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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99강. 에피(Out) 성령과 엔(In) 성령 (요 16:13-15)

by coroa 2022. 1. 3.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99강. 에피(Out) 성령과 엔(In) 성령 (요 16:13-15)

-.정낙원 목사

 

요 16:13-15절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오늘은 성령의 두 가지 사역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설교 제목이 좀 생소하지요.

어찌 보면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조금 어렵고 굉장히 중요한 공부가 되니 깊이 생각하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이면 그냥 성령이지 무슨 “에피(Out) 성령”이 있고, “엔(In) 성령”이 있느냐고 말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성령의 외적 역사나 내적 역사라는 말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러니 생소한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에피(Out)”란 말은 바깥이란 뜻이고!

“엔(In)”이란 말은 안이란 뜻이에요.

 

바깥에서 역사하는 “에피(Out) 성령”을 일컬어 “성령의 외적(外的) 역사”라고 하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엔(In) 성령”을 일컬어 “성령의 내적(內的) 역사”라고 합니다.

 

이 시대 성령은 엄청나게 왜곡되어 있어요.

비 성경적이란 말입니다.

교인들이 이방인들처럼 성령을 전지전능 하신 신이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 성령 그러면 능력을 행하고 기적을 베풀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식으로서의 성령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일하심은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하여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령이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을 해석 할 때는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물의 창조 목적이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일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살펴보는 성령에 대하여서도 창세전 언약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성령의 올바른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하심을 무당들이 푸닥거리하는 식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 시대 성령론이 왜곡된 것은 창세전 언약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처럼 기적을 행하는 주술적인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 안에서도 성령 운동을 마치 병을 고쳐주거나 퇴마사들이 귀신을 쫓아내거나 혹은 어떤 기이한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럼 창세전 언약이 어떤 것인지 부터 상고해 봅시다.

 

에베소서 1장입니다.

 

엡 1:3-10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하늘에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하늘에 신령한 복이 무엇인고? 하니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여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흠 있는 죄인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 아들들이 되는가 하면 예수님의 피로 되어집니다.

예수님의 피로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처럼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식으로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들은 모두가 예수님 안에서 나온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구약에서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서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고자 함입니다.

여기서 “그” 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건 자기 피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성도는 이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예수님의 피 뿌리심으로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을 예수님에게 돌려드려야 합니다.

 

이게 바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일컬어 “아들에 나라” 라고 합니다.

성도가 살아갈 곳은 하늘나라입니다.

성도가 하늘나라에 가서 뭘 합니까?

 

요한계시록 4장을 봅시다.

 

계 4:10-11절.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하늘나라를 보니 거기에 24장로가 있습니다.

24장로는 구원 받은 모든 성도의 총칭(總稱)을 말합니다.

이들이 무얼 하는가 보니 어린 양에게 경배하면서 자기의 면류관을 벗어서 던져 드리면서 세세토록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에게 찬미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완성”된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에게 세세토록 찬미를 드리게 하려고 역사를 만들고 자기백성을 죄 아래 가두어 두었다가 예수님을 보내서 구원케 하는 일들을 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 역사는 예수님을 세세토록 찬미케 하기 위한 과정에 필요한 것이라서 도구로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찬미케 하려고 지음을 받았고 죄와 사망가운데 종노릇하다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그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의 인생을 산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말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들 만들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 이야기는 이 창세전 언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도 아들이신 예수님을 증거 하시고 계시고!

성령님도 구원주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계시고!

성경 속에 나타나는 모든 이야기들이 예수님의 구원이야기인 것입니다.

 

성령론도 당연히 예수님의 구속사 이야기로 이해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을 단독으로 뚝 떼어서 어떤 기적이나 능력을 행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교회에서 성령님을 어떤 능력을 행하는 분으로 잘못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육에 속한 거짓 목사들이 성경을 육적으로 해석하여서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모르니까 나타난 현상론을 가지고 성령의 능력을 마치 무당들이 마귀의 능력으로 작두 타는 식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교인들은 어떤 목사가 기이한 능력을 행한다고 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 있는 종이라고 생각하여 추종을 합니다.

목사들은 이러한 인간의 종교 심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초월적인 능력을 행하면 교인들 앞에서 자신을 신(神)의 대리자로 각인을 시켜서 자기를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말이 진리라고 여기게 되어요.

그 목사가 하는 말이 곧 하나님 말이 되고 말아요.

성령의 일하심도 그렇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럼 주변에서 아무리 그게 아니라고 말을 해 주어도 듣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요즘 금이빨 만들어주는 목사가 큰 인기 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눈 앞에 기적이 보이니 교인들은 그것이 성령의 능력인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경인 교인들이 그 목사를 하나님의 큰 종이라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단의 교주는 항시 초월적인 것으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발 어느 목사의 말을 듣지 말고 성경을 상고하세요.

어느 목사의 말을 듣게 되면 그럼 사람의 종이 되어요.

사람은 누구나가 자기를 인정해 주는 자를 따르게 되어 있어요.

이걸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합니다.

유유상종하는 것은 같은 것끼리 있어야 편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내 편을 들어주면 좋아합니다.

반대로 날 틀렸다고 해 보세요.

그건 부모라도 싫어요.

그래서 어느 시대이고 미혹하는 자들은 달콤한 말로 사람의 마음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압살롬처럼 말이에요.

 

달콤한 말이란? 그 사람의 생각이나 하는 일을 긍정해 준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해 준단 말입니다.

그 사람의 편을 들어준단 말이에요.

그릇된 행동을 하여도 복음으로 포장해서 면피해 주어요.

 

그러니 그 사람을 따르고 추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을 진리화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이 다 복음이라고 착각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걸 편견이라고 합니다.

 

편견(偏見)이란? 한쪽으로 치우쳐서 보는 왜곡된 눈을 말해요.

쉬운 말로 외눈박이에요.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고정이 되면 그 사람만 진짜로 보이고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신앙적으로 편견에 사로잡히면 아주 무서운 독선으로 빠져요.

그 사람의 말만 절대 진리로 들려요.

 

목사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부 자기 사상을 옹호하는데 인용하고 가르치고 있으니 교인들은 알 턱이 없지요.

다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데 그 속에서는 분별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사람의 말을 가지고 성경을 재해석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무서운 독(毒)과 같아요.

 

여기에 빠지면 분별력이 상실 되어요.

이러면 그 집단에 있으면 안심이 되고 그 집단에서 떨어지면 불안해요.

결국 그 집단 속에 가두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추종하는 그 목사의 사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불안해하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증거가 없으면 사람의 증거를 취하고자 해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 안에 성령의 인침이 없는 사람은 여기 저기 기웃거려요.

자기 신앙을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고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찾아 다녀요.

 

그래서 자기를 인정해 주면 그 사람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어떤 유명하다고 하는 목사가 인정을 해 주면 보험에 든 것처럼 든든한 겁니다.

믿음을 목사에게 인정받고자 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증거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인정해 주는 목사나 집단에 속한 것으로 안위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라도 추종하게 되면 모든 판단 기준이 그 목사의 사상으로 하게 되어 있어요.

그 목사와 다른 말을 하면 다 이단이라고 정죄해 버립니다.

영적 깡패가 되어요.

어느 특정한 목사를 따르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가 다 영적 깡패들이에요.

 

저도 과거에 몇 번 이런 편견에 사로잡혀서 깡패 짓을 한 적이 있어요.

다행히 하나님께서 그때그때마다 사건을 일으켜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빼내 주시고 쫓겨나게 해 주셨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예전에 제가 율법 아래 있을 때 어느 목사님을 통하여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엉터리인데 그 당시엔 진리처럼 다가왔어요.

이 분은 성화를 주장하면서 청교도 신앙을 강조하던 분이었어요.

그 목사님은 한마디로 성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철저하게 개혁주의 교회관으로 자칭 100점 교인이라는 카드를 만들어서 교인들을 교회 중심으로 붙잡아 두고 열심과 충성과 봉사를 강조하던 분입니다.

그 땐 저도 율법주의 신앙으로 성화주의에 푹 빠져 있던 터라 이러한 개혁주의 신앙관이 제 마음에 확 와 닿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금새 푹 빠져 들고 말았어요.

 

그 목사님이 제 마음에 딱 맞는 설교를 하니 단숨에 푹 빠지고 말았던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광팬이 된 겁니다.

울산에서 서울로 교회를 다녔을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제가 열심이라고 하면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워했을 정도로 한 열심 하던 때였어요.

 

그러다 보니 그 목사님의 책이라던가!

설교 테이프라든가!

심지어 그 교회 주보에서부터 신문에 난 기사까지 그 목사님의 이름이 있는 것이면 다 귀하게 보이는 겁니다.

그 목사님을 만나는 날이라도 되면 소풍 가는 날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마음이 설레었어요.

 

그 땐 그냥 그 목사님 이름만 들어도 좋았어요.

설교도 최고로 잘하는 줄 알았어요.

당시 그 목사님은 저에겐 신앙의 롤 모델이었으며 모든 판단 기준이 그 목사님이었어요.

누가 그 목사님의 설교를 비판한다거나 안 좋은 말을 하면 본능적으로 반발을 했어요.

내가 흑기사가 되어서 그 목사님을 지키고자 비판하는 사람들과 싸웠어요.

 

얼마나 그 목사님 설교를 많이 들었던지 나중에 보니 내가 하는 행동이며 말투가 그 목사님처럼 변해 있더라고요.

아마도 설교 테이프를 천개 이상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도 모르게 그 목사님의 말투며 행동으로 닮았던 겁니다.

그 분의 설교 테이프를 늘 듣고 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이처럼 사람의 마음이 누군가가 좋다고 느껴지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다 좋게 보여요.

이는 이미 그 목사님에 대한 비판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그 목사님을 누가 비판하면 비판하는 그 사람이 복음을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을 했어요.

이걸 편견이라고 합니다.

 

이단이 왜? 생기느냐 하면 따르는 사람들이 판단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좋아 보이면 흠도 흠으로 보이지 않고 다 이해가 되고 넘어가게 되어요.

남이 그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하면 온갖 욕을 하였을 터인데도 그 사람이 하면 뭐 그럴 수 있지 라고 덮어두고 두둔하고 변호하고 싶어져요.

 

이럴 땐 곁에서 아무리 그 목사에 대하여 잘못된 것을 이야기 해 주어도 듣지 않아요.

올바른 말을 해 주어도 저에겐 그렇게 들리지 않아요.

괜히 시기하고 모함한다고 들려져요.

왜냐하면! 난 이미 그 목사님의 사상으로 중독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목사님은 옳다고 이미 판정을 하고선 듣기 때문에 그 누가 어떤 말을 해도 내 판정은 변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목사님과 내 자신을 하나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님이 부정당하면 내 신앙과 내 믿음이 부정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을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어찌하든지 그 목사님이 옳고 자기가 판단한 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입니다.

 

제일 무서운게 신앙의 편견이에요.

그 편견이 사람을 추종하게 만들어요.

그러니 그 목사를 닮고자 하고 흉내를 내게 되는 겁니다.

제가 과거에 그랬어요.

 

그땐 제 생각으로 최고라고 생각하던 목사였는데 지금 복음을 알고 나니 그 분은 율법주의자이고 교권주의자이고 바리새인인 것입니다.

지금이니 이렇게 보이지 그땐 참이라고 보였어요.

제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나니 속았다는 것이 깨달아지는 겁니다.

 

그럼에도 제가 그 분을 이단이라고 판단하지 않는 것은 그 분도 하나님께서 필요하여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노골적으로 교주 노릇을 하면 이단이라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나름대로 예수를 증거하고 있단 말입니다.

물론 자기 식이지만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세운 것은 자기 백성들을 훈련하는데 필요해서입니다.

때론 거짓 선지자를 통해서도 훈련을 하세요.

마치 목자가 염소를 통해서 양을 훈련시키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기도 하지만 때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 하십니다.

즉 복음주의에 두기도 하시고 이단에 빠져 보게도 하신단 말입니다.

 

신앙이란? 생명의 자람과 같이 과정이 있어요.

 

율법 아래서 종노릇도 해 보아야 하고!

신비주의에도 빠져 보아야 하고!

기복주의에도 빠져 보아야 하고!

복음을 자기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는 데에도 빠져 보아야 해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얼마든지 성경을 가지고서도 어긋난 길을 갈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신앙의 본질로 붙잡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이러한 코스로 끌고 다니면서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 어떤 것도 믿어선 안 되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뿐이구나! 를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 백성은 사람을 추종하지 않도록 간섭하세요.

 

저도 많이 빠졌어요.

종말론에도 빠져 보았고!

은사주의에도 빠져 보았고!

지독한 율법주의에도 빠져 보았고!

개혁주의 성화주의에도 빠져 보았고!

십자가만 외치는 자칭 복음주의라고 하는 곳에도 빠져 보았어요.

 

그런데 그 어느 것도 완전한 것이 없어요.

다 허물이 있고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요.

모두가 다 부분을 전부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곳도 절대 진리의 집단이 아니에요.

 

그래서 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도 하나님의 자기 백성 다스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지혜라고 이해해요.

결국 집단에 빠지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에요.

 

하나님이 참으로 다양한 곳으로 끌고 다니면서 무엇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기 때문에 속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제가 나와 궤를 같이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극단적으로 이단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들도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어느 집단이나 어느 목사를 절대화 하여 따르고 빠지지 말라는 차원에서 경계를 시키고자 때론 큰 소리를 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나도 그들 속에 있다가 나왔잖아요.

하나님께서 나를 잠시 그들 속에 있게 하다가 빼내 주셨듯이 또 하나님도 나처럼 잠시 거기 있다가 빠져나오게 할 성도들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각자 인도하시니까 박 터져라 싸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심판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왜? 그들을 이단이라고 공격하고 싸우지 않느냐고 해요.

그럼 제가 가말리엘의 지혜로서 지켜보자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난 것이라면 우리가 아무리 공격한다고 해도 꺾을 수가 없을 것이고 하나님께로 난 것이 아니라면 시간이 지나면 무너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속상한다고 해서 서로 적개심을 품고 같이 물고 뜯으면 함께 망해요.

 

나하고 같은 색깔을 맞출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은 우리 생각을 넘어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 포착할 수가 없어요.

내가 깨닫고 보는 것도 한 부분이고 지극히 제한적이에요.

그러니 나와 다르다고 해서 죽일 놈 살릴 놈 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양들은 공격하는 자들이 아니라 공격을 당하여 죽임 당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잊지 마세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복음을 남을 이기게 하는 공격용 무기로 주지 않았어요.

또한 자기를 방어하는 수단으로도 주시지 않았어요.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먹도록 해 놓았어요.

그게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양들이에요.

잘 기억하세요.

 

흔히들 사기도 당해 보아야 분별력이 생긴다고 하잖아요.

우리는 일평생 살아가면서 이러한 일들을 수없이 겪게 됩니다.

실패만큼 좋은 스승이 없어요.

사람에게도 많이 속아 보아야 사람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래야 그 어떤 인간도 믿고 따를 인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혼자 다 아는 척 하는 자들은 거의가 사기꾼이니 조심하세요.

이런 자들은 거의가 복음을 빙자하여서 자기 배를 채우는 자들이에요.

복음을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사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혼자 다 아는 척 하는 것입니다.

남 보다 우월하다고 하여야 사람들이 따를 것이 아닙니까.

이런 자들은 이(利)을 탐하는 광명의 천사에요.

진짜로 성령의 은사로 복음을 아는 사람은 혼자 다 아는 척 하지 않아요.

복음을 알면 내가 못난 자로 드러나게 하지 잘난 자로 세우지 않아요.

 

목사에게도 속아 보아야 목사를 추종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어느 목사에게 은혜를 독점적으로 주시지 않아요.

각 사람에게 부분적인 은혜를 주세요.

그러니 어느 특정인을 따를 필요가 없는 말입니다.

 

추종할 것이 따로 있지 왜? 목사를 추종합니까?

똑 같은 죄인인데 알면 얼마나 알고 신령하면 얼마나 신령하겠어요.

다 거기서 거기에요.

괜히 쬐끔 아는 것으로 으뜸 되고자 하는 교만으로 다 아는 것처럼 잘난 척 할 뿐이에요.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씀대로 우리의 신앙이 어렸을 땐 어린아이 생각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다가 어른이 되어서야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게 되는 것처럼 이 목사 저 목사에게 속아 보아야 목사를 믿지 않게 됩니다.

 

율법주의에도 속아보고!

신비주의에도 속아보고!

종말론에도 속아보고!

개혁주의에도 속아보고!

복음주의에게도 속아 보아야 사람을 따르지 않게 되어요.

 

신앙엔 냉정함이 필요해요.

베뢰아 교인들처럼 과연 그러한가?

말씀이 그러한가 늘 상고해 보아야 해요.

이는 사람보다 복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자기 사상을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지 잘 분별해 보아야 해요.

초대교회 안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공교한 말로 사람들을 미혹한 자들이 많았어요.

 

지금도 동일해요.

수많은 목사들이 자기 사상을 입증하려고 하나님 말씀을 인용하고 있어요.

이런 자들을 하나님 말씀을 도적질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자기를 지키는 수단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빙자해서 자기 조직을 지키고자 하고 그 조직으로 자기 배를 채우는데 이용하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복음을 자기 방어 수단으로 이용하고 남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그 어떤 목사라 할지라도 선한 의미에서 항상 달아보고 의심을 하여야 해요.

그 누구도 마찬가지에요.

저 역시도 늘 달아보셔야 해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기이한 능력을 행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복음을 말한다고 하여도 궁극적으로는 자기 챙기기에 급급해요.

이건 복음을 알아도 달라지지 않아요.

목사가 복음을 아는 것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것은 따로 따로 놀아요.

그 누구도 복음을 이용하고자 하지 그 복음으로 자기 자신을 죽이고자 하지 않아요.

그만큼 인간은 육신의 소욕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잠시 육신의 소욕을 이긴 것 같아도 이긴 척 했을 뿐이지 돌아서고 나면 늘 그 자리에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네 인생살이는 늘 자기를 포장하고 사기 치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사기 치고 남에게도 사기 치고 살아요.

속으론 탐욕이 가득하면서도 겉으론 아닌 척 하면서 남을 속이고 산단 말입니다.

난 아닌데요? 라고 하지 마세요.

우린 모두가 속고 속이면서 저울질하고 사는 야곱이에요.

 

그러니 그 누구도 믿지 마세요.

누가 천국을 보고 왔다고 해도 믿지 마세요.

누가 죽은 사람을 살린다고 해도 믿지 마세요.

누가 계시를 받아 크고 비밀한 말을 한다고 하여도 믿지 마세요.

 

오직 예수님만 나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만 믿으세요.

모르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세요.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는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반드시 예수를 믿어지게 해 주시고 구원을 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세요.

그러니 어떤 집단에 속하지도 말고 어떤 목사도 추종하지 마세요.

 

설교 초두에 왜?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성령이 이 시대 어느 특정한 목사들이 능력을 행하는 전유물로 전락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목사가 무당 짓을 하고 있는데도 수많은 교인들이 소경이라서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믿고 따르고 있어요.

성령 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무당짓거리들을 하잖아요.

 

깔깔 거리지를 않나!

눈을 쑤시지를 않나!

목을 조르지 않나!

금 이빨을 만들어 준다고 하지 않나!

별 희한한 짓거리들을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목사들이 병을 고치고 축귀를 하면 다 성령이라고 믿어요.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고 하면 무조건 성령의 역사라고 해요.

이 모두가 성령을 언약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하지 않고 현상론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능력이라고 하면 뭔가 신기한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입만 열면 주술처럼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문제 해결을 받으라고 하잖아요.

지금도 교회 안에서 성령이 무슨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르쳐지고 있어요.

실제로 목사들이 성령 충만이라는 이름으로 무당들 굿하는 것으로 행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교인들은 그걸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고 있잖아요.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도(道)가 구원하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도가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고 어리석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인다는 것은 자기들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에서 보면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여요.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늘 인간의 생각을 비껴가는 식으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죄인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에 죄인의 지혜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게 되면 죄인들의 방법으로 구원을 따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을 인간들이 보기에 미련하고 어리석은 방식으로 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자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버립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길이 차단되었어요.

그 후로부터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감추어져 계십니다.

인간 쪽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상종하지 않습니다.

숨어 계십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포착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 오셔야지만 합니다.

 

그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을 하세요.

통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게 하시려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 마음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세요.

그래서 그 뜻을 좇게 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성령이 오시면 새로운 것을 알려 준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복습한다 생각하시고 잠간 살펴봅시다.

성령이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전혀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제시한 기준이 육에 속한 자들이 듣기엔 어리석어 보여요.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가 무엇이라고 한다고 했나요?

예수 안 믿는 것이 죄라고 하지요.

그러자 인간들이 반발합니다.

아니~ 어떻게 예수 안 믿는 것이 죄가 되느냐!

나쁜 짓을 해야 죄이지!

 

그러나 성령은 예수 안 믿는 것이 죄라고 합니다.

착하게 산 것이 의가 아니고, 예수 믿는 것이 의라고 합니다.

인간들에게서는 의가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러면 인간들은 돌아 버립니다.

너 이단이지!

그래서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다 함은 기존에 것은 틀렸다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기존에 것을 고수하면 죄가 됩니다.

그럼 성령이 책망을 하십니다.

 

세상은 세상의 기준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과 다른 기준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말이 좋아서 충돌이지 이건 전쟁입니다.

성령이 제시한 기준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전쟁입니다.

 

성령이 제시한 기준을 받아들이면 세상과 다른 기준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게 되고 핍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고 하는데 어찌 핍박당하지 않겠어요.

세상이 말하는 선악관과 성령이 알려주는 선악관을 달라요.

마치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요.

 

하늘과 땅은 존재 양식이 다릅니다.

 

존재 양식이 다르다는 것은 곧 가치 기준도 다르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늘을 묵시”라고 하고, “땅을 역사”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늘을 창조 세계”라고 하고, “땅을 피조 세계”라고 합니다.

 

하늘과 땅은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요.

하늘은 창조의 양식인 “주는 양식”으로 살아가고!

땅은 피조의 양식인 “받는 양식”으로 살아갑니다.

하늘에 방식은 자기를 비우고 섬기고 나누고 베풀지만!

땅에 방식은 많이 소유하고 높아지고 섬김 받고자 합니다.

 

우리는 땅에서 낳고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땅에 존재 양식으로 살아갑니다.

땅에 존재 양식은 받는 양식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본능적으로 많이 받아야만 행복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니 베풀고 나누고 비우는 하늘에 존재 양식은 낯설고 거북스러워요.

그런데 성도들에게는 움켜쥐고 쌓고 받아야 행복해하는 사람에게 줌으로서 기뻐하는 하늘에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게 하는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양식과 대조가 되는 것으로 살도록 간섭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셔서 알려주는 가치관은 세상과 충돌하게 되어 있어요.

 

우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 익숙해요.

당연히 세상 가치관으로 사는 것이 편합니다.

세상에서는 세상이 말하는 보편적인 가치관으로 살아야 유익해요.

 

그런데 성령이 세상 가치관으로 살지 말라고 합니다.

하늘에 가치관으로 살라고 해요.

하나님의 존재 양식으로 살라고 합니다.

세상 가치와 세상 기준으로 살면 성령이 책망하고, 하늘 기준으로 살면 세상이 핍박을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먼저 우리 몸에서 일어납니다.

육적 가치관으로 살면 영이 곤고함을 당하고, 영적 가치관으로 살면 육신이 고달파요.

성도는 이 둘 사이에 끼였어요.

그러니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바울이 이 둘 사이에 끼여서 죽겠다고 했어요.

 

한 쪽에선 살라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선 죽으라고 합니다.

한 쪽에선 쌓고 움켜잡으라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선 나누고 베풀라고 합니다.

한 쪽에선 상좌에 앉아 대접을 받으라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선 종이 되어 섬기라고 합니다.

극과 극입니다.

 

옛 사람은 자기 의로 살라고 하고, 새 사람은 예수님의 의로 살라고 합니다.

옛 사람은 자기 영광을 챙기고자 하고, 새 사람은 예수님 영광으로 드러내라고 합니다.

옛 사람은 땅을 지향하고 살라고 하고, 새 사람은 하늘을 지향하고 살라고 합니다.

옛 사람은 자기 행함으로 살라고 하고, 새 사람은 예수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이처럼 성질이 다른 두 놈이 내 안에서 서로 내 몸을 주장하고자 해요.

 

우린 여기서 우린 죄가 낱낱이 고발을 당하게 되어요.

그래서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줄까” 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우리 마음은 내 법으로 살고 싶은데, 성령은 예수님의 법으로 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법으로 살게 하시려고 성령이 오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령이 오시면 우린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이걸 “속성”이라고도 합니다.

다른 말로 “지향성”이라고 하고,

또는 “경향성”이라고도 합니다.

성도 안에는 이러한 속성들이 있어요.

성령이 우리 마음에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본능과 거스르므로 낯설고 힘들어서 악악거려요.

감사보단 불평이 먼저 나온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속성”과 “죄인의 속성”이 부딪치면서 우리 안에서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가 터져 나옵니다.

이러한 “영적 전쟁”을 통하여서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애모” 라는 노래 말을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 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 드는가”

 

우리는 말씀 앞에만 서면 작아져요.

그리고 상한 심령이 되어요.

왜? 그런가요.

이는 말씀 앞에서 우린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되면 유구무언(有口無言)이 되어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여 난 개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된단 말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알아갈수록 감사의 깊이가 더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 죄를 고발하는 것은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게 하시려고 우리 죄를 고발하시는 것이에요.

죄가 고발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크게 느껴져요.

그러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우릴 죄인의 자리에 앉게 만들어요.

잘난 자로 세우는 것이 아니고, 못난 자로 드러나게 하세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들의 특징이 상한 심령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이런 마음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럼 본문을 봅시다.

 

요 16:13-15절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성령이 오십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오신다”는 말은 이 땅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보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하십니다.

그가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알려 주신다”고 합니다.

 

이로보건데 성령은 자기 뜻을 펼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오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의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말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말만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일을 하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가 계시를 받았다고 하여도 믿지 마세요.

환상을 보았다거나 입신을 들어갔다거나 꿈을 꾸었다거나 하는 것에 미혹당하지 마세요.

성령은 계시를 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고 계시를 깨닫게 해 주시고자 오셨어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가 있어요.

그게 성경이에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셨어요.

그러니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은 예전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성경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기록된 말씀으로 하신다는 뜻이에요.

 

이렇게 되면 성령은 예수님에게 종속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에게 종속이 되어 있어요.

이건 종과 상전의 개념이 아니고 성령이 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는지 그 하시는 사역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하셨던 사역이에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 뜻에 철저히 복종하셨어요.

이걸 “종속적 삶”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이름으로 와서 아버지에게 종속당하여 일하셨듯이!

성령님도 예수의 이름으로 오셔서 예수님에게 종속당하여 일을 하세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의 특징은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중요한 것은 성령은 우리의 요구에 의해서 오시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가 달라고 해서 오시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또한 난 성령 안 받을래요 라고 한다고 안 오시는 분도 아니에요.

성령은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오셔서 일을 하세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 백성들 속에 강제로 성령을 집어넣어 주십니다.

마치 하나님이 아담의 코에 생기를 훅~ 불어 넣은 것과 같아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성령을 열심히 기도하면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인간들이 자신들의 사고로 성경을 이해하기 때문이에요.

육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신의 도움을 끌어내기 위해서 지성이면 감천하는 식으로서의 인간 쪽에서 가능성을 찾아요.

많은 분들이 이렇게 성경을 보기 때문에 신앙을 열심의 문제로 끌고가는 것입니다.

 

오해 할까봐서 먼저 못을 하나 쳐 놓고 갑시다.

 

성도가 열심히 행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열심은 구원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이에요.

이건 산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같은 이치에요.

꽃이 피는 것은 나무가 살았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겨울철이 되면 나무가 다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봄이 되면 나무에 싹이 나고 잎이 피고 꽃이 핍니다.

이건 살았다는 증거에요.

 

우리 신앙도 동일해요.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있으면 예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감사하는 삶이 살아져요.

환경은 예전과 달라진 것은 없는데 그 환경을 바라보는 안목이 달라져요.

감사하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그 안에 살아 있는 성도의 모습이에요.

 

삶은 생명이 살아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적인 것이므로 강조할 필요가 없어요.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게 없으면 가짜에요.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열심히 행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열심은 믿음에 따른 부속물이지 본질은 아니에요.

신앙의 본질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엔 우리 열심을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나와야 해요.

 

인간의 본성 속에는 종교성이 있어요.

종교성은 반드시 인간의 열심을 바탕으로 역사해요.

열심은 믿음 없어도 얼마든지 행할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열심으로 난 신앙 있어요” 라고 하면 인 되어요.

열심을 신앙의 근거로 붙잡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를 믿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내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건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지 않으면 절대로 못 믿어요.

 

그러므로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자기 행함으로 나오지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신앙을 비유적으로 음식으로 말하면 예수를 믿는 것이 “메인 음식”이고,

열심이나 능력 행하는 것은 입가심을 하는 “에피 타이저”나 “디저트”와 같아요.

 

하나님은 인간의 열심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아들을 영접하라고 합니다.

뭘 하려고 하지 말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우리 구원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라고 하십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이 비탕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해요.

내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하고!

내가 왜? 봉사하고 충성하여야 하고!

내가 왜? 어린 양을 세세토록 찬송하여야 하는지를 알고 하여야 합니다.

이를 알고 하면 예수를 사랑하는 신앙생활이 되지만, 모르고 행하면 하나님이 나보다 높은 신이기 때문에 섬기는 종교적인 일이 되어요.

 

하나님은 창조주세요.

창조주란? 피조물을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지 “받는 분”이 아니에요.

 

“구원도 주시고!”

“영생도 주시고!”

“천국도 주시고!”

“성령도 주세요.”

 

성경에서 성령을 받으라는 말은 우리더러 노력해서 따 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열심히 기도하면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기도 많이 한 사람들은 다 성령을 받았겠네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하니 이해하시고 들으세요.

 

전 과거에 기도를 엄청 했어요.

몇 년 동안은 하루에 12 시간씩 했어요.

새벽 기도에서부터, 철야기도로 해서, 산 기도에 한 달 금식기도까지 해 보았어요.

그것도 아주 열심이 특심할 정도로 말이에요.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했어요.

아내가 미쳤다고 할 정도로 종교적 열심에 미쳐 있었어요.

 

그러나 성령을 받지 못했어요.

여기서 제가 성령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오늘본문이 말하는 성령이에요.

내 안에 오신 성령 말이에요.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이 믿어지게 하는 성령을 받지 못하였어요.

 

그러니 기도하고 열심히 특심하여도 예수가 안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예수가 안 믿어졌어요.

그러니 더욱 더 믿고자 열심을 낸 것입니다.

원래 안 믿어지면 더 믿고자 하잖아요.

그래서 더 매달린 것입니다.

자연히 기도를 많이 간절하게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엄청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인 것이에요.

 

성경 많이 알지요!

기도 많이 하지요!

헌금 많이 하지요!

봉사와 충성 많이 하지요!

각양의 은사도 행하지요!

교회 일이라면 내 집안일보다 더 열심히 하였어요.

한국교회의 신앙관으로는 본다면 일등 신앙이었어요.

 

남전도 회장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중 고등부와 청년들을 가르치는 교사도 하고,

예수가 믿어지지도 않는데도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설교도 하고 가르쳤어요.

급기야는 목사도 되었어요.

우습지요.

 

그런데 이 우스운 일이 지금도 교회 안에 수많은 교인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척 연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어지지도 않는 예수를 믿는 척 연기하고 있단 말입니다.

전 이런 연기를 수십 년을 했어요.

 

사람들이 착각하기를 성령을 받으면 어떤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데 아니에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건 무당들이 하는 말이에요.

어떤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행하는 것은 마귀도 할 수가 있어요.

물론 성령이 행하시는 능력도 있어요.

 

마귀는 생명을 살리는 것만 빼 놓고 다 할 수 있어요.

마귀는 흔히 말하는 세상에서 잘 살게 되는 복도 주어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마귀가 예수님에게 자기에게 절만 하면 천하만국의 모든 권세와 영화를 준다고 했어요.

이러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했어요.

 

욥기를 보세요.

하나님이 마귀에게 사업을 망하게도 하고!

자식들을 죽이기도 하고!

병이 들게도 하잖아요.

하나님이 마귀에게 허락했어요.

 

그러나 단 한 가지 마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은 못해요.

왜냐하면! 마귀는 창조주가 아니고 피조물이기 때문이에요.

마귀 속엔 생명을 살리는 창조의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마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못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오직 창조주만 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만 하실 수가 있어요.

예수님만 하실 수가 있어요.

성령님만 하실 수가 있어요.

 

누가 기도 많이 해서 성령 받았다고 하여도 속지 마세요.

그것이 성령인지 아닌지 구분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구분을 하느냐 하면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면 성령이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면 아닌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을 봅시다.

 

약 3:13-18절.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누가 복음을 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복음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를 보라고 합니다.

시기와 다툼을 일으키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마귀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 자체가 생명을 살리는 것인데도 마귀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복음을 가지고 죽이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회평케 한다고 하지요.

즉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복음으로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예수의 마음이 나오면 성령이고, 마귀의 마음이 나오면 거짓 영인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이 어떤 것입니까?

한마디로 생명을 살리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열매로 나무를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한 나무는 마귀의 속성을 드러내게 되어 있고,

예수에게 속한 나무는 예수의 마음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예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빌립보서 2장을 봅시다.

 

빌 2:5-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비워서 사람으로 내려오는 마음이에요.

이건 창조주가 피조물의 위치로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자기희생이고 죽음이에요.

 

이건 종교인들이 수행하여서 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본성을 말해요.

인간의 본성은 종교적인 것으로 자기를 긍정하고자 포장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본성은 창조주로서 피조물을 살리고자 하는 본성이에요.

그러므로 자기를 죽임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살려 내시는 것입니다.

 

왜 자기를 죽이느냐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마음을 잘 보여 주는 것이 바로 부모님의 마음이에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곧 창조주 마음과 같아요.

부모의 마음은 자식을 위해서 죽는 마음이에요.

이건 생명을 주는 자에게만 있는 마음이에요.

 

예수님 마음이 곧 창조주 마음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받으면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되어요.

어떻게 살리느냐 하면 자기를 희생하면서 살려요.

 

이런 마음은 인간들에게 없어요.

하나님이 주셔야지만 생겨요.

성령이 이 마음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게 되면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일어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자기를 낮추고 비우고 헌신하고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건 인간들의 측은지심(惻隱至心)과 달라요.

 

그런데 이 시대 자칭 성령 운동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마음이 없어요.

자기를 비워 종이 되는 마음이 없어요.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 교만해요.

 

으뜸이 되고자 하고!

선생이 되고자 하고!

섬김 받고자 하고!

상좌에 앉아서 잘난 척해요.

 

병을 고치고, 귀신을 좇아내고, 능력을 행하고, 크고 비밀한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 안에서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어요.

긍휼의 마음이 없어요.

용서하고 참아주고 보듬어 주는 마음이 없어요.

 

자기 말 안 들으면 다 쫓아내고, 마귀라고 하고, 이단이니 틀렸다고 합니다.

자기만 옳다고 하잖아요.

말은 천사의 말을 하는데 토해지는 것은 마귀 짓을 해요.

그러니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가 광명의 천사로 행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마음으로 행하기 때문에 예수를 말하면서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전부 죽이는 것입니다.

 

저도 과거에 기도 많이 할 땐 각양의 은사들을 골고루 다 체험을 하였어요.

병도 고쳐보고, 귀신도 쫓아내고, 방언도 하고, 입신도 들어가고, 환상까지 다 보았어요.

짧지만 두루 경험해 보았어요.

교회 일도 대단하게 했어요.

전도도 열심히 했고 봉사와 충성도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내 안에 예수의 마음이 없었어요.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아는 것으로 사람들 앞에 으뜸 되고 싶어 했어요.

각양의 은사 받은 것으로 잘난 척 했단 말입니다.

내가 너희들보다 한 수 위라고 교만을 떨었지 그 은사로 종노릇 하지 않았어요.

나와 다르면 비판하고 정죄하고 폄훼 했어요.

 

그러니 성령의 은사 운운하면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이고 있었어요.

예수님의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내 안에 오신 성령을 받지 않았으니 예수님의 마음이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쉬운 말로 “그리스도의 마음” 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봅시다.

 

고전 2:6-16절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두 지혜가 있습니다.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지혜란? 깨달음이고 하나님의 일하시는 뜻을 아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는데 어떻게 구원을 하시는가 하면 성령을 보내서 예수를 믿게 하여서 구원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했어요.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을 입고서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유대인들에게 알려 줍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의 지혜 자들이 가만히 들어보니까 이건 아니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이단이라고 하여서 십자가에 죽였어요.

 

유대인들은 인간의 지혜를 대표하고 있는 자들로서 성경에 나타나 있어요.

그러니 유대인은 모든 인본주의 사상의 대표에요.

사도 바울은 이들을 세상의 관원들의 지혜라고 하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즉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알리니까 세상이 예수를 미쳤다고 하면서 십자가에 달아 죽여 버렸어요.

 

이걸 지금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유대교에 있을 때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자들을 미친놈이라고 해서 죽이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유대교에서는 이단이에요.

 

이건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의 지혜를 가지고서 하나님의 지혜를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칭 율법에 흠이 없다고 했어요.

그렇게 열심을 다하여서 충성하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살았다고 했어요.

저도 동일했어요.

그런데 하나님 마음을 몰랐어요.

 

그 안에 오신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령 안 받아도 얼마든지 종교적으로 완벽하게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타나는 일을 가지고 판단하면 안 되어요.

인간들은 안 믿어도 믿는 척 얼마든지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를 보아야 해요.

 

유대인들은 자타가 인정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 마음이 없었어요.

하나님 마음을 몰랐어요.

왜냐하면! 그 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째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요?

 

이 모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일부러 인간들이 알아먹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로서의 구원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기준이 바로 내가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인간들이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라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성화주의에요.

자신들은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의롭다고 여겼어요.

유대교 신앙은 인간들이 의를 만들어내는 신앙이에요.

이게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관이에요.

모든 종교는 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의를 주어서 구원을 하십니다.

 

“의를 주신다” 는 말을 기억하세요.

의를 준다는 것은 인간 쪽에선 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만들 수 없다는 말이에요.

의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 자체가 틀렸다는 말입니다.

이건 인간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모두가 죄인이라고 합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의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들 백날 해봐라 거기서 의가 나오는가?

안 나온다는 겁니다.

 

백날 기도하고 철야하고 금식해 봐라!

백날 개혁하고 성화하고 열심내고 봉사해 봐라!

그러한 것에서는 하나님이 바라는 의가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 안에만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유대인들처럼 열심히 해서 의로워지라고 하는 자들에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에요.

그러니 뿔따구가 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산 것을 의라고 여기고 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건 말짱 꽝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의 의를 가로 막는 불의라고 했어요.

저주 받을 것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납니까?

 

구약에 예레미야라는 선지자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교인들이 성전에 예배드리러 가는데 그 성전 앞에 서서 하는 말이 애들아 이거 성전 아니거든!

여기서 백날 하나님께 제사 드려보아도 하나님은 하나도 안 받는단다!

그러니 헛짓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뭐 이런 놈이 있어! 하고 죽도록 두들겨 팼어요.

 

지금 예수님의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넌 뭐냐!

왜? 우리가 하는 일을 부정해 하면서 십자가에 죽여 버렸어요.

이걸 지금 바울은 “세상 관원들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를 몰라서 그랬다고 합니다.

 

그럼 누가 이런 하나님의 지혜를 아느냐!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 압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에겐 성령을 보내서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일을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닫게 하세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하는 이야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의로운 분이 죽어서 죄인이 용서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입니다.

 

그럼 성령을 받은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을 알아요.

성령을 받기 전에는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의로워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나니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은 우리 행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전 과거에 기도 많이 하고 열심과 충성이 특심할 때는 이걸 몰랐어요.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당시에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바빴습니다.

실제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시는 성령을 받지 않았어요.

 

그 당시 교회 안에서 목사님을 위시해서 모든 성도들이 전부 저의 열심과 특심을 보시고 성령이 충만하다고 했어요.

전 그 당시 진짜 착하게 살았고!

열심이 특심했어요.

다들 믿음 좋다고 부러워했어요.

 

그런데 전 그 당시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물론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요.

그러나 그게 내 안에서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의로워진다고 하는 것을 믿었으니까요.

예수를 믿지 않고 열심히 행하였습니다.

그러니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니지요.

 

성령이 충만했으면 예수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잖아요.

그랬으면 내 열심과 충성을 의로운 것이라고 붙잡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전 그 때 내 행함에서 의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몰랐어요.

의가 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누가 열심과 충성에 대하여 태클을 걸면 엄청 화를 냈습니다.

열심과 충성이 없는 사람은 신자 취급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나는 열심과 충성은 대단하였지만 내 안에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는 성령은 받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나중에 바울처럼 내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나니 내가 세상의 관원에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핍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내 딴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섬겼는데 그건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바로 유대인이었고 바리새인이었던 것입니다.

내 열심과 충성과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을 의로 붙잡고 있었으니까요.

무식하면 용감해요.

지금도 모르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기도 많이 한다고 해서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기도 많이 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열심으로 불러내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기도 많이 하면 어떤 능력은 나타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 능력이 예수를 믿는 성령 충만은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내는 지혜는 아니란 말입니다.

 

왜? 이러한 말을 하는가 하면 성령은 우리가 열심을 내고 기도한다고 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란 말을 하기 위해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성령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어떤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는 의미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이 시대 그릇된 성령에 은사 운동을 하는 자들이 열심히 기도하면 성령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란 뜻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하세요.

잘못 이해하면 정낙원 목사는 성령의 능력을 부정한다고 말하게 됩니다.

저는 성령의 일하심은 인간의 행함이나 조건에 따라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중요한 말을 하니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세요.

 

설교를 시작하면서 “에피(out) 성령”과 “엔(in) 성령”이 있다고 했지요.

 

“에피(out) 성령”은 외부에서 능력을 행하는 성령이고!

“엔(in) 성령”은 우리 안에서 예수가 믿어지게 하는 성령이에요.

 

구약에 일하는 성령과 신약에 일하는 성령은 달라요.

구약은 외적으로 역사를 하였고,

신약은 내적으로 역사를 하십니다.

옛 언약인 율법 아래서는 외적 역사가 일어났지만,

새 언약인 은혜 안에서는 내적 역사가 일어납니다.

 

“에피(out) 성령”은 일하는 성령이고,

“엔(in) 성령”은 믿어지게 하는 성령이에요.

외적으로 능력을 행하는 성령과, 내적으로 예수가 믿어지게 하는 성령은 달라요.

이건 성령이 두 분이란 말이 아니고 성령이 행하시는 사역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성령은 에피 성령으로 일을 하셨고,

신약의 성령은 엔 성령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만약에 능력을 행하는 성령을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은 구약 사람이에요.

율법 아래 있는 자입니다.

율법 아래 있으니까 성령을 능력 행하는 분으로만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에피(out) 성령”의 능력은 신자나 불신자를 따지지 않고 나타납니다.

이는 갖가지 기적이나 초월적인 사건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일을 하세요.

“에피(out) 성령”은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기적을 행합니다.

 

이는 신자나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일을 하십니다.

구약에 보면 에피 성령이 발람이나 사울 왕에게도 역사 하셨어요.

이건 구원과 상관없어요.

 

예수님이 열 문둥병자를 고치지요.

그런데 그 중에 아홉은 떠나고 한 사람만 예수님을 따르지요.

열 사람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병 고침의 은사를 맛보았어요.

외적으로 병 고침 받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단 한 사람만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한 사람만이 예수님이 구주라는 것을 믿었어요.

그러므로 열 문둥병자를 고치는 사건은 아홉은 성령의 외적 역사인 “에피(out) 성령”의 은혜만 맛보았고, 한 사람만 성령의 내적 역사인 “엔(in) 성령”의 은혜를 입은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홉 명은 율법의 제사장을 찾아 갔고, 하나는 예수그리스도를 제사장으로 찾아 온 것입니다.

 

문둥병이라는 병 고침을 받고 예수님을 떠난 아홉 명의 사람들은 히브리서 6장에서 말하는 성령의 은사를 맛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의 떡을 먹고 예수를 떠난 군중들과 마찬가지에요.

 

이렇게 능력을 행하는 성령은 “에피(out) 성령” 이라고 합니다.

“에피(out)”란 말은 바깥이란 뜻입니다.

이 “에피(out) 성령”은 왔다 갔다 해요.

 

그래서 성경에선 “성령을 입어” 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성령은 입어” 라는 말은 성령이 옷처럼 입었다 벗었다 한다는 말입니다.

이 성령은 능력을 행하는 성령으로서 우리 안에서 머무는 성령이 아니고 바깥에서 왔다 갔다 하시는 성령이세요.

 

그러니 필요에 따라서 능력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 안 믿어도 나타나요.

제가 과거에 예수를 안 믿으면서도 이러한 일을 했어요.

이 성령은 보통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기적을 행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이걸 다른 말로 “성령의 권능”이라고 합니다.

 

이 시대 많은 분들이 이러한 일들이 나타나면 성령을 받았다고 말을 하는데 아니에요.

“에피(out) 성령”의 은사를 조금 맛 본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에서 이런 것을 붙잡고 있는 자들을 초보라고 하고 젖 먹는 자들이라고 했어요.

이건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을 잠시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에 머무는 자들을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라고 했어요.

 

“에피(out) 성령”은 마치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성령의 권능을 주신 것과 같아요.

제자들이 파송을 받아 나가서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는 능력을 행하였잖아요.

가룟 유다도 이 능력을 행하였어요.

그런데 나중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었어요.

 

이 “에피(out) 성령”은 성도를 구원하는 일을 하시지 않아요.

성도를 구원하는 성령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엔(in) 성령”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우리 안에 내주(內住)하는 분이세요.

이 “엔(in) 성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아버지께로 가셔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예수님이 가시면 다른 보혜사로 오신다고 하는 성령이 바로 이 “엔(in) 성령”이세요.

이 “엔(in) 성령”은 오직 자기 백성에게만 오세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에게만 오세요.

 

그러니 누가 성령의 능력을 맛보고 행하였다고 해서 다 구원 받은 신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맛보고 행하고도 지옥 가는 자들이 수없이 많았어요.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것은 그 속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믿어지는 “엔(in) 성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는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지 않았어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성령이 아직 제자들 속에 오시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럼에도 성령의 능력으로 갖가지 기적과 능력을 행하였어요.

이걸 “에피(out) 성령”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가시고 난 후에 오신다고 하는 성령은 “엔(in) 성령”입니다.

 

“엔(in)” 이란? 우리 마음 안에 라는 뜻입니다.

엔 성령은 성도에게만 주어집니다.

“엔(in) 성령”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믿어지게 해 주십니다.

성도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엔(in) 성령”이 임하면 예수가 믿어져요.

“엔(in) 성령”은 능력 행하는 성령이 아니고 우리 안에서 믿음으로 일을 하세요.

어떤 일을 하시는가 하면 창세전 언약이 믿어지는 일을 하세요.

 

예수가 믿어지게 하시고!

말씀이 깨달아지게 하시고!

새 언약이 믿어지게 하시고!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도록 하세요.

“엔(in) 성령”이 임하면 천국에 대한 소망도 생기고 그동안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본 바가 되고 손으로 만진 바가 되고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어요.

 

이 “엔(in) 성령”이 오시면 사람이 변해요.

가치관이 변하고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져요.

옛 사람을 벗어버리게 하고 새 사람을 입게 하세요.

 

불만이 가득하고 원망하던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요.

부정적이던 사람이 긍정적으로 변해요.

땅만 바라보던 사람이 천국을 소망하게 되어요.

그러니 “에피(out) 성령”을 능력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엔(in) 성령”은 성품적인 것입니다.

 

참 감람나무에게 접을 붙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당한 자는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적인 것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를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금지할 수 없는 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에게 접붙임을 당한 자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품이 변하지 않으면 그건 가짜에요.

반드시 변하게 되어 있어요.

이건 완전하게 천사처럼 변한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없던 예수의 마음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가치관이 달라진단 말입니다.

삶에 지향성이 바뀐단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가치관이 달라지고!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져요.

옛날처럼 살지 않는단 말입니다.

성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가는 의미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걸 변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엔(in) 성령”은 오시면 영원히 떠나지 않아요.

성도 안에서 거하세요.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지요.

처소가 예비 되면 다시 와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거한다고 하잖아요.

그 처소가 바로 “엔(in) 성령”인 것입니다.

 

처소란? 집이에요.

그래서 성령이 오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거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한다”는 말은 “동거하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엔(in) 성령”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 들에게만 주어집니다.

이걸 “아들에 영” 이라고 합니다.

 

“엔(in) 성령”은 능력을 행하게 하는 성령이 아니고 예수가 믿어지게 하는 성령이에요.

믿음을 주신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이 나를 위하여 하신 것이라는 것이 믿어진단 말입니다.

예수와 나를 한 몸으로 연합을 시켜주어요.

그러므로 “엔(in) 성령”을 받은 성도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를 부인 할 수가 없어요.

 

“엔(in) 성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성령이에요.

그래서 “엔(in) 성령”이 임한 상태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합니다.

이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두고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고백 할 수가 없다고 했어요.

“엔(in) 성령”이 우리 안에서 마음으로 믿어지게 하여서 의에 이르게 하고 우리 입으로 예수님이 “나의 주이시고 나의 그리스도 이십니다!” 라고 시인하게 하십니다.

 

제가 과거 성경을 많이 읽고 표피적으로 많은 말씀을 알고 기도를 많이 하여 갖가지 성령의 외적 은사들을 체험하면서도 예수를 믿지 못하였던 것은 이 “엔(in) 성령”이 제 안에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에피(out)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갖가지 은사들을 행하면서도 정작 예수가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땐 아직 “엔(in) 성령”을 받지 않았어요.

 

만약에 지금 제 안에 “엔(in) 성령”이 오시지 않았으면, 지금도 “에피(out) 성령”의 능력으로 무당 노릇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리니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는 “엔(in) 성령”의 오심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전 지금 과거에 행하던 “에피(out) 성령”의 능력이나 외적은사들은 하나도 행하지 않아요.

과거에는 외적 능력을 달라고 했지만 이제는 구하지 않아요.

이제는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어린 아이가 장성하면 어린 아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버린 것과 같아요.

장난감이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니고 장성하고 나니까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온전하신 예수를 만나고 나니 장난감이 더 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는 은혜가 있기 때문에 방언을 하지 않고 능력을 행하지 않아도 전혀 아쉽다거나 불안한 맘이 없어요.

왜냐하면! 내 안에 아들에 영이신 “엔(in) 성령”이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에피(out)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던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었던 것이 산상보훈에서 책망 받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으면 저주 받아요.

 

마태복음 7장을 봅시다.

 

마 7:21-23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지막 심판의 모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님 앞에 나와서 자신들이 행한 업적들을 자랑합니다.

 

“난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난 병자를 고쳤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난 전도 했습니다!”

“난 충성하고 봉사 했습니다!”

“난 헌금 했습니다!”

“난 성화 했습니다!”

 

갖가지 종교적인 일들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불법을 행한 자들아 다 내게서 떠나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이들이 다 “주의 이름으로” 능력들을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주의 이름으로 능력으로 행하였어요.

이들은 마치 70문도와 같이 “주님의 권능”으로 갖가지 능력을 행하였어요.

여기서 권능이란 능력을 말하는데 이는 “에피(out) 성령”의 일하심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들을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하고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합니까?

이는 모두가 “에피(out) 성령”으로 행한 능력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행한 일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다는 것은 “엔(in) 성령”을 받지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나오지 않고 자기가 행한 업적들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이어서 집을 짓는 비유로 산상보훈을 결론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집을 시험하는 것은 업적이 아니라 “어느 터”인지로 하십니다.

“모래 위에 지었느냐!”

“반석 위에 지었느냐!”로 심판을 합니다.

 

“모래는 인간”을 말하고!

“반석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러니 “인간의 의”로 나오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이고!

“예수님의 의”로 나오는 것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지킴이라는 자기 의로 나와서 예수님으로부터 독사의 자식이라고 저주의 말을 들었어요.

“율법에 의”로 나온 유대인들이 바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들입니다.

반대로 세리와 창기들은 “예수님의 의”로 나왔으므로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이 됩니다.

 

이들은 왜? “에피(out) 성령”으로 갖가지 능력을 행하면서도 정작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엔(in) 성령”을 받지 못하였을까요?

그건 이들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오지 않고 자신들이 행한 업적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자기 의로 나아온 것이므로 불법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식으로 말하면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진리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으면 “엔(in) 성령”은 하나님이 주세요.

우리가 애쓰고 노력할 필요가 없어요.

주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주세요.

그 때는 하나님이 결정하세요.

 

이 “엔(in)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알고 믿어지게 되어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엔(in)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어요.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받으시는지를 알아요.

한마디로 정답을 안단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정답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 정답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만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엔(in) 성령”을 받은 성도의 모습이에요.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하나요?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가시면 다른 보혜사인 “엔(in) 성령”이 오신다고 하지요.

“엔(in)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신다고 하시잖아요.

 

진리가 뭡니까?

예수님이 진리에요.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하신 일이 곧 모든 진리에요.

성령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고 했는데 모든 진리란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을 말해요.

 

성령이 오시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고 했으니 예수님이 하신 일이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위한 일이라는 것으로 믿어지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신 일을 붙잡게 하세요.

한마디로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게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하나님에 의이고 불변하는 진리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새 언약을 붙잡게 하시려고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자꾸만 다른데 눈길을 빼앗기니까 그런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 눈길을 예수님에게 고정시키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자꾸만 우리 행함에 눈을 빼앗겨요.

본능적으로 그래요.

 

내가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충성하고 성화하고 개혁하는 일에 눈을 빼앗겨요.

눈을 빼앗기게 되면 우리 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안 보이고 뭘 해야 한다는 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에요.

인간의 본성은 자기가 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내가 한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자 하는 유혹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 것도 내가 예수를 믿은 것으로 붙잡고자 해요.

이게 다른 사람들에게 차별성으로 나타나서 자신과 다르면 난 예수 믿는데!

넌 왜? 안 믿어! 라는 식으로 나타나요.

“난 예수 믿었는데” 라는 말은 곧 내가 예수를 믿었다는 행함인 겁니다.

그럼 예수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자신이 뿌듯해져요.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해 주어서 믿고 있는데도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셨다는 은혜는 엿 바꿔 먹고 자기가 믿는다고 한단 말입니다.

은혜를 행위로 바꿔치기 한단 말이에요.

이게 불법이에요.

 

우린 늘 불법을 행하는 자에요.

우리 본성이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안 믿고 예수 믿는 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책망하고 바로 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는 것은 예수 안으로 밀어 넣고 가르치고 고치고 책망한다는 말이에요.

신앙을 올바르게 교정시켜 준단 말입니다.

 

야! 정낙원이 너~ 복음 전하는 것은 네가 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전하게 하신 것이다!

너~ 복음 깨닫는 것이 네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다!

너~ 헌금하고 교회에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이 너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게 해 주셔서 하는 것이다!

너~ 누굴 사랑하고 용서하고 하는 것도 다 하나님이 하게 해 주신 일이다! 라고 알려 주세요.

 

그럼 우린 화들짝 놀라지요.

야! 또 하나님의 은혜를 내 것으로 도적질하고 있었구나!

에이! 이 나쁜 놈!

주여!~ 용서하소서!

이 놈이 또 “주께 긍휼을 입고 있습니다!” 라고 감사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런 일을 하시려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거에요.

 

제발 성령 충만을 무당 푸닥거리 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마세요.

제가 과거에 “에피(out) 성령”으로 무당 푸닥거리 엄청 했거든요.

그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내가 그 일을 성령 충만으로 오해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믿어지지도 않는 예수를 믿는 척 했어요.

예수도 모르면서 예수 믿는다고 주접을 떨었어요.

십자가에 의미도 모르면서 십자가 십자가 했어요.

그릇된 앎은 반드시 그릇된 신앙을 낳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먼저 올바른 앎이 우선이 되어야 해요.

그러니 안 믿어지면 뭘 하려고 하지 말고 믿어질 때까지 기다리세요.

제발 조급해 하지 마세요.

우리가 예수를 믿고 안 믿고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세요.

 

어떤 사람은 모태로부터 예수가 믿어지게 하고!

어떤 사람은 20살에 믿어지게 하고!

어떤 사람은 40살에 믿어지게 하고!

어떤 사람은 60살에 믿어지게 하세요.

 

어떤 사람은 교회 가자 말자 복음 깨닫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교회 10년 다니다가 깨닫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30년 다니다가 깨닫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50년 다니다가 깨닫는 사람도 있어요.

그건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보세요.

 

어떤 사람은 새벽에 부르고!

어떤 사람은 10시에 부르고!

어떤 사람은 점심 때 부르고!

어떤 사람은 오후 3시에 부르고!

어떤 사람은 마치기 한 시간 전에 불러요.

 

그 누구도 스스로 자기가 시간을 정해서 포도원에 들어간 사람이 없어요.

다 주인이 불러서 들어갔어요.

어느 시에 부르는 것은 그건 주인의 마음이에요.

어떤 사람은 부르심을 입지 못한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 어떤 사람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예수를 못 믿을 수도 있어요.

목사 노릇하고도 지옥 가는 사람이 있어요.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과 동거동락 하면서도 예수를 안 믿을 수가 있어요.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반대로 예수 안 믿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면 믿기 싫어도 믿어지고!

하나님이 믿음을 안 주시면 믿고 싶어도 안 믿어져요.

 

중요한 것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이면 반드시 성령을 주어서 믿어지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찾는 몫은 주인의 몫이지 우리 몫이 아니에요.

그러니 주인 되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찾아내십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내가 하나님 백성이면 반드시 “엔(in) 성령”이 오세요.

“엔(in) 성령”이 오시면 예수가 자연스럽게 믿어져요.

전혀 어렵지 않아요.

그냥 술술 믿어져요.

이처럼 “엔(in) 성령”은 우리가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교회 다닌지 근 40여 년 만에 복음을 깨달았어요.

40여 년 동안 예수도 모르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했어요.

예수를 믿는 척 한 것이지 믿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지 않는데 어찌 믿는단 말입니다.

 

이사야 65장을 봅시다.

 

사 65:1절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잘 보세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타나서 내가 여기 있다고 알려 준다고 하잖아요.

반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겐 감추어져 계세요.

 

이건 마치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산 아브라함의 본 자손들은 지옥으로 보내고 전혀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이 산 세리와 창기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간 것과 같아요.

천국 갈 것이라고 열심히 산 바리새인들은 손을 벌려서 예수를 못 믿게 하고!

당연히 지옥 갈 것이라고 여기던 세리와 창기들에겐 예수를 믿어지게 하여서 구원을 받게 한 것과 같아요.

왜?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시는가 하면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남게 하기 위함입니다.

 

구원 속에는 우리의 노력이나 정성이나 공로가 담겨져 있으면 안 되어요.

 

내가 예수를 믿는 것 속에는 내 열심이나 내 똑똑함이나 내 지혜가 담겨 있으면 안 되어요.

그럼 내가 예수 믿은 것이 되어요.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는 믿음으로 남기 위해서 우리의 노력이나 지혜가 믿음 속에 담겨져 있으면 안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제가 그렇게 40여 년 동안 예수를 믿고자 하여도 예수가 믿어지지 않게 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때 그렇게 예수 믿고자 했는데도 못 믿었어요.

안 믿어지는데 어찌 믿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믿는 척만 하였지 믿은 것은 아니에요.

 

그러다가 스스로 속이는 것도 한계가 다다르자 우울증이 와요.

에라이! 나 예수 안 믿을래!

목사고~ 교회고~ 다 때려 치워야겠다고 내 던지려고 하니 그때 믿어지게 해 주셨어요.

참 고약하지요.

하나님 나빠요!~

 

믿겠다!~ 믿겠다 할 때는 손 벌리고 믿지마!~ 믿지마! 그러다가~

나 안 믿을 래! 하니까 붙잡고 믿어지게 해 주는 심보는 무슨 심보입니까?

이게 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전 지금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하지 않아요.

실제로 그렇구요.

난 예수 안 믿어요.

아니!~ 믿을 수가 없어요.

 

다만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니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믿는 믿음은 내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이 관리하세요.

 

하나님이 거짓말쟁이가 아니고 변덕쟁이가 아니니 난 땡 잡은 겁니다.

이젠 나 예수 안 믿을래! 라고 하여도 그게 안 되어요.

하나님이 아니야!

넌 예수 믿어야 돼! 라고 하면서 믿어지게 해 주세요.

 

제 안에서 야! 너 성화해야~ 의로워진다고 하면 교인들에게 성화를 하라고 하겠는데!

아니야!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야 돼! 라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만 외치는 것입니다.

예전엔 성화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여서 성화! 성화 했는데!

지금은 내 안에서 성화가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거든 이라고 해요.

 

그러니 저는 예전과 달리 창세전 언약만 증거하는 것입니다.

욕 먹어가면서도 말이에요.

그래서 전 지금도 궁시렁 거리면서도 예수 믿고 있답니다.

 

예수를 믿고 안 믿고는 우리 능력 밖에 일이에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에요.

천국가고 지옥 가는 것은 하나님이 하는 일이지 우리가 선택하는 일이 아니에요.

천국 갈 사람은 반드시 예수를 믿게 할 것이고!

지옥 갈 사람은 아무리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어요.

이게 세상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요.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세상으로부터 타협할 줄 모르는 독선주의라고 비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일을 하시는데 우리가 어찌 한단 말입니까.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고 욕해도 어쩔 수가 없어요.

이해되는 우리는 감사합니다! 하고 살아야지요.

 

그러니 성령 받겠다고 집안 일 다 팽개치고 미친 여자 싸돌아다니듯이 다니지 마세요.

예수 믿겠다고 어느 목사를 쫓아다니지 말란 말입니다.

그래서 믿어지는 예수는 없어요.

어느 목사에게 가면 예수가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놈은 가짜에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사람은 반드시 예수가 믿어지게 되어 있어요.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예수 믿을 사람은 다 믿게 해 주시니까요.

가만히 있으면 이란 말은 집안에서 놀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애쓸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주께서 다 알아서 한다는 말입니다.

 

제 말이 안 믿어지면 어쩔 수 없어요.

그럼 미친 여자처럼 싸돌아다니셔야지 어찌 하겠습니까.

그러다가 진짜 미친 놈 만나요.

이상한 이단 집단에 빠져요.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 대 부분이 열심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 속에는 빨리 진리를 알아서 선생노릇하고 싶어 하는 교만이 도사리고 있어요.

그러니 좀 색다르다고 하면 단맛에 훅 하고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 받겠다고 집안 일 다 팽개치고 살림살이도 안하고 하루 종일 교회 가서 주의 일을 한다고 지랄하지 마세요.

그건 목사들이 자기 탐욕을 채우고자 교회를 유지 보수하기 위해서 당신의 열심과 정성과 돈을 도적질하고자 사기 치는 것이에요.

예수는 지랄스럽게 믿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평범함 속에서 믿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을 등한시하고 어느 특정한 일에 빠져서 주의 일이라고 하지 마세요.

그건 이단들이 하는 짓거리들이에요.

그냥 평범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사세요.

하나님을 교회에서만 찾지 말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내 삶 모든 것에서 임마누엘 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알고 사세요.

하나님을 교회에서 찾지 말고 내 일상 속에서 찾으세요.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세요.

 

왜? 가정생활을 등한시합니까?

그 가정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왜? 못 믿으세요.

예수 핑계대고 남편이나 아내가 자식이나 형제들을 무시하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그들에게 제일 먼저 예수의 마음으로 다가가셔야 해요.

 

그렇다고 교회도 가지 말고 집구석에 틀어 박혀 있으란 말이 아니에요.

교회와 일상을 구분하지 말란 말입니다.

제가 예수 믿고자 싸돌아다니지 말라는 것은 믿음이나 은혜는 우리의 애씀이나 노력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제발 말 귀를 좀 알아먹으세요.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하세요.

그러니 진득하게 기다리세요.

괜히 어쭙잖게 설쳐대다가 이단에 빠지지 말고!

이상한 놈 만나서 돈 뺏기고 가장파단 일으키지 마시고 기다리세요.

 

기다림도 신앙이에요.

법 아래 있으면 법 아래서 사세요.

하나님 뜻이려니 하고 기다리세요.

지금 있는 곳에서 감사하면서 섬기고 봉사하세요.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 갔듯이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이 다메섹에 바울을 찾아 갔듯이 찾아오십니다.

그럼 그 때 아! 율법이 아니고 믿음이었구나! 하세요.

 

지금 믿어지십니까?

그럼 지금 감사하면서 섬기고 봉사하세요.

믿어지는데도 게으름을 피우고 있으면 당신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시용하고 있는 악당입니다.

뭔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그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조금만 더 살펴봅시다.

 

먼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성령을 그냥 성령이라고 하지 않고 “진리의 성령”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진리의 성령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진리가 진리를 만나게 한다고 합니다.

 

이는 진리와 진리는 서로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서로 상통하고 교감을 한다는 말입니다.

끌어당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성령이 주도적으로 이끄십니다.

왜? 성령이 주도적으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여야 할까요?

이는 우리 본성이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우린 진리에 관심이 없어요.

알고 싶지도 않아요.

 

만약에 우리 스스로 진리를 알아보고 그 진리 가운데로 들어간다고 하면 구태여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끌어당기고 밀어 넣어 주실 필요가 없어요.

성령이 오셔서 진리 가운데로 끌어당기고 밀어 넣어주신다는 말은 곧 우리 스스로 안 되기 때문에 성령이 와서 강제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아까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겐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육에 속한 자들에겐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십자가 도를 구원의 능력으로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진리 되신 예수님 안으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십자가 도가 구원의 능력임이 믿어지게 해 준단 말입니다.

 

그럼 여기서 또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왜? 예수님이 하신 일만이 진리가 되느냐 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이 진리 인가를 알아야겠지요.

 

진리란? 어원적으로 말하면 절대로 변하지 않는 도리나 원리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고정된 법칙이에요.

고정되었다 함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역사 세계엔 변하지 않는 것이 없어요.

 

사람도 변하고!

가치관도 변하고!

법칙도 변해요.

 

변하지 않는 법칙은 변하지 않는 세계에서만 있어요.

변하지 않는 분에게서만 나옵니다.

하나님만 변하지 않아요.

그럼 변하지 않는 도리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진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법칙 하나를 주셨습니다.

 

무슨 법칙인가 하면 “창세전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이 세상을 존재케 하는 근거에요.

세상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 주로 인하고 주께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만물을 우리들이라고 보세요.

우린 예수님으로부터 창조가 되었고!

예수님을 위하여 살다가!

예수님에게로 돌아갑니다.

이게 우리의 운명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는 말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다스려지고 있어요.

창세전 언약이 완성되면 사라질 것들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자기 백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 언약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법칙입니다.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우린 흠 있는 죄인입니다.

스스로 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창세전 언약은 의로운 분의 희생으로 죄인이 구원받는 언약입니다.

 

알다시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입니다.

아담은 죄인이에요.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다 죄인으로 출생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정의하길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죄인은 구원을 받을 자들이지 구원할 자가 아니에요.

그러므로 이 세상 그 누구도 구원자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 죄 없는 의로운 분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이 세상은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요.

그렇다면 죄 없는 분은 이 세상 밖에 존재하는 분이란 말입니다.

세상 밖에서 오신 분이라야 구원자가 될 수가 있어요.

죄인은 세상에 속하였고 죄 없는 의인은 세상 밖 창조에 속하였습니다.

 

세상 밖을 묵시라고 하고, 이 세상을 역사라고 합니다.

묵시는 변하지 않아요.

하지만 역사는 변해요.

묵시인 세상 밖 창조 세계는 완료된 세계이므로 변하지 않습니다.

 

죄인은 변하는 역사에 속하였습니다.

오늘 다르고 내일 다릅니다.

아침 다르고 저녁 다릅니다.

인간은 믿을 것이 못 되어요.

인간은 자기 유익에 따라서 수시로 카멜레온처럼 변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아니고 죄인이라고 합니다.

죄인이란? 죄 아래 갇힌 인간이란 말입니다.

죄 아래서는 무얼 해도 죄에요.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 아닌 것이 없어요.

 

죄란? 부패케 하는 것입니다.

부패케 한다는 말은 변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지기유익에 따라서 수시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변하지 않는 진리는 이 땅에 없는 것이란 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이 세상에 없어요.

진리는 변하지 않는 하늘에만 있습니다.

 

“하나님을 일컬어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

“하나님은 식언치 않는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란 말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칙도 변하지 않고 고정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고정이 되었다 함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변치 않는 하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의 영원한 법을 하나 제시해 주셨습니다.

 

영원한 법이란? 아들을 통한 구원입니다.

아들을 통해서 죄사함을 주시고!

아들을 통해서 영생을 주신다는 법칙입니다.

 

누구든지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고 아들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를 영접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아들을 영접치 않는 자는 심판을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제시한 법칙이에요.

 

죽고 사는 문제가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로 달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묻지 않아요.

어떻게 살았느냐!

어떤 인간이냐! 묻지 않아요.

 

단 하나 예수를 영접 했느냐를 묻습니다.

영접이란? 맞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건 하나가 된다는 말이에요.

 

예수가 하는 일을 인정하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세상에 구주로 보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인정하느냐!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느냐! 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주로 인정하느냐 묻고 있어요.

 

주란? 주인이고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를 내 주인으로 인정하면 나는 자연히 예수의 종이 됩니다.

예수를 왕으로 모시면 나는 자연히 신하가 됩니다.

종은 주인을 위하여 죽는 자입니다.

신하는 임금에게 절대 복종하는 자에요.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묻습니다.

 

너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 수가 있어!

너 예수에게 절대 복종 할 수가 있어!

너 예수를 위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수 있어!

너 예수를 위해서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릴 수 있어!

 

이게 예수를 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저함 없이 예! 라고 나와야 합니다.

아니요! 라고 하면 예수를 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주로 인정하지 않으면 저주를 하겠다고 합니다.

 

인간 입장에선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느냐고 따질 수 있어요.

세상에서 이런 경우는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거든요.

내가 내 주인으로 살았어요.

내가 왕이고 내가 주인이에요.

내 인생은 나의 것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이걸 죄라고 합니다.

이걸 어찌 순순히 받아 들일수가 있겠어요.

없어요.

 

지금까지 인간들이 하나님이라고 섬겨온 신은 우리 존재를 인정해 주었어요.

한 번도 우리더러 자신을 위해서 죽으라고 하지 않았어요.

우리 존재를 인정해 주었다니까요.

 

마귀는 우리에게 너 틀렸어! 그러지 않아요.

너 잘났어!

너 대단해!

너 같은 사람은 없을 거야!

마귀는 우리를 한 번도 부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마귀를 참 하나님이라고 섬기고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요.

부정해요.

틀렸다고 합니다.

넌 꺼지라고 합니다.

이걸 어떻게 우리가 받아들인단 말입니까?

못해요.

 

우린 반발합니다.

하나님 자기가 뭔데!

우리더러 예수를 위해 죽으라고 합니까?

우린 뭐 시다바리 입니까?

하나님이면 답니까?

이게 인간들의 항변입니다.

 

하나님이 신이시고 하니까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믿어는 주겠는데!

예수를 위하여 내 인생을 포기하라고 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나도 살고 예수도 사는 길을 찾자고 합니다.

우린 예수를 믿어도 늘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흥정을 하고자 합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리고 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메시야란 말입니다.

메시야는 구원자란 뜻입니다.

구원자란? 구원을 해 주는 분이란 말입니다.

 

구원이란? 죄와 사망에서 건져 준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살려 준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를 살려 준다는 말이에요.

이건 인간들이 용납 할 수가 없어요.

 

인간들은 스스로를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살았다고 생각해요.

그러고 어디에 가두어진 적도 없어요.

자유인으로 살았어요.

이게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어요.

예수님이 자유를 준다고 하자!

아니 우리가 누구의 종이 되어 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자유케 된다고 하느냐! 고 비아냥 거렸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죄의 종이야” 라고 하자!

아니야!

우린 죄 짓지 않았어!

그래서 예수님이 죄에서 구원해 준다고 하니 웃었어요.

아니! 우리가 뭐가 답답해서 너 한데 구원을 받아야 하느냐고 거부했어요.

 

자신들은 구원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너무도 반듯하게 사는데 어찌 죄인이란 말입니까!

요즘 교인들의 말대로 이렇게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 하는데 어찌 죄인이란 말입니까!

 

죄인이라고 한다면 저기 저 창기들과 같은 자들이라고 여겼습니다.

저 놈들이야 개차반으로 사니까 죄인이지만 자기들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구원을 베푼다고 하자 그런 구원은 우린 필요가 없고 저기 있는 저 세리와 창기들에게나 주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는 인본주의자들이에요.

모든 인간들을 대표하고 있어요.

모든 아담의 군상들을 바리새인들 속에 다 담아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신앙 속에는 인간의 신앙관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자기가 죄인임을 몰라요.

사람마다 약간의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남에 도움을 받아서 구원을 받아야 할 그런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 보세요.

자신은 착하기 때문에 천당에 간다고 해요.

그 누구도 지옥 간다고 하는 사람은 없어요.

다 자기에겐 선이 있다고 믿어요.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지 않아요.

 

이것이 인간들이 자신들을 진단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나의 구원자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받아 들일수가 없어요.

그러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용납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알게 해 주세요.

내게는 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 불가한 것들이 믿어진단 말입니다.

 

우리 이성으로!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던 것들을 성령이 믿어지고 하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예수님 앞에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고백이 나와요.

 

이건 인간이 고백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오직 성령이 하게 하는 고백이에요.

내 마음 속 심연 깊숙한 곳에서부터 내가 죄인이라는 이 사실이 믿어지고 고백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이 믿어져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믿어져요.

예수님의 피로서 내 죄가 사해졌다는 것이 믿어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원의 능력이라고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성령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을 불가능해요.

여기서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믿어지면 마땅히 저주 받아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저주 받아야 할 자가 예수님 때문에 살아났다고 생각하니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감사가 되나요.

예수가 믿어지나요.

그럼 성령이 그 안에 와 계신 것입니다.

이제 그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고 느끼세요.

하나님을 성경 책 속에 가두어두지 말고 살아서 나와 동행하게 하세요.

 

욥처럼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손으로 만진바 되고 눈으로 본 바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껏 삶 속에서 하나님을 스킨십을 하세요.

감사하시고 사랑하며 사세요.

이건 그 안에 성령이 와 계신 성도들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이 특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멀리 있던 하나님을 이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 됨을 감사합니다. 성경이 믿어지게 해주시고, 새 언약이 믿어지게 해 주시고, 천국이 믿어지게 해 주신 그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이 믿음으로 남은 삶을 감사하며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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