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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96강. 예수님 앞에서 폭로되는 죄 (요 15:21-27)

by coroa 2021. 12. 31.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96강. 예수님 앞에서 폭로되는 죄 (요 15:21-27)

-.정낙원 목사

 

요 15:21-27=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 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 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5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고 합니다.

여기서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한다는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이는 앞에서 살펴 본 내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앞선 내용이 무엇인가요?

지난 시간 예수를 믿으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소극적인 의미에서 유대인을 말하지만 광의적으로 말하면 예수를 배척하는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혈통을 앞세우고 나아오는 유대인들을 일컬어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처럼 인간의 조건으로 나아오는 자는 마귀의 자녀입니다.

이들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핍박하는 유대인이나 세상이나 동의어로 보면 됩니다.

예수를 미워하고 배척하는 모든 자들은 세상이고 유대인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들은 예수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음이 됩니다.

 

그럼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왜? 예수 믿는 자들을 미워할까요?

미워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건 예수가 밉기 때문입니다.

왜? 밉습니까?

그 이유를 유대인에게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럼 유대인(사람)들이 왜? 예수를 미워합니까?

이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신앙이 틀렸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행사를 악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왜? 우리가 틀렸느냐!

우린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니까 틀린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째서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이 틀린 것입니까?

예수님은 무슨 근거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이 이유를 모르면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도 독사의 새끼라는 말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역설(逆說)의 의미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고발하는 것은 고치기 위함입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병을 진단하여서 살리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이 사랑을 모릅니다.

하나님(예수님)의 일하심을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라고 합니다.

“알지 못한다” 함은 하나님에 대하여 소경이란 뜻입니다.

소경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미움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영적 소경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소경임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실상이 이렇다는 것을 예수님을 보내서 알려 줍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인간의 실상이 드러납니다.

수치를 감추고자 하는 본성을 가진 인간들 입장에서는 감추인 실상이 드러난다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

좋은 것이 드러나면 기분이 좋지만 나쁜 것이 드러나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쁜 것을 드러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유대인들이 자랑이라고 하는 것을 죄라고 고발을 해 버립니다.

유대인들의 의라고 하는 것을 그건 의가 아니고 악이라고 합니다.

이건 도무지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자연히 반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어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어둠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빛으로 보내셨습니다.

이를 빛이 어둠에 비추었다고 합니다.

유대인에게 비추었고 우리에게 비추었습니다.

유대인이나 우리나 동일합니다.

그러니 유대인과 우리 자신들을 함께 묶어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암튼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세상이 어둠이었다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없을 땐 우리 자신들은 어둠인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어둠이라는 것으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건 세상(우리 모두)으로서는 일대 혼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어둠이란? 죽음입니다.

죄를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이 죽은 자이고 죄인이라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죄가 터져 나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죄가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드러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이라고 알려 주기 전에는 죄인 인줄 몰랐어요.

어둠인줄 몰랐고 죽은 자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빛이 등장합니다.

빛이 옴으로서 우리 자신들이 어둠이라는 것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가 죄인이라고 한단 말이지요.

그러니 듣는 유대인들이 기분 나쁜 겁니다.

왜? 자기들을 죄인이라고 하느냐 입니다.

자신들은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사는데 말이에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빛으로 생명으로 보낸 것은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내기 위함입니다.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고 구원을 하기 위함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하여서 구원을 받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걸 모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보내신 자인 예수님이 하는 말씀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니까 예수님께 속한 자들을 몰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님에게 속한 성도들을 미워하고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핍박을 당하는 것은 모두가 나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것으로 택함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은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소경이란 뜻입니다.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는 이 백성이 무지하여서 망한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영적 무지란 죄입니다.

무지란?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깨닫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긴 보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신앙이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는 엇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지에요.

무지를 다른 말로 무식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해요.

두려움을 몰라요.

자신이 하는 짓이 어떤 것인줄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길을 가시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무리들이 앞 다투어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반가워하지 않고 도리어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너희들이 나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따르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안다고 한다면 예수를 따른다고 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 줍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부모와 형제를 버리는 일이고!

전토를 버리는 일이고!

자기 자신까지 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건 인간이 추구하는 것에 반(反)하는 것들입니다.



인간들은 가문이 번성하고!

부모 형제를 더 사랑하고자 하고!

전토를 더 늘리고자 하고!

자기 자신을 더 사랑받고자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이러한 것들을 도리어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반(反)하는 일에 직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돌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라고 하시는 말씀 속에는 너희들은 지금 날 이용해서 너희 배를 채우고 입신양명하고자 하지 않느냐 라는 고발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를 아시고 예수님은 역(逆)으로 나는 너희들에게 입신양명을 주는 것이 아니고 미움과 핍박을 안겨 준다고 합니다.



이는 곧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걸림돌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면 알수록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예수 믿는 일이 마냥 기쁜 일만이 아니란 것을 실감케 됩니다.



겉으로는 우겨쌈을 당하는 일이고!

꺼꾸러뜨림을 당하는 일이고!

날마다 자기 지신을 부인하여야 하는 아픔을 당하게 됩니다.

왕이 되고자 하는 본성을 지닌 인간들에게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신앙이란? 부인하겠다고 각오를 다지고 의지를 불태우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부인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 의지나 각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복음을 몰랐을 땐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을 쉽고 가볍게 생각했어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의지가 강하고 내 각오를 다지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까짓것 고난 받지 뭐!

그랬어요.

 

그 당시 즐겨 부른 찬송이 있었어요.

355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이라는 찬송입니다.

목 놓아 찬송을 부르면서 주여! “아골 골짝 어디라도 복음 들고 가겠다” 고 했어요.

“멸시 천대 내가 받고 주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라고 하였어요.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난 후 한 번도 안 불렀어요.

아니 못 부르겠더라고요.

왜냐하면! 찬송가 가사 내용이 나의 원함과 상반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내가 감당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어요.

 

가사를 한번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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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 만 따라 가오리다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없이 빛도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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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를 쭉 훑어보세요.

어디 가당키나 한가요?

가사를 보면 멋들어지지요.

이불 속에서 부르면 모세가 부럽지 않고 엘리야가 부럽지 않고 바울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끝내 주어요.

말대로 라고 하면 하나님도 반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에서는 하나도 감당치 못할 것들입니다.

아니! 손 톱 밑에 가시가 하나 박혀도 죽겠다고 징징거리는 인간이 가긴 어딜 가겠단 말입니까?

아골 골짜기가 어떤 곳인 줄이나 알고 간다고 합니까?

멸시 천대 받는 것이 어떤 것이나 알고 받는다고 합니까?

그냥 추상으로만 아니까 주접을 떠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우리 본성과 합하는 것이 없어요.

모두가 우리 본성과 반하는 내용들입니다.

우리가 다 피하고 싶어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가사의 내용과는 반대로 살고 싶어 해요.

 

우리는 괴로우면 도망가고 싶어 하고!

우리는 십자가는 피하고 존귀영광은 취하고 싶어 하고!

아골 골짜기는 주님을 보내고 나는 존귀 영광을 차지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고 나는 예수 때문에 이름을 내고 빛도 내고 싶어 하고!

우리는 사랑을 주기 보단 사랑 받고 싶어 하고!

멸시천대는 주님이 받고 나는 영광만 받고 싶어 한단 말입니다.

 

나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몰랐을 땐 사명감만 불타서 이 노래를 엄청 불렀습니다.

입만 열면 불렀어요.

그런데 복음을 깨닫고 내 꼬라지를 알고 난 후로는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르면 하나님이 야! 이 놈아! 사기 치지 말라고 그러는 것 같아요.

 

의욕이 앞선다고 해서 그것이 신앙이 아니에요.

의욕은 침대 위 이불 속에서 땅콩 까먹으면서도 가질 수 있지만 신앙의 삶은 피 흘리면서 싸우는 일입니다.

신앙은 아름다운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에요.

실제입니다.

 

천국이 실제이듯이 고난 받고 핍박당하는 것도 실제에요.

구원이 실제이듯이 부모형제를 버리고 전토를 버리고 자기를 버리는 것도 실제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실제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요.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이러한 환경 속으로 밀려들어간단 말입니다.

 

실제로 욕을 먹고!

실제로 미움을 받고!

실제로 핍박을 받아요.

실제로 이러한 일을 당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미운 줄 아세요.

 

욕을 먹고 핍박을 받아 보세요.

얼마나 아픈 줄 아세요.

얼마나 비통한 줄 아세요.

하나님이 얼마나 야속하고 원망스러운지 아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돌을 던지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 일들이 남에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라는 것으로 깨달아진단 말입니다.

신앙은 장난이 아니에요.

예수 믿는 것을 호락호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래서 예수님은 날 따라 오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머릿속 지식으로는 십자가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지지요.

왜? 백 번 천 번이겠어요.

만 번이고 그 이상 죽어 백골이 진토가 되어 넋이 되어서라도 지고 가지요.

 

그러나 실상에선 십자가 “십” 자만 들어도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머리로 성경 구절 외우고 관념으로 믿는 것은 할 수가 있겠는데 몸으로 살아내는 것은 싫어해요.

말씀이 우리 몸에서 실제로 새겨지는 것은 싫어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에게 악악거리면서 죄를 토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오느니 불평이고 원망입니다.

나 애굽으로 다시 돌아 갈래! 라고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야~! 나는 참으로 믿음이 없는 자이구나를 알게 됩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내가 복을 받을 자인지 아니면 저주를 받을 자인지 아는 것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자기 꼬라지를 알게 하시려고 율법(말씀)을 주신 겁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지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지키려고 하기 보다는 말씀으로 자기 주제를 아는 것이 급선무란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말씀을 지키고자 덤빈 겁니다.

이게 그들의 잘못이었어요.

 

유대인들이 망한 것은 자기가 누군 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다가 망했어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한 것이 하나님을 죽였어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면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어요.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지 말고 내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아는 것이 급선무에요.

제사보다 긍휼을 구하는 것을 배워야 한단 말입니다.

 

섬기려고 하지 말고, 섬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주일성수 하려고 하지 말고, 주일이 무엇인지 알아야하고!

십일조를 하려고 하지 말고, 십일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성전을 지으려고 하지 말고, 성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먼저 아세요.

그리고 행하십시오.

알고 행하면 감사가 되지만, 모르고 행하면 그 행한 것이 독이 되어 죽습니다.

알지 못하고 하게 되면 그것이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을 죽이는 칼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죽어요.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을 위한 신앙생활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신앙생활이 되어요.

 

그러므로 앎이 먼저이고 섬김은 나중입니다.

앎이 없으면 유대인들처럼 자기 행함 때문에 예수를 죽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종자가 아니란 것을 알게 하려고 율법을 주셨어요.

 

그런데 이 지각이 없고 우둔한 인사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는다고 하니까 자기 주제가 어떤 줄인지도 모르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목숨을 걸고 약속을 덜컥 해 버립니다.

복을 받고자 지키겠다고 덥석 물어 버린 그 율법이 축복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를 몰고 오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도장을 찍어서 맺은 계약에 의해서 망했어요.

결국 유대인들을 하나님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지금도 동일합니다.

이 악순환은 교회와 교인들 속에서 돌고 돌아가고 있어요.

자기 꼬라지도 모른 채 개혁이니 성화니 하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주접을 떨고 있어요.

아골 골짝 어디라도 복음 들고 가겠다고 목소리 높이고 있어요.

멸시천대를 받고 십자가 지고 가겠다고 객기를 부르고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알아야 섬기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면 올바로 섬길 수가 없어요.

섬김이란? 의무 봉사가 아니고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는 사랑이고 교제입니다.

섬김이란? 마음으로 우러난 것이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억지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의무이고 법입니다.

법은 지키면 반드시 자기주장을 하게 되어 있어요.

지킨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겨루고자 합니다.

따진단 말입니다.

이게 죄에요.

 

죄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법에 속한 것입니다.

진정한 섬김이란? 마음에서 우러난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섬길 때 그 속에 감사와 기쁨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교제하기를 원하지 법적으로 의무를 행하는 것을 원치 않아요.

 

성경의 모든 계명을 한마디로 “사랑” 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서로 간에 깊은 앎이 없이는 안 되어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근본은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섬김이란? 앎에서 나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아느냐 라는 앎에 깊이에 따라서 섬김의 농도가 달라집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하라! 하지 말라! 라는 모든 명령들은 강제성이 아니라 자발성이에요.

사랑에서 우러난 순종이라야 합니다.

강제로 시켜서 얻어 본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강제로 행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고 굴종입니다.

 

굴종은 어쩔 수 없이 힘에 굴복 당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힘이 있으면 안 해요.

다 힘이 없으니 하는 겁니다.

굴종은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므로 하면 할수록 분을 품게 되어 있어요.

굴종 속에는 분노가 쌓이지 사랑이 나오지 않아요.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고 하는 것은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제사 속에 사랑을 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사를 왜? 지내야 하는지를 모르고서 지내는 제사는 글자 그대로 제사일 뿐입니다.

내가 왜?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를 알고 지내는 것은 그 제사 속에 감사와 사랑이 담겨져 있지만 모르고 지내면 제사를 지냈다는 자기 의가 쌓이게 됩니다.

 

왜? 제사를 지냅니까?

율법 속에 있는 제사란 무엇입니까?

죄인이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죄 용서 받는 것이 제사 속에 담긴 내용입니다.

그러니 나는 명령대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가 본질이 아니에요.

제사 속에는 주여! 내 죄인이 흠 없는 제물의 죽음으로 속량을 받았습니다! 라는 감사의 정신이 담겨져 있어야 해요.

 

하나님은 죄인을 살리기 위하여 제사 제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니 제사 속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살리고자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제사 제도를 주셨어요.

그러니 제사를 지낼 때마다 죄인이 하나님께 용서 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이 묻어 나와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고 하면 제사를 어떤 마음으로 지내고 어떤 자세로 지낼까요?

당연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담아서 지낼 것입니다.

하지만 제사 속에 담긴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하고 제사를 지내면 제사를 지냈다는 행위만 남아요.

제사를 지내라고 했으니 지내는 것이 된다면 그 제사는 형식이 되고 맙니다.

이런 제사를 하나님은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제사를 받지 못하여서 환장을 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고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제사를 지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제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마음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제사를 지내면서도 부족한 마음으로 긍휼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게 됩니다.

 

구약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신약에서는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 속에도 감사와 사랑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뭔가 얻고자 해선 안 됩니다.

예수를 믿어 주었으니 복 주세요! 라고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주여! 이 죄인이 오늘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삽니다! 라는 마음이 고백되어져야 한단 말입니다.

 

교회 나올 때도 이런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내가 행한 모든 바탕에 하나님의 은혜가 깔려 있어야 해요.

성도가 행하는 모든 것에 주님께 받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야 한단 말입니다.

손톱만큼도 내 자랑이 담겨져 있으면 안 되어요.

 

주여! 오늘도 교회 오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여! 내게 헌금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여! 봉사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여! 성도를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도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라는 것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자랑하고 있어요.



하나님 오늘 전도 했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봉사 했습니다!

하나님 저 헌금 했습니다!

하나님 나 구제 했습니다!

 

나 착하지요!

나 잘했지요!

그러니 복 주세요! 라고 하고 있어요.

이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입니까?

 

모든 것을 자기가 행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자랑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제사라는 행위만 있고 긍휼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예수님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 빠진 제사라고 했어요.

한마디로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는 것을 배우라는 말은 왜? 무슨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는지 알라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네가 죄인인줄 아느냐! 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정낙원이 너~ 내 공로로 살고 있음을 아느냐! 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제사 지내기에만 급급했습니다.

그러니 제사 지낸 것을 자기 의로 들고 나온 것입니다.

나~ 제사 지냈잖아요!

하나님이 제사 지내라고 해서 지냈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라고 했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나 복음 전했잖아요!

복음 전했다는 것을 자기 의로 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 복음 전했잖아요! 라고 꼴값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복음 전한 것이 문제에요.

복음을 전했다는 것 때문에 지옥에 가요.

왜인 줄 아세요.

복음 전한 것을 자랑으로 붙잡고 선생 노릇을 하고 교주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 복음 전했잖아!

뭐가 문제인데! 라고 하고 있어요.

자기는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옳다는 겁니다.

나 복음 전했으니 그 누구도 날 터치 하지 말라고 해요.

이런 등신이 있나요?

 

이런 사람은 복음 전한 것이 독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 전한 것으로 모든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면서 조직에서 교주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복음 전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어요.

그랬으면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는 마음이나 들지요.

 

나 예수 믿었잖아요!

이게 죄에요.

예수 믿는 것이 자랑으로 남으면 안 되어요.

그럼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지옥에 갑니다.

복음 전한 것은 잘못이 아니에요.

다만 복음 전한 것을 자기 의로 삼아 힘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을 했으니 잘 새겨들으세요.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통해서 말씀하셨잖아요.

바리새인은 아버지여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헌금하고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라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고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했어요.

누가 옳다고 인정을 받았습니까?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이 왜? 틀렸습니까?

말씀대로 살았다는 자기 의로 나왔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산 것은 잘못이 아니에요.

다만 말씀대로 산 것을 자기 신앙으로 들고 나온 것이 잘못인 것입니다.

 

만약에 바리새인이 말씀대로 산 것을 의지하지 않고 주여! 말씀대로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나왔으면 하나님이 버선발로 나와서 맞이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말씀대로 살았다는 것을 들고 나왔습니다.

말씀대로 산 것을 의로 가지고 있으니 세리와 창기와 다르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잘못인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에라이! 이 독사 새끼야! 지옥으로 가라고 했어요.

차라리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 저 세리가 낫다고 세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은 것이 잘한 것이 아니에요.

자신은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자임을 아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고 잘 새겨서 들으세요.

 

나 복음 전했잖아!

나 예수 믿잖아!

나 교회에 봉사 했잖아!

뭐가 잘못인데! 라고 하는 사람은 바리새인인 겁니다.

“나 했잖아” 가 잘못인 겁니다.

 

이걸 차라리 소경이었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그저 죄가 있느니라! 라는 말씀과 같아요.

차라리 복음 전하지 말지!

복음 전했다는 그것 때문에 독사처럼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아무나 물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복음 안 전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복음을 전해야지요.

그러나 복음 전한 것을 자기를 변호하는데 힘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성령의 은사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복음 전한 것을 힘으로 삼지 않아요.

복음 전하게 해 주심을 감사해요.

 

유대인들이 잘못은 간단해요.

너무도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낸 것이 문제였습니다.

차라리 제사를 안 지냈으면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가 되는데 그 놈에 제사를 지냈다는 행위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 목을 뻣뻣이 세우고 나온 겁니다.

 

마치 탕지 비유에서 맏아들처럼 아버지 명을 어김없이 지킨 것이 화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 명을 어김없이 지킨 것을 의로 가지고 있으니까 탕자를 용서해 주는 아버지가 하는 것이 못 마땅한 것입니다.

 

맏아들의 잘못은 아버지 명을 어김없이 지킨 것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근거로 삼은 것 즉 남을 정죄하는 법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 문제에요.

그러니 자기하고 다르게 흥청망청 재산을 말아 먹고 살다가 온 동생을 용서하는 아버지가 틀렸다고 따지는 것입니다.

 

아버지 명을 지킨 것은 잘한 것이에요.

다만 그걸 힘으로 붙잡고 있으면 악이고 죄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는 일한 것을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사랑은 없고 자기가 일을 한 업적을 들고 나온 겁니다.

자기 업적으로 따지는 것입니다.

그 업적이 아버지께 덤비는 힘이 되고 만 겁니다.

마치 나 복음 전했잖아! 가 되는 겁니다.

이게 죄에요.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에요.

불효란? 부모님에게 용돈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니고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불효에요.

부모님의 마음도 헤아리고 용돈도 드리세요.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는 것이 제사라고 한다면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긍휼이에요.

부모는 용돈보다 부모의 마음을 알기를 바래요.

용돈 몇 푼 드리고선 자식 도리 다 하였다고 하면 안 됩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용돈 몇 푼 드린 자식들처럼 제사 지낸 것을 자랑하고 있어요.

맏아들처럼 아버지 명을 지킨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상을 뒤집어엎으면서 율법적 신앙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이사야 선지자가 제발 성전 마당만 밟는 짓을 하지 말라고 탄식 하신 것과 같아요.

 

이사야 1장입니다.

 

사 1:10-14=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보세요.

하나님이 제발 제사 들고 나오지 말라고 하잖아요.

꼴도 보기 싫다고 합니다.

얼마나 역겨웠으면 에이! 이 더러운 소돔 고모라의 새끼들아! 라고 소리를 치겠습니까?

 

소돔 고모라가 어떤 곳입니까?

유황불로 저주 받은 곳이잖아요.

지금 하나님이 누구를 보고 소돔 고모라 백성이라고 합니까?제사를 들고 나오는 자들을 보고 말하고 있어요.

 

이건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는 이방인들을 소돔 고모라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자는 다 소돔 고모라 백성이라고 해요.

 

이사야의 저주를 신약에서 누가 누구에게 한 줄 아세요.

예수님이 하셨어요.

누구에게 했습니까?

유대인들에게 했어요.

그 율법을 잘 지켰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마귀새끼라고 했다니까요.

독사의 새끼들아 지옥으로 가라고 했어요.

 

왜? 이사야는 제사로 나아오는 자를 소돔 고모라 백성이라고 하고!

예수님은 율법 지킨 것을 들고 나아오는 자들을 독사 새끼라고 합니까?

이는 법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법 아래 있는 자들은 모두가 저주 아래 있어요.

제사를 지냈느냐 안 지냈느냐를 근거로 하는 것은 법이에요.

제사는 지켜도 법이고 안 지켜도 법이에요.

법에는 하나님이 바라는 의가 안 나와요.

 

법은 옳은 자를 위하여 있지 않고 죄인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의인에겐 법이 필요치 않아요.

천국엔 법이 없어요.

왜냐하면! 거긴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법 아래 있다는 것은 지키고 안 지키고 와는 상관없이 저주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죄인에게 주어졌어요.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죄를 들추어내기 위함이지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의롭게 된다고 여겼어요.

그러니 자신들이 율법을 지킨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고 있는 겁니다.

 

이건 율법의 본질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에요.

율법은 의를 만들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가두기 위해서 주셨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진노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로마서 3장을 봅시다.

 

롬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하고자 함이라고 하지요.

이건 율법으로 죄를 고발해서 죽이겠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실존을 고발하기 위해서 율법이 투입이 된 것입니다.

 

죄가 없으면 율법을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를 고발하려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범법함으로 인하여 더하여 준 것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9절을 봅시다.

 

갈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이 무엇이냐?

“범범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원래 율법이 필요가 없었는데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추가로 주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율법이 왜? 주어졌는가 하면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쉬운 말로 공부를 열심히 잘 하는 아이에게는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아요.

스스로 알아서 잘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공부하라는 말은 법이에요.

그럼 스스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에겐 공부하라는 명령 즉 법을 줄 필요가 없겠지요.

 

그럼 누구에게 공부하라는 명령 즉 법을 줍니까?

공부 안하는 놈에게 줍니다.

그러니 공부하라는 말은 넌 공부 안하는 놈이야! 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는 것입니다.

공부하라는 명령을 준 것은 넌 공부 안하는 죄인이야 그 말이란 말입니다.

공부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이미 너는 공부를 하든 안하든 넌 공부 안하는 놈이야 라는 것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은 죄와 한 셋트인 겁니다.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넌 죄인이란 뜻입니다.

너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 주려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 지킨 것을 들고 나오면 안 되어요.

그건 율법에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속에는 의가 없어요.

그러니까 율법을 지켰다고 하여도 의가 되지 않아요.

의는 다른데 있어요.

어디에 있는가 하면 “약속의 자손” 에게 있어요.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 안에 있어요.

그래서 율법은 약속의 자손이 오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자손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율법의 끝에 가면 누가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계세요.

율법은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길잡이인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합니다.

 

갈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몽학선생이란? 안내자란 뜻입니다.

율법을 졸졸 따라가면 예수님이 나와요.

율법이 예수님 안에 의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요.

 

그럼 율법을 지킨 것을 의라고 들고 나온 유대인들은 율법을 안 지킨 것이 되고 말지요.

율법으로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하여야 율법을 지킨 것이 된단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시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 지킨 것을 자랑만 하였지 예수를 배척하였어요.

그러니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고 율법을 어긴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을 들고 나오는 자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저주를 끌어 부은 것입니다.

이사야도 제사로 나아오는 자들을 소돔과 고모라 백성이라고 저주한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 지킴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는 자들은 모두가 뱀의 새끼들인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복음 전한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는 자들은 뱀의 새끼들인 겁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것을 자랑하는 것은 법 아래 있는 자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그러니 복음 전한 것을 신앙이라고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는 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니고 은혜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법 적으로 나오는 자가 아니고 사랑으로 나오는 자들이에요.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은 자신은 아버지의 명을 하나도 어기지 않았다는 자신의 행함이라는 법으로 나왔지만 탕자는 아버지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는 사랑으로 나왔어요.

그러니 진정한 아버지의 아들은 탕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합니까?

예수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들에게 저들은 아버지를 몰라서 그런다고 하지요.

아버지를 모르니 아비지께 속한 사람들을 미워하고 핍박 한다고 하잖아요.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을 핍박합니까?

자기들하고 다른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지킴을 의라고 말하는데 예수쟁이들은 아니라고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뿔따구가 나는 겁니다.

자기들의 신앙이 부정당하니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 이단이지! 라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지킴으로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는데 예수쟁이들이 율법지킴은 신앙이 아니고 예수 믿는 것이 신앙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이 놈들이 자꾸만 자기들이 틀렸다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 가만 둘 수가 없어요.

죽어야지요.

 

이 모두가 예수님은 저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그런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하나님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일들은 계속되고 있어요.

 

우리 안에도 유대인들의 기질이 있어요.

유대인들의 기질이란 다름 아닌 자기 행함을 의지하고자 하는 습성과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속성을 말합니다.

누가 내 신앙을 부정하면 화가 나지요.

난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데 누가 아니라고 하면 화가 나잖아요.

 

인간은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을 참지 못해요.

나는 항상 옳다고 여기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걸 자기 사랑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말이니 잘 이해하세요.

 

우린 내가 옳으면 안 되어요.

그럼 내 옳음으로 나온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게 죄라고 고발을 하십니다.

네가 옳다고 여기는 그것이 죄라고 한단 말입니다.

 

지금 무지 무지하게 중요한 말을 했어요.

중요하니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옳으면 안 되고 예수님이 옳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내가 자랑스러우면 안 되고 예수님이 자랑스러워야 해요.

 

하나님의 옳음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만 정답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예수 믿는 자기도 옳음으로 슬며시 끼워 넣고자 해요.

예수 믿는 자기도 의로운 자라고 여긴단 말입니다.

 

그럼 성령이 그럽니다.

야~ 이놈아!

네가 의로운 것이 아니고 예수 때문에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 때문에” 에요.

이걸 놓치면 안 되어요.

마귀는 자꾸만 이 “예수 때문에” 를 놓치게 만들어요.

 

신앙이 “예수 때문에” 가 되려면 나는 여전히 죄인으로 남아야 해요.

내가 죄인이어야 예수 때문에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성립이 되어요.

어떤 분들은 왜? 자꾸만 죄인! 죄인 그러느냐! 고 짜증을 냅니다.

예수를 믿으니 의인이 아니냐! 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니 의인이 아니고 예수님의 대속하심 때문에 의인으로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의인과 의인으로 여김을 받는 것은 천지 차이에요.

예수 믿으니 의인이잖아요! 라는 말 속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자기 긍정이 담겨져 있지만!

예수 안에서 의인으로 여김을 받는 것에는 나는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의로운 자로 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라는 자기 부정이 담겨져 있어요.

 

우리는 의인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예수님에게만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의로 가득하기를 바래요.

우리 안에 예수님의 의(義)로 가득하려면 우리는 계속하여서 죄인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해요.

 

우리가 죄인의 모습으로 드러나면 날수록 예수님의 의는 더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에 의로 살게 하려고 우리 죄를 낱낱이 고발하여 기어코 우리를 죄인의 자리로 끌고 가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하세요.

성령 충만 할수록 자기가 죄인임을 밝히 알게 되어요.

그러니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아는 자가 성령 충만 한 자입니다.

 

그래서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반드시 법을 동반하여서 일을 합니다.

법이 없으면 은혜가 은혜로 드러나지 않아요.

법과 은혜는 서로가 서로를 드러나게 해 줍니다.

우리 몸이 법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덮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망한 것은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 되어서 망했어요.

율법을 너무 잘 지키니까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의를 거부한 겁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하니 하나님이 주는 의를 담을 수가 없었어요.

유대인들은 자기 의를 남기고 하나님의 의를 갖다가 버렸어요.

 

로마서 10장을 봅시다.

 

롬 10:2-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보세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고 하지요.

쉬운 말로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준다고 해도 자신들이 율법을 지킨 자랑거리가 있으니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불쌍히 여기는 것은 저기 저 세리나 창기들에게나 주라고 했어요.

저 돼지같이 더러운 이방인들에게 주라고 했다니까요.

저기 저 개 같은 울산목양교회 정낙원이에게나 주라고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 의가 너무도 많아서 하나님이 준다고 해도 담을 수가 없어서 싫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이러한 신앙을 탕자 비유로 말씀하신 겁니다.

유대인들은 맏아들처럼 너무도 아버지 명에 충실했어요.

아버지에게 긍휼을 구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아버지 앞에서 모가지를 곧추세우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탕자를 용서해 주는 것이 못 마땅한 것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하나도 어김없이 지킨 것이 화근이었어요.

아버지 명을 하나도 어기지 않았다는 의가 있어서 아버지 앞에 대 든 겁니다.

아버지가 탕자를 용서해 주자!

맏아들은 아버지 이건 옳지 않습니다!

어떻게 저런 죄인을 용서해 준단 말입니까! 라고 아버지가 하는 일을 못 마땅하게 여겼어요.

 

유대인들이 그랬잖아요.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겼잖아요.

그러니 유대인이나 맏아들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맏아들이 아버지가 탕자를 용서해 주는 것이 못 마땅하게 여긴다는 것은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맏아들의 기준은 죄 지은 놈은 집에서 쫓아내고 죽여야 한다는 기준입니다.

이게 바로 선악의 법입니다.

 

선악의 법은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 명을 어기지 않은 자기는 의인이고 아버지 명을 어긴 탕자는 죄인인 것입니다.

결국 맏아들은 자기 행위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제사를 의지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보내지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란? 유대인들의 신앙에서 축출당한 자들을 말합니다.

율법 신앙에서 쫓겨난 자들을 말합니다.

율법 신앙에서 왜? 쫓겨났을까요?

이는 율법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사는 자들만 신앙 있는 유대인으로 간주했습니다.

율법을 어기는 자는 개 같이 취급을 하였어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모르는 자들은 저주 받은 자들이라고 미워하고 핍박 했어요.

당연히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도 당연히 저주 받은 자들로 여겨서 미워하고 핍박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수에게 선택을 입은 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런 일을 당하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합니다.

나도 그런 일을 당했으니 너희들이야 오죽 하겠느냐고 미리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게 제자들의 운명입니다.

 

그럼 제자들의 이러한 운명을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에 적용해 봅시다.

 

신앙생활을 우리들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실족합니다.

우린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잘 되고 평안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인간의 사고가 신에게 속하면 복을 받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미워하고 핍박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이름을 인하여” 입니다.

미움 받는 근거가 “예수님 때문에” 입니다.

예수가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그럽니다.

그럼 예수 안 믿으면 될 것이 아니냐?

예수를 믿으면 미움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런 예수를 왜? 믿느냐고 합니다.

믿지 마! 그럽니다.

 

그렇습니다.

까짓것~ 예수 믿지 말지 뭐!

안 믿으면 될 것 아니냐!

그래서 예수 안 믿기로 합니다.

저 역시도 미움 받아 가면서까지 예수를 믿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복음 전할 생각이 없어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막상 예수를 안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안 됩니다.

그냥 에이~ 예수 믿지 말자! 라고 했는데 이게 안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은 성도는 예수를 안 믿기가 안 됩니다.

예수를 안 믿는 것이 믿는 것 보다 더 어려워요.

그냥 확~ 안 믿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 안 되는가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걸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선택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해요.

선택 당한 자의 운명은 선택하신 분의 손에 붙잡혀 있어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했어요.

그럼 예수님이 제자들을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 안 믿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선택을 당하였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되었지요.

그럼 예수 안 믿기도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안 되어요.

예수를 믿고 안 믿고는 우리 의지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안 믿는 것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시면 우리 힘으로 안 믿을 수가 없어요.

이게 선택 속에 담겨진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때문에 미움 받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믿음은 마귀가 먼저 알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로 인하여 세상이 너희들을 미워하고 핍박을 한다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핍박이 오거든 당연한 것으로 여기라고 합니다.

16장 1절에 보면 너희들이 실족 할까봐서 미리 귀띔을 해 준다고 했어요.

 

이건 우리가 바라는 그림이 아닙니다.

우린 예수를 믿으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년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서 그려지는 그림은 이와는 정 반대로 악몽 같은 그림들이 그려집니다.

우리의 원함과는 정반대의 인생이 펼쳐집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 때문에 되는게 없어요.

세상에서 예수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에서 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과 예수님은 서로가 원수란 말입니다.

서로 하나 될 수가 없어서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 적입니다.

예수님과 세상은 왜? 하나 될 수가 없습니까?

이는 서로 하나 될 수가 없는 다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빛에 속하였고 세상은 어둠에 속하였습니다.

빛과 어둠은 본질이 다릅니다.

빛과 어둠은 극과 극이에요.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게 되어 있습니다.

왜? 밀어내는가 하면 수용하면 자신이 죽기 때문입니다.

 

빛은 빛끼리 살고 어둠은 어둠끼리 살아야 편합니다.

이를 두고 유유상종이라고 합니다.

빛과 어둠은 부딪치면 서로에게 상처를 줍니다.

죽음을 줍니다.

 

성경은 세상을 어둠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성도를 일컬어 빛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한다는 것은 빛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이유 없이 미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유 없이 밉다”

“그냥 싫다” 라는 말이 있지요.

이건 본능적으로 싫고 밉다는 말입니다.

 

왜?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생기고 싫고 미울까요?

이는 자기하고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하고 다르면 이질감을 느껴서 본능적으로 상대를 밀어냅니다.

 

여러분은 누가 싫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꼴 보기 싫고 밉습니까?

자기하고 다르면 꼴 보기 싫고 밉지요.

멀쩡히 있다가도 그 인간만 보면 화가 나잖아요.

기분이 나쁘잖아요.

 

어떤 여자 분이 그럽디다.

예쁜 것들은 재수 없어!

그러는 거예요.

왜? 그런가 보니 그 분이 이 시대 미적 기준으로 보면 못 생겼어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예쁜 사람들 때문에 피해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쁜 것들은 재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개그콘서트에서 박성광이가 왜?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술 처먹고 주정을 합니까?

자기는 일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등이 아니기 때문에 일등 때문에 손해를 입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등만 보면 화딱지가 나고 재수가 없는 겁니다.

 

만약에 자기가 일등이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아요.

일등을 기억해 주고 대접해 주는 좋은 세상이라고 할 겁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을 해요.

그러다 보니 자기 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 싫은 것입니다.

괜히 시기하고 질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단 말을 하겠어요.

사촌이 논을 사면 기뻐하여야 함에도 기쁘지 않은 것은 자신과 비교 대상으로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나 보다 잘 살면 배가 아픕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에요.

나 보다 잘 나가면 배가 아파요.

꼭 내 것을 빼앗기고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헐뜯고 시기하고 음해합니다.



이 모두가 상대적으로 오는 박탈감 때문입니다.

지금 누가 밉고 싫다고 한다면 그 사람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괜히 험담을 하고 허물을 들추어내고 깎아 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 피해의식에 사로잡힙니까?

이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죄성 때문입니다.

죄가 왕이 되라고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만족을 못 누리는 것입니다.

탐욕으로 인하여 항상 결핍을 느끼고 불행해 합니다.

 

인간이란? 누구를 만나면 본능적으로 힘 겨루기를 합니다.

이걸 다른 말로 기 싸움이라고 합니다.

기란? 힘입니다.

그러므로 기 싸움에서는 반드시 이긴 자와 진 자간에 서열이 정해집니다.

 

이런 기 싸움이 예수 믿기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납니다.

항상 내가 아는 복음만 옳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알아도 저 사람 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예수를 믿어도 저 사람 보다는 내가 더 잘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나는 너 보다 났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잘하면 격려하고 칭찬하기 보다는 은근히 시기심이 발동을 하고 질투가 생기고 부아가 납니다.

입을 삐쭉거리면서 꼴값 떤다고 비아냥거립니다.

꼭 어린아이들이 동생이 생기면 엇나가는 것과 같아요.

자기 사랑을 빼앗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동생을 미워하고 해코지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기 사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누구랑 있든지 항상 내가 그 중심이 되고 싶어 합니다.

중심이 되고 싶다는 말은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단 말입니다.

항상 자기만 옳은 자로 남고 싶어 합니다.

 

이 모두가 죄가 가져다 준 결과물입니다.

죄가 왕이 되라고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부모는 가정에서 자식들에게 가르치고!

목사는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가르칩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어디를 가나 으뜸이 되라는 말입니다.

 

모두가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영웅심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영웅심이 자신보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시기심이 발동을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보다 내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상대방을 폄훼하기 시작합니다.

흠을 잡고 넘어뜨리고자 합니다.

 

이게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면 아주 무서운 독선으로 흐릅니다.

이 독선이 목사들에게는 복음 안다는 것을 독점화 하고 싶어 해요.

자기만 알고자 해요.

그래서 사람들 위에서 우러름을 받고 싶어 합니다.

홀로 우러름을 받고자 하는 것은 교주에요.

 

이런 자들이 교주가 되고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군중들도 이런 자들을 교주로 섬기고자 해요.

교인들은 목사가 자신들과 뭔가 다르기를 바래요.

교주는 자신들과 뭔가 다르다고 여겨요.

스스로 신비롭게 여겨요.

 

그래서 교주가 손이라도 잡아 주면 무슨 성은을 입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감격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조직의 목사 꿈을 꾼 것을 신몽이라고 좋아하는 사람을 보았어요.

추종하는 목사들도 교주와 가까이 지내면서 교제라도 하면 그 집단에서 특권층이 되어요.

교인들은 그런 자들과 함께 있으면 뭔가 영험하다고 여기게 되고 보호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교회이면 교회원으로 조직이면 그 조직원이 된 것만으로도 흐뭇해해요.

교주는 이걸 즐겨요.

 

이러한 일들이 교회나 조직에서 일어나는 것은 모두가 목사들의 탐욕 때문입니다.

왕 노릇하고자 하는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주가 되면 혼자 다 아는 것처럼 교만을 떨어요.

복음을 독점화 하여서 으뜸이 되어서 가르치려고 해요.

영원한 선생으로 남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건 미혹이에요.

 

알다시피 복음은 은사에요.

은사는 인간이 독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이비들은 복음을 독점화 하여서 자기 소유화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교주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에서 교주가 생기는 연유도 다 이런 진리를 독점화 한 것처럼 속이는 독선 때문입니다.

왜? 교주가 되고자 합니까?

모든 영광을 홀로 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목사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다 같아요.

이러한 본성은 모두가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는 죄성 때문입니다.

 

죄가 모두를 교주화 시켜 버렸어요.

교주를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으뜸 되고자 하는 것이 교주에요.

나만 옳은 자로 남고자 하는 것이 교주에요.

남에게 군림하고 영광 받고 싶어 하는 것이 교주성입니다.

 

그러니 내가 소경이면 속습니다.

내 안에 빛이 없으면 속아 넘어갑니다.

그럼 집단에 매몰당하고 목사를 교주처럼 추종하게 되어 있어요.

제발 목사를 우상화 하지 마세요.

 

인간들 속에는 신을 형상화 하여 섬기고자 하는 우상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니 눈에 보이는 목사를 신의 대리자로 믿고자 한단 말입니다.

목사들은 이런 인간의 심리를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을 영험한 존재로 부각시키는 퍼포먼스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40일 금식을 한다거나!

365일 철야를 한다거나!

밤마다 산 기도를 다닌다거나!

아니면 공부 많이 한다거나!

좌우지간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모두가 이단적 요소가 담겨져 있어요.

 

마귀가 돌이 떡 되게 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고,

세상에서 영웅이 되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만 국한 된 시험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시험들입니다.

마귀는 항상 잘난 자로 서라고 합니다.

교주가 되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우리가 넘어질 것들이 많은 줄 몰라요.

 

저는 많은 목사들이 이 마귀의 꾐에 넘어진 것을 보았어요.

어느 순간 교주가 되어 있어요.

교인들이 목사의 말을 성경보다 더 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이런 목사들을 따르는 교인들은 자기 교회 목사 이외는 목사가 없다고 생각해요.

자기 교회 목사만 복음을 안다고 쇠뇌가 되어 있어요.

그러니 신앙생활들이 그 목사의 입맛에 따라서 획일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마치 북한 사람들이 김일성 주체사상에 조정당하여 인형놀이 하듯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기억하세요.

이단은 유명하다고 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난다는 것을 말이에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늘에서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샘에 떨어져 교인들에게 쑥물을 먹이듯이 유명하다고 하는 자들이 자기 사상을 복음으로 교묘히 위장해서 전하고 있어요.

 

그러니 자기 안에 진리의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다 속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에 목사라는 사람이 보이면 이미 속고 있다는 증거에요.

목사가 보이면 그 목사의 사상이라는 독에 중독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성경보다 목사의 말을 더 신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성령이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사사로운 말에도 넘어가지 않아요.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당하지 않아요.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는단 말입니다.

목사를 추종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집단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예수를 죽인 줄 아세요.

이는 모두가 학습화된 진리 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습화된 진리 관이란? 조상의 유전이란 말입니다.

 

조상의 유전이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신학이라는 틀이에요.

신학은 나쁜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신학이 틀이 되면 악이 되어요.

성령의 가르침을 제한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 시대는 신학이 성경을 매몰시켜 버렸어요.

신학이 성경에 해석당하여야 하는데 꺼꾸러 신학이 성경을 해석하는 틀이 되고 말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신학이 예수를 또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성령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성도는 신학에 가두지 않아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소경이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셨지요.

인도하는 자가 소경이면 따라가는 자도 소경인 겁니다.

그러니 같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눈을 뜬 사람은 절대로 소경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소경을 인도자로 세우지도 않아요.

이걸 다른 말로 그 안에 성령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성도는 절대로 목사를 교주화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목사의 말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설교도 완벽한 설교는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목사의 설교도 표준이 되지 않아요.

표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목사의 설교도 진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는 오직 성경뿐입니다.

성령만이 스승입니다.

 

성령은 목사를 거쳐서 교인들에게 가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직접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성령을 받은 성도는 독자적으로 성경이 깨달아져요.

예수가 믿어진단 말입니다.

 

성경이 믿어진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 안에 성령이 임한 성도는 그 어떤 설교를 듣더라도 과연 그러한가 성경을 상고하게 되어 있어요.

학문적으로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보며 깨달을 수 있는 영안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 안에 성령의 증거를 가진 성도는 장로들의 유전과 같은 교회의 전통이나 신학이나 교단의 교리와 같은 이데올로기에 매몰당하지 않아요.

 

오늘 본문은 이러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오자 세상에 죄가 드러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이 무진장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와서 말하지 않았으면 죄가 없었을 터인데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이젠 죄가 없다고 핑계 할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곧 예수님 때문에 죄가 드러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수치를 가리고자 합니다.

이건 선악과가 주는 본성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제일 먼저 한 일이 벌거벗음이 수치인 것을 알고 감추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수치라고 여겨지면 감추어야 합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죄관과 의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벌거벗음을 죄라고 여기고 벌거벗음을 감추는 것이 의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벌거벗음을 수치로 보지 않았는데 아담은 수치로 본 것입니다.

아담은 왜?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하였을까요?

자기 양심상 수치를 가지고서는 하나님 앞에 떳떳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수치를 가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자 함입니다.

교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의를 죄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의를 가지게 되면 하나님 앞에 떳떳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떳떳해지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사라집니다.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해요.

이게 죄가 노리는 노림수인 것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 앞에 떳떳하면 안 됩니다.

얻어먹어야 해요.

 

얻어먹으면서 주여 감사합니다!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에 감사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떳떳해지면 감사가 사라집니다.

감사가 사라진 신앙은 제사에요.

제사는 반드시 교만으로 치달아요.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하신다는 말은 떳떳하게 나오지 말고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마음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주 떳떳하게 나왔어요.

 

유대인들이 떳떳함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율법 지킴에서 나왔어요.

알다시피 율법에 의로는 천국에 못갑니다.

그러니 유대인과 같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는 그 떳떳함으로는 천국에 못가요.

왜냐하면! 유대인이 앞세우고 나온 떳떳함은 자기에게서 나온 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언제 떳떳해 집니까?

자기 잘남을 가질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들의 잘남을 깨트려 버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깨트립니까?

유대인들이 떳떳하다고 여기는 그 율법 신앙을 깨트려 버립니다.

 

지금 예수님이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에게 하지요.

유대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진리관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기준이 뭡니까?

율법이지요.

 

모든 것을 율법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자 율법으로 판단하던 그 기준 자체가 죄라고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건 경천동지 할 노릇입니다.

속된 말로 천지가 개벽을 할 일이에요.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유대인들의 기준 자체가 틀린 것으로 드러났어요.

그럼 유대교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 되고 말아요.

왜냐하면! 틀린 것을 기준으로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어찌 받아들이겠어요.

못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이면 자기들이 이단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꼴인데 어찌 받아들이겠어요.

 

그럼 결론은 하나입니다.

자기들의 기준을 진리로 고수하기 위해서는 다른 진리를 말하는 예수를 죽이는 수밖에 없어요.

이걸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합니다.

어둠이 빛을 죽인 결과가 되고 만 것입니다.

 

쉬운 예로 눈 두 개를 가지고 사는 동네에 외 눈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은 원래 외눈박이를 창조 하셨다고 합니다.

너희가 눈이 두 개가 된 것은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죄가 돌연변이를 몰고 와서 한 개이던 눈을 두 개로 만들어 버렸다고 합니다.

 

이걸 두 눈을 가진 사람들이 수용을 하겠습니까?

못합니다.

외눈박이가 오기 전 까지는 두 눈이 정상이었어요.

그런데 외눈박이가 출현하면서 자신들이 다름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다름으로 드러나면 아~ 우리가 틀렸구나! 라고 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도리어 외눈박이를 이단으로 몰아서 죽여 버렸어요.

그 놈을 두고서는 자신들의 정체성이 폭로가 되니 곁에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 세상이 그렇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런 종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세상의 실체가 이렇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외눈박이처럼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합니다.

진리란? 진짜란 말입니다.

물건으로 말하면 진품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진품입니다.

 

진품(원본)은 하늘에 있습니다.

땅에 있는 것은 다 복사본 입니다.

진품이 오면 복사본은 가짜로 드러나게 됩니다.

가짜는 진짜를 통해서만 가짜로 드러납니다.

진짜가 없으면 가짜로 드러나지 않아요.

 

진품이 없을 땐 복사본이 진품 노릇을 했습니다.

그것도 진품이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진품 노릇을 했어요.

그러나 진품이 왔으면 복사본은 가짜로 드러나야 합니다.

진품이 왔는데도 복사본이 진품 노릇을 하면 그 때부터 죄가 되어요.

나는 가짜입니다 라고 하지 않으면 미혹이고 사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저 세상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것을 본 따서 이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보이지 않는 세상이 진품이고 보이는 이 세상은 가품이 됩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과 비교 할 때 보이는 이 세상은 가짜입니다.

 

가짜는 진짜가 오면 폐기가 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보이는 이 세상은 멸망하기로 보존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장 11절을 보면 주만 영존하시고 만물은 다 멸망할 것들이라고 증거해 줍니다.

 

자~ 이 말을 나에게 적용합니다.

나는 예수님 앞에서 가짜로 들통이 나야합니다.

나는 가짜고 예수님 안에 있는 내가 진짜임을 보아야 합니다.

 

나는 아담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러니 본질적으로 죄인입니다.

가짜란 말입니다.

 

가짜란 말은 죄인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죄인이라고 하면 싫어요.

이상하게 반발을 해요.

죄인임에도 죄를 감추고 싶어 해요.

 

왜? 죄를 감추고 싶어 할까요?

이는 법 아래서는 수치가 약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선악의 법으로 다스려집니다.

이 세상에서는 남보다 더 잘난 것이 있어야 힘이 됩니다.

 

사람은 자기 장점으로 사람들로부터 높임 받고, 대접받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합니다.

반대로 잘못을 저지르면 그 잘못 때문에 무시당하고 업신여김 당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숨기고 싶어 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짓을 했어요.

자신들은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잘난 사람이었고!

세리와 창기들처럼 율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은 개 취급을 했어요.

깔보고 무시하고 천시했어요.

그걸 즐겼어요.

이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 율법을 지켰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도 자기들의 편을 들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세리와 창기들이나 이방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치 기준으로 보면 정말 착하게 살았거든요.

세리와 창기들은 꿈도 못 꿀 그런 착한 삶을 살았으니 당연히 자기들은 의인이고 죄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두가 죄인이라고 동일하게 취급을 해 버립니다.

자신들을 이방인과 같이 죄인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자체가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날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날 믿지 않으면 다 저주 받는다고 합니다.

율법을 지킨 자나 안 지킨 자나 예수를 안 믿으면 다 저주 받는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특별하게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들과 자신들을 동일하게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용납 할 수가 없어요.

예수가 산통을 다 깨트려 버리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자긍심을 깡그리 부셔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화가 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주장은 단 하나입니다.

이방인과 다르게 취급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율법 지킨 것을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율법을 지킨 사람과 지키지 않은 놈들과 같이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화가 나지요.

적개심이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너희에게 율법을 준 것은 너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 줄 메시야가 온다는 것을 알려주시려고 준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짐승의 제물을 받지 않고 한 몸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걸 알려 주려고 율법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으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는 장차 이 짐승처럼 죽임 당할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걸 알라고 율법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몰라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메시야를 바라보라고 율법에 속한 제사를 지내라고 했는데 너희들은 정작 제사 속에 담겨져 있는 메시야가 왔는데도 그를 몰라보고 제사에만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러 오셨습니다.

이를 속죄 제물이라고 합니다.

속죄 제물이란? 우리 죄를 대신 하여 죽을 제물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애초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방법을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심으로서 건져 내는 방식으로 언약을 하셨어요.

이걸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의 죽음으로서 자기백성이 구원 받는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은혜 언약이에요.

예수님의 오심도 이 은혜 언약을 위하여서입니다.

그럼 우리의 구원이 은혜가 되려면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할 죄인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은혜란 죄가 넘치는 곳에 더욱 넘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죄를 모르는 사람은 은혜를 몰라요.

고마움을 몰라요.

지금 유대인들이 고마움을 모르고 있어요.

율법을 지켰다는 것 때문에 은혜가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 은혜를 주어도 싫다고 차 버린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은혜와 연결되지 않았다는 말은 구원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본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자에게만 적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 자체가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행동에서 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자신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내 행위를 의지하지 않게 되어요.

 

그런데 마귀는 인간들의 마음을 미혹하여 이 사실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인간에게도 선이 있다고 미혹한 것입니다.

인간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의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유대인들이 여기에 걸려 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지킴을 의로 들고 나온 것입니다.

 

이 미혹을 누군가가 깨트려 주어야 해요.

넌 죄인이야! 라고 해 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시온의 거치는 반석으로 보낸 것입니다.

 

거치는 반석이란? 넘어뜨리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이 일을 하라고 선택을 한 것입니다.

틀렸다고 고발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지적해 주신다면 엄청난 은혜이고 사랑입니다.

죄인에겐 이것보다 더 큰 선물이 없어요.

죄가 고발당하여야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인인줄 알아야 긍휼을 구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인간들의 본질을 폭로하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잘못 된 신앙은 빨리 넘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오셔서 유대인들을 넘어지게 한 것이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을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말이에요.

유대인들이 동의하건 말건 하나님은 하나님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이 일을 하십니다.

목사들은 교인들을 넘어지게 하여야 합니다.

나 복음 안다는 것조차도 악이라고 고발해 주어야 해요.

 

신앙생활은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복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살기 위해서 복음을 안다는 인간의 의를 빼내게 하여야 합니다.

복음 아는 걸 자랑하지 말라고 하여야 해요.

그러다가 미움을 받고 욕을 먹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복음 아는 것을 힘으로 시용하고 있어요.

그 증거가 복음 모르는 분들을 업신여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건 복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복음 안다는 것을 힘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유대교 신앙과 같은 것이에요.

유대인들이 율법 지킨 것을 힘으로 사용한 것이나 복음 아는 것을 힘으로 사용하는 것이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은사로 알아진 복음을 가진 성도는 절대로 복음 아는 것을 힘으로 삼지 않아요.

남을 깔보지 않아요.

복음 모르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는단 말입니다. 

도리어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복음을 알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복음을 아십니까?

그럼 그 아는 복음으로 감사하며 사랑하며 사세요.

 

부디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도 커서 주님의 사랑이 용암처럼 분출이 되어서 섬기며 봉사하며 사랑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은혜가 넘치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의 악함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의는 기각당하고 예수님의 의만 오롯이 남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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