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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95강. 세상에서 미움 받을 죄 (요 15:18-21)

by coroa 2021. 12. 30.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95강. 세상에서 미움 받을 죄 (요 15:18-21)

-.정낙원 목사

 

요 15:18-21=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오늘은 예수님의 친구 된 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게 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친구란? 가족과 같은 개념입니다.

자기 속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비밀을 서로 공유하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이젠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속마음을 다 털어 놓을 수 있는 사이로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이건 파격입니다.



예수님이 알고 있는 것은 하늘에 비밀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친구들은 하늘에 비밀을 세상에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한다는 것은 그리 기쁜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에 유익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일은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은 세상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란? 광의적으로는 모든 인간을 말합니다.

영적으로는 율법신앙을 말합니다.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는 유대주의를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여호와의 말씀만 영영히 선다고 했습니다.

풀이란? 우리 인간을 말하고 꽃은 인간의 의를 뜻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고 여호와의 말씀만 영영히 선다는 것은 인간의 의는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의만 남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안에 있는 의인데 이는 곧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말합니다.

결국 인간의 의는 다 불 태우고 예수님의 의만 굳게 남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걸 히브리서 기자는 주만 영존하시고 만물은 다 멸망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물은 옷과 같이 낡고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의 의는 옷처럼 낡고 부패하여서 폐기처분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한마디로 예수님 한 분만 남기고 다 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한분만 구원하세요.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 안에서만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만물이 예수님에게서부터 나왔지요.

그리곤 예수 안으로 돌아갑니다.

 

구원이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린 예수 안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인 겁니다.

 

이걸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아담은 예수님을 표상합니다.

그럼 아담에게서 나온 여자는 우리를 말합니다.



하와가 아담 안에서 나왔지요.

그리고 다시 아담 안으로 들어가잖아요.

 결혼을 통해서 아담과 한 몸이 되지요.

이게 구원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일컬어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한다고 하고 성도를 어린 양의 신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제 자리로 돌아가 한 몸이 되는 거예요.

이걸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은 예수 안에서 존재하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만 남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 한 분만 구원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이 좀 어패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아들이고 우리는 양자입니다.

양자는 실제 아들이 아니고 아들로 인정을 받는 겁니다.

그 양자됨도 누구 안에서 인정받는가 하면 예수 안에서 인정을 받아요.

하나님은 성도들을 독자적으로 대하지 않고 예수 안에서 대하십니다.

 

이걸 예수님의 의로 의롭다 함으로 인정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수님 의가 양자되게 하는 근거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예수님 의만 받으시는 것이 됩니다.

 

이런 상태를 예수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 안이에요.

이걸 놓치지 마세요.

예수 안은 의이고 예수 밖은 무조건 불의에요.

 

신앙생활은 누구 의로 사느냐의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내가 누구 안에서 사느냐의 영역에 싸움입니다.



내 의냐!

예수님의 의냐!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이렇게 되면 죄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알게 되겠지요.

예수 안에서 살지 않고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겠지요.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로 나오지 않고 인간의 의로 나오겠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나오지 않고 자기 행함으로 나아오겠지요.

 

그럼 신앙의 싸움이 어떤 식으로 전개 될까요?

내가 잘났느냐!

하나님의 은혜냐! 로 나타나게 됩니다.

 

마귀는 인간을 독자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고 합니다.

독자적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은 인간의 의로 나아가게 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행함으로 나아가게 한단 말입니다.

우리 잘남으로 나가라고 해요.

 

아까 하나님의 의는 어디에만 있다고 했습니까?

예수 안에만 있다고 했지요.

예수 안은 의이고 예수 밖은 무조건 불의라고 했잖아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의만 받아요.

인간의 의는 안 받아요.

 

그럼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일을 하시겠습니까?

인간의 의를 깨트리는 식으로 일을 하시겠지요.

그리곤 오직 예수님의 의만 남기도록 일을 하시겠지요.

그래요.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 의만 남기는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인간의 의를 남기고자 하는 세력과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랑 전쟁을 했습니까?

마귀이지요.

 

마귀가 누구를 통해서 나타났습니까?

유대교 율법주의 신앙으로 나타났지요.

율법주의가 뭡니까?

인간의 행함을 의로 여기는 것이잖아요.

 

로마서 10장을 봅시다.

 

롬 9:30-3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0:1-3=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이 의를 얻고!

의에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그 법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방인은 의를 생각지도 않고 있었어요.

관심도 없었어요.

의가 뭔지도 몰라요.

구원에 대한 생각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의를 줬어요.

구원을 얻었어요.

그냥 공짜로 말이에요.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의에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그 의에 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행위에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의에 법이 무엇인가요?

율법입니다.

 

율법이란? 의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일을 합니다.

이걸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의인 예수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들고서도 예수를 만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율법을 지키면 의가 되는 줄 알고 예수 안에 있는 의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의에 법에 이르지 못한 꼴이 되고 만 겁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면 의가 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열심을 다해서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율법을 오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하나님의 의는 율법에 있지 않고 예수 안에 있었어요.

이걸 가르쳐 주려고 율법을 준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 속에 의가 있는 줄 착각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그게 아니라고 넘어뜨린 겁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왜? 우리를 넘어지게 하느냐고 하면서 예수를 죽인 겁니다.

 

다시 말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지도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예수를 믿음으로서만 의가 주어지는지를 알게 하려고 율법을 주었어요.

율법을 가지고 예수를 만나라고 주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가지고 예수를 죽였어요.

그러니 그 좋은 법으로 가지고서도 의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겁니다.

이걸 부딪치는 돌에 넘어졌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친구로 삼아서 세상에 보내는 것은 이 일을 하라고 보내는 겁니다.

너희들도 가서 저 유대교와 같은 율법주의 신앙을 넘어뜨리라는 겁니다.

인간의 그 어떤 행함에게서도 하나님의 의가 나오지 않는다고 알리라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너희들도 나처럼 미움을 받고 핍박을 당하고 종국엔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의만 남기고자 인간의 의를 부정하다가 죽임 당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 인간들이 자기 의가 부정당하면 적개심을 품을까요?

이는 자기가 부정당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을 못 참아요.

인간은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 이름을 남기고자 합니다.

이게 죄성이에요.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창조가 되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자 하나님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자기 이름을 남기기 시작한 겁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기 나라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박살을 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즉 인간의 이름을 삭제 시키고 그 자리에 하나님 이름을 남기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극심한 반발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발생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가서 나처럼 인간의 의를 박살내는 일을 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운명은 도살할 양들처럼 미움 받고 죽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겁니다.

이걸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낸다고 합니다.

인간의 의를 자랑하는 유대교 율법주의가 이리에요.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죽였어요.

 

죄 아래서 태어난 인간의 본성은 영원불멸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일평생 자기 흔적을 남기고자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구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이걸 죄라고 고발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세상이 가만 두겠어요.

미워하고 핍박하고 끝내는 죽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제자들을 통해서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하는가요?

세상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것이라고 하지요.

너희들이 나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핍박을 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친구로 부름을 입은 자들은 세상에서 미움 받는 운명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에게 선택을 입으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으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한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자기를 긍정하고 칭찬을 해 주어야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구들은 인간의 가치를 부정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누가 좋아 하겠어요.

 

우린 나의 이름을 남기고 싶고 나의 공로를 남기고 싶어 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 공로만 남기고 인간의 공로는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난 너희들 신앙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런 불쾌한 소식을 구약에서는 선지자들이 전했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식을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로 삼아서 전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들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입에다가 강제로 하나님 말씀을 넣어 주시고 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전부 하나님의 뜻을 전하다가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맥(脈)을 따라 오셨어요.

구약의 선지자들은 모두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인생을 미리 선취 적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성령에 감동으로 입혀서 행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 줄 터인데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내 운명 안으로 끌어 들여서 내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말하다가 목 베임을 당하였듯이 너희들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건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하는 운명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일컬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지킴이라는 인간의 의를 가지고 성전을 짓고 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아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인간의 의로 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로 짓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넌 뭐냐? 라고 하면서 죽여 버린 겁니다.

 

지금 제자들이 이러한 말을 하여야 하는 운명으로 초대가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늘에 뜻을 전한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게 좋은 소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나쁜 말을 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할 운명으로 초대를 당한 자가 바로 예수님의 친구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친구 된 자들이 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당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구약에 선지자들이라고 했지요.

그럼 먼저 구약에 하나님의 비밀을 전한 선지자들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들은 곧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2장을 봅시다.

 

겔 2:1-10=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2 말씀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4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5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찌니라 6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찌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찌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찌어다 7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찌어다 8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9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10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하나님이 에스겔을 선택합니다.

그리곤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냅니다.

무엇으로 보내는가 하면 인자로 보냅니다.

에스겔을 “인자”라고 하지요.

 

신약에 오면 예수님을 인자라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에스겔은 예수님을 대신하여서 세움을 입은 겁니다.

예수님 예표하고 있습니다.

 

인자라는 말이 다니엘서에도 나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하늘로부터 인자”가 옵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지요.

 

하나님이 지금 에스겔에게 너를 예수님을 대신하여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낸다고 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누구에게 선지자를 보냅니까?

자기 백성에게 보냅니다. 

이건 죽이려고 보내는 것이 아니고 살리고자 보내는 것입니다.



왜? 보냅니까?

그들의 죄를 지적해서 돌이키게 하고자 보냅니다.

왜? 죄를 지적합니까?

살리고자 함입니다.

 

이스라엘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 후손이잖아요.

아브라함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어요.

그럼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도 은혜로 구원이 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은혜가 어떤 것인줄 몰라요.

은혜가 은혜 되려면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저주 받아야 하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구원받은 것이 은혜로 남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 아브라함 후손에게 율법을 주어서 그들의 죄를 낱낱이 고발하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이 은혜를 알게 하려고 선지자들을 보내는 겁니다.

가서 저 놈들 죄를 낱낱이 고발하라고 합니다.

그럼 그 속에서 진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된 자들은 회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지자들이 그 무슨 말을 하여도 이스라엘에겐 복 된 소리인 겁니다.

 

예수님도 이 일을 하려고 오셨어요.

선지자들이 자기 백성들에게 보내심을 입은 것은 곧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오신 것과 같아요.

지금 예수님도 제자들을 자기 백성들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자들인가 하면 패역한 자들입니다.

선지자들을 죽이는 자들이에요.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팍한 자들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악한가 하면 그들의 모습이 가시와 찔레 같고 전갈 같다고 합니다.

가시나 찔레나 전갈이란 말은 마귀 백성과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의 모습이 바로 이랬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 애비는 마귀라고 했습니다.

 

패역이니,

배반이니,

뻔뻔함이니,

강퍅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가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한마디로 깡패 같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가서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을 전하라고 합니다.

너희들은 이제 죽었다!

망했다!

이제 끝났다! 라고 하랍니다.

가서 그들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부르고 죽은 자를 위하여 슬피 울듯이 곡을 하라고 합니다.

 

마치 상주처럼 베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아이고~ 아이고~ 울라고 합니다.

이 모습이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들이 하는 모습니다.

두 증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을 하는 모습이 바로 에스겔에게 시킨 모습입니다.

그러니 지금 에스겔은 두 증인으로 보내심을 입은 겁니다.

 

요한계시록 10장을 봅시다.

 

계 10:8-11=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두 증인들이 작은 책을 먹지요.

이건 마치 에스겔이 먹은 두루마리 책과 같습니다.

그 속에 적힌 내용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에요.

그러니 이 말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런데 이 책을 먹고 어디에 가서 예언하는가 하면 성전에 가서 해요.

성전이란? 이스라엘 백성이란 말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교회에 가서 다시 예언하라고 하지요.

 

여기서 "다시 예언"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다시 예언한다는 말은 예전에 한 것을 다시 전하라는 말입니다.



예전에 누가 했나요?



선지자들이 했어요.

예수님이 했어요.

제자들이 했어요.

 

선지자들이 누구에게 전하다가 어떻게 되었나요?

자기 백성들에게 전하다가 죽임 당하였지요.

그러니 두 증인들도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자기백성들에게 전하다가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증인들도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자기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해요.

 

그럼 에스겔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대신 행하고 있다고 했으니 예수님도 이 땅에 두 증인처럼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을 하러 오셨다는 말이 됩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저주를 퍼부으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고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을 하다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니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 일을 위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 남아서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친구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패역하고 배반하고 뻔뻔하고 강퍅한 깡패들이 그런 말을 전하는 자들을 가만 둘리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다 죽입니다.

하나님이 보내는 자들은 보내는 족족 다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을 포도원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주인이 포도원을 종들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그리곤 추수 때가 되어서 종들을 보내서 세경을 받아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세경은 고사하고 주인이 보낸 종들마다 다 죽였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습니다.

이 아들은 설마 죽이지 않겠지 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악한 농부들이 이 아들만 죽이면 포도원이 자기들 것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 아들까지 죽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군대를 동원하여 그 농부들을 다 죽였다고 합니다.

 

이 비유에서 먼저 보내어진 종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입니다.

그리고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마저 죽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 나라를 들어서 유대인들을 완전히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곤 나중에 긍휼로 구원을 베푸십니다.

이를 로마서 11장에 감람나무 비유로 말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는 이유는 그들의 악을 고발하고자 함입니다.

너희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 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자 합니다.

너희들의 실존이 이렇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리하여 너희들이 사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 때문임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로마서 11장을 봅시다.

 

롬 11:32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보세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었다고 하지요.

순종이 안 되도록 해 놓았다는 말입니다.

순종하고 싶어도 순종이 안 되어요.

이걸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바울이 지금 이 편지를 누구에게 보냅니까?

로마 교회에 보내지요.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들의 실존이 이렇다 라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이 은혜이고 기쁜 소식인 겁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수 없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순종 합시다! 가 아니라, 우린 순종이 안 됩니다!

그러니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를 알아야 합니다.

산다는 것에 감사가 나와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이 일을 하려고 하나님께서 배반하고 패역한 자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내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몰라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원수인지 모르고 있어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하나님의 백성 됨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주어진 것인줄 알지요.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의로 구원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받았음을 알게 하고자 합니다.

그러자면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들의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선지자들은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하시는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백성들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 알게 한다"는 대목입니다.

선지자가 있는 줄 알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 놈들은 내가 함께 있어도 나를 배반하는 놈들이라는 겁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시는데도 우리는 예수님을 잊고 사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지금 에스겔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에이~ 이 나쁜 놈들아!

그래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잊고 사느냐!

이 악독한 놈들아!

 

구약은 육적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말하였고 신약은 교회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 속에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신약의 교회들에게 제자들을 보냅니다.

 

제자들에게 가서 외치라고 합니다.

너희는 틀렸다고 외치랍니다.

그럼 그 놈들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를 죽일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고 핍박한다고 합니다.

 

세상이란? 넓게는 온 세상을 말하지만 작게는 교회를 말하고 우리 자신들을 말해요.

교회가 세상이고 우리가 세상이에요.

선지자들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모든 자들이 곧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죽었어요.

그러니 유대인들이 곧 세상인 겁니다.

 

지금은 유대인을 대신하여 교회가 있어요.

교회가 또 선지자들을 죽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죄를 고발하고자 선지자들을 보내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친구로 죽임 당한 사람들을 두 증인이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죄를 고발하는 자들입니다.

그럼 두 증인이 성전을 척량하기 위해서 나타났다는 것은 교인들의 신앙이 틀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두 증인에게 성전 안만 척량하고 성전 밖은 척량치 말라고 하지요.

 

성전 밖이란? 뜰을 말하는데 이는 율법 신앙을 말합니다.

율법 신앙은 인간의 의를 쌓는 신앙이에요.

인간의 행함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는 것을 말해요.



이건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전 밖은 척량치 말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스가랴에서에 나옵니다.



스가랴 4장을 봅시다.

 

슥 4:6-9=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하셨고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스가랴 4장은 일곱 등대의 환상을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일곱 등대는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촛대로 나타나지요.

일곱 촛대는 곧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러니 스가랴가 지금 보는 환상은 성전을 짓는 환상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짓는데 누가 짓는가 하면 스룹바벨이라는 사람이 짓습니다.

스룹바벨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상징합니다.

메시야가 오면 기존에 있던 성전은 허물어지고 평지가 됩니다.

 

이건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으로 지어진 육적 성전을 부정하는 것을 상징해요.

평지가 된 곳에 스룹바벨이 친히 머릿돌이 되어서 은총으로 짓습니다.

이 성전은 사람의 힘으로나 능으로 짓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만 지어집니다.

이는 성령이 오셔서 성도 안에 성전을 짓는 것을 말합니다.



힘으로 안 되고 능으로 안 된다는 말은 인간의 의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율법 신앙으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이 일을 누가 증거하는가 하면 두 감람나무가 증거합니다.

이 두 감람나무가 누군가 하면 기름 발리운 자들인데 하나님 앞에 모셔 섰다가 온 세상으로 보내심을 입을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두 감람나무가 두 증인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두 증인들에게 성전 뜰은 척량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전 뜰에 있는 자는 인간의 의로 나아오는 자들을 말해요.

척량치 말라는 것은 수에 칠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인간의 의로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의로 세워진 성전은 예수 앞에서 무너질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뜰은 율법 신앙을 말하는데 율법 신앙으로는 육적 성전만 지을 수 있어요.

육적 성전은 믿음과 상관없이 인간의 열심과 정성만 있으면 지어요.

자기 열심과 정성으로 짓는 것은 자기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 신앙은 자기 의를 쌓는 신앙인 것입니다.

자기 의는 우상이에요.

 

성전의 뜰은 육의 세계에요.

성소 안은 영의 세게에요.

그러므로 성전의 뜰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죽임 당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진정으로 죽임 당하였다고 한다면 뜰에 있지 않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성소 안에 들어갔으면 자기 의를 버리고 예수님에 의로 나와야 합니다.

자기 행함으로 나아오지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옵니다.

이게 성소 안 신앙입니다.

 

그런데 뜰에서 얼쩡거리는 자들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두 증인들에게 이런 자들은 성도가 아니므로 척량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짐승과 놀도록 내 버려두라고 합니다.

그러니 뜰 신앙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거듭나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들 열심과 충성으로 성전을 짓겠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은 여호와의 신으로만 지어요.

즉 성령이 와서 지어주어요.

성령이 언제 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후에 오시지요.

성령이 오시면 성도 안에 성전이 지어집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자신의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의로 나아오지 않고 예수님의 의로 나아와요.

이걸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찾는다고 하셨어요.

그럼 이런 예배가 언제 이루어지는가 하면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야 이루어집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난 후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했어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려 주려고 친구로 삼으신 겁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를 보는 안목이 달라집니다.

 

이게 무진장 중요한 말입니다.

지금부터 귀 종끗 세우고 귀담아 들으셔야 합니다.

이제부터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살펴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봅시다.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오순절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합니다.

성령은 아무에게나 오시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서 선택한 자들에게만 오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뭔가를 알려 주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이게 유대인들에겐 기절초풍할 정도로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이단이라고 죽였잖아요.

그러자 하나님이 죽은 그 예수를 부활케 하셔서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겁니다.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 라는 것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먼저 사도바울의 증거를 들어봅시다.

 

골로새서 1장입니다.

 

골 1:25-27=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뭔가 하니 비밀이라고 합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오면서 감추어져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의 성도” 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만세로부터 감추어져 있던 비밀이 드디어 베일이 벗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여기서 “나타났고” 라는 말은 계시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서 알려 주었다는 뜻입니다.

 

누구에게 알려 줍니까?

그의 성도들에게 알려 준다고 합니다.

왜? 알려 줍니까?

이방인 가운데서도 구원 얻기로 작정된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중요하니 다시 설명합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하나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즉 죄인 중에 괴수인 자가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고자 함이란 뜻입니다.

그 경륜이란?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는 곧 창세전 언약을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원수였던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한 것이란 말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뭔가요?

예수의 피로 자기 백성이 죄사함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만대로부터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오셔서 창세전 언약을 십자가에서 성취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는 창세전 언약이 비밀로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 비밀이 바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밀을 누구에게 알려 준다고 했습니까?

“그의 성도”라고 하지요.



누구의 성도라구요?

“그의 성도”에요.

 

그럼 “그” 가 누구인가요?

바로 예수님이에요.



그런데 그 예수가 누구인가 하면 너희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너희 안에 예수라 하지 않고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이걸 유념하세요.

예수가 비밀이 아니고!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이 비밀이에요.

 

“예수”를 비밀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비밀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그리스도” 라는 것을 육에 속한 자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비밀로 해 두었을까요?

그리고 육에 속한 자들이 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면 안 되는가요?

여기엔 뭔가 중요한 것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감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비밀로 해 놓았지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육은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 세상은 모두가 육이니 세상의 지혜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즉 세상 지혜로는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예수만 알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겁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자 제자들이 일제히 하나님께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하기 시작 했습니다.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성령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케 하려고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럼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와 그리스도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주”란? “왕” 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왕이란? 하나님의 대리자에요.

그러니 주 라는 말은 곧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아들이란? 곧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지금 “예수 당신은 하나님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보지 않았어요.

기껏해야 선지자나 선생 정도로만 보았어요.

선지자나 선생은 가르침을 받을 자이지 믿을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 내가 주님이니 나를 믿으라는 말은 기가 막히는 망발인 겁니다.

참람이고 불경인 것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했지요.

“그리스도”란? 헬라어인데 히브리어로는 메시야란 말입니다.

메시야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라는 뜻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

왕으로 위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선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에게 기름을 부어 세웠던 것입니다.

 

둘째로는,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물에 기름은 불에 태웠어요.

불에 태운다는 것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질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임을 위임받은 왕이고 제사장이고 선지자란 말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하면 구원자입니다.

그래서 “메시야”를 “구원자” 라고 합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 주실 구원자입니다.

 

그러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 속에는 예수 당신은 우리의 구세주이고, 왕이고, 하나님입니다! 라는 고백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이러면 왜? 유대인들이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극구 부인하려고 했는지 알 수가 있어집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과 동등한 한 인간으로서의 선생이나 선지자 정도로는 인정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주이고 그리스도라는 것은 용납 할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기들의 신앙을 부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란? 왕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에게 왕이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당신은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입니다! 라는 고백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유대교 신앙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수가 없어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게 되면 자신들은 하나님을 죽인 것이 되고 말아요.

그러니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 할 수가 없지요.

고백하면 자신들이 틀린 자라는 것을 시인하는 꼴이 되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다음에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도 마찬가지에요.

이것도 고백 할 수가 없어요.

그리스도란? 메시야란 말인데 이는 구원자라고 했어요.

구원자라는 것은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전제하여야 고백 할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부하였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구원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몰랐어요.

구원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같은 세리나 창기와 같은 죄인들이나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겐 예수가 구원자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지요.

 

그리고 중요한 한 것은 유대인들의 메시야 관이 달랐어요.

유대인들의 메시야 관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메시야가 아니고 세상 권세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정치적인 메시야에요.

유대인들의 구원은 죄로부터 구원이 아니고 세상 권력으로부터 해방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에서 건져주는 메시야는 필요가 없었어요.

 

유대인들이 바라는 메시야는 민족주의적 메시야에요.

과거 다윗 왕과 같이 이스라엘을 세계에게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들어줄 메시야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바라는 메시야는 정치적인 메시야인 겁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구원해줄 메시야가 필요한 겁니다.

민족의 해방을 가져다 줄 강력한 구원자가 필요했어요.

그러자면 온 민족을 하나로 결속시켜 로마에 항거 할 수 있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메시야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체 정치적인 일을 하시지 않았어요.

정치적인 일이란? 국가적으로는 유대나라를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서 부국강성케 해 주는 일이고, 개인적으로는 세상에서 잘 살게 해주는 그런 일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 때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고자 한 것도 모두가 자신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 달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 할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환호한 것도 다윗 왕과 같이 이스라엘을 강한 나라로 만들어 달라는 의미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들을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시려고 오지 않았어요.

물론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픈 마음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 주시려고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이라는 저주 아래서 끄집어내기 위해서 오셨어요.

물론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에요. 

예수님은 영에 문제를 해결하고자 오셨는데 유대인은 육에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한 겁니다.



육은 로마에서 해방되는 것이지만,

영은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로마는 육적 권세이지만, 죄와 사망은 영적 권세에요.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십자가에서 깨트렸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사망권세를 쥐고 있는 뱀에 머리를 깨트리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죄와 사망 권세를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분을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했지요.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메시야는 자기 목숨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에요.

 

대속 제물이란?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속량하는 제물이란 말입니다.

남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단 말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대신하는 제물인가 하면 자기 백성들을 위한 제물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대속 제물로 드렸어요.

 

이게 그리스도가 하는 역할이에요.

그러니 그리스도란 말은 예수님이 하는 직임적인 말입니다.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2장을 봅시다.

 

히 2:14-16=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자녀가 지금 사망의 세력에게 잡혀 있다고 하지요.

그래서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하고 있다고 합니다.

뭔가 이상하지요.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가 사망의 세력인 마귀에게 잡혀 있대요.

 

자 보세요.

하나님은 영생하는 분입니다.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자녀가 사망에 가두어져 있다고 합니다.

죄 아래 있습니다.

 

이건 마치 자식이 강도에게 인질로 붙잡혀 있는 것과 같아요.

여러분의 자녀가 인질로 붙잡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밥맛이 있겠어요?

잠이 오겠어요?

마음에 쉼이 있겠어요?

사는게 사는게 아닐 것이 아닙니까?

온통 마음은 자식에게 가 있을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도 그래요.

안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 자기 백성들이 죄와 사망에 가두어져 있어 종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서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라고 하신 겁니다.

 

어떻게 건져내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죄값을 치루어 주심으로서 건져내는 방식으로 하십니다.

제자들도 성령이 임하고 나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스스로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은 이런 사실을 몰라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지금 로마에게 종노릇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죄로부터 종노릇 하고 있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만 뜨면 로마로부터 끄집어 내 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주면 뭣합니까?

죄 때문에 죽는데!

로마의 식민지로 있어도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죽고,

로마로부터 해방을 받아도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죽어요.

그러니 로마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급선무인 것입니다.

 

하지만 자칭 하나님 자녀라고 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몰라요.

자기들은 의롭고 거룩한 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방인이나 창기들이 죄인이지 자기들은 죄와 상관이 없는 자라고 생각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자신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율법이 없는 자는 저주 받은 자라고 했어요.

 

요 7: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자신들은 당연히 율법대로 살고 있으니 저주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죄 문제를 이야기하면 그건 이방인에게나 필요한 것이라고 여긴 겁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으면 당연히 천국에 간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확신은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 때문이에요.

그런데 히브리서가 증거하는 것은 예수님은 사망의 세력에 종노릇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놓아주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잘 보세요.

예수님이 지금 아브라함 후손을 놓아주려고 하지요.

어디에서 놓아 준다고 합니까?

죄와 사망이지요.

 

그렇다면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은 누구입니까?

자기가 죄와 사망에 가두어져 있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반면에 자기가 죄와 사망에서 빠져 나와야 된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아브라함 후손이 아닌 겁니다.

 

이렇게 되면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한다면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해 줄 메시야를 기다려야 해요.

그럼 지금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은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은 죄로부터 건짐 받을 성도들인 겁니다.

이를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이해되시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으로 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찾아서 구원을 하시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혈통적인 아브라함 후손과 영적인 아브라함 후손이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표면적 이스라엘과, 이면적 이스라엘로 갈라 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로 구분이 된다는 것을 몰랐어요.

 

혈통적이니 육적이니 표면적이라는 말은 전부 육이란 말입니다.

육적 이스라엘이란 마귀 자식이에요.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마귀 자녀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와서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니 펄쩍 뛴 겁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육적 메시야를 기다리는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메시야를 기다리는 영적 이스라엘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육적 신자와 영적 신자가 있어요.

육적 신자는 육적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나아오고,

영적 신자는 영적인 문제를 해결 받고자 나옵니다.

예수를 찾는 것은 동일한데 그 내용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유대인들의 육적 메시야 사상은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의 생각과 동일해요.

교회 다니면 자연히 천국에 간다고 믿고 있어요.

그러니 죄와 사망의 문제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겁니다.

유대인들과 똑 같은 사고방식으로 예수를 믿고 있어요.

 

유대인들은 예수를 보면서도 그 “예수”가 죄에서 건져줄 “그리스도” 라는 것을 몰랐어요.

이는 그들에게 “예수”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줄 “그리스도” 라는 것은 감추어져 있는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함은 이제 성령으로 오시면 너희들에게 내가 바로 주이시고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그럼 제자들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겠지요.

이게 예수님의 친구로서 행하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이를 받을까요?

거부할까요.

당연히 거부하지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듯이 제자들도 죽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죽었고!

예수님도 죽였고!

신약의 두 증인들도 죽었어요.

이게 예수님의 친구 된 자들에 운명인 겁니다.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잖아요.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다면 핍박을 하지 않았을 터인데 하필이면 세상에서 예수님의 것으로 선택을 당하여서 미움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다 함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친구로 사는 삶이란? 고난과 영광의 삶이 교차하는 삶입니다.

영적으로는 영광이지만 육적으로는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는 기복 신앙은 거짓인 것입니다.

고난을 면한다거나 세상에서 인생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물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는 것도 거짓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적용해서 살펴보기로 합시다.

 

오늘 본문은 육적으로 보면 우리를 슬프게 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을 깡그리 무너지게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생각과 반하는 말씀입니다.

 

우린 예수를 믿고 세상에서 잘 되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 때문에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핍박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예수님 때문에 말이에요.

우린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게 잘 살고 싶은데!

우리의 바램과는 정 반대로 미움을 받고 핍박을 당한다고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음미하여 보면 예수님은 세상과 원수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 세상은 예수님을 싫어할까요?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합니다.

 

인간은 사회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홀로 사는 자가 아니라 집단으로 모여서 사는 자들입니다.

사회성이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려면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나만 이롭고 남에게 해가 되면 그 사람은 그 사회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사회성이란? 동질성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동일한 생각을 갖고!

동일한 마음으로!

동일한 가치관을 쫓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예” 라고 하면 “예” 를 하여야 하고!

모두가 “아니요” 라고 하면 “아니요” 라고 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반하면 그 집단 속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미움을 받고 쫓겨나게 됩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것으로 택함을 입었어요.

세상과 다른 생각을 가진 자로 택함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과 화합을 하셨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세상을 악하다고 하다가 죽임을 당했어요.

그것도 아주 비참하게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도를 선택합니다.

한 무리를 둘로 구분시키고 있는 겁니다.

성도는 선택을 당함으로서 세상과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이걸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냄을 입었다고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당하였다는 것은 곧 세상으로부터 죽임 당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입니다.

 

세상에서 미움 받아야 하고 핍박을 당하여야 하니까 슬픈 이야기인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왕따를 당하여야 하는데 어찌 기쁜 소식입니까?

슬픈 소식이지요.

그래서 복음은 육적으로는 슬픈 소식인 겁니다.

 

우린 세상과 하나로 살고 싶어 합니다.

세상에서 누리고 싶은 것은 다 누리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야! 이리 나와!

그리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모두가 하나였습니다.

친구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 세상은 두 쪽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인간은 다 한 인간인 줄 알았는데 두 인간이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이 두 부류로 갈라놓으신 겁니다.

세상에 속한 자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구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제자들은 분명히 세상에 속하여서 살고 있어요.

어디 하늘나라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깊은 산 속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남들과 똑같이 사회생활을 하고 삽니다.

 

남처럼 직장에도 다니고!

남처럼 돈도 벌고!

남처럼 결혼해서 자식도 낳고 살고!

남처럼 취미생활도 하고!

남들처럼 다 하고 삽니다.

 

남과 다른 것이라고는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다른 것은 다 문제가 되지 않는데 예수를 믿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예수를 믿는 것이 문제입니까?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토록 미움을 받고 핍박을 당하여야 할 일입니까?

 

우린 예수 믿고 미움 받기 싫어요.

핍박당하기 싫어요.

도리어 이러한 것들을 면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찾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리어 우리의 생각과 정면으로 반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고 합니다.

문제는 예수님 때문이라고 합니다.

 

왜? 예수님의 친구가 되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까요?

여러분은 누구를 미워합니까?

자기와 다르면 미워하지요.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지거나 자기와 뜻을 달리하면 미워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자기하고 다른 말을 하면 이단이라고 하여 원수시하고 쫓아냅니다.

 

인간은 진리냐 아니냐 에는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내편이냐 아니냐에 만 관심을 가집니다.

내편이면 친구이고 동지이지만 내편이 아니면 남이고 대적자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다는 것은 예수님은 세상 편이 아니란 뜻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원수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원수는 진멸 대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 같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세상이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나의 것들도 미워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세상 속에서 미운 오리 새끼로 서 있는 것이 됩니다.

미움의 표적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 속에 미운 오리 새끼로 남겨 두셨을까요?

이는 세상의 본질을 폭로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악을 들추어내고자 함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마귀를 모릅니다.

자신들이 마귀의 하수인이라는 것도 모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름하여 죄입니다.

이 죄가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미워합니다.

 

예전에 어느 분과 상담을 했습니다.

 

자신은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닌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은 자신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는 것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차라리 절에 다니라고 한답니다.

 

남편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그냥 싫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남편이 자기가 예수 믿고 교회를 다니면 좋아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반대라서 적잖이 당황스럽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가정에 평화를 위해서라면 교회를 다니지 말고 절에 가야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묻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본인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절간에 가는 것이 좋습니까?

교회에 오는 것이 좋습니까? 

그러니 그 분이 교회에 오면 포근한데 절간에 가면 웬지 싫다고 합니다.

이상하게 교회가 좋다고 해요.

예수 믿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본인의 마음이 가는 것으로 결정을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억지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매님은 예수를 믿어야 할 팔자인가 봅니다! 라고 했어요.

 

왜? 남편은 본능적으로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것이 싫다고 하고,

아내 분은 절간이 싫고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것이 좋다고 할까요?

이건 각자의 신앙적 본성 때문입니다.

흔한 말로 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신앙적 본성은 적대적이므로 하나 될 수가 없습니다.

이건 인력으로 해결 할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해 주셔야지만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기다릴 수 밖에 없어요.

기도를 들어주면 다행이고 안들어주어도 우리 쪽에서는 어찌 할 수가 없어요.

에서와 야곱처럼 하나님의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절간과 교회는 근본이 다릅니다.

절간은 인간이 신이 되라고 가르치는 곳이고,

교회는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곳입니다.

절간은 인간을 긍정하지만 교회는 인간을 부정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근본이 다른 교회와 절간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만물을 만드시고 만물을 주관하고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이나 땅에 정사와 권세를 모두가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도 하나님이 만드셨고 절간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 절간이 세워진 것입니다.

 

욥기에 보면 하나님이 마귀를 사용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귀도 하나님이 부리는 종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속하는 일에 반드시 필요해요.

자기 백성들을 시험하는 일이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마귀를 욥을 시험하는데 사용합니다.

마귀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움직여요.

절간에 스님들이나 무당도 하나님이 사용하는 도구인 겁니다.

 

하나님은 왜? 서로가 배척하여야 하는 전혀 다른 이절적 성향의 신앙을 두셨을까요?

이 모두는 예수님이 만유의 주가 되는 일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럽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합니다.

심판이란? 갈라내는 것입니다.

 

만유의 주란? 심판하는 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두 부류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처럼 말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예수님이 만유의 주가 되는 일이 도구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자신들의 조건으로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국과 지옥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곤 그 나라 백성도 창조했습니다.

야곱은 천국 백성으로 창조가 되었고 에서는 지옥 백성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서로가 다른 성향의 신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군데 섞여 있습니다.

 

이건 마치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의 바로 아래서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함은 천국가기로 작정이 된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애굽의 바로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비록 바로 아래서 태어났지만 그 속에는 아브라함의 언약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고난이 닥치자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로가 미워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자가 있고 미움 받는 자가 있습니다.

야곱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기로 태어난 사람이 있고,

에서처럼 미움 받기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둘은 각자의 본능 속에 자기 신을 찾는 성향이 다릅니다.

 

이걸 교회와 절간으로 비유합니다.

편의상 교회에 다니는 것을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절간에 다니는 것을 예수 안 믿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교회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에서는 절간에 다니는 것을 좋아합니다.

여기서 이분법으로 교회를 하나님 집이라고 한다면 교회 밖은 모두가 절간입니다.

단순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고 절간은 미워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에게 속한 자는 교회를 좋아 할 것이고 에서에게 속한 자는 절간을 좋아 할 것입니다.

마치 상담을 하신 분의 남편과 아내와 같습니다.

아내는 야곱에 계열에 속하였고 남편은 에서의 계열에 속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는 자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과 이 세상 사람으로 비유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서로의 근본이 다릅니다.

 

하늘과 땅은 천국과 지옥처럼 이질적으로 근본이 다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서 근본이 다른 두 부류의 사람이 존재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과 같이 하늘에 속한 자들을 찾아냅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은 예수가 친근합니다.

그래서 따릅니다.

 

하지만 땅에 속한 자들은 예수가 밉습니다.

이유 없이 밉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는 예수쟁이들을 싫어합니다.

왜? 싫으냐고 물으면 그냥 싫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 사람들 속에서 선택을 하여 친구로 삼습니다.

그러자 세상이 미워합니다.

너 왜? 예수 믿는데 라고 핍박합니다. 

제자들은 단 한 가지 세상에서부터 예수의 것으로 선택을 입었다는 것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럽니다.

난 예수쟁이들이 싫어!

재수 없어!

너 왜? 예수 믿는데! 라고 핍박합니다.

 

세상에서 예수 믿는 것이 죄입니다.

맞습니다.

성도의 잘못은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이 죄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죄입니다.

세상이 미워하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세상에서 미움 받고 핍박당하고 죽어야 할 죄입니다.

 

성도는 예수로부터 택함을 받는 순간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의 영을 받는 순간 예수에게 복속된 사람으로 소속이 바뀝니다.

이건 우리보다 세상 신인 마귀가 먼저 알아봅니다.

그래서 마귀가 자기 졸개들에게 예수 믿는 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죽이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세상 임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왕으로 보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은 예수를 왕으로 모십니다.

예수에게 속한 자들이 세상에다가 마귀가 임금이 아니고 예수님이 임금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마귀는 자기 수하들에게 예수를 왕으로 섬기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게 합니다.

이게 영적 전쟁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세상 임금인 마귀가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게 성도들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야곱처럼 천국백성으로 난 자들도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마귀를 왕으로 섬기고 살았습니다.

그 아래서 종노릇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마귀로부터 찾아옵니다.

애들아! 너희들의 임금은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내가 곧 너희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들이 야~ 우리 왕은 예수님이네! 라고 마귀로부터 떠납니다.

 

이게 바로 출애굽입니다.

그러자 마귀가 바로처럼 게 거품을 물고 죽이겠다고 쫓아옵니다.

마귀가 자기 졸개들에게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라고 합니다.

예수에게 속한 자들은 다 죽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 예수쟁이들을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마귀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마귀가 먼저 알아봅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지고 마귀의 세력들을 들추어내십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마귀의 세력들을 들추어내는 미끼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귀를 들추어내는 미끼로 오셨듯이 성도들도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들추어내는 미끼로 사용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님을 마귀라는 이리 가운데로 보내서 죽임 당하게 하셨듯이!

예수님도 자기 백성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예수님이 당하셨던 그대로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체험한 그 체험을 오늘날도 선택을 입은 성도들에게 체험케 하십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동일한 운명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고난이 예수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성도들에게 그대로 재현이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미움을 받게 함으로서 너희는 예수님의 패밀리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미움 받는 것이야 말로 더 확실한 증거가 없습니다.

예수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이야 말로 예수의 패밀리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수를 싫어하는 사람들 속에는 마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싫어하는 사람을 일컬어 불신자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도 불신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세상 임금 정도로 생각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자기 유익을 위해서 믿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는 자기 꿈을 이룰 이용대상입니다.

이런 자들이 알고 있는 예수는 전지전능하신 메시야입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어줄 메시야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저들의 신은 배라고 했습니다.

먹고 사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습니다.

 

누가 십자가의 원수냐?

예수 앞에서 세상 것을 달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육신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좇아가는 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이걸 악이라고 고발을 합니다.

제자들은 두 증인들처럼 선지자로서 악을 고발해 주어야 합니다.

선지자란? 죄를 고발하는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을 봅시다.

 

계 11: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두 증인들이 땅에 속한 자들을 괴롭게 하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땅이란? 육을 말합니다.

땅은 뱀의 후손들이 살아갈 근거지 입니다.

하나님은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저주 하셨습니다.

땅에 기운으로 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증인들이 땅에 것을 부정하고 악하다고 한단 말입니다.

뱀에 후손들에겐 땅이 전부인데 땅에 속한 것을 죄라고 하면 가만있지를 못합니다.

이건 자기를 부정당하는 것이므로 반발을 합니다.

땅에 것을 부정하는 하늘에 속한 자들을 죽여 없애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에 말을 하는 자들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친구로 선택을 입은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하늘에 소리를 합니다.

이 세상은 허상이고 하늘이 실상이라고 합니다.

땅은 망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땅을 위해 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라고 합니다.

 

이게 믿어지면 되는데 안 믿어진단 말입니다.

그러니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 라고 하면서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사랑은 미움 받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에게 선택 당함은 핍박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이걸 복이라고 했습니다.

 

마 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우린 과연 이걸 복으로 여기고 있나요?

우리는 도리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없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이용하여 세상에서 입신양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이런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바로 나입니다.

내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우린 말씀 앞에서 절망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미워야 합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이 보여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내가 바로 예수를 죽인 원수라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스가랴서 12장을 봅시다.

 

슥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하나님께서 때가 이르면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은총과 간구의 영” 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주신다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본다고 합니다.

그리곤 애통하고 통곡을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본다고 하는 “그” 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를 찌른 자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임하면 예수를 죽인 자들이 예수를 바라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령이 부어지면 내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이 깨달아진다는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 것은 자신이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고자 함입니다.

결국 성령을 받은 자는 내가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의 특징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압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 자기 절망이 일어나게 됩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통곡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스가랴의 예언대로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줍니다.

베드로가 외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죽인 그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이는 여러분들이 틀렸고 예수가 맞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잘못을 자복하고 회개 하십시오.

 

그러자 여기저기서 “어찌 할꼬” 하는 통곡들이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은총과 간구의 영을 그들 속에 부어준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알게 되고 “어찌 할꼬” 애통이 일어나고 통곡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자신이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은총과 간구의 영이 부어지면 아! 나는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죄인이구나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런 죄인이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가치를 예수님의 의에 두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여기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모든 삶에 바탕에 난 예수를 죽인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깔고 시작하여야 합니다.

이런 죄인이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이 깨달아질 때 범사가 감사가 됩니다.

 

가난해도 난 예수를 죽인 하나님의 원수야!

병 들어도 난 예수를 죽인 하나님의 원수야!

성공해도 실패해도 난 예수를 죽인 하나님의 원수야!

복음 전하는 목사 노릇을 해도 난 예수를 죽인 하나님의 원수야!

헌금하고 봉사하고 충성을 하여도 난 예수를 죽인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깔고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의를 버리고 예수님의 의로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하심 안에서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케 됩니다.

성도의 삶 모든 바탕에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살고 있다는 은혜가 묻어 나와야 합니다.

 

감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면 우리로 하여금 죄인의 자리에 앉게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여 나는 “개” 라는 고백이 나오게 합니다.

자신이 개 라는 것을 알 때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져서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부스러기라도 얻어먹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부디 은총과 간구의 영이 부어져서 그 찌른바 그를 보시는 영안이 열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환경을 탓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바로 예수를 죽인 원수임을 알았습니다. 원수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내가 사는 모든 바탕에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용서하심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서 범사가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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