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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94강. 예수님의 친구 (요 15:12-17)

by coroa 2021. 12. 29.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94강. 예수님의 친구 (요 15:12-17)

-.정낙원 목사

 

요 15:12-17.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함 이로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합니다.

 

옛말에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는 유유상종(類類相從)으로 모이는 것이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왜? 친구라고 할까요?

 

알다시피 예수님은 의인이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유유상종일 수가 없어요.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친구로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드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으로 오셔서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

 

 

 

친구로서 말을 할 때는 왜? 친구라고 하였는지 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어떨 때 친구라고 하셨는지 살펴볼까 합니다.

 

하나님이 친구라고 한 사람은 어떻게 살았는지를 통해서 예수님이 친구라고 한 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정의한 친구관이 있습니다.

 

 

 

친구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럼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려 주신 친구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친구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의 친구 됨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라는 친구의 죽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우리를 낳았습니다.

 

이걸 과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맺은 과실은 우리들입니다.

 

 

 

과실은 나무가 맺어낸 결과물입니다.

 

예수님이 맺은 결과물이 바로 자신의 죽음으로 성도를 살려낸 것입니다.

 

이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초대합니다.

 

이젠 역(逆)으로 우리더러 예수님처럼 친구를 위하여 죽으라고 합니다.

 

이걸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서로 사랑이라는 과실을 맺게 하려고 우리를 친구로 택하였다고 합니다.

 

 

 

너희가 내 친구라고 한다면 내가 명한대로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더러 과실을 맺으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과실을 맺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예수님이 맺으셨던 그 사랑이라는 과실을 우리를 통해서 맺으시게 하실 것입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14, 15, 16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면 다른 보혜사인 성령이 오셔서 하는 일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고 하잖아요.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과 함께 우리 안에 오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로 오셔서 우리 몸을 거처로 삼으시고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계실 때는 우리 안에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따로 우리 따로 였습니다.

 

육체로 계실 때는 곁에서 도움을 주셨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오시면 우리 안에 침노해 들어오십니다.

이걸 숨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숨처럼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우리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우리를 책임지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성령으로 오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로 오시면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럼 우리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어떤 일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일어나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했습니다.

 

택하여서 친구로 삼은 목적은 과실을 맺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과실이 뭐냐 하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맺는 과실이란 사랑이라는 과실인데 그 과실이란 바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일을 먼저 예수님이 본(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의 친구가 되어서 십자가에 죽어 주심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이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야! 정낙원이!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다!

 

그래서 넌 죄사함 받고 살아난 것이다!

 

너!~ 이 사랑을 아느냐! 라고 묻습니다.

 

 

이 사랑을 안다고 한다면 이제부터 너는 너를 위해 살지 말고 나를 위해 살으라고 합니다. 

 

나를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말해 줄 테니 그 말을 세상에 알려주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세상이 너희 말을 듣고 가만있지 않고 극심하게 반발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처럼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급기야는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우리가 죽은 그 자리에서 다른 친구를 생산해 내신다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의 친구 된 자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예수처럼 세상에게 죽임 당하게 하려고 친구로 선택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주 고약한 친구로서의 선택 당함 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을 봅시다.

 

 

 

계 6:9-12=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사도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천국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여 살다가 죽임 당함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에게 빨리 원수를 갚아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잠시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아직까지 이 세상에 너희들처럼 죽임 당하여야 할 동무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숫자가 차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 동무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들을 동무로 선택 한 것입니다.

 

너희들 내 동무로서 좀 죽어 달라고 합니다.

 

나도 너희를 위하여 죽었으니 너희도 나를 위해서 죽으란 말입니다.

 

그래야 나와 같은 한 몸이 아니겠느냐 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아니겠느냐 라고 합니다.

 

 

 

어떻게 친구가 되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으로 스데반을 친구로 삼습니다.

 

그러자 스데반은 예수님 때문에 바울에게 돌에 맞아 죽습니다.

 

예수님은 이번엔 스데반을 죽인 사울이라는 바울을 선택합니다.

 

그리곤 바울을 예수님처럼 스데반이 죽임 당한 그 현장으로 보냅니다.

 

바울은 예수 때문에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다가 결국 예수님처럼 죽임 당합니다.

 

바울이 죽은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예수의 친구들이 생겨납니다.

 

 

 

이건 마치 씨가 죽어서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는 또 다시 씨를 내고,

 

그 씨는 또 다시 죽어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듯이, 예수가 죽은 그 자리에 또 다른 예수가 나옵니다.

 

언제까지냐 하면 하나님이 정한 수(數)가 차기까지 입니다.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친구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곤 자기가 부인되는 자리로 밀려가게 됩니다.

 

자기가 부인 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과실들이 맺힙니다.

 

 

 

결국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서 창세전에 영생 얻기로 작정이 된 예수님의 백성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죽으라고 합니다.

 

이게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신앙생활 속에는 예수님 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짐 받는 것도 있지만,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친구인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은 형제들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라고 성령의 각양에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서 다른 지체들의 유익을 위하여 섬기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자기 부인이라고 하고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시키는지 부활하시고 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하시는 말씀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봅시다.

 

 

 

요 20:19-23=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려워서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곤 주님의 평강을 주십니다.

 

평강이란?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말합니다.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나타나서 두려움을 없애 주십니다.

 

어떻게 없애 주십니까?

 

바로 예수님이 성령으로 그들 속으로 들어가서 없애주시는 것입니다.

 

 

 

평강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 안에 평강이 생깁니다.

 

예수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은 평강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예수님이 잔뜩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문을 잠가 놓았겠어요.

 

문을 닫았다는 말은 잠가 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문을 열지 않고 그냥 벽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이건 마치 성령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실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일방적으로 우리 안으로 쳐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이 벽을 뚫고 들어오셔서 평강을 주십니다.

 

어떻게 주시는가 하면 마치 인공호흡을 하듯이 그들 속에 숨을 불어넣어 주심으로서 줍니다.

 

훅~ 하고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 속으로 성령이 숨처럼 쑤욱~ 들어갑니다.

 

물론 이것은 며칠 후 오순절 날에 이루어집니다.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주시고선 하시는 말씀이 압권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전이(轉移)시키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은 보낸 것은 죽으라고 보낸 거잖아요.

 

그러니 너희들도 나처럼 가서 죽으라고 합니다.

 

이러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예수님의 일생을 그대로 답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걸 십자가의 길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이 세상에 왜? 보냈습니까?

자기 백성을 위하여 죽으라고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예수라는 이름으로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케 하여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죽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 백성들을 찾아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한 그 일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성령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어서 세상으로 보냅니다.

 

왜? 보냅니까?

 

죄사함을 위하여 보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사함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으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어서 대신 죽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사함 받고 살아났습니다.

 

이걸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지금 제자들에게 시킵니다.

 

성령을 주어서 너희들도 가서 친구들을 위하여 죽으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죽었듯이 너희도 가서 죽으라고 합니다.

 

이건 너희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 안에 들어가서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중요하니 다시 정리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누구 이름으로 오십니까?

 

아버지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아버지 이름으로 오셔서 죽으셨습니다.

 

그럼 누가 죽은 겁니까?

 

아버지가 죽은 것입니다.

 

아버지가 죽어서 우리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성도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를 예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이건 마치 요셉이 아들을 낳았는데 야곱이 내 아들이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룻이 아들을 낳았는데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쉬운 말로 요셉이나 룻은 예수님 흉내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이 그대로 반복합니다.

 

아버지가 하신 일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복습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그리곤 세상에 보냅니다.

 

 

 

제자들은 누구 이름으로 세상에 나가는가 하면 예수님 이름으로 나갑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나가서 죽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서 죽는 겁니다.

 

누구를 위하여 죽는가 하면 창세전에 영생 받기로 작정이 된 예수님의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죽습니다. 

 

예수님의 백성들은 세상 속에서는 예수님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예수님의 친구라 합니다.

 

친구란? 친구를 위하여 죽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서 예수님을 위하여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삼은 것은 예수님이 자기백성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직 구원을 받아야 할 예수님의 백성들을 찾아내는데 우리를 미끼로 사용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죽이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또 다른 친구들을 만들어 낸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를 예수님처럼 죽게 하려고 친구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이 세상에 예수님을 대신하여서 존재하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세상은 성도를 통하여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성도 안에 와 계신 것은 성도를 통하여서 자신을 계시하고자 함입니다.

 

 

 

스데반을 예수님이 친구로 삼고선 스데반을 다시 예수님의 친구를 위하여 죽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을 예수님의 친구로 삼고선 바울을 다시 예수님의 친구들을 위하여 죽게 만듭니다.

 

결국 예수님의 친구란 예수를 위하여 죽임 당하기로 선택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고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죽어줌으로서 사랑을 보여 주었듯이 너희들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라는 친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성령이 임하면 성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성령이 성도에게 임하면 성도의 신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땅 사람에서 하늘에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땅 사람이 하늘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사람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땅 사람과 하늘에 사람은 살아가는 원리가 다릅니다.

 

하늘은 “창조의 원리”이고, 땅은 “피조물의 원리”입니다.

 

하늘은 “생명을 주는 원리”로 살고, 땅은 “생명을 받는 원리”로 삽니다.

 

한마디로 하늘에 사람은 “주는 사람”이고, 땅 사람은 “받는 사람”입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남자와 여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남자란? 씨를 주는 자이고!

 

여자란? 씨가 받는 자란 말입니다.

 

씨란? 하나님의 생명을 말합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씨” 라는 생명을 줍니다.

 

여자는 밭처럼 남자의 생명을 받습니다.

 

그리곤 그 아이를 위하여 자신이 버려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자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여자를 주장합니다.

 

여자는 아이의 요구에 따라 움직입니다.

 

 

 

여자는 뱃속에 아이의 요구에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아이가 원하는 음식을 먹게 됩니다.

 

이걸 “입덧”이라고 합니다.

 

 

 

여자는 아이를 해산하기까지 자기 인생은 아이에게 차압당합니다.

 

아니 해산을 하여도 엄마는 아이를 위하여 희생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일컬어 바울은 여자가 해산의 수고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여자가 해산의 수고로 구원을 받는 것을 여자가 남자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자는 아이를 생산하면 아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그 동안 아이가 없을 땐 남편으로부터 받기만 했는데, 아이를 해산하고부터는 받는 자의 위치에서 주는 자의 위치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남편에게는 받는 여자이지만, 아이에게는 주는 남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서 거듭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땅 사람입니다.

 

땅 사람은 받기만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하늘에 생명을 받습니다.

 

 

 

그리곤 거듭납니다.

 

그럼 새 사람이 됩니다.

 

새 사람은 하늘에 속성으로 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걸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남편이신 예수님 앞에선 여전히 받아야 하는 여자이지만, 세상 사람들에겐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남자로서 주는 자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 앞에선 여자로서 받아야 하는 자이지만, 세상에서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남자가 되어서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해산의 수고” 라고 하고 “구원” 이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땅 사람이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땅 사람은 여자처럼 받는 자이고, 하늘 사람은 남자처럼 주는 자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전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아들에 영(靈)이라고 하는 것도 성령으로 거듭나면 땅 사람이 하늘에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땅 사람은 여자이고, 하늘 사람은 남자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모든 인간은 여자입니다.

 

땅에서 난 자는 다 씨가 없는 여자입니다.

 

씨란 생명을 말합니다.

 

아담의 후손은 죽은 자이므로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자인 겁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으면 여자에서 남자로 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남자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입니다.

 

아담에겐 하나님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입니다.

 

여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씨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씨를 주려고 이 땅에 남자로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은 전부 여자로 있습니다.

 

교회를 일컬어 신부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의 씨를 받아야 할 밭으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신부인 교회에게 자기 생명을 주십니다.

 

어떻게 주느냐 하면 자신의 죽음으로 줍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성도는 거듭남이라는 해산의 수고로 여자에서 남자로 바뀝니다.

 

해산의 수고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을 받은 자는 모두가 아들에 영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이 아들을 예수님께서 다시 세상으로 보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으로 여자에서 남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처럼 남자가 되어서 여자를 위하여 죽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울이라는 바울에게 찾아 갑니다.

 

사울은 예수를 믿지 않을 때 이름이고 바울은 예수를 믿고 난 후의 이름입니다.

 

그러니 사울은 여자인 셈이고, 바울은 남자인 셈입니다.

 

 

 

예수님이 찾아가기 전에 바울은 이 때까지 사울로서 여자입니다.

 

그 속에는 예수의 생명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울 속으로 쑥 들어갑니다.

 

그러자 사울이라는 여자에서 바울이라는 남자로 바뀝니다.

 

 

 

이제 예수님은 바울을 남자로서 세상으로 보냅니다.

 

바울은 세상에 갈 때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남자로서 갑니다.

 

세상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은 모두가 여자입니다.

 

이제 바울은 남자가 되어서 여자를 위하여 죽습니다.

 

바울의 죽음으로 또 다시 새로운 사울들이 바울로 변합니다.

 

 

 

사울이란? 큰 자란 뜻이고

 

바울이란? 작은 자란 뜻입니다.

 

큰 자란? 죄인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왕이 되어 자기 이름으로 사는 자를 말하고!

 

작은 자란? 예수 안에서 자기 이름이 삭제 당하고 나는 없고 예수로 살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성도는 자기 이름이 삭제가 당한 자들입니다.

 

성도는 예수 이름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전부 작은 자 바울인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사울을 바울 만들기 위함입니다.

 

큰 자들을 작은 자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작은 자로 세상에 파송합니다.

 

하나님의 씨앗으로 세상이라는 밭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작다는 것은 씨앗처럼 이름 없이 빛도 없는 자란 말입니다.

 

무시당하고 볼품없는 자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연한 순 같이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시했습니다.

 

조롱했습니다.

 

 

 

이게 씨의 특징입니다.

 

모든 씨는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큰 나무가 들어가 있습니다.

 

씨가 죽는 것은 큰 나무를 틔우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작은 자로 보냅니다.

 

작은 씨로 보냅니다.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들어 먹는 자로 보냅니다.

 

세상의 구경거리로 만물의 찌끼처럼 보냅니다.

 

 

 

이걸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고 합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짐승의 밥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과 같습니다.

 

우린 짐승이었는데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람됨에는 예수라는 양식을 먹어서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는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심이 이와 같습니다.

 

양이 이리에게 잡아먹힘으로서 이리를 양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우리에게 잡아먹힘으로서 우리를 예수로 만든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잡아먹은 성도는 그 속에 예수가 삽니다.

 

이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합니다.

 

 

 

예수를 잡아먹은 성도는 모두가 세상에서 예수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안에서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예수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을 보내면서 죄 사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 이름으로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성도의 신분이 바뀐다고 했습니다.

 

땅 사람이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난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사람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바뀝니다.

 

 

 

하나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가족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걸 성경에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종과 친구의 차이는 하나님의 일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5절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오늘 분문을 보면 종과 친구가 나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데 친구는 아버지가 하는 일을 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알려 주시겠다고 합니다.

 

이는 성령이 오시면 아버지의 뜻을 알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성도를 친구로 삼으신 것은 아버지께 들은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리려고 친구를 삼은 것입니다.

 

이제 구원과 심판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게 엄청나게 중요한 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들에겐 하나님 나라는 숨겨져 있습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안다고 하여도 기껏 하여야 자기가 아는 지식으로만 압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을 쫓겨나면서부터 에덴동산은 자기 지식 안에 가두어져 버립니다.

 

제한적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니 이젠 에덴동산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알고 싶어요.

 

왜냐하면! 죄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어 합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감지되지 않으면 불안을 느낍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혀야 안심을 합니다.

 

자기가 예측하여야 안심이 되어요.

 

이렇게 자기가 예측이 되고 감지가 되어야 안심하는 속성을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우상성이란? 고정화 된 것을 말합니다.

 

고정이 되어야 예측이 가능하고 예측이 가능하여야 안심이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온 인간은 자기가 모르는 것은 만나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껴요.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고정화 된 법 체계가 그 안에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른다는 것은 고정화 되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불확실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죽은 자입니다.

 

죽음이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엇이든지 움직임이 없도록 고정화하여 이해하고자 합니다.

 

 

 

쉬운 예로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서 액자에 담아서 감상을 합니다.

 

아름다운 풍경은 실제이고, 그림은 허상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실제를 허상에 담아서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건 인간 속에 우상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성이란? 고정화시켜서 해석하고자 하는 본성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무엇이든지 고정화 된 틀을 만듭니다.

 

신도 고정화 시키고!

 

신앙생활도 정형화 시키고!

 

살아가는 삶도 틀에 맞추어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인간은 죽은 자입니다.

 

죽었으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임이 없으니 변화가 없고!

 

변화가 없으니 고정이 되고!

 

고정이 되니 예측이 가능하고!

 

예측이 가능하니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무엇이든지 자기 안에 가두고자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내 것으로 만들어야 안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 아니면 예측이 안 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경계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낯선 사람을 만나거나 낯선 곳에 가면 두렵지요.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생기지요.

 

왜? 낯선 곳에 가면 경계심이 생기고 두려움이 생깁니까?

 

이는 그곳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른다는 것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자기에게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불신자에겐 죽음 이후의 세계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고!

 

신자에겐 죽음 이후의 세계가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죽음 이후 천국에서 누릴 영광을 압니다.

 

그러니 죽음이 두렵지가 않은 겁니다.

 

믿음으로 죽음 이후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랑(믿음)이 두려움을 쫓아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지가 되지 않으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밤이 되면 왜? 두려운가요.

 

동일한 장소임에도 낮에는 두렵지가 않은데 밤이 되면 왜? 두려운가요.

 

감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확실하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불확실한 것은 두렵기 때문에 불확실한 것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고자 해요.

 

불확실한 하나님을 확실한 하나님으로 붙잡고자 해요.

 

불확실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자기 안에 있는 틀에 끌어당겨서 해석을 해 버립니다.

 

불확실을 확실이라는 틀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틀은 규칙이고 법이에요.

 

 

 

틀을 만들어도 누구 기준에서 만듭니까?

 

자기 기준에서 만들어요.

 

자기 기준에서 만들어 놓아야 안심이 되어요.

 

이걸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우상성이란? 예측 가능하게 하는 법 체계를 말해요. 

 

인간은 법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법을 만들어요.

 

틀을 만든단 말입니다.

 

자기 생각에 가두어 버립니다.

 

 

 

천국과 지옥도 자기가 만든 것으로 해석합니다.

 

천국은 이런 곳일 것이다!

 

지옥은 이런 곳일 것이다!

 

자기 생각의 천국관과 지옥관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편하거든요.

 

 

 

하나님도 자기 식으로 해석해요.

 

하나님은 이런 분일 거야!

 

이렇게 하면 복을 주고!

 

저렇게 하면 벌을 주실 거야!

 

 

 

이러면 하나님이 기뻐하고!

 

저러면 하나님이 싫어하실 것이야! 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정한 규칙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고 싫어하는 일은 안 하고자 합니다.

 

순전히 자기 생각입니다.

 

 

 

그리곤 그 형식화 된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삶이 그 형식에 들어가 있으면 안심이 되도 벗어나면 불안해합니다.

 

하나님이 받느냐 안 받느냐는 의미가 없어요.

 

내 생각에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생각만 되면 됩니다.

 

그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순전히 자기가 만든 틀에서 하나님을 판단하고 희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신앙 속에 들어가 있어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예수를 그렇게 믿고 있다니까요.

 

그러니 미친 여자 널뛰듯이 자기 행함으로 울었다 웃었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는데 우린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우리 행함을 믿어요.

 

자신이 한 일을 믿고 있어요.

 

 

 

자신의 행실에 따라서 천당에 갔다가 지옥에 갔다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래서 되겠나!

 

이건 신앙이 아니야!

 

그러면서 자기 생각에 합리적인 틀을 만드는 겁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틀 말입니다.

 

 

 

결국 신앙을 또 정형화시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몸은 무엇이든지 고정화 형식화해 버립니다.

 

이걸 법이라고 합니다.

 

그리곤 그것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만나도 그러잖아요.

 

자기 생각으로 그 사람을 판단해 버리잖아요.

 

아! 저 사람을 저럴 것이야! 라고 미리 판단 해 놓고 분석하잖아요.

 

 

 

심리학자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사람은 2초 만에 상대를 감지한다고 합니다.

 

본능적으로 판단 한다고 합니다.

 

이걸 “이미지” 라고 합니다.

 

일단 이 사람은 이럴 것이다! 라고 전제하고 그 다음부터 분석하고 수정해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미지가 고착화 되면 편견이 됩니다.

 

편견이 되면 수정이 안 되어요.

 

항상 그것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러면 그렇지!

 

네 까짓 것이 변하면 얼마나 변하겠냐! 라는 식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이미지란? 자기 안에 그려진 그림이란 말입니다.

 

한번 그려진 그림은 쉽사리 바뀌지 않아요.

 

열 가지 중에 한 가지가 자기가 그린 이미지에 맞으면 그걸 답으로 정해 버립니다.

 

그럼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어!

 

드디어 네 본색을 드러냈구나! 라고 판단해 버린단 말입니다.

 

 

 

편견으로 고착화 되면 아무리 잘해 주어도 안 되어요.

 

저 인간은 원래 그런 인간이야! 라고 치부해 버린단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엇이든지 자기 틀을 가지고 해석을 해 버립니다.

 

결국 자기가 만든 틀 안에 가두어져서 살아가니 불행한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상성 때문입니다.

 

 

 

이게 신앙에 그대로 녹아져 있어요.

 

교인들마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다 달라요.

 

자기가 아는 것으로 이해해요.

 

아무리 아니라고 하여도 자기가 이해되지 않으면 안 고칩니다.

 

자기 안에 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법을 깨트리기를 싫어해요.

 

 

 

신앙생활도 이 법으로 해요.

 

자기가 정한 규칙대로 자신이 움직이면서 안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루에 성경 석장씩을 보고 새벽 기도를 하는 사람은 그걸 하여야 안심이 되어요.

 

자기가 정한 법을 준수하였기 때문에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행여라도 새벽기도를 안 하면 자기가 정한 법을 벗어낫기 때문에 불안한 겁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서는 이 법은 수시로 자기 육신의 조건에 따라서 수정하고 변해요.

 

자기 합리화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안심이 되거든요.

 

백수로 놀 때는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직장을 구하면 코빼기도 안 보이잖아요.

 

처녀 때는 교회 문턱이 닳도록 다녔는데 결혼하고 아이 낳아 보세요.

 

교회는 명절날 시집 찾아 가는 것처럼 되어버리잖아요.

 

 

 

그만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수정이 된 것입니다.

 

수시로 자기 조건에 따라서 자기 합리화를 시켜 버립니다.

 

합리화가 되어야 안심이 되거든요.

 

이게 법 아래서 태어나 법에 가두어져 살아가는 인간들이에요.

 

 

 

이 법이 교인들이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고 듣는 것에도 작동을 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자기가 듣고자 하는 말만 들어요.

 

무슨 말을 해도 듣고 싶은 것만 편집해서 들어요.

 

듣고 싶은 말을 안 해주면 떠나요.

 

바울은 이를 두고 귀가 가려워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따른다고 했어요.

 

자기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 주는 목사를 찾아다닌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고가 목사들에게는 성경을 자기 틀에서 해석하는 관(觀)을 가지게 만듭니다.

 

자기가 아는 틀에 맞추어서 성경을 해석하여서 설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틀을 벗어나면 이단이라고 합니다.

 

자기하고 다른 말을 하면 비 복음이라고 치부해 버려요.

 

마치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한단 말입니다.

 

 

 

이 모두가 자기가 정한 틀에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안에 가두어 버린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는 소리는 마치 카드회사 ARS 틀어 놓은 것과 같아요.

 

늘 같은 말을 반복으로 말해요.

 

 

 

혼자 복음을 다 안다고 하는 자들과 이야기 해보세요.

 

벽에 대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지극히 부분적으로 아는 것을 가지고 다 아는 척 한단 말입니다.

 

틀린 말을 한다는 것이 아니고, 부분을 전부로 말하기 때문에 그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는 맞아요.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자기 수준에서 알고 있는 것이에요.

 

자기 수준으로 다 안다고 답을 적어 놓았기 때문에 자기하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요.

 

이 모두가 우상성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깨어져야 하는데 안 깨어지고 있어요.

 

언젠가 하나님이 간섭하시면 지진이 일어나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라면 말이에요.

 

아니면 끝까지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할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하면서 십자가 원수 노릇할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생명의 자람과 같아요.

 

생명은 고정되어 있지 않아요.

 

날마다 자라고 변해요.

 

여기서 자라고 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일이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지고 길어진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인생을 살아온 세월만큼 아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살아온 만큼 세상을 아는 것이 달라요.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도 이와 같아요.

 

더 많이 알고 적게 아는 것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건 예수님이 죄를 사해 주는 것이 사람마다 차별적으로 해 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누군 많이 사해주고 누군 적게 사해 주고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다 동일하게 사해 주셨어요.

 

다만 사람마다 그걸 깨닫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깨닫고 어떤 사람은 적게 깨닫습니다.

 

못 깨닫는 사람도 있어요.

 

 

 

하나님은 지금도 악인이나 선인이나 동일하게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깨닫는 것은 다 다릅니다.

 

신자라고 하여도 달라요.

 

많이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적게 감사하는 사람도 있어요.

 

불신자처럼 아예 감사치 않는 자들도 있습니다.

 

각자의 믿음에 분량에 따라 다르고 각자의 신앙에 따라 다릅니다.

 

각자 깨닫는 것만큼 신앙생활로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깨닫는 것을 비례하여 나타납니다.

 

죄인이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면 병들어 죽어가면서도 감사를 할 것이고!

 

자신이 죄인이고 용서 받은 것을 모르면 산해진미를 먹어 가면서도 불평을 합니다.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면 많이 사랑할 것이고 모르면 적게 사랑합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과 결혼하고 난 후 자기가 자식을 낳고 키워가면서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달라요.

 

사랑이라는 말은 같아도 그 질(質)은 달라요.

 

내가 자식을 낳아 키워보면서 아는 부모의 사랑과 철없이 부모 속 섞이면서 아는 사랑은 달라요.

 

 

 

하나님을 아는 일을 성막으로 비유합니다.

 

 

 

성막을 보면 뜰과 성소로 구분을 합니다.

 

뜰은 오픈이 되어 있고 성소는 숨겨져 있어요.

 

뜰에선 성소 안을 몰라요.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뜰에서 안다고 하는 것은 천막으로 덮여 있는 성소의 껍데기이지 그 안에 내용과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몰라요.

 

성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려면 성소 안으로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성막은 예수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말해주고 있어요.

 

예수님은 성막의 삶을 사셨어요.

 

 

 

예수님을 일컬어 전에도 계시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하지요.

 

과거, 현재, 미래 시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역이 있고!

 

현재의 사역이 있고!

 

미래의 사역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영생하시는 분이시므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에요.

 

항상 존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어제와 오늘과 장차로 말하는 것은 역사에 속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일하심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제는 과거적인 의미로서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제는 현재적인 의미로서 성령으로 성도 안에 오셔서 일하시는 것을 말해요.

 

예수님의 장차는 미래적인 의미로서 왕으로 신랑으로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고 신부들과 천국에서 영원히 사실 것을 말합니다.

 

 

 

이걸 성막을 통하여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뜰에 있는 번제단에서 제물이 태워지는 것은 예수님의 육체적 사역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상징합니다.

 

이건 예수님의 어제입니다.

 

 

 

성소 안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성령으로 일하시는 사역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성도 안에 오셔서 사역을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건 지금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일하시고 계시는 현재입니다.

 

 

 

성소를 또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을 하는데 하나님은 지성소에 강림을 하십니다.

 

지성소에 강림하시는 하나님은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말하는데 이는 장차 재림하시는 미래의 예수님을 말합니다.

 

성소를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하는 것은 하나이면서 둘을 상징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우리 안에 성령으로 현재를 살게 하는 것도 있지만, 왕으로서 장차를 현재 속에서 살게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둘이 하나이면서 하나가 둘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버지가 예수 안에 예수가 아버지 안에!

 

또한 예수가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몸이 곧 성막과 같아요.

 

이해되시지요.

 

 

 

성막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성도의 신앙에 단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편의상 단계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옛 사람이 죽는 사건을 당합니다.

 

이건 어제이고 뜰 신앙인 겁니다.

 

 

 

십자가에서 옛 사람이 죽은 자에게 성령을 보내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거듭나면 예수와 연합이 됩니다.

 

연합이 된다는 말은 예수 안으로 들어간단 말입니다.

 

이걸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 거한다고 합니다.

 

이건 오늘이고 성소 안 신앙인 겁니다.

 

 

 

성소 안 신앙은 새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말해요.

 

어쩌면 신앙생활은 성소 안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는 삶이 시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뜰 신앙이 있고 성소 안 신앙이 있어요.

 

 

 

이걸 성도가 받아야 할 두 가지 세례로 말합니다.

뜰 신앙은 요한의 세례이고,

성소 안 신앙은 성령세례를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을 보면 두증인들을 교회로 보내면서 성전 뜰에 있는 자들을 척량하지 말라고 합니다.

 

척량하지 말라는 것은 144000명의 숫자에 포함되지 않은 자란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구원 얻은 무리를 각 지파 속에서 12000명씩 인을 치지요,

이는 각 지파 속에서 빼내심을 입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각 지파에서 뽑아진 자들을 144000명이라고 숫자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정한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정한 숫자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족보에 오르지 못하는 사생아(私生兒)란 말입니다.

 

사생아는 천국을 유법으로 받지 못해요.

 

이스마엘처럼 쫓겨 날 자에요.

 

그래서 뜰에 있는 자들은 그냥 짐승에게 넘겨주라고 했어요.

 

 

 

이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니 뜰에 있는 것입니다.

 

뜰은 옛 사람의 영역이에요.

 

그러니 옛 사람의 구습을 쫓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나지 않고 예수를 믿는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들을 성경에선 육에 속하였다고 합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그 안에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 없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속된 말로 꼴리는 대로 산다! 막산다! 라고 합니다.

 

자기 안에 예수님이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을 서슴치 않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뜰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하고 성소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달라요.

 

그러니 뜰에서 아는 하나님을 가지고 난 하나님을 다 안다고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뜰에서는 뜰 만큼만 하나님이 계시하셨어요.

 

성소 안에 들어가면 거기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또 있어요.

 

 

 

그러니 뜰에서 성소 안을 다 아는 것처럼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이건 교만이에요.

 

이걸 아까 고정화로 알아진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여도 고작해서 뜰에서 만든 그 틀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뿐이에요.

 

그러면서 다 아는 것처럼 기고만장 한단 말입니다.

 

 

 

이런 자들이 너무도 많아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 알고서 다 안다고 꼴값을 떨고 있어요.

 

십자가의 종결성이니 또는 폐쇄성이니 하면서 말이에요.

 

십자가는 옛 사람으로서는 종결성이 되지만 새 사람으로서는 시작이고 열려 있는 개방성이에요.

 

십자가는 끝이면서 시작이에요.

 

옛 사람은 십자가에 죽어서 끝이지만 새 사람은 십자가로부터 살아나서 시작이에요.

 

 

 

십자가를 지나오면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점점 더 열려요.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에 대하여 더 깊이 알아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새 사람에겐 개방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에겐 반드시 십자가 도는 개방성으로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친구가 되면 아버지가 하는 일을 알려준다고 하잖아요.

 

성령이 임하면 친구가 되어요.

 

종이 아니고 친구라고 하잖아요.

 

친구에겐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 준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친구에겐 십자가 도가 개방성이 되는 것입니다.

 

뜰에 있는 종에겐 십자가 도가 역사하는 성소 안에 세계는 폐쇄성이 맞아요.

 

그러나 성소 안에 들어간 친구들에겐 십자가 도는 개방성으로 계속하여 열려져서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계시는 점점 더 열려져요.

 

한마디로 불신자에겐 예수님은 감추어진 분이지만 신자에겐 열려진 분이란 말입니다.

 

 

 

성경은 신자에게 주신 말씀이지 불신자에게 준 말씀이 아니에요.

 

신자는 성경을 날마다 더 깊이 알아가게 되어 있어요.

 

희미하던 것이 점점 더 밝히 보여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부분을 아는 것 가지고 다 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분을 가지고 전부라고 다 아는 척하는 것은 이건 계시의 점진성을 모르면서 말하는 어리석음이고 교만한 것입니다.

 

 

점진성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깊이를 말해요.

 

 

 

종에겐 계시가 닫혀 있지만 친구에겐 열려 있어요.

 

그럼 언제 종에서 친구가 됩니까?

 

성령이 오시면 종에서 친구가 되지요.

 

그럼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종으로서 성막의 뜰에 있어요.

 

성령이 오셔야 친구가 되어 성소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러잖아요.

 

내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겠다!

 

종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모르지만 친구이기 때문에 알려 준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죽기 전에는 제자들이 종이에요.

 

친구가 될 수 없어요.

 

친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야 해요.

 

그래서 내가 성령으로 오면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으로 오면 너희에게 아버지의 비밀을 친한 친구에게 알려주듯이 알려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종은 성막으로 비유하면 뜰에 있는 자들이고,

친구는 성소 안에 들어간 자들이에요.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친구라 하는 것은 성소 안으로 들여보내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보혜사인 성령이 오시면 하실 일들을 계속하여서 말씀 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 보혜사인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아가도록 인도하실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안다고 해서 다 아는 척하지 말란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이방인도 알아요.

 

귀신도 알아요.

 

육체로 오신 예수는 모두가 다 알아요.

 

그건 어제의 예수에요.

 

어제의 예수는 죽은 예수에요.

 

 

 

그러나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오직 자기백성들만 알아요.

 

자기 백성들은 성령으로 오신 예수로 살아갑니다.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 바로 오늘의 예수 현재의 예수님인 겁니다.

 

오늘의 예수가 우리 안에서 사는 예수입니다.

 

 

 

생명이란? 현재이지 과거가 아니에요.

 

과거는 죽음이고 현재가 생명이에요.

 

어제 아무리 건강하게 살았다 하여도 지금 죽으면 소용없어요.

 

 

 

바울이 그랬잖아요.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쫓아간다고!

 

이건 과거를 잊고 항상 현재 속에서 미래를 소망하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십자가에 죽으신 그 예수님을 발판으로 하여 현재 우리 가운데 와 계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만 말하지 말고 현재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그 예수님을 알아야 해요.

 

신앙생활이란 말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를 깨닫고 감탄하고 감복하게 되어 있어요.

 

머물러 있지 않아요.

 

성령이 점 점 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읽어내는 계시를 확장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죽은 예수만 말하고 현재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예수님을 말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이단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 가운데 일하심을 부정하니까 성도의 삶이 없다고 망발을 하는 것입니다.

 

꼴리는 대로 살아도 된다!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겁니다.

 

꼴리는 대로 살 수 밖에 없고!

 

막 살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과,

꼴리는 대로 살아도 된다와 막 살아도 된다는 것은 달라요.

 

그 의미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우린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이길 수 없어서 막 살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인지(認知) 할 때는 죄로 인하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지만!

 

그래 난 죄인이기 때문에 막 산다! 꼴리는 대로 살거야! 어쩔래 라고 하는 것은 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여 아픔이 없으니 죄를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입니다.

 

이런 자를 일컬어 바울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라고 했어요.

 

 

 

진정으로 예수의 죽음을 안다고 하면 죄와 싸우고 멀리하고자 하는 성향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고 죄를 지어도 죄를 미워하게 된단 말입니다.

 

육신이 연약하여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죄를 짓고 살지만 늘 상하고 통회하면서 예수님의 피 뿌림 안에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잊지 않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아! 막 사는 이 기쁨!

 

죄인이 죄 짓는데 뭐 어때!

 

그러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십자가 십자가하면서

 

아! 막 사는 이 기쁨!

 

죄 짓는 이 기쁨!

 

그러는 인간들이 있어요.

 

 

 

자칭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지도자 노릇을 하는 사람들은 이걸 악이라고 고발을 해 주어야 하는데 침묵하고 있어요.

 

도리어 부추겨요.

 

왜냐하면! 자신이 성소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뜰에서만 십자가를 연구하였기 때문에 죄에 대한 아픔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도를 학문으로 연구하여 지식으로 알기 때문이에요.

 

이들에게 예수는 논문 속의 예수에요.

 

그러니 신앙이 맨 날 새로운 논문 발표하듯이 변론을 일삼고 논쟁과 분쟁을 일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겐 현재 예수가 없어요.

 

십자가에 죽은 예수만 있어요.

 

그러니 복음 복음하면서 십자가에 반하는 언행심사들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를 지식으로 아는 자이지, 예수를 삶으로 믿는 자가 아닙니다.

 

복음을 학습으로 배워서 아는 자이지, 성령의 은사로 알아진 복음이 아니에요.

학습으로 알아진 복음은 죽은 것이므로 정죄하고 죽이는 차가운 법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은사로 알아진 복음은 생명이므로 은혜로서 따뜻함으로 살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학습으로 알아진 복음 속에는 예수의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학습으로 알아진 예수는 추상이에요.

 

학습으로 알아진 십자가 도는 관념이에요.

 

그러니 예수 예수하면서도 예수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예수만 알고 산 예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예수님을 알아야 해요.

 

과거의 예수가 아니라 현재의 예수를 알아야 합니다.

 

과거의 예수는 종들이 아는 예수이지만, 현재의 예수는 친구가 아는 예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삼아 준다는 것이 엄청난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종에서 친구가 되어요.

 

친구는 성소 안에 들어가서 사는 자에요.

 

그러니 뜰에서 일어나는 것만 말하지 않고 성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뜰은 요한의 세례가 베풀어지는 곳이라고 했어요.

 

 

 

요한의 세례는 성막의 뜰 신앙에요.

 

요한의 세례는 옛 사람이 죽는 세례에요.

 

옛 사람이 죽는 곳은 성막의 뜰이에요.

 

 

 

뜰에 있는 번제단은 예수님에게 적용하면 십자가에 죽으심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육체적인 죽으심은 옛 사람에 대한 죽음이에요.

 

예수님의 죽음은 새 사람으로서의 살아남을 위한 수순에 불과해요.

 

이건 마치 가나안을 가기 위하여 출애굽을 하여 홍해를 건너 온 것과 같아요.

 

 

 

번제단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성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뜰에서 보면 성소 안은 미지(未知)의 세계에요.

 

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뜰에선 성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감지 할 수가 없는 미지의 세계인 것입니다.

 

 

 

이건 마치 십자가 이쪽에서 보는 십자가 너머의 세계와 같아요.

 

십자가 이쪽에서는 십자가 너머는 안 보여요.

 

마치 뜰에서 성소 안이 안 보이듯이 안 보인단 말입니다.

 

성막의 뜰은 어둠이고 법이고 죽음의 세계이지만, 성소 안은 빛이고 은혜로서 생명의 세계에요.

 

십자기 이쪽은 어둠이고 죽음의 세계이지만, 십자가 저쪽은 빛이고 생명의 세계에요.

 

 

 

십자가 이쪽에선 죄에 대하여 무기력하지만, 십자가 저쪽은 죄와 싸웁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죄와 싸우는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어요.

 

성령을 받지 않으니 성도의 삶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맛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니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자기 안에 틀로서 판단하는 우상성이라고 했어요.

 

 

 

성령이 오시면 이 우상성을 깨트립니다.

 

우상성을 법이라고 했습니다.

 

고정화 또는 형식화 된 틀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아담 안에서 난 죽은 자들이 만든 법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판단하는 그 틀이 깨어집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 주세요.

 

이제 예수 안에서 산 사람으로서의 기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성소 안으로 불러들이기 위함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자기 백성들을 십자가 너머의 세계로 불러들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으로 다시 오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오셔서 십자가 이쪽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십자가 저쪽으로 넘겨주신 겁니다.

 

 

 

여기서부터 새 사람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고정화 된 우상의 하나님에서 살아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령이 오시면 자기 안에 틀이 깨어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새 언약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몸으로 만든 틀에서 벗어나 예수라는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을 내 것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새 언약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효력이 발생을 합니다.

 

성령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맺은 계약을 발효를 시키십니다.

 

예수님이 피로 맺은 계약이 뭡니까?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이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의를 입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우리 행위로 판단 받지 않아요.

 

이걸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독자로 보지 않고 예수 안에서 보아요.

 

예수라는 안경으로 우릴 보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항상 예수의 의로 정죄 당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자신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구원을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라는 자세로 살아갑니다.

 

 

 

성령의 오심은 곧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 온 것과 같아요.

 

 

 

우리는 성령이 오심으로서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온 것과 같아요.

 

광야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온 자들이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여기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 사람이 죽어지는 싸움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싸우는 자란 말인데 이는 곧 하나님께 얻어터지는 자란 말입니다.

 

애굽에 사고와 애굽에 삶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걸 구습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다고 합니다.

 

 

 

광야는 모든 것이 낯설어요.

 

애굽과 전혀 다른 아주 낯선 세계입니다.

 

광야는 애굽처럼 모아두고 살아가는 곳이 아니고 날마다 하나님이 공급해 주는 것으로 사는 곳이에요.

 

한 마디로 예측이 가능한 곳이 아니고 예측이 안 되는 곳이란 말입니다.

 

 

 

애굽에선 모아 두었기 때문에 예측이 가능했어요.

 

그러나 광야는 모아 둘 수가 없기 때문에 예측이 안 되어요.

 

오늘 배불리 먹어도 내일 안 주면 굶어야 합니다.

 

그러니 애굽에 사고로 살려면 불안해서 못살아요.

 

 

 

예측이 가능한 애굽에서 태어난 자들이 낯선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은 두렵고 불안해요.

 

앞 날을 예측 할 수가 없고 감(感)이 안 잡히니 불안 한 겁니다.

 

그러니 악악대는 겁니다.

 

특유의 우상성이 발동을 하여 좀 예측이 가능하게 인도해 달라고 합니다.

 

만나도 매일 주지 말고 한 달 치씩 달라는 거예요.

 

 

 

양식도 손에 붙잡고 있어야 안심이 되는데 매일 하루치씩만 주니 불안해서 못 살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루치만 거두라고 하여도 이틀 치 사흘 치씩 모으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이 진노합니다.

 

 

왜? 예측하고자 하느냐고 혼을 냅니다.

 

왜? 네 인생은 네가 책임자고자 하느냐!

 

네 인생은 그냥 내게 맡기고 살라고 합니다.

 

광야에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못 살아요.

 

 

 

애굽의 신은 예측이 가능한데 광야에 하나님은 예측이 안 되어요.

 

애굽의 신은 고정화 되어 있어요.

 

인과응보하는 신이거든요.

 

인과응보 한다는 말은 우리의 원인에 따라 결과가 온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복 받을 짓을 하면 복이 오고 벌 받을 짓을 하면 벌을 받게 된다는 사고입니다.

 

이걸 법이라고 하고 우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애굽식 신앙은 내가 원인을 재공하면 신은 그 원인에 따라서 반응을 하기 때문에 내가 신의 일하심을 예측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을 이 시대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어요.

 

그러니 교인들이 인과율(因果律)로 자기 신앙을 가늠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복 받을 짓과 벌 받을 짓을 가늠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 받고 싶으면 열심을 내고, 벌 받을 짓을 하면 액땜하려고 안 하던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애굽적 신앙이에요.

 

 

 

애굽에서는 내가 신을 조종 할 수가 있었어요.

 

그러나 광야에 하나님은 내가 조종 할 수가 없어요.

 

우리의 인과율로 움직이는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불안 한 겁니다.

 

 

 

광야에서 사는 길은 그냥 하나님께 맡기는 것뿐입니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세요!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그냥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선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따라가면 되어요.

 

믿음만 있으면 그렇게 편한데!

 

믿음이 없으면 한시도 편하게 살아 갈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오자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앞장서서 인도를 하신 것입니다.

 

광야에선 구름 기둥만 졸졸 따라가면 되어요.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서 이루어졌습니다.

 

성령이 구름 기둥처럼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 때 그 때 감동을 주어서 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우리는 애굽에서 광야로 나온 것입니다.

 

내가 예측하던 것에서 벗어나 하루하루가 주님의 인도하심이라 믿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선 틀이 필요했어요.

 

왜냐하면! 애굽에 신은 죽은 신이므로 움직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의 일하심을 예측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선 자기가 정한 틀이 필요가 없어요.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저렇게 하면 벌을 받는다는 식의 신앙이 통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만약에 그 틀을 붙잡고 있으면 이게 곧 우상이 되어요.

 

 

 

이걸 십자가로 이야기 합니다.

 

십자가 이쪽에서는 틀은 필요했어요.

 

십자가 이쪽은 죽은 신이 지배하는 동네이니까요.

 

그러나 십자가 너머에서는 필요가 없어요.

 

그건 살아계신 하나님이 다스리는 동네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예측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서 마음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일하심이 고정화 되어 있지 않고 포착이 안 되어요.

 

그러므로 십자가 너머에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고정화하여 예측하고자 하면 죄가 되어요.

 

어제의 하나님을 오늘 붙잡으면 죄가 되어요.

 

그게 또 고정화 형식화가 되어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정화 되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예측이 가능해집니다.

 

아! 이렇게 했더니 복을 받았다고 하면 그게 법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또 복을 따내고자 그 짓을 하게 되어요.

 

이게 바로 우상을 섬기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예측이 되면 하나님은 그 예측에 가두어지게 됩니다.

 

그럼 애굽에 신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측이 안 되게 하시려고 구름 기둥이 인도를 하는 것입니다.

 

구름 기둥이 어디에 머물지 또 며칠을 머물지 몰라요.

 

 

 

그러니 광야를 행군하는 이스라엘에겐 자기 생각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구름 기둥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만 가면 됩니다.

 

이건 그 안에 법이 깨어진 사람에겐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 안에 법이 살아 있는 사람은 불평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자기 예측대로 하나님이 움직여주지 않기 때문에 불안하고 불평이 생기는 것입니다.

 

 

 

광야는 믿음이 없으면 못 살아요.

 

광야에선 내일 일을 장담 할 수가 없어요.

 

하루 하루 주시는 대로 받아먹고 살아야 합니다.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하면 하나님을 우리 틀에 가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수준으로 판단하지 말란 말입니다.

 

내가 철야하고 금식하며 기도했더니 복을 주더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고정화 시키지 말란 말입니다.

 

 

 

물론 금식기도 해서 응답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금식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금식기도라는 인과율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님으로 전락하고 말아요.

 

그럼 하나님은 금식기도를 하면 응답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번에 금식기도를 하면 역설적으로 응답을 하십니다.

 

만약에 지난번에 금식기도 했더니 응답을 받았다고 해서 그걸 믿고 또 금식기도 하면 응답하지 않아요.

 

응답해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응답을 해 주면 그 사람에겐 하나님이 우상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비켜가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도리어 준 것도 빼앗아 가는 식으로 일을 하실 수 있단 말입니다.

 

병을 고쳐 달라고 하면 죽일 수가 있고!

 

돈을 달라고 하면 망하게 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제 경험을 말할게요.

 

전 예전에 복음을 몰랐을 땐 기도를 엄청 많이 했어요.

 

그 땐 응답을 무진장 많이 받았어요.

 

그냥 말하면 그대로 이루어졌어요.

 

 

 

항상 그랬다는 말이 아니고 이런 일이 참으로 많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때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를 하라고 그렇게 큰 소리 쳤어요.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면 이상한 것이라고 했어요.

 

말만 하면 응답이 오니까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 나 포도 먹고 싶은데요! 라고 하면 누가 포도를 갖다 주었어요.

 

나 고기 먹고 싶은데! 그러면 누가 고기를 사 주어요.

 

오죽 했으면 제 아내가 여보! 우리는 무슨 말을 못하겠다고 했어요.

 

말만 하면 바로 바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기도해도 응답이 안 와요.

 

어! 이상하다!

 

왜? 하나님이 응답을 안 하시지!

 

불안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더 강도를 높여서 기도하게 되는 겁니다.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밤마다 철야를 하였어요.

 

그런데 기도하면 이상하게 나쁜 일만 생기는 겁니다.

 

어긋난단 말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에 반대되는 일들이 자꾸만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그 때 제 아내가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제발 당신 기도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 때는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러니 자꾸만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겁니다.

 

 

 

내가 뭘 잘못했지!

 

왜? 응답 안 해 주시지!

 

하나님이 날 버렸나!

 

갖가지 생각들이 다 드는 겁니다.

 

나중엔 우울증이 와요.

 

 

 

예전에 기도 응답이 척척 될 때는 룰루~랄라~ 했는데!

 

이젠 기도 응답이 안 되니 죽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자살하려고까지 했다니까요.

 

말씀도 들어오지 않고 기도 응답도 안 되니 갑갑해서 죽겠더라고요.

 

 

 

나중에 은혜를 받고 난 후 생각하니 그게 하나님께서 내 안에 우상이라는 틀을 깨트리기 위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 당시 하나님이 계속해서 내 기도에 응답을 해 주었으면 난 지금 아주 용한 점쟁이나 무당이 되어 있을 겁니다.

 

내 속에 우상의 하나님을 깨트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도리어 어긋나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이렇게 일을 하세요.

 

우리 틀을 벗어나서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우상성이 우리 안에서 사라지지 않아요.

 

그러니 고통인 겁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우상성은 항상 꿈틀거려요.

 

이 놈에 우상성이 복음을 알고 나서도 또 나타나더라고요.

 

복음을 또 내 생각의 틀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다! 라고 고정화 시켜 버린 겁니다.

 

내가 아는 복음만 진짜이고!

 

나머진 다 틀렸다는 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음은 분명히 맞아요.

 

그런데 그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것을 내가 깨달은 것에 맞추어서 고정화 시켜서 해석을 한 것입니다.

 

 

 

마치 뜰에서 성소 안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 속에 담겨진 풍성한 것들을 다 읽어내지를 못하면서 다 아는 척하였단 말입니다.

 

그러니 신앙이 교만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나 아니면 안 돼! 라는 식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 나와 다르면 다 이단이라고 했어요. 

 

그러다가 혼쭐이 났어요.

 

 

내 안에 법을 하나님이 또 깨트려 주신 겁니다. 

 

우린 늘 이렇게 깨트림을 당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우상성이 항상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리고 싶어 한단 말입니다.

 

나만 하나님에 특별한 은혜를 받은 종으로 남고 싶어 한단 말입니다.

 

결국 자기 이름을 내고 내가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늘 우리 안에 지진을 일으켜서 우리가 굳게 세워 놓은 법을 허물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틀을 깨트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법을 만들면 하나님은 허물어요.

 

이게 바로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발 내가 아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내가 한 부분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아는 성경해석법이 전부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안다고 하는 그것도 지극히 미미한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짜로 아는 사람은 모른다고 말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우리가 측량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알수록 입을 닫게 됩니다.

 

입을 닫으니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달리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안다고 하는 것이 지극히 미미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말을 안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경륜이 깊어 갈수록 누구의 신앙을 정죄하거나 판단하지를 못해요.

 

두고 본다니까요.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구경을 하게 되어요.

 

 

 

그런데도 성경을 쬐끔 아는 것들이 꼭 태권도 석 달 배운 아이들이 사람을 두들겨 패고 다니듯이 남들을 다 판단하고 다닙니다.

 

진짜 태권도 고수들은 남을 패지 않고 도리어 맞아요.

 

하나님을 깊이 아는 사람은 남을 판단하지 않아요.

 

도리어 그 사람을 통하여서 자기가 받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배우게 되어요.

 

 

 

십자가 쬐금 아는 것을 가지고 온 교회를 판단하고 심판하는 자들을 보면 불쌍해요.

 

십자가 너머의 풍성한 세계를 맛보지도 못한 것들이 다 아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을 다 난도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아는 것이 무슨 과거 급제라도 된 듯이 말이에요.

 

안다고 하여도 기껏해야 인간의 지식인 철학으로 알아진 자기 생각에 고정화된 것일 뿐인데 말이죠.

 

 

 

중요한 말이니 잘 새겨들으세요.

 

 

 

십자가는 옛 언약이 완성 되는 곳입니다.

 

“나” 라는 역사가 끝나는 곳이 십자가에요.

 

“나 있음”이 “나 없음”으로 되는 곳이 십자가에요.

 

 

 

십자가 너머는 묵시 세계에요.

 

묵시 안에서는 “나” 란 없어요.

 

예수 안에 내가 있어요.

 

예수 안에 있는 “나” 는 더 이상 내가 아니고 예수의 것으로서의 “나” 에요.

 

이걸 예수의 종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이쪽은 “나” 라는 옛 사람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십자가 너머는 예수 안에서 “나” 라는 새 사람의 영역입니다.

 

그러니 십자가 너머에서는 내가 책임질 인생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서 책임을 져 주십니다.

 

 

 

십자가는 옛 사람으로서는 종말이지만, 새 사람으로서는 시작이에요.

 

옛 사람의 죽음은 곧 새 사람의 시작이에요.

 

십자가는 묵시 세계로 나아가는 새로운 관문이에요.

 

십자가 이쪽에서 보면 죽음이고 끝이지만 십자가 너머에서 보면 새로운 시작이에요.

 

관문을 지나고 나면 광야처럼 새로운 묵시라는 세계가 펼쳐져요.

 

묵시의 세계는 너무도 광활해서 우리 육으로는 다 담아내지 못하고 예측도 안 되고 감지도 안 되어요.

 

 

 

하나님의 세계는 광야처럼 너무도 넓어서 예측이 안 되어요.

 

그냥 입이 쩍 벌어질 뿐입니다.

 

이건 마치 바울이 삼층천에 가서 본 것과 같아요.

 

너무도 엄청나서 입이 닫히고 말았어요.

 

 

 

그래서 바울이 그럽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풍성함을 알아가는 일에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고, 더 높아지고, 더 길어지라고 합니다.

 

이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다 담아 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궁무진하다는 말입니다.

 

 

 

이걸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 인용할 수가 있어요.

 

오늘 깨달은 말씀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지나고 나면 한 부분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말씀 속에 더 깊고 풍성한 것들이 담겨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성경을 볼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 때는 제가 아는 해석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나면 지극히 작고 지엽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전에 말한 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단 말입니다.

 

과거에 이것이 전부인줄 알고 다 아는 척 한 것이 경솔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이걸 바울은 어린아이 때는 어린아이 같이 생각하고 어린아이처럼 행동을 하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 일을 버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를 알아가는 것도 이와 같아요.

 

지금 안다고 하는 것도 지나고 나면 모름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지금은 제가 말씀을 전할 때는 지금 전 이렇게 은혜를 받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보는 성경 해석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도 과거엔 그 자리에서 전부를 다 폄론했어요.

 

판단하고 심판했어요.

 

그러니 복음 복음하면서도 하는 짓은 반 복음적으로 정죄하고 죽이는 일만 한 겁니다.

 

그런데 은혜를 조금씩 깊이 알아가다가 보니 철없이 나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동일해요.

 

지금 제가 안다고 하는 것도 부분적이에요.

 

그러므로 이것이 전부다! 라고 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전 이렇게 은혜를 받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제 해석을 절대적으로 두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제 자신은 이것이 복음이다! 라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이것이 전부라고는 하지 않아요.

 

 

 

그러니 이젠 누구를 판단하지를 못하겠어요.

 

하나님께서 각 사람마다 다루어 가시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안 맞아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다스려 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정죄나 심판을 할 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너무도 크고 깊고 넓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점점 입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이란? 다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 안다고 하는 자는 아직 다 알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다 안다고 하는 자는 교만한 겁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복음 쬐금 아는 것을 가지고 다 아는 척 하는 자들은 마귀의 미혹을 받아서 마귀 짓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일 무서운 것이 철없는 사람이 완장을 차는 것입니다.

 

철없는 사람이 완장을 차면 다 죽여요.

 

자기 기준으로 다 심판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철없는 사람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다 잘라내요.

 

철이 없다는 말은 복음을 지식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지식으로 복음을 알면 철없는 자처럼 다 아는 것처럼 설치고 나대요.

 

하나님의 은사로 복음을 알지 않고 학문적으로 습득하여서 깨닫게 되면 그 깨달음으로 힘을 삼아 남을 죽이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 받지 않고 목사 노릇을 하면 사람을 죽이는 일을 자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한번 살펴보세요.

 

복음 복음하면서 마귀 종노릇 하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십자가 십자가하면서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모든 사람들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다니면서 교인 하나를 얻으면 배나 더 지옥 자식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런 자들은 성막의 뜰에 있으면서 성소 안을 이야기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지껄이는 것입니다.

 

 

 

이걸 십자가 이쪽과 저쪽으로 조금 더 이야기해 봅니다.

 

 

 

십자가 이쪽은 애굽처럼 복음을 내 지식으로 습득이 가능한 곳이에요.

 

그러나 십자가 너머 저쪽은 복음을 하늘에서 은사로 내려주는 곳이라서 내 지식으로 습득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 이쪽에선 복음을 내 지식으로 습득을 하기 때문에 힘으로 사용 할 수가 있어요.

 

남 보다 잘난 척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너머 저쪽에선 복음을 내 지식으로 습득 할 수 없고 하늘에서 은사로 주어지기 때문에 복음 안다는 것을 힘으로 사용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다 알 수가 없어요.

 

은혜를 받아도 다 몰라요.

 

거긴 무한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한의 세계에서 태어났어요.

 

 

 

우리 몸은 유한에 가두어져 있어요.

 

유한이 무한을 담아내지를 못합니다.

 

다 알 수가 없어요.

 

알아도 유한이라는 자기 수준에서만 알아요.

 

 

 

무한을 알려면 하나님께서 계시로 알려주셔야 합니다.

 

설사 계시로 알려 준다고 하여도 그것도 유한한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알려주어도 우리 수준에 맞게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은혜를 주어도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 만큼만 은혜를 알아요.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받은 분량 밖으로 넘어가지 말고 자랑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 보다 더 깊고 넓은 것이 있기 때문에 지금 알려준 것도 유한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안다는 것으로 전부를 안다고 말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걸 알면 날마다 은혜를 사모하게 되어요.

 

성령의 깨닫게 해 주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친구에 대하여 조금 더 살펴봅시다.

 

 

 

친구란? 오래도록 사귄 사람을 말합니다.

 

옛말에 친구는 오래된 친구가 좋고, 옷은 새 옷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오래된 친구가 좋습니까?

 

이는 다 알기 때문입니다.

 

속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사귐을 통하여서 속마음을 알기 때문에 마음속에 있는 것을 친구에게는 털어 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친한 친구를 만나면 마음이 편하지만, 낯선 사람을 만나면 경계하게 되고 불편해요.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되면 본능적으로 그 사람에 대하여 다 알기까지는 경계를 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해를 끼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지 본능적으로 자기에게 유익이 되느냐 불이익이 되느냐!

 

유(有) 불리(不利)만 따집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다 알기까지는 자기 안에 것을 숨기게 됩니다.

 

하지만 죽마고우에겐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다 털어 놓지요.

 

왜? 죽마고우에겐 마음에 있는 것을 다 털어 놓습니까?

 

이는 그 친구와는 깊은 사귐을 가져서 서로를 깊이 알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오래된 친구는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란?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 말할 수 있는 사이를 말합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의 친구기 있었습니다.

 

누구인가 하면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벗이라고 했습니다.

 

 

 

벗에게 어떻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알려 주었습니다.

 

창세기 18장입니다.

 

 

 

창 18:16-17=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1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소식을 알려줍니다.

 

아브라함에겐 숨기지 않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지 그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게 친구에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에요.

 

 

 

소돔 고모라가 심판을 받을 것은 아브라함만 압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어떻게 합니까?

 

빌지요.

 

왜? 빕니까?

 

거기엔 조카 롯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카 롯은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이 떨어진다는 것을 몰라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압니다.

 

하나님이 자기 조카 롯이 있는 곳에 심판을 행한다고 하자 아브라함의 마음이 급해집니다.

 

아브라함은 잠이 안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친구가 되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려 준 것이 아브라함에게 유익입니까?

 

고통입니까?

 

고통이지요.

 

 

 

안다는 것은 고통을 동반하게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은 조카 롯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고통을 떠안은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친구들에 운명입니다.

 

 

 

여러분 자식이 공부를 못하면 왜? 부모의 속이 타들어갑니까?

 

왜? 자식이 공부를 안 하고 게임을 하면 부모의 마음이 아픕니까?

 

이는 부모는 공부를 안 하면 나중에 당하는 아픔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인생의 수(數) 만큼 살지 않아서 공부 못하면 나중에 세상에서 빌어먹는다는 것을 몰라요.

 

그러니 공부하여야 할 시기에 공부는 하지 않고 게임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부모는 가만있나요.

 

아니지요.

 

울지요.

 

기도하잖아요.

 

왜? 자식이 공부를 안 하는데 부모가 울고 잠을 자지 않고 금식하면서 기도합니까?

 

이는 부모의 울음을 통하여서 지식의 마음을 돌려세우기 위함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꼭 그 짝입니다.

 

조카 롯은 아무도 몰라요.

 

잠시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압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셨어요.

 

그러니 미치겠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기도합니다.

 

씨름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 소돔 고모라를 다 멸할지라도 롯은 살려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하나님께서 롯을 살려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랬어요.

 

아브라함의 기도는 예수님이 하신 기도와 같아요.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세요.

 

우린 철없이 롯처럼 살고 있어요.

 

얼마나 예수님이 급했으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기도하고 계시겠어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라고 하듯이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기 까지 예수님의 수많은 울음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더 얼마나 울어야 할지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말씀이 단 한군데 없어요.

 

모두가 우셨어요.

마르다를 보고 우셨지요.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잖아요.

 

왜? 우셨습니까?

 

평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정한 평화에 대하여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려 주셨듯이 알려 주신다고 합니다.

 

이걸 기쁘다고 해야 하나요!

 

슬프다고 해야 하나요!

 

복음을 알면 알수록 많이 아파요.

 

아는 만큼 많이 울어야 해요.

 

 

 

예레미야의 증거를 봅시다.

 

예레미야가 어떻게 말했는지를 봅시다.

 

예레미야 1장입니다.

 

 

 

렘 1:4-10=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열방의 선지자로 선택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곤 하나님이 예레미야의 입에 하나님 말씀을 둡니다.

 

이건 가서 외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뜻을 전하라는 겁니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통곡을 합니다.

 

아 슬프다!

 

왜? 슬프다고 합니까?

 

심판의 말을 전하여야 하니 슬픈 겁니다.

 

인간들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여야 하니 슬픈 일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소식을 전하여야 하기 때문에 아픈 겁니다.

 

 

 

좋은 말을 하면 왜? 슬프다고 하겠어요.

 

듣기 싫은 말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슬픈 겁니다.

 

선지자들이 다 이런 운명으로 살았어요.

 

듣기 싫은 소리 하다가 다 맞아 죽었어요.

 

 

 

구약에선 이스라엘 민족을 고발하였지만!

 

신약에선 우리 개인을 고발합니다.

 

우리 죄를 고발합니다.

 

우리의 멸망을 전합니다.

 

넌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넌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다 미움 받고 맞아 죽습니다.

 

 

 

이게 예수님의 친구 된 자들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그 운명을 지금 제자들에게 주시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울음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게 눈물로 씨를 뿌리게 하는 하나님의 농사법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이란? 이 땅에서 우는 삶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여야 하기 때문에 울어야 하는 아픔입니다.

 

하지만 그 아픔은 애 벌레가 나방이 되어 하늘을 날아가기 위한 아픔입니다.

 

천국은 이 땅에서 예수 때문에 슬픈 일을 당한 자들이 가는 곳이란 것을 잊지 마세요.

 

 

 

이 땅에서 우는 자들이 천국에서 어떤 대접을 받게 되는지 요한 계시록 21장을 봅시다.

 

 

 

계 21:1-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이 눈물을 닦아 준다고 합니다.

 

이는 우는 자만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천국엔 울지 않은 자는 갈 수가 없어요.

 

운다는 것은 고난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본성과 반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윗은 눈물로 음식을 삼았습니다.

 

주야로 눈물로 침상을 띠웠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눈물을 병에 담아서 하나님 앞에 기념이 된다고 했습니다.

 

 

 

시 56:8절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에겐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때가 주어집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어요.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없고!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슬픔이 없으면 위로도 없습니다.

 

 

 

이건 우리더러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십시오! 라고 하면 종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는 신앙입니다.

 

 

 

우린 모두가 이렇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연합이 되었기 때문에 벗어 날 수 없는 운명인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눈물로 통곡하며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셔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예수님을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시고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시고 주라 시인하게 만드셨습니다.

 

 

 

장차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흘린 눈물만큼 기쁨으로 갚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뿌린 눈물들이 모두가 알알이 보석처럼 하늘 예루살렘의 성전에 벽돌들이 되는 성도들을 낳게 되는 단초가 된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하늘 예루살렘 성의 기초 석에 12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름이 기록 되었다는 말은 예수님과 같은 영광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예수님과 같은 영광을 받을 수 있나요?

 

 

 

이는 예수님의 신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부는 신랑의 영광을 차지합니다.

 

이 영광된 자리로 초대하시려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우리를 친구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친구 됨을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름 없이 사라져야 할 죄인을 예수님의 친구라는 영광된 자리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주께서 간섭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보지 말고 그 환경 배후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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