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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81강. 끝까지 변치 않는 사랑 (요 13:1-11)

by coroa 2021. 11. 13.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81강. 끝까지 변치 않는 사랑 (요 13:1-11)

-.정낙원 목사

 

13:1-1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니다 하시니라”

 

사람은 미래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알고자 점술 객들을 찾아가 점(占)을 치는 겁니다.

이는 인간의 속성이 미래를 모르면 살아가면서 불안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점쟁이를 찾고 무당을 찾는 것은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무당들은 화(禍)는 막아주고 복(福)은 불러 오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교회 안이나 밖이나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어요.

교회 안에서는 목사들이 자칭 예언이라는 말로 개인의 길흉사를 점을 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신을 찾게 되는 것은 불안해서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늘 두려움으로 살아갑니다.

죄가 두려움을 몰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신이 노한다고 믿어요.

 

이는 모두가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상선벌악하는 신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의 노여움을 달래고 복을 받기 위해서 제사(예배)를 지내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가게를 개업하면 목사를 불러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이와 같아요.

또한 수능시험을 앞두고 목사에게 안수기도를 받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인간들이 신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제사로 신의 노여움을 달래고 복을 불러 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로보건데 인간에게 있어 신이란? 자기 삶을 도와주는 도우미에요.

철저히 자기중심주의에서 비롯된 신관입니다.

인간은 자기 이외는 몰라요.

오로지 자기 몸 밖에 없어요.

 

며칠 전 뉴스에 양산에 사는 30대 여인이 어린아이를 입양 한 후 각종 보험에 가입을 하고 아이를 일부러 병들게 만들어서 입원을 시켜 보험료를 타 냈다고 합니다.

이미 한 명은 입양 후 사망을 하였고,

그 후 또 다시 한 명을 입양해서 동일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왜? 그랬느냐 물으니 남편과 이혼을 하고 생계유지를 위하여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낳은 아이도 병으로 죽었는데 이 아이도 그렇게 죽임 당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경찰에서 수사를 한다고 합니다.

이 여인에게 아이란? 자신이 살아가기 위한 돈 버는 수단이었던 겁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세 아이가 희생당했어요.

 

이젠 모성애(母性愛)도 돈 앞에 사라지고 없어요.

돈의 가치가 자식보다 우선인 겁니다.

그러니 자식을 죽여가면서 까지 보험금을 타내려고 하지요.

이런 것을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고 하나요.

죄가 인면수심을 만들었어요.

 

같은 인간으로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씁쓸하고 서글프지요.

그러나 우리도 그 사람과 동일한 종자(種子)들이에요.

우리 속에도 그런 죄가 숨어 있어요.

그 여인은 드러냈고 우리는 감추고 있을 뿐이에요.

 

지난번에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울산이 고향인 군인이 전사를 했어요.

국가에서 전사자에게 지급되는 보상금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군인의 어미는 2살 때 집을 나가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리고 거기서도 자식을 낳고 잘 살고 있어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지금껏 코빼기도 안 보이고 연락도 없이 살았어요.

 

그런데 자식이 죽자 자기 자식이라고 보상금을 타 갔어요.

핏덩이를 버려두고 도망을 간 사람이 아들이 죽자 그 아들이 내 아들이라고 하면서 보상금을 달라고 나타난 겁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홀로 그 자식을 키웠어요.

그런데 살아 있을 땐 나 몰라라 하던 사람이 돈만 홀라당 챙겨 간 겁니다.

저희 옆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한참 시끄러웠어요.

 

죽은 군인의 누나인 딸이 그 어미에게 전화를 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니 낳아주었으니까 자기 자식이라고 하면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겁니다.

세상 적으로 보면 가히 인면수심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린 이런 일들을 접하면 본능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느냐고 비분강개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우리에게 닥친다고 한다면 우리 역시도 그럴 수가 있어요.

우리에겐 안 일어났을 뿐이에요.

우리 안에도 동일한 본성이 자리 잡고 있어요.

 

돈이 모든 가치의 최우선으로 두고 살아가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을 이길 장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은 그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누구라도 돈 앞에 이해관계가 얽히면 그렇게 될 수 있어요.

 

이 시대 돈이란 신이에요.

물질만능주의에선 돈 이외는 다른 신이 있을 수 없어요.

돈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매김한 세상에선 부모도 자식도 돈의 가치를 앞설 순 없어요.

이게 인간이고 세상이치에요.

 

우리 모두가 이러한 가치관이 통용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도 그 부류인 겁니다.

그나마 윤리와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억제되어 오던 양심이 이젠 점점 짐승화 되어가고 있어요.

몸뚱이를 끌어안고자 하는 짐승적 본능이 돈 앞에서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죄가 자기 육신 중심으로 움직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은 고통을 싫어해요.

편안하고자 해요.

이건 믿음과 상관없어요.

 

인간에겐 몸뚱아리가 신이에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듯이 인간은 육신을 중심으로 움직여요.

항상 “나” 에요.

 

내가 있고 부모도 있고!

내가 있고 자식도 있고!

내가 있고 신도 있어요.

결국 내가 신보다 우선이니 나 이외 다른 신은 없는 겁니다.

 

죽음에 쫓기는 인간들에겐 자기를 포기하고 신을 섬길만한 마음에 여유가 없어요.

인간들은 무슨 일이든지 항상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요.

인간은 무슨 일을 하여도 그 바탕엔 자기애(自己愛)가 깔려 있어요.

자기 유익을 위해서 타인을 사랑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결혼이에요.

결혼은 상호 이해관계로 하는 겁니다.

인간에게 있어 결혼이란 서로간의 이해가 얽힌 정략이에요.

내 결핍을 상대방을 통해서 채우고자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상대를 사랑한다고 위장을 해요.

자기 사랑을 위해 상대를 자기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겁니다.

이건 사랑이 아니고 자기 욕구를 이루기 위하여 상대를 이용하는 겁니다.

이용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좋아하는 거예요.

 

사랑이란? 자기를 비워 타인을 유익하게 해 주는 것이에요.

반면에 좋아하는 것은 타인을 통해 자기 유익을 채우는 겁니다.

사랑은 희생이고!

좋아하는 것은 거래에요.

 

인간들은 거래하고 살아요.

부모 자식 간에도 거래해요.

부모나 자식이나 서로에게 해(害)가 되면 다 떠나요.

세상에 내 편은 단 하나도 없어요.

아직까지 다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있기 때문에 내 편 인척 하고 있을 뿐입니다.

 

위에서 천안함 사건에서 언급한 자식의 주검에 대한 보상금을 타간 어미도 자기 행복을 위해서 핏덩이를 버리고 떠났어요.

그러다가 수십 년 동안 연락두절로 살다가 막상 자기에게 유익이 되니 내 자식이라고 하면서 보상금을 타 간 겁니다.

이건 부모나 자식이나 동일해요.

 

인간들은 사랑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대하지 마세요.

 

복음을 알면 부모도 자식도 기대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요.

결국 나와 예수님의 관계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관계로 남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어요.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사랑이야기에요.

 

예수님의 사랑만이 변하지 않는 사랑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사랑은 여기 있나니” 라고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한 것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기 탐심을 위하여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위장이 자기 유익에 반하는 일들이 일어나면 본색이 드러납니다.

자기 유익을 바라고 사랑한다고 결혼했다가 막상 살아보니 아닌 것 같으니 이혼하는 겁니다.

그것도 사랑해서 이혼한대요.

끝까지 위장하고픈 겁니다.

 

이게 신을 향하여서도 동일하게 나타나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그 내면엔 자기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요.

예수를 믿어도 자기를 위해서 믿고!

교회에 나오는 것도 자기 이익을 바라고 나와요.

 

자기에게 해가 된다고 하면 언제든지 떠납니다.

그러니 자기 사랑을 바탕으로 한 정략적인 신앙인 겁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말하는 신앙은 자기 유익에 따라서 항상 변하게 되어있어요.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 할 수가 없어요.

어느 누구도 자기 육신을 이길 장사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은 항상 자기 유익에 따라 변해요.

이처럼 인간들은 생각을 아침 저녁으로 고치고 바뀐다는 의미로 조변석개(朝變夕改) 라고 하고!

아침 저녁으로 마음이 움직이고 변한다고 해서 조석지변(朝夕地變)이라고 해요.

 

조석지변이라는 말에 뜻이 참 재미있어요.

문자적으로 보면 아침저녁으로 땅이 변한다는 말입니다.

조석지변이라는 말의 지는 땅을 말하는데 땅을 의인화(擬人化) 하여서 말하면 우리 육신을 말해요.

왜냐하면! 우리 몸이 흙(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마음은 자기 육신에 따라서 수시로 카멜레온처럼 변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조석지변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한마디로 인간은 몸뚱이 따라 변하기 때문에 믿을 것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은 곧 인간에게 나오는 모든 것은 전부 변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인간의 마음은 그림자처럼 수시로 변해요.

흔들리는 갈대처럼 늘 변동되어요.

 

어떤 농부에게 아둔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농부는 아들에게 일을 시켜볼 작정으로 소로 밭을 갈게 하였어요.

아버지가 밭이랑을 한 줄로 곧게 잘 갈려면 하나의 목표를 정해 두고 갈아야 된다고 알려줍니다.

그리곤 아버진 다른 밭에서 일을 합니다.

한 식경이 지난 후에 아들이 밭을 제대로 갈았는지 확인하러 갔더니 밭이랑이 갈 지(之)자로 엉망진창인 겁니다.

 

왜? 이렇게 밭을 갈았느냐고 물으니 아버지가 하나의 목표를 보고 갈라고 해서 자기는 저 앞에 있는 염소를 목표로 정해 놓고 갈았다고 합니다.

염소가 이리 저리 움직이니 그것 따라 갈다보니 갈 지(之)가가 된 겁니다.

움직이지 않는 소나무를 기준으로 하지 않으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쩜 이 시대 교인들의 믿음과 같아요.

이 시대 교인들이 믿음이 갈 지(之)자에요.

믿음이 변하고 흔들리는 것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는 예수를 믿어야 하는데 예수는 안 믿고 조석으로 변하는 자기 자신을 믿고 있어요.

자기 행함을 붙잡고 있는 겁니다.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것은 육신의 컨디션에 따라 수시로 변해요.

건강 할 땐 산을 옮길 만 하다가도 몸 아파보세요.

손 하나 까딱하기 싫어요.

젊었을 때 행하는 것과 늙어서 행하는 것은 달라요.

그러니 늘 자기 행실에 따라 희비하고 흔들리는 겁니다.

 

어떨 땐 천국을 따 놓은 당상처럼 자랑하더니 어떨 땐 풀이 죽어 지옥으로 가고 있어요.

이 모두가 자기가 붙든 믿음이 자기 컨디션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목욕탕에서 온탕 냉탕 넘나들듯이 하고 있어요.

사랑도 흔들리고 믿음도 흔들려요.

 

목사들의 설교도 마찬가지에요.

본문 따라 왔다 갔다 해요.

앞에선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고 뒤에 가면 행함이 없으면 짤린다고 하니 어느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춰야 할지 몰라요.

성경을 문자풀이 식으로 해석을 하니 앞 뒤가 다를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믿음이 흔들리는 겁니다.

뭘 믿어야 할지 몰라요.

 

입술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 뚜껑을 열어 보면 믿음은 온데간데없고 자기 행함을 믿고 있어요.

마음으로 안 믿어지면 자기 행함을 붙잡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자기 행함에 따라서 희비가 엇갈리는 겁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고 변함이 없다고 합니다.

그림자가 없다는 말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고정적이란 말입니다.

흔들림이 없다는 말입니다.

 

끝까지 지속 된다는 말입니다.

중간에 포기 되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한 일은 끝까지 보장 된다는 뜻입니다.

이를 두고 하나님은 식언치 않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하는 겁니다.

 

맞아요.

하나님은 식언(食言)치 못하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 하나 하나가 곧 창조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면 그 말씀이 창조의 능력이 되어서 반드시 성취를 해 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약속이라고 해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뭔가 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영생 한다는 겁니다.

영생 한다는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잖아요.

그럼 영생 한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어요.

그러므로 예수 안에는 영생이 있어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어요.

이는 예수 안은 영생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 당하지 않아요.

정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단 말입니다.

죄를 예수의 피로 가렸어요.

이걸 도말(塗抹)이라고 합니다.

 

도말이란? 페인트칠하는 것과 같아요.

더러운 죄를 예수의 피로 덧칠을 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겉에선 죄가 안 보이고 예수의 피만 보이는 겁니다.

예수 믿는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의 피로 덮어 주는 겁니다.

 

분명히 죄가 있지만 예수의 피로 덮었으니 죄로 여기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를 로마서에선 간과한다고 해요.

간과한다는 것은 그냥 지나친다는 겁니다.

죄를 죄로 인정치 않는단 말입니다.

 

분명히 죄를 지었는데 그 죄 값을 그에게 찾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대신해서 죄 값을 다 치렀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치 않겠다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독자적으로 보지 않고 예수님을 거쳐서 보아요.

예수님이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성도를 폭 감싸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 눈엔 죄인이 안 보이고 예수님만 보이는 겁니다.

 

수중 발레 알지요.

수중 발레는 수면 위에 펼쳐지는 그림을 보고 채점을 해요.

심판관은 수면 아래를 보지 않아요.

수면 위에 나타난 그림(얼굴)을 보아요.

수중 속에서 어떤 짓을 하든지 상관치 않아요.

 

우리의 구원이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되신 예수님만 보아요.

예수님만 물 바깥에 계세요.

우린 물 속에 있어요.

 

하나님은 물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신경 쓰지 않아요.

물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채점 대상이 아니에요.

즉 머리 아래 있는 우리의 행함은 심판 대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머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만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채점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를 묻지 않고 너는 무엇을 붙잡고 있느냐를 물어요.

너의 머리는 누구냐고 물어요.

다른 말로 너의 조상이 누구냐를 묻는단 말입니다.

 

네 조상이 아담이냐!

아니면 예수냐! 를 물어요.

아담 안에 있으면 아담의 행함으로 심판을 받고!

예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의 행함으로 심판을 받아요.

 

2차 대전 때 우리나라가 일본에 해방 되었어요.

맥아더 사령관이 히로히또 일본 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어요.

일본 왕이 항복을 하자 그 기세등등하던 일본군들이 쥐 죽은듯이 도망을 갔어요.

반면에 우리나라는 맥아더 사령관 때문에 만세를 불렀어요.

 

맥아더에 속하였느냐!

히로히또에게 속하였느냐 로 판단해요.

아랫 것들을 보고 결정하지 않고 윗 머리를 보고 결정해요.

 

지금 하나님이 성도를 그렇게 대하는 겁니다.

우리를 보지 않고 네 머리가 누구냐를 보아요.

머리가 예수이면 이긴 자이고, 머리가 아담이면 진 자에요.

그러니 나의 머리가 누구인지를 확인하세요.

 

머리가 아담이면 아무리 성화해도 지옥에 가고!

머리가 예수이면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천국에 갑니다.

이게 하나님이 판단하는 방법이에요.

 

하나님은 예수님 하고만 상대 하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이를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이 책임져 주는 거예요.

 

성도들이 하는 모든 일을 예수님이 책임지겠다고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담보로 제공했어요.

그러니 하나님은 성도들의 그 어떤 죄도 예수의 피를 보시고 간과해 주는 겁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죗값을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를 말해주고 있는 내용이에요.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자기 백성들의 죄 값을 대신 담당해 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증거하고 있어요.

 

“끝까지” 란? 불변한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끝까지 사랑하신다” 는 것은 책임진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일이 닥쳐도 취소되지 않고 확정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건 인간들 사랑에선 볼 수가 없는 사랑이에요.

인간들은 자기 유익에 따라 수시로 변하지만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기 약속을 지키세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해 주신다고 하는 겁니다.

 

이 끝까지 사랑이 믿어진다면 그 어떤 환경이나 두려움으로부터도 이길 수가 있어요.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믿음이 세상을 이겨요.

이 끝까지 사랑을 사도요한은 “온전한 사랑” 이라고 했어요.

온전한 사랑만이 두려움을 내어 쫓아요.

 

사람에게 두려움이 왜? 엄습할까요?

두려움의 근원을 알아야 그 두려움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있어집니다.

그럼 두려움의 원인을 추적해 보기로 합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두려움이 없었어요.

아니 두려움을 몰랐어요.

두려움은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알았어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 갑자기 하나님이 두려워졌어요.

선악과를 먹기 전에 하나님이 두렵지가 않았는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 하나님이 두려워졌다는 것은 곧 선악과 속에 두려움의 원인이 들어가 있다는 뜻입니다.

 

왜? 선악과를 먹자 두려움이 엄습하였을까요?

이는 선악과 속에 옳고 그름이라는 심판성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이란?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하는 겁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엔 모든 것이 좋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나자 좋고 나쁨으로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좋고 나쁨으로 나누기 시작합니다.

발가벗은 몸이 나쁨으로 보이고 옷을 입은 것이 좋음으로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 까지만 해도 벌거벗었음이 나쁨인 줄 몰랐는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 벌거벗음이 하나님 앞에서 나쁨으로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은 발가벗음을 나쁘게 보지 않는데 본인들이 나쁘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두려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겁니다.

 

이건 다른 눈을 가졌다는 거예요.

하나님 눈으로 판단하지 않고 자기 눈으로 판단하니 하나님 판단과 충돌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자기 생각을 집어넣고 따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과 대결 구도가 형성됩니다.

하나님과 적이 되고서야 어찌 두렵지가 않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두려움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선악을 아는 사람”이 죽지 않고서는 해소 되지 않아요.

선과 악을 아는 사람이 죽어야 두려움이 사라져요.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을 아는 사람을 죽이시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선악을 아는 사람을 죽임으로서 선악이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세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워하는 선악에 사람을 죽이고 두려움 없는 사람으로 살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진 놈을 죽이고 하나님과 같은 눈을 가진 자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이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살아나는 구원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죽이시는 하나님을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알다시피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역사를 합니다.

죽음은 생명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따라다니면서 죽이겠다고 해요.

살고자 하면 할수록 죽음도 살고자 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그림자처럼 쫓아다녀요.

 

아이러니 하게도 죽음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길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선악의 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에 쫓기는 인간은 더 집요하게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더 도망을 합니다.

결국 산다는 것은 두려움의 연속인 겁니다.

이렇게 살고자 하여서는 죽음이 주는 두려움을 이길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자기 몸뚱이를 챙기는 자기 사랑을 쫓아가는 것은 모두가 이 두려움 때문이에요.

두려움이 엄습하면 할수록 더욱 더 자기를 사랑하는 쪽으로 움직여요.

죽음에 쫓기기 때문에 본능이 반작용으로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을 낳게 만든 겁니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옛 사람의 본능이에요.

 

그러니 옛 사람은 무얼 해도 살고자 움직이는 겁니다.

결국 옛 사람은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하면서 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 죽음에서 해방키 위함입니다.

죽음이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이에요.

 

어떻게 해방시켰느냐 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옛 사람을 죽이는 방식으로 해방을 시켜요.

아주 역설적이지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옛 사람을 죽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 주세요.

 

마치 우리가 어릴 때 놀면서 하던 두껍이 집 교환하는 것과 같아요.

두껍아! 두껍아! 새 집 줄게 헌 집 다오! 라고 부른 노래 있잖아요.

헌 집은 아담이 준 집이고, 새 집은 예수님이 준 집이에요.

아담이 준 집은 헌 사람이고, 예수님이 준 집은 새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집을 바꿔주신 겁니다.

우리 죽을 몸에 새 사람을 심어준 겁니다.

새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죽어야 할 몸이 죽어도 죽지 않을 몸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하세요.

이상하게 믿어져요.

그러니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죽음이 두렵지가 않은 겁니다.

도리어 육신의 죽음을 소망으로 기다리게 되어요.

이건 믿음이 주는 소망이에요.

참 이상하지요.

 

저는 복음을 받고 제일 먼저 해방 된 것이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에요.

율법 아래서 열심히 특심해도 죽음이 두려웠었어요.

성화하여야 한다고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하여도 죽음은 두려웠어요.

그런데 믿음이 오니 성경이 믿어지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생기는 겁니다.

빨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미 결론을 알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문제가 해결되면 두려움이 사라져요.

왜냐하면! 모든 두려움은 살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셨어요.

 

죽고자 하는 사람에겐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고 도리어 반가운 겁니다.

그러니 예수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난 성도는 죽음이 두렵지가 않고 도리어 기쁜 겁니다.

이 두려움 없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온전한 사랑인 겁니다.

믿음은 이 온전한 사랑을 몰고 와요.

 

믿음이란? 어떤 대상과 그 내용에 관한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 속에는 하나님이 믿으라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한 일이 있어요.

하나님이 믿으라고 한 대상은 예수님이세요.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일은 유월절 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겁니다.

 

믿음이 오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믿어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의미를 알게 되어요.

예수님이 하신 일이란? 세상 죄를 지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죽으셨어요.

자기 백성이 죽어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죽은 겁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었으니 예수 안에 있는 자기 백성들은 죄가 없는 거지요.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신 겁니다.

죄를 사해 준다는 것은 죽음에서 해방시켜준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자기 피로 죄사함을 주는 언약을 맺었어요.

 

이름하여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모든 죄에서 용서해 준다는 겁니다.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 받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이 오면 이 새 언약이 믿어져요.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약속이 뭔 줄 아세요.

약속이란? “묶는다” 는 뜻입니다.

둘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것을 약속이라고 해요.

참 재미있지요.

 

하나님이 예수님과 성도를 샴 쌍둥이처럼 한 몸으로 묶어 놓았어요.

사도 바울은 이걸 “접붙임”이라고 했어요.

한 몸으로 붙여 버린 겁니다.

이걸 결혼이라고 해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짝 지워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짝 지워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말은 남녀 간에 결혼하고 이혼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성도가 예수님에게 접붙임 당한 구원이야기에요.

하나님이 예수님과 성도를 한 몸으로 묶어 놓았으니 그 어떤 것으로도 나누이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그 누구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 성도와 예수님은 한 몸인 겁니다.

항상 함께 있어요.

일을 해도 함께 일하고 잠을 자도 함께 자요.

한 몸인데 예수님이 머리이고 성도는 지체에요.

머리가 지체를 지탱시켜요.

 

머리란? 생명을 공급해준다는 뜻입니다.

지켜 준다는 뜻입니다.

몸은 머리 때문에 사는 겁니다.

머리가 없으면 몸은 죽어요.

머리를 뿌리라고 해요.

 

요한복음 15장에서 성도와 예수님의 관계를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 하셨어요.

성도를 가지라고 하고 예수님을 뿌리라고 했어요.

뿌리가 가지에게 생명을 공급해 줘요.

 

가지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어요.

가만히 있으란 말은 아무 것도 안한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 노력으로 살지 않는단 말입니다.

뿌리에서 주는 것을 공급받으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에요.

뿌리가 주는 게 있어요.

계속해서 생명을 공급해 주어요.

그러면 가지는 뿌리가 공급해 주는 힘으로 잎도 피우고 꽃도 피우고 열매를 맺어요.

 

이런 것은 자연히 나타나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삐져나와요.

이걸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이 주님을 사랑하게도 하고!

형제를 사랑하게도 하고!교회에 봉사하게도 하고!

헌금도 하게 하고!

전도도 하게 하세요.

 

그러니 뿌리와 연결이 되어 있는 가지는 뿌리가 주는 것을 토해 내면 되어요.

가지가 독자적으로 뭘 하려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뿌리가 주면 하고 안 주면 안 하면 되어요.

그러나 뿌리에게 연결되어 있으면 반드시 뿌리는 생명을 가지에게 공급을 해 주어요.

생명을 공급해 주지 않는 뿌리는 그 뿌리 자체가 죽은 뿌리이므로 가짜에요.

 

예수라는 뿌리는 영생하는 뿌리이기 때문에 잠시라도 생명을 가지에게 중단한 적이 없어요.

항상 공급을 해요.

이걸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해요.

이런 상태를 일컬어 물가에 심기운 나무라고 하는 겁니다.

 

남진이라는 가수가 “둥지” 라는 노래로 불렀잖아요.

 

“넌 그져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 줄게!

내 품에 둥지를 틀어!”

 

이걸 예수 안에서 나는 죽었고 내 안에 예수가 산다고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고 예수의 생명으로 산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 놓았어요.

우리를 예수라는 둥지에 가두어 놓았어요.

예수님에게 묶어 놓았어요.

이게 새 언약이에요.

 

성경은 예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증거하고 있어요.

창세전 언약이 바로 예수 안에서 무조건 용서 받는다는 언약이에요.

자기 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죄사함 받는다는 언약입니다.

 

예수님은 이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어요.

 

그러니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유월절 양이 되어서 세상 죄를 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어야 “하늘이 있는 장자들의 총회”에 참석할 자기 백성들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의 일을 위해 오셨어요.

아버지의 일이란? 아들을 죽이는 겁니다.

예수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에요.

 

아들을 죽이는 것이 아버지의 일이다!

참 이상하지요.

이상하지만 사실이에요.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아들을 죽이는 일은 벌리세요.

아들이 죽어야 하는 것이 만유의 주가 되는 수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만유에 주가 되시는 일을 벌이세요.

주란? 주인이란 말도 되지만 심판하는 분이란 뜻이에요.

또한 주는 공경 대상이란 말이에요.

결국 하나님은 아들을 만유로부터 공경 받게 하시는 일을 벌리신 겁니다.

이 일을 하시려고 만물을 창조하셨어요.

 

천국에 가면 만물이 어린 양을 찬양하지요.

왜? 어린 양을 찬양합니까?

이는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살려 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는 것은 만유의 주가 되기 위한 수순이에요.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나!

세상 죄를 지고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죽은 것이나!

죽음에서 부활하여 승천하여 주가 되신 것이나!

장차 만왕의 왕으로 재림 하시는 것이나 모두가 예수님이 만유의 주가 되는 수순들이었어요.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로 죽는 겁니다.

그 한 알 속엔 수많은 알갱이가 들어가 있어요.

그 알갱이를 틔워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겁니다.

이걸 로마서에선 “맏아들 만들기”라고 합니다.

 

농부가 밀알을 땅에 심는 것은 죽으라고 심는 겁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이 밀알인 예수님을 밭이란 세상에 보내서 심은 겁니다.

죽인 겁니다.

이제 죽임 당한 그 한 알을 통하여서 많은 열매를 맺힙니다.

결국 하나님은 예수를 죽이고 한 민족을 얻고자 하신 겁니다.

 

예수님 안에는 한 민족이 들어가 있어요.

마치 아브라함 안에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들어가 있듯이 예수님 안에도 천국백성이라는 한 민족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민족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언약한 그 때가 된 것입니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유월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날이 가까워 옵니다.

시나리오를 보니 자신이 유월절이 되면 십자가에서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의미를 알려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생전에 안하던 일을 하니 제자들이 당황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주님 왜? 이러십니까?

이러지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님 발을 씻겨드려야 옳지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 발을 씻기느냐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법은 없어요.

남들이 보면 욕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아니 제자들이 선생의 발을 씻겨야지 어찌 선생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느냐고 핀잔을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제발 가만히 계세요.

우리가 주님의 발을 씻겨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내 발은 절대로 씻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야~ 이놈아!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넌 나와 상관이 없어!

내가 널 씻겨 주어야 된단 말이야!

이건 발을 씻는 일이 아니야!이건 죄를 씻는 일이야!

그러니 내가 너를 씻겨 주는 것이지!

너희가 나를 씻겨 주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라고 합니다.

 

물론 본문에선 그런 말을 하시진 않았어요.

나중에 성령이 오시고 나니 그렇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 무슨 말인가요?

왜? 예수님이 제자들을 씻겨 주어야 합니까?

인간들의 도리로 보면 제자들이 주님의 발을 씻겨 드려야지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아니야! 내가 너희 발을 씻겨 주어야 된다고 합니다.

 

이는 단순하게 발 씻겨 주는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가 너를 씻겨 주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뭔가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져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세요.

그래요.

이건 단순히 예수님의 겸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이걸 겸손으로 오해하여 세족식을 하면서 겸손에 대한 퍼포먼스를 하고 있어요.

그럴 만도 한 것이 예수님께서 너희들도 이같이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봐라!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서로 발을 씻겨 주라고 했지 않느냐!그러니 서로 발을 씻겨주는 종의 자세로 남을 섬기는 마음으로 대하라고 합니다.

이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 겁니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다고 했지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 했다는 것은 전부 예수님 이야기란 말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는 곧 십자가 이야기에요.

십자가 이야기는 곧 죄사함 이야기에요.

 

예수님의 피로서 죄사함 받는 이야기가 곧 창세전 언약 이야기이에요.

모든 성경이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요.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모든 성경을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로 조명을 해 주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도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겁니다.

 

만약에 오늘 본문이 세족식 이야기라고 한다면 사도들이 서신서 속에 발 씻겨준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성만찬이나 세례와 같이 제자들이 행하였어야 한다구요.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제자들이 성도들에게 발을 씻겨준 이야기가 없어요.

 

제자들이 세족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발을 씻겨준 사건은 세족식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알았기 때문인 겁니다.

성령이 임하고 나니 예수님이 자신들이 발을 씻겨준 것은 죄사함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세족식을 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가는 곳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피로 죄 씻음 받았다고 증거하였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너도 예수님 피로 죄사함 받았지!

나도 예수님 피로 죄사함 받았어!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 피로 죄사함 받았다는 것을 증거하자고 했어요.

서로 서로에게 예수님의 피로 씻김 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세족식 하는 거에요.

 

발을 백날 씻어도 죄가 사해지지 않아요.

그러니 세족식 하지 마세요.

그런 퍼포먼스에 미혹당하면 안 되어요.

 

성경에 나와 있다고 흉내를 내는 것은 사기에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흉내 내려는 것은 복음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에요.

예수님이 하신 일 자체가 모두가 복음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지 않아도 복음을 믿으면 되어요.

 

세족식 안 해도 세족식에 의미를 알면 되어요.

유월절과 발 씻음은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이 세족식 사건을 유월절과 연계시켜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유월절을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는 것에 포카스를 맞추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합니까?

유월절 전에 예수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알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지요.

예수님이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을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으로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이 끝까지 자기 사람들의 죄 문제를 담당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유월절이 뭡니까?

어린 양이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대신 죽는 거잖아요.

출애굽 할 때 세상에 모든 장자가 죽을 때 이스라엘의 장자 대신 어린 양이 죽었잖아요.

어린 양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의 장자는 죽음에서 살아났어요.

 

지금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는 겁니다.

그래서 만찬 때에 포도주와 빵을 주시면서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했어요.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흘리는바 새 언약의 피라고 했어요.

 

옛 언약에선 양이 죽었지만 새 언약에선 예수님이 죽는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 피를 흘리십니까?

자기 백성들에게 죄사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말로 죄를 씻겨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자기 피로 죄 씻김 받는 것을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내가 너희 죄를 씻겨 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발을 씻겨 준다고 하니 난 싫습니다! 라고 거절을 하자!

야! 이 놈아!

내가 너를 씻겨주지 않으면 넌 나와 상관이 없어!

나와 상관없으면 넌 지옥에 가야 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씻겨 준다는 것은 죄는 예수님이 해결해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린 죄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피 흘린다고 죄가 사라지지 않아요.

우리 피는 죄인의 피에요.

죄인의 피는 개 돼지 피나 다름없어요.

그래서 죄인을 짐승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백날 성화하여서 의롭게 되고자 하여도 말짱 꽝이에요.

 

죄는 예수님의 피로서만 사함을 얻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죄는 죄 없는 분만이 책임을 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죄를 책임 질수가 없어요.

죄인이 책임을 져 봐야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선 의가 나오지 않아요.

그러니 죄인이 내가 죄를 책임지겠습니다! 라고 하여도 책임지는 것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는 죄 없는 내가 책임져 주는 것이지 너희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예수님이 발을 씻겨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또 오해하기를 그럼 내 몸과 머리도 씻겨 달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아직까지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 목욕을 시켜 달라고 하지요.

이에 예수님이 이미 목욕한 자는 온 몸이 깨끗하니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목욕하였다는 말은 죄 사함 받았다는 말입니다.

거듭났다는 거예요.

구원 받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 하였다는 것은 곧 구원 받았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영역 안에 들어와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오면 이 사실이 믿어질 것입니다.

 

구원은 마치 출생과 같아요.

엄마 뱃속에서 한 번만 태어나면 되지 두 번 세 번 태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이처럼 거듭나는 것은 단회적인 것이지 반복적인 것이 아니에요.

이런 거듭남을 목욕이라고 은유적으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이미 목욕을 하였다는 것은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한번 죄사함을 받은 자는 다시 죄사함 받을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들은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발을 씻어주는 것은 너희는 이미 목욕한 자들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넌 이미 목욕했기 때문에 발만 씻겨 주는 거야!

그러므로 두 번 목욕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럼 발 씻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건 날마다 예수님의 피 뿌림 안에서 살고 있음을 알게 하신다는 겁니다.

우린 비록 구원을 받아도 몸은 여전히 죄의 몸이에요.

죄를 짓고 살아요.

 

우리 몸은 죄를 이기지 못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낫기 때문이에요.

육신은 죄를 생산하는 공장이에요.

이건 우리의 의지와 각오의 문제가 아니고 본질의 문제에요.

그러므로 발 씻음이 필요한 겁니다.

 

발 씻음이란? 예수님 피로 용서 받았다는 것을 늘 상기하는 겁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늘 깨닫게 하세요.

믿음으로 살게 하세요.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서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니에요.

우린 죄를 못 이겨요.

육신은 죄를 이길 수가 없어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해서 할 수가 없어요.

 

이걸 아시고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날마다 믿어지게 하시는 겁니다.

성령이 예수의 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세요.

마음 판에 예수의 피로 용서 받고 산다는 새 언약을 새겨 놓으신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하면 예수님의 피를 내 보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 주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믿어지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사단의 참소를 막아 주신다는 겁니다.

사단은 날마다 참소해요.

 

욥기를 보면 사단이 하는 일이 나타나지요.

성도라 할지라도 길을 걸으면 발이 더러워지듯이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늘 죄를 지어요.

그럼 사단이 참소합니다.

이럴 때 예수님께서 변호사가 되셔서 성도를 하나님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겁니다.

이를 발을 씻겨 준다고 하는 겁니다.

 

사도요한의 증거를 봅시다.

 

요한복음 17장 입니다.

 

요 17:9-17=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장은 대 제사장으로서의 기도에요.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겁니다.

나는 이제 아버지께로 가고 제자들만 세상에 남겨둔다고 합니다.

 

세상은 알다시피 마귀가 장악하고 있어요.

그러니 제자들도 마귀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마귀는 율법으로 인간의 행함을 공격해요.

인간의 육신은 마귀의 참소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육신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참소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 벗어 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저 아이들은 내 것이니 지켜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저희들을 마귀의 궤계에 넘어지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용서 받은 진리 가운데서 승리하게 해 달라고 하는 거에요.

이건 마치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것과 같은 내용이에요.

사도요한은 이걸 더 구체적으로 말한 곳이 있어요.

 

요한일서 2장입니다.

 

요일 2:1-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보세요.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이 대언한다고 하지요.

대언한다는 것은 변호한다는 말입니다.

왜? 변호하느냐 하면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변호하는가 하면 자신의 피 흘리심으로 변호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내가 저 놈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다고 자기 피를 가지고 변호하세요.

 

아버지는 그 예수의 피를 보시고 성도를 용서해 주세요.

이걸 예수님이 발을 씻겨 준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죄사함 받은 성도가 잊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한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게 믿어져야 흔들림이 없어요.

우리가 흔들리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을 잊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았음이 안 믿어지니 성화하여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구원을 누리면 되는데 안 믿어지니 구원을 이룬다고 난리를 치는 겁니다.

 

마치 갈멜산에서 자기 몸을 학대하면서 신을 찾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같아요.

엘리야는 약속을 붙잡고 주여 하니 그냥 하늘에서 왜? 하고 불로 응답해 주잖아요.

지금도 성화주의자들은 자기 몸을 학대하고 있어요.

내가 이렇게 열심과 충성을 하는데도 안 봐 주실 겁니까! 라고 밤낮으로 데모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믿음 속엔 우리가 할 일이 하나도 없어요.

오직 예수님이 하신 일만 있어요.

그러니 믿음 속에는 예수님이 하신 일만 담겨져 있어요.

예수님 피만 있어요.

그러므로 믿음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이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겁니다.

 

베드로는 아직 이러한 예수님의 끝까지 책임져 주는 사랑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이니까요.

후일에 성령이 오시고 난 후에 알았어요.

성령이 오고 난 후 예수의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고 증거하며 살았어요.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행한 것이기 때문에 이성적으로는 잘 믿어지지가 않아요.

이 약속은 성령이 와야만 믿을 수가 있어요.

 

성령이 이걸 믿게 하세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죄 가운데서도 늘 담대할 수가 있는 겁니다.

자기 행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성령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자기 행함으로 인하여 넘어지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피로 내 행함을 도말하심이 믿어져요.

예수님의 피가 밤새 내린 눈처럼 내 모든 죄를 하얗게 덮어주심이 믿어져요.

예수님의 피가 나를 폭 감싸요.

예수님이 나보다 더 넓고 더 길고 더 높고 더 깊다는 것을 알아요.

나의 모든 죄를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넉넉히 다 감싸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고 담대하게 사는 겁니다.

예수님이 변호사로 계신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사도요한은 내가 너희가 죄를 안 짓기를 바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이고 실제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변호해 주시듯이 발을 씻겨 주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변호해 주어야 해요.

그래서 대언자를 말하기 전에 우리의 실존을 먼저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요한일서 1장을 봅니다.

 

요일 1:8-10=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만일 죄 없다 하면 그 속에 진리가 없다고 하지요.

죄 없다 하는 것은 죄 안 짓는다는 말이에요.

난 죄를 안 지을 수 있어!

난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성화주의자들은 지금 거짓말 하고 있어요.

그들은 성령으로 죄를 이길 수 있다고 하거든요.

과거엔 죄를 못 이겼지만 이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긴다고 해요.

열심히 기도해서 성령 충만 받으면 된다고 해요.

 

시도요한은 지금 이런 사람은 그 속에 진리가 없다고 합니다.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 믿는 자란 말이에요.

그러니 자기 주제가 어떤 줄도 모르고 죄 안 짓는다고 말하는 겁니다.

죄를 안 짓거나 이긴다면 예수님이 변호 해 줄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이 발을 씻겨줄 필요가 없다구요.

 

그러니 죄 안 짓는다고 하는 사람은 그 속에 진리가 없는 것이고!

거짓말 하는 자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난 죄 안 짓겠다고 하는 것이 죄에요.

죄인이 죄를 이길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죄에요.

이런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분으로 만들어요.

 

하나님은 죄를 이길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주세요.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어요.

죄사함은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지지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주어지지 않아요.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넘어 가세요.

 

출애굽 때 장자가 죽어질 때 그 재앙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보고 넘어 갔어요.

하나님에겐 인간의 행함은 안중에도 없어요.

오로지 그 아들의 피 뿐이에요.

지금 예수님이 그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가 되어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이나 성화주의자들처럼 자기가 죄를 안 짓고 죄를 이길 수 있다고 하면 하나님은 예수를 헛 죽이고 만 것이 되어요.

난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고 죄 안 짓는다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죄인에게서 죄 아닌 것을 찾고자 하는 것이 죄에요.

아니 죄인에게서 어떻게 의가 나옵니까.

의가 나오면 죄인이 아니지요.

죄인에게선 의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죄인인 겁니다.

 

죄인에게선 죄만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이 발을 씻겨 주시듯이 죄를 씻어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겁니다.

내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에요.

 

이건 마치 성막에 제사장들이 물두멍이 손발을 씻고 성소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이미 더러워 질 것을 아시고 물두멍을 준비해 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난 안 더럽거든요! 라고 하면 그 물두멍을 만들어 놓은 하나님이 완전히 바보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쓸데없는 것을 만들어 놓은 꼴이 되잖아요.

이게 얼마나 하나님을 모욕하는 처사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발 안 씻겠다고 하는 것은 난 죄 안 짓고 살래요! 라는 말과 같아요.

그러니 예수님이 그래!

그럼 넌 내 피가 필요가 없네!

그렇다면 넌 나와 상관이 없구나!

그렇게 된 다구요.

 

바리새인들이 그랬어요.

자기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산대요.

예수가 필요 없대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럼 알았다! 하시곤 약하고 천한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씻겨 주시는 겁니다.

 

성경이 강한 자라고 하는 것은 힘 쎈 놈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로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를 말해요.

반대로 약한 자는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말해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는 예수님께 씻겨달라고 해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기 사람이란? 스스로가 죄인임을 아는 자들이에요.

예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약한 자들이에요.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에요.

그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 “끝까지 사랑한다” 는 의미를 알겠습니까!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끝까지 책임진다는 말이에요.

끝까지라는 말은 제자들의 조건에 치우침이 없이 일방적으로 세상 끝까지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이건 예수님이 자기 스스로와의 약속이에요.

 

마치 구약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과 같아요.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내 목숨을 걸고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겠다는 표시로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이 홀로 지나가신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복을 안 주면 죽는다는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 목숨을 걸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어요.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런 약속을 하고 계신 겁니다.

내가 반드시 내 죽음을 걸고서 너희 죄를 씻겨 주겠다고 합니다.

그 어떤 죄에서도 건져주겠다는 뜻입니다.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해도 난 너희를 끝까지 천국으로 데리고 가고 말겠다고 약속을 하고 계신 겁니다.

 

이 얼마나 위로에 말씀인가요.

이건 마치 아버지가 어린 아이에게 아빠가 지켜 줄게 라고 하는 말과 같아요.

아무 걱정 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중간에 포기됨이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원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원함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린 구원해 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우린 구원의 필요성도 몰라요.

 

마치 잃어버려진 양처럼 내가 잃어버려진 자인 줄도 모르고 살았어요.

그냥 버리진 대로 고아처럼 거지같이 살았다구요.

그런데 목자 되신 예수님에 의해서 찾긴바 되고 난 후에 야! 내가 저주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찾긴바 되고 보니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져진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놀라는 겁니다.

찾긴바 되고 보니 구원이 엄청난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입만 열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를 토하게 되는 겁니다.

이걸 그 입술의 “찬미의 제사”라고 해요.

 

이런 구원이 우리의 조건에 따라서 변동되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그 어떤 것으로도 이 구원에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워요.

왜? 끊어지지 않나요?

예수님과 묶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변치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람의 조건을 보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들을 그냥 불쌍히 여겨서 구원해 주셨어요.

우린 세리와 창기들이에요.

우리의 구원에 바탕엔 하나님의 긍휼이 깔려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겁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에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불쌍히 여겨주셨어요.

순전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마음이에요.

이걸 은혜라고 해요.

 

세상은 법이 지배해요.

법이 지배하는 세상에선 은혜란 낯설어요.

그러니 은혜로 주어진 구원이 무엇인지 세상 사고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간음 중에 붙잡힌 여자를 일방적으로 용서 해주는 예수님의 행동은 너무도 생경해요.

아니 용서를 해도 좀 꾸지람을 하고 용서 해주던가 해야지!

그냥 무조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용서를 해 주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겁니다.

 

용서 받는 여자도 낯설긴 마찬가지에요.

처음 당하는 것이니 낯설 수밖에요.

우리도 무조건 용서 해준다는 것이 낯설어요.

익숙지 않아요.

 

그러니 자꾸만 내 꼬라지를 살피게 되는 겁니다.

이러고도 괜찮을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겠지!

자꾸만 자기가 죄의 경중을 따지고 있어요.

하나님 앞에선 죄의 경중은 없어요.

큰 죄, 작은 죄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큰 죄 작은 죄로 따져요.

남을 미워한 것은 용서가 되어도, 살인 한 것은 용서가 안 되겠지!

남에 밭에 호박 따 오는 것은 용서 해 주어도, 강도질 한 것은 용서가 안 되겠지!

마음 속으로 음욕을 품은 것은 용서해 주어도, 간음한 것은 용서가 안 되겠지!

자기 몸에서 행한 것을 자꾸만 큰 것 작은 것으로 나누어요.

 

여러분 예수님 우편에 달린 강도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를 저지른 자에요.

십자가형은 오직 악독한 자만했어요.

너무도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로마 사람은 십자가형을 하지 않았어요.

십자가에 달아서 죽이는 자는 죄인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죄인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용서해 주셨어요.

어느 것은 용서하고 어느 것은 용서하지 않는 것이 없어요.

용서하면 다 용서하고 용서하지 않으면 다 용서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그랬지요.

호리라도 다 갚지 않으면 옥에서 나오지 못한다고!

이는 곧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은 털끝만치라도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자기 행함에 경중을 따지는 사람은 그 속에 믿음이 없는 사람인 겁니다.

믿음이 없으니 자꾸만 자기 자신을 살피게 되는 겁니다.

제발 자기 꼬라지로 낙망하지 마세요.

우린 본성적으로 이런 함정에 자주 빠져요.

그래서 내 꼬라지만 보였지 예수님의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 겁니다.

 

이게 마귀의 미혹이에요.

마귀는 항상 약속을 잊게 하고 자기 자신을 살피게 만들어요.

자신이 발을 씻게 만들어요.

자기가 자신의 죄를 해결하겠다고 덤벼요.

결국 허공에다 헛 주먹질 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이 말씀으로 뒤통수 때리면서 야! 너 왜 또 헛지랄 하는데! 라고 합니다.

그럼 예수님 피가 보입니다.

새 언약이 믿어져요.

이게 우리가 일생동안 싸우는 싸움이에요.

 

우린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우리 안에는 법이 본능적으로 작동을 해요.

법에겐 은혜가 부담스러워요.

잘못 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응징을 당해야 시원해요.

응징 당하지 않으면 도리어 불안하고 찜찜해요.

우리 몸뚱아리 구조가 그래요.

 

예를 들어서 아내가 밤늦게 술 먹고 들어왔다고 생각합시다.

그럼 당연히 남편이 큰 소리로 나무라든가 아니면 뺨이라도 때려주어야 죄책감이 사라져요.

욕을 먹고 뺨을 맞았으니 이젠 죄값을 치렀다고 생각해서 시원한 겁니다.

그러면 잠도 편하게 자요.

이게 자기 몸으로 죄값을 치루어야 안심이 되는 법 아래서 난 육신의 본성이에요.

 

그런데 남편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면 불안해서 못 살아요.

잠도 안 와요.

본인 스스로가 이 인간이 왜? 아무 소리를 안 할까!

뭔가 한 마디 큰 소리라도 쳐 주어야 잘못을 탕감 받은 것이 될 터인데 말이죠.

이게 법에 속한 사람의 마음이에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 그래요.

예수님이 너 그러면 안 돼 라고하든지!

야! 이 미친년아 왜? 그런 짓을 했어 라고 좀 뭐라고 해 주어야 자기가 속이 시원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냥 일방적으로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고 합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나 그를 탄핵하던 바리새인들이나 예수님의 행동은 감당 할 수가 없어요.

세상엔 이런 법은 없기 때문이에요.

 

세상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칼에는 칼로 보답하는 곳이에요.

이게 율법이에요.

간음하면 돌에 맞아 죽는 곳이에요.

여인은 차라리 돌 몇 개 맞는 것이 편해요.

그런데 돌 하나도 던지지 않고 그냥 용서 해 준대요.

 

간음 중에 잡힌 여인도 그 속엔 법이 있어요.

법 아래서 태어나서 법 아래서 살았어요.

그러니 법대로 해 주는 것이 편안해요.

그런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무조건 용서라는 것을 예수님이 해 주시니 도리어 몸이 불편하고 예수님이 이상한 겁니다.

 

우린 간음 중에 잡힌 여인과 같아요.

우리도 법 이래서 태어났어요.

그 법 아래서 살았구요.

 

십일조 떼어 먹으면 집에 도둑이라도 들어와서 패물을 훔쳐 가야 편해요.

주일날 교회오지 않고 놀러 갔으면 다리라도 삐끗해야 내 그럴 줄 알았다고 위로 받아요.

고 3 수험생이 시험 준비한다고 교회 안 오다가 대학에 떨어져야 내 그럴 줄 알았다고 해요.

이런 사고는 우리의 본성 속에 들어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상선벌악하는 하나님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벌을 받아야 할 놈을 도리어 용서해주세요.

지옥에 가야할 놈을 천국으로 보내준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짤라 내야 하는데 그냥 보듬어 준단 말이에요.

그러니 고맙기도 하지만 신기한 겁니다.

세상에 이런 사랑도 있나 싶어요.

 

그런데 성령이 깨닫게 하시면 이게 믿어져요.

낯설지가 않아요.

얼마나 위로가 되는 줄 몰라요.

그러니 감사가 되고 찬양이 나오는 겁니다.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면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이 주어진 것이란 것이 믿어져요.

자신의 실수로 인하여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이 믿어져요.

하나님은 내가 잘못한다고 주신 사랑을 거두어 가시는 분이 아니란 것이 믿어져요.

그러니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일컬어 식언치 않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이라고 했잖아요.

이는 기분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변하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왜? 변하지 않고 변덕스럽지가 않은가 하면 성도의 구원은 인간과 약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과 약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 속엔 하나님의 자존심이 담겨져 있어요.

야곱은 태어나기 전에 약속을 받았어요.

야곱을 구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이 야곱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구원을 이루어내고야 마는 겁니다.

야곱은 지옥에 가고 싶어도 못가요.

그럼 하나님의 약속이 공수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지옥 갈 짓을 해도 환도뼈를 부러뜨려서라도 천국으로 질질 끌고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강원도 삼척에 가면 산불로 태워진 나무들을 가지고 조각을 해 놓았어요.

그냥 불에 태워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들이에요.

그런데 조각가가 주어서 각양의 모습으로 멋지게 조각품을 만든 겁니다.

 

조각가가 불에 탄 옛 것을 톱으로 켜고 대패로 밀고 끌로 파내고 사포로 닦아내고 페인트를 칠해서 불에 탄 나무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놓았어요.

전 그것들을 보면서 많은 은혜를 받아요.

명절 때 그곳을 지나다니며 늘 보면서 내가 바로 저기 서 있는 조각목이라고 생각해요.

 

나도 불 속에서 타 버릴 소나무와 같은 자였어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냥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으로 쑥 들어가야 할 놈이었다구요.

그런데 조각가 되신 예수님이 나를 불 속에서 건져내서 예수님의 신부라는 조각품을 만들어 낸 겁니다.

조각품 속에 조각가의 숨결이 담겨져 있듯이 내 속에도 예수님의 숨결이 담겨져 있어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를 조각가가 주워서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듯이 우리 예수님이 성도들을 선택해서 멋진 인간들을 만들어 내세요.

법 아래서 눈만 뜨면 법! 법하면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던 그런 인간을 말씀이라는 톱으로 켜고 대패로 깎아내고 사포질을 해서 은혜로 참아주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내세요.

 

물론 서툴고 미흡하지만 말이에요.

과거의 법 아래 내가 아닌 은혜의 사람으로 만들어내세요.

완벽하다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에게 없던 것들이 가물에 콩 나듯이 간헐적으로나마 나타난단 말입니다.

어디서 그런 관대함이 나오고 용서가 나오고 은혜가 나온단 말입니다.

옛날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한 여름에 여우 비오듯 하지만 나타난단 말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열심히 빚어낸 결과물이에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존심 때문에 우리를 끝까지 간섭하고 붙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게 없던 것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는 곧 내 안에 예수님이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세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없던 것들을 툭툭 던져 내면서 야~! 정낙원이 너 안에 내가 있다고 알려주시고 계신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취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끝까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구원이 확실한 것은 이처럼 변함이 없는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 때문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이 끊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많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좀 푹 젖어 드세요.

성도는 이 끝까지 지켜주는 예수님의 사랑에 흠이 가지 않도록 싸워야 해요.

다른 요소가 첨가 되지 않게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행함이 섞이지 않게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성도란? 은혜 안에 있는 자이지 행함에 있는 자가 아니에요.

 

구원이란? 선행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구원을 행함으로 지키려고 하지 마세요.

구원 받은 자로서 선행을 행하시되 그 선행을 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의는 오직 예수님 피 밖에 없습니다.

 

은혜를 법으로 바꾸지 마세요.

그냥 은혜로 남겨두세요.

그냥 하나님께 빚지고 사세요.

그 빚을 갚으려고 하지 마세요.

빚진 자로 감사하며 사세요.

 

성령은 예수님의 행위에 다른 것이 섞이지 않도록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세요.

우리 마음속에 인간의 의가 섞이지 않게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의는 포도주와 같고 인간의 의는 물과 같아요.

포도주에 물이 섞이면 변질되고 썩어요.

맛을 잃어버린단 말입니다.

 

죄를 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의로우신 예수님의 피이지 인간의 의로운 행함이 아닙니다.

그러니 행함에 따라 희비하지 마시고 새 언약을 믿으세요.

사도들이 무엇으로 살았는지 보세요.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이 그들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그 혹독한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살았던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예수님의 사람은 끝까지 지켜주는 사랑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사랑이에요.

이 사랑이 우리 속에 심겨져 있어요.

 

그러니 담대하십시오.

담대함을 버리지 마세요.

이것이 큰 상을 얻습니다.

자기 지신을 보지 말고 주 예수를 보십시오.

그가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마음의 문에 바르시고 끝까지 지켜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면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넘어지고 실수하는 인생이지만 예수님의 끝까지 지켜주심의 사랑이 있기에 감사하고 삽니다. 나의 눈이 나에게 고정되지 말고 예수님에게 고정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그 피가 나의 모든 죄로부터 해방케 하는 능력으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지식이 아니라 실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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