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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80강. 심판과 구원 (요 12:44-50)

by coroa 2021. 11. 11.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80강. 심판과 구원 (요 12:44-50)

-.정낙원 목사

 

요 12:44-50=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인간 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문자적으로 영원을 사모한다는 것은 오래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 속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본능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신(神)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죄인들에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또한 보여 달라고 해서 그래 나 여기 있다고 보여주시지도 않습니다.

이는 죄인에게는 숨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죄가 담을 막아 하나님과 인간을 단절케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추방시켰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의 문을 걸어 잠가버렸습니다.

에덴동산의 문을 걸어 잠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인간에게 숨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능 속에는 신을 향한 갈망함이 담겨 있어서 신을 찾게 됩니다.



죄란? 하나님이 금지하는 것을 소망하는 식으로 역사를 합니다.

죄인의 본성은 하라고 하면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하면 기를 쓰고 하고자 합니다.

이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보면 알 수 있어요.

 

하나님 말씀은 우리의 본성과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천국 오지 마!

그러는데 우리는 아니야 기어코 나는 가고 말거야! 라고 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안 만나 주시겠다고 숨으셨는데,

인간들은 그 숨어 계신 하나님을 기어코 만나겠다고 하면서 섬기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을 만나 주지 않습니다.

또한 죄인의 섬김을 받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인만이 섬길 수가 있어요.

의인은 예수님뿐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은 예수님만이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만 나타내셨고 예수님의 섬김만 받으십니다.

예수님 것만 받으세요.

 

하나님이 만약 아담과 하와에게 섬김 받고 싶다면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 내지 않았어요.

그리고 숨을 이유도 없어요.

하나님이 죄인에게 숨었다는 것은 죄인과 상종치 않겠다는 뜻입니다.

 

죄인을 에덴동산에서 내어 보내고 그들 앞에 숨은 것은 빛과 어둠이 동거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죄인과는 동거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둠이 동거하면 어둠이 빛에게 잠식당하듯이 죄인이 하나님에게 죽임을 당해요.

그러니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어 보낸 것은 저주이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인 겁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 턱이 있나요?

없어요.

그러니 숨어 계신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는 죄가 청개구리처럼 하나님 말씀을 안 듣도록 역사를 해서 그래요.

그러니 숨어 계신 하나님을 찾아내고 섬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나주지 않자 급기야 자기 식으로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기 시작을 한 겁니다.

이게 바로 우상이에요.

십계명이 이를 잘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인간의 실존을 잘 알려주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너희가 섬기는 신은 다른 하나님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하나님을 형상화 하지 말라고 합니다.

형상이란?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도록 해 놓은 것을 말해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형상화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지금 이스라엘이 형상화 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신은 이럴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신의 개념화라고 합니다.

우상은 고정되어 있는 죽은 신이고 하나님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생명의 신이십니다.

 

형상화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보면 죽으니 보려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숨은 것이 복인 줄 알라는 겁니다.

그러나 어디 인간들이 이걸 아나요.

모르니 자기들 생각대로 하나님을 형상화 하여서 섬기고 있는 겁니다.

 

형상화된 하나님은 전부 가짜에요.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는 신앙은 가짜에요.

그리고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도 가짜에요.

 

알다시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에덴동산에서 쫓아내고 숨어 버렸어요.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 이외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자식들을 생산했어요.

그럼 아담의 후손들은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맞아요.

그 어느 인간도 하나님을 만난 적도 본 적도 없어요.

그럼에도 인간들은 하나님을 형상화 해 놓았어요.

 

그럼 그 형상은 어디서 따온 형상인가요?

그건 자기 마음대로 만든 겁니다.

인간들이 상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한 번도 본 적도 없는데도 하나님을 형상화 해 놓았다는 것은 그 형상은 곧 가짜란 말입니다.

 

아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형상화 합니까?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형상화하여서 섬기고 있었어요.

이스라엘이 형상화한 하나님은 자기들이 만든 하나님이에요.

그러니 가짜 하나님이지요.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 신화 이야기에요.

그리스 신화 이야기를 보면 신들을 영웅화시켜 놓았지요.

 

인간에게 있어 신이란? 전지전능 하신 분이에요.

위대하고 강한 분이에요.

그리스 신화는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신을 투사 시켜 놓았어요.

신을 영웅화한 것은 곧 인간들의 신관을 잘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사고가 신에 속한 사람도 영웅화 시키고 있어요.

그래서 신에게 복속된 사람은 범인과 달라야 한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목사를 바라보는 관(觀)이기도 합니다.

목사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 사십일을 금식해서 능력 있는 종으로 서고 싶어하는 겁니다.

봐라! 하나님이 함께하는 종은 뭔가 달라도 다르지 않느냐!

 

이렇게 되어서 이 시대 교회마다 목사라는 우상이 떡 허니 버티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예수를 안 믿고 목사를 믿고 있잖아요.

예수를 자랑하지 않고 목사를 자랑하잖아요.

 

교인들이 목사라고 한다면 마치 계룡산에 도를 닦는 도인(道人)들처럼 뭔가 초능력을 행하거나 인간들이 가까이 범접 할 수 없을 정도로 뭔가 신비로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목사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같아요. 

이건 모두가 세상에서 알고 있던 메시야관으로 목사를 대하기 때문입니다.

민간설화에 나타나는 메시야이즘을 보면 모두가 천지개벽을 이룰 영웅들이에요.

 

불교에서 말하는 미륵이나!

도술을 행하는 고승들이나!

민간설화에 나오는 정도령이나!

교인들이 바라는 능력의 종 불의 종이나!

유대인들이 바라는 메시야나 동일해요.

 

모두가 초 능력으로 국태민안을 가져다 줄 메시야들이에요.

이런 메시아 사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메시야를 초능력을 행하는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이 감추어 계시니 인간들 생각의 메시야 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감추어 계시다는 것은 정형화 되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정형화 되어 있지 않는데 형상화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다 다르다는 말입니다.

즉 각 사람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상(像)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다! 라고 정형화 되어 있지 않으니까 각 사람마다 생각하는 하나님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십인십색(十人十色) 이란 말이 있지요.

이는 사람마다 색깔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즉 사람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다르단 말입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다르니 신에 대하여서도 십인십신이에요.

각자가 섬기는 하나님이 다 달라요.

 

십인십신이란 말은 곧 10 사람이면 신도 10 이란 말입니다.

10 이란? 많다는 뜻입니다.

10 신이란? 사람의 수만큼이나 신이 많다는 뜻입니다.

오죽했으면 일본에선 신이 800만개나 된다고 하겠어요.

이는 집마다 수호신이 있고 사람마다 개인 신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담 이후에 온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되었어요.

노아 이후에 민족과 혈통이 나누이게 되었어요.

그러니 민족마다 혈통마다 하나님이 다른 겁니다.

지구상에 흩어진 민족들마다 다 하나님이 달라요.

 

그럼 유대인들에게도 유대인 민족들이 아는 하나님 상이 있어요.

조상대대로 들어 왔던 하나님이 있어요.

조상들에게 구전(口傳)으로도 들어 왔고 실제 속에서 경험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경험하고 조상으로부터 들어왔던 하나님은 민족이 위란(危亂)에 처할 때 자신들을 도와주는 하나님이었어요.

위대하고 강한 힘 있는 하나님이었어요.

이방인들이 알고 있는 신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유대인들의 하나님은 열국의 왕들을 혼내고 애굽에 신들을 벌 주는 그런 신 중에서도 최고의 신이었어요.

한마디로 천하제일의 무소불위하는 하나님이에요.

이런 하나님이 메시야를 보내 주신다고 했어요.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는 이런 하나님의 능력으로 온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지금은 민족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언제 꺼질지 모르는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이지만 장차 메시야가 오면 전세를 역전을 시켜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어요.

그만큼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 간절하고 컸어요.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한 대단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어요.

유대인들에게 있어 메시야는 강하신 분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된다는 메시야 상(像)이 있었어요.

 

세상의 그 어떤 군주보다도 강한 그런 메시야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아마도 로마 황제보다도 강한 분으로 오실 것이야!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백마 타고 늠름하게 오실 거야! 라고 기대 했어요.

나름대로의 메시야에 대한 상상을 하고 기다렸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초라한 목수의 아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비록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고 선지자와 같은 일들을 한다고 하지만 근본은 천하디 천한 나사렛 촌 동네 목수의 아들이에요.

 

인간들 세상에서는 가문을 따지고 근본을 따져요.

죄는 인간을 차별케 만들었어요.

그래서 인간 세상엔 힘을 바탕으로 주종이라는 반상의 법도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가문을 따지고 근본을 따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이 바라던 메시야라고 한다면 인간들의 상식으로 좋은 가문의 혈통으로 오거나 영웅호걸로 와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콧대를 꺾어주어야 했어요.

 

그런데 낮고 천한 천민으로 오신 겁니다.

오셔서 하는 모습이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고 있어요.

이건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으로는 도무지 용납이 될 수가 없어요.

수치스럽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게 한 참람죄로 십자가에 죽인 겁니다.

 

그럼 진짜 메시야라고 한다면 비록 인간들이 무지해서 죽인다 하더라도 폼 나게 죽어야 했어요.

군병들이 십자가 아래서 조롱 할 때 그들의 입을 막아버려야 했단 말입니다.

봐라! 내가 메시야다 이 놈들아! 하면서 폼 나게 죽든가!

그것도 아니에요.

아무런 힘도 한번 쓰지 못하고 쪽 팔리게 죽었어요.

 

유대인들은 그래도 예수님이 죽을 때 뭔가를 보여주기를 바랐어요.

예수님이 행한 기적을 참고하면 그런 생각도 할 수가 있어요.

실제 가룟유다는 예수님이 살았을 때 갖가지 기적을 행하였으니 혹시라도 죽음에 직면하면 암행어사 출두요 하는 식으로 천사들을 동원해서 짠하고 반전을 시켜 주리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가룟유다는 유대의 해방을 꿈꾸는 민족주의자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이용해서 민족의 해방을 꿈꾸었던 겁니다.

예수님이 행한 기적을 보면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는 일을 보면 민족을 분열시키고 엉뚱한 일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죽음에 직면하면 본능이 나오니 예수님도 죽음에 직면하면 암행어사 출두를 외칠 것이라고 믿은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항 한번 하지 않고 로마 병정들의 조롱을 받으면서 힘없이 십자가에 죽어 버립니다.

그래서 가룟유다는 내가 사람을 잘못 죽였다 생각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자살을 한 겁니다.

가룟유다의 마음이 곧 그 당시 유대인들이 마음이었어요.

 

그리고 가룟유다의 메시야 관은 모든 인간들이 메시야 관이기도해요.

결국 예수님은 가룟유다와 같은 메시야 관을 가진 자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힘없는 예수는 싫어해요.

 

이 시대 교인들도 십자가 지신 예수는 싫어하고 부활하신 예수를 좋아해요.

부활하신 예수라야 능력의 예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십자가 속에 담김 비밀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진짜 예수님의 능력은 십자가에 죽으심인데 이걸 모르는 겁니다.

 

암튼 힘없이 죽어가는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한 겁니다.

이건 유대인으로서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입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웠으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패를 써서 십자가에 붙이니 떼어 달라고 했겠어요.

 

한마디로 창피하다는 말입니다.

우린 저런 왕을 둔 적이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창피 했으면 빌라도가 너희 왕이라고 하자 우리에겐 가이사가 왕이라고 했겠어요.

우린 가이사 같은 왕을 원했지 저런 촌뜨기 같은 왕을 원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유대인이 뭐라 하든지 빌라도는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기가 쓸 것을 썼다고 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십자가 위에 단 것은 유대인을 향한 조롱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 조롱을 통하여서 옮은 말을 세상에 공포한 겁니다.

봐라! 이 예수가 바로 유대인의 왕이다!

이 사람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연한 순 같이 오신 메시야라고 알려 준 것입니다.

 

물론 빌라도나 유대인들은 이런 사실을 몰라요.

하지만 하나님은 발라도가 알고 썼건 모르고 썼건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공표하셨어요.

 

이로보건데 유대인들은 성경이 말한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를 기다린 것임을 알 수가 있어요.

유대인들은 성경! 성경하면서 정작 성경을 안 믿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꼭 이 시대 교인들과 같아요.

 

예수! 예수 하면서 정작 성경이 말하는 예수를 안 믿고 있어요.

자기들이 상상하고 만든 예수를 믿고 있어요.

마치 유대인들이 강하고 능력 있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듯이,

이 시대 교인들도 복주고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를 믿고 있어요.

 

그러니 유대인들이 성경적으로 진짜 메시야를 몰라보고 죽였듯이 지금도 성경적인 진짜 예수를 배척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2천 년 전에 유대인들에게 일어났던 메시야의 수난 사건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반복하여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가짜 메시야 상(像)과 가짜 예수 상(像) 때문에 진짜 메시야 진짜 예수를 축출하고 있어요.

 

우리 속엔 세상 임금인 가이사의 화상(畵像)이 그려져 있어요.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살게 해 주는 그런 신이 그려져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으면 뭔가 육신적으로 잘 풀릴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가짜 메시야의 화상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예수 때문에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버려짐을 당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잘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된단 말입니다.

 

우린 복음 복음 하면서도 세상 임금이 자리 잡고 있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은 예수님의 화상은 없어요.

그러니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말하면 듣기 싫어하는 겁니다.

고난당한 예수 말고 능력 있는 예수를 말해 달라고 하잖아요.

 

제 안에도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져 있어요.

그러니 복음을 빙자하여서 고난 받기를 싫어하는 겁니다.

복음 전했으니 잘 해 주어야 되지 않느냐고 반복음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가이사를 원하지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원하지 않아요.

 

우리가 본능적으로 바라는 예수는 적그리스도에요.

적그리스도는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그리스도에요.

죄에서 구원 해줄 그리스도를 바라지 않고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살게 해 주는 그런 그리스도를 바라고 있어요.

그러니 설교 시간에 죄 이야기를 하면 듣기 싫어하고 귀를 막고 시큰둥해 하는 겁니다.

 

반면에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사는 이야기를 하면 자다가도 눈을 번쩍 뜨고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잖아요.

그러니 지금 우리들이나 2천 년 전 유대인들이나 다를 바가 없어요.

맞아요.

인간은 어느 시대나 그 본질은 동일해요.

그래서 2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 이야기가 지금도 우리를 고발하고 진리로 들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의 왜곡된 메시야이즘에 빠져 있는 바탕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관을 시켜서 말씀을 하십니다.

자신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상당히 도발적입니다.

 

44-45절에서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고 나를 믿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한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고 또한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낸 분을 본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보낸 분은 하나님이세요.

그럼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할 말을 친히 명령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난 너희를 구원하려고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이 심판을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내 말을 듣고 안 듣고는 자유이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내 말을 안 듣는 자는 반드시 심판을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멸망을 받는다고 분명하게 말해주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럼 예수를 안 믿는 자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은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날 좀 믿어 달라고 읍소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일방적인 통고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이런 말을 누가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듣기엔 예수님의 말은 미친 소리에요.

결국 예수님 말씀대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로 심판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과 심판을 하시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성경은 예수님을 통한 자기 백성들의 구원이야기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창세전 언약에 근거하여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님의 피로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로 언약을 하셨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나리오에요.

하나님이 벌리시는 구원은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일어납니다.

그러면 시나리오를 알면 정답을 아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펼치기 위해서 세상을 만듭니다.

예수의 피로 구원 받을 자와 아닌 자로 구분해서 창조하십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만들어졌어요.

신자는 예수님 편에 속한 자로 창조가 되었고 불신자는 예수님과 원수된 자로 창조가 되었어요.

 

신자든 불신자든 인간이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창세전 언약의 시나리오에 의한 것입니다.

누가 암까마귀인지 누가 숫까마귀인지 몰라요.

예수님이 오면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으로 갈라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어요.

구원 받을 자는 예수를 믿는 자로 나타나고 멸망 받을 자는 예수를 배척하는 쪽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모든 만물을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셔서 주(主)라고 시인하도록 만들어 버리신 겁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 함은 구원이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창세전 언약의 핵심이에요.

모든 성경은 이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구원이 예수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은 중요하고 본질적인 이야기에요.

 

구원이“주어진다” 는 것은 외부에서 공급해 준다는 말입니다.

즉 공짜란 말이에요.

구원은 공짜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애들아! 구원은 공짜로 줄게 그랬어요.

믿음이란? 공짜로 주는 걸 믿는 겁니다.

 

공짜란? 우리의 노력이나 조건과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어요.

예수 믿는 것조차도 우리가 할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자에겐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도록 해 주세요.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게 해 준단 말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우린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어요.

믿고자 하지도 마세요.

 

하나님이 보낸 믿음이 그냥 우리 마음을 뚫고 들어와서 확 믿어지게 해 주실 테니까요.

이게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은 하나님이 성신을 쏟아 부어서 우리 마음속에 쓰나미처럼 들어와서 새기는 겁니다.

이걸 새 법을 마음 판에 새겨 준다고 합니다.

 

구원을 공짜로 준다는 것은 인간의 조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인간에겐 구원 받을 조건이나 멸망 받을 조건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 꼬라지 때문에 구원받거나 멸망당할 일은 없어요.

왜냐하면! 애초부터 구원과 멸망은 우리 꼬라지를 벗어나 예수님에 의하여 주어지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목사들이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구원 운운하는 것은 공갈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면 공갈에 넘어가요.

하나님은 구원과 멸망을 예수님을 기준으로 세워 놓으셨어요.

한 쪽은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고 다른 한 쪽은 예수님 때문에 멸망을 받아요.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때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어요.

 

골고다 언덕엔 세 개의 십자가가 있었어요.

예수님을 중심으로 두 강도가 달렸어요.

그런데 한 강도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고 한 강도는 멸망을 받았어요.

결국 예수님은 두 강도를 가운데 두고서 나눈 겁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서 구원이나 멸망의 조건을 찾을 것이 없어요.

그냥 강도로서 처벌받아 죽어 가는데,

한 강도는 예수님 때문에 천국에 갔고,

한 강도는 예수님 때문에 지옥에 갔어요.



모든 인간은 강도에요.

우린 모두가 강도로 출생을 해요.

강도란? 죄인이란 말입니다.

죄인은 그냥 죄인이에요.

착한 죄인 악한 죄인이 없어요.

모두가 동일해요.

 

죄인이 독자적으로 구원을 받을 길이 없어요.

왜냐하면! 죄인에게선 하나님이 바라는 의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저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거저 주는 구원을 은혜라고 합니다.

 

창세전 언약이 예수님의 피로서 구원이 주어진다고 하였다면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예수님의 공로만 남기겠다는 뜻입니다.

이는 만물이 예수로 말미암고 예수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 자체가 예수님의 공로를 남기기 위하여 창조가 되었어요.

여기서 만물을 인간으로 보세요.

그럼 인간의 몸에 예수님께서 뭔가 일으키는 사건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성도의 몸엔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이 있어요.

그러니 우리 몸에 예수님이 하신 일을 훼손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이란? 새 언약을 심어 놓은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몸에 새 언약이 믿어지도록 해 놓았어요.

우린 이 사건을 증거하면 되어요.

그러라고 성령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새 언약에 증인이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 받은 성도는 예수님이 공짜로 주신 구원을 잘 간직해야 합니다.

공짜로 주어진 구원을 훼손치 않도록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꼴란 종교적 행함을 신앙이라고 보태지 말란 말이에요.

 

하나님은 온 세상에 예수님의 흔적만 남기길 바래요.

이건 마치 노아 언약처럼 정결한 제물의 희생으로 부정한 자들이 살고 있는 것과 같게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은 예수님의 공로를 담고 있어요.

예수님의 공로를 남긴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남긴다는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남기시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은혜란 공짜라고 했어요.

공짜의 반대는 조건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요.

 

그럼 먼저 은혜가 은혜 되려면 먼저 은혜를 가리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은혜가 은혜 되려면 행위가 상대적으로 있어야 하니까요.

구원이 공짜로 주어지기 전에 먼저 인간의 조건으로 구원을 이루어 내고자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공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공짜란? 내 조건과 상관없이, 내 행위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공짜가 공짜로 되려면 먼저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 일이 있어야 하겠지요.

인간의 행위로 구원이 실패 할 때 비로서 공짜로 주어지는 구원이 은혜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공짜란 은혜입니다.

은혜의 반대는 법입니다.

그럼 은혜보다 먼저 법이 와야 합니다.

법을 지켜서 구원을 이루어 보고자 하는 시도가 있어야 하겠지요.

그리곤 인간은 법 앞에 무능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법이 인간들을 전부 정죄하여서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해요.

그리고 인간들을 다 지옥으로 끌고 가야 합니다.

 

지옥으로 끌려가도 할 말이 없게 만들어야 해요.

그래서 예수라는 은혜가 오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모세에게 율법을 주었어요.

은혜가 오기 전에 먼저 법이 온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16-17=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예수님을 은혜 위에 은혜라고 합니다.

이는 은혜 덩어리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왔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모세와 예수님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이고 예수님은 은혜라고 합니다.

알다시피 율법과 은혜는 성질이 극과 극으로 달라요.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는 일을 해요.

 

율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에덴동산에 두 과실과 같아요.

선악과는 죽이고 생명과는 살리잖아요.

 

그럼 모세가 준 율법은 선악과이고 예수님이 주신 은혜는 생명과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속하면 죽고 예수에게 속하면 살아요.

그런데 모세가 먼저 왔어요.

이는 죽음이 먼저 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서 율법으로 죽이게 하셨어요.

그리곤 예수님을 보냈어요.

모세가 죽여 놓은 것을 예수님이 살려내시는 겁니다.

마치 에스겔 37장의 해골 골짜기에 해골들을 성신이 살려내는 것과 같아요.

 

이는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듯이 죽은 자를 살려내는 방식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를 통해서 보여주셨어요.

창세기 1장에서 흑암과 혼돈된 세상에 빛이 임하는 것이 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흑암과 혼돈은 죽음을 상징하고 빛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어둠 속에 빛이 비친다는 것은 죽음에 생명이 임했다는 뜻입니다.

율법에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려내는 방식으로 일을 하세요.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거든요.

 

창세전 언약이 뭡니까?

자기 백성을 예수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 거잖아요.

자기백성들이 예수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려면 먼저 비 거룩과 흠 있는 모습으로 있어야 합니다.

비 거룩과 흠이란 타락이고 죄인데 이는 곧 죽음이란 말입니다.

 

창세기 1장 식으로 말하면 혼돈과 공허한 상태란 말입니다.

여기에 빛이 등장하여 빛과 어둠을 갈라내는 일을 하게 됩니다.

참 재미있지요.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했어요.

그러자 그 빛에 의하여 빛과 어둠이 갈라지는 겁니다.

빛이 빛을 갈라내고 있어요.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두 빛이 나오지요.

빛에 의하여 갈라지는 빛이 있고!

빛과 어둠을 갈라내는 빛이 있지요.

원래 있던 빛은 어둠과 섞여서 혼돈된 상태로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온 빛이 그 혼돈된 빛을 갈라내는 겁니다.

 

왜? 이런 구조로 성경이 써져 있는가 하면 성경 이야기가 예수님에 의해서 갈라지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은 빛으로 갈라지고 어둠은 어둠으로 갈라지는 것을 심판이라고 하고 구원이라고도 해요.

 

그러면 창세기 1장에서 빛과 어둠을 갈라내는 빛은 예수님이세요.

빛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갈라진 빛과 어둠은 진리와 비진리를 말합니다.

진리와 비진리를 의인화해서 말하면 천국 백성과 지옥백성을 말해요.

그러니 창세기 1장 1절에서 말하는 천지 창조 이야기는 천국과 지옥을 말하는 겁니다.

 

이를 영적으로 말하면 영과 육을 말해요.

사망과 생명을 말해요.

또한 진리와 비진리를 말해요.

 

그러니 이 세상은 진리와 비진리, 영과 육, 사망과 생명으로 섞여 있는 겁니다.

섞여 있는 것을 예수님이 빛으로 오셔서 갈라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오심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산 자와 죽은 자로 갈라지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곧 창세기 1장의 창조는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창세기 1장에서 혼돈된 세상에 빛이 등장하여서 빛과 어둠을 갈라내는 일은 곧 예수님에 의해서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을 갈라내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사건인 겁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예표하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빛으로 와서 자기 백성들을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백성들을 사망에서 생명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빛이라 함은 예수 이외는 다 어둠이란 말입니다.

 

빛을 생명이라고 했으니 그럼 예수 이외는 다 죽은 자란 말입니다.

죽은 자들이 산 자로 행세하고 있어요.

이게 세상이에요.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여 판치는 세상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진짜로 보내신 겁니다.

이제 세상은 예수님에 의하여 들통이 나기 시작했어요.

인간들이 구원관이 가짜임이 드러나게 되었어요.

그러니 온 세상이 반발을 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진짜 노릇 하는 자들이 예수의 대적자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처럼 세상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심판을 당합니다.

참 생명과 거짓 생명으로 갈라집니다.

예수님이 참 생명으로 오심으로서 인간들이 말하는 생명은 거짓 생명으로 드러났어요.

예수님이 진리로 오심으로서 인간 세상의 진리는 비진리로 드러나게 되었어요.

 

예수님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 생명으로 오셨어요.

생명으로 오신 이유는 모세가 죽여 놓은 자들을 살려주려고 오신 겁니다.

다른 말로 율법 아래 갇힌 자들을 해방시키려고 오셨어요.

율법 아래서 죽은 자들에게 은혜로 자유케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하는 수순은 먼저 법으로 죽이고 나중에 은혜로 살려내세요.

생명과를 드러내게 하려고 선악과를 둔 것과 같아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먼저 따먹고 죽은 것도 다 이런 시나리오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주시기 전에 먼저 율법을 주신 겁니다.

생명을 생명으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죽음을 바탕에 깔아 놓으신 겁니다.

이는 마치 흰색을 드러내기 위해서 까만색을 바탕으로 깔아 놓은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율법을 주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고발하십니다.

죄인에게 하나님 말씀을 지키라고 명령 한 것은 죄인 됨을 드러나게 하시기 위함이에요.

너희는 내 말을 듣지 않는 자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고 오해를 한 겁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과연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어기지 않고 다 지킬 수 있느냐 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율법의 일점일획도 어기지 않고 다 지킬 수 있었다면 은혜가 주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란? 법으로 정죄 당한 자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란 용서에요.

 

죄인에게만 은혜가 필요해요.

하나님은 율법으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셨어요.

죄인임을 드러내서 모든 인간을 저주 아래 가두기 위함입니다.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자라고 한다면 구원은 고사하고 저주 받아야 할 죄인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원래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 인간은 저주에 떨어졌어요.

 

그런데 마귀가 눈을 가리고 마음을 혼미케 하여서 모르고 있어요.

자신들이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니라는 차원에서 율법을 주어서 저주 가운데 가두어 버린 겁니다.

 

율법이 첨가되면서 인간은 저주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 더욱 더 분명해졌어요.

인간 쪽에서 구원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어요.

인간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을 한 것입니다.

 

이게 옛 언약이에요.

옛 언약으로는 구원의 길이 없어요.

옛 언약은 새 언약을 주기 위한 밑밥이에요.

바울은 밑밥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했어요.

 

율법은 구원이 하나님이 제공하는 은혜로 거저 주어진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죄인은 독자적으로 살 길은 없어요.

살려면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의를 죄인에게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용서해주는 것 밖에 없어요.

용서가 곧 은혜에요.

 

죄인이 살 길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은혜뿐이에요.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님이 몰고 오셨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새롭고 산 길을 마련해 주셨어요.

 

그런데 그 구원의 길이 참으로 기이합니다.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주어진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누구든지 내 말을 들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내 말을 듣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예수님이 내 말을 들으라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해요.

예수님이 내 말을 들으라고 하니 그럼 예수의 말을 들으면 될 것 아닙니까? 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들을게요! 라고 덥석 받고자 해요.

 

그런데 이게 생각 같지 않아요.

누구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덥석 들을 수 있다고 여기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본성과 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들 입장에선 들을 수 없는 요소가 담겨져 있어요.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싫어하는 성질이 담겨져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흔히 예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예수 믿으면 되어요.

까짓것 믿으라고 하면 믿어주지 그래요.

 

이게 인간들의 사고방식이에요.

인간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선악과가 준 주체의식이에요.

그러니 예수를 믿는 주체를 자기가 행사한다고 덤비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싶어도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에요.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러니 문제인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주체를 인간들에게 허락하시지 않았어요.

믿음에 주체를 하나님이 행사를 하세요.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라고도 하고 선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옛 언약의 주체는 인간에게 주었지만 새 언약은 하나님이 행사하세요.

옛 언약 하에선 인간의 열심이 통했지만 새 언약에선 인간의 열심은 무용지물이에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유대인은 열심히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이루고자 했어요.

인간 쪽에서 열심히 하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어요.

그래서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것에 신앙의 근본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전혀 다른 구원관을 제시합니다.

 

요 6:54-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6: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마시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영생은 예수의 살과 피 속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자칭 제자라고 하던 자들 중에 여럿이 예수님의 말이 어렵다고 하면서 떠나갔어요.

 

여기서 어렵다는 말은 상식에 맞지 않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의 율법 신앙관으로는 도무지 받아 들일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그런 법이 있느냐 에요.

 

예수의 살과 피를 먹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구원은 예수님에 피 흘리심으로 의해서 거저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건 성령이 와야 믿어져요.

성령은 아무나에게 오지 않고 오직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작정 된 자들에게만 와요.

 

인간들은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따 내는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내가 열심히 하면 얻을 수 있다고 믿어요.

그러니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어요.

그럼에도 영생을 얻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에게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그 방법론을 알려 달라고 하는 겁니다.

 

부자 청년은 아직도 자기가 영생을 따 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부자 청년의 구원관은 모든 인간들이 구원관이에요.

인간들이 이런 구원관을 갖고 있는 바탕엔 주체가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인간들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에요.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에요.

그러므로 모든 것을 자기로부터 출발을 해요.

 

내가 뭘 하겠다고 해요.

구원을 받아도 내가 받아야 하고!

은혜를 받아도 내가 받아야 해요.

구원이니 은혜니 모두 내 근거로부터 주어진다고 생각해요.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은 자기가 포기 되지 않아요.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도 내가 믿는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내 말을 믿으라고 하니 예 제가 믿겠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준다고 해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니 우리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믿음인 겁니다.

믿음에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에요.

결국 믿음이란 주체 문제로 대두되어요.

 

예수의 살과 피를 먹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곧 구원의 주체가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말이에요.

내가 낄 틈이 없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가는 겁니다.

떠나가는 제자들은 이 세상엔 그런 구원은 없다는 겁니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느냐고 조소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거저 주는 구원을 싫어하는 것은 인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아도 구원 받고 난 후에 자기 자랑이 있어야 해요.

자기 힘으로 구원을 받아야 떳떳하고 할 말이 있잖아요.

천국에 가도 할 말이 있어야 하잖아요.

 

이게 인간들의 주체사상이에요.

내가 없는 구원이나 천국은 의미가 없어요.

천국에 가도 나 라는 존재는 항상 자랑 되어져야 해요.

그래야 폼이 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천국엔 인간들 자랑거리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되어진다고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애초부터 예수를 증거하기 위하여 창조가 되었어요.

“나”는 예수를 드러내는 도구에요.

 

내 몸에서 내가 드러나면 안 되고 예수가 드러나야 해요.

내 공로가 아니고 예수의 공로가 빛이 나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구원을 우리가 따 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뒤에 감추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슨 일을 하여도 그 일의 주체를 자기가 아니고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갓입니다.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예수를 믿게 해 주신 것도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에요.

이런 고백을 하는 자가 예수의 살과 피로 살아나 영생을 받은 성도에요.

 

그래서 구원은 빛이 어둠을 쳐들어오듯이 주어진다고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러지요.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이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것은 나를 믿는 자는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합니다.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한다는 말을 기억하세요.

 

중요하니 잘 들으세요.

예수님이 빛으로 왔어요.

그 이유는 예수를 믿는 자는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한다고 하지요.

이 말이 무진장 중요해요.

“거한다”는 것은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해 준다고 했으니 이는 곧 예수님이 어둠에 살지 않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해 준다는 말은 어둠에 사고를 물러가게 한다는 말입니다.

어둠에 사고란? 율법적 사고에요.

율법적 사고는 인간의 이성을 바탕하고 있어요.

율법은 인간의 상식을 요구해요.

 

그래서 율법 신앙은 문자대로 지키는 것을 두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겁니다.

율법적 신앙은 인간의 행함을 요구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율법적 사고 즉 어둠에 사고를 몰아낸다고 합니다.

내 행함으로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을 몰아낸다는 말입니다.

어둠에 사고를 몰아내고 빛의 사고를 심어준다고 합니다.

어둠에 거하지 않으면 빛에 거하게 되는 겁니다.

빛의 사고는 거저 주는 구원이에요.

 

예수를 믿게 되면 인간의 상식으로 알고 있는 구원관에서 떠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알고 있는 구원관은 자기가 구원을 이루어가는 겁니다.

그것이 율법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율법 신앙의 주체는 내 자신 이에요.

 

율법 신앙은 어둠의 사고에요.

빛의 사고는 예수 믿음이에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

 

중요하니 다시 말합니다.

 

어둠의 사고는 내가 구원을 따 내는 것이고, 빛의 사고는 예수님이 거주 구원을 주어요.

어둠엔 내가 주체이지만 빛엔 예수님이 주체에요.

어둠엔 내 행함이지만 빛엔 예수님의 행함이에요.

 

빛 안에선 설령 내 몸으로 하여도 그건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한 것이에요.

빛 안에 있는 성도는 자연히 그런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건 본인이 잘 알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두는 사람은 어둠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는 성화주의자들은 어둠에 있어요.

그러니 자기 행함을 포기하지 못하는 겁니다.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다고 자랑하는 겁니다.

항상 자기를 끼워 놓는 겁니다.

이게 어둠의 사고에요.

 

어둠을 행함이라고 한다면 빛은 믿음이에요.

행함은 내가 이루는 것이고 믿음은 예수님이 이루는 겁니다.

행함의 주체가 달라요.

인간과 예수님이라는 행함의 주체 자체가 달라요.

 

어둠과 빛은 상극이에요.

서로가 용납이 되지 않아요.

서로가 서로에게 이단이에요.

서로가 서로에게 심판을 하게 되어 있어요.

 

행함은 법이지만 믿음은 은혜에요.

빛이 어둠에 왔다는 것은 법이 지배하는 곳에 은혜가 왔다는 말입니다.

법이 지배하는 곳에 은혜가 왔다는 것은 곧 법이 심판 당하였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효력을 발휘 할 수가 없어요.

은혜 아래선 법은 죽은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둠에 예수님을 빛으로 보낸 것은 그 자체가 어둠을 심판하는 행위입니다.

빛이 거하면 이미 어둠에 대하여서는 심판을 받은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들이 나를 믿지 않으면 나를 보내신 하나님이 심판을 하신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은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구원과 저주라는 심판행위에요.

예수를 안 믿는 것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이미 심판을 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갈라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구원 받기로 된 자는 예수를 믿도록 하시고 멸망당하기로 된 자는 배척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멸망 받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팔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은 창세전에 영생 얻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어둠에서 갈라냄을 당하는 심판인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안 믿는 자는 안 믿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이에요.

예수를 믿는 자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어요.

 

은혜란? 무조건 용서해 주는 겁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인간 자체를 논하지 않아요.

너 왜? 그렇게 살았느냐 따지지 않아요.

 

은혜가 우리의 악함을 다 덮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폭설처럼 온 대지를 다 덮고도 남은이 있어요.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다 덮고도 남아요.

그래서 바울은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 국한 된 이야기에요.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그 어떤 죄도 다 용서해 준다는 말씀이에요

그러니 성도는 자기 행함으로 인하여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온전한 사랑 안엔 두려움이 없어요.

 

자기 행함으로 인하여 두려움이 없어야 온전한 사랑을 받은 자에요.

빛 가운데 거하면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즉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법으로부터 추궁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죄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빛에 거하는 자는 자기 행위로 인하여 심판당하지 않아요.

자신의 행실로 인하여 스스로를 심판하지 마세요.

하나님도 심판하지 않는데 왜? 내가 나를 심판 합니까?

아버지가 탕자를 용서 했는데 왜? 탕자 본인이 용서하지 못합니까?

스스로가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건 불신앙이에요.

 

믿음은 담대함이고 뻔뻔스러움이에요.

성도는 죄로 인하여서는 물론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은 일어나지만 자신의 행실을 책임을 지는 무거운 짐으로부터는 자유하여야 합니다.

이게 빛의 사고에요.

 

이는 빛이 어둠에 사고를 몰아냈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선 더 이상“나”라는 주체성을 가진“나”는 없어요.

“나”라는 주체가 죽었어요.

예수 안에서“나”에요.

예수 안에서 사는“나”는 예수의 것으로서의“나”에요.

 

그러니 내가 아니고 예수님의 것인“나”인겁니다.

예수님의 것인“나”는 내가 책임질 인생이 없어요.

예수님이 책임을 져 주세요.

그러니 인생살이가 가벼운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나”는 예수님이 책임을 져 주는 것을 보여주는 도구에요.

예수님은 성도를 은혜를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세요.

이걸 기능적 몸 또는 도구라고 합니다.

무슨 기능을 보여주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도구에요.

 

에베소서 2장을 보면 구원을 선물이라고 했어요.

 

엡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보세요.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준 것은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잖아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 세대에 찬미케 하기 위함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몸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일들을 벌리시는 겁니다.

우리 몸에서 용서의 냄새가 풀풀 넘치게 한다고 하잖아요.

어떤 식으로 용서의 냄새가 풀풀 넘치게 하시는가 하면 우리 몸이 하나님의 뜻을 담아 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식으로 드러내세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식으로 나타나지 않고 도저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으로 나타나게 만들어요.

그러니 말씀 앞에 서면 난 저주 받아야 마땅한 자라는 것으로 드러나게 한단 말입니다.

이런 악당이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세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자기를 포기하게 되어요.

자신의 무능함을 알게 된단 말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썩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자기에게 의미를 두지 않고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포기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감사가 되어요.

쪽 팔리는 것이 아니고 은혜의 풍성함에 안심이 된단 말입니다.

결국 우리 몸은 율법 적으로 보면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 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게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산다고 고백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걸 새 언약으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라고 해요.

내 자랑거리는 하나도 없고 오직 예수님의 자랑거리로만 우리 육체에 채워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게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다고 까불지 말라고 했잖아요.

 

하나님 앞에선 감사가 나오고 이웃에겐 관대함이 나와요.

용서받은 자로서의 여유로움이 타인에겐 너그러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의 향기를 풍긴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걸 탕감 받은 종으로 비유하셨어요.

 

일만 달란트 탕감 받았기에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 주는 식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일백 데나리온은 빚진 자를 탕감해 주지 못한다는 것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탕감 받은 종의 비유는 탕감 받은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은혜 받은 자에겐 은혜가 나온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이에요.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도 은혜를 쏟아내지 못하고 법을 토해내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은 탕감 받지 않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분명히 탕감을 해 주었는데 본인이 탕감으로 여기지 않고 장차 갚아야 할 빚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속엔 주인의 은혜가 담겨져 있지 않고 법이 담겨져 있는 겁니다.

자기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갚아할 부체로 여기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어요.

스스로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법이 온통 사로잡고 있으니 스스로가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자책하는 겁니다.

 

이게 상대적으로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말씀을 지킨 것으로 세리와 창기들을 업신여겼어요.

율법대로 살았다는 자기 행함으로 남을 우습게 여겼다구요.

 

바리새인들이 정녕 구원이 거저 주는 것이란 것을 알았다면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로 사람을 차별치 말아야 했어요.

세리와 창기들을 업신여겼다는 것은 그들 속에 말씀을 지켰다는 법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겁니다.

말씀을 지킨 것을 의로 간직하고 있으니 말씀대로 살지 못한 자들을 우습게 여기는 겁니다.

차별하는 겁니다.

 

지금도 자신이 복음을 아는 것을 자랑거리로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어둠의 사고 안에 있는 자에요.

그러니 남을 믿음이 있네 없네 판단하고 정죄하는 겁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있어요.

 

이건 자신이 복음 안에서 녹아지지 않았다는 반증이에요.

이런 상태를 소금이 맛을 잃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법이 튀어 나오는 겁니다.

법으로 판단하다가 사람들에게 밟히는 겁니다.

 

복음 안에서 녹아지면 법이 나오지 않고 은혜가 나와요.

은혜가 나오면 이해하고 용서하고 참아줌이 나와요.

없는 은혜를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고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가 은혜를 토해내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걸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합니다.

 

복음을 아는 것이 자기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겁니다.

복음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면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긍휼이 나와야 해요.

참아주어야 해요.

주의 긍휼이 그들에게 임하길 기도하여야 해요.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전에 그들과 같았어요.

나도 예전에 저들 속에 있었어요.

복음 모른다고 정죄하는 그 무리들 속에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이 암하여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귀를 받은 겁니다.


그러니 복음을 모르는 자들을 보면 그들을 무시하고 정죄할 것이 아니라 나도 저와 같았는데 이런 은혜를 받았구나 라고 하나님께 감사하여야지요.

그게 은혜에 거하는 자들이 모습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합니까?

은혜가 오기 전에 먼저 법이 주어졌다고 했잖아요.

어둠 속에 빛이 왔다고 했잖아요.

우린 원래 어둠이었어요.

그런데 빛이 다가온 겁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복음을 모른다고 하는 저 어둠에 있는 사람도 빛이 우리에게 다가 왔듯이 저들에게도 다가가기를 기도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자에게 빚진 자라고 하면서 섬기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게 빛을 받은 성도가 어둠에 속한 자들을 대하는 자세에요.

신자다 불신자다 따지지 말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증거하며 사세요.

 

그러니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내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가 나와야 하는 겁니다.

나 같은 죄인이게 이런 은혜가 임하였다는 것에 감사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이 감사함이 이웃에겐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성도들의 모습이에요.

복음을 아는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세요.

 

우린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에요.

예수님이 머리에요.

지체는 머리를 자랑하여야 해요.

그러니 구원 받은 나를 자랑하지 말고 구원 해 주신 예수님을 자랑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은 나를 자랑하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라고 준 겁니다.

그 은혜란 바로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받았다는 것이에요.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할 것이에요.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이웃에겐 참아주고 용서하고 섬겨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걸 은혜의 도구라고 해요.

예수의 향기를 날린다고 해요.

 

신앙생활은 자신이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고 더 악당이라는 것을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알아간다고 합니다.

은혜니 믿음이니 같은 말로 보세요.

예수를 믿는 믿음에 분량에 따라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깊이가 달라져요.

 

자기가 악당임을 많이 알아가는 것만큼 감사의 기쁨이 달라져요.

은혜를 많이 받으면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더 깊이 많이 알아가고 적게 받으면 죄를 덜 알아가요.

이 은혜를 깨닫는 앎에 깊이에 따라서 감사가 달라져요.

 

이를 두고 예수님은 많이 탕감 받은 자와 적게 탕감 받은 자로 비유했어요.

예수님께서 문둥이 시몬의 집에 들어갔을 때 마리아가 향유든 옥합을 깨트려서 예수님의 발을 씻길 때 제자들이 수군거리자 마리아는 많이 탕감 받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한다고 하셨어요.

반면에 시몬에겐 넌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은 것은 적게 탕감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이건 양(量)적인 이야기가 아니에요.

깨달음의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나에게 일으킨 사건을 증거하는 겁니다.

어둠이었던 나에게 빛으로 와서 일으킨 사건이 있어요.

그 사건에 대한 반응이 감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겐 많이 주었고 문둥이 시몬에겐 적게 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차별 없이 죄를 탕감해 주셨어요.

그런데 그 탕감의 깊이를 아는 것은 달라요.

자기가 어떤 존재였는가를 아는 것에 따라서 달라져요.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어떤 종에겐 5 달란트를 주고,

어떤 종에겐 2 달란트를 주고,

어떤 종에겐 1 달란트를 주었어요.

이건 주인이 종들을 차별한 것이 아니에요.

주인은 각각 그 재능대로 그들의 수준에 맞게 준 거에요.

 

5 달란트를 받은 종은 5 달란트를 남기면 되고,

2 달란트를 받은 종은 2 달란트를 남기면 되고,

1 달란트를 받은 종은 1 달란트를 남기면 되어요.

 

종들이 주인이 없어도 장사하여서 달란트를 남긴다는 것은 자신들은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주인의 명을 지키고 살아야 하는 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1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주인이 눈에 안 보이니 없다고 생각해서 땅에 묻어 둔 겁니다.

 

1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는 것은 빈둥거리고 놀았다는 말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구원을 자기 용도로 챙기고 있었다는 말과 같아요.

그러니 복음을 인하여 고난 받는 일엔 동참하지 않고 육신이 편한대로 빈둥거리고 놀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없음을 알고 빈둥거리고 놀았다는 것은 이 종은 평상시에 주인의 눈치만 살피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건 주인의 은혜로 살지 않고 법적으로 일했단 말입니다.

 

5 달란트 받은 종과 2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없음에도 열심히 일한 것은 나 같은 천한 놈을 종으로 써 준 것만 해도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는 평상시에도 은혜로 살았단 말입니다.

주인의 은혜에 감사하고 살았단 말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집에 있건 없건 개의치 않고 일을 한 겁니다.

이들은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았어요.

그 은혜에 감사하고 살았던 겁니다.

그 은혜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일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인에게 받은 은혜를 증거하는 겁니다.

감사로 사는 겁니다.

 

감사로 사는 모습은 각양 달라요.

정형화 되어 있지 않아요.

범사에 믿음으로 살면 그게 일하는 것이에요.

많이 탕감 받은 것을 아는 자는 많이 감사하며 살 것이고 적게 탕감 받은 종은 적게 감사하며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해요.

주인에 대한 은혜가 열심히 달란트를 남기는 일을 하였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열심히 주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어떻게 사랑할까요? 라고는 묻지 마세요.

사랑은 어떤 틀이 없어요.

단 하나 말한다면 사랑은 관심입니다.

성령께서 관심의 대상을 알려 주실 겁니다.

그것이 교회 일수도 있고, 형제 일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어요.

탕감 받은 자 답게 마음에 감동되는 대로 하세요.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난 5 달란트 2 달란트 받은 종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고 있는지!

아니면 1 달란트 받은 종처럼 빈둥거리고 자기 육신 편한대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세요.

복음 안다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성경이 힘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는 것은 은혜 받아서 무슨 큰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 주제를 더 많이 알라는 뜻이에요.

내가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많이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은 깨달음으로 귀결 되어지는 겁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더 많이 더 넓게 더 높게 더 깊게 더 멀리 깨닫기를 기도했어요.

 

부디 우리 마음 속에 샛별이 떠올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깨달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자랑하고 마리아처럼 은혜의 향기를 토해내는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빛으로 오셔서 어둠이 사고를 몰아내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쪽으로 심판을 받게 하심도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몸이 은혜의 도구로서만 사용되어지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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