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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82강. 예수님의 섬김 (요 13:12-20)

by coroa 2021. 11. 15.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82강. 예수님의 섬김 (요 13:12-20)

-.정낙원 목사

 

요 13:12-20=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 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물론 육으로 보면 모든 말씀들이 다 오해 투성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을 가지고 남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 마치 올바른 신앙인냥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거짓 종들은 세족식을 하면서 마치 예수님처럼 겸손한척 위선을 떨고 있어요.

그러나 본문은 예수님의 겸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들은 구속사적인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윤리 도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발을 씻겨 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성도의 죄가 씻김 받는 것을 말합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을 발 씻는 것으로 말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성도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 것은 집을 짓는 설계도와 같아습니다.

 

누가 어떤 집을 짓기 전에 먼저 설계도를 만듭니다.

설계도에는 집의 구조에서부터 건축에 사용되어질 모든 재료들이 다 언급되어 있습니다.

목수는 그 설계도에 따라서 집을 건축하게 됩니다.

설계도는 집이 있기 전에 먼저 있었어요.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도 하나님께서 설계도를 주셨습니다.

배에 칸을 나누는 것이나 창문을 내는 것이나 겉에 역청을 칠하는 것까지 지시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수로 일을 하셨지요.

그럼 예수님도 배를 건조할 때도 설계도대로 만들었어요.

설계도 없인 만들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창조주십니다.

창조란 일하심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도 일을 하시는 데에는 설계도가 있습니다.

이름하여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해 가시는 데에는 창세전 언약을 토대로 해서 일을 해 나가십니다.

이건 불변의 원칙입니다.

세상 만물은 이 원칙에 의하여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세상의 역사도 이 원칙에 의해서 다스려져 갑니다.

 

하늘 위에 있는 천상의 권세나!

땅 아래 있는 음부의 권세나!

땅 위에 있는 세상의 권세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에 따라서 쇠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합니다.

 

창세전 언약은 하나님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이 뱉어낸 언약을 토대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므로 식언치 않는다고 하시면서 스스로를 거짓말 하실 수 없다고 하셨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창세전 언약은 하나님이 뱉어낸 겁니다.

 

그럼 창세전 언약이라는 법칙은 하나님조차도 어길 수가 없어요.

이건 하나님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에게 동일하게 적용이 되어지는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려면 먼저 창세전 언약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역사는 창세전 언약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을 구현하는 장소입니다.

언약 없이 창조가 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이 세상의 모든 인류 역사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창세전 언약을 드러내는 역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살아가는 역사 한 마디 한 마디 속에는 다 언약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전 언약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고 하셨어요.

여기에 보면 “예수의 피” 가 나오고, “자기 백성”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자기 백성이라 함은 다른 백성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애초부터 두 민족을 창조했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래요.

하나님은 애초부터 천국백성과 지옥백성 두 민족을 창조 했어요.

자기 백성과 다른 백성은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는 상대적인 존재로 창조가 되었어요.

 

이건 마치 흰색을 드러나게 하려고 검은색을 바탕에 깔아놓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그림의 명암(明暗)에 구도처럼 창조가 된 것입니다.

이러면 창세전 언약 속에는 이미 “너”와 “나”로 갈라지는 심판이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백성과 다른 백성으로 구분되는 심판이 전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조 자체가 심판을 전제하고 있어요.

그래서 성경엔 구원과 멸망이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가 있는가 하면 반드시 멸망당한 자가 있어요.

가인과 아벨처럼 말이에요.

 

가인과 아벨의 구원과 멸망이라는 심판도 이 창세전 언약에 근거하여서 일어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야곱과 에서처럼 긍휼의 그릇이든지 진노의 그릇으로 창조가 되었어요.

야곱과 에서처럼 구원의 그릇으로 태어나든지 아니면 멸망의 그릇으로 태어나든지 그래요.

그리곤 이 두 그릇이 한군데 뒤죽박죽 섞여져 있어요.

이를 창세기 1장 2절에서는 혼돈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그릇을 갈라내는 일을 빛이신 예수님이 하세요.

예수님이 어둠인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과 다른 백성을 갈라내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은 너희와 저희로 말씀하셨어요.

천국에 비밀을 너희에겐 허락되었지만 저희에겐 감추어져 있다고 했어요.

예수님에 의해서 너희에겐 천국의 비밀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에 의해서 너희와 저희로 갈라지게 되었어요.

 

이를 예수님의 주 되심이라고 합니다.

주란? 주인으로서 갈라내는 분이란 말입니다.

주님이란? 심판하시는 분이란 말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셔서 유대인들 중에서도 너희는 천국 저희는 지옥으로 구분하신 것입니다.

그릇을 정리정돈 하듯이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을 정리정돈 하시는 겁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이신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겁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계실 땐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계셨어요.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시면서 예수라는 이름을 아버지로부터 받아 오신 겁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와 내가 창세전에 언약한 자기 백성들을 찾으라고 예수라는 이름을 주어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실 구원자란 말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백성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저희들 중에서 너희를 골라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찾는가 하면 자신의 피로 찾습니다.

자기 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기 백성을 구원키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오직 자기 백성에게만 효력이 있어요.

이는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시간이 가까워 옵니다.

유월절이 되면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그 피로 자기백성들의 죄사함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죽으면 자기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걸 죄 씻음이라고 해요.

 

예수님은 이 사실을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사건으로 예시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세족(洗足)식은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가 씻겨지는 것을 계시하는 계시사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준 것은 흔히들 말하는 겸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죄사함을 보여주는 예표적인 사건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죽어야 할 때인 유월절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죽어야 할 그 때를 맞추어서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행동을 인간적인 입장에서 선생이 제자들을 섬기는 것으로 이해하고 안 된다고 덤벙 거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윤리 도적 차원에서 이해를 한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씻겨주지 않으면 너희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건 윤리 도덕적인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죄사함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씻겨주지 않으면 예수님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씻겨 주신다는 것은 죄사함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죄 씻는 일을 죄인에게 맡기지 않고 예수님에게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발을 씻기겠다고 하자 책망을 하신 겁니다.

 

야~ 이 건방진 놈아!

죄는 내가 너를 사해주는 것이지 네가 나를 사해주는 것이 아니라고 책망을 하신 겁니다.

의인이 죄인은 담당해 주어야지 어떻게 죄인이 의인을 담당 할 수 있느냐고 책망하신 거에요.

 

그런데 지금도 많은 분들이 베드로처럼 세족식 사건을 겸손이나 회개로 이해하고 있어요.

잘못된 행동을 고치고 돌이키고 반성하는 성화론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성화주의자들의 주장은 구원은 예수의 피로 받았지만 구원 이후에 살아가면서 짓는 죄는 발을 씻듯이 회개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목욕은 예수님 피로 구원 받는 것이지만!

발 씻는 것은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짓는 죄들을 회개하는 것이라고 해요.

마치 걸어 다니다 보면 발에 먼지가 묻듯이 성도가 세상을 살다가 보면 죄를 짓게 되니 회개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어때 그럴듯하지요.

문자적으로 보면 전혀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문자적으로 보면 그렇게 해석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성경은 이런 성경해석을 죄라고 합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해석은 구태여 성령을 안 받아도 누구라도 해석을 할 수가 있어요.

성화주의자들의 해석은 인간의 상식으로 하는 해석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세족식은 인간의 상식과 다른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어요.

이는 성경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해석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 했다는 것은 모든 성경은 예수님의 피 뿌림의 사건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하여 일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족식 사건은 성령을 받은 자와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 간에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은 윤리적인 사건으로 해석을 하고!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해석을 하게 되어 있어요.

 

성화론의 오류는 잘못된 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성화론은 옛 언약적 죄관을 가지고 있어요.

옛 언약적 죄관은 인간의 행동으로 좌다 아니다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회개도 인간의 행동을 고치는 것으로 두고 있어요.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인간의 행동으로 죄를 논하지 않아요.

인간의 행동 자체를 죄로 규정해 버려요.

새 언약 하에선 죄를 구조적인 문제로 말하고 있어요.

 

구조(構造)란? 영역을 말해요.

즉 어느 소속에 속하였느냐를 가지고 죄인이다 의인이다를 구분해요.

누구 아래 있느냐로 판단 한단 말입니다.

예수 안이냐!

아담 안이냐! 로 판단해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옛 언약 하에선 인간의 행동으로 판단했어요.

내가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로 죄다 아니다 로 판단을 했어요.

왜냐하면! 옛 언약은 우리와 약속을 맺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인정해 주었어요.

그러므로 내 행실로 죄다 아니다로 판단 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이러한 죄관이 사라졌어요.

예수님 편이냐 아니냐 라는 새로운 죄관이 주어졌어요.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한다고 하지요.

이는 옛 언약 하에서 알고 있던 죄관과 의관과 심판을 책망한다는 말이에요.

 

옛 언약 하에선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로 죄다 아니다 를 따졌어요.

안식일을 지키면 의고 안 지키면 죄였어요.

도적질 하면 죄이고 안하면 의였어요.

살인하면 죄이고 안하면 의였어요.

간음하면 죄였고 안하면 의였어요.

 

바리새인들은 이 죄관과 의관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율법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롭다고 생각했고 세리와 창기들은 율법적인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옛 언약 하에선 인간의 행동에 의로운 것과 불의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되면 자신의 행동에 따라서 죄인이 되기도 하고 의인이 되기도 해져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이런 율법적인 죄관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므로 인간의 행동을 근거로 하는 죄관과 의관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것과 반대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인간이 되고 말아요.

자기의 행동에 따라서 죄인이 되기도 하고 의인이 되기도 하는 중립적인 인간이 되어요.

십계명을 어기면 죄인이 되지만 십계명을 지키면 죄인이 아니거든요.

이게 옛 언약 하에서의 죄관이에요.

바리새인들이 이런 죄관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건 성경이 말하는 인간이 아니에요.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어요.

인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타락했다고 했어요.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라고 했다니까요.

이는 몸과 마음이 다 썩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은 이런 자 라고 고발을 해 준 겁니다.

인간에겐 의가 없다고 말해 주셨어요.

 

새 언약 하에선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규정해 버려요.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인간에게선 의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이건 죄이고 저건 의라고 구분하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아요.

 

그러니 새 언약 하에선 인간의 행함으로 죄다 아니다 라고 접근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이를 말해 주어요.

새로운 법을 알려 주어요.

 

새 언약 하에선 죄와 의는 영역으로 구분해요.

영역을 구조라고 하는데 즉 누구에게 속하여 있느냐 에요.

네 조상이 누구냐 로 따진단 말입니다.

쉬운 말로 아담 안에 있느냐! 예수 안에 있느냐! 로 따지는 겁니다.

그러니 아담 안에 있으면 무조건 죄인이고! 예수 안에 있으면 무조건 의인이에요.

 

새 언약 하에선 인간은 낄 틈이 없어요.

새 언약 하에선 인간은 죽은 자에요.

하나님은 인간을 취급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인간에게선 의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동은 모두가 죽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죽은 것이지요.

새 언약 하에선 하나님은 인간을 독자적으로 보지 않아요.

예수님 하고만 상대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 피로서 새 언약을 맺은 겁니다.

새 언약 하에선 난 없는 자에요.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우리의 행동으로 죄다 아니다 를 논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성화주의는 우리 행동으로 죄다 아니다 를 판단해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살아 있어요.

그러니 눈만 뜨면 자기 행동에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까라고 고민을 하니 목사들이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으라고 가르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를 안 믿고 자기 관리를 한다고 바쁜 겁니다.

이건 마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수치를 자기 힘으로 가리고자 무화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것과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성화주의자들은 내가 거룩하게 변화 하여야 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기껏 변화된 삶이라고 내어 놓는 것이 고작해서 인간들이 말하는 착함이에요.

 

예를 들어서 술 담배 먹던 사람이 술 담배를 끊고!

교회에 충성하지 않던 사람이 교회에 충성하고!

강도짓 하던 사람이 변해서 이웃에게 밥 퍼주는 사랑을 한다든가! 라는 것이에요.

고작해서 자기 행동을 뜯어 고친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이런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곧 인간의 행함을 신앙으로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의미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가르치는 겁니다.

 

그래서 회개 한다는 것이 맨 날 자기 행동을 돌아보고 고치는 것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자기에게 의미를 두고 있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무엇을 믿을 것인가는 없고 무엇을 행할 것만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아니고 행함인 겁니다.

 

이건 옛 언약 하에서의 신앙이에요.

옛 언약 하에선 내가 살아 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행동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는 믿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늘 고치고 돌아보게 되는 겁니다.

 

회개란? 나를 보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을 말해요.

마귀는 자꾸만 내가 내 죄를 책임지라고 미혹을 해요.

그럼 성령께서 뒤통수 때리면서 야 임마! 너 한데서는 의가 나오지 않어!

그러니 네 꼬라지 보지 말고 예수님 피를 믿으라고 해요.

하기사 이건 믿음을 받아야지만 가능한 일이지만,,,

 

예수 안에서 바라보면 정죄함이 없어요.

예수님이 내 죄를 다 담당해 주셨다는 것이 보이거든요.

그러나 마귀는 자꾸만 예수 밖에서 자기를 바라보게 만들어요.

예수 밖에서 보면 자기 꼬라지가 죄로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맨날 자기 행동 뜯어 고친다고 분주한 겁니다.

이런 것을 개가 토하였다가 다시 먹는다고 하고 돼지가 씻었다가 도로 눕는다고 해요.

맨 날 자기 행동 세웠다 허물었다 뜯어 고친다고 난리인 겁니다.

뜯어고치면 뭣 합니까?

돌아서고 나면 또 그 짓을 하는데!

기분이 좋을 땐 천사 같다가도 속 상해 보세요 마귀로 돌변해요.

이게 인간이에요.

 

인간은 행동을 뜯어 고쳐 보아야 지나고 나면 또 그 자리에 서 있어요.

인간은 자기 몸뚱아리를 이기지 못해요.

이젠 안 해야지 다짐을 해도 닥치면 또 그 짓을 하고 말아요.

몸뚱아리는 환경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시절을 따라서 변해요.

 

그래서 인간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라고 하는 겁니다.

갈대는 안 흔들리고자 해요.

그런데 바람이 자꾸만 불어대는 겁니다.

그러니 바람 따라 흔들리는 겁니다.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옛날에 산을 옮길 만한 믿음들이 다 엿 바꿔 먹었잖아요.

이젠 이무기가 되어서 날 잡아 잡수! 하고 있잖아요.

목사가 피리를 불어도 춤 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잖아요.

 

우리 행동으로 죄다 아니다 를 논한다는 것은 여전히 나를 산 자로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 자신을 개별자로 두고 있다는 말이에요.

내가 개별자로 있으면 믿음이 필요가 없어요.

예수 믿을 필요가 없어요.

내가 변화되면 되니까요.

내가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지켜서 의로워지면 되어요.

 

옛 언약 하에선 예수를 안 믿어도 되어요.

왜냐하면! 말씀을 지킬 주체가 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내가 살아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되어요.

그러니 옛 언약에선 믿음이 필요가 없고 행함이 필요한 겁니다.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성화하여 변화되면 되니까요.

 

하지만 새 언약에선 난 예수 안에서 죽었어요.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고 예수 안에서 나 에요.

내 주인은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종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내 주인이기 때문에 내가 책임질 것이 없어요.

하나님은 종하고 상대하지 않고 주인하고만 상대를 해요.

종은 주인의 운명에 따라서 자기 팔자가 달라져요.

종은 자아가 없어요.

이건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이서 하신 약속이에요.

이게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이 예수님하고만 상대를 해요.

쉬운 말로 하나님은 두목하고 상대 하겠다는 겁니다.

두목이 이기면 그 조직 전체가 이긴 것이 되고 두목이 지면 그 전체가 지게 되어요.

 

이걸 대표성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에선 이걸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에서의 신앙은 예수를 믿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고 예수 안 믿으면 저주 받아요.

 

그러니 성화주의자들처럼 내가 변화되고 안 되고 와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하지만 성화주의는 변화를 내게 두고 있어요.

그러니 여전히 내가 독자적으로 살아서 의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새 언약에선 용납하지 않아요.

 

새 언약에선 인간의 의는 없어요.

오직 예수님 의 밖에 없어요.

그러므로 새 언약 하에선 성화주의가 이단인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안 믿고 자기가 변화된 것을 의롭다고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안 믿고 예수를 본받고 닮는다고 흉내만 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도 성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옛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 주체를 포기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아무리 포기하려고 해도 안 되어요.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자동적으로 자신이 지키겠다고 덤비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다 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자기가 지키고 행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믿음이란? 어떤 대상과 그 내용에 관한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 속에는 하나님이 믿으라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 대상이 누군가 하면 예수님이에요.

그러므로 믿음이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변치 않는 사랑이라고 했지요.

왜? 변하지 않는가 하면 우리 행위로 하지 않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셨기 때문에 우리 행위로 인하여 취소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마귀도 끊지 못해요.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 자신도 끊지 못해요.

왜냐하면! 사랑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버리지 않는 한 우린 지옥에 가고 싶어도 못가요.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막말로 나 예수 안 믿어! 라고 해도 안 되어요.

하나님이 우리 심장 속에 예수를 믿도록 불도장을 콱 찍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불도장이 찍한 사람은 예수를 안 믿을 수가 없어요.

성령이 임한 성도는 예수 안 믿는 것이 불가능해요.

 

그러므로 나 천국 안 갈래! 라고 하여도 안 되어요.

예수님이 책임지고 천국까지 끌고 가세요.

우린 예수를 믿고 안 믿고를 결정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믿으라고 하면 믿고!

믿지 말라고 하면 못 믿어요.

 

구약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우리 가나안 안 간다고 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가나안으로 데리고 갔잖아요.

질질 끌고 갔어요.

너희들이 뭔데 들어간다! 만다! 라고 하느냐! 라고 하면서 두들겨 패면서 데리고 갔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하나님이 가나안에 넣어 주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이에요.

 

성도의 팔자는 조상의 팔자를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자기가 팔자를 바꿀 수가 없어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이 한 약속으로 살아갔어요.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실 때 네 후손을 이방에 객이 되게 하였다가 4대 만에 다시 가나안으로 데리고 오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고!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출애굽을 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난 가나안 안 가겠다고 해도 안 된다고 하고!

싫다고 해도 하나님이 안 된다고 그래요.

그럼 왜? 안 되는데요? 라고 따지면 네 조상하고 약속했어! 그럽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조상의 팔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운명이에요.

하나님이 예수님하고 약속했어요.

이게 엄청난 축복이면서도 더럽게 재수가 없는 것이에요.

축복이라 함은 우리가 아무리 싫다고 하여도 천국에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고!

저주라 함은 우리 마음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없잖아요.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이 저주스러운 겁니다.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잖아요.

인간의 본성은 누가 간섭하면 극도로 반항해요.

 

그런데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서 일일이 간섭을 하니 짜증나는 겁니다.

맨 날 징징거리게 되는 겁니다.

마치 광야 길을 가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눈만 뜨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반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발 우리 마음대로 살게 해 달라고 해도 안 된다고 해요.

이건 마치 부모가 자식을 간섭하는 것과 같아요.

자식이 아무리 날 간섭하지 마세요! 라고 하여도 부모는 간섭을 포기 할 수가 없어요.

 

왜? 부모가 자식을 포기 못합니까?

자기가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를 버려도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가 없어요.

이게 끝까지 사랑인 겁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서 우리를 낳았어요.

그러니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천국에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란? 어쩌면 일평생 하나님과 싸우는 삶이에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살아가요.

 

죄인은 일평생 살면서 죄를 쏟아 내게 되어 있어요.

이걸 아는 사람이 성령을 받은 신자에요.

신자는 신앙이 깊어지면서 지독히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있어요.

자신이 잘난 자가 아니라 못난 자라고 깨달아가요.

죄의 집요함을 깨닫는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를 더 많이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유구무언(有口無言)이 되게 하여서 천당에 데리고 가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가면 아무 소리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선 오로지 어린 양에게 고맙습니다! 만 세세토록 하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럽니까?

어린 양의 변치 않는 끝까지 사랑 때문에 천국에 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할 말이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 가면 갈수록 할 말이 사라져요.

바울처럼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고백 밖에 안 나와요.

성경은 이걸 주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고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알고 할 말을 잃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하는 겁니다.

 

입술로 주여 사랑합니다! 라고 나불거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에요.

진짜 사랑은 주님 앞에서 자신을 던지는 거예요.

난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찾아간 예수님 앞에 할 말을 잃고 주여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하는 것이 주를 사랑하는 거예요.

주님의 은혜만 오롯이 남아 있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요.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에요.

이건 자기가 지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고백되어지는 것입니다.

괜히 어쭙잖게 흉내 내려고 하지 마세요.

신앙생활은 쇼가 아니에요.

 

우리 안엔 야곱이 있어요.

이 놈은 아주 교활하고 약삭빠른 놈이에요.

이 놈은 오로지 자기 몸뚱이만 챙겨요.

하나님하고도 씨름을 해서 이긴 놈이리구요.

이건 하나님 뜻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2장을 보면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을 해서 져요.

하나님이 이긴 것이 아니라 야곱이 이겼어요.

하나님도 야곱의 죄에 고집을 꺽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건 마치 자식의 고집을 부모가 이기지 못하는 것과 같아요.

자식이 잘나서 산 것이 아니고 부모가 날마다 희생하였기 때문에 산 겁니다.

이걸 언제 아느냐 하면 시집가고 장가가서 자기가 지식을 낳아 키우면서 알게 되어요.

자기 자식이 속을 섞여 보아야 아! 우리 부모가 져주고 살았구나! 를 알게 된 다구요.

 

창세기 32장을 봅시다.

 

창 32:9-11=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야곱의 등에는 아브라함 언약이 짊어져 있어요.

물론 야곱은 몰라요.

야곱은 이 사실을 모른 체 자기 야망을 이루고자 온갖 술수를 따 써서 거부가 되어서 귀향을 합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에서가 군사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고 합니다.

야곱의 가슴이 철렁 합니다.

아니 지금까지 어떻게 이루어 온 재산인데!

여기서 빼앗길 순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찾아서 뭐라고 합니까?

자기 목숨과 재산을 지켜 달라고 하지요.

야곱은 아브라함 언약엔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자기 재산을 지키면 되어요.

이게 야곱이 알고 있는 하나님관이에요.

 

말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그 아브라함과 언약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몰라요.

이건 마치 이 시대 우리와 같아요.

우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창세전 언약으로 오신 예수님을 몰라요.

그러니 예수 믿고 복 받고 잘 살게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과 똑같아요.

 

야곱에게 하나님은 자기를 지켜주는 수호신이에요.

이건 모든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관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얍복 강에서 왜곡된 하나님 상을 바꿔주는 일을 단행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시비를 겁니다.

 

창 32:24-28=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 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 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과 하나님의 씨름을 보면 아주 의미심장한 일이 있어요.

우린 이 사실을 간과해요.

 

우리 생각엔 하나님이 야곱을 이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어요.

하나님이 야곱을 이기지 못하여서 환도뼈를 위골시킨 겁니다.

하나님이 그러지요.

네 놈은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놈이라고!

 

이 말이 무진장 중요해요.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야곱에게 진 것이 아니에요.

이는 야곱의 죄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말해주고자 함이에요.

 

죄가 하나님 뜻을 이기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에요.

 

죄를 이기지 못하면 저주 받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저주 받지 않고 있어요.

이는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고 계신단 말입니다.

마치 야곱과 씨름에서 져 주신 것과 같아요.

져 주심으로서 너는 이렇게 고집이 세고 악랄한 놈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잘 보여주는 것이 부모와 자식이에요.

특히 엄마에요.

이 세상에 자식 놈들 치고 엄마에게 순종한 놈이 없어요.

모두 엄마를 이긴 놈들이에요.

그래서 인간을 어미를 잡아먹은 살모사 새끼라고 하는 겁니다.

엄마가 힘이 없어서 지는 것이 아니고 져 주는 것이잖아요.

왜? 져 줍니까?

엄마는 자식을 알기 때문이에요.

 

자식은 엄마가 저 주었다는 것을 자기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알아요.

아~ 우리 엄마나 날 은혜로 키우셨구나!

속 섞이는 자식을 키우면서 나 같이 못난 인간을 키운다고 고생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때 비로서 효도 한다고 부산을 떨지만 이미 부모님은 오늘 내일 하잖아요.

그래서 철이 들어서 엄마 앞에 서면 자기 잘남이 사라지고 자신의 못남만 생각이 나는 겁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모양이요.

마치 탕자의 비유처럼 아버지는 탕자가 재산을 말아 먹을 줄 다 알면서도 집 나가는 자식을 막지 않은 겁니다.

탕자는 집에 있을 땐 아버지의 간섭이 사랑인줄 몰랐어요.

아버지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그래서 어찌 하든지 집을 떠나고자 했어요.

 

그러나 집 나가 고생을 하고 난후 아버지의 은혜를 깨달은 겁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었음을 안 겁니다.

아버지는 탕자에게 이 은혜를 깨닫게 하시려고 자식이 집을 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던 겁니다.

집을 나가겠다고 하는 놈은 아무리 잡아 두어도 소용없어요.

기어코 나가서 고생해 보아야 왜? 부모가 못 나가게 했는지를 알아요.

인간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기어코 해 보아야 손을 들기 때문입니다.

돌아오고 난 후에라야 자신이 부모 가슴에 대 못을 박은 것이란 것을 알아요.

 

지금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하는 것이 그래요.

일부러 져 준 것입니다.

져 줌으로서 넌 하나님 앞에서도 고집을 꺾지 않은 자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고집을 피운다는 것은 죄에요.

그럼 저주 받아야지요.

져 줌으로서 넌 죄를 이길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까지 이기려고 덤비는 놈이라는 뜻에서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속에는 하나님까지 이기고자 하는 죄성이 담겨져 있어요.

순종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이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이름을 바꿔 주시고선 그곳을 죄인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도 살아났다는 의미에서 브니엘이라고 하신 겁니다.

저주 받아야 할 놈이 하나님의 용서로 살아났다고 해서 브니엘인 겁니다.

 

오늘 본문이 뭔가요?

예수님의 섬김을 기억하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난 후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들도 이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클 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아느냐 입니다.

내가 왜?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지 아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에요.

왜? 죄 없는 예수님이 죽어야 하는지를 아느냐를 묻고 계신 겁니다.

너희들 때문에 죽는 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왜? 창세전 언약을 예수님의 피로서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이는 자기백성들이 스스로 거룩해 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 아래 가두어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피를 흘려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죄 아래 가두어 둔 것은 구원이 은혜로 남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기백성들 속에 예수님의 희생을 담아 놓기 위함입니다.

다른 말로 은혜를 남기고자 함이에요.

그래야 아들의 나라에서 아들만 찬양하고 살수가 있어요.

 

나의 난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 때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순종이 나와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기쁜 소식이 되려면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과 비례해요.

자신의 죄에 깊이를 아는 것만큼 예수님의 피에 가치가 귀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져요.

 

인간은 본질적으로 남을 섬기지 못해요.

왜냐하면! 죄가 왕 노릇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섬김 받으라고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준 것은 인간들은 할 수가 없는 일이에요.

남에 발을 씻겨 준다는 것은 종이란 말입니다.

스스로 종이 되겠다는 뜻이에요.

다 왕 노릇하고 싶어하는 인간이 어떻게 남에 종이 되고자 한단 말입니까?

이는 불가능해요.

 

사람은 본성적으로 남에게 섬김을 받기 원하지 남을 섬기려고 하지 않아요.

인간은 남을 섬기면 진다고 생각해요.

그러므로 다 섬김 받고자 하지 섬기고자 하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너희들도 나처럼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본성과 거스르는 역설적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인간의 본성과 반대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어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이 하늘나라의 도라고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힘의 논리로 다스려지는 세상적 사고와는 역설적이므로 행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자기 자신의 한계를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자인가를 먼저 알아야 해요.

내가 과연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있는지 달아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여도 내가 지킬 수가 없다면 소용없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악당들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섬김이란?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이에요.

창조주가 피조물을 보살피는 것을 말해요.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말해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는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생명이 잘 자라도록 보살피고 섬기는 것이에요.

 

어째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깁니까?

이는 강한 자는 알고 약한 자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를 아는 자와 죄를 모르는 자 둘 중에 누가 더 답답합니까!

죄를 아는 자가 더 답답해요.

 

부모와 자식 간에 공부를 두고 누가 더 답답합니까?

부모에요.

자식은 공부에 중요성을 몰라요.

그러니 부모는 시간 시간 공부하라고 닦달하고 자식은 시간만 나면 공부 안하고 놀려고만 하는 겁니다.

 

부모는 공부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자식에게 공부를 시키려고 온갖 희생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돈 벌어 자식 과외비를 대 주잖아요.

그런데 이 자식 놈은 이런 것도 모르고 간섭한다고 귀찮아하잖아요.

자식들 입장에선 부모의 간섭을 희생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부모는 공부하는 자식에게 숨 죽이고 사는 것이 바로 섬김인 겁니다.

참아주고 용서하고 욕을 먹고 오해를 당하고 사는 것이 사랑이에요.

 

자식을 키우기 위하여 부모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가요.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해요.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존심도 수치심도 다 팽개쳐요.

이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사함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과 같아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담당했어요.

침 뱉음을 당하셨고!

뺨을 맞으셨고!

조롱을 당하셨고!

발가벗김을 당하셨고!

끝내 죽임을 당하셨어요.

 

우린 예수님의 이런 섬김을 받았어요.

지금 내가 사는 이 순간도 예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고 살아가고 있어요.

남을 섬기기 이전에 “아!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구나!” 를 알아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17절이 말하는 “이것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이것이란?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제자들의 죄가 용서함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아느냐 !라고 묻는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으로부터 죄씻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를 묻고 계신 겁니다.

형제의 발을 씻긴다는 것은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행할 수가 있어요.

 

예수님의 명령이라고 해서 그 의미도 모르면서 행한다고 해서 순종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씻김 받고 있음을 알지 못하면 쑈가 되는 겁니다.

퍼포먼스 하는 겁니다.

이걸 외식이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알겠느냐! 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형제의 발을 씻기기 이전에 내가 왜? 형제의 발을 씻겨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아는지를 물으시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명령은 내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는 표현을 형제의 발을 씻김으로 증거 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즉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보이라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용서해 준 것 같이 너희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의 바탕엔 주님으로부터 용서 받음이 깔려 있어야 해요.

그래야 그 용서가 내가 한 용서가 아니고 주님의 용서하심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 한 갓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용서하신 것이 되어요.

 

그러므로 형제의 발을 씻긴다는 것은 내가 주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니 나도 너를 용서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씻으면서 나도 주님으로부터 씻김 받아 용서받은 자입니다 를 알라는 것입니다.

용서 받았음을 용서함으로 보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15절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본을 보였다는 것은 흉내 내라는 말이 아니고 넌 나로부터 용서 받았느냐!

내가 널 씻겨 주었는지 아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그럼 용서하라는 겁니다.

이러한 용서는 우리 안에 주님께서 행하시는 용서예요.

 

성도가 행하는 것은 자기 안에 받은 것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 받은 것을 그려내는 도화지와 같아요.

용서를 받았으면 용서를 그려내고!

사랑을 받았으면 사랑을 그려내요.

 

내가 고아라는 것을 알면 고아를 사랑하고!

내가 나그네라는 것을 알면 나그네를 대접하고!

내가 살인한 자라는 것을 알면 살인자를 용서하고!

내가 간음한 자라는 것을 알면 간음한 자를 용서하고!

내개 율법 아래 있었다가 은혜 받은 것을 알면 율법 아래 있는 자를 탄핵하기 보단 그를 위해 기도하게 되어 있어요.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덮어두는 것은 자신도 자식 때 그랬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도 내 부모로부터 용서 받았음을 알기에 내 자식도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몰라도 철들면 알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참아주고 이해하고 보듬어 주는 겁니다.

우린 처음부터 부모가 된 것이 아니에요.

우리도 자식으로 출발했어요.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자식의 잘못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잘못한 자식을 잘라내지 못하고 허물을 덮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엔 장가를 가지 않은 놈은 어린아이로 취급을 했어요.

어른은 장가가서 아이를 낳고 키워보아야 비로서 어른이 어떤 것인 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죄 용서함을 받고 은혜를 입고 보니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잘못한 사람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이라고 느껴질 때 비로서 하나가 되어져서 그를 변호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도적놈이 되어보아야 도적놈을 진심으로 용서 할 수가 있어져요.

내가 도적놈이 아니면 시혜를 베푸는 것이지 용서가 되지 않아요.

무슨 적선이라도 해 주듯이 용서한다고 꼴값을 떨게 된다구요.

 

성도가 행하는 것은 모든 것이 예수님의 것이에요.

자기 것이라곤 없어요.

모두 예수님에게 받았어요.

용서나 사랑이나 쏟아내는 것마다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우린 은혜에 대하여 죽은 자였어요.

우린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악함만 쏟아냈어요.

우리 안엔 자비와 양선과 희락과 오래 참음과 충성과 온유와 화평과 긍휼과 사랑이 없었어요.

우리가 쏟아내는 것마다 죄였어요.

남을 해치는 것들 뿐이었다구요.

 

그런데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부터 예전엔 감히 맛보지도 못한 것들이 툭툭 터져 나와요.

참아주고 용서하고 섬긴단 말입니다.

물론 주께서 간섭 하실 때만 그래요.

하지만 가뭄에 콩나듯이라도 이러한 것들이 간헐천처럼 솟아난다는 것은 주께서 우리 안에서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걸 야고보서에센 믿음과 행함이라고 했어요.

믿음이 전기라고 한다면 행함은 돌아가는 선풍기와 같아요.

선풍기는 독자적인 힘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전기의 힘으로 돌아갑니다.

 

전기는 눈에 보이지 않아요.

선풍기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전기가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전원 스위치를 꼽았는데도 선풍기가 안 돌아가면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겁니다.

생명이 단절 된 것입니다.

그러니 전기라는 에너지(생명)의 흐름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성도의 행함도 이와 같아요.

믿음은 전기와 같아요.

생명의 능력이에요.

우리가 행하는 행함은 생명의 능력으로 선풍기가 돌아가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믿음이라는 전기가 공급되는 성도라고 한다면 반드시 어떤 행함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 행함이 용서일 수도 있고!

섬김일 수도 있고!

헌신일 수도 있고!

오래 참음일 수도 있고!

교회에 대한 충성일 수도 있고!

복음을 위하여 내는 헌금일 수도 있어요.

이 모두가 예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성도에겐 자기 자랑거리가 없어요.

이는 성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예수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성도에게 순종을 받고자 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모든 일에 감사가 되어요.

이러한 일들을 하고서도 감사가 되어지는 겁니다.

주께서 하게 하신 섬김엔 반드시 주님께 대한 감사가 나와요.

자기가 한 일이 아니고 주께서 하신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로 알 때 행할 수가 있어요.

은혜를 모르면서 헌신하게 되면 아까운 생각이 들고 허비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생색을 내게 된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시고 그대로 하라고 하신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의 악함과 무능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합니다.

그토록 용서받고 살아가고 있음에도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악함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깊이 알아가야 해요.

내가 바로 저주 받을 자라는 것을 알 때 모든 것이 감사로 보여지게 됩니다.

 

우리는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38년 된 병자와 같아요.

물이 동하면 들어가면 낫는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물이 동하는 것을 뻔히 보고서도 들어 갈 수가 없는 자들이에요.

누군가가 넣어주지 않으면 그림의 떡이에요.

 

우리도 죄 안 짓고 살고 싶어요.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어요.

형제를 사랑하고 섬기고 싶어요.

주님 말씀대로 살고 싶어요.

그런데 한 자락이라도 지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의 일방적인 용서하심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방식이 아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용서해 주셔야지만 되어요.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방법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신 죽어주심의 방법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요구를 다 이루어 주심으로 지킨 것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린 누굴 사랑하고 섬길 능력이 없어요.

원수를 용서하고 안아 줄 능력이 없어요.

아무리 예수님께서 섬기라고 하여도 할 수가 없어요.

그 어떤 말씀 앞에서도 우린 순종이 나오지 않고 불순종이 나와요.

 

우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 앞에 우리 주제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존재들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야 할 곳은 지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에겐 지옥이 편하지 천국은 거북스러워요.

 

우리가 죄를 안다고 해서 죄를 안 지을 재간이 없어요.

아담과 하와처럼 선악과를 먹으면 죽을 줄 뻔히 알고서도 기어코 따먹고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에요.

 

우리는 예수의 피로 죄 씻음 받는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그 피를 믿을 수가 없어요.

예수를 믿는 것조차도 우리 힘으로 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아무리 내가 너희를 씻겨 줄게 라고 하여도 그것을 아멘으로 믿어낼 재간이 없어요.

예수의 피로 죄 씻김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어야지만 가능해요.

그러니 우린 주여! 믿음을 더 하소서! 라고 고백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럼 우린 형제의 발을 씻겨주면서 “주여 나의 발도 씻겨 주옵소서” 라고 해야 합니다.

지금도 주께서 내 발을 씻겨 주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고 산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지금도 예수님께서 우리 발을 씻겨 주고 계시다는 증거에요.

예수님께서 씻겨주시기 때문에 믿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도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산다는 것을 알면 유구무언이 되어요.

하지만 내가 지금 주님의 명령대로 남의 발을 씻기고 있다고 생각하면 자랑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산다는 것은 잊은 체 남을 섬긴다고 자긍하고 있어요.

 

뭔가 조금이라도 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근거로 상좌에 앉고자 한단 말입니다.

헌금이라도 좀 하고 충성이라도 좀 해 보세요.

벌써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잖아요.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비웃으면서 너희들은 뭐 하는 인간들이냐고 조소하고 있는 겁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의 씻겨주심으로 산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씻김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하는데 도리어 남을 씻기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어요.

“주여 도와주소서!” 라고 해야 하는데 “주님 내가 할게요!” 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긍휼이 없고 제사만 난무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토록 율법을 지키면서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하던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자비를 원한다” 는 것을 배우라고 하셨는지를 아세요.

제사는 인간들이 지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희생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제사를 받지 않아요.

오직 예수님의 제사만 받아요.

 

우린 말씀 앞에서 예수라는 제물을 보아야 해요.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씻겨주는 제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섬김으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아는 자들이 바로 주께로부터 택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택함을 받지 않은 자들은 거부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는 예수님이 그를 선택한 자이므로 제자들을 영접 할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알리는 자들이에요.

예수님의 씻겨주심으로 살고 있음을 알리는 자들이에요.

우리는 증인이에요.

예수님의 씻겨주심으로 깨끗해진다는 것을 증거할 증인들이에요.

 

물론 세상은 이 증거를 받지 않아요.

하지만 세상의 판단과 상관없이 우리가 지금도 예수님의 씻겨주심으로 살고 있음을 알고 믿기에 이 사실을 아니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 자는 본 것을 말하게 되어 있어요.

주께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으로부터 씻김 받고 삽니까?

 

그럼 예수님의 씻기심으로 산다고 증거하세요.

성화가 아니라 예수의 피라고 증거하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증거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변함없이 예수님의 씻겨주심으로 살고 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씻겨주심으로 산다는 사실을 증거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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