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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78강. 하나님은 왜? 예수를 숨기시는가 (요 12:35-43)

by coroa 2021. 11. 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8강. 하나님은 왜? 예수를 숨기시는가 (요 12:35-43)

-.정낙원 목사

 

요 12:35-43=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오늘 본문을 보면 뭔가 급박하게 움직인다는 긴장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뭔가 비밀스러운 말을 해주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엄마가 자기 자식에서 다른 아이들 몰래 맛난 것을 먹이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에게 유대인들 몰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천국의 비밀을 제자들에게만 알려주잖아요.

제자들에게 알려주면서 쉿! 너희들에게만 알려주는 것이야!

저기 저 바리새인들에겐 비밀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오늘 본문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애들아! 나는 빛이고 세상은 어둠이란다!

그래서 세상이 나를 몰라본단다!

 

여기서 세상이란? 유대인을 말하고 광의적으로는 온 인류를 말합니다.

본문에선 유대인을 말합니다.

그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너희들은 나와 다녔으니 내가 빛인지 알겠지!

이제 내가 곧 떠나가야 하거든!

내가 십자가에 죽어야 하거든!

내가 떠나면 너희도 저들과 똑같이 어둠에 빠질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을 때 내 말을 단단히 들어야 한다!



무슨 말인지 새겨들어야 한다!

귀담아 들어 놓아라! 

그래야 나처럼 빛의 아들이 된단다!

빛의 아들이 되어야 내가 가는 곳에 너희도 올수가 있단다!

그러니 내가 너희와 같이 있을 동안에 내 말을 잘 듣고 믿어야 한다! 고 합니다.

 

무슨 선문답(禪問答)하는 것 같지요.

맞아요.

빛과 어둠의 선문답이에요.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몰라요.

알 수가 없어요.

나중에 성령이 오시자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선문답하듯이 말씀하시고선 예수님이 저희들을 떠나 숨어버리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숨다” 라는 말은 “크리베” 라고 하는데!

“크리베” 라는 말은 “크맆프토” 라는 “숨기시다” 라는 말의 수동태에요.

 

수동태란? 누군가가 강제로 의도적으로 숨겼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스스로 숨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강제로 예수님을 감추어 버렸다는 말이에요.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해요.

오늘 공부는 좀 어려우니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셔야 합니다.

 

본문 내용을 다시 설명합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늘에 비밀을 살짝 알려주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밀치면서 에이~ 쉿! 그러면 안 되지!

그러면서 예수님 손을 낚아채서 강제로 숨긴 것과 같아요.

 

숨겼다는 말은 못 만나게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날 믿으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안 돼!

너희들 그대로 예수 믿으면 안 돼!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숨겨 버린 것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폭탄을 분해하려고 하자 어른이 안 돼! 라고 하면서 폭탄을 빼앗는 것과 같아요.

어떤 분위기인지 감이 잡힙니까? 

하나님께선 예수님을 숨겼다는 말은 죄인들이 예수를 믿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엄청난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하시고 계신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린 흔히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기 바란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마다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는 플랜카드를 걸고서 전도하라고 하잖아요.

마치 전도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그럼 교인들은 순종한다고 나가서 전도한다고 동분서주합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인은 믿음 없는 신자로 취급하잖아요.

그만큼 우리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해석을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이상해집니다.

전도가 목적일 것 같으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숨길 필요가 없지요.

더 예수님을 드러내서 믿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하나님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고 믿을까봐 숨겨 버렸어요.

너희들 예수 믿으면 안 돼! 라고 예수를 못 믿게 방해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뭔가 이상하지요.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이라 참으로 생소하지 않나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을 몰라요.

믿게 한다고만 생각해요.

그래서 누가 예수 믿는 것을 방해하면 마귀 짓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하는 행동은 마귀 짓인 겁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고자 하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을 못 믿도록 숨겨버렸으니까요. 

 

하지만 본문에선 이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지 못하게 방해하셨다고 해요.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지식이나 이성으로 풀면 망한다고 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이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숨기셨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늘 허구로 흘러요.

헛 다리 짚어요.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예수를 믿어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전혀 다른 신앙생활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 영광 영광 하면서 말이에요.

 

이사야가 그랬잖아요.

 

사 1:11-1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하나님이 헛된 제물을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합니다.

제발 교회에 오지 말라고 하잖아요.

성전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다시는 모이지도 말라고 합니다.

기도해도 듣지 않겠대요.

전도도 하지 말래요.

헌금도 하지 말래요.

인간이 꼴보기 싫은데 무엇인들 이쁘겠어요?

결국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충성하는 것은 하나님을 죽이는 일인 겁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어요.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하나님을 죽이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잖아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나님을 죽였다구요.

이러한 일이 2천 년 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인류 역사 속에서 일어났어요.

 

그만큼 인류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은 다툼의 역사란 말입니다.

인류역사는 하나님 앞에서 죄가 고발되는 역사인 겁니다.

참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이 다투는 역사란 말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숨기셨어요.

죄인과 격리시키셨다구요.

 

왜? 그랬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감추어 버렸을까요?

하나님이 보시기엔 죄인들이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숨겨 버린 겁니다.

 

그 이유를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겁니다.

 

38-40=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숨길 것을 미리 말했어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숨기신 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뭐라고 했나요?

하나님께서 저희 눈을 멀게 하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소경을 만들고 마음을 어둡게 하셨다고 합니다.

 

혹여라도 저희가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을까봐 숨겼답니다.

마음으로 깨닫는다는 말은 마음으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신약에선 구원을 말할 때 예수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잖아요.

그럼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열어서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어야 하잖아요.

그래야 예수 믿습니다 라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사야의 말을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죄인이 예수를 믿으면 큰일 난다고 꽁꽁 숨겼다고 합니다.

아니! 이 무슨 황당한 말씀이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는 사도 바울도 말했어요.

사도행전 28장 25-28절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예수님 이야기를 알아듣지를 못하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였어요.

하나님께서 듣지 못하게 하여서 저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이렇게 되면 누가 복음을 말해도 듣지 않는다고 화를 낼 일이 아닙니다.

예수 안 믿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상식으로 생각하면 이래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낸 것은 하나님이세요.

예수님을 보낸 것은 자기 백성들을 예수를 믿게 해서 구원시키기 위함이에요.

그럼 예수를 믿게 해 주어야지요.

마음을 열어서 믿게 해 주어야지요.

 

예수님을 보면 첫 눈에 아! 저 분은 메시야구나 알아보게 해 주어야지요.

그래서 소경도 척 알아듣고 예수를 영접하게 하여야지요.

가는 곳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이 나타나야 해요.

이게 우리 생각이고 상식이에요.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믿지 못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 상식과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어요.

 

그럼 왜? 그런가 그 원인을 추적해 봅시다.

하나님이 죄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한 이유를 찾아봅시다.

분명히 죄인이 예수를 믿으면 안 될 이유가 잇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숨긴 것이니까요.

 

숨겼다!

감추었다! 라고 하면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지요.

이건 마치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보는 것과 같지 않나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인이 되어 죽은 자가 되자 급히 생명과를 따 먹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는 것과 같지요.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를 먹으면 큰일 나기 때문에 급히 숨기고 쫓아낸 것입니다.

죄인이 생명과 근처에 얼씬 거리지 못하도록 하였어요.

여기에 오늘 본문의 정답이 숨겨져 있어요.

 

생명과 속에 뭐가 있나요?

영생이 있지요.

생명과를 먹으면 영생한다고 하였잖아요.

 

이렇게 되면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된 죄인은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면 안 된다는 말이 되지요.

그러니 부랴부랴 천사들을 동원해서 생명과를 지키도록 한 것입니다.

 

이는 곧 죄인은 생명과를 먹으면 큰일 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생명과가 있는 에덴동산을 불을 훤히 밝히고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하도록 천사들에게 불 칼을 들고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반복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니 새겨들으세요.

 

생명과를 먹으면 영생한다고 했지요.

이걸 예수님에게 적용해 봅시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했어요.

누구든지 자기 살과 피를 먹으면 영생한다고 했어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 속에 영생이 있다는 말이 되지요.

이러면 생명과를 먹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은 같은 뜻이 됩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체이니 그럼 생명과는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 되겠지요.

 

그럼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과를 감춘 것은 신약에선 하나님이 죄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과 같은 뜻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감추었잖아요.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생명과를 지키는 천사들처럼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키고 계신 것입니다.

이해되지요.

 

하나님이 그럽니다.

죄인에게 생명과를 감추었다는 것은 죄인이 예수 믿고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죄인이 예수를 믿고자 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말과 같아요.

이상하지요.

 

오늘 본문 내용이 그렇잖아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요.

우리 생각은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해 준다고 믿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정 반대로 말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예수를 못 믿게 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왜? 죄인이 예수를 못 믿게 할까요?

그건 죄인이 예수 믿으면 죄인으로서 영생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누굽니까?

하나님을 거역하는 놈이잖아요.

하나님을 거역하는 놈이 영생하면서 천국에서 산다고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요.

 

이건 마치 말 안 듣는 자식과 한 지붕에 사는 것과 같아요.

아무리 자기 지식이지만 말 안 들어 보세요.,

그건 자식이 아니고 웬수에요.

꼴도 보기 싫어요.

저도 자식이 말을 안 들으면 나가라고 해요.

나가서 혼자 살라고 해요.

자식도 말 잘 들어야 자식이지, 말 안 들으면 저주스러운 원수에요.

 

뱀이 선악과를 소개할 때 뭐라고 했나요.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했지요.

하나님도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을 내어 쫓을 때 하신 말씀이 저 놈들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같이 되었다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에게 생명과를 감춘 이유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피조물이 선악을 아는 일로 영생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안다는 말은 심판 한다는 말입니다.

심판은 창조주만이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더러 심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눈만 뜨면 누구를 심판하고 있어요.

누군 옳고 누군 그르고 판단하잖아요.

이게 모두가 선악과를 먹어서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처럼 심판하는 겁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인이 되었어요.

죄가 뭐냐!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진 겁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좋다고 하는 것을 좋다고 하고 하나님이 싫다고 하는 것을 싫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罪)라고 하면 죄이고,

하나님이 의(義)라고 하면 의라고 하는 것이 신앙이에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인간은 독자적인 눈을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독자적인 눈으로 판단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는데도 자기가 싫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싫다고 하는데도 자기는 좋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치장을 하는 겁니다.

 

좋고 나쁨의 기준을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反)하는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이런 놈을 그대로 두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되어요.

 

이런 놈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을 한다면 이건 재앙이에요.

그래서 죄인이 생명과를 먹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이런 놈은 죽여야 해요.

그래서 예수를 못 믿게 하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졌어요.

죄인의 눈이에요.

죄인의 눈으로 예수님을 판단하는 겁니다.

자기들 눈으로 판단해서 예수를 믿고자 합니다.

 

죄인의 눈에 비친 예수는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에요.



떡을 주는 예수이고!

병을 고쳐주는 예수이고!

기적을 베푸는 예수에요.

모두가 자기 육신에게 유익을 주는 예수에요.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예수라면 얼른 믿어야지요.

얼른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자로 살아야지요.

이게 죄인들이 예수를 믿고자하는 믿음이에요.

이런 믿음을 가지면 예수님을 평생 이용하게 되어요.

 

원래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어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인간을 창조했어요.

애당초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없어요.

오로지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만 있어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어요.

이게 피조물이에요.

 

그런데 죄가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들었어요.

자기 뜻대로 살게 하였어요.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할 자가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가 되고 말았다구요.

이런 몸을 어찌 에덴동산에서 살게 할 수가 있나요.

쫓아내야지요.

죽여야지요.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인간 지음을 한탄하셨다고 하지요.

왜? 한탄 합니까?

하나님 말을 안 들으니 한탄하는 겁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자식을 보고 언제 한탄합니까?

말 안 들을 때잖아요.

그러니 말을 안 듣는 자식은 곧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말 안 듣는 죄인임을 알게 하려고 그런 자식을 주신 것입니다.

자식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런 종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교사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죄인으로서 영생하는 것을 막는 일을 하세요.

죄인 그대로 예수를 믿으면 죄인이 아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숨겨 버린 것입니다.

예수 믿지 말고 죽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잘 보여주었어요.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태어나고 애굽에서 배웠어요.

그러므로 애굽에 지식으로 가득해요.

하나님도 애굽에서 배운 지식으로 알아요.

 

애굽에 배운 신(神)은 자기를 위한 신(神)이에요.

이걸 우상(偶像)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우상의 하나님을 가지고 출애굽을 합니다.

가나안은 이런 하나님을 섬기면 죽어요.

 

그래서 애굽에 사람을 죽여야 해요.

죽이고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야 해요.

그리고 난 후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여야 애굽식의 하나님을 섬기지 않게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여기에 동원 된 것이 홍해바다를 건너는 겁니다.

가나안을 가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지름길로 가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편하고 빠른 길을 이용하지 않고 어렵고 힘든 길을 택합니다.

이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 인간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은 자기 생각이 없고 하나님의 말에 순종하는 자가 사는 곳이에요.

한마디로 죄인은 살수가 없어요.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에 죄인을 홍해바다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육지 길을 가면 지름길이라 빠른데도 굳이 멀고 험하고 힘이 든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한 것은 홍해바다를 통해서 뭔가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홍해란? 붉은 바다란 말입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피 바다” 란 말입니다.

의역하면 “죽음의 바다” 란 말입니다.

홍해를 건넌다는 것은 죽음의 바다를 건넌다는 말이에요.

홍해바다로 들어갔다는 것은 죽음 속으로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이건 예표(豫表)에요.

 

그럼 신약에선 홍해바다를 건넌 것을 뭐라고 합니까?

바울의 증거를 들어 봅시다.

 

고린도전서 10장을 봅시다.

 

고전 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바울은 구약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을 세례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구약을 전부 예수님과 연관된 사건으로 해석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해석을 해요.

 

이게 새 언약식 해석법이에요.

새 언약식 해석법이란? 예수님을 거쳐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건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바라보는 겁니다.

 

다시 본문을 봅시다.

 

구약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은 모세에게 속하여 다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요.

여기서 모세에게 “속했다” 는 말은 모세 안에 담겨졌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모세가 이스라엘을 자기 품에 폭 감싸고 홍해를 건넌 겁니다.

 

마치 모세라는 고기 뱃속에 이스라엘이라는 알이 가득 들어 있는 것과 같아요.

모세가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서 알을 쏟아낸 겁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모세 뱃속에서 쏟아져 나온 겁니다.

 

이렇게 되면 모세가 이스라엘을 낳은 것이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모세 한 사람을 건졌는데 그 속에 이스라엘이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세요.

비유로 말하는 것이니 잘 이해하세요.

 

그러니 모세는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 한 사람을 구원했어요.

하나님이 모세를 구원하고 보니 모세가 뱃속에 이스라엘을 임신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걸 한 몸 또는 연합이라고 해요.

 

그럼 세례가 뭔가요?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를 받았다고 했잖아요.

그럼 새 언약의 관점에서 세례의 의미를 알아야지요.

 

골로새서 2장과 로마서 6장을 함께 봅시다.

 

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롬 6:3-5=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세례를 장사라고 말하지요.

바울은 세례를 죽음으로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누구 이름으로 받습니까?

예수님 이름으로 받지요.

이는 곧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혼자 죽은 것이 아니고 자기백성들과 함께 죽었어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구약에서의 홍해바다 사건과 같지요.

구약에서는 모세가 홍해바다에서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모세나 예수님은 대표하고 있어요.

그 속에 한 민족이 들어가 있어요.

모세 속엔 육적 이스라엘이 들어가 있었고!

예수님 속엔 영적 이스라엘이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세례를 “그리스도와 함께 합하여” 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합하여” 라는 말은 속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연합” 이라고 합니다.

연합은 하나 라는 뜻입니다.

 

자 정리하고 넘어 갑시다.

모세가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을 세례라고 했어요.

그런데 세례는 죽음이라고 합니다.

모세 속엔 이스라엘이 담겨져 있어요.

이걸 연합 또는 한 몸이라고 했지요.

 

그럼 이스라엘은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 몽땅 죽은 것이 되지요.

모세도 홍해에서 죽었고 이스라엘도 죽었어요.

그리고 모세가 홍해에서 살아난 것은 이스라엘도 살아난 겁니다. 

이렇게 되면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은 이젠 애굽에 이스라엘이 아니지요.

새로운 이스라엘인 겁니다.

모세에게 속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세가 홍해를 건넌 사건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어요.

그럼 모세 속에 이스라엘이 품어져 있다고 했으니 예수님 속에도 새로운 이스라엘이 담겨져 있겠지요.

이를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영적 이스라엘이에요.

예수님이 혼자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들을 몽땅 안고 죽은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저와 여러분도 죽은 겁니다.

우리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었어요.

 

자 묻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언제입니까?

성령이 오셔서 믿었지요. 

그럼 성령은 언제 오셨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이지요.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시고 난 후에 성령이 오셨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예수는 아담 안에서 난 우리가 믿는 겁니까?

아니면 아담 안에서 태어난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함께 죽고 예수님이 부활할 때 함께 살아난 예수 안에서의 우리입니까?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서 죽었다 살아난 우리가 믿는 것이지요.

 

이걸 제자들에게 적용해 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아담 안에서 난 자들이지요.

 

아담 안에서 난 자들은 죄인이에요.

죄인은 우상숭배자에요.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삶에 이용하는 자들이에요.

그럼 제자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따라다니는 것은 예수를 이용하고자 하겠지요.

이런 놈이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은 평생 이 놈들 시다바리로 살아야 해요.

 

하나님이 이걸 허락 할 수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당연히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숨긴 겁니다.

제자들이 비록 예수님을 따라다닌다고나 하나 아직까진 아담의 자손인 죄인으로서 예수를 따르고 있는 겁니다.

 

예수를 믿어도 지금 믿으면 안 되어요.

아담 안에 인간이 죽고 난 후 믿어야 해요.

아담 안에서 태어난 예수를 이용하고자 하는 죄인을 죽이고 난 후에 예수님을 믿게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아담 안에서 난 인간을 먼저 죽이는 일이 선행 되어야 해요.

그 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담 안에 난 인간을 안고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반드시 물속에서 죽는 경험을 하도록 하신 겁니다.



성막에 보면 성소와 뜰이 있지요.

성소를 세분화 하면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을 합니다만 이 둘을 통칭 성소라고 해요.

그런데 성소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뜰에 있는 물두멍에서 몸을 씻고 들어가야 해요.

안 씻으면 죽어요.

여기서 씻는다는 것은 세례와 같아요.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요.

이 때 요단강을 건너잖아요.

이 요단강에 들어가는 것도 홍해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은 의미에요.

가나안에 가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반드시 옛 사람이 죽는 경험을 하여야 하는 겁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예표적인 일들이에요.

장차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는 반드시 죽음을 경험한 후에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옛 사람은 못 만난다는 말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말이에요.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어야 만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와 함께 죽으시고 살아난 다음에 성령을 보내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는 겁니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고!

성막에 물두멍에서 몸을 씻는 것이나!

신약에 세례를 받는 것은 모두가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라는 의식인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를 믿으면 안 되어요.

믿어도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난 후에 믿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감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부러 못 믿게 하시려고 눈을 가리고 마음을 어둡게 하셨다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에요.

 

예수는 언제 믿어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후에 믿어야 해요.

옛 사람인 죄인이 죽고 난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후에 믿어야 해요.

즉 성령으로 거듭난 후에 믿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후에 성령을 보내서 예수를 믿게 해 주시는 겁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여서 예수를 믿도록 하시는 겁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한 이유도 다 이런 이유에서요.

애굽에 인간을 홍해바다에서 다 수장시켰어요.

홍해 바다에서 올라 올 땐 다른 인간이에요.

이건 장차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에요.

 

그럼 이걸 예수님에게 적용해 봅시다.

예수님이 30세 때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지요.

세례란 죽음이라고 하였잖아요.

그럼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음으로서 죽은 것이 되지요.

예수님의 30년 사생애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서 죽은 겁니다.

그리곤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영역 안으로 연합이 되었다는 말이에요.

물에서 올라온 예수님은 다른 예수님이에요.

이를테면 성령으로 거듭난 예수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자기백성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예표적인 사건이에요.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거듭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는 살리는 세례에요.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우리 성도가 겪어야 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수순을 밟아야 해요.

이 물세례의 실상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은 것은 예수님 자신이 장차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것을 미리 보여준 예표적인 사건인 겁니다.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는 예수님 자신의 일과 성도의 모습을 함께 담고 있는 이중적 계시가 담겨져 있어요.

 

자 다시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숨기셨어요.

이는 죄인으로서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류역사는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겼어요.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인간의 가능성으로 섬기게 되어요.

이게 대표적으로 잘 나타난 것이 바벨탑이에요.

 

바벨탑을 쌓은 것은 하늘에까지 닿고자 함입니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침노 하겠다는 발상입니다.

이게 신앙으로 나타난 것이 바리새인들이었어요.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의로 구원을 받고자 했어요.

이게 결국엔 예수님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식 신앙은 하나님을 죽이는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왜? 바리새인들 신앙이 하나님을 죽입니까?

 

로마서 10장을 봅시다.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은 자기 의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기 의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였다고 말하고 있어요.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의는 율법을 지켰다는 행함이에요.

율법을 지켰다는 행함이 바로 바벨탑 사상이에요.

인간의 능력으로 천국에 가겠다는 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인을 잘라 냈어요.

그리곤 천국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이방인을 긍휼로 구원을 해 주셨어요.

세리와 창기들은 이방인을 상징하는 자들이에요.

이방인은 구원에 대하여 천국에 대하여 관심조차 없었어요.

아니 모르고 살았어요,

하나님에 대하여 소경이란 말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선 예수를 믿고자 하는 놈들에겐 예수를 감추어 버리고 예수를 모르는 놈들에겐 믿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믿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들이고 예수를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에요.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그러지요.

너희가 소경이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그져 죄가 있다고!

이 말은 너희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였다면 구원의 은혜가 덮쳐 올 텐데 안다고 하니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주여 우리는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구원의 은혜가 임할 터인데 주여 우리는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천국에 갑니다! 라고 하니 죄가 그대로 있다고 하는 겁니다.

안다고 하는 놈은 모른다고 하고 모른다고 하는 놈에겐 예수를 알도록 눈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소경을 눈 뜨게 하고 본다고 하는 눈뜬 놈들은 소경을 만들어 버린 겁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것은 예수를 믿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본다고 하는 자들을 소경을 만들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려 버렸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못 믿게 만들었단 말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본다고 하는 자에겐 예수님은 감추어져 있고 소경이라고 하는 자에겐 열려져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감추어져 계신다고 하는 겁니다.

죄인이 예수님을 만날 수 없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빛이라 하고 세상은 어둠이라고 합니다.

어둠이란? 빛에 대하여서는 소경이란 말입니다.

빛을 예수라고 했으니 세상은 예수에 대하여 소경이에요.

 

세상이 안다고 하는 예수는 가짜에요.

왜냐하면! 세상은 예수님에 대하여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소경이면서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것은 소경으로서의 예수이지 진짜 예수가 아니에요.

 

소경을 죄인이라고 합시다.

그럼 죄인이 알고 있는 예수는 가짜인 겁니다.

죄인이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죄인의 지혜로 아는 예수이기 때문에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가짜 예수인 겁니다.

 

진짜 예수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성경은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나 동의어이니 죄인이 아는 하나님은 가짜란 겁니다.

 

이게 예수님이 오시자 확 드러난 겁니다.

봐라! 너희들은 예수를 몰라보잖아!

그러니 너희가 소경인거야!너희가 소경이라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몰라보고 예수를 죽였잖아!

참 빛이신 예수를 몰라보니 너희는 어둠인 거야!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의 주제가 뭡니까?

예수님은 빛이고 세상은 어둠이라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세상은 자신들이 어둠인줄 몰라요.

그러므로 자신이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접근을 하는 겁니다.

 

이게 유대교 신앙이고 구약이에요.

모든 인간은 다 여기에 속하였어요.

구약은 신앙의 출발을 인간으로부터 해요.

인간의 가능성으로 하나님을 접근하는 겁니다.

인간의 열심과 충성으로 구원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인간의 불가능성을 고발하고 있어요.

성경은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가지고 시험을 하였어요.

곁에서 아무리 기적을 베풀고 능력으로 도와주어도 안 되더라고 알려주고 있어요.

두들겨 패도 안 되고 얼르고 달래도 안 되더라는 겁니다.

옆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어도 안 되더라는 겁니다.

구약의 역사를 통하여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죄인은 정답을 알려 주어도 정답대로 살수 없는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중풍병자에요.

중풍병자는 마음으로는 훤히 아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요.

그래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맨 날 마음 따로 육신 따로 사는 겁니다.

이걸 바울이 알았기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탄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은 인간 쪽에서 예수님에게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인간들이 자신이 어둠인줄도 모르고 어둠에 방식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것을 하나님이 막아 버리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나 예수 믿을게요!

나 예수 믿을 테니 구원시켜 주세요! 그런다구요!

자기가 어떤 주제인줄도 모르고 말이에요.

 

예수님은 이걸 죄라고 해요.

내가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악이라고 고발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나중에 형편이 되면 믿겠다고 합니다.

이런 사고가 바로 죄인의 사고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까?

모두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과연 그 믿음의 출처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요?

나로부터 나왔는가요?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인가요?

 

나로부터 나온 것은 나의 조건에 따라서 변해요.

왜냐하면! 내가 믿었으니까요.

내가 믿었으니까 내가 안 믿을 수도 있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믿음이 다 여기에 속하였어요.

그러니 자기 기분에 따라서 신앙생활이 춤을 추는 겁니다.

자기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제자들처럼 뭔가에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신앙은 예수님에게 이끌려 가는 거예요.

이끌려가기 때문에 우리 기분에 따라서 춤을 출수가 없어요.

 

예수님에게 이끌려 가는 신앙생활은 하기 싫어도 하는 겁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날마다 나는 죽는 겁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나를 이끌어요.

 

어디로 이끄는 줄 아세요.,

십자가로 이끌어요.

욕먹고 매 맞고 핍박당하는 곳으로 이끈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린 울면서 끌려가는 겁니다.

 

바울이 이 고백을 했어요.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다구요.

그러므로 바울의 일생은 마치 개 끌려가듯이 원치 않는 길로 끌려가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믿음은 나의 조건에 따라서 변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셨기 때문에 내 행위와 상관없이 계속하여서 믿어지는 것입니다.


손해 보아도 믿고!

매를 맞아도 믿고!

이단 소리 들어도 믿고!

핍박과 조롱과 멸시를 받아도 믿는 겁니다.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신 예수는 내가 안 믿고 싶어도 안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내 의지를 뚫고 들어와서 나를 장악하고 믿어지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마치 강한 자가 집에 들어와서 주인을 결박시키고 세간살이를 늑탈해 가는 것과 같아요.

나 보다 강한 분이 내 안에서 예수를 믿게 한단 말입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구약은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고!

신약은 하나님이 예수를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겁니다.

구약은 내 노력이 필요하지만!

신약은 내 노력과 상관이 없어요.

 

구약은 내가 살아있고 신약은 내가 죽었어요.

구약은 아담 안에서 난 죄인 그대로 예수를 믿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나 신약은 아담 안에 태어난 나는 죽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로서 믿는 겁니다.

 

죄를 해결하지 못하고 예수를 믿으면 안 되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를 믿으면 죄인으로 영생하게 되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위배되어요.

 

예수님은 죄인을 죽이기 위해서 오셨어요.

죄인을 죽이고 죄 없는 자를 만들기 위해서 오셨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를 믿는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예수님을 감추어 버리신 겁니다.

 

죄인의 사상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인본주의(人本主義)란? 인간 중심의 사고를 말해요.

이게 유대교 신앙이에요.

유대인은 유대인을 위한 하나님을 믿었어요.

이게 유대 민족주의로 나타나요.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신앙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와 교인들이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내 교회!

내 가정!

내 자녀를 위한 하나님을 믿고 있어요.

이 시대 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자기를 위한 도우미에요.

이걸 우상이라고 합니다.

 

마귀가 이런 하나님을 섬기라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은 절대로 이런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숨기신 겁니다.

숨기시되 정한 때까지 숨기세요.

 

숨기신 것이 드러날 때가 있어요.

그건 형벌의 기간이 끝나야 합니다.

복역의 때가 차면 숨기웠던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실 겁니다.

 

에스겔 39장을 봅시다.

 

겔 39:22-29= “그 날 이후에 이스라엘 족속은 나를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줄 알겠고 23 열국은 이스라엘 족속이 그 죄악으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던 줄 알찌라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으므로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우고 그들을 그 대적의 손에 붙여 다 칼에 엎드러지게 하였으되 24 내가 그들의 더러움과 그들의 범죄한대로 행하여 그들에게 내 얼굴을 가리웠었느니라 25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긍휼을 베풀찌라 26 그들이 그 땅에 평안히 거하고 두렵게 할 자가 없게 될 때에 부끄러움을 품고 내게 범한 죄를 뉘우치리니 27 곧 내가 그들을 만민 중에서 돌아오게 하고 적국 중에서 모아내어 열국 목전에서 그들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낼 때에라 28 전에는 내가 그들로 사로잡혀 열국에 이르게 하였거니와 후에는 내가 그들을 모아 고토로 돌아오게 하고 그 한 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줄 알리라 29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우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내 신(神)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숨어 계시던 하나님이 언제 나타나시는가?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한 형벌의 기간이 끝나면 다시 고토로 돌아오게 한다고 합니다.

형벌의 기간 때에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형벌의 때가 끝나면 얼굴을 드러내신다고 합니다.

 

형벌이란? 죄값을 치른다는 말입니다.

이걸 신약적으로 말하면 죄사함 받을 때까지란 말입니다.

그럼 죄사함은 언제 주어집니까?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주어져요.

 

그러니 에스겔의 예언을 신약적인 의미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셔야 죄사함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린 모두가 죄와 사망에게 포로로 잡혀 있었어요.,

다른 말로 죄로 인하여 형벌을 받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려 주셨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의 포로로 잡혀 있던 자기 백성들을 구출해 주셨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성도가 당할 형벌의 복역에 때가 끝이 난 것이 되는 겁니다.

형벌의 역사가 끝나면 감추었던 얼굴을 드리워 준다고 하지요.

 

그리고선 하나님의 신을 쏟아 부어준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신이란 성령을 말해요.

성령을 부어준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에스겔 37장의 해골 골짜기 사건과 같아요.

마른 해골에 생기의 바람이 불어서 살려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들을 성령을 보내서 살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 성령이 오신 겁니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를 믿어지게 해 주신단 말입니다.

이를 두고 감추었던 얼굴을 드러낸다고 하는 겁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요.

 

본문에서 하나님의 신을 “쏟았음이니라” 라는 말은 “솨파크” 라는 말은 강세형으로서 마치 용암이 분출하듯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말해요.

강제로 밀어 넣는 것을 말해요.

 

마치 삼페인을 흔들면 그 안에 가스가 차서 뚜껑을 터트리고 분출하듯이 하나님께서 성령을 확 부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을 뚫고 들어와요.

우리하고 상의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들어오세요.

 

그리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게 해 버려요.

믿어지게 하니 믿는 겁니다.

이게 새 언약이에요.

그러니 새 언약은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맺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맺은 언약이에요. 

그런데 이게 언제 일어나는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후에 일어나요.

 

예레미야 31장을 봅시다.

 

렘 31:31-3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보세요.

날이 이르면 새 언약을 세운다고 하지요.

새 언약은 애굽에서 나올 때 세운 것과 다르다고 하지요.

애굽에서 나올 때 세운 언약은 옛 언약인데 이는 “겉 사람하고 맺은 언약” 이에요.

겉 사람이란 속 사람의 반대말입니다.

속 사람은 새 사람이고 겉 사람은 옛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은 겉 언약인 겁니다.

 

겉 언약이라고 하니 생소하지요.

편의상 겉 사람하고 맺은 언약이라고 하여서 겉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니 오해하지 마세요.

겉 사람이나 옛 사람이나 같은 말이니 옛 언약이나 겉 언약이나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겉 언약은 하나님이 남편처럼 곁에서 잔소리하고 도와주는 언약이에요.

그런데 실패 했어요.

남편의 말을 안 듣고 자기 고집을 피우다가 망했어요.

 

호세아서에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호세아와 그의 아내 고멜로 비유하였어요.

고멜의 마음은 음탕해서 호세아하고 살면서도 그 마음 속엔 다른 놈이 자리 잡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거예요.

붙잡아 오면 또 가출하고, 붙잡아 오면 또 가출하고 그러는 겁니다.

이는 마음 속에 다른 놈(죄)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하고 살면서도 그 마음속엔 이방 신이 자리 잡고 있어요.

죄가 자리 잡고 있으니 이방신을 섬기는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잘 해 줘도 안 되어요.

고멜처럼 화냥끼(죄성)가 있어서 틈만 나면 다른 놈(우상)을 찾아 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참다 참다 못하고 이스라엘을 멸망시켜 버렸어요.

더 이상은 못 참는다고 하면서 가나안 땅에서 다 쫓아 내 버린 겁니다.

그리고 꼴보기 싫다고 하면서 얼굴을 숨겨 버렸어요.

이게 구약의 역사에요.

 

그래서 구약의 역사는 형벌을 받은 역사인 것입니다.

이제 그 형벌의 때가 끝나면 새 언약을 세우겠대요.

새 언약은 곁에서 도와주는 언약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 속에 파고 들어온대요.

우리와 한 몸이 되겠대요.

 

이젠 겉에서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 하지 않고 그냥 우리 마음을 쥐락펴락하시겠답니다.

어떻게 쥐락펴락하는가 하면 성령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다 담당해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 쥐락펴락하시겠답니다.

그래서 새 언약을 마음에 기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 마음에 새겨지면 이제부턴 예수를 믿게 되어 있어요.

안 믿는 것이 불가능해요.

옛 언약 하에선 예수를 믿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새 언약 하에선 예수를 안 믿는 것이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예수님과 내가 한 몸이라는 것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과 나를 타인으로 보지 않고 한 몸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를 위한 죽으심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정죄하면 예수님이 다 갚아 주셨다고 말하는 겁니다.

 

새 언약이 마음에 새겨지면 이젠 누구에게 예수님이 누구시냐고 물어 볼 필요가 없어요.

그냥 자기 안에 새겨진 새 언약이라는 법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해 주어요.

이걸 사도 요한은 성령의 기름 부음이 알게 해 준다고 하였어요.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성령이 오면 예수님을 알아요.

믿어져요.

믿어지게 해 주세요.

 

무얼 믿어지게 해 준다고 합니까?

우리의 죄악을 사하시고 다시는 기억치 않는다는 것이 믿어지게 해 주신답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았다는 것이 믿어지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이게 믿어지면 내가 뭘 할 것이 없어요.

새 언약이 새겨지면 더 이상 정죄함을 당하지 않아요.

 

그럼 이런 새 언약이 언제 우리 안에서 새겨집니까?

에스겔 식으로 말하면 새 신을 부어주면 일어나요.

성령이 오시면 일어난단 말입니다.

그럼 성령이 언제 오셨는지 보면 새 언약 백성이 언제 생겨나는지 알 수가 있어집니다.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감추었던 예수님을 드러내는 순간이에요.

자~ 이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때입니다.

이 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후 오순절 날에 일어났어요.

 

사도행전 2장을 봅시다.

 

행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보세요,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라고 하지요.

이는 성령이 오시기로 작정된 그 날이란 말입니다.

“이르매” 라는 말은 이제 그날이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성령을 주기로 작정된 그날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은 오순절 날에 오시기로 되어 있어요.

이미 약속을 그렇게 하셨어요.

이 약속을 절기 속에 담아 놓았어요.

 

이스라엘 속엔 7대 절기가 있어요.

7대 절기 속엔 예수님의 일생을 담아 놓았어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담아 놓았어요.

 

7대 절기는 유월절로부터 시작해서 초막절로 끝나요.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죽음에서 해방된 날이에요.

즉 출애굽한 날이에요.

이는 마귀의 권세로부터 벗어난 날을 말해요.

어떻게 벗어났는가 하면 어린 양의 피로 벗어났어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 안에서 사는 민족인 겁니다.

이건 장차 어린 양의 실체로 오실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는 겁니다.

 

어린양의 피로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을 신약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사함 받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이 죽음을 확인 시키는 일이 홍해 바다를 건너는 겁니다.

신약에선 성도가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다는 것을 세례로 표현해 내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그러지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셨어요.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 죽는 시간에 맞추어서 죽었어요.

이건 블로그에 절기가 올려져 있으니 참고 하세요.

 

유월절이 일어난 후 50일째가 오순절이에요.

구약 시대에 이 날에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았어요.

구약에선 유월절 후 50일째 되는 날엔 하나님이 돌 판에 옛 언약을 새겨 주신 날이에요.

옛 언약은 돌 판에 새겨 주셨어요.

 

그런데 신약에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난 후 50일 만에 성령이 강림하셨어요.

성령이 성도들 마음 판에 새 언약을 새겨놓은 겁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처럼 하나님이 새 신을 쏟아 부어 주셨어요.

성령이 성도들 마음속으로 뚫고 들어왔어요.

그리곤 예수님께서 피로 세운 새 언약이 믿어지게 하셨어요.

 

새 언약은 우리의 죄악을 기억치 않는다는 언약이에요.

 

다시 예레미야를 봅시다.

 

렘 31:33-3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뭐라고 합니까?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않는다고 하지요.

왜? 기억치 않는가요?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과를 다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나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에서 뭐라고 했는지 살펴봅시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하지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하지요.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창에 찔리고 매를 맞고 죽임 당하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리심을 받았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다 예수님에게 담당시켰어요.

 

우리 대신에 예수님을 죽이셨다구요.

그러니 우리가 살고 있는 그 바탕엔 예수님의 죽으심이 깔려 있어요.

우린 예수님의 죽음을 대신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가 이루어졌어요.

 

이는 곧 아담에게 감추었던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나타내 주신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감추어져 계시던 하나님을 드러내고 알리어지게 하신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잠깐 제자들에게 알리워졌던 예수를 감추어 버린 것입니다.

이 때는 아직까지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아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이전이므로 아직 죄인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죄인 그대로 예수님을 믿으면 죄인을 위한 예수님이 되고 말아요.

예수를 이용하게 된단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자기 삶에 도우미로 이용하게 된단 말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누가 크냐 경쟁했어요.

심지어 예수님의 이모는 예수님에게 예수의 나라가 임하면 자기 아들들을 하나는 우의정에 하나는 좌의정에 앉혀 달라고 청탁을 했어요.

이는 곧 예수님을 자기 삶에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에요.

 

누가 크냐 작냐 라고 따지는 것은 아담 안에 있는 인간들이 지향하는 삶이에요.

이런 놈이 예수 믿고 천당에 가면 왕의 자리에 앉을 놈이에요.

그러니 이런 놈은 예수를 믿을 수 없게 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이 시대 목사들이 이런 예수를 가르치고 있어요.

교인들은 이런 예수를 믿고 있어요.

그러니 서로 경쟁하는 겁니다.

교회마다 누가 누가 크냐 경쟁하고 경쟁 시키고 있어요.

이건 아담 안에서 난 죄인들이 믿는 예수에요.

마귀가 심어준 예수에요.

가짜이지요.

 

이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지 않았다는 증거에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이 아니지요.

가짜 예수이지요.

이는 곧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사는 세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에요.

그러니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한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겐 이런 예수를 허락하지 않아요.

반드시 십자가에 죽고 살아난 후에 예수를 믿게 하세요.

그래야 예수를 이용하지 않아요.

그래서 성도에겐 성령이 오셔서 예수를 믿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믿어지게 하는 예수는 구원자로서의 예수에요.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지게 하세요.

이럴 때 비로서 나의 구원자로서의 예수가 보여지게 되어요.

“나의 주시여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 되고 나는 그의 종이 되는 겁니다.

죄인으로서 예수를 알 땐 내가 주인이 되어서 예수를 이용하고자 했는데!

이젠 예수님을 위해서 종이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겉 사람은 후패하고 속사람은 새롭다고 하지요.

왜? 겉 사람은 후패합니까?

예수님의 종으로 세상 가치로 살지 않으니 후패해 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우리 속에 심겨졌어요.

그러면 우리 몸은 그 밀알을 틔워내기 위해서 썩어져야 해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육신을 토양분으로 해서 삐져나와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겉 사람을 후패하게 만들어요.

세상에서 망하게 만들어요.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예수님처럼 대접을 받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만물의 찌끼 같고 구경거리로 전락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매맞고 버림당하고 욕을 먹게 되어요.

 

바울은 사도의 증거를 이런 것으로 말하고 있어요.

 

고후 11:23-30=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린도후서 11장은 거짓 종과 참 종을 구별해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단의 종들이 광명의 천사로 둔갑을 해서 교인들을 잡아먹고 있다는 내용이에요.

그런데 교인들이 이런 종들을 진짜라고 따르고 있단 말입니다.

도리어 사도 바울을 가짜라고 매도하면서 말이에요.

 

사단의 종들은 죄인으로서 안 예수를 믿고 있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살아야 된다는 사상으로 교인들을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아담 안에 있는 교인들에게 듣기 좋은 소리이거든요.

 

그러니 거짓 종들은 아담 안에서 바라보는 예수를 믿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 주는 예수!

기적을 베푸는 예수를 증거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본인들도 예수를 이용하여 큰 자가 되어서 교인들 위에 군림하면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예수는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죄인에게 숨겨지지 않는 예수님인 겁니다.

유대인들처럼 기적을 행하는 예수를 따르는 겁니다.

죄인에게 복 주는 예수!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

죄인으로서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는 그런 예수를 믿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감추어져지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 거짓 종들이 예수 이름을 들먹이면서 왕 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사도바울은 이들과 정 반대의 모습으로 사도됨을 증명하고 있어요.

나는 예수 때문에 매 맞고!

옥에 갇히고!

굶고 주리고!

목마르고!

춥고 헐벗고!

죽을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때문에 겉 사람이 후패 할대로 후패했는데!

거짓 종들은 예수 때문에 겉 사람이 돼지처럼 살이 포동 포동 찌고 있어요.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예수 때문에 겉 사람이 후패한 것인데!

그러나 거짓 종들의 자랑은 예수 때문에 겉 사람이 살찌운 것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어찌 그렇게 분별력이 없느냐고 책망하는 겁니다.

내가 언제 세상에서 호의호식하고 왕 노릇하는 예수를 가르쳐 주었느냐?

내가 언제 죄인의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를 증거했느냐?

그런데 너희들은 어째서 그런 가짜 예수를 전하는 자들의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잘 믿고 있느냐 고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그래요.

교인들이 죄인의 소원을 빼앗아가는 예수를 믿지 않고 죄인의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를 믿고 있어요.

교회마다 기적을 행하는 예수!

내 가정을 행복하게 해 주는 예수를 믿고 있어요.

예수를 이용해서 육신을 배불리고 살찌우고 있어요.

 

그러니 교인들이 겉 사람의 후패함을 찾아 볼 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 때문에 쇠하고 약해지는 아픔은 없고!

예수 때문에 흥하고 강해지는 화려함만 있는 겁니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생명이 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 판을 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내게 감추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여야 합니다.

참 예수를 안다는 것에 감사하여야 해요.

이제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우리에게 감추시는지를 우리 신앙에 적용해 봅시다.

 

우린 강한 자로 살기를 원합니다.

세상에서 영웅이 되고 싶어해요.

우리 본성이 늘 이런 삶을 추구해요.

 

그래서 어디서든지 난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겁니다.

남에게 알려져야 하고!

남보다 잘 살아야 하고!

남들이 나를 알아주어야 해요.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시기하고 질투해요.

그래서 나보다 강한 자가 있으면 넘어지기를 바라고 사라지기를 바래요.

이게 아담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에요.

 

바울도 이런 사고에 빠졌어요.

 

고후 12:7-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은 엄청난 은혜를 받았어요.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나 하면 삼층천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온 사람입니다.

자신이 이미 천국에 가 있는 모습을 보고 온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몸에 결정적인 취약점이 있었어요.

무슨 병인지는 정확하게 기술이 되어 있진 않지만 많은 주경신학자들이 간질이라고 합니다.

간질은 갑자기 발작을 하는 병이에요.

흔히 지랄병이라고 합니다.

 

과거 제가 회사에 다닐 때 이런 사람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죽을 뻔 한 적이 있어요.

이 사람이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입에 게거품을 토하면서 넘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핸들을 담장으로 돌려서 처박은 적이 있어요.

 

상상해 보세요.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갑자기 정신 줄을 놓고 발작을 하는데 얼마나 혼이 났겠어요.

회사 구내에서 20km로 천천히 갔으니 망정이지 바깥에서 시속 100km 달리다가 그래 보세요.

그럼 죽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병에 걸린 겁니다.

한참 설교를 하다가 넘어가 보세요.

얼마나 쪽 팔리겠어요.

아니 하나님의 능력을 전한다는 사람이 자기 병 하나 고치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운운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불성설입니까?

창피한 일이잖아요.

 

그래서 바울이 기도한 겁니다.

하나님! 하나님도 참 딱하십니다.

내가 그래도 하나님과 독대한 사람 아닙니까?

그러면 후광이 비치지는 못하게 할망정 이 병 하나는 좀 고쳐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하나님 위신도 서고 제 체면이 좀 설 것이 아닙니까?

말 빨도 서구요.

그래서 하나님에게 자기를 좀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고 하신지 압니까?

이 자슥이 지금 뭐라고 하나!

야! 이놈아 네가 강하면 난 뭐가 되는데!

네가 잘나서 다 하면 나는 언제 드러나는데!

 

사람들이 네가 무슨 일을 하면 그건 다 네가 너 잘나서 한 것이라고 하지 내가 했다고 하겠나!

그럼 사람들이 널 믿지 날 믿겠냐!

네가 못 나야 내가 드러날 것이 아니야!

네가 병신 쪼다 같아야지 네가 한 일이 네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한 것으로 드러날 것이 아니냐 말이다!

그러니 잔말 말고 입 닫고 찍소리하지 말고 있어!

 

하나님께 하시는 말씀이 바울의 약한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머문다고 합니다.

네가 약할 때가 내(하나님) 능력이 가장 강할 때라고 합니다.

아주 역설적인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지금 우리도 바울처럼 기도하고 있어요.

하나님! 날 좀 강하게 해 주면 안 됩니까?

잘난 사람으로 만들어 주면 안 됩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어필이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종을 만들어 주면 안 됩니까?

 

그래서 교회마다 성공신학과 번영신학이 난무하잖아요.

교인들마다 기복신앙으로 절어 있잖아요.

성공! 성공!

일등! 일등!

 

오죽했으면 개그맨들이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하면서 더러워서 술 한 잔 했다고 풍자하겠어요.

교회가 아주 더러운 곳이 되고 말았어요.

교회가 일등만 부추기고 일등만 대접 받는 아주 이기주의 집단이 되고 말았다구요.

그러니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고 마귀의 교회가 되고 만 겁니다.

 

이 시대 예수님은 교회에 없어요.

교인들도 예수님이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꼭꼭 걸어 잠가놓았어요.

목사들이 예수님을 교회에서 다 쫓아냈어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있으면 교회에 손님이 안와요.

교회 장사가 안 되어서 문을 닫게 생겼다구요.

 

그래서 제발 저 울산에 있는 목양교회에나 가 계세요 라면서 쫓아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하꼬방만한 울산목양교회에 와 계신다구요.

저도 아주 불편해 죽겠어요?

그러니 우리 울산 목양교회가 손님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떡하니 계시니 손님이 안와요.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다른 교회로 가라고 하시니 어디 가실 데가 없데요.

환영해 주는 교회가 없대요.

교회에 가면 입구에서 다 밀어낸대요.

제발 여기 얼씬 거리지 말고 다른 교회에 가라고 한답니다.

 

예수님은 아주 귀찮은 시 아버지가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시면서 강가로 들판으로 배회하고 계시면서 바람하고 말하고 들풀들과 말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에요.

아주 오래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서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고 통곡하셨어요.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 날 몰라본다고 하였다구요.

 

그 소리가 지금도 온 세계에 울려 퍼지고 있는 겁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이용해서 강한 자가 되고자 하지 예수님처럼 버림당하고자 하지 않아요.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숨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엉터리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고자 하면 죽이고 죽고자 하면 살려요.

이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에요. 

내가 믿음이 좋다고 할 때가 믿음이 없을 때이고!

내가 믿음이 없다고 할 때가 믿음이 가장 좋을 때에요.

내가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할 때가 예수를 안 믿고 있을 때이고!

이건 믿음도 아니라고 애통할 때 믿음이 가장 고상한 때에요.

 

새로운 피조물은 겉 사람은 후패하고 속사람은 새롭다고 하지요.

그럼 옛사람은 이와 반대이겠지요.

옛 사람은 속 사람은 후패해도 겉 사람을 강하게 하겠지요.

 

이걸 우리 믿음에 응용해 보세요.

우린 어느 사람을 강하게 하고 있나요.

속 사람입니까?

겉 사람입니까?

 

우린 믿음 믿음 하면서도 항상 겉 사람을 강하게 하고 있어요.

세상에서 잘난 자로 강한 자로 살고자 해요.

교회 안에서도 항상 으뜸이 되고자 한단 말입니다.

남을 섬기기보단 섬김 받고자 해요.

남을 칭찬하기 보단 내가 칭찬 받고자 해요.

 

그래서 나 보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음해하고 질투하잖아요.

누가 나 보다 목사의 관심을 더 많이 받으면 시기하잖아요.

저 인간은 뭔데!

지가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는데!

 

종국엔 그런 사람을 싸고 도는 목사도 싫어하잖아요.

우린 모두가 자기가 사랑 받지 않으면 뚜껑이 열리고 돌아 버려요.

그래서 하나님도 예수님도 눈에 안 보여요.

교회가 시험 들든지 말든지 신경 안 써요.

 

제가 과거에 열심이 특심 할 때 목사님이 내 편을 안 들어 주어서 교회를 옮긴 적이 있어요.

그 때 제가 한 열심 했거든요.

그런데 목사가 제 말을 안 들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다른 교회로 보란 듯이 옮겼어요.

 

옮기면서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이 놈에 교회가 어디 잘 되나 두고 보자고 했어요.

세상에! 이런 잡놈이 어디 있나요?

내가 중요하지 교회가 중요하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 이런 망발을 하지요.

날 몰라보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란 말입니다.

날 몰라주는 목사는 목사가 아니란 말이에요.

 

이런 죄인이 지금 목사를 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목사 만들어서 그때 한 것을 그대로 되갚음 당하게 하고 있나 보아요?

수많은 사람들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나서 배운 게 무엇인줄 아세요.

인간은 믿지 말자에요.

 

처 자식도 믿지 말고!

형제도 믿지 말고!

일가친척도 믿지 말고!

친구도 믿지 말고!

목사도 믿지 말자에요.

믿을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란 걸 알았어요.

 

하지만 또 사람을 믿고자 하는 본성이 또 꿈틀거려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꾸만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 일들을 발생 시켜요.

너 또 왜? 사람 의지하려는데 하고선 흩어 버려요.

내가 비빌 언덕을 다 허물어 버리시는 겁니다.

모래성을 허물듯이 다 허물어서 종국엔 인간에게 걸려서 넘어지게 만들어요.

 

좌우지간 하나님은 우리의 강함을 허락하지 않아요.

이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머물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약하게 하시고 우리와 함께 기거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열심이 특심 할 때는 숨어버립니다.

내가 강할 때 하나님은 숨어 계세요.

내가 설치면 하나님은 구경하세요.

그래 혼자 잘 해 봐라!

 

전 과거에 율법 아래서 열심이 특심할 땐 예수님이 숨어계셨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 땐 그토록 예수님을 믿고자 했어요.

예수님을 만나고자 밤마다 철야하고 산 기도 다니고 했어요.

그런데 끝내 만나지 못했어요.

그 당시엔 내 열심과 충성과 정성이 믿음 있음으로 증거되었어요.

 

그런데 말이죠.

내 열심이 특심할수록 내 속엔 공허함이 넓고 깊어져 갔어요.

이건 아닌데!

믿음이 있는 게 아니고 믿음 없음이 드러나기 시작했어요.

내 안에서 내가 가짜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어요.

내 속에 또 다른 내가 넌 예수 믿지 않는 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미치는 거예요.

누구에게 말 할 순 없고 혼자 속으로 끙끙 앓는 겁니다.

이 딜레마에 빠지면 삶에 의욕을 잃어버려요.

 

제가 만약에 율법 아래 있을 때 예수를 믿었으면 죄인이 아는 예수를 믿었어요.

나를 세상에서 영웅 만들어 주는 예수를 믿었으니까요.

그러면 난 유대인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을 겁니다.

그럼 지금쯤 예수 이름을 팔면서 왕 노릇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비롭고 사랑이 많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땐 예수님을 내게 숨기셨다가 지금 나타내 주셨어요.

그 땐 그렇게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하였는데!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고 목사 노릇 그만 하겠다고 할 때 나타내 주셨어요.

예수 믿는 것이 쇼라고 생각하고 이제 예수 믿지 않겠다고 할 때 복음을 만났어요.

결국 내 열심을 무장해제 시키신 후에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신 겁니다.

강한 자가 아니라 약한 자로 만들어서 만나 주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약함을 들어서 세상에 강함을 어리석게 하고 싶어 하세요.

약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바울도 살 소망 까지 끊어지게 해 놓고선 하나님을 의뢰하라고 했다 하잖아요.

 

고후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후 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바울은 죽고 싶을 때 하나님을 의뢰케 하신다고 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땅에 소망을 다 막아 놓고선 하늘을 처다 보게 만들어요.

결국 우리가 쳐다 볼 곳은 하늘뿐이라고 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환란 중에 위로하신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많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많이 아느냐?

그건 많이 부대끼면서 알아가요.

하나님의 은혜는 실패하면서 알아가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늘 실패하게 하시는 사건을 일으키는 겁니다.

넌 죄인이고 못난 놈이라고 말이에요.

예수의 피 뿌림이 없으면 용서 받지 못할 죄인 중에 괴수라고 까발리세요.

 

신앙생활은 고시 공부하는 게 아니에요.

영어 단어 외우듯이 성경 구절을 외우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아는 일이에요.

말씀이 우리 육신 속에서 피어나게 하는 삶이에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부딪치고 깨어지고 시험 들고 낙망하고 그래요.

 

생명은 아스팔트에서 자라지 않아요.

거름더미에서 자라요.

냄새나고 더러운 곳에서 자라나요.

 

신앙은 화려하게 아무 걱정 근심 없는 환경에서 생기지 않아요.

실패하고,

핍박받고,

조롱당하고,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해가면서 하나님을 위로를 알게 되고 믿음이 커가요.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격어가면서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구나를 어렴풋이 안 다구요.

그 앎이 언제까지냐 하면 평생가요.

 

그러니 지금 쬐끔 아는 것으로 다 아는 척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일하심은 깊고도 넓고도 길어요.

측량할 수가 없어요.

다 안다고 싶으면 또 다른 문제를 내서 끙끙거리게 하세요.

 

아이러니하게도 신앙을 불신앙 속에서 태동이 되어요.

아주 역설적인 말인데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우리 입에서 에이~ 씨 나 교회 안가!

나 예수 안 믿을래! 라는 소리가 툭툭 터져 나와야 해요.

 

에이~ 더러워서 목사 때려치우겠다는 말이 수시로 터져 나오면서 우리 안에 죄가 하나 둘씩 마치 양파 껍질 벗겨지듯이 벗겨져야 해요.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 속에 죄를 들추어내세요.

야~! 난 진짜 나쁜 인간이구나! 를 알게 만들어요.

그래서 우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요.

 

우린 예수 믿을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도록 만든다구요.

맏아들이 아니라 탕자를 만든단 말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처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임을 고백하게 만든단 말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하세요.

아! 내가 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세요.

 

하나님이 구약 이스라엘을 광야로 몰고 나간 것은 너희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 밖에 없는 종자란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먹고 마시는 것으로 시험하는 겁니다.

제발 나에게 돌을 던지라고 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날 미워하고 죽여야 한다는 겁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미워해야지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죄인을 천국에 넣어 주어야 감사를 하지 의인을 넣어주면 잘난 척을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만드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아니지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하셔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세요.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아야 산다는 것 자체가 감사가 되어요.

지금 내가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가 되지 않으면 여러분 앞에는 아직도 많은 시험지가 남아 있어요.

 

하나님은 기어코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없는 종자라는 것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난 지옥에 가야 마땅한 놈이란 것을 알게 만드십니다.

그래야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요.

이럴 때 지극히 미미한 것 하나도 감사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실패하고 또 실패하게 하여서 내가 병들고 아프고 망해도 감사하다는 것을 깨닫도록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하나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게 하신다구요.

 

바울이 그러지요.

안다고 하는 그 사람은 아직 다 알지 못하는 자라고!

무슨 말인가요?

 

모르기 때문에 다 안다고 까불락 대는 겁니다.

진짜 아는 사람은 안다고 하지 않고 모른다고 해요.

이건 일부러 겸손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만나면 겸손해져요.

만나서 얻어터지고 깨어지고 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져요.

아직까지 안 얻어터지니 따따부따 말이 많은 겁니다.

 

사업도 망하고!

친구에게 사기도 당하고!

믿던 자식도 친구랑 놀러 가서 죽고!

돈도 없는데 암이 걸리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남편이나 마누라가 바람이 나서 도망을 가고!

인생에 먹장구름이 덮여 보아야 하나님에게 따지고 저주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구요.

그동안 안 찾던 하나님을 찾게 된다구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죄가 툭툭 터져 나온다구요.

 

그럼 하나님이 씨익 웃어요.

그럼 그렇지!

그래 넌 죄인이야!

그러면서 야! 너 왠 일이니!

왠 일로 날 다 찾니!

참으로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세요.

 

우린 망하고 실패하여야 죄가 드러나고 안 찾던 하나님도 찾아요.

안 하던 기도도 하고!

안 나오던 교회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가 가장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입니다.

 

실패하고 넘어져 보아야 자기가 별 볼일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럼 겸손해져요.

할 말이 사라져요.

범사가 감사가 되어진다구요.

강할 땐 한 번도 감사하지 못하던 것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나면 이상하게 감사가 나온다고요.

 

제 경우에 그랬어요.

교인들이 제법 웅성거릴 땐 감사치 못했어요.

흔히 교회가 부흥이 될 때 말이에요.

그 땐 교인들 눈치 보고 비위 맞춘다고 노심초사했어요.

누가 안 나오면 가슴이 철렁했어요.

설교 시간 내내 왜? 안 올까? 고민했어요.

 

그런데 교인들 다 떠나고 나니 홀가분한 겁니다.

이상하게 마음에 쉼을 얻고 안 하던 감사가 나오더라고요.

쥐뿔도 없는데 말이에요.

이 무슨 개 같은 경우입니까.

 

그래요.

신앙생활은 개 같은 경우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겨쌈을 당하면서도 히죽거리고 감사하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누가 이단이라고 하면 화가 나야 하는데 허허 그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무심처사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죄라는 놈은 훨씬 간교하고 깊이 숨어 있어요.

우린 좀처럼 자기 허물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아요.

괜찮은 인간으로 철저히 이미지 관리를 해요.

이런 위선이 자신의 목숨에 위협을 느껴야 본색을 드러내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죄의 본색을 들추어내시기 위해서 우리를 시궁창으로 끌고 가는 겁니다.

하나님을 저주 할 수 밖에 없는 그 자리로 내려가게 하여서 기어코 우리 입술로 하나님을 저주하게 만들어요.

그리곤 봐라! 넌 나를 미워하잖아! 라고 해요.

베드로처럼 예수를 저주 하도록 해서 개차반을 만든다구요.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자라야 용서를 알고 은혜를 알아요.

내가 죄인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용서나 은혜도 공염불에 불과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반드시 자신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토설하게 만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 좋다고 기고만장 하는 놈을 어느 순간에 믿음 없음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아주 쪽 팔리고 망신살 뻗치는 사건들을 벌리신다구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말년에까지 인구조사를 하게 하여서 하나님을 힘 삼지 않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자하는 죄를 끄집어내시잖아요.

넌 내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겁니다.

죽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다시 환기 시키는 겁니다.

 

우리 모두 베드로처럼 다윗처럼 우리 안에 감추어진 죄를 끄집어냄을 당하도록 다스림을 받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저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고백케 하세요.

말씀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세요.

나는 불가능하구나를 알게 하세요.

예수가 아니면 안 되는구나를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위에 은혜를 부으세요.

내가 하나님을 저주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세요.

 

그리하여 십자가의 용서로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구요.

저주 받아야 할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약할 때가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는 때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망하고 넘어져야 비로서 내가 붙잡을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임을 알게 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일하심에 방법입니다.

 

야곱처럼 터지고 나면 장자가 강한 자가 아니라 차자가 강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하나님 앞에선 세상에서 강한 놈이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한 놈이 강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구요.

그래야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하면서 애굽에 셋방살이 하려고 온 거지같이 살아온 자가 애굽에 강한 왕을 축복 할 수가 있어진다구요.

 

거지가 왕을 축복하는 이 광경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이해되셔야 합니다.

야곱은 일평생 하나님과 싸우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야곱은 일평생 힘을 빼는 삶으로 휘둘림을 당하였어요.

 

그래서 장자의 축복을 세상의 원리와 다른 방식으로 꺼꾸러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강한 놈을 약하게 하고!

약한 놈을 강하게 하는 어긋맞기는 장자의 축복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싸우다가 허리가 분질러지고 난 후 기념으로 얻은 지팡이 하나 의지하고서 말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야곱처럼 다루어 가실 것입니다.

엿새가 차기까지!

엿새가 지나야 일곱째 날 안식의 날이 도래하는 겁니다.

 

야곱처럼 하나님과 부대끼면서 시달리다가 보면 자기를 비우게 되어요.

안 비우고 싶어도 자연히 비워져요.

까짓것 내 인생 어차피 내 것이 아닌데!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라는 똥배짱이 생긴단 말입니다.

 

이런 배짱은 하나님과 많이 부대낌을 당하면서 생겨요.

그러니 부디 하나님과 많이 부대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신이 쓰레기이고 똥이란 것을 알아가시길 바랍니다.

내가 사는게 유익이 아니라 죽는 것이 하나님께 유익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런 깨달음이 날로 날로 깊어지고 새록 새록 넓어지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지신이 어떠한 자인 줄 아는 지혜를 주옵소서. 강한 자가 아니라 약한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시라도 살수 없는 마마보이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쓰레기이고 똥이란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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