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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79강. 표적과 믿음 그리고 사람의 영광 (요 12:37-43)

by coroa 2021. 11. 10.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요 12:37-43=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79강. 표적과 믿음 그리고 사람의 영광 (요 12:37-43)

-.정낙원 목사

 

 

 

사람들 기적을 좋아합니다.

거기에 무슨 신령한 것이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기적이 있는 곳엔 사람이 많이 모입니다.

 

신비한 일이란? 기적을 말하는데 이는 곧 신비밀스러운 일이란 말입니다.

모든 종교는 이 초석(礎石) 위에 세워져 있어요.

그래서 모든 종교는 초월적인 것을 기반으로 하여서 포교활동을 하는 겁니다.

각 종파마다 기적으로 인간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종교가 신과 더 밀접한 종교임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사람들도 누군가가 기적을 일으키면 그 사람은 특별히 신의 능력을 받았다고 믿어요.

그래서 그 사람을 신처럼 추종을 하는 겁니다.

또한 기적을 행한 사람도 자신은 마치 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냥 과신을 합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베푼 사람들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들끓습니다.

 

이건 교회 안이라고 다를 바가 없어요.

교인들도 기적을 좋아해요.

그래서 기적을 일으킨 목사를 따르게 되는 겁니다.

 

한국교회에서 흔히 크게 부흥 하였다고 하는 대다수의 교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거의가 어느 특정한 목사를 따르는 사람들로 모인 곳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목사들은 거의가 자칭 하나님의 능력을 행한다는 사람들입니다.

교인들의 말을 들어 보면 병을 고치든지, 귀신을 쫓아내든지, 어떤 능력을 행한다고 해요.

 

그러므로 교회부흥을 꿈꾸는 목사들은 능력을 받고자 사십일 금식이나 철야로 산 기도를 하는 것과 같은 고행을 자처하는 겁니다.

이들의 사고는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면 능력을 받는다고 믿고 있어요.

 

그래서 자신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교인들에게 각인 시키려고 평범한 교인들이 할 수 없는 사십일 금식이나 일년 365일 산에서 철야기도와 같은 것을 하는 겁니다.

마치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가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신의 능력을 이끌어 내려고 자기 몸을 학대하는 것과 같이 고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칭 능력 있는 종이라고 자처하는 목사들의 이력서엔 반드시 자기 열심과 특별한 고행이 써져 있는 겁니다.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겁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종이라는 것을 알아 달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은근히 자신이 기도하면 복이 임하고 저주하면 재앙이 온다는 식으로 공갈을 칩니다.

 

그럼 진리를 모르는 교인들은 그 말을 안 들을 수가 없어요.

그 속에 빛이 없어서 분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은 목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자연히 목사와 교인들 간에는 주종(主從)관계가 형성이 되고 그 목사는 교인들 위에 왕처럼 군림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가 그랬어요.

거짓 선지자들이 심지어 뺨을 때리고 재물을 갈취하는데도 그것을 기쁘게 여겼어요.

 

지금도 이런 목사들이 수두룩해요.

교인들의 수준이 이 지경이 되면 목사들에겐 이같이 매력적인 것이 없어요.

그래서 능력을 받겠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는 겁니다.

 

최면 학원에 목사가 제일 많다는 것은 이 시대 목사들의 관심사를 잘 대변해 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최면을 통해서라도 사람들에게 능력 있는 종으로 인정받고 싶은 겁니다.

물론 그 저변엔 사람을 모으고자 하는 탐욕이 깔려있어요.

 

목사들에겐 기적을 행하는 능력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운 선악과에요.

사십일 금식해서 능력만 받으면 평생 왕 노릇하는데 어찌 이를 포기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 지금도 밤이슬 맞아가면서 주여! 내게 능력을 주소서! 라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적을 보이면 사람들이 자신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의 생각을 비켜가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표적을 저희들 앞에서 행하였으나 믿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표적(表迹)이란 기적을 말합니다.

이로보건데 기적이 믿음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기적이 뭔가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적” 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표적이란? “싸인” 이란 말과 같아요.

 

그러니 예수님이 행한 기적은 인간의 호기심을 달래주는 것에 있지 않고 예수님께서 기적이 담고 있는 일들을 하시는 분이란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적은 하나의 그림인 겁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통하여서 메시야 됨의 싸인을 하였는데도 인간들이 몰라보더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그 기적만 신기해하였지 정작 그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아주 중요한 힌트가 들어가 있어요.

 

사람들이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였다고 하지요.

이는 곧 예수를 믿는 믿음은 기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적을 보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기적을 한번 보여 달라고 하잖아요.

그럼 믿겠다고 하지요.

 

그러나 성경은 죄인에겐 그 어떤 기적을 보여 주어도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니 기적으로 예수 믿게 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믿음은 기적과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지옥 간 부자가 하나님에게 그러지요.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서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면 자기 형제들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믿을 사람은 기적이 없어도 믿고 믿지 않을 놈은 죽었던 사람이 살아가도 안 믿는다고 했어요.

이는 믿음은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이 믿게 해 주어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면 안 믿을 재간이 없어요.

안 믿고 싶어도 믿어져요.

반대로 하나님이 믿게 해 주지 않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 믿어요.

믿고 싶어도 못 믿어요.

이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보여주면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자들은 부자와 같이 지옥에 갈 자들이란 말입니다.

부자와 같은 사고가 지옥 갈 사고란 말입니다.

그러니 부자처럼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서 예수 믿게 하겠다고 하는 목사들은 가짜란 말이 되지요.

기적으로 믿음 운운하는 것은 본인도 지금 안 믿고 있다는 반증이에요.

하나님이 안 믿어지기 때문에 능력을 받아서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능력 행하는 것하고 믿음은 전혀 별개에요.

또한 기적을 일으키는 것하고 구원하고도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가룟 유다도 귀신을 쫓아냈어요.

그런데 지금 지옥에 가 있어요.

 

마태복음 7장 21-23절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기적을 행하였다고 주님 앞에 자랑을 하는데 정작 주님은 난 너희들을 모른다고 합니다.

불법을 행하였다고 하면서 지옥으로 가라고 합니다.

그러니 기적 쫓아가다가 망할 수 있음을 명심 하세요.

 

오늘 본문에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도 예수를 믿지 못한 것을 이사야의 예언을 가지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어떤 내용인가요?

하나님께서 저희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완고케 하였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서도 예수를 못 믿는 것입니다.

인간은 설령 하나님이 눈 앞에 나타나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마귀는 갖가지 기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미혹을 합니다.

물론 가짜 하나님입니다.

기적으로 다른 하나님을 믿도록 역사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이러한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봅니다.

 

살후 2:9-12=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서 일어난다고 합니다.

여기서 악한 자란 거짓 종들을 말합니다.

사단이 거짓 종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면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행하게 하여서 사용 한다고 합니다.

 

무슨 일에 사용하는가 하면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거짓 종들이 행하는 기적을 보고 따르는 자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사랑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결국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없는 자는 거짓 종들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적은 거짓 신자들을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거짓 종들에게 허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허락을 하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충실하게 잘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는 자기 종들에게 능력을 주어서 기적을 행하게 하고 거짓 신자는 그들을 따르고 결국에는 모두가 지옥으로 직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이 내용이 나와 있어요.

 

계 13:1-15=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 된 이름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5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 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 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다 죽이게 하더라”

 

사도요한이 보니 바다와 땅에서 짐승이 올라옵니다.

그런데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어요.

여기서 용은 사단입니다.

 

그럼 바다와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적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이 마흔 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았어요.

마흔 두 달이란? 70 이레 중 마지막 한 이레 중 절반을 말합니다.

한 이레를 전 3년 반과 후 3년 반으로 나누어 말합니다.

마지막 한 이레는 예수님의 초림 이후의 모든 날을 말해요.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후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셨어요.

물론 영적이지만 말이에요.

예수님의 공생애는 정확하게 말하면 3년 반이에요.

 

그러니 70 이레 중 마지막 1 이레의 절반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되고 절반은 십자가 이후의 기간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후 3년 반 즉 마흔 두 달은 신약의 전 기간을 말하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 동일한 날을 다른 말로 이야기 할 때가 종종 있어요.

3년 반을 한 때 두 때 반 때라고도 하고,

마흔 두 달이라고도 하고!

1260일 이라고도 해요.

날짜로 따지면 다 동일한 날 수에요.

왜? 동일한 날을 때와 달과 일로 다른 말로 하는지 궁금하지요.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때는 한 때 두 때 반 때라고 해서 “때” 로서 말하고!

1260일이라고 태양력을 쓰는 것은 복음이 증거되고 참 종들이 진리의 빛을 발할 때를 말하고!

마흔 두 달이라는 태음력을 쓰는 것은 육의 지배 즉 사단의 활동을 말할 때 사용을 합니다.

그러니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짐승이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거짓 종들이 역사하는 시기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는 신약의 교회 시대와 함께 미혹의 역사를 했어요.

그래서 신약의 서신서에 적그리스도나 거짓 선지자들의 출몰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신약의 전 기간에 이 땅에서 일어날 사건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데살로니가후서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을 추수하려고 바다와 땅에 속한 짐승들을 출현 시켜서 갖가지 기적으로 생명책에 녹명 되지 않은 자들을 미혹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 거한 자들은 모두가 이 짐승에게 경배한다고 합니다.

뱀의 후손들은 짐승들이 행하는 갖가지 기적을 보고서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자란 뱀의 후손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어린 양이 인봉한 책의 인을 떼면서 일어나는 것들이므로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거짓 신자들을 추수하려고 허락하신 거예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시나리오대로 일어나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생명책에 녹명 된 자들은 절대로 거짓 선지자들을 따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기적을 보고 따른다는 것은 생명책에 녹명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는 성도는 기적을 보고 넘어가지 않아요.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지 않는 거짓 신자들을 추수하기 위해서 마귀를 시켜서 거짓 종들을 일으키게 만들어 갖가지 기적과 능력을 행하게 하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행하는 자를 악한 자라고 하고!

그들을 따르는 자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기적으로 예수 믿게 하는 일은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을 베풀어도 사람들은 예수를 못 믿었다고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기적으로 믿음을 운운하는 자는 악한 자입니다.

자칭 능력의 종이니 불의 종이니 하는 자들은 전부 바다와 땅에서 올라온 짐승인 겁니다.

또한 그들을 따르는 자도 땅에 거하는 악한 자들입니다.

 

요즈음에 서울에서는 금 이빨로 바꾸어 주는 교회가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다고 합니다.

이 교회는 각 지역에 지점을 개설하여서 포교 활동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요.

기적을 보고 모이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의 각 교단에선 교인들이 빠져 나가니 이 교회를 이단으로 판단하고 교인들을 단속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게 어디 막아서 될 일인가요.

데살로니가후서를 쓴 바울의 말대로라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은 이빨이 금 이빨로 바뀌는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냐 아니냐 라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설령 하나님이 그런 기적을 일으켰다고 하여도 그건 가짜 신자들을 추수하기 위해 한 일이에요.

그러니 기적이 맞다 아니다 이빨이 금이다 아니다 를 따지지 마세요.

은이 금으로 바뀌든 안 바뀌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그 기적으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적을 쫓아가는 사람들에겐 십자가는 듣기 싫어요.

십자가 정신과 금 이빨 만드는 기적을 쫓아가는 것은 서로 상충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기적이 있는 곳에 모이는 것은 그건 인간의 종교성과도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신을 찾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신의 도움으로 얻기 위해서입니다.

한마디로 신과 거래하기 위해서 신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신을 섬겨 줄 테니 신은 나의 소원을 들어 달라는 겁니다.

 

이러면 은 이빨을 금 이빨로 바꿔준다고 하는 교회에 모여드는 사람들도 결국 신과 거래하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숭배 자들이 모이는 겁니다.

 

그럼 교인들이 이곳으로 가는 것을 구태여 막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을 추수하기 위해서 거짓 목사를 세워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은 이빨을 금 이빨로 바꿔 주는 기적은 행하는데 왜? 반대로 금 이빨을 은 이빨로 바꿔 주는 기적은 행하시지 않을까요?

은과 금은 가치성의 차이에요.

금이 은보다 귀하고 값이 많이 나가잖아요.

그러니 은이 금으로 변한다는 것은 흥하고 잘되게 해 준다는 겁니다.

반대로 금이 은으로 변하는 것은 망하고 안 되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들은 왜? 하나님은 인간을 흥하게 해 주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을까요?

인간들은 왜? 하나님은 인간을 망하게 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할까요?

이는 인간들이 바라는 하나님은 자기를 도와주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알려준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은이 금으로 변하게 해 준다고 믿는 겁니다.

반대로 금이 은으로 바뀌는 것은 마귀가 행한다고 믿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참 하나님은 인간을 망하는 쪽으로 몰고 갔음을 말해주어요.

반대로 우상은 항상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니 지금 은이 금으로 바뀌는 기적은 마귀가 하는 기적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모이는 겁니다.

 

역설 적으로 말해 봅시다.

지금 은을 금으로 바꿔주는 그 목사가 금을 은으로 바꿔준다고 하면 사람이 모일까요?

안 모일까요?

안 모이겠지요.

어느 누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하겠어요.

다 잘 되자고 하나님을 믿는 것인데!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깨부수는 일을 하신다고 해요.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 만나서 다 망했어요.

12제자도 망했어요.

바울도 예수 때문에 신세를 망친 사람이에요.

 

하나님을 만나서 망한 사람들의 기록이 성경이에요.

이런 하나님을 증거하면 다 도망가요.

어느 누가 망한다고 하는데 오겠어요.

그래서 은을 금으로 바꿔주는 기적이 일어나는 곳엔 벌떼처럼 모이지만 금을 은으로 바꿔 주는 기적을 행하는 곳엔 사람들이 없어요.

 

십자가가 금을 은으로 바꿔주는 곳이에요.

망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곳이에요.

그러니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곳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금을 은으로 바꿔치기 해서 세상에서 망하게 하는 것이거든요.

세상을 떠나게 하거든요.

그래서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교회엔 손님이 없는 것입니다.

 

금을 은으로 바꿔주는 곳엔 왜? 안 올까요.

이건 인간들이 바라는 기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바라는 기적은 더하고 곱하고 높이고 흥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반대로 빼고 낮아지고 망하는 것은 저주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그러니 인간들이 바라는 기적은 항상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기적인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신을 원하지 자기에게 손해를 입히는 신은 원치 않아요.

애당초 인간에겐 하나님은 관심이 없었어요.

하나님은 그저 이용대상일 뿐이에요.

 

그래서 인간들이 찾는 종교마다 그 신이 어떤 신이냐 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에게 얼마나 유익을 주느냐 라는 손익 계산을 하고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에게 나아와 나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신은 초월적인 일을 행한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인간의 손에 죽임 당하였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세상에 일으킨 최고의 기적인데도 말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이 십자가를 기적으로 보지 않아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느냐 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사람은 바보들인 겁니다.

 

사람들은 신은 강한 분이지 절대로 약한 분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낮아지신 하나님을 몰라요.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어 주신 그런 하나님을 몰라요.

 

교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도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언약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의미에서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해요.

그러니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할 땐 어김없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러 대는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모두가 흥하게 해 주는 기적만 바래요.

자신에게도 진능하신 신이 개입하면 기적이 일어나리라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열심히 빌고 또 비는 겁니다.

스스로 기적을 행할 순 없으니 기적을 행하는 능력 있는 종에게 도움을 받아서 자기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종교꾼들은 이런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서 자신이 신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무당이 되겠다고 자청해서 나섭니다.

무당이란? 인간과 신을 연결해 주는 통로에요.

 

이걸 지금 목사들이 독점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자기에게 기도를 받으면 문제가 해결 된다고 하는 겁니다.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은 집안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목사에게 기도를 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목사가 신에게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겁니다.

한국교회 안에선 목사가 없으면 예수도 믿을 수가 없어요.

반드시 목사를 통해서만 예수를 만날 수 있게 되어 있어요.

교인들에게 있어서 목사는 신이에요.

 

교인들 스스로가 목사를 예수님과 교인들을 연결 시켜 주는 중보자로 세워둔 것입니다.

하나님하고의 중보자는 예수님이고!

예수님하고 중보자는 목사에요.

새로운 중보자가 제도가 생긴 겁니다.

이걸 교인들이 만들어 놓았어요.

그래서 문제만 있으면 목사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그럼 목사는 대신 기도해 주는 대신 감사 헌금이란 복채를 챙기게 되는 겁니다.

서로 좋은 겁니다.

교인들은 자기가 애써 밤새 기도할 필요가 없어서 좋고!

목사는 기도해주고 돈을 받으니 좋은 겁니다.

이런 일들이 이미 수천 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사사기 17장 18장을 보세요.

 

삿 17:9-11=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뇨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 인으로서 거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10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하므로 레위 인이 들어갔더니 11 레위 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하기를 만족히 여겼으니 이는 그 소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어떤 레위 인이 미가에게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일 년 먹고 살 양식을 받기로 연봉 계약을 맺고 그 집 제사장이 되잖아요.

미가는 자기 가정을 위하여 개인 제사장을 두었어요.

요즘 식으로 목사를 고용한 겁니다.

연봉을 받고 고용된 목사는 그 집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겁니다.

 

교목은 학교를 위해서 기도하고!

군목은 군대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원목은 병원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사목은 회사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목사는 교인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있잖아요.

그러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는 똑 같아요.

 

이렇게 개인 제사장을 두는 이유는 그 제사장은 신과 교통하는 통로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고액의 연봉을 주고 계약을 하는 겁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교인들이 목사가 하나님과 소통하는 자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 된다고 믿는 겁니다.

 

교인들은 특히나 기적을 행하는 목사에게 기도를 받으면 신의 능력이 임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목사가 뭔가 신기한 일을 하면 너도 나도 모여드는 겁니다.

그 무당에게 잘 보여서 자기도 신의 혜택을 입고 싶어서입니다.

그런 목사에게 잘 보이면 복을 받고 밉게 보이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목사가 하는 말을 거역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예! 예! 하는 겁니다.

 

수요는 공급을 낳는다고!

이 시대 교회 안에 목사라는 이름의 무당들이 많은 것은 그만큼 거짓 교인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교인들이 무당을 원해요.

 

그만큼 교회 안에 하나님을 이용하여 복을 받고자 하는 땅에 속하여 흙을 먹고 살아가는 뱀의 후손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선 종말의 교회를 각종 귀신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하는 겁니다.

교회가 절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일으키는 기적은 인간에게 더함을 주는 것이 아니고 마이너스를 주어요.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소원을 빼앗는단 말입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고 자꾸만 떠나라고 등 떠밀어요.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는 기적을 일으켜요.

 

그 기적이 바로 성도의 십자가 구원이에요.

십자가에서 죽이고 살리는 기적이에요.

구원은 반드시 옛사람의 죽음의 바탕에서 주어져요.

십자가 이후에 성령이 오신 것도 다 옛 사람의 죽음이 먼저이고 새 사람으로 거듭남이 나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물 세례이고, 나중이 성령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원하는 세대에게 요나의 기적 밖에 보여 줄게 없다고 한 것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주심으로서 자기 백성들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기적이란? 신기한 일이라고 했잖아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라고 하였지요.

인간이 감히 상상 할 수도 없고 감지 할 수도 없는 일이 하나님이 일으킨 기적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이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하나님이 일으킨 기적이란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일으킨 모든 기적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겨냥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사람들은 감지하지 못하였어요.

 

왜? 감지하지 못하는 줄 아세요.

이는 십자가는 인간에겐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자기 백성이 살아나는 것은 깨닫지 못해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실패로 보아요.

 

그런데 성도에겐 예수님의 죽음으로 자신이 살아났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겁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믿어진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기적은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죄사함 받고 천국에 간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백성들의 죄를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 시켜서 용서 해주셨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이건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죽이고 죄인을 살려 낸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에요.

그래서 하늘에 천사들도 알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천사들도 놀랐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의로운 자를 죽여서 죄인을 의롭게 하는지 그저 놀랍고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런 것은 인간의 머리로선 나올 수가 없어요.

 

인간은 기껏 하여야 인간의 힘으로 하늘에 올라가고자 바벨탑을 쌓는 일만 해요.

인간의 머리에선 이것 이상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저 용서받고 은혜로 주는 구원은 싫어하는 겁니다.

구원을 받아도 자기 힘으로 자기 노력으로 받아야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겁니다.

이게 바리새인들에게 신앙으로 그대로 나타났어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일컬어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지요.

이는 그들의 사상이 바로 뱀의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뱀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이 되라고 미혹해요.

아담과 하와가 여기에 걸려들어서 저주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뱀은 인간으로 하여금 의를 만들라고 해요.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하라고 해요.

그래서 뱀은 열심과 충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예수의 도움 없이도 거룩해지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거룩을 향하여 매진하는 겁니다.

 

목사들은 그렇게 살아서 되겠느냐!

더 분발하라고 채근 합니다.

자! 성과 대를 하늘에 닿게 쌓자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를 확 허물어버리는 일을 단행하십니다.

죄를 드러내는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기어코 넌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하세요.

 

이걸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보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넘어뜨리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 의를 쌓고자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서 너희는 마귀 새끼라는 것을 드러내게 하셨다고 합니다.

 

지금도 성령은 너희는 죽었다 깨어나도 의를 만들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의는 예수님 피에서만 나온다고 해요.

여기에 항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고집을 피우고 허물어진 인간의 행함이라는 의(義)에 바벨탑을 또 쌓고 있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의를 앞세우고 나아오던 자들이 저주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을 봅시다.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어떤 자들이 기적을 행한 자기 업적을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온 겁니다.

자신은 주의 이름으로 갖가지 기적을 행하며 선지자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분명히 기적을 행하고 주의 이름을 선포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청천병력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난 너희를 모른다고 합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러한 것을 불법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아니! 언제 불법을 저질렀는가요?

이들은 불법을 저지른 적이 없어요.

충성스럽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였다구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열심히 예수를 믿었어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나님께 충성을 했어요.

진짜 진심으로 열심을 다하여 봉사 했어요.

주의 이름으로 은 이빨을 금 이빨로 만들어 주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불법을 행한 자라고 하면서 지옥으로 가라고 합니다.

이렇게 억울할 때가 있습니까?

자신은 주의 이름으로 은 이빨을 금 이빨로 만들어 주었는데 말이에요.

왜? 그럽니까?

 

세상을 떠나게 하는 예수를 증거치 않고 세상에 안주시키는 예수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십자가에 죽이는 예수가 아니고 죄인을 십자가 없이 살려주는 예수를 증거하기 때문에 불법인 겁니다.

결국 죄인의 소원을 들어주는 다른 예수를 전했어요.

그래서 불법을 저지른 자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나더러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여 주여 한 자들은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말하고 이차적으로는 유대인과 같은 신앙 안에 있는 모두를 말해요.

 

유대인들은 눈만 뜨면 주여 주여 하고 살았어요.

지극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겼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모른대요.

이러면 환장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은 정통이고 천국 간다고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했어요.

 

마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꼭 이 시대 열성 신자들 같지 않나요.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려고 동분서주하잖아요.

한 사람이라도 더 천국에 데리고 가려고 진심 이런 전도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판단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에 간다고 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유대인들의 신앙이 틀렸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틀렸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다니면서 전도를 했던 겁니다.

자기들만이 정통이고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지금 우리가 유대인들과 똑 같은 짓을 하고 있어요.

우리도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전도하고 있어요.

그리고 단 한 번도 우리 신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맞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생각해요.

 

지금부터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지금 우리에게 하셨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우리들의 신앙관으로 접근을 해 보자는 말입니다.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주여 주여 하면서 자기 신앙을 앞세우고 나아 올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잘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자기 확신이 없어서 지옥에 간 것이 아니에요.

그들은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조상들의 전통 신앙으로 신앙생활을 했어요.

그들은 지금 우리처럼 꿈에라도 자기들 신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지금 우리도 우리 신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면서 지옥에 가라고 했어요.

그럼 우리에게도 이런 말이 떨어 질 수 있단 말입니다.

우리도 유대인들 못지 않게 자기 신앙에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난 널 모른다고 한 말씀을 이 시대 우리 신앙으로 이해해 보자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이단이라고 하는 자들도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을 가지고 기성 교회를 이단이라고 하고 지옥에 간다고 해요.

여호와의 증인이나 신천지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세요.

자기들만 구원받은 십사만사천명이라고 해요.

여호와의 증인이나 신천지에 의하면 우린 이단이에요.

우린 아무리 우리가 정통 신앙이고 올바른 예수를 믿고 있다고 하여도 그들에겐 우린 틀렸어요.

 

그들은 자기들 교리가 성경적이고 자기들 신앙만 맞다고 해요.

그래서 자기들 밖 기성교회에선 구원이 없다고 해요.

우린 그들에겐 기성 교회에 속하였어요.

그러므로 그들로부터 서슴없이 너희는 다 지옥에 간다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만약에 말이죠!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가 맞고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진짜이고 신천지의 교리가 맞고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진짜이면 우린 꼼짝없이 지옥에 가야해요.

우리가 믿는 예수가 가짜이고 그들이 믿는 예수가 진짜라면 그렇다는 말이에요.

은 이빨을 금 이빨로 만들어 주는 그 예수가 진짜라면 우린 저주를 받아야 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은 이단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이단이라고 했으니 지옥으로 가야지요.

 

자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우린 저들이 성경을 곡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이단이라고 합니다.

그럼 저들도 우리처럼 우리가 성경을 곡해하고 있는 이단이라고 말해요.

그럼 누가 이단인가요.

우리끼리는 판단이 안 되어요.

 

서로가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자기 것이 맞다고 백날 싸워도 해결이 나지 않아요.

서로 옳다고 할 땐 제 삼자가 판단을 해 주어야 해요.

그 제 삼자는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짠하고 나타나서 누구 손을 들어주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냥 성경만 달랑 주고선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성경으로 말하자고 합니다.

성령이 알게 해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들도 우리와 동일한 말을 해요.

자기들도 성령께서 알게 주었다고 합니다.

 

이건 합일점이 없어요.

그러니 우린 서로가 이단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의 피가 어떻고 복음이 어떻고 하여도 그건 그들에겐 마귀의 소리에요.

우린 그들에게 마귀의 자녀들이에요.

 

그러니 신천지 천국이 따로 있고!

여호와의 증인들의 천국이 따로 있고!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인들이 가는 천국이 따로 있고!

순복음 교회처럼 성령의 은사파 교인들이 가는 천국이 따로 있어요.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를 자기 교리가 맞고 다른 교단은 틀렸다고 이단이라고 하잖아요.

 

서로가 자기 교리가 맞다고 하잖아요.

자기 신앙이 맞다고 하잖아요.

지금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고 있어요.

나만 맞고 나머진 다 틀렸다고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개혁주의 성화주의자들이 가는 천국이 따로 있고!

보수주의자들이 가는 천국이 따로 있고!

자유주의자들이 가는 천국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신앙으로 판단한다면 각 교단마다 천국이 다 따로 있어요.

이는 모두가 판단 기준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만 옳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무섭지요.

 

그런데 이런 무서운 짓을 지금 우리가 똑같이 하고 있어요.

우린 서로가 자기만 맞다고 하고 있잖아요.

너나 나나 서로가 자기의 신앙으로 난 맞고 넌 틀렸어! 라고 모두를 판단하고 있어요.

 

신앙의 기준을 제대로 잡고 있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과연 무엇이 좋은 신앙인가요?

어떤 신앙을 하나님이 인정하는 올바른 신앙인가요?

성도는 항상 하나님 앞에 판단 받을 신앙의 기준을 가지고 생활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아무리 나는 옳고 신앙이 좋다고 하여도 그것은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자기 생각일 뿐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서 상고하는 이유도 다 이런 이유입니다.

우리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뭘 요구하고 바라느냐를 알아가고자 함입니다.

 

인간 중심에서 성경을 보느냐!

아니면 하나님 입장에서 성경을 보느냐! 가 중요해요.

인간 중심으로 성경을 보는 것을 인본주의라고 하고 하나님 중심에서 성경을 보는 것을 신본주의라고 합니다.

 

인본주의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고!

신본주의로 성경을 보면 인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느 것이 성경적인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케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기 위함이에요.

그러니 성경은 하나님 중심으로 보아야 옳은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의 주 되심에 두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시려고 만물을 만드시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를 통하여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하는 일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증거를 봅시다.

 

빌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자신은 십자가 이외는 전하지 않기로 작정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주가 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종의 형체로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모든 속에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있어요.

이는 곧 우주 만물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란 말입니다.

천사들이나 천국에 간 사람이나 지옥에 간 사람이나 몽땅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主)라고 시인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하였어요.

저는 이것을 신앙의 근거로 붙잡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성경은 이 틀에서 해석을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님 앞에 만물을 무릎을 꿇게 하여서 주라 시인케 하셨다고 하셨기 때문에 이 교리를 믿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의 성경 해석이 가장 하나님이 바라는 해석이라고 저희들은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피를 증거 하는데 올인하는 겁니다.

바울처럼 십자가 외에는 결코 전하지 않기로 작정을 하였어요.

그 이외 어떤 것도 다 이단이라고 하는 겁니다.

물론 우리들 생각이에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도 저의 생각이에요.

우리와 생각을 달리하는 부류들의 입장에선 그건 너희들 생각이라고 치부하고 있어요.

실제 개혁주의 성화주의자들은 이단이라고 합니다.

 

그건 너희들이 성경을 너무 좁게 보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왜? 십자가 이후에 삶을 간과하느냐 라고 합니다.

왜? 성화를 무시하느냐 라고 합니다.

그들은 우리는 하나만 보는 외눈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들이 그렇게 비아냥거린다 하여도 우린 이 사상을 철회할 생각이 없어요.

우린 그들이 우리더러 이단이라고 하여도 할 말이 없어요.

 

우리 역시 우리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 그들을 이단이라고 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우리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어요.

내 안에서 이게 아니다 라고 깨달아지기 전까진 말이에요.

왜냐하면! 우린 이게 하나님의 뜻이고 진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비난하는 쪽에서는 우리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고 해요.

그들의 생각대로 우리가 지옥에 간다고 하여도 어쩔 수 없어요.

그건 우리가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니까요.

 

어차피 믿음은 주관적인 겁니다.

예수는 아무나에게 계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리새인들 입장에서 예를 들어서 보면 바울에겐 예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고 바리새인들에겐 안 했어요.

바울에겐 예수님은 주관적이에요.

그러니 바울은 목숨을 버림당하더라도 예수를 증거하는 겁니다.

 

이게 믿음의 세계에요.

우리가 믿는 예수도 각자에게 믿어지게 해 주셨기 때문에 주관적이에요.

하나님은 이 세상엔 예수라는 객관적 진리를 보냈지만 그 예수를 모든 이에게 계시하지 않고 차별적으로 계시하기 때문에 신앙의 모습을 각자 주관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 자기 신앙이 맞다고 하는 겁니다.

 

인간들에겐 성경이 객관적 진리로서의 힘을 쓰지 못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모두가 주관적으로 해석을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진리를 안다고 하는 신앙은 자기 주관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는 것으로 사는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과 상관없이 성경을 객관적 진리로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다 자기가 깨달은 것으로 해석을 하고 믿어요.

그래서 너나 나나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판단 받게 되는 겁니다.

 

그 때가 되면 양과 염소처럼 갈라지겠지요.

우리가 양이고 저들이 염소가 될지!

아니면 반대로 우리가 염소이고 저들이 양이 될지!

그도 아니면 우리 모두가 염소일지!

반대로 우리 모두가 양일지! 몰라요.

서로가 자기는 양이고 상대는 염소라고 하지만 그러나 그건 하나님만 아실 일이에요.

 

확신은 각자 신념이지 신앙이 아니에요.

그러니 확신! 확신 하지 마세요.

그건 우리 확신이지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아니에요.

수많은 이단들도 다 확신이 있어요.

 

유대인도 확신을 갖고 있다가 망했어요.

예수님 초림 당시도 많은 교파가 있었어요.

마치 이 시대 교파처럼 모두가 자기들만이 맞고 정통이라고 하면서 싸웠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자 다 이단이었어요.

 

이렇게 되면 우리가 서로 싸울 필요가 없겠지요.

각자 믿는 것으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면 되니까요.

어차피 예수님은 모두에게 계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바울이나 12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선택으로 계시를 받아서 믿는 성도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수많은 군중들처럼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선택하고 안 하고는 예수님 몫이니까 우리 주권에서 벗어나 있어요.

우리더러 선택하라고 하면 서로 자기 것이 맞으니 믿으라고 설득하고 전도 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믿음이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선택당하는 것이므로 우리로선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어요.

즉 믿어지는 대로 살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네가 맞니 내가 맞니 다툴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어졌고 우리를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겐 저렇게 믿어졌어요.

그 믿어짐을 우리가 어쩌지 못해요.

그러니 믿음을 가지고 서로 싸울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한 두 마디 해보고 아니라고 하면 그냥 예! 그렇게 믿고 사세요! 라고 하면 됩니다.

우린 우리가 믿는 도리만 증거하면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단과 변론하지 말라고 했어요.

예수는 변론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믿음은 변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각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복음은 설득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럼 누가 자신의 말을 안 믿는다고 화를 낼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린 믿어지니 믿는 것이고 그 사람은 안 믿어지니 안 믿는 겁니다.

그러니 싸울 일이 없지요.

그냥 난 이런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말하면 되어요.

맞으면 동행 할 것이고 아니면 돌아 서겠지요.

 

각자 믿어지는 대로 살면 되어요.

어차피 우린 각각 믿은바 행한 대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니까요.

모두를 포용하라는 말이 아니고 분별하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믿음이 주관적이란 말은 우리의 믿음을 어느 교단에게나, 어느 목사에게나, 어느 사람에게 증명 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믿음을 누구에게 확인 받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연약하여서 우리의 믿음을 누구에게 증명을 받고자 해요.

교단에서 증명 받고 싶어하고!

목사에게 증명을 받고 싶어 해요.

특히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자기 교회 목사로부터 인정받고자 해요.

그래야 그 교회에서 신앙 있는 자로 대우를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선 이를 사람의 영광을 취한다고 해요.

즉 그 집단에서 영광 받기 위해서 그 집단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어느 집단에서나 동일해요.

그 집단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그곳에 소속되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집단이고 자기들이 정한 룰이 있어요.

그 룰에 따르지 않으면 출회시켜요.

 

어느 집단이고 자기들의 룰을 가지고 판단하고 출회를 시킨다는 것은 이미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증거에요.

그 집단은 이미 복음을 독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들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판단하여서 출교를 시키는 겁니다.

출교를 시킨다는 자체가 이미 하나님처럼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심판을 하는 겁니다.

 

이러면 오늘 본문에서 출회를 당할까봐서 드러내 놓고 예수를 믿지 못한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알겠지요.

이 이야기를 하고자 계속해서 자기들 믿음이 맞느냐 틀리느냐의 싸움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 현실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복음은 피조물이 독점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란 말은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뜻을 곡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러니 귀는 열어놓으시고 입은 닫아야 해요.

 

이 말은 우리가 타인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를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바울도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어요.

이건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남의 신앙을 판단하지 말라는 겁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심판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 안다고 하는 사람은 아직 다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했어요.

이 말은 진짜 하나님을 아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처럼 다 안다고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혜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판단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우리가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심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 맞다고 할지라도 누굴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자는 말입니다.

분별은 하되 심판은 하지 말아야 해요.

이게 지혜로움이에요.

 

복음을 내가 독점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기다림이 필요한 겁니다.

지금은 우리 생각과 같지 않다고 하여도 주의 뜻이라면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갖게 하지 않겠는가 하고 이해하고 기다려 주는 겁니다.

그들을 인정해 주라는 말이 아니고 기다려 주자는 말입니다.

이게 복음을 아는 자들의 자세에요.

 

타협은 하지 말아야지만 나와 다르다고 잘라낼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복음을 분별은 하세요.

하지만 잘라 내지는 마세요.

그건 우리 몫이 아니에요.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 두자는 말입니다.

 

물론 바울도 다른 복음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했어요.

이는 복음에 분명함을 말하고자 함이에요.

그러니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의 대상이라고 말을 한 겁니다.

 

바울이 남을 대하는 것을 보면 남을 판단하고 잘라내기 보다는 그들과 같은 눈높이를 맞추고자 했어요.

바울이 복음을 몰라서 이방인과 상종하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과 교제한 것이 아니에요.

혹여라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자신과 같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은 이미 빛에 거하기 때문에 어둠과 같이 있을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자기 안에 빛이 있으니 어둠에 속을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에게 설득 당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관대한 겁니다.

어둠과 당당히 교제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어둠에 속지 않으니 상대가 내치지 않는 한 바울이 어둠을 내칠 이유가 없지요.

 

자신도 과거엔 어둠 속에 있다가 빛을 만났으니 혹시 자신이 교제하는 어둠에 속한 자들 중에서도 자신과 같이 빛을 만나게 될지 누가 압니까.

그러니 빛을 만난 자로서 참아주고 이해하고 용납해 주는 겁니다.

 

그들이 맞아서가 아니라 혹시 나에게 주의 긍휼이 임한 것처럼 그들에게도 주의 긍휼이 임할까봐서 참아주고 기다려 주자는 겁니다.

그들의 말에 동조하라는 것이 아니고,,,,,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그럼에도 우린 바울과 같은 여유로움이 없어요.

생명을 가진 자로서의 관대함이 나오지 않아요.

너무 소아적이에요.

나와 다르면 무조건 잘라 내고만 있어요.

그러니 신앙이 가난한 겁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잘라내고 붙이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린 다만 복음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빚을 진 자들이니 이 빚을 다른 사람들에게 갚는다는 자세로 살아야 해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자신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하잖아요.

그들에게 빚을 졌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이 받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빚을 졌다고 하는 겁니다.

저들이나 자신이나 다 저주 받아야 할 자인데 자신에겐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여 천국에 가니 그들에겐 미안한 겁니다.

 

그래서 비록 자신과 다른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관대함으로 다가가는 겁니다.

이 바울의 심정을 아시겠어요.

이 마음이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해요.

그래야 그 사람이 바울과 같은 은혜 아래 있는 성도에요.

 

그런데도 우리에겐 왜? 이런 바울의 마음이 없을까요?

이는 우리가 이미 다 아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예수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내 믿음만 맞고 남은 다 틀렸다고 남을 판단하는 겁니다.

이건 교만이에요.

 

복음을 지식으로 가지고 있으면 교만해져요.

복음을 사랑으로 받아야 남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이 나와요.

복음을 사랑으로 받은 사람은 절대로 교만치 않아요.

긍휼이 나와요.

긍휼을 만들어 내란 말이 아니고 긍휼로 구원 받은 자는 긍휼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우리는 항상 내 판단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린 하나님의 일하심을 부분적으로만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이 부분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해요.

내가 안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아는 것이에요.

그럼 내가 깨닫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맞아요.

우린 모두가 부분적으로 알아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그 누구도 남을 판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도 다 아는 것이 아니고 부분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하였어요.

 

고린도전서 4장을 봅시다.

 

고전 4:3-5=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지금 바울이 이 말을 하는 것은 고린도교회 안에서 계파별로 분쟁이 생겨서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바울이 옳다!

게바가 옳다!

아볼로가 맞다! 라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신앙을 판단하였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어느 교단이 맞고!

어느 목사가 맞느냐! 라고 싸우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은 양심상 판단 받을 일은 없지만 그래도 나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가 옳다 그르다 를 판단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신의 신앙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신앙이라는 것엔 추호도 의심하지 않지만 그러나 자기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알고 있으므로 남을 판단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린 모두가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일이나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겁니다

 

왜? 우리가 할 일도 아닌데 우리가 나서서 맞다 틀리다 하면서 싸우느냐 에요.

그건 우리 몫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왜? 하나님이 하실 일까지 하느냐 에요.

 

우린 누가 천국가고 누가 지옥가고 하는 일에 관심 쓸 필요가 없어요.

그건 우리 몫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린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어요.

이는 우리가 구원 받고 멸망 받고 하는 것은 우리 선에서 결정이 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선에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우리 행함과 상관없이 긍휼을 베풀 자는 구원하고 강퍅케 할 자는 멸망시켜요.

우리 행함과 상관없이 말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조차도 맞다 틀리다 따질 필요가 없어요.

 

자신이 십자가 복음을 알면 누가 뭘 전하든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내가 판단해서 아니라고 생각되면 안 들으면 되어요.

자꾸만 누구에게 맞느냐 틀리느냐 라고 묻는다는 것은 본인이 아직 십자가 복음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본인도 못 믿으니 자꾸만 다른 사람에게 확인 받으려고 그러는 겁니다.

 

어떤 분들이 저에게 질문을 해요.

자기교회 목사님 설교를 좀 비평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제가 그 목사님을 판단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냐고 합니다.

내가 맞다고 하여도 질문한 당사자가 맞다고 생각하여야 맞은 겁니다.

본인이 긴가 민가 하는데 내가 아무리 판단해 주어보아야 소용없어요.

그건 내 판단이지 그 사람의 판단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판단 할 필요가 없지요.

 

물론 비평을 요구하니 복음은 이런 것입니다 라고 말은 해 주어요.

 

남을 판단하기 이전에 내가 복음을 아느냐가 중요해요.

내가 복음을 알면 저절로 옳고 그름이 분별이 되어요.

그러니 제가 알려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알아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본인이 자기 안에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는 복음이 있느냐 에요.

그게 없으면 제가 알려 주어도 그 사람에겐 카더라 통신이 되어요.

 

“카더라 통신” 이 뭔 줄 아세요.

누가 이렇다 카더라!

누가 저렇다 카더라! 라는 말이에요.

이렇게 되면 자기 신앙은 없고 늘 다른 사람의 판단에 신앙이 흔들리고 지진이 일어나요.

 

만약 제가 맞다거나 틀렸다거나 합시다.

그럼 그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으로 맞다거나 틀렸다거나 하지 않고 정낙원 목사가 그러는데 맞다거나 틀렸더라고 하더라고 할 것입니다.

그럼 그 판단은 정낙원 목사의 판단이지 자기 판단이 아니에요.

이런 판단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소용없어요.

 

제가 알려준 것은 제 신앙으로 알려 준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겐 신앙이 될 수가 없어요.

그건 자기가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안 것은 지식이에요.

자신이 안 것이라야 신앙이 되어요.

 

남이 알려준 것은 지식이에요.

그러니 남에게 들은 것이 지식이 되어서 누가 그러는데 그 사람 복음을 모른다고 하더라 라고 경솔하게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식은 교만케 한다고 했어요.

지식으로 알아진 것은 반드시 심판하는 행위로 나타나요.

아는 것으로 자기 잘난 척을 하여야 하거든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알아진 믿음은 덕으로 나타나지 절대로 교만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그래서 바울은 서로 잘났다고 싸우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지식은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말하는 겁니다.

 

물론 누구에게 들어서 깨달을 순 있어요.

그 깨달음이 성령께서 알려준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심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반드시 하나님께로는 감사로 나타나고 이웃에겐 긍휼의 마음으로 나타나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혼자 예수님을 만났으니 다른 사람에게 긍휼의 마음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겐 빚 진자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자기 안에 성령이 있으면 그 성령이 알아서 분별을 해요.

이것 이상 정확한 건 없어요.

성령이 있는 사람은 성령의 분별로 판단 할 것이고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판단 할 겁니다.

결국 자기 판단으로 판단 받는 겁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왜? 쫓아냈습니까?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같이 되었다고 해서 쫓아냈지요.

에덴동산은 생명의 세계에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고 죽은 자가 되었어요.

죽은 자가 되었음에도 심판하는 자가 된 겁니다.

이런 놈을 생명의 세계에 두면 죽은 자의 눈으로 판단을 해 버리게 되어요.

 

그러면 에덴동산은 죽음의 동산이 되고 말아요.

왜냐하면! 죽은 놈이 자기 생각으로 이건 맞고 저건 틀렸다고 전부 판단을 해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놈은 죽은 세상에서 살으라고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 낸 겁니다.

 

생명과가 에덴동산에만 있다는 것은 에덴동산 밖은 생명이 없는 곳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세상은 죽은 세상인 겁니다.

공동묘지 즉 장망성이라고 해요.

죽은 놈들끼리 서로 맞다 틀리다 백날 판단해도 다 죽은 판단이니 하나님 앞에선 틀린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럼 바울이 왜?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지 알겠지요.

우린 비록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 안엔 여전히 선악의 법이 도사리고 있어요.

이 놈이 수시로 심판하게 만들어요.

우리가 남을 판단하는 것도 다 이 놈이 장난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놈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 노릇하게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남을 심판하는 겁니다.

 

분별과 심판은 달라요.

우리 안에 성령이 계셔서 분별하게 하세요.

그러나 성령께선 우리가 심판하는 일을 행하게 하시지 않아요.

심판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안에 옛 사람이 성령의 소욕을 밀어내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게 한단 말입니다.

 

진정으로 그 안에 성령이 있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 사실을 인지(認知)해요.

그래서 늘 자신과 싸우는 겁니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우는 겁니다.

남과 싸우는 것이 아니고 자기와 싸워요.

 

그래서 바울도 자신은 자신을 판단 할 수가 있지만 이것조차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것조차 하나님께 맡겨 두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너희들도 누굴 심판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맞다 틀리다 판단을 해도 그 판단은 하나님 판단이 아니고 우리 판단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어리석게 싸우느냐 에요.

 

바울의 말은 이래요.

바울도 하나님이 사용하는 종이고!

게바도 하나님이 사용하는 종이고!

아볼로도 하나님이 사용하는 종이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씨를 뿌리는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물을 주는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밭을 가는 일을 하고!

각각 맡은 사역이 다를 뿐이에요.

 

바울은 내가 못하는 일을 게바가 할 수도 있고!

게바가 하지 못하는 일을 내가 할 수도 있고!

게바나 바울이 못하는 일을 아볼로가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어요?

저와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린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가야해요.

이는 구원이 짤릴까 말까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니고 교만치 말라는 말입니다.

언제든지 넘어 질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세우고 넘어지게 하는 능력은 주님께 달렸어요.

그러니 타인의 신앙은 신경 쓰지 말고 누구 말대로 너나 잘하시면 되어요.

각자 받은 은혜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신이 처한 곳에서 열심히 복음으로 살면 됩니다.

그곳이 교회 안이든 교회 밖이든 상관치 말고!

 

고린도교회가 왜? 시끄러운 줄 아세요.

각 사람마다 받은 은사가 달라서 그래요.

그러니 각자 받은 은사로 서로가 서로를 판단하는 겁니다.

 

꼭 한국교회 같아요.

서로 받은 은혜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준 은사를 자기 잘남으로 시용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자기를 드러내는 일을 하는 겁니다.

자기를 들어내자니 자연히 남과 차별성을 들고 나오는 겁니다.

 

이건 성령의 은사에 다양성을 몰라서 그래요.

우리는 늘 자기 하고 같은 색깔을 맞추고자 해요.

자기하고 같아야만 같은 편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풍성함을 몰라서 그래요.

 

바울의 말처럼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은 씨를 뿌리고 어떤 사람은 물을 주고 어떤 사람은 밭을 간다고 합시다.

그럼 밭을 가는 사람은 밭을 가는데 필요한 말을 할 것이고!

씨를 뿌리는 사람은 씨를 뿌리는데 필요한 말을 할 것이고!

물을 주는 사람은 물을 주는데 필요한 말을 할 것이 아닙니까!

다 자기가 맡은 사역에 필요한 말을 할 것이잖아요.

 

밭 가는 사람이 왜? 씨를 그렇게 뿌리느냐 말할 수 없어요.

또 씨 뿌리는 사람은 밭 가는 사람에게 너 왜? 밭을 그 따위로 가느냐! 라고도 할 수 없어요.

각자 하나님께로 받은 것으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말을 한다고 해서 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서로 농사 잘 짓고자 하는 지향점이 같다고 하면 포용하여야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각 사람에게 각각의 은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욥이나 욥에 친구들처럼 자신은 마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손금 보듯이 다 안다고 교만을 떨고 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욥이 전혀 알지 못하는 창조의 일을 가지고 묻는 겁니다.

 

너 바다 속에 길이 있는 걸 보았느냐!

너 내가 해와 달과 별을 지을 때 어디 있었느냐!

너 지구가 공중에 어떻게 매 달려 있는 줄 아느냐!

너 밤에 내리는 이슬에 엄마가 누군지 아느냐!

너 태백산 소나무에 물을 줘 본적이 있느냐!

너 지리산 오소리에게 밥을 준 적이 있느냐!

 

좌우지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아는 척하고 잘난 척하는 욥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서 욥이 평상시에 생각해 보지도 않고 신경 써 보지도 않는 것으로 묻습니다.

욥은 지금까지 다 안다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질문에는 단 한마디도 못하고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주둥이를 가리잖아요.

 

주여! 잘못 했습니다.

이 주둥이가 문제였군요!

쥐뿔도 모르는 것이 탱자 탱자 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곤 자기 입을 재봉틀로 박아 버렸어요.

 

욥이 자기 주둥이를 가린 것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애들아! 주둥이 닫고 살아라!

함부로 다 아는 척 하면서 심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신앙은 단순하지 않아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신앙은 생명의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고정되어 있지 않아요.

늘 움직이고 변해요.

그러니 삶에 언행심사가 다양함으로 묻어 나오는 겁니다.

 

어린아이 때는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어른은 어른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요.

그래서 신앙도 생명처럼 흐름의 역사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은 옳다고 한 것이 지나고 나면 철없음을 알게 되어요.

그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안 것이 전부가 아니고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보다 더 높고 더 깊고 더 풍성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중요한 이야기라서 이렇게 길게 말하였네요.

이해하세요.

 

다시 본문을 살펴봅시다.

 

본문을 보면 역설적인 말처럼 들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앞서선 사람들이 표적을 보고도 안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후반부에선 관원들 중에서 믿는 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이 예수를 안 믿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좋아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말은 믿고 싶은데 안 믿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선 이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에 동의하고 싶은데 동의하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다 이단이라고 하는데 동조했다가 그들에게 찍히면 큰일 나기 때문에 드러내 놓고 동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 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 눈치보다 사람의 눈치를 더 보았다는 말입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영광을 더 챙기는 자라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드러내 놓고 믿지 못하였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에 판단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본문을 봅시다.

 

42-43절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보세요.

관원 중에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한다고 하지요.

이는 그 집단에서 쫓겨날까봐서랍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의 관원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고 싶어도 드러내 놓고 믿지 못하는 것은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서라고 합니다.

그 집단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관원이라고 하면 지도자급입니다.

그 집단에서 지도자 대접을 받으려면 그 집단의 판단을 따라야지요.

유대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유대인들의 판단을 따라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이단이라고 하는데 이단 아니라고 말할 순 없잖아요.

예수를 두둔 했다간 그 집단에서 쫓겨나야하니까요.

 

쫓겨나면 당장 먹고 사는 일이 태산입니다.

직장도 잃고 친구도 잃고 동네사람들에게 이단이라고 낙인이 찍혀서 살수가 없는데 어찌 그 일을 감당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자기는 어떻게 고난을 감수한다고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처자식들을 어쩌라고요.

가족들을 어떻게 살라고요.

그러니 예수를 믿고 싶어도 드러내 놓고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여 사람의 영광을 주었다고 한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을까요?

아니지요.

안 죽이고 더 우려먹었겠지요.

 

오래도록 곁에 두고서 기적을 빼내 먹었을 것 아닙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자기들의 영광을 구하게 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광을 구하게 해주지 않고 도리어 자기들 영광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죽인 겁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모두가 자기 자신의 영광을 구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인간의 본성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본능적으로 거부하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도 자기에게 유익 되지 않으면 죽여요.

이런 사고가 인간으로 하여금 일평생 편 가르기 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겁니다.

인간에겐 자기편 아니면 다 적이에요.

그러므로 인간들은 자기와 다르면 죽여야 하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와 다르면 쫓아내야 해요.

그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불편해요.

진리다 아니다 는 상관없이 네 편이냐! 내 편이냐! 만 따지는 겁니다.

내 생각에 동조해 주면 내 편이고 안 해주면 적이에요.

그래서 틈만 나면 당(黨)을 짓는 겁니다.

 

아무리 진리를 전한다 하여도 자기편을 안 들어주면 목사를 쫓아내든지 아니면 자신이 그 교회를 떠나요.

인간들이 진리 운운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에요.

그 누구도 그 진리에 자신을 죽이고자 하지 않아요.

인간의 본성상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린 늘 복음을 이용하고 자신을 보호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교활함을 도리어 인간 속에 있는 죄를 고발하는데 이용을 합니다.

너는 하나님 영광보다 네 영광을 더 생각하는 악당이라고 고발해요.

한 번도 하나님은 진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너희는 너희 영광만 챙기는 자라고 고발을 해요.

 

이 세상 그 어떤 위인도 세상 영광을 마다할 사람은 없어요.

인간은 근본 된 토지를 갈도록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어요.

아담의 근본 된 토지란? 흙이에요.

그러므로 인간은 흙을 떠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은 흙에서 나는 것을 먹다가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 흙이 바로 세상이에요.

세상 영광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저주를 하지요.

이는 하나님이 뱀에게 죄인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를 세상 권세라고 합니다.

그래서 뱀이 예수님을 찾아 와서 자신에게 절을 하면 세상 영광을 다 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뱀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하는지 봅시다.

 

누가복음 4장입니다.

 

눅 4:5-8=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7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잘 보세요.

마귀는 지금 천하만국의 세상 영광을 하나님으로부터 넘겨받았다고 하지요.

이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나에게 절을 하면 세상에서 영웅을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는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잖아요.

얼마나 좋습니까?

마귀가 천하만국의 권세와 세상 영광을 다 준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어느 인간이 마귀를 이기겠어요.

못 이겨요.

왜? 그런 줄 아세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흙에서 나는 것을 먹게 하셨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본능적으로 자기 몸뚱아리를 챙기게 되는 겁니다.

 

신앙은 자신만만한 것이 아니에요.

늘 넘어지고 자기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닫는 겁니다.

자신은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 없다는 존재란 것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 바탕에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깔려있음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마귀를 이길 수 없어요.

아니 마귀를 찾게 되어 있어요.

마귀에게 돈 좀 달라고 할 수 밖에 없어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이나 뱀이나 모두 흙을 떠나지 못하게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뱀과 인간은 다정한 친구인 겁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이런 친구를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마귀를 버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겁니다.

 

하나님은 이를 아세요.

그래서 예수를 믿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강제로 믿어지게 해 주셨어요.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우리 행함의 여부와 상관없이 흔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린 예수 믿을 실력이 없어요.

우린 마귀가 더 가깝지 예수가 가깝지 않아요.

유대 관원처럼 바리새인이 가깝지 예수가 가깝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의 말이 아무리 진리라고 하더라도 우린 늘 뱀의 편에 설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뱀의 편에 선다는 것은 뱀의 편을 든다는 것이 아니고 뱀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에요.

내 육신을 못 이기니 뱀을 이길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성도의 구원은 취소가 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강제로 우리 안에 예수가 믿어지도록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성령이 마음에 새겨준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은 사랑의 언약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그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에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했어요.

 

바울이 말썽 많은 자들에게 너희들 그렇게 살면 저주 받는다! 라고 하지 않았어요.

너희들 행함으로 심판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너희들 말씀대로 안 살면 저주 받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너희들 싸우면 저주 받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직 하나 누구든지 예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고 했어요.

예수 안 믿으면 저주 받는다고 했다구요.

이 사실을 놓치지 마세요.

우리의 구원에 능력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에서 나오지 우리의 행함에서 나오지 않아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와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사랑을 심어 놓았어요.

 

이걸 사도요한은 온전한 사랑이라고 했어요.

 

요일 4: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온전한 사랑이란? 하나님이 심어준 사랑이에요.

새 언약이에요.

세 언약 안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가 들어가 있어요.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이 짤리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러니 이 사랑이 심겨진 사람은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마음 속에 이 사랑을 심어 놓았어요.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심어 놓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일부러 마귀와 예수님의 만남을 주선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대신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예수님 속으로 집어넣기 위해서에요.

 

예수님은 우리를 대표해서 마귀를 만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만나는 겁니다.

성도를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은 성도를 대표해서 마귀와 대면하고 있는 겁니다.

 

마귀는 예수에게 세상 영광으로 유혹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거절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구했어요.

사람이 사는 것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최초로 마귀를 이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 안에 있는 성도를 예수님이 이기신 이김으로 간주해 줍니다.

그런데 이 이김을 간주해 주는 것이 아주 역설적입니다.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말이니 귀담아 들으세요.

 

하나님은 성도가 마귀를 이기는 것으로 해 주지 않고 지게 만들어요.

우리 인간은 마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세요.

그래서 너희는 예수가 이긴 이김으로 이긴 자라는 것을 알게 하세요.

예수님이 이긴 것을 붙잡게 한단 말입니다.

 

내가 이긴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긴 것을 붙잡게 하세요.

그러니 우린 늘 예수님이 이긴 것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 안에서 산다!

혹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예수의 생명으로 산다고 했어요.

 

그러니 성도의 삶에 끝에는 항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귀를 이긴 이김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나 말씀대로 살았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난 말씀대로 살지 못했어가 나오는 겁니다.

난 못 이겼는데 예수님 피로 용서 받았어 가 나오는 겁니다.

성령이 성도의 삶속엔 항상 예수님의 피로 승리하심이 남게 만드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죽었습니까?

자기 백성들의 죄 때문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잖아요.

 

그럼 우리 죄란 뱀에 말을 들은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범죄 한 자가 되었잖아요.

그러니 죄란? 뱀의 말을 듣는 겁니다.

 

그 뱀이 인간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세상 영광을 준다고 다가오잖아요.

그럼 우리 인간들은 그 말을 홀라당 받아먹어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 뱀의 말을 지금도 달콤하게 받아먹고 있어요.

 

그러니 아무리 성경에서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여도 우리 귀에는 소 귀에 경 읽기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돈을 사랑하지 말아라!

그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여도 안 되어요.

 

우린 돈을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세상에선 예수님 없인 살아도 돈 없으면 살아요.

우리 육신은 떡을 원하지 말씀을 원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눈만 뜨면 떡을 찾지 말씀을 찾지 않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린 뱀의 말을 거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마귀와 사바사바 하여서 하나님 뜻을 거역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럼 성령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으로 우리를 끌고 갑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믿게 하세요.

아까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새 언약을 심어 놓았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성령은 새 언약을 붙잡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세요.

성령이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우리 몸에 발라요.

마치 법궤 위 시은좌에 피를 뿌리듯이 우리에게 뿌린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위에 뿌려진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용서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린 예수님의 피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 육신이 감당 할 수 없는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아라!

돈을 사랑하지 말아라!

그런 다구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인 것을 구하지 말고 사랑하지 말라고 하고 있어요.

여기에 주여 우린 못 하겠는데요! 라고 하는 사람이 성도에요.

반대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자는 바리새인이요.

 

아니 돈 없으면 살 수 없는 환경 속에 두고선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면 어찌합니까?

진짜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겁니까?

아니면 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까?

 

중풍병자에게 축구공을 주면서 축구하라는 것은 넌 중풍병자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에요.

조금 움직인다고 중풍병자가 아니라고 하니 축구공으로 확인 시키는 겁니다.

넌 축구를 할 수 없는 중풍병자이거든!

그를 기죽이려는 것이 아니고 실존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지킬 수도 없는 말씀을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발하고 계신 겁니다.

우린 마귀와 한 통속이라는 것을 고발하고 계세요.

 

맞아요.

우리는 늘 마귀와 손을 잡고 예수님을 죽이고 있어요.

그래서 우린 예수를 죽인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누가 알겠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는 겁니다.

 

38-41=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하나님이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는 것은 예수를 못 믿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못 믿게 하셨다는 것은 곧 우린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마귀와 합세하여서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일을 하십니까?

이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을 머물게 하시고자 함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죽인 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덮어지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광야의 놋 뱀 사건으로 말씀하지요.

누구에게 놋 뱀을 쳐다보게 합니까?

뱀에 물린 자들이지요.

누가 뱀에 물렸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한 자들이지요.

신약 식으로 말하면 예수를 죽인 자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놋 뱀처럼 십자가에 죽인 것은 예수를 죽인 자들을 살리기 위함이에요.

아주 역설적이지요.

누가 예수를 믿는지 아세요.

예수를 죽인 자만이 믿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제자들이 왜? 다 도망을 친 줄 아세요.

도망을 쳐 주어야 배신자들이 되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해서 배신한 자들을 찾아 가서 용서 해주는 겁니다.

 

하나님을 원망한 자를 용서하기 위해 놋 뱀을 다시고!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 할 수밖에 제자들을 위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달게 하신 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시겠어요.

이걸 이해하셔야 십자가가 복음으로 다가 오게 되어요.

이 비밀을 아셔야 오직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게 된다구요.

다시 말하지만 예수를 죽인 자만이 예수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요.

 

용서란? 죄인에게만 필요한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용서가 필요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자기백성들 속에 항상 머물러 있게 하시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마귀의 말에 넘어지도록 두는 것입니다.

 

마치 탕자가 집을 나가도 아버지가 붙잡지 않는 것과 같아요.

아버진 탕자가 아버지의 용서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유산을 달라고 하니 군말하지 않고 나누어 주었어요.

아버진 탕자가 돈을 다 말아 먹을 것을 알았어요.

그러면서도 주셨어요.

 

가서 마귀가 어떤 놈인지 좀 알고 오라는 겁니다.

마귀의 나라에 가서 살아봐라!

네가 마귀를 이길 수 있나! 없나!

결국 유산을 주어서 집을 나가게 하여서 넌 이 애비의 용서하심과 그 은혜로 살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겁니다.

 

아버지는 재산보다 자식이 아버지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해요.

그래서 철없는 자식이 집을 나가 독립을 한다고 거금을 달라고 해도 선뜻 주신 겁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신자에요.

그럼에도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생각지 않고 잘 살았느니 못 살았느니 자기 행함으로 희비하면서 꼴값을 떨고 있어요.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 숨바꼭질 하는 겁니다.

우린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숨기고자 하고 하나님은 기어코 우리 속에 숨긴 죄를 다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저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폭로시킵니다.

성도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죄인이라는 것을 폭로당한 자들이에요.

 

인간들은 자기 잘남을 포기하지 못해요.

끝까지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고 자기 옳음을 드러내고자 해요.

그래서 죄를 지적받으면 반발을 하는 겁니다.

 

설교를 통해서 책망을 들으면 어이쿠 잘못 했습니다! 라고 하지 않고 목사와 각(角)을 세우는 겁니다.

왜? 날 기분 상하게 하고 괴롭히느냐고 덤벼요.

말씀으로 죄를 고발당하면 기뻐하여야 하는데 우린 도리어 화를 내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드러나면 감사할 일인데도!

그럼에도 우린 안 들키려고 죄를 꼬낏 꼬깃 감추고 있어요.

나 죄인 아니거든요!

그러고 있어요.

 

어떤 분이 죽음을 앞둔 권사님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어요.

권사님 사람이 죽으면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집니다.

천국엔 하나님과 화목해야 갈수가 있어요.

하나님과의 화목은 예수님의 피로서만 가능해요.

그러니 예수 믿고 하나님과 화목하세요!

 

그러자 그 권사님이 난 하나님과 싸운 적이 없어!

난 하나님 앞에 죄 안 지었어!

난 하나님 말씀에 다 순종하고 살았어!

그러니 나는 하나님과 화목 할 일이 없다고 합니다.

아! 이를 어째야 합니까!

 

지금 우리가 이 권사님처럼 하고 있어요.

말씀 앞에 죄를 지적 받으면 주여 난 죄인입니다! 라고 하여야 하는데!

우리는 기분 나쁘다고 바락 바락 난 잘못이 없다고 덤벼요.

기어코 난 맞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해요.

 

자기가 정당하면 설교 들을 필요가 없어요.

설교를 듣는 것은 자기 안에 숨겨진 죄를 낱낱이 고발당하기 위함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맞아!

내가 복음을 오해하고 있었어!

내가 왜? 그걸 몰랐을까!

이것도 죄였구나!

내가 이런 죄인이었구나!

그래서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고 있음에 감사하여야 하잖아요.

그래야 그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에요.

 

그럼에도 우린 어리석게도 자기 자존심 때문에 죄를 숨기고 들키지 않으려 하고 있어요.

난 잘못하지 않았어!

난 죄 없어!

그러고 있어요.

이는 모두가 사람들로부터 나는 죄 없는 자라고 하여 영광 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에요.

이를 어찌하여야 합니까?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구약 시대 엘리야가 아합 왕의 잘못을 지적하자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달려들면서 하는 말이 저 놈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하잖아요.

아합 왕이 곧 우리들이에요.

왜? 날 괴롭게 하느냐!

네가 뭔데 내 신앙이 옳으니 그르니 말하느냐고 따져요.

 

전 다만 믿음 안에는 이런 요소가 담겨져 있습니다! 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말하느냐고 합니다.

전 제 안에 성령께서 이렇게 말하라고 해서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 왜? 그런 말을 해! 라고 하면 안 되지요.

 

우리가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도 하나님께서 저 목사님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말하고 계시구나! 라는 자세로 들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들을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어느 설교를 들어도 죄를 지적 받아야지 칭찬 듣고자 하면 안 되어요.

 

우린 칭찬 들을만한 짓을 하고 살지를 못해요.

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사는 죄인들이에요.

그러니 늘 말씀 앞에서 우리 죄가 폭로 당하여야 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고 복이에요.

 

그럼에도 우리도 아합 왕처럼 하고 있어요.

왜? 날 괴롭게 하느냐고 화를 내는 겁니다.

예수님이 설교를 하니 인간들이 어떤 반응을 일으켰나요.

예수님을 절벽으로 끌고 가서 밀어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잖아요.

우리가 지금 이 짓을 하고 있어요.

 

인간은 바른 소리를 듣기 싫어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저희가 빛 앞으로 나아오지 않는 것은 자기 행위가 악하고 어둠이 드러날까 봐서 라고 하잖아요.

그 저희가 바로 우리들이에요.

내가 바로 저희에요.

죄를 고발당하기 싫어하는 저희란 말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그러더군요.

맞는 말이니 인용합니다.

자기가 한 설교에 모든 청중이 반응을 한다면 그 설교는 잘못한 설교라고 했어요.

설교는 성도로 하여금 넘어뜨리게 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을 긍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기 위해서 설교를 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항상 설교단에서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 그러지 못하고 있어요.

남에게 인정받고자 한단 말입니다.

남들이 내 설교에 칭찬을 해 주기 바란단 말입니다.

이는 결국 나도 사람들 비위를 맞추고 있다는 것 밖에 안 되어요.

그러니 난 엉터리 설교를 하고자 하는 악당인 겁니다.

설교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 입신양명을 노리는 사기꾼인 겁니다.

 

이처럼 우린 모두가 복음을 이용하지 복음에 삼키 운바 되고자 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린 복음을 좋아하지 않는 겁니다.

복음은 반드시 인간의 죄를 고발하면서 다가와요.

그런데 인간의 본성은 죄를 숨기고자 해요.

 

그러니 목사와 성도는 늘 충돌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죄인을 부딪치게 만들어서 그들 속에 있는 죄를 낱낱이 고발하고 계신 겁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합니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는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어부지리란 말이 있지요.

조개하고 도요새가 서로 잘났다고 싸우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잡혀갔다는 말이잖아요.

우리가 지금 그러고 있어요.

서로 사로 잘났다고 싸우면서 죄가 고발되어져요.

그럼 하나님이 십자가 잎으로 데리고 가요.

 

두 죄인끼리 싸우게 만들어서 그들 속에 있는 죄를 까발려서 서로가 죄인임을 드러나게 하세요.

그리곤 두 놈 다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단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끄집어내는 일이에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그 말 많고 분쟁 많은 고린도교회에 주께서 너희를 그리스도의 날까지 견고케 하고 끝 날까지 흠 없는 자로 세울 것이라고 미리 말하고 책망을 해 대잖아요.

 

고전 1:8절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어떻게 책망 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웁니까?

이는 예수님의 피로 뒤집어씌워서 흠 없게 하는 겁니다.

서로 서로 잘났다고 치고 박고 싸우는 놈들을 예수님 치마폭으로 감싸서 흠이 안 보이게 하는 겁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그러니 우리의 일생은 죄를 고발당하는 일생이에요.

뭘 짜들어지게 하나님께 충성하고 말 잘 듣고 사는게 아니고 문제만 일으키고 말썽만 일으켜요.

이게 우리의 실존이에요.

그러니 끝까지 뻔뻔스럽게 견디세요.

 

사람에게 뻔뻔스러우란 말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뻔뻔스러우란 말이에요.

사람에겐 나긋나긋하세요.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세요.

 

믿음이 좋다는 것은 그만큼 뻔뻔스럽다는 겁니다.

믿음은 뻔뻔함이에요.

그러니 뻔뻔스러움을 잃지 마세요.

 

여러분 왜? 자식이냐면 부모 앞에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뻔뻔하기 때문이에요.

부모 앞에 죄책감을 가지면 집에서 못 살아요.

자식은 아무리 잘해도 부모의 마음에 들 수가 없어요.

그러니 부모 앞에선 그냥 뻔뻔스러우세요.

 

자식은 늘 잘했다고 하고 부모는 늘 잔소리해요.

이게 부모와 자식이에요.

아이는 아이 입장에서 보니 늘 잘한 것처럼 보이고 부모는 부모 입장에서 보니 늘 잔소리를 하는 겁니다.

 

부모 잔소리 듣기 싫다고 나가면 죽어요.

부모 잔소리 듣기 싫다고 집을 나가 보세요.

전부 강도들만 있어요.

그 누구도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잔소리 듣더라도 해 주는 밥 잘 챙겨 먹으세요.

아니 공짜로 밥을 쳐 먹으면서 잔소리 정도는 들어 주어야지요.

잔소리 들으면서 밥을 안주면 왜? 밥을 안주느냐고 하세요.

자식 굶겨 죽일 일이 있느냐고 하세요.

이게 자식이에요.

 

성경은 이 뻔뻔함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이란? 내가 반듯하게 살아서 하나님을 놀래키는 일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 뿌림이 아니고서는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깊이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그 언저리에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흥건하게 흘러 있어야 해요.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더 많이 깨닫고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예수님의 피가 뚝뚝 묻어나는 증거를 남기세요.

난 이런 악당인데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이 자랑으로 남게 하세요.

이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아직까지 이 세상에 살려두신 까닭입니다.

난 마귀를 이길 수가 없고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소망이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시려고 아직까지 세상에 남겨 둔 것입니다.

 

죄인 중에도 더 악독한 죄인임을 알게 하시려고 아직까지 살려두고 계신 겁니다.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 때쯤 되면 그만 살고 오라는 제대 통보서가 날라 올 겁니다.

언제쯤 제대 통지가 올런지,,,,

그날을 기약하고 사세요.

 

사는 날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많이 감사하고 자랑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질기디 질긴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깊이 깨닫는 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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