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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83강. 언약을 위한 도구들 (요 13:21-30)

by coroa 2021. 11. 18.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83강. 언약을 위한 도구들 (요 13:21-30)

-.정낙원 목사

 

요 13:21-30=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 대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 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려져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참 새 한 마리도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어요.

이는 참새 한 마리에서부터 풀 한 포기까지도 하나님이 다 먹이시고 입히시고 기르신다는 말입니다.

 

물론 인간도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당연히 포함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세요.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 함은 주인으로서 관리하고 간섭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통촉하시고!

우리의 머리털 까지도 다 세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계신다고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해요.

그래서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을 지고자 하는 겁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성경을 통하여서 인간을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손금 보듯이 다 꿰고 있다고 머리로는 다 알아요.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연 이러한 사고로 살아가고 있느냐 입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간섭하심에서 일어난다고 생각을 하느냐 에요.

머리로는 아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아요.

 

우린 하나님을 생각으로 아는 것만큼 그렇게 의식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아요.

우리는 예수를 믿기 전이나 믿고 난 후에도 여전히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니 살아가는 삶에 하나님을 의식치 않아요.

하나님을 의식치 않으니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도 없거니와 두려움도 없는 겁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이 있는데 삶에는 하나님이 없어요.

죽은 하나님이에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관념으로 흐르는 겁니다.

말씀이 생명이 아니고 습득된 지식으로만 남아 있어요.

그러다 보니 하나님 말씀을 롯의 사위들처럼 농담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 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이 사실로 느껴질 때 나타나요.

하나님이 지금 나를 보고 있다고 느껴져야 해요.

이런 상태를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고 합니다.

 

믿음이란? 생물이에요.

생물이라고 하니 좀 생경하지요.

믿음을 생물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살아서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살아서 인간을 움직여요.

 

믿음은 실체가 없는 추상명사에요.

실체가 없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고 실체가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람처럼 분명하게 있지만 눈에 보이거나 잡히지 않아요.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말할 땐 반드시 동사로서 말하는 겁니다.

 

동사란? 움직이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직역하면 말씀이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움직인다는 것은 말씀이 생명이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떨어지는 곳엔 반드시 그 말씀이 일으킨 사건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흔적을 남긴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은 곧 실체가 없어요.

그러나 그 말씀이 곧 어떤 사건을 일으켜서 흔적을 남겨요.

그러자 중풍병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이끌려서 자리를 들고 벌떡 일어나서 걸어갑니다.

 

이에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는 그 모습을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믿음이 너를 자리에서 일으키고 걸어가게 하는 일을 행하셨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믿음과 함께 일을 한 겁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일컬어 믿음으로 산다고 해요.

 

우린 성경을 보아서 중풍병자가 믿음으로 나은 사건은 압니다.

하지만 그 믿음으로 살지를 않아요.

무슨 말인고 하니 믿음 믿음 하면서도 그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는단 말입니다.

중풍변자는 믿음으로 벌떡 일어나서 걷기도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께 감사했어요.

 

그러나 우리는 누워있는 중풍병자 처럼 자리에 누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어요.

감사를 합니까!

찬송을 합니까!

그렇다고 교회에서 섬기고 봉사를 합니까!

우린 그냥 주둥이로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있잖아요.

이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란 반증이에요.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고 죽은 것이라고 하지요.

이는 믿음은 반드시 어떤 행함을 낳게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믿음은 살아서 움직이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함을 낳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전화를 한다거나!

데이트를 한다거나!

선물을 사준다거나!

아니면 그 사람의 말에 순종한다거나 하는 액션이 나타나요.

 

예를 들어서 사랑하는 사람이 나 자장면 먹고 싶어!

그러면 자장면을 사 주어요.

이게 사랑이에요.

 

사랑도 추상명사에요.

그런데 사랑하는 연인이 자장면을 먹고 싶다고 하니 자장면을 사주는 것으로 나타나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전화해!

그러면 전화를 하는 것이 사랑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전화 하라고 해도 하지 않고 자장면을 사달라고 해도 모른 척 한다고 하면 그건 죽은 사랑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주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주님에 대한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할 것 아닙니까?

사랑이란? 관심이에요.

이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고 거기에 맞추어서 행동하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 최초에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에녹이에요.

에녹을 일컬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동행이란? 함께 걸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같은 사고로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에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이 슬퍼하는 일을 같이 슬퍼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첫 걸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내가 뭘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뭘 원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제사보다 순종이에요.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에요.

 

제사는 갖다 바치는 것이지만 순종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귀담아 듣는 겁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가 듣는 거예요.

마리아처럼 예수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무슨 말씀을 하는지 듣는 것이 순종이에요.

반면에 마르다처럼 예수님을 대접한다고 분주하게 일하면 그건 제사 지내는 거구요.

 

예수님 마음도 모르고 대접을 하면 자기를 위한 대접이지 예수님을 위한 대접이 아니에요.

이런 대접을 하고 나면 난 예수님을 대접했다는 자기 행위만 남아요.

그래서 성경은 제사를 지내려 하지 말고 순종하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마음도 모르면서 백날 제사로 대접하면 뭐하느냐 에요.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주셨어요.

하나님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어요.

하나님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라고 합니다.

 

아들을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아들에 말을 듣는 것이 내 말을 듣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내가 모든 것을 아들에게 맡겼으니 너희들은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세요.

 

그래서 모든 성경은 아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과 일들이 아들과 상관이 있는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하셨어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예수님과 관련된 일이란 말입니다.

 

앞서서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주인이란? 다스리는 분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으로서 세상사 모든 일에 일일이 간섭하세요.

그러므로 이 세상 인간사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간섭하심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욥기서를 보면 욥에게 일어난 일들이 하늘에서 주관한 것임을 알 수 있어요.

욥에게 닥친 재앙은 하나님이 일으켰어요.

그런데도 욥이나 그에 친구들은 땅에서 원인을 찾고자 합니다.

인간 쪽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어요.

이게 죄에요.

 

욥의 자식들이 죽고!

사업이 망하고!

몸에 병이 들고!

부인이 도망을 가고 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입니다.

 

욥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하늘에서 하나님과 마귀하고 내기해서 나타난 결과에요.

이를 두고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격이라고 합니다.

맞아요.

욥은 하나님하고 마귀하고 내기한 것 때문에 등이 터지고 만 겁니다.

하늘 위에서 발생이 된 원인 때문에 욥이 코피가 터지고 만 것입니다.

 

이로보건데 인간의 일생이란 하나님과 마귀하고 내기하는데 사용되는 장난감인 겁니다.

하나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인형인겁니다.

얼마나 황당합니까!

인간 입장에서 보면 억울해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원래 이런 일을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어요.

 

그래서 인간의 창조를 토기장이가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겨난 것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불평 할 수가 없어요.

우린 원래 없던 자들이었으니까요.

우리가 생겨났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겨나게 된 것은 창세전 언약 때문입니다.

언약을 위해서 만들어 졌어요.

언약 속엔 구원 받을 자와 멸망 받을 자가 있어요.

사랑받을 자와 미움 받을 자가 있어요.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이 있어요.

 

모든 인간은 두 부류에요.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이에요.

귀하고 천함은 하나님이 결정해요.

그러므로 우리 일생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결정된 것으로 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언약을 펼쳐 보이는 마당(場)이에요.

하나님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가지고 사건을 일으켜요.

우린 광대처럼 언약이라는 장단에 맞추어서 춤을 추는 것입니다.

 

귀히 쓸 그릇들은 예수님 편에 속한 자로서 예수님과 같은 운명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고!

천히 쓸 그릇들은 마귀 편에 속한 자로서 마귀와 같은 운명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두 편으로 갈라놓았어요.

인간은 하나님이 갈라놓은 편에 소속이 되어서 당나라 군대와 고구려 군대로 나누어져 싸우듯이 싸우면 되는 겁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하늘에서 큰 바람이 바다로 불어요.

그럼 바다에서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바다란 이 세상을 말해요.

 

그럼 이 세상은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하여 어떤 사건들이 발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바람이 부니 이 세상에 제국이 일어나기도 하고 제국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이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국가의 흥망성쇠를 하나님이 주관 하신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져서 대치하고 있는 것도 하나님이 그렇게 해 놓으신 겁니다.

하나님이 마치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갈라놓은 것처럼 남북한으로 갈라놓았어요.

그러니 인간들이 통일을 하고자 하면 안 되어요.

 

하나님이 원하시면 내일이라도 통일이 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안 되어요.

그렇다면 우린 남북한의 대치 상황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다 그러해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땅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하면 안 되어요.

이는 하늘에서 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문제이든지 땅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여서도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원인은 하늘에서 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이야기로 예를 든다면 욥에게서 재앙의 원인을 찾고자 하여서는 그 해답을 얻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늘에서 강도를 보내서 재물을 강탈하게 하였고!

하늘에서 태풍을 불어서 재산을 망하게 하였고!

하늘에서 몸에 욕창이 생기게 하였고!

하늘에서 마누라를 도망치게 만든 겁니다.

강도니 태풍이니 병이니 마누라가 도망을 간 것까지도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이에요.

 

이것을 이 시대 우리 현실에서 일어난 가까운 사건으로 적용해 봅시다.

 

지난번에 연평도에 북한에서 포격을 가하였습니다.

그때 남한 군인들이 제대로 응사하지 못했어요.

그 이유는 상부의 지시 때문이에요.

언론 보도에 의하면 상부에서 포탄 몇 발을 쏘라는 것까지 지시를 했다고 합니다.

 

현장에 있던 군인들 입장에선 몇 배나 더 응징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자신들이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행동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대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포탄을 쏜 북한 군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와서 쏜 겁니다.

 

군대는 상부의 지시로 움직이는 집단입니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어요.

상명하복으로 다스려져요.

죽이고 살리는 권세가 상관에게 있어요.

 

부하에겐 결정권이 없어요.

오직 상관의 결정권에 따를 뿐입니다.

결국 군인의 운명은 상관에게 달린 겁니다.

상관의 지시를 어기면 항명 죄로 처벌을 당해요.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성도들의 사령관이에요.

성도는 그리스도에게 지시를 받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성도의 운명은 예수님에게 달렸습니다.

죽이고 살리는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어요.

 

사도행전을 보세요.

12제자들의 행적을 보면 모두가 성령의 이끌림으로 살아갔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같이 복음 증거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았어요.

 

모든 성도들도 동일해요.

우리는 우리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들이 깨닫는 것이 둔하여서 모를 뿐입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이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엄연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여부와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일방적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우린 거부하거나 수용하거나 할 능력이 없어요.

 

예수님에게 찾아온 백부장이 그랬지요.

자기 하인이 병이 들어서 예수님에게 고쳐달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집에 가서 고쳐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백부장이 하는 말이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하면서 그냥 여기서 명령만 해 달라고 합니다.

 

자기도 자기 위에 상관이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는데 예수님께서 구태여 자기 집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질병도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냥 여기서 그 질병에게 명령만 하면 자기 하인의 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떠나갈 것이 아니겠느냐! 라는 말입니다.

대단한 믿음이지요.

 

백부장의 말은 예수님이 질병을 고치는 분이라고 한다면 그럼 병에게 명령만 하라는 겁니다.

구태여 병든 자에게 갈 필요가 없이 예수님이 그 병에게 명령만 하면 그 병은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깨끗하게 떠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믿음이 좋은 말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온 이스라엘에서도 이런 믿음은 찾아보지 못하였다고 하시면서 하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백부장의 말대로 집에 가지 않고 환자를 보지도 않고 그냥 멀리서 병에게 명령했어요.

예수님이 백부장의 하인의 병에게 이제 그만 그 사람에게서 떠나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질병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서 그 하인에게서 떠났어요.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동화 속 이야기 같은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어요.

성경 속 이야기는 온통 이런 이야기로 전개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성경은 믿음이 아니면 해석이 안 되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온 세상이 예수님의 명령에 움직인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이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백부장에게 네 믿음이 좋다고 한 것이에요.

하나님이 백부장에게 예수님이 만유를 다스리시는 주님으로 믿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백부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어요.

 

예수님께선 창세전 언약에 따라 이 세상에 오셨어요.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백성들이 거룩하게 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그 언약의 정점인 십자가에 죽을 때인 유월절이 가까이 왔어요.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에요.

 

이스라엘은 출애굽 할 때 죽음의 재앙에서 어린양의 피로 살아났어요.

어린 양의 피가 이스라엘을 살린 겁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의 어린 양의 피는 자기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줄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월절이 가까이 온 겁니다.

유월절이 되면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로서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이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다른 때 같으면 어린 양고기로 유월절을 지킬 터인데 이번엔 떡과 포도주로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떡을 주면서 내 살이라고 하고 포도주를 주면서 내 피라고 합니다.

어린 양 고기 대신 예수님의 살과 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의 실상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피는 너희들을 위하여서 흘리는바 새 언약의 피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너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 것이라고 합니다.

이건 제자들이 상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동고동락하면서 지내왔는데 누가 예수님을 판단 말입니까?

제자들이 의아해서 웅성거립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 품에 기대어 있던 요한에게 머릿짓을 하면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예수님에게 물어 보라고 합니다.

이에 사도요한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주여 그가 누구입니까?

누가 주님을 팔아먹는단 말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내가 떡을 주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가룟 유다에게 떡을 줍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마귀가 쏙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네 마음에 품은 일을 속히 하라고 하자 가룟 유다가 밖으로 나가 버립니다.

이게 오늘 본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한 일을 하시고자 하십니다.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예수님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자면 예수님을 자기 백성을 사로잡고 있는 자로부터 죽임을 당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가룟 유다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알다시피 12 제자는 모두가 예수님이 선택을 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12 제자들은 다 구원받은 자가 아닌가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다고 믿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모든 제자들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맞아요.

12제자는 모두가 예수님이 선택을 했어요.

예수님이 12 제자를 선택한 것은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그 언약 속엔 구원과 멸망이 들어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선택 속에는 구원받을 선택과 버림당할 선택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택 속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어요.

이 사실을 놓치면 안 되어요.

구약의 이스라엘 속에도 구원 받은 자와 저주 받은 자가 섞여 있는 것도 다 이런 이유입니다.

 

선택 속에는 구원을 위한 선택과 저주를 위한 선택이 있어요.

11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선택이 있는가 하면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님을 배도하기 위한 선택이 있어요.

 

이건 마치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는 것과 같아요.

이삭은 구원의 자식이고 이스마엘을 저주의 자식이에요.

이삭은 유업을 얻었고 이스마엘은 쫓겨났어요.

 

또한 이삭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던 것과 같아요.

이삭에게도 구원을 위한 야곱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저주를 위한 에서라는 아들이 있었어요.

한 부모 아래 두 민족이 있는 겁니다.

이건 12 제자 중에 두 부류가 있는 것과 같아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으로 일을 하시는 데에는 예수님을 위한 자들도 있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 있어요.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하는 사람 중에 있어요.

함께 떡을 떼는 자들 중에 있어요.

 

예수님은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죽는데 있어 자신을 팔아야 할 제자기 필요했어요.

그래서 창세전부터 멸망 받기로 작정이 된 가룟 유다를 선택을 한 겁니다.

가룟 유다는 몰랐어요.

가룟 유다는 자신도 12 제자 중에 하나인 줄 알았어요.

그들과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니라고 합니다.

넌 날 팔기 위해서 선택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빨리 그 일을 하라고 채근을 하신 겁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요구대로 예수님을 팔기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는 일에 가룟 유다를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사울 왕에게 악신을 보내 다윗을 죽이게 하는 것과 같아요.

결국 인간이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부리시는 대로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악신을 주시면 마귀 편에 서서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로 일하게 되고!

하나님이 성신을 주시면 예수 편에 서서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책에 녹명 된 자에겐 성신을 주시고 녹명되지 않은 자에겐 악신을 주세요.

사울 왕이 악신으로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듯이 가룟 유다도 악신이 장악을 하니 예수님을 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에 나타나는 그림을 자세히 보면 창조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창조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고 가기로 합시다.

 

골로새서 1장입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 하실 때 하늘과 땅에 것을 창조하십니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좌와 주관과 정사와 권세를 창조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하늘에 속한 것이고!

보이는 것은 땅에 속한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것은 천사들이고 땅에 속한 것은 인간들입니다.

천사들 속엔 마귀도 포함되어 있어요.

마귀나 사람이나 모두가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이 만유의 주가 되는 일에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배역을 맡겨 준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만물의 주인이 되셔서 예수님을 위하여 12 제자들을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허락을 하자 마귀가 가룟 유다 속으로 쏙 들어가는 겁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마귀가 가룟 유다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마귀의 활동을 허락 하셨다는 뜻입니다.

 

마귀도 예수님의 명령에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로 하여금 가룟 유다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팔도록 하신 겁니다.

이렇게 되면 마귀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위하여 사용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유의 주(主)가 되는 일엔 천국 백성도 있고 지옥 백성도 있어요.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은 태초부터 창조를 했어요.

나중에 자라가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창조가 되었어요.

 

이건 마치 사자는 사자로 창조가 되었고 호랑이는 호랑이로 창조가 된 것과 같아요.

사자가 변해서 호랑이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원래부터 사자이고 원래부터 호랑이에요.

이와 같이 천국 백성은 애초부터 천국 백성으로 태어나고 지옥 백성은 처음부터 지옥 백성으로 태어나요.

 

야곱은 야곱으로 에서는 에서로 창조가 된 겁니다.

야곱이 에서가 되고 에서가 야곱 되는 일은 없어요.

예수님에 의해서 각자의 운명으로 갈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 일을 위하여 오셨어요.

 

그러니 가룟 유다는 애초부터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이 된 자입니다.

그 동안 숨겨왔던 본색을 드러나게 하시기 위해서 마귀를 집어넣어 폭로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권세를 주셨어요.

무슨 권세인가 하면 악에 속한 자들을 추수하는 권세에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추수하듯이 마귀도 자기 백성을 추수해요.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속한 백성에게 성령을 주셔서 예수를 믿게 하고 마귀에게 속한 백성에게 악령을 주어서 예수를 배척하게 만들어요.

 

마귀는 하나님께서 허락한 권세로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복음을 핍박하는 자들은 마귀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 마귀는 예수님이 만유가 주가 되는 일에 악당으로서 활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뱀의 후손에 속하여서 이일에 동참하는 것이구요.

 

그래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알고 계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 아시고 제자로 선택했어요.

이스마엘처럼 이삭을 핍박하는 도구로 말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악인도 그 씌움에 합당하게 만들었어요.

 

잠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가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사용하시고 계세요.

그러므로 무당도 하나님이 세웠고!

점쟁이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고!

거짓 선지자도 하나님이 일으켜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가룟 유다를 측은해 하면 안 되어요.

가룟 유다는 모든 인간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가룟 유다와 동일한 인간들이에요.

다만 하나님께서 예수를 파는 일에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러므로 인간의 조건으로 따지면 안 되어요.

예수를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 수 있는 자들이에요.

그런 죄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신을 주셔서 가룟 유다 같은 행동을 못하게 막아주고 계신 것뿐입니다.

성령이 예수를 배반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린 예수 믿는다고 까불면 안 되어요.

예수 믿는 것이 우리 실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다는 것을 감사하셔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따지면 우리도 벌써 예수님을 배도했어야 했어요.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 했어야 했어요.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럼에도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은 모두가 성령이 우리를 간섭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란? 불평하고 원망하고 욕을 하면서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들이에요.

마치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원망하면서 질질 끌려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천국엔 다 질질 끌려서 가요.

 

생명으로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합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가는 길을 찾는 이가 없다고 하셨어요.

반면에 멸망으로 가는 길은 크고 넓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멸망으로 가는 길을 갑니다.

 

그 누구라도 성령이 간섭하지 않으면 모든 인간은 멸망하는 길로 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영생 얻기로 작정한 자들에겐 성령을 보내서 영생으로 가는 좁은 길로 질질 끌고 오게 만든 겁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은 것은 모두가 성령이 질질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우리 실력이 아니에요.

그래서 바울은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믿는 것이 자기 실력인 냥 자긍치 말라는 거예요.

우리도 주께서 붙잡아 주지 않으면 언제 예수를 배도할 줄 몰라요.

 

사람들은 착각하기를 믿음을 자기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 누구도 믿음을 자기가 지켜낼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신이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그건 착각이에요.

우린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본성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우린 예수를 믿는 자가 아니고 죽이는 자에요.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어요.

죄인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이 정상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허물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것은 자기 유익을 위함입니다.

예수 믿어서 덕을 좀 보겠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를 자기 삶에 이용하고자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고 좋아함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싫어함을 당하면 손바닥 뒤집듯이 철회해요.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믿음은 언제든지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혀요.

그러니 이런 믿음은 하나님이 준 믿음이 아니고 우리가 만든 믿음인 겁니다.

믿음이 아니고 자기 각오이고 자기 의지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믿음은 믿음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린 지금까지 수없이 예수를 손바닥 뒤집듯이 믿다가 안 믿다가 했어요.

툭하면 삐치고 수가 틀리면 교회 안 오잖아요.

에이! 나 예수 안 믿을 래 그러잖아요.

우린 예수 믿는 것을 적선 하듯이 믿고 있어요.

교회 다니는 것을 무슨 자원 봉사 하듯이 하고 있어요.

 

예수 믿는 것을 기분 따라 믿고 있어요.

기분 좋으면 간이라도 빼줄 듯이 하다가도 배알이 꼴리면 언제 보았느냐는 식이잖아요.

이게 모두가 자기가 믿음을 행사하기 때문이에요.

이런 믿음은 인간의 믿음이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준 믿음은 내 유익과 상관없이 믿고, 내 믿음은 내 유익에 따라 믿어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우리의 사정과 상관없이 끌고 다녀요.

우리의 기분과 상관없이 믿게 하세요.

예수를 안 믿고 싶어도 안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러니 고난 받아도 믿고!

욕을 먹어도 믿고!

손해를 보아도 믿고!

수치를 당하면서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종교생활은 기분 따라 하는 것이에요.

신앙생활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이끌림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분에 따라 춤을 출 수가 없어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고난 속으로 끌고 다녔어요.

믿음이 가만히 놀고 있게 하지 않았어요.

믿음이 자꾸만 어떤 사건 속으로 밀어 넣어요.

믿음이 내 몸뚱이를 가지고 뭔가 하게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내 몸뚱이 편하게 해 주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았어요.

내 몸 편하게 해 주는 그런 구원은 없어요.

그런 구원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구원관이에요.

 

성경을 보세요.

구원받은 성도가 어디에 자기 몸뚱이 편하게 산 적이 있는가요.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끌고 간다고 그랬잖아요.

끌고 간다는 것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끌려가는 인생이니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겁니다.

 

인생살이뿐만 아니라 천국 가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천국으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구원이 취소 될 수 없는 것도 예수님이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이게 엄청난 행운이면서도 엄청난 불행이에요.

구원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에게 끌려가기 때문에 행운이지만!

반면에 인생살이가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고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끌려가기 때문에 불행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누구로부터 간섭받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왕이 되라고 역사를 해요.

누구로부터 간섭받지 말고 독자적으로 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독자적인 인생으로 살도록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가 하나님의 뜻에 반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자기 힘으로 의를 만들고자 하고 구원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건 자기가 주인인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에게 끌려가지 않고 자기 인생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에겐 예수님의 언약이 등짝에 짊어져 있어요.

성도는 예수님의 운명에 휩싸여서 살아가도록 선택을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이 고난인 겁니다.

 

고난이란? 자기의 원함과 상관없이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난 하기 싫은데 믿음이 자꾸만 밀어붙이기 때문에 고난인 겁니다.

만약에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가면 그건 고난이 아니고 즐거움이에요.

그런데 성도가 가는 길은 베드로처럼 원치 않는 길로 끌려가기 때문에 고난인 겁니다.

원하지 않는 상황들이 자꾸만 발생하기 때문에 싫은 겁니다.

 

그런데 이런 원치 않는 능력이 예수를 믿게 만들어요.

그러니 축복이면서도 불행인 겁니다.

성도는 예수를 안 믿는 것이 불가능해요.

예수를 믿게 하는 능력이 강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예수를 믿도록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믿음이 이끌려 가는 성도의 모습이에요.

그러니 믿음이 이끌면 원치 않는 일들이 발생을 하니 세상살이가 힘이 든 겁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를 믿는 것이지 순종하는 것이 아니에요.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은 아는데 순종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자기가 죄인임을 깊이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성도의 존재 목적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어요.

 

성령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성도를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게 하세요.

자기에겐 의가 없음을 깨닫게 만들어요.

그래서 죄 앞에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시선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걸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고 합니다.

 

구원이란?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 주는 것이에요.

우린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이고 예수님은 피해자세요.

자기가 예수를 죽였다는 것은 성령을 받은 성도만이 알아요.

그러므로 성도는 의인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피해자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 죄를 고발하고 드러내시는 일을 하세요.

우리를 “죄인의 본래의 자리” 로 돌아가게 하여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넌 죄인인데!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았다는 것을 남기고자 함입니다.

우리 몸에 예수님의 용서하심만 담아서 데리고 가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몸으로 가야 천국에서 세세토록 어린 양만 찬양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역설적이게도 순종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불순종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불순종 하라는 말이 아니고 순종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단 말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예수님이 야속하게 느껴져요.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피 뿌리심을 입게 하기 위함이에요.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성도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원함과 상관없이 믿음이 그리스도의 고난 속으로 떠밀려서 살아가게 하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며 하나님과 싸우면서 산 것입니다.

 

착하게 순종했다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어금니 깨물고 악악대면서 살았어요.

하나님을 미워하고 죄를 토해내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원수임을 토설했어요.

그래서 자신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용서하심이라는 것을 알았던 겁니다.

 

그러니 이러한 것이 없다는 것은 믿음이 이끌지 않는다는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방탕과 방임 하면서 산다는 것은 자기 안에 성령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과 상관없이 쾌락을 쫓아가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믿음은 세상과 거스르게 살아가도록 간섭한다는 겁니다.

이건 완벽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삶에 지향성을 말해요.

믿음이 간섭하기 때문에 세상 풍조에 밀려서 떠다니지 못해요.

믿음이 육신의 소욕과 싸우게 하고 세상의 가치와 싸우게 하세요.

싸워서 이긴다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싸우면서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알게 되어요.

싸움에 지면서도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겁니다.

 

넘어지면서 죄의 무서움을 깨닫고!

일어나면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요.

그래서 자신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예수님이 주인으로서 간섭해 주신 것임을 알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고백은 산전수전을 겪어야 나오게 되는 것이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성도는 반드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신앙생활이란? 자기 육신을 방탕과 방임에 내어맡기는 것이 아니고 육신의 소욕과 싸우는 것이에요.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못 이긴다는 것을 알기 위한 싸움이에요.

그러므로 성도는 늘 상한 심령일 수밖에 없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의논해서 우리 인생을 다스리지 않아요.

그냥 일방적이에요.

예수님이 써놓은 시나리오대로 끌고 가세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늘 하나님의 뜻과 우리 뜻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주권을 하나 하나 예수님에게 차압당하는 것입니다.

회수당하는 겁니다.

우리 인생은 원래 예수님 것이에요.

원래 예수님의 인생인데 죄가 우리 인생으로 바꿔놔 버렸어요.

 

구원이란?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주인에게 찾김 받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 성도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성도의 인생에 개입을 하셔서 하나 둘씩 회수해 가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간섭해서 아브라함의 인생으로 차압을 하였듯이 우리 인생을 차압합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간섭하여서 이스라엘로 바꿔치기 하였듯이 우리 인생을 바꿔치기 하세요.

예수님이 사울을 간섭해서 바울로 거듭나게 하듯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세요.

지금도 예수님은 주인으로서 우리 인생을 간섭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룟 유다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의 말로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시고 계신 겁니다.

지금 예수님이 12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하나님의 은혜가 붙잡아 주지 않으면 너희도 가룟 유다처럼 나를 배신할 놈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신앙을 지키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를 통해서 내가 지금 얼마나 큰사랑과 은혜를 입고 있는지를 알아야 해요.

우리가 복음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이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해요.

관념이 아니라 실상으로 말이에요.

입술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음도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의 입술에서 범사가 감사만 되어지는 고백이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에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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