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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77강. 십자가에서 쫓겨난 세상임금 (요 12:27-34)

by coroa 2021. 11. 2.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7강. 십자가에서 쫓겨난 세상임금 (요 12:27-34)

-.정낙원 목사

 

요 12:27-34=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성경은 온통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신가? 알기 위해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배에 물이 들어와서 곧 침몰할 위기에 처합니다.

제자들은 배가 침몰할까봐서 사색이 되어서 물을 퍼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하면 만사형통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럼 예수님과 함께 타고 가는 배가 풍랑을 만났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배를 교회이고 성도의 가정이라고 생각합시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 믿으면 환란이 없다고 배웠습니다.

신앙생활 잘하면 만사형통한다고 배웠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것대로라면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는데 풍랑을 만난 것은 제자들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겁니다.

이 시대 목사들이 예수 믿는 교회와 가정에 어려운 일이나 환란이 닥치면 그것은 다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회복합니까? 라고 물으면 교회에 충성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감사하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의 행함의 문제라고 합니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외치잖아요.

그럼 교인들은 열심과 충성으로 금식하고 철야기도하고 교회에 봉사하는 것으로 동분서주합니다.  

회개라는 것이 고작해야 자기 행실을 뜯어 고치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뭔가 부족한 것이 있으면 부족분을 빨리 채워 놓기에 바쁜 겁니다.



기도가 부족한가!

교회에 충성하지 않아서인가!

주일 성수 안 해서 그런가!

혹 십일조를 떼먹어서 그런 것인가!

 

그래서 안 하던 새벽기도도 하고!

교회 청소도 하고!전도지 나누어준다고 하고!

길거리에서 커피 타주고 붕어빵 구워서 나누어 주면서 집안에 닥친 저주를 빨리 풀고자 마음에도 없는 열심과 충성으로 액땜 하듯이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식으로 말하면 지금 제자들이 지금 그런 꼴을 당한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타고 가는 배가 풍랑으로 파선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하태평하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자기들끼리 어찌 항해를 하려고 하다가 도무지 안 되어서 참다못해서 누군가가 소리칩니다.

 

야~ 예수님 좀 깨워 봐!

그래서 곁에 있던 제자가 주무시는 예수님을 툭툭 치면서 깨웁니다.

예수님 좀 일어나 보세요.

세상에 이 경황에 잠이 옵니까!

비아냥거리며 말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눈을 부비고 일어나십니다.

무슨 일인데!

왜? 자는 사람 깨우고 난리인데! 라고 책망을 합니다.

이를 두고 적반하장이라고 하던가요.

제자들이 기가차서 말도 안 나옵니다.

 

제자들이 퉁명스럽게 아니 태풍 부는게 안 보입니까?배에 물이 들어와서 침몰할 상태라는 것이 안 보이냐구요?

지금 배가 가라앉고 있잖아요.

빨리 물 퍼내는 일을 좀 도우세요! 라고 퉁명스럽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천연덕스럽게 바람을 꾸짖습니다.

야~ 바람아!

이제 그만 불어라!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바다를 삼킬 것 같던 태풍이 순식간에 종용해집니다.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일순간 고요한 정적이 흐릅니다.

 

제자들이 깜짝 놀랍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아니~ 이럴 수가!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그래서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도대체 이 양반 누군데 바람도 말을 듣는가?

 

여기저기서 웅성 거립니다.

도대체 이 분이 누구냐?

누군데 바람이 말을 듣는단 말인가?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주님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누구시길래 바람이 예수님 말을 듣습니까?

 

야~ 이놈들아!

누군 누구야!

내가 바람을 만든 주인이지!

예~에!

 

예수님이 그럽니다.

바람에게 물어 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바람에게 묻습니다.

야~ 바람아!

이 양반이 도대체 누구냐?

누구시길래 너희들이 예수님 말을 다 듣냐?

 

그러자 바람이 대답합니다.

누군 누구냐!

하나님이지!

바람을 만든 창조주이지!

 

그래 너희는 하나님하고 같이 다니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걸 몰랐느냐?

아니 예수님이 하나님인줄도 모르고 따라다녔단 말이냐!

에라이~ 이등신들아!

그래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예수 믿고 있단 말이냐? 

물론 제자들이 바람과 대화하는 것은 제가 유추해서 한 말입니다.

 

지금 바람이 우리보고 묻습니다.

너 예수가 누군지 아느냐?

너는 예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린 여기에 답을 해야 합니다.

 

지금도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도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대부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 예수가 누구신지를 몰라요.

물론 입만 열면 예수를 말해요.

예수라는 말은 다 해요.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예수는 하나님이 증거하는 예수가 아니에요.

인간들이 조합해낸 예수에요.

그러니 자기들 식으로 믿고 판단하는 겁니다.

 

바울은 이런 예수를 “다른 예수” 라고 했어요.

이렇게 되면 예수를 이야기하고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서 옳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처럼 예수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따라 다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믿는 예수가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과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누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어요.

이건 마치 유대인들이 말끝마다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같아요.

유대인들은 다른 하나님을 섬겼어요.

다른 하나님을 믿다가 막상 진짜 하나님이 왔는데 죽여 버렸어요.

 

지금도 이런 일은 반복하여서 일어나고 있어요.

수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진짜 예수를 이단으로 몰아서 죽이고 있어요.

이 시대 교인들은 십자가에 힘없이 죽어가는 예수는 필요가 없어요.

나를 출세시키고 세상을 호령하게 해주는 힘을 주는 예수를 원해요.

 

교권주의자들이 노골적으로 그러잖아요.

제발 십자가! 십자가! 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이젠 십자가를 넘어서서 폼 나게 세상에서 큰소리치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잖아요.

교회 부흥시키고!

출세하고 성공해서 세상에다 봐라! 내가 믿는 예수가 이런 분이다! 라고 보이라고 하잖아요.

 

그 누구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좋아하지 않아요.

십자가에서 피를 닦아 내고 있어요.

십자가를 화려하게 만들어 놓았어요.

피 묻은 십자가는 싫어요.

 

제발 죄인! 죄인!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말하면 얼굴을 찡그리고 재수 없어 해요.

그만큼 다른 예수 관에 푹 젖어 있어요.

 

전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땐 누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 반가워했어요.

우린 한 형제라고 동류의식을 느꼈어요.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난 후엔 이상한 버릇이 생겼어요.

누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 옛날처럼 반갑다 친구야! 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혹시 저 사람이 믿는 예수가 진짜인가 가짜인가 라는 것을 먼저 탐색하게 되어요.

 

왜? 그런가 하면 제가 과거 율법에 특심할 때 가짜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진짜 인줄 알고 믿었어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말이에요.

그것도 수십 년을 말이에요.

 

그래서 저 사람도 혹시 그럴 소지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가 틀렸기를 바라지만 사실로 드러나요.

거의가 다른 예수에요.

제가 율법에 특심할 때 믿던 그 예수에요.

그래서 그 예수는 다른 예수라고 하면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어요.

당신이나 잘 믿으세요! 그래요.

 

우리도 늘 점검해야 해요.

우리 안에선 항상 다른 예수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를 영웅 되게 해 주고 복 주는 예수를 원해요.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고 해서 안심 할 것이 아니고 내가 믿는 그 예수가 하나님이 보낸 예수가 맞는지 아닌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한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유대인들이 “이 인자가 누구냐?” 라는 질문을 하지요.



이 말은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냐? 라는 말입니다.

이 양반이 도대체 누군데 자꾸만 죽는다고 하느냐 입니다.

예수님이 뭔데!

자기가 십자가에 죽으면 자기 백성을 구원한다고 하느냐 에요.

 

유대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메시야(그리스도) 관이 있어요.

유대인들이 아는 그리스도는 죽지 않아요.

그래서 본문에서 율법에는 그리스도가 죽지 않고 영원하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겁니다.

율법 아래선 죽는 그리스도는 가짜에요.

유대인들을 그렇게 믿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스스로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죽는다고 하는 겁니다.

자신이 죽어서 구원을 한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선 예수님의 말씀이 황당할 수 밖에 없어요.

유대인들에겐 엄연히 구원받는 길이 있어요.

율법이라는 것을 통해서 죄사함 받는 길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무리들이 니가 누군데 감히 구원을 하네 마네! 라는 망발을 하냐고 힐난하는 것입니다.

네가 누구관대!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너 때문에 구원을 받느냐!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라고 말하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을 앞에 두고 진짜냐? 가짜냐?

진실게임 논쟁에 휩싸였어요.

 

오늘 설교 서두에 성경은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를 알기 위해서 본다고 했지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계시하셨어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모르면 예수를 모르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이 주는 일을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 그 피로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 주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선언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다 들어가 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에 의미를 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예수님 이야기로 보는 우리들은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 거룩이 예수님의 피로 주어지는지 알아야 해요.

그래야 사도바울처럼 나는 십자가 이외는 전하지 않기로 작정하겠노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요.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일에 자기 인생을 올인 할 수가 있어져요.

 

그렇지 않으면 예수 믿는 것은 하나의 종교 생활로 전락하고 말아요.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안 믿어도 되는 것이 되고 만단 말입니다.

 

그럼 교회 다니는 것이 동호회 모임처럼 시간 나면 참석하는 모임이 되고 말아요.

이 시대 수많은 교인들이 이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예수 믿는다고 해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십자가를 생명처럼 여기지 않아요.

이는 예수가 생명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가 생명이라는 것을 안다면 대충 대충으로 설렁설렁으로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예수를 대충 대충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관념으로 지식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도 십자가 정신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모아집니다.

마치 병에다 참 기름을 넣을 때 병 주둥이에 깔때기를 꽂고 참 기름을 들어부으면 그 깔때기를 통하여서 좁은 병 속으로 참 기름이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 전 성경을 깔때기에 부으면 예수님의 십자가이야기로 드러나요.

성경의 중심 사상이 예수님 십자가에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예수님 피로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한다고 했지요.

만물이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잖아요.

이건 주님이 오실 때까지 잊지 말아야 해요.

 

그렇다면 피조 세계의 역사는 창세전 언약이 길게 늘어져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 예수님의 십자가잖아요.

그렇다면 십자가가 인류의 전 역사를 그림자처럼 길게 들어 누워있는 것입니다.

 

쉽게 비유로 설명합니다.



십자가가 이렇게 서 있어요.

그 위에 예수님이 달렸어요.

그런데 그 십자가를 이쪽에서 빛으로 비춥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서 비춰지겠지요.

그 길게 늘어진 십자가의 그림자가 바로 역사에요.

 

그러니 어느 시대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일들이 담겨져 있는 겁니다.

이렇게 비유합니다.

역사를 기다란 생선으로 비유합시다.

기다란 제주산 갈치로 비유합시다.

 

마트에서 갈치를 사면 토막 토막 내서 손질을 해 주지요.

원래 한 마리인데 토막 토막을 내서 구워 먹잖아요.

토막 토막마다 갈치 맛이 나지요.

어느 토막을 먹어도 갈치 맛이 나요.

 

그럼 역사를 갈치처럼 토막 토막을 내 봅시다.

흔히 세대주의자들처럼 역사를 시대별로 나누어 봅시다.

전 편의상 인물 중심으로 나눕니다.

 

아담 시대!

아벨 시대!

에녹 시대!

노아 시대!

아브라함 시대!

이스라엘 시대!

예수님 초림 시대!

예수님 재림 시대!

아담부터 예수님이 재림하는 시대가 역사잖아요.

 

그럼 아담 시대도 창세전 언약이 담겨 있고!

에녹시대도 담겨 있고!

노아 시대도 담겨 있고!

아브라함 시대도 담겨 있고!

이스라엘 시대도 담겨 있고!

예수님 초림 시대도 담겨 있고!

예수님 재림 때에도 담겨 있겠지요.

마치 토막 난 갈치처럼 어느 시대고 창세전 언약 맛이 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역사는 어느 시대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는 일들이 담겨져 있는 겁니다.

이건 어떤 사건이나 한 인물 속에도 담겨져 있어요.

저와 여러분에게도 십자가 사건은 담겨져 있어요.

 

성령이 오면 이 사실이 믿어지고 깨달아져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창세기의 아담에서부터 장차 예수님이 재림 하시는 그날까지의 전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끄집어내게 되는 겁니다.

성경으로 말하면 그 어떤 성경 속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미가 증거 된단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일어났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맥(脈)은 온 인류 전체를 유유히 흘러 왔어요.

구약에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미를 담은 사건들이 일어났어요.

이걸 선취적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브라함도 내 때를 보고 즐거워했다고 한 겁니다.

다윗도 주를 보고 기뻐했어요.

그러니 영적으로 십자가의 사건적 의미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어느 시대나 죄에서 구원 받는 이야기들은 있어 온 겁니다.

특히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미리 살았어요.

그리스도의 고난에 선취적으로 동참하였어요.

 

베드로의 증거를 봅시다.

 

벧전 1:10-11=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성령이 그들로 하여금 장차 그리스도가 받을 고난을 맛보게 하였다고 하지요.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리스도의 약속에 참예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증거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어느 시대나 구원은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에요.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로만 나타나요.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토록 하셨어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초지일관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를 펴도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이 창세전 언약을 바탕으로 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성경을 기록케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 이방인들이 제자들에게 찾아와서 예수님을 좀 만나게 해 달라고 청을 넣었잖아요.

이때 만약에 이방인들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물었다면 제자들이 어떻게 대답해 주었을까요?

자기들이 아는 것으로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라고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자그마치 3년 동안 동거 동락했어요.

예수님을 너무도 잘 알아요.

육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성질에서부터 습관까지 세세하게 다 알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앎이 허구였음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다고 할 때 다 드러났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일이 발생하자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갔어요.

이는 제자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어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말에 의미를 몰랐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속에 자신들이 영생이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것을 몰랐어요.

그러니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일이 발생하자 다 도망을 친 겁니다.

 

자칭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면전에 두고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잖아요.

베드로의 이런 행동은 모든 제자들의 행동과 같아요.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거예요.

이렇게 되면 결국 베드로의 모습은 곧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는 겁니다.

베드로의 모습 속엔 모든 인간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어요.

 

그렇다면 제자들이 아는 예수님은 다 가짜란 말입니다.

육적으로 안 것이라는 것이 드러나지요.

십자가를 지식으로 안 것이 드러나지요.

그러니 죽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다 도망을 간 겁니다.



지금도 지식으로 알면 동일한 모습으로 드러나요. 

이 시대 교인들에게 예수를 물어보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빠삭해요.

지식적으로는 너무도 잘 알아요.



십자가니!

부활이니!

재림이니!

천국이니!

줄 줄줄 꿰어요.

 

그런데 그 십자가는 남의 십자가에요.

예수와 남남이에요.

그냥 책속에 예수이지 자기의 예수가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산다는 진짜 십자가를 말하면 다 싫어하는 것입니다.

입술로 예수 믿는 것으로 판단한다면 아마도 세계 최고이고 제일일 겁니다.

그러나 막상 그 속에 예수가 있는가 들여다보면 없어요.  

빈 깡통이에요.

그러니 개구리처럼 소리만 요란한 겁니다.



이는 예수를 입으로만 믿었지 가슴으로 믿지 않아서 그래요.

예수가 머릿속에만 있지 가슴 속에는 없어요.

예수가 가슴에 없으니 몸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삶으로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피 때문에 거룩하고 흠이 없어졌다는 것이 없어요.

그러니 신앙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피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찌르면 예수님 의가 나와야 하는데!

찌르면 예수님 의가 안 나오고 자기 의가 나와요.

자기 행함이 나오는 겁니다.



자기가 한 일은 줄 줄줄 나오는데 예수님이 하신 일은 자랑되어지지 않아요.

이게 모두가 자기 안에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음이 없기 때문인 겁니다. 

그러니 제자들처럼 이 분이 도대체 뉘길래? 라는 의문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면!

그래 십자가가 도대체 뭔데?

뭐 길래! 십자가만 말하느냐고 신경질을 내는 겁니다.

자기도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 왜? 십자가만을 말하느냐고 짜증을 내는 겁니다.

이는 십자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물음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아버지여 나 좀 살려 주면 안 됩니까?

나 십자가 안지면 안 됩니까?

그러면서 선문답하듯이 스스로의 물음에 답을 합니다.

 

본문 내용을 표준 새 번역본을 보면 조금 더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아서 인용합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라고 말할까? 아니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이 때에 왔잖아! 그러니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본문을 직역하면 이런 내용이에요.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십자가 안지면 안 됩니까? 물어 놓고!

아니지!

내가 이 십자가를 지려고 왔지!

아버지가 나를 십자가에 죽으라고 보내셨지!

그래 죽어야해!

내가 십자가에 죽는 것이 아버지 뜻이잖아!

그러니 죽자 죽어!

 

그리고는 아버지여 알았습니다.

내가 죽을게요!

아버지 뜻대로 죽을게요!

그러니 아버지 영광 받으세요!

 

그러자 하나님이 그래 고맙다!

네가 그렇게 십자가에 죽어 준다고 하니 내가 기분이 좋구나!

그래 잘 죽어라!

네가 십자가에 죽으면 네 새끼들을 전부 다 너에게로 이끌어 줄께!

내가 한 놈도 빠지지 않고 다 천국으로 이끌어 올려주겠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독백에 어떤 거부 할 수 없는 운명을 보는 것 같지요.

거부하고 싶으나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느껴지지요.

예수님하고 십자가는 마치 부메랑처럼 멀리 도망갔다가도 다시 원 위치로 돌아 올 수밖에 없는 운명과 같지요.

 

이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신경질을 냅니다.

아니~ 니가 뭔데?

그래 니가 뭔데?

죽으면 사람들을 하늘로 끌어당긴단 말이냐?

말 같지 않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에요.

 

오늘 본문은 어찌 보면 성경전체를 축약하고 있는 내용이에요.

창세전 언약에서부터 그 성취까지가 다 포함되어 있어요.

성경을 한 단원으로 말하면 오늘 본문이에요.

 

그럼 오늘 본문을 탐사해 봅시다.

먼저 예수님의 기도를 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의 제물로 죽을 때가 가까워 옵니다.

 

예수님의 심정은 마치 사형 집행날짜를 앞두고 있는 사형수와 같아요.

겟세마네의 기도를 보세요.

귓전에 죽음이 다가오는 시계 소리가 들려옵니다.

 

입은 바짝 바짝 타 들어가고!

온 몸엔 식은땀이 비 오듯 흐릅니다!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정신은 몽롱해 가고!

어찌 할 바를 모릅니다.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있으므로 인간이 당하는 아픔을 다 당하셨어요.

인간들이 겪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다 겪었어요.,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겁니다.

 

아버지여! 나를 좀 구원해 주세요.

죽지 않게 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죽음에 쫓기는 모든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이걸 체휼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예수님의 마음을 다스려 주십니다.

아니지!

내가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온 목적이 십자가에 죽으러 온 것이지!

내가 이 일을 하려고 왔잖아!

내가 죽어야지 내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지!

그러니 마음 약해지지 말고 단단히 먹고 정신 차리자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예수님의 기도를 가만히 들어보면 아버지와 아들 간에 미리 약속이 된 것을 볼 수가 있지요.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라고 하잖아요.

이미 십자가를 지기로 약속하고 지금 왔다고 하지요.


이는 곧 미리 약속된 일이란 말입니다. 

이런 약속이 언제 이루어졌나요?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창세전에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에베소서를 봅시다.

 

엡 1: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창세전이란?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있기 전에 이미 아버지와 아들 간에 약속을 한 겁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아들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이 구속 곧 죄사함 받기로 한 약속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참 의미심장한 언약이지요.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 자기백성을 살려 낸다는 시나리오를 쓴 겁니다.

 

창세전 언약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정점(頂點)으로 하고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세운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의 십자가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겁니다.

십자가는 마치 모든 것을 흡입하는 블랙홀과 같아요.

 

창세전 언약을 근거해서 만물을 만듭니다.

저와 여러분을 만듭니다.

마귀도 만들고 천사도 만듭니다.

선악과도 만들고 생명과도 만듭니다.

아담도 만들고 뱀도 만듭니다.

 

가인도 만들고 아벨도 만듭니다.

에서도 만들고 야곱도 만듭니다.

아브라함도 만들고 다른 사람들도 만듭니다.

이스라엘도 만들고 이방인도 만듭니다.

예수 믿을 사람도 만들고 안 믿을 사람도 만듭니다.

 

이 모두가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에 의해서 만들어졌어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거룩함을 입을 백성도 필요하고 입지 못할 백성도 필요해요.

즉 구원 받을 사람도 있고 저주 받을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가룟 유다도 필요하고!

바라바도 필요하고!

빌라도도 필요하고!

로마 군병도 필요하고!

모든 셋트를 완벽하게 만들었어요.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시나리오를 보면 런닝타임이 7천년입니다.

7일 만에 창조를 했잖아요.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했으니 이 원리로 7천년이라고 합니다.

7천년이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이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 시간에 맞추어서 아들에 피로 자기 백성들이 구속 받는 일들을 찍어냅니다.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에 의하면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같이 이 때에 오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에 맞추어서 십자가에 죽기로 되어 있어요.

유월절 어린 양이 죽는 시간에 맞추어서 진행이 착착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다는 것이 뭡니까?

십자가에 죽는 겁니다.

죽어서 자기 피로 자기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백성들을 대신해서 죽는단 말입니다.

 

그 때가 지금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마음은 죽기 싫지만 아버지와의 창세전에 언약을 그렇게 했기 때문에 지금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대본에 지금 죽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은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감독이신 아버지에게!

자~ 언약대로 갑시다!

내가 시나리오대로 죽을 테니!

아버지가 멋진 그림을 담아내세요!

 

그러자 하늘에서 아버지가 오케이~

자! 스텐 바이!

천사들에게 야~ 빨리 빨리 준비시켜!

뭐하고 있어!

지금 예수가 대본대로 가자고 하잖아!

십자가에 죽겠다고 하잖아!

그러니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상황을 빨리 만들어!

거기 필요한 사람들을 준비시켜!

 

천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마귀도 움직입니다.

빌라도도 준비시키고!

대 제사장도 준비시키고!

군중들도 준비시키고!

이런 이야기가 하나님과 예수님 간에 오고 갔어요.

 

곁에 선 무리들은 뭔가 소리가 들리긴 들렸는데 그 소리가 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주변에 있누 무리들에게 너희들 하늘에서 나는 소리 들었지!

무리들이 천둥이 쳤나?

 

예수님이 그럽니다.

이제 세상 임금이 쫓겨날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으면 그 땐 세상이 바뀔 것이다!

그럼 내가 너희를 하늘로 이끌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은 둘러선 무리들에게는 미친 소리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누군데 그런 헛소리를 하느냐? 라고 타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리들이 우리가 알기로는 그리스도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분이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신은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왜? 죽는다고 하느냐?

그래서 도대체 이 인자가 누구냐? 라고 묻는 겁니다.

 

우리가 살펴 볼 것은 왜? 인자가 들려야 하느냐? 에요.

즉 그리스도가 왜? 힘없이 죽어야 하느냐? 입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왜?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자기백성들을 십자가로 끌어당기느냐 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함은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기쁨이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구원의 비밀이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도는 구원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인자가 땅에서 들린다는 것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어떤 의미에서 들리는지 앞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해 주셨어요.

 

요한복음 3:13-15절입니다.

 

요 3:13-15=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내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것은 모세가 광야에서 놋 뱀을 든 것처럼 들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 때 불 뱀 사건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동일시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 뱀에 물려서 죽어갈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죽음을 구약의 놋 뱀 사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놋 뱀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모형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놋 뱀 사건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미리 말해준 것입니다.

 

그럼 놋 뱀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살펴봅시다.

 

민수기 21:4-9절입니다.

 

민 21:1-9= “남방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 곧 아랏의 왕이 이스라엘이 아다림 길로 온다 함을 듣고 이스라엘을 쳐서 그 중 몇 사람을 사로 잡은지라 2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만일 이 백성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리이다 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붙이시매 그들과 그 성읍을 다 멸하니라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 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여 가나안으로 향하는 길목입니다.

이제 가나안 접경 지역에 다다릅니다.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정탐꾼들을 보내서 가나안 땅을 정탐도 했습니다.

이제 들어갈 때가 다 되었다고 생각이 드는 때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접경 남쪽 지역에 거주하는 아랏이라는 부족의 왕이 이스라엘이 온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서 못 들어오게 막아 버립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 몇 명을 포로로 붙잡아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선 그냥 들어가면 되는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모세로부터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넣어 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쑥 들어가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예기치 않는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기골이 장대한 놈들이 떡하니 버티고 서서 못 들어오게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대성통곡을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진정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저 몹쓸 놈들을 다 쓸어버리게 해 주소서!

저 싸기지 없는 놈들은 우리 손으로 죽여 버리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아랏 놈들을 이스라엘 손에 붙여 줍니다.

그래서 그들의 성읍을 불태워버립니다.

성읍을 불태우면서 봤지!

이 놈들아! 우리가 보통 사람들이 아니야!

우린 하나님의 군사들이야! 라고 기고만장 합니다.

이제 가나안 깊숙이 들어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이 때가 언젠가 하면 가나안 땅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요.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정상적인 경우라면 그래요.

 

예를 들어서 서울이 가나안이라고 한다면 부산에서 시작하여서 서울시 경계 지역인 과천 정도까지 간 겁니다.

이제 산 하나만 넘으면 서울에 입성해요.

 

그런데 갑자기 모세가 기수(旗手)를 다시 부산 쪽으로 틀어버리는 겁니다.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후퇴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백성들이 뿔따구가 나는 겁니다.

아니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뭐하는 거냐고 불평하면서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군중심리는 불 붙기가 어렵지 한번 붙었다 하면 들풀처럼 사납게 번지잖아요.

한쪽에서 이건 아니지! 라고 웅성거리면서 원망하기 시작하자 금새 온 백성들이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이 염병처럼 이스라엘 전역으로 붙어버린 겁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지나온 광야 길을 걸어오면서 당해 왔던 설움들을 다 토해내는 겁니다.

 

하나님이면 다냐!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

언제 먹을 것 제대로 주었느냐!

마실 것을 제대로 주었느냐!

이젠 만나 먹는 것도 지겹다!

코에서 만나 냄새가 난다!

그 동안 쌓였던 불평과 원망이라는 앙금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겁니다.

폭동이 일어날 것 같아집니다.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죽을 고생 고생하면서 이제 가나안까지 다 왔어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젠 가나안에 넣어 주어야지요.

가나안 접경까지 왔으면 하루라도 빨리 들어가게 해 주어야지요.

 

그런데 가나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고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라니요!

이게 말이 되느냐! 에요.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이겐 아니에요.

그래서 우린 못 가겠다고 농성을 하면서 땡깡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 놈에 자슥들이 어디다가 말대꾸를 하고 덤비느냐고 불 뱀을 보내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놈들을 모조리 물어 죽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저기서 불 뱀에 물려서 죽어 나가자빠집니다.

데모를 하다가 사람이 죽어 나가자빠지는 것을 보니 겁이 덜컹 나는 겁니다.

 

불 뱀에 물린 놈들은 독(毒)이 온 몸으로 펴져 나갑니다.

고열이 나고 두통이 생기고 금방 죽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잘못 했다고 싹싹 빌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잘못했으니 제발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기도 좀 해 달라고 합니다.

 

이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놋으로 뱀의 모양을 만들어서 큰 장대에다 매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누구든지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산다고 소리칩니다.

 

그러자 모세의 말을 믿고 쳐다 본 사람은 다 살아납니다.

하지만 농담으로 여기고 쳐다보지 않는 자는 다 죽었어요.

쳐다 본 사람은 믿음으로 쳐다보았고!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인간의 상식으로 쳐다보지 않았어요.

 

아니 뱀에 물렸으면 빨리 해독제를 먹인다거나 독을 제거하는 처방을 해야지!

무슨 놈에 장대에 놋 뱀을 만들어서 쳐다보면 산다고 하느냐 에요.

이건 믿음이 없으면 순종할 수 없는 일이에요.

 

모세의 행동을 이성으로 판단한 사람들은 놋 뱀을 쳐다보지 않았어요.

반면에 믿음으로 받은 사람은 쳐다보았어요.

결국 장대에 달린 놋 뱀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갈라내기 위한 조치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이와 같아요.

바울이 그랬지요.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겐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멸망 받을 자들에겐 미련한 것이라고!

 

유대인들의 상식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자신들의 구원에 능력이 나온다는 것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요.

유대인들의 눈엔 어리석어 보여요.

유대인들은 율법 지켜서 구원 받는다고 믿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는 어리석어 보이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 어리석은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면 죄인이 죄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모세 시대 때 놋 뱀이 장대에 달려서 뱀에 물린 사람들을 살려냈듯이!

지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살려 낸다고 하고 있는 겁니다.

 

놋 뱀 사건은 하나님께서 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참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대답해 보세요.

 

불 뱀을 누가 보냈습니까?

하나님이 보냈지요.

왜? 보냈습니까?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는 놈들을 죽이려고 보냈지요.

 

그래놓고선 하나님께 원망하는 죄인들을 물어 죽이는 불 뱀을 잡아서 장대에 달라고 합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아니 달려면 원망하는 놈들을 달아야 하잖아요.

왜냐하면! 불 뱀을 원망하는 놈들을 죽이라고 보낸 것이니까요.

 

그럼 원망하는 놈들을 물어서 죽인 불 뱀에게 상(賞)을 주어야지요?

불 뱀을 잡을 것이 아니고 불평하는 놈들을 죽여야지요.

그런데 불 뱀을 죽이고 있어요.

 

장대에 놋 뱀을 단다는 것은 뱀을 심판하는 행위에요.

놋이란 심판성을 의미하고 있어요.

성막의 뜰에 보면 제물을 태우는 번제단이 있는데 이 번제단이 놋으로 만들었어요.

제물을 불에 태운다는 것은 심판한다는 의미에요.

 

그러니 불 뱀을 놋으로 만들어서 장대에 단다는 것은 불 뱀을 심판한다는 의미입니다.

불 뱀을 왜? 심판 합니까?

이 놈이 나쁜 놈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게 한 원흉이 바로 불 뱀이란 말입니다.

 

그럼 불 뱀은 곧 이스라엘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우리 속에 불 뱀이 있는 겁니다.

우리 속에 죄가 바로 불 뱀이에요.

마귀가 불 뱀이에요.

요 놈에 죄라는 불 뱀이 우리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들어요.

 

그러므로 불 뱀은 죄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마귀의 상징이기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마귀를 죽인 겁니다.

죄를 없앤 겁니다.

 

그래서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라고 하는 겁니다.

봐라! 이 놈이 바로 너희를 죄 짓게 하는 놈이다!

이 놈이 바로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든 놈이다! 라고 알려주는 겁니다.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저주로 몰아넣는 뱀을 죽였다는 겁니다.

불 뱀의 죽음은 곧 나의 죽임이에요.

나 대신 불 뱀이 죽는 겁니다.

 

그러므로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본다는 것은 곧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놈이 바로 죄이구나!

마귀가 바로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들었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원망케 하고 불평케 한 마귀를 죽이셨구나! 를 알아야 해요.

 

자 이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적용해 봅시다.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십니까?

자기 백성들의 죄 때문이지요.

우리 죄를 대신 예수님이 짊어지고 죽는 거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불 뱀처럼 죽임 당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왜? 십자가에 다십니까?

우리 죄를 죽이고자 죽이는 거지요.

예수님이 짊어진 죄는 누구에게서 나온 겁니까?

우리에게서 나온 거지요.

그럼 예수님이 우리 대신 불 뱀처럼 죽는 것이 되지요.

이해되시지요.

 

예수님의 죽음 속엔 우리의 죽음도 들어 있고 마귀의 죽음도 들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예수님에게 전가 시켜서 죽이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우리의 죽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안고 죽으신 겁니다.

 

이걸 창세기 3장에선 뱀의 머리를 깨트린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뱀의 머리통을 깨트린 거예요.

어떻게 깨트리는가 하면 예수님이 뱀을 안고 자폭해 버린 겁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지요.

뭘 지고 간다고 합니까?

세상 죄이지요.

그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세상 죄를 지고 간 것이지요.

예수님 혼자 죽은 것이 아니고 세상 죄와 함께 죽은 겁니다.

 

바울의 증거를 들어 봅시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았다고 하지요.

저주를 받았어요.

저주!

이걸 잊지 마세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저주 한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옴팡 뒤집어쓰고 저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휴머니즘으로 접근하면 안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시간에 꼴도 보기 싫다고 흑암으로 얼굴을 가린 겁니다.

 

예전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란 영화를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고난 받는 장면을 리얼하게 표현을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휴머니즘으로 접근해서 측은해 하고 있어요.

안타까워하고 눈물을 흘렸어요.

어휴~ 저걸 어째!

참 안 됐다!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눈물을 흘려요.

이건 십자가를 감상주의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물론 인간의 측은지심으로 보면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언약적 차원에서 보면 눈물이 아니라 경악을 해야 해요.

야~ 하나님이 죄를 저렇게 미워하시는구나! 를 알아야 해요.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저렇게 처리 하셨구나! 를 알아야 해요.

내가 저렇게 저주 받아야 할 놈이구나! 를 알아야 해요.

내 죄가 저런 것인데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셨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에 의미가 훼손당하지 못하게 하여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의미를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것에 다른 것이 섞이지 않게 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미를 보존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너희 눈앞에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떤 놈들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느냐 라고 눈에 쌍심지를 키고 덤비지요.

왜? 그러겠어요.

인간의 행함으로 예수님의 피를 훼손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는 놈은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한 겁니다.

 

이사야 53장에 뭐라고 합니까?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하잖아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우리 죄악을 다 담당시키셨다고 하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내 죄를 지고 죽은 것이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내 죄에 대한 저주를 예수님에게 대신 받게 하셨잖아요.

맞아요.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우리 죄를 죽인 겁니다.

마귀를 죽였어요.

예수님이 마귀를 안고 자폭한 거라고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첫째로는 마귀를 없이한 것이고!

둘째로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기 백성들 대신 불 뱀을 잡아서 장대에 달라고 한 것입니다.

요 놈에 뱀이 자기 백성들 속에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게 한다고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일부러 원망하고 불평하는 환경을 만들어서 그들 속에 있는 뱀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신 겁니다.

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멀쩡히 잘 가던 길을 돌이켜서 다시 후퇴하게 만든 거예요.

그 지긋 지긋한 광야로 다시 내 모는 겁니다.

광야로 내 몰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자기들을 사로잡고 있는 놈이 바로 뱀(마귀, 죄)이라는 걸 알게 하신 겁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어려운 일을 당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든 겁니다.

우리 속에 뱀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뱀(마귀, 죄)이 자기들 속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도록 역사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바로 뱀이구나! 를 알게 하세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독사 새끼라고 하지요.

그럼 우리도 독사 새끼에요.

바리새인은 자신들이 독사새끼인줄 모르고!

우리는 내가 독사새끼라는 것을 알아요.

 

이게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에요.

자신이 독사새끼인줄 아는 사람은 신자이고 모르는 사람은 불신자에요.

자신이 독사새끼라는 것을 알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안에 있는 독사를 죽인 것에 감사가 나와요.

십자가를 볼 때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있는 독사와 함께 죽으셨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다시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려 주셨구나 를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제 내 주인이 마귀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마귀에게 빌빌거리면 안 되어요.

마귀가 그 어떤 것으로 우리를 참소하여도 우리 죄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도말 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단 말입니다.

더 이상 죄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단 말입니다.

 

우린 비록 몸뚱이는 죄를 이기지 못하고 살지만 예수 안에 있어요.

예수 안엔 정죄함이 없어요.

우리에겐 예수님의 피가 발려져 있어요.

예수님의 피가 죄를 가려놓았어요.

그러므로 죄와 상관없는 자로 살게 되는 겁니다.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고 죄를 지어도 정죄 당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놋 뱀을 쳐다보았다는 것은 단순하게 쳐다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을 장악하고 있는 놈이 마귀란 것을 안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어야 해요.

나를 장악하고 있는 마귀를 하나님이 죽였구나! 라는 것도 알아야 제대로 놋 뱀을 쳐다본 것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장악하고 있는 놈이 마귀란 것을 알고!

그 마귀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여 주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마귀는 죄를 주관하는 놈이잖아요.

그럼 나를 주관하던 마귀가 죽었으니 죄도 죽은 것이 되지요.

 

그래서 세상 임금이 쫓겨난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장악하는 마귀를 죽였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이 사실을 믿는 성도라면 마귀를 두려워 할 이유가 없겠지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살겠지요.

마귀가 더 이상 자기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지요.

 

이걸 믿는 것이 믿음이에요.

이런 믿음으로 사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믿음 속에는 이 두 사실이 담겨져 있어요.

나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마귀의 권세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 뱀이 누구를 물었습니까?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들을 물었지요.

원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는 자들은 물지 않았어요.

그럼 하나님께서 놋 뱀을 장대에 달게 한 것은 누구를 살리기 위함입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놈들을 살리기 위해서이지요.

 

쉬운 말로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지요.

우리가 바로 그런 놈이에요.

우린 지금까지 하나님을 원망하고 살아왔어요.

물론 앞으로도 그럴거구요.

 

그럼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누가 쳐다보겠습니까?

불 뱀에 물린 사람이지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겠지요.

불 뱀에 물리지 않은 놈들은 쳐다보지 않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누가 믿느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가 믿어요.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는 자는 예수 안 믿어요.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자라는 것을 아는 자가 성령을 받은 성도에요.

천국엔 자신이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자가 가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이 되려면 먼저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먼저 죄를 들추어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미워하도록 만들어요.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들추어내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어요.

원망하는 것이 정상이에요.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죄인인 겁니다.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고 천국에 가야 세세토록 어린양에게 찬양을 돌리게 되어요.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한 자라고 하면 천국에 가면 꼴값을 떨어요.

잘난 척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인간들 자랑이 난무하는 곳이 되어요.

 

천국은 은혜의 나라에요.

은혜가 은혜로 남으려면 인간의 자랑거리가 없어야 해요.

자신은 천국에 올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이 천국에 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 갈 백성들의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끄집어내는가 하면 우리의 생각대로 살아지지 않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러지요.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갈 것이라고 하지요.

이건 예수님이 소 고삐 잡듯이 잡고 끌고 다닌단 말입니다.

 

왜? 고삐를 잡고 갈까요.

우리가 가기 싫어하는 길로 데리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린 질질 끌려가면서 악악대는 겁니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처럼 가나안 땅에 다 가 놓고선 되돌리는 일들을 벌리는 겁니다.

멀쩡히 가나안 땅을 다 정탐케 해 놓고 못 들어가게 하는 겁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잘 살아보려고 하는데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 환장하는 거예요.

 

고생 끝!

행복 시작 하려고 하는데!

누가 행복 시작이래?

 

행복은 무슨 놈에 행복이야!

다시 원위치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 팔짝 뛰지요.

 

성도의 일생이 이와 같아요.

하나님은 우리 원대로 살아지지 못하게 하세요.

그 이유는 우리 안에 불 뱀을 끄집어 내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서 하나님을 미워하는 죄를 끄집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천국에 갈 놈이 아니고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할 놈이라는 것을 알게 만들어요.

이런 인간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임을 깨닫도록 하시는 겁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만들어요.

 

그래서 신앙이 깊어질수록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예~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말을 하는데!

이건 하루아침에 고백되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말이 줄어들어요.

 

옛날엔 사소한 일만 닥쳐도 댕댕 거렸는데 말씀 속에서 잠기다 보면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되어요.

식은 밥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하고!

더운 밥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하고!

유구무언(有口無言)이 되어요.

 

사도바울이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을 처음부터 하지 않았어요.

죽을 때 했어요.

그만큼 살아오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알아간 것입니다.

그러니 점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죽어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기에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저에게 적용하면 저는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고 나면 본능적으로 불평이 나와요.

에이~ 씨! 한다구요.

 

그래서 야~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요.

나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는 놈이란 것을 알게 되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다 육신을 편하게 해 주니 그렇지 조금만 자기 육신을 힘들게 하면 본능적으로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와요.

 

이게 깨달아지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겐 없어서는 안 될 복음이 되는 겁니다.

야~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서 저주를 담당해 주시지 않았으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러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면 세상 임금이 쫓겨난다고 하지요.

세상 임금이 누굽니까?

마귀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귀를 죽였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을 때 혼자 죽지 않고 자기 백성들과 함께 죽었지요.

나도 죽고!

마귀도 죽었어요.

 

그러므로 성도는 마귀의 권세 아래 있지 않는 겁니다.

마귀가 성도의 운명을 좌우하지 못해요.

성도는 예수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죽이고 살리는 권세는 예수님에게 있어요.

그래서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죽이고 지옥 불에 놓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신 겁니다.

 

성도는 지옥에 가고 싶어도 못가요.

예수님이 안 넣어 줘요.

실수로 지옥에 가 있어도 예수님이 찾아내요.

야~ 임마 너 왜? 여기 있어!

빨리 나와!

그런다구요.

기어코 천국에 넣어 주세요.

 

이게 성도의 운명이에요.

왜냐하면! 성도의 운명을 예수님이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성도를 다스리던 세상 임금을 쫓아냈기 때문입니다.

 

이걸 로마서에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시켰다고 합니다.

해방시켰다는 것은 권세로부터 벗어나게 했다는 말입니다.

이젠 성령의 법이 지배합니다.

성령이 이걸 믿어지게 하세요.

 

마지막으로 이것 하나만 살펴보고 마칩시다.

왜? 예수님이 땅에서 들리면 하늘로 이끄는지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이는 곧 영역의 이동을 상징합니다.

땅은 어둠이고 죽음의 세계이고!

하늘은 빛이고 생명의 세계에요.

 

땅은 지옥이고 하늘은 천국이에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달려 있는 십자가가 천국이 되고 그 밑에서 조롱하던 자들은 지옥에 있는 것이 되지요.

 

그래요.

십자가가 천국이에요.

세상에서 보면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지만!

하나님 쪽에서 보면 십자가는 죽음을 넘어간 안식의 세계에요.

 

십자가는 육적으로는 고난이에요.

하지만 영적으로는 안식이에요.

십자가 안에 있으면 평온해요.

 

세상 것으로 휘둘리지 않아요.

십자가 안에 있으면 자족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요.

왜냐하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살면 유리바다처럼 마음에 평온함으로 살아가요.

십자가 안은 유리바다처럼 폭풍우가 없고 고요해요.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산다고 한 겁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말이에요.

 

그러므로 우리 마음은 십자가 정신을 담고 있어야 하는 겁니다.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겨쌈을 당하여도 낙심치 않고!

세상에서 만물의 찌기같이 무시당하여도 실망치 않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지 않고!

핍박을 받아도 요동치 않아져요.

 

마음이 넉넉해진단 말입니다.

누가 이단이라고 해도 그냥 씩 웃고 말아져요.

세상을 살아가는 여유로움이 생겨요.

풍부에 처하든지 비천에 처하든지 감사가 되어요.

자족하는 마음들이 생긴단 말입니다.

늘 여일(如一)하진 않지만 성령께서 간섭을 하실 땐 넉넉해 진다구요.

 

십자가 안에서 보면 인생 별거 아니에요.

그러니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이 없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끝난 이긴 경기를 비디오로 보는 것과 같이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승리한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요동치 말고 담대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좀 마음이 넉넉하게 사세요.

힘들다고 악악거리지 말고!

없다고 댕댕거리지 말고!

좀 담대하세요.

 

우린 모든 것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환경에서라도 믿음으로 그냥 까짓것 하면서 사세요.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우리의 운명은 변하지 않아요.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아요.

그러니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로 사세요.

곧 주님이 오십니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 마음속에 풍랑이 일어도 흔들리지 않는 유리바다가 이루어지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세상 임금을 쫓아 낸 것이 믿어지게 하옵소서. 더 이상 마귀에게 휘둘리지 말고 예수님께서 이겨주심을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게 하옵소서. 십자가 안에서 안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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