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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64강. 어미를 잡아먹고 사는 자들 (창 35:21-29)

by coroa 2021. 8. 24.

 

 

64강. 어미를 잡아먹고 사는 자들 (창 35:21-29)

-.정낙원 목사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난해한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보면 본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과 같은 이야기가 삽입이 되어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중간에 삽입이 되어 있을까?

의문이 뜰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보면 스토리 전개상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늘 성경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 도가 멸망을 받을 자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성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 십자가 도가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일까요?

이는 하나님께로 난 자들에게만 구원의 능력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십자가 도는 구원 얻을 백성들에게만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비밀인 것입니다.



알다시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다는 것은 성경의 저자는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성경 속의 이야기는 성령께서 편집을 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뜬금없어 보이지만 그 사건이 꼭 거기에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 자리에 편집을 해 놓으신 것입니다.



제가 블로그에 글을 쓸 때 보면 처음에는 깨달아지는 대로 씁니다.

그리고 나중에 교정을 하면서 첨삭을 하고 또한 앞에 내용을 뒤에 넣고 뒤에 내용은 앞으로 당기는 식으로 편집을 합니다.



성경 이야기도 성령께서 편집을 해 놓으셨습니다.

누구 이야기로 편집을 해 놓으셨는가 하면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신약의 사 복음서 같은 경우에는 동일한 내용인데도 복음서마다 순서적으로 다릅니다.

동일한 사건인데 어느 곳에서는 앞에 있고 어느 곳에서는 뒤에 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사 복음서 자체가 대상이 다르고 그 사건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영적인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구속사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창세기 35장은 야곱의 일생을 마감하는 장입니다.

알다시피 야곱은 얍복강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야곱으로 살아 왔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으로 야곱은 20년 후에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그 장소인 벧엘로 돌아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너를 야곱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다고 하십니다.



야곱은 옛 이름이고 이스라엘은 새 이름입니다.

이름이란? 부모가 지어주는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육적인 부모인 이삭이 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영적인 부모인 하나님이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벧엘로 귀환한 야곱은 이스라엘로 부르겠다고 하는 것은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야곱의 부모가 되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인생으로 간섭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35장은 야곱과 관련된 것들이 다 청산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동안 야곱과 함께 한 유모도 죽고 라헬도 죽고 이삭도 죽습니다.

옛 사람 야곱과 관련이 된 모든 것이 청산되어집니다.



그런데 르우벤이 서모 빌하를 간통하는 사건이 삽입이 되어 있습니다.

이건 뭐지?

의아해 할 수가 있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성경의 저자는 성령입니다.

그럼 성령께서 옛 사람 야곱이 청산이 되는 마당에 뜬금없이 르우벤이 서모를 통간하는 사건을 삽입해 놓은 것은 어떤 영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 야곱의 죽음과 르우벤의 서모 간통 사건은 어떤 영적 연관성이 있을까요?

오늘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언약적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합시다.



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구약은 옛 언약이고 신약은 새 언약입니다.

구약은 장차 신약에서 나타날 일을 예표적으로 기록하였고,

신약은 구약의 예표적인 사건을 실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도 두 야곱이 있습니다.

얍복강 이전의 야곱과 얍복강 이후의 야곱이 있습니다.

얍복강 이전의 야곱은 이삭으로부터 받은 이름의 야곱이고,

얍복강 이후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의 야곱입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을 두 언약으로 비유하면 옛 언약과 새 언약과 같습니다.



얍복강 이전의 야곱은 옛 언약에 속한 야곱이고,

얍복강 이후 이스라엘은 새 언약에 속한 야곱입니다.

야곱이 벧엘로 귀환 하자 하나님께서 더 이상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로 부르겠다고 하신 것은 새 사람으로 대하겠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옛 언약으로 대하였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은 새 언약으로 대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럼 야곱의 일생을 마감하는 이야기 속에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간통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옛 언약에 속한 야곱이 죽고 새 언약에 속한 이스라엘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음이 됩니다.



어떻게 그러 한지를 풀어봅시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옛 언약이고 신약은 새 언약입니다.



언약의 출처는 창세전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로 구분을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받아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들이 있고,

그냥 예수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아담의 아들로 살아가는 죄인들이 있습니다.



두 민족 이야기를 구약 마당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가지고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집안에도 육으로 난 이스마엘과 약속으로 난 이삭이라는 두 아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죄인인 아브람이 낳았고,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이 낳았습니다.

이스마엘은 사람의 아들이지만 이삭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삭의 집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에 속한 자가 있고 약속에 속한 자가 있습니다.

에서는 육에 속한 자이고 야곱은 약속을 받고 낳아졌기 때문에 영에 속한 자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집안에 와서는 두 아내의 자녀로 나타납니다.

레아의 자녀와 라헬의 자녀가 있습니다.

레아는 야곱으로부터 자녀를 낳았지만,

라헬은 맥추 때 합환채를 먹고 난 후에 자녀를 낳았습니다.

맥추 때 얻은 합환채는 신약으로 오면 성령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레아의 자녀는 육에 속한 자이고 라헬의 자녀는 영에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낳은 아들이 요셉입니다.

이 요셉이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로 대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야곱이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으면서 낳은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자기 아들로 입적을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을 대신하여서 산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낳은 자식은 야곱의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과 요셉의 관계는 37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이 시간은 르우벤과 서모의 간통 사건 속에 담긴 영적 의미를 살펴봅시다.

옛 사람 야곱의 종말과 르우벤의 간통 사건은 신자들의 구원 사건과도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이게 그냥 사건이 아니고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바꿔치기 당하는 사건이 담겨져 있습니다.

보통 사건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을 윤리적으로 보면 일탈의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르우벤이 서모와의 간통 사건도 그러하고,

다음에 살펴보게 될 유다와 며느리인 다말과의 간음 사건도 그러합니다.

윤리적으로 보면 불륜 스캔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구속사 이야기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보는 안목과 성도가 성경을 보는 안목은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그냥 일반적인 책이지만 성도들에게는 그냥 책이 아니고 영적인 이야기이고 구원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후손에게 성경을 주었습니다.

구약 마당에서는 이스라엘에게만 성경을 주었습니다.

성경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 구원하는 비밀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후손들은 성경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속에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역사의 시작과 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언약의 후손들은 성경을 통해서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을 알게 됩니다.

그럼 언약의 후손들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선지자적 사명을 가진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선지자이고 신약에서는 교회가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곳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창세로부터 감추인 비밀을 교회를 통해서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늘나라 대사관입니다.

하나님은 하늘나라 소식을 교회에다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이외에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신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경을 가지고 하늘나라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럼 성도들은 교회를 통해서 하늘나라 소식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인쇄술이 발달 하여서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에서는 제사장만 성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제사장들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되면 모든 백성들이 성전에 모여서 제사장들이 읽어주는 성경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이란 그냥 쉬는 날이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 듣는 날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싶어서 안식일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형식으로 변하고 외식이 되면서 변질이 되고 타락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변질이 되고 타락 되었지만 안식일에 성경을 듣는 것은 지속이 되어 왔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셔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로 풀어주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 주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이 보낸 참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이 날마다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성령이 임하고 난 후로는 날마다 안식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날마다 모여서 성경으로 예수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자들이 구약의 모든 성경을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바울은 구약을 전부 예수그리스도로 풀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책이 히브리서입니다.

사도들이 죽고 사도들에게 배운 제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맡아서 가르칩니다.

사도들에게 배운 제자들을 일컬어 속 사도라고 합니다.

속 사도들이 또 제자를 낳고 그 제자들이 또 제자를 낳고 그렇게 하여서 지금까지 유지가 되어 온 것입니다.



성도들이 성경을 갖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아요.

중세 시대 문화 혁명이 일어나고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성경이 점차적으로 대중화되면서 성도들이 성경을 소유하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좋은 면도 많았지만 아주 나쁜 폐단을 몰고 왔습니다.



그것이 교회 무용론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교인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젠 교회에 가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필요성이 사라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로 모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성경이 없을 때는 교회에 가야지만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가 있기 때문에 교회에 모였지만 이제는 자신이 성경을 가지고 있으니까 꼭 교회에 가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느냐 라고 하면서 교회의 모임을 페하여 버린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의 모임을 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말씀 듣는 게 전부가 아니에요.

말씀을 듣는 것은 시작에 불과해요.

신앙은 들은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은 생명이에요.

그러므로 진짜 예수로 살아난 성도들은 들은 그 말씀을 삶으로 풀어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말씀이고 삶은 행함이에요.



만약에 말씀을 안다고 하면서도 삶이 없으면 그것은 귀신의 믿음이고 죽은 것입니다.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말씀이 생명으로 유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귀는 속이는 자에요.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입술로는 예수를 말하나 삶으로는 예수의 향기를 토해내지 못해요.

도리어 들은 말씀을 가지고 사망의 냄새를 풍기게 되는 것입니다.



어는 시대이고 교회는 항상 말쟁이들 때문에 시험을 겪었어요.

이 시대 이러한 사고가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이 그래요.

어느 시대이고 자칭 사도가 있었고 자칭 유대인들이 있었어요.

자칭이 문제에요.



신약에서의 교회의 모임은 천국에서의 모임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로 모이는 것은 주의 날로 모이는 것입니다.

주의 날이란? 예수님의 부활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엿새 동안 십자가에서 일하시고 부활을 하여서 일곱째 날 안식으로 들어가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일곱째 날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일날 교회로 모이는 것은 단순하게 하나님 말씀만 듣는다는 것이 아니고 엿새 동안 흩어져 살다가 예수님께서 마련해 주신 안식의 세계에서 모든 형제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도 간에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에도 제사장들이 읽어주는 성경을 듣고 난 후 모두가 가지고 온 음식으로 축제를 하였어요.

이게 교회의 모임에 의미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 깨달음이 감사와 찬양으로 나타나고 모두의 기쁨으로 축제를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라는 말 속에는 위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아래로는 성도 간에 교제하는 것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도가 위로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아래로는 이웃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에요.



교회의 모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에요.

이걸 모르고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은 성경을 단편적 지식으로만 알고서 예수 믿는 내가 교회인데 교회 갈 것이 무엇이 있느냐 라고 하면서 교회를 떠나서 세상과 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의 모임에 의미를 모르고 껍데기 지식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나쁜 사단의 궤계입니다.

이러한 사고가 초대 교회 안에서도 있었어요.

그게 영지주의입니다.



이를 알고 바울은 히브리서를 통해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성을 본받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적극적으로 그 날이 가까이 올수록 더욱 더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였어요.

모여서 서로 위로 하라고 하였어요.



교회는 성도의 집이에요.

아침에 회사로 출근했다가 저녁이 되면 퇴근하여서 집으로 돌아가듯이 성도들은 엿새 동안 세상에 출근 했다가 일곱째 날인 주의 날에 교회로 퇴근을 하여서 천국의 가족들과 화목하게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교회로 모이는 것은 장차 천국에서의 모임을 예행 연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을 했든 안했든 교회를 통해서 일을 하세요.

구약 교회를 통해서 메시야가 오셨듯이,

신약도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의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 교회는 온전한 교회는 없어요.

다 문제투성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을 알리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는 항상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듯이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타작마당을 추수하세요.

예수님의 타작마당은 교회에요.

그러므로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받은바 은혜로 섬기면 되어요.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는 우리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에요.

우린 오직 하나 받음 은혜로 섬기는 것뿐이에요.

모든 것은 주님이 판단하신다 생각하시고 2 달란트 5 달란트 받은 종들처럼 주인이 있든 없든 개의치 않고 자기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주님이 나중에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세요.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말씀을 주시잖아요.

그런데 아시아의 일곱 교회마다 다 문제 투성이었어요.

발람의 교훈이 판을 쳤고 니골라 당이 있었고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어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종말의 비밀들을 맡겨 두신 것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전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비밀을 알리신다는 뜻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 자칭 사도도 있고 자칭 유대인도 있어요.

밭에 곡식 가운데 가라지처럼 교회 안에도 양들 틈에 염소들이 있어요.



염소가 있다고 해서 양의 우리를 허물어서는 안 되어요.

곡식 가운데 가라지가 있다고 해서 밭을 불사르면 안 되어요.

교회가 타락하였다고 해서 교회생활을 포기해서는 안 되어요.

그럴수록 받은 은혜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머리에 든 지식으로 사람에게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어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하고 섬기셔야 합니다.

비 진리를 전하고 땅에 말을 하는 목사의 말은 들을 필요는 없지만 성도를 섬기는 일을 게을리 하여서는 안 되어요.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것은 주의 몸 된 교회이기 때문이지 어느 사람들 때문이 아니에요.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넘어지고 일으켜 세우는 것은 주께서 알아서 하실 테니까,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에 사랑의 빚진 자로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구더기 있다고 장 담그기를 포기해서는 안 되어요.

구약 이스라엘이 성전 중심으로 살았듯이 신약의 성도들도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이스라엘 진 안에 머물렀듯이 신약의 성도도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구약과 신약은 짝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는 이스라엘을 가지고 말씀하셨고 신약은 교회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구약 교회를 간섭하셨듯이 신약의 교회도 간섭하십니다.

교회는 언약에서 나왔습니다.



언약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 교회가 있고 신약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 교회는 옛 언약에 속하였고 신약 교회는 새 언약에 속하였어요.



그런데 이 둘은 하나에서 나온 쌍둥이입니다.

이는 창세전 언약이 쌍둥이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쌍둥이면서 성격이 달라요.

마치 에서와 야곱처럼 말이에요.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을 가지고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법이고 새 언약은 은혜입니다.

법과 은혜는 빛과 어둠처럼 서로를 드러내 주는 일을 합니다.

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을 하십니다.

그런데 은혜는 법이 없으면 드러나지를 않아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죄 아래 가두는 언약이 있고 죄에서 건져내는 언약이 있어요.

창세전 언약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수순이 법 아래 두었다가 은혜 아래로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보면 이방 나라에서 종노릇하다가 빼내심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노릇 한 것은 어린 양의 피 흘리심으로 빼내심을 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먼저 종노릇하게 하신 것입니다.



종노릇하게 하신 것은 자유의 소중함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죽음에 가둔 것은 생명의 귀함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죄인의 실존이 애굽에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죽은 자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율법을 주어서 너희가 죄인이고 너희는 죽은 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은 자라는 알 때 살려 주세요 라고 합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 때 용서해 주세요 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걸 율법이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이는 죄를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구원자를 보내기 전에 율법을 주어서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너희는 죄인이고 죽은 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세례 요한이 물세례로 죽이는 일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물속에 잠기게 하는 것은 죽음을 상징해요.

이것은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홍해 바다를 건넌 것과 같아요.



세례요한을 일컬어 율법과 선지자의 마침이라고 하지요.

그러면서 세례 요한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합니다.

주의 길이란?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으로 오신 분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자기가 죄인인줄을 몰라요.

자기가 죽은 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례 요한을 예수님보다 앞서 보내서 죄 아래 가두고 죽이는 일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도끼 들고 전부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누굴 죽이나요?

자기가 의롭다고 하는 자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나는 쇠하여야 하고 예수는 흥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 제자들을 전부 예수님에게로 보낸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을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자라고 하면서 자기는 빠진 것입니다.

그것이 유대인의 왕인 헤롯왕의 죄를 고발하고서 자신은 죽임당하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왕은 백성을 대표하는 자이므로 세례 요한이 헤롯왕의 죄를 고발한 것은 온 유대인들의 죄를 고발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모든 유대인들을 예수 앞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이를 바울은 알고 율법을 일컬어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한 것입니다.

율법이 예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예수에게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율법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이걸 아는 사람은 율법을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 아래서 죽은 자들에게 산 자를 보내 주셨어요.

그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셔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일을 하십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이 되려면 먼저 옛 것으로부터의 단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구원은 옛 사람의 죽음을 전제로 하여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본문 속에서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로서의 삶을 위해서 옛 사람 야곱으로부터의 단절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 일을 하자면 옛 언약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역설적으로 나타나요.

이게 비밀입니다.



겉으로는 옛 언약이 새 언약을 집어 삼켜요.

옛 언약이 새 언약을 죽여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새 언약이 옛 언약을 살려내는 일을 해요.

이건 마치 우리가 예수님을 죽였는데

나중에 보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장악하고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명이 사망에 삼킨 바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영생하는 생명이므로 죽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먹으면 먹힘 당한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야금야금 집어 삼키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예수를 먹었는데 나중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먹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가 예수를 죽였는데 예수가 우리를 살려내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레아의 소생인 르우벤이 라헬의 몸종인 빌하를 강간하지요.

르우벤은 레아의 소생입니다.

레아는 형이고 라헬은 동생이에요.

레아와 라헬을 두 언약으로 비교하면 레아는 먼저 나온 언니이므로 먼저 주어진 옛 언약을 상징하고 라헬은 나중에 나온 동생으로서 나중에 주어진 새 언약을 상징해요.



레아와 라헬은 두 언약이에요.

레아는 옛 언약이고 라헬은 새 언약이에요.

레아에게 속한 자들은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을 상징하고 라헬에게 속한 자들은 새 언약을 상징해요.

르우벤이 레아의 장자입니다.

레아는 옛 언약을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이 누구를 죽이느냐 하면 새 언약에 속한 자들을 죽여요.

무엇으로 죽이느냐 하면 자기 의로 죽여요.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지킴을 의로 여겼습니다.

그 의로 예수님을 죽였어요.



이처럼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은 자기 의로 새 언약에 속한 자들을 죽여요.

이게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예수님을 죽인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 언약에 속한 분이세요.

새 언약은 은혜에요.



예수님이 은혜와 진리를 몰고 오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으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에게 와서 죽임을 당했어요.

이렇게 되면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죄를 지은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유대인들의 죄를 고발하는 미끼로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예수님을 죽이자 하나님이 봐라 이놈들아 너희가 죄인이고 너희가 의롭다고 하는 율법이 틀렸음으로 드러나지 않았느냐?

율법이 의로운 것이라고 한다면 사망이 나오면 안 되고 생명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율법의 의를 가지고 죽이는 일을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율법이 너희로 하여금 너희는 틀린 자이고 죄인이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예수를 죽였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너희는 하나님 백성 될 자격이 없어 하고 잘라냈어요.

이걸 바울은 참 감람나무 비유에서 법에 거하는 자들을 잘라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잘려나간 자들이 나중에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아~! 우리는 죄인이었는데 율법 지킨 것을 가지고 의인인척 하고 살았구나!

우리가 참으로 악당인줄을 알면 그 때 하나님은 참 감람나무에 다시 접을 붙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을 먼저 버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버린 것은 다시 찾고자 함입니다.

다시 찾아짐을 당할 때에는 용서 받은 자로 찾아지는 것입니다.

용서 받은 자로 찾아 질 때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강간 사건으로 르우벤이 장자권을 상실해버립니다.

르우벤의 장자권이 누구에게 넘어가느냐 하면 라헬의 소생 요셉에게 넘어갑니다.

장자권을 상실했다는 것은 참 감람나무에서 잘려 나간 것과 같아요.

옛 언약에 속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고 참 감람나무에서 잘려나가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자리에 새 언약에 속한 이방인들을 접붙임을 하십니다.

접붙임 당한 자들이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역대상 5장을 봅시다.



역대상 5장 1-2절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르우벤은 아비의 침상을 더럽힘으로 인하여 장자에서 실격이 되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누구에게로 넘어 갔는가 하면 라헬의 후손인 요셉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족보에는 유다를 장자로 기록하라고 합니다.



이러면 장자가 둘인 셈입니다.

유다는 육적인 장자이고 요셉은 영적인 장자인 것입니다.

육은 명분이고 영은 실리에요.

육은 가짜이고 영이 진짜에요.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지만 육으로 낳은 자가 아니고 영으로 낳은 자에요.

요셉은 합환채를 먹고 낳았어요.

합환채는 성령을 상징해요.

그러니까 야곱의 아들들 중에는 육으로 낳은 자가 있고 성령으로 낳은 자가 있는 것입니다.

족보에는 육으로 낳은 자를 장자로 하지만 실제적인 장자의 명분은 성령으로 낳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요셉의 맥을 따라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야곱 집안의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12 지파가 야곱의 12 아들로 형성되었어요.

그럼 예수님이 구약 이스라엘의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야곱의 육적 아들들이 온 세상에 기근이 임할 때 누구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나요?

요셉을 통해서 받게 됩니다.

육의 아들들이 영의 아들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일을 하셨나요?



육으로 난 자들이 영으로 난 요셉을 죽이는 일을 하였지요.

육으로 난 자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애굽으로 팔아 버렸잖아요.

요셉을 구덩이에 던진 것은 죽인 것과 마찬가지에요.

영적으로는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셉을 죽음에서 살려내서 애굽의 총리로 삼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자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려내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마당의 요셉과 그 형제들의 사건을 가지고서 신약에서 일어나는 예수님과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사건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럼 르우벤의 빌하 강간 사건이 담고 있는 영적 의미를 살펴봅시다.

르우벤이 아비의 침상을 더럽혔다고 하지요.



아비의 침상을 더럽혔다는 말은 어머니를 범했다는 뜻입니다.

어머니를 죽였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낳아준 자를 죽였다는 뜻입니다.



이런 자를 신약에서는 독사의 새끼라고 합니다.

독사의 본래 뜻은 살모사 에요.

살모사란? 어미를 잡아먹고 사는 자라는 뜻입니다.

죄인은 모두가 살모사 새끼들이에요.

자기를 낳아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에요.

그래서 신약에서는 세상과 짝하는 자들을 일컬어 간음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을 봅시다.



약 4:4절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세상과 벗된 것을 간음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까?

이는 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죄를 짓고 난 후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자기 육신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자기 육신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강간이 뭔가요?

자기 쾌락이에요.



르우벤이 쾌락의 대상을 어미로 삼은 것입니다.

르우벤의 이 모습이 바로 아담 안에서 난 자들의 모습입니다.

르우벤은 아담 안에서 나온 우리 옛사람을 상징해요.

우리도 우리를 구원 해 주신 어머니인 예수님을 육신의 쾌락을 좇는데 필요한 도구로 이용하고 있잖아요.



우리의 어미가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우리를 낳아준 의미에서 ‘어미’ 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하늘의 사람으로 낳아 주셨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하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하늘에 속하였다는 것으로 세상 것에 미련을 두지 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않아요.

도리어 예수를 이용해서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고자 합니다.



이건 마치 출애굽 한 백성들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가고자 하지 않고 도리어 애굽의 것을 그리워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애굽에서 빼내 주셨는데,

우리는 광야에 나와서도 애굽에 것을 그리워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한단 말입니다.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면 어린 양의 죽음은 헛것이 되고 말아요.

교회에 와서 세상 것을 구하면 예수님의 죽음이 헛것이 되고 만단 말입니다.

광야에서의 죄가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었듯이,

교회 안에 와서의 죄가 세상에 대하여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요.

그래서 세상과 짝하는 자들을 일컬어 간음하는 자들이라고 하고 이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을 봅시다.



골 3:1-10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지요.

거기에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하지요.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이미 땅에 대하여는 죽었고 하늘로 향하여 살아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구약식으로 말하면,

너희는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니까 애굽의 것은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애굽과 단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갈래야 갈 수가 없어요.

이젠 앞으로 가는 것 밖에 없어요.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면 어린 양의 죽음을 헛 죽음으로 만드는 것이므로 징벌을 받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애굽을 그리워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들을 모조리 다 죽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건 옛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징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는 것입니다.



남의 새끼는 징계하지 않아요.

내 새끼들이기 때문에 매질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아픔이에요.



마귀라는 놈은 세상 것을 가지고 미혹해요.

세상 것은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요.

그래서 우리가 자꾸만 넘어지는 것입니다.

넘어질 때마다 그 값을 예수님이 대신 치루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막을 보면 매일 제사가 지내집니다.

이건 백성들이 매일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매일 죄를 지으니까 흠 없는 양이 매일 죽임 당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러고 있어요.

우리도 매일 죄 짓고 살아요.

그럼 예수님은 자기 피로 우리 죄를 속량하는 일을 하세요.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여 저 놈들 때문에 내가 죽었습니다’ 라고 대언을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어미를 잡아먹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르우벤이에요.

그래서 교회에 와서도 우리의 욕심을 채우고자 예수님을 죽이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5-10절을 보세요.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땅에 있는 지체를 뭐라고 하나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라고 하지요.

이게 전부 어디에 쾌락을 주는 겁니까?

육신이에요.

이러한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하지요.



하나님이 이 진노를 누구에게 퍼 부었나요?

예수님이에요.

우리가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미를 잡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보세요.



사 53:4-6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였다고 하잖아요.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가 찔림을 받았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가 상함을 입었으며,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하여 그가 징계를 받았다고 하잖아요.



무슨 말인가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죄를 짓고도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대신 매를 맞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자식들 입에 밥이 넘어 가는 것은 아버지가 뼈 빠지게 일을 하여서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들 입에 밥을 넣어 주기 위하여 매일 출근해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하지 않으면 자식들 입에 밥을 넣어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등골이 빠져 가면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은 아버지 등골을 빼먹고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나중에 커서 철이 들고 나면 아버지의 등이 휜 것은 다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효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애끓는 심정으로 너희가 전에는 땅에 것을 쫓아가면서 살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야 되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이제 새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사람이 아니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의 애끓는 마음과 상관없이 교회에 와서 또 애굽의 것을 구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매일 제물이 되어서 아버지 앞에 바쳐지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매일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매일 자신의 죽음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신다는 뜻입니다.



요한일서 2장을 봅시다.



요일 2:1-2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사도요한이 하는 말이,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것은 너희가 죄를 안 짓기를 바라지만,

어째 인간이 죄를 안 짓고 살수가 있겠느냐,

하지만 죄를 짓더라도 이것 하나만은 잊지 말아라,

우리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죄를 지어도 벼락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근거로 해서 아버지 앞에 간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법으로 대하였으면 우리는 벌써 요절이 났을 텐데,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용서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르우벤이 어미를 강간하고도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 죄를 요셉에게 전가 시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르우벤이 죽어야 할 자리에 요셉을 밀어 넣은 것입니다.

그것이 르우벤의 장자권을 요셉에게 넘겨준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르우벤이 장자 구실을 못하니까 요셉에게 넘긴 것입니다.



장자의 자리는 자신의 죽음으로 형제들을 살려내는 자리입니다.

육적 장자인 르우벤은 자기 쾌락을 위해서 어미를 잡아먹었는데,

영적 장자인 요셉은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죽는 자리로 밀려 내려 간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죽어야 하는 자리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겠다고 세상과 간음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겠다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간음하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르우벤처럼 어미 잡아먹은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대신 죽어준 예수님 때문에 살고 있어요.

이게 복음이에요.

이게 바로 창세전 언약이에요.



창세전 언약이 뭔가요?

예수가 죽어서 우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 때문에 죽습니까?

자기 백성들 때문에 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미를 잡아먹고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구원을 받은 자로서 우리 몸을 예수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 반대에요.

우리 몸을 위하여 예수를 팔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미 잡아먹은 뱀 새끼들이에요.



우리를 낳아주신 어미가 누구인가요?

예수님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뭐하고 있어요?

예수님 잡아먹고 있어요.



성질 급한 사람은 그럴 겁니다.

아니 예수 안 잡아먹으면 되잖아요.

우리가 잘하면 되잖아요.

그게 안 되어요.

그렇게 하고 싶어도 안 되어요.

우리 몸뚱이가 그렇게 안 된단 말입니다.



죄 아래서 난 몸으로 죄 짓지 말라는 것은 강아지 보고 강아지 소리 하지 말라는 것과 같아요.

강아지이니까 강아지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죄인이니까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난 사람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에요.

애굽에서 났기 때문에 애굽에 것을 달라고 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난 사람을 고쳐서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지 않아요.

가나안은 애굽에서 난 사람은 못 들어가요.

왜냐하면 가나안에 집어넣어도 애굽에 것을 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애굽에서 난 자들은 다 죽이고 광야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려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광야에서 출애굽 1 세대들이 다 죽고 광야에서 태어난 2 세대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걸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로 불러 놓고서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이느냐?

말씀으로 죽이는 것입니다.



하브리서 4장을 보세요.



히 4:12-16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 말씀을 칼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이 칼로 무슨 일을 합니까?

우리의 심령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하지요.



이건 제물의 각을 뜨는 것을 말해요.

하나님이 지금 우리 몸을 난도질 한다는 말입니다.

마치 암 수술을 하듯이 온 몸을 헤집어 놓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죄를 낱낱이 고발을 하는 것입니다.



죄를 고발당하고 보니 살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꼼짝없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하늘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니까 예수그리스도가 대 제사장으로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는 겁니다.

내가 너의 죄 때문에 죽었단다!

내가 네 죄값을 다 갚았단다!

너의 죄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항상 긍휼의 자리로 나아와서 은혜를 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새기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은혜와 긍휼의 자리로 담대하게 나아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뭐냐?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구원 받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건 단회적이면서도 반복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이미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으며,

장차 받을 것입니다.



왜 구원을 과거 시제와 현재 시제와 미래 시제로 사용하는지 아세요.

우리가 죄의 몸으로 죄악 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록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몸으로 죄악 된 세상에서 죄를 이기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아도 우리 몸의 속성상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게 되어 있어요.

이건 본능이고 본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의 자리를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을 봅시다.



롬 11:32-36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하지요.

이는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은 죄인을 긍휼이 여기심으로 구원하시는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시지요.

나는 의인을 원하지 않고 죄인을 원한다고 하시지요.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고자 오셨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부의 교리부분의 마지막을 불순종과 긍휼이라는 키워드로 마감을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내어 놓은 패가 긍휼이에요.

이 긍휼은 누구에게 필요한가 하면 죄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에게만이 긍휼의 패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독교와 세상 종교의 차이는 신에게 받는 것과 신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는 신에게 갖다 바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믿음도 받아야 하고,

구원도 받아야 하고,

은혜도 받아야 하고,

긍휼도 받아야 합니다.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받아야지만 살 수가 있어요.

이게 창조 질서에요.

이를 벗어나면 불경이고 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실패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중요한 팁이 하나 들어가 있습니다.



21절-22절을 봅시다.



창 35:21-22절 “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 둘이라”



야곱의 일생을 보면 출생과 동시에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야곱의 이야기가 창세기 26장부터 시작이 됩니다.

오늘본문이 창세기 35장입니다.

그러니까 26장에서부터 35장에 오기까지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에 와서는 이스라엘로 나타납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창세기 32장의 얍복강 사건에서 받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로 쓰지 않고 계속해서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여 왔습니다.

그러다가 세겜에서 디나의 강간 사건으로 쫓겨 오다시피 하면서 벧엘로 올라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간섭을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로 다시 돌아 올 때는 처음 벧엘에서 하란으로 떠나던 모습과 똑 같이 빈 털털이로 돌아 왔습니다.



20년 동안 야곱은 자기 욕망을 이루고자 하였어요.

그러나 20년 후 그 자리로 돌아 올 때는 빈 손이었습니다.

얻은 것이라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벧엘로 돌아오자 이제부터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옛 사람이고 이스라엘은 새사람입니다.

야곱은 자기 꿈을 이루고자 살았습니다.

야곱의 꿈을 한마디로 하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이걸 한마디로 하면 떡이에요.

떡을 많이 소유하면 자기 이름이 떨쳐지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떡을 가지니까 온 세상이 다 무릎을 꿇잖아요.

야곱의 이름이 나중에 요셉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것도 떡을 통해서 말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로 사는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세상의 떡으로 이름을 떨치고자 한 야곱은 죽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요셉의 양식을 가지고 온 세상의 주가 되는 것으로 이름을 떨치게 하신 것입니다.



암튼 야곱은 옛 사람이고 이스라엘은 새 사람입니다.

다시 벧엘로 올라온 야곱은 이제부터 옛 사람 야곱으로 살면 안 됩니다.

새 사람 이스라엘로 살아야 합니다.

옛 사람은 떡으로 살지만 새 사람은 언약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뭔가요?

‘신과 싸우는 자’ 이잖아요.

그 신이란? 자기 안에 있는 우상이에요.

하나님이 야곱 속에 있는 우상과 싸운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이제부터 하나님이 철저하게 떡을 쫓아서 살지 못하게 간섭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새 사람인 이스라엘로 살지 않고 또 다시 옛 사람 야곱으로 살고자 하였어요.



그것이 오늘 본문 21절입니다.



21절 “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서 장막을 쳤더라고 하지요.

야곱은 20년을 걸쳐서 본래 언약을 받은 그 자리로 돌아 왔어요.

20년 전 아버지 집에서 쫓겨났을 때 한 돌을 베게 하고 잘 때 하나님이 찾아 온 그 자리입니다.

그럼 새로운 사람으로서 벧엘에 머물러야 합니다.



벧엘에서 야곱으로 살면 안 되고 이스라엘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벧엘을 떠나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시 발행하여” 라고 합니다.



다시란 말은 예전처럼 반복한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다시 간 곳이 어디안가요?

에델 망대입니다.



에델 망대란? “가축 떼가 모이는 곳”이라는 뜻이에요.



이건 뭔가 익숙하지요.

야곱이 하란에서 벧엘로 돌아가라고 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세겜에 정착을 했습니다.

야곱이 세겜에 머문 것도 가축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겜에서 무슨 일을 당했나요?

디나의 강간 사건을 당하였어요.

디나의 강간은 가축 때문에 발생이 된 것입니다.



옛 사람은 떡으로 살지만 새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해요.

옛 사람 야곱은 가축 떼에 신경을 쓰고 살았지만 새 사람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새 사람 이스라엘이 되고서도 또 가축 떼에 관심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가축 떼에 관심을 가지면 반드시 집안에 강도가 들끓고 엄청난 사건들이 일어나요.

그것이 르우벤이 서모 빌하를 강간하는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르우벤의 서모 강간 사건을 역대상 5장에서 아비의 침상을 더럽혔다고 하였어요.

아비의 침상은 이는 나를 낳아준 어미를 범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르우벤이 자기를 낳아준 어미를 죽이는 일을 벌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음녀가 무슨 일을 하는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에서 사치하고 일락을 즐기지요.

음녀인 타락한 교회가 성도들의 영혼을 사냥하고 있어요.



무엇을 얻고자 그럽니까?

떡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떡으로 사는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십자가를 이용하여서 떡을 쫓아가고 있어요.

이러면 예수님은 또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가축 때 때문에 디나의 강간 사건을 겪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되어서 또 다시 가축 때 때문에 자기 아내가 아들에게 겁간을 당하는 강간 사건을 겪게 됩니다.



이를 신약 식으로 말하면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면 간음하는 것이고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을 박는 것이 됩니다.

성도는 떡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사는 자에요.

살아가는 이유가 떡이 아니고 말씀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 왔어도 여전히 세상의 떡을 구하고 있어요.

마치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음식을 그리워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면 우리 대신 누군가가 희생을 당해요.

우리 대신 누가 희생당합니까?

예수님이에요.

천국을 소망하고 살아야 하는 자들이 이 세상 것을 쫓아가면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지금 우리는 예수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모사 새끼들처럼 우리를 낳아준 어미를 잡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 할게요.

부모가 등골 빠져 가면서 자식들 공부 시킨다고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을 보냈어요.

그럼 자식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하여서 좋은 회사 취직을 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자식이 공부는 하지 않고 맨 날 오락이나 하고 클럽이나 쫓아다니면서 보내준 학비를 탕진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부모의 등골을 더 희어지게 되어요.

이 짓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어요.

야곱이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 놈이 어미를 강간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죄와 싸우는 자이잖아요?

그런데 야곱은 지금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죄를 쫓아가고 있는 거예요.

죄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세요.



22절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 둘이라”



야곱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라고 합니다.

유하다는 말은 말뚝을 박고 산다는 말이에요.

잠시 온 것이 아니고 거기서 말뚝 박고 살고자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살아야 할 장소는 벧엘이잖아요?

그런데 벧엘에 살아야 할 자가 지금 어디에 왔나요?

가축 떼를 치려고 에델 망대에 와 있잖아요? 

 

거기에 장막을 치고 살고 있는 거예요.

떠날 기색이 없이 정착하려고 한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게 르우벤이 어미를 강간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일 후에 야곱은 아비 집인 헤브론에 머물게 됩니다.

헤브론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우거하던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조상이 머물던 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조상이 머물던 곳으로 오기까지 두 번의 강간 사건을 겪게 됩니다.

첫 번째는 세겜에 머물다가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였고,

두 번째는 에델 망대에 머물다가 아내가 강간을 당하였습니다.



야곱이 당한 강간은 징계와 같아요.

하나님이 언약의 자리를 떠나니까 징계로서 다시 언약의 돌아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야곱을 따라 다니면서 간섭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에요.

남의 자식이기 때문에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간섭을 당한다는 것은 아픔이면서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벧엘로 올라온 야곱에게 이제부터 야곱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하겠다고 하지요.

이건 야곱에게 선전포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뭔가요?

신과 싸우는 자이잖아요.

우리 안에 우상과 싸운다는 말입니다.

누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야곱과 싸우겠다는 뜻입니다.

그게 징계에요.

하나님의 전쟁 상대는 자기 백성들입니다.

자기 백성들 속에 있는 우상과 싸우는 것입니다.



우상은 우리 육신을 볼모로 잡고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 몸이 불편하도록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이 고달픈 것입니다.

이걸 고난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43장에 보면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지명하고 부르신 것은 죄 아래서 빼내신 것이고 조성하였다는 것은 간섭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간섭하면 어떨까요?

그야 죽음이지요.



그게 물 속에 집어넣고 불 속에 집어넣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가슴 아프게도 등 따습고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떠났다가 매 맞고 고통당하면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자꾸만 간섭해서 징계하는 것입니다.



징계 당할 때마다 우리 인생은 불편해져요.

지금 야곱이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숨통이 터진다 싶으면 여지없이 언약의 자리를 떠나 세상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럼 애꿎은 사람이 피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피해를 당하는 사람 속에 예수님의 희생이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의 자리를 벗어나 육신을 쫓아서 세상으로 향하면 예수님이 피 흘리심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가 고통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야곱은 르우벤이 빌하를 강간하고 난후에 이 일을 하나님이 벌리셨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것이 22절에 나와 있어요.



22절을 다시 보세요.



22절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 둘이라”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다” 라고 하지요.

여기서 “이를 들었더라” 라는 말은 하나님이 이 일을 벌이셨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내가 벧엘의 언약을 버리고 가축 떼를 위하여 세상에 내려오니까 죄 없는 사람이 희생당하는 이런 일을 벌어졌구나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게 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 후에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하던 곳에 머물게 됩니다.

이는 언약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27-29절까지를 보세요.



창 35:27-29절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 아비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우거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 일백 팔십세라 29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야곱이 어디로 가나요?

아비가 있는 헤브론으로 가지요.

헤브론이 어떤 곳인가 하면 막벨라 굴이 있는 곳이에요.

조상들의 무덤이 있어요.

이를 열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세겜과 에델 망대에서 혼이 나고 나서 조상이 계신 곳으로 간 것입니다.

비싼 수업료를 내고 난 후에 언약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야곱의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도 틈만 나면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다가 매를 맞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라고 돌아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범사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늘에 것으로 사는 자입니다.



하늘에 것을 받아야 평안해요.

세상 것에는 평안이 없어요.

세상 것은 쫓기게 만들어요.

사람이 소유하면 행복 할 것 같지요.

아니에요.

그 반대입니다.



행복은 비움에서 와요.

세상 것은 소금물과 같아서 소유하면 할수록 갈증을 유발시켜요.

수가성 여자를 보세요.

땅에 신랑이 행복을 줄 것이라 믿고 다섯 명이나 갈아치우고 여섯 번째와 사는데도 목마름을 해결 할 수가 없어서 낮 12시에 물을 길러 우물가로 왔잖아요.



그런데 그 우물가에 하늘에 신랑이 찾아 온 것입니다.

세상 신랑은 목마름을 주었는데 하늘에 신랑은 해갈을 주었어요.

그래서 물동이를 내 던진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 남편 쫓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물동이를 내 던지는 것으로 애둘러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가축 떼를 쫓아가다가 혼만 났어요.

세겜이나 에델 망대에서 쉼을 누리지 못하였어요.

야곱이 쉴 수 있는 곳은 조상의 언약이 있는 벧엘 뿐이에요.



세겜이나 에델 망대는 야곱이 쉴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벧엘로 올라가라고 세겜이나 에델 망대에 머물면 지진을 일으키고 풍랑을 일으켜서 벧엘로 올라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고멜을 보세요.

고멜이 수중에 돈만 있으면 외간 남자를 찾아 가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가시와 담으로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돈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자 고멜이 에이~ 본 신랑한데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가시와 담이 고멜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고멜이고 야곱이에요.

틈만 나면 세상과 짝하고자 하고 틈만 나면 세상 부귀영화라는 가축 떼를 치려고 세겜과 에델 망대에 머문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복잡한 사건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건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 나올 때 탕자처럼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유구무언이 되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걸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야곱으로서 마지막 크라이막스에 어떤 사건이 나타나느냐?

르우벤이 자기 어미를 강간하는 사건이 일어남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모두가 죄 아래 가두는 일들을 하는 거예요.

이제부터 하나님이 야곱으로 하여금 너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깨달아 할 것은 내가 르우벤 이구나!

내가 날 낳아주신 어미인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 못 박는 일을 하고 있구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은혜와 긍휼을 자리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안 됩니다!

날 불쌍히 여겨 주세요!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하여야 합니다.

죄인이 살 수 있는 길을 오직 하나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 긍휼의 자리를 떠나지 마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넘침 바 되어져서 오늘도 우리가 르우벤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서 늘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음을 압니다. 이것을 앎으로 상한 심령이 되어서 주의 은혜로 긍휼의 자리 은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리하여서 우리의 입술의 고백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살고 있는 그 은혜를 찬미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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