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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성경강해)66강. 야곱의 약전과 요셉 (창 37:1-11절)

by coroa 2021. 8. 31.

 

 

66강. 야곱의 약전과 요셉 (창 37:1-11절)

-.정낙원 목사

 

 

 

육과 영은 살아가는 원리가 다릅니다.

육의 사람은 땅의 가치로 살아가고,

영의 사람은 언약의 가치로 살아갑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에서는 육에 속하였고,

야곱은 영에 속하였습니다.

각자의 인생관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렇게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을 하나님이 결정하신대로 간섭을 하십니다.

그리하여 아비 이삭이 죽고 난 후 각 자의 길로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에서는 아비의 집을 떠나서 세일 산으로 가서 정착을 하고,

야곱은 그 아비가 우거 하던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야곱이 돌아온 그 아비가 우거하던 가나안 땅은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언약을 맺은 곳입니다.



이삭도 아브라함이 우거 하던 땅에서 살았습니다.

이제 야곱도 조상들이 우거하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조상들의 언약을 이어갈 언약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언약의 장소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비로소 언약의 장소로 돌아온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야곱은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많은 사건들을 겪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에게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바꿔 주셨습니다.



이름을 주신다는 의미는 아비란 뜻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이삭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삭제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이는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30년 전에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고 아비 집에서 쫓겨나서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하나님이 얍복강에 나타나서 이름을 개명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야곱의 아비가 되어서 적극적으로 간섭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벧엘로 돌아오자 하나님은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제부터는 이스라엘로 간섭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옛 사람을 상징하고, 이스라엘은 새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새 사람으로 간섭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2기 인생인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야곱의 육적 아비가 죽자 하나님이 영적 아비가 되어서 야곱의 인생을 간섭하십니다.

그것이 이삭이 죽은 후부터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야곱의 약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을 보세요.



창 37:2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 ~



약전이란? 족보 또는 계보라는 뜻입니다.

큰 의미에서는 족보 이야기이지만 언약적인 의미에서는 야곱의 이력서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약전이라고 하고서는 요셉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약전이라고 한다면 야곱에 관한 이야기로 나타나야 하는데 정작 야곱은 없고 요셉의 이야기가 전개가 됩니다.



야곱의 이력서에 요셉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야곱의 언약을 이어가는 자 라는 뜻입니다.

언약적으로 보면 요셉은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의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건 마치 성도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성도를 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하늘의 시온 산에 구원을 받은 성도들인 144000명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은 이들은 어린 양의 인생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어린 양과 144000명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야곱과 요셉이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적인 비중으로 보면 요셉이 조상들보다 더 큰 일을 하였습니다.

그럼 요셉의 하나님이라고 하여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요셉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요셉이 야곱의 2기 인생을 대신 산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죽기 전에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으면서 낳은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야곱의 자식으로 입적을 시키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죽기 전에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을 합니다.

이것은 아비로서 권리를 행사한 것입니다.

축복은 아버지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요셉이 축복을 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야곱이 자신이 낳은 아들을 야곱이 축복하는 것을 보고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요셉 스스로가 야곱의 2기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언약으로 본 야곱과 요셉에 대하여 살펴볼까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언약을 먼저 주시고 나중에 그 언약을 이루어가는 방식으로 일을 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 속에는 수많은 인물이 있고 수많은 사건이 있습니다.

사건이나 인물들의 삶은 각각 독립된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구속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모든 성경은 자기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두가 예수님과 자기 백성들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요 5장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눅 24장 27절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성경은 영생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영생은 인간의 노력으로 따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십니다.

예수님이 영생을 누구에게 주나요?

언약의 후손들입니다.



언약은 창세전에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해 놓았습니다.

때가 되어서 그 아들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보내서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찾아가서 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러 왔다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야곱과 요셉 이야기도 예수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성경을 읽더라도 예수님 이야기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든 것도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요셉이 야곱의 약전으로 산 이야기도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을 살리는 이야기도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언약에는 두 언약이 있습니다.



구약이란? 옛 언약이라는 뜻이고,

신약이란? 새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야기 해 주셨고,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성도(교회)들을 통해서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으로 나타났고,

신약에서는 믿음의 조상이 예수그리스도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도 내 때를 보고 즐거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언약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모든 언약을 예수님께서 이루십니다.

창세전 언약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오셨고,

성경대로 죽으셨고,

성경대로 살아나셨고,

성경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성경대로 라는 말은 언약대로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언약의 책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언약대로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생겨났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여 이삭이 생겨났고 야곱도 생겨났습니다.

물론 야곱의 12아들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도 언약에 의하여 생겨났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주어진 언약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 속에서 이루시는 언약을 미리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실 때 그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가를 알려 주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을 크게 보면 두 가지 내용입니다.



첫째는, 후손에 관한 언약이고,

둘째는, 땅에 관한 언약입니다.



창세기 15장을 봅시다.



창 15:1-17절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8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로 알리이까?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아브람이 소돔 고모라에 있던 조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이 나타납니다.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아브람에게 주면서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이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나는 너의 방패이고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합니다.

방패는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하나님에게 내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하나님도 알다시피 전쟁을 하려면 식구가 많아야 하는데,

나는 자식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데 어찌 전쟁을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내게 씨를 주지 않으니 여기 있는 엘리에셀이나 후사를 삼아야 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아니다!

후사는 네 몸에서 난 자라야 한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네 후손들을 하늘에 별과 같이 많게 해 줄 것이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이 일을 하나님의 생명을 담보로 지켜낸다는 의미로 언약의 제물을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이 홀로 지나가십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지금은 네 후손이 하나도 없지만 이방 나라에 가서 크게 번성하여서 사대 만에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네 후손들이 돌아 올 때 네 후손들을 괴롭힌 자들은 몽땅 심판을 하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 언약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주어진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뭔가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때가 되면 예수그리스도가 죄 아래서 종살이 하는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어서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을 괴롭힌 세력들을 심판하십니다.



언약은 처음에는 미미합니다.

처음에는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시작을 합니다.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하나님 백성이라는 한 민족이 생겨납니다.

마치 아담 한 사람 안에서 온 인류가 나왔듯이 아브라함 한 사람 안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오는 것으로 성취가 됩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예수그리스도의 언약을 보여주는 그림자적인 언약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옛 언약이라고 하고,

예수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육적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이었지만,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의 조상은 예수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구원 이야기는 신약의 성도들의 구원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그림자라고 하고 신약을 실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아브라함 언약을 잘 이해하시면 신약에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백성들의 구원이야기를 잘 알 수가 있어집니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후손이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고 나왔듯이,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생겨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옮겨가게 될 것입니다.



언약의 후손들이 이방 나라를 나올 때는 하나님은 언약의 후손들을 핍박한 이방 나라를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한 죄값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언약의 후손들은 죽음을 상징하는 홍해 바다에서 살아서 걸어 나왔지만 애굽의 바로와 그 군대들은 바다 속에서 몰살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애굽의 멸망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장차 예수님 재림으로 나타날 이 세상 멸망을 예표하는 그림입니다.

장차 예수님의 재림하시면 이 세상은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그 후손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언약의 장소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언약이 4대에 걸쳐서 성취가 된다는 것입니다.

4대는 신약의 전 기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은 장소가 가나안 땅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보면 애굽은 이방나라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후손들이 가나안을 떠나 애굽이라는 이방 나라에 가서 종살이 하면서 고난을 당하다가 때가 차매 하나님이 모세라는 구원자를 보내서 빼내 오는 것으로 언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12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12 아들을 가지고 이방에서 큰 민족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럼 야곱의 12 아들들이 이방 나라로 내려가야 합니다.

아브라함도 죽고 이삭도 죽었습니다.

이제 야곱만 남았습니다.

야곱의 아들들로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의 아들들이 이방 나라로 내려가는 프로젝트를 가동하십니다.

그것이 야곱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요셉을 야곱의 약전에 넣고 이방 나라인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는 일들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방나라로 내려가게 하셨는지를 살펴봅시다.



시편 105편을 봅시다.



7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8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9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10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11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12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13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14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 왕을 꾸짖어

15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16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20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21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22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23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24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 하사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25 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26 또 그 종 모세와 그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27 저희가 그 백성 중에 여호와의 표징을 보이고 함 땅에서 기사를 행하였도다

28 여호와께서 흑암을 보내사 어둡게 하시니 그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도다

29 저희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사 저희 물고기를 죽이셨도다

30 그 땅에 개구리가 번성하여 왕의 궁실에도 있었도다

31 여호와께서 말씀 하신즉 파리떼가 오며 저희 사경에 이가 생겼도다

32 비 대신 우박을 내리시며 저희 땅에 화염을 내리셨도다

33 저희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저희 사경의 나무를 찍으셨도다

34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황충과 무수한 메뚜기가 이르러

35 저희 땅에 모든 채소를 먹으며 그 밭에 열매를 먹었도다

36 여호와께서 또 저희 땅의 모든 장자를 치시니 곧 저희 모든 기력의 시작이로다

37 그들을 인도하여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 지파 중에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38 그들의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저희가 그들을 두려워함이로다

39 여호와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 불로 밝히셨으며

40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41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42 이는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43 그 백성으로 즐거이 나오게 하시며 그 택한 자로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44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시며 민족들의 수고한 것을 소유로 취하게 하셨으니

45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좇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택하고 이삭을 택하고 야곱을 택하셨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숫자가 너무도 적어서 경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 한 사람을 먼저 이방 나라에 가게 하였습니다.

종으로 팔려갔는데 하나님의 계시로 인하여 이방 나라의 주가 됩니다.

이 때 하나님이 기근을 불러서 가나안 땅에 있는 야곱의 아들들을 애굽으로 이주를 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때까지 이방나라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다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서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장차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이 세상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라는 이방나라에 예수라는 한 분을 보내서 큰 민족을 이루시게 합니다.

때가 차면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하늘나라로 옮겨 가실 것입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요셉과 같고, 재림의 예수님은 모세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는 곧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37장부터는 언약의 후손들이 어떻게 애굽에 내려가게 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12 아들들을 가지고 큰 민족을 이루어가는 일을 하십니다.

여기에 동원된 나라가 애굽입니다.

애굽은 야곱의 12 아들이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이 만들어진 토양과도 같습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에 보내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큰 나라를 만드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만드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걸 요셉을 통해서 야곱의 12 아들들이 애굽에서 큰 민족으로 번성하는 것으로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내려 갈 때는 70명이라는 소수였습니다.

그런데 출애굽 할 때는 남자 장정만 60만 명이라는 큰 민족을 이루고 나옵니다.

남자 장정만 60만 명이라고 한다면 그에 따른 여자와 아이들 모든 식솔들을 합하면 작게 셈을 해도 200만 명은 족히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대로 큰 민족을 이루고 나온 것입니다.

그 당시의 인구 밀도로 본다면 200만 명은 엄청난 큰 민족입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 속에서 큰 민족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큰 민족이 생겨나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야곱의 일생을 크게 나누면 세 구분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1기 인생은, 아버지 집에서 살던 때입니다.

2기 인생은, 장자의 축복을 받고 집에서 쫓겨난 후에 하란에 가서 12 아들을 낳고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3기 인생은, 얍복강에서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산 인생은 죽임을 당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거듭나고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37장 이후부터의 야곱의 인생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인생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 한 개인이기도 하지만 광의적으로는 그 후손으로 생겨나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전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12 아들을 가지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의 아들들이 이방 나라인 애굽으로 내려가서 번성하여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일을 벌리신 것입니다.



야곱은 철저하게 하나님 언약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엄마 뱃속에서부터 선택을 입었습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하였습니다.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언약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미움이란 언약과 비 언약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언약의 자식과 비 언약의 자식을 구분하신 것입니다.

언약의 자식은 언약을 이루어 가는 도구로서 사용이 되어집니다.

여기에 자기 인생은 차압당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반면에 비 언약의 후손들은 자기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류 역사를 조명할 때에 비언약의 백성들은 땅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언약의 후손들은 고난당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언약의 후손들은 저주의 삶을 살았고 비언약의 후손들은 복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걸 예수님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간섭을 복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간섭 안에 있는 것이 복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통해서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도 모른 채 재물을 의지하고 산 부자를 어리석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잊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면서 산 부자는 지옥으로 갔고,

반면에 하나님을 바라고 거지로 산 나사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고 산 부자를 저주 받은 자라고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산 거지를 복 받은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 복을 받은 자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이러면 야곱과 그 후손들이 복을 받은 것입니다.

야곱과 그 후손들은 늘 하나님의 간섭 하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늘 자기 계획이 기각당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걸 복된 인생이라고 합니다.



이 땅은 아담의 범죄로 저주 받은 곳입니다.

그렇다면 땅에서 아무리 잘되어도 저주인 것입니다.

복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거짓 목사들이 마귀의 말로 미혹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종들은 땅에 것으로 미혹합니다.

하늘의 복을 땅의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땅에서 잘되는 사람들을 보고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땅에서 잘 되는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정반대로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생각과는 역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이 교정당하여야 합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원수들이 핍박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봅시다.



요 15:19절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복을 모르고 세상의 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서로 높은 자가 되고자 경쟁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나라가 되면 세상 사람들보다 좋은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경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예수님의 것으로 택함을 입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이건 제자들의 생각과 다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것이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는 말입니다.

이 말은 성도들은 세상에서 이방인이라는 뜻입니다.

나그네요 외국인이라는 뜻입니다.

외국인은 그 나라에 분깃이 없습니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찬밥 신세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은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미움의 대상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하고 다르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함으로 하나님과 원수 됨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성도는 세상을 고발하는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가지고 세상의 악함을 드러내는 미끼로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 두고서 애굽이 악의 세력 하에 있다는 것을 고발하였습니다.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함으로서 스스로가 악의 지배 아래 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애굽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미워했듯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성도들을 싫어합니다.

그냥 싫어합니다.

본성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는 빛과 어둠이 서로를 밀어내듯이 그 속에 속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절간을 친숙하게 여기는데 교회는 꺼려하는 것도 다 이와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꺼려하듯이 성도들도 절간을 싫어합니다.

빛은 빛의 동네에 있어야 편하고,

어둠은 어둠의 동네에 있어야 편합니다.



각자 편한 곳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하는 것이나,

성도가 절간을 싫어하는 것이나 그 속에 본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둠이 하나 될 수가 없듯이 언약과 비 언약도 하나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예수에게 속한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까닭 없이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과 비 언약이 광의적으로는 세상과 교회로 분리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옛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을 어둠에 속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둠에 속하였다 함은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옛 언약 안에서 새 언약 안으로 옮겨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정죄와 심판이 있고,

새 언약은 용서와 긍휼이 있습니다.



옛 언약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새 언약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인간의 의로 살아가고,

새 언약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살아갑니다.



율법의 의는 법이고,

믿음의 의는 은혜입니다.

법과 은혜는 상극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는 충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성질이 극과 극으로 다르기 때문에 충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누가 죽였나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죽였습니다.

왜 죽였나요?

예수님 앞에서는 자기들의 의가 틀렸음이 고발당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지금도 똑 같습니다.

교회 안에 율법의 의로 사는 자가 있고 믿음이 의로 사는 자가 있습니다.

율법의 의로 사는 자들이 예수님을 미워했듯이 지금도 법 아래 있는 자들이 은혜 아래 있는 성도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새 언약으로 산다고 해서 핍박을 하지 않습니다.

누가 핍박을 하느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어디에 있나요?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세요.

요셉이 아비의 사랑을 입습니다.

그 증거로 형제들과 다르게 채색 옷을 입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입혀 주었습니다.

이건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한 것과 같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장자의 축복을 받았듯이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입고 채색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입은 채색 옷은 장자의 옷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형제들이 아는 겁니다.

형제들은 아버지가 자기들과 요셉을 차별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러니 미워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사랑 받은 값으로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이므로 감수하여야 합니다.



야곱은 왜 요셉을 편애 했을까요?

이는 요셉이 합환채로 태어났고 꿈을 꾸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받은 꿈은 만유의 주가 되는 꿈입니다.

만유의 주가 되는 꿈은 예수님이 품은 꿈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만유의 주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유의 주를 만드는 방법이 독특합니다.



빌립보서 2장을 봅시다.



빌 2:5-11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종의 형체로 보내셨습니다.

종이란? 주인에게 종속이 된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복종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족속으로 예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입으로 주라 시인케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유의 주로 삼아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나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누구의 마음입니까?

예수의 마음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죽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버림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품으면 버림당합니다.



지금 요셉이 그러합니다.

꿈을 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품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버려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버려짐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는 이 땅에서 버려짐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오신 분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누가 죽였나요?

자기 백성들이 죽였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해서 애굽에 팔아 버린 것과 같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의 옷을 찢고 애굽에 팔아 버린 것은 죽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밉다고 죽인 그 놈이 자기를 죽인 형제들을 살려내는 일을 합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죽였는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케 하여서 그들의 구원주가 되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남기고 싶어 하는 은혜와 긍휼입니다.



구원이 뭐냐?

은혜와 긍휼을 입는 것입니다.

용서 받는 것입니다.

용서를 알게 하려고 요셉을 미워하게 한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을 알게 하려고 자기들이 죽인 형제로부터 살아남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의 후손들은 은혜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남기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역설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 자를 죽였는데 그가 살려내는 일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용서의 집합체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죽였는데,

하나님은 그 예수를 가지고 우리를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용서와 은혜와 긍휼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은혜 언약입니다.

용서와 긍휼의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긍휼이 배여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용서가 되려면 잘못을 저질러야 합니다.

어떤 잘못이냐 하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류의 시작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은 죽임 당하는 것으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고 가인의 제사는 거부합니다.

이에 가인이 하나님이 제사를 받은 아벨을 죽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을 사랑하고 자기는 미워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하나님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난 후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가인에게 표를 주어서 살려 주십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가인은 죄인이 최초로 은혜와 용서와 긍휼을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을 해 내시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아벨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가인은 우리 죄인들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죽였는데 하나님은 그 예수님의 죽음을 가지고 우리의 죄인 됨을 고발하고 용서해 주시는 방법으로 구원을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이 은혜와 용서와 긍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아벨을 죽게 만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다 받았으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이 만약에 다른 형제들과 똑같이 요셉을 대우하였으면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도 일반 유대인들처럼 대우하셨으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를 죽이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를 죽이게 함으로서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리하곤 용서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럴 때 구원 받은 자들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긍휼이 마치 김치 속에 양념처럼 배이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용서받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집안은 언약의 집안입니다.

그럼 그 집안 식구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긍휼을 입은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용서와 은혜와 긍휼은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후손들에게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일을 하십니다.

여기에 누가 투입이 되는가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 자가 투입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야곱의 집안에서는 요셉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요셉이 어떻게 태어났나요?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낳았습니다.

합환채는 임신촉진제입니다.

이걸 먹으면 임신을 한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임 여성들에게는 합환채는 명약으로 통했습니다.



여자에게 있어 자식은 상급입니다.

그런데 라헬에게는 자식이 한명도 없습니다.

언니 레아와 몸종들은 하룻밤만 자면 아이를 덜컹 임신해서 잘 낳았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아무리 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헬이 야곱에게 따집니다.

자기에게도 아이를 좀 낳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화를 내면서 내가 하나님이냐!

아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어떻게 나에게 아이를 달라고 하느냐고 신경질을 냅니다.



오매불망 아이 생각만 하고 있는 라헬 앞에 르우벤이 합환채를 들고 온 것입니다.

맥추 때에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라헬이 르우벤에게 합환채를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르우벤이 자기 엄마 주려고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하면서 거절합니다.



이에 라헬이 언니 레아에게 거래를 합니다.

언니는 합환채를 안 먹어도 아이들을 순풍 순풍 잘 낳으니까,

오늘 밤이 내가 야곱을 차지하는 순번인데 언니가 합환채를 나에게 주면 신랑을 언니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라헬은 합환채와 신랑을 바꿔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언니 레아가 오케이 콜~ 그러면서 합환채를 라헬에게 줍니다.

그 후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요셉을 낳게 됩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라헬은 신랑을 바꾼 것입니다.

야곱 대신 합환채를 얻은 것입니다.

라헬은 합환채를 먹고서 요셉을 낳았습니다.

이러면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 아니고 합환채가 낳은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세요.



창 37:3-4절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 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요셉을 노년에 얻은 아들이라고 하지요.

노년이란? 늙었다는 뜻입니다.

이건 그냥 늙었다는 말이 아니고 자식을 낳을 수 없는데 낳았다는 뜻입니다.

자식을 낳을 수 없는데 낳았으면 누가 낳았는가요?

하나님이지요.



여기서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야곱이 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낳아진 자라는 뜻입니다.

마치 경수가 끊어진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고 이삭을 낳은 것과 같습니다.

할례란 남자의 생식기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이건 남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는 뜻입니다.



사라도 경수가 끊어지고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았어요.

이건 둘 다 죽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죽은 사람에게서 자식이 나왔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죽은 몸을 가지고 창조의 일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요셉이 그런 존재입니다.

라헬도 석녀로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었고,

야곱도 노년으로 아이를 낳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합환채를 먹고 요셉을 낳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죽은 몸에 창조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뚫고 낳아진 자가 요셉입니다.

이건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예수님도 남자를 모르는 처녀에게서 태어 낳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처녀에게 임하니까 죽은 몸에서 아이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영적 의미로는 경수가 끊어진 사라나,

생식기를 자른 아브라함이나,

아이를 낳지 못하는 라헬이나,

노년의 야곱이나,

남자를 모르는 마리아나 다 같은 의미입니다.



죽은 자를 상징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서 생명이 나왔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행하시는 창조인 것입니다.



다시 합환채에 대하여 살펴보십시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요셉을 낳았으니 영적인 의미로서 합환채를 의인화 하면 합환채가 라헬의 남편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말대로 아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니까 라헬이 합환채로 요셉을 낳았으니까 합환채는 곧 하나님과 같은 것입니다.



르우벤이 합환채를 얻은 때가 언제인가요?

맥추 때입니다.

맥추 때란 오순절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의 오순절에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하나님의 아들들이 생겨나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이러면 라헬이 먹은 합환채는 신약적으로 보면 성령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성령으로 낳아진 자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낳아졌기 때문에 꿈을 꾸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팁이 또 하나 있습니다.



라헬에게 두 남편이 있습니다.

야곱이라는 남편과 합환채라는 남편입니다.

야곱이라는 남편은 아이를 낳을 수가 없고 합환채라는 남편은 아이를 낳게 해 주십니다.



두 남편을 두 예수로 보세요.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는 일을 하십니다.

생명은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 주십니다.



그럼 야곱은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합환채는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옛 언약에 속한 신랑이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새 언약에 속한 신랑이 됩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합환채로 낳아진 요셉이 꿈을 꾸지요.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꿈은 계시이면서 언약을 상징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어떻게 된다고 하던가요?

이상을 보고 꿈을 꾼다고 하지요.

야곱의 12 아들들 중에서 꿈을 누가 꾸나요?

합환채로 태어난 요셉입니다.



하나님은 꿈을 준 자를 어떻게 하나요?

꿈이란 언약을 말합니다.

그럼 언약을 받은 자는 버려짐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누구로부터 버려짐을 당합니까?

형제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언약을 이루고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품은 예수를 형제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셨지요.

그러자 누가 핍박하나요?

법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성령 강림으로 생겨난 초대 교회 성도들이 누구로부터 죽임을 당합니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요셉이 합환채로 낳아진 것은 성령으로 낳아진 것과 같아요.



그래서 육적으로 낳아진 형제들이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도 성령으로 낳아진 성도들을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핍박을 했어요.

하나님은 성령으로 낳아진 자를 가지고 언약의 후손들을 은혜와 용서와 긍휼의 자리로 끌고 오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영에 속한 자들이 육에 속한 자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모습으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자기 백성이 누구인가요?

언약의 후손입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에는 이들이 유대인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걸 야곱의 집안 속에 그려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예수님의 초림 때에는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모든 성경은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이 깨달아 질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백성들 구원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런 구조를 누가 만들었나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일을 펼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 아들의 죽음으로 너희가 구원을 받았다는 이 사실을 알리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교회가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용서를 받은 자들이 모인 은혜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로 모인 자들은 모두가 예수그리스도 한 분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이고 천국입니다.



그럼 합환채로 낳아져서 하나님의 꿈을 맡은 자는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지를 살펴봅시다.



본문 2절을 봅시다.



창 37:2절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요셉이 무슨 일을 하는가요?

그 형제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는 일을 합니다.

형제들이 양을 치는데 요셉이 가만히 보니까 올바르게 치지 않는 것입니다.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양을 치던 방식으로 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고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고자질하는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주의자들의 신앙을 책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주의자들을 책망하지요.

책망한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여야 하는데,

율법주의자들은 백성들을 법 아래 가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게 외식 신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의 신앙을 한마디로 하면 외식입니다.

외식이란? 마음에도 없는 것을 연기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요셉이 합환채로 낳아진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그 형제들은 육으로 난 자들이 되겠지요.

이러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가 육적 신자들의 신앙을 고발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그대로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셨어요.

이러면 유대인들은 전부가 육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고발하였던 것입니다.



이걸 빛이 어둠에 비추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빛이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어둠이에요.

빛과 어둠은 충돌할 수 밖에 없어요.

이게 지금 언약의 가문인 야곱 집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2기 인생을 사는 자라고 하였잖아요.

야곱의 1기 인생은 어둠이고 육이었어요.

야곱의 1기 인생은 율법 아래 있는 것과 같아요.

야곱의 2기 인생은 새 이름으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새 이름은 거듭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옛 사람을 상징하고 이스라엘은 새 사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새 사람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의 인생을 요셉이 대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육으로 낳아진 그 형제들의 과실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었고 급기야는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했어요.

지금도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들이 옛 언약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해요.

이게 요한계시록 11장의 두증인 들입니다.

두 증인들이 죽은 장소가 어디인가요?

교회에요.

그런데 그것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고 주가 죽으신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영적으로 하면 구약과 신약은 같다는 뜻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영에 속한 자들이 육에 속한 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였어요.



가인이 아벨을 죽였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였고,

에서가 야곱을 죽이고자 하였고,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고,

북쪽 이스라엘이 남쪽 유다를 멸망시키고자 하였고,

초림 때는 육적 유대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죽였고,

재림 때는 옛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이 새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을 죽여요.



우리가 누구 손에 죽임 당하는가 하면 교회 안에 옛 언약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죽임을 당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의인은 예루살렘 밖에서 죽임 당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의인들의 피가 소리친다고 하였어요.

종말에는 음녀가 성도들이 피에 취하여 있어요.



이 시대 육적 목사들이 성도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나요?

땅으로 데리고 가지요.

이 세상에 복을 준다고 미혹하잖아요.

이게 요셉의 형제들이 양 떼를 잘못 치고 있는 과실과 같아요.



교회는 하늘에 속하였어요.

그런데 거짓 종들이 교인들을 세상의 떡으로 미혹하는 것입니다.

땅에 붙잡아 두는 것입니다.

이걸 참 종들이 고발을 합니다.

그럼 거짓 종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미워하겠지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장에서 두 증인들이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속한 자로부터 죽임을 당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들의 과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른 말 하니까 듣기 싫지요.

적개심이 들지요.

너는 잘하느냐고 따지고 싶지요.

그게 바로 빛이 어둠에 비취니까 어둠이 빛을 미워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러잖아요.

정 목사 당신은 그럼 잘하느냐!

욕하잖아요.

저도 제 설교에 고발을 당하고 있어요.

목사가 설교를 하는 것은 자기가 잘하여서 하는게 아니에요.



그 어떤 인간도 말씀 앞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인간은 근본 자체가 죄인이에요.

죄인은 태생적으로 말씀대로 살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바른 설교를 해야 하는 것은 말씀이 우리의 허물을 고발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잘못을 고발하다가 교인들 손에 죽임 당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게 선지자적 사명이에요.



귀에 듣기 좋은 설교를 찾지 마세요.

설교는 아파요.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듣기 좋은 말을 하지 못하게 하여야 해요.

듣기 싫지만 바른 소리 해 달라고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가 살아요.



이 시대는 책망이 사라졌어요.

마치 요즘 젊은 세대들이 아이들을 버르장머리 없이 키우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짐승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회초리가 사라지면 짐승이 되어요.



인간은 짐승으로 태어나요.

짐승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회초리에요.

그런데 인권 인권하면서 회초리를 버렸어요.

그러니까 세상이 지옥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보세요.

천국인가요?

지옥인가요?



아이들이 말을 듣는가요?

안 듣잖아요.

저걸 왜 낳았는가 한 숨을 쉬잖아요.

그게 모두가 자식들을 회초리로 키우지 않아서 그래요.



학교에서도 체벌이 사라지니까 아이들이 짐승이 되는 것입니다.

체벌하고 폭력은 달라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행하는 것은 체벌이에요.

체벌은 사랑의 매에요.



그런데 이 시대는 일부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짐승들이 선생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체벌을 하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잖아요.

선생님들이 회초리가 몽둥이가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체벌을 금지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이 되고 급기야 교실에서 회초리가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회초리가 사라진 결과가 어떤가요?

개판이지요.

학생이 선생을 때리는 세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부모라는 작자가 아이에게 매를 댔다고 선생을 두들겨 패는 세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무관심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중학교 선생님이 계시는데 고충을 토로하는 걸 들었어요.

과거엔 사명감이 있었는데 이제는 없다고 해요.

사명감으로 가르치면 학생들과 싸워야 하는데 그럼 학교에 붙어 있지를 못한다고 해요.

과거에는 교사로서의 자긍심이 있었는데 이젠 자괴감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젠 학교가 직장이고 교사가 직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 달 일하고 댓가를 챙기는 월급쟁이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젠 하루 하루가 아무런 탈 없이 지나가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지금은 아이들을 훈육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훈육이 안 되는데 학교에서 되겠어요.

자기 부모의 말도 안 듣는 새끼들이 선생님 말은 듣겠어요?

안 들어요.

그런 새끼들이 사회에 나오니까 세상이 이렇게 개판이 되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 죄악이 관영 하였듯이 지금도 죄악이 관영해지고 있어요.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일들이 온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세상이 지옥이에요.



어미가 보험금 타려고 자식을 죽이질 않나,

자식이 재삼이 탐나서 부모를 죽이질 않나,

아내가 남편을 돈 때문에 죽이고,

남편이 아내를 돈 때문에 죽이고,

진짜로 집안 식구들이 원수에요.



인간들이 마귀에요.

이게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왔어요.

교인들이 목사의 말을 듣고자 하지 않아요.

바른 소리 하면 교회를 옮기잖아요.

그래서 바울은 종말에 고통하는 때가 오는데 사람들이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좇을 선생을 많이 둔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자기를 알아주는 목사를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말씀에 관심이 없어요.

교회를 찾는 것도 말씀하고는 상관없어요.

자기에게 잘해주고 귀에 달콤한 말을 해주는 목사기 필요해요.



이 시대 목사는 목회를 잘하면 되어요.

사람 비위 잘 맞추면 교회는 부흥되게 되어 있어요.

목사는 설교자이지 목회자가 아니에요.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이지 교인들 비위 맞춰 주는 자가 아니에요.



목사와 목회자를 구분하세요.



목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이고,

목회자는 교회를 운영하는 자에요.

목사는 성도들의 영혼을 위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는 자이고,

목회자는 교회라는 조직을 위하여 교인들을 다독거리는 자들이에요.



이 시대는 목회자가 강단을 차지하고 있어요.

이걸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늘에서 떨어진 별들이 쑥물을 먹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쑥물을 먹이니까 교인들이 영혼들이 죽는 것입니다.

이걸 요한계시록 18장에서는 음녀가 성도들의 피에 취하여 있고 사람들의 영혼을 사고판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왜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버려짐을 당했나요?

예수님이 왜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했나요?

두 증인들이 왜 교회에서 죽임을 당하는가요?

모두가 형제들의 과실을 고발하다가 죽임을 당했어요.



이러면 정답이 하나 나오지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 자는 바른 말 하다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공식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에 미움을 받아도 그들을 미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은 죄로 말이에요.



그럼 이제부터 요셉이 꾼 꿈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꿈은 내가 꾸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꾸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의 꿈은 하나의 계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게 되면 꿈을 받습니다.

그 꿈은 앞 날을 예언하고 있어요.



요셉이 어떤 꿈을 꾸었나요?



본문을 봅시다.



창 37:5-11절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요셉은 같은 내용의 꿈을 두 번 꿉니다.

처음 꿈은 땅에 꿈입니다.

밭에서 곡식을 추수하는데 요셉의 곡식단이 중앙에 서고 그 형제들의 단은 요셉의 단을 둘러싸고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꿈을 꿉니다.

이번에는 하늘에 꿈입니다.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을 하는 것입니다.



두 꿈 모두가 요셉이 형제들의 주가 되는 꿈입니다.

그런데 이 꿈을 야곱은 마음에 담아 둡니다.

이는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을 때 아버지 이삭이 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7장을 봅시다.



창 27:21-29절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 22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23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24 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25 이삭이 가로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26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 맞추라 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 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어느 날 리브가가 이삭과 에서가 하는 말을 엿 듣게 됩니다.

그 내용은 이삭이 눈이 어둡고 기력도 쇠잔해 가서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큰 아들 에서에게 가문을 맡기고 쉬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 와서 가문을 인수인계 하는 위임식을 하자고 합니다.

이에 에서가 들에 사냥을 나갑니다.



이삭과 에서의 대화를 들은 리브가는 두 아이를 임신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계시는 작은 자가 이삭의 가문을 이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야곱에게 이 가문은 네가 이어가야 한다고 하면서 염소 우리에 가서 실한 놈으로 잡아 오라고 합니다.

그럼 내가 아버지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줄 테니까 너는 그걸 들고 가서 에서가 받아야 할 축복을 네가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엄마!~ 나는 매끈매끈하고 형은 털이 많아서 아버지가 내 손을 만져 보면 금방 탄로가 날 텐데,

그럼 나는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 텐데 싫다고 합니다.

그러자 리브가가 염소 털로 매끈매끈한 부분을 다 감추어서 형 에서가 입던 장자의 옷을 취하여서 야곱에게 입혀주고는 신신당부합니다.

너는 지금 형 에서의 옷을 입고 나가는 것이므로 야곱이 아니고 예서야,

그러니까 아버지 앞에 가서 야곱이라 하지 말고 “아버지의 맏 아들 에서로소이다” 라고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에 야곱이 엄마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의 맏 아들 에서로소이다’ 라고 하고 나아갑니다.

그러자 이삭이 어~ 이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어찌 ‘에서’ 라고 하느냐,

그래서 가까이 오라고 하면서 손을 만져 봅니다.

그리고는 야곱이 입고 온 옷의 냄새를 맡고서는 으음~ 이건 에서의 옷이 맞는데 라고 하면서 야곱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축복의 내용이 이상합니다.



29절을 다시 봅시다.



29절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겠고 열국이 굴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어미의 아들들이 굴복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건 뭔가 이상합니다.

형제들의 주가 된다고 하는 것과 어미의 아들들이 굴복한다는 말입니다.



야곱에게는 형제라고는 형 에서 하나뿐입니다.

그럼 단수적으로 네 형의 주가 될 것이라고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복수적으로 형제들의 주가 된다고 합니다.

형제들이라는 말은 복수의 여러 형제들이 있어야 합니다.

형제라고는 달랑 형 하나뿐인데 많은 형제들이 있다고 하니까 이상합니다.



그리고 어미의 아들들이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어미는 리브가입니다.

알다시피 리브가는 에서와 야곱 둘만 낳았습니다.

그럼 어미의 아들들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미의 아들들이 굴복을 하고 형제들의 주가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받은 축복을 야곱에게서 나온 자가 이룬다는 뜻입니다.

야곱에게서 나온 자는 많은 형제들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많은 어미의 아들들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야곱의 2기 인생을 살아가는 요셉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삭의 축복은 요셉에게 적용해 보세요.

그럼 딱 들어맞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주가 되었습니다.

어미의 아들들이 굴복을 하였습니다.



언제 굴복합니까?

장차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굴복합니다.

이걸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고 나자 하나님이 그를 높여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자면 먼저 애굽으로 내려가는 일이 일어나야 하잖아요.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죽임당하는 것을 말해요.

죽음에서 살아나야 주가 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만유의 주는 죄와 사망 권세까지 굴복을 시켜야 하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요셉을 죽였다가 살려내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애굽으로 종으로 팔려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은 삼십에 팔려서 죽임 당하는 것과 똑 같아요.

예수님이 죽음 속에 들어가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부활 시키셔서 만유의 주로 삼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신자이든 불신지이든 주님이에요.

신자에게는 구원주로서 주인이시고, 불신자에게는 마귀를 이기셨으니까 주인인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난 후 온 세상의 주가 되지요.

언약의 후손들에게도 주가 되고 비 언약 백성들인 애굽 사람들에게도 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두 꿈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실현 하자면 먼저 죽어야 하겠지요.

누구에게 죽임 당합니까?

자기 형제들이에요.

그래야 나중에 그들에게 용서와 긍휼이 부어져요.



구원이란? 긍휼을 입는 것이고 용서 받는 것입니다.

이건 죄인에게만 주어져요.

죄인은 예수를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기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아는 자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구원을 베풀 자기 백성들을 먼저 죄 아래 가두는 일을 하셔야하겠지요.

그것이 예수를 죽이는 일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건 중요하니 되새기는 의미로 다시 반복하고 마칩시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왜 죽였나요?

시기해서 죽였지요.

왜 시기했나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버지가 채색 옷을 입혀주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은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 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러면 요셉을 죽인 것은 야곱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편애를 했기 때문에 형제들의 시기심이 발동을 한 것입니다.

만약에 야곱이 다른 아들들과 똑 같이 요셉을 대하였으면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거나 미워할 이유가 없어요.

그럼 죽이지 않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드러내 놓고 편애한단 말입니다.

이것은 형제들로 하여금 요셉을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요셉을 형제들의 주가 되는데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해 주는 방식으로 전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유대인들이 예수를 왜 죽였나요?

한마디로 잘난 척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보내셨지요.

이건 미운 오리 새끼로 보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넘어뜨리려면 그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 주셔서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능력을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고발하게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화를 돋운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햐서 형제들의 화를 돋운 것과 같이 말이에요.

그러자 형제들이 화가 나서 요셉을 죽였듯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요셉 앞에 형제들이 죄인이 되었듯이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에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형제들의 운명은 요셉이 쥐고 있고,

유대인들이 운명은 예수님이 쥐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하면 용서가 되고 용서치 않으면 저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하고,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용서 하셨어요.

이렇게 될 때 그들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종의 형체로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가 살려내셔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시고 온 족속으로 하여금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주라고 시인하게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죄를 조성하신 것이 아니에요.



죄란? 하나님이 하는 일을 못 마땅히 여기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하는 일을 못 마땅히 여깁니까?

자기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는 일이 못 마땅한 것입니다.

이게 죄에요.



하나님은 형제들 속에 죄를 끄집어내고자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고 반발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혀 주었다고 해도 그냥 사랑으로 받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런데 형제들 속에 있는 죄가 자기들하고 다름은 용납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하는 일이 못 마땅했고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은 놈을 죽이는 것으로 나는 죄 아래 있는 놈입니다 라고 드러낸 것입니다.



요셉이나 예수님은 형제들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기 위한 미끼에요.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죽임 당하였어요.



아벨을 보세요.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니까 가인이 뚜껑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인 제사도 받았으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않았어요.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하나님이 가인과 아벨을 달리 대우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하나님이 아벨을 편애하지 가인 속에 있는 죄가 부글 부글 끓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돌로 쳐 죽였다는 것은 잔인하게 복수 하였다는 뜻이에요.

가인은 하나님을 죽인 것입니다.



아벨의 자리에 요셉이 있었고,

요셉의 자리에 예수님이 계셨어요.

가인의 자리에 요셉의 형제들이 있었고,

요셉의 형제들이 자리에 유대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자리에 두 증인들이 있고 유대인들이 자리에 육적 신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이 핍박을 해요.

복음을 전하면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핍박해요.

하늘에 가치로 살면 땅에 가치로 사는 자들이 핍박해요.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고 교회에 충성해 보세요.

그럼 은혜 받지 못하고 충성 하지 않는 자들이 질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 자들은 항상 고난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죄악된 세상 속에서 펼쳐가는 창세전 언약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고난을 축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복을 보세요.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잖아요.



요한계시록이 주어지면서부터 요한계시록의 복 안에 있는 자들은 죽임을 당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삶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낙망치 말고,

모두가 요셉처럼 사랑을 받고 꿈을 품고 있기 때문에 당하는 아픔이라 여기시길 바랍니다.



사랑 받았으니 아픔을 당하는 것이니까 믿지는 장사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는 족히 비교가 되지 않으니까

복음 전하다가 욕 들어 먹고 핍박을 받더라도 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은 값이라 여기세요.



주님이 곧 오시니까,

주님이 오시면 환란 당한 자들에게 안식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 받음에 감사하면서 그 날을 소망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요셉을 야곱의 약전으로 살게 하셨듯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의 약전으로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미흡하고 서툴지만 아버지께서 주신 은혜로 잘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다고 하여도 이 모두가 하늘에 꿈을 받았기에 나타나는 것임을 깨닫게 하여서 범사 속에서 감사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드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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