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강. 야곱의 고난과 에서의 형통 (창 36장)
-.정낙원 목사
성경을 보면 두 부류의 인간이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입니다.
이를 언약의 후손과 비 언약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언약의 후손은 고난을 당하고 비 언약의 후손은 형통함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야곱과 에서를 통하여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언약의 후손이고 에서는 비 언약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둘의 삶을 추적해 보면 야곱은 고난의 길을 걷는데 에서는 형통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 후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에서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문이 화려합니다.
수많은 족장들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에서의 가문이 번성하였다는 뜻입니다.
형통하였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복은 땅에 속한 복입니다.
가축 떼가 많고 자녀들이 번성하면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에서의 가문은 복을 받은 가문입니다.
물론 야곱의 후손도 번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후손들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였습니다.
이건 형통이 아니고 고난입니다.
고난과 형통 중에서 어떤 것이 좋은가요?
우리더러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열이면 열 모두가 형통을 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난은 싫어하고 형통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과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통 그러면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잘 풀리고 하는 일마다 잘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좋고 나쁨을 우리 몸 중심으로 판단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면 우리의 뜻은 차압당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없고 언약을 위하여 간섭당하는 것으로 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형통이라고 합니다.
요셉을 보면 아무런 잘못도 없이 애매히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요셉에게는 분명히 고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여서 형통했다고 합니다.
어떤 형통인가요?
먼저 창세기를 봅시다.
창 39:2-3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창 39:23절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팔려 갔습니다.
어느 날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붙잡고 자기와 통간 하자고 합니다.
그러자 요셉은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주인을 욕되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을 합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이걸 모함합니다.
꺼꾸러 요셉이 자기를 겁간하고자 하였다고 하면서 옥에 집어넣습니다.
요셉은 애매히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함으로 범사에 형통하였다고 합니다.
무슨 형통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으로서의 형통입니다.
우리가 아는 형통과 다릅니다.
우리가 아는 형통은 우리 뜻대로 일이 잘 풀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하는 형통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시편 105편을 봅시다.
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요셉은 애매히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이 감옥에서 살았던 삶을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언약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단련을 하였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언약으로 낳아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요셉과 같이 언약을 위하여 하나님께 인생을 차압당하고 간섭당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범사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형통의 길입니다.
그 길이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일수도 있고 푸른 초장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경과 역경으로 가지고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를 일컬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간다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잘못된 생각들을 고침 받아야 합니다.
세상적 가치로 우리 인생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언약적인 관점에서 우리 인생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실족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시면 믿음으로 살아간 성경의 여러 위인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모두가 언약을 위하여 자기 인생을 차압당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믿음이 이들을 언약의 길로 인도 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들 중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도 언약을 위하여 차압당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원함과는 반대로 인도 하십니다.
왜 그러느냐?
하나님은 죄인의 세계가 확장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흥왕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죄인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인간들이 좋아하는 형통으로 인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원함과 정 반대로 인도하십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우리는 세상에서 잘되면 백발백중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이게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은 부요하면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을 고발해 주는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은 부요해서 망했습니다.
사사기를 보세요.
사사기는 인간들의 실존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부요와 타락 그리고 징계와 회개의 역사를 순환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가 그대로 이스라엘의 열 왕들의 역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열 왕들의 역사는 사사기의 역사를 그대로 반복하는 역사입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이고 인간은 똑 같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자기 몸뚱이를 신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지고 인간은 등 따습고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떠나는 자라는 것을 고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십일을 주리신 후에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습니다.
마귀가 떡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십니다.
마귀는 생존을 위하여 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언약을 위하여 사는 자라고 합니다.
마귀와 예수님의 대화는 인간의 실상을 고발하는 동시에 인간의 존재 목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귀는 인간들이 신을 찾는 이유는 떡을 위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언약을 위하여 다스리고 있다고 합니다.
마귀와 예수님의 대화는 동상이몽입니다.
마귀는 머릿속으로 떡을 그리고 있고,
예수님은 머릿속으로 언약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떡은 배부름을 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의 뜻을 멀리하고 자기 몸뚱이를 위하여 살게 만든 것입니다.
죄가 주객을 전도시켜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도 시켜 놓은 것을 원래의 자리로 되찾아 주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을 마귀로부터 시험 당하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이기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한 마디로 하면 떡입니다.
이 시대 말로 하면 돈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떡을 위하여 언약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한 자리에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는 것입니다.
마귀는 구약 이스라엘을 떡으로 넘어지게 하였듯이 예수님도 떡으로 넘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너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그럼 잘 살아야지’ 라고 합니다.
그럼 내 말을 들어 ‘내가 너를 세상에서 잘 살게 해 줄게’ 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면서 마귀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인간의 창조 목적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먹고 배부름을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가는 자라고 합니다.
마귀는 배부름을 위하여 하나님을 찾게 만듭니다.
이게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이용해서 네 육신의 평안을 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을 타락케 할 때 쓰던 멘트입니다.
이러한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이 신을 찾는 배경입니다.
이걸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
예수를 배부름으로 찾는 자들은 모두가 우상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말의 교회를 음녀라고 하는 것은 떡을 찾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하나님에게 하나님이 왜 날 구원을 하였는지에 대하여 물어야 하는데,
하나님 날 구원해 주었으니 떡 주세요 라고 하고 있습니다.
물에 빠진 놈을 건져 놓으니까 보따리 내어 놓으라는 심보입니다.
이게 불의이고 죄입니다.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떡을 달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거짓 목사들이 떡 주는 예수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몸뚱이 편하게 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거래하는 신앙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위하여 충성을 할 테니까,
하나님은 내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업이 잘 되게 해 주고,
자식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게 해 주고,
좋은 신랑감 좋은 신부감 만나게 해 달라고 하고,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으로 성공하게 해 주고,
무병장수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습니다.
언약은 약에 쓰려고 해도 안 보입니다.
하나님 손에는 언약이 한 보따리가 들어 있는데 찾는 이가 없습니다.
마귀를 찾는 이가 많지만 하나님은 찾는 이는 적습니다.
떡 주는 교회는 문전성시를 이루는데, 언약을 외치는 교회는 썰렁 합니다.
이게 종말의 교회 모습입니다.
그래서 종말의 타락한 교회를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합니다.
교인들 마음속에 재물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단의 조치를 강구합니다.
자기 백성들을 갈구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원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간섭하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에게는 고난인 것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잘 된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간섭해서 엄청난 고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설령 겉으로는 성공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 성공이 어떤 결과를 낳는가 하면 엄청난 재앙을 불러 오는 일들을 하게 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루어가는데 있어서 한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그 법칙이 뭐냐?
바로 언약입니다.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언약대로 다스려 가는 것입니다.
언약을 위해서 이방나라도 들어서 쓰십니다.
이스라엘이나 이방나라나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위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는 이스라엘과 이방나라의 전쟁의 역사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나라의 전쟁을 통해서 언약을 이루어 왔습니다.
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언약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구약과 신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육이고, 신약은 영입니다.
육은 허상이고, 영이 실상입니다.
하나님은 육을 가지고 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육으로는 안 되고 영으로만 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육은 인간을 말하고, 영은 하나님을 말합니다.
구약은 인간의 역사이고, 신약은 영이신 예수님의 역사입니다.
구약은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간섭을 해 주어도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신약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영이신 예수님이 하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이 영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은 법이고, 신약은 은혜입니다.
구약이라는 옛 언약은 버려짐과 소멸의 언약이고,
신약이라는 새 언약은 되찾음과 채워짐의 언약입니다.
옛 언약이라는 율법은 죄와 사망에 가두어지는 언약이고,
새 언약이라는 은혜는 의와 생명으로 살아나는 언약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시간은 마이너스로 까먹는 것으로 진행이 되지만 신약은 시간을 더하기로 채워가는 것으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복은 육적으로 세상에서 잘 되는 물질(떡)의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더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는 망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진짜 복은 이 세상에 속한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산상보훈의 8복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신약의 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8복은 모두가 영적인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영적인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복은 영적인 것입니다.
이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땅의 것은 거두어 가시고 하늘의 것으로 채우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쉼을 주십니다.
육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언약을 위하여 살도록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떡을 위하여 사는 사람과, 말씀(언약)을 위하여 사는 자가 있습니다.
자기 생존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가 있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가 있습니다.
우린 모두가 생존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네 생존을 위하여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라고 간섭을 하십니다.
이게 언약 백성들의 이 세상에서의 운명입니다.
예수님은 언약 백성의 운명을 그대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약을 위하여 사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빌립보서 2장을 봅시다.
빌 2:5-1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예수님을 뭐라고 합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사셔도 됩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살던 하나님 나라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 세계에 오신 것입니다.
이걸 자기 비움이라고 합니다.
왜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나요?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우리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구원 받은 성도들 안에 하나님의 소원을 두고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몸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왜 구원을 받았는지 기억하고 생명의 말씀이 헛것이 되지 않도록 달음질을 잘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잘 믿으라는 말입니다.
예수 잘 믿는 것이 뭐냐?
자기 몸을 믿음의 제물로서 관제와 같이 드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림으로 창세전 언약을 이루었듯이 하나님은 구원을 받은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언약을 위하여 살도록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는 이유는 성경 속에 성도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성경대로 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성경대로 다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성경대로 사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오셨고
성경대로 죽으셨고
성경대로 살아나셨고
성경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경대로 다루어 가십니다.
우리 역시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창세전 언약대로 간섭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자는 예수님과 같은 운명으로 간섭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얘야~! 너는 창세전에 영생 받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간섭당하는 것이야!’ 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택한 자와 유기된 자의 모형입니다.
야곱은 언약을 위하여 자기 인생이 차압당하여서 이 세상에서 망하는 삶을 살았고,
에서는 떡을 위하여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살았습니다.
야곱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고 에서는 마귀에게 속한 자입니다.
야곱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았고,
에서는 이 세상의 주인으로 살았습니다.
야곱은 하늘에 있는 성을 바라보고 살았고,
에서는 이 땅에 성을 짓고 살았습니다.
하늘나라 백성들은 이 땅에 분깃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이 세상에서 빼내심을 입고 하늘나라로 가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구약 이스라엘에게는 출애굽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서 애굽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빼내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애굽은 세상 나라가 되고 광야는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 나오자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모세를 시내산 위로 부릅니다.
이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너희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시내 산을 옆으로 눕혀 보세요.
그러면 시내 산 꼭 대기는 가나안으로 나타나고 시내 산 아래는 광야가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구원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가나안 땅으로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날마다 떠나는 삶으로 간섭 하신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보세요.
떠나는 삶을 살았습니다.
먼저는 본토 친척 아비 집으로부터 빼내심을 입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나안에 들여보내 놓고서는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보여주시고는 세상에 정착하지 말고 떠나는 삶을 살도록 간섭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장막 생활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에서의 후손들은 세일산에 거점을 확보하고서 모두가 승승장구하여서 이 땅에 붙박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맨 날 떠나는 삶을 강요당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에서는 이 세상에 속한 자이고 야곱은 하늘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를 보여주는 시청각 교제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운명으로 간섭당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언약의 후손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 입장에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이 세상에서 승승장구하게 해 주시겠구나’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간섭합니다.
세상에서 승승장구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고 정착하지 못하게 자꾸만 흔들어 대십니다.
흔들면서 너희의 분깃은 하늘에 있고 이 땅에 없다고 합니다.
이게 우리에게 엄청난 고난인 것입니다.
우린 승승장구하고 싶은데 하나님은 자꾸만 흔들어 제끼니까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이걸 시편 기자는 눈물 골짜기를 통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지금까지 눈물 골짜기를 통행하였고 여전히 통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통행은 죽어야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 길이 영생으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멸망으로 가는 문은 크고 그 길은 넓습니다.
하지만 영생으로 가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합니다.
우린 크고 넓은 길로 다니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좁고 협착한 길로 인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좁고 협착한 길로 인도하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무슨 이런 사랑이 있나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이 다 이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좁고 협착한 길로 인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일컬어 하늘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 더러 이들이 걸어간 길을 걸어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원함과 반대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이 세상으로부터 빼내심을 입고 버려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이 망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뽑혀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벨론에 멸망당하여서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이 바벨론입니다.
우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자들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살았어요.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의 모습이 예수님 초림 시에는 로마로부터 식민지 생활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육적으로는 로마의 식민지였고, 영적으로는 율법 아래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 유대인들은 영육 간에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면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서 부국강성한 나라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매불망 메시야 오기만은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혜성같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풍랑도 잠잠케 하면서 갖가지 기적을 일으키고 놀라운 일들을 일으키니까 백성들은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아~! 이 분이 우리를 로마로부터 해방 시켜주는 메시야이구나!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자기들의 옷을 펴서 맞이하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열렬히 환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고 한단 말입니다.
로마와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유대교의 율법신앙을 허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민족을 단결시키는 것이 아니고 분열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 기대가 배신으로 돌변하여서 십자가에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죄 값으로 성전은 파괴시키고 이스라엘을 온 세계로 흩어버립니다.
제 2의 바벨론 포로 생활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게 2000년 신약의 역사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이스라엘의 복역의 때와도 같습니다.
참 감람나무 비유로 보면 유대인은 2000년 동안 복역을 하고 이방인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제 구약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을 당한 후에 때가 차서 70년 만에 포로에서 해방이 되었듯이 신약에서도 때가 차면 유대인들에게도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이 믿어지게 되는 구원의 은혜가 베풀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육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 이스라엘 속에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신앙의 회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일어나게 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육적 이스라엘 속에서 영적 이스라엘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로마서 11장에서 참 감람나무 접붙임 비유에서 엄위에 거하다가 잘려나간 자들이 인자로 접붙임을 당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무슨 이런 사랑이 다 있나요?
이건 저주이지 사랑이 아니에요.
그러나 성경은 이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해요.
그럼 우리는 하나님 사랑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실족하지 않습니다.
모르면 실족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걸 사랑으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작정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작정대로 야곱과 에서를 간섭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을 떠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미움은 이 세상 기운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에서는 땅에 복을 쫓아가게 하였고, 야곱은 하늘에 복을 쫓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는 육적으로 만사형통으로 살아가는데 야곱은 고난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간섭으로 나타나고 미움은 유기로 나타납니다.
에서는 하나님이 유기하니까 자기 맘대로 승승장구하여서 땅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이 간섭을 하니까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간섭하지 않았으면 야곱이 에서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 야곱은 하나님 나라를 잊은 채 땅 강아지 마냥 저주의 기운으로 살다가 영원한 지옥으로 향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자기 뜻대로 살아가도록 둘 수가 없어서 저주의 기운으로부터 떠나도록 간섭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장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야곱은 장자가 되면 아버지 집을 물려받아서 부자가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회적 배경을 보면 장자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틈만 나면 형의 장자권을 빼앗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 속에 영적 장자를 심어 놓았습니다.
영적 장자는 이 땅에 분깃이 없습니다.
야곱은 세상의 육적 장자를 꿈꾸었는데,
하나님은 그걸 역 이용하여서 하나님 나라의 영적 장자의 길을 가게 하신 것입니다.
육적 장자는 세상 것을 움켜잡는 것인데,
영적 장자는 세상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건 인간의 생각에 반하는 길입니다.
이 길을 인간들 스스로가 갈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육적 장자는 세상에서의 형통으로 나타나고 영적 장자는 고난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에서는 떡을 얻고자 장자권을 버리는 것으로 나타났고,
야곱은 장자권을 얻고자 떡을 버리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떡을 얻고자 장자권을 버린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합니다.
이는 마귀의 자녀로 저주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떡을 버리고 장자권을 택한 야곱의 행동을 지혜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러한 행동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섭을 하신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세상 것을 버리고 하늘에 것을 쫓아가도록 간섭을 하신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교회 안에 두 부류의 신자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야곱의 계열이 있고 에서의 계열이 있습니다.
이삭의 집안에 육적 장자와 영적 장자가 있었듯이 교회 안에도 육적 장자와 영적 장자가 있습니다.
땅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가 있습니다.
에서의 계열과 야곱의 계열은 동상이몽이에요.
에서의 계열은 땅에 복을 쫓아가고,
야곱의 계열은 하늘에 복을 쫓아갑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하세요.
똑같이 하나님을 찾아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이 어떠한가를 쫓아가고,
어떤 사람은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잘살까 생각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함으로 예배하고,
한 사람은 ‘나 이렇게 하였으니 복 주세요’ 라고 거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 바꿔져요.
그 안에 속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자는 땅에 것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고,
영에 속한 자는 하늘에 것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 안에 시스템이 그렇게 내장이 되어 있어요.
에서 속에는 떡을 쫓아가는 시스템이 내장 되어 있고,
야곱 속에는 장자권을 쫓아가는 시스템이 내장이 되어 있어요.
그러나 각자 내장된 시스템을 따라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각자 믿음대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해보면 분명하게 드러나요.
언약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떡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누가 떡을 쫓아간다고 해서 나무라지 마세요.
그 사람이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에게는 떡이 생명인데 어찌 떡을 버리라고 할 수가 있나요?
없어요.
소는 풀을 먹고 사자는 고기를 먹듯이,
땅에 속한 사람은 땅에 떡을 쫓아가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에 약속을 쫓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록 하늘에 속한 성도라 할지라도 육신이라는 몸뚱이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뚱이는 떡으로 살지 말씀으로 살지 않아요.
떡을 안 넣어 주면 우리 몸은 난리를 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로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도 우리의 몸뚱이는 이 땅에 것을 쫓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받는 야곱 앞에 형통하는 에서를 세워 놓고 어떤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일인지 살펴봅시다.
에서의 형통과 야곱의 고난을 가지고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사랑과 미움은 세상적으로 반대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이 역설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식으로 야곱에게 주어지는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은 긍휼의 그릇으로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담는 일을 하십니다.
은혜와 긍휼을 다른 말로 하면 용서입니다.
알다시피 야곱은 얍복강에서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신과 싸우는 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이란?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는 우상과 싸우는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우상이란? 다른 하나님을 말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땅에 복을 주는 하나님이에요.
우린 모두가 세상이라는 애굽에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알았던 하나님은 떡을 주는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떡 주는 하나님을 자기 안에 섬기고 살아가고 있어요.
이에 하나님은 찾아 오셔서 나는 너희에게 떡을 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말씀을 주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주신다는 말은 언약을 위하여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나를 위한 하나님을 품고 살아가는데, 하나님은 나는 너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너를 내 언약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건 완전히 우리 생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안에 숨어 있던 죄가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은혜와 긍휼이라는 용서를 준비해 두셨어요.
은혜와 긍휼이라는 용서는 야곱의 죄가 고발이 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고자 그 앞에 에서를 두신 것입니다.
야곱이나 에서나 동일한 인간입니다.
둘 다 죄 아래서 난 자입니다.
야곱도 에서처럼 만사형통하고 싶어 합니다.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에서는 승승장구하게 하는데 자기에게는 날마다 태클을 거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이 차압당하는데 기뻐할 인간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이 기각당할 때마다 하나님을 향한 미움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꼭 꼭 숨어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미움을 끄집어내고자 우리의 원함과 반대 되는 길로 인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고 이용하는 자라는 것을 까발리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은 좋을 때 본심은 드러나지 않아요.
어려울 때 드러나요.
나에게 잘해 줄 때는 내 속에 있는 나쁜 것은 감추어요.
내 속에 나쁜 것은 나를 힘들게 하거나 내 뜻을 방해 할 때 드러나요.
그게 미움이고 악인 것입니다.
우린 다 이 미움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이 미움이라는 악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어버립니다.
넌 마땅히 죽어야 하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이걸 잘 보여주는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이기 전까지는 자기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윗 속에는 간음과 살인이 태어나면서부터 있었습니다.
이게 평상시에는 감추어져 있었어요.
감추어져 있을 때는 자기가 악한 자라는 것을 몰라요.
다윗이 그러하였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너는 원래 악한 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을 하십니다.
여기에 밧세바와 우리야를 미끼로 사용한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보는 순간 그 속에 간음이 밖으로 뛰어 나온 것입니다.
다윗은 밖으로 튀어 나온 간음을 감추고자 우리야를 이용합니다.
그런데 우리야가 말을 듣지 않으니까 다윗 속에 있던 살인이 튀어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야를 죽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다윗은 밖으로 튀어 나온 간음과 살인을 감추고자 합니다.
다윗을 죄를 지으나 안 지으나 살인자이고 간음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속에 품고 있을 때에는 착한 자로 위선을 떨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죄가 밖으로 튀어 나온 겁니다.
이걸 감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착한 자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다윗을 실체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서 자신은 어미 뱃속에서부터 죄를 품고 태어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 안에 선이 없음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나와서 긍휼을 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을 한 것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은 야곱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고자 에서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의 승승장구를 보면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 입장에서는 만사형통하는 에서가 부러울 수밖에 없어요.
상대적으로 매사에 자기 인생에 태클을 거는 하나님이 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야곱은 고난 속에 살아가면서 에서의 형통을 보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만 미워하느냐고 말이에요.
우리도 흔히 그러잖아요?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잘되고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될 것 같으면 하나님에게 따지잖아요.
왜 안 믿는 저 사람들은 저렇게 잘 사는데 우리는 못 사느냐고 불평하잖아요.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이방인과 똑 같다는 말입니다.
이방인과 가치관이 똑 같으니까 원망이 나오고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일평생 우리 안에 죄가 고발당하는 삶이에요.
이게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광야에서 한 일이 뭡니까?
원망이에요.
왜 떡 안 주느냐고 불평했어요.
사도 바울이 마지막에 고백하는 것이 뭔가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였어요.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예수 믿자마자 한 고백이 아니에요.
인생 말년, 즉 죽기 전에 나오는 고백입니다.
흔히들 사도 바울은 온전하게 살지 않았겠느냐 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니에요.
바울이나 우리나 다 같아요.
똑 같은 성정을 가진 자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사도 바울이 우리보다 나은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사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자기는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고 합니다.
자기를 살펴보니까 악당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자기 안에서 터져 나오는 상한 심령의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우리의 고백이에요.
우리도 그런 고백을 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이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세상에서 다루어가는 방식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죄의 깊이를 알아가게 되어요.
옛날에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이제는 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물론 삶에 모습은 예전과 비교하면 나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일어나는 죄의 모습은 상상 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죄라고 여기지 않던 것이 이제는 죄로 보여요.
율법 아래서 알던 죄하고 은혜 아래서 아는 죄는 달라요.
율법 아래서는 행위 차원에서 죄로 보았어요.
그러나 은혜 아래서는 죄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기껏해야 교회 생활 제대로 안한 걸 죄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는 것이 죄라는 것으로 깨달아지잖아요.
어느 정도 사랑해야 하느냐?
무한정이에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게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재주로 이런 사랑을 한단 말입니까?우리가 어떻게 온 마음과 뜻을 다하고 목숨을 버려서 하나님을 사랑한단 말인가요?
우리가 어떻게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한단 말입니까?
못해요.
나는 나를 사랑하지 이웃을 사랑하지 않아요.
원수를 죽이고 싶어하지 원수에게 주린 배를 채우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를 고발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고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는 자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언약 안에서 죄는 사랑 없음이에요.
고린도전서 13장을 보세요.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잖아요.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하고 크고 비밀한 것을 전해도 사랑 없으면 꽝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지갑을 열어서 구제를 하고 큰 일을 한다고 하여도 사랑 없으면 꽝이에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죄가 계속 고발당하는 모습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신약에서의 죄는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안하고 하는 그런 차원을 벗어나 있어요.
우리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 끝에는 사도 바울같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로 끌고 가실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후손들을 추적해 보면 하나님의 사랑과 미움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서 보면 역설적이라는 것으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야곱의 후손은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은 에서의 후손은 형통하였어요.
에서의 족보를 보면 13명의 족장이 나옵니다.
당시의 부족은 나라와 같으니까 족장이라는 말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대통령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가문에서 13명의 족장이 나왔다는 것은 엄청난 가문인 것입니다.
이처럼 에서의 후손들은 세일산을 거점으로 삼고 부국강성은 민족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 하면서 살아가는 동안에 에서의 후손들은 강대국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출애굽을 합니다.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행진을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에 에서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민수기 20장을 봅시다.
민 20:14-21절 “모세가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자를 보내며 이르되 `당신의 형제 이스라엘의 말에 우리의 당한 모든 고난을 당신도 아시거니와 15 우리 열조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우리가 애굽에 오래 거하였더니 애굽인이 우리 열조와 우리를 학대하였으므로 16 우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우리 소리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이다 이제 우리가 당신의 변방 모퉁이 한 성읍 가데스에 있사오니 17 청컨대 우리로 당신의 땅을 통과하게 하소서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나 통과하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공히 마시지 아니하고 우리가 왕의 대로로만 통과하고 당신의 지경에서 나가기까지 좌편으로나 우편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리이다 한다 하라 하였더니 18 에돔 왕이 대답하되 너는 우리 가운데로 통과하지 못하리라 내가 나가서 칼로 너를 맞을까 염려하라 19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우리가 대로로 통과하겠고 우리나 우리 짐승이 당신의 물을 마시면 그 값을 줄 것이라 우리가 도보로 통과할 뿐인즉 아무 일도 없으리이다 하나 20 그는 가로되 너는 지나가지 못하리라 하고 에돔 왕이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강한 손으로 막으니 21 에돔 왕이 이같이 이스라엘의 그 경내로 통과함을 용납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이 그들에게서 돌이키니라”
모세가 에돔 왕에게 우리가 지금 가나안으로 가는데 길을 좀 터 달라고 합니다.
길을 터 주면 값을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모세가 우리는 서로 한 형제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너희 조상은 에서이고 우리 조상은 야곱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애굽에 가서 죽도록 고생했는데 너희들은 잘 살지 않았느냐!
우리가 공짜로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형제애를 생각해서라도 길 좀 비켜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에돔 왕이 안 비켜 주는 것입니다.
안 비켜주는 정도가 아니라 군사들을 이끌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빙빙 돌아서 가게 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누구를 원망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민 21장을 보세요.
민 21:1-9절 “남방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 곧 아랏의 왕이 이스라엘이 아다림 길로 온다 함을 듣고 이스라엘을 쳐서 그 중 몇 사람을 사로잡은지라 2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만일 이 백성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리이다 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붙이시매 그들과 그 성읍을 다 멸하니라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 4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 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길을 우리나라 지도로 비유해서 보면 목포에서 서울 가는 것과 같아요.
목포에서 서울까지 곧장 가면 일주일이면 가는 길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목포에서 부산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부산에서 인천까지 왔습니다.
이제 인천에서 부천을 지나면 곧 서울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에서의 후손들이 부천에 진을 치고서 길을 안 비켜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충청도로 내려갔다가 코스를 바꿔서 다시 과천쯤 올라온 것입니다.
이제 고개 하나면 넘으면 서울에 들어갑니다.
과천이 가나안 남방인 아랏이라는 곳입니다.
아랏 왕이 이스라엘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못 들어오게 지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이 아랏 사람들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십니다.
아랏은 실제적으로 가나안 땅이에요.
그래서 3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붙이시매 그들과 그 성읍을 다 멸하니라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 고 합니다.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호르마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살았던 브엘세바 옆 동네에요.
가나안 땅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대전으로 내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신경질을 내면서 하나님께 항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애들 장난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모세에게 따집니다.
5절을 보세요.
5절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백성들의 원망은 왜 애굽에서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 해 왔느냐?
우리가 언제 가나안에 넣어 달라고 했느냐?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고생고생하면서 여기까지 오게 했으면 들여보내줘야 하지 않느냐!
무슨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지랄이냐고 난리를 칩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러지 않겠어요.
저 역시 이러고도 남아요.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이 하시는 것이 이 놈에 새끼들이 말이 많다고 하면서 불 뱀을 보내서 물려 죽게 하는 것입니다.
아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건 아니지요.
인간의 상식으로 보면 하나님이 잘못하였어요.
그런데 성경은 이스라엘의 잘못으로 규정하고 있어요.
그럼 우리는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딴 식으로 일을 하느냐고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옳음이잖아요.
그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뺑뺑이 돌게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 뱀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에서 살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알다시피 가나안 땅은 인간들 스스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땅이 아니에요.
애굽은 물을 저축하여서 언제든지 농사를 지을 수가 있지만 가나안은 산악지대로 물을 저축 할 수가 없어요.
가나안에서 살려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농사를 지어주시겠지 라는 믿음이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가나안은 광야와 같은 곳이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이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너희들을 먹이고 입히고 마시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면 가나안에 들여보내도 하나님을 원망해요.
하나님이 험한 광야 길로 인도하신 이유는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음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께 순종하면 되는구나 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믿음을 방해하는 것이 자기 생각이에요.
자기 생각을 가지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럼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재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생각이라는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광야 길이고 불 뱀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불평은 평안 할 땐 나타나지 않아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평탄하게 인도 했으면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았어요.
속에 원망과 불평이 있지만 나타나지 않고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숨어 있는 그 원망과 불평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백성들의 생각과 반하는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어요.
자기 몸뚱이 밖에 몰라요.
인간들은 자기 몸뚱이를 편하게 해 주는 신을 원해요.
이건 죄 아래서 난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아는 신입니다.
우상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걸 다른 신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우상의 하나님을 품고 있는 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는 항상 이용대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속에 있는 다른 신을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야곱의 얍복강 사건입니다.
얍복강 사건은 야곱 속에 있는 우상의 하나님을 죽이는 사건입니다.
얍복강 사건은 신관이 바꿔치기 당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인 것입니다.
새롭게 알아진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분이신 것입니다.
여기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죄가 밖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게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정과 욕심을 죽이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려내는 곳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실존을 알리기 위하여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안에 죄를 고발키 위함입니다.
죄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자가 자기 영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을 이용해서 자기 영광을 얻고자 합니다.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상 숭배신앙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이 오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우상 숭배 신앙을 깨트리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다른 신을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가나안 전쟁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대한 아낙 자손들이 살고 있어요.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가나안 칠 족속이 살고 있어요.
이름하여 옛 사람입니다.
우리 옛 사람은 신을 이용해서 신이 되고자 해요.
우리에게 신은 이용 대상일 뿐입니다.
내가 신이 되는데 필요한 도구이고 도우미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나’ 라는 신을 죽이고자 광야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끄집어내는 가장 좋은 곳이 광야 길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닥쳐오면 아파요.
아프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찾는 것이 아니라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찾는 것입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가 좋아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탕자는 밥이 필요했어요.
돼지 밥을 먹다가 보니까 집 밥이 그리운 것입니다.
돼지 밥을 먹으면서 아버지 집에 종들이 먹는 밥이 부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종들이 먹는 그 밥을 먹고 싶어서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하면서 돌아간 것입니다.
탕자가 밖에서 잘 먹어 보세요.
안 돌아와요.
이걸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바로 탕자이니까요.
우리도 비빌 언덕이 있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지금이라도 비빌 언덕이 있어 보세요.
당장 로또 복권 100억이 당첨 되어 보세요.
그 돈 쓸 궁리 하면서 교회를 안 올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안 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주어도 신자에게는 안 주는 것입니다.
흔히들 길몽이라고 하는 조상 꿈을 꾸고 용꿈을 꾸고 돼지꿈을 꾸고 똥 꿈을 꾸어도 안 주어요.
길몽은 내가 꾸었는데 당첨은 옆집 불교 신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난 척 하는 꼴을 못 보세요.
탕자처럼 아버지 집을 떠나서 스스로 성공하는 꼴을 못 보세요.
아버지가 언제 기뻐한 줄 아세요.
탕자가 망할 때입니다.
사기 당하고 돈 떨어 졌을 때입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의 성공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아버지의 은혜를 아는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성공 했으면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럼 아버지의 고마움을 영영 모르고 살게 되어요.
아버지의 은혜는 실패하여야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완전히 실패하여서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하면서 돌아온 아들이 너무나도 고마운 것입니다.
비로소 아버지의 은혜를 아는 아들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고마움을 아는 자리로 자꾸만 밀어 넣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실패의 자리인 것입니다.
실패의 자리가 바로 아버지의 은혜를 아는 자리입니다.
그 길을 광야 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을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을 보세요.
고난의 길로 인도하신 것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사랑입니다.
그럼 광야 길로 인도하는 것도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랑을 수용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안에 우리들의 사랑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준대로 주어지면 사랑이라고 하고 우리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미워한다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준이 틀렸음을 알게 하려고 우리의 원함대로 인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안에 죄가 고발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하고 살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고발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광야 길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린 광야에서 우리 안에 있는 뱀 새끼를 잡아야 합니다.
이 뱀이 언제 나타나느냐 광야 길에 나타나요.
불 뱀을 왜 보냈습니까?
원망하는 자들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원망을 누가 하게 하나요?
우리 안에 있는 죄가 하게 합니다.
그 죄가 바로 불 뱀인 것입니다.
겉으로는 외부에 있는 불 뱀이 물었어요.
하지만 불 뱀은 백성들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 속에 있는 죄라는 뱀을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놋 뱀을 장대에 달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놋 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자 놋 뱀을 쳐다 본 자들은 다 살아났습니다.
놋 뱀을 누가 쳐다보았나요?
불 뱀에 물린 자들입니다.
그럼 불 뱀은 누가 물렸나요?
원망하는 자들입니다.
그럼 놋 뱀은 누구를 살리기 위한 것입니까?
원망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놋 뱀 사건으로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위하여 죽었나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
그럼 예수를 누가 믿습니까?
자기가 죄인인줄 아는 자가 믿습니다.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자는 예수를 안 믿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놋 뱀처럼 십자가에 달았어요.
누굴 살리고자 달았나요?
죄인을 살리고자 달았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만 쳐다보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고발하는 일들을 날마다 벌리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를 고발하느냐?
환경을 가지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이 늘 우리의 원함과 반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함과 다른 인생이 살아지면 우리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뭐 이래?
도대체 하나님은 나를 보고 있기나 하는 거야?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데? 라고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죄에요.
하나님께서 야곱 족속에게 은혜와 긍휼을 담는 일을 하십니다.
은혜와 긍휼은 죄인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은 죄를 이길 수 없다는 처절하게 느끼고 죄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가 미워야 합니다.
상한 심령이 일어나야 해요.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에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누구를 구원하러 왔나요?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왔지요.
예수님 초림 당시에 자기 백성은 누구인가요?
유대인들이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죄인인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지킴이라는 치마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들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 지킴이라는 치마를 확 벗겨 버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 눈앞에서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나탄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자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유대인들이 율법을 근거로 죽인 예수를 그들이 보는 앞에서 부활케 하셨습니다.
율법을 근거로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려 주셨다는 것은 율법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판단 한 것이 죄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모두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면서 유대인들을 자극했을까요?
이는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사기를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기입니까?
율법 속에서는 의가 나오지 않는데 바리새인들은 의가 나오는 것처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인인체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으로는 의를 만들어 낼 수가 없고 도리어 사망을 낳게 된다는 것을 자신이 율법에 의하여 죽임 당함으로서 폭로를 시킨 것입니다.
그것 봐라!
율법으로는 생명을 살릴 수가 없고 죽이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잖아! 라고 고발하신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성령이 뭐라고 하던가요?
너희가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너희가 죽은 예수라고 합니다.
너희가 율법을 근거로 죽였는데 잘못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려서 유대인들 앞에 내 세워서 너희들이 틀렸다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구조로 계속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일부러 유대인들 앞에서 성질을 돋운 것입니다.
다른 날 병을 고쳐도 되잖아요.
그런데 병을 고쳐도 꼭 안식일 날 고치는 것입니다.
이건 약을 올리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참다가 참다가 더는 못 참고서는 참람 죄로 죽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신성 모독죄로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살렸어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유대인들 속에 감추어진 죄를 끄집어내는 미끼로 사용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모두 죄인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왜 그러느냐?
그들이 죄인인줄 알아야 은혜와 용서와 긍휼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게 함으로서 은혜와 긍휼의 자리로 인도한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사도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올라온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어찌할꼬 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어찌할꼬 회개하는 그 자들이 누굽니까?
자기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와 긍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 사랑 법으로 인도 하세요.
시편 73편을 봅시다.
1 (아삽의 시)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12 볼지어다 !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16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아삽이 누구이냐?
요즘 말로 믿음이 좋은 찬양 대장이었어요.
그런데 아삽이 시험에 든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이 자기 생각하고 다르게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는 신앙생활 잘하면 복을 받고 만사형통 되어야 하는데 정 반대인 것입니다.
도리어 신앙생활을 개떡 같이 하는 자들이 흥왕하는 것입니다.
아삽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잘살고 하나님을 안 섬기는 자는 못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에 아삽이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삽은 세상 사람들 관점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는 하나님은 착한 사람에겐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겐 벌을 주는 상선벌악 하는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지금 자기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그게 아닌 것입니다.
착한 사람은 힘들게 살고 악한 놈들은 편하게 산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따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하나님을 잘 섬기겠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이 틀린 것이 아니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소에 들어가서 기도하다가 깜짝 놀랐어요.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역설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고 도리어 반대로 악인이 승승장구하는 구조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왜 그런가 보니까 이 땅에서의 삶이 실상이 아니고 허상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꿈같은 것이란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자 하나님이 이 땅을 저주하였어요.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세상에서 잘 살아봐야 저주예요.
하나님을 떠난 악인들이 아무리 잘 살아보아야 결국은 저주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악인들은 몰라요.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려 주느냐 하면 고난을 가지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의인은 세상에 의지 할 것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세상에서 잘되니까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이고,
의인들은 세상에서 힘드니까 하나님을 찾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진정한 복은 하나님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우리의 인생을 안개 같다고 합니다.
어디 가서 장사를 해서 큰 돈을 벌려고 하니까 하시는 말씀이 잠깐보이다가 사라질 안개 같은 인생들이 무얼 그리 큰 꿈을 꾸고 있느냐고 합니다.
인생은 일장춘몽입니다.
잘 산다고 부러워하지 말고 못 산다고 낙망하지 마세요.
다 꿈이니까.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참고 하세요.
부자가 이 세상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산 것은 우리 인생은 전반전입니다.
그러나 후반전이 있어요.
부자는 후반전이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후반전에는 일대 반전이 기다리고 있어요.
전세가 역전이 됩니다.
후반전에는 거지 나사로가 아버지와 겸상하고 있고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해요.
그것도 영원히 말이에요.
우린 거지 나사로들입니다.
후반전을 기대하면서 전반전을 잘 치러 내시길 바랍니다.
곧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이 될 것입니다.
조금만 참고 견뎌내십시오.
그 날이 곧 가까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까요!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넘침 바 되어져서 우리는 에서의 형통을 부러워하고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헛된 일장춘몽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여전히 에서와 같은 사고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하여 늘 주님의 긍휼과 은혜를 사모하는 상한심령이 우리 안에 일어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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