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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62강.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 (창 35:1-15)

by coroa 2021. 8. 11.

 

 

62강.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 (창 35:1-15)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은 성도의 마지막 길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결론을 이야기 해 주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을 해 내시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야곱은 어머니 태로부터 하나님께 선택을 입은 사람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엄마 뱃속에 태어날 때에 ‘너는 내 것’이라고 찜을 했습니다.

먼저 찜을 해 놓고 그 후에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게 해 준 것입니다.



언약이 먼저이고 존재함이 나중입니다.

언약이 창조를 앞서고 있어요.

창조케 한 것이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먼저이고 만물의 지음이 나중이지요.



우리의 구원도 언약이 먼저이고 구원이 나중인 것입니다.

언약이 있었기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저는 창세전 언약을 깨닫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너무도 기쁘고 감사했어요.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일하심의 스토리에요.

저는 어렸을 때는 한국에 태어난 것을 원망했어요.

어릴 당시에 저의 동네에는 군인들이 많이 진을 치고 있었어요.

그 때 미군들도 있었어요.



미군들을 통해서 초코릿도 얻어먹고 껌도 얻어서 씹고 건빵도 얻어먹었어요.

그럴 때 왜 나는 잘 사는 나라에 태어나지 않고 못사는 나라에 태어났느냐?

미국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매일 초코릿을 먹을 수 있을 텐데 라고 하면서 가난한 나라에 태어난 것을 원망을 했어요.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나서는 내가 이 나라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감사했어요.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복음이 활발하게 외쳐지는 이 대한민국 땅에 태어난 것이 엄청난 행운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거기다가 목사가 되고 목사가 되어도 복음전하는 목사가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지금은 예수님 재림하기 직전의 시대입니다.

종말 중에서도 끝이에요.

이러한 때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감사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 아버지가 58세에 어머니가 47세에 낳았습니다.

늙은 분들이 저를 낳았어요.

그래서 저는 없어야 할 사람인데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없어야 할 사람을 있게 했느냐?

왜 늙은 부모 아래서 낳게 하였을까?

왜 이 세상에 보냈을까요?

단 한가지입니다.

복음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도 창세전 언약을 전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1장을 보세요.



렘 1:4-5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나님이 어느 날 예레미야를 찾아옵니다.

이 때는 예레미야가 청년 시절일 때입니다.

오셔서 하는 말이 예레미야야 내가 너를 복중이 짓기 전에 알았고 네가 엄마 뱃속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합니다.

이건 하나님의 일방적인 통고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의논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캐스팅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구원의 서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창세전에 예레미야를 열방의 선지자로 찜을 해 놓은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젊었으니까 꿈도 있었겠지요.

자기 인생의 계획도 거창하게 세우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찾아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너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에 따라서 열방의 선지자로 캐스팅을 한 것이라고 말씀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기겁을 합니다.

왜 납니까? 라고 따집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심과 동시에 예레미야 인생은 종을 찬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가자 그들이 인생이 종을 친 것과 같아요.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임하였어요.

예수님이 찾아 오면 그것으로 인생 종결이에요.

이게 성도의 운명입니다.



성도의 부르심은 각자 달라요.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보면 각자 부르심의 때가 다르지요.



어떤 사람은 아침에 부르심을 입고,

어떤 사람은 점심 때 부르심을 입고,

어떤 사람은 저녁 때 부르심을 입습니다.



모두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주인으로부터 부르심을 입고 포도원 품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 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청소년 시절에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중년 시절에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늙어서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르심의 때는 각각 달라도 구원하기로 작정을 한 것은 동일합니다.

창세전입니다.



창세전에 각각의 시간에 따라서 부르심이 정해진 것뿐입니다.

마치 드라마에서 배우가 출연하는 시기가 각자 다르게 정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에요.

예수가 믿어진다,

이건 놀라운 사건입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그러니 지금 내가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창세전 언약으로 이해하세요.

그럼 모든 것에 다 이해가 되어요.

저는 이 시대 목사가 된 것에 엄청 감사해요.

이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해요.



지금 태어나지 않고 조선시대에 태어났을 것 같으면 어떻게 했겠어요?

그때는 예수도 몰랐을 텐데 어쩔 뻔 했어요.

또 한국에 태어나지 않고 예수도 모르는 저 아프리카에 태어났으면 어쩔 뻔했어요.



지금은 예수님이 재림하기 직전시대에요.

저는 그렇게 봐요.

내가 살아있을 대에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자세로 살고 있어요.

이런 시대에 내가 태어나서 더구나 내가 예수를 믿고 복음이 들려진다는 것은 놀랍고 놀랍고 또 놀라운 사건이에요.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다루어가는데 있어서는 우연이라는 것은 없어요.

모든 것이 예정된 일입니다.

계획된 일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저와 여러분이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계획된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만난 것입니다.

언약은 드라마의 시나리오와 같아요.



드라마를 보세요.

배우들의 만나고 헤어짐이 다 짜여진 각본에 의한 것이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좋은 인연으로 만나고,

어떤 사람들은 악연으로 만나게 되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좋은 동무로 만나는 사람도 있고,

나쁜 동무로 만나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처음보다 나중이 좋은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처음보다 나중이 좋은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쁜 사람이 있어요.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사람은 처음에 못하다가 나중에 잘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처음에 잘하다가 나중에 넘어지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한 것입니다.



복음 안다고 까불지 마세요.

한방에 훅 가는 수가 있어요.

신앙에 있어서 교만은 금물이에요.



여섯 가지 “자” 자를 조심하셔야 해요.

신앙에 있어서 자고, 자만, 자긍, 자족, 자랑, 자위는 넘어짐의 선봉이에요.

교만은 스스로 되었다고 할 때 나타납니다.



이게 뱀의 속성이에요.

뱀은 피조물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놈이었어요.

그런데 그 지혜로 하나님을 대적했어요.

자기 생각으로 말이에요.



인간의 잘남은 바벨탑을 쌓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뱀의 후손들은 항상 자기 잘남으로 하나님의 일에 대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똑똑한 놈들을 통해서 발전을 하고 똑똑한 놈들 때문에 망해요.

세상 역사가 말해주고 있어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열심 있는 자들로 흥하고 열심 있는 자들로 쪼개져요.

교회 안에서도 항상 스스로 잘난 척 하는 자들이 마귀 노릇을 해요.



열심은 좋은 것이로되 그 열심이 인간의 열심이 아니고 성령의 열심이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은 잘난 척하지 않아요.

성령으로 행하는 성도들은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않아요.

그러나 인간의 열심으로 하는 자들은 반드시 그 열심을 힘을 삼아서 교회 안에서 거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잘난 척 하는 자들을 경계하세요.



암튼 하나님은 우리를 다루어 가는데 있어서 언약에 따라서 다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야곱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야곱처럼 다루어 가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곱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의 마지막 일생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 마지막이 하나님의 집인 벧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끝으로 야곱은 역사의 뒤안길로 빠집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인생을 어떻게 갈무리를 하는지를 보면 우리의 신앙의 끝을 알 수가 있어요.



오늘 본문인 35장은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는 것이고,

36장에서는 에서의 족보가 나오고,

37장에서는 야곱의 약전에 요셉이 올라가고 난 후로는 야곱은 무대 뒤로 사라지고 요셉의 이야기로 전개가 됩니다.

그러므로 야곱으로서의 일생은 오늘 본문이 마지막이 되는 것입니다.



얍복강에서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로 거듭났어요.

그 이스라엘의 인생을 야곱이 벧엘로 올라오고 난 후에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이력서에 요셉을 등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으면서 낳은 두 아들을 야곱이 자기 아들로 삼아버리지요.

이것은 요셉이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로 대신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기 인생이 없어요.

아버지의 인생을 대신 살았어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언약하신 것을 요셉을 통해서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로 볼 때 오늘 본문은 야곱의 마지막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하는가요?

빈손으로 마감을 합니다.

야곱의 마지막은 30년동안 움켜잡았던 모든 것을 상수리나무 아래에다 묻어버리고 빈손으로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단을 쌓는 것으로 마감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야곱의 일생을 보면서 참 위;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야곱처럼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인생을 보세요.

여기까지 오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



30년 전에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고 집에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집을 떠나오자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야곱은 30년 동안 12 아들을 낳는 일을 하였습니다.

12 아들은 12 지파가 되었고 12 지파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낳게 되었습니다.

야곱 한 사람이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을 이룬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낳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30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을 낳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보면 30년 사생애가 있고 3년 공생애가 있습니다.

30년의 일을 3년 속에 담아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늘 하나님 아들로 사셨습니다.

30년 동안 드러나지 않다가 30세가 되어서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30세부터 시작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30년을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자기 인생을 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30세가 되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되어 있어요.

제사장은 자기 인생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30세가 되자 자기 인생의 종결을 의미하는 의식을 행한 것입니다.

그것이 물과 성령의 두 가지 세례로 나타난 것입니다.

물 세례는 옛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고 성령 세례는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출발을 의미합니다.



물 세례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서 물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임하시지요.

성령이 임하면서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공식 취임하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님의 인생은 없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제사장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의 인생은 실제로 33년을 사셨지만 엄밀히 말하면 30년을 사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30년 사생애의 1기 인생은 야곱의 인생과 같고, 요단강에서 성령 세례를 받으신 후 3년 2기 인생인 공생애는 마치 요셉이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을 대신 산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12 제자를 부르신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의 12 아들로 육적 이스라엘이 생겨났듯이 예수님의 12 제자를 통해서 영적 이스라엘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30년 동안 1기 인생을 마치고 2기 인생인 이스라엘을 요셉에게 넘겨준 것은,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의 30년 인생을 마치시고 12 제자들에게 바통을 넘겨주고 아버지 집으로 가신 것처럼 야곱도 30년 인생을 마감하고 요셉에게 바통을 넘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야곱이 여기까지 오는 30년 인생 길을 추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야곱을 구원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서 리브가 뱃속에 넣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야곱이 어떤 자인지를 알려 줍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장자라고 합니다.



이 아이가 비록 차자로 태어나지만 장자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집의 장자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차자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차자로 태어난 야곱을 30년 동안 하나님의 장자로 만들어 가시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 속에 장자의 언약을 담아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장자권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장자로 태어난 에서는 장자권에 대한 집착이 없었어요.

경홀히 여겼어요.

그래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망령된 짓이라고 합니다.



에서는 왜 이러한 망령된 짓을 하였을까요?

이는 그 속에 하나님의 장자에 대한 언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서는 비록 장자로 태어났지만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릴 정도로 가볍게 여기고 경홀히 여긴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장자권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쫓겨난 야곱을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장자는 이 땅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자라는 것을 실물 교육으로 시키십니다.

그것이 형제들의 주가 되어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예수님이 사셨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또한 신약의 성도들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 속에는 이중 계시가 담겨 있어요.

주의 모습과 성도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약을 산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을 통해서 답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약에 있었던 사건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미리 엿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지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잘 보세요.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을 보면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 찾는 것으로 하십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가는 것으로 비유하여 주었습니다.



구원이란? 잃어버려진 자를 되찾는 것입니다.

이방에 던져 놓았다가 다시 본래의 그 자리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에게 적용시켜 보세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던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어요.

그리곤 이 세상에서의 일이 다 마치면 본래의 그 자리로 데려 가셨습니다.



아브라함 언약도 보세요.

언약을 가나안 땅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언약하신 그 장소인 가나안 땅으로 인도 하십니다.

본래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야곱도 보세요.

장자권의 축복을 받고 집에 쫓겨납니다.

광야에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와서 내가 너와 함께 하고 필경은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신다고 언약을 하십니다.

야곱은 30년 동안 이방에서 객으로 살다가 벧엘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러한 식으로 일을 하시는가요?

이는 이방에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이방에서 살면서 아버지 집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고 눈물 흘리면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천국입니다.

천국의 소중함은 천국에서는 몰라요.

천국의 소중함은 지옥에서 알게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을 이 세상이라는 지옥에 잠시 두셨다가 천국으로 건져내는 것으로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집에 소중함은 집 밖에 나가 보아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집을 떠나게 하는 일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게 하십니다.

돌아 올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득 머금고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은혜의 나라이고 영생의 나라에요.

은혜와 영생을 알려면 은혜와 영생의 반대되는 곳이 있어야 합니다.

빛이 어둠으로 인하여 드러나듯이 은혜와 영생도 그 반대가 되는 법과 죽음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와 영생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기 백성들을 먼저 그 반대가 되는 법과 죽음의 나라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 아래서 태어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죄 아래 있어야 죄에서 건져주심이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수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율법 아래 두십니다.

율법 아래서 처절하게 종노릇해 보아야 해요.

그래야 종에서 해방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큰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종노릇을 오래 해 본 사람일수록 은혜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복음에 소종함을 모르는 것은 종살이를 안 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지식으로 듣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도를 닦는 것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지식이 되면 신앙이 관념으로 흘러요.

삶에 힘을 쓰지 못해요.

죽은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무기력해지는 것입니다.

교회에 모이는 것이 동호회 모임처럼 필요하면 참석하는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걸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니 실상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살이에는 살아서 펄떡 펄떡 뛰는데 교회 생활은 중풍병자들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머리로는 복음을 달달 외우는데 손과 발은 움직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 일이라면 자다가도 뛰쳐나가는데 교회 일은 멍석을 깔아 놓아도 움직이지 않아요.

이걸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고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죽은 나무는 잎을 내지 못하듯이 귀신의 믿음은 예수의 생명을 내지 못해요.



교인은 구원이 없어요.

성도라야 구원이 있어요.

교인은 종교인이고 성도는 신자에요.

신지라는 말은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자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사역 동사에요.

살아서 움직이고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믿음과 행함이 함께 일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믿는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그것은 귀인의 믿음이고 죽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의 생명의 활동이에요.

살아 있는 나무가 잎을 내고 열매를 맺듯이 살아 있는 신앙은 반드시 예수님의 생명의 잎을 내고 열매를 맺게 되어 있어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금지할 수 없는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금지 할 수 없는 법이란?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은혜의 나라이고 영생의 나라에요

영생은 죽음을 통하여서 드러나요.

은혜도 마찬가지에요.

은혜는 법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자기 백성들을 은혜의 나라와 영생의 나라에 살도록 예정하셨어요.

이를 알게 하려고 은혜의 나라와 영생 나라와 대조적인 나라를 만드셨어요.

그게 이 세상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법의 나라이고 죽음의 나라에요.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나라에요.

그게 구약에서는 애굽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후손들을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이 애굽이에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면 도저히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늘 상하고 애통해 하면서 은혜를 사모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이고 실제로는 그 반대로 나타난단 말이죠.

정답을 알면서도 정답대로 살지 못해요.

그러니 미치는 겁니다.

스스로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상한 마음이 생기고 애통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쌓여가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구나를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아니면 죄를 용서 받을 길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애모’ 라는 노래 가사를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 드는데

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 나는 당신의 여자

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여



우린 예수님 앞에 서면 작아져야 해요.

우린 예수님 발 아래서 눈물을 흘려야 해요.

나는 주님의 용서로 사는 자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그 언약이 내 몸에 새겨져 있는 한 나는 예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우린 예수님의 여자에요.

우린 예수님을 떠날 수가 없어요.

우리에게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 한 예수님이 우리를 지켜주세요.

예수님이 보내지 않아요.

그래서 감사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우린 말씀 앞에서 늘 우리의 연약함을 고발당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해요.

우리는 죄와 사망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완성지점이 뭔가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창조 하였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어요.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의 모습이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세세토록 찬송하는 것으로 말해주는 것도 다 언약의 완성이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을 배우는 곳이에요.

찬송은 감사의 다른 표현입니다.

감사는 깨달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감사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야곱을 보세요.

야곱은 빈손으로 벧엘로 올라 갈 때가 가장 행복했을 때입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니까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야곱은 스스로 벧엘로 오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았으면 야곱은 세겜에서 이방인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잊고 살았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야곱을 잊은 적이 없어요.

늘 함께 하였어요.

하나님이 늘 함께 하였기 때문에 야곱에 세겜에 정착하고자 할 때 하나님은 디나의 강간 사건을 일으켜서 세겜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야곱이 있어야 하는 자리는 벧엘이에요.

벧엘은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곳이에요.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에요.

하나님의 집은 세상 것을 가지고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30년 인생의 산물들을 몽땅 세겜 상수리 나무 아래 묻어 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자기 인생을 살고자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의 인생은 없다고 합니다.

내가 너를 선택한 것은 내 언약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30년 동안 이 사실을 깨달아가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이를 깨닫고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아내와 자식들이 소유한 이방신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다 세겜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 버린 것입니다.

야곱은 30년 인생을 세겜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 버린 것입니다.



의복도 바꿔 입습니다.

옷을 바꿔 입는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을 죽음을 상징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부터는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세겜 땅을 떠나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30년 동안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면 인생은 내 뜻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항복 선언을 한 것입니다.



야곱은 벧엘로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께 어떤 고백을 하는가요?

‘엘 벧엘’이라고 하지요.

‘엘’이라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벧엘’은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에요.

즉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벧엘로 돌아오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나를 여기까지 인도 하신 분은 벧엘의 그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일찍이 아브람에게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17장을 보면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자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나타나셔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아브람도 야곱처럼 하나님을 몰랐어요.

아브람은 하나님이 자식을 준다고 하여도 믿지 못하였어요.

그래서 자기 힘으로 이스마엘을 낳았어요.



그러다가 야곱처럼 죽임을 당합니다.

그것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는 것과 할례를 받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할례란? 남자로서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게 신약에서는 세례로 나타납니다.

세례는 죽음을 상징해요.

그러니까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는 아브람을 죽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아브라함으로 바꿔치기 해 주신 것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벧엘에 올라오자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이제부터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라고 합니다.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는 야곱은 죽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살게 해 주는 이스라엘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고 야곱을 이스라엘 되게 하시는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간섭하고 계세요.

우리 인생에 개입을 하여서 우리에게 언약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신앙이 뭐냐?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사귐이 되려면 알아야지요.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올바른 사귐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알던 하나님 상을 제하여 버리시고 언약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려주시는 일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내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이에요.

내 이름을 창대케 해 주는 그런 하나님이에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우리 이름을 삭제 시키고 예수의 이름으로 새기는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내 인생은 차압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인생으로 살아가도록 간섭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신앙의 산전수전을 겪어가면서 내가 아는 하나님은 버리고 언약의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와서 하나님 알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배워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들에게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 계속해서 우리 인생에 태클을 거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 안에 창세전 언약이 심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그의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영광을 찬미 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아는 것은 자꾸만 부대껴야 해요.

부대끼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많이 부대낄수록 많이 알아가요.



우리는 부대끼면서 언약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언약은 우리가 순종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낮아지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린 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데 하나님은 늘 은혜의 언약으로 우리를 대하시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불순종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아~ 그러면 불순종하면 되겠네” 라는 뜻이 아니에요.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은혜는 반드시 우리의 상한 심령을 동반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은 우리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 힘이 겪어진 그 자리에서 상한 심령이 일어납니다.

아! 나는 안 되는구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구나 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순탄하게 순종하여서 벧엘로 돌아 왔으면 엘 벧엘이라는 고백이 나오지 않아요.

나 잘했지요!

나 착하지요! 하면서 잘난 척을 해요.

그럼 벧엘이 은혜의 동네가 아니고 법의 동네가 되어요.

인간의 자랑이 난무하는 곳이 되고 말아요.



야곱이 벧엘로 돌아오게 한 것은 하나님입니다.

야곱은 하나님 손에 이끌려 온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야곱의 벧엘 귀환을 보면서 야곱에게 눈길을 주지 말고 야곱을 야곱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에 눈길을 주어야 합니다.



언약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언약을 이루는 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수동적이었어요.

야곱을 이끄는 신앙의 주체는 언약이지 야곱이 아니에요.

이건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의 실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어서 믿는 것일 뿐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자랑 할 것이 아니라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다 하나님이 하게 해 주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봉사도 하나님이 하게 해 주어서 하는 것이고,

헌금도 하나님이 하게 해 주어서 하는 것이고,

섬기는 것도 하나님이 하게 해 주어야 하고,

복음을 깨닫는 것도 하나님이 하게 해 주어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이 하게 해 주어서 하는 것이에요.



교회에 다니는 것도 하나님이 하게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행하는 모든 것은 성령의 은사에요.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일을 하여도 그 일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그 안에 성령이 거하는 성도들은 알아요.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어떤 일을 하여도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 아래서 난 야곱은 애당초 순종이 안 되는 인간이에요.

순종하기 싫어서 불순종한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죄 아래서 난 불순종의 자식이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 아래서 난 불순종의 자식을 선택했어요.

그리고 계속해서 은혜로 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그 은혜 하나 알리려고 30년 동안 야곱을 따라다니면서 간섭을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30년 동안 죄만 토해내다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야곱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엘 벧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건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야곱과 같은 과정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린 야곱처럼 늘 불순종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은혜와 긍휼로 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을 보면 천상에 있는 24장로가 자기의 면류관을 벗어서 하나님께 돌려드리면서 세세토록 찬송을 드리지요.

왜 면류관을 하나님에게 벗어 던집니까?

이는 이 면류관은 하나님이 씌워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24장로들도 이 역사 속에서 야곱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간섭을 당해 온 것입니다.

24장로는 구약의 12 지파와 신약의 12 제자를 상징하는데 이는 신구약의 모든 성도를 상징해요.

24 장로 속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니 우리의 인생도 야곱처럼 하나님으로부터 간섭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교회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발걸음을 교회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케 되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끝자락에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남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은혜이고,

우리가 복음을 깨닫는 것도 은혜에요.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여야 하는 것은 은혜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 아는 것을 가지고 잘난 척하고 있어요.

잘난 척 한다는 것은 자기가 알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학습으로 알았기 때문에 잘난 척하고 자랑질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복음을 법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복음 자체가 은혜인데 자신이 법에 속하였기 때문에 복음 안다는 것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법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깨닫게 된 사람은 자랑질 하지 않아요.

자랑질을 못해요.

본인이 그건 자기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에게 빼앗기지 않아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자기 자랑을 하지 못하게 간섭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자랑거리를 치우는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지게 만들어요.

넘어지게 하고서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세요.



신앙이 뭔 줄 아세요.

하나님으로부터 갈굼을 당하는 것입니다.

간섭당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30년 만에 벧엘로 돌아오게 된 것은 하나님이 집요하게 갈궜기 때문이에요.

야곱이 스스로 돌아 온 것이 아니에요.

이걸 야곱은 알았기 때문에 엘 벧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바치는 것이 아니에요.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듯이 능력을 행하는 것도 아니에요.

고상한 인품으로 변화되는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세요.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꽝이고,

자기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꽝이고,

산을 옮길만한 능력을 행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꽝입니다.



무슨 말인가요?일 보다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다른 말로 하면 은혜에요.

그래서 신앙의 궁극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걸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릴 때 예수님께서는 많이 깨닫는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깨닫는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국 신앙은 깨닫는 만큼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많이 깨달으면 많이 사랑하고 적게 깨달으면 적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간섭을 하실까요?많이 깨닫도록 간섭을 하시겠지요.

그것이 우리 안에 죄를 토해내게 하는 상황 속으로 밀어 넣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걸 한마디로 고난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야곱이 세겜에 머물고자 할 때 디나의 강간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일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도 야곱처럼 짐승 떼를 늘리고 싶어해요.

짐승 떼는 지금 식으로 말하면 돈이에요.



우리는 머리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천국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몸뚱이는 세상을 떠나고자 하지 않아요.

우리 스스로 세상을 떠날 실력이 안 되어요.

세상의 가치를 이길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서 강제 집행하는 일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에게는 고난입니다.



야곱이 세겜을 떠나면서 무슨 일을 합니까?

그동안 야곱의 인생을 청산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이방의 신상과 모든 장신구들을 세겜 상수리나무에 묻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게 또 의미가 깊어요.



한글 성경에는 없지만 원문에는 “그” 라는 정관사가 있어요.

“그 상수리나무” 라는 뜻입니다.

“그 나무”라는 말은 예전에 어떤 의미가 있던 그 나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12장을 봅시다.



창 12:5-8절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와서 제일 먼저 단을 쌓은 곳이 바로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입니다.

하나님이 상수리나무에서 만나주셨어요.



“세겜”이란? “언덕” 이라는 뜻이고,

“모레”란? “본다” 라는 뜻의 “라아”에서 파생된 말로서 이는 “가르치는 교사” 또는 “예언자” 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겜 모레 상수리나무”는 영적으로 말하면 하늘에서 오신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예언자들이 상수리나무 아래서 신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상수리나무를 일명 예언자의 나무라고도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상수리나무에서 아브람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세겜의 모레 상수리나무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8장 1절을 보면 아브람이 할례를 받고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바뀌고 난 후에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이삭을 주겠다고 하던 장소가 바로 상수리나무 아래입니다.

사사기 6장을 보면 기드온이 상수리나무 아래 있을 때 여와와의 사자가 찾아가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24장을 보면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앞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고 언약을 하고서 그 언약을 돌에 새겨서 상수리나무 아래 세웁니다.



이처럼 상수리나무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걸 신약적으로 이해하면 골고다 언덕에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서 만나주셨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만나 주십니다.



야곱은 지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그 세겜 상수리나무 아래 이방의 신상과 장신구들을 다 묻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적으로 보면 성도가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다 못을 박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죽이는 곳입니다.



성도가 교회에 와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도(道)는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이름을 지우고 어린 양의 이름을 새겨 넣는 곳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내 인생은 차압당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조상인 아브라함이 신탁을 받았던 그 세겜 상수리나무 아래 우상을 묻어 버리고 벧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죽음과 같아요.



참 재미있는 것은 야곱의 일생을 쭉 이야기 하다가 뜬금없이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등장하지 않아도 될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가 누구인가 하면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입니다.



창 35:6-8절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드보라는 야곱의 유모가 아니고 어머니 리브가의 유모에요.

왜 야곱의 벧엘 귀환에 어머니인 리브가의 유모의 죽음 사건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여기에 또 비밀이 있습니다.

드보라는 리브가가 이삭에게 시집을 올 때 따라 왔어요.



리브가의 아버지가 누구였나요?

라반이지요.

라반이 먼 타향으로 시집을 가는 리브가에게 유모 드보라는 붙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리브가의 유모가 야곱을 따라서 온 것입니다.

이는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과 동행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리브가가 누구인가요?

야곱을 장자 만드는 일을 한 사람입니다.

야곱을 장자의 축복을 받을 때에 리브가가 주도하지요.

하나님께서 리브가가 임신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차자가 장자가 될 것이라고 계획을 알려 주십니다.

이에 리브가가 야곱을 장자를 만드는 일을 주도적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야곱은 리브가의 지시 아래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리브가의 유모인 드보라가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는 길을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리브가가 야곱과 동행하고 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에 벧엘로 올라가자 어머니 리브가를 상징하는 드보라가 죽습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죽음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자 하나님께서 리브가의 유모인 드보라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드보라는 리브가를 상징하는 사람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드보라의 죽음은 리브가의 죽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리브가가 야곱을 장자의 명분을 얻는 일을 주도 하였는데 리브가를 상징하는 유모가 죽었어요.

이것은 야곱의 1기 인생이 끝났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머니를 상징하는 드보라의 죽음과 함께 죽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의 인생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1기 인생은 벧엘의 귀환으로 끝이 나고,

이제부터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로서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옛 사람을 상징하고,

이스라엘은 새 사람을 상징합니다.

야곱의 옛 사람과 함께 어머니도 함께 죽은 것입니다.

이건 옛 언약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부터는 너를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로 부를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로 부르겠다는 것은 옛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새 사람으로 대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옛 사람은 죄 아래서 나서 법으로 대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새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낳아진 자로서 은혜로 대하심을 입게 됩니다.

은혜로 대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은혜로 살도록 간섭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장자로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차자의 이름이고 이스라엘은 장자의 이름이에요.

옛 사람 야곱이라는 차자가 새 사람 이스라엘이라는 장자가 되기까지 30년이 걸린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일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30년에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은 사생애를 30년을 사시고 3년을 공생애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 하실 때 요단강에서 두 가지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 세례를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물 세례는 죽은 세례이고,

성령 세례는 살아나는 세례입니다.

예수님은 물 세례로 30년 사생애 인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령 세례로 하나님의 장자로서 새로운 인생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장자가 되어서 자기의 희생으로 그 형제들을 살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30년 사생애는 역사적 예수로 사신 것이고,

3년 공생애는 묵시적 예수로 사신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은 30년을 사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사신 것은 묵시적 인물로 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는 탈 역사에요.

장자의 축복을 받고 난 후 집에서 쫓겨나고 이방의 객으로 살다가 벧엘로 돌아온 야곱의 30년 인생이 바로 예수님의 30년 인생과 동일한 성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0년 인생을 마감하고 3년을 성령에 이끌려서 사신 것은 야곱이 벧엘로 돌아온 후 야곱이라는 이름은 삭제가 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로서의 인생은 합환채를 먹고 태어난 요셉이 대신하여서 살게 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합환채는 신약으로 오면 성령과 같아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성령 세례를 받고 난 후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았듯이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낳은 요셉이 야곱의 2기 인생인 하나님의 장자로서의 인생을 대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벧엘 귀환과 동시에 유모가 죽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유모와 함께 야곱의 옛 사람도 죽은 것입니다.



야곱은 유모 드보라를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그곳 이름을 “알론바굿”이라고 합니다.



알론바굿이란? “통곡의 상수리나무”라는 뜻입니다.

즉 옛 사람이 죽임 당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옛 사람 야곱은 통곡의 상수리나무 아래 묻히고 맙니다.

그래서 야곱의 행보는 이후로는 사라지고 그 아들 요셉의 이야기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꿈은 장자의 꿈인데 이것이 바로 야곱이 장자로서의 삶인 것입니다.

통곡의 상수리나무가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옛 사람을 죽이는 곳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예수님의 십자가는 통곡의 십자가이고 눈물의 십자가입니다.



왜 눈물의 십자가인가요?

십자가는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예수를 이용해서 우리 옛 사람을 승승장구하고 싶어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승승장구하고자 하는 우리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죽이십니다.

그래서 성도의 길을 눈물 골짜기로 통행하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고 30년 동안 자기 이름을 내고자 아등바등하면서 살았는데 하나님이 빈손으로 벧엘로 올라오게 하고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제 영웅이 되고자 하는 인생으로 살지 말고 종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제부터 야곱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장자로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관련된 모든 것을 다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버립니다.

야곱이 자기 자식들에게 지금까지 너희들이 섬겨온 이방 신상들을 다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의복도 바꿔 입으라고 합니다.

이제 옛 사람은 다 청산을 하자는 것입니다.



의복을 바꿔 입으라는 것은 신분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옷은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입었던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나는 죽었고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돌고 돌아 30년 만에 벧엘로 돌아온 야곱은 이제부터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야곱 속에 심어놓은 언약을 위해서 살아가는 과정을 겪게 하십니다.



야곱에게 심겨진 언약은 장자의 언약입니다.,

장자의 언약은 뭐냐?

자기를 희생하여서 형제를 살리는 것이에요.

이삭이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할 때에 너는 형제들의 주가 된다고 했어요. 

 

성경이 말하는 주의 개념은 자신의 희생으로 형제들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로 사셨어요.

그럼 이삭이 야곱에게 한 장자의 축복 속에는 너희 죽음으로 형제들이 살아나게 된다는 것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에게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창세기 35장을 지나고 36장에 에서의 족보를 이야기하고 난 후 37장에 가서는 야곱의 약전에 요셉을 올려 놓고 그 후로는 요셉의 이야기로 창세기는 끝이 나는 것입니다.

30년 동안 돌고 돌아서 벧엘로 돌아온 야곱의 인생을 요셉이 야곱의 2기 인생인 형제들의 주가 되는 이스라엘로서의 일생을 대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주가 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인생이 없어요.

자기 형제들을 살리는 인생을 살았어요.

이것을 신약 식으로 보니까 예수님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셉처럼 하나님의 장자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의 주가 되어서 자신의 희생으로 형제들을 살려내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시지요?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자기 몸을 형제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고,,,

이게 하나님의 장자로서 사는 길이에요.



장자는 부모를 대신 하는 자에요.

우리가 가정에서 그러지요.

맏아들은 부모를 대신한다고 그러잖아요.

부모를 대신한다는 이야기는 형제들을 책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보면 장자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요.

황정민이가 1.4 후퇴 때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을 옵니다.

이 때 아버지가 잃어버린 꽃순이를 찾는다고 하면서 피난 배를 함께 승선하지 못하고 헤어지면서 황정민이에게 너는 맏이니까 아버지를 대신하여서 동생들과 어머니를 돌보라고 합니다.



황정민이는 부산에 장착하여 살면서 숱한 고생을 합니다.

아버지의 명을 붙들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봅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꽃순이를 찾고서 아버지 영정 앞에서 방성대곡을 합니다.



아버지! 보세요!

아버지가 하라고 하는 일을 다 해 냈습니다!

꽃순이도 찾았습니다!

아버지가 하라고 하는 것을 다 이루었습니다!

보세요!



그런데 아버지 나 억수로 힘들었어요!

너무너무 힘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펑펑 울어요.



저는 이 대목에서 엄청 울었어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로 들려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인생이 그래요.

하나님의 장자로서 이 땅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 닦아준다고 그러지요?

왜 눈물을 닦아 준다고 합니까?

이는 이 땅에서 눈물 흘리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두 마리 암소 이야기를 아시지요.

벧세메스는 ‘태양의 집’이라는 뜻이에요.

그 곳에는 제사장들이 사는 동네에요.

바로 천국을 상징합니다.



젖 나는 두 마리 암소가 새끼를 두고 블레셋에서 법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가지요.

젖 나는 소 라는 말은 금방 새끼를 낳았다는 뜻입니다.

짐승 중에서 모성애가 가장 강한 짐승이 소라고 합니다.

그런데 금방 낳은 새끼를 떨궈 두고 법궤를 싣고 울면서 가고 있어요.



자기 새끼들이 있음에도 떨궈 놓고 가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말이에요.

이게 얼마나 아픈 일인줄 아세요.


두 마리 암소는 끝내 제물로 바쳐집니다.

이게 우리 신자의 일생이에요.



우리는 언약을 지고서 날마다 죽임당하는 일생을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눈물로 씨를 뿌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깨어지고, 욕심이 깨어지고,

자꾸만 깨어지는 삶들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고전도전서 4장을 봅시다.



고전 4:9-15절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세요.



나는 약해도 너희는 강하고

나는 비천해도 너희는 존귀하고,

나는 못 먹어도 너희는 먹이고,

누가 나에게 욕을 해도 바울은 그를 축복하고,

누기 핍박을 해도 참고,

누가 내 것을 빼앗으면 빼앗겨 주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깨어지는 삶을 살았어요.

예수님께서 바울을 장자의 삶을 살게 하셨어요.

장자는 식구를 책임지는 자라고 했어요.

내 입에 들어갈 밥을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에요.

나는 안 먹어도 너는 먹으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바울이 걸어간 길로 인도 하세요.

교회 안에서도 영적인 장자들은 베풀고 살아요.

자기 것을 내놓아 섬기고 나누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장자에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니까 장자의 모습들이 나타났어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날마다 교회로 모이고 자기 것을 내어 놓은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섬기고 내어놓지요?

오순절에 천하각국에서 사람들이 올라 왔어요.



성령이 임하자 수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 외국에서 올라온 나그네들이에요.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자 바나바는 자기 밭을 팔아서 교회에 내어놓고 성도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장자의 모습입니다.



율법아래서는 모으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 성령의 은혜를 입고 보니까 움켜잡은 손을 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고 보니까 하늘의 장자의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그 고백을 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나를 욕을 해도 나는 너희들을 욕하지 않고 도리어 축복을 하였고,

너희들이 내 것을 빼앗는다고 해서 내가 그것을 안 빼앗기려고 사수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미련하더라도 너희들은 지혜롭고,

나는 망해도 좋으니 너희들은 흥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장자입니다.



예수님이 장자로 사셨어요.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생명까지 말이에요.



예수를 믿으면서 섬김과 베풂과 나눔이 없다면 다 가짜에요.

관념이고 허상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내 안에 법을 깨뜨리고 무장해제 시켜버려요



이솝우화에 보면 길가는 나그네 옷 벗기는 이야기가 있지요.

해 하고 바람 하고 내기를 하잖아요?

지나가는 나그네 옷 벗기기 내기를 하잖아요?

옷이 어떻게 벗겨지나요?

햇볕을 따뜻하게 비춰주니까 벗겨져요.



하나님의 은혜가 햇빛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햇빛과 같은 은혜를 비춰주세요.

은혜를 받으니까 내 속에 있는 나를 무장 해제 시키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나는 움켜잡는 나예요.

높은 자리 않고 싶어하고 상좌에 앉아서 높아지고 싶아하고 군림하고 싶어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간섭하면 내 속에 있는 나의 옛 사람이 죽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옛 사람인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옛 사람 야곱이 죽임을 당한 그 자리에 새 사람 이스라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옛 사람 야곱이 죽임 당하고 새 사람 요셉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를 바울은 겉 사람은 후패하고 속 사람은 새롭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은 속성이 다릅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릅니다.

옛 사람은 손을 움켜잡는데 새 사람은 손을 펴요.

옛 사람은 야곱처럼 섬김을 받고자 하고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데,

새 사람은 요셉처럼 섬기고 나누어주고 주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우리 안에는 야곱과 요셉 두 사람이 있어요.

새 사람 요셉이 옛 사람 야곱의 속성을 죽이는 일을 해요.

손해보고 욕 먹고 참고 섬기게 만들어요.

이건 우리 육신의 소욕에 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아파요.

그래서 성도의 삶을 눈물 골짜기를 통행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알고 천국을 유업으로 준비해 두신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 준다고 하지요.



이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장자로 산다는 것은 눈물을 흘리는 아픈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이 땅에서 예수 때문에 자기 인생을 차압당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이에요.

내가 차압당한 그 자리에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 하실 때 가루 서 말 속에 있는 누룩과 같다고 하였지요.

이것은 이 세상에서의 복음이 퍼져 나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것을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누룩처럼 들어오셔서 우리를 야금 야금 장악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세요.



마치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하는 것과 같아요.

성령이 여호수아처럼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옛 사람인 가나안 7 족속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간다고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아담의 형상이 찍혀나가고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이 새겨지니까 눈물 골짜기로 통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아담의 형상이 찍혀나가고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이 새겨지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에요.



에베소서 4장을 봅시다.



엡 4:22-32절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하지요.

이 말은 부정 과거 시제로 쓰고 있는데 이것은 너희들은 이미 옛 사람은 죽었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지요.

이 말은 현재 진행형이에요.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현재 속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분론적인 구원은 단회적으로 끝이 났어요.

이건 우리의 조건으로 변하지 않아요.

구원이 우리의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므로 우리의 조건으로 인하여 구원이 취소되는 일은 없어요.

이를 보증하려고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은 아들의 영이에요.

아들의 영은 창세전에 아들로 예정이 된 자들으게만 와요.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낳아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셔서 성령을 아들의 영으로 성도들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 아들의 영을 받은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아요.

성도의 구원은 확정되었어요.

그러나 역사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일은 날마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산다는 게 전쟁이에요.



우리 육신도 사는게 날마다 병과의 싸움이에요.

왜 운동을 하고 몸에 좋은 음식들을 챙겨먹나요?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병을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새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날마다 죄의 소욕과 싸워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이 풍성해져야 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장자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토해 낼 때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지요.

이는 구원 받은 성도들이 모여서 그리스도께 받은 것으로 서로 섬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모두가 으뜸이 되고 섬김 받고자 하였는데 새 사람이 되고 난 후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에서 서로 섬기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서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걸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천년 동안 왕 노릇한다고 하지요.

이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섬기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왕이세요.

그런데 섬겼어요.



예수님이 섬긴 것은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낳아진 자들은 천년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섬기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역사 속에는 교회로 나타난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교회 안에서 섬기는 자로 세움을 입었어요.

섬김은 우리 힘으로 할 수가 없으니까 성령의 은사들을 주어서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이게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초대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곳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높고 낮음이 없어요.

모두가 동등해요.

직분은 서열이 아니에요.

직분은 몸의 지체와 같아요.

지체마다 각각의 기능이 다르듯이 교회 안에서의 성도의 직분도 그러합니다.



목사는 말씀 전하는 자로 세움을 입었고,

장로와 집사는 섬기는 자로 세움을 입었어요.

서로 귀히 여겨야 해요.

서로의 뒤에 예수님이 계세요.

그러니까 서로 서로 주님을 섬기듯이 사랑하며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로 사는 거예요.

하늘의 장자로 사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30년 동안 야곱을 간섭하여서 하나님의 장자의 자리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럼 우리도 인도 할까요?

안 할까요?

당연힌 인도합니다.

우리가 야곱이니까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심어 놓으셨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언약의 자리로 인도해 가십니다.

그 언약의 자리가 장자의 자리에요.

자기를 비워 종이 되어서 형제를 살리는 그 자리에요.

우리는 그동안 꾸준히 간섭을 당하여 왔습니다.

지금도 간섭 당하고 있어요.

언제까지 간섭하느냐?

죽을 때까지 간섭하십니다.



하나님의 단어에는 포기란 없어요.

하나님께 찜 당하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빠져나갈 방도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의 구원도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간섭 당함이 우리에게는 고난입니다.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들어요.

세상을 산다는 것이 아픔이듯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아픔이에요.

눈물 흘리면서 가는 길이에요.

아파도 한 걸음 두 걸음 가야해요.



예수님의 기도를 보세요.

땀이 피가 되는 기도를 하셨잖아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심어 놓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죽는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발 이 쓴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피땀 흘리면서 기도를 하는데도 천사들을 보내서 기어코 십자가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어야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는 것은 우리가 자녀들을 공부시키는 것과 같아요.

오늘 못하면 내일 시키고 내일 못하면 모래 시키지요.

부모는 자식이 실패하는 꼴을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달달 볶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은 부모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의 위상에 따라서 부모의 위상이 달라져요.

이 땅에 모든 부모가 자식의 성공을 위하여 불철주야로 간섭을 하듯이 하나님이 성도를 간섭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존심이 걸려있어요

그래서 올해 안 되면 내년에 시키고 내년에 안 되면 그 후년에 시켜요.

결국은 그 자리로 가게 만들어요.

버티면 버틸수록 아파요.



쉬운 이야기로 숙제 끝내 놓고 TV 보는 게 좋나요?

숙제 안 해 놓고 보는 게 좋나요?

숙제 안 해놓고 보면 TV를 보면 숙제 안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계속 엄습해요.

보면서도 불안하고 찜찜해요.

그럼에도 자발적으로 TV 끄고 공부하는 아이는 없어요.

부모가 간섭해야 비로소 공부합니다.

그것도 투덜거리면서 문 쾅~! 닫고 들어가면서 말이에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고 있어요.

자식들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를 대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 둘씩 차압해 가는 것입니다.

우린 그걸 빼앗길 때마다 죽겠다고 아우성을 쳐요.

그렇다고 하나님이 하던 일을 중단하느냐 하면 안 그래요.

계속해요.



먼저 숙제하고 TV를 보라고 하면 아이들은 TV보고 숙제하겠다고 하듯이 우리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이를 구하라고 하면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구해요.

그런 것은 구하지 말라고 하여도 구해요.

아이가 TV보는 것이 즐거움이듯이 우리도 세상과 연락하는 것이 즐거움이에요.

공부 좋아하는 아이가 없듯이 세상 일락 싫어하는 성도도 없어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좋아하는 인간은 단 한사람도 없어요.

어떻게 하든지 내 뜻대로 살아가려고 해요.

내 뜻대로 살아가고 싶어 할수록 고난은 가중되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채워가는 일을 중단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별명을 영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사야 43장을 보면 야곱아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조성한다고 합니다.

조성이란 마치 정원사가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듯이 하나님이 정원사가 되어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 가운데로 들어가고 불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냉탕에 집어넣었다가 열탕에 집어넣었다가 담금질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신자들의 운명이에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자리로 우리를 끌고 가세요.

계약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영문 밖으로 나가자고 합니다.

영문 밖에 누가 기다리고 계시느냐?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거예요

영문 밖이 어떤 곳이냐 하면 죽음의 자리에요.

그 자리를 우리 스스로 갈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곱의 벧엘로의 귀환 사건입니다.

야곱은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미리 살았어요.

그래서 성도의 구원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래 자리가 하나님의 장자의 자리에요.

그 본래 자리를 누가 만들어놓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만들어놓았어요.

창세전에 말이에요.



우리가 이 땅에 온 것도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하나님은 한순간도 버려둔 적이 없어요.

늘 간섭해 오셨어요.

우리가 깨닫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이 자리에 서 보니까 비로소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가슴이 먹먹해져요.

할 말이 없어요.

그동안 내 뜻대로 살아지지 않았던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이었구나!

하나님이 날 간섭하지 않았으면 어찌할 뻔 했는가!

참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제 쬐끔 철이 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의 본래의 자리로 가자면 조금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야 그 자리로 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기까지는 한참을 또 실갱이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이 아프더라도 참고 이겨내세요.



그 날이 오고 있으니까요.

속히 올 것입니다.

그 날을 소망하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여기까지 오게 한 것임을 알고 감사를 드립니다. 시작 하신 이가 주님이시니 주께서 끝 날까지 이루실 줄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가는 길이 험하고 아플지라도 모두가 하나님의 장자이기 때문에 당하는 아픔이므로 이 또한 축복이라 여기고 잘 이겨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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