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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63강. 베노니와 베냐민 (창 35:16-29)

by coroa 2021. 8. 22.

 

 

63강. 베노니와 베냐민 (창 35:16-29)

-.정낙원 목사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면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져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구약을 그림자라고 하고 신약은 실상이라고 하잖아요.

구약은 옛 언약이고 신약은 새 언약입니다.



옛 언약을 율법이라고 하는데,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했어요.

율법으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는 장차 오는 좋은 일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율법으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는 죄사함을 주는 제사가 아니고 죄를 깨닫게 해 주는 제사라고 합니다.

온전한 죄사함은 창세전에 약속한 한 몸이 와서 드려지는 제사라야 합니다.

그 한 몸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드려지는 제사가 참 제사에요.

그러니 구약의 짐승의 제사는 그림자이고 신약의 예수그리스도의 제사가 참인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도 마찬가지에요.

구약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후손입니다.

아브라함은 장차 오실 자의 표샹이에요.



장차 오실 자가 누구인가요?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아브라함 후손으로 만들어진 육적 이스라엘은 그림자이고 신약의 예수그리스도로 낳아진 성도들이 영적 이스라엘로서 실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진짜 이스라엘인 영적 이스라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을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가지고 신약의 성도들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럼 구약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인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속에 내가 있어요.

우리가 그 속에 있어요.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의 범죄가 우리의 범죄 모습인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경을 보실 때에 두 가지 법칙이 있어요.



첫 번째는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사건을 일차적으로 예수님 이야기로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 이야기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성도는 연합된 한 몸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 이야기 속에는 우리 성도들의 이야기도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일생 속에도 이중적 의미가 있어요.

첫째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는 일이 담겨져 있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간섭해 가는지도 담겨져 있어요.



야곱이 누굽니까?

어미 태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찜 당한 사람이잖아요.

이사야 43장을 보면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고 부르시고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지명하여 부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입니다.



야곱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간섭 속에 들어가서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르신 것은 야곱을 가지고 뭔가 하실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장자로 사는 길입니다.



야곱은 원래 차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지는 장자를 만들어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걸 조성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43장에서 지명하고 부르시고 조성하였다고 하지요.

조성이란? 정원사가 정원을 가꾸듯이 하나님이 야곱을 가꾸어간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가꾸어 가는가 하면 차자를 장자로 가꾸어가는 것입니다.



차자의 일생과 장자의 일생은 달라요.

차자는 자기 인생으로 사는 자이고,

장자는 형제들의 주가 되어 사는 인생이에요.

쉬운 말로 장자는 자기 집안을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이걸 아버지의 뜻을 이룬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오셨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일생도 두 구분으로 되어 있어요.

30년 동안은 차자로서 자기 인생을 살았어요.

그러나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3년은 장자의 인생을 사셨어요.



그 장자의 인생이 아버지의 심정으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인생을 사셨어요.

겟세마네에서 기도 하실 때 뭐라고 하셨나요?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하였어요.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였어요.



아버지의 뜻이 뭔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이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마음으로는 십자가를 안지고 싶었는데 아버지의 뜻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니까 자기 뜻을 접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게 장자의 인생입니다.

야곱도 두 인생이 있어요.

차자의 인생이 있고 장자의 인생이 있어요.



야곱이라는 이름으로는 자기 인생을 살았어요.

야곱이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꿈을 실현하고자 하였어요.

그것이 하란에서 거부가 되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란에서의 20년과 벧엘로 돌아가는 과정 속에서의 10년을 합하면 30년 동안 자기 꿈을 이루고자 살았어요.



그것이 얍복강에서 깨어집니다.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고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게 됩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바뀌고 난 후에도 10년 동안 야곱으로 살고자 하였어요.

자기 꿈을 이루고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어요.



하나님은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였는데,

야곱은 짐승 떼에 마음이 빼앗겨서 세겜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세겜에서 강제 추방당하는 구조로 만들어 버립니다.

야곱은 마지못해서 자기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간섭으로 벧엘로 올라갑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자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너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이스라엘로 부르겠다고 하십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이름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입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주인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이름을 받은 자는 이름을 주신 자에게 종속이 되어요.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제부터 너는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로 부르겠다는 것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장자로서의 삶을 살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장자의 삶은 자기를 버리고 형제를 살리는 삶이에요.

이게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야곱의 일생과 예수님의 일생을 비교해 보세요.

엄밀히 말하면 둘 다 3기 인생을 살았어요.



예수님의 역사 속에서 사신 인생이 3기 인생이에요.

30년 동안 사생애로 사신 것은 1기 인생이고,

3년 공생애로 사신 것은 2기 인생이고,

십자가 이후 부활 하신 후 성도들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3기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기까지가 1기 인생이고,

집에서 쫓겨난 후 하란으로 갔다가 30년 만에 벧엘로 다시 돌아오기까지가 2기 인생이고,

벧엘로 돌아와서 이스라엘로 살아가는 것이 3기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일생은 예수님의 일생과 같아요.



야곱이 장자권의 축복을 받고나서 어머니의 조상의 땅으로 가서 아내를 맞이하지요.

야곱이 하란으로 간 것은 부모님이 시켜서 한 일입니다.

에서가 가나안 땅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자 이삭과 리브가가 큰 근심을 합니다.

이것은 언약의 가문과 비 언약의 가문이 섞이는 타락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삭과 리브가가 야곱을 어미의 고향으로 보내서 어미의 조상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려고 야곱을 리브가의 고향으로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리브가의 오라비인 라반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찾아서 천국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신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아무나 구원하지 않고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 구원을 합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이 곧 어미와 같습니다.

우리를 존재케 한 것은 창세전 언약이에요.



우리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전 어린 양의 생명책이 곧 우리의 조상과 같은 것입니다.

야곱이 아내를 얻는 것도 창세전 언약에 근거하여서 얻었어요.



야곱에게 두 아내가 있습니다.



레아와 라헬입니다.

레아와 라헬은 한 형제에요.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어요.



라헬을 얻고자 7년 종살이를 했어요.

그런데 라반은 라헬을 주지 않고 레아를 먼저 줍니다.

이에 야곱이 라반에게 나는 라헬을 사랑했지 레아가 아니라고 따집니다.

그러자 라반이 이 동네의 풍습이 언니가 먼저 가고 동생이 나중에 가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레아를 먼저 주고 라헬을 나중에 줍니다.



이게 두 언약과 같아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어요.

옛 언약은 죄 아래 가두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죄에서 구원하는 언약이에요.

하나님은 새 언약 안에 있는 자를 사랑해요.

그런데 언약의 순서가 옛 언약이 먼저 주어지고 새 언약이 나중에 주어집니다.



우리는 새 언약으로 구원을 받아요.

그런데 그 나라 법도가 새 언약이 주어지기 전에 옛 언약이 먼저 주어져요.

이러면 옛 언약은 레아와 같고 새 언약은 라헬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옛 언약인 율법 아래서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해요.

그러다가 새 언약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율법이고 새 언약은 은혜에요.

율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원 하세요.



갈라디아서 4장을 보세요.



갈 4:1-7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잘 보세요.

원래 유업을 얻을 아들인데 잠간 동안 종노릇하게 하였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원래 은혜로 살아가는 아들인데 잠간 동안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창세전 언약의 수순이 율법 아래 종노릇하던 자들을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하여서 아들의 자리로 옮겨주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약도 종노릇하게 하는 옛 언약인 율법이 먼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아들로 살아가게 하는 은혜인 새 언약이 나중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언약은 예수님이 지켜내세요.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를 죽이는 예수가 있고 살리는 예수가 있는 것입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는 우리를 몽땅 안고 십자가에서 죽이는 일을 하셨어요.

이건 율법 아래 있는 우리 옛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우리를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함께 죽인 자들을 성령으로 오셔서 살려내는 것입니다.

부활 하신 후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어린양의 생명책이 녹명된 자기백성들에게만 오세요.

이것을 성령의 인침이라고 하고 구원의 보증이라고도 합니다.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을 이해를 잘 하셔야해요.

성령 세례는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라고 인 쳐주는 것이에요.

이것을 성령의 내주하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로 도장을 찍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하고 성령 세례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라고 인을 쳐 주었으니 하나님의 아들로 살도록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살자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인침을 받은 자들은 성령 충만을 구하게 되어 있어요.

이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이 밥을 찾는 것과 같아요.



살아 있으니 밥을 찾고,

밥을 먹으니까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침을 받은 자들이 성령 충만을 구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기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은혜를 주세요.

이것은 법적으로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응답으로 은혜를 주신다는 뜻이 아니에요.

은혜를 아는 자는 기도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건강한 사람이 밥을 찾듯이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은혜를 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밥을 안 찾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에요.

산 사람은 반드시 밥을 찾게 되어 있어요.



생명이란? 항상 살아 있는 것입니다.

어제 살았으니 오늘 안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에요.

살아 있기 때문에 하루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만이 성령 충만을 구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성령이 있어요.

성령이 둘이란 말이 아니고 두 가지 사역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게 하는 성령과 거듭난 자로서 살아가게 하는 성령이 있어요.

거듭나게 하는 성령은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게만 주어집니다.

이 성령은 성도 안에 내주 하세요.

이 분은 떠나지 않아요.



그 다음에 은사를 행하는 성령이 계세요.

이 성령은 성도들을 도우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선물로 성령을 주신다고 하신 그 성령입니다.

이것을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거듭나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고,

거듭난 성도로서 살아가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성령 충만을 위하여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은 것이에요.

기도는 하나님과 연결이 된 생명줄이에요.

살아 있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주여 은혜를 주세요.

은혜 아니면 못 삽니다.

그게 기도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했지요?

우리는 흔히 그렇게 생각하시잖아요?

예수님이 기도할 필요가 뭐있겠냐?

아니에요.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 그 구조 속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늘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 시대 복음을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이 기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해요.

내가 교회인데 교회에 갈 필요가 뭐 있느냐 라고 하면서 교회에 갈 필요가 없다고 해요.

설령 교회에 와도 아무 것도 안해요.

거치는 자로 있어요.



이들은 신앙의 행위 자체를 부정해요.

그래서 신앙의 형식들을 다 파괴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단들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예수 믿는다고 해요.

이런 예수는 없어요.

가짜에요.

귀신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일컬어 거짓말쟁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이 어디에 많은가 하면 할례당에 많다고 해요.

할례당이란?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들만이 진짜라고 하는 자들을 말해요.

자기만 복음 안다고 나대는 자들이에요.



이런 자들이 특징이 사납고 차가워요.

그 속에 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따뜻함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품어내고 양이 물을 마시면 젓을 내듯이 뱀 새끼들이 복음을 가지니까 죽이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의 본질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로 나무를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 양의 탈을 쓴 이리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안에 말쟁이들에 경고하지요.

내가 가면 너희의 말을 달아 볼 것이 아니라 너희의 능력을 달아 보겠다고,,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어요.

예수님 초림 당시에 자칭 신앙 좋다고 한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하였듯이,

어느 시대이고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에 의해서 예수가 가려져 왔어요.



신앙생활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살아가는 삶이에요.

말씀이 양식인 것은 예수라는 양식을 먹은 자는 반드시 예수로서의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분명히 말하지만 교회에서 행하는 신앙적 삶이 없는 신앙은 가짜에요.



삶이 없는 신앙은 가짜이고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나요?

초대교회 당시에도 입으로만 예수 믿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일컬어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지금도 영지주의자들이 수두룩해요.



바울은 자기가 전한 교훈에 머물지 않는 자들과는 사귀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니 잘 분별하세요.

그 사람이 어떤 삶을 토하여 내고 있는지 그 결말을 잘 지켜보세요.

분명히 말하지만 예수는 세우고 살리는 일을 하고 뱀은 허물고 죽이는 일을 해요.



교회는 받은 은혜를 형제 사랑으로 토해내는 곳이에요.

그러니 교회 생활 열심히 잘해야 해요.

하나님이 교회를 폼으로 세워 놓은 것이 아니에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이유는 성도는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생명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다시 야곱 이야기를 해 봅시다.



야곱은 하란에서 열 두 아들을 낳고 거부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하나님은 벧엘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벧엘로 돌아가라는 말은 언약 안으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야곱의 언약은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자가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란? 아비의 심정으로 형제들을 섬기는 자에요.

그런데 야곱은 인간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어요.

하란에서 얻은 부(富)로 형을 이기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내고 싶은 것입니다.



형을 이기고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힘을 상징하는 야곱의 환도뼈를 위골시켜 버립니다.

위골 시켰다는 말은 온전치 못하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에서에게 무릎을 꿇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기는 자가 아니라 지는 자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건 야곱이 바라던 그림이 아니에요.

야곱은 형 에서가 자기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정반대로 야곱을 에서에게 무릎을 꿇게 하신 것입니다.

주가 아니라 종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 에서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고 주라고 고백케 됩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자기 힘을 빼앗기고 지팡이 하나를 받습니다.

지팡이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야곱은 어쩔 수 없이 지팡이를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입니다.



우리는 으뜸 되고 싶어 하지 나중 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상좌에 앉고 싶어 하지 말석에서 종 노릇 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우리 인생을 폼 나게 살고 싶어 해요.

하나님을 이용하여서 내 이름을 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야곱에 에서에게 무릎을 꿇고 난 후에도 욕심을 버리지 않았어요.

지팡이를 의지하면서도 자기 꿈을 이루고자 했어요.

그것이 짐승 떼를 치기 좋은 세겜에 머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야곱을 강제적으로 세겜에서 쫓아내는 일을 벌이십니다.



그것이 딸 디나의 강간 사건입니다.

야곱은 디나의 강간 사건으로 어쩔 수 없이 세겜을 떠나서 벧엘로 올라오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납니다.



9-15절을 한번 봅시다.



창 35:9-15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13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14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5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야곱이 세겜에서 쫓겨나 벧엘로 올라갑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다시 나타납니다.

다시 나타났다는 말은 예전에 보았던 그 하나님이 다시 찾아 왔다는 뜻입니다.



다시 나타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요?

이름을 바꿔주시지요.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부르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약 10년 전에 얍복강에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꿔주었어요.

야곱은 탐욕자라는 뜻이고,

이스라엘은 신과 싸우는 자라는 뜻인데 이는 자기 안에 우상과 싸우는 자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야곱은 자기 안에 탐욕이라는 놈과 싸우기는 커녕 그 탐욕을 이루고자 하였어요.

그것이 세겜의 정착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겜에서 강제로 추방당하게 하여서 벧엘로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여기까지 30년이 걸렸어요.

30년 동안 자기 꿈을 이루고자 하였는데 결국은 실패하고 원점으로 돌아 온 것입니다.

실패의 모습으로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신 것은 야곱을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것입니다.

말을 잘 들었으면 안 나타날 텐데 말을 안 들으니까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다시 나타나셔서 이제부터 야곱으로 살지 못하게 간섭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곱과 관련이 된 것들을 다 청산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곱과 관련된 인물들이 죽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라헬도 죽고 이삭도 죽습니다.

1 세대들은 다 죽습니다.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35장은 야곱의 1 세대들이 죽는 장이에요.

1 세대 야곱도 죽고,

2 세대 이스라엘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유업을 받지 못해요.

이스라엘이 아버지의 유업을 받아요.

그래서 야곱으로 있을 때는 아비지 집에서 쫓겨났는데 이스라엘이 되어서 아버지 집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야곱이 벧엘로 돌아왔습니다.

벧엘로 돌아오자 하나님이 옛날 이름 야곱은 삭제하고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로 주십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율법 아래서 나서 율법 아래서 살고 있다가 하나님이 다시 찾아 와서 우리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과 같아요.



아담 안에서 난 땅의 이름을 삭제하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난 하늘의 사람으로서의 이름으로 새겨주신 것입니다.

이제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집인 천국으로 가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아버지 집으로 데리고 가기 위함입니다.

데리고 갈 때 옛 사람으로 데려가지 않고 새 사람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이게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장자는 아버지 집을 유업으로 받는 자에요.



30년 전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을 때에는 아버지 집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였어요.

도리어 아버지 집에서 쫓겨남을 당하였어요.

30년이 지난 후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이 되어서 아버지 집을 유업으로 물려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옛 사람은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새 사람으로 갑니다.



옛 사람으로 있을 때는 육적 장자가 아버지 집을 차지하였어요.

그런데 우리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면 육적 장자는 집에서 쫓겨나고 영적 장자가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옛 사람은 약속을 받았고 새 사람이 유업을 받는 것입니다.

야곱으로 있을 때는 아버지 집을 에서가 차지하고 있었어요.

야곱은 장자의 명분만 받았지 실제 장자가 아니었어요.

실제 장자는 옛 사람 야곱이 죽고 새 사람 이스라엘이 되어서 받습니다.



창세기 36장을 봅시다.



창 36:6-8절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 동생 야곱을 떠나 타처로 갔으니 7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의 우거한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인하여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8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산에 거하니라”



야곱이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고난 후 집에서 쫓겨납니다.

이 때 아버지의 유업은 에서가 차지했어요.

그런데 30년이 지난 후에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어서 아버지 집에 돌아옵니다.



그러자 에서가 아버지 집을 떠나 세일산으로 가 버립니다.

아버지 집을 이스라엘이 차지하지요.

이건 새 사람이 천국을 차지하는 것과 같아요.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약속을 받았어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약속을 받으면서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천국을 유업으로 약속을 받고 난 후 야곱의 30년 인생처럼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바뀌듯이 우리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탐욕이 죽임 당하는 일들을 당합니다.

이게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전쟁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 안에 있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옛 사람이 죽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새 사람으로 천국에 갑니다.

이건 예수님이 육체로 이 땅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서 천국을 차지하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도 죽고 새롭게 부활 하여서 천국을 유업으로 받았어요.



모든 성도는 이 코스를 가게 되어 있어요.

이건 필수 코스에요.

천국을 누가 차지하느냐?

예수님과 같은 코스를 겪은 사람이 차지합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의 뜻이 뭐라고 했나요?

자기 안에 우상과 싸우는 자라고 했지요.

이건 하나님이 싸우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 속에 있는 탐심이라는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죄는 영웅주의로 나타나요.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한단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시비를 거는 거예요.

하나님은 탐욕의 사람 야곱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공격당하는 삶이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로 사는 삶은 고달파요.

옛 사람이 죽임 당하는 아픔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고 난 후에 아들을 낳는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본문을 봅시다.



창 35:16-18절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어서 벧엘에서 아버지 집으로 가는 노정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가는 노정에 라헬이 아이를 낳습니다.

라헬이 아들을 낳고 죽습니다.

그 자식은 어미의 죽음으로 태어났어요.



라헬이 죽어가면서 아들 낳고는 그 이름을 “베노니” 라고 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아니다 이 아이는 “베노니”가 아니고 “베냐민”이라고 합니다.

베노니는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베냐민은 “오른 손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이는 “이긴 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엄청난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야곱과 라헬은 한 몸이에요.

부부는 한 몸이에요.

라헬의 죽음은 야곱이 죽음과도 같아요.

그러니까 베냐민은 야곱의 죽음으로 얻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라헬이 죽어가면서 아들을 낳고서 이름을 베노니라고 불렀지요.

그런데 야곱은 그 이름을 베냐민이라고 지었어요.

어미의 죽음으로 태어난 자들은 육적으로는 슬픔이 아들인데 실제로는 이긴 자라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와 예수님 관계로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물과 피를 쏟으시고 우리를 낳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예수 안에서 태어난 자들은 이 세상에서는 슬픔의 아들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슬픔의 아들로 보시지 않고 이긴 자로 보십니다.

요한계시록의 아시아의 7교회를 볼 것 같으면 이긴 자들이 나옵니다.

이긴 자들이 누구인가?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입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은 베냐민으로 이긴 자들인데 이들이 이 땅에서는 슬픔의 아들인 베노니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는 베노니 이고 천국에서는 베냐민이에요.

이 땅에서는 슬픔의 아들로 살지만 천국에는 이긴 자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 슬픔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이 그러지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된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어요.

환란을 좋아할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원치 않아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 안에 예수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예수를 싫어해요.

그래서 예수를 품고 사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속에 예수를 품고 사는 성도들은 베노니로 슬픔의 아들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베노니로 사셨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베냐민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긴 자에요.

하나님 앞에 이긴 자는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럼 예수님의 죽음으로서 생겨난 자들도 이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와 예수님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긴 자가 되셨어요.

그런데 이 땅에서의 삶은 진 자로 살았습니다.

매 맞고 조롱당하고 침 뱉음을 당했어요.

이게 성도의 운명이에요.



하나님의 씨를 가진 자들은 이 땅에서 버려지는 인생을 살게 되어 있어요.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고 사는 것이 아니고 버려지는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버려지는 자리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예수라는 생명은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은 우리 옛 사람이 죽을 때 나타납니다.

우리가 살아 있으면 예수님의 생명은 감춰진바 되고 우리가 죽으면 예수님의 생명은 나타나요.

이게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예수의 생명을 잉태케 하는 방식이에요.



씨가 죽지 않으면 그 속에 생명을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농부는 씨를 죽음에 넘겨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농부처럼 우리를 죽음에 넘겨주고서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베노니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베노니의 삶을 살게 하시려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베노니로 살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참 아들들은 이 땅에서 베노니로 살고 천국에서 베냐민으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거짓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베냐민으로 살고 지옥에서 베노니로 살게 됩니다.

천국은 이 땅에서 베노니로 사는 자들에게 유업으로 주는 곳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받은 사람은 은혜를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봉사와 섬김과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교회를 섬기게 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주면 그 은혜가 나를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세요.

베노니의 삶을 살게 하세요.

은혜 받지 못하면 베노니로 살 수가 없어요.

우리의 본성은 베냐민으로 살고자 해요.

높은 자로 살고 싶지 낮은 자로 살고 싶지 않아요.

이게 죄인의 속성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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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모가 부른 ‘가시나무’ 라는 노래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어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에는 내가 너무도 많아 (반복)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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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이 쉴 곳이 없다고 합니다.

내 속에 있는 나 때문에 예수의 생명이 드러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이에요.



아이러니하게도 고난당하면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드러나요.

이를 알고 시편 기자는 고난당함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렘 29:11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우리는 이 땅에서 베냐민으로 살고 싶어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베노니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이 드러나기 위해서 마치 기드온의 300용사들의 항아리를 깨트리들이 우리의 육신의 소욕들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는 예수라는 빛이 있어요.

예수라는 횃불이 있어요.

항아리 속에 횃불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우리 몸이라는 항아리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항아리를 깨는 것은 횃불을 끄집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자기백성들 속에 있는 예수의 생명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우리 몸을 고난으로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의 자리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자들은 하나같이 버려진 자들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나그네들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야곱도 보세요,

야곱의 1기 인생은 베냐민으로 살고자 하였어요.

모으는 인생을 살아갔어요.

그러나 얍복강을 지나고 난후로는 버리는 인생으로 살게 되었어요.



얍복강을 지나서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형님 앞에 나가서 무릎을 꿇고 주라고 하였어요.

이긴 자가 아니라 진 자로 나아갔어요.

그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

이게 하늘나라 장자에요.



무릎을 꿇는 자가 주에요.

겉으로 보기에는 야곱에게 절을 받는 에서가 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무릎을 꿇은 야곱이 주에요.

하나님 나라의 주는 이 세상에서는 종의 모습으로 있어요.

베냐민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베노니로 있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베노니로 사셨어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섬기는 종으로 사셨어요.

그래서 나는 너희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형제를 섬기는 자가 하늘의 장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기는 그 모습이 베노니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걸 시편기자는 눈물로 씨를 뿌린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눈물로 씨를 뿌린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는 배노니로 살게 하시고는 천국에서는 베냐민으로 살게 하세요.



오늘 본문을 보면 또 기가 막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이 라헬을 베들레헴에다 장사하는 것입니다.

이 속에 또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창 35:19절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절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야곱은 누구를 사랑했나요?

라헬을 사랑했지요.

이것은 라헬이 야곱의 정실부인이라는 뜻입니다.

정실부인의 자식이 호적에 올라가요.

유업을 받아요.



라헬이 낳은 요셉이 야곱의 족보에 올라가지요.

37장을 보면 야곱의 약전은 이러 하니라 라고 하고서는 그 다음부터는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주가 되는 꿈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의 어미가 라헬이에요.

그러니까 라헬이 야곱의 정실부인인 것입니다.



정실부인이면 열조들이 있는 무덤에 안장을 해야 합니다.

라헬이 열조들이 계신 무덤 속으로 들어가야 돼요.

그런데 야곱은 라헬을 조상의 무덤에 안장하지 않고 베들레헴에 안장을 합니다.

열조들의 무덤에는 레아가 들어갔어요.



창세기 49장을 보세요.



창 49장 29-33절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야곱이 자기가 죽으면 열조들이 있는 무덤에 장사해 달라고 유언을 합니다.

그 열조의 무덤에 누가 들어가 있다고 합니까?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레아가 들어 가 있어요.



그곳에 야곱이 들어갑니다.

그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부부가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이러면 라헬의 자리를 레아가 차지한 것이 되지요.



알다시피 레아는 라헬 때문에 얻은 아내에요.

야곱은 라헬을 사랑해서 7년 동안 종살이를 했는데 라반이 라헬 대신에 레아를 주었어요.

그러니까 레아는 라헬 때문에 야곱의 아내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의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레아는 라헬 때문에 야곱의 아내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라헬이 들어갈 자리에 레아가 들어갔어요.

이것은 라헬의 버려짐으로 레아가 구원을 받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아와 라헬은 두 교회를 상징합니다.

레아는 구약 교회를 상징하고,

라헬은 신약 교회를 상징해요.



구약의 육적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이고,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의 조상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의 육적 이스라엘은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의 조상인 예수그리스도의 버려짐으로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비록 순서상으로는 구약 교회가 레아처럼 먼저이지만 하나님은 라헬과 같은 신약 교회를 사랑해요.

하나님은 구약 교회를 신약 교회 안에서 구원을 하세요.

이게 옛 언약이 새 언약 안에서 온전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 하셨습니다.

이는 율법이라는 옛 언약이 예수그리스도의 버려짐을 통해서 온전케 된 것입니다.



열조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레아는 라헬이 양보한 그 자리로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러합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버려짐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레아와 같아요.

하나님의 족보에 올라 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버려짐으로 구원을 받았어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족보에 올라 갈 수가 있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반드시 나를 대신해서 누가 버려짐을 당하여서 얻어진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보세요.



사 53:5-6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어요”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를 버리셨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의 바탕에는 그가 버려짐이 있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입니다.



우린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입니다.

레아처럼 사랑을 입지 못한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내어 주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겁니다.

우리가 버려져야 하는 자리에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고 레아와 같은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구원 속에는 항상 예수님의 희생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창세전 언약의 구원의 끝자락에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라헬의 버려짐으로 레아가 구원을 받았지요.

이게 그대로 그 자식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레아의 자식들이 라헬의 자식인 요셉을 버렸어요.

그런데 버려진 라헬의 자식인 요셉이 자신을 버린 레아의 자식들인 그 형제들을 기근으로부터 살려내는 것입니다.

결국 레아의 자식들은 자신들이 버린 라헬의 자식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그림이 바로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획했던 그 그림인 것입니다.

그래서 흠 없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가지고 흠 있는 자기백성들을 위하여 죽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어주심으로 인하여 흠 있는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라헬이 장사가 된 베들레헴이 어떤 곳인가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곳입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고 그 형제들에게 죽임 당하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예수님의 죽음을 가지고 예수를 죽인 자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서 누가 혜택을 받았나요?

유대인들이 혜택을 입었지요.

이렇게 될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혜택을 입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 속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모든 성도들 속에는 예수님의 버려짐의 희생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은 단 하나 그 아들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살아났다는 그 은혜성인 것입니다.



이걸 구약에서는 출애굽 사건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났습니다.

어린 양의 버려짐으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은 겁니다.

광야에 나온 백성들은 모두가 어린 양의 피 뿌림 입은 것입니다.



이걸 잊지 말라고 성막에서 죄인을 위한 희생 제물의 제사를 지내게 한 것입니다.

과양 40년 동안 날마다 흠 없는 제물의 희생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은 어린 양의 죽음을 기념케 하는 것입니다.



광야 40년은 우리 인생 전부를 상징합니다.

그럼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속을 받앗다는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유월절을 매년 기념케 하였습니다.



기념이란? 과거적 사건을 현재화 시키는 것입니다.

비록 과거에 일어난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효력이 늘 지속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광야 40년 동안 불순종의 역사를 살았지만 성막의 제사를 통해서 살아 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제사를 지낼 때마다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흠 없는 짐승의 버려짐을 통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사 속에 제물의 희생으로 용서 받고 살고 있다는 긍휼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긍휼이 빠진 제사는 껍데기 제사에요.

이걸 외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사보다 긍휼을 배우라고 하지요.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고 하지요.

이 말은 제사를 왜 지내는지를 아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 제사 왜 지내는데?

죄 때문에 지내잖아요.

너희들 죄 때문에 흠 없는 짐승이 죽었잖아,



그럼 제사를 지내면서 내가 죽어야 하는 자리에 짐승이 대신 죽었구나,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마음이 제사 속에 담겨져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너희들은 그 긍휼의 마음은 없고 나 제사 지냈잖아요 라는 것만 가지고 있지 않느냐,

내가 언제 그런 제사를 지내라고 했느냐,

그 따위 제사 지내려면 다시는 제물을 내게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합니다.

이게 이사야 1장의 내용이에요.



이사야 1장을 봅시다.



사 1:1-4절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2 하늘이여 ! 들으라 땅이여 !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11-14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사야 1장 1절을 어떻게 말하나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이상이라고 하지요.

지금식으로 말하면 교회에 말하는 것입니다.



뭐라고 하나요?

욕을 끌어 붓지요.

“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아”

“짐승 새끼도 자기 밥 주는 주인은 알아보는데”

“너희 놈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 고 합니다.



그러면서 역겨우니까 다시는 내게 제사 지내려고 오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제사 지낸 것을 의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왜 지내는지도 모르면서 제사를 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명절날 부모님 집에 형제들이 모여서 싸우는 것과 같아요.

명절에 부모님이 계신 고향 집에 왜 갑니까?

부모님 은혜 감사하고 형제들과 화목키 위함이잖아요.

그런데 은혜에 감사키는커녕 형제들끼리 쌈박질이나 하고 있으니까

부모님이 속상해서 버럭 소리치는 겁니다.



“야 이 놈들아”

“그럴 거면 다 가”

그러려면 다시는 집에 오지 말라고 합니다.



이게 집에 오지 말라는 소리입니까?

왜 명절에 부모님 집에 오는지를 알라는 것입니까?

부모님 집에 오는 이유를 알라는 것이잖아요.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이사야 1장과 같았어요.

제사만 지냈지 그 제사가 담고 있는 의미를 다 놓치고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는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하니까 제사 지내려고 하지 말고 긍휼을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게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것입니까?

제사의 의미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까?

제사의 의미를 잊지 말라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23장을 봅시다.



마 23:23-24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 신앙을 책망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양적인 것으로만 이해하였어요.

그러나 십일조는 물질의 양이 아닙니다.

물질은 의와 인과 신을 담는 그릇입니다.



의와 인과 신이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에요.

다른 말로 은혜와 사랑과 긍휼이에요.,



십일조가 뭔가요?

맏물이에요.

초태생이에요.



초태생을 왜 바치라고 하였나요?

이는 애굽에 장자가 죽을 때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났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났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초태생을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초태생을 상징하는 십일조를 드리면서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것을 깨닫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없이 드려지면 그것이 바로 외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나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시지요.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인가요?

이것은 의와 인과 신이고 저것은 십일조라는 형식이에요.

십일조는 그릇이고 의와 인과 신은 내용인 것입니다.



이걸 이 시대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여러분 왜 예수를 믿습니까?

왜 교회에 옵니까?



우리가 교회에 오는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행위입니다.

교회 생활과 감사는 동일한 비중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도 열심히 하시고 봉사와 충서도 열심히 하세요.

그냥 손님처럼 왔다 갔다 하지 마시고,,,



교회 오는 걸 자랑할 일인가요?

아니지요.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 은혜가 너무도 커서 교회로 모여서 감사하고 찬송하고 예배하는 것이잖아요.

이 감격 때문에 모이잖아요.

모여서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살고 있음을 깨닫고 더욱 더 그 은혜를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주일이니까 교회 왔잖아요,

주일 날 교회 오라고 해서 교회 왔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라고 큰 소리 칠 일은 아니지요.

주일을 지키러 왔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려고 왔습니까?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살고 있음을 안다면 교회의 모임이 기쁘고 설레어야 하겠지요.

감사하여야겠지요.



예배가 뭔가요?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의 모임이 기뻐야지요.

기다려져야지요.

더욱 더 모여야지요.

이게 구원의 은혜를 아는 성도입니다.



내가 구원 받기 위해서 예수님이 버려졌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이걸 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법이 되고 법이 되면 신앙생활이 힘이 들어져요.

신앙생활이 억지가 되면 안 되어요.

기쁘고 즐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이 든 겁니다.

어디서 떨어 졌는지 생각하고 돌이키셔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제발 설렁설렁하지 마세요.

처 삼촌 묘 벌초 하듯이 대충대충 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영혼이 달린 문제입니다.

제가 안타까운 게 왜 예수를 믿는 것이 그렇게 못 마땅하게 여기시는지 모르겠어요.

남의 일 하듯이 하느냐 말입니다.



남의 문제가 아니고 내 영혼의 문제에요.

그러니 제가 대충 대충 하라고 하여도 여러분은 목사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떻게 예수를 대출 대충 믿을 수 있나요 라고 따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이 반대로 되었어요.

제가 열심을 내라고 하면 짜증을 내요.

아니 목사가 열심 내라고 하지 열심 내지 말라고 합니까?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세요.



스스로 믿음 좋다고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는가요?

그것도 믿음이냐,

그것도 신앙생활이라고 하고 있느냐,

차든지 덥든지 하라고 하잖아요.

그러면서 열심을 내라 회개 하라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열심을 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열심 내라는 말을 제 이야기로 듣지 마시고 예수님 말씀으로 듣고 앉은뱅이로 있지 말고 일어나 걷고 뛰세요.

주님 오실 때가 가까웠어요.



라헬의 버려짐으로 레아가 열조의 무덤에 묻혔듯이

레아의 자식들은 라헬의 자식이 버려짐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어요.

예수님의 버려짐으로 얻은 구원이에요.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고 신앙생활을 하세요.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났나요?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님이 어떻게 되나요?

자기 형제들이라고 하는 유대인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지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의 버려짐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예수를 죽였던 자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십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자 베드로가 외칩니다.

이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무리들은 천하각국으로부터 올라온 경건한 유대인들입니다.

베드로가 너희가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어찌할꼬 라는 회개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구조로 일을 하실까요?

이는 구원 받은 자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버려짐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흔적들을 새겨 놓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 누구 때문에 살고 있는지 아느냐”

“내 아들의 죽음 때문에 살고 있어”

“이 사실을 잊지 마”



이 사실을 기억케 하려고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날을 주의 날로 삼아서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주일이 바로 주께서 살아나신 부활의 날입니다.

신약 교회는 부활의 날로 시작을 해요.

이는 신약의 교회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이긴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죄와 사망의 권세 바깥에 속한 하나님 나라 소속이에요.

그래서 부활의 날을 주의 날로 모이는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로 모여서 예수그리스도의 버려짐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하여야 해요.

하나님은 이 사실을 성도의 몸에 새기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생명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시어서 예수를 대신하여 사는 자로 만드세요.

이게 베노니의 삶인 것입니다.

베노니가 뭐라고 했나요?

슬픔의 아들이라고 했지요.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에서 버려지는 베노니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과 5장을 봅시다.



고후 4:7-12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우리가 보배를 질그릇에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보배는 예수님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예수를 싫어해요.

예수를 죽였어요.

그러니 당연히 예수를 품은 자들도 미워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겨쌈을 당해서 핍박을 받고 꺼꾸러뜨림을 당하고 욕을 먹고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버려지는 구조 속으로 밀어 넣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있는 예수의 생명을 세상에 토하여 내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예수의 생명을 끄집어내려고 우리를 버려지는 구조로 밀어 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죄인이 구원을 받았듯이 성도들이 전한 복음을 통하여서 세상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이 구원을 얻는 일들을 벌리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항상 예수를 품고 사는 성도들의 피 뿌림으로 증거가 되어 온 것입니다.



계속해서 고린도후서 5장을 봅시다.



고후 5:13-15절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미친 짓을 누가 하게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여서 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를 자신이 걸었던 그 십자가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미친 삶을 살게 한단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위해서 살게 하지 않고 예수를 위해서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이 세상 속에 예수로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라는 뜻입니다.

세상이 왜 성도를 미워하는가 하면 그들 속에 예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 껍데기를 보지 않아요.

우리 안에 예수를 보아요.

예수를 품고 있는 자들을 핍박해요.

마귀가 먼저 알아 봐요.

교인과 성도를 알아 봐요.

마귀는 저 놈이 예수를 품고 있는지 없는지 알아요.



교인은 예수가 없고 성도는 예수가 있어요.

마귀는 교인은 핍박하지 않아요.

성도만 핍박해요.

그래서 그 속에 예수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버려지는 슬픔의 아들인 베노니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희는 슬픔의 아들이 아니고 승리의 아들인 베냐민이라고 합니다.



이게 아시아의 일곱 교회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사아의 일곱 교회마다 이기는 자들이 나오지요.

그 이김이 이 세상 가치로는 버려짐으로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은혜를 받으면 버려짐을 당해요.

섬기고 베풀고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손해를 보아요.

은혜 받지 못한 자들이 혜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셈법으로 사는 자가 아니에요.

성도는 하늘의 셈법으로 사는 자입니다.

하늘은 주는 원리이고 땅은 받는 원리에요.

세상의 셈법은 움켜쥐는 것이지만 천국의 셈법은 내어 놓는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다고 하지요.

소금은 자신을 녹이면서 맛을 내게 됩니다.

소금은 녹으면서 음식의 맛을 냅니다.

이게 지고서 이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이름을 주셨습니다.

베노니이면서 베냐민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는 진 자이지만 천국에서는 이긴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도 베냐민으로 살고 천국에서도 베냐민이 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베노니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낮은 자리로 나아가게 하세요.

우리 힘으로 안 되니까 은혜를 주어서 낮은 자리에서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종으로 살게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우리는 미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맞아요.

성도는 미쳤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전부 미친 자가 되어요.

등신이 된단 말입니다.



바나바처럼 밭을 팔아서 성도를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바나바로 하여금 등신짓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건 등신짓이 아니고 지혜로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들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등신짓하면서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만 더 등신짓하고 삽시다.

세상은 온전한 정신으로 살면 열 받아서 못 살아요.

영악스러워지지 말고 바보가 되십시오.

바보가 되어야 허허 하고 웃을 수가 있어요.



바보스러움을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보스러움이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그 흔적들이 온 몸 가득히 아로새겨지셔야 합니다.

부디 베노니로 사시고 베냐민으로 천년 왕국에서 왕 노릇하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세상에서 베노니로 살게 하는 것이 천국에서 베냐민으로 살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게 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베노니로 살수 없으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강권하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도움을 구합니다. 그 은혜 속에서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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