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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61강. 세겜을 떠나게 하시는 하나님 (창 34:1-31)

by coroa 2021. 8. 4.

 

 

61강. 세겜을 떠나게 하시는 하나님 (창 34:1-31)

-.정낙원 목사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정한 곳으로 가기 전에 중간에 머무는 일들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에서 곧장 가나안으로 가지 않고 하란에 머물다가 가나안으로 갑니다.

하란에서 아버지가 죽고 난 후에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구약 이스라엘도 출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곧 바로 직행하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광야를 거쳐서 들어가게 됩니다.

광야에서 출애굽 1 세대들이 다 죽임을 당하는 일을 겪게 됩니다.



오늘 살펴보는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란에 있던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노중에 세겜에 정착하게 됩니다.

여기서 엄청난 아픔을 겪게 됩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의 집으로 가지 않고 세겜이라는 동네에 머물고 맙니다.

우리 생각에는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그렇게 혼이 났으면 하나님 말씀에 예 하고 순종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야곱의 이러한 모습은 곧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착각하기를 하나님을 만나면 말을 잘 들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들은 하나님이 아무리 잘해 주어도 말을 안 듣는 종자들이라는 것을 고발해 주고 있습니다.



죄가 뭐냐?

불순종입니다.

십계명을 보면 우리 인간들의 속성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내용을 잘 훑어보면 우리의 속성과 반대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 목숨을 버리라고 합니다.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랑은 모두가 이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목숨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이웃 또한 내 유익의 도구로 이용하고자 합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자에게 남을 위해 살라는 것은 순종을 얻어내고자 함이 아니고 너희는 불순종하는 자라는 것을 고발하고자 함입니다.

우리는 우리 눈앞에 하나님이 척 나타나서 기적을 베풀면서 명령을 하면 예 하고 순종 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날마다 기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순종의 역사를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구약 이스라엘을 가지고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나 야곱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우리가 야곱이고,

우리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 야곱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에이 나쁜 놈들 그러지 말고”

“주여 내가 바로 이런 자입니다” 라고 하셔야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시청각 교제입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고 난 후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구약 이스라엘과 야곱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를 믿지 말자 곧장 천국으로 데리고 가지 않고 이 세상에 두십니다.

그 모습을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여정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출애굽과 가나안 중간에 광야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자들을 곧장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고 광야를 거쳐서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출애굽 1 세대들은 다 죽고 2 세대들이 태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떡으로 살던 애굽의 사람을 죽이시고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들로 만들어 내십니다.

이 과정은 성도가 걸어가게 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야곱의 인생사 속에도 성도의 신앙 여정이 담겨져 있습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벧엘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곧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겪게 되는 것들입니다.



야곱에게 닥친 일들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도 야곱이 겪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놀라지 마시고,

아 올게 왔구나! 생각하고 이 모두가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 관리법이라 생각하세요.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어떻게 구원을 하시고,

구원 후에는 어떻게 간섭해 가시는지를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야곱을 통해서 보여 주십니다.



구약은 신약의 거울과 같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을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신약의 성도들의 운명을 가늠해 볼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어미 태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서 태어났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입었다는 것은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구원 받은 자들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하늘의 장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차자로 태어났습니다.



구원이란? 차자가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차자가 장자가 되는가 하면 장자의 옷을 입고서 됩니다.

장자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진짜 장자가 감싼다는 뜻입니다.

죄인이 진짜 장자의 품안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진짜 장자가 누구냐?

예수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장자로 보냈습니다.



왜 보냈느냐?

차자들에게 옷을 입혀주라고 보냈습니다.

자기 옷을 벗어서 입혀 주라고 보냈습니다.

이 모습을 에덴동산에서 가죽 옷을 입혀주는 것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발가벗김 당하였습니다.

옷 벗김을 당하였습니다.

그 옷을 우리가 입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이사야 53장에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가 옷 벗김을 당함으로서 우리가 옷을 입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누가 장자냐?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들이 장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장자들만 가는 나라입니다.

히브리서 13장에서는 하늘에는 장자들의 총회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장자가 되어서 하늘의 총회에 참석케 되는 것입니다.



이게 구약 출애굽 때 보여주었어요.

모세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킬 때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장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장자가 되었느냐?

어린 양의 피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내 장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모든 초태생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초태생은 장자를 뜻합니다.

이것은 어린 양의 피로 죽음에서 살아난 자 모두가 하나님의 장자라는 뜻입니다.

초태생 속에 이스라엘 전부가 포함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누구에게 어린 양의 피를 발랐는가요?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발랐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기도 하지만 믿음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신약으로 오면 믿음의 조상이 예수님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옛 언약의 조상이고,

예수님은 새 언약의 조상입니다.

언약을 거슬러 올라가면 창세전 언약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거쳐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 안에서 창세전 언약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창세전 언약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성취가 되는지를 예표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이 예수님 초림으로 완성이 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구약 이스라엘을 끌어안고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스라엘로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신약의 성도로 나타난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우리 옛 사람의 모습이고,

신약의 성도는 구약 이스라엘의 새 사람의 모습입니다.

구약은 옛 것이고,

신약은 새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과 신약의 성도는 짝입니다.

그러니 구약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인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럼 구약 이스라엘의 원조인 야곱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조망해 봅시다.



우리도 야곱과 같은 일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어떤 인생이냐?

얻어터지는 인생입니다.

왜 얻어터지는가요?

말은 안 들으니까 얻어터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한다고 하면 끝까지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사정을 봐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말을 안 듣는 겁니다.



그럼 방법이 없어요.

하나님이 야곱의 인생을 차압하고 간섭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 일을 다 이루기까지 달달 볶을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고서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벧엘 광야에서 유숙하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동행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너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창세기 28장을 보고 갑시다.



창 28:10-15=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5절 하나님의 약속을 잘 보세요.



첫째,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합니다.

둘째,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겠다”고 하십니다.

셋째,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넷째,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 온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심입니다.

야곱을 도우려고 온 것이 아니고 야곱을 사용하고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오해한 것입니다.

자기를 도와주려고 오신 줄 알았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와 동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살아가면서 하나님은 자기를 도와주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가게 됩니다.

야곱은 살아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환상이 점점 깨어져 갑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만을 위한 분이라는 것을 알아갑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 속에 담긴 의미를 몰랐어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 줄을 몰랐어요.

장자의 축복은 옛 사람이 죽는 겁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장자가 되면 이 땅에서 영웅호걸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온갖 술수를 다해서 장자권을 강탈하다시피 해서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장자는 영웅호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야곱은 세상 장자의 가치관으로서 하나님의 장자를 이해하였습니다.

하란에서 돌아 올 때까지만 해도 세상 장자관을 버리지 않았어요.

이게 얍복강에서 깨어집니다.

얍복강에서 하나님이 야곱의 힘을 빼앗아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자는 섬김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라는 것을 강제적으로 알려주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게 에서에게 무릎을 꿇고 주여 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야곱은 자기 생각의 장자인 영웅호걸이 되었으면 에서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지지 않았으면 절대로 에서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게 힘을 다 빼앗기고 나니까 어쩔 수 없이 에서에게 무릎을 꿇고 주 라고 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씨름을 당하는 겁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힘을 빼앗김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씨름을 걸어오세요.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시비를 거세요.

왜냐하면 우린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지 않고 내 뜻을 이루고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장자는 예수님입니다.

그럼 장자의 복을 받은 야곱은 예수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인생이 섬기는 인생입니다.

자기를 버려서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꺼꾸러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게 아니라고 교정 시켜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얍복강 사건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예수님의 인생을 살도록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인생을 살고자 합니다.

이 땅에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우리는 우리 이름을 내고자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시비를 거는 겁니다.

너 왜 그러는데 하고서는 태클을 거는 것입니다.

이게 죽을 맛인 겁니다.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얻어 맞은 사건 투성이에요.

왜 얻어 맞는 사건 투성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을 안 듣기 때문입니다.

말 안 들으면 두들겨 패는 수밖에 없어요.



히브리서 12장을 보세요.



히 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잘 보세요.

주께는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신다고 하지요.

아들마다 채찍질 한다고 하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다가온다고 합니까?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그것도 엄청 큰 아픔으로 다가 옵니다.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치기 하는 것으로 다가 와요.

하나님은 남의 새끼는 징계하지 않고 자기 새끼만 징계 하세요.

그래서 징계가 없으면 참 아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게 미치는 겁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그렇게 얻어터지고도 자기 안에 있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고집을 버리지 않았어요.

이게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에 머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이야기에요.

창세기 32장을 보면 벧엘의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벧엘에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가시겠다는 뜻입니다.



벧엘에서 어떤 약속을 했나요?

모든 족속들을 데리고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얍복강을 지난 후에도 밍기적 거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엘로 가는 도중에 세겜이라는 동네에 안착을 합니다.

세겜에서 자기 꿈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하지만 서울이 벧엘이라고 한다면 하란이 부산이에요.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중간에 세겜이 있어요.

그런데 이 세겜이 전주 쯤 벗어나 있어요.



부산에서 대전을 거쳐서 곧장 서울로 올라가면 되는데,

야곱은 부산에서 대전까지 잘 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전주 쪽으로 틀어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짐승들이 먹을 만한 풀이 많기 때문입니다.



세겜은 그리심산과 에발산 중간에 위치한 곳으로서 초목이 무성해서 소와 양 떼들을 치기에 아주 좋은 곳이에요.

야곱은 얍복강을 건넌 후 에서와 화해하고 난 후 숙곳에서 수년간 머물면서 가축 떼를 많이 불렸어요.

재산이 많이 늘어난 것입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 말씀은 잊고 재산 불리는데 정신을 빼앗기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 떼 때문에 세겜에 정착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얍복강을 건너왔을지라도 야곱은 여전히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꿈이란? 세상에서 거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재산은 짐승이었습니다.

그래서 짐승들이 살기 좋은 곳을 택한 것입니다.

그곳이 세겜입니다.



야곱의 이런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돈 버는 데에만 관심이 있잖아요.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까에 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토록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고 하여도 우리는 그건 그냥 성경책 속의 이야기이고 세상 사는데 중요한 것은 돈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돈이 있고 난 후에 예수도 믿는 것이지 돈 없으면 예수도 필요 없다고 하잖아요.

천국도 먹고 살만 하고 난 후에 하는 이야기이지,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무슨 믿음을 말하고 신앙을 말하느냐고 농담으로 듣잖아요.

우리는 농담으로 들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농담으로 간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농담이 아니란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는 일들을 벌리십니다.

그것이 엄청난 고난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야곱은 세겜에 머물면서 외동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엄청난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디나는 야곱의 불순종으로 인한 희생양입니다.

만약에 야곱이 곧 바로 벧엘로 올라갔을 것 같으면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디나의 강간 사건 속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 때문에 죄 없는 누군가가 희생을 당하게 된다는 복음적인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디나의 강간 사건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여기엔 엄청난 두 가지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복음이 뭔가요?

죄인을 위하여 흠 없는 분이 희생당하는 것이잖아요.

디나가 흠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아무런 잘못이 없는 디나가 야곱의 욕심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잖아요.

여자에게 있어 강간이란 죽음과 같은데 야곱이 디나를 죽인 것입니다.



이 모습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광야에서 확대 되어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이 살아간 코스도 야곱과 같아요.

야곱은 종노릇하던 하란에서 나와서 벧엘로 가는 노정에 세겜을 거쳐서 가게 됩니다.

이스라엘도 종노릇하던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광야에서 어떤 일을 하나요?

불순종하는 삶을 살지요.

이 때 이들의 죄 때문에 누가 죽습니까?

흠 없는 제물들이 희생당하였습니다.



이 그림을 그대로 신약으로 끌고 와 보세요.

우리도 그 과정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교회를 거쳐서 천국으로 가잖아요.



우리가 교회에 와서 무슨 일을 하나요?

세상 것을 버리라고 교회로 불러 주셨는데,

우리는 교회에 와서도 세상 것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살아갑니다.



이건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 와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과 같아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였어도 광야에서 애굽의 음식을 달라고 데모한 것과 같아요.

우리도 교회에 와서 세상 것 달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인간이 달라진 것이 없어요.

애굽에 있으나 광야에 있으나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세상에 있으나 교회에 왔으나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달라진 것이라고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내 죄 때문에 누군가가 희생당하였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면 하나님께서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는 노정에 세겜을 두신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는 노정에 광야를 두신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교회를 거쳐서 천국으로 가는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흠 없는 분이 희생을 당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흠 없는 분의 희생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 아들의 피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걸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한다고 합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 하려면 그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드러내는 일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워갔습니다.

이 말은 사람의 존재 목적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날마다 떡 때문에 예수를 죽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린 세겜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도 여전히 세상 것을 구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 것을 못 버리고 있어요.

이건 우리 힘으로 안 돼요.

불가능해요.

야곱이 세겜에 머물고자 한 것도 세상 것을 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창 33:17-19=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19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20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였어요.

그런데 야곱은 세겜에 정착하려고 합니다.

밭을 사고 집을 짓고 우릿간을 만들었다는 것은 정착하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세겜에서 정착하려고 했던 것은 짐승 떼 때문입니다.

야곱의 가치관은 짐승이었어요.

신약 식으로 말하면 돈입니다.

야곱은 여전히 삶의 목적을 돈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 행복을 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돈을 쫓아가는 이유는 돈이 행복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육신의 평안함을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행복하다고 여겨요.



육신의 평안함은 돈이 주거든요.

그래서 돈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돈은 행복을 주지 않아요.

사람들이 속고 있는 것입니다.



돈은 육신의 편리함을 줄 수 있어도 행복은 주지 못해요.

돈을 소유하면 불행이 따라와요.

돈은 마약과 같아서 사람을 끌어 당겨요.

돈 맛에 취하게 만들어요.

결국 돈의 종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사고가 틀렸다는 것을 자꾸만 깨우치는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짐승 떼가 없었다면 세겜에 머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럼 디나가 강간당하는 사건도 없었을 것입니다.

짐승 떼가 결국 야곱의 집안에 재앙을 불러온 것입니다.

돈이 재앙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이건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가난 할 때 형제간에 우애도 좋았어요.

그러나 돈이 생기면서부터 형제간에 우애가 금이 가기 시작을 합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에요.



돈이 부모 자식을 갈라놓고,

형제간도 갈라놓아요.

돈이 가는 곳마다 분열을 몰고 다녀요.

그래서 성경은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 자체가 악은 아니에요.

돈을 사용하는 자들이 탐욕으로 가득한 지옥의 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 때문에 싸우고 죽이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은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것에는 평안이 없어요.

그러나 마귀는 세상 것으로 거짓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평안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행복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에 평안은 마음을 지으신 분이 주어야 해요.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주신 평강이 바로 하늘에 평강입니다.



이 평강은 십자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탐욕을 죽이는 곳입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는 곳이에요.

인간의 불행은 탐욕 때문인데 이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안이 평강의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 평안을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도록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고난인 것입니다.



죄인에게 있어 고난은 하나님의 복입니다.

이걸 시편 기자는 알았어요.

그래서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간증하였던 것입니다.



시 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주의 율례를 몰랐는데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께 속한 성도들은 반드시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신 것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야곱은 합환채를 먹고 낳은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혀줍니다.

이건 구원의 옷입니다.

구원의 옷을 입고 나니까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주십니다.



그 꿈의 내용은 형제들의 곡식 단들이 요셉의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고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자기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유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꿈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꿈대로 형제들의 주가 되는 코스로 인도 하십니다.

그것이 죽음의 길입니다.

집에서 쫓겨나고 형제들로 부터 배신당하고 죽임당하고 쫓겨났으면 원수를 갚아야 하는데 도리어 그들을 살려 냅니다.

형제들을 용서하고 기근으로부터 살려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야곱도 이 길을 걸었어요.

야곱도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을 때 내 형제들의 주가 되는 축복을 받았어요.

알다시피 야곱에게는 형제는 에서 하나 밖에 없어요.

그럼 형의 주가 된다고 하여야 하는데 이삭은 축복하기를 형제들의 주가 된다고 하였어요.

이는 많은 형제들의 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도 만유의 주가 되는 코스로 인도 하셨어요.

그것이 집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께서 자기백성들에게 죽임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제부터 디나의 강간 사건 속에 담겨진 비밀을 살펴봅시다.



디나가 강간당한 사건은 야곱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야곱은 언약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을 야곱 속에 심어 놓았습니다.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12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제 그들을 데리고 하나님의 집인 벧엘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에 머뭅니다.

야곱이 벧엘로 가야 20년 전에 야곱에게 심어 놓은 벧엘 언약이 완성이 됩니다.



벧엘 언약은 식구들을 데리고 벧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벧엘로 돌아가지 않고 세겜에 머문단 말입니다.

이러면 벧엘 언약이 유보가 되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아무런 잘못도 없는 한 여인을 희생시킵니다.

야곱이 디나의 강간 사건 후에 세겜에서 쫓기다시피 하여서 벧엘로 올라가게 됩니다.

결국 디나의 강간 사건이 야곱으로 하여금 세겜을 떠나게 하고 벧엘로 올라가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 속에는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 했을 때 희생당하는 여인들이 등장을 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무얼 쫓아서 내려갔나요?

떡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빼낸 것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갈대아 우르는 떡으로 사는 곳이지만,

가나안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기근이 들자 지체치 않고 떡이 있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방식인 떡의 가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떡을 위하여 세겜에 머문 것이나,

아브라함이 떡을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나 그 영적 의미는 동일해요.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서 무슨 일을 당합니까?

사래가 바로에게 강간당하는 사건을 맞이하지요.

아브라함의 죄 때문에 사래가 희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사래나 디나나 같아요.



둘 다 언약의 사람이 언약을 위하여 살지 않고 떡을 쫓아가니까 애꿎은 한 여자가 희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래의 희생으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디나의 희생으로 벧엘로 올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걸 신약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 한 것은 떡에 가치로 살던 곳에서 말씀에 가치로 사는 곳으로 빼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 와서도 여전히 떡을 구하고 있어요.

아브라함이나 야곱처럼 떡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세겜에 머무는 야곱의 모습이에요.



‘디나’의 이름이 뭔 줄 아세요.

‘심판’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받아야 할 심판을 디나가 받은 것입니다.



디나의 사건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세상에서 교회로 빼냈어요.

떡에 가치로 살던 사람을 말씀에 가치로 사는 사람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교회에 와서도 떡을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두 번 못 박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 죽이고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는 교회로 나올 때마다 무엇이 깨달아야 하느냐?

나는 예수를 이용해서 이 땅에서 뭔가 얻으려고 했었구나 하는 것이 폭로가 되어야 합니다.



아! 내가 한 주간 동안에도 예수를 죽이고 살았구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긍휼을 구하여야 합니다.

립 서비스가 아니고 진심으로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는 과정 속에 광야를 두신 겁니다.

광야 속에서 우리의 죄악들을 낱낱이 고발당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상한 심령이 일어나야 합니다.



“난 진짜 악당이구나”

“나는 천국 갈 자격이 없어”

“나는 마땅히 지옥가야 해”

이것이 토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가지고서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 이 나쁜 놈! 그러지 말고,

‘내가 야곱이구나’를 아셔야 합니다.



솔직히 스스로를 획인해 보세요.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머리 속에 천국이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부귀영화가 있습니까?



솔직한 얘기로 우리는 세상의 부귀영화 꿈꾸고 있어요.

언제 우리가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나요?

돈 들어 왔을 때 기뻐하고 감사하잖아요.

언제 원망합니까?

돈 없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믿는 게 아니고 돈을 믿고 있는 거예요.



야곱의 불순종 때문에 디나가 강간을 당했어요.

하나님께서 야곱을 때려야 하는데 야곱 대신 디나를 심판하신단 말이죠.

디나는 야곱 대신에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돈 때문에 날마다 예수를 죽이고 산다니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저주해야 되는데 우리에게 저주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저주하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하나님이 여섯 시간 동안 침묵하신 겁니다.

여섯 시간 동안 흑암이었어요.



여섯 시간이란 창조 6일과 같아요.

창세기 1장에 엿새 동안 창조한 일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 세상 전체 역사가 흑암의 역사에요.

흑암은 죄를 상징합니다.

그 죄의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백일하에 확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도 몰랐는데 성령이 우리에게 와서 알려 주신 겁니다.

너희들이 예수 믿고 복 받고 세상에서 잘 살고자 하는 그 사고가 예수를 죽이는 그러한 악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잖아요?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니 그 후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잘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도리어 그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얍복강 이전이나 이후나 야곱은 변한게 없어요.

탐욕도 그대로에요.

변한 것이란 환도뼈가 위골 되어서 불편한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야곱에겐 지팡이는 하나님을 상징해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 할 때 지팡이를 의지해서 장자와 차자를 뒤 바꿔서 축복을 했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얍복강에서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었지요.

야곱이라는 뜻은 약탈자에요.

이스라엘 이라는 뜻은 우상과 싸우는 자에요.

무슨 뜻인고 하니 하나님이 야곱 속에 있는 우상과 싸우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세겜에 정착하고자 하는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디나의 강간 사건을 통해서 강제로 쫓겨가게 하는 일을 벌리신 것입니다.



야곱은 계속해서 야곱이라는 이름처럼 탐욕으로 살고자 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간섭하여서 야곱의 꿈을 산산조각 나게 만드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도 예수 믿기 이전이나 이후나 달라진 게 없어요.

그 욕심 그대로 가지고 살아요.

우리는 한 번도 우리의 꿈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그 꿈을 이루고자 달려갑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의 꿈을 깨어지게 하는 일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예수 믿고 나서 꿈을 포기하고 성품이 바뀌어서 착한 사람이 되었는가요?

아니에요.

물론 조금 포기하고 나아질 수도 있어요.

그러나 나라는 인간의 실존을 볼 때는 조금도 나아진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내가 착한 사람인줄 알았어요.

근데 예수를 믿고 난 후부터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잖아요?

우리가 뭘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내 근본이 나쁜 인간이라는 것을 알잖아요.



인간은 바뀌지 않아요.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게 예수를 믿으면 인간이 바뀐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포카스를 인간의 변화된 것에 맞추고 있어요.

아니에요.



물론 조금 바뀐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요.

바뀐 것처럼 보일 뿐이지 인간 속에 있는 그 죄성은 사라지지 않아요.

만약에 인간 자체가 바뀔 것 같으면 이 몸으로 천국에 가게 되어요.

그러나 천국은 이 몸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몸으로 변화되어서 갑니다.

몸을 바꿔 준다는 말은 이 몸으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야곱을 보세요.

안 바뀌잖아요.

야곱과 이스라엘의 차이는 우리 옛 사람과 새 사람과 같아요.

옛 사람은 법 아래 있고 새 사람은 은혜 아래 있어요.



얍복강 이전의 야곱은 법 아래 있었고 얍복강 이후의 이스라엘로서의 야곱은 은혜 아래 있어요.

하나님이 얍복강 이후의 야곱은 하나님이 은혜로 대하였어요.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징계는 당하여도 심판은 받지 않아요.

매를 맞을 지언정 잘려나가지는 않아요.



야곱이 세겜에서 당하는 고난은 징계에요.

징계하는 것은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아니야!

이 길이야!

이리로 가!



간섭당하는 것입니다.

간섭 당함이 고난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의 관점을 바꾸셔야 돼요

내가 예수 믿고 난 후에 내가 더 착하게 되고 온전하게 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인간은 그렇게 변화가 되지 않아요.



만약에 인간들의 변화에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으면 성경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고난 후에 계명을 잘 지키고 행복하게 살았다 라고 기록이 되어야 합니다.

근데 성경은 어떻게 말하나요?

계명을 주었는데도 어기는 것으로 말합니다.

종국에서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패잔병으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구약의 역사는 인간은 아무리 은혜를 줘도 안 되더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약의 인간은 되느냐?

아니에요.

구약의 인간이나 신약의 인간이나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그럼에도 구약과 신약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대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인간은 법으로 대하셨지만 신약을 인간은 은혜로 다하세요.



구약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법적 책임을 물었지만,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에게 책임을 물은 것입니다.

구약의 법 아래서는 예표적으로 성막에서 드려지는 희생 짐승에게 책임을 물었지만,

신약의 은혜 아래서는 희생 제물의 실상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에게 책임을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대하는 게 달라졌다는 거예요



얍복강 이전을 말하면 야곱의 옛사람을 상징한단 말이죠.

옛사람을 법으로 대하는 거예요.

법은 반듯이 징벌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야곱이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진 것은 야곱을 법으로서 대한 것을 말하는 거예요.

죽여 버렸단 말이죠.



야곱은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짐으로 법의 집행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야곱을 죽이고 이스라엘로 살려 내셨어요.

이스라엘은 은혜로 살아난 자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부터 법으로 대하지 않고 은혜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얍복강 이전과 얍복강 이후는 하나님이 야곱을 어떻게 대하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야곱이 어떤 사람으로 개과천선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인간의 잘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정한 그 자리로 인도 하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여정이나 야곱의 여정 모두 불 순종의 여정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한 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라도 끝까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본래의 그 자리로 인도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끝자락에는 그의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자식이 철이 들어가면서 부모님의 마음을 알고 효도를 하듯이,

우리도 신앙의 연단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씩 깊이 알아가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철이 들어가는 것이지 인간의 근본은 바뀌지 않아요.



그래서 끝까지 은혜인 겁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마세요.

우리가 설 자리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그 은혜의 자리를 벗어나지 마세요.

그 자리가 우리가 서 있어야 하는 구원의 자리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디나의 강간 사건이 담고 있는 또 다른 의미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앞서는 야곱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한 여인의 희생을 살펴보았습니다.

여인의 희생으로 야곱은 세겜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야곱 가족의 죄악상을 고발하는 것으로 살펴봅니다.



먼저 야고보서 4장을 봅시다.



약 4:1-5=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고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신앙의 싸움은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싸움으로 나타납니다.

육신의 소욕은 우리의 몸을 즐겁게 해 주고 성령의 소욕은 우리의 영혼을 즐겁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은 몸을 위하여 살고자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이 몸은 육신의 소욕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모두가 이 세상 것들입니다.

이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모두가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 것을 구합니다.

이걸 간음이라고 합니다.



3절에 우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다고 하지요.



우리가 품고 있는 정욕은 모두가 세상에 대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위하여 사는 것을 세상과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간음 하면 우리 안에 성령이 시기 한다고 하지요.



하나님이 시기하면 어떻게 되나요?

응징이 따릅니다.

그 응징이 바로 고난입니다.



강간과 간음은 같은 것이에요.

타자에 의하여 일어난 사건은 강간이라고 하고,

자신에 의하여 일어난 사건은 간음이라고 합니다.

강간은 강제적이지만 간음은 자발적이에요.



디나의 강간 사건은 두 가지 다를 담고 있어요.

야곱 입장에서는 디나가 강간을 당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세겜 사람들 입장에서는 디나가 간음을 한 것입니다.



강간 사건이 왜 일어났나요?

디나가 세겜에 구경 나갔다가 일어났습니다.



1절을 보세요.



1절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습니다.

이건 디나의 자발적 행위입니다.

디나가 스스로 그 땅 여자들을 보려고 나갔습니다.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다는 것은 그 곳의 여자들이 행하는 종교적인 축제에 참여 하였다는 뜻입니다.

당시 종교 축제는 항상 동네 잔치 분위기였어요.

이방인들은 종교적의 의식을 행할 때 여자들이 회려한 장신구를 치장을 하고서 춤을 추어요.

마치 브라질에서 행하여지는 카니발 축제로 연상을 하시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이방신들의 종교 축제는 항상 행음이 있었어요.

이방 종교에서의 행음은 종교 의식이에요.

브라질에서 행하여지는 카니발 축제에 왜 온 세계 남성들이 가는 줄 아세요.

거기는 섹스의 향연이 펼쳐지기 때문이에요.



민수기에 보면 발람이 이스라엘을 타락케 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모압 왕 발락이 발람 선지자에게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면 저주를 받게 하느냐고 했을 때 발람이 알려준 것이 종교 축제였어요.

모압 평지에 종교 축제를 벌리는 것입니다.

반라의 여자들이 춤을 추니까 이스라엘 남자들이 훅하고 넘어 가서 그들과 행음을 하고 급기야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절을 하기에 이릅니다.



디나가 세겜에 이방 종교 축제하는 것을 보러나갔어요.

세겜의 카니발에 참예한 것입니다.

디나가 그 땅의 여자를 보러 나갔다는 것은 여자들이 행하는 일에 참예 하였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는 각 부족마다 그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제사하는 것이 있었어요.

정한 날을 잡아서 굿거리를 했어요.

마치 우리나라에서도 고을마다 무당을 불러서 액운을 막고 길운을 불러오는 굿을 하는 것과 같아요.



야곱의 자식들은 굿 거리 하는 것은 낯선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참예케 된 것입니다.

디나도 구경을 갔다가 어울리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보다’ 라는 단어를 “라아” 라고 하는데 이는 ‘경험하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경험이란?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들의 종교 의식에 동참 하였다는 뜻입니다.

동참 하였다는 의미 속에는 그들과 동침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어요.

단순하게 그냥 논다는 의미가 아니고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겜의 종교적 의식에 참예하는 것을 의미해요.



이는 영적으로 간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과 가 아들들 간의 대화 속에서도 잘 나타나 있어요.

야곱이 아들들을 책망을 하자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요?왜 우리 동생을 창녀처럼 대우하느냐 라고 하지요.



31절 “그들이 가로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니이까?”



그가 디나를 창녀 같이 대우하였다고 하지요.

창녀란? 사창가 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신전에서 봉사하는 여 사제를 말해요.

이 말은 디나가 춤추는 여자들 틈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몰 추장의 아들 세겜이 낯선 여자가 있으니까 찜해서 데리고 잔 것입니다.

본문을 잘 보시면 디나가 즐겼다는 의미가 있어요.



26절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세겜 사람들이 할례를 받고 아파 할 때 시므온과 레위가 급습을 하여서 세겜의 집에 있던 디나를 데리고 옵니다.

이 말은 디나가 세겜의 집에 기거하였다는 뜻입니다.

왜 기거 하였나요?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에서 세상과 짝하는 것이 간음이라고 하였지요.

왜 세상과 짝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합니까?

이는 즐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간과 간음은 같은 의미라고 했지요.

강간은 힘으로 내 욕구를 채우는 것이지만,

간음은 내가 자발적으로 즐기는 것입니다.

디나의 강간 사건은 야곱의 입장에서는 강간이지만 세겜의 입장에서는 간음이에요.



야곱 족속이 왜 세겜에 머뭅니까?

자기 유익을 위해서에요.

디나가 왜 이방인들 종교 축제에 참가합니까?

즐기기 위해서에요.



야곱 족속들이 왜 세겜에 머물러 있느냐?

그곳이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세겜이 매력적이니까 세겜을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디나가 강간당한 것은 세겜이 좋아서 머물러 있는 것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에요.



디나가 강간당한 사건은 그들이 자초한 일이에요.

겉으로는 디나가 강간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디나가 세겜을 간음한 것입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세겜과 간음한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것으로 비유하면 야곱의 족속들이 지금 세상과 간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강제로 추방당하게 하여야지요.

그게 디나의 강간 사건이 주는 의미에요.



하나님이 디나가 강간을 당하게 함으로서 세겜에서 강제로 쫓겨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디나가 강간당한 것은 야곱 족속에게는 고난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세겜을 떠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가지고 세상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잘 보세요.

세겜 추장인 하몰의 아들인 세겜은 디나를 진짜 사랑했어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난 디나가 좋으니까 아버지가 디나 아버지에게 가서 디나를 자기에게 달라고 간청을 좀 해 보라고 조릅니다.



창 34:3-4= “3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련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4 그 아비 하몰에게 청하여 가로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3절을 보면 그 마음에 깊이 연련하였다고 하지요.

여기서 “마음 깊이 연련하며” 라는 말은 “티드 바크 나프소” 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의 영혼이 디나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 라는 뜻이에요.

세겜은 디나에게 온 정신을 빼앗긴 상태였어요.



이건 디나와 마음이 하나 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겜이 강제적으로 혼자 일방적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고 디나도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디나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집에 눌러서 산 것입니다.



이에 하몰이 야곱을 찾아갑니다.

찾아가서 우리 아들이 당신 딸을 그렇게 사랑하니까 우리 서로 사돈을 맺자고 합니다.

당신들을 보아하니까 떠도는 나그네들 같은데 내가 땅을 줄 테니까 여기서 정착을 해서 서로 의지하면서 살자고 합니다.



당신 자식들과 우리 자식들 간에 결혼을 하여서 서로 사이좋게 살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니 우리 서로 사돈 합시다 그랬어요.

알다시피 야곱은 세겜에 정착하려고 밭을 샀잖아요.

밭을 산 것은 정착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땅의 왕과 사돈이 되게 생겼는데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이게 야곱에게 좋은 거래입니까?

나쁜 거래입니까?

좋은 거래이지요.



야곱은 심정적으로 세겜 추장 하몰의 제안을 수락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철없는 자식들이 술수를 부려서 틀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만약에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했을 것 같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늙어 죽을 때까지 세겜에서 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강제적으로 세겜에서 추방시키는 일을 허신 것입니다.

여기에 그 아들들이 동원이 된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얼마나 사악하지 아세요.

야곱이 자식들은 세겜 사람보다 더 악질이었어요.

세겜 사람들은 순진하였어요.



잘 보세요.

야곱이 아들들에게 세겜 추장이 찾아 와서 사돈을 맺자고 제안을 합니다.

야곱의 마음은 이왕 일이 이렇게 벌어 졌으니 저쪽에서 우리가 살아갈 땅도 주고 집도 주고 재산도 불려 준다고 하는데 자식들에게 너희들 생각은 어떻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야곱의 아들들이 술수를 씁니다.

무슨 술수를 씁니까?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의 추장인 하몰에게 우리는 언약의 민족인데 비 언약의 민족과 혼인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우리와 혼인을 하려면 당신들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와 사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세겜의 아비 하몰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고 묻습니다.

이에 야곱의 아들들이 할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하몰이 그 제안을 수락합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자기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은 가축도 많고 자식들도 많으니까,

우리하고 한 가족이 되면 저들의 재산이 우리 것이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저희들과 우리가 서로의 아들과 딸을 혼인을 시켜서 혈연관계를 가지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들의 요구가 자신들과 하나가 되려면,

자신들과 같은 종교 의식을 행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남자들은 다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겜의 남자들도 다 할례를 받아서 그들과 연합을 하자고 합니다.

이에 세겜의 남자들은 좋다고 하면서 다 할례를 받습니다.

이 얼마나 순진합니까?



그런데 시므온과 레위가 밤에 칼을 차고 세겜 성으로 들어가서 하몰과 그 아들 세겜과 모든 남자들을 다 죽이고 그들의 아내와 재산들을 늑탈해 옵니다.

그리고 세겜의 집에 머물고 있던 디나를 데리고 옵니다.



잘 보세요.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을 죽인 것은 디나의 강간에 대한 복수입니다.

복수를 어떻게 합니까?

힘으로 하지요.



강간이 뭔가요?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여서 강제로 자기 욕구를 채우는 것입니다.

이건 마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귀적인 일들을 야곱의 아들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의식인 할례로 말이에요.

이건 악한 것이에요.



야곱의 아들들이 할례 언약을 가지고 세겜의 사람들을 죽인 것은 영적 강간과 같은 것입니다.

나타난 모습은 세겜 사람이 디나를 강간했지요?

맞아요. 맞는데,,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을 어떤 식으로 복수를 하는가요?

할례라는 언약을 가지고 복수를 해버리지요?

이러면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을 강간하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야곱의 가족은 강간과 간음을 동시에 한 것입니다.



누가 더 나쁜가요?

세겜 사람인가요?

야곱의 가족들인가요?

야곱의 가족들입니다.



야곱이 세겜에 머물지 않았으면 이러한 일들을 일어나지 않았어요.

모두가 야곱이 세겜에 머물고자 하여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야곱은 이 일로 야반도주 하다시피 세겜을 떠나게 되고 벧엘로 올라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디나의 강간 사건을 가지고서 야곱의 가족들을 강제로 세겜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구조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만약에 자식들이 할례로 세겜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야곱은 세겜에 정착 하였을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은 다 아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의 아들들을 격동케 하여서 쫓겨 가는 신세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의 불순종의 죄를 고발하기 위하여 그 자식들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신앙에 적용해 보세요.

우리들도 복음을 빙자하여서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천국 보다 이 세상이 좋아요.

천국은 그냥 관념 속에 나라에요.

우리가 꿈꾸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행복은 허구라는 것을 깨닫는 일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이 행복을 준다고 돈을 쫓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돈 때문에 엄청난 아픔을 겪게 만드시는 일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돈의 자리에 부모 형제와 자식일 수도 있고, 세상의 권세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어요.

우리가 의지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을 하나 둘씩 허물어 가는 일을 벌이십니다.

그것이 화근이라는 것을 알게 만드세요.



예를 들어서 이야기 합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 잘하다가 세상과 가까워지는 겁니다.

교회를 등지고 한 단 말이에요.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그 집안에 어떤 사건을 벌이시는 거예요.

사건을 일으켜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를 찾고 기도하게 만드세요.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찾느냐 하면 어렵고 힘이 들어야 찾아요.

등 따습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안 찾아요.

이게 인간의 본성이에요.



우리 육신은 흙에서 났기 때문에 세상 것을 얻을 때 기분이 좋은 겁니다.

행복해 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눈에 보이는 세상을 쫒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과 연락하며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 말씀에 순순히 순종하고 사는 인간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원함과 상관없이 사건사고를 자꾸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이것이 세겜을 떠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겜이라는 이 세상에 머물기를 원치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이 좋아요.

짐승 떼 치기 좋고 육신의 편안함을 주고 사람살기에 좋단 말이죠.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이상한 일들을 발생시키는 거예요.



갑자기 사고가 난다거나,

잘 나가던 사업이 갑자가 망한다거나,

건강한 몸이 갑자기 이상이 와서 아픈 다거나,

멀쩡히 말 잘 듣던 아이가 갑자기 사고를 쳐 가지고 문제를 일으킨다거나,

좌우지간 우리가 원치 않는 골치 아픈 일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면 하나님이 간섭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동안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셨다면,

이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 하시는 것입니다.

몸 편할 때는 하나님을 잊고 살았는데,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그때서야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하나님이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하여 자식들이 사고를 치게 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들이 종종 발생을 해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을 찾아요.

우리는 세상이 좋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골치 아픈 일들을 종종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교인들이 있어요.



고난당하면 영영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있고,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어요.

고난을 당하면 진짜와 가짜가 구분이 되어요.



고난당하면 떠나는 사람은 원래 아닌 사람이고,

고난당하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하나님의 양이에요.

편할 때 몰라요.

고난 닥치면 옥석이 구분이 되는 겁니다.



고난이 닥치면 스스로 예수를 따르는 자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으로 예수를 믿는 자인지 구분이 되어요.

스스로 예수를 믿는 자는 자신에게 불이익이 당하면 떠나고,

하나님 손에 이끌림을 받은 성도는 손해보고 아픔 당하는 줄 뻔히 알고서도 따라가요.

하나님은 고난을 가지고 진짜와 가짜를 구분해 내세요.



우리는 세겜이 좋아요.

세겜을 떠나기 싫어요.

세겜에 머물기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눈만 뜨면 세겜의 것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복음 알아도 여전히 우리는 세상 것을 원해요.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을 보세요.

광야에 나와서도 애굽에 것을 달라고 하잖아요.

툭 하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잖아요.

나 가나안 안 갈래!

애굽으로 돌아갈래! 그러잖아요.



그럼 하나님이 오냐 그럽디까?

아니에요.

이 놈에 새끼들 하면서 두들겨 패잖아요.

내가 너희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오려고 치른 값이 얼마인데 하면서 두들겨 패잖아요.

질질 끌고 가나안으로 올라가잖아요.



막상 가나안에 들어가 보니까 이게 웬 횡재입니까?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 그래 잘 가라고 했으면 어찌 할 뻔 했겠어요.

비로서 우리의 원대로 버려두지 않고 하나님의 원대로 질질 끌고 온 것이 너무나도 고마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와 찬송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보니까 고난이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에서는 천상에 간 24 장로들이 자기가 쓴 면류관들을 모두 벗어서 하나님에게 던져 드리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천국에 가 보니까 하나님이 강제로 이끌고 온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는 거에요.

그러니 면류관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감사와 찬송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징계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을 보고 갑시다.



히 12:4-1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남의 새끼는 징계하지 않고 자기 아들들에게만 하세요.

왜 징계한다고 합니까?

죄와 싸우게 하려고 징계한다고 합니다.



죄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들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징계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왜 징계하나요?

잘되라고 하는 겁니다.

그릇된 길 가지 말고 옳은 길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된 길을 가는데,,

하나님은 채찍으로 못 가게 하세요.

그래서 성도의 신앙 길은 온갖 얻어터진 흔적 투성이로 가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 징계가 디나의 강간 사건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아들이에요.

신앙생활을 개떡 같이 하는데도 아무런 징계가 없다고 하면 그건 사생아에요.

그런 사람은 교회 마당만 밟고 다니는 그냥 교인이에요.

교인은 징계가 없어요.

징계는 성도만 당해요.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그거에요

신상생활을 개떡같이 하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따집니다.

하나님 저 인간 언제까지 가만히 둘 겁니까?

무엇이 저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까?

뭐가 당당해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까?



저 사람이 진짜 하나님 새끼라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가로 막고 있는 것들을 다 치워 달라고 합니다.

언제까지 유기할 겁니까?

손 좀 봐 주세요 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손보면 복잡해져요.

하나님이 손보기 전에 잘하세요.

언중유골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엄청난 시달림을 받았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장자의 사랑이에요.

예수님의 사랑이에요.



요셉을 보세요,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가 되는 꿈을 주었습니다.

주란? 장자에요.

장자는 아버지 집을 맡아서 아버지 노릇을 해야 해요.

그래서 형제들은 요셉을 미워하고 팔아먹었어도 요셉은 그들을 살려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벧엘 언약이 심겨져 있어요.

그러므로 세겜에 머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세겜에 머무니까 하나님이 강제 철거 작업을 벌리신 것입니다.

그것도 그 자식들을 가지고서 말이에요.



오늘 우리는 디나의 강간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비록 겉으로는 아픔으로 보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은 끝까지 간섭 하여서 언약의 그 자리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딤후 4:18절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길에도 수많은 우여곡절들이 있었습니다.

순경도 있었고 역경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주의 긍휼을 구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비싼 수업료를 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물론 그 나라에 가기까지는 계속해서 수업료는 지불하겠지만 말이에요.



그러나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하나님이 끝 날까지 이루실 줄을 믿기에 안심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가 원치 않는 일을 당한다 하여도 낙심하지 마시고 그것이 하나님의 간섭하심이고 사랑이라는 것을 아시길 바랍니다.



고난도 믿음으로 받으면 아멘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아시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야곱이 세겜에서 당한 이 사건들은 결국 야곱으로 하여금 언약의 장소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이 시간에 알았습니다. 야곱이 세겜에 머묾 때문에 디나가 희생당한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지금도 야곱처럼 이 세상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십자가 앞에서 늘 긍휼을 구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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