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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44강. 이스마엘을 곁에 두신 이유 (창 25:11-18)

by coroa 2021. 5. 19.

[44강. 이스마엘을 곁에 두신 이유 (창 25:11-18)]

-.정낙원 목사

 

오늘은 이삭의 면전에 이스마엘을 두신 이유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알다시피 이삭은 약속으로 난 자로서 영에 속한 자를 상징하고 이스마엘은 혈통으로 난 자로서 육에 속한 자를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한 집안 속에 영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를 함께 두신 것입니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요.

오늘은 그 이유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아브라함이 죽는 사건 속에서 이스마엘의 족보를 붙여 놓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알다시피 이스마엘은 종의 자식으로 육에 속한 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죽음 이야기 속에 종의 자식의 계보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건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 집안은 언약의 가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언약의 가문 속에 육의 속한 자손들의 계보를 두었어요.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후손도 12 방백을 두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12 지파와 대조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언약 속에 언약의 후손도 12 지파를 두고 비 언약의 후손도 12 지파를 둔 것입니다.



이는 교회 안에 언약의 후손과 비 언약의 후손이 공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영으로 난 자와 육으로 난 자가 섞여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양과 염소가 섞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갈라디아서 4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내를 가지고 두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갈을 일컬어서 시내산 언약이라고 하고,

사라를 일컬어서 하늘 예루살렘 언약이라고 합니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육을 상징하고,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영을 상징합니다.

하갈의 후손은 땅에 속한 자를 말하고,

사라에게 속한 자는 하늘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걸 언약으로 말하면 하갈의 소생은 옛 언약에 속한 자이고,

사라의 소생은 새 언약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두 언약이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말합니다.

그럼 이스마엘의 후손은 육을 상징하는 옛 언약에 속한 것을 말하고, 이삭의 후손은 영을 상징하는 새 언약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하늘 예루살렘과 땅 예루살렘은 짝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짝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서로를 드러내는 짝입니다.

그러니까 이삭과 이스마엘은 서로를 보여주는 짝인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딱 깨면 마치 호두가 반으로 짝 쪼개어지듯이 두 언약으로 나누어집니다.

죽이는 언약과 살리는 언약이 있습니다.

죄 아래 가두는 언약이 있고, 죄에서 건져내는 언약이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자기 백성들을 예수그리스도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먼저 흠 있는 모습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해지는 것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게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로 하면 흑암 속에서 빛을 불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왜 창조가 저녁에서 아침으로 진행이 됩니까?

이는 성도의 구원이 죄에서 의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와 구원은 영적으로는 동일한 의미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쉬운 말로 죽었던 자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살려 내기 위하여서는 죽음이 전제가 되어야겠지요.

그래서 언약이 주어질 때에는 먼저 죽이는 언약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두 과실로 나타납니다.

에덴동산의 두 과실은 두 언약을 상징합니다.

선악과는 먹으면 죽고, 생명과는 먹으면 삽니다.

선악과는 죽이는 언약이고, 생명과는 살리는 언약인 겁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는 절대로 먹어선 안 된다고 합니다.

그걸 먹으면 반드시 죽는 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뱀의 미혹에 선악과를 먹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였음에도 아담은 먹으라는 생명과는 먹지 않고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먼저 죽음이 다가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독자적으로 우리가 죽음에 뛰어 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가 형성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는 선악과는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듣고 먹어버렸습니다.

그리곤 죽음에 가두어지게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담이 왜 죽었나요?

그 속에 선악의 독을 이길 생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과를 먹지 않아서 죽은 겁니다.

아담 속에 사망을 이기는 생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예방주사와 같습니다.

우리가 예방주사를 맞습니다.

예방주사를 먼저 맞으면 독감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는 독감을 이기는 항체가 우리 몸에 이미 형성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과를 먹으면 어떻게 된다고 하였나요?

영생 한다고 하였습니다.

영생이란?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을 수 없는 몸을 가진 것입니다.



이 몸은 죄가 침범하지 못합니다.

생명과를 먹으면 죄와 사망의 영역 바깥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이 바로 생명에 속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바깥세상에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가 없고 죽음도 가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암튼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어서 에덴동산 바깥으로 쫓겨났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어버림으로서 죄가 형성되고 죽음에 떨어지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한 수순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흠이 먼저이고 거룩이 나중입니다.

죽음이 먼저이고 생명은 나중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죽은 자를 예수님이 오셔서 살려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사는 세상에 예수님이 산 자로 오시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를 산 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생의 세계에서 오신 예수님을 살려주는 영이라고 합니다.

살려주는 영이란? 죽은 자를 살려 주시는 영에 속한 분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영이시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 살아난 자들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예수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가 된 자란 뜻입니다.

성경의 중심사상은 산 자가 오시어서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으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이름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예수” 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일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자기백성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지 않으면 예수가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살려 주는 영으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백성들이 죄와 사망에 가두어져 있어야 합니다.

뱀이 예수님의 백성들을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뱀의 머리를 깨트리고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기 때문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이것을 창세기 1장에서 창조로 보여주었습니다.



창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습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혼돈과 공허와 깊음과 흑암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죽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죽어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들었는데 선악과를 먹고 죽어 버린 것과 같습니다.

이런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하나님 말씀이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말씀이 흑암 속에서 빛을 불러냅니다.

그러나 흑암 속에서 빛이 어둠을 깨트리고 나옵니다.

이건 마치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흑암과 혼돈과 깊음 속에 있는 그곳에 누가 찾아왔느냐 하면 말씀이신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빛을 불러내십니다.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니까 흑암 속에서 생명에 속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에 속한 자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흑암 속에서 빛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어둠이 빛은 가둘 수가 없어요.



빛이 비추면 어둠이 물러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역설적으로 어둠이 빛을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죄라고 합니다.



이걸 신약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의 아들들에게 죽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인간들이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하늘에 속한 영적 성도들을 땅에 속한 육적 교인들이 죽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흑암 속에 가두어진 빛은 빛의 자손들을 상징합니다.

곧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이 죄악 속 어둠 속에 가두어져 있었는데 말씀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들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신약 식으로는 예수님이 죽은 세상에 오시어서 자기백성들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에는 두 언약이 있습니다.

죽이는 언약과 살리는 언약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 집안에 두 아들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집안에 육으로 난 자와 영으로 난 자가 있는 것입니다.

육은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죽이는 자의 모습이고, 이삭은 살리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에게 주었을 때에는 이스마엘을 통하여 뭔가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어서 주신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시느냐 하면 언약의 백성들을 시련하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가 있습니다.

율법이 하는 일들은 계속 은혜를 드러내는 일을 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는 법이 바탕에 깔려있지 않으면 은혜로 드러날 수 가 없습니다.



이삭은 약속으로 난 자(아들) 입니다.

언약으로 난 자의 반대는 육으로 난 자 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낳게 해 주는 것이고 육은 사람의 힘으로 낳는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낳게 하였고 이스마엘은 사람이 낳았습니다.



사람의 자식과 하나님의 자식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의 자식이 하나님의 자식을 핍박하고 죽입니다.

이게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죽이고 있어요.

이걸 죄라고 하고 역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육에 속한 자가 영에 속한 자를 핍박함으로서 악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인 이스마엘을 통하여 핍박을 당하는 이삭은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게 신약에서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죽이는 것으로 확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에서의 두 아들의 모습이 바로 성령으로 낳아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혈통으로 낳아진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는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서로를 고발하고 있어요.

서로가 사로의 소속을 고발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이삭을 핍박함으로 뱀에게 속한 자로 고발이 되어지고, 이삭은 이스마엘로부터 핍박을 당함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임이 증명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죽음 이야기 소속이 성질이 전혀 다른 두 아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식으로 이스라엘 속에서 일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형제들의 동방의 살도록 하십니다.



동방이라는 말은 “파님” 이라고 하는데, 이는 “면전”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서로 마주보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맞대면서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게 하는 거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이삭의 면전에 둔 것은 이삭을 드러내기 위하여 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힘으로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는 것을 막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하갈의 동침을 묵인한 것은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필요한 수순이 기 때문에 막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모든 일들을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이미 준비하셨습니다.



이삭은 약속으로 난 자입니다.

이스마엘은 육으로 낳은 자이고 이삭은 영으로 낳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난 자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육으로 난 자를 먼저 주신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은혜 언약입니다.

은혜는 법을 통하여서만 드러납니다.

법을 모르면 은혜를 모릅니다.

법과 은혜는 서로 면전에 보고 있습니다.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전 언약을 이야기 할 때에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쌍둥이로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이 있어야 반듯이 새 언약이 성립이 됩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새 언약을 주시는 것이 목적이에요.



새 언약은 은혜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은혜로 구원하시는데,

그것이 새 언약인데,

그 은혜를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먼저 옛 언약을 먼저 주시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우리를 죄에서 가두는 언약이고,

죄를 고발하는 언약이고,

우리를 죽이는 언약입니다.

우리는 율법 앞에 서면 죄인으로 고발이 됩니다.

율법은 우리를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롬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법은 그른 자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곧 너는 틀린 자라는 것은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걸 지켜서 의로워지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넌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하고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어 버립니다.

우리는 율법아래서 죄인으로 드러나고,

나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서 마땅히 죽어야 하는 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듭니다.

입을 막아 버립니다.



죽어도 할 말이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말씀 앞에 유구무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입니다.



율법 앞에서 예, 나는 죄인입니다.

난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라고 율법을 주신 겁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자기가 죽어야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도 두 예수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를 죽이려고 오신 예수가 있고,

우리를 살리려고 오신 예수가 있습니다.

예수가 둘이란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두 사역을 말합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러 오신 분입니다.

이 때 혼자 죽는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을 몽땅 안고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이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나 죽이는 것이 아니에요

누구를 죽이느냐?

창세전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만 찾아가서 죽이는 거예요.

자기백성들만 죽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광의적으로는 온 세상 인류의 죄를 위하여죽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실제 자기에게 적용이 되는 자들은 자기백성들에게만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죽으실 때에 자기백성들을 안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나 죽이는 게 아니고 자기백성들만 찾아가서 죽입니다.

죽인 것은 살리기 위함입니다.

옛 사람을 죽인 것은 새 사람으로 살리기 위함입니다.

이건 마치 아브람이 죽고 아브라함으로 살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살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찾아가 죽인 자들만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안고 죽은 자들에게 성령으로 보내서 살려내십니다.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의 오심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오심을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언약도 죽이는 언약과 살리는 언약이 있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두 언약으로 일을 하십니다.

두 언약으로 죽이고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이걸 아브라함의 집안 속에 두 아들로 담아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5장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말하는데 거기에는 이스마엘의 족보도 있고 이삭의 족보도 함께 병행시켜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항상 다툼이 일어납니다.



이스마엘을 일컬어서 “들 나귀” 같다고 합니다.

들 나귀라는 말은 “페레” 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거가 되지 않는 자” 라는 의미입니다.

“말씀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자” 라는 뜻입니다.

들 나귀라는 말 속에는 “자기 맘대로 살아간다” 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삭은 들 나귀처럼 나대지 않았습니다.

이스마엘과 상대적으로 온순합니다.

심지어 자기가 제물로 바쳐져서 태울 나무를 짊어지고 모리아 산까지 따라갈 정도로 부모의 말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떨어져 나간 자의 모습입니다.

그게 들 나귀처럼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이삭은 온순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게 나중에 이삭의 아들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에서와 야곱으로 나타납니다.

야곱은 종용한 자로 나타나고 에서는 사냥꾼이 되어서 들 나귀처럼 뛰어다닙니다.



아브라함 집안에 이스마엘과 이삭이 이삭의 집안에는 에서와 야곱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의 집안에는 라헬의 자손과 레아의 자손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이렇게 둘을 깔아놓았습니다.



육에 속한 자는 항상 강성한 자였고, 영에 속한 자는 유약하였습니다.

육에 속한 자는 자기 힘으로 살았고, 영에 속한 자는 부모의 도움으로 살았습니다.

여기서 부모란 하나님을 대리합니다.

하나님은 힘 없는 이삭의 면전에 힘 있는 이스마엘을 두셨습니다.



힘 없는 이삭은 힘 있는 자의 면전에서 살아가면서 자기 능력으로 살아 갈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내 힘으로는 살아 갈수가 없구나!”

“하나님이 나를 살게 해주셔서 살아가고 있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이스마엘이 알까요?



이삭이 알까요?

이삭이 알지요.

이스마엘은 몰라요.

이스마엘은 스스로 살아가는 자니까요.



이삭은 형 앞에서 힘 없는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삭을 이스마엘 면전에 두고서 이삭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두 구조를 깔아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구조 속에 있어요.

우리가 지금 언약으로 살아가는 이삭과 같아요.

우리 주변에는 비 언약에 속한 자들이 있습니다.

강한 자들이 포진해 있어요.

그런데 힘 없는 우리가 죽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걸 우리 교회로 적용해 보세요.

우리 주변에는 큰 교회들이 즐비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늘 힘들었어요.

세상의 원리적으로 말 한다면 문을 닫았어도 벌써 닫았을 것입니다.

교회운영이 안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지키고 끌고 오시었습니다.

이십년이 넘는 동안 몇 십 명으로 살아 왔다는 것은 누구의 힘으로 살아 왔다는 것인가요?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목양교회야!

너희는 너희 힘으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단다!

너는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개인에게 적용될 것 같으면,

육적으로 말하면 예수고 뭐고 다 때려치워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고 하는데,

우리는 복은 고사하고 맨 날 지지리 궁상만 떨고 있어요.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나 돈벌러간다는 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꾸역꾸역 예수를 믿고 있다니까요.

조롱당하면서 말이에요.

이것이 누구의 힘이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꼭 아셔야 합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고 하지요.

꺼져가는 심지가 바람 앞에서 꺼져야 정상입니다.

갈대처럼 갈대가 바람에 꺾여 져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꺾여 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지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지켜주고 보호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어떻게 사용하실 지를 말씀해 주셨어요. 

 

창 16:11-12=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 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그가 사람 중에서 들 나귀같이 된다고 하지요.

그리고 “그가 모든 사람을 친다”고 하지요.

또한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친다”고 합니다.

이는 전쟁하는 자로 세워 두었다는 뜻입니다.



어디에 두었다고 합니까?

모든 형제들의 동방에 두었다고 하지요.

동방이란? “파님”이라고 하는데 이는 면전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마엘은 바란 광야에서 활 쏘는 자로 살게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활 쏘는 자는 적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언약의 후손들이 괴롭히는 자는 활 쏘는 자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이스마엘이 지금 맡은 역할은 악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괴롭히는 역할인가요?

자기형제를 괴롭히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이렇게 구조를 만들어 놓았어요.



드라마가 되려면 주인공과 악당이 항상 대립구조 갈등구조가 되어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악당으로 이삭 앞에 두는 거예요.

이삭을 괴롭혀야 됩니다.

이삭은 계속 괴롭힘을 당해야 해요.

이 사건이 실제 이삭에 태어나 젖을 뗄 때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창세기 21장을 봅시다.



창 21:8-11=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11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라”



이삭이 젖을 뗄 때에 이스마엘의 나이가 17세쯤 되었어요.

17세쯤 되었으면 철이 들어서 형이 동생을 돌봐야 합니다.

그런데 동생을 희롱하고 있습니다.



희롱한다는 이야기는 괴롭힌다는 이야기입니다.

핍박을 한다는 이야기이에요.

그 모습을 아브라함이 가만히 지켜보며 근심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두 형제의 갈등 구조의 원인 제공자가 아브라함 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고 이삭을 낳았는데, 그 갈등구조를 만든 장본인이 아브라함입니다.

그 아브라함을 하나님으로 보세요.



하나님이 이스마엘과 이삭을 갈등구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해놓은 목적이 무엇일까요?

이는 이 세상에서 창세전 언약이 이러한 식으로 펼쳐진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죄와 사망이 자기 백성들을 가두고 있습니다.

마귀가 죄와 사망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하나님의 백성은 약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약자로 있습니다.

이게 구약 이스라엘의 애굽의 바로에게 종살이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은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구원자를 보내서 종에서 해방을 시키십니다.



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 약자로 두셨을까요?

이는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율법 속에 약자 보호법을 두셔서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담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은 애굽처럼 힘으로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힘을 약자를 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는 강하신 하나님이 약자인 이스라엘을 돌 보고 계심을 알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강한 이스마엘의 면전에 둠으로서 하나님을 의뢰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삭은 이스마엘을 통하여서 나는 내 힘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힘으로 사는 자라는 것을 계속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자기백성들을 힘없는 자로 두신 것은 바로 힘없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누구를 바라보나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은 기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시편을 보세요.

시편은 다윗이 사울로부터 도망 다니면서 토해낸 기도입니다.

힘이 있었으면 도망 다니지 않아요.

그럼 기도 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힘이 없으니 도망 다녔고,

도망 다니다 보니까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변에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원수들이 우굴거려요.

그 웬수가 부부 일 수도 있고, 부모 자식 일 수도 있습니다.



서로 어렵고 힘든 일들을 하게 함으로써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웬쑤 짓을 해도 원수시 할 수가 없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내 자식이고 내 마누라이고 내 남편이고 내 가족들이기 때문입니다.

내 가족들이기 때문에 나를 힘들게 해도 원수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속은 썩어 문드러지지만 그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원수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하셨지요.

이것이 실제 가능할까요?

아니에요.

그런데 그 원수가 내 가족일 것 같으면 달라지겠지요?

그래서 네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이삭을 핍박해도 이삭은 이스마엘을 저주 할 수가 없어요.

한 형제인데 자기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가는 자로 택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으로 라면 장자인 이스마엘이 유업을 받아야 하는데 아브라함 집안은 언약을 보여주는 집안이라서 장자인 이삭이 유업을 이어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삭이 미안한 거지요.

그러므로 이삭은 형을 미워 할 수가 없어요.



사도 바울이 그랬잖아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바울을 핍박했지만 바울은 그들을 욕할 수가 없었어요.

도리어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어요.

왜냐하면 자기는 그들 속에서 선택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는 빚진 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했어요.

내 아내가 원수이고, 내 남편이 원수이고, 내 자식이 원수 입니다.

그런데 그 원수를 저주 할 수가 없습니다.

내 가족이니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 엮어 놓으신 작품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가족이라는 원수를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되고 도움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에게 적용해 보세요.

예수님은 유대인이에요.

유대인은 한 형제에요.

그 형제인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저주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한 집안 식구이니까요?

그래서 십자가에 죽어가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 하소서! 저들이 알지 못해서 저런다고 기도한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어떤 의미에서 부부가 너무 좋아도 안 된다니까요?

적당한 갈등 구조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가 너무 사이가 좋으면 마귀가 틈을 타서 하나님을 바라 보고 힘을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합심하여서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할 확률이 놓아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세상 방식으로 살고자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적당한 갈등구조를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게 은혜에요.

서로가 마음에 안 들면서 하나님께 구하게 됩니다.



솔직히 남편하고 아내가 말을 안 들을 때 우리가 궁시렁 거려도 누구한테 궁시렁 거립니까?

하나님 앞에 궁시렁 거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하나님을 찾도록 하십니다.



“너는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어!”

“너는 내 은혜에서 벗어 날 수가 없어!”

이게 신자의 운명입니다.



들 나귀는 지 맘대로 사는 자라고 했습니다.

끈 떨어진 연과 같다고 했습니다.

근데 우리 신자들은 들 나귀가 아니고 멍에 매인 나귀입니다.

들 나귀는 광야에서 끈 떨어진 연처럼 자기 맘대로 뛰 놀지만, 집 나귀는 멍에 줄에 매여서 주인의 손에 이끌려서 살아가요.



이삭의 목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메여져 있고, 이스마엘에게는 말씀이 메여져 있지 않습니다.

이스마엘은 언약 밖에서 들 나귀처럼 자기 마음대로 살지만, 이삭은 나귀와 같이 언약에 붙잡혀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저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아픔 구조 속으로 주시지 않고 힘을 주시었다면 제가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 내 힘을 믿고 살았을 것입니다.

내 주변을 보면 다 잘 되는데 나만 안 되고 있어요.

제 주변에는 전부 이스마엘처럼 힘 있는 자들만 있어요.

제 생각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저만 그런게 아니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면전에 이스마엘을 둔 것같이 우리 주변에도 그렇게 해 놓으셨어요.

약함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약함이 곧 강함이 되는 것입니다.



약함 속에서 내가 지금 누구의 은혜로 살고 있느냐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깊어질수록 “내가 진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구나!” 하는 고백들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큰 것을 받아서 큰 일을 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큰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세한 것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어요.

그럴 때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이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끌려 다니는 백성 맞은편에 말씀 없이도 잘 살아가는 이스마엘을 두심으로서 이삭을 계속 시련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물질에 가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가치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아들 만들기”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언약 하나 믿고 사는 것입니다.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더라도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금 신상에 절하는 것을 거부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목에 하나님의 언약이 짊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약이, 믿음이 그들을 붙잡고 있었기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면서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믿음이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면 불 구덩이 속으로 못 들어갑니다.

그렇다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본받자고 그러지 마십시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들어간 것이 아니고 믿음(언약)이 그들을 불속으로 끌어당긴 것입니다.



우리인생사를 뒤돌아보십시오.

마치 억지로 개를 끌고 온 자국 같은 것이 남지 않았나요?

개를 끌고 오는데 바닥에 어떤 자국들이 나타나나요?

질질 끌려올 때에 발자국들이 있지요.



우리의 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누구도 이 자리에 순순하게 끌려 온 자는 없습니다.

모두가 억지로 질질 끌려왔습니다.

그 끌려오는 자국들이 고난이고 아픔들이에요.



그 고난들이 결국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뒤돌아보니까 “아~! 내가 여기 있는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구나!”를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후손들 앞에 골리앗과 같은 자들을 대적으로 붙여 놓았어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만들어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어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약할 때에 강함이라고...

사도 바울은 죽은 자도 살린 사도입니다.

수많은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는 질병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은 말도 잘 못합니다.

이런 부족한 사람이 사도 역할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문헌에 보면 사도바울의 병이 간질병이라고 합니다.

간질병은 멀쩡하게 있다가 뒤집어 지는 고질병입니다.



그 당시에 아볼로라는 목사가 있었어요.

그는 교법사로서 수사학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달변가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아볼로파가 생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바울은 말도 잘 못하고 생긴 것도 제대로 생기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도로서 외모적인 것이 그리 없었던 모양입니다.

거기다가 간질병까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인간적으로 얼마나 쪽 팔렸겠습니까?

바울이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 했습니다.

3번 기도 했다고 기록합니다.



물어 봅시다.

3번은 3일 연속으로 기도했다?

아니면 틈나면 기도했다?

저는 3일 연달아 기도했다고 그렇게 보지 않아요.

3번을 기도 했다는 것은 계속하여서 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바울에게 책망을 하십니다.

“야 이놈아 네가 약해야 내 능력에 네게 머물게 되는 것이지”

“네가 강해봐라 내 힘을 의지하겠느냐?“

그러면서 거절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약할 때에 곧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강함이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약하니까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구나!”

“진짜 강하신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밖에 없구나!”



바울은 약함 속에서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병을 고쳐주는 식으로 일하지 않았어요.

도리어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식으로 일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 살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한 것이 어디 한 두 가지입니까?

우리는 문제만 있으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이 문제가 있고, 저 문제가 있고,

우리는 그렇게 해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환경 속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들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제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은 후에는 기도를 할 때마다 응답이 왔습니다.

그 때는 우리 집사람하고 말을 못해요.

기도만 하면은 즉각 즉각 응답이 왔다니까요.

야! 진짜 신이 났어요.



그런데 어느 시점에 되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은 고사하고 사건이 터지는 겁니다.

처음에는 기도하면 바라는 대로 응답이 떨어졌는데 나중에는 그 반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어느 시점이 지나니까 내가 기도한 반대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집사람이 “당신 기도 하지 마!”

“당신이 기도만 하면 문제가 생겨!”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뭘 도와 달라는 기도를 못하겠더라고요.



이 이야기는 그 동안에 내가 기도한 것은 하나님을 우상처럼 여겼다는 말입니다.

“내가 기도만 하면 들어 준다”

이것은 곧 하나님은 내가 섬김의 대상이 아니고 내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하나의 도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경륜이 쌓이고 난 후에는 내가 내 욕구를 충족시키는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기도응답을 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했다 하면 어그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아지는 것은 “아 내가 하나님을 귀신 섬기듯이 섬겼구나!”

“내 소원 들어주는 하나님으로 섬겼구나!”

“그것이 아니었구나!”

“나는 나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구나!”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구하고 두드려야 하는데 나는 내 욕심을 위하여 기도를 하니까 자꾸 엉뚱한 일을 터지게 하여서 그런 기도를 못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나중에 그게 은혜인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럽니다.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하나님을 감사하다고”

교회 개척 한 후 처음에 한 사십 명이 모여가지고 교회가 좁아서 교회건축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안하던 금식기도를 기도원 가서 하고 왔는데,

왔더니 자기들끼리 싸우고 다 빠져 나갔습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했는지 아세요?



왜 내가 교회를 부흥 시키려고 했는데 하나님 왜 깽판치려고 합니까?

그런데 그 교회를 거두어가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주었습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채워져 가니까 그때 그 기도를 안 들어 주신 것이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그 때에 교회를 지어주었다면 저는 백 프로 정치 목사 했을 겁니다.

생긴 것도 정치인으로 안 생겼어요?

정치 목사 한다니까요?

노회장 총회장 이런 것 한다니까?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나니까 세상에 그때 막아주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 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때의 그 사건을 야곱의 얍복강 사건이 라고 생각해요.

야곱이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계속 자기 꾀로 살았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죽이고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이스라엘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 지팡이가 바로 하나님인 겁니다.



야곱에게 지팡이는 단순한 지팡이가 아니에요.

하나님을 상징해요.

그래서 나중에 그 지팡이를 의지해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고 축복 할 때 장자와 차자를 어긋 맡기고 축복을 한 것입니다.



장자는 힘 있음을 상징하고 차자는 힘 없음을 상징해요.

그러니까 야곱은 얍복강에서 힘을 믿고 사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차자가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자가 장자가 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 그때 하나님을 참 많이 원망 했어요.

성도들이 으쌰으쌰 해서 교회가 지어졌을 것 같았으면 교회가 부흥은 되었겠지요.

그럼 지금 전하는 복음과는 상관없는 목회를 하고 있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딜 가면 내 기도를 안 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맘 한 켠에는 “그래도 내 기도를 좀 들어주어야 안 됩니까?” 라고 합니다.

지금도 그래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우리방식으로 하되 그 기도를 통하여 얼마나 우리가 왜곡된 비언약적 사고로 기도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를 시험 삼아서 해 보세요,

기도를 녹음기에 녹음해서 들어 보세요.

기도가 거의 다 소원성취 해달라고 하는 기도밖에 없어요.

아마도 “세상에 무슨 이런 기도를 다하느냐?” 고 얼굴이 화끈거릴 겁니다.



죄는 교묘하게 자기 합리화해서 나타나요.

그런 것들이 기도를 함으로써 고발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준다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소원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덮쳐 옴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최고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소원은 없고 이 땅에서 좀 나은 생활하게 해달라는 소원 밖에 없어요.



우리는 복음 안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기도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고발당할 때마다 세상에 이렇게 순 엉터리 같이 하는데도 내가 지금껏 살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하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 백성이 내 은혜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이 살면서 가장 큰 바램은 그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신앙 좋음이란? “하나님이 있는 것 다 가져 가실지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주신자요 여호와시요 취하신이도 여호와라” 이런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그 자리로 하나님이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자기 백성들을 이스마엘 같은 강한 자들 앞에 붙여놓았어요.

그들이 우리를 시험하고 괴롭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괴롭힐 때 원한을 쏟아 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을 정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상황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가 우리 집사람하고 40년을 살았는데,

저 사람의 마음을 못 바꿔요.

못 이겨요.

그래서 제가 이해하고 맞춰가고 있어요.

목사라는 죄 때문에,,,



싸우면 마음이 상해요.

그럼 영감이 사려져요.

목사가 영감이 사라지면 끝이에요.

그래서 싸워도 항상 내가 지는 겁니다.

저 사람은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해요.

무슨 일이 있으면 당신은 목사잖아 그래요.

저 웬수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그 사람을 변화시켜 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 사람을 이해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해요.

싸워 이겨 본들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그래서 에라, 져 줘라! 그래요.

지는 게 편치,,



신앙은 생명과 같습니다.

생명은 외적 자람이 있고 내적 자람이 있습니다.

외적 자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내적 자람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벧후 1:1-10=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그이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고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의 성품이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께서 오심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건 우리의 의지적 문제가 아니고 성령께서 행하는 자연적인 것입니다.

이걸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근데 바울은 성령의 열매는 금지 할 수 없는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금지 할 수 없다는 것은 마치 나무가 과실을 맺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란 뜻입니다.

생명의 유출입니다.



알다시피 성령의 열매는 모두가 이타적인 것입니다.

이건 곧 예수님의 사역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사랑은 자신을 우리의 대속 물로 내어주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거 자기 비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로 부르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닮고 본받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받은 자들은 이타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은 다툼을 싫어해요.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변론하고 정죄하고 다투는 자리를 피하게 됩니다.

싸우기 싫어해요.

손해 보고 말고 져 주고 말게 되어요.



우리는 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본능적으로 옳고 그름으로 접근합니다.

서로 법으로 대하니까 자꾸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싸우고 나면 마음이 상하잖아요.



이런 걸 반복 하다가 보면 학습효과나 나타나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양보하고 이해하고 말게 되어요.

이겨 본들 뭣하겠느냐? 라고 포기하게 되어요.

포용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옳고 그름으로 접근하지 마세요.

그럴 때에는 반드시 다툼이 생깁니다.

내가 이기면 저 사람은 틀린 자가 되잖아요?

그러면 서로 불편해 집니다.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은 대부분 다름의 문제입니다.

이해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음이 그런 마음입니다.

그래서 제가 진리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타협이나 양보가 필요 없지만 비본질적인 문제에서는 타협하고 양보 하세요.



어떤 것이 옳은 것이냐 정답은 없습니다.

이해하면 다 달라집니다.

이 사람은 이 방식으로 살고 저 사람을 저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을 내 쪽으로 끌어당겨서 정답으로 만들려고 하니까 섭섭하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 탐욕입니다.

그건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작동이 되면 이해하고 용서하고 다름으로 인정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요.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라고 하지요.

지체는 다 달라요.

다르지만 몸을 위하여 움직여요.

그러므로 지체는 모두가 귀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어요.

그 다양함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교회에서의 일은 어떤 능률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고 용서하는 식으로 세워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일을 가지고 옳고 그름으로 판단해서 내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은 잘라내는 식으로 일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진리 문제가 아닌 다음에는 저 사람이 내 뜻과 다르다 할지라도 포용하여야 합니다.



교회의 최고의 모습은 사랑입니다.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도 그리스도 피로써 부름을 받았고 나도 그리스도의 피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동일하게 피 뿌림을 받은 자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신앙은 복음을 알고 성경적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복음의 내용을 삶에서 얼마나 풀어내느냐가 신앙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삶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 신앙은 허구에요.

스스로 속고 있는 겁니다.



말씀 아무리 알면 뭐합니까?

삶속에서 행동으로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말씀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서 우리 안에서 달음질 할 것 같으면 그 말씀이 우리 고집을 꺾고, 내 욕심을 꺾고, 나를 죽이고, 자존심을 꺾게 만듭니다.



“모든 것이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만듭니다.

이삭은 자기 면전에 있는 이스마엘을 타도하자 이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삭이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이스마엘과 같은 강한 것들이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지 마시고 그 문제 속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문제를 해결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 마음을 변화시켜 주어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에 그 사람이 타도할 적으로 보이지 않고 긍휼히 여길 대상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이러한 모습으로 간섭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이 내 힘이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깨달음이 있어야 마음에 쉼을 얻게 되고 삶에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문 속에 비 언약으로 난 이스마엘과 언약으로 난 이삭을 서로 마주보게 만들어 놓고 이삭을 훈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이삭의 스파링 파트너에요.

이삭이 이스마엘을 위하여 이삭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삭을 위하여 이스마엘이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이스마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여야 하는 것이 이삭의 신앙입니다.

우리도 그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 이스마엘과 같은 강한 자들을 붙여놓은 것입니다.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아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감당치 못한 일들을 우리 앞에 두신 것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꾸 제거시켜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제거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서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고 내가 은혜로 살고 있음을 우리에게 교육하기 위하여서 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나의 나 된 것이 다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사도바울의 고백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서 내속에서 터져 나오는 고백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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