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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42강. 언약에 동참하는 자들의 운명 (창 24:1-27)

by coroa 2021. 5. 6.

 

[42강. 언약에 동참하는 자들의 운명 (창 24:1-27)]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은 이삭의 아내를 맞이하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이삭이 장가가는 그런 이야기가 아닌 겁니다.



모든 성경은 다 예수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에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잘 살펴보면 성도들의 운명이 잘 드러나 있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사라의 죽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라의 죽음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시대도 끝이 나가는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네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리라 약속을 받았지만 그 씨를 낳아줄 사람은 사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라의 죽음은 곧 아브라함의 죽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라의 죽음과 함께 언약의 1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시대도 역사 속에서 저물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 아들 이삭에게로 언약이 이어져가게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자 이삭을 장가보내는 일을 합니다.

아브라함의 맥은 이삭에게로 전수가 되고 사라의 맥은 이삭의 아내 리브가에게로 전수가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대로인데 사람만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은 시대를 초월하여서 그대로 유효하게 이러져 간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모든 세대에 걸쳐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도구로 사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지칭할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하나님은 변함이 없이 인간들을 가지고서 언약을 이루어가신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이 이삭에게 전이가 되고, 이삭에게 한 언약이 야곱에게 전이가 야곱에게 한 언약이 이스라엘에게로 전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언약의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셔서 완성을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완성하신 것을 신약의 교회에 적용을 시키십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를 일컬어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암튼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아브라함 가정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언약적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장면에서도 언약적인 관점으로 보면 엄청난 비밀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언약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성부 입장에 있고 이삭은 성자 입장에 있어요.

그리고 아브라함의 명을 받고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떠나는 아브라함의 몸종인 엘리에셀은 성령의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을 늙은 종이라고 하지요.

여기서 늙은 종이라는 말은 “자케” 라고 하는데 이는 존귀한 자라는 뜻입니다.

흔히 이스라엘의 장로를 “자케” 라고 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귀한 분이라는 뜻이에요.



아브라함이 아들의 신부 감을 구하기 위하여 이 땅에 존귀한 분을 보냈습니다.

그분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성령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성부 하나님이고 이삭은 성자 하나님이시고 엘리에셀은 성령 하나님으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을 아브라함 잡에서 길리운 늙은 종이라는 말은 아브라함과 운명을 함께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신부감을 찾으러 보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엘레에셀을 보내며 당부를 합니다.

너는 이 가나안 땅에서 이삭의 아내를 데려오지 말고 본토 친척 집으로 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찾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만물이 주로 말미암아 창조가 되었지요.

주께로부터 나와서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본토와 고향은 그리스도 예수 안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아담과 하와로 보여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아담 속에서 하와가 빼내시지요.

그리고는 하와를 아담에게로 끌고 오시지요.

그러자 아담은 대번에 아 저 여자는 내 몸에서 나온 내 뼈이고 내 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최초의 결혼의 모습이에요.

결국 결혼이란? 원래 한 몸이었던 자가 잠시 떨어져 있다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다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녀 간의 결혼을 가지고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의 구원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어린 양의 혼인잔치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 성도의 구원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신부될 자를 찾는데 아담과 하와처럼 잠시 떨어지게 하셨다가 다시 만나는 것으로 하십니다.

우리는 모두가 이 세상에 잠시 버려져 있었어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끌어다 주신 것입니다.



이걸 버려짐과 되찾음이라고 합니다.

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에요.



아브라함 언약도 창세전 언약에서 나왔어요.

그래서 아브라함 언약이 그 후손들이 이방에 버려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에게 준 언약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언약의 내용이었어요.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4대 만에 돌아온다고 하지요.

이것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아브라함 가정을 다루어가는 모습 속에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자기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어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 가정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의 계시사적인 일들인 겁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아브라함과 같은 과정으로 간섭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람을 찾아가서 빼내지요.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빼내지요.


이것은 죽음을 상징해요.



우리는 아담 안에서 태어났어요.

구원이 뭐냐?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걸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마귀 아래 있었어요.

마귀가 우리 애비에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너희 아비 마귀 짓을 한다고 하지요.



맞아요.

우리 애비가 마귀에요.

우린 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 와서 빼내 주신 겁니다.



이처럼 구원은 반드시 옛 것과 단절이 필요해요.

그러므로 성도는 아브라함과 같은 과정에 동참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의 아내를 가나안 땅에서 찾지 않고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빼내오는 형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에 있는 리브가를 엘리에셀이 데리고 오잖아요.

리브가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온 것처럼 아비 집으로부터의 빼내짐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종이 가서 이삭의 신부될 사람을 지목하여 데려와요.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 가서 아브라함을 빼내오는 것과 같고 우리식으로 말하면 율법 아래, 곧 마귀 아래 있던 우리를 성령을 보내시어서 우리를 교회로 빼내는 것과 같아요.

그 언약에 동참하는 자는 반듯이 옛것으로부터 떠나오는 것을 필연적으로 거치게 되어있어요.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으로 가서 이삭의 아내를 찾아오라고 하지요.

그러자 엘리에셀이 그 여자 안 오면 어찌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순적히 만나게 해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네가 가면 하나님이 준비한 여자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앞서서 사자를 보내서 만나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자신의 환도뼈에 손을 넣고 맹세를 하게 합니다.

여기서 환도뼈에 손을 넣고 맹세를 하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이 엘리에셀로 하여금 이삭의 아내가 될 여자를 만나게 해 주겠다는 뜻입니다.



이건 하나님 입장에서 하는 맹세에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내가 너를 내 며느리 감 앞으로 인도해 주겠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종에게 한 맹세를 “세바” 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곱 번 약속을 한다” 라는 뜻을 담고 있어요.



일곱이란 창조의 수에요.

창조는 구원과 같아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구원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 속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는 모습을 담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내를 구해 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직접 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이 홀로 하세요.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이삭을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그 아내는 성도가 되겠지요.

그럼 이삭의 결혼 이야기는 성도의 구원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럼 성도의 구원도 하나님이 홀로 다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을 보내면서 여호와께서 그의 사자를 앞서 보내서 일을 하실 것이라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에 엘리에셀은 하란에 도착헤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엘리에셀이 세부적으로 기도하지요.

엘리에셀은 “하나님 내가 만약에 어떤 여지에게 접근해서 물을 달라 하면 그 여자가 나에게 물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데리고 온 약대들에게도 물을 주면 내가 그 여자가 하나님이 예비한 여자인줄 알겠습니다.” 라고 기도하였어요.



엘리에셀이 그 기도를 마치자 리브가가 오는 겁니다.

엘리에셀이 기도한 대로 하는 거에요.

그래서 엘리에셀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까 리브가가 자기 아버지에게 가서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리브가의 아버지가 엘리에셀을 영접합니다.

이에 엘리에셀이 빙폐물을 주고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리브가를 준비해 놓았어요.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알았어요.

그동안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의 아내를 맞이하는 것을 창조의 방식인 여호와의 맹세로 한 것입니다.



우리더러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일을 하실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여서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미 다 준비해놓고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의 기도와 리브가의 만남을 보세요.

아브라함은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어요.

하나님이 준비하셨다는 것을 믿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에게 자신을 지금까지 인도해 오신 하나님을 말해주었던 것입니다.



7절 보세요.



7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다루어 왔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나안으로 들어 온 것은 하나님의 맹세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여왔듯이 하나님이 이삭의 아내도 여기까지 인도해 오실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리브가도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빼내심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리브가도 아브라함의 운명에 연합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리브가의 모습 속에 우리의 모습도 담겨져 있어요.



우리도 본토 친척 아비 집으로부터 빼내심을 입게 되어요.

엘리에셀이 생전 처음 보는 여자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이나, 그 말을 듣고 따라오는 여자나 똑 같아요.

이 둘을 하나님이 만나게 하셨기 때문에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만남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할 자와 말씀을 들을 자를 서로 만나게 하셨어요.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보세요.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를 보세요.

준비하셨다는 것을 알아야만 해요.



우리가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어요.

주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둘씩 파송할 때 그러지요.

가면 너희들을 영접하는 자들이 있을 거라고 하잖아요.

그럼 너희들은 그 집에 들어가서 하늘에 평강을 주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은 반드시 복음을 듣도록 하세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나 그를 영접하는 자나 모두가 하나님이 준비를 하셨다가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그냥 천국 복음만 전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럼 내가 만날 자들을 만나게 해 주신다는 겁니다.



바울이 강가에서 루디아를 만나는 것도 다 주께서 하신 일이에요.

지금 저와 여러분이 만난 것도 동일해요.

그래서 제가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고 창세전에 만나기로 작정된 만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감이 좀 잡히세요.



제자들이 믿음이 없었다면 가면서도 불안했을 겁니다.

엘리에셀도 믿음이 없었다면 떠날 때에 불안했을 겁니다.

그러나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말을 그대로 믿고 기도한 겁니다.

그러자 기도한 그대로 리브가가 행동을 하는 겁니다.



엘리에셀의 기도를 다시 한 번 보세요.

얼마나 구체적인가!



“하나님 내가 물을 달라고 했을 때에 나에게만 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간 약대들을 위하여서도 물을 마시게 하면 그 여자가 바로 하나님께서 이삭을 위하여 준비한 아내가 될 사람인 줄을 알겠습니다” 라고 기도를 했어요.



엘레에셀은 물가로 나온 어떤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다.

그녀가 바로 리브가예요.

리브가는 엘리에셀에게 물을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약대들에게도 물을 먹여야한다면서 손수 물을 길어다가 약대에게 마시우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엄청난 것인 줄 아세요.

엘리에셀은 물 한 바가지만 마시면 되어요.

그러나 짐승은 달라요.

약대에게 물을 마시게 하려면 엄청난 수고를 하여야 해요.



리브가는 스스로 약대들에게도 물을 먹이는 겁니다.

엘리에셀이 시키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리브가는 자발적으로 짐승의 목마름을 알고 물을 떠서 먹이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성도들의 모습인 겁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 중에서 양들의 모습인 겁니다.

양들의 눈에는 불쌍한 자들이 보이면 본능적으로 도왔어요.

아픈 자들을 보면 돌보았어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 속에 긍휼의 마음이 그러한 일들을 하게 한 것입니다.



양들은 댓가를 바라지 않았어요.

그냥 불쌍한 사람이 있으니 도운 겁니다.

이것은 약대들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리브가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약대들을 성도들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양들은 누가 아프고 고통당하면 그들을 위하여 은혜와 사랑이 발동이 되어서 그들을 돕고 섬기고 사랑해요.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들의 특징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가만있지를 않아요.

은혜가 일을 하게 하세요.

그래서 믿음을 사역동사로 쓰는 것입니다.



사역 동사란? 믿음이 어떤 일을 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걸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을 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 행함이 없는 것을 죽은 믿음이라고 하고 이를 귀신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능력이에요.

어떤 생명인가요?

예수님의 생명이에요.



그러므로 이 시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아무 것도 안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자들은 귀신의 믿음을 가진 자들인 겁니다.

이들은 입으로만 복음 복음 그러지 실제 삶에서는 전혀 복음적인 것이 나타나지 않아요.

이러한 것을 중풍병자라고 하고 앉은뱅이 신앙이라고 합니다.



중풍병자와 앉은뱅이는 머리로는 다 알아요.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요.

그러니 아무 것도 안하는 겁니다.

안다는 것으로 교회나 사람에게 거치는 자가 되는 겁니다.



이런 자들을 유다서에서는 열매 없는 가을나무라고 하고,

물 없는 샘이라고 하고,

비 없는 구름이라고 해요.



열매 없는 가을 나무와 물 없는 샘과 비 없는 구름은 모두가 사기라는 겁니다.

나무가 가을에는 열매를 맺어야 하고,

샘은 당연히 물을 솟아내야 하고,

구름은 당연히 비를 뿌려야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것들을 생산해 내지 못한다는 것은 모양만 그럴 듯하게 사기를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귀신의 믿음이에요.

예수를 만난 중풍병자나 앉은뱅이는 반드시 일어나서 걷고 뛰게 되어 있어요.



주둥이로 예수 예수 복음 복음하면서 아무 것도 못하고 앉아 있다는 것은 예수를 머리로만 알고 있지 실제로 만나지 못하였다는 증거에요.

그러니 아무 것도 못하는 겁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를 망신시키는 자들이에요.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교회에서 섬기지 못하며 봉사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건 스스로 속고 있는 겁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이런 자들을 일컬어 교회 마당만 밟고 다니는 자라고 합니다.



성도의 행함은 강요할 것은 아니에요.

믿음이 살아 있으면 그 믿음이 행함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고지해 주어야 해요.

그래야 복음 복음하면서 아무 것도 안하는 자들이 귀신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성도들의 삶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권면이지 그건 억지로 만들어내라는 것이 아니에요.

물어 봅시다.

여러분 속에 예수님이 와 계시는가요?

이걸 믿으세요.



그럼 예수님이 여러분들에게 너 복음 아니까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던가요?

빈둥거리면서 놀라고 하던가요?

아니지요.

그럼 알아서들 하세요.

왜 예수님이 우리 몸을 피로 값 주고 사셨는지를 좀 생각해 보세요.



리브가가 누구인가요?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이지요.

이삭은 예수님을 표상하잖아요.

그럼 리브가는 성도를 예표 하겠지요.



리브기가 이삭의 아내이니까 이삭의 약대들에게 물을 길어서 먹이는 겁니다.

여러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물이 얼마나 귀한 줄 아세요.

물을 긷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그럼에도 리브가는 엘리에셀의 짐승 떼들에게 모두 물을 길어서 먹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에셀이 옳거니 이 여자가 바로 하나님이 준비한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이구나 하고 그에게 이삭이 준 빙폐물들을 주고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원래 하나님이 창세로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종이 가니까 은혜를 토해 내는 겁니다.

약대에게 물을 먹이는 거예요.

그 때 엘리에셀은 아!~ 이 여자가 바로 이삭의 아내이구나 척 하고 알아본 것입니다.

그래서 빙폐물을 리브가에게 준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을 구원하는데 창세전 언약으로 하세요.

창세전 언약이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아브라함 언약의 수순을 밟게 되어 있어요.

그 수순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오는 것처럼 기존의 곳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언약적으로 하면 옛 언약에서 새 언약 안으로 옮겨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러다가 은혜 아래로 옮겨진 겁니다.

모든 신앙은 율법 신앙부터 출발을 해요.

그러다가 은혜 신앙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세상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원래 불신자였고 마귀 아래 있던 자들이었어요.

그러다가 세상에서 교회로 빼 내심을 입은 겁니다.

마귀라는 아비를 섬기다가 예수를 구주로 섬기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 처음 와서 바로 은혜 생활 하지 않아요.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했어요.



이건 마치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이방인들과 똑같은 신관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과 같아요.

우리도 교회에 처음 오면 세상에서 알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요.

복 주는 하나님으로 섬깁니다.

우상숭배적 신앙으로 하나님을 믿어요.

그러다가 참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처음 오는 분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면 그들은 그가 알고 있는 신관으로 기도를 하게 되어 있어요.

대상이 부처에서 예수로 바뀐 것 밖에 없어요.

그래서 복 달라는 기도 밖에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어요.

율법신앙은 기브 엔 테이크 (give and take) 에요.

하나님과 거래하는 겁니다.



이 거래의 조건이 우리 행함입니다.

전도라도 하고 봉사라도 하면 당당하게 복 달라고 하잖아요.

왜냐하면 율법 아래서는 우리가 정성을 쏟은 대로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신앙의 근간이 행함에 두고 있어요.

지성이면 감천한다고 믿어요.



한국교회의 문제가 뭔가요?

빌고 빌면 복 준다고 믿잖아요.

그래서 내어 놓는 것이 열심이고 충성입니다.

나 이만큼 했으니 복 주세요 하잖아요.

복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다가 복음 알고 나면 어이쿠~ 내가 그 동안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겼구나를 알게 되고 회개하잖아요.

이게 언약 백성들의 신앙의 수순이에요.

창세전에 녹명된 자들은 모두가 이 과정을 밟게 되어 있어요.

율법에서 빼내심을 입게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도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빼내심을 입고 보니 조상들이 섬기던 신들이 우상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떠나오지 않았다면 우상을 섬긴 것을 모르고 있었을 겁니다.

와서 보니까 우상인걸 알게 된 겁니다.



구원의 선행조건은 출애굽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섬기려고 했어요.

그러자 하나님은 광야로 빼내고서는 “이 산에서 나에게 예배하라” 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하고서도 하나님을 애굽식으로 섬기려고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주어서 신관을 바꿔 주는 일을 하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게 광야 40년 동안 애굽에서 태어난 1 세대들이 죽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건 옛 사람의 죽음을 말해요.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언약의 후손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리브가를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에서 빼내서 아브라함의 집으로

입적을 시키신 것입니다.



리브가를 데리고 와서 사라의 장막에 들어가게 하지요.

왜 하필 사라의 장막으로 데리고 들어갔다고 하였을까요?

이는 사라와 연합시키는 겁니다.

사라의 신앙에 동참을 시키는 것입니다.



사라의 장막에 합방하게 한다는 것은 곧 리브가가 곧 사라처럼 언약의 후손을 낳을 어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리브가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언약을 펼쳐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라는 처음에 자식을 낳지 못했어요.

경수가 끊어지고 여자로서 죽은 자가 되어서야 비로서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삭을 얻었습니다.



사라의 죽은 몸에서 이삭을 생산하듯이 리브가도 자식을 낳지 못했어요.

잉태하지 못한 리브가도 역시 은혜로 자식을 낳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시는 창조주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리브가를 본토 친척집에 두지 않고 빼내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감을 얻고자 늙은 종을 본토 친척 아비 집이 있는 곳으로 보내서 데리고 오게 한 것은 전부가 예수님이 성도들을 구원하는 구속사 이야기인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그 신부들의 구원 이야기를 이스라엘의 결혼 제도 속에 팁으로 담아 놓았어요.



그러므로 구약의 결혼 제도를 알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기가 쉬워질 겁니다,



아브라함은 성부 입장이고,

이삭은 성자 입장이고,

엘리에셀은 성령 입장이라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신부 될 자들을 예정하여 놓았어요.

우리는 모르지만 성령이 오시어서 신부될 자들만 찾아가세요.

성령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오시지요.

이것은 곧 성령께서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을 찾아내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신랑의 것들을 가지고 오세요.

마치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에게 이삭의 아내에게 줄 각양의 빙폐물들을 가지고 가서 주게 하였듯 성령이 예수의 것들을 가지고 와서 성도들에게 주세요.

이걸 성령의 은사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결혼 제도를 보면 아들의 신부감은 아버지가 결정을 하세요.

아들은 자기 신부가 누군지를 몰라요.

아버지가 정해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요.

아들의 혼기가 차면 아버지는 자기 집에서 가장 똑똑한 종을 며느리 감에게 보냅니다.

이 때 그냥 보내는게 아니고 혼수 감을 줘서 보내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신랑이 신부에게 결혼 지참금을 주어서 사와요.

그러니까 종은 결혼 지참금과 아들이 아내에게 주는 결혼 빙폐물을 가지고 가서 결혼 지참금은 신부의 부모에게 주고 빙페물은 신부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약혼과 동시에 사실혼으로 인정해요.

값으로 계약을 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계약이 성사가 되면 신부는 신랑이 준 것으로 단장을 하고서 나는 임자가 있는 사람입니다 라는 것을 동네 총각들에게 공포를 해야 해요.

그리고 신부는 종이 알려준 신랑의 정보를 가지고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 기간이 보통 1년에서 3년 정도가 되어요.



신부는 그 기간 동안 정절을 지키며 신랑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들의 신앙생활과 같아요.

이스라엘은 밤에 결혼식을 해요.

이 때 신부의 친구들이 들러리는 서게 되는데 각자가 등불을 켜서 들고 있어요.

그럼 신랑은 그 중에서 자기 신부를 찾는데 어떻게 찾는가 하면 자기가 준 빙페물로 단장한 여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성도들의 구원과 같아요.

하나님이 예수님의 신부들에게 성령을 보내셨어요.

성령은 예수님의 것들을 가지고 오셨어요.

그게 성령의 은사들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이에요.

성령은 예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 자기백성들에게 알려주어요.

그러면 성도들은 그 은사로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리브가에요.



오늘본문 16절을 보면 리브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16절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리브가를 심히 아리땁고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고 하지요.

“아리땁다” 라는 말은 사라에게도 사용되었고, 라헬에게도 사용되었어요.

이는 미적(美的)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의미로서 믿음적인 아름다움을 말해요.

또한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순결하다” 는 것입니다.



이는 곧 마음이 오직 남편 한 사람에게만 고정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믿음에 정절을 잘 지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세상 가치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에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세속화 되지 않고 순결하게 산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신앙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면서 반복음적으로 사는 자들이 너무도 많잖아요.

마치 복음 아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냥 하면서 자기 게으름을 합리화 하는 자들이 너무도 많아요.



창세전 언약이 율법과 은혜로 되어 있지요.

이것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요.

서로 지탱해 주어요.



교리와 실천은 양쪽 바퀴와 같아요.

온전한 신앙은 교리를 삶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복음은 반듯이 복음이 담고 있는 내용을 삶으로 풀어내게 되어 있어요.

리브가의 아리따운 마음이 약대에게 물을 먹이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 속에 은혜의 마음 긍휼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게 생전 처음 보는 나그네를 대접하고 영접하고 섬기는 모습으로 토해져 나온 것입니다.



마치 마태복음 25장의 양들처럼 말이에요.

양들은 가난한 자들을 보고 가만있지를 못했어요.

그 속에 은혜의 마음이 나그네들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자기 안에 긍휼이 이웃에게 자기 것을 내어놓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걸 성령의 열매라고 하고 이러한 것은 금지할 법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세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인이에요.

강도 만난 자에게 제사장도 레위인 지나가요.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었어요.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한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율법적으로 보면 죽은 자들을 만지지 못하게 되어있어요.

그들은 율법을 충실하게 지킨 자들이어요.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죽어가는 자를 상처를 치료하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 돈을 주면서 강도 만난 자를 살려냅니다.

법보다 생명이 우선이었어요.

이게 사랑이에요.



율법을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이에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계명이 뭐냐고 물었을 때에 먼저는 하나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껍데기로는 레위인과 제사장이 율법을 지켰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자는 사마리아 사람인 것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은 머리로는 사랑을 알아요.

그런데 사랑이 머리에만 있었어요.

그러니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사람을 보고서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킨 자가 사마리아 사람이에요.



사마리아인은 곧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같은 자이고 리브가 같은 자에요.

우물가에 많은 여자들이 있었어요.

그러나 오직 리브가만 자기의 수고를 다하여 물을 길어 약대들에게 마시우게 하였어요.

이것은 리브가 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은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여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성령의 은사를 주어서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도록 하세요.



우리는 교리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에요.

실제 구원받은 자들은 교리를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실제 삶 속에서 소금처럼 녹아서 맛을 내는 것처럼 나타나게 되어있어요,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지요.

교리를 백날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을 못하는 상태 그것이 곧 맛을 내지 못한 소금인 겁니다.

소금은 원래 짠 맛을 내요.

맛을 잃어버릴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소금이 맛을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소금이 언제 맛을 잃어버립니까?

이는 음식 속에 들어가서 자신이 녹아져야 하는 겁니다.

그게 소금이에요.



김치 속에서 소금이 녹아서 맛을 골고루 배게 하여야 해요.

근데 김치 속에서 녹지 않고 있으면 그건 김장을 망치는 거에요.

이런 소금은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어요.

이걸 맛 잃은 소금이라고 합니다.



왜 성도의 신앙을 맛 잃은 소금으로 이야기 할까요?

이런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이 바로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자들이에요.

이 시대로 말하면 복음 안다고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자들이에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셨어요.

우린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라고 예수님이 우리 속에 와 계신 겁니다.



왜 우리 속에 와 계신가요?

왜 우리 몸을 피값을 주고 사고 구원을 했는가요?

이는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예수가 있는 성도는 자연적으로 에수님의 마음으로서의 삶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리브가처럼 말이에요.

부부는 일심동체에요.

예수를 신랑으로 모시고 사는 신부는 에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라고 성령의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성도는 은혜로 감사로 섬기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오시면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를 드러내는 일을 해요.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증인이란 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운명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면 우리 몸은 예수님의 소모품으로 사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손해보고 양보하고 참아 주는 겁니다.

부부간에 살아가면서도 때로는 다툴 때가 있어요.



예수 믿으면서도 신경질이 날 때가 있어요.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면 “아이구 내가 참고말지.. 다투어서 무슨 유익이 있겠나!” 라고 하면서 참잖아요.

은혜를 많이 받으면 하나님은 많은 것을 요구해요.

한마디로 죽으라고 해요.



싸워서 이겨 본들 그게 무슨 대수냐! 하고 참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받아야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 서로 힘들면 은혜 받는 자리로 끌어다 놓으세요.

그러면 해결되어요.



남편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아내가 혜택을 누리고,

아내가 은혜를 많이 받으면 남편이 혜택을 많이 누리게 되어 있어요.

이 비밀을 알면 서로가 서로에게 은혜를 많이 받는 형편으로 몰아가게 되어 있어요.

신랑 잘못 만났다고 하지 말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내어보내어서 하나님이 좀 만지도록 해야 여러분이 편해요.



신앙 생활이라는 말은 두 단어가 붙어있는 말입니다.

신앙과 생활이에요.

이걸 분리하지 마세요.

신앙을 가진 자는 생활하게 되어 있어요.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되어있어요,

이건 자연스러운 겁니다.



마치 무용수의 몸짓과 같은 겁니다.

무용수의 손짓과 발짓은 전부가 무용이에요.

그 사람 행동에서 무용을 따로 떼어 낼 수가 없어요.

신자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를 믿으며 산다는 것은 예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해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는 말은 이미 예수의 마음이 우리 안에 심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예수의 마음을 심어 놓았어요.



성령이 예수의 마음으로 오셨어요.

그러므로 성령 받은 성도의 삶은 자연적으로 예수의 증거하는 자로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로 산다고 합니다.

말씀이 씨앗처럼 뿌려지면 그것이 우리 몸을 토양으로 하여서 말씀이 담고 있는 것을 싹틔우게 되어 있어요.



이건 생명의 속성이에요.

예수의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도 동일해요.

씨앗이 싹을 내고 잎을 내서 열매를 맺듯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입으면 자동적으로 리브가 같이 자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십년 이십년 믿고 있으면서도 앉은뱅이와 같이 산다는 것은 문제예요.

교회오기가 힘든 다는 것은 문제예요.

교회는 가고파져야 하고 그리워져야 해요.

밥 먹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면 문제이듯이 성도가 교회 가기가 싫으면 문제인 거지요.



성도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해야 해요.

한번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듣고자 해야 해요.

건강한 사람은 먹고 나면 또 배고파서 음식을 찾는 것처럼 믿음도 건강한 사람은 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들었다고 계속 배불러 있는 것이 아니에요.

밥을 먹었는데 다시 배고프듯이 말씀이 다시 듣고 싶어져야 해요.

그게 건강한 신앙입니다.

늘 은혜 받는 자리로 나아와야 해요.



제일 무서운 게 영적 교만이에요.

자긍하고 자만하고 자족하고 자랑하는 거에요.

그래서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는 겁니다.

건강한 사람이 늘 건강을 더 신경쓰듯이 신앙도 은혜를 아는 사람이 더 은혜 받는 일에 열심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메너리즘(mannerism )에 빠지지 마세요.

요한복음 포도나무 비유를 보세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뿌리와 단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연결되어있다면 반드시 진액이 공급되어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어요.



열매가 없다면 죽은 것이지요.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하면 농부가 잘라내 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사기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성품이 없었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셨어요.

성령의 오심은 리브라가 신랑이 준 빙페물을 가지고 자기를 단장하는 것과 같아요.

리브가는 신랑이 준 것으로 단장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준 것 있잖아!

그걸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지요.

이것은 우리가 남의 죄를 사해 주면 우리 죄를 사해준다는 뜻이 아니에요.

우리가 먼저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사해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해 주셨어요.

그리곤 사해주라고 하는 겁니다.

이러면 사함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을 봅시다.



엡 4:30-31=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먼저 32절을 보세요.

서로 인자하게 하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것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신 것 같이 하라고 하지요.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용서해 주었으니 용서 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갚으라는 것입니다.

이러면 우리가 행하는 용서는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탕감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갚으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사랑이라고 해요.



우리가 이런 삶을 내어 보이면 하나님이 기뻐하세요.

왜 그런가 하면 어 저 녀석이 내가 준 용서를 제대로 받았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걸 잘 받아줘서 고맙다 그러는 겁니다.



우리가 내어놓는 용서는 우리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것이에요.

이걸 영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신앙의 열매를 맺었더라도 자기가 자랑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하여주는 힘이라고 했어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용서 받았기 때문에 용서로 자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이 구조로 되어 있어요.

항상 먼저는 교리를 말하고 나중에는 실천을 이야기해요.

교리가 나무라고 한다면 실천은 열매에요.



로마서 1장부터 11장에서는 교리를 설명하고 있어요.

그리고 로마서 12장부터 16장 까지는 이 교리가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고 있어요,.

로마서는 앞 쪽은 교리이고, 뒷 쪽은 실천편이예요.



1장에서 11장까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교리를 말하고 12장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 하도록 하라” 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성령의 은사를 주신대로 각각 받은 데로 섬기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도 다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달란트 비유에서도 종들이 달란트를 남겼지요.

그 달란트가 누구 겁니까?주인 거에요.

그래서 종들은 달란트를 남겨도 자기 것으로 삼지 않고 주인에게 돌려 드리는 겁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들을 자기의 즐거움에 초대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준 것이 있기 때문에 남길 수 있는 것이에요.

주인은 없는 것에서 달라고 하지 않아요.

종들은 주인이 준 것을 보여주는 것 뿐이에요.

종은 달란트를 남겼어도 자랑할 수가 없어요.

주인이 달란트를 주지 않았으면 장사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리브가처럼 수고하고 힘들어도 그 많은 약대에게 물을 마시우게 한 것처럼.

엘리에셀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난 후에 리브가가 하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았어요.

그런데 리브가가 자기가 기도한 대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에셀은 아 이것은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은혜를 주셔서 하는 일이구나 라고 생각을ㄹ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리브가를 강권하니까 리브가는 자기 약대들처럼 돌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남이 아니고 한 식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엘리에셀이 리브가에게 너는 누구의 딸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리브가가 나는 나홀에게 낳은 브두엘의 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22장 20절을 보면 사라가 죽기 전에 리브가가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창 22:20-24= 이일 후에 혹이 아브라함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밀가가 그대의 동생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21 그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동생은 부스와, 아람의 아비 그므엘과 22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23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처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24 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



23:1 사라가 일백 이십 칠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사라의 죽음 앞에 아브라함의 형제를 이야기 하면서 리브가의 출생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이것은 사라 대신 리브가를 준비하고 계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라의 뒤를 이를 사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구조를 잘 보세요.



21장은 브엘세바의 우물이야기이고,

22장은 아브라함의 족보를 말하고,

23장은 사라의 죽음을 말하고 있지요.



사라의 죽음 앞에 아브라함의 형제들의 족보를 말하는 것이 특이하지요?

족보란? 계보에요.

쭉 연결이 되는 선과 같아요.

같은 계통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동생이 나홀이지요.

그리고 나홀의 아들이 브두엘입니다.

브두엘이 리브가를 낳았어요.

결국 아브라함은 자기 식구를 찾은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자기 핏줄 찾기에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자기 핏줄 찾기에요.

예수 안에서 나온 자들을 찾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찾는 겁니다.



이건 마치 아담 속에서 나온 하와를 하나님이 아담에게 다시 데리고 가서 한 몸으로 만드신 것과 같아요.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종고 그 약대들에게 자기의 수고를 아끼지 않은 것은 그들이 자기의 피붙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간섭하신 증거에요.



그래서 물을 먹이는 것입니다.

이건 그냥 물이 아니에요.

자기 생명을 준 겁니다.



은혜를 받은 자들은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을 알아봐요.

교회 안에서 성도를 섬기는 것이 아깝지 않은 것은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한 성령을 마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배운 교리를 삶으로써 풀어내는 곳이에요.

서로가 서로를 섬기고, 내 것 네 것이 없고, 섬기는 곳이 교회에요.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하니까 유무상통 하게 되지요.

이것은 모두가 한 형제가 되기 때문이에요.



장차 일어날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리브가 사건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자기 신부 찾는 이야기입니다.

리브가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들려지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리브가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들려지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가운데 넘침 바 되게 하옵소서. 주께로부터 받은 그 은혜를 자기 사욕을 위하여 사용하지 말고 주와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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