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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41강. 막벨라 굴 (창 23:1-20)

by coroa 2021. 5. 4.

 

[41강. 막벨라 굴 (창 23:1-20)]

-.정낙원 목사

 

우리가 성경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 쪽에서 보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느냐? 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됩니다.


인간 쪽에서 보면 인간이 해야 하는 것으로 해석을 하고, 하나님 쪽에서 보면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으로 해석이 됩니다.



오늘 본문을 인본주의로 보면 우리가 “막벨라 굴을 사야 합니다” 라고 이해하게 되고,

신본주의로 보면 하나님께서 막벨라 굴을 준비하셨다고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본문은 사라가 죽어서 막벨라 굴에 장사되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 값을 주고 산 막벨라 굴에다가 사라를 장사합니다.

이건 구속사 적으로 큰 의미가 있어요.



지난 시간 우리는 “여호와 이래” 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왜 여호와 이레입니까?

이는 제물을 여호와께서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은 하나님 것만 받으세요.

우리 것을 받지 않아요.

하나님 것에는 하나님의 공로가 담겨져 있지만, 우리 것에는 우리의 공로가 담겨져 있게 되어요.



이걸 의로 이해해 보세요.

그럼 하나님은 인간의 의는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의만 받는다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어야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의가 어디에 있느냐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누가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있느냐?

그 분이 누구냐?

예수에요.



그래서 제가 신앙의 본질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것에 있지 않고 주 예수가 하신 일을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랑을 아주 싫어해요.

하나님은 하나님만 자랑하기를 원해요.

하나님이 하신 일만 이 땅에 남기고 싶어해요.

이걸 하나님 영광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마찬가지에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면 안 되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하자 스톱~! 하고서는 이삭 대신 숫양을 여호와 이레의 제물을 준비하신 겁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것은 우리 자식을 바치라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하나님 것만 받아요.

하나님이 주신 것만 받아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것은 이삭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내 꺼니까 내 봐! 그러는 겁니다.

근데 막상 내 놓으니까 이삭 말고 수풀에 걸린 숫양을 바치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삭을 통해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이삭 대신 숫양을 바치라고 한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삭도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은혜만을 이야기 합니다.

이 세상이 만들어진 것 자체가 하나님 은혜의 산물 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예요.



우린 원래 없는 자였어요.

창세전 언약 때문에 생겨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잘 산다 못 산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따지지 말고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럴 때 감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매사에 우리 입장에서 보는 겁니다.

모든 일을 내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좋았다 나빴다 하는 겁니다.

내게 유익이 되고, 좋은 환경이 주어지고, 우리 일신상에 좋은 일들이 있으면 감사하지만,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면 은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좋은 일이에요.

우리가 자식에게 하는 일처럼 말이에요.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일은 다 자식을 위한 좋은 일이잖아요.



그런데 자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자기 입장에서 보면 사랑이 아니고 미움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자식들은 부모를 미워하는 겁니다.

철들고 나서야 아 우리 부모가 나를 사랑했구나를 알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래요.

감사보단 원망이 더 많잖아요.

바울은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했어요.

은혜로 보면 다 감사라고 했어요.



우리가 순경에 처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역경에 처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시편 23편에 보면 여호와가 나의 목자신데 그가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도 인도하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 하세요.

순경으로도 인도하시고 역경으로도 인도하세요.



양의 입장에서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가고 싶어 하지 않지요.

그러나 목자는 푸른 초장에만 두면 병들기 때문에 거친 산으로도 인도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푸른 초장과 사망의 골짜기로 인도했어요.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는 겁니다.



우리를 간섭하고 다스리는 분이 이런 분이구나 라고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실족하지 않아요.

언약을 보면 축복과 저주가 있어요.

푸른 초장도 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있어요.



이스라엘에게 저주란? 징계에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당한 것도 모세 언약에 의한 것이에요.

모세 언약에 보면 순종하면 복 받고 불순종하면 매 맞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 겁니다.



물론 백성들은 알 턱이 없지만 말이에요.

그러나 예레미야는 알았어요.

아~ 모세 언약에 의하여 70년 동안 이방 나라에서 객이 되었다가 다사 돌아오는구나!

그래서 순순히 벌을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언약했어요.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였어요.

또한 그 언약으로 인하여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을 끄집어내는가요?

왜 모세에게 내 백성들을 애굽에서 끄집어내어 이 산에서 나를 경배하게 하라고 합니까?



그게 아브라함과 한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왜 애굽에서 끄집어내고서 경배를 받겠다고 하실까요?

이는 죽었다가 살아나 봐야 감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지옥에서 건져짐을 당하여야 고마움을 알아요.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교제에요.

일방적으로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서로 주고받는 거예요.



마치 연인들이 전화하는 것처럼 서로 주고받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고 우리는 그 받은 것에 대하여 화답을 하는 겁니다.

은혜를 받으면 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주셨구나”

“저것도 하나님이 주신 거구나”

“하나님이 날 여기까지 간섭해 오셨구나”



좋은 신앙은 범사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고 감사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사랑으로 다스리는데 그것이 때로는 순경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역경으로 나타나요.



사랑의 이면에는 질투와 미움이 있어요.

질투도 사랑이에요.

미움도 사랑이에요.

사랑에는 반듯이 질투가 있어요.

질투가 없으면 사랑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려 가는 것은 모든 것이 사랑이에요.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면 실족해요.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할 때에 왜 이런 일이 내게서 일어나느냐 하지 말고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일을 벌이셨을까 이렇게 생각하세요.



예배 잘드리고 갔는데 강도가 집에 와서 패물을 다가지고 갔다면 나 이제 교회 안 갈래,

하나님은 왜 우리 집에 강도를 들여서 훔쳐가게 할 수가 있어? 그러지 말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자기방식으로 믿는 거예요.

자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하고 서운해 하는 겁니다.

서운해 하는 것은 우리 속에 우상의 하나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의 하나님은 나에게 항상 잘해주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니 예배 잘 드리고 갔는데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 하면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내가 뭘 잘못 했는데 그럽니까? 라고 항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은금 패물에 관심을 두니까 천사를 보내서 치우게 하셨구나

내 스스로 은금 패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귀한 사람을 보내어서 내가 애지중지하던 패물들을 훔쳐가게 했구나 생각하여야 해요.

참 꿈같은 이야기 한다.

그치요.

동화 속 이야기 하고 있지요.

맞아요.



하나님은 동화 속 이야기들을 우리의 삶 속에서 펼쳐나가세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럼 도둑놈이 은금 패물 가지고 간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로 믿으셔야 하겠지요.



그럼 도둑을 맞으면 왜 그랬을까?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 생각해야 정상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우린 나 교회 안 갈래.

집 지킬 거야.

나 예수 안 믿어,

그러잖아요.



우린 여기까지 오면서 수없이 그래 왔어요.

신앙이고 뭐고 다 때려치운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 여기 이렇게 있어요.

이건 우리 실력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간섭해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라도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우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간섭하신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간섭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서 사고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에 사고 자체를 보지 말고 배후에 일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나를 병들게 하였는가?

뭔가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아프고 나면 깨닫게 되잖아요.

평상시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몰라요.



병들고 나서야 알아요.

처음엔 내가 왜 암입니까?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기운이 빠지고 나면 나중에야 비로서 알게 되어요.

그 때서야 비로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어요.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와 가까이 하고 싶어해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예요.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고, 하나님과 멀어 지는 것이 저주에요.



호세아서를 보면 호세아의 아내인 고멜이 틈만 나면 외간 남자를 찾아가지요.

수중에 돈만 있으면 카바레에 제비 만나러 가요.

그래서 하나님이 고멜의 돈 줄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돈이 떨어지고 나니까 신랑에게로 돌아갑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가시로 길을 막고 담을 쳐서 못 가게 했다고 합니다.

아골골짜기로 인도 했다고 합니다.

아골골짜기란 지옥을 말해요.

아픔을 말해요.



고멜이 우리에요.

우리도 등 따시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떠나가요.

그래서 하나님이 건강도 치시고 물질도 빼앗아 가시는 겁니다.

다 빼앗기게 하고서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세요.



물질도 거두어 가고 건강도 빼앗아가는 일들을 만들어서라도 하나님을 찾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탕자비유에서 아버지가 가장 기뻐한 것은 아들이 성공해서 재벌 되는 것이 아니라 빨리 다 탕진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것이었어요,

아버지는 늘 기다려요.

탕자가 돌아 왔을 때 아버지가 가장 기뻐해요.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에요.

탕자가 언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나요?

망해서입니다.

망하지 않았으면 안 돌아와요.



요한계시록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보세요.

맨 마지막 교회가 라오디게아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모습이 어떤가요?

예수님을 전부 밖으로 쫓아냈지요.

예수님이 교인들 마음 속에서 쫓겨났어요.



왜 쫓겨났나요.

교인들 마음에 세상 것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부자이니까 예수가 필요 없는 겁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가 그래요.

세상 것으로 부자가 되었어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세상 것으로 부자가 되면 예수님을 쫓아내요.



그래서 하나님은 고멜의 앞 길을 가시와 담으로 막아서 본 신랑에게 돌아가게 하였듯이 지금도 자기 백성들의 삶을 자꾸만 헝클어뜨려서 예수에게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우리의 뜻대로 살아지지 않을 때에 주님 앞에 나아오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뜻대로 살아지지 않음을 감사해야 해요.



우리의 인생을 세상 관점에서 보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 인생을 보세요.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세요.

그럼 복된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 1장을 봅시다.



렘 1:4-10=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예레미야가 잘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러면서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기겁을 하는 겁니다.

왜 내가 선지자를 해야 합니까? 라고 항의 하는 겁니다.

이건 육적으로 저주의 소리에요.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백성들이 타락하면 나타나서 죄를 지적하다가 죽임당하는 자들이에요.

예레미야의 팔자는 바른 소리하다가 백성들에게 맞아죽는 겁니다.

그러니 예레미야가 재수 없이 걸려들었다고 방성대곡하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내 인생은 내 것인데 왜 하나님이 개입하여서 이렇게 만드냐고 따지는 겁니다.

예레미야의 항변에 하나님은 원래 네 팔자는 없어!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성별했다고 합니다.

이건 내가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창조했다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있기 전에 언약이 먼저인 겁니다.

언약에 의하여 예레미야 인생은 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예레미야와 같아요.

우리도 언약에 의하여 창조가 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잘 살고 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 와서 예수를 믿어지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의 팔자로 살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게 우리에겐 기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께 따지잖아요.

내 인생이 왜 이 모양입니까?



제 버전으로 말하면 저쪽 교회는 잘되는데,

왜 우리 교회만 이 모양 이 꼴입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세요.

너 인생은 없어!

너는 처음부터 선지자로 지음을 받았어!

백성들에게 바른 소리 하다가 죽어! 그러는 겁니다.



예레미야처럼 이 고약한 팔자를 아시겠어요.

근데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나면 배짱이 생겨요.

내 인생은 하나님이 책임져 준다는 것이 믿어지면 담대해져요.

우리는 사명이 끝나기 전까지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어요.

반대로 사명이 끝나면 살고 싶어도 살 수 없어요.

하나님이 데려 가세요.



오늘 본문이 그 이야기를 해주고 있어요.

사라가 127세를 살았는데 험악한 세월을 살았어요.

그 험악한 세월을 그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이지요.

사라는 아브라함이 사 놓은 굴로 들어가서 안식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이삭의 번제 사건 이후에 나타나고 있어요.

이건 계시사적으로 무슨 뜻이 있겠지요?

이삭의 번제 사건은 이삭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삭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에 이삭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순서상으로 보면 이삭이 먼저 죽은 것이 되고 사라가 나중에 죽은 것이 되지요.

이러면 사라가 이삭의 죽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되어요.

죽음을 안식이라고 하지요.

그럼 사라가 이삭의 죽음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삭은 예수님을 예표한다고 하였으니까 그럼 사라는 예수님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알다시피 이삭은 약속으로 낳아진 아들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상징해요.



이러면 사라가 비록 이삭을 낳았지만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사라 이전에 계신 분이니까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이 아니라 이삭이 사라를 낳은 것이 됩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성도 안에 들어오심으로 성도가 거듭나 구원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품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예수님이 우리를 품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의 번제 사건 후에 사라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라가 이삭의 죽음 안에서 안식을 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안식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도의 죽음이란? 이 세상의 수고를 그치고 쉬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제대하는 거에요.

이제 안식하러 가는 겁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죽은 자는 복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사라의 인생을 보세요.

여자에게 있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저주에요.

얼마나 아이를 낳고 싶었으면 자기 몸종을 통해서 아이를 낳고자 하였을까요?

몸종이 막상 아이를 갖자 자기를 무시하잖아요.

그러다가 여호와가 아이를 줍니다.



근데 몸종의 자식이 구박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몸 종의 자식을 쫓아냈어요.

이제 아픔이 없는가 싶었는데,,

웬걸, 이젠 아이를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그때 사라의 심정은 어떻겠어요?

자식을 죽이는 어미의 심정이 어떻겠어요?

지옥이지요.



그런데 그 자식이 살아서 돌아온 겁니다.

이삭이 돌아와서 어미를 안식의 세계로 인도한 겁니다.

살아서 돌아온 이삭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아요.

그러므로 살아서 돌아온 이삭이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 와서 안식의 세계로 초대하는 것과 같이 사라를 안식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라를 수고하는 이 땅에서 쉼이 있는 안식의 세계로 데려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잠을 잔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이란 안식이에요.



이사야 57장을 봅시다.



사 57:1-2=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이 말씀은 앞에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앞선 56장 9절을 보면 양들이 거짓선지자들의 먹거리로 살고 있는 겁니다.

짐승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아가리에서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 끄집어냄이 죽음이라는 방법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죽음이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쉬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알려주는 겁니다.



얘들아! 너희의 죽음은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기뻐하라고,,,

짐승들 편에서 보면 데려감을 입은 자들이 불쌍하게 보이나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들을 이제 그만 고생하라고 데려가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성도에게 죽음은 감사이고 복인 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우연한 사고를 죽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은 잘 죽었다고 좋아하겠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제 그만 고생하고 평안하게 쉬라고 천국에 데려가시는 것이에요.

그러니 복음 전하다가 죽더라도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세요.



죽음은 저주가 아니에요.

이 세상의 역사는 지나가는 한 경점 같아요.

우리에게는 영원한 나라가 있어요.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한 세상 속에서 먼지 같고 점과 같은 인생을 살면서 그 끝이 다다랐다는 것은 희소식이에요.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위하여 쉴 수 있는 굴을 마련합니다.

그것이 막벨라 굴로 나타납니다.

사라가 제 2기 인생을 살아가는 집을 장만하는 거예요.

쉬게 해 주려고...



구약은 그림자에요.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상징해요

예수님이 성도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 있어요.

그곳이 바로 이 세상에서는 교회로 나타난 것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예수님의 피값으로 샀다고 하지요.

예수님의 피값으로 산 곳이 아게다마라는 피 밭이에요.

가룟유다가 예수를 죽이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서는 예수님을 판 몸값을 성전에 던지지요.

그리고 목매달아 자살을 합니다.



그러자 제사장들이 그 돈으로 밭을 하나 삽니다.

그 밭 이름을 아겔다마 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밭을 나그네들의 무덤을 삼습니다.

그 무덤이 바로 교회에요.



교회는 나그네들이 쉬는 곳이에요.

교회에 와서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고 쉼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는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부추기고 있으니 문제이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는 이 세상에 것을 죽어서 쉼을 주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땅을 준다고 하시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막상 가나안 땅에 들어와 보니까 거기에 땅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네가 가야할 땅은 하늘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이 말씀에 이끌려 간 땅은 교회를 예표하는 겁니다.

교회에 가니까 우리가 살 땅은 이 세상에 없고 하늘에 있다고 알려주잖아요.

아브라함도 가나안에 가니까 하나님이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보여주시고서는 네가 가야할 땅은 바로 저 하늘에 있다고 알려준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를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가나안에서 나그네와 행인같이 장막생활을 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에게 장차 주어질 땅을 예표로 주어진 것이었어요.

그래서 막상 가나안에 들어가자 “네가 장차 주어질 땅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어! 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살면서 정과 욕심을 죽이며 산 겁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일곱 우물을 파는 교회 생활을 한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건 예표의 땅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약속으로 받아야할 땅은 천국이에요

새 하늘과 새 땅이에요

이 세상의 땅은 다 멸망 될 거에요.

하늘에 영원한 영생이 있는 땅이 우리의 상급이에요.



아브라함은 자기 땅을 장만하는 삶을 살지 않았어요.

거부였지만 빌딩을 짓고 전답을 사들이지 않았어요.

유일하게 가나안 땅에 돈을 주고서 땅을 한 조각 샀는데 그게 바로 자기 아내가 쉴 수 있는 막벨라 굴이에요.

장차 이 굴에 아브라함도 들어가고 그 후손들도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서 교회를 세우셨어요.

요한복음 1장 11절에 보면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원수들이 차지하고 이 땅에 합법적으로 자기 땅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핏 값으로 교회를 세운 겁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합법적으로 자기 땅을 마련하였는지 다시 살펴봅시다.



마태 27장을 봅시다.



마 27:1-10=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가룟 유다는 열심당원이에요.

지금 말하면 독립운동가예요,

오직 로마로부터 해방 되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가룟 유다는 그 독립운동에 예수를 이용하려고 했던 거예요.

사람은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 본성이 나타나게 되어있어요.

예수님이 죽음에 위협을 당하면 본성이 나타나서 힘을 발휘하여서 로마로 부터 항거할 줄 알았어요.

그래서 가룟 유다가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로마에 팔아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힘없이 잡혀가서 죽었어요.

아 이거 사람 잘못 보았구나 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이기지 못하고 목매어 죽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의 죽음으로 자기의 죄값을 치룬 겁니다.



이게 바로 악인들이 모습입니다.

죽음으로 난 이렇게 내 잘못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라고 알리는 겁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의 모습인 겁니다.



죄 값은 자기가 갚으면 안돼요.

예수님이 갚아야 해요.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으나 그 죄 값은 예수님이 갚아주시었어요.

자기 잘못을 책임지는 모습을 보인 가룟 유다는 인간이 보기에는 멋진 사람이에요.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교만이에요.

악이에요.



죄가 뭐냐? 죄를 자기가 책임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를 어떻게 책임을 지나요?

죄인은 죄를 책임 질 수가 없어요.

죄는 의인만이 책임 질 수가 있어요.

그래서 죄의 나라가 아닌 죄없는 나라인 하늘에서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아담의 씨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가 되신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책임을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내 죄를 예수님이 대신 책임을 져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이걸 은혜라고 해요.



그러므로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는 겁니다.

그러라고 성령이 오셨어요.

성령이 오셔서 네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셨다고 알려 주세요.

그럼 우리는 예수님이 내 대신 책임져 주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신앙이에요.



그런데 가룟 유다는 자기의 죄를 자기가 책임자겠다고 했어요.

자기의 죽음으로 자기의 죄값을 책임자겠다고 한 것입니다.‘

죄인 주제에 말이에요.

이게 하나님 앞에 악이고 불경이고 참람인 겁니다.



암튼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판 댓가로 받은 은 삼십을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줍니다.

그리곤 자살을 해 버립니다.

그러자 제사장들이 이 돈은 핏 값이므로 성전 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고 하면서 토기장이의 밭을 하나 사서 나그네들의 묘지로 삼습니다.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사서 자기 가족들의 무덤으로 만들었듯이 예수님이 자기 몸값으로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는 자기 백성들의 무덤을 만든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일컬어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곳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자기 몸값을 주고 합법적으로 산 것이 바로 교회예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준다고 했어요.

그럼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의 땅이에요.

엄밀히 말하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주인이에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고 나그네로 삽니다.



자기 땅인데도 도리어 객에게 은 400을 주고 막벨라 굴을 샀어요.

이 땅도 본래 예수님의 것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이 차지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오시어서 은 삼십을 주고 사서 교회 하나 세워 놓으셨어요.



그러므로 교회는 구약의 막벨라 굴과 같은 것입니다.

막벨라 굴은 죽은 자들이 들어가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빼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이 세상에 아브라함과 같이 나그네로 두었어요.

그래서 신자는 교회 와서 세상의 정과 욕심을 장사지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이 완전히 말씀을 통하여 깨어져서 내가 세상의 영화를 구하는 것이 예수님을 두 번 못 박는 것임을 알고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이심을 고백할 때 세상에 나가서도 천국으로 살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힘들어 하는 것은 우리 속에 꿈을 이루려고 하니까 사는 게 힘든 거예요.

우리는 본능적 욕망으로 더 나은 것을 꿈꾸어요.

죄인이 꿈을 가진들 그 꿈은 죄인이 창대해지는 꿈이 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우리의 꿈을 깨드리는 작업을 하세요.



호세아를 보면 너희가 제단이 많은 수록 주상을 많이 세운다고 합니다

이 말은 교회가 부흥할수록 마귀집단이 되어버린다는 뜻입니다.

타락은 반드시 많을 때에 일어나요.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탐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야망을 주는 곳이 아니고 깨트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한 인생살이가 힘들고 고단해집니다.

우리는 어리석어서 고단하면서도 그 꿈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강제로 우리가 하지 못하니까 대신 해 주시는 것입니다.

실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꿈이란 탐욕이거든요.

남보다 더 잘 살고자 하고 더 높아지고자 하고 더 움켜잡고자 하잖아요.

하나님이 인류에게 공평하게 먹고 살도록 하셨어요.



원래 하나님은 빈부를 주시지 않았어요.

그런데 탐욕이 빈부를 생기게 한 겁니다.

내가 더 챙기려고 하니까 남에 것을 빼앗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동안 살 때는 빈부가 없었어요.

매일매일 주는 것만 먹으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차지하면서부터 빈부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 때에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인간들의 탐심이 하나님이 주신 공평을 깨트릴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의 탐욕 때문에 고아가 생길 것이고, 종이 생길 것이고 나그네들이 생기니까 너희는 그들을 버려두지 말고 과거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돌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걸 고엘 제도라고 합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제도입니다.

이게 희년으로 나타났어요.



50년마다 희년 제도를 주셔서 희년이 되면 토지도 돌려주고 종에서도 해방시켜 주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경내에는 사람 간에 차별을 없애라는 겁니다.

처음 가나안에 들어 올 때의 차별 없는 평등한 모습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희년은 천국을 모형하고 있어요.

의인화 하면 예수님을 말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선포 하실 때 희년이야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게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초대 교회로 나타난 겁니다.



성령이 임하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러자 교회 안에 빈부가 함께 모였지만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을 위하여 전답을 내어 놓고 유무상통하면서 차별없이 교제하였던 것입니다.

이게 천국의 모습이에요.



이것이 성도 안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인간의 외모를 가지고 차별하는 것이 사라져요.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천국으로 사는 겁니다.



천국이 이루어지면 경쟁할 필요가 없어져요.

자기 안에 천국이 이루어진 자들은 누가 잘 산다고 시기하지도 않고 누가 못 산다고 무시하지도 않아요.

또한 자기 자신도 못 산다고 낙심하지도 않고 잘산다고 자랑하지도 않아요.



자족하는 마음이 생겨요.

그럼 어떤 환경에서도 천국에 소망으로 이겨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각 사람에게 분복을 주셨어요.

분복 따라 살아가면 되어요.

이게 믿어지면 자족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열심히 살았는데 이것 밖에 안 된다면 아 이것이 내 분복이구나 생각하세요.

그렇지 않고 남과 비교하면 우울해지고 감사가 사라지게 되어요.

믿음으로 받으면 감사인데,,

타인과 비교하면 결핍을 느끼고 속상해 하고 급기야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 가치로 사는 자가 아니에요.

영적 가치로 살아야 해요.

그래야 삶으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습니다.



우린 모두가 이 땅에서 각자 맡은 배역을 연기하는 거에요.

부자는 부자대로, 거지는 거지대로,,,

배역가지고 싸울 일이 아니에요.

부러워 할 일도 아니고..

내가 맡은 배역이 이것이구나 라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교회의 직분을 은사라고 하는 겁니다.

교회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집과 같아요.

왕이 준비한 예복이 있어요.

우린 그 옷을 입고 교회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 옷으로 인한 차별이 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덤이라고 하였지요.

세상에 정과 욕심을 묻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내가 누구다 라는 것을 묻어야 해요.

속된 말로 세상 계급장을 떼고 너도 은혜로 부르심을 입었고 나도 부르심으로 왔으니 우리 서로 차별하지 말고 우리를 불러주신 그 분만 찬양하자 그래야 한단 말입니다.

그게 교회에요.




제일 바보가 교회에 와서 세상 옷 자랑하는 겁니다.

또한 그걸 부러워하는 사람들이에요.

그건 세상 가치를 그대로 안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가치를 안고 사는 사람은 교인은 될 수가 있어도 성도는 아니에요.

구원 받은 자라고 할 수 없어요.

영적 의미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교회 처음 온 사람들은 그렇다고 하여도 이해는 하지만 만약에 목사나 장로가 세상 것으로 희비 한다면 그 사람은 육에 속한 자들이라고 밖에 볼 수가 없어요.

제일 못난 것이 목사가 교회 크기 자랑하는 거에요.

목사가 자랑할 것은 복음이지 교회 평수가 아니에요.

교인 숫자가 아니에요.

성도의 자랑거리는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복음뿐이에요.



교회는 세상 옷을 버리고 왕이 준비한 옷을 입고 사는 곳입니다.

만약 성도가 세상 것을 자랑한다면 하나님이 조만간 그 옷을 벗겨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라면 말이에요.

하나님은 세상 힘을 빼는 일을 하세요.



왜 교회로 부르셨나요.

세상 것을 장사지내게 하시려는 겁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들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세상의 가치를 벗어버리고 하늘의 가치를 얻을 때에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안식이 되는 거예요.



교회는 세상 것으로부터 안식을 주는 곳이에요.

하늘의 것으로 안식을 주는 곳이에요.

교회가 땅의 가치가 교회 안에 창궐하지 못하게 해야 해요.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 놓게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더 채워주지 못해서 안달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합니까?

교인들을 달라고 하고 목사는 주겠다고 하고 있으니,,

그러니 교회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인 겁니다.

신앙생활이 쉼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 간에 서로 경쟁하게 되는 것입니다.

급기야 교회 안에 부익부 빈익빈으로 나누어서 동호회 모임처럼 교인들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단언코 이러한 것은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에요.

마귀가 진치고 있는 교회에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천국을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옥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탐욕이 있으면 그것이 천국이 아니라 불타는 지옥이 되어요.

스스로 자신을 태우게 되어요.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언제 불행하고, 언제 행복한가?

주신 것도 여호와시요 취하시는 분도 여호와이심을 알고 있는바 족한 줄 알고 산다면 천국을 살게 되지만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해 라고 하면 그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지옥으로 사는 겁니다.

이건 예수를 못 만났다는 겁니다.



교회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교회에 와서 쉼을 누려야 해요.

있는바 족한 줄 알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쉼을 얻고 예수 밖에 있으면 수고에요.



환경이 쉼을 주지 않아요.

환경은 몸은 편하게 해 줄 수는 있어도 마음은 편하게 해 줄 수가 없어요.

마음에 쉼을 누려야 천국인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환경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를 하잖아요.



행복은 환경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것이 행복이에요.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지요.

풍부이든 비천이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쉼을 얻고 산 것입니다.

몸뚱이는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감옥에서도 찬송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가둔 간수들을 위로할 수가 있었어요.



옥중서신을 보면 옥에 갇힌 사람이 도리어 옥 밖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고 있어요.

이것은 세상의 이치로는 맞지가 않아요.

옥이라는 것은 십자가 안을 말해요.



바울에게 있어 감옥은 십자가 너머와 같아요.

그런데 그 감옥에 들어가니까 도리어 평안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옥에서 찬송과 기도를 하게 되고 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 속에 던져집니다,

그것도 신상에 절하지 않는 죄로 말입니다.

하루 아침에 역적으로 몰린 겁니다.



그래서 평상시 보다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져짐을 당합니다.

얼마나 뜨거웠으면 그들을 집어넣는 사람이 불 입구에서 타 죽었겠어요.

풀무불 밖에 있는 자들이 얼마나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했겠어요.

어이쿠~! 이 미련한 사람 같으니 그냥 한번 절하면 될 것을 그 고집을 피우다가 불 속에 들어가게 되었나 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불 속에 들어가 보니까 불이 사르지 못하는 분이 계신 겁니다.

어서 와라 그러는 거에요.

그 분은 불도 이기는 분이에요.

죽음을 이기신 분이에요.


그 분이 누구겠어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불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죽음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이걸 히브리서에서는 영문 밖에서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주 예수가 기다리고 있는 그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 영문 밖이 바로 십자가 안이에요.

십자가 너머에 가니까 예수님이 계신 겁니다.

예수님 안에서 십자가 이쪽을 밖을 바라보니까 거기가 지옥인 겁니다.

불 속이 천국이고 불 바깥이 지옥인 거에요.



그림을 그려보세요.

얼마나 역설적인가.

불 밖에 있는 자들은 불 속에 던져진 다들을 보고 안됐다고 하고,

불 속에 있는 자들은 불 밖에 있는 자들을 보고 안됐다고 하고 있어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우리 보고 어리석다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어리석잖아요.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은 잠간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겁니다.



영원한 묵시에서 보면 시작과 끝이 있는 이 세상은 찰나와 같아요.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의 삶을 한 경점 같다고 하는 겁니다.

그럼데 우리는 안개 같은 세상 것을 붙잡고자 합니다.



세상 것은 재처럼 움켜잡으면 다 사라져요.

십자가 안에서 보면 이 세상은 허상이에요.

신기루에요.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내 인생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에서 바라보니까 풀무불 바깥에 있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운 겁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이 세상은 바다와 같아요.

바닷물은 먹으면 먹을수록 갈증을 유발하고 급기야 죽게 해요.

그러므로 세상의 것은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인생이 쫓기게 되어 있어요.



이 땅의 영광은 많을수록 쉼을 얻지 못해요.

잘되려고 하지마세요.

그럴수록 힘들어져요.

세상 것은 쉼이 없어요.

안식이 없어요.



돈이 안식을 준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마음의 평안은 하나님이 주어야지만 얻을 수가 있어요.

평안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유출되어요.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은 허구에요.

그래서 이 세상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되는 겁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 것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했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다 세상으로부터 온다고 했어요.

세상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마귀가 준다는 겁니다.

실제로 마귀가 예수님에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주겠다고 시험했어요.

마귀가 그러잖아요.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자들에게 준다고 하면서 예수님에게 너도 나에게 절만 하면 이것을 다 주겠다고 하잖아요.

그러자 예수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합니다.

이는 나는 떡에 가치로 사는 자가 아니고 아버지와 맺은 언약을 위하여 사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 언약은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죽는 겁니다.

그 죽음으로 인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하늘에 평강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고 그 십자가를 근거로 하늘에 평강이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더러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는 것도 다 이 뜻이에요.

주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죽임당하고 버림을 당하는 그 안에 평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뚱이는 육신의 정욕와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이 문방구 앞에 있는 두더지 게임기의 두더지처럼 얻어맞아도 자꾸만 머리를 쳐들어요.

그러므로 교회는 하늘에 소망으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들을 말씀으로 깨트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이 죽여짐을 당하고 쉼을 누려야 합니다.



없음 속에서 감사가 나와야 해요.

족한 줄 알고 감사하며 살아야 해요.

그게 막벨라 굴에서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탤런트들에요

각기 맡겨준 배역이 있어요.

드라마에서 왕 노릇한다고 해서 집에 와서도 왕 노릇하면 욕 얻어먹어요.

드라마 밖에서는 왕이 아니에요.

드라마를 찍을 때만 그래요.

끝나면 동등한 입장이 되는 거예요.



천국은 차별이 없어요.

교회 안에서는 나는 없고 모두가 예수 안에서 만난 사이에요.

너나 나나 차별이 없이 쉼을 누려야 합니다.

그게 교회에요.



우리는 내 인생이 없어요.

내 인생이 없기에 쉼을 누리는 거예요.

내 인생이 있으면 내가 책임을 져야하기에 쉴 수가 없어요.

내 인생을 예수님이 책임져 주세요.

그러므로 성도의 인생은 실패가 없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사는 인생이므로 다 성공한 인생을 사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습이 세상에서 초라하다고 할지라도 낙망하지 마세요.

드라마에 출연하여서 연기한다고 생각하세요.

그 드라마가 곧 끝나갑니다.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마련해 주신 막벨라 굴에서 쉼을 누리면서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소망하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침 바 되어 주시어서 우리로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로 불러 주시어서 이렇게 이세상의 모든 짐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죽여주심을 감사합니다. 날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들이 이 교회 안에서 죽여지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넉넉하며 관대함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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