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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46강. 흉년이 든 땅에 두신 이유 (창 26:1-11)

by coroa 2021. 5. 28.

 

[46강. 흉년이 든 땅에 두신 이유 (창 26:1-11)]

-.정낙원 목사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다뤄가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역사를 가지고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고 실제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들과 동거동락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위하여서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물과 피를 쏟고 낳아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엄마가 아이를 낳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전적인 부모의 공로입니다.

아이는 태어나기 위하여 자기가 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태어난 후에는 부모의 도움으로 자라가는 것은 자신이 하여야 합니다.

자람에 있어서 부모의 도움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서는 온전하게 자라 갈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부모와 아이는 한 몸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홀로 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주의 간섭하심으로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도움과 간섭을 통하여 어른으로 자라가듯이 우리 신앙도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자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자란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많이 알아간다는 뜻입니다.

아이가 커 가면서 부모님의 은혜를 알아가듯이 성도들도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그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고 감사의 스펙트럼이 넓어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범사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살아가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간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막연한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내 삶에 개입하여서 간섭하고 있는 하나님인가요?

추상적으로 기록된 하나님을 믿고 산다면 그 하나님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간섭하신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속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해요.

내가 만난 하나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집에서 알던 하나님은 조상의 하나님이었어요.

그러나 벧엘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은 자기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간섭하십니다.

우리 인생에 뛰어들어 간섭하여 가십니다.

우리는 눈을 열고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서 우리를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두렵지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길을 가는데 최홍만씨처럼 거인을 만나도 아빠만 있으면 걱정하지 않아요.

큰 소리쳐요.

아이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힘이 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믿어질 때는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알면 두렵지 않아요.

그러나 이 믿음이 없으면 두려워요.

 

하나님은 우리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커 보이는 것입니다.

마귀는 날마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으로부터 가리는 일을 합니다.

세상 것으로 가려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눈앞에 얼쩡거리는 것들을 제거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귀가 우리 눈앞에 얼쩡거리게 하는 것들이 우리가 좋아 하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선악과처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운 것들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이에요.

이건 마치 어린 아이들이 문방구 앞에 있는 게임기처럼 발걸음을 붙잡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세상 것들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자꾸만 바라봐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신앙이 넘어지는 것입니다.

넘어졌다 일어섰다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에도 넘어지고, 불에도 넘어지곤 해요.

 

예수님이 제자들과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 눈에 하늘나라가 보이는 겁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있는 겁니다.

 

베드로가 보니까 너무도 좋은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여 여기에다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합니다.

그냥 거기서 살고 싶은 겁니다.

근데 모세와 엘리야가 천구만 살짝 보여주고 떠나간 겁니다.

 

예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가자고 합니다.

예수님은 신앙생활은 여기서 하는 것이 아니고 저 아래 귀신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그들과 싸우고 이겨내야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산에서 내려오니까 산 아래 있던 제자들이 귀신 들린 자를 앞에 두고 씨름하고 있는 겁니다.

귀신을 쫒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예수님 우리는 왜 안 됩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기도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곧 너희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해결해 주어야 할 문제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한다는 것은 내 힘으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해 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기도의 의미입니다.

 

기도는 나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 울산 목양교회 성도들은 아주 악한 자들만 모여 있어요.

여러분들이 기도를 안하잖아요.

목사가 그렇게 악악대고 소리를 치는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잖아요.

아주 독종들이에요.

이 웬수들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거지요.

빽이 든든하다는 거지요.

어떤 빽이 있으니까 기도를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엘리야처럼 기도하는 겁니다.

 

엘리야가 무슨 기도를 했나요?

비 오지 못하게 하는 기도를 하였어요.

백성들은 바알과 아세라가 복은 준다고 믿고 쫓아가니까 엘리야가 하늘을 닫아 비오지 못하게 기도해서 이 놈들이 누리는 복들이 바알과 아세라가 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고 비오지 못하게 기도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못 이깁니다.

그러니 기도하셔야 해요.

기도 안하면 한방에 훅 가는 수가 있어요.

 

우린 세상 못 이겨요.

우리는 늘 징징 거릴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알고 난 후에 기도를 안 해요.

왜 그런가?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과거에 복음을 몰랐을 때는 이방인처럼 복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나니까 그건 틀린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맞아요.

이방인처럼 세상 것 달라고 기도하면 안 되어요.

하지만 하늘에 것을 구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복음 알고 난 후에 숫제 기도를 끊어버렸어요.

이것은 땅에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는데 하늘에 신령한 것을 구하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하늘에 것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그 길이를 알아가는 기도를 하여야 해요.

하늘에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근데 구하지 않아요.

결국 마귀의 노림수에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은 결정적으로 그릇되게 반 복음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뭔가 하면 기도도 안하고 예배 참석도 우습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형식을 다 버렸어요.

모이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것들을 다 버렸어요.

 

분명히 말하지만 형식을 버리면 내용도 날아가요.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과 같아요.

신앙의 내용은 그 은혜에 감사하고 찬미하는 것입니다.

이걸 어디서 해야 하는가 하면 교회에서 해야 합니다.

교회에 모여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하여야 해요.

 

초대교회를 보세요.

구원의 기쁨이 얼마나 기뻤으면 날마다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했겠어요.

그러니 우리도 모이서 기도하고 찬송하여야 합니다.

이건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어야 해요.

주께서 우리 안에서 그 일을 행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신 이유는 우리 몸을 사용하시려고 오시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린 안에 오신 것은 우리 몸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 사용하고자 하심입니다.

교회 안에서 받은 그 사랑을 토해내게 하고자 하십니다.

이게 천국이에요.

 

그렇게 간섭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내가 만난 주님으로 이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구원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어요.

하지만 이제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육신의 소욕과 싸워야 합니다.

 

먼저 자기 자신과 사워야 하고 옛 사람과 싸워야 하고 육신의 소욕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을 자꾸만 자기 몸뚱이 편한 쪽으로 추구하는데,

그건 아니에요.

신앙이 편한 쪽으로 흐르게 되면 예수님은 내 몸뚱이를 편하게 해주는 도구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그게 아니라고 자꾸만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걸 이삭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문은 언약의 가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데리고 가십니다.

이제 이삭이 그 언약의 가문을 지켜가야 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만난 그 하나님을 이삭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삭에게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너의 아버지 세대는 지나갔고 네 아버지를 간섭하던 그 하나님이 이제부터는 너를 간섭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처럼 이삭을 간섭합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경험하였던 그 구조 속으로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똑 같은 형편을 당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세요.

 

창 26:1절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아브라함 때에 흉년이 들었지요.

그런데 그 흉년이 아브라함이 죽고 난 후 이삭의 시대가 열리자 또 흉년이 들지요.

흉년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도착하자 그 해에 흉년이 듭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거기서 아브람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애굽의 바로를 가지고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 주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가서 무슨 짓을 했나요?

자기 마누라를 팔아먹는 일을 하지요.

 

아브람은 자기 몸뚱이 하나 살려고 아내를 팔아먹는 일을 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아내 때문에 살아났어요.

이것은 사래의 죽음으로 아브람이 살아난 것입니다.

이 그림은 신약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예수 때문에 살아난 것과 같아요.

 

바로가 사래를 취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를 책망합니다.

바로는 잘못이 없어요.

아브람이 사래를 자기 누이라고 했기 때문에 재물을 주고 산 겁니다.

아브람은 사래 덕분에 살아났고 큰 재물을 얻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람을 책망하지 않고 바로를 책망합니다.

 

바로가 누구입니까?

세상에서 제일 큰 왕이에요.

그런데 아브람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바로를 책망하고 혼을 내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그제서야 자기를 간섭하는 하나님이 바로 보다 더 높은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를 혼을 내심으로서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가고 계심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람은 애굽에 내려가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흉년 들기 전까지는 아브람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였어요.

추상적으로만 알고 있었어요.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흉년과 기근을 사용 하신 것입니다.

아브람은 기근을 해결하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분임을 알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너는 떡을 위하여 살아선 안 되고 내 언약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을 하셨습니다.

 

기근이 들고 나니까 아브라함은 떡을 찾으러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너는 네 힘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자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자기에게 복을 주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근을 통하여 알려주시는 것은 하나님은 네 몸뚱이 하나 위해서 일하는 분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일해 가시는 것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물론 아브람은 다 깨닫지 못합니다,

점차적으로 깨달아갑니다

아브람이 한 번에 믿음이 자란 것이 아닙니다.

시행착오를 해 가면서 알아가게 됩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되어 가면서 점차적으로 알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생명의 자람과 같아요.

한번 은혜 받았다고 그 신앙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오래 안 갑니다.

 

만약 한 번 은혜 받았다고 다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한 번 받은 은혜를 가지고 평생 울궈 먹고자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날마다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을 하고 나온 이스라엘에게 매일 만나를 주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만나로 나타납니다.

만나를 그냥 양식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했어요.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날마다 받아야 하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왜 날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까?

그건 우리의 신앙이 날마다 마귀와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키십니다.

왜? 졸지도 않고 지키십니까?

이는 마귀가 졸지도 않고 잠도 안 자고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우리가 자식을 군대 보내놓고 걱정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 놓고 잠을 잘 수가 없어요.

호시탐탐 마귀가 노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혜사를 보내서 돕도록 하신 겁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을 보면 보혜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고 하십니다.

다른 보혜사란 성령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시고 난 후 약속대로 성령이 보혜사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도우려고 오셨어요.

성령님은 돕는 분입니다.

 

성령이 우리 대신 일을 해 주지 않아요.

일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과외선생님처럼 우리에게 공부를 시키세요.

공부는 우리가 해야지 과외 선생님이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과외 선생이 대학 입시 수능시험을 대신 쳐주지 않아요.

시험은 내가 쳐야만 합니다.

내가 실력을 가져야만 합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해야지 다른 사람이 해주지 못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간섭만 해줍니다.

내가 기도해야 하고 내가 봉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너 가만히 있어 내가 해줄게”

그러지 않아요.

육신의 소욕과의 전쟁은 내가 해야 해요.

그래서 신앙생활이 아픔이고 고난인 것입니다.

 

성령이 계속 과외선생이 되어서 세상 가치로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땅에 가치는 죽이고 하늘에 가치로 살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로 이기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피 흘리며 싸우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음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안에 죄들이 토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내 몸뚱이만 챙기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 보다 이 세상을 더 사랑하는 자라는 것을 고발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복음 하면서도 여전히 그 복음을 우리 사욕을 좇는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자기 몸뚱이를 챙기고 있어요.

 

우리는 나밖에 몰라요.

내 몸이 신이에요.

그래서 몸뚱이 편한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흉년과 기근의 현장에 던져지면 우리의 실체가 드러나요.

이삭도 기근을 당하니까 자기 아내를 팔아먹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삭 이 나쁜 놈 그러면 안 되어요.

 

이삭이 바로 우리에요.

내가 이삭이에요.

우리는 나 하나 살자고 예수를 늘 팔아먹어요.

예수는 우리 때문에 늘 죽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삭도 그랄 땅 블레셋에 가서 자기 아내를 통하여 자기가 살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람이 기근 때문에 애굽에 내려가 부인을 팔아먹고 하나님을 만났듯이, 이삭도 그 구조로 보내시어서 하나님을 알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삭아 너를 지키는 자는 나다”

“내가 아버지를 지켜준 것처럼 너를 지켜 줄께”

거기에 아비멜렉 왕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왕은 신이었습니다.

어느 시대이고 왕은 모든 법률로 부터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왕은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은 곧 신(神)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은 그 어떤 일을 해도 죄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아베멜렉도 왕입니다.

그러므로 여자 하나 취하는 것은 죄도 아닌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을 혼을 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이 보는 앞에서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을 책망하심으로 하나님이 세상의 왕보다 크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삭은 이 모습을 보고서 나를 간섭하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신 위에 계신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간섭 한다면 세상을 이긴다는 것을 이삭이 알게 된 것입니다.

 

당시는 부족 국가입니다.

힘이 있어야 살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삭은 힘이 없어요.

자식도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너를 지켜줄게” 라고 하십니다.

 

본문 2-5절을 봅시다.

 

창 26:2-5=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3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을 상기시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기억케 하십니다.

맹세란? 하나님이 땅과 자식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 아버지에게 맹세한 것을 반듯이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천하만국이 이삭을 통하여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려면 어떤 환경에서도 이삭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네 아버지와 한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너는 절대로 죽지 않도록 내가 너를 보호할 것이다“ 라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나타나서 아브라함과 한 언약을 다시 한 번 가르쳐 줍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앞선 믿음의 선진들에게 맹세하신 것을 지금 이루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들에게 간섭하시었던 하나님께서 지금 현재 우리를 간섭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늘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 주세요.

다양한 사건과 사고를 통해서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은?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간섭하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많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앎은 부대낌 속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많이 부대낌을 당할수록 많이 알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 자들은 많은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하여 더 많이 알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부대낌은 부부간의 삶과 같아요.

하나님을 “안다” 라는 앎을 “야다” 라고 하는데 이는 부부의 침실용 말이에요.

부부가 합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남자와 여자가 하룻밤 자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기한 게 남녀가 만나면 서먹 서먹해요.

아무리 오래 사귀어도 서먹해요.

그런데 잠 자리 한번 하고 나면 달라져요.

잠 자리를 하고 나면 법에서 사랑으로 바뀌어요.

 

아무리 친해도 잠자리를 하기 전에는 남남이에요.

그러나 잠 자리를 하고 나면 한 몸이 되어요.

이게 남녀 간의 성(性)이 담고 있는 비밀이에요.

그래서 남녀 간의 성(性)을 생명과 목숨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율법 아래서는 남남으로 살았어요.

그 때는 하나님을 법으로 섬겼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고 난 후에는 사랑으로 섬깁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곧 예수님과 우리가 하룻밤 자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과 성도는 신랑과 신부로 말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신 것은 합방하는 것과 같아요.

성령이 임하고 난 후 법에 관계에서 사랑의 관계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마치 남녀가 하룻밤 잠자리를 하고 난 후에 남남에서 한 몸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성(性)을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부간의 침실용어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된 하나님을 가질 때에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경험은 본인이 하여야 해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많이 가져도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만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그 고백을 하잖아요.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잖아요.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과 하룻밤 자는 경험을 가진 겁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실제 경험하는 일들을 벌리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언제 알 수가 있나요?

바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알아가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이라는 풀무 속에 집어넣고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편안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잖아요.

우리는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이렇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실제 경험하게 되면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은 산전수전 다 겪어야합니다.

좋은 신앙은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아요.

오랜 세월 동안 쌓여가면서 생기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 한 사람들은 잘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늦게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냄비처럼 기복이 심해요.

좋은 의미에서 신앙생활은 차근차근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태 신앙을 우습게 여기지 마세요.

주일학교 신앙을 경히 여기면 안 되어요.

신앙생활이 어려서부터 차근차근 하면서 내공이 쌓이고 큰 실력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아래서 억지로 한 것도 실력이 되어요.

 

제가 뼈아프게 실수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아이들에게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를 하지 않고 어른 예배만 참석하게 한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율법이라는 기본부터 가르쳐야 하는데 그걸 놓친 겁니다.

교회 생활의 소중함을 가르쳐야 했는데 그걸 하지 못한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머리가 굵어지니까 교회에 안 오잖아요.

 

율법 없이 은혜만 가르쳤더니 그걸 악용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부르시겠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지금 나타난 모습으로만 본다면 전 주일학교를 실패했어요.

그래서 우리 교회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많이 아파요.

다 제 잘못이에요.

 

그래서 이제는 어린 자녀들이 있는 집사님들에게 주일학교가 있는 곳으로 자녀들을 보내라고 합니다.

어려서는 율법을 가르치라고 합니다.

 

헌금하는 것도 가르치고,

봉사하는 것도 가르치고,

기도하는 것도 가르치고,

전도하는 것도 가르치라고 합니다.

교회에 모이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보세요.

하나님이 유업을 이을 아들이지만 정한 때까지는 율법 아래 두셨다고 하잖아요.

학교 보낼 때에 제일 먼저 학교 열심히 가는 것부터 알려주는 것처럼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어릴 때부터 봉사도 가르치고 헌금도 가르쳐야 합니다.

나중에 헌금 하라고 하면 아까워서 못하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하는 자는 나중에도 잘하게 됩니다.

베이스가 탄탄하지 못하면 자꾸 흔들려요.

 

제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면서 교회의 모임을 폐하는 자들을 나무라는 것도 다 이러한 이치 때문입니다.

온전하게 알아진 복음은 더 모이게 해요.

복음은 신앙의 형식을 버리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형식 속에 내용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입니다.

 

복음 안다고 하면서 교회의 모임을 우습게 여기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기도하는 일들을 경히 여기는 것은 옳은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짝퉁복음이에요.

 

복음은 그런게 아니에요.

복음은 율법을 온전히 세우는 일을 해요.

율법주의가 되라는 말이 아니고 율법을 귀하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는 은혜는 허구에요.

허상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들이 허구이고 허상임을 고난 속에 집어넣어서 고발하세요.

지식으로 알아진 하나님은 힘이 없어요.

고난 속에서 경험으로 알아진 하나님이라야 능력이 되어요.

능력이란 담력과 같아요.

담력은 경험으로만 생겨요.

 

신앙이란? 지식 쌓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 속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간섭하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간섭하신 하나님을 내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햇지요.

이는 각자가 경험되어지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을 내가 만난 하나님이 될 때 “산 자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어서도 안 되고,

이삭의 하나님이 되어서도 안 되고,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서도 안 되고,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만 합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을 내어 놓으세요.

그것이 전도입니다.

다른 사람이 만난 하나님을 내놓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만난 하나님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만나 주십니다.

벧엘 광야의 야곱을 찾아 가셨듯이 지금도 고난 속에서 찾아주세요.

고난은 성경 속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경험하는 가장 좋은 곳이에요.

 

이삭은 아버지 죽고 난 후에 흉년이 들자 그랄 땅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아내를 빼앗기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아비멜렉을 책망하고 막아 줍니다.

 

이삭은 비로서 아버지가 애굽에서 만난 그 하나님을 아버지와 똑 같은 상황 속에서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아버지의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으로 갖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넌 이제부터 아버지가 만난 하나님을 잊고 네가 만난 하나님으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이 장자권의 축복을 받고 난 후에 나타난 것은 집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집에서 쫓겨 난 후에 벧엘 광야에서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 오십니다.

하나님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서 야곱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

 

그때에 야곱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은 할아버지 하나님이 아니고,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의 하나님을 알려 주시기 위하여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서 있을 때는 아버지의 하나님이었는데,

이제는 나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신앙은 모두 개인적인 것입니다.

구원도 개인으로 받습니다.

하지만 개인을 위한 구원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입니다.

그리스도 몸에 지체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로 나타났어요.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각자 신앙고백을 한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은 모두가 자기가 만난 하나님이 있는 것입니다.

 

지체마다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시온 산에 서 있는 144000명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각 사람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은 각자 어린 양과의 만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는 각자의 만남을 같도록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만남을 주세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은 자는 반드시 십자가의 길로 인도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히브리서 13장에서는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영문 밖에서 기다린다고 하면서 우리도 그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영문 밖이란? 세상과 격리된 곳입니다.

화려한 예루살렘과 반대되는 곳이에요.

거긴 영광이 없어요.

고난의 장소에요.

 

신앙이란 ?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고 영광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구원을 받은 자는 예수님이 죽으신 그 현장으로 던져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운명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참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참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한 알의 밀알처럼 죽었어요.

그 죽음으로 하나님의 양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으로써 양아들들이 생겨 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양자라고 합니다.

양아들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서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은 참 아들의 죽음으로 생겨난 양아들도 아들 대우를 해주세요.

그들 속에 참 아들의 죽음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양아들을 참 아들과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양 아들들도 이 땅에서는 예수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이 고난과 고달픔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우리에게 필연적인 것입니다.

예수 믿고 우리가 가만히 노는 것이 아니에요.

영적으로 전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군사는 싸우는 자입니다.

전쟁에 임하는 군사는 집 걱정 하면 안 되어요.

그리고 먹고 살 걱정도 하면 안 됩니다.

군사는 오직 전쟁에서 이길 것만 생각해야 합니다.

 

군대에 입대하면 먹을 것 입을 것 다 주십니다

양말에서 팬티까지 다 줍니다.

먹고 살 걱정을 안 해도 됩니다.

국가에서 다 알아서 해주기 때문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군사 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먹을 것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게 믿어지는 자는 없음 속에서도 감사하며 삽니다.

안 믿어지는 자들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만나를 쌓아두고자 합니다.

 

왜 매일 내리는 만나를 쌓아 둡니까?

이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일 안주면 어쩔까 하고 이틀 치 사흘 치를 모아두는 것입니다.

 

결국 모아놓은 것이 썩음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쌓아 놓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으로 다가 오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모아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빼앗아 가는 일을 해요.

 

좋은 환경 속에서 예수 잘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광야로 몰아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흙에서 나서 흙을 먹고 사는 자가 아닙니다.

비록 흙에서 났지만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 났습니다.

흙의 가치로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늘의 가치로 사는 자들로 부름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내어 모는 일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에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고난 속에서 자기와 함께 하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이삭과 같이 약속으로 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도 이삭이 당한 그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십니다.

 

“아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구나!”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구나!”

 

이걸 알게 하세요.

이것을 많이 깨닫는 자가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간섭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를 보여준 사람이 욥입니다.

 

욥기 19장을 봅시다.

 

욥 19:1-29=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2 너희가 내 마음을 번뇌케 하며 말로 꺾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3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꾸짖고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4 내가 과연 허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는 것이니 5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긍하며 내게 수치될 행위가 있다고 증명하려면 하려니와 6 하나님이 나를 굴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은 알아야 할지니라 7 내가 포학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지라도 신원함이 없구나 8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 내 첩경에 흑암을 두셨으며 9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 10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11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같이 보시는구나 12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수축하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 쳤구나 13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14 내 친척은 나를 버리며 가까운 친구는 나를 잊었구나 15 내 집에 우거한 자와 내 계집종들은 나를 외인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16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청하여야 하겠구나 17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의하는구나 18 어린 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19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대적이 되었구나 20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꺼풀 뿐이로구나 21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22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 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28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꼬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29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욥은 자기가 막상 고난을 당하니까 친척들도 친구들도 모두 욕하고 떠나더라는 것입니다.

욥이 잘살았을 때에는 친척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욥의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 가난 속에 집어넣으시니까 인간들의 본색이 드러나고 떠나더라는 것입니다.

 

떠난 사람들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욥이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욥이 그래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뿐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가지치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과 독대하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저는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에 “내가 교회를 개척하면 저 사람은 나를 도와 줄꺼야 ”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교회를 개척하고 나니까 하나같이 외면하는 겁니다.

형제는 물론이거니와 지인들까지도 안면 몰수하는 겁니다.

 

내가 전화를 하면 도움을 요청할까봐 전화도 안 받는 겁니다.

신기할 정도였어요.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그때 처절한 고독함을 맛보았습니다.

그때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은 “절대로 인간을 믿지 마라 네가 가야 할 길은 나를 믿고 가는 것이지 인간을 바라 보고 목회하려고 하느냐?” 고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혜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아십니까?

지나고 나니까 은혜인줄 알지만 그 땐 엄청 하나님을 원망했어요.

그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관계를 회복시켜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모든 관계를 다 단절시켜놓았어요.

다 막아버리고는 너는 나만 바라보라고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지금도 이러한 과정을 날마다 겪게 하십니다.

그럼 우린 늘 따지 잖아요.

“왜 편안하게 안 해 주십니까?”

“편안하면 넌 나를 바라보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안 해주신다고 하는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시험은 계속되고 있어요.

 

욥의 고백을 보세요.

 

6절을 보세요.

 

6절 “하나님이 나를 굴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은 알아야 할지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욥을 그물 속에 가두는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바닷가에 살아서 이 말씀에 의미를 잘 알아요.

배 두 척이 양쪽에서 그물을 치고 고기를 모으는 것입니다.

고기들은 자기가 그물 안에 가두어진 것을 모르고 놉니다.

 

배 두 척이 양쪽에서 그물을 잡아당깁니다.

그것을 강원도 말로 “후리 ”라고 합니다.

당기면 점점 반경이 좁아집니다.

나중에 그물을 딱 잡아당기면 고기가 몽땅 잡히는 것입니다.

 

욥이 지금 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그물로 에워싸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물이 에워싸는 모습이 친구들도 욕하고 떠나고 심지어 자기 마누라가 욥이 숨 쉬는 것조차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욥이 아프니까 신음 했겠지요.

마누라는 듣기 싫다고 합니다.

심지어 집안에 종들도 욥을 업신여겨서 말을 안 듣고 어린아이들조차도 말을 안 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하지요.

 


이 말은 욥이 병든 몸을 벗어나 죽은 후에 주님을 본다는 말은 맞아요.

이것을 신약 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 주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죽을 고난 가운데서,

내가 십자가에 달려서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이 현실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고난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고난을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아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기위하여 이런 고난을 주시었구나!”

그래서 고난이란? “하나님 아들 만들기” 입니다.

 

모세를 보내어서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그들은 내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떡으로 살았습니다.

떡으로 살던 그 환경에서 떡을 주지 않고 하늘의 만나를 주십니다.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구조 속으로 몰아넣고는 하늘만 쳐다보고 살라고 합니다.

 

“너희는 떡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이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살려주어야 살 수 있는 자” 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만나는 떡이 아닙니다.

만나를 통하여서 “아 우리가 사는 것이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는 것이구나” 를 알게 하는 것이 만나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40년 동안 계속하여 훈련하여 가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아는 자들인데 이놈들이 모르니까 40년 동안 뺑뺑이 돌리면서 알아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 광야의 길이 현재 우리의 삶입니다.

 

이 세상이 광야입니다.

이 광야에서 깨달아야하는 것은 이 세상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철저하게 믿어질 것 같으면 이 세상이 두려워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물질의 가치로 사는 곳입니다.

물질이 없으면 사는게 두려워집니다.

물질이 떨어지면 근심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물질을 의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일을 벌리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지하는 물질을 거두어 가는 일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미워서가 아닙니다.

 

마치 고 3 수험생이 공부하지 않고 게임을 한다면 부모는 그 게임기를 빼앗아갑니다.

공부해야 할 놈이 공부를 안 하고 게임만 하면 그 게임기를 박살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다 잘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하여서는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제 되어야 할 것은 없고 오직 떡을 구하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떡을 가지면 가질수록 쫓기게 됩니다.

인생이 힘들어져요.

떡은 바닷물처럼 먹으면 먹을 수록 갈증을 유발시켜요.

결국 돈 때문에 죽게 하는 겁니다.

이게 돈의 속성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마귀는 핍박하고 옥에 가두고 죽이는 것으로 예수를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인권 때문에 예수 믿는다고 죽이지 못해요.

지금은 다른 것으로 시험해요.

이 시대는 물질 만능시대에요.

그래서 마귀는 물질을 가지고 시험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서는 음녀들이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와 영광과 사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더 떠나 버렸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그들의 죄에 참예치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상 가치관에 빠져 있지 말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타락하기 시작한 것은 떡이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떡이 왕 노릇하는 떡판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마다 떡 가지고 싸우고 있습니다.

 

돈이 있다가 보니까 놀러 다니기 바쁩니다.

이제는 선교라는 이름으로 해외로 나갑니다.

말만 선교이지 실제는 여행가는 겁니다.

이런 것이 나빠서가 아니고 우리 마음이 그런 것에 빼앗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처음부터 크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죄는 씨앗처럼 다가옵니다.

처음에는 미미하게 싹을 내고 그것이 발전하여 잎을 내고 줄기를 내서 큰 나무를 만들어 결국에는 내가 악에게 잠식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좋은 것하고 편한 것을 못 이겨요.

좋은 것하고 편한 것은 돈이 주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돈의 유혹으로부터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알아야 해요.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언제든지 넘어 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 앞에서 바람 앞에 등불과 같아요.

그래서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 질까 조심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연약하기에 주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주의 능력을 힘 입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힘으로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고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 가르치시기 위하여 지금도 하나님은 성도들을 이삭처럼 아버지와 똑 같은 구조 속으로 집어넣으시고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삭아 너는 하나님을 믿고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에게 있어서 흉년은 곧 복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간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 속에 접어 넣어놓고 하나님을 경험토록 하십니다.

그렇게 하시고는 우리가 만난 하나님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고백케 하십니다.

 

옛날 같으면 돈 없으면 죽겠다고 징징거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족하며 삽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까 돈 보다 복음이 더 소중한 걸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니까 가치관이 바뀌게 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을 경험한 신자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고난도 복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이 우리의 뜻대로 살아지지 않아도 낙심치 말게 하시고 주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지나가는 세상 것에 연연치 말고 영원히 쇠하지 않는 하늘에 것을 소망삼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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