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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43강. 아브라함의 죽음이 주는 축복 (창 25:1-10)

by coroa 2021. 5. 14.

 

[43강. 아브라함의 죽음이 주는 축복 (창 25:1-10)]

-.정낙원 목사

 

아브라함의 죽음의 내용을 설교로 준비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고단한 삶을 마치고 천국으로 데려가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몰라요.

아브라함을 일컬어 믿음이 조상이라고 하지요.

그럼 아브라함의 죽음 속에는 우리의 죽음도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브라함의 죽음을 통하여 내 자신의 죽음이 보여지니까 위로가 되는 겁니다.

목사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설교 준비를 위해서 의무적으로 말씀을 봐야하는데 그때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있어요.

그게 감사한 겁니다.



우리가 무슨 큰 것을 받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에요.

좋은 신앙의 세세한 것 속에서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럴 때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감사가 됩니다.

삼시세끼 밥 제대로 먹는 것에서도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해요.



하나님의 은혜를 추상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큰 것을 해주어야만 은혜가 아니에요.

해가 뜨는 것조차도 은혜로 보아야 합니다.

일상적인 것이니까 하고 넘겨서는 안 됩니다.

평범함 속에서 은혜를 깨달아야 쉼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신안생활이란? 어깨에 띠를 하고 목청 높여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전도하기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 입니다.

삶의 최종점에는 감사와 찬송이 있어야하는 것이에요.



설교를 하면서도 감사 찬송하고,

일을 하면서도 감사 찬송하고,

어떤 일을 하면서도 감사 찬송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교회는 성스러운 곳이고, 교회 밖은 속된 곳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교회 일은 거룩한 것이고, 세상 일은 비거룩 한 것이 아니에요.

성과 속은 장소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이 무엇을 담고 있으며 어떤 자세로 사느냐로 판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세상 걱정하고 살면 속된 것이고 세상에서도 천국을 소망하고 살면 성이 되는 겁니다.



그럼 아브라함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위로와 소망을 삼아야 하는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죽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들어야 합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75세에 부르셨습니다.



지금 175세 일생을 마감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1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을 한 것입니다.

창 12장에서 25장까지가 100년의 아브라함의 일생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침묵하기도하고 하고,

때로는 회초리를 들고 징계하기고 하고 위로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은 마치 롤러코스트를 탄것과 같았어요.

하나님이 롤러코스트에 태워서 올렸다 내렸다 하셨어요.

그러면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100년 동안 씨름하시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셨어요.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마지막 신앙고백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모습으로 고백되어지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것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에 자기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딱 하나 돈 주고 장만 한 것이 자기가 들어갈 막벨라 굴 무덤하나 장만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시는 것으로 살았다는 고백입니다.

아브라함만 그러느냐?

아닙니다.

모든 성도는 그렇게 되어 있어요.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가는 길은 다 같아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은 모두 아브라함처럼 다스려 가세요.



1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다시 후처를 취하지요.

왜 마지막 죽음의 모습을 후처를 취하는 모습으로 나타내는가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있어요.



다시 후처를 취하여 자식을 생산하지요.

이것은 자식 낳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선교적인 모습으로 본다면 이방인들 구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나중에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는 민족으로 나타납니다.

그게 미디안 족속이에요.

이스라엘을 출애굽 하는 지도자 모세가 이 미디안 족속의 제사장으로부터 40년 동안 양육을 받아요.



미디안도 양면성이 있어요.

출애굽 할 때는 돕는 민족으로 나타나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서 사사시대가 되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이방민족으로 나타나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죽음도 언약적인 관점과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언약적인 관점에서는 후처를 위하는 것은 언약을 이어가는 과정에 필요한 것이지만 개인적인 죽음으로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데려가심으로 보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두 족보가 있습니다.

육적인 아들 이스마엘과 영적인 아들 이삭의 족보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마엘도 이스라엘처럼 12방백을 주셨어요.



이것은 이들도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데는 육적 아들도 필요해요.

이들이 적그리스도의 세력으로서 영적 아들들을 죽이는 일을 해요.

그래서 성경은 형제 싸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반드시 이 구조로 놓여 있어요.

육에 속한 자들이 강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영에 속한 자들을 염소처럼 힘으로 누르는 것입니다.

영에 속한 자들은 힘없이 당해요.

암튼 아브라함의 죽음 사건에 후처를 취한 것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단순하게 볼 사안은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아브라함 개인의 죽음으로 봅시다.

믿음으로 산 한 사람의 성도 이야기로 봅시다.

아브라함이 죽어서 천국에 갔지요.

천국이 어떤 나라인가요.

은혜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은 은혜로 데려가는 것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육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한 것은 아름답지 못한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의 실수와 같아요.



왜 아브라함의 말년을 수치스러운 일을 하게 하였을까요?

이는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년에 아브라함의 실수를 보여줌으로써 결국 “너는 내 은혜로 구원을 입는다” 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믿음에 사람들의 수치스러운 일들이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사람의 끝에 실수를 나타내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어요.

다윗도 말년에 인구 조사를 하다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고,

그 아들 솔로몬도 실수로 인생의 끝이 그려지고 있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자기 공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언약에 의하여 부르심을 입었고,

언약에 의하여 다스려졌어요.

그 언약이 은혜 언약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마지막 길이 후처를 취하는 모습으로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공과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게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신앙생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어도 마귀는 우리 안에서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고 살살 미혹을 해요.

떳떳해지라는 겁니다.

이게 교만이거든요.



여기에 걸려들면 자기 행위로 희비하게 되어요.

관찮다고 생각하면 당당하고 잘못 했다 싶으면 주눅이 들어요.

꼭 우리 아이들과 같아요.

시험을 백접이라도 받으면 큰 소리 빵빵 치고 빵점 받으면 풀이 죽어 있잖아요.



우리가 그래요.

믿는다 하면서도 말이에요.

이건 우리 몸뚱이가 본능적으로 그렇게 반응을 해요.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지 양심이 먼저 발동을 해요,.



양심이 선악을 판단해요.

그래서 선이다 싶으면 큰 소리치고 악이다 싶으면 꼬리를 내려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면 마음이 아픈 겁니다.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이 들어요.

내 꼬라지가 이래서는 되겠느냐 하며 마음 아파합니다.



물로 이런 마음은 가져야 합니다.

늘 자신을 돌이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지향성은 가져야합니다.

이건 정답지와 같아요.

정답을 알아야 틀린 것을 알게 되지요.



그렇다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못산다고 해서 주눅 들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다뤄 가는 것하고,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을 다뤄 가시는 방법이 다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을 봅시다.



20:11-15=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하나님 앞에 책이 두 권이 있습니다.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있어요.

책들은 복수이고 책은 단수에요.

단수의 책은 생명책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린 양의 생명책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그 사람의 행위와 상관이 없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기록이 되지 않은 택함을 받지 못한 불신자들은 책들에 기록 된 자기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들은 자기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신자들은 어린 양이 대신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어린 양의 공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후처를 삼았다고 해도 언약대로 구원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얻은 자들 입니다.

이미 구원을 얻었어요.

흑암에서 아들의 나라로 이미 옮겨졌어요.



옮겨 놓고 너 말 안 들으면 저쪽으로 도로 옮겨질거야 라고 하지 않아요.

그럼 예수님이 헛 죽은 것이 되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이 헛것이 되지 않도록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대신 간구하고 변호해 주는 것입니다.



옮겨 놓으신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 한다고 해서 쫓겨남을 당하는 것이 없어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이걸 믿으라고 성령을 우리 가운데 보내 주신 것입니다.

마귀라는 놈은 자꾸만 우리 행실을 가지고 참소를 하지만 성령은 우리 꼬라지 보지 말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죄를 대신하여서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요동치 않아요.

믿음이 자기 꼬라지와 상관없이 요동치 않게 해요.

이게 안 믿어지면 미친 여자 널 뛰듯이 조석지변으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거에요.



중요한 것은 우리 몸이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산다는 것입니다.

몸이 죄를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서 죄를 좇아가는 겁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였음에도 애굽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태어난 몸을 가지고 광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태어난 몸은 광야에 빼내 놓았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똑 같아요.

광야나 애굽이나 자기 몸뚱이 이해서 살고자 하는 것은 동일해요.



그래서 광야에서 애굽의 바로 왕처럼 10번이나 하나님을 기역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주 받지 않은 것은 어린 양의 피 뿌림으로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동네가 달라진 거에요.

이젠 홍해 때문에 애굽으로 돌아 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광야에 빼내 놓고 달달 볶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죽을 맛이에요.

애굽에서 태어난 몸을 애굽과 전혀 다른 동네에다 옮겨 놓고서는 애굽과 다르게 살라고 한단 말이지요.

이러면 미치는 겁니다.



죽이지 않고 너히는 애굽 사람과 다르다고 하는 겁니다.

다르긴 뭐가 달라요.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 몸이 그 몸인데 다르긴 뭐가 다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 사람과 다르게 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용서 받고 사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분명히 용서 받은 것은 알겠는데 하는 짓은 애굽 사람 짓을 하고 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도 미치는 겁니다.



마음 같아서는 하나님이 기절할 정도로 순종하고 싶은데 말이죠.

근데 안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저 애굽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굽의 습성들이 계속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일어날 때마다 상한 심령과 애통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아 미치겠다,,

이걸 바울식으로 표현하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에요.

신자가 되어서 신자다운 삶을 살지 못할 때 기분이 어떻던가요?

찜찜하지요.

짜증도 나고,,

내개 밉지요.

한심스럽기도 하고.,

야 내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나,,

그러면서 늘 자기에게 실망을 하잖아요.



부부간에도 다툴 때가 있잖아요.

늘 다투잖아요.

다툴 일도 아닌데 다투고 나면 신경질이 나지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잖아요.

참아야하는데 또 참지 못했구나.



“하나님 내가 왜 이 모양입니까?” 라고 물으면,

하나님께서 “너는 본래 그런 인간이야!” 그러시잖아요.

저만 그런가요?

아니지요?

여러분도 동일하지요.



그렇다고 어차피 안 되는 거 “이제부터 나는 함부로 살 꺼야!” 그러지는 마세요.

어떤 인간들을 그러니까 꼴리는 대로 막 사세요 라고 하는 자들도 있어요.

그게 엄청 복음적인줄 알고 말이에요.

이런 자들을 일컬어 영지주의자들이라고 해요.



우리는 죄와 싸우는 자들이에요.

왜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는가요?

이는 우리의 연약함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안 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죄를 이기라고 한단 말입니다.



마치 부모가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공부해라 공부해라 잔소리 하는 것과 같아요.

부모는 그 아이가 공부 잘 하기를 바라지 않아요.

그럼에도 공부하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그 아이가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부모가 어차피 너 공부 못하니까 니 맘대로 살아라 라고 하는 부모가 어디에 있나요.

없어요.



우린 죄를 못 이겨요.

하나님도 아세요.

그럼에도 죄짓지 말라고 해요.

죄와 피 터지게 싸우라고 합니다.



싸우면서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럼에도 살고 있는게 어린 양의 피 흘리심 때문임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 자신과 싸우세요.

내 안에 있는 나와 싸우세요.

그게 신자가 할 일이에요.



조성모의 노래 중에서 “가시나무 새” 라는 노래가 있어요.

그 가사 중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밪아요.

우리 모습이에요.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요.

그러니 예수가 쉴 곳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 예수님이 교인들에게 쫓겨나서 문밖에 서 계세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에요.

지금 우리가 그러고 있어요.

그럼에도 살고 있으니 은혜이지요.



뻔뻔하게 하나님에게 나와서 복 주세요,

그러고 있잖아요.

꼭 시험 빵점 받고 와서는 엄마 배고파 밥 줘, 빨리, 그러는 아이들 같아요.

우리가,,,그래요.



비록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더라도 엄마 배고파 밥 줘 그러는 이이가 되세요.

그게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엄마는 시험 빵점 받아도 배 아파사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공부는 못해도 건강을 해야지 하고서는 먹을 걸 챙겨주세요.



우리 하나님이 그러신단 말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살아도 몸 상하지 마라 그런단 말이에요.

하나님 앞에 뻔뻔하세요.

아버지 하고 파고 드셔야 해요.



엄마가 때리면 엄마 잘못 했어, 다신 안 그럴게, 하고 파고 들어야 해요.

그게 엄마를 대우해 주는 겁니다.

우리도 하나님 미워하고 도망가지 말고,

또 잘못 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러세요.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잘못을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해 주시는 분이에요.

자기 피 흘려서 낳은 새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배척하면 안돼요.



내가 잘못을 저질러 놓는 것도 나중에 보면 그것도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뒷북치는 것도 은혜예요.

자주 뒷북을 쳐봐야 앞 북도 치게 된다니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다루어가세요.

끝에는 “나는 안 되는구나!” 를 말하게 되어있어요.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신앙이에요.



이런 노래 있지요.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이게 복음성가예요.



아브라함도 보세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이런 꼬라지로 살아도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였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행위로 대하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백성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준 것입니다.

그 믿음이 구원을 이루어주십니다.



모든 말씀이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누가 실수하고 넘어지는 것을 가지고 왜 이럴 수가 있느냐고 손가락질 하지 말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임을 알아야 해요.

그럼에도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 좋은 신앙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쌓여갈수록 자신의 부족을 많이 알아가게 되는 것 입니다.

젊어서는 자기 부족을 몰라요.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몰라요.

꿈이 부풀어서 다 할 것 같이 생각해요.



그러다가 나이 들어가면서 아 인생이 내 맘대로 안 살아지는구나 하고 슬슬 자기를 꿈을 내려 놓게 되는 것입니다.

한끼 밥 먹는 것도 감사하다는 경지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 하면서 하루에도 수없이 사표 내 던지고 보란듯이 나오고 싶지만 처 자식 생각하면서 어휴 내가 참는다 참어 하면서 현실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분 나쁘다고 사표 던지는게 실력이 아니고 기분 나쁘더라도 꾸역 꾸역 참고 내 새끼 입에 밥이라도 넣어 주는게 실력이에요.



우리는 늙어 가면서 자기부족을 알아가요.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처음에는 산을 옮길 것 같지만 나중엔 내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유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래서 늙으면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젊은 부모는 자식의 잘못을 용서하자 못하고 윽박지르지요.

그러나 할머니는 “내 버려둬라 아이들이 다 그렇게 크지” 그렇게 말해요

어른들은 알아요.

그 아이도 철이 들 때가 있다는 것을요.



지금 내 꼬라지가 이렇다고 해서 한강 다리에 가서 뛰어내리지 마세요.

괜히 119대원들 고생 시키지 말고,,

남들 보는데서 죽는다고 지랄 떨지 말고,,

죽으려면 혼자 곱게 죽으세요.



그렇다고 진짜로 죽지 말고,

징하게 사세요.

악착같이,

예수 피 때문에 산다고 하면서 말이에요.



우리는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온전하게 살지 못해요.

하나님도 다 아세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그 은혜로 다스려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죽음이 주는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복의 조상인데도 마누라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었어요.

아스마엘도 자기 힘으로 낳았어요.

이삭을 준다고 할 때도 비웃었어요.



아브라함이 일생에서 치우고 싶은 세 사람이 있어요.

마누라외 이스마엘과 이삭이예요.

아브라함 주변에는 전부 아브라함을 쪽 팔리게 하는 사람들만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포진시켜 둔 겁니다.



마누라는 두 번씩이나 팔아 먹었으니 볼 때마다 얼굴이 화끈 거렸을 거이고,

두 자식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이 생각나고,,,

이 세 사람들은 일평생 아브라함의 불신을 드러나게 한 사람들이에요.



마누라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은 사람이 아브라함이에요.

사라도 인간이에요

마누라들이 그렇잖아요.

옛날 케케묵은 것까지 끄집어내서 달달 볶잖아요.



사라가 아브라함을 볼 때마다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요?

아브라함은 사라를 볼 때마다 자신의 과거의 잘못이 생각났을 거예요.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놓고도 기다리지 못해서 첩을 얻어서 생산한 아들이고,

이삭은 준다고 해도 못 믿은 자식이고,,

아마도 아브라함은 엄청 쪽 팔렸을 거에요.



마누라가 어허~ 하고 큰소리만 쳐도 알았어 하고 꼬리는 내렸을 거에요.

언약을 믿지 않음을 보여주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이스마엘이 혈기를 가지고 이삭을 비웃는 것을 볼 때에 아브라함은 괴로웠을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 살려 주세요!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안 됩니다! ” 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세요.

우리의 허물들을 드러내는 것들로 포진해 있지요.

우리들은 깨끗한 모습으로만 있으면 잘난 척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 못남이 드러나게 하는 것들을 포진해놓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보면서 내 불신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믿음 없음을 알게 하시고, 죄가 고발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감을 고백하게 하세요.

그래서 우리로 “너는 끝까지 머리 들지 말고 숙이고 살아!”

이것을 깨닫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허물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시어 관리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본문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울었습니다.

“아 아브라함을 이렇게 간섭하신 하나님이시구나!”



본문을 다시 봅시다.



7절에 “기운이 진하여서” 라고 하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맡겨진 생애를 다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빼 먹을 것 다 빼 먹고 데려가신다는 말이에요.

무슨 큰 일을 해서 데려가는게 아니고 온갖 실수는 다하게 하고서 하나님의 은혜로 폭 싸서 데려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할 일 다 하고 갔어요.

마치 400m 계주 하듯이 아브라함은 1번 주자로 뛴 겁니다.

이제 그 바통을 2번 주자인 이삭에게 넘겨주었어요.



하나님이 수고 했어 넌 여기까지만 하면 돼!

이제 네 아들 이삭을 데리고 일 할게! 그러는 것입니다.

세상 일을 그만 잊고 "이제 그만 퇴근해라!" 하시는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그 증거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죄의 삯으로 온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죄인이 오래도록 산다는 것이 저주인 것입니다.

죄인의 삶은 모두 슬픔과 수고뿐이에요.

그래서 죄인이 오래 사는 것은 저주인 겁니다.



시편 90편을 봅시다.



시 90:1-12=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 임이니이다 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모세가 성령의 감동으로 인생의 허망함을 말씀합니다.

인생이란 하나님 앞에서 한 경점과 같은데,,

그것도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간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 아래서 태어나서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게 되어있어요.

인생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 자체가 수고이고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태어나는 것 자체가 형벌적 의미가 담겨있어요.



쉬운 말로 하나님이 우리가 죄 아래서 태어났기에 수고와 슬픔이라는 감옥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형벌이라는 것은 정한 때가 되면 형기를 마치게 되어 있어요.

죽음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는 것과 같아요.



출근을 할 때는 퇴근이 축복인 것입니다

퇴근이 없다는 것은 지옥인 것입니다.

출근하는 자에게 가장 큰 기쁨은 퇴근하는 시간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출근하자마자 퇴근시간을 기다려요.

출근하자마자 “나는 여기 계속 있을거야” 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죄 아래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수고와 슬픔은 필연적 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끊어내는 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의 죽음은 절대로 저주가 아니에요.

죽음은 이제 고단한 삶을 쉬라는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를 아무리 머리로 잘 알아도 죽음의 의미를 자기 것이 되지 않으면 관념에 불과 합니다.

성경 지식은 빠삭한데 그 사랑과 긍휼을 맘껏 누리지 못한다면 겉도는 것입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죽음은 하나님이 최대한 예우를 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수고 더하지 말고 그만 쉬어라”

“이제 수고 많이 했으니 그만 퇴근해라”

마치 군대에 간 사람에게 제대하라는 것과 같은 기쁨의 소식인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낼 때에는 기업으로 줄 땅이 있어서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막상 가나안에 도착하니 안 주었습니다.



“네가 가야할 땅은 따로 있다” 고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다음에도 내가 가야할 곳은 이곳이 아니고 저 하늘에 있음을 알고 장막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도 나그네로 살았던 겁니다.



나그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겠어요.

가나안에서 100동안 나그네로 살았어요.

나그네 인생을 100년을 살아서 지금 175세입니다.

무슨 낙이 있겠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족보는 땅의 족보가 아니고 하늘에 있다고 하십니다.

너의 조상들이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하늘은 이 세상을 떠나야 갈수 있는 곳입니다.

이제 떠날 날이 온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늘에 있는 너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거기엔 아브라함의 조상인 예수님이 계세요.

아브라함은 죽음을 통하여 원래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그리로 가게 되어 있어요.

우린 그곳에서 왔습니다.

우리의 열조는 곧 예수그리스도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그것으로 가는 것이 성도들의 죽음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왔지만 가나안 땅을 분깃으로 주지 않고 하늘에 분깃을 바라보며 살게 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서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바라보면서 살게 한 것입니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돌아가서 사랑할 형제들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복입니다.

돌아갈 집이 없는 자는 불쌍한 자입니다.

내가 섬길 수 있는 교회가 있고,

내가 사랑할 성도가 있다는 것이 엄청난 복인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귀한 곳이에요.

그러니 교회 생활을 우습게 여기지 마세요.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면서 교회 생활을 우습게 여기는 자들이 있어요.



이런 자들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교회는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이 땅에서 쉬도록 주신 집이에요.

하나님은 이 땅에 하늘나라에 있는 우리들의 고향을 예표 하는 교회를 주신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핏 값으로 산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돈으로 산 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자기 후손들을 들여보내려고 준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핏 값으로 나그네 행인으로 살아가는 자기백성들을 위하여 교회를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수고와 슬픔을 벗어버리고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가 교회 안에 통용되면 안 됩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우리가 돌아갈 곳은 주님 품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 품을 예표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 가는 것이 즐거워야 해요.

교회 가는 것이 기다려지고 성도들이 그리워져야 해요.

성도들이 보고 싶어져야 해요.



형제가 늘 사이좋게 살 수는 없습니다.

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형제의 싸움은 칼로 물 베기에요.

우리 집사람을 보면 때로 동생하고 전화 할 때 보면 “가시나야” 하면서 싸워요.

그러면 내가 “여보 형제 있는 것을 감사 하세요” 라고 말합니다.



저는 형제가 없으므로 외로울 때가 많아요.

우리 집사람은 외로울 때 형제들한테 토해내기도 하지만 나는 토해낼 형제가 없어요.

그래서 아프면 하늘보고 울어요.

외로울 때는 달 보고 울어요.



저는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시므온이라는 늙은 선지자를 보고 감동합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으로부터 일찍 죽지 말고 메시아가 오면 보고 죽으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죽고 싶어도 못 죽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탄생 한 겁니다.



아기 예수를 품에 안게 되었습니다.

그때 시므온이 “주여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니 감사 합니다” 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이 얼마나 강동적인 줄 몰라요.

저도 이 말을 종종 읊조려요.



시므온이 예수님을 안고는 하나님이 “이제 내가 떠나도 되겠네요” 라며 감사했어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예수를 만나야 떠나요.

예수 만나기 전에는 떠나지 못해요.

하나님이 예수 만나고 오라고 하셨어요.



그러니 우리가 바로 시므온인겁니다.

시므온이 살면서 메시아에 대한 대망이 얼마나 간절하였을까요?

언제쯤 올 겁니까?” 늘 물었을 것입니다.

빨리 메시아를 만나고 가야겠는데 늙도록 그분이 안 오셨어요.



그런데 드디어 그분이 오셨어요.

만났어요.

얼마나 감격스럽겠어요.

그러니 예수를 안고 첫 마디가 이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한 겁니다.



눈을 감고 그림을 한번 그려 보세요.

예수님을 품에 안고 축복하면서 감사하는 모습을 그려 보세요.

나를 세상에서 퇴근시켜 주셔서 감사하고, 평안히 놓아주셔서 감사하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욕먹을 때가 참 많아요.

특히 안다고 하는 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면 주님 언제까지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합니까? 라고 떼를 쓸 때가 있습니다.



항상 그렇잖아요.

입안에 혀처럼 놀던 자들이 등에 칼을 꼽잖아요.

이런 일들을 당할 때마다 시므온이 참 부러워요.



2008년부터 블로그 글을 쓰면서 여기까지 끌려왔어요.

로마서를 끝내고 글을 안 쓰려고 했습니다.

안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 동안 글을 안 썼어요.



상 차려 놓고 먹기만 하면 좋은데 꼭 타박을 해요

맛이 있네, 없네,

꼭 트집 잡는 인간들이 있잖아요.

가정주부들이 그렇잖아요.?

음식을 차려놓았는데 맛이 없다고 타박하면 치워버리고 싶잖아요.



저도 블로그 닫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외부에서 자꾸 전화가 걸려옵니다.

어떤 이는 “그것 직무 유기 하는 것 아닙니까?”

어떤 이는 “요한계시록 좀 써주세요” 구체적으로 요청을 해요.

저는 “시중 서점에 가면 책 많이 있어요” 그렇게 말합니다.

그럼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싶어요” 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쓰고 있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을 쓰기위하여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를 많이 보고 듣고 해요.

나 혼자 너무 주관적으로 보지 않는가 해서 참고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안다는 것이 다 맞는 것이 아니니까 선배들의 글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책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분들은 나에게 스승과 같은 것입니다.

때로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다가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 속에 예화인데,,

어떤 목사님이 목회를 오래 해오다 지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골에 쉬려고 내려갔는데,

목사님이니까 새벽에 기도하러 교회에 갔다고 해요.



근데 어떤 할머니가 강대상을 붙잡고 “주여 정식으로 믿게 해 주세요! 정식으로 믿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더랍니다.

목사님 생각에 무슨 저런 쓸데없는 기도를 하냐고 생각하였답니다.

첫 날 가서 속이 상하여서 돌아왔는데,

다음 날 가도 그렇게 똑 같이 기도하더랍니다.



그런데 다섯째 날 되는데 머리를 때리고 가는 감동이 있더랍니다.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한 번도 성경을 정식으로 보지 않았던 것을 발견 했답니다

목사님이 거기서 “내가 그 동안 목회를 정식으로 안 했구나!” 그 할머니의 기도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는 은혜를 받아서 다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 때문에 목사님이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목사님을 위로하기 위하여 할머니로 하여금 기도를 그렇게 하게 하셨다고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가지고 일하세요.

모든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저 사람을 통하여 싸인을 주는구나” 알아야 해요.



저는 그 목사님의 예화를 듣다가 내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맞아 나도 정식으로 목회 해야겠구나.

뭐가 정식인가요?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겁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율법아래서 시작 하였습니다.

그런데 은혜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율법 아래 있는 형식들을 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예배도 안 드리고, 봉사도 치워버리고, 교회에 참석 하는 것도 치워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주둥이로만 “복음 아는데 복음 아는데” 하고 있어요.

섬기기를 하나, 봉사하기를 하나, 헌금하기를 하나, 아무 것도 안하고, 주둥이로만“ 복음 아는데” 그러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껍데기 신앙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식으로 돌아오길 바랍니다.



은혜는 율법이 없는 상태에서는 은혜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은혜는 율법과 짝입니다.

하나라도 기울면 온전한 신앙이 안 되어요.

율법이 말하는 신앙생활도 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이 사라지니까 은혜가 사라지고 마는 겁니다.

복음은 안다는데 은혜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가 돌이켜 보세요.



내 맘이 지금 말씀이 달음질하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황홀하고 기쁜가 살펴보세요,

첫사랑은 다 어찌되었는지 생각해보세요.



에베소 교회를 보세요.

초대교회 안에 영지주의자들과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서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러자 그들과 싸움을 하다가 그만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처음사랑을 놓쳐 버리고 말았어요.



옳고 그른 것은 싸울 줄 알았지만,

정작 받은 은혜와 사랑을 놓치고 급기야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저 놈 혹시 이단 아닌가 하면서 경계를 하다가 보니까 마음들이 차가운 냉골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섬김과 은혜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에베소 교회에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교리적으로도 든든히 서는 것도 맞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리의 바탕에서 사랑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자들의 모습이 사랑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는 많은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날마다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날마다 떡을 떼며 은혜로운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난 후입니다.

이게 처음 사랑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율법과 은혜라는 두 축이 있어야 해요.

마치 솔로몬 성전을 야긴과 보아스 라는 두 기둥 지탱을 해 주듯이 우리의 신앙도 율법과 은혜가 함께 공존해야만 합니다.

옛 언약이 있어야 새 언약이 있어야 해요.

이 둘은 서로를 드러내 주는 일을 해요.



그러므로 이 둘은 버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서로가 견뎌주어야 온전한 신앙 생횔이 되어요.

그런데 우리는 복음 안다고 하면서 두 기둥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속에서는 뜨거움과 기쁨 감사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부분과 많이 싸워요.

하나님 저를 제발 만져주세요.

힐링 시켜 주세요.

내가 행복하고 기뻐야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

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쿵쾅거려야 흥분되게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내가 하는 모든 일들 중에서 기쁨이 나오고 감사하고 나오고 찬송이 나오게 되어요.

그건 은혜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다뤄가는 것은 반듯이 율법과 은혜로 다뤄 가십니다.

그것을 교회에 두시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우리 신앙을 날마다 점검 받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자들은 늘 돌아보고 다시 점검해보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백성들에게 영원한 본향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샘플로 교회를 주셨어요.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위로를 받고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랑 밤새 이야기 하듯이 여기서도 재잘 저기서도 재잘거리는 소리가 나야 합니다.



큰 교회에 다니는 어떤 집사님이 그러더라고요.

큰 교회 나가니까 좋은 점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꼴 보기 싫으면 그 사람이 1부 예배 나오면 자기는 2부 예배 나가고, 그 사람이 2부 예배 나가면 자기는 1부 예배 나간다고 해요.



그것은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린다는 형식은 있을지 몰라도 정작 예배 속에 담겨 있어야 하는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지금 껍데기로만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는 것은 일하기 위하여 밥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그 말씀이 힘이 되어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듣기만 하고 일하지 않는 것은 마치 일은 하지 않고 먹기만 하면 식충이와 같아요.

착각하지 마세요.



신앙생활을 스스로 돌아보세요.

행복하세요?

여러분 스스로가 예수 안에서 행복하냐? 이 말입니다.

어떤 조건과 상관없이 환경과 상관없이 행복해야 합니다.



저는 이번에 요한계시록을 쓰면서 크게 감사와 희열을 느꼈습니다.

세상에 사도 요한이 언제 하나님 날 하나님의 보좌에 보내 달라고 했느냐 말이에요.

사도 요한이 기도했다는 말이 없어요.

사도 요한이 기도해서 하늘나라를 보았다고 하는 것은 만들어낸 말이에요



사도 요한처럼 밧모 섬에서 기도하면 하늘 문이 열린다고 말한다면 저는 하늘 문을 수없이 열어야 했어요.

하늘 문을 여는 조건은 우리의 기도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어야 해요.

하나님이 이리로 올라오라고 해야 올라 갈 수가 있어요.



사도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늘나라 올라갔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주어서 본 것입니다.

몸은 밧모 섬에 죽어가고 있는데 성령의 감동으로 위의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자신이 예수 때문에 유배를 당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그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요한은 큰 위로를 받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요한의 눈을 열어 하늘을 보게 하였듯이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사도 요한이 보고 온 그 세계를 믿어지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 세계를 믿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가 임하면 사도요한이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 세계를 보고 이 세상의 종말을 알고 자기 자신이 끝이 영광된 것임을 알았듯이, 우리들도 성경이 믿어지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저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쓸 때가 AD 90-95년 정도라고 합니다.

그 시기에는 12사도는 다 순교당한 때입니다.

계시록 6장을 보면 “일찍 목 베임 당한 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고 하지요.



사도 요한이 하늘나라 가서 앞서간 사도들을 보았을 겁니다.

베드로도 보았고, 바울도 보았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자기도 빨리 거기에 있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한은 이제 땅으로 내려가라고 합니다.

가서 이 편지를 지상에 있는 교회들에게 전해주고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천상에서 본 이야기를 전부 적어서 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한 것입니다. 아마도 사도요한은 그 편지를 전해주고 하늘나라로 기쁘게 갔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하늘의 본향을 보여 주셨어요.

그리고는 너는 이제 네가 하던 일은 이삭에게 맡기고 사라가 하던 일은 리브가에게 맡기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천국에서 쉬고 있어요.

그 세계가 죽음 이후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이 세상에서 제대를 시키기 위하여 죽음이라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저는 장례식 설교를 할 때가 제일 기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았을 때에 싸이코 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기쁘고 감사해요.

나의 달려갈 길을 다 가면 나도 그 세계로 가야하는 것이 보여 지기 때문에 죽은 분의 모습 속에서 나의 죽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죽음을 두려워 하지 마세요.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이 임하면 늙은이들에게 꿈을 준다고 해요

늙은이들에게 꿈은 천국입니다.

성령이 그 세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저 바깥 세상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조가 있는 그 세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더 오래 산다고 행복한 인생이 아니에요.

더 살아 보아야 예전과 똑같은 인생을 살게 되어요.

그러니 더 살게 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를 알게 하시고는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복입니다.



아브라함이 1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고 죽었다는 것은 완전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살고 갔다는 것입니다.

100이라는 숫자가 말하는 의미는 사람에게 주어진 일생의 기간 전부를 의미합니다.

곧 정한시간만큼 살다 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시간이 되면 거두어 가는 것입니다.

기운이 진하여 거두어 갔다는 것은 잘 익은 곡식을 추수하여 간다는 것입니다.

더 놔두면 짐승들이 다 먹으니까.

농부 되신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운이 진하여”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살만큼 다 살게 하시고 사용할 만큼 다 사용하시고 잔업 시키지 않으시고 “이제 그만 끝” 하고 정시에 퇴근을 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잔업하길 원합니까 아니면 정시 퇴근하길 원하십니까?

우리 아니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나님은 우리의 후발주자들을 통하여 일하여 가십니다.

나 혼자 일 하려고 욕심 부리지 말마세요.

나 아니라도 얼마든지 할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나만 복은 전한다 하지 마세요.

숨겨진 7천명이 있어요.



교회 안에서도 내가 모든 일을 다 하려고 하지 마세요.

교회는 협업을 해야 해요.

서로 짐을 나누어서 져야 해요.

혼자 다 하면 반드시 갑질하게 되어 있어요.



교회는 일은 서로 합심하여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가 서로를 귀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하여 일을 하든지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반듯이 가져야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를 실 정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까지는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믿음으로 묵묵히 살고 있으면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이 데려 가십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고 있다면 “아 하나님께서 나를 살게 하셨구나”

“아 아직 쓸 일이 남아 있는가 보다”

“복음 전할 일이 남아 있기에 살려 주시구나” 생각하세요.

우리의 발걸음을 이리저리 옮겨 주시는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점거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불러간다 해도 할 말이 없어요.

그럼에도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보너스로 산다고 생각하세요.

인생을 이렇게 고달프고 더럽게 살아야하나 불평하지 마세요.



각자가 살아야할 분복들이 있습니다.

그 분복대로 열심히 살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되고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감사하며 사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을 때에는 우리의 계획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보내셨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사용하시었다가 정한 때에 데려가심을 압니다. 아브라함이 죽음을 통하여서 우리의 자신들의 죽음을 같이 합쳐서 볼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버려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모두가 언약 때문임을 알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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