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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45강. 야곱과 장자권 (창 25:19-34)

by coroa 2021. 5. 23.

 

[45강. 야곱과 장자권 (창 25:19-34)]

-.정낙원 목사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창조주의 지혜와 피조물의 지혜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의 지혜로는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이해가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창조주를 이해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창조주께서 창조주의 마음을 우리에게 넣어 주셨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 까지도 통달 하시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왜 이런 식으로 일하셨는가 깨닫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죽자 그 가문을 이삭이 이어가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의 가문은 언약의 가문이지요.

언약의 가문이라는 말은 언약이 그 가문을 이끌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삭이 아브라함 가문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이삭으로 하여금 아브라함 가문을 이어가게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면 이삭이 자기 생각대로 가문을 이끌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삭은 자기 생각으로 가문을 유지하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게 이삭이 에서에게 장자권의 축복을 하고자 하는 장면으로 나타납니다.

이삭은 힘이 있는 에서가 가문을 이어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삭의 생각을 기각시키고 야곱이 장자권의 축복을 받도록 간섭 하십니다.

이삭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에서가 장자이고 힘이 있으니까 축복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는 작은 자가 장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건 언약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가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기 위하여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가 하면 창조의 방식으로 펼쳐집니다.

창조의 방식이란?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서 산 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삭의 가문도 창조의 방식으로 유지가 됩니다.

그래서 자녀도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도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경수가 끊어진 사라에게서 이삭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삭도 아버지와 동일한 모습으로 자녀를 생산합니다.



리브가가 이삭에게 시집을 오고 이십년 동안 잉태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이삭이 기도합니다.

그러자 리브가의 태가 열려서 자식을 낳게 됩니다.

이삭이 기도해서 낳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식이란 뜻입니다.

이게 창조의 방식으로 낳은 것입니다.



리브가가 쌍둥이를 잉태하자 하나님이 계시해 줍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언약에 관한 내용입니다.

옛 언약이 새 언약 안에서 완성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리브가 속에 있는 아이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 주기 위한 아이들인 것입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어떤 일을 만나도 우리 존재론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내 생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고 그러면 내 가치 챙기기에 하나님을 이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죄 입니다.

이것을 구약에서는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그 사고가 죄가 주는 사고라고 알려주고 깨드리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는 것을 안다면 인생이 가벼워져요.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겠지 ”

“죽이던지 살리던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시겠지” 라고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이게 잘 안되지요.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흥정하려고 해요.

“내가 이렇게 할 테니까 하나님은 내 소원을 들어 주어야 해요” 라고 합니다.

이런 것은 이방종교의 신앙입니다.



성령은 하나님 앞에 이런 사고가 죄라는 것이라고 알려주어요.

지금 이삭이 여기에 걸려든 겁니다.

그래서 육적으로 볼 때 멋진 아들인 에서를 가문을 잇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삭은 야곱과 에서가 어떤 언약으로 태어났는지 몰라요.

리브가만 알아요.

리브가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이삭이 큰 자를 가문을 잇는 장자로 삼고자 하니까 리브가가 나서서 장자와 차자가 뒤 바꿔지는 사건을 만들어서 이삭의 생각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움직인 겁니다.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이 죄입니다.

이삭이 인간의 힘으로 가문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이삭은 인간적인 생가으로 힘 있고 강한 자가 가문을 이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하였어요.

이게 죄가 주는 사고에요.



힘의 논리로 집을 세워가고자 하는 것은 짐승의 법칙이에요.

이 세상은 짐승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힘의 논리로 다스려집니다.

힘의 논리로 다스려가니까 내 가문도 힘 있는 가문이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본능적으로 강하고 힘세고 똑똑한 자식이 대를 잇기를 원합니다.

힘 있고 잘난 자식에게 가문을 물려주기를 원합니다.

이는 우리 가문은 영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족보에 보면 다 힘 있고 출세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리고 있어요.

우리 가문에 이러한 사람이 있었다 라고 자랑합니다.



힘의 논리로 가문을 이어가려는 것이 사람의 본능입니다.

이것이 이삭의 집안에서도 나타납니다.

이삭의 집안은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삭은 우리 가문도 우리 힘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대로 은혜로 지켜지고 있음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삭은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장자였고 강한 자이고 힘 있는 자이기 때문에 에서를 원하였습니다.



이건 모든 인간들의 보편적 가치관이에요.

우리도 유약한 야곱보다 강한 에서를 원해요.

에서 같은 자식을 원하지 야곱 같은 자식을 원하지 않아요.



에서는 멋있습니다.

혼자서도 잘해요.

그러나 야곱은 마마보이처럼 약해요.



부모들은 야곱 같은 자식을 보면 속이 터집니다.

유약한 자식을 보면 어떻게 이 정글 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할지 걱정이 되잖아요.

짐승의 법칙으로 다스려가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합니다.

어미는 늘 약한 자식에게 관심을 쏟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약함으로 하나님의 관심을 받고 사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받는 것이 복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귀찮아해요.



우리가 필요할 때만 만나 주시길 원하잖아요.

우리는 하나님 없이도 우리 스스로 살래요.

그러니 우리 인생 간섭하지 마세요.

우리가 필요 할 때만 도와주세요.

그러고 있잖아요.



그게 우리의 사고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늘 야곱의 얍복강 사건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냥 둘 수가 없으니까 우리에게 다가와서 자꾸만 태클을 걸잖아요.

넘어진 그 자리에 은혜 라는 지팡이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남기고 싶어 해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을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자기백성들을 죽음에서 아들을 통하여 죽음에서 구원하시고,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그 은혜를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역사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 속에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난 후 인간들 세상에는 하나님의 은혜성은 사라지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엔 예수를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의 힘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사건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힘의 논리로 살고자 하는 것이 죄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걸 깨트리는 일을 하세요.

힘을 빼앗아 가는 일을 하세요.



힘의 논리로 신앙생활하면 반드시 예수를 죽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힘을 깨뜨리는 일을 하십니다.

신앙생활이란? 세상의 가치를 뽑아내는 것입니다.

세상가치는 물질적인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요즘 식으로 풀어봅시다.



회사 사장이 회사를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합니다.

맏아들이 잘나고 경영도 잘하고 멋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사고나치는 못난이에요.



세상의 아비라고 한다면 당연히 맏아들 같은 자에게 회사를 물려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탕자 비유에서는 역설적으로 작은 아들에게 물려주고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가 인장반지를 끼어줍니다.

이것은 가문을 맡긴다는 뜻입니다.



탕자 비유에서 아버지의 마음은 하나님의 속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집은 재물을 늘리는 집이 아니고 기업을 확장시키는 집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은혜와 자비와 사랑과 긍휼을 강물처럼 흘러가는 집을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담고 있는 사랑과 은혜와 긍휼과 용서와 같은 것들을 집안 구석구석에 흘러가게 하는데 가장 적합한 아들이 바로 용서를 받은 둘째 아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와 긍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남기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들이 사는 것은 내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로 이 세상이 유지 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죄인들은 모르니까

자기 백성들에게는 성령을 보내 주어서 너희는 너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어요.

“내가 너를 지켜주고 있어!”

“그러니 세상 가치로 살려 하지마!”

“네가 세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자리 잡지 못한다!” 고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를 통하여 보여 주시는 것은 누가 봐도 야곱은 장자가 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을 장자로 만들어 주시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이 출생하는 모습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야곱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나왔습니다.

이것은 “나는 형의 도움이 없이는 못 삽니다!” 라는 말입니다.

야곱은 형의 도움 없이는 나는 살 수 없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하지요.

맏아들이란 형이란 뜻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우리의 형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뜻이에요.

그렇다고 예수님을 형 그러지 마세요.

뭔 말인지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그러니까 야곱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은 것은 언약적으로 말하면 신자는 야곱과 같이 “나는 예수님의 도움이 없이는 못 삽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얍복강 가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얍복강 가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지요.

야곱은 하나님을 보내 주지 않습니다.

끝까지 붙잡고 “내게 축복해주지 않으면 떠날 수 없습니다.” 씨름합니다.

이것이 야곱의 근성입니다.



이것을 나쁘게만 해석하지 마세요.

“당신이 나를 보호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를 붙잡아 주지 않으면 나는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야곱을 진짜 야곱으로 알려주기 위하여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절도록 만듭니다.



환도뼈가 부러졌다는 말은 야곱은 “힘을 빼앗긴 자”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줍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힘을 빼앗고 난 후에 그에게 지팡이 하나만 줍니다.

지팡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야곱은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지팡이는 힘을 의지하던 야곱은 죽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이스라엘 거듭난 상징물입니다.

이 지팡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힘을 의지하고 살던 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 사건 후로는 지팡이를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히브리서 11장 21절을 보면 야곱은 얍복강에서 받은 그 지팡이를 의지하고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합니다.



그것도 오른 손은 차자에게 왼 손은 장자에게 어긋맞게 하고 축복을 합니다.

야곱은 지팡이를 의지하여 장자와 차자가 바뀌는 축복을 하였던 것입니다.

야곱은 죽을 때까지 지팡이에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죽을 때까지 주관을 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야곱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힘을 의지하며 살면 안 되어요.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 죄에요.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자기 힘을 축적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힘을 빼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을 이방민족에게 붙여 고난당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힘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고 너희는 나만 바라보며 사는 자 들이야”

“내가 너희를 살려줄 께!” 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구약 광야 40년 동안에 철저히 알려 주시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에서 배운 것은 딱 하나입니다.

사람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애굽은 자기 힘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신명기 8장을 봅시다.



신 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왜 애굽에서 꺼내주셨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너희는 너희의 생존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먹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힘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나를 쌓아 두고자 했어요.



왜 쌓아 두고자 합니까?

쌓아 두어야 안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쌓아둔 만나가 그들에겐 힘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쌓아둔 만나를 썩게 만든 것입니다.



이건 힘을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왜 광야에 나와서도 힘을 가지고자 할까요?

그게 죄의 모습입니다.



죄는 독자적으로 살게 합니다.

하나님을 잊게 만듭니다.

무엇으로 잊게 하느냐? 힘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역사는 끊임없이 자기의 힘을 쌓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게 최초에 바벨탑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늘에 닿고자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인간이 쌓은 탑을 허물어 버립니다.



바벨탑 사건은 한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고 역사 속에서 계속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서 계속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서도 계속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서도 끊임없이 힘을 축적 하려고 합니다.



이 시대 교회의 타락은 물질적 부요 때문입니다.

인간은 힘을 가지만 반드시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타락은 항상 부요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잘될 때 하나님을 반듯이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은 힘을 가지지 못하도록 계속 가지치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힘을 빼게 하십니다.

힘을 빼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야속하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하여서 이 땅에서 복 받고 잘살려고 합니다.



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에게는 기복사상이 먹혀듭니까?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노리는 것이기 때문에 먹힐 수밖에 없습니다.

기복 사상을 인간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목사들이 땅의 것을 주겠다는 설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교회를 떡 주는 교회로 전락시키려고 합니다.

말씀을 주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안 모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주는 교회는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복음 복음해도 마음 속에 깔려있는 것이 떡일 것 같으면 계속 떡을 구하게 되어있습니다.

교회 안에 귀신 들린 자들이 있습니다.

점잖은 귀신 들린 자들이 참 많습니다.

예수 안 믿는 자들은 다 귀신 들린 자들입니다.



인간은 두 종류입니다.

성령을 모시고 사는 자와 귀신을 모시고 사는 자입니다.

예수 안 믿는 자들은 모두가 귀신들린 자들인데 그들의 가치관은 모두 떡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야곱의 관심은 장자권에 있습니다.

하지만 에서는 팥죽에 있습니다.

에서는 떡에는 관심이 있었으나 장자권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에서의 가치관은 떡의 가치입니다.

에서의 관심사는 오직 자기 몸뚱이 뿐이었습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다는 것은 장자궝을 무가치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에서가 무가치하게 여긴 장자권을 팥죽을 주고 있습니다.

이는 떡을 버리고 장자권을 택한 것입니다.



장자권이란? 구원과 같습니다.

야곱은 먹고 사는 것보다 구원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떡을 주고 장자권을 산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야곱과 에서는 두 부류의 사람을 총칭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백성을 에서는 마귀의 자녀를 상징합니다.

야곱 속애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속성이 담겨져 있고 에서 속에는 마귀의 자녀들의 속성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늘에 것을 사모하고 마귀의 백성은 땅에 것을 사모합니다.

그게 장자권과 팥죽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팥죽으로 장자권을 산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 것으로 하늘에 것을 얻는 것으로 나타나고 에서가 장자권을 팥죽으로 팔아버린 것은 마귀의 자녀들은 하늘에 것을 이용하여 땅에 것을 취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백성들의 이 세상에서의 삶에 모습이 야곱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입은 자들이 모습이 에서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팥죽보다 장자권이 좋았고 에서는 장자권보다 팥죽이 좋은 것입니다.

각자 좋은 것을 취한 것입니다.



야곱은 어째서 떡보다 장자권을 택하였나요?

이는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강권한 것입니다.

이걸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이 야곱으로 하여금 장자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에서는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았기에 짐승처럼 떡을 구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에서는 이 땅에서 복 받고 잘 살면 되지 무슨 천국 이야기를 하느냐 그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를 통하여 하나님 백성들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 12:16절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에서 같은 행동을 망령된 행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향하여 경고하는데 에서와 같은 사고로 살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에서와 같은 생각을 자꾸 부수는 작업을 하십니다.

우리는 에서와 같이 살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와 같은 사고를 깨버리고 야곱과 같은 사고를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받은 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복을 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물질적 가치로 세속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로 부터 태어나기 때문에 죄의 소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의 소욕과 정반대 개념인 성령의 소욕을 우리 속에 심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서 영적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우게 됩니다.

성령의 소욕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살도록 하시는 것이고,

육신의 소욕은 떡을 위하여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늘 가나안 전쟁이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합니다.

여호수아야! 네가 전쟁을 하는데 그 전쟁은 네가 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전쟁은 네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한다는 것이라고 알려주시면서 신발을 벗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네가 싸우는 것이 아니야”

“너는 못 이겨 내가 이겨주어야 해”



구원이란? 여호와가 싸워서 이기는 것을 전리품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오시어서 육신의 소욕을 제거하시는 전쟁을 하여서 그 전쟁에서 얻어진 전리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물질적 가치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한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되어주시어서 싸워주시니까 세상의 가치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로 살려는 소욕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런 간섭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없습니다.

야곱이 받은 복은 독자적으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을 붙잡고 사는 마음을 준 것입니다.

야곱을 나쁜 의미에서 “사기꾼이다” 혹은 “약탈자”라고 하는데,

그런 의미보다도 독자적으로 살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좋은 의미로 해석해 본다면

좋은 신앙은 “하나님 살려 주세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안 됩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신앙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야곱과 같이 유약한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힘을 제거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복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가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 가슴에 어떤 가치관이 존재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향하고 추구하는 가치관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한다면 어디에 있다고 할찌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믿음의 가치가 없고 세상의 가치가 있다면 환경을 보고 불안 해 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나는 동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나는 항상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영광을 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나를 알고 내가 아버지를 알면 됐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인정한다고 해서 내가 기뻐하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슬퍼하고 그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알고 나와 항상 함께 하니까 사람들이 다 나를 버린다고 해도 섭섭하거나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이 주는 담대함이에요.



성령은 자기 백성들 속에서 이 담대함을 주세요.

성령이 그 일을 하기 위하여 오시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성도는 세상 조건에 희비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주변을 자꾸 살핍니다.

수의 논리로 반응하게 됩니다.

그럼 큰 무리 속에 있으면 안심하고 적은 무리 속에 있으면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 속에 말씀이 뿌리가 내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환경으로 신앙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속에 언약의 가치를 심어주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게 심겨지면 담대해 집니다.

이 담대함이 말씀에 뿌리를 밖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뿌리가 박힌 사람은 말씀이 있으면 만족해요.

말씀 하나면 족해요.



다른 건 다 비본질이에요.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세요.

본질만 옳으면 비본질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어요.

흔들림이 없어요.



그러나 말씀이 없으면 비본질적인 것으로 흔들려요.

이런 사람들은 다수를 쫓아가요.

다수가 모인 곳에 있어야 안심을 해요.

결국 믿음으로 살지 않고 육적 가치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오직 복음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믿어지니까 사람이 많든 적든 상관치 않고 말씀 하나만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너희 안에 믿음이 있는가 확증해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거하지 않으면 너희는 버리운 자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 하나로 만족하지 않으면 가짜란 말입니다.



믿는 척 할 수는 있어도 믿음은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다 아세요.

믿는 자와 믿는 척 하는 자를 불꽃같은 눈으로 갈라내십니다.

믿고자 하는 것과 믿어지는 것은 달라요.



예수는 믿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는 사람은 예수가 저절로 술술 믿어져요.

말씀이 믿어져요.

이런 사람들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인하여 흔들리지 않아요.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간섭해 오셨는가를 알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간섭하신 것처럼 우리도 간섭하고 있어요.

그래서 성도에게 성경은 자기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리브가가 아이를 잉태하였을 때에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 먼저 주어진 언약에 나중에 주어지는 언약에 흡수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큰 자와 작은 자를 언약으로 이해하세요.



그럼 큰 자는 먼저 나온 언약을 말하고 차자는 나중에 세운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세운 언약은 구약으로서 율법이고 나중에 세운 언약은 은혜로서 새 언약을 말해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는 것은 곧 옛 언약이 새 언약 안에서 완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죄 아래 가두어진 자들을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건져내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 펼쳐 질 때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옛 언약은 죄인 만드는 언약이고, 새 언약으로 죄인을 구원을 받게 하는 언약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항상 먼저 나오는 자는 타락 하는 자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나온 자가 타락한 자를 끌어안아서 구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에서의 후손들 가운데서도 야곱 안에서 구원받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 9장을 봅시다.



암 9:11-12절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12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날이란? 예수님이 오시는 날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다윗장막을 회복하는 동시에 에돔의 남은 자들에게도 기업을 잇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에돔은 에서의 별명입니다.



그러니까 에서의 후손 중에서도 남은 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오시면 혈통적 이스라엘은 사라지고 이제는 영적 이스라엘이 생겨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에서는 버려진 자를 상징하는데 이게 신약으로 오면 이방인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옛 언약 하에서는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새 언약 하에서는 이방인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고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자기 힘으로 사는 자가 죄인임을 깨닫게 만들고 자기 힘으로 살지 않는 자들 속으로 흡수시켜서 구원 받는 것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은 항상 약한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증거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입니다.



고전 1:25-29=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강하다고 하지요.

이 말은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은 세상의 잘난 자를 들어서 사용치 않고 못난 자들을 들어서 잘난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일을 하시나요?

이는 아무도 구원을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구원이 인간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펼쳐 가는 그림은 이 땅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남기고 싶어합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자들은 이 세상의 약한 자들입니다.

약한 자는 강한 자들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약한 자들이 버젓이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약한 자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미미한 존재들이 언약을 부여잡고 살아온 역사입니다.

부흥신학이 교회를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은 교회가 힘을 갖는 것입니다.

교회가 힘을 갖는 순간 하나님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미미하게 드러납니다.

가루 서말 속에 겨자씨처럼 미미합니다.

그래서 힘의 논리로 사는 자들로부터 무시를 당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는 모습은 항상 버려지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약한 자의 모습으로 있습니다.

이것을 구약에서는 “남은 자 ”라고 합니다.

남은 자는 별 볼일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로 보았을 때 “저게 무슨 교회냐!” 라고 할 정도로 미미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지혜와 반대되게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 하나님께 붙잡힌 자들은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들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극명하게 잘 나타나 보이는 것이 다윗과 골리앗입니다

골리앗의 눈에는 다윗은 한 주먹 거리도 안 됩니다.

다윗이 말합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나아오지만 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간다” 고 합니다.



골리앗이 갖고 있는 무기는 칼과 창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눈에는 그게 무기로 안 보여요.

다윗의 눈에는 골리앗이 장수로 보잊 않아요.

개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조약돌을 들고 온 것입니다.

병사들은 모두 골리앗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조차도 다윗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형들조차도 다윗을 책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두가 불가능하게 보이는 다윗을 통하여 골리앗을 깨뜨립니다.



이것이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유대종교교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약한 자의 모습으로 있고 유대종교는 거대한 골리앗과 같은 존재로 있습니다

누가 봐도 예수님이 이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골리앗과 같은 유대종교를 깨뜨려버리십니다



예수님이 연약한 자로 오시어서 거대한 골리앗과 같은 세력들을 깨뜨렸는데 그 예수에게서 나온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있겠습니까?

다윗과 같은 연약한 모습으로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교회들이 그렇게 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 골리앗같이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타락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예수를 버리고 돈을 택하는 것입니다.

에서처럼 장자권을 버리고 팥죽을 택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의 근원과 같이 가까이 있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저주입니다.



탕자가 자기 주머니에 돈이 있을 때는 아버지 곁을 떠나 있습니다.

탕자에게는 돈이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돈이 떨어지자 비로서 아버지 집을 그리게 됩니다.

탕자에게는 수중에 돈이 다 떨어지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돈이 있으면 하나님을 떠납니다.

교회를 떠납니다.

돈이 곧 힘이고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너희들은 내 아들의 피를 주고 샀는데 어찌 내가 너희를 가만히 놓아 둘 수가 있겠느냐”라고 하시면서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사 43:1-3=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합니다.

“야곱아 너는 내 것이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비록 물 가운데 들어가더라도 불 가운데 들어가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물과 불과 같이 두려운 환경에 집어넣는다는 뜻입니다.



시편 23편의 말씀처럼 목자가 양들을 때로는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너는 내 것” 이라는 말이 믿어질 때에는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환경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꾀로 살고자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그 힘을 빼앗아 가십니다.

하나님은 야곱 속에 있는 죄를 드러내는 식으로 일합니다.

그것이 역설적으로 야곱이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환경으로 조성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두려운 환경에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간섭하심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때가 바로 시련속입니다.

물속에 넣어놓고서는 물속에 침몰당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불 속에 집어 넣고는 불에 타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 속에 들어가고 불 속에 들어가서야 비로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속에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 역설적이지요.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는 어려우면 예수 안 믿고 다 도망가야 합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다 도망가야 하는데 자의든 타의든

그런데도 지금 우리가 이렇게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였기 때문에 도망가고 싶어도 못 가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 속에 있어도 떠나지 못하고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를 통하여 유약하기 이를 데 없는 야곱에게 장자권을 얻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야곱이 장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 주세요!”

“하나님 살려 주세요!”



이것이 야곱의 복입니다.

지금 우리가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도와 주세요!”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이 복을 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언제쯤 철이 들까요?

우리는 다 털리고 난 후에야 비로서 “이게 주님의 은혜 였군요.” 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의 삶에서 다 보여주었습니다.



에서는 떡을 얻기 위하여 장자 권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장자 권을 얻기 위하여 떡을 버렸습니다.

이 세상은 떡을 힘으로 사는 곳 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떡을 버리고 장자권을 취하려고 하는 것은 야곱에게 하나님이 간섭한 증거입니다

연약한 야곱은 힘을 상징하는 떡을 모아도 시원치 않은데 버리는 것은 인간의 상식에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떡을 버립니다.

이건 야곱의 실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태중에서 이미 택하여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떡의 가치로 사는 자가 아니고 말씀의 가치로 사는 자임을 정하여 놓으셨기 때문에 떡의 가치보다 장자권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야곱의 일생이 나는 늘 떡을 버리고 장자권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끊임없이 떡의 가치로 살려고 했어요.

하지만 하나님이 계속 언약으로 살도록 간섭해 가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한번 뒤돌아 보세요.

우리는 수없이 믿음이 파선당하여야 하는 사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간섭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이력서는 화려한 것이 쓰여 지는 것이 아닙니다.

늘 깨어지고 무너지는 것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늘 가마사하고 항상 기쁨으로 찬양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점철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용서 받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용서로 살아 왔어요.

그걸 알기에 요만큼이나마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려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믿어지면 내가 못난 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못난 자임이 깨달아 졌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하염없이 작아지고 은혜를 알고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또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았네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이 있습니다.

이 곡을 쓴 사람은 죤 뉴턴(J. Newton 1779) 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본래 해군장교였으나 탈영하다가 붙잡혀서 노예선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노예선에서 탈출하고 난 후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 자기 인생을 돌아보니 은혜 그 자체였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 같은 죄인이 용서받은 것이 놀랍고 놀랍다고 신앙 고백을 글로 쓴 것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우리는 성도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인데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잘려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야곱과 에서를 보면서 우리의 실존을 살펴보아야 해요.

우리는 다 야곱입니다.

못난 자 입니다.

못났기 때문에 살기위하여 형의 발꿈치라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다시 말합니다.

예수를 일컬어 맏아들이라고 합니다.

맏아들 이라는 것은 뒤에 동생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동생이 되는 것입니다.



의미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맏형인 예수님의 발꿈치를 잡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야곱이 형의 발뒤꿈치를 잡은 것은 스스로 살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스스로 살 수 없는 자이기 때문에 복인 것입니다.

반면에 에서는 스스로 살아 갈 수 있는 자이기 때문에 저주인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살아 갈수 있는 자인가요?

아니면 하나님께 도움을 얻어야 살아 갈수 있는 자인가요?

스스로 확인해 보세요.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살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최후에 이런 고백이 나오도록 간섭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안하려고 해도 그렇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가면 유구무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의 그 은혜의 영광이 꽃이 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이러한 고백들이 여러분들의 삶속에서 많이 일어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야곱과 같이 유약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아야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주님의 바짓가랑이 놓지 않도록 주께서 간섭하여 주시옵소서. 행여 우리가 힘을 가져서 우리가 주님 놓고 살까 염려됩니다. 우리 마음 속에 세상 것 의지하지 말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살도록 간섭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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