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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51강. 피로 맺은 언약 (히 9:16-26)

by coroa 2021. 5. 5.

 

[51강. 피로 맺은 언약 (히 9:16-26)]

-.정낙원 목사

 

예전에 TV에서 유산균 음료수인 요구르트 선전 내용입니다.
청년이 할머니 요구르트를 드리면서 100세까지 오래 사세요! 라고 하자,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나 지금이 100살인데,,,
앞으로 200살까지 살아야지,
그러는 것입니다.
 
이 시대 보통 인간들의 수명으로 보면 100세를 사셨으면 많이 사셨잖아요.
그런데도 만족하지 않고 쪼글쪼글하면서도 200살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아마 100년 후에 그 할머니에게 물으면 300살 까지 살겠다고 할 것입니다.
인간이란 이처럼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러니 100세 잡수신 할머니에게도 오래 사셨네요! 라고 하면 결례가 되고 앞으로 사신 것만큼 더 사세요! 라고 해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죽을병에 걸려도 오래 살라고 하면 좋아해요.
 
창세기에 보면 므드셀라 라는 사람은 969세까지 살았어요.
지금의 수명으로 비교하면 열 배는 더 살았어요.
그런데 애석하게도 죽었다고 합니다.
속담처럼 말한다면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고 했으니 므드셀라는 지금 살아 있는 똥개만도 못한 겁니다.
 
왜 인간들은 오래 오래 살고 싶어 할까요.
이는 죽음이 그 속에 내장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죽음에 쫓기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살고자 하는 방어기재가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말이죠.
아담이 선악과를 안 따먹고 생명과를 따 먹었으면 어찌 되었을까요?
죽음이라는 단어조차도 모르고 살겠지요.
죽음을 모르면 살고자 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우리 조상 아담은 하나님이 먹으면 죽는다고 한 선악과를 따먹은 겁니다.
그래서 죽은 자가 되고 말았어요.
죽은 자인 아담의 후손들은 줄줄이 그 속에 죽음(죄)이라는 유전자를 담고 나옵니다.
므드셀라가 969세를 살고도 죽은 것이나,
10년을 살다가 죽는 아이나 다 그 속에 죽음(죄)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조상에게서 죽은 자가 나오고,
산 조상에게서는 산 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조상을 잘 만나야 된다는 말이 빈말은 아닌 듯합니다.
산 조상을 만나느냐 죽은 조상을 만나느냐 에요.
 
아담은 죽은 조상이고,
예수님은 산 조상이에요.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결정이 됩니다.
운명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니까 하나님이 어떤 운명으로 이 땅에 보내느냐 입니다.
하나님이 각자 운명대로 간섭을 하셔서 만나게 하십니다.
 
우스갯말로 자식은 부모를 잘 만나야 하고,
회사 직원은 사장님을 잘 만나야 하고,
교인은 목사를 잘 만나야 해요.
거짓선지자인 목사를 만나면 평생 동안 종처럼 개고생 해요.
돈 다 빼앗기고 몸 망가지고 평생 목사의 노예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설교를 쓰고 있는데 어떤 분이 상담전화를 했어요.
상담 내용이 목사가 성전건축을 하고자 하는데 돈을 안 내니까 목사 말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마귀라고 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따지니까 교회에서 나가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온갖 저주를 끌어 붓더래요.
 
예전에 헌금을 잘 할 대는 천사가 왔다고 하면서 칭찬을 그렇게 하더니만 성전 건축 헌금을 안 하니까 마귀라고 한다는 겁니다.
어떤 사연이 있어서인지는 모르지만 상담하신 분의 말이 액면 그대로라면 이건 아니지요.
이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목사는 거짓 종이에요.
예수님 초림 당시 말로 하면 강도인 겁니다.
 
왜 목사에게 순종하여야 하는데요.
목사가 십자가에 내 대신 죽어주었나요?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목사 말에 순종하여야 합니까.
 
올바른 말씀이면 순종을 해야지요.
그러나 복음과 상관없이 인간의 말을 한다고 하면 그건 순종 할 필요가 없지요.
저 소리가 하늘에 말인지 땅에 말인지 잘 분별하여야 해요.
 
땅에 말은 들을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그 사람은 목사도 아니고 사기꾼이니 잘 나왔다고 했어요.
하나님이 사기 당하지 말라고 집사님을 빼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섭섭해 하지 말고 도리어 감사하라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은 복음 전하는 목사와 만나도록 해 주세요.
가짜 목사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 만나고 진짜 목사도 하나님 허락 하에 만나요.
진짜와 가짜는 복음으로 판단하세요.
십자가 피로 판단하셔야 합니다.
 
요즘은 십자가 피를 말해도 또 분별을 잘 하셔야 합니다.
짝퉁이 많기 때문이에요.
복음을 빙자하여 자기 사욕을 쫓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 피를 자기 맘대로 사는 것을 면죄부라도 주는 냥 악용하고 있어요.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도 있구요.
예수 믿으면 개판으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이 있어요.
 
십자가는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시험지에요.
십자가 피를 전하면 그 순간에는 진짜이고 나중이라도 엉뚱한 말을 하면 가짜이지요.
사람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몰라요.
저도 지금은 복음 전한다고 하지만 언제 변할지 몰라요.
나도 나를 몰라요.
우리는 우리 자신도 믿지 못해요.
 
그런 의미에선 이 세상에 진짜란 없어요.
진짜는 오직 하늘에 있는데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땅에 있는 자를 선생이라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너희 스승은 하늘에 있다고 했어요.
 
암튼 우리 조상 아담은 하나님 말씀을 안 듣고 뱀에 말을 들어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음 아래서 태어나게 된 겁니다.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우리 모두 다 죽습니다.
 
죄가 뭡니까?
청개구리같이 반발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너 죽어 그러니까!
인간들은 살자고 하는 겁니다.
싫어! 나 살래! 라고 반발하는 거예요.
 
이런 죄가 바벨탑을 쌓게 만들었어요.
바벨탑은 인간의 힘으로 하늘로 올라가자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의 정성과 노력으로 천국에 가자고 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의로 영생을 얻어 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만든 모든 종교는 극락왕생 한다는 교리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육신의 죽음은 막을 수 없으니까,
이를 대체하기 위해서 만든 교리가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다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소망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종교꾼들이 본격적으로 종교 장사를 해서 먹고 살려고 소매를 걷어붙인 것입니다.
 
이제는 산 속에 있던 절간들이 시내로 들어왔어요.
서비스 업체가 되었어요.
옛날에 살기 어려운 때는 절간이 산 속에만 있었는데 이젠 동네 가운데 버젓이 들어와 있어요.
사람들이 바빠서 절에 못 오니까 절이 찾아 온 것입니다.
종교 서비스를 해 줄 테니까 대신에 돈을 내라는 것입니다.
 
승가 대학에서 매년 스님들을 배출하는데 산 속에 있는 절간엔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그래서 졸업하면 마치 목사들이 신학교 졸업하고 개척교회 하듯이 스님들도 절간을 동네 한 복판에 개척하는 겁니다.
이젠 산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절이 여러분을 찾아 가겠습니다!
영생까지 애프터서비스 해 주면서 책임져 준다고 고객을 확보하고 있어요.
 
그러자 이젠 산 속에 있는 절간에서 자기 고객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대형버스를 동원해서 고객들을 실어 나르고 있어요.
바야흐로 종교 경쟁시대에요.
잘하면 살아남고 못하면 도태되어 문을 닫아야 해요.
교회나 절간이나 동색(同色)인 것입니다.
그 놈이 그 놈인 겁니다.
 
복음을 모르면 멀리 있는 교회로 가지 말고 가까운 절간에 가면 되어요.
절에 가서 교회 감사헌금봉투에 돈을 넣고 시주하고 밥 얻어먹고 오면 됩니다.
어차피 교회나 절간이나 가르치는 것이 같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빌고 또 빌면 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부처님이면 어떻고 예수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그 조상은 마귀인데!
 
너무 노골적으로 말했는가요.
아니 전 예수님이 말씀한 그대로를 말한 것뿐이에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서 “강도의 굴혈”이라고 했지요.
아까 상담한 그 집사님에게 악담을 퍼 부은 그 목사가 바로 강도에요.
 
강도의 굴혈이란? 멀쩡한 사람 후려서 돈 빼앗아내는 소굴이란 말입니다.
그 속엔 도적놈들만 우굴 거린다는 말입니다.
도적놈이 뭡니까?
남에 주머니 강탈하는 거잖아요.
자기는 가만히 있다가 남이 벌어 놓은 것을 빼앗아 가잖아요.
 
스님들이 극락왕생을 주겠다고 불자들 주머니에서 돈을 빼앗아 내는 것이나,
목사가 천국 상급 운운하면서 교인들 돈 우려내는 것이나 뭐가 다릅니까?
절간에 바치는 것은 시주(施主)이고,
교회 바치는 것은 헌금(獻金)이라는 말만 달라요.
시주나 헌금이나 글자만 다르지 그 말이 그 말이에요.
 
기독교 방송이나 불교 방송이나 그 내용을 들어 보세요.
눈 감고 들어보면 똑 같아요.
용어만 다를 뿐이지 그 내용이 같아요.
바치면 복 받고 빌면 복 받는다는 것은 똑 같아요.
불교 방송에서도 포교를 위해서 시주하라고 하고,
기독교 방송에서도 목사가 나와서 선교해야 하니 헌금하라고 하잖아요.
절간이나 교회나 글자만 다르지 그 놈이 그 놈인 것입니다.
 
초록은 동색이에요.
부처님 오신 날에는 교회가 축하하고,
예수님 오신 날엔 절간에서 축하해 주는 겁니다.
이건 우린 한 뱃속에서 나온 한 형제라는 말이에요.
스스로 조상이 같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는 그 뿌리가 같아요.
각양의 모습으로 대문을 달고 있지만 그 근본 가르침은 동일해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한다는 사상이에요.
지극정성으로 빌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겁니다.
 
신도 눈이 있다면 착하게 사는 놈에게 복을 안주면 누구에게 주겠느냐!
그러니 착하게 살고 지극정성으로 빌고 빌면 복을 반드시 받는다는 겁니다.
복을 못 받는 것은 하늘에 쌓은 공덕이 모자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성이 부족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니 열심히 빌고 또 열심히 바치라는 것입니다.
교회 식으로 말하면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 많이 하라는 겁니다.
 
돈 내고 돈 먹기인데 왜 안하겠어요.
교회에서는 30배 60배 100배라고 하는데,
이만한 투자가 어디에 또 있겠어요.
그래서 큰 절간이든 큰 교회이든 열심히 비는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인 것입니다.
복도 받고, 영생도 받는다는데 이런 횡재가 어디 있겠어요?
귀에 달콤한 소리잖아요.
 
사람들은 부정적인 말을 싫어해요.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죽는다는 말입니다.
망한다!
저주 받는다!
지옥 간다!
 
이런 말을 하면 얼굴색이 금방 변해요.
얼굴색이 변한다는 말은 듣기 싫다는 말입니다.
왜 듣기 싫겠어요.
인간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소망을 주어야 하는데 자꾸만 재수 없는 소리만 하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겁니다.
소망적인 말을 하면 그것이 사기라 할지라도 좋아해요.
 
제가 아는 어느 집사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교회에 대한 열심과 충성이 대단해요.
자녀들도 교회에서 살다시피 해요.
그걸 자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왜 그러냐고 했어요.
자기가 다니는 단골 기도원에 어떤 부흥사가 와서 자기 자식에게 예언기도를 해 주었는데 이 아이는 앞으로 크게 될 것이라고 했대요.
자식을 위해서 열심히 하나님께 매달리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건 무당들이 립 서비스로 던지는 말인데도 그걸 하나님 약속이라도 되는 냥 믿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고등학생인 딸아이를 하교를 하고 나면 교회에 가서 공부하고 자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식을 위해서 곗돈 붓듯이 차곡차곡 헌금도 한 대요.
꿈에 부풀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비아냥 겸 참된 말 겸 그 부흥사 라는 인간이 바른 말을 했네요.
그럼 앞으로 크지요.
밥 잘 먹으면 클 겁니다.
크려면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아도 밥만 잘 먹으면 큽니다 라고 했어요.
그러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겁니다.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을 보면 주제 파악이 안 되어요.
특히 어머니들을 더해요.
제 눈엔 아무리 보아도 아닌 것 같은데 그 엄마 눈에는 천재로 보이는가 봐요.
이런 것을 일컬어 착시(錯視) 현상이라고 합니다.
착시현상을 일으키면 아무리 알려주어도 안 들어요.
도리어 욕으로 듣고 화를 냅니다.
 
이게 신앙적인 문제로 대두되면 더 무서워요.
제가 과거에 아주 잠깐 동안 장막성전 교리를 가르치는 전도사와 사귐을 가진 적이 있어요.
약 30여년 다 되어 가나 싶은데 몇 개월을 그 분과 성경 공부를 하였어요.
 
옆에 있는 기도원이어서 잠시 왕래 하였어요.
이곳에 들어가면 자기들이 대단한 무리라고 여겨요.
자기들만 제사장 반열이라고 하고 장차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면 열 고을씩 다스린다고 하면서 방방 띄웁니다.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들이라고 가르치니까 무지한 사람들은 뿅~ 가는 겁니다.
 
조금만 참자!
곧 새 날이 올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지으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라고 홀립니다.
이럴 땐 곁에서 아무리 말을 해 주어도 귀에 안 들어와요.
말하는 사람이 도리어 불쌍한 겁니다.
어떻게 이런 좋은 말씀을 못 알아듣느냐! 라고 안타까워해요.
 
전 그 당시 성경을 엄청 읽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목사님들 설교가 귀에 차지 않았어요.
너무 세속적이고 싱거운 겁니다.
그래서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된 겁니다.
항상 열심이 특심하면 이단에 빠지기 쉬워요.
 
그러다가 기도원을 다니게 되었고 거기서 장막교리를 가르치는 여 전도사를 만난 겁니다.
당시 제 나름대로 신앙의 틀은 가지고 있었어요.
비록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율법주의와 성화교리에 빠져 있었지만 하도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고 책을 많이 보아서 나름대로의 기준은 서 있었어요.
그래서 교만한 마음으로 당신이 얼마나 아는가 날 한번 꺾어 보라는 식으로 배운 겁니다.
 
처음엔 갖가지 상징과 비유들을 해석하니 솔깃하더라고요.
기성 교회에서 듣지 못하는 말이니까요.
그래서 처음엔 그 전도사에게 엄청 잘 해 줬어요.
그러니 이 분이 아마도 우리가 자기 말을 다 듣는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어느 날 공부 중에 유재열이가 재림 예수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영(靈)이 유재열이에게 임하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경기도 파주엔가 어디인가에 새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서 거기서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럼 장막성전 사람들은 전부 제사장이 되어서 다스리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말은 처음엔 안 해요.
우리 열심을 보고 다 자기들 판단에 아! 이 사람은 여기에 빠졌다 싶으면 그런 말을 해요.
제가 신앙적인 일에는 아주 열심이거든요.
갈급했으니 여기에 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열심을 낸 겁니다.
매일 저녁에 가서 성경공부를 했거든요.
쌀도 사들고 가고, 헌금도 하고, 갖가지 먹을 것들도 사다 주고 했어요.
 
그러니 그 전도사 판단에 제가 걸려들었던 것으로 보인 모양입니다.
그래서 비밀 교리를 가르친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제가 에이~ 씨팔!
이건 아니지!
뭐냐! 이것 말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인 거냐! 라고 화를 내고 나왔어요.
 
전 다행히 이건 아니라고 깨달아졌기 때문에 나왔지만 그렇지 않고 그게 만약에 진리라고 믿어지면 백약이 무효에요.
공갈을 쳐도 안 되고 협박을 해도 안 돼요.
본인이 이것이 아니다 싶기 전까진 안 되어요.
 
이런 사이비 집단에서 가르치는 것이 대 부분이 영생(永生)교리에요.
안 죽는다는 겁니다.
죽어도 예수님처럼 사흘 만에 살아나니 염려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빠져 드는 겁니다.
 
왜 이처럼 사람들이 영생교리에 빠지느냐 하면 죽음이 주는 두려움을 본능적으로 피해보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지 않기 위해서 영생으로 달려가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찬 물을 끼얹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죄 가운데 죽는다고 합니다.
하님의 진노가 머리 위에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이게 얼마나 기분 나쁜 말인 줄 아세요.
소망을 완전히 깔아뭉개는 말이에요.
오늘 본문이 그런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조금은 생소하지만 참으로 중요한 말이니 잘 들으세요.
진짜 중요한 공부가 될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는데 피로 언약을 세운다고 합니다.
 
본문을 봅시다.
 
히 9:18-22절.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세웁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독특합니다.
짐승의 피를 온 백성에게 뿌리는 것입니다.
 
장막에도 뿌리고,
그릇에도 뿌리고,
사람에게도 뿌려요.
 
피를 뿌리는 이유는 정결케 하기 위함이래요.
그러면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합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잘 보세요.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피를 뿌리고 있어요.
그런데 그 피가 “정결케 하는 피”라고 합니다.
이러면 이스라엘은 부정하다는 뜻인 거에요.
부정하기 때문에 피를 뿌려서 정결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정하다는 것은 죄를 지었단 말입니다.
죄인이란 말이에요.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죄인들 위에 정결케 하는 피를 뿌리고 있는 겁니다.
야! 이놈들아!
너희는 죄인이야!
너희는 이 피 때문에 죄에서 깨끗케 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모세가 이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피 뿌림 속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피가 없으면 너희는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알려 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 피는 곧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피를 뿌려서 이스라엘을 정결케 해 준다는 언약을 세웠어요.
앞으로 이스라엘의 죄는 피로서 정결케 된다는 언약입니다.
 
모세가 세운 언약은 “옛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율법이잖아요.
그럼 “율법도 피로 맺은 언약”이란 말이지요.
무슨 피냐 하면 “짐승의 피”에요.
 
지금 이스라엘은 율법이라는 옛 언약을 받았어요.
신약에서 보면 옛 언약이지 당시에는 그냥 언약이에요.
모세가 언약의 후손들에게 짐승의 피를 뿌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피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이 대목이 중요해요.
지금 이 피 뿌리는 언약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신다는 싸인이에요.
하나의 계시사적 사건이에요.
장차 행할 예표적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지금부터 중요하니 잘 들으세요.
 
성경은 언약의 책이에요.
그 언약의 내용이 피 입니다.
피를 통해서 죄인이 살아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피를 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피 사건이 최초로 등장한 곳이 에덴동산이에요.
에덴동산에서 최초로 피 뿌림의 사건이 일어났어요.
죄인을 위하여 희생 제물이 죽는 사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그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대신 짐승이 죽었어요.
하나님이 죄인에게 가죽 옷을 입혀주었어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죄를 가리기 위해서 짐승을 대신 죽인 겁니다.
가죽 옷을 입고 있는 것은 피 뿌림과 같아요.
 
짐승의 피 흘림은 아담과 하와의 죄사함을 위하여서 도입이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사함을 위해서 짐승이 대신 죽었어요.
아담과 하와가 입고 있는 “가죽 옷”은 곧 짐승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과 같아요.
아담과 하와는 짐승의 생명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인간을 위해서 죄 없는 짐승을 죽였어요.
죄인이 죽어야 할 그 자리에 흠 없는 짐승이 대신 죽은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건 이미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약속 안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를 봅시다.
 
엡 1:4-7절.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에베소서를 씁니다.
바울이 성령에 감동을 받고 보니 창세전에 있었던 것을 본 겁니다.
창세전이란?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이란 말이에요.
아담과 하와가 생기기 전이에요.
 
성령께서 바울을 창세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게 하였어요.
거기서 보니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간에 약속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런데 그 약속의 내용을 들여다보니 이상한 겁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를 택합니다.
그런데 성도가 흠이 있어요.
죄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죄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십니다.
 
왜 죄인인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를 만드는가 보니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들을 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가 보니 자기 피로 한다는 겁니다.
자기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게 한다는 거예요.
 
이건 아주 쇼킹한 이야기에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약속이 아들의 피로서 자기백성들의 죄를 깨끗케 한다는 내용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피를 뿌려서 정결케 하는 것은 이미 창세전에 계획된 것입니다.
 
창세전에 이미 예수님 피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는 것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짓자 다급하게 시나리오를 수정하여서 만든 내용이 아니고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일이에요.
이런 예정을 하고 만물을 만들었어요.
만물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 세운 약속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펼쳐진 마당인 것입니다.
 
만물에 속한 우리들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 하신 약속을 이루어가기 위하여 선택이 된 배우들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우린 연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장기판에 졸과 같아요.
주인이 알아서 움직여요.
 
이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어요.
예수님이 큐 싸인을 내면 마치 드라마에 캐스팅 배우들이 각각 자기가 맡은 배역을 연기하여서 극(劇)을 완성하기 위해서 분주히 움직이는 것과 같아요.
이 사실을 요한계시록에 보면 잘 나와 있어요.
어린 양이 일곱 인을 떼니까 각양의 색깔을 가진 말들이 뛰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6장을 봅시다.
 
계 6:1-8절.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4.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5. 세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세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7. 네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네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자 보세요.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늘나라를 보았어요.
마치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창세전을 본 것과 같아요.
 
사도 요한이 보니 어린 양이 있어요,
그 앞에 네 생물이 있는 겁니다.
마치 어린 양의 명령이 떨어지면!
에잇~ 하면서 수종을 들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어린 양 손에 일곱 인(印)이 있어요.
인(印)이란? 봉함된 것이란 말입니다.
어린 양이 일곱 인(印) 중에서 하나를 뗍니다.
 
그러자 그 앞에 수종 들고 있던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이리 오너라!
그러는 겁니다.
그러자 갑자기 흰 말이 휘이잉~ 하면서 나옵니다.
이에 천사가 그 말의 궁둥이를 찰싹 때리니 흰 말이 세상으로 뛰어 나가는 겁니다.
 
그러자 세상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흰 말이 뛰니 세상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겁니다.
내가 재림 예수다!
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거짓 선지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온 세상을 미혹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또 어린 양이 인(印)을 떼니 이번엔 붉은 말이 뜁니다.
그러자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민족이 민족과 싸우고,
나라와 나라가 싸우고,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좌우지간 피 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또 인(印)을 떼니 이번에는 검은 말이 뜁니다.
그러자 세상에 갑자기 기근이 일어납니다.
온 세상이 경제공황이 일어나서 실업자가 속출하고 여기저기서 굶어 죽습니다.
 
그 다음에 인(印)을 떼니 청황색 말이 뜁니다.
그러자 이번엔 온 땅에 전염병이 돕니다.
이 시대로 말하면 인간들에겐 코로나나 신종플루 같은 전염병이 돌고 소들에게는 구제역 병이 돌고 난리입니다.
이건 순차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고 동시 다발적으로 온 세상 여기저기서 각양의 모습으로 일어난다는 뜻이에요.
 
이러한 것을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종말의 징조들로 말씀을 하셨어요.
 
마 24:4-1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태복음 24장의 징조들은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사건들과 같아요.
이 세상은 하늘에서 어린 양의 지시대로 움직여지는 겁니다.
 
어린 양이 이단도 일으키고,
어린 양이 전쟁도 일으키고,
어린 양이 기근도 일으키고,
어린 양이 전염병도 일으켜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아이티에 일어난 지진도 어린 양이 일으킨 것입니다.
쓰나미가 일어난 것도 어린 양이 일으킨 것이고,
지구 곳곳에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도 어린 양이 일으키는 겁니다.
 
이걸 이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은 온전한 곳이 아니에요.
철거가 될 세상이에요.
철거가 될 세상이니까 부실 한 것입니다.
지진도 일어나고 쓰나미도 일어나고 천재지변도 일어나는 곳이에요.
 
그런데 어린 양이 꼭 잡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있어!
그러니까 만물이 조용히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 말을 안 들으니까 어린 양이 잡고 있던 만물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일어나고 각양의 천재지변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마음도 붙잡고 있다가 풀어 주니까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죄가 화산처럼 분출을 하여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시대 이러한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어린 양이 인을 떼기 때문이에요.
이제 세상을 끝장 낼 때가 되었다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24장의 종말의 징조들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세상에다 소리쳐야 해요.
예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이 세상은 불바다 되고 작살 날 것이다.
예수 믿지 않으면 다 망한다고 해야 해요.
이런 말을 하면 아마도 뒤지게 욕을 먹을 겁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런 말을 하다가 매 맞아 죽었어요.
지금도 이런 말을 하면 매 맞아 죽어요.
이단이라고 매 맞아요.
저도 이런 말 한다고 엄청 욕을 먹고 있어요.
목사가 되어서 부정적인 말을 한다고!
 
그런데 어쩝니까?
제 눈에 그렇게 보이는데!
보이니까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말 할 수밖에 없어요.
말하다가 이단소리 듣고 죽어야지요.
하나님이 빨리 좀 제대 시켜 주었으면 좋겠어요.
 
암튼 이 세상은 언제나 이러한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어요.
이는 민물이 창조가 되고 난 후 어느 시대이고 어린 양이 일하고 있었다는 말이에요.
어린 양이 일을 하고 있으니까 세상이 창조가 되고 난 후부터 흰 말도 뛰고, 붉은 말도 뛰고, 검은 말도 뛰고, 청황색 말도 뛰는 겁니다.
 
어느 시대고 거짓 종들이 일어나 사람들을 미혹하였고,
어느 시대고 전쟁도 일어나고,
어느 시대고 기근도 일어나고,
어느 시대고 역병도 일어나고,
어느 시대고 천재지변도 일어나는 겁니다.
 
지금도 거짓그리스도가 일어나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온역(전염병)이 일어나는 겁니다.
특히 인간들이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놈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일어나요.
지난번 어떤 자료에 보니 한국에만 재림 예수가 30여명이라고 해요.
 
00교 문00이도 재림 예수고,
00성전 유00이도 재림 예수고,
00님의 교회 안00이도 재림 예수고,
00지 이00도 재림 예수라고 하잖아요.
 
어떤 목사는 자칭 말씀의 아버지라고 해서 하나님 행세를 해요.
이런 놈들 밑에 똘마니들 중에서도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인간들도 있어요.
그런데 이런 놈들을 누가 일으킨다구요.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일으켜요.
 
00교 교주 문00이도 어린 양이 일으켰고,
00지 교주 이00도 어린 양이 일으켰고,
00성전 교주 00열이도 어린 양이 일으켰고,
000의 교회 00홍이도 어린 양의 허락 하에서 일어났어요.
여호와의 증인도, 몰몬교도, 무당 같은 목사들도 어린 양이 출현시켰어요.
진짜 목사도 어린 양이 일어나게 하였고, 가짜 목사도 어린 양이 일어나게 하였어요.
 
어떤 인간들은 말씀을 받은 자기가 예수라고 해요.
하여간 별 희한한 인간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어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어날 겁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가짜를 일으켜서 가짜 신자들을 추수하려는 것입니다.
가짜 그리스도가 일어난다는 것은 가짜 신자들이 많다는 겁니다.
그러니 가짜를 일으켜서 가라지들을 추수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이 일어나도 미혹을 받지 말라고 했어요.
이런 자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한 치도 거짓 없이 다 성취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들이 일어나면 예수님이 곧 오신다는 것으로 알아야 해요.
 
바울이 이미 이를 알고 경고 했어요.
 
살후 2:9-12절.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거짓 종들이 마귀와 하나 되어서 갖가지 기적을 베푼다고 합니다.
그러면 말씀에 다스림을 받지 않는 거짓 신자들은 다 따라요.
표적을 보고 뭔가 신기한 것이 있는 줄 아는 겁니다.
거기에 영생이 있는 줄 알고 따라요.
이는 하나님이 유혹을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안 따라 갈 것 같은 데에도 따르는 겁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진짜 예수님의 양들은 그 속에 있다가도 이건 아닌데! 하고 나와요.
주님께서 빼내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8장 4절에 보면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고 하는 겁니다.
이는 하나님이 빼내 준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이단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나오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이 모든 일을 누가 한다구요?
예수님이 하세요.
왜 그런가 하면 이 세상은 예수님을 주의 자리에 앉히기 위하여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아들 간에 창세전에 한 약속이 뭔가 하면 아들을 주의 자리에 앉히는 겁니다.
주란? 임금이고 주인이란 말인데 여기선 심판주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의 자리에 앉는가 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앉아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주가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증거했어요.
 
빌 2:6-11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보세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비워서 사람의 모양으로 와서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이유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창세전에 약속이 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약속대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려고 십자가에 죽은 겁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죽음에서 부활시켜서 지극히 높여 만물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어요.
그 이름이 바로 주에요.
왕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물에 주가 되게 하셔서 모든 만물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을 보면 아버지 마음이 흡족해 한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을 것을 말합니다.
 
요 12:23-2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예수님이 죽는 것이 영광을 얻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가 죽을 때가 되어서 아버지께 이제 죽겠습니다!
그랬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래 잘 죽어라!
고맙다!
내가 이미 영광을 받았다! 라고 합니다.
 
무슨 이런 아버지가 다 있습니까?
아니~! 아들이 죽는다는데 잘 죽으라니요.
고맙다니요!
이런 아버지가 세상 천지에 어디에 있나요?
그런데 있어요.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입니다.
그것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분이에요.
 
왜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영광을 받습니까?
이는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자기 백성들이 무수히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록 한 알의 밀알처럼 죽지만 그 죽음을 통해서 수많은 밀알들이 살아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고맙다고 하는 겁니다.
왜 고마워합니까?
예수님이 죽어서 죄 아래 가두어진 자기 백성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예수를 한 알의 밀알로 심어서 수많은 아들들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예수의 피 뿌림으로 자기백성들이 죄에서 정결케 된 것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제가 이걸 깨달았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하는 겁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증거하는데 있어요.
교회가 부흥해도 예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모르면 지옥에 가요.
반대로 교회에 교인들 하나 없어도 피를 알면 천국가요.
 
여러분이 목사라고 한다면 어디에다가 목회 포카스를 맞추겠어요.
당연히 피를 증거하는 일이겠지요.
그럼 이 시대 목사들이 피를 증거하지 않고 교회 부흥을 외치고 있다는 것은 복음을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그들이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여러분이 대답해 보세요.
가짜이지요.
그럼 내가 왜 그 가짜들 눈치 봐야 합니까?
눈치 볼 필요가 없지요.
그러니 이런 설교를 통해서라도 예수의 피를 모르면 무당이고 가짜라고 소리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교회 부흥을 위하여 이용되는 도구가 아니에요.
교회는 예수의 피로 값 주고 산 곳이에요.
예수님의 피는 교회의 본질이고 기초에요.
예수의 피가 없으면 그건 교회가 아니고 절간이에요.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했지요.
그럼 성경 어디를 말해도 예수님 피 이야기로 말해져야 하겠지요.
 
창세기를 비롯하여 모세오경도 예수님 피로 설교가 되어져야 하고,
역대기와 같은 역사서를 펴도 예수님 이야기로 해석되어져야 하고,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와 같은 시가서를 펴도 예수님 피 이야기로 해석되어져야 하고,
이사야나 말라기 같은 선지서를 펴도 예수님 이야기로 설교가 되어야 하고,
신약의 사도서신을 펴도 예수님 피 이야기로 설교가 되어져야겠지요.
 
성경을 가지고 교회 부흥이야기가 나오면 안 되어요.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산다는 것이 나오면 안 되어요.
그건 반칙이에요.
하지만 많은 분들이 이 반칙을 서슴치 않고 있어요.
 
이 시대 대다수가 느헤미야나 에스라를 가지고 교회 개혁을 부르짖잖아요.
특히 성화주의자들이 사도 서신서를 가지고 새 생명의 삶을 말하잖아요.
좀 고급스러운 사람이 되라고 하잖아요.
이것도 반칙이에요.
 
사도 서신서를 가지고 성화 이야기가 나오면 안 되어요.
성화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예수님 피를 보라고 준 것이에요.
왜 예수님의 피가 구원의 능력인가를 알라고 사도 서신서를 주었어요.
 
새 생명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얻은 생명이에요.
그렇다면 시종일관 예수님 피를 말해야 그 사람이 새 생명으로 사는 자예요.
내가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았구나! 를 늘 깨닫고 감격하고 감사하고 사는 것이 새 생명의 삶이에요.
이것이 바탕이 되어서 성화를 하든지 말든지 하라구요.
 
그러면 난 성화 했다고 자랑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피를 자랑하지!
난 예수님 피 때문에 용서 받고 삽니다! 라고 자랑하라고 새 생명을 주었어요.
우리더러 말씀대로 살아서 잘난 척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고요.
 
그렇다고 개판으로 막 살라는 것도 아니에요.
이걸 또 오해 하여서 복음 복음하면서 막 사는 인간들이 있어요.
실제로 제가 아는 어떤 목사는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피, 피 하면서 죄인이 죄 짓는 것이 뭐가 문제냐!
그러니 꼴리는 대로 살아라, 막 살아도 된다고 가르치고 있어요.
이게 전부 성경을 학문적으로 지식으로 알아서 그래요.
그 안에 예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목사라고 한다면 반드시 예수님 피 이야기를 해요.
반대로 성령을 받지 않은 목사는 피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해요.
복 받는 이야기를 한다든지,
교회부흥이야기를 한다든지,
성화하라고 하든지,
귀신 좇아내고 기적을 행하는 이야기를 하든지 좌우지간 피를 빗겨가요.
 
예수님에게 포카스가 맞추어지지 않는 설교를 다 다른 복음이에요.
가짜란 말입니다.
그 속에 성령이 없는 교인들은 다 그런 목사들을 따라가요.
 
그 만큼 피가 중요해요.
왜냐하면! 창세전에 예정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피”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서 창세전 이야기서부터 천지창조 이야기까지 동원한 겁니다.
 
또 진도 나가 봅시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수님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얻게 하려는 약속이 드디어 세상에 펼쳐지기 시작했어요.
창세전에 약속한 일이 실제로 에덴동산에서 벌어진 겁니다.
이게 믿어진다면 가슴이 쿵쾅거려야 해요.
드디어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자기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대하드라마가 시작이 된 겁니다.
 
에덴동산으로 필름을 되감아 돌려 봅시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창조 했을까요?
예수님지요.
아담도 예수님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영생하는 길과 죽는 길을 알려주신 겁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 먹으면 죽고 생명과 먹으면 영생한다고 알려 주었어요.
하나님이 분명하게 확실하게 알려 줬다고요.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은 아담 책임이에요.
하나님에게 뭐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곤 하나님이 뱀을 풀어 놓았어요.
뱀이 인간을 꼬십니다.
뱀의 말이 너무도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맞아서 아담과 하와는 그만 뱀의 말을 듣고 맙니다.
 
중요합니다.
어느 시대고 뱀의 말은 인간의 이성으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상식적이에요.
예수님과 유대인의 말을 들어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에서 열까지 다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상식적이었어요.
복음은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상식적이에요.
 
반면에 바리새인들의 주장은 인간의 이성으로 다 맞아요.
이걸 인본주의라고 해요.
인본주의 복음이 다른 복음이에요.
다른 복음은 다 상식적이에요.
 
새 생명의 삶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아주 상식적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너무도 타당하고 맞는 말이에요.
모든 교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런데 새 생명의 삶은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 믿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 이건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아요.
뭔가 허전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 허전함을 채우려고 성화를 외치는 겁니다.
 
성화를 외치는 순간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 눈을 떼지 못하는 것과 같아져요.
선악과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로울 만큼 탐스럽게 생겼어요.
성화는 너무도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요.
자기를 치장하기 때문입니다.
 
나! 이뻐!
나! 괜찮아!
나! 이 정도면 되겠지!
 
인간은 성화에 필이 꽂히면 영적 나르시즘에 빠져요.
오! 아름다운 나여!
복음 안다고 잘난 척하면서 남을 판단하고 꼴값 떠는 것도 영적 나르시즘이에요.
내 귀에 캔디처럼 달콤하게 속삭여요.
 
마귀가 달콤하게 귓가에서 속삭여요.
야! 너 참 대단하다!
어쩜 그렇게 신앙이 좋니!
집사님은 우리교회 보배야!
이런 소리 들으면 그냥 ~꼬~르~르~륵~ 하면서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요.
 
우리 조상이 선악과를 보는 순간 ~뿅~ 하고!
그렇게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갔어요.
아담과 하와가 뱀의 미혹에 빠져 죄를 짓고 말았어요.
죄인으로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나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갑자기 눈이 떠진 겁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운 줄 몰랐는데!
이상하게 아담과 하와가 벗은 몸이 부끄러운 겁니다.
 
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이 들면 방법이 없어요.
수치를 가려야지요.
그래서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는 눈만 뜨면 수치를 가리려고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어요.
그 좋은 에덴동산에서의 안락한 삶은 간곳이 없고 허구한 날 수치를 가리는 일에 시간을 다 빼앗기고 만 겁니다.
 
성화주의자들이 그래요.
내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 방법이 없어요.
지켜야 안심이 되어요.
 
그래서 성화주의자들은 아담과 하와처럼 눈만 뜨면 수치를 가리고자 치마를 만드는 일(말씀대로 사는 것)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거저 주는 그 평안은 다 빼앗기고 성화하여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서 눈만 뜨면 하나님 말씀 지켜야지 하면서 종처럼 오늘도 살고 있어요.
아! 불쌍하고 가련한 아담이여!
 
성화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 3장에서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과 같아요.
 
계 3: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스스로를 생각하기를 엄청 믿음이 좋은 것으로 여겨요.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처럼 아버지 명을 하나라도 어기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얼마나 노심초사 했습니까?
너무 너무 신앙이 좋은 것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럽니다.
애들아! 너희들 모습이 왜 그러니!
왜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고 있니!
그럼에도 그들은 몰라요.
아주 신앙이 최고인줄 알고 있어요.
이를 어찌하여야 합니까?
 
누가 아담의 자식이 아니랄까봐서!
우리의 아담과 하와도 성화한다고 자기 노력으로 수치를 가리려고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가렸잖아요.
치마 만드는 일이 신앙생활이 되었어요.
 
어느 날 하나님이 부릅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가슴이 철렁합니다.
어이쿠! 드디어 하나님이 찾는구나!
 
나무 뒤에 숨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에!
하나님이 너 왜 나무 뒤에 숨었는데!
누가 너보고 벌거벗었다고 뭐라고 하더냐!
???
이리 와 봐라!
 
하나님 눈에 들어온 아담과 하와의 몰골은 물에 빠진 생쥐같이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고생고생해서 만들어 입은 무화나무 잎 치마를 확 걷어 내고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수치를 가려줍니다.
이는 죄의 수치는 흠 없는 제물의 피로 가려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 사건을 창세전 약속으로 돌아가 봅시다.
에베소서에서 말씀하신대로라면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죽어준 짐승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죽 옷으로 수치를 가린 것은 예수님의 피로 죄를 가린 셈이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피가 곧 죄로 인하여 죽은 자에게 뿌려짐으로서 죄인들의 죄가 사함을 입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세요.
저만 황홀해 하고 흥분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지요.
여러분도 황홀하고 흥분이 되어야 해요.
가슴이 쿵쾅거리지요.
 
피 뿌림 이야기를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해 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피를 뿌리고 언약을 세우지요.
정결케 하는 피 이지요.
그럼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뿌린 피는 죄사함을 위하여 뿌리는 피가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을 죽은 자로 보고 있는 겁니다.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해요.
죽은 자란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죄인을 정결케 하려고 피를 뿌리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죽은 자에요.
죄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피를 뿌리라고 한 겁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를 위해 대신 죽은 짐승처럼 짐승을 잡아서 피를 뿌리고 있는 겁니다.
죽은 자들 위에 죄인을 위해 대신 죽은 제물의 피가 뿌려져서 그들을 살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앞으로 언약!
그러면 창세전 언약을 기억하세요.
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 주신다는 그 언약!
내가 죄사함을 입은 것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주어지는 그 언약 때문이지!
내 머리 위에 예수님의 피가 발려져 있지! 라고 생각하란 말이에요.
 
모세가 피 뿌림을 가지고 언약을 체결하지요.
이스라엘이 받은 언약이 뭡니까?
율법이잖아요.
율법을 일컬어 옛 언약이라고 하잖아요.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지요.
그런데 그 율법을 받는 이스라엘 위에 피를 뿌렸어요.
이는 곧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 피를 뿌린 것과 같아요.
 
그렇다면 율법은 죽은 것이란 말이에요.
율법으로는 영생이 나오지 않는단 말이에요.
율법으로 영생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행함으로는 구원 받을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뭔가 감이 잡히는가요.
 
제가 왜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성화주의자들을 공격하는지 알겠어요.
성화주의자들의 악함은 인간을 자꾸만 산 자로 만들고자 하기 때문이에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려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자신이 죄인인줄 아는 자에게 뿌려져요.
나는 죽은 자라는 것을 아는 자에게 뿌려진단 말입니다.
그럼 인간이 나는 죽은 자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율법으로 알지요.
 
다른 말로 하나님 말씀으로 알잖아요.
히브리서 4장 12절을 보면 하나님 말씀이 살아서 운동하여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하였어요.
 
히 4:12-13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보세요.
만물이 말씀 앞에서 발가벗긴바 된다고 하지요.
이는 말씀이 인간의 언행심사(言行心思) 모든 것을 해부한단 말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낱낱이 파헤친단 말입니다.
인간의 언행심사 모두를 하나님 말씀이라는 MRI 로 찍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병든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도 썩었고,
머릿속에 담고 있는 것도 썩었고,
하는 행동거지도 썩었고!
하는 말도 썩었고!
어디 온전한 데가 없어요.
 
겉으론 목사입네! 장로입네! 권사입네! 집사입네! 하지만,
그 속에 온갖 더러운 탐욕과 음욕과 거짓이 다 들어가 있어요.
성화 좋아하네!
새 생명의 삶 좋아하네!
 
죽은 놈이 뭘 한단 말입니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내 죄가 심히 크니이다! 라고 해야지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말씀을 어디로 쳐 자십니까?
똥 구녕으로 쳐 먹습니까?
바울이 버렸던 배설물(똥)과 같은 말씀대로 사는 신앙생활이 새 생명의 삶이라고 합니까?
그러니 입만 열면 인간 자랑이라는 똥냄새가 진동을 하는 겁니다.
 
교회마다 똥을 모은다고 경쟁하고 있어요.
우리 교회는 이런 일 한다!
우리 교회 누가 나온다!
난 뭐 했다!
전부 인간들 자랑만 난무하잖아요.
 
여러분!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잘 알지요.
바리새인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말씀대로 살았어요.
요즘말로 성화신앙생활을 했다구요.
 
그런데 신앙을 판정하는 심판관이 너 틀렸어 지옥으로 가!
그랬단 말입니다.
심판관이 틀렸다고 하면 틀린 겁니다.
 
성화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에요.
정답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앙의 본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정답은 예수 피에요.
 
축구하다가 골을 넣어도 심판이 오프사이드라고 하면 노골이에요.
그거 따지면 퇴장 당해요.
심판이 노 골이라고 하면 노 골인 겁니다.
 
지금 예수님이 성화주의자였던 바리새인을 틀렸다고 합니다.
그럼 틀린 거예요.
토 달지 마세요.
그러니 성화하려고 하지 말고 말씀 앞에서 난 죄인이구나! 를 아세요.
난 죽은 자이구나! 를 아세요.
 
참 재미있는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자기가 죽은 자라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자기에게 의미를 두지 않아요.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말씀을 지켜도 그걸 신앙이라고 내어 놓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건 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의는 오직 예수님 피에만 잇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씀대로 사나 안 사나 난 죽은 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피를 뿌려 주세요! 라고 해요.
 
그러나 예수 밖에 있는 자는 자기가 산 자라고 믿어요.
그래서 자기가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는 겁니다.
마치 유대인들처럼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고 해요.
 
아니 아까 율법을 받을 때 피를 뿌렸다고 했잖아요.
이는 너희는 죄인이다!
너희는 죽은 자 라는 의미로 뿌렸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율법 앞에서 주여 난 죽은 자입니다! 라고 해야 율법을 바로 아는 자에요.
말씀 앞에서 주여 난! 죽은 자이네요! 라고 해야 성령을 받은 성도에요.
 
그런데 성화주의자들은 자기가 산 자라고 우기는 겁니다.
이는 성령을 못 받았다는 증거인 겁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의 생명으로 삽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요.
난 죄인인데 예수님의 희생으로 삽니다! 라고 한다구요.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자기 생명을 죽음에 넘겨준다고 했어요.
 
고후 4:10-11절.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항상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을 짊어지고 산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자기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비록 예수 안에선 산 자가 맞지만 죽음에 넘겨주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예수 안에서 산 자가 맞다!
하지만 내가 사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을 알 때 나타나요.
그래서 난 살았다! 라고 살지 않고 난 죽은 자입니다! 라고 산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헷갈리기 쉬우니 곰곰이 씹으세요.
 
그러니 성화주의자들처럼 우리는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어서 산 자가 되었으니 이제부터 의로운 자로서 하나님 말씀대로 삽시다! 라고 하면 이건 자기 병을 도리어 감추는 꼴이 되고 말아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아! 나는 이래서 죽은 자이구나!
그래서 예수님이 날 위해 대신 죽어 주셨구나! 라고 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예수의 증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휴~ 어려워!
이해되시지요.
 
자기 죄를 감추게 하는 놈이 누군가 하면 마귀에요.
마귀가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라고 했어요.
바리새인들은 나 죄인 아니야! 라고 했어요.
 
그러자 예수님이 너희가 왜 죄인이 아닌데! 라고 물으니!
우리 말씀대로 살았잖아요!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에라이~ 이 독사새끼들아! 지옥으로나 들어가라고 저주를 한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안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서 유구무언(有口無言)이 되어야 해요.
나 행한 것 죄뿐이니! 라고 해야 해요.
그래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라고 해야 한다구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나 이뻐!
그러고 있어요.
이 등신들이!
지금은 성화주의자들이 그러고 있어요.
아이구~ 두통이야!
 
왜 말씀 몇 자락 지킨 것으로 성화했다고 시건 방을 떠느냐 말이에요.
이런 놈들을 어찌 하겠어요.
그저 튀김가루 입혀서 새우 튀기듯이 튀겨야 하겠지요.
하루라도 빨리 회개하고 돌이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새우튀김 될 겁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몰라요.
꼭 철없는 아이들이 엄마가 수제비 하려고 밀가루 반죽을 해 놓았는데 그걸 가지고 진흙 이기는 장난을 하는 것과 같아요.
온 손과 발과 얼굴에 밀가루 범벅을 하고선 엄마 나 잘했어! 한다구요.
 
이걸 어찌해야 합니까?
그냥 확!
더 이상은 여러분이 말을 하세요.
전 그냥 확!~ 까지만 하겠습니다.
 
지금 모세가 양푼이에 피를 담아서 이스라엘 머리 위에 확 뿌리는 것은 너희들은 다 죽은 놈이야! 라는 말입니다.
이제 그 율법으로 죽은 놈이라는 것을 알라는 겁니다.
너희가 왜 죄인인 줄 알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시험 삼아 한번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지켜보세요.
산상보훈을 펴고 보세요.
지킬 만 한 것인가?
아니면 도무지 안 되는 것인가? 해 보세요.
어느 것은 지키고 어느 것은 안 되고가 없이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지 해 보세요.
 
오른 눈이 범죄하면 확 뽑아 버리고!
왼쪽 눈도 훌러덩 벗은 여인을 보고 음욕이 일어나면 확 뽑아 버리세요.
손도 발도 다 찍어 내 보세요.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 보세요.
 
아니! 그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제가 설령 성경을 잘못 해석한다고 하면 그저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대자대비(大慈大悲) 하는 마음으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셔야지요.
하나님 말씀이 그러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이단이네 삼단이네 하면서 핍박을 합니까.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라고 했는데,,,
왜 욕을 하고 핍박합니까.
그건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나야 원래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니 성화주의자들에게 이단이다 삼단이다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성화하시는 불자님들께선 그러시면 안 되지요.
다른 것은 다 지키겠는데 이건 못 지키겠습니까? 라고 할 것입니까?
하나님 다 하겠는데 저 정낙원이라는 놈은 도저히 용서 못하겠습니까? 라고 하실 건가요.
 
그럼 부모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전토도 버릴 수는 있나요?
그것도 못하겠습니까?
그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라는 것을 구하지 않겠지요?
그것도 안 됩니까?
그럼 뭐가 됩니까?
그러면서 무슨 성화한다고 깝죽댑니까?
 
그러게 제가 안 된다고 했잖아요.
안 된다고 하는데 왜 성질을 내고 지랄을 떱니까?
그 고매한 성화를 하시면서 욕을 합니까?
공든 탑이 무너지면 어찌시려구요!
 
이걸 비아냥으로 듣지 마시고 과연 그러한가 한번 살펴보세요.
사람들의 착각은 자기가 살아 있다고 생각해요.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자기 가능성으로 이해를 해요.
하나님 말씀도 자기가 지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를 데리고 해골이 있는 골짜기로 데리고 갑니다.
가서 묻기를 에스겔아! 이 뼈들이 능히 살아나겠느냐! 라고 묻습니다.
에스겔이 기가 찬 겁니다.
아니 물을 걸 물어야지요.
마른 뼊다구가 어떻게 살아난단 말입니까?
 
이건 아주 비상식적인 물음이에요.
아니~! 죽은 지 오래 된 뼈들이 어떻게 살아납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걸 살려 내시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나라!
그러니 이 뼈다귀와 저 뼈다귀가 척척 맞아서 들어맞더니 힘줄이 생기고, 근육이 생기고, 살점이 생기는 겁니다.
이건 뭐 로보캅도 아니고!
 
에스겔의 눈알이 튀어 나왔다가 들어갑니다.
이건 정상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왜 에스겔에게 이런 광경을 보여주었을까요?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이런 광경을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장차 메시야가 오면 이렇게 죽은 자들을 살려낸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죽은 해골은 예수님이 살려낼 자기 백성들이에요.
창세전에 자기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주기로 한 자기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그 백성들이 지금은 해골처럼 죽어 있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그 위에 언약의 피를 뿌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피를 뿌림 받은 자들이 여기저기서 하나 둘씩 척척 일어나요.
지금도 이런 피에 복음을 듣고 여기저기서 아멘 할렐루야! 라고 일어나고 있어요.
지금 제가 예수님의 새 언약을 증거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여기저기서 복음을 듣고 살아나잖아요.
 
미국에서도 살아나고,
호주에서도 살아나고,
중국에서도 살아나고,
일본에서도 살아나고,
발리에서도 살아나고,
캐나다에서도 살아나고!
러시아에서도 살아나고!
영국에서도 살아나고 있어요.
 
서울에서도 살아나고,
대전에서도 살아나고,
평택에서도 살아나고,
안양에서도 살아나고,
수원에서도 살아나고,
대구에서도 살아나고,
여수에서도 살아나고,
진주에서도 살아나고!
청주에서도 살아나고!
익산에서도 살아나고!
강원도 산골짜기에서도 살아나고 있어요.
숱한 분들이 살아나서 아멘! 할렐루야! 하면서 화답하고 있어요.
 
이상하게 울산 바닥에서만 안 살아나요.
아마도 여긴 내 나와바리(구역)가 아닌가봐요.
울산에서 살아나면 울산목양교회가 부흥해서 제가 타락할까봐서 그런 것 같아요.
넌 그냥 글이나 써서 인터넷에 올리면 하나님이 전 세계로 전파해서 살려 내시겠대요.
하나님이 절 더러 넌 꺼져!
그러는 것 같아요.
하나님 참 나빠요!~ 힝~
 
암튼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은 인간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배제시키면서 일을 해요.
하나님 것만 담겨져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 공로만 남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증거하는 겁니다.
즉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진정한 구원이란? 예수님 공로만 담겨져 있어야 해요.
예수님만 자랑하는 사람이라야 구원 받은 성도에요.
성령 받은 성도의 특징이 주구장창 예수님만 자랑한다는 겁니다.
그 외는 다 사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누구든지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강하게 말한 겁니다.
 
지금까지 내용은 다 이해하시겠지요.
소가 되새김질 하듯이 씹고 또 씹으면 고소할 겁니다.
예수님과 데이트 한다 생각하고 곰곰이 살펴보세요.
 
자 이제 또 난해한 이야기를 좀 살펴봅시다.
이건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기승전결(起承轉結)로 처리할게요.
 
오늘 본문 시작에 유언(遺言)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다시 본문을 봅시다.
 
히 9:16-17절.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유언이란? 죽고 나면 효력을 발생하는 말이에요.
살아 있을 땐 효력이 없어요.
죽어야 효력이 발생되어요.
 
이 말은 언약은 예수님이 죽어야 효력이 생긴단 말입니다.
왜 예수님이 죽어야 효력이 생깁니까?
이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약속을 그렇게 해서 그래요.
아들에 피로 자기백성들 죄를 사해준다고 했거든요.
 
마귀는 예수님을 죽이면 끝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겁니다.
마귀는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창세전에 언약을 몰라요.
왜냐하면! 창세전엔 마귀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마귀가 바리새인들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죽이면 율법 신앙이 견고하게 서는 줄 알았어요.
저 꼴 보기 싫은 예수만 죽이면 이제 발 뻗고 편하게 자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였어요.
 
그런데 오순절 날이 이르자 갑자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 겁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살아 있을 땐 예수님의 입 하나만 막으면 되었는데!
이제는 수천 명이 온 동네를 다니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게 생겼어요.
 
이제 온 세계에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말들이 증거되기 시작한 겁니다.
바야흐로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죄사함 받는다는 새 언약의 시대가 열린 겁니다.
예수님의 유언이 비로소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유언은 유언 한 자가 죽어야 효력이 생긴다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 하시고 나자 이제는 성령이 예수님의 피를 가지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 일을 하십니다.
인간이 어떠한가는 따지지 않아요.
예수님은 성령에게 창세전에 아버지와 약속한 구원받기로 작정한 자기 백성들의 생명책을 주어서 하나라도 남김없이 다 찾아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2천 년 전에 강림한 그 성령이 지금 저와 여러분을 찾아내서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죄사함을 주시고 살려내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한 치도 빈틈이 없이 이루어져 왔고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런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고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째 오늘 말씀을 들으니 든든하지요.
그래요.
하나님 말씀은 든든해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사람도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살이도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 것 없다고 징징거리지 마세요.
불편 하면 조금 불편한 대로 사세요.
 
예수님이 곧 오십니다.
우린 이미 부활의 세계 안에 들어와 있어요.
이미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재림을 하셨어요.
우리 안에 영적으로 천년왕국이 이루어졌다구요.
아직 실감이 안 납니까?
 
그건 말씀을 안 먹어서 그래요.
말씀을 잡숴 보세요.
그러면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주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날 겁니다.
예수님의 피에 능력이 나타나면 세상이 세피하게 보여요.
아! 세상 별거 아니네! 라고 해 진다구요.
 
우린 지금 창세전에 맺은 그 언약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어요.
창세전에 약속한 그 피를 뿌림 받았어요.
예수님이 그 약속을 위해서 세상 마지막 때 나타나서 단번에 자기 피로 천국에 들어갔어요.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당함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제 꼬라지가 말씀과 상반된 모습이지만 예수님의 피가 뿌려졌기 때문에 뻔뻔스럽게 살고 있는 겁니다.
안팎으로 더러운 것이 가득하지만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았기 때문에 뻔뻔스럽게 목사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의 피는 사람을 아주 뻔뻔스럽게 해요.
그 어떤 것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게 해 준다고요.
그래서 예수의 피가 믿어지는 성도는 하나같이 담대한 겁니다.
 
어디 이 피 한 사발 들이키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피를 한 사발 사약으로 마시고 죽었다 살아나십시오.
그러면 세상이 달리 보일 것입니다.
세상이 작아 보일 겁니다.
아! 세상 별거 아니네!
 
부디 오늘의 말씀이 깨달아져서 세상이 작아 보이는 은혜가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창세전에 이미 끝난 게임을 지금 비디오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속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는 이 사실이 늘 감격으로 다가오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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