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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49강.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두신 것들 (히 9:1-10)

by coroa 2021. 5. 3.

 

[49강.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두신 것들 (히 9:1-10)]

-.정낙원 목사

 

성막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늘에 식양을 본 따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막은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혁이란? 고친다는 말이 아니고 온전한 것이 오면 폐기되어져야 할 것이란 뜻입니다.
 
오늘은 개혁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개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들이 말하는 개혁이라는 말에 미혹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개혁 신앙이 최고의 신앙인냥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혁을 말하면 마치 성경적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러나 개혁신앙이라고 내어 놓는 것이 성경의 정신과 맞지 않아요.
 
개혁주의는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해요.
그런데 정작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꿈꾸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개혁은 세속적인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받아들여서 고치자는 겁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교회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개혁을 주장하는 교인들의 말을 들으면 한마디로 이 시대 교회는 너무도 세속적이란 겁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교회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이들이 롤 모델로 삼고 있는 교회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초대교회에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해요.
성령이 임하니 날마다 교회에 모이고 유무상통하였잖아요.
그러니 지금도 그런 교회를 만들자는 겁니다.
 
이건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구약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율법신앙으로 돌아가자는 것과 같아요.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해방되어 자신들이 망한 이유를 곰곰이 분석을 했어요.
분석한 결과 자신들이 망한 것은 율법이 해이하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해방이 되자 참신한 유대인들이 경건을 지향하는 교단을 만든 겁니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예수님 당시에 자칭 경건의 무리라고 하던 바리새파, 사두개파, 쿰란공동체, 엣세나파, 열심당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 같이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어요.
율법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각 교파마다 다르게 나타났어요.
마치 이 시대 교단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조금씩 다르듯이 나타났어요.
서로가 자기들이 정통 교리라고 하였어요.
 
이럴 때 예수님이 오셨어요.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신앙이라고 믿고 있었던 겁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이방인으로 취급하여서 상종을 하지 않았어요.
요즘 말로 신자가 아니라고 치부했어요.
 
유대인들이 율법 신앙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것은 마치 이 시대 개혁주의자들이 성경적인 교회를 만들자고 하는 것과 같아요.
영적 상황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동일해요.
어느 시대이고 인간은 동일해요.
구약의 인간이나 신약의 인간이나 동일하기 때문에 시대를 초월하여서 영적인 것들은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는 유대인들이 율법 율법하면서 예수를 죽였듯이 지금은 개혁 개혁하면서 예수님의십자가에 죽으심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유대인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킵시다! 라고 한 것이 하나님의 의를 가리는 원수 노릇을 한 것이라는 것을 몰랐듯이 지금도 목사들이 교회를 개혁합시다! 라고 하는 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가리는 십자가의 원수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하고 쉽게 설명할게요.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냐 하면 예수를 죽이는 자에요.
이 시대 언어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리는 자에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예수님의 피만이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이에요.
 
마귀는 이걸 너무도 잘 알아요.
그래서 마귀는 예수님의 초림 때이든 지금이든 예수님을 가리는 일을 하는 겁니다.
초림 땐 율법지킴으로 하나님의 의를 가렸고,
재림 땐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가려요.
 
성경이 말하는 이단은 예수를 가리는 것이에요.
초림 땐 율법으로 가렸고,
지금은 개혁주의로 가려요.
 
개혁주의 라는 말은 좋은 것이에요.
그런데 그 내용이 인본주의로 가득하기 때문에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앙 끝에 가면 예수의 피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의가 자랑이 되어지고 교회 자랑이 나와요.
 
저는 지금까지 개혁주의를 외치는 목사들 중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예수그리그도의 의를 자랑하는 목사를 만나 본 적이 없어요.
개혁을 말하는 목사들 치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말하는 목사가 없어요.
 
기껏해야 좋은 교회 만들어서 세상에 욕 먹지 말고!
좋은 교인들 만들어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자고 하는 수준이에요.
모든 설교의 포카스가 인간들의 행함에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착한 사람이 되어서 좋은 교회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지금 눈으로 보여주고 있잖아요.
서울 사0의 교회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개혁교회에요.
옥00 목사가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자고 한 것이 제자훈련이잖아요.
제자훈련이 산불처럼 온 세상의 교회에 번져서 교회마다 제자 훈련한다고 난리잖아요.
 
이것이 예수님 초림 당시 각 교파마다 자기들 방식으로의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그것을 이수한 자에게 자기들의 조직에 가입을 허락해 준 것처럼 이 시대도 교화마다 가기들의 교욱 프로그램을 이수한 자들에게만 직분자를 세우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교회에서의 신앙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가르침에 따라야 신앙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교회마다 도입을 해서 제자 훈련한다고 했잖아요.
기독교 신문이나 방송들도 사0의 교회 그러면 참신한 교회!
개혁적인 교회라고 생각하고 한국교회의 자랑이라고 떠들어 대잖아요.
많은 교회들이 앞 다투어 제자 훈련 시스템을 도입해서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있잖아요.
사0의 교회를 롤 모델로 삼아 벤치마킹한다고 난리들이잖아요.
 
그런데 사0의 교회가 하는 짓거리를 보세요.
수천억을 들여서 성전이라고 짓고 있잖아요.
이건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지은 것과 같아요.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웅장하게 지어서 우리는 이러한 일을 했다고 인간의 가치를 한껏 북돋아 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는 신성불가침한 신전이에요.
 
예수님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덧놓이지 않고 다 무너진다고 하신 것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신종 바벨탑을 쌓고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교인들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마귀의 가르침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 이름 팔아서 말이에요.
예수를 믿으라고 했더니 건물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이 시대 개혁을 외치는 목사들의 현주소에요.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개혁이 유대인들이 하던 그 짓을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2000년 전에는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킨 유대인들의 손에 예수님이 죽었어요.
지금은 개혁을 외치는 자들이 손에 예수님의 십자가 도가 가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돌아간 것이 예수님을 죽이고 만 겁니다.
율법으로 예수를 만나라고 주셨는데 도리어 율법 때문에 예수를 영접하지 못했어요.
구약의 유대인들이 율법을 잘못 해석하여서 예수님을 배척하였듯이,
이 시대 교인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원수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개혁신앙이 예수님을 두 번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교회를 만들자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것인 줄 꿈에도 몰라요.
초대교회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불 신앙인줄 몰라요.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운다는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해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개혁하여서 뜯어 고치고 자시고 할 것이 없단 말입니다.
 
개혁주의자들이 모델로 삼고 있는 초대교회도 타락하였어요.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보세요.
다 온전치 못하였어요.
이것이 죄 아래 있는 세상의 교회 모습이에요.
 
하나님은 세상의 교회를 온전하게 하시지 않았어요.
죄인들이 모여서 죄가 고발되어지도록 하였어요.
나중에 보면 다 사라져요.
하나님이 일부러 다 흩어버렸어요.
흩어진 자들이 복음을 전했지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지 않았어요.
 
교회란? 예수의 피를 증거하는 성도들의 모임이에요.
교회는 신앙고백 중심으로 세워지는 것이지 건물 중심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에요.
이처럼 예수님의 피를 믿는 성도들이 바로 음부의 권세를 이긴 교회에요.
그래서 성경에는 지상에 있는 교회는 다 사라지고 없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도 다 사라졌어요.
그러나 예수의 피를 증거한 성도는 지금도 있어요.
예수의 피로 세워진 성도는 교회를 아름답게 개혁합시다! 라고 말하지 않아요.
오로지 예수의 피만을 증거해요.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의 피를 증거하지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자고 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세우시는 교회는 성령이 성도들 안에 세워요.
이 시대 개혁을 외치는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교회가 아니에요.
인간 군상들이 모인 집단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란 말입니다.
성도의 마음에 세워지는 교회는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교회에요.
 
그러니 좋은 교회 만들자는 말에 현혹당하면 안 되어요.
과거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돌아간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게 하였듯이!
이 시대도 초대교회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예수님의 피를 가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을 좋은 교회를 만들 자거나 착한 교인들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면 안 되듯이 초대교회로 돌아가면 안 되어요.
율법의 의를 버려야 하듯이 보이는 교회도 버려야 합니다.
건축물에 미련을 가져선 안 된단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진짜 율법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면 역설적으로 율법신앙을 버려야 했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율법의 끝에 가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율법 신앙은 율법으로는 의가 없고 예수그리스도에게 의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율법을 버리란 말은 율법으로 의(義)가 안 나온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단 말입니다.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켜도 구원의 능력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했어요.
그래서 율법 외에 다른 의를 붙잡아야 해요.
율법으로 그리스도를 만나야 율법을 바로 지킨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에서 율법 외에 다른 의를 그토록 외친 겁니다.
제발 율법신앙을 붙잡지 말라고 했어요.
율법 외에 다른 의란 예수의 피를 믿는 믿음이에요.
오로지 피에요.
피!
 
대전에 사시는 어떤 집사님이 그러더군요.
이 분은 정신과 의사인데 아이에게 복음을 이렇게 설명을 하였다고 말하는 겁니다.
복음을 여섯 자로 말하면 “예수그리스도” 이고,
세 자로 말하면 “십자가”이고,
한 자로 말하면 “피” 라고 했대요.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라고 했대요.
이것 이상 간단명료한 복음은 없어요.
 
전 그 소리를 듣고 탄복했어요.
그래!
복음이란? 피야! 피!
이런 소리를 말하는 사람이 귀해요.
너무 너무 귀해요.
이 시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말하면 문둥병자 취급해요.
무슨 염병 걸린 사람처럼 대하듯이 슬슬 피하잖아요.
 
이걸 역리 현상이라고 해요.
교회가 십자가를 싫어하고,
교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싫어해요.
교회가 십자가를 가리고 있고 교인들이 예수를 밀어내고 있어요.
 
정신 똑 바로 차려야 해요.
신앙은 생명이에요.
죽고 사는 문제에는 냉정해야 해요.
말이 좋다고 해서 옳은 신앙이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마귀는 항상 짝퉁으로 진짜를 가리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개혁이라는 말에 미혹당하면 안 되어요.
 
본문이 말하는 개혁에 대하여서는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합시다.
 
사람들은 자기 행동 여하에 따라서 복과 저주가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을 것이란 기대감을 갖게 되고 악한 일을 하면 저주를 받지나 않을까 은근히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모두가 선악의 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신은 선악의 법으로 알아진 신이에요.
선악의 법으로 알아진 하나님은 선을 행한 자에겐 상을 주고 악을 행한 자에겐 벌을 주는 하나님입니다.
선악의 법에서 말하는 착함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이에요.
 
위로는 신을 공경하고,
아래로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건 율법 정신이에요.
 
모든 종교의 바탕은 한마디로 경천애인이에요.
인간들이 만든 종교는 신을 경외하는 진실 된 신심(神心)과 인간을 사랑하는 자비심(慈悲心)을 근본 교리로 가르치고 있어요.
선악의 법에서 생각할 수 있는 교리는 이것 이상 더 좋은 게 나올 수가 없어요.
 
한마디로 착하게 살아서 복을 받으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복과 저주는 인간 쪽에서 따 내는 형국이 됩니다.
인간이 복 받을 짓을 하면 신은 복을 주어야 하고 벌 받을 짓을 하면 벌을 주어야 합니다.
신은 인간들의 결정에 반응을 해 주어야만 해요.
결국 인간이 신을 움직이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을 펴면 이런 신은 가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제시한 복과 저주는 하나님이 세우신 한 인물을 통하여서 주어진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들이 알고 있는 복을 받는 정보와는 다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착함과 악함을 근거가 복과 저주가 온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을 보지 않고 한 인물을 근거로 복과 저주를 주세요.
여기에 충돌이 생기겠지요.
 
복을 천국 가는 구원이라고 봅시다.
선악의 법 아래에서는 내 쪽에서 천국에 가는 구원을 따 내고자 해요.
착하게 살아서 천국에 가려고 해요.
실제로 세상 사람들은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고 믿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착한 사람이 죽으면 좋은데 가서 편히 쉬라고 하잖아요.
연예인들이 자살을 하면 동료들이 이제 좋은데 가서 편히 잘 쉬어 그러잖아요.
이런 말을 하는 배경엔 인간의 종교성이 그대로 녹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착하게 살았으니 천국에 갔다고 믿는 겁니다.
 
선악의 법이란?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하고 있는 율법 신앙입니다.
실제로 율법 신앙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천당에 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율법 아래선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은 구원을 인간이 어떻게 살았느냐! 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을 믿느냐 안 믿느냐 로 결정합니다.
 
시편 2편은 이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어요.
 
시 2:7절.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 2:12절.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이 세상에 포고령(布告令)을 내렸어요.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고 합니다.
이건 너무 이기적이에요.
 
아무리 하나님이지만 이건 횡포에요.
자기 아들에게 입을 맞추지 않는다고 죽이는 그런 법이 어디에 있나요?
인간 쪽에서 이건 불공평하다고 하나님의 뜻을 철회하라고 얼마든지 데모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뜻을 철회할 기미가 없어요.
아들을 영접하지 않으면 죽이겠답니다.
하나님이 지목한 그 아들은 예수님이세요.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로 심판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호합니다.
융통성이라곤 파리똥만큼도 없습니다.
 
이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서 하시고자 하는 뜻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예수 이외는 남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만물이 예수를 위해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을 가지고 그 아들을 증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들에게 입을 맞추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만물을 만드신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 저주와 축복을 하겠답니다.
 
예수가 심판의 기준입니다.
여기에 어떻게 살면 됩니까?
교회 개혁하면 됩니까?
율법 잘 지키면 됩니까? 가 없어요.
너 예수 믿어! 안 믿어!
믿으면 천국이고, 안 믿으면 지옥이라는 것 밖에 없어요.
 
여기에 인간들의 생각은 들어갈 틈이 없어요.
도리어 자기 생각이 걸림돌이 되어요.
죄가 뭐냐?
자기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불순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순종은 자기 생각을 가지면 나타나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먹으라고 한 것은 먹고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안 먹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먹으라고 한 것은 안 먹고 먹지 말라는 것은 쳐 먹었어요.
그러니 죽어야지요.
아니!,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 말을 안 듣고 자기 고집대로 살고자 하면 쫓겨남을 당하여지요.
 
지옥은 전부 자기 생각을 가진 자들만 모였어요.
우수갯 소리로 일명 똑똑한 놈들만 모였어요.
전부 똑똑하다가 보니까 남의 말은 안 들어요.
그러니 전부 스스로가 왕 노릇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보면 자칭 성겨 안다고 하는 자들이 말을 안 들어요.
성경을 제대로 안다고 하면 순종을 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불순종을 하고 있어요.
이 모두가 지식으로 알아서 그래요.
학습으로 배워서 알아진 예수라서 순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알아진 예수이니까 머리는 뜨겁고 가슴은 냉골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예수 하면서도 순종을 안 하고 마귀 짓을 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교만케 하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에요.
 
신앙생활이란 단순해요.
예수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죽는다는 거에요.
뭘 할까요? 가 아니고 예수 믿으면 되어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인가 알아가야 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신과 하나님은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야 바로 섬길 수가 있어요.
 
성경은 하나님을 계시하신 책이에요.
성경이 이스라엘이라는 역사를 기록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들 속에서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을 하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하나님이 뒷방 영감처럼 하늘에서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고 드러내셨어요.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계시(啓示)사적 민족인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성경을 통하여서 배워야 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구약 이스라엘을 간섭하셨듯이 지금 우리를 간섭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보여주신 구원의 길을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구원)의 길을 알려 주셨어요.
 
창 12: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 가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인간은 다 한 통속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람을 선택함으로서 두 부류로 갈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찾아온 자와 찾아오지 않은 자로 갈라집니다.
하나님이 찾아간 자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이 찾아가지 않은 자는 버려짐을 당하게 됩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브람을 주워 온 것입니다.
 
정자 바닷가에 가면 동글동글한 몽돌이 있어요.
온 바닷가를 뒤덮고 있어요.
그 몽돌을 인간이라고 봅시다.
그런데 제가 그 바닷가를 거닐다가 몽돌 하나는 주워 왔어요.
주워 와서 제 책상에 두었어요.
 
몽돌이 제 수중에 들어 온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면 제가 주워 온 몽돌은 제게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몽돌 중에서 건져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몽돌이 언제 저 보고 주인님 절 주워 가세요! 라고 하였나요?
아니에요.
제가 일방적으로 주워왔어요.
 
지금 아브람이 그래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 간 겁니다.
즉 아브람을 주워 온 겁니다.
주워서 천국으로 데리고 갔어요.
아브람 입장에선 대박난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불합리하게 보여요.
 
이걸 법칙으로 살펴봅시다.
 
인간은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나지요.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가기 전 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선악의 법으로 살았어요.
착하게 살면 하나님께 복(구원)을 받는다고 믿었어요.
이건 아브람도 마찬가지이고 그의 부모형제도 동일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오심으로 이 법칙이 깨어지게 되었어요.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는 것이 깨어지고 만 겁니다.
이제부터 아브람에 의해서 복이 결정 된다고 합니다.
 
아브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인간 개개인의 행실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젠 한 인물중심으로 판단한다고 합니다.
아브람을 축복하면 복을 주고 저주하면 저주하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한다는 것은 아브라함을 영접한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말을 믿는다는 겁니다.
이제부터 세상 속에는 아브람의 말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아브람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브람처럼 구원을 받게 되고,
아브람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버려짐을 당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복에 조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내 말을 믿으면 복을 받고 안 믿으면 저주 받게 된다고 합니다.
아주 일방적이고 독선적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내 살과 피를 마시면 영생한다는 말과 같아요.
아브람은 장차 예수님이 하실 말을 그대로 한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을 누가 믿겠어요?
 
인간의 상식과 거리가 멀어요.
이건 인간들이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횡포로 밖에 보이지 않아요.
어떻게 자기 말을 들으면 천국에 가고,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할 수가 있나요?
그러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인간들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잠시만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 이해하지 말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입장에서 이해해 보시면 답을 금방 찾을 수가 있어요.
천국은 하나님의 집이에요.
하나님이 하나님 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만 데리고 가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 내 집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초대 하겠다는 누가 말릴 수가 있나요.
없어요.
이건 인간들도 이해를 해요.
그런데 이걸 구원 이야기로 말하면 반칙이라고 해요.
하나님의 횡포라고 지랄을 떨어요.
 
여러분은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하잖아요.
여러분 말을 안 듣는 사람과는 교제하지 않잖아요.
집들이를 하면 여러분과 친한 사람들을 초대하잖아요.
여러분은 그렇게 하는 것은 괜찮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왜 반칙이라고 하나요.
그럴 순 없어요.
 
천국은 하나님 집이에요.
하나님이 천국은 예수 믿는 자를 데리고 가시겠데요.
이걸 세상에 공표를 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하겠다고 말이에요.
 
하나님은 예수로 구원을 해요.
예수를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가 누구냐!
앞으로 나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여기저기서 믿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물론 적은 수이지만!
분명하게 믿는 자가 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착오가 없이 척척 진행되어 가고 있단 말입니다.
 
믿음이란? 이성을 떠나 있어요.
이건 뭔가 홀려야지만 생기는 겁니다.
한마디로 성령으로 뒤집어씌워야 나타나요.
믿음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어야 믿음을 받은 자에요.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은 자를 찾아내는 일을 하세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 나와 봐!
즉 내 아들을 구주로 믿는 자 나와 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여기요 하면서 손을 드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을 드는 사람들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여기에 인간의 조건은 아무도 소용이 없어요.
 
나 많이 배웠는데요!
나 부자인데요!
나 목사인데요!
나 여자인데요!
 
이러한 것들은 예수 믿는데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아요.
 
부자든 가난하든,
많이 배웠든 못 배웠든,
목사이든 절간에 중이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누구라도 예수만 믿으면 천국으로 가고 예수 안 믿으면 지옥으로 가요.
 
아주 단순해요.
그런데 이 단순한 것이 믿음을 받아야지만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선물로 주고서는 믿는 자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고 믿고 있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니야! 하나님이 날 믿어야 복을 받는다고 했어!
그러면 사람들이 반발을 하게 되겠지요.
아브라함아 네가 미쳤구나!
네가 제 정신이 아니구나!
네가 뭔데 우리가 너를 믿어야 복을 받는단 말이냐? 라고 따질 것이 아닙니까?
 
맞아요.
인간의 상식으로는 아브라함이 정신 나간 말을 하고 있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은 아브라함이 한 말이 믿어져요.
이런 사람을 믿는 자라고 해요.
믿음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말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말이 믿어지니까 믿는 거에요.
 
신약식으로 예수의 말이 믿어지니까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에요.
그래서 예수 믿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잘남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자기는 옳다고 믿고 있어요.
자기가 하는 것은 다 옳고 남이 하는 것은 다 틀렸다고 믿고 살아가요.
자기 생각을 남에게 관철시키고자 하지 남의 생각에 자신이 굴복하고자 하지 않아요.
이는 모두가 자기는 옳은 자라는 죄성 때문이에요.
 
교도소에 가 보세요.
다 자기는 억울하다고 하잖아요.
정치인들을 보세요.
뇌물 받아 쳐 먹고 걸리면 난 억울하대요.
이게 모두가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와서 신(神)을 바꾸라고 합니다.
네가 알고 있는 신은 가짜라고 합니다.
아브람은 지금까지 하나님 없이도 불편 없이 잘 살아 왔어요.
그런데 바꾸라고 합니다.
이건 불가능해요.
 
내가 알고 있는 신이 가짜라는 것은 곧 나도 가짜란 말입니다.
내가 가짜이니 가짜 신을 섬기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와서 하신 말이 그렇다는 뜻이에요.
아브람아 너 믿는 신은 가짜야 내가 진짜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예 알겠어요 하는 겁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부모친척 아비 집을 떠나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해 봅시다.
우리는 율법으로 하나님을 접근해요.
율법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우리 행실을 근거로 나아온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착한 자는 상을 주고 악한 자는 벌을 준다는 상선벌악하는 하나님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자기가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는 인과응보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신앙 속에 그대로 녹아져 있어요.
 
우린 모두가 자기의 열심과 충성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요.
이건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배운 지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였던 것과 같아요.
애굽에서 알아진 하나님은 가짜에요.
날 도와주는 하나님이에요.
 
성경에서 날 도와 주는 하나님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우상의 하나님이 광야에 나와서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으로 나타났어요.
애굽에서 알았던 하나님은 금송아지 하나님이에요.
금송아지 하나님은 인간들의 상식으로 만든 하나님이에요.
 
인간의 상식은 선악의 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요.
선악의 법은 인간의 행함을 신앙으로 내어 놓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열심과 충성을 믿음으로 내어 놓아요.
 
바리새인들이 기도를 들어보면 알 수가 있어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기들이 행한 것을 근거로 기도하고 있어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연보한 것들을 나열하였어요.
난 저기 있는 세리와 창기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은 천국에 가야하고 저기 형편없는 죄인들인 세리와 창기들은 지옥으로 가야 마땅하다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땅히 천국에 간다고 믿었던 바리새인은 지옥으로 보내고 당연히 지옥으로 가야 하는 세리와 창기들은 천국으로 보냈어요.
왜 그런가요?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로 구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인간의 조건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죄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다 죄인인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들의 행함 속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선악의 법이라고 해요.
선악의 법아래서 태어난 인간은 선악의 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밖에 없어요.
이런 섬김은 하나님이 싫다고 해요.
그러니 충돌이 생기는 겁니다.
 
아주 리얼한 비유로 말합니다.
 
어떤 집에 똥을 먹고 사는 똥강아지가 있어요.
똥 강아지에겐 똥이란 진수성찬(珍羞盛饌)이에요.
그런데 이 똥 강아지가 자기 주인도 자기들처럼 똥을 좋아 하는 줄 알고 갖은 양념 다해서 푸짐하게 한 상 가득히 차려서 올립니다.
그러자 주인이 밥상을 걷어차 버립니다.
 
이에 똥 강아지가 화를 냅니다.
주인님 너무하지 않습니까?
우린 지극정성을 들여서 밥상을 차렸는데 어찌 우리 성의를 무시하고 걷어 찰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서 주인을 물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제사로 나타났어요.
 
지금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그러고 있어요.
죄인이 선과 악이라는 행사머리 중에서 선(善)이라고 하는 착함을 골라서 한 상 가득히 차려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건 죄야! 라고 걷어차 버립니다.
그러자 인간들이 화를 냅니다.
왜 우리의 착함을 무시하느냐고!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복을 따 내고자 하였어요.
우리의 행실로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열심과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겼어요.
그러면 천국에 간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그런 신앙을 버리라고 합니다.
이젠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뭔가 해야 안심이 되는 인간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면 화가 나요.
자기 존재감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제일 기분 나쁜 게 뭔 줄 아세요.
자기가 배제 되는 겁니다.
교회에 만약 어떤 일이 생겨서 의논을 할 때 당신은 신경 쓰지 마세요! 라고 하면 고맙지가 않고 화가 나요.
이 인간들이 나를 뭘로 보느냐! 라고 화를 냅니다.
 
지금 하나님이 그러고 계세요.
우리가 하나님에게 어떻게 하면 복(구원)을 얻습니까? 라고 물으니 하나님께서 넌 꺼져!
예수가 다 할 꺼야!
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돼!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 고맙습니다!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도리어 심드렁해져서 삐져요.
이게 죄인이에요.
 
신앙생활이 뭐냐!
자기가 알고 있던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이 제시한 한 인물을 믿는 겁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인물이 예수님이잖아요.
그럼 자기에게서 눈을 떼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 ~ 예수님이 다 하셨구나!
 
예수님 때문에 내가 복을 받는구나!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심으로 내 죄가 사해졌구나!
이렇게 고마울 때가 있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래야 한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감사하기 보단 자꾸만 예수님이 하신 일에 우리 것을 보태고자 해요.
 
하나님 내가 어떻게 살까요?
내가 뭘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예수를 믿으라니까!
그러면 교인들은 하나님 저 예수 믿어요.
 
그러면서 뭘 하면 됩니까? 라고 묻는단 말입니다.
이는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난 타고난 본성 때문이에요.
하나님께 뭘 바쳐야 한다는 선악의 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하여야 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뭔가를 합니다.
그건 내가 뭔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게 하시는 뭔가에요.
이 뭔가는 우리가 뜻을 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은혜가 우발적으로 행하게 하십니다.
믿음을 받은 성도는 이걸 알아요.
 
그러나 믿음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주께서 행하게 하는 행함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뭔가 하여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 잡혀서 계속하여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 믿음을 자꾸만 무엇을 하여야 하는 것으로 정형화 하고자 하는 겁니다.
 
믿음을 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믿음은 일이 아니고 주를 사랑하고 사는 겁니다.
사랑하는 것에는 정형화 된 틀이 없어요.
마음이 감동되는 대로 행하면 되어요.
 
신앙생활에는 어떻게 살까요! 가 없어요.
그런 말이 성립이 안 되어요.
그냥 믿어지는 것으로 살면 되어요.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죽어주셨구나! 를 알게 되면 그 앎이 나로 하여금 어떤 움직임을 일으켜요.
감사하게 하든지!
교회에 충성하게 하든지!
이웃을 사랑하게 하든지!
전도하게 하든지!
연보를 하게 하든지!
이걸 야고보서에서 살아 있는 믿음에 나타나는 행함이라고 해요.
 
믿음이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게 만들어요.
이 움직임은 예수가 내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살아서 움직이면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게 만들어요.
그러니 믿음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라고 하는 것은 온통 자기가 행하여야 하는 것으로 붙잡고 있기 때문에 불신앙이 되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라는 것은 자기 행함이지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사는 것 속엔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한다는 것은 없고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지만 들어가 있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고 사는 것이 행함인 겁니다.
 
사람마다 자기 세계관이 있어요.
자기 세계관 속에는 자기 신도 들어 있어요.
자기 신앙도 들어 있어요.
 
아브람도 하나님이 찾아오기 전에는 자기 세계관이 있었어요.
아브람이 알던 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간섭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아브람이 알고 있던 세계관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집에 갑자기 재개발이 불어 닥쳤어요.
철거반원들이 들이 닥쳐서 다 때려 부수는 겁니다.
거기엔 내가 애지중지하는 것들이 가득해요.
그러니 울고불고 난리 치겠지요.
아이고! 아까워라!
저게 얼마짜리인데! 하면서 아쉬워 하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도 내가 값지게 여기는 보물단지들이 있어요.
내 열심이 있고!
낸 충성이 있고!
내 봉사와 헌신이 있어요.
 
그런데 믿음이 들이닥쳐서 내가 지금까지 신앙이라고 아끼던 내 행함이라는 보물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 때려 부수는 겁니다.
전도한 것을 의라고 붙잡고 있는 것도 때려 부수고!
연보한 것을 의라고 붙잡고 있는 것도 때려 부수고!
모태 신앙을 의라고 붙잡고 있는 것도 때려 부수고!
복음 전한 목사노릇 한 것을 의라고 붙잡고 있는 것도 때려 부수고!
50년 교회 다닌 것도 자랑거리가 아니라고 다 때려 부수는 겁니다.
때려 부순다는 말은 구원의 능력이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걸 의지하지 말라는 겁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율법에 흠이 없이 산 것도 배설물이고,
바리새파라는 정통교단에 속한 것도 배설물이고,
가말리엘 문하생이라는 좋은 신학교 나온 것도 배설물이고,
모태신앙도 다 배설물이란 것을 알았어요.
 
자기가 지금까지 목숨 바쳐 충성한 것엔 의가 없는 것이란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껍데기만 붙잡고 있었음을 알았어요.
알맹이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예수 이외는 다 버릴 것들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바울은 오직 십자가 이외는 증거하지 아니하기로 작정을 하였다고 한 겁니다.
 
사람은 익숙한 것이 좋아요.
불편해도 익숙해지면 불편함을 몰라요.
인간은 어떤 환경이든지 금방 적응하는 놀라운 생명의 집착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만든 환경을 스스로 포기 하지 않아요.
버리라고 해도 안 버려요.
그래서 하나님이 손을 대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들의 것을 다 때려 부순다는 이야기에요.
 
지금까지 신앙을 개혁한다고 합니다.
말이 좋아 개혁이지 다 때려 부순다는 말입니다.
수리해서 고치는 것이 아니고 아예 불태워 버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올라오라고 해서 하늘에 있는 것을 보여주었어요.
그리곤 하늘에 있는 식양을 따라서 이스라엘 속에 성막을 만들라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보여준 대로 성막을 만들었어요.
성막에서 섬기는 것은 하늘에 모형이에요.
그러니 성막에서 일어나는 일 속에는 하늘의 정보가 그대로 담겨져 있는 겁니다.
 
모형이란? 실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실제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모형은 아무리 잘해도 모형이지 실제가 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모형이라 하여도 실제가 올 때까진 실제처럼 여겨야합니다.
모형을 통하여서 실제를 간접적으로 맛보기 때문입니다.
 
모형을 통하여서 실제를 맛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막 속에 그려놓은 그림으로 하늘에 숨은 그림을 찾아야 합니다.
도대체 성막이 뭔가?
 
나중에 성막만 따로 공부 할 겁니다.
그 때 성막의 모든 부분을 상세하게 다룰 겁니다.
오늘은 본문중심으로만 살펴봅니다.
 
성막은 큰 의미에서 세 구분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성막을 감싸는 울타리가 있고,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뜰이 있고,
뜰을 거치면 성소가 있어요.
성소 안에 들어가면 성소(聖所)와 지성소(至聖所)가 있습니다.
 
성막은 마치 집과 같아요.
 
울타리가 있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앞마당이 있고,
마당을 거쳐서 집 안에 들어가면 안방과 거실이 있는 것과 같아요.
 
안방은 부부의 공간이고,
거실은 손님들의 공간이에요.
성소는 손님들이 거하고 거실과 같고,
지성소는 부부가 잠을 자는 안방과 같은 곳입니다.
 
오늘 본문은 집 안을 말하고 있어요.
집 안을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을 하고 있어요.
성소와 지성소는 큰 의미에선 하나이지만 세분하면 둘이에요.
마치 밖에서 집을 보면 하나인데 그 안에 들어가면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과 같아요.
 
성소는 제사장들이 매일 매일 들어가서 일하지만,
지성소는 일 년에 딱 한번 그것도 대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어요.
이는 지성소는 인간들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제사장은 우리 인간을 말하고 대 제사장은 예수님을 말해요.
물론 광의적으로는 예수님이 제사장이고 대 제사장이고 그래요.
하지만 본문에서 일반 제사장과 대제사장을 구분 할 때는 일반 제사장은 우리 성도를 말하고 대 제사장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아까 성막을 집으로 비유하면 성소는 거실과 같고 지성소는 부부의 침실과 같다고 했지요.
거실은 아무나 거하는 공간이지만 침실은 부부만 거하는 공간이잖아요.
그러니 침실은 은밀한 곳입니다.
 
부부침실과 같은 지성소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거하는 곳이에요.
지성소를 대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은 예수님만 만날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 누구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어요.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만이 만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이건 조금 후에 살펴볼게요.
 
성막은 마치 에덴동산과 같아요.
우리는 흔히 에덴동산을 하나라고 하지만 실상은 두 구분으로 나누어진 세계에요.
에덴과 동산은 구분된 곳입니다.
 
창세기를 한번 살펴봅시다.
 
창 2:8-10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잘 보시면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다고 하지요.
에덴과 동산을 구분해서 말하고 있지요.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신다고 하지요.
강물이 흐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흐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흐른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 강의 발원지가 요한계시록 22장 1절을 보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라고 합니다.
그럼 강이 발원하는 에덴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고 동산은 하나님 보좌를 감싸고 있는 궁궐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 에덴은 임금님이 거하는 곳이고 동산은 신하들이 거하는 곳과 같다는 말입니다.
 
에덴동산을 성막으로 비유한다면 에덴은 지성소와 같고 동산은 성소와 같아요.
지성소는 임금님이 거하는 전(殿)이고 성소는 신하들이 거하는 전이에요.
에덴은 부부 침실과 같고, 동산은 거실과 같아요.
 
베갯잇 송사란 말이 있지요.
이는 집안에 모든 송사는 침실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에요.
부부의 사랑을 근거로 집안이 다스려져 가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일도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이 의논해서 다 이루어져 가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쉬운 예를 듭니다.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중심은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에요.
나랏일들은 청와대에서 모든 지시가 내려와요.
 
그러니 청와대는 에덴과 같고 청와대 밖은 동산과 같아요.
이를 통틀어 에덴동산이라고 합니다.
구분을 하면 에덴과 동산으로 나누이지만 큰 틀에서 보면 하나인 겁니다.
 
성막이 그래요.
크게 보면 성막이지만 그 내면을 구분해서 보면 성막 속에 성소가 있고 지성소가 있어요.
은밀한 침실이 있고 거실이 있더란 말입니다.
 
성소엔 일반 제사장들이 들어가지만 지성소엔 대 제사장만 들어가요.
그러니 대 제사장만 침실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이는 곧 대 제사장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아무나 만나 주시는 것이 아니고 대 제사장만 만나 주세요.
 
지금 모세가 하늘에서 본 그대로를 만들었어요.
하늘에 있는 에덴동산을 보니 성막처럼 구분이 되어 있더란 말입니다.
 
그럼 성막을 분해해서 살펴봅시다.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가 있다고 했지요.
성소는 일반 제사장들이 매일 드나드는 곳입니다.
그러나 지성소는 일 년에 단 한 번만 대 제사장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지성소에 계세요.
하나님은 거기서 만나 주세요.
하나님은 일반 제사장들은 만나주지 않아요.
오로지 대 제사장만 만나주세요.
 
그럼 하나님은 만나는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셔서 하나님을 만났지요.
 
자 봅시다.
지성소는 대 제사장이 일 년에 딱 한번 들어간다고 했지요.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면 피를 앞세우고 들어가요.
피를 앞세우고 들어간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담보로 들어간다는 뜻이에요.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1-5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율법을 그림자라고 하지요.
그럼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그림자이니까 온전한 제사가 아니겠지요.
맞아요.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온전하지 않아요.
그래서 매일 매일 반복하여서 드리는 겁니다.
매일 제사를 드리면서 죄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럼 죄는 어떻게 온전히 사해지는가 하면 짐승의 죽음이 아니고 한 몸이 죽어야 해요.
그 한 몸이란? 하늘에서 온 죄 없는 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애초부터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그 한 몸이 바로 예수님이세요.
 
그러니 예수님을 상징하는 대 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 번 하나님을 만나러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들어가되 자기 몸을 제물로 해서 들어가는 겁니다.
대 제사장이 만약 흠 있는 제물의 피를 앞세우고 들어가면 즉사해요.
그러니 지성소에 대 제사장이 들어가는 것은 자기 생명을 담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일 년이라는 싸이클을 세상 끝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럼 대 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단 한 번 죽음으로서 하나님을 만나러 가셨다는 것과 같아지겠지요.
 
이로보건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셨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하나님을 만나러 가셨다는 말이 되지요.
이렇게 되면 피를 앞세우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 제사장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피를 앞세우고 하늘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간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들어간 겁니다.
 
그렇다면 지성소는 땅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것이 되지요.
맞아요.
지성소는 땅에 있는 하늘나라에요.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보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고 하였지요.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말은 천국이 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 자신이 성막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성막의 실체로 오신 거예요.
 
예수님이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고 했지요.
성막으로 비유하면 하나님이 지성소에 계시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아버지가 자기 안에 계신다고 했잖아요.
그럼 예수님 안은 지성소가 된다는 말이 되겠지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고 한 겁니다.
 
이렇게 되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본 성막이 바로 예수님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성막은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개혁이란? 진짜가 오면 버려진다는 거예요.
성막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시청각교제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셨지요.
하늘에 아버지가 계시지요.
아버지를 만나러 가셨잖아요.
그럼 지성소는 하늘에 있지요.
 
예수님이 하늘에 있는 진짜 지성소로 가셨어요.
그럼 이 땅에 있는 지성소는 더 이상 지성소가 아니지요.
성막은 더 이상 가치가 없어요.
용도 폐기 되어야 해요.
 
그래서 성막에서 섬기는 모든 것들은 비유라고 한 겁니다.
비유란? 참을 설명하기 위하여 도입된 것이에요.
하나님은 성막은 통해서 인간의 죄가 어떻게 사해지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막은 죄사함이 이루어지는 곳이에요.
죄사함이 이루어지는 성막을 이스라엘에게 주었다는 것은 너희는 죄인이라는 겁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성막을 주어서 너희는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쳐 준 겁니다.
 
이스라엘이 죄인이 아니라면 성막이 필요가 없어요.
성막은 죄인에게만 필요해요.
그런데 성막에서 일어나는 죄사함은 이스라엘 대신에 흠 없는 제물이 죽어줌으로서 일어나요.
이스라엘이 담당하여야 할 죄를 흠 없는 제물이 대신 담당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죄는 인간 스스로가 감당하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대신 담당해 주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제사를 지내면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자기 죄를 누군가가 대신 담당해 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어요.
이 사실을 잊으면 제사를 지낸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신 분을 아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에게 메시야를 보내 주신다고 했나요?
이는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담당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왜 기다려야 하느냐 하면 죄 문제를 위해서 기다려야 해요.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면 안 되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린 겁니다.
자신들은 율법적 제사를 지내고 있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믿은 겁니다.
율법적 제사는 온전치 못하고 개혁 할 때까지 잠시 맡겨둔 것이란 것을 몰랐어요.
 
성막에서 짐승 피로 드려지는 제사로는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어요.
그건 어디까지나 육체의 예법이고 개혁하여야 할 것이에요.
온전한 것이 오면 버려야 한단 말입니다.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는 율법이에요.
 
율법 신앙은 곧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와 같아요.
다른 말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개혁되어져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버려져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의문에 쓴 증서를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라고 했어요.
이런 것은 다 그리스도를 위한 그림자라고 했어요.
 
그럼 성막의 제사를 이 시대 우리의 신앙으로 살펴봅시다.
 
성막에서 일어나는 제사는 육체의 예법이라고 합니다.
육체의 예법이란 곧 육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예법은 개혁한다고 하는 겁니다.
 
개혁한다는 것은 지금 이 몸으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뭔가 바뀌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몸은 아담으로 물려받은 죄의 몸이에요.
죄의 몸으로는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천국은 죄 없는 몸이라야 갈 수가 있어요.
천국은 육이 죽은 자가 들어갈 수가 있어요.
육이 죽는다는 것은 옛 사람이 죽는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옛 사람이 죽은 사람이라야 천국에 간다는 말입니다.
말이 어려우니 잘 음미하고 소화하세요.
 
우리 옛 사람은 율법 아래서 났어요.
율법 아래선 자기 죄를 자기가 감당하여야 해요.
아들이 죄를 지었다고 부모가 대신 감옥에 갈 수가 없어요.
 
율법은 개개인과 셈을 해요.
누가 대신 책임져 주는 게 없어요.
율법 아래선 전부가 개인 개인만 있는 겁니다.
 
죄 아래선 한 몸이 되지 않아요.
한 몸이 되려면 자아가 없어야 합니다.
편의상 한 몸을 “우리” 라는 집단 혹은 조직이라고 합시다.
 
자아는 죄가 몰고 온 것이기 때문에 죄가 있는 한 없어지지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죄인이 있는 곳에는 항상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모두가 자기를 위해서 우리(한 몸, 집단, 조직)를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 있어 우리란? 자기를 위한 우리이지 우리를 위한 자기가 없어요.
즉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하여 우리를 이용한단 말입니다.
나에게 해(害)를 가하는 것이라면 우리라는 집단 속에서 뛰쳐나와요.
 
이건 복음을 안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아요.
집단과 집단이 싸울 땐 내가 속한 집단을 위하여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외부의 공격이 사라지면 여전히 집단 속에서 나로 전환이 되어요.
 
요즈음 개그콘서트에 이런 코너가 있지요.
술 쳐 먹고 파출소에 와서 1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
국가가 나를 위하여 해 준 것이 뭐가 있느냐! 라고 술주정을 하지요.
버젓이 국가에 살고 있지만 국가가 자기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면 더 이상 자기에겐 국가가 아니란 말입니다.
자기에게 유익을 줄 때만 국가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국가를 교회로 비교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 교회에 다닐 사람은 없어요.
인간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때는 반드시 자기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해요.
그러니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란 자기를 위한 것이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에요.
죄인은 남을 사랑 할 수가 없어요.
불가능해요.
 
그러니 누가 사랑한다고 하면 저 사람이 나에게 뭔가 얻어 낼 것이 있구나! 를 감지하세요.
날 이용하고자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세요.
그래야 속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말을 믿지 않는 겁니다.
사람들이 천국을 가고자 하는 것도 천국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 주는 곳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천국은 자기를 행복하게 해 주는 곳이에요.
그러니 천국에 가서도 자기로 살고 싶어하는 겁니다.
 
지난번 성탄절 전 날 저녁에 기독교방송을 보았어요.
채널을 돌리니 여러 사람이 성탄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겁니다.
그 중에 인도하는 목사가 하는 말이 서로 서로에게 인사를 시키면서 천국에 가면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그러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가서 좋은 맨션에서 산대요.
그러니 거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가 서로 서로에게 천국에 가면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라고 화답하는 겁니다.
 
이런 천국은 없어요.
이 사람은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어요.
천국은 자기가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천국은 내 몸으로 가는 곳이 아니에요.
나를 위하여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가는 겁니다.
내 몸을 위한 천국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천국이에요.
천국에는 나 라는 자아가 없어요.
 
성도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요.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것이란 말이에요.
이걸 예수 안이라고 해요.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라는 말이 성립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천국은 개인주의로 살아가는 죄인은 갈 수가 없어요.
내가 가는 곳이 아니고 예수 안에 내가 가는 곳이에요.
천국은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예수와 함께 죽은 자라야 들어갈 수가 있어요.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나는 죽었다는 말이에요.
내가 죽었으니 내게서 나오는 모든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되는 겁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지요.
 
갈 2:19-20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죽긴 죽었는데 무엇에 대하여 죽었느냐 하면 율법에 대하여 죽었어요.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내가 나를 책임질 인생이 없다는 겁니다.
더 이상 내 인생에 책임질 것이 없단 말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합니다.
예전에 나는 율법 아래 나였고!
지금의 나는 예수 안에서 나 라는 겁니다.
말이 어려우니 곰곰이 세기세요.
 
예수 안에서 나 란? 난 없는 자란 말입니다.
죽었다는 뜻이에요.
누가 죽었느냐 하면 죄 아래서 태어난 내가 죽었어요.
 
다윗이 그러지요.
자신은 모친의 뱃속에서부터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고!
이 말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죄라는 말입니다.
자기는 의를 행할 수 없는 몸이란 말입니다.
 
밧세바와 간음한 것이나 우리야를 죽인 것은 모두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게 하신 하나님의 일이란 겁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듣고 나서 우리야는 자기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래서 자기는 비록 범죄하였지만 자기 죄를 들추어내려고 하나님이 우리야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주께서 꺾은 뼈를 보고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 우리야를 죽는데 버려두었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처럼 뻔뻔스러울 수가 있나요.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통하여서 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한다고 믿잖아요.
그러나 다윗은 그게 아니란 겁니다.
도리어 죄를 짓도록 가만 두다가 죄를 짓고 나면 봐라 너는 죄인 맞잖아!
그런단 말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한국교회에선 하나님은 죄 안 짓게 한다고 가르치잖아요.
마귀가 죄 짓게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꺼꾸러 말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막아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다윗은 범죄하고 난 후 자기 실존을 분명하게 보았어요.
죄는 자기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안 겁니다.
자기 죄는 자기가 담당 할 수가 없고 누군가가 대신 담당해 주어야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러니 자기 죄 때문에 애매하게 죽은 우리야의 죽음을 보고 즐거워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우리야를 죽인 것을 합당하게 여긴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우리야를 죽인 것을 보니 죄악 중에 출생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죄가 뭐냐 하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면 자기에게 의미를 두게 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여기게 되어요.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자기가 정한 법이 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서 하루에 성경을 석장씩 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하루 석장을 보면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두 장을 보았으면 낙심하고 넉 장을 보았으면 더 뿌듯하겠지요.
 
그럼 하루 성경 석 장을 보아야 한다는 법은 누가 만든 겁니까?
자기가 만든 거지요.
이걸 신앙생활 전반에 응용해 보세요.
 
하나님 말씀이 던져 졌어요.
그러면 우린 본능적으로 지킬까! 말까! 라는 법이 작동을 합니다.
우리 안에 선악의 법이 지키면 옳고 못 지키면 그르다고 합니다.
이러면 말씀대로 살았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못 살았으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러면 나쁜 기분을 없애기 위해서 다음엔 지키고자 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안에 법이 자기를 다스리게 되는 겁니다.
이건 자기가 자기를 책임지는 인생이에요.
 
바리새인들이 이런 삶을 살았어요.
자기 행동에 따라 희비하고 살았어요.
율법을 지키면 기분이 좋고 안 지키면 불안해했어요.
 
예수님은 이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고 했던 겁니다.
내가 이 법을 십자가에서 못 박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 멍에를 매고 배우라고 한 겁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 법으로 살았어요.
자기가 말씀대로 사는 인생을 살았어요.
법이 항상 몰아친 겁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자기가 지켜야 할 법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셨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율법을 지켜야 할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이 깨달아진 겁니다.
그래서 자신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것도 그거에요.
율법은 예수님이 오실 때 까지만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란 말은 본문에선 개혁할 때까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다 폐기한단 말입니다.
이걸 도말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지금까지 하던 것을 다 없앤단 말입니다.
왜 없애느냐?
양심상 온전케 할 수 없어서 라고 합니다.
 
9-10절.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양심상 온전케 할 수 없다는 말은 율법으로는 속사람을 깨끗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제사는 육체의 예법이라고 합니다.
육체의 예법이란 한마디로 겉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란 말입니다.
 
성막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겉으로 지은 죄를 위한 제사에요.
율법은 겉에 죄를 고발해요.
율법 아래선 마음속엔 분노가 가득해도 겉으로 살인하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아요.
마음속엔 음욕이 가득해도 겉으로 간음하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아요.
그러니 속으로 범죄하는 것으로 인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요.
 
율법에선 양심에 죄는 죄로 정죄치 않아요.
율법에 속한 제사는 껍데기 죄만 씻어 내는 제사인 겁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양심상 온전한 제사가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율법신앙은 아무리 완벽해도 온전치 않아요.
 
바울이 율법에 흠이 없었다는 말은 완벽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배설물이었어요.
그러니 겉으로 아무리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도 헛것이란 말입니다.
 
율법 신앙은 기껏 해봐야 껍데기란 말입니다.
겉만 번드르르하게 치장하는 것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겉으로 성경 끼고 교회에 나와도 그 마음속에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없으면 회칠한 무덤이에요.
입술로 주여 주여 한다고 하나님은 속지 않아요.
그러니 율법 신앙은 위선으로 흐르게 되는 겁니다.
 
율법 신앙은 아무리 잘해도 겉만 가꾸지 속 양심은 씻어내지 못해요.
속 양심은 성령이 와야 깨끗케 되어요.
왜냐하면! 성령이 예수의 피를 믿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여야 비로서 개혁이 이루어진 겁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는 더 이상 옛 것을 의지하지 않아요.
성령이 이제 예수님의 피로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고 알려 주세요.
성령은 예수와 한 몸을 만드세요.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하세요.
성령은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우리를 지성소로 안내해요.
우리의 행위를 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를 들고 나아가게 해요.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의 피로서 허물의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아요.
진정한 개혁신앙은 예수의 피만 남기는 겁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개혁을 이루고자 합니까?
아름다운 교회 입니까?
아니면 근사하게 성화되어서 자랑하고픈 자기 자신입니까?
그도 아니면 예수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까?
 
부디 우리 눈 앞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만 밝히 보이는 개혁이 이루어지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진정한 개혁은 예수 믿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교회라는 비늘을 벗겨 주시고 성화라는 비늘을 벗겨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 밖에 다른 것이 보이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피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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