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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47강. 모형(模型)과 실체(實體) (히 8:1-5)

by coroa 2021. 4. 26.

 

[47강. 모형(模型)과 실체(實體) (히 8:1-5)]

-.정낙원 목사

 

오늘은 모형과 실제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무엇이 모형이고 무엇이 실제인가요?
아론의 반차는 모형이고 멜기세덱의 반차가 실제입니다.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모형이고 예수그리스도가 드리는 제사는 실제입니다.
 
히브리서는 계속하여 이 예수가 율법을 완성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율법 지킴이 아니고 주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형을 붙잡지 말고 실제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모형에 머물러 있지 말고 실제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사역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 고 하지요.
저녁은 밤(어둠)이고, 아침은 낮(빛)입니다.
이를 순서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어둠으로 시작하여서 빛으로 창조를 하신다는 말입니다.
 
어둠은 율법이고 빛은 은해에요.
어둠은 모형이고 빛은 실제에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창조하는 일은 모형에서 실제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혼돈된 세상을 질서로 환원하는 일을 창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죄인을 구원하는 일로 말하면 타락된 것을 온전케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저주에서 구원을 이끌어낸다는 뜻입니다.
 
우리 생각은 아침이 먼저이고 저녁이 나중인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아요.
우리 생각과 역설적으로 일하세요.
가짜를 먼저 주시고 나중에 진짜를 주세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항상 가짜가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가인이 먼저이고, 아벨이 나중이고!
이스마엘이 먼저이고, 이삭이 나중이고!
에서가 먼저이고, 야곱이 나중이고!
다른 형제가 먼저이고, 요셉이 나중이고!
사울 왕이 먼저 나오고, 다윗 왕이 늦게 나오고!
표면적 유대인이 먼저이고, 이면적 유대인이 나중입니다.
 
옛 사람이 먼저이고, 속 사람은 나중이고!
첫 아담이 먼저이고, 마지막 아담이 나중이고!
적그리스도가 먼저이고, 예수그리스도가 나중입니다.
율법이 먼저이고, 복음이 나중입니다.
율법을 옛 언약이라고 하고, 복음을 새 언약이라고 해요.
 
참 재미있지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항상 가짜를 먼저 보내고 진짜는 나중에 보내세요.
그런데 하나 같이 먼저 나온 가짜들이 나중에 나온 진짜들을 핍박을 해요.
진짜가 가짜들에게 죽임을 당해요.
이러한 것을 역리(逆理)현상이라고 합니다.
 
바로가 꾼 꿈이 바로 그러했어요.
바로의 꿈을 보면 살찐 소가 파리한 소에게 잡아먹히지요.
이건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지는 것과 같아요.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죽임당하는 사건이에요.
이런 것을 죄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진짜가 가짜로부터 핍박을 받는 구조로 놓여져 있어요.
가짜가 진짜를 핍박함으로서 세상이 죄 아래 놓여 있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배척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도하는 모습이에요.
 
이러한 구조를 바로 죄가 만들어 놓았어요.
그 배후에 마귀가 있어요.
하나님은 이 마귀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일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마귀가 장악한 세상에 하나님께 속한 자들을 보냅니다.
그러자 마귀가 반발합니다.
이는 자기의 정체가 폭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을 죽이기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보냅니다.
그러자 마귀는 또 죽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보냅니다.
'설마 아들은 안 죽이겠지',
그런데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입니다.
 
이를 예수님은 세를 준 포도원 사건으로 비유하셨어요.
 
어떤 주인이 좋은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貰)를 주고 떠났습니다.
그리곤 때가 되어서 주인이 포도원 세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니 세를 든 농부들이 포도원을 차지 하고자 주인이 보낸 종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주인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었는데 그들은 아들마저 죽입니다.
이에 주인이 군대를 보내서 악한 농부들을 진멸해 버립니다.
 
이건 세상의 악함을 고발해주고 있어요.
이 세상의 본질이 악한 자의 수중에 놓여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끝은 죄악이 관영해 가요.
노의 때처럼 말이에요.
 
그럼 요셉의 환란 때처럼 역리가 창궐해요.
가짜들이 진짜들을 죽이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항상 가짜가 먼저 나와서 나중에 오는 진짜를 죽이는 일을 하였어요.
결국 하나님은 처음 것은 폐하시고 나중에 것을 세우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것은 폐하신다는 것은 실체가 아니고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형을 먼저 주시고 실체를 나중에 주신다는 뜻입니다.
나중 것이 실체란 말입니다.
 
우리 몸도 겉 사람은 후패하고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되어 가는 겁니다.
후패하다는 것은 타락한다는 말입니다.
새롭다는 것은 온전하다는 말입니다.
 
후패한 것이 온전케 되는 과정이 있지요.
그 과정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요.
후패한 몸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새로운 몸으로 바뀌게 되어요.
 
이는 곧 예수그리스도가 타락된 것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되면 죄로 인하여 타락된 세상을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온전케 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바울은 예수 안에서 만물이 선다고 했어요.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선다” 는 말은 “온전케 된다”는 의미에요.
만물은 예수 안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온전해지는 겁니다.
예수가 빠진 것은 불 온전해요.
그래서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 없는 인생은 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고 할 수 있어요.
 
예수 없는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에요.
세상에서 아무리 화려하게 성공하여도 예수를 모르면 저주 받은 인생인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 없는 인생은 모형으로 가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없는 인간은 흙이에요.
흙으로 된 육신 속에 예수의 생명을 담아야 비로소 사람이 되어요.
흙으로 된 인간은 가짜이고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을 담아야 진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짐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했어요.
보이는 것이란 이 세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장차 올 세상이에요.
그럼 보이는 세상을 위해 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세상인 하늘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말해주고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이 사실을 알려 주고 있어요.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고 그림자라고 합니다.
저희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섬겨 온 것이 무엇인가요?
율법 신앙이지요.
아론의 반차로 난 제사장들이 드리는 짐승의 제사였어요.
 
그럼 율법이 모형이고 그림자란 말이 되지요.
모형은 실체가 아니란 말입니다.
한마디로 가짜란 뜻입니다.
 
율법 속에는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과 먹고 마시는 것들이 들어 있어요.
날과 달과 절기를 별도로 주어서 지키게 한 것은 구별을 가르치고자 함이에요.
여러 날 중에서 어느 특정한 날을 지키라는 것은 특정한 세계가 있다는 뜻이에요.
 
율법은 시간과 공간을 모두 성(聖)과 속(俗)으로 구분을 해요.
하나님께 속한 것과 세상에 속한 것으로 구분을 했어요.
이걸 창조 7일 속에 담아 두셨어요.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째 되는 날은 쉬라고 합니다.
이는 엿새와 이레는 다른 날이라는 말이 됩니다.
하나에서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은 구별된 날이 됩니다.
 
저녁에서 아침으로 라는 싸이클로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이렇게 지나가다가 저녁에서 아침이 없는 다른 구조의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일곱째 날은 구별된 날이 되는 겁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일하는 날이었다고 하면 일곱째 날은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쉬는 날이에요.
일하는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은 역사에 속한 날이고,
모든 일을 마치고 안식하는 일곱째 날은 역사 밖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날이에요.
 
이것이 장소적인 것으로도 나타내 주었어요.
그것이 성막입니다.
넓은 광야 속에 특정한 장소에 성막을 세우면 그곳이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성막과 광야는 다른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모든 것을 구별을 했어요.
하나님은 율법이라는 모형을 가지고 실상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별된 나라가 있다고 말이에요.
그래서 구원이 구별되는 것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을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함과 동시에 이 세상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당한 자와 선택을 입지 못하는 자로 구분이 됩니다.
 
선택을 당한 아브라함만 하나님의 성민(聖民)이 되고,
선택을 입지 못한 사람들은 이방인(異邦人)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을 하시면 둘로 갈라지는 일들이 일어나요.
이렇게 구별당하는 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별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어서 또 구별을 시킵니다.
 
날도 구별하고!
장소도 구별하고!
먹고 마시는 것도 구별하고!
심지어 사람까지도 구별합니다.
 
이스라엘은 구별의 삶을 살았어요.
요람에서 무덤까지 구별된 삶을 살았어요.
이를 성별된 거룩한 삶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는 이건 모형이라고 합니다.
실체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건 다 그림자와 같이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그건 가짜라고 하고 있어요.
이렇게 허탈할 수가 있습니까?
일생을 율법대로 산다고 투쟁하다시피 살아왔는데 가짜라니요.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빈껍데기 인생을 붙잡고 산 것이 됩니다.
속에 보물이 들어 있는 줄 알고 단지를 부여잡고 살아왔는데 막상 뚜껑을 여니 그 속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가짜” 이렇게 쓰여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착각은 약속 어음을 돈이라고 믿고 산 겁니다.
약속 어음은 돈과 교환 할 때까진 돈에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돈은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약속일뿐이에요.
 
어음은 현금을 받을 때 까진 귀한 것입니다.
약속 어음을 받은 사람은 현금과 교환 할 때까진 보물처럼 여겨야 해요.
하지만 현금으로 교환하여야 하는데도 바꾸지 않고 어음만 가지고 있으면 그건 한낱 종이에 불과해요.
 
제가 어렸을 때 살던 저희 동네에 탄광이 있었습니다.
탄광에서는 석 달에 한 번씩 쌀을 배급해 주어요.
회사에서 쌀이 나오기 전에 직원들에게 쌀 배급표를 나누어 줍니다.
그럼 직원들은 그 배급표를 잘 간수하였다가 배급 날짜에 쌀과 교환을 합니다.
편의상 배급표를 어음이라고 하고 쌀을 헌금이라고 합시다.
 
율법을 어음이라고 하면 예수님은 현금이에요.
율법이라는 어음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라는 현금이 왔어요.
그럼 빨리 율법이라는 어음으로 예수라는 현금으로 바꾸어야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을 율법이라는 어음만 자랑하고 있었지 예수라는 현금을 바꾸지 않았어요.
그래서 망한 겁니다.
 
모형이란? 실체가 오면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사진을 준 것은 나중에 오는 실체를 만나라고 준 겁니다.
실체를 못 만나고 사진만 들고 있으면 사진을 가진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똑 같아요.
 
실체를 위하여 모형을 주셨어요.
그럼 모형을 가진 사람은 실체를 기다려야합니다.
그래야 모형을 가지고 있는 의미가 있어요.
 
실체가 왔음에도 모형만 붙잡고 있으면 그건 모형을 가진 자나 안 가진 자나 동일해요.
예수를 못 만난 사람은 율법을 지킨 자나 안 지킨 자나 다를 바가 없어요.
똑 같아요.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한 겁니다.
 
율법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따라가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어 있어요.
율법은 사진이고 그리스도는 실체인 겁니다.
 
이러한 사고로 광의적으로 예수님과 만물로 살펴봅시다.
만물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만물이 예수로부터 나왔다는 말은 예수가 실체이고 만물은 모형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만물이 예수 안에서 선다고 해요.
선다는 말은 만물이 예수 안에서 온전해 진다는 것입니다.
 
만물은 예수를 보여주는 모형이에요.
만물만 보면 안 되고 만물을 통해서 만물을 창조하신 예수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물은 예수를 보여주는 사진과 같아요.
하나님은 만물을 가지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서로를 드러내는 짝이에요.
창조주는 피조물로 드러나고 피조물은 창조주를 통해서 드러나요.
피조물을 통해서 창조주를 보아야 해요.
 
만물은 만물 자체로 있을 땐 온전한 것이 아니에요.
만물은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온전해 집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지만 만물의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선풍기가 있는데 전기에 연결되어야 온전한 역할을 하는 것과 같아요.
전기가 선풍기를 돌아가게 하는 생명이에요.
전기가 공급되지 않으면 선풍기는 죽은 거에요.
선풍기를 살게 하는 것이 전기입니다.
 
전기는 선풍기를 통해서 드러나고,
선풍기는 전기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전기와 선풍기는 짝인 겁니다.
 
예수님이 만물을 움직이게 하는 생명이에요.
예수님과 단절된 만물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풍랑이나 물고기나 무화과나무나 나귀새끼나 모든 만물이 다 예수님 말씀을 들은 것은 만물이 예수님과 연결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만물 중에서 유독 하나가 말을 안 들어요.
그게 바로 인간이에요.
죄가 인간을 장악하고 있어서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죄에게 장악당한 인간을 십자가에서 죽여 버리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물론 자기 백성들에 한해서입니다.
 
그럼 히브리서 기자는 만물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히 1:10-12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태초에 주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하늘과 땅이란 만물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하늘과 땅이 멸망 할 것이라고 합니다.
옷과 같이 낡아져서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라고 합니다.
 
갈아입는다는 말은 다른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현재의 것은 온전치 못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멸망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은 온전한 것이 아니에요.
온전한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잠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 속에서 영존하고자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영존하는 곳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영존하는 나라는 이 세상 바깥에 있어요.
영존 하는 생명도 이 세상 바깥에 있어요.
영존하는 나라를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영존 하는 나라에 살려면 영존하는 생명이 있어야 해요.
그 영존하는 생명을 예수님이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다 변하여도 주님만 변하지 않고 영존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땅에 속한 것은 전부 가짜다.
나도 가짜고 너도 가짜고 만물도 가짜다.
다른 말로 모형이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다 옷과 같이 낡아지고 갈아입을 것이라고 하였으니까요.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장막을 덧입게 되어 있어요.
우리 몸도 갈아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진짜 몸이냐?
오직 영존하신 예수님만 진짜 몸이에요.
인간들이 땅에서 아무리 근사하고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다 허상이에요.
하나님 앞에선 모두가 가짜란 것입니다.
 
인생은 화무십일홍이에요.
인생은 일장춘몽이에요.
인생은 영원하지 않아요.
 
영원한 것은 예수님뿐이에요.
예수님만 진짜에요.
하나님은 진짜만 받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 것만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것만 받아요.
예수님이 하신 것만 받으세요.
인간의 것은 가짜이고 예수님 것만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아무리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킨다 하여도 하나님은 받지 않겠지요.
왜냐하면! 가짜이니까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이 지킨 율법을 받지 않고 예수님이 지킨 것만 받으세요.
율법도 예수님이 지키신 것만 받아요.
우리가 율법을 지킬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지켜 주어야 해요.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이 정성을 다하여 율법을 지킨 것도 전부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못 지키고 오직 예수님만 지킬 수가 있어요.
애초부터 율법을 지킬 분은 따로 정해져 있었던 겁니다.
 
죄인에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의인이라야만 지킬 수가 있어요.
그럼 죄인인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아도 우린 안 되는데요 라고 했어야 했어요.
율법을 지켜주실 분을 기다렸어야 했어요.
그럼에도 이들은 착각하고 자기들이 지키고자 하였어요.
율법을 들고 우린 가짜입니다 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만 우린 진짜입니다 라고 했단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지킨 율법을 안 받는다는 것을 몰랐던 겁니다.
죄인 주제에 율법을 지킨다고 깝쭉 된 것이 죄였어요.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하나님의 긍휼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한다고 하니 점점 더 예수와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는 겁니다.
예수님과 남남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율법을 볼 때마다 우린 가짜지!
진짜가 빨리 와야 할 텐데! 라고 기다렸어야 했어요.
우리가 지킨 율법은 가짜이고 예수님이 지킨 것만 진짜란 것을 알고 지켜야 율법을 제대로 지킨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는 아랑곳 하지 않고 율법 지킨 것만 자랑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망하지 않고 베기겠어요.
유대인들은 가짜를 가지고 하나님 백성 노릇을 했어요.
 
예수님이 십일조 문제를 말할 때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신과 인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 속에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 빠진 것은 십일조가 아니라고 했어요.
이 말은 물질의 십일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일조 속에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 담겨져 있어야 온전한 것이란 말입니다.
 
십일조는 그릇이고 의와 인과 신은 내용이에요.
내용이 없는 그릇은 가짜에요.
그릇은 내용을 담기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내용을 담는 그릇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내용을 담기 위해서 그릇도 아끼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드리는 십일조는 맏물입니다.
맏물은 곧 예수님을 말해요.
그러니 성도가 십일조를 드린다고 한다면 난 예수님 것입니다! 라는 정신으로 드려야 해요.
자기 것이 아니라 예수님 것을 드리는 겁니다.
 
율법 속에 담긴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만이 옳은(義) 분이고!
예수님만이 자비로운(仁) 분이고!
예수님만이 진실한(信) 분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이 빠진 것은 전부 가짜가 되는 겁니다.
 
신약에선 십일조란 없어요.
예수님이 십일조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주님 것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를 품은 성도 자체가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비단 십일조뿐만 아니라 성전도 그렇고, 안식일도 그렇고, 제사장도 그래요.
 
예수님이 성전이고!
예수님이 안식일이고!
예수님이 제사장이에요.
 
율법을 모형(가짜)이라고 했어요.
율법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다 모형이에요.
가짜란 말입니다.
 
성전도 가짜이고,
안식일도 가짜이고,
십일조도 가짜이고,
제사장도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 하에선 모형에 속한 것을 들고 오면 안 되어요.
예수님의 것을 들고 와야 해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들고 나와야 해요.
 
예수님이 진짜이므로 예수님 앞에선 모형을 버려야 해요.
우리 자신이 모형이므로 실체이신 예수님 속으로 들어가야 해요.
우리 몸으로 살면 안 되고 예수 안에서 살아야 해요.
 
롬 11: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돌아간다는 말은 예수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들어갈 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했어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신 일만 의지하고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뭡니까?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대속 제물로 주신 거잖아요.
왜 예수님의 몸을 우리 대신 대속 제물로 주셨을까요?
이는 우리 몸은 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의 몸으로 드리는 것은 안 받아요.
하나님은 의인의 제사만 받아요.
그 의인이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라고 하신 겁니다.
신앙을 예수 믿는 것으로 두신 것입니다.
 
죄인에게서는 선(善)이 나오지 않아요.
죄의 몸으로 사니 무슨 일을 해도 다 죄가 되겠지요.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죄 아래 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가 늘 필요한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발라 주어야 저주로부터 넘어 갈 수가 있어요.
 
하나님은 매일 분노(忿怒)하시는 하나님이세요.
 
시 7:11절.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왜 분노 하십니까?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인데 세상을 보니 온통 죄로 얼룩져 있는 거에요.
하나님이 만든 세상이 아니에요.
인간도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 아니에요.
그러니 하나님이 화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화를 예수님이 풀어 드리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걸 화목 제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분노를 달래려고 의로운 피를 뿌려 주신 겁니다.
이걸 예수그리스로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신학적 용어로 칭의라고 해요.
 
지금도 출애굽 때처럼 죽음의 천사가 다녀요.
마귀가 죽음의 천사에요.
마귀는 예수의 피가 없는 자들을 죽여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영적인 상황은 그대로 일어나고 있어요.
다만 인간들이 모를 뿐입니다.
성도만 이를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 안에서 사는 겁니다.
늘 예수님 피 안에서 산다는 것을 기억케 하려고 성령이 우리 안에 와 계신 겁니다.
그러니 성령이 와 계신 성도는 늘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니 내가 뭔가 하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니에요.
내가 하는 것은 그건 행함으로 사는 것이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지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의지하고 산다는 말입니다.
이건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선물로 받은 사람은 믿음으로 사세요! 라고 하면 그 말을 알아먹어요.
그러나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살까요? 라고 물어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방법을 가르쳐 주어도 몰라요.
 
예수를 믿는 믿음은 인간 쪽에서 의지적 결정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인간 쪽에서 할 일이란 없어요.
믿음을 주시면 믿어지는 것이고,
선물로 주시지 않으면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어요.
 
믿음을 선물로 받으면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쉬워요.
우리가 숨 쉬는 것처럼 쉬워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항상 예수님 것만 내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 어떻게 살았어! 라고 물으면!
예수님 때문에 살았는데요!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놈 믿음 있네!
그런단 말입니다.
그 놈 참으로 똑똑한데!
그런단 말이에요.
 
하나님은 우리 몸에 예수님이 하신 일만 남기는 것이 소원이에요.
예수님의 흔적을 보시고 매일 분노 중에서도 용서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만물이 주께로 돌아갈 때 예수님만 세세토록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만물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세요.
만물은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돋보이게 하는 엑스트라에요.
엑스트라는 항상 주인공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되어요.
난 가짜고 저 분이 진짜라고 관객들의 시선이 주인공에게로 쏠리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괜히 자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자 하면 짤려요.
 
엑스트라가 자기 주제를 모르고 드라마의 흐름을 방해하면 교통사고로 죽이든지, 병으로 죽이든지, 아니면 해외로 보내든지 해서 그 드라마에서 하차시켜 버려요.
죽이지 않고 살려두면 자꾸만 드라마를 망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이 짓을 하다가 짤렸어요.
자기들은 가짜이고 예수님이 진짜입니다! 라고 해 주어야 하는데,
이 놈들은 자기들이 진짜라고 우긴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잘라 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처럼 까부는 놈들이 있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하겠다고 하는 목사들이 그렇고 교인들도 그래요.
혼자 거룩한 척 하는데 예수님의 피가 없는 거룩이니 가짜 거룩인 겁니다.
 
하나님이 왜 예수를 믿게 해 주셨는지를 몰라요.
하나님이 왜 교회로 불러주셨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모르니까 예수를 밀어내고 자기가 거룩해 진다고 깨춤을 추고 있는 것입니다.
 
성화를 외치는 사람들의 설교를 들어보세요.
모든 포카스가 인간에게 맞추어져 있어요.
이상하리만치 예수님은 쏙 빠져 있어요.
 
제가 과거 복음을 몰랐을 때 율법주의 성화주의로 살았어요.
그 때 설교한 것을 보면 열정은 지금보다 백배 충천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가 없어요.
어떻게 그렇게도 안했는지 의아해요.
이건 지금 일부러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할 겁니다.
 
그런데 그 땐 엄청 설교 잘한다고 칭찬을 들었거든요.
전도사 시절 때부터 목사님들 세미나도 인도하고 간간히 부흥회도 인도했으니까요.
당시에는 설교를 두 시간씩 했어요.
한 주간에 5일 씩 성경공부를 인도했어요.
그냥 성경만 들고 서면 줄줄줄 나왔어요.
 
어디서 그렇게 나오는지 몰라요.
그런데 앙꼬 없는 찐빵인 겁니다.
예수님의 피는 없고 온통 인간의 행함만 쏟아냈어요.
그러니 가짜인 거지요.
 
제일 쉬운 설교가 뭔 줄 아세요.
성경대로 가르치는 설교에요.
문자 풀이하는 설교 말이에요.
이건 성경을 많이 읽으면 도가 터요.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쭉 꿰고 있으면 동일한 내용을 여기저기서 끄집어내요.
그러면 두어 시간은 금방 가요.
이런 설교는 의와 인과 신이 빠진 십일조와 같아요.
껍데기만 훑고 지나가는 겁니다.
 
이건 성령 안 받아도 다 할 수 있는 설교에요.
그러니 상식적인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를 사람들이 좋아해요.
왜냐하면! 인간의 상식에 맞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재주로 할 수 없는 설교가 있어요.
그건 예수님의 십자가 피 이야기 하는 겁니다.
십자가 피는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만이 토해 낼 수가 있어요.
자기가 가짜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뱉어 낼 수가 있어요.
 
지금은 그때보다 설교를 훨씬 못하는데도 예수님의 피를 말하고 있어요.
피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설교가 안 되어요.
완전히 바뀌었어요.
이젠 내 안에 진짜 되신 예수님이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율법이 가짜이고 예수그리스도가 진짜라고 합니다.
구약의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어요.
율법 붙잡지 말고 예수그리스도를 붙잡아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어떻게 완성하셨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 속에서 예수그리스도가 하실 일을 붙잡아야 된다고 줄기차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론에 반차는 가짜다!
멜기세덱의 반차가 진짜다!
땅에 제사장은 가짜다!
하늘에 제사장이 진짜다!
짐승의 제사는 가짜다!
예수님 피가 진짜다! 라고 하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목숨 바쳐서 정성 드려 섬기는 율법지킴이 전부 모형이라고 하잖아요.
그림자라고 하잖아요.
실상이 따로 있다고 하잖아요.
진짜가 따로 있다고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짜를 진짜로 붙잡고 있었던 겁니다.
진짜가 왔는데도 가짜 때문에 진짜를 죽였어요.
이런 황망 할 때가 있습니까?
진짜를 영접하라고 모형을 주었는데 그만 모형에 빠져서 진짜를 버렸단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런 일이 구약 이스라엘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도 계속해서 자행되고 있어요.
그것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교회에서 말이에요.
 
교회 밖에선 모형이 없으니 진짜에 관심도 없어요.
그러나 교회는 달라요.
교회는 진짜 되신 예수님의 피로 세워졌어요.
 
이 땅에 교회가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진짜로 살아 계셔서 다스리고 있다는 증거에요.
동화가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을 자기백성들에게 보내 주신 것이 동화이야기가 아니에요.
실제 사건이에요.
 
제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무슨 도(道)를 닦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목사님들도 신앙을 성경을 학문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교인들도 지식적으로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이 신앙 좋음으로 알고 있어요.
성경적 지식은 많은데 삶은 전혀 아닌 겁니다.
 
하나님 말씀이 양식이 되어야 하는데 지식이 되었어요.
양식으로 먹으면 그 양식이 나를 주장하여 삶으로 토해져 나와요.
그러나 지식은 아는 것 따로 사는 것 따로 에요.
말하는 것 따로 행동하는 것 따로 에요.
 
지금 저와 여러분이 실제로 살고 있듯이 예수님도 실제로 성도 안에서 살아 계세요.
세상 사람들이야 어둠에 속하여서 예수님에 대하여서 까막눈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성도라고 한다면 사실로 믿고 살아야 해요.
근데 이 시대 교회 안에선 예수님의 십자기 피 이야기가 동화처럼 되고 말았어요.
 
예수님 십자가를 이야기 하면 옛날이야기 듣는 것처럼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피를 말해도 무덤덤한 겁니다.
피가 주는 구원의 희열이 없어요.
구원을 관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시간나면 믿는 취미가 되어 버렸어요.
교회 오는 것은 동호회 모임이 되고 말았구요.
예수 보다 자기 삶이 더 우선인 것입니다.
 
교인들이 세상에서 복 받고 사업이 번창하고 자식들 잘되고 가정에 우환질고 없이 행복하게 잘 산다고 하면 아멘 아멘을 연발하는데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시큰둥해요.
육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깔깔 거리는데 십자가 이야기 하면 시계만 쳐다봐요.
 
이는 전부 예수님의 십자가를 관념으로 알고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십자가도 관념이고 부활도 관념이고 성령도 관념이에요.
그러니 신앙생활도 관념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 오는 것도 이따금씩 단골집 음식 먹으러 가듯이 하고 있어요.
 
하도 목사가 우린 죄인이라고 하니까
죄인이 뭔 말 인줄도 모르고 그냥 예 저 죄인 맞습니다! 라고 읊조리고 있는 겁니다.
난 죄인입니다! 라고 말을 한다고 그 사람이 죄인임을 아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난 죄인입니다! 라고 했기 때문에 난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고 착각을 해요.
그건 관념이에요.
그러니 복음과 다른 모습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사람은 그래 난 죄인인데 어쩔래! 라는 식이에요.
그러면 자기가 엄청 복음대로 산다고 믿어요.
 
고린도전서 13장을 흔히들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사귐이에요.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희노애락을 함께 느끼는 것이에요.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둘이 함께 하는 것이에요.
혼자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혼자 감상하는 거예요.
혼자 하는 사랑은 마치 학생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들 브로마이드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쳐다보는 것과 같아요.
그건 사귐이 아니에요.
그건 자기 혼자서 사진을 감상하는 것이에요.
 
예수님은 브로마이드가 아니에요.
벽에 걸어 놓고 감상하는 사진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저와 여러분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교제 하듯이 사랑해야 하는 분이에요.
예수님은 지식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과의 사랑을 거울 속에서 보는 것 같이 희미한 것이 아니고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 같이 실제라고 했어요.
부분 적으로 알지 않고 온전히 안다고 했다구요.
 
온전하다는 것은 사실로 인지(認知)한다는 말입니다.
사도요한이 그러잖아요.
 
요일 1:1-3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하잖아요.
이건 경험한다는 말이에요.
실제 속에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런 그 예수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지금 전한다고 하잖아요.
이는 우리처럼 너희도 예수님과 사귐을 갖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허황된 이야기 같은 이 예수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겁니다.
 
성도가 누구냐?
하나님께로 난 자가 누구냐?
허황된 이야기 같은 것을 실제로 사실로 믿고 사는 자들이에요.
저와 여러분이 지금 만나 교제하듯이 예수님과 교제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사귐을 갖게 되면 그 사귐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인테넷이란 가상공간이 있어요.
제 블로그에 수많은 분들이 드나들어요.
글을 통하여서 교감을 해요.
비록 보지 못하고 만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교통이 되어요.
 
어떤 분들은 전화를 걸어오고 어떤 분들은 얼굴과 얼굴을 대하면서 교제를 나누어요.
전화를 하고 만나서 성경공부도 하고 신앙이야기도 나누는 것은 브로마이드 걸어 놓고 감상하는 게 아니에요.
피부로 느낀단 말입니다.
신앙적인 희노애락을 같이 해요.
 
지난 금요일에 여수에 계신 장로님과 권사님 댁에 성경공부를 하러 갔었습니다.
약 3개월 전에 블로그에 글을 보고 연락을 주셨어요.
그동안 자신이 율법아래 있었다는 것을 제 블로그에 올려진 설교를 보고 깨달았대요.
 
그래서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여서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황당한 시간인 줄 아세요.
모든 가족들이 일과를 마치고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시간이 밤 12시에요.
피곤해서 잠을 자야 할 시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부모님을 위시하여 2녀 1남 다섯 식구가 그 시간에 다 모인다는 겁니다.
큰 딸은 출가를 하였는데도 그 시간에 성경 공부하러 와요.
밤 12시에 시작하면 새벽 3시에 끝나요.
3시간을 논스톱으로 해요.
 
중간에 쉬면 잠이 올까봐서 그대로 달리는데도 지루한 기색 하나 없이 말씀 안으로 빨려 드는 걸 보면 기적이 따로 없구나 해요.
마치 제비 새끼가 어미가 모이를 주면 입을 벌리고 서로 먹겠다고 하는 것처럼 말씀 속으로 빨려 두는 것을 보면 신기해요.
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가 있는가!
 
요즘 자식들은 장성하면 자기 주관이 있어서 부모님 말을 안 듣잖아요.
다 자기 시간이 있고 자기 라이프스타일이 있잖아요.
그런데 말씀을 듣는 데에는 하나같이 눈이 똘망 똘망 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좋아해요.
 
전 이 광경을 보면서 야!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주선해 주셨듯이 지금 여기 대한민국 여수 땅에서 이런 사건을 일으켜 주셨구나! 를 생각하게 되어요.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실제였듯이 제가 여수에 계신 장로님 식구들을 만난 것이 실제에요.
고넬료가 온 식구들을 불러 모아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것이 실제였듯이 장로님 댁 온 식구들도 둘러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이 실제란 말입니다.
 
이건 얼마나 오래 지속이 되느냐는 중요치 않아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 지금도 주님이 살아계셔서 일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도행전이 써지고 있다는 뜻이에요.
 
석 달 전만 해도 그분들을 몰랐어요.
저는 여수가 어디에 붙어 있는 줄도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만나게 되었어요.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 친 형제같이 반갑고 기쁜 겁니다.
 
지난번 주일날엔 울산까지 와서 예배를 드리고 가셨어요.
이건 우리 계획에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어요.
그래서 우린 하나님이 만든 사건 속에 휘말려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던 복음을 깨닫게 된 것이나,
여수 장로님이 복음을 깨닫게 된 것이나 모두가 하나님이 만든 사건이에요.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사건 아닌 것이 없어요.
모두가 하나님이 연출하시고 있어요.
여러분 인생도 하나님이 사건을 만들어 가실 겁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것도 사실이듯이 복음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들도 실제에요.
복음이 실제이기 때문에 복음 속에 담겨져 있는 것들이 실제 삶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복음 속에는 영생이라는 기쁨도 있지만 핍박이라는 고난도 있어요.
그러니 복음을 받으면 복음이 주는 기쁨도 있지만 복음으로 인한 고난도 일어나는 겁니다.
 
어제 저녁에 어떤 분이 전화를 했어요.
1천여 명 모이는 교회에 장로님이세요.
복음을 깨닫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몰라요.
 
이 분이 교회 청년회를 맞아 봉사하고 있는데 잠시 성경공부 하면서 복음을 이야기 했대요.
그러자 청년들이 생소한 말이라고 담당 부목사에게 말하고 부목사도 처음 듣는 말이라고 당회장에게 말해서 장로님 사상이 의심스러우니 앞으로 가르치는 부서에서 손을 떼라고 했다는 겁니다.
 
장로님이 너무 안타깝고 화가 나기도 해서 저에게 전화를 한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수가 있느냐 에요.
왜 복음 전하는데 알아주지 못하고 도리어 공격을 당하게 되느냐 입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그랬어요.
장로님이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다고!
무슨 말인가 하면 장로님은 복음 전하면 사람들이 환영하고 박수 쳐 줄줄 알고 있다고 환상에 빠져 있다고 꿈 깨라고 했어요.
 
복음은 환상이 아니고 실제에요.
현실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툭툭 터진다고요.
예수님이 핍박 받았듯이 실제로 핍박이 일어나요.
 
제가 느끼기엔 장로님은 그곳에서 복음은 복음대로 챙기고 장로라는 기득권도 챙기고 싶다는 것으로 보여졌어요.
이를테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고자 함이 아니고 복음 안다는 것으로 교회 안에서 자기 위치를 공고히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그 교회에서 난 복음을 안다!
너희는 모르지!
나 한데 한 수 배워!
날 앞으로 스승으로 잘 모셔!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어요.
이런 생각은 복음을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당황스러운 겁니다.
 
성도는 스승이 아니고 제자에요.
스승은 가르치기만 하지만 제자는 예수님의 삶에 동참이 되어져요.
제자인 성도에게는 복음과 함께 고난도 옵션으로 같이 오는 겁니다.
장로님에게 복음과 고난이 옵션으로 같이 온 겁니다.
이는 복음이 우리에게 이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만약에 장로님의 바람대로 라면 그건 복음을 감상하는 것이지 실제로 복음에 소유당한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굉장히 중요한 말이니 잘 새겨들으세요.
 
내가 복음을 소유하면 십자가는 지식이 되어요.
이러면 선생 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지식으로 십자가를 소유하면 남이 알지 못하는 것을 갖고 있으므로 자랑하고 싶어져요.
지식은 자꾸 들으면 생겨요.
십자가 피 이야기도 자꾸만 들어 보세요.
그러면 착각에 빠져요.
 
착각에 빠지면 입으로는 십자가를 말하는데 삶으로는 십자가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요.
그러니 앵무새 같이 흉내를 내게 되는 겁니다.
이건 지적 유희를 즐기는 것이에요.
십자가를 담론(談論)으로 즐기고 있는 겁니다.
지식을 자랑하는 것엔 핍박이나 미움을 받지 않아요.
 
그건 마귀가 너무도 잘 알아요.
마귀는 저 놈이 십자가에 사로잡힌 놈인지 지식으로 알고 있는 놈인지 알아요.
그래서 지식으로 알고 있는 놈에겐 핍박을 안 해요.
예수 안에서 사로잡힌 사람만 핍박을 해요.
복음이 나를 장악하면 복음 속에 담겨져 있는 것들이 내 몸으로 터져 나와요.
 
복음 속에는 영광도 있지만 고난도 들어 있어요.
영광은 장차 받는 것이고 고난은 지금 여기서 받는 것이에요.
복음이 장악한 사람은 자기의 원함과 상관없이 복음에 합당한 사건들이 자꾸만 일어나게 되어요.
미움 받고 따돌림을 당하고 이단소리 듣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셨던 일들이 실제로 나에게 일어나요.
이런 현상이 일어나야 그 사람이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요.
예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이 당하셨던 일들이 재현이 되어요.
나는 싫은데 마귀가 알아보고 자꾸만 괴롭혀요.
 
하지만 자기가 복음을 장난감처럼 소유한 사람은 마귀가 그냥 내비 둬요.
건들 필요가 없어요.
그 사람은 복음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그림책 보듯이 감상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전혀 복음 때문에 당하는 아픔이 없는 것입니다.
 
이걸 저는 지식으로 습득된 복음이고 관념적 신앙이라고 해요.
지식으로 습득한 복음은 신앙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이에요.
관념은 허상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자기 부인이 일어나지 않고 유희를 즐기는 것은 복음을 자기 지식으로 습득하여서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남 앞에서 스승 노릇을 하고자 하는 겁니다.
말로는 엄청 많이 아는 것 같은데 생명의 역사가 없고 싸늘하고 공허해요.
가슴이 따뜻하지 않고 냉골인 겁니다.
 
마치 겉절이 한 김치 같아요.
김장을 하면 양념이 배추 속에 잘 스며들어서 김치 맛을 내 주어야 하잖아요.
배추가 소금물에 절여져서 양념에 배이면 맛난 김치가 되어요.
하지만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지 않고 양념을 하면 배추 따로 양념 따로 맛이 나요.
배추가 살아서 밭으로 갑니다.
 
이처럼 복음에 소유당하지 않으면 입으로는 복음 복음 하는데 영 맛이 안나요.
복음 냄새가 안 나고 지식 자랑하는 냄새가 풀풀나요.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시장 통에 다니면서 나 이런 사람이야! 라고 대접받고자 한단 말입니다.
 
나 복음 아는 사람이야!
난 십자가 피 아는 사람이야!
너는 모르지!
그러니 앞으로 날 잘 모셔!
 
교회 안에서도 으뜸 되고자 하고 나대기를 좋아해요.
자기 딴에는 복음을 말하는데 전혀 남에게 유익을 주지 못해요.
남에게 상처만 주어요.
 
지식은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워요.
바울이 심심해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이 말을 고린도 교회에서 하고 있어요.
 
고린도 교회는 갖가지 은사를 받은 자들이 나대면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어요.
흔히 안다고 하는 자들이 그랬어요.
아는 것이 도리어 사람에게나 교회에 거치는 것이 되니 이런 경고를 하는 겁니다.
이건 아니란 말입니다.
 
율법은 그림자라고 했지요.
무엇을 위한 그림자인가요.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그림자이지요.
우리는 그림자이고 예수님이 실체에요.
그러니 그림자인 내가 드러나면 안 되고 실상인 예수님이 드러나야 하는 겁니다.
 
바울이 율법을 예수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했지요.
이는 율법지킴이 드러나면 안 되고 예수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용서하심이 우러나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예수그리스도를 바로 만난 사람이고 율법을 바로 지킨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가 복음을 소유한 사람과 복음에 장악당한 사람으로 비교해 봅시다.
율법을 자기가 소유하면 율법대로 사는데 바빠요.
문자적으로 지키기에 바쁘단 말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율법 지킨 것을 자랑거리로 갖고 있어요.
그러나 율법이 그 사람을 장악하게 되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어요.
율법 앞에서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생긴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서 바리새인들의 신앙에 허구를 말했지요.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킴을 자랑거리로 들고 나와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기에 바빴잖아요.
그런데 세리는 얼굴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통곡했지요.
어째서 통곡했나요.
자기가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어기면서 살아온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양념이 하나도 배지 않은 김치처럼 율법에 배지 않아서 펄펄 살아 있는 겁니다.
반대로 세리는 율법이라는 양념에 푹 절여져서 난 죽을 놈입니다! 라고 애통하고 있는 겁니다.
세리는 율법 앞에 자기 주제를 정확히 깨닫고 입을 닫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했어요.
율법에 푹 절여지면 세리처럼 난 죄인입니다! 가 나와야 해요.
안 절여지면 바리새인처럼 나 잘했지요! 가 나와요.
 
바리새인은 자기가 율법을 소유하였고, 세리는 율법이 세리를 소유한 겁니다.
자기가 율법을 소유하면 자기 자랑으로 치닫고 율법이 나를 소유하면 죄인으로 낮아져요.
주께 받은 은혜를 자랑하게 되어요.
동일한 율법을 가지고도 나타나는 현상은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나게 되어요.
 
지금도 이런 형상은 교회 안에서 그대로 나타나요.
율법을 복음이라고 합시다.
그럼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은 나 복음 안다!
나 십자가 피 안다!
이건 마치 바리새인들이 너희들 율법 안 지켰지!
난 지켰다!
그러는 것과 같아요.
 
십자가 피를 알아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에요.
전 단호하게 말합니다.
십자가 피 아는 사람은 지옥가요.
십자가 피에 사로잡힌 사람이 천국에 가요.
 
십자가 피가 김장에 양념 배듯이 그 사람을 장악하여서 날마다 그 사람을 해체시키고 십자가를 안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아니라 감사거리로 나타나야 해요.
복음 아는 것이 자랑으로 나타나면 남에게 피해를 주어요.
십자가 피를 안다는 것으로 남을 쿡쿡 쑤시고 염소새끼처럼 들이 받는다구요.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많아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 맞습니다!
입만 열면 이런 말을 내 뱉는다고 그 사람이 십자가를 아는 것이 아니에요.
 
진짜 십자가를 알면 난 죄인입니다! 라고 떠벌리지 않고 죄인이 용서받고 사는 것을 온 몸으로 토해내요.
이게 때로는 사랑으로 나타나고,
화평으로 나타나고,
용서로 나타나고,
관용으로 나타나고,
인내로 나타나고 해요.
 
난 죄인입니다! 라는 립 서비스를 말하지 않고 이런 못난 죄인이 이렇게 주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삶으로 감사로 표현해 낸단 말입니다.
입으로는 난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전혀 죄인이 용서 받은 모습은 없고!
그래 난 죄인이다!
어쩔래! 배 째라! 하는 식으로 나오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십자가는 자학(自虐)하는게 아니에요.
십자가 피가 내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 속에 속속들이 배여야 산다는 것 자체가 감사가 되어요.
그래야 사랑에 빚진 자처럼 살아가게 된다구요.
 
그렇지 않고 난 십자가 안다!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데 뭐가 문제냐! 라고 하면!
이건 마치 하나님이 유대인들 때문에 이방인에게 모독을 당한 것과 같아요.
지금은 십자가를 안다는 사람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모독당하고 있어요.
 
십자가 도는 관념이 아니에요.
실제에요.
실제이기 때문에 십자가가 나를 소유하면 예수님이 당하셨던 그 십자가의 고난이 실제로 나에게 나타나는 겁니다.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예수님을 지식으로 알고 관념으로 믿었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니 관념이 실상으로 나타나게 되었어요.
이제 십자가의 능력이 제자들을 끌고 고난 속으로 밀어 넣은 겁니다.
그래서 산상보훈에서 의(義)를 인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한 겁니다.
 
마 5:10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핍박을 “받는 자”가 아니고!
핍박을 “받은 자”에요.
인간의 역사는 수평적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현재란 없어요.
현재라 하는 것도 눈 깜짝하면 이미 과거에요.
 
예를 들어 지금 현재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 현재는 지나간 과거에요.
그러니 현재란 우리 손에 잡히지 않아요.
인간은 오직 지나간 과거만 손에 붙잡고 있는 겁니다.
 
과거를 붙잡고 있는 것이 현재에요.
그러니 의(義)를 인하여 핍박을 받은 자라는 것은 예수님의 운명을 이미와 현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경험된 사실이란 말입니다.
경험된 사실을 현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어음이 아니고 현찰이에요.
그러니 성령이 임한 자는 십자가 사건이 시시때때로 터져 나오게 되는 겁니다.
성령께서 예수님께서 이미 경험하신 사건들이 현재화 되어서 터져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터져 나오는 사람을 일컬어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산상보훈의 팔복은 전부 이미 받은 복입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팔복은 전부 과거에 나타난 일을 현재화 하고 있어요.
하나님께 복을 이미 받은 성도에겐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앞으로 이런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복을 받았다는 말이에요.
하나님께 하늘에 신령한 복을 받으니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복을 받았기 때문에 어리한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에요.
조건이 아니고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 하십시오!
애통하십시오!
온유하십시오!
긍휼이 여기세요!
화평케 하세요!
마음을 청결케 하세요!
핍박을 받으세요! 라고 말하면 안 되어요.
 
이건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에요.
성도에겐 이런 현상들이 툭툭 터져 나와요.
그러니 이런 일들이 일어나거들랑 예수님이 지금 여러분 속에서 함께 동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감사하여야 해요.
우리가 세상살이가 바쁘다고 자기 안에 계신 예수님을 늘 잊고 사니까 예수님이 질투하셔서 나 여기 있다! 라고 툭툭 간섭하시는 겁니다.
 
십자가가 겉절이 김치가 아니라 김장 김치처럼 앙념이 배여 있어요.
성도들 속에 속속들이 배여서 사람 속에서 예수님의 흔적들이 툭툭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신앙생활이라고 해요.
 
바울을 보세요.
언제 바울이 자기 고난을 예측이나 했나요.
예측하지 않았지만 복음 때문에 자꾸만 이상한 사건들이 발생하잖아요.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나서 교제하게 되고 예기치 못한 일들을 당하게 되었어요.
지금도 동일해요.
복음이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어떤 사건 속으로 몰아넣어요.
복음 전하는 자리로 밀고 가는가 하면 욕먹는 자리로도 밀어 넣어요.
 
전 지금 이상한 사건 속으로 휘말려 살고 있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툭툭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도 생기지만 욕먹는 일도 생겨요.
 
십자가를 아는 것과 사는 것을 이분법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하나에요.
그럴 때 십자가가 지식이나 관념으로 머물지 않고 능력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우겨쌈을 당하여도 당하지 않고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넘어지지 않게 되는 겁니다.
 
복습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정리하고 마칩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늘에 실체가 있고 이 땅엔 모형이 있다고 합니다.
그럼 땅에서 사는 우리는 모형을 가지고 실체를 보아야 할 숙제를 안게 되었어요.
모형을 가지고 실체를 찾아 가야한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선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여러 가지 비유를 가지고서 천국을 설명해 주셨어요.
예수님에겐 세상의 것들은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한 시청각 교재였어요.
시청각 교재의 목적은 본질을 깨닫게 하는데 목적이 있어요.
그러므로 비유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고 비유가 담고 있는 것을 붙잡아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구약의 율법을 한마디로 예수님을 위한 그림자요 모형이라고 했어요.
율법의 모든 제도들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모형이에요.
제사나, 제사장이나, 성막이나, 또는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 모두가 그림자에요.
 
골 2:16-17절.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율법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했지요.
장래 일이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십자가에요.
아무리 율법조항을 완벽하게 잘 지켰어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율법 지킨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것을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율법을 하나도 못 지켰다는 말이 되어요.
 
히브리 기자는 하늘에 참 성소가 있다고 합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늘에 성소를 보았어요.
모세가 하늘의 성소에 보니 예수님이라는 영원한 제사장이 계시더라는 겁니다.
모세는 하늘에서 본 것을 본 따서 성막을 지었어요.
 
이 땅에 지어진 성소는 하늘에 있는 성소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에요.
그럼 이 땅에도 제사장의 모형도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레위지파 제사장들을 세운 겁니다.
레위지파 제사장은 하늘에 계신 영원한 제사장을 보여주는 시청각교제인 겁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제사장이지 땅에 제사장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하늘성전에 제사장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땅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땅의 제사장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땅에 있는 모형 성전에는 땅에서 난 가짜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게 놔둔 것입니다.
 
땅에 제사장은 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온전한 제사가 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땅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아무리 잘해도 영원한 속죄가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영원한 속죄가 되려면 죄와 상관이 없는 제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죄와 상관없는 제사가 되려면 먼저 흠 없는 제물이 필요하고 흠 없는 제사장이 필요해요.
알다시피 땅에는 흠 없는 것이 없어요.
다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어요.
 
그러니 단번에 속죄 제사가 안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냥 흉내만 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제사장이 오시기까지 잠시 허락하신 겁니다.
모형을 가지고 실체를 보게끔 하신 것이지요.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늘의 제사를 보았어요.
거긴 예수님이 제사장으로서 자기 몸을 제물로 제사를 지내더라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으노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린 하늘에 제사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겁니다.
 
이게 비밀이에요.
그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늘에 제사인줄 몰라요.
하나님은 이 비밀을 교회 속에 주셨어요.
성도는 이 비밀을 맡은 자들입니다.
 
이 비밀을 알았다면 증거하세요.
그러면 바울처럼 자기 몸에 십자가의 흔적들이 있다고 하였듯이 우리 몸에도 십자가의 흔적들이 하나 둘 쌓여 갈 것입니다.
그 흔적들이 곧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부디 이 영광된 흔적들을 주께서 저와 여러분의 몸에 많이 새겨 가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것임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세상은 가짜이고 진짜는 하늘에 있음을 알았으니 가짜인 세상에서 진짜를 준비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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