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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48강. 마음에 새겨주신 새 언약 (히 8:5-13)

by coroa 2021. 4. 30.

 

[48강. 마음에 새겨주신 새 언약 (히 8:5-13)]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 모형(模型)과 실체(實體)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지켜온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이 섬겨온 것은 율법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신앙은 모형이고 그림자라고 합니다.
모형과 그림자란 진짜가 아니고 가짜란 말입니다.
그러니 율법은 아무리 완벽하게 잘 지켜도 실체가 될 수가 없습니다.
다른 말로 죄인은 아무리 꽃단장을 하여도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행실 하나 하나를 가지고 이건 죄(罪)이고 저건 의(義)이다 라고 따지지 않아요.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죄 아래서 출생을 한 죄인이기 때문이에요.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죄에요.
흔히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요.
맞아요.
죄인이 성화 한다고 해서 의인이 되지 않아요.
 
모형은 아무리 정교하고 화려하게 해도 모형이지 실체가 아니에요.
율법은 모형이에요.
율법 속에는 의가 없어요.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켰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요구하는 의를 이룰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바라는 의는 하늘에서 오신 실체에게 있어요.
하나님의 의는 실체이신 예수님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로 나오지 말라고 해요.
예수님의 의를 앞세우고 나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 외에 다른 의를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율법 외에 다른 의를 증거하다가 율법의 의를 가진 자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았어요.
율법 외에 다른 의를 주셨다는 것은 율법의 의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모형과 실체가 따로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으로 장막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장막이란? 성막을 말합니다.
성막은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죄인이 희생 제물의 피로서 하나님께 용서받고 화목 하는 곳입니다.
 
성막에는 하나님이 세운 제사장이 있고, 희생 제물이 있고, 제사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성막을 주신 것은 죄인이 희생 제물의 피로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율법 속에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죄사함을 받는 제사 제도를 주신 것은 인간들의 행위로는 죄사함을 받는 길은 없다는 뜻이 담겨져 있어요.
의로운 분이 대신 죽어주심으로서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성막을 율법 속에 담아 놓은 것입니다.
 
인간은 사는 날 동안 죄가 늘 터져 나오듯이 제사도 늘 지내야 합니다.
오늘 제사 지냈다고 내일 죄 지은 것까지 용서받지 않아요.
그러니 땅에서 드려지는 모형적 제사는 늘 짐승을 잡아야 합니다.
인간이 늘 죄를 흘리고 다니듯이 매일 짐승의 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과 저녁으로 상번제를 드리라고 했어요.
 
상번제란? 항상 지내는 제사란 말입니다.
하루도 거르지 말고 아침저녁으로 늘 드리는 제사입니다.
언제까지 지내느냐 하면 하늘에서 실체가 오기까지에요.
하늘에서 오신 실체가 온전한 제사를 지내주기까지 드려야 해요.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늘에 있는 실상을 보았어요.
거기에 예수라는 제사장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제사장이 제사를 지내는데 양이나 소가 아니고 자기 몸으로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매일 지내는 것이 아니고 단번에 끝내더라고 합니다.
자기 몸을 드려서 단번에 끝을 냈어요.
 
단번에 드린 제사가 영원히 효과가 지속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홍역 예방접종을 한번 맞으면 평생 가듯이 말이에요.
즉 아담 한 사람의 죄가 모든 인간에게 전이(轉移)가 되듯이, 의로우신 예수님의 의가 자기백성들에게 영원한 속죄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몸으로 드린 단번의 제사는 땅에 있는 모형인 제사장들이 매일 짐승을 잡아 드리듯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오신 실상이 드린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실상이 드리는 제사만 받으세요.
예수님이 드리는 제사만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겁니다.
 
모세는 이걸 그대로 본(本)을 따서 성막을 지었어요.
성막에서 드려지는 모든 것은 하늘에서 드려지는 제사를 흉내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막에서 드려지는 모든 것을 다 모형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막도 모형이고,
제사장도 모형이고,
제사도 모형이고,
제물도 모형이에요.
 
누구의 모형이냐?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사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의 모형이에요.
예수님의 피로서 자기 백성들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형이에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까지 모형으로 드려지던 율법신앙이 예수라는 실상 안에서 완성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을 올바로 알아야 껍데기를 붙잡고 진짜라고 우기지 않아요.
 
오늘 본문에선 이 모형을 옛 것이라고 합니다.
옛 것은 흠이 있어서 낡아지고 폐하여 질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모형이라고 했으니 율법은 흠이 있고 낡아지고 폐하여 질 것이란 말입니다.
왜 율법이 페하여 지느냐 하면 흠이 있기 때문입니다.
흠이란 죄에요.
 
왜 율법신앙은 흠이 있느냐?
율법은 죄인이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흠이 있는 자에요.
낡아지고 사라져야 할 존재란 말입니다.
 
흠이 있고 사라져야 할 죄인에게선 온전한 것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니 인간의 몸으로 행하는 율법 신앙을 붙잡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건 죄로 인하여 온전치 못하고 흠이 있고 낡고 페하여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율법신앙은 인간의 행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가짜라고 했으니 인간의 행함도 가짜란 말이 됩니다.
인간의 그 어떤 행함에도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되어요.
왜냐하면! 흠이 있는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율법을 누가 지켜야 하느냐?
하늘로부터 오신 진짜 되신 예수님이 지켜야 해요.
하나님은 예수님이 율법을 지킨 것만 받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흠이 없는 온전한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신 일만 보고 자기를 보지 말라는 뜻이에요.
믿으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은 인간은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어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가 믿어지는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믿어지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자기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의지하고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행한 것을 믿어요.
남이 한 것을 자기가 한 것처럼 믿을 수가 없어요.
이는 인간의 의식 구조가 나는 나고 남은 남이라는 것으로 인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자기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내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 믿음이지 하나님의 믿음이 아니에요.
자기 믿음이니까 ‘예수 믿어 주었잖아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주었다고 해요.
이들이 예수를 믿어주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고 자기 행위에요.
그러니 예수 믿어 주었잖아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밥을 먹어야 내 배가 불러요.
상대방이 나 대신 밥을 먹어 준다고 해서 내 배가 부르지 않아요.
이처럼 인간은 남과는 원리적으로 하나 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나와 남은 하나가 될 수 없고 둘이에요.
 
예수님이 한 것은 예수님이 한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못 믿는 겁니다.
아니 안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성으로 믿는다고 하여도 그건 어디까지나 관념이지 실제가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의 비유를 하셨지요.
거기에 보면 왕은 분명히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 주었어요.
그런데 빚진 자는 탕감 받은 것으로 여기지 않아요.
갚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어요.
무얼 보면 알 수 있나 하면 자기에게 빚진 자를 대하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백억을 탕감 받은 종이 길을 가다가 자기 돈 십만원을 빌려간 사람을 만나서 왜 안 갚느냐고 하면서 옥에 가두어버린 것입니다.
이 모습을 왕의 종들이 보았어요.
천억을 탕감 받았으면 십만원 빚진 자를 흔쾌히 탕감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들이 보아도 백억을 탕감 받은 자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왕의 종들이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려 주었어요.
그러자 왕이 탕감해준 종을 불러서 내가 너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탕감해 주었는데도,
너는 어떻게 작은 것 하나 갚지 않는다고 옥에 가둘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그 종을 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탕감 받은 비유를 얼핏 보면 조건부 탕감으로 보이지만 그 의미는 조건부 탕감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임금이 베푼 은혜를 알고 있느냐!
임금의 자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
 
이건 무엇과 같은가 하면 하나님께서 악인이나 선인이나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시는데,
그 비와 햇빛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을 알고 사느냐 모르고 사느냐를 묻고 있는 것과 같아요.
바울은 이 사실을 알려 주었어요.
 
사도행전 17장을 봅시다.
 
행 17:23-25절.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바울이 전도 여행을 다니다가 아덴이라는 곳에 갔습니다.
아덴은 지금의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를 말합니다.
거기에 보니 수많은 제단들이 있는 겁니다.
제단마다 각각의 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입니다.
각각의 신의 이름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이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이건 이방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라요.
이방인들은 인간이 신을 섬긴다고 믿고 있어요.
그러나 바울은 아니라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방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지만 말이에요.
 
섬긴다는 말은 돌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것을 받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죄인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것은 마치 임금이 빚진 자를 탕감해 준 것과 같아요.
탕감이란? 빚을 없는 것처럼 면제해 주는 겁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는 생명으로 도리어 하나님께 갚고자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갚을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인간에게 알리고 나누어야 해요.
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라고 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 준 것은 빚을 나중에 하나님에게 갚으라고 탕감 해 준 것이 아니고 탕감 받은 자로 살아가라고 해 준 것입니다.
탕감 받은 자는 탕감 받은 기쁨으로 감사하며 이웃에게 나누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포도나무에서 포도 열매가 맺히듯이 임금에게 용서를 받은 자라고 한다면 자연히 용서의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탕감 받은 종은 임금이 베푼 용서를 나중에 갚아야 할 것으로 여기고 있었어요.
그러니 자기에게 빚진 자에게 용서가 안 나오는 겁니다.
이는 임금이 베푼 용서를 갚아야할 채무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이 시대 화폐 가치로 100억이라고 본다면 백 데나리온은 10만 원 정도에요.
그만큼 비교 할 수 없는 액수란 말입니다.
100억을 탕감 받음이 믿겨진다면 10만원 빚진 자를 왜? 탕감해 주지 못하겠습니까?
10만원을 탕감 해 줄 수가 있어야 100억을 탕감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100억을 탕감 받았다고 하면서 10만원을 탕감해 주지 못한다는 것은 100억을 탕감 받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 앞으로 갚아야 할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관용이 안 나오는 겁니다.
남을 탕감해 준다는 것은 자신이 남에게 탕감을 받은 자만이 베풀 수 있어요.
그래서 관용은 성령의 은사로 나타난다고 하여서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관용은 한마디로 받은게 너무 기쁜 나머지 받은 걸 토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이에요.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의 활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걸 야고보서에서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한다고 했어요.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 믿음이 행하게 하는 것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봄이 되면 나무들이 새싹을 냅니다.
겨울철에 보면 다 메말라서 죽은 것처럼 보여요.
하지만 봄이 되면 살아 있는 나무는 반드시 새싹을 틔우게 되어 있어요.
모든 나무들이 새싹을 틔우는데 그 중에 어떤 나무가 새싹을 틔우지 않는다면 그 나무속에는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생명의 활동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용서 받았습니까?
말과 혀로 하지 말고 용서받음을 생명처럼 새싹을 틔우세요.
입술로만 나불거리는 것은 잎만 무성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아요.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 받았습니까?
믿어지십니까?
그럼 죄 용서 받은 자로서 감사하며 사세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불쌍히 여기세요.
나도 용서 받고 산다고 하세요.
인간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 구원이 주어진다고 증거하며 사세요.
 
사랑이 자기 안에 임하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사랑하게 되어요.
강요하지 않아도 사랑해요.
사랑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사랑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겁니다.
 
흔히들 나도 예수를 사랑하고 싶고,
나도 신앙생활 잘하고 싶고,
나도 예수 잘 믿고 싶다고 해요.
그런데 안 되는 걸 어쩌느냐고 합니다.
 
맞아요.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믿는 것은 인간의 각오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비처럼 내려와서 나를 적셔주고 장악하면 저절로 사랑이 되어요.
 
제일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내어 놓으려고 하니 가식이 되고 억지가 되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가장 쉬운 게 뭐냐 하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받은 자는 예수 믿는 게 쉽고 안 받은 자는 예수 믿는 게 불가능해요.
이처럼 예수님이 하신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아야만 믿어져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예수가 믿어지게 하시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자기를 위한 것이란 것이 믿어져요.
성령이 오시면 나와 예수님을 하나로 만들어요.
예수 죽음이 나의 죽음이고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라는 것이 믿어진단 말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한 몸이라는 것이 믿어져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곧 나를 위하여 한 일이라는 것으로 믿고 사는 겁니다.
 
난 여전히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 나 대신 죽어주심으로서 내가 살고 있다고 믿어져요.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한 겁니다.
이게 더 나아가면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켜 주셨다는 것이 믿어져요.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해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사마리아 땅 끝까지 내 증인(證人)이 되리라고 하셨지요.
증인은 일하는 사람이 아니고 본 것을 증거하는 사람이에요.
 
성령이 오셔서 무얼 하느냐?
예수님을 증거해요.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을 증인이 되어서 증거를 해요.
예수의 피로 우리 죄가 사해졌다고 증거해요.
 
증인은 본 것을 증거하는 자에요.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니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일으킨 사건에 의미를 세상에 알리는 겁니다.
 
마치 수가성 여인처럼 동네방네 다니면서 나 메시야 만났다고 증거하게 되어요.
자기가 상상하고 생각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만난 예수를 증거하는 겁니다.
증인이 되려면 본 것이 있어야지요.
내가 사건을 만들어서 보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든 사건을 목격하고 증거하는 겁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본 것처럼 믿어져요.
예수님의 십자가 도가 믿어져요.
 
십자가 도가 뭔가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거잖아요.
내가 죄값으로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나 대신 예수님을 죽게 하셨다는 것이잖아요.
다른 말로 내가 지켜야 할 율법을 예수님이 대신 다 지켜 주셨다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성령이 임하면 자신은 죄인이고 저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아울러 내가 받아야 할 그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았다고 담대하게 증거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살고 있다고 자랑할 수가 있는 겁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 감사가 나와요.
야! 내가 할 일을 예수님이 대신 해 주셨구나!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그래서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겁니다.
구원받고자 애쓰지 않아요.
 
성령을 받은 성도는 모든 말씀을 자기가 직접 받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서 받아요.
자기가 말씀을 지키고자 하지 않고 예수님이 지킨 것으로 살아요.
예수님이 나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주셨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겁니다.
이를 일컬어 믿음으로 산다고 해요.
 
자 다시 본문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늘에 있는 것을 본(本) 따서 땅에 모형으로 세우라고 했어요.
모형을 만들어서 하늘에 실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한 것입니다.
너희 죄 때문에 흠 없는 제물이 희생당하듯이 의로운 분이 죽임 당함으로서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성막에서 드려지는 일체의 신앙행위를 통해서 하늘에서 드려지는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하늘에 예수라는 제사장이 자기 몸을 제물로 제사를 드리고 있다고 했으니 우리가 양을 잡아서 드리는 제사는 가짜이고 예수님이 드리는 제사가 진짜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이걸 의와 인과 신이 담긴 제사라고 합니다.
 
그래야 비록 모형으로 드려지는 제사라 할지라도 바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모형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가지고 온전한 것인냥 잘난 척하면 안 되어요.
드리면서 온전한 것은 하늘에서 와야 합니다! 라고 해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형을 주실 때는 장차 실상을 주시겠다는 전제로 주셨어요.
그러니 모형으로는 실체가 오면 언제든지 바꾸겠다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지요.
 
두껍아! 두껍아!
새 집 줄게! 헌 집 다오!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새 집을 주었으니 헌 집을 달라고 합니다.
예수라는 새 집을 주었으니 율법이라는 헌 집을 버리라는 겁니다.
율법 외에 다른 의를 주었으니 율법에 의를 버리라고 합니다.
새 언약이 왔으니 옛 언약을 붙잡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 언약은 폐하여지고 새 언약이 굳게 선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낡아질 것과 영원한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더 좋은 언약을 가지고 오셨다고 하지요.
더 좋은 언약을 가지고 오셨다고 하는 것은 지금 있는 언약은 낡고 헌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언약을 주셨어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이에요.
옛 언약은 모형이고, 새 언약은 실체에요.
 
옛 언약은 땅에 것이고, 새 언약은 하늘에 것이에요.
옛 언약은 인간이 지키는 것이고, 새 언약은 예수님이 지켜요.
옛 언약은 흠이 있고 낡고 폐하여질 것이고, 새 언약은 온전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이걸 모세를 통하여서 이미 예표 적으로 보여주셨어요.
모세가 시내 산에서 두 돌 판에다가 율법을 받지요.
두 돌 판을 몇 번 받았나요?
두 번이지요.
두 번 받지만 내용은 동일해요.
 
내용은 동일하지만 첫 번째 돌 판을 줄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했어요.
그런데 이 계약은 깨어졌어요.
그리고 두 번째 돌 판을 주었어요.
두 번째 돌 판은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주었어요.
이 계약의 돌 판이 법궤 속에 보관이 되어 있어요.
 
이걸 언약으로 비교해 봅시다.
첫 번째 돌 판을 폐기된 옛 언약이라고 하고,
두 번째 돌 판을 영원한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처음 돌 판은 이스라엘이 범죄하여서 깨어졌어요.
이걸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흠이 있고 낡아져서 폐하여졌다고 합니다.
 
두 번째 돌 판은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주어졌어요.
하나님은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주신 두 번째 돌 판을 보관케 하였어요.
이스라엘은 두 번째 돌 판을 앞세우고 가나안에 입성을 합니다.
 
가나안은 천국의 모형이에요.
두 번째 돌 판을 새 언약을 상징해요.
그럼 천국은 새 언약을 앞세우고 들어간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새 언약을 그냥 언약이라 하지 않고 영원한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법궤 속에 두 번째 받은 돌 판을 담아 둔 것은 두 번째 돌 판이 이스라엘을 지켜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돌 판은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주어진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이스라엘은 모세 안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영적 의미로 보면,
모세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사람은 새 언약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고,
하지만 자신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옛 언약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에요.
 
율법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이 옛 언약 아래 있는 사람인지 새 언약 아래 있는 사람인지를 알 수가 있어요.
비록 율법 아래 있지만 율법에 의를 붙잡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붙잡고 살면 그 사람은 새 언약에 속한 사람인 겁니다.
 
이들이 바로 출애굽하여 가나안까지 입성한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아요.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살았어요.
여호수아 갈렙은 이런 사고를 가진 자가 구원 받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중요하니 다시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계약을 어겼어요.
그래서 계약이 파기되었음을 알리기 위해서 모세가 돌 판을 깨트린 겁니다.
이제 계약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죽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 앞을 가로막고 이스라엘을 죽이려면 자기를 죽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대신 자기가 죽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그래 좋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잡았어요.
이제 하나님은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신 겁니다.
모세를 다시 시내 산으로 올라오라고 하고선 두 번째 돌 판을 줍니다.
두 번째 돌 판은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 돌 판은 신약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생명을 담보로 성도를 용서해 주는 새 언약과 같은 것이에요.
두 번째 돌 판이 새 언약이란 말이 아니고 새 언약의 성격을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해되시지요.
 
새 언약은 긍휼히 여겨주시는 언약이에요.
우리 행위를 보지 않고 예수님의 행위를 보시고 용서해 주는 언약이에요.
내가 죽어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죽어 준 언약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 죄를 기억치 않는 겁니다.
 
12절.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은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죄를 기억치 않는 언약입니다.
죄가 있지만 용서해 주는 거에요.
누구를 보고 용서해 주나요?
구약에선 모세를 보고 용서해 주셨고 신약에선 예수님을 보고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대신 모세의 생명을 담보 받았으니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죽음은 하나님도 만족케 하고 이스라엘도 만족케 하는 중보적인 죽음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쏟을 저주를 예수님에게 쏟아 부은 겁니다.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 시켰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에 하나님이세요.
벌 줄 자에겐 벌을 주고, 상 줄 자에겐 상을 주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 죽어요.
 
이건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예외일 순 없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범죄했어요.
그럼 공의대로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대신 죽겠다고 했어요.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이스라엘을 살려 달라고 했어요.
이스라엘이 법을 지키지 못한 것을 모세가 대신 지키겠다고 한 겁니다.
어떻게 지키느냐 하면 자기 목숨을 대신 내어주는 것으로 지켰어요.
그래서 모세가 자기 생명을 담보로 내어 놓은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셨어요.
모세의 죽음을 담보로 이스라엘이 살아난 것은 구약 마당에 새 언약과 같아요.
모세는 장차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모형적으로 미리 보여준 겁니다.
그러니 구약 이스라엘 안에서도 이미 새 언약 정신이 있었던 겁니다.
모세의 목숨을 담보로 자기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사람은 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이스라엘이 이걸 몰랐던 겁니다.
율법을 자기들이 지키고자 하였어요.
이미 깨어진 것을 지키겠다고 덤빈 겁니다.
 
모세는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백성들에게 신명기를 통해서 알려 주는 겁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키지 못할 것을 이미 예언하였어요.
 
신명기 31장을 봅시다.
 
신 31:16-21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17.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18.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20.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21.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모세가 성령의 감동으로 앞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나는 장차 너희들이 어떤 짓을 할지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고 합니다.
앞날을 내다보니까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언약을 어길 것이라는 것이 보였어요.
너희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 때에 등 따습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겁니다.
그래서 배반의 노래를 지어서 부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배반한다는 것은 언약이 깨어진다는 겁니다.
언약이 깨어지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저주 받는 그 때를 당하면 지금 내가 너희에게 부르라고 한 이 배반의 노래가 증인처럼 될 것이라고 합니다.
 
어느 누가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싶겠어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든지 언약을 지키고자 합니다.
하지만 죄인은 마음먹은 대로 언약을 지켜 내지 못해요.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기는 것은 그들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나면서부터 죄의 종이에요.
 
죄의 종이란? 죄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못 이기기 때문에 죄의 종인 겁니다.
죄가 뭡니까?
하나님 뜻을 어기는 거잖아요.
 
죄인에게 있어 하나님 말씀은 소귀에 경(經)읽기에요.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다면 죄인이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죄인인 겁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죄인이에요.
 
왜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느냐?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죄 아래 가두어 두셨기 때문이에요.
 
갈 3:22절.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죄 아래 가두어 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시기 위함이에요.
참 재미있지요.
죄 아래 가두어 놓고 믿음을 주어서 구원을 하신대요.
 
무엇을 믿는 믿음입니까?
예수그리스도가 자기백성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시키기 위해서 죄 아래 가두어 놓은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아까 인간의 이성은 남이 한 것은 믿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고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를 믿게 하여서 구원하시고자 합니다.
믿을 수 없는 자에게 믿어서 구원을 시킨다는 것은 모순이에요.
아무리 하나님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시킨다 하여도 인간이 믿지 못하면 소용이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믿어지게 하는 겁니다.
성령으로 믿어지게 만들어요.
이렇게 되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가 되는 겁니다.
이를 구약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말씀해 주셨어요.
 
먼저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 봅시다.
 
렘 31:31-34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새로운 언약을 세울 것을 예언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언약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사하시고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날이 이르면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세운다고 합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다르다고 합니다.
옛 언약은 겉에 언약이고 새 언약은 마음에 언약이에요.
 
새로 세울 언약은 마음에 기록하는 언약이에요.
하나님이 법을 마음에 기록해 두신다고 합니다.
이건 마음으로 믿어지게 한다는 뜻이에요.
 
재미있는 것은 옛 언약은 하나님이 남편처럼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는 겁니다.
곁에 서서 언약을 지키도록 해 주었어요.
그런데도 언약을 지키지 못했어요.
 
신앙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 속에는 우리 것이 하나도 없고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만 담겨져 있는 겁니다.
그러니 자랑 할 수가 없지요.
 
아무리 언약 안에 머물라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머물도록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안 되어요.
왜 은혜를 안 주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 수가 없는가요?
이는 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도록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죄인에게 아무리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어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죄 아래서 난 죄의 종이라서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태생적으로 머리가 나빠서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아무리 유능한 과외 선생을 붙여 주어도 안 되는 것과 같아요.
공부해라!
공부해라! 해서 공부하는 아이는 없어요.
공부하는 척은 할 수가 있어요.
 
책상에 앉아서 책을 펴 놓아도 공부는 하지 않아요.
늘 딴 생각을 해요.
어떻게 하면 공부를 안 할까 궁리해요.
그러니 책상머리에 앉아서 이어폰을 귀에 끼고 노래듣고 있는 겁니다.
부모가 공부하는 놈이 무슨 음악을 듣느냐 라고 하면 그래야 공부가 잘된다고 합니다.
이건 순 거짓말입니다.
 
인간의 머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 할 수가 없어요.
돌 머리 주제에 두 가지를 생각한다고요?
머리 나쁘니 그런 말로 핑계를 대는 겁니다.
마음은 공부하기 싫고 연예인들처럼 노래하고 춤추고 싶은데 어찌합니까?
 
예수님이 그러지요.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나님을 섬기든지 재물을 섬기든지 하라고 하지요.
여기서 재물은 자기 자신과 같아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좇아가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그래요.
죄 짓고 싶은데 어찌합니까?
청개구리같이 하나님이 좌(左)하면 우(右)하고, 우(右)하면 좌(左)하고 싶은데 어쩝니까?
하라고 하면 안하고 싶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고 싶은데 어찌합니까?
 
오죽 했으면 몰래 먹은 떡이 맛이 있다고 했겠어요.
이건 죄 짓는 게 재미있다는 말입니다.
죄인에게 있어 죄 짓는 것만큼 재미있는 게 없어요.
 
반항하는 재미!
거역하는 재미!
어깃장 놓는 재미가 보통 재미가 아니거든요.
 
인간은 남이 강요하면 이상하게 하기 싫어요.
인간의 심성은 남이 시켜서 하면 자존심을 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부러 안 해요.
시키는 대로 하면 그 사람에게 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같은 일이라도 시키면 안 하는 겁니다.
일단 안 할래 거부해요.
 
멀쩡히 잘하던 광대놀음도 멍석 깔아 주면 안한다는 말이 다 이런 뜻이에요.
혼자 자기 방에서 노래하면서 춤을 추던 놈도 부모가 춤을 추라고 하면 안 추어요.
이게 다 죄성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인간은 남에게 지시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게 모두가 죄가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자존자로 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아무리 교회 빠지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성경봐라!
기도해라!
봉사해라!
늦어도 예배 시간 10분 전까지는 나와라! 하여도 소용없어요.
예배 시작 5분 후에 와야 목사를 이긴 것 같은 생각이 든다니까요.
 
교인들에게 시킬 필요가 없는 겁니다.
시켜도 안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에 내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마음으로 우러나야 가능해요.
그런데 인간의 마음을 죄가 지배하는데 어떻게 우러납니까?
죄 때문에 안 되어요.
 
그래서 바울은 왜 그런가 살펴보니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도록 가두어 놓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롬 11:32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순종이 안 되도록 한 것은 순종해서 구원이 안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순종해서 구원을 못 받게 한 것은 용서 해 줘서 구원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구원 속에는 하나님의 용서가 담겨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용서 해 줘서 구원받는다고 하면 인간들이 좋아 할 것 같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죄인은 공짜로 주면 자존심 상해해요.
자기 체면이 말이 아니거든요.
한마디로 쪽팔리는 겁니다.
자존심 상 뭔가 한 마디를 하기는 해야겠는데 그냥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용서 해 주시니까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자존심으로 사는 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인간들은 공짜로 주는 구원은 싫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을 좋아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구원 받겠다고 하는 겁니다.
남에 집에 가서도 밥을 얻어먹어도 공짜로 얻어먹었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장작이라도 패 주고 얻어먹어야 자존심이 덜 상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인간의 자존심을 뭉개는 구원을 베푸는 겁니다.
불순종하는 인간을 용서해 주어서 구원해 주는 겁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찾아가서 구원을 해 주는 겁니다.
천국에서 찍 소리 못하도록 만든 겁니다.
 
베드로를 유구무언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 할 때 막아주지 않은 겁니다.
자기가 한 장담을 지키지 못하도록 한 거에요.
일구이언을 하게 한 겁니다.
남아일언중천금이 아니라 남아일언풍선껌이에요.
인간은 자기가 한 말도 지켜내지 못하는 쪼다들인 겁니다.
 
베드로가 지금 천국에서 찍소리 못하고 어린양에게만 찬양하고 있어요.
천국에 있는 24장로 중에 베드로도 포함되어 있어요.
24장로가 천국에서 자기가 받은 면류관을 어린양에게 던지는 것은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어떤 곳이냐 하면 영원토록 찍소리 못하고 사는 곳이에요.
찍 소리 못한다는 것은 자기 자랑을 하지 못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천국은 오로지 어린 양만 찬양하는 곳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죄인이 순종해서 구원 시키는 일을 하시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던 나라의 본 자손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데로 쫓아내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방인에게 긍휼을 베풀어서 천국에 들여보내는 것입니다.
이걸 지금식으로 말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는 자들은 지옥으로 보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천국으로 보내요.
 
자 보세요.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안 되도록 해 놓으셨다고 하지요.
그런데 죄라는 놈이 이 원리를 역행하도록 역사를 해요.
어떻게 역사합니까?
순종하라고 역사를 하지요.
왜냐하면! 죄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쪽으로 운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걸려서 넘어진 자들이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다가 망한 사람들이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이 지옥 갈 죄였어요.
굉장히 쇼킹하지요.
뭔가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바울이 이를 잘 증거해 주고 있어요.
 
롬 9:30-33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0:1-3절.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한 신앙생활을 의 이야기로 하고 있어요.
의란?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는 겁니다.
이방인들은 의를 좇아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의를 얻었어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며 의를 좇아갔어요.
그것도 아주 열심히 지극정성으로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율법으로 나온 의는 가짜 의였기 때문입니다.
율법 속엔 하나님의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초두에 모형과 실체를 말했지요.
모형은 가짜라고 했지요.
율법은 모형이라고 했으니 율법으로 만든 의는 가짜에요.
죄인의 행함은 가짜에요.
 
인간의 행함 속에는 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진짜 의는 하늘에서 주어지는 의에요.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에요.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고자 하다가 망하였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 의를 세우고자 한 것은 율법에 흠이 없이 산 것입니다.
 
바울이 장본인이에요.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찾아 주시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 의를 세우고자 열심이었어요.
자기 의를 세우고자 하나님의 의를 거부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바울을 태클을 건 겁니다.
위에 말씀처럼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으로 바울을 넘어뜨린 겁니다.
예수님에게 걸려 넘어지고 보니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는 것을 안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이제는 오직 예수의 십자가만 증거 하기로 작정을 했다고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있다고 증거 하였어요.
그러다가 예전이 동문수학을 하던 동무들로부터 이단이라고 정죄당하고 말았던 겁니다.
 
이런 일이 지금도 교회 안에서 자행되어지고 있어요.
일명 성화를 주장하는 목사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큰 소리 칩니다.
성령 충만 받아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해요.
바리새인들과 똑 같아요.
이들에게 육신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다고 하면 화를 내요.
 
이 사람들은 성령을 오해하고 있어요.
이들은 성령이 왜 오셨는지를 몰라요.
 
하나님의 뜻이 만약에 인간을 개과천선(改過遷善) 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성령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주셨을 겁니다.
그랬으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일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성령 충만으로 예수님을 지켜주었을 테니까요.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잘라낼 정도의 충성심이었다면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주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처지가 되자 다 도망갔어요.
예수님은 도망 간 놈들을 찾아가서 용서해 주었어요.
이게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해서 구원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 충만을 주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지 않도록 막아주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의 죽으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예수님의 피가 자기백성들의 죄를 사하게 하는 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걸 모세가 시내 산에서 보았다고 했잖아요.
성령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서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주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행 2:32-33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의가 되기 때문에 부활하게 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사망이 예수를 받아 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망은 죄인만 가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기 때문에 사망이 가둘 수가 없어서 토해 낸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죄인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께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자기 백성들에게 보내 주신 겁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믿어져요.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걸 예언했어요.
에스겔 선지자는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한 약속을 예언했어요.
 
겔 36:26-27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새 영(靈)과 새 마음을 준다고 하지요.
우리가 새 마음을 일구고 만드는 것이 아니고 부드러운 마음을 준다고 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이란? 하나님의 언약이 믿어지는 마음을 말해요.
그래서 성령이 오면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란?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얻는 거잖아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우리 죄를 그에게 다 담당 시키셨다는 거잖아요.
이걸 믿어지게 하려고 성령을 보내 주신 겁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주어지는 의가 훼손당하지 않게 하세요.
 
지금부터 중요한 말이니 잘 들으세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지요.
그렇다면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만 높이 드러나게 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죄를 고발하겠지요.
예수님의 의만 남게 하려고 인간의 의를 부정하겠지요.
너희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 없는 자라고 고발하겠지요.
그래야 예수가 너희 대신에 죽었다고 증거해 줄 것이 아닙니까?
 
성령이 오시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해요.
유대인들은 율법적 죄관과 의관과 심판관으로 살았어요.
다시 말해서 율법 지키면 의롭고 안 지키면 불의하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녀가 태어나자 말자 율법을 가르치기에 급급했어요.
 
율법대로 산 자기들은 천당에 가고 율법을 모르는 세리와 창기들은 지옥에 간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대로 산 나라의 본 자손은 지옥으로 가고 세리와 창기들이 먼저 천당에 간다고 했어요.
성령이 오시면 이런 유대인들의 죄관과 의관과 심판관이 틀렸다고 지적을 한단 말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오면 인간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의가 된다고 한 율법적인 의관이 죄라는 것으로 드러나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의가 된다는 것이 죄로 판명이 나요.
 
아주 역설적이지요.
바울이 성령을 받고 놀랐어요.
세상에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특심하다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어요.
율법대로 산 자들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간다고 하니 어찌 기절하지 않겠어요.
 
성령은 죄인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세요.
그래서 성령은 성도 안에서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 않고 주 예수를 믿게 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율법에 의를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믿게 하신다구요.
 
이렇게 되면 이 시대 성령 충만 받아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하라고 가르치는 목사는 성령론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드러나지요.
이 시대 교회에선 성령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게 한다고 가르치고 있잖아요.
이게 마귀인줄 몰라요.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도 하나님 앞에 의가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하는데 도리어 의가 된다고 가르치고 있잖아요.
 
제가 아는 어떤 목사는 죄를 안 짓고 산대요.
수원에서 목사님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교제를 하는데 어떤 목사님 한분이 끝까지 인간의 의를 내세우는 겁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죄 안 짖고 살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는 그렇게 산대요.
 
이 사람은 죄가 무엇인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율법적이 죄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 난 죄 안 짓고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이런 망발을 하는 것입니다.
 
설사 율법적 죄관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인간은 율법을 다 지켜 낼 수도 없어요.
물론 부분적으로는 가능해요.
하지만 하나님의 요구는 최선을 다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완전을 요구하세요.
어느 정도 죄 안 짓고 사는 게 아니고 아예 죄를 안 짓고 사는 것을 원해요.
 
오른 쪽 눈이 범죄하면 빼내고,
오른 쪽 팔이 범죄하면 잘라내고,
원수가 주리면 먹이고 욕을 하면 축복하고,
누가 욕을 하더라도 욕하지 말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벗어주고,
재산 팔아서 교회다 다 바쳐야 하고,
예쁜 여자를 보아도 마음으로라도 음욕을 품지 말고,
새벽기도 철야기도 했다고 자랑하지 말고 24시간 쉬지 말고 기도하고,
자식이 죽어도 감사하고,
사업이 망해도 감사하고,
교인들이 이웃교회로 다 옮겨가도 감사하고,
열심히 목회 했는데 암병 걸려 죽어도 감사하고,
멀쩡한 자식이 수영하다가 익사해도 감사해야 하고,
회사에서 짤려도 감사 할 수 있어야,,,,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에요.
돌을 던지고 죽여도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여야 한다구요.
어느 때까지 해야 하냐 하면 죽을 때까지이고,
그것도 하루 24시간 모두를 그렇게 살아야 온전한 삶이에요.
 
그런데 이런 삶을 살아갈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죄 안 짓고 산다고 하면 자기 안에 미움이나 시기나 질투나 탐심이나 음욕이나 악한 생각과 같은 것들까지 다 없어야 죄 안 짓고 산다고 할 수가 있어요.
그럼에도 자기 뜻이 틀렸다고 성질을 내면서도 죄 안 짓고 산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 사람은 인간 자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 안 해요.
죄인에게도 선(善)이 있다고 믿어요.
이 사람은 성령으로 예수님을 드러내는 게 아니고 자기 치장하기에 바빠요.
죄인 주제에 나 이렇게 거룩한 사람이야 라고 자랑하고 있어요.
 
이건 마치 타짜라는 영화에 보면 정 마담(김혜수)이 놀음판에서 고리 뜯어 먹는 주제에 나 이래봬도 이대 나온 여자야! 라고 꼴값 떨고 있는 것과 같아요.
그래 그 좋은 명문대학인 이화여대를 나와서 놀음판에서 고리 뜯고 있습니까?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말입니까?
 
죄인 주제에 나 성화 했어! 그러는 것이 정 마담과 같은 바보짓이에요.
이건 완전히 바리새인이에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쯧쯧 하고 조소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서로가 이단으로 살자고 했어요.
그 사람이 볼 때는 제가 이단이고, 제가 볼 때는 그 사람이 이단인 겁니다.
 
이는 아직까지 바울처럼 다메섹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서 그래요.
그러니 바울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게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예수를 핍박하고 훼방하는 것인 줄 몰라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딤전 1:13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 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은 자기가 율법에 흠이 없고 열심이었을 때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고 합니다.
믿지 아니할 때라고 했어요.
언제 바울처럼 다메섹 사건이 일어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한 것이 그리스도를 훼방하고 핍박하고 포행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요.
하루 속히 그런 날이 임하길 바랄뿐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게 아니고 악령을 받은 겁니다.
성령을 받으면 인간을 부정하는 사람이 되지만 악령을 받으면 인간을 긍정하는 휴머니스트가 되어요.
인간 쪽에서 보면 인간을 인정하고 가치 있다고 하는 사람이 천사처럼 보여요.
세상은 이런 천사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교회마다 이런 천사를 생산해 낸다고 불철주야 난리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선 노숙자에게 밥 퍼주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라고 하지 그걸 죄라고 보지 않아요.
고아를 돌아보고 자선냄비에 적선하고 불우 이웃을 돕는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아름답잖아요.
인간이라면 이렇게 살아야지요.
 
인간 입장에서 인간의 가치관으로 본다면 고아를 돌아보고 자선냄비에 적선하고 불우이웃을 돕고 노숙자들에게 밥 퍼 주는 것을 죄라고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이런 일들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라고 하면 죄가 되어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뿐이에요.
예수님의 피 앞에선 인간의 그 어떤 것도 다 죄가 되는 겁니다.
 
이런 일을 하더라도 이게 하나님 앞에선 의가 되지 않습니다! 라고 하면 되어요.
그냥 인간의 측은지심으로 하면 됩니다.
그러면 누가 그 일을 신앙적으로 공격하여도 섭섭할 이유가 없어요.
그럼에도 이런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고 하면 화를 낸다는 것은 그것을 의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는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라고 반문하겠지요.
이렇게 되면 인간의 행함 속에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어디서 어디까지 선이고 어디서 어디까지는 악이다 라고 해야 한다구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의 행함을 선이다 악이다 구분하는 것을 악이라고 해요.
 
하나님이 바라는 선은 예수 안에만 있어요.
선이란 의인데 하나님이 바라는 의는 예수님의 피에게만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피 이외에 다른 것으로 선이라고 접근하는 것은 죄가 되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잘 새겨서 들으세요.
 
마귀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지 거역하라고 하지 않아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라고 하지 불의한 자가 되라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붙잡고자 하지 않고 인간의 의를 붙잡는 겁니다.
마귀에게 붙잡힌 사람은 하나같이 광명의 천사들이에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마귀는 항상 인간의 의를 드러내라고 해요.
인간을 기쁘게 하고,
인간을 긍정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겨요.
그래서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한 겁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의를 집착하는 것은 인간의 의 속에 자기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자기 부인이 안 되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육신은 자아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자기 밖에 몰라요.
그래서 자기 의를 마일리지 쌓듯이 쌓아가는 겁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막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의 행함 속에는 의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의가 없으니 그걸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인간은 온전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좋지요.
성도라면 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요.
그러나 마음먹은 대로 살 수 없을뿐더러 하나님 뜻대로 살아도 하나님 앞에선 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해요.
 
좋은 것과 옳은 것은 달라요.
좋은 것은 질적인 문제이지만 옳은 것은 정답의 문제에요.
질적으로는 좋고 나쁨은 정도의 차이기 때문에 좋아도 되고 나빠도 괜찮은 겁니다.
그러나 정답은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 때문에 적당히 타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좋고 나쁨의 문제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느냐 안 믿느냐는 죽고 사는 정답의 문제인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어요.
인간은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해요.
그래서 성령이 늘 이런 것이 죄라고 지적을 하고,
이런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고,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이라고 알려 주세요.
자기 안에 선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아요.
 
새 언약 안에선 인간이 할 것이 없어요.
내 세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굳이 한다고 하면 자기 죄를 예수님의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성령이 성도의 마음속에 새 언약을 새겨 놓았어요.
 
10-12절.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이 새겨진 사람은 예수님의 피로서 불의에서 깨끗케 되었음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만 자랑하고 살게 되는 겁니다.
새 언약이 새겨진 사람은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을 뿐더러 행함으로 인하여 희비하지도 않아요.
 
제발 온전해지려고 하지 마세요.
막 살라는 말이 아니고 온전치 못한 자라는 것을 알라는 말입니다.
온전치 못한 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성도가 토해 내야 하는 것은 자기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에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는 거예요.
새 언약이 믿어지면 쉼을 얻어요.
일체의 수고로부터 해방이 되어요.
 
사람이 제일 힘든 것이 자기를 관리하는 겁니다.
죄인이 죄 안 지으려고 관리를 하자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겠어요.
위선을 떨어야 하고, 겉과 속이 다르게 위장을 하여야 하니 얼마나 쫓기겠어요.
죄인이 죄 안 짓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제발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세요.
난 죄인입니다! 라고 커밍아웃하세요.
이거 하라고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예수님이 그럽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고 하잖아요.
 
당신은 제사로 나아가고자 합니까?
긍휼히 여겨 달라고 나아갑니까?
부디 성령의 조명으로 우리 안에 있는 악함 들을 다 드러내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기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주제를 아는 지혜를 주옵소서. 내 안에 선이 없고 의를 행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께서 성령으로 심어 주신 법으로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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