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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52강. 심판을 이기는 근거 (히 9:27-28)

by coroa 2021. 5. 11.

 

[52강. 심판을 이기는 근거 (히 9:27-28)]

-.정낙원 목사

 

오늘은 말씀의 주제가 심판이라서 좀 가볍게 하려고 합니다.
아니 심판이면 더 강하게 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신앙의 판정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답이 없는 것이라면 목소리가 크면 유리하겠지만 신앙에는 정답이 있는 것이라 큰 소리 칠 이유가 없답니다.
 
정답을 가지고 있으면 목소리가 작아도 이기지만 틀린 답을 가지고 있으면 목소리가 아무리 커도 탈락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답이냐 아니냐에요.
오늘은 그 정답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앙은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을 믿을까가 남게 됩니다.
하나님이 믿으라고 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믿으라고 하신 것을 믿는 것이 곧 진리입니다.
 
진리 문제에 있어서 해답은 마치 화투판에서 끗발이 센 사람이 이기는 것처럼 정답을 가진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심판을 이기게 하는 것이 곧 정답이에요.
 
비속어이지만 제가 복음을 화투판에 장땡이로 비유로 합니다.
화투판에서 장땡이는 최고에요.
이 패만 가지고 있으면 느긋해요.
그 누가 뭐라고 해도 동요할 것 없이 표정 관리만 하면 됩니다.
어렸을 때 화투를 친 경험이 복음적인 비유에 사용될 줄은 몰랐네요.
 
심판은 정답이냐! 오답이냐! 로 판가름해요.
그러므로 정답과 오답의 문제에서는 목소리를 높일 이유가 없어요.
정답을 썼으면 목소리 높이지 않아도 이기고,
오답을 썼으면 목소리 높여도 틀리기 때문입니다.
 
심판관이 시험을 채점하는 것은 정답이냐! 오답이냐! 로 해요.
글씨를 잘 썼느냐! 못 썼느냐!
연필로 썼느냐! 볼펜으로 썼느냐! 로 판단하지 않아요.
오로지 정답이냐! 오답이냐! 만 봐요.
 
신앙생활이란? 예수 믿는 것입니다.
무얼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으라고 하신 것을 믿는 거에요.
믿는다는 것을 유념하세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한국교회에서는 방언이에요.
영 알아먹지를 못해요.
믿음을 인간들의 열심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면 믿음이 좋다고 하고 게으르고 나태하면 믿음이 없다고 해요.
물론 신앙은 열심으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해요.
그러나 그 열심이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하나님의 열심이냐! 내 열심이냐!
 
믿음이 없이도 얼마든지 열심을 낼 수가 있기 때문에 인간들의 열심으로는 믿음을 판단 할 수가 없어요.
참고는 할 수 있어도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에요
그만큼 짝퉁이 많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행함의 반대말이에요.
행함의 반대말이라는 말은 우리의 행함으로 믿음을 판단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누구를 믿는다는 것은 내 조건과 상관이 없어요.
믿는 사람의 조건만 필요해요.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믿음은 인간들의 행위와는 무관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으라고 하신 분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빠가 아이에게 아빠만 믿어!
그러면 아이는 자기의 조건을 볼 이유가 없어요.
아빠의 말만 들으면 되어요.
이게 믿음이에요.
 
그런데 이상하게 한국교회에선 예수 믿으라고 하면 자기에게 관심을 갖고 있어요.
어떻게 믿을까요? 라고 물어요.
아니 예수 믿으라니까요?
그러니까!
어떻게 믿는지 가르쳐 달라구요?
어떻게는 행위에요.
자기 행위로 믿음을 대체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믿는지 그 방법론을 알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 믿어지니까 자기 행위로 불안함을 해소하고자 하는 겁니다.
나! 이러면 저주 받지 않을까?
혹시 이렇게 믿다가 지옥 가는 건 아닐까?
분명히 말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안에 예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예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 행위로 천국 가고 지옥 가고를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는다”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예수를 믿는 것 속에 구원이 있고,
예수의 살과 피 속에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 속에 구원도 있고 영생도 있어요.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면 다른 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내가 이러면 되겠나! 라는 사고로부터 벗어나야 해요.
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이런 고민을 하게 되어요
자기 안에 법이 두렵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꾸 이렇게 하여야 한다!
저렇게 하여야 한다! 고 하는 것은 예수가 안 믿어진다는 겁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하신다는 것이 없어요.
 
교회 안 다니면 저주 받는다!
성경 안 읽으면 저주 받는다!
십일조 안하면 저주 받는다!
주일성수 안하면 저주받는다!
목사 말 안 들으면 저주받는다!
성화 안하면 저주 받는다!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살면 저주 받는다!
교회 부흥 안 시키면 저주 받는다!
개혁주의 안하면 저주 받는다!
사회정의 외치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
도적질 하면 저주 받는다!
간음하면 저주 받는다! 라는게 없어요.
 
이렇게 되면 저주의 문제도 아닌 것으로 다툴 이유가 없지요.
 
너! 성화 했냐! 안 했냐!
너! 교회 개혁했냐! 안했냐!
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냐! 안 살았냐!
너! 착하게 살았냐! 악하게 살았냐!
이런 것으로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 로 판단 할 일도 아니지요.
 
성경은 예수 안 믿으면 저주 받는다고 되어 있어요.
그럼 예수 믿으면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왜 불안해 합니까?
불안해하는 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 패가 신통치 않은 겁니다.
장땡이가 아니고 시월 단풍과 유월 목단 이파리를 가지고 장땡이로 착각하고 있으니 불안 불안해서 남에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이에요.
 
목사 눈치 살피고!
교회 오래 다닌 사람 눈치 살피고!
성경 많이 안다고 으스대는 사람 눈치 살피고!
다른 사람 패에 관심을 두는 겁니다.
 
넌 뭔데!
넌 어때!
예수가 어떻던데!
 
아니 왜 예수를 남에게 묻습니까?
내 남편을 왜 다른 사람에게 묻습니까?
예수님이 남편인 사람은 남에게 묻지 않아요.
받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남에게 묻을 필요가 없어요.
 
연인들이 사랑을 확인하는 것은 불안하기 때문이에요.
혹시 이 사람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생각이 들면 자꾸만 자기 나 사랑해! 라고 물어요.
그러면 애인이 짜증내요.
 
하나님의 사랑은 밀물처럼 우리에게 밀려와요.
이 사랑이 오면 든든해요.
의심이 가지 않아요.
의심이 가는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사랑이에요.
그러니 자기 안에서 자꾸만 의심이 생기고 두렵고 불안 한 겁니다.
 
예수님의 품에 안겼던 사도 요한의 증거를 들어봅시다.
 
요일 4:16-19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흔히들 사도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합니다.
12제자 모두가 주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요한은 특별한 사랑을 받았어요.
만찬 석상에서 다른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품에 안겼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 생각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 그가 사랑에 대한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사랑했어요.
다른 말로 우리가 사랑 안 해도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베드로처럼 예수를 부인해도 예수님은 날 찾아 오실꺼야!
이게 믿어져야 믿음이에요.
 
성령이 이를 믿어지게 해 주어요.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자기 행함을 의지하지 않아요.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요.
이렇게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는 사랑을 온전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온전한 사랑이 있는 성도는 두려움이 없어요.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뭔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랑 안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겁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사랑이 안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어요.
여기서 “결코” 란 말에 유의하세요.
“결코”란 말은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그 어떤 짓을 해도 정죄하지 않아요.
다른 말로 지옥가지 않아요.
참 신나지요?
극단적이라고 비유했어요.
비유이니 오해하지 마세요?
 
성도 안에는 성령이 와 계시므로 그 어떤 짓을 하도록 방치 하지 않아요.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징계는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회초리는 경계용으로 둔 것이지만 때론 불을 뿜어요.
암튼 성도는 행함으로 인하여 저주 받는 정죄함은 없어요.
이 사실이 믿어지면 두려움이 없어요.
 
두려움은 율법에 의하여 조성이 되어요.
율법이 자꾸만 너 말씀대로 살았어!
너 그렇게 살면 되겠니!
너 이것 지켰어! 라는 식으로 뭔가 우리에게 액션을 취하도록 해요.
 
그 안에 법이 살아 있는 사람은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안 살면 불안한 겁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뭔가를 하여야 하는 겁니다.
하면 안심이 되고!
안하면 불안하고!
그러니 신앙생활이 예수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는 겁니다.
 
혹시 날 버리면 어쩔까?
나 이렇게 신앙생활 하다가 지옥가면 어떡해!
자기 조건으로 판단하니 늘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이건 믿음이 아니에요.
자기 행함을 의지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은 우리 조건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해요.
우리가 조석(朝夕)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온전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하나님을 잡았다 놓았다 해요.
이건 예수 믿는 게 아니에요.
 
믿음을 받으면 제일 먼저 배짱이 생겨요.
두려움이 사라진단 말입니다.
휴~ 하고 안심이 되어요.
왜냐하면! 내가 지키고 행하여야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 있다가 믿음이 오면 이게 믿어져요.
 
이게 믿음이에요.
그럼 심판은 예수 믿느냐! 안 믿느냐! 로 판단해야지요.
믿으면 믿는 것이고, 안 믿으면 안 믿는 거예요.
믿느냐! 안 믿냐! 라는 것으로 성질내고 타툴 일이 아니에요.
 
믿어지시면 종용히 말하세요.
아주 종용히!
“예~수~가~믿~어~지~세~요!~” 라고 귓속말로 물으면 되어요.
그러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 믿~어~져~요! ~확~실~하~게!~” 라고 대답합니다.
그럼 서로 씨익 웃으면 되어요.
 
믿어지는 사람은 믿어지는 것으로 살고, 안 믿어지는 사람은 안 믿어지는 것으로 살아요.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잖아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시종일관 예수 믿음을 내어 놓는 겁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난 결코 정죄함이 없어!
그런단 말입니다.
 
인간에서 나온 것을 행함이라고 하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을 믿음이라고 해요.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은 사람은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 것을 내어 놓아요.
난! 이렇게 살았습니다!
난! 저렇게 살았습니다! 라는 식으로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내어 놓고 믿는다고 해요.
 
야고보서가 말하는 믿음과 행함이라는 말도 믿음이 주는 것을 내어 놓으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믿음에다가 뭘 담아서 주셨어요.
그게 뭔가 하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에요.
믿음 안에는 예수님의 것이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믿음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것을 내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일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것이 뭡니까?
십자가에 피 흘린 거잖아요.
자신의 피로 언약을 세우셨어요.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어요.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해요.
 
그럼 믿음을 받은 사람은 새 언약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죽으셨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율법의 요구로부터 해방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님의 피 안에서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아주 간단해요.
복잡한 것이 없어요.
받은 것만 내어 놓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받은 것이 없으면 자기가 믿음을 만든다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난리입니다.
 
금식도 해보고!
새벽기도도 해보고!
교회를 위하여 죽도록 충성도 해보고!
집 팔아서 헌금도 해보고!
전도도 해보고!
성경도 달달 외워보고!
 
좌우지간 믿음에 좋다고 하는 것은 다 해 보는 겁니다.
쉬운 말로 종교적인 열심을 다 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도 허전한 마음은 달래지지가 않아요.
텅빈 가슴은 채워도 채울 수가 없어요.
제가 과거에 그랬어요.
아무리 해도 공허한 겁니다.
안 믿어지는데서야 백약이 무효지요.
 
백날 만들어 보세요.
믿어지는가!
믿음은 만들 수가 없어요.
제가 약 40여 년 동안 만들다가 만들다가 실패했어요.
 
여러분! 믿음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믿는다고 하면 믿는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나는 돼지 대가리를 믿는다!
아니다! 난 닭 대가리를 믿는다!
아니야! 난 말 대가리를 믿어!
아니야! 나는 소나무 뿌리를 믿는다!
 
암튼 뭔가 믿는 게 있을 것 아닙니까?
난 나를 믿는다!
그러지는 않을 것이잖아요.
그래요.
믿음은 믿는 대상이 있어요.
 
난 문00이를 믿는다!
그러면 문00이를 메시야로 믿어야지요.
아니야! 난 이00를 믿어!
그러면 이00를 메시야로 믿어야 해요.
문00이나 이00를 메시야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메시야가 아니라고 하면 귀싸대기 맞아요.
 
그런 사람들에겐 그래 열심히 믿으세요!
그러세요.
왜 남의 환상에 흥을 깹니까?
본인이 이것이 답이 아니다 라고 깨달을 때까지는 곁에서 아무리 알려줘도 안 들어요.
아니라고 하면 물어요.
 
복음은 설득하는 게 아니에요.
선포에요.
선포하면 귀 있는 자는 듣고 귀 없는 자는 안 들어요.
어떤 분의 블로그에 들어가 보니 제가 쓴 “새 생명의 삶에 대한 오해” 라는 글을 올려놓았더라고요.
 
그런데 거기에 어떤 분이 반론하는 글을 댓글로 적었어요.
왜 성도의 삶을 무시하느냐 에요.
그러면서 자기의 말을 성경이 증거하는 것이라고 성경 구절을 도배하다시피 적어 놓은 겁니다.
봐라!
성경에 이렇게 많이 성화를 말하고 있지 않느냐! 라고 열변을 토하고 있어요.
 
그 분이 성화를 입증하는 말씀이라고 성경을 인용한 것은 전부 본문에 의도가 아니에요.
성화를 말하는 말씀이 아닌데도 자기 눈에는 성화이야기로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아전인수(我田引水)으로 자기 마음대로 말씀을 이용하고 있는 겁니다.
 
본인 눈에 성화하라는 말씀으로 보이면 어쩔 수 없어요.
성화하라는 말로 들어야지!
아니라고 하면 되레 화를 냅니다.
 
그 분 입장에서 저를 보면 얼마나 안타깝겠어요.
어떻게 성경을 단편적으로 보느냐?
왜 모든 것이 죄라고 만 하느냐?
이렇게 많은 성경이 성화하라고 말하는데 왜 성경대로 말하지 않느냐? 라고 가슴을 치는 겁니다.
자기는 안타까운 마음에 좋다고 하는 성경 구절을 다 끌어다가 적어 놓았는데도 제가 몰라주니 얼마나 안타깝겠어요.
 
이건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 속에서 풀무불 밖을 바라보는 심정이에요.
풀무불 밖에선 풀무불 속에 들어간 세 친구가 너무도 불쌍해요.
어휴~ 저걸 어째!
가련하고 불쌍해서 어떻게 해!
그러게 진즉 내 말을 듣기 그랬어!
그러면서 안타까워해요.
 
그런데 풀무불 속에 예수님이 계세요.
세 친구는 지금 십자가(풀무불) 너머 천국에서 세상(풀무불 밖)을 바라보고 있어요.
세 친구들은 세상 수고 다 끝내고 쉬고 있어요.
성화라는 법에서 해방이 되어 예수님의 의로 안식하고 있어요.
 
하지만 풀무불 밖에 있는 사람들은 성화하여야 한다고 아비규환이에요.
너 말씀대로 살았어!
너 기도했어!
너 성경 읽었어!
그러니 풀무불 속에 들어간 세 친구들이 밖에서 성화하고자 안타까워는 그 분들이 얼마나 가련하겠어요.
 
돌에 맞아 죽어가는 스데반은 천국에 간다고 좋아 하는데 스데반을 죽이는 사람들을 스데반이 그렇게 불쌍해요.
그러게 십자가만 말하지 말고 성화도 말하지 그랬어!
개혁주의 성화주의(율법)를 건들지 말지 그랬어!
그 십자가만 외치다가 이단이 되어서 그렇잖아!
아이구! 쯧쯧~
 
누가 누구를 위로해야 하겠습니까?
누가 누구를 안타까워해야 합니까?
지금 제가 그래요.
우린 성화를 외치는 그 분이 불쌍하고,
성화를 외치는 그 분은 우리가 불쌍하고 안타까워요.
 
그래요.
전 참으로 안타까운 놈이에요.
하지만 저도 안타까워요.
저렇게 심성이 착하고 순진한 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내가 나를 생각해도 안타까워요.
 
아마도 죽으면 좋은데 갈 것입니다?
저렇게 심성이 고운 분이 좋은데 안가면 누가 가겠어요?
외골수 같이 십자가 피만 외치는 자들이 가면 안 되잖아요?
거룩하게 성불한 사람들이 가 있는 곳에 저 같이 개판인 사람이 가면 안 되지요.
인간들이 알고 있는 천당엔 저런 분들이 가는 곳이에요.
 
전 그 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를 해요.
그 분 입장에선 그렇게 밖에 성경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판단을 합니다.
자기 생각으로 성경을 읽어요.
그래서 자기 식으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 스님들이 성경을 읽으면 어떻게 해석 할까요?
불교 교리로 해석을 하겠지요.
불교 교리로 해석하면 자비심으로 여러분 이웃을 사랑하고 사세요!
그러겠지요.
 
그럼 공자님이 성경을 읽으면 어떤 해석을 할까요?
윤리도덕으로 하겠지요.
윤리도덕으로 보면 부모님 공양 잘하고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라고 하겠지요.
 
인도 자이나교에서 성자라고 하는 ‘오쇼 라즤니쉬’ 라는 분이 있어요.
이 분은 대단히 많은 것을 깨달은 분인데 인도에선 성자라고 해요.
그런데 이 분이 성경의 사 복음서를 강해했어요.
예수의 가르침을 인간 입장에서 강해했는데 인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혀요.
 
이 분 주장은 예수의 정신을 세상에 퍼트리자는 겁니다.
예수는 믿는 것이 아니고 본받는 것이라고 해요.
자신은 성경을 그렇게 본 겁니다.
 
이걸 이 시대 교인들의 신앙으로 접근해 봅시다.
옛 언약 아래 있는 사람이 성경을 보면 옛 언약으로 해석하겠지요.
옛 언약이란? 율법이에요.
율법은 인간이 행하는 겁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 전부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으로 해석하겠지요.
 
그럼 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성경을 어떻게 볼까요?
새 언약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것을 담당해 주는 거거든요.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다 지켜주신 겁니다.
그럼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성경을 어떻게 보겠어요?
전부 예수님이 지킨 것으로 보겠지요.
자기는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 때문에 산다고 하겠지요.
 
위에서 말한 것대로 라면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보는 사람마다 다른 해석을 내어놓았지요.
그럼 어느 것이 올바른 성경해석입니까?
무조건 난 이렇게 읽었으니 내 해석이 맞다고 하면 안 되겠지요.
누군가가 정리를 해 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축구를 하는데 양 팀 22명이 다 공을 갖고 차면 경기가 안 되겠지요.
경기가 되려면 공 하나를 가지고 서로 뺏고 빼앗아서 상대방 골문에 넣어야 경기가 되어요.
자기 공 자기가 자기 골대에 넣으면 그건 경기가 아니고 그냥 자기가 노는 겁니다.
22명이 다 자기 골대에 넣는 경기라면 누가 구경 가겠어요.
그냥 혼자 월드컵 우승하고 말지요.
 
그런데 22명 다 심판이면 어찌 되겠습니까?
개판 되겠지요.
다 자기가 옳다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럼 경기가 되려면 누가 있어야 합니까?
심판관이 있어야 하지요.
심판도 22명을 두면 안 되겠지요.
한 사람이 심판이 되어서 결정을 해 주어야 하겠지요.
 
세상이라는 그라운드에 수많은 종교가 있어요.
불교도 있고, 힌두교도 있고, 이슬람교도 있고, 브라만교도 있고, 기독교도 있고, 무당도 있어요.
종교마다 다 자기들이 진리라고 합니다.
다 진리이면 진리가 아니겠지요.
진리는 하나이어야 하잖아요.
 
교회 안에도 다양한 신앙이 있어요.
이걸 믿어야 한다!
저걸 믿어야 한다!
성화해야 한다!
아니야! 개혁을 해야 한다!
무슨 소리야 방언을 해야지!
이렇게 하여야 한다!
저렇게 하여야 한다!
참 복잡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선 교회를 일컬어 각종 개구리 영들이 모인 귀신의 처소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 온갖 잡소리가 다 들어와 복음이라고 외쳐지고 있어요.
교인들도 피곤해요.
이 놈이 오면 이 소리하고!
저 놈이 오면 저 소리하고!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몰라요.
 
그래서 나온 것이 에라 모르겠다!
아무거나 믿자!
이 놈! 저 놈! 하여도 열심히 하라는 것은 동일하니 소나 개나 열심히 하면 된다고 합니다.
 
권사님 뭘 믿습니까?
몰라!
목사님이 믿으래!
목사님이 뭘 믿으라고 하던가요?
무조건 열심히 교회 다니고 믿으면 된대!
 
어느 할머니가 교회를 다닌지 6개월이 지나서 세례를 받고자 목사님이 문답을 합니다.
목사님께서 문답을 하기 전에 무엇을 물을지 며느리에게 예문(例問)를 주고 준비하라고 했어요.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하는 말!
어머님!
목사님이 예수님이 누구 죄 때문에 죽으셨어요! 라고 물을 겁니다.
그러면 나! 때문이라고 대답하세요.
 
그래 알았다!
그렇게 대답할게!
꼭 나 때문이라고 해야 해요!
알았다니까!
 
이제 주일날 문답 시간에 목사님이 묻습니다.
할머니 예수 믿으세요.
응!
예수님이 누구 죄 때문에 돌아 가셨어요.
응! 우리 며느리 때문에!
헐~
 
피식하는데!
우습다 이거지요.
그런데 이런 짓을 누가 하고 있느냐 하면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어요.
아니라고 하고 싶지요.
 
이 시대 교인들이 믿음! 믿음 하는데 그 속을 까보면 다 달라요.
가만히 분석해 보면 같은 교회 안에서도 믿음이 다 달라요.
십인십색이에요.
그러니 누군가가 옳다 그르다 심판해 주어야 하잖아요.
제가 할까요!
여러분이 할까요!
 
오늘 본문이 심판 이야기인데!
심판이란? 판정하는 겁니다.
심판관은 예수님이지요.
 
여기에 개혁을 말하고 성화를 하여야 한다는 사람도 이의를 제기하진 않겠지요.
그럼 예수님의 판단에 귀를 기우려야겠지요.
서로 잘났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의 판정을 받으면 간단히 해결이 되어요.
 
내가 아무리 맞다고 하여도 예수님이 ~노(no)~ 그러면 끝이에요.
반대로 한국교회가 다 틀렸다고 하여도 예수님이 ~예스(yes)~ 그러면 합격이에요.
예수님이 어떤 판정을 내리는지 알아야 하겠지요.
신앙은 열심과 충성보다 어느 것이 정답인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오늘 그 정답을 알아봅시다.
도대체 예수님이 뭐라고 했는지 살펴봅시다.
아까 신앙생활은 예수 믿는 거라고 했지요.
그럼 예수님의 뭘 믿으라고 하나요?
그 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거잖아요.
 
맞아요.
이걸 믿고 사는 게 신앙생활이에요.
그럼 죄를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너희는 이런 죄인이라고 알려주는 일을 하세요.
무엇으로!
하나님 말씀으로 해요.
 
그럼 말씀이 무슨 일을 하는지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12-13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잘 보세요.
하나님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날선 칼이라고 하지요.
살았다는 것은 온 사방으로 다 헤집고 다닌다는 겁니다.
어디를 헤집고 다니는가 하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헤집고 다녀요.
이는 다른 말로 인간의 정신과 마음과 행동과 말을 다 해부한다는 말입니다.
 
언행심사 전부에요.
이는 우리의 언행심사 모두에 죄가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언행심사 속에서 무얼 찾아내려고 해부합니까?
죄이지요.
 
자 중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신, 구약 성경 모두를 말해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사도 서신 전부를 말해요.
그럼 신약이든 구약이든 성경을 펴서 말씀 앞에 서면 뭐가 튀어나와야 합니까?
죄이지요.
 
그런데 이 죄가 또 두 가지에요.
예수 안에서 바라보는 죄가 있고, 예수 밖에서 바라보는 죄가 있어요.
이 세상에 인간은 두 부류에요.
예수 안에 있는 인간과, 예수 밖에 있는 인간이 있어요.
 
예수 안에서 판단하는 죄와, 예수 밖에서 판단하는 죄가 달라요.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선악이라는 법 아래서 출생해요.
인간 속에는 선악의 법이 담겨져 있는 겁니다.
 
신악의 법은 인간의 행위로 선이다 악이다 판단해요.
선악의 법 아래 있는 인간에게 성경을 주면 전부 자기가 행한 것으로 판단을 합니다.
말씀대로 살았으면 선이라고 하고 안 살았으면 악이라고 해요.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선악의 법에서 해방 되었어요.
선악의 법에서 해방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가 행한 것으로 판단 받지 않아요.
말씀대로 살았든 안 살았든 판단 받지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 안은 내 행위를 가지고 가타부타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한다고 하지요.
이는 기존에 율법 아래서 알고 있던 죄관과 의관과 심판관이 틀렸다고 책망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죄관과 의관과 심판을 알려주세요.
 
성령이 알려주는 죄관은 예수 안 믿으면 죄라고 해요.
예수 믿으면 의라고 해요.
아담 안에서 태어난 나를 지배하던 마귀가 이젠 예수님의 십자가로 박살이 났다고 알려주어요.
마귀가 심판을 받은 겁니다.
그러니 이젠 마귀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어요.
 
지금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셨어요.
그렇다면 성령이 말하는 죄 이야기를 해야 하겠지요.
그럼 성령이 무엇을 기준으로 죄라고 규정한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피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만이 죄와 사망을 이기는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너 예수 믿냐! 안 믿냐!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너 대신 율법의 요구를 다 담당했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어요! 라는 것이 나와야 믿는 겁니다.
이것 말고 다른 게 튀어나오면 안 되어요.
 
내가 말씀대로 살아야 하겠다거나!
예수를 닮아야 한다거나!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기 위해 개혁을 하여야 한다거나!
이웃을 사랑하고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자고 하면 안 되어요.
이러한 것들을 신앙의 본질로 붙잡고 있으면 안 되어요.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세요.
성도가 착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러나 착하게 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은 아니에요.
착하게 사는 것은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도 살 수가 있어요.
 
선악의 법 아래 있는 자들은 선을 행하기도 하고 악을 행하기도 해요.
선 행함을 선이라고 하고 악 행함을 악이라고 해요.
세상의 모든 종교는 선악의 법 중에서 선을 행하고 악은 멀리하라고 가르쳐요.
착하게 사는 것은 예수 밖에 있는 인간들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선악의 법 아래 있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주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아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예수의 피만 선으로 붙잡게 되어 있어요.
 
설령 착한 삶이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 피 믿으면 구원을 받아요.
반대로 착한 삶이 있어도 예수 피 안 믿으면 구원을 못 받아요.
그럼 예수의 피도 믿고 이러한 일들을 하면 되잖아요.
맞아요.
그런데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은 자들은 예수 믿음을 내어 놓을 수가 없으므로 자기 행함을 선으로 내어 놓게 되어 있어요.
 
착함과 옳음을 분별하세요.
착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신앙의 옳음은 아니에요.
신앙의 옳음은 주 예수를 믿는 것이에요.
그렇다고 예수 믿는 자들이 막 살지 않아요.
착하게 살아요.
그러나 그 착함을 의로 내어 놓지 않아요.
착함을 통해서 인간의 가치를 챙기고자 하는 악을 발견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말씀대로 산 것을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아니 이렇게까지 귤을 까서 입에 넣어 주듯 하는데도 모른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주 씹어 드릴까요.
지금까지 이야기들이 다 이해되지요.
그래요.
다 이해가 되실 거예요.
 
이해가 된다고 하고 다시 말씀이 하시는 일을 살펴봅시다.
지금부터 무지무지하게 중요한 말이에요.
잊지 마세요.
 
그럼 말씀이 죄를 깨닫게 해서 뭘 하는지 살펴봅시다.
 
히 4:14-16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말씀이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을 예수라는 큰 대 제사장에게 인도해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도리를 굳게 붙잡게 합니다.
 
잘 보세요.
우리더러 무얼 하라고 하지 않고 누굴 붙잡으라고 하지요.
너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지 않고 누굴 붙잡으라고 하잖아요.
붙잡으라는 말은 믿으라는 말이에요.
누굴 붙잡으라고 합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의 뭘 붙잡으라고 합니까?
믿는 도리를 붙잡으라고 하잖아요.
 
그럼 예수님의 믿는 도리가 무엇인지를 알면 해답이 나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뭘 믿으라고 합니까?
내 살과 피를 먹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지요.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예수님 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약속이 뭡니까?
새 언약이잖아요.
그럼 새 언약이 체결되는 현장으로 가 봅시다.
 
마태복음 26장입니다.
 
마 26:26-28절.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합니다.
그 만찬 자리가 바로 유월절이에요.
유월절이 뭔가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기 전에 온 애굽에 장자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죽는 날이지요.
 
이스라엘도 애굽에 속하여서 예외가 아니에요.
9가지 재앙은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해서 일어났어요.
그러나 장자의 죽음에 재앙은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가리지 않고 다 일어났어요.
그런데 애굽 속에 누가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있잖아요.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 후손입니까?
아브라함 후손이지요.
하나님이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과 약속을 할 때 장차 아브람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종노릇하다가 가나안 땅으로 귀환 할 것을 약속했어요.
 
애굽이란? 이 시대적 의미로는 세상을 말해요.
그러니 출애굽은 종말론 입장에선 장차 이 세상이 끝장나는 날입니다.
언약적으로 보면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나오는 것을 말해요.
이건 잠시 후에 말할게요.
 
암튼 애굽에 죽음의 재앙이 덮칩니다.
그런데 일찍이 하나님이 아브람과 네 후손들을 사대 만에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브라함과 한 언약을 기억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살려주기로 합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이 죽음의 재앙에서 살아날 것을 알려 주었어요.
하나님이 알려준 방법이 이상해요.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에다 바르라는 겁니다.
그러면 죽음을 집행하는 천사가 문에 피가 발려진 집은 그 안에 누가 있든지 상관하지 않고 다 살려준다는 겁니다.
 
집안에는 도적놈이 있을 것이고,
살인을 한 놈도 있을 것이고,
술 처먹고 헤롱거리는 놈도 있을 것이고,
도덕군자처럼 점잖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열심히 성경 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천사는 그 인간들을 보지 않고 오직 피를 보고 넘어가는 겁니다.
천사는 집에 발려진 피만 보고 일을 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로 살았어요.
 
중요한 것은 애굽에 백성들 중에서 9가지 재앙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안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듣고 피를 발랐어요.
그들도 살아났어요.
반대로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피를 바르지 않는 사람도 있었어요.
이 놈들은 다 죽었어요.
 
그러니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은 애굽인이다 이스라엘인이다 상관치 않고 오로지 어린양의 피만 발라져 있으면 됩니다.
그럼 광야에 나온 사람은 새로운 민족이 되겠지요.
무슨 민족입니까?
어린양의 피로 생겨난 민족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영원한 규례로 지키라고 했어요.
유월절 정신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라는 겁니다.
 
너희가 죽어야 할 자리에 하나님께서 대신 흠 없는 양을 대신 죽었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라고 영원한 규례로 제정해 주신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나와서부터 유월절이 되면 어린 양을 잡아서 그 예식을 지켰어요. (유월절은 제 블로그에 절기를 참고 하세요.)
 
그런 이스라엘이 지금 예수님 시대까지 왔어요.
예수님도 유대인이므로 33년 동안 살면서 유월절을 지켰어요.
예수님은 이제 아버지와 약속한 시간이 다가와서 이 세상을 떠나야 해요.
십자가를 질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유월절을 제자들과 지키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린 양으로 지내지 않고 떡과 포도주로 지키는 겁니다.
지금까진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어요.
매년 유월절이 되면 어린 양을 잡아서 지켰어요.
이 때도 다른 집에선 다 어린양을 잡아서 지켰어요.
예수님만 어린양을 안 잡고 떡과 포도주로 지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12제자들은 이상한 유월절을 지키고 있는 겁니다.
 
암튼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을 떡과 포도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자신의 살과 피라고 합니다.
“이 떡은 내 살이다!”
“이 포도주는 내 피다!”
그러는 겁니다.
 
이는 곧 내가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이란 말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출애굽 시킨다는 말이에요.
그러면서 “새 언약의 피”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합니다.
야! 긴장 된다!
정신을 가다듬고 들으세요.
 
예수님이 새로운 유월절을 제정하시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옛 언약”에선 “짐승의 피”로 세웠지만,
“새 언약”에선 “예수님 피”로 세웠어요.
 
옛 언약은 율법이고,
새 언약은 믿음이에요.
 
율법 아래선 짐승의 피로 유월절을 지켰어요.
그러나 믿음 안에선 예수님 피로 유월절을 지켜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꼭! 꼭! 꼭! 기억하세요.
 
그럼 예수의 피를 믿는 자들에게는 짐승의 피로 지키는 유월절은 의미가 없어지겠지요.
옛 언약일 때는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이젠 새 언약 시대잖아요.
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 피로 지켜야 하겠지요.
이렇게 되면 새 언약 하에선 예수님의 피로 새로운 민족이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구약 시대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죽음에서 구원을 받아 새로운 이스라엘이 생겨났어요.
그렇다면 신약 시대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은 새로운 민족이 생겨난 겁니다.
 
이를 일컬어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해요.
바울은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했구요.
그래서 신약에 구약의 12지파를 대신하여서 12 제자를 세운 겁니다.
12제자는 12지파를 대신하는 겁니다.
 
둘 다 동일한 맥이에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 문에는 12지파의 이름이 써져 있고 그 성곽의 기초 석에는 12사도의 이름이 써져 있는 겁니다.
 
계 21:10-14절.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12성곽의 기초석마다 보석으로 꾸며져 있지요.
이는 곧 12 사도의 신앙을 계승한 성도가 곧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전의 보석들이란 말입니다.
전 이 말씀을 깨닫고 엉엉 울었어요.
야! 내 꼬라지가 이래도 하늘 예루살렘 성의 보석이구나!
 
어린양이 보석으로 지어진 성에 빛으로 들어와요.
이걸 신랑과 신부로 묘사했어요.
성의 보석들이 모두가 어린양의 신부가 되는 겁니다.
온갖 보석으로 지어진 곳에 빛이 비췬다!
얼마나 황홀하겠습니까!
 
아! 가슴이 벌렁거려 물 한 잔 마시고 해야겠어요.
이런 말씀을 듣고도 무덤덤한 분들은 무슨 말을 들어야 춤을 출겁니까?
참 이상한 사람들이네!
여러분들이 하늘나라 성전에 보석이란 말이에요.
정신 좀 차리세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예수 믿으면 안 되지요.
 
보석은 흙이 큰 불에 화학 반응을 일으켜서 생긴다고 합니다.
이는 흙과 같은 인간이 불같은 시련으로 통하여서 오직 믿음이라는 보석으로 되는 겁니다.
욥이 그러지요.
시련이 정금 같이 한다고!
 
베드로도 그랬어요.
 
벧전 1:6-7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여러 가지 시험이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들을 다 버리게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의(義)라고 여겼던 것들이 다 배설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버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직 믿음이라는 정결한 보석으로 거듭나게 하는 겁니다.
성도는 하늘나라 보석들이기 때문에 고난이 많은 겁니다.
 
지난 번에 KBS에서 ‘자명고’ 라는 드라마를 했지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은 목숨을 건 사랑을 하였어요.
 
줄거리를 대충 살펴보면!
낙랑공주가 사는 낙랑과 호동왕자가 사는 고구려는 서로 적국이에요.
고구려 왕은 낙랑국이 너무도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있어서 호시탐탐 낙랑국을 함락시키고자 합니다.
그런데 낙랑국에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스스로 울어대는 자명고라는 신물(神物)이 있어요.
자명고가 울리면 온 백성들이 일심동체가 되어서 적군을 물리쳤어요.
그래서 고구려에서 자명고를 찢으라고 호동왕자를 첩자로 보내요.
 
호동왕자가 위장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여서 낙랑공주의 마음을 사로잡아요.
그리곤 호동왕자가 자기를 사랑한다면 낙랑공주에게 자명고를 찢으라고 합니다.
낙랑공주는 호동왕자의 사랑에 눈이 멀어서 국가를 배신하여 자명고를 찢습니다.
그리곤 낙랑국은 멸망을 해요.
 
전 여기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을 예수님과 저의 사랑으로 보았어요.
내가 태어난 이 세상을 버리고 예수 라는 신랑에게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리는 낙랑공주의 그 사랑이 내 사랑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그렇게 살진 못해요.
그래서 안타까운 겁니다.
 
그 때 드라마 주제가로 나온 노래가 너무 좋아요.
물론 저만 그렇겠지만!
가사를 잘 음미 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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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죄인가요 - 백지영 (자명고 OST)
 
안 된다 안 된다고 해도
어쩔 수가 난 없네요
그대 얼굴만 또 보네요 다시
눈물로 젖은 가슴이 찢겨도
고갤 돌릴 수 없네요
그댈 원하는 내 마음이 묻네요
사랑이 죄인 건가요 이 맘이 나쁜 건가요
잘못이라 해도 나 벌 받을게요
그댈 가질 수 만 있다면
가슴이 너무 저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나를 미워하고 욕한다 해도 그대 밖에 사랑 못해요
죄인이 되어도
 
눈물로 하루를 보내도 말할 수가 없네요
내 마음 그대만 원하네요 자꾸
숨겨도 숨길 수 없는 이 맘이
내게 자꾸만 보채요 그대 없이는 살 수가 없다 해요
사랑이 죄인 건가요 이 마음이 나쁜 건가요
잘못이라 해도 나 벌 받을게요
그댈 가질 수만 있다면
가슴이 너무 저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나를 미워하고 욕한다 해도 그대 밖에 사랑 못해요
죄인이 되도 좋아요
한 번이라도 족해요
그대를 꼭 안고 사랑한다면 그런 날이 내게 온다면
타들어가는 가슴이 까맣게 재가 되어도
나 기다릴게요 기다릴게요
단 한 번만 내게 와주면
죄인이 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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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공주가 호동의 여자가 되고 싶어 비록 국가에 죄인이 되어도 좋다고 하잖아요.
이건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과 이런 사랑을 하여야 해요.
주님을 가슴 시리도록 말이에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부모와 자식과 전토와 자기 자신까지 버릴 수 있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야 한다고요.
노래는 각자 컴퓨터로 검색해서 들어보세요.
전 이 노래가 너무도 좋아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들어요.
 
가슴이 너무 저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나를 미워하고 욕한다 해도 그대 밖에 사랑 못해요
죄인이 되도 좋아요
 
주님을 위해서 세상에서 죄인이 될게요!
성도는 이런 가슴 시린 사랑을 하여야 해요.
사랑이 얼마나 아픈지!
사랑이 얼마나 가슴이 시린지!
여러분 사랑은 아픈 거예요.
엄청 아파요.
 
그래요.
세상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죄에요.
그리고 예수님에게 사랑을 입은 것이 죄에요.
예수님과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이 죄에요.
마치 낙랑공주가 적국의 왕자를 사랑한 것이 죄이듯이!
마귀의 나라에서 하늘나라 사랑을 받은 것이 죄에요.
 
예수 믿는다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셨다구요.
이게 믿어지면 어떻게 대충 대충 믿겠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누구든지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한 겁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시나요!
가슴 시리도록!
한 번 해 보세요.
우린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요.
 
이런 불가능한 사랑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 주셨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슴 시리도록 사랑을 하셨어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우리를 사랑했다구요.
이 사랑 노래가 솔로몬의 아가서에요.
물론 모든 성경은 예수님의 아가서에요.
 
예수님이 솔로몬 왕처럼 보잘 것 없는 깜뚱이인 술람미 여인과 같은 우리 죄인을 사랑했어요.
누가 이 사랑을 아십니까?
가슴 시리도록 아픈 사랑을!
 
아가서를 갑자기 하고 싶어지네요.
언젠가 해야겠지요.
괜히 하늘나라 성전의 열두 보석을 하다가 잠시 사랑에 취하였네요!
 
짜릿한 사랑은 잠시 억누르시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신앙은 무엇이라고요!
예수 믿는 것이라고 했어요.
누구든지 예수의 피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믿지 않으면 저주에요.
 
예수님께서 새 유월절을 제정하면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시면서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바 언약의 피라고 하지요.
무슨 피라고요!
죄사함을 위한 피에요.
잊지 마세요.
죄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 사해져요.
 
자 그럼 또 어려운 공부를 해 봅시다.
 
지금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의 죄가 뭡니까?
율법으로 의로워지려고 하고 있었잖아요.
예수님이 누구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까?
율법주의자들이지요.
 
알다시피 율법은 옛 언약이지요.
율법신앙은 인간이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새 언약은 예수님 피로 죄사함 받는다는 거예요.
그럼 신앙생활이 옛 언약에선 인간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에서, 새 언약에선 예수님이 내 대신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 바뀌었지요.
 
율법 지킴이라는 행함이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으로 바뀌었지요.
그럼 새 언약 하에선 율법 지킴을 붙잡으면 죄가 되겠지요.
다른 말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으면 죄에요.
 
새 언약은 옛 언약으로부터 출애굽 시키는 겁니다.
새 언약 하에선 영적으로 말하면 율법이 애굽이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신앙이 곧 애굽 신앙이 되는 겁니다.
율법 신앙이 예수님을 죽었어요.
 
지금도 율법 신앙이 예수를 죽이고 있어요.
성화주의자들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전하는 우리를 핍박하는 것이 곧 예수를 핍박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게 있어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았지요.
광야에 나온 사람들은 누구라도 유월절 어린 양 때문에 살았다고 믿었어요.
하나님이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보고 구원했다고 믿었어요.
 
아까 말했지요.
출애굽 한 이스라엘은 혈통에 의미가 없고 어린 양의 피로서 새로 생겨났다고!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모르면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다른 말로 이스라엘의 죄를 어린 양에게 대신 담당시켰다는 것을 알아야 이스라엘이에요.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알게 하려고 율법을 줍니다.
율법 지킴이라는 행함을 붙잡는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구원 받았다는 믿음을 붙잡는지 확인하고자 함입니다.
가나안 땅엔 약속의 땅이고 은혜의 땅이니 율법을 지켰다는 자기 공로를 자랑하는 자는 살 수가 없어요.
 
자기 공로를 자랑하는 자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구원 받았다는 것을 모르는 놈이에요.
이놈은 광야에서 다 걸러내야 해요.
그래서 어느 놈이 암까마귀이고, 어느 놈이 숫까마귀인지 찾으려고 율법을 준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은 아브라함 언약 때문이지요.
그런데 출애굽을 할 때는 어린 양의 피로 새로운 민족이 생겨났지요.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 언약 위에 어린 양의 피가 덧 씌워진 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언약에다가 피를 뿌린 겁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처럼 선택을 한 성도에게 예수님의 피를 뿌린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창세전에 영생 받기로 작정된 성도는 예수님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거예요.
아까 예수님이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피를 흘린다고 했잖아요.
그럼 피를 뿌림 받은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걸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예수님의 피 때문에 산다고 할 것 아니에요.
 
그럼 넌 이런 죄인이다! 라고 죄를 고발하여야겠지요.
너희는 이런 죄인인데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어야 하잖아요.
그럼 죄를 고발하는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말씀이라고 했잖아요.
신구약 모든 말씀이 우리를 낱낱이 해부해서 넌 이런 죄인이라고 고발한다고 했잖아요.
 
그럼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자기가 죄인인줄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모르지요.
말씀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율법을 준 겁니다.
뭘 알라고!
죄를 알라고 주었지요.
 
그럼 율법을 가지고 뭘 해야 합니까?
죄를 깨달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니 유대인들이 율법 가지고 뭘 하고 있어요.
나 이뻐!
그러고 있어요.
자기 자랑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야! 이 등신들아!
왜 율법 가지고 니 치장하고 있느냐! 라고 책망하는 겁니다.
너희가 언제 율법 지켜서 구원 되었느냐!
하나님 은혜로 된 것이지!
 
그래서 예수님이 이제 자기 피로 율법 사상에 잡혀 있는 자기 백성들을 제 2의 출애굽을 단행하는 겁니다.
어디서 어디로 출애굽 시킵니까?
율법 아래 있는 자를 믿음 안으로 불러들이는 일을 하십니다.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출애굽 시킨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 율법 안에 있는 것은 애굽에 있는 것과 같아요.
어려운가요?
잘 이해하세요.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을 땐 율법이 없었어요.
율법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안 살고와 상관없이 하나님 백성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행위를 가지고 너 죽을래!
그러지 않았어요.
 
아니 죄인보고 너 내 말 안 들을래!
그러면 말하는 하나님만 야속해요.
여러분은 강아지 보고 말 안 듣는다고 싸웁니까?
강아지와 싸운다는 것은 그도 강아지라는 말이에요.
그러니 강아지랑 싸우는 겁니다.
사람은 강아지하고 싸우지 않아요.
그냥 이해하고 데리고 사는 겁니다.
 
강아지가 행여 자기 행위로 주인이 사랑해 준다고 하면 그런 놈은 내보내야 해요.
안 그러면 주인 앞에서 꼬리를 안 흔들어요.
아주 당당하게 꼬나본단 말입니다.
이런 놈을 어떻게 데리고 살겠어요.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선 강아지와 같아요.
자기들이 뭔가 잘나서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냥 은혜에요.
은혜!
이걸 모르면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이 은혜를 깨닫게 하려고 율법을 주었어요.
봐라!
너희들이 어떤 꼬라지들인지!
너희들이 어떤 종자들인지 보고 깨달으라고 율법을 준 것이란 말입니다.
그걸 지켜서 잘난 인간 되라고 준 것이 아니라고요.
 
죄인 주제에 잘나면 얼마나 잘나겠어요.
자기가 죄인인줄 알면 그래 나 죄인 맞습니다.
그러니 내 몸에서 하나님의 용서만 풍겨나게 하소서!
그래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 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 했으니 이쁩니까? 라고 하면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겁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
예수 믿으라고 하잖아요.
니 꼬라지 보지 말고 예수 믿으라고!
 
그런데 우린 예수는 안 보고 자기 꼬라지를 보고 있어요.
맨 날 이랬다! 저랬다! 갈 지(之)자 행보를 하고 있어요.
어느 때 보면 믿음이 엄청 좋은 것 같다가도 어느 때 보면 불신자에요.
이게 모두가 예수를 안 믿고 자기를 믿으니 그래요.
 
그럼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무엇으로 심판 합니까?
피에요.
피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란 말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두 번째 오시는데 누구에게 오느냐 하면 죄와 상관없는 자에게 오세요.
죄와 상관없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피를 바른 자이지요.
한마디로 자기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사람이에요.
 
그럼 심판에서 이기려면 무얼 붙잡고 있어야 합니까?
예수님 피지요.
그럼 정답은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신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그럼 안심하세요.
아직도 뭘 해야 된다고 생각 됩니까?
뭔가 불안 합니까?
 
여러분이 가진 신앙의 패를 한 번 확인해 보십시오.
믿음이라는 같은 단풍잎 두개인지 아니면 믿음 플러스 성화라는 단풍과 목단 이파리인지!
세상을 이기는 것은 동일한 단풍잎 두개의 장땡이 같은 믿음이지 믿음과 하나님 말씀도 지켜야 한다는 단풍잎 하나와 목단 잎 하나 같은 갈라디안식 신앙인 다섯 끗발이 아닙니다.
괜히 다른 패를 들고 있다가 낭패 당하지 말고!
디섯 끗발 가지고는 마귀를 못 이겨요.
 
부디 장차 죽음의 재앙에서 이겨낼 피라는 패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는 새 언약의 유월절에 피가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를 붙잡는 복된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피가 믿어지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예수님의 피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세상을 이긴 자로서 담대하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과의 가슴 시린 사랑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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