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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53강. 창세전에 제물로 준비된 한 몸 (히 10:1-8)

by coroa 2021. 5. 12.

 

[53강. 창세전에 제물로 준비된 한 몸 (히 10:1-8)]

-.정낙원 목사

 

‘파스타’라는 드라마를 보면,
일등 요리사가 애인을 데리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합니다.
식사의 순서가 먼저 ‘에피 타이져’로 빵이 나옵니다.
애인이 그 빵을 먹으려고 하니까 먹지 말라고 합니다.
 
애인이 왜 먹지 말라고 하느냐고 따지니까!
그걸 먹으면 ‘메인 코스’로 나오는 진짜 요리를 맛있게 먹지 못한다고 합니다.
‘에피 타이져’는 눈요기로 시장기를 돌게만 하고 ‘메인 요리’로 배를 불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걸 보면서 오늘 본문의 두 제사가 생각나더라고요.
제사를 음식이라고 한다면 ‘먼저 나오는 음식’이 있고, ‘나중에 나오는 음식’이 있습니다.
진짜 제사가 나중에 나옵니다.
이걸 붙잡아야 해요.
 
오늘 본문은 “두 제사” 이야기입니다.
 
하나는 “짐승의 제사”이고,
하나는 “몸으로 드려지는 제사”가 있어요.
 
5절에 보면 ‘한 몸’을 준비 하였다고 합니다.
짐승 제사가 먼저 나오고, 한 몸의 제사가 나중에 나옵니다.
짐승의 제사는 에피 타이져이고, 한 몸으로 드리는 제사는 메인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몸으로 드려지는 요리를 잡수시겠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에피 타이져로 나오는 짐승의 제사는 먹지 말라고 합니다.
그걸 통해서 메인 요리를 기대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두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짐승으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있고, 한 몸을 제사로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피 타이져인 ‘짐승의 제사’로 나아오는 자는 안 받으시고, 메인으로 나오는 ‘한 몸의 제사’로 나오는 자들을 받으십니다.
 
이렇게 되면 한 몸이 진짜이고 율법은 가짜란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옛 언약인 율법은 에피 타이져이고,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메인인 것입니다.
 
이 시대 대부분의 교인들은 에피 타이져로 나오는 율법이라는 빵만 잔뜩 먹고 배가 불러서 메인 요리로 나오는 예수의 살과 피는 먹지 못하고 있어요.
스스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롭다고 자긍심이 대단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주어지는 은혜는 세피하게 여기는 겁니다.
메인 요리인 예수님의 십자가로 주어지는 은혜 속에는 하늘의 신령한 산해진미(山海珍味)로 가득한데 그건 입에도 대지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예수님이 그럽니다.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마시지 않으면 그 속에 생명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로 성찬을 즐기라고 합니다.
피가 주는 놀라운 은혜를 맛보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리석어서 맛없는 율법이라는 의에 배가 불러 잇어요.
마치 라오디게아 교인들 같이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나르시즘에 빠져 있어요.
주님이 보시기에는 피골이 상접한데도 본인들은 몰라요.
헛 배를 부르게 하는 빵을 먹으면서 좋아라 하고 있어요.
 
어쩌겠습니까?
빵이 좋다고 하는데!
그거 뺐으면 개처럼 무는데!
그냥 내버려 두어야지요.
 
다시 말합니다.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가짜에요.
그래서 율법으로 나아오는 자는 온전케 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이 히브리서를 쓰는 사도 바울이 과거에 율법이라는 빵을 먹다가 목에 걸려서 죽을 뻔 했어요.
그래서 경험자가 되어서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겨’와 같아요.
아무리 먹어도 헛 배만 불러요.
배부르게 하는 건 ‘밀’이지 ‘겨’가 아니에요.
즉 알맹이이지 껍데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율법은 껍데기이므로 헛배만 부르게 해요.
방귀 한 번 뀌면 푹 꺼질 겨에요.
성화! 그거 십년공부 한 순간에 무너져요.
마치 삼십년 수절 과부가 하루 밤에 무너지듯이 조그마한 시험이 닥쳐도 무너져 내려요.
수십 년 성화해서 90점 쌓아 놓았는데 하루아침에 성질부리고 나면 낙제점으로 뚝 떨어져요.
 
그럼 또 다시 이 악물고 분발해서 쌓고 또 쌓아야 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또 시험거리 줘서 확 무너뜨려요.
성화한다고 맨 날 롤러코스트 타고 바지에 오줌 지리고 깜짝 깜짝 경끼하고 있어요.
되지도 않은 자기를 관리한다고 얼마나 힘이 듭니까?
 
아침엔 새벽기도로 정진수도하고 마음을 다스립니다.
그런데 출근길에 누가 발을 밟으면 신경질을 내고 악악댑니다.
하루 종일 회사에서 사무에 시달리다가 보면 아침에 맑고 신선했던 그 싱싱한 성화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마음은 지옥입니다.
이게 모두가 자기 의로 세우는 겨 같은 율법을 먹어서 그래요.
 
그러나 메인 요리인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 보세요.
피가 주는 은혜를 먹으면 눈이 번쩍 뜨이고 힘이 솟아요.
화날 일이 있으면 화를 내고서도 돌아서면서 그까잇거~ 한단 말입니다.
괜찮아유~
그럴 수 있지 유~ 하면서 실실 웃어요.
이러면 감당이 안 되어요.
 
이걸 히브리서 11장에선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했어요.
그래요.
예수님의 피가 주는 복음을 맛보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오늘은 이상하게 복음을 음식이야기로 비유하는데 잘 새겨서 들으세요.
 
그럼 조금 더 율법적 제사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율법으로 나아온다는 말은 인간에게서 발생되는 것으로 나아오는 것을 말해요.
이게 포괄적으로는 인간의 행함으로 드려지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생각 하시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요.
하늘은 창조 세계를 말해요.
피조 세계 바깥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영역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는 말이에요.
영역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니 먹는 것이 다를 것이지요.
하나님이 잡수실 것이 따로 있어요.
 
그걸 오늘 본문에선 한 몸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나는 짐승 고기는 싫고 하늘에서 온 예수라는 고기를 먹겠다고 합니다.
짐승 제사 말고 사람 제사를 받겠답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은 피조 세계의 것은 받지 않아요.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로 피조 세계는 저주 받은 곳이기 때문이에요.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타락한 곳이에요.
그래서 땅의 짐승의 제사로 나아오는 자들은 온전케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짐승의 제사는 율법에 속하였어요.
율법에 속하였다 함은 죄와 연관이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죄가 있는 곳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드리는 제사로는 온전케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온전한 것은 어디에 있나요?
그건 피조 밖 세계에 있어요.
하늘은 죄가 없어요.
온전한 것은 하늘에만 있어요.
 
피조 밖 세계를 하늘나라라고 해요.
하나님이 하늘나라에 계세요.
하나님은 하늘나라에 것만 받으세요.
 
이걸 알게 하시려고 구약에 드려지는 제물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겁니다.
이를 여호와 이래라고 해요.
이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잘 말해주었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코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고자 모리아 산으로 갑니다.
이삭이 나무를 지고 가면서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칼과 나무는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아! 그건 말이다!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다! 라고 했지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자 할 때 하나님이 수풀에서 숫양을 줍니다.
숫양을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다는 의미에서 “여호와 이레”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하나님이 친히 내려 주신다는 뜻입니다.
제물을 하나님이 내려 주신다는 것은 이 땅에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제물이 되도록 하신 겁니다.
한마디로 인간들에게 너희들이 제사를 지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사는 예수님이 지내니까 너희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무엇과 같은고 하니 재벌 아버지가 초등학생 아들에게 용돈을 주었어요.
그런데 아들이 용돈을 아껴서 아버지께 선물을 사 가지고 왔어요.
이건 아버지가 바라는 바가 아니에요.
아들 입장에선 아버지를 생각해서 순순하게 드린 겁니다.
뜻은 가상 하지만 아버지가 아들에게 용돈을 준 것은 자기가 필요한데 사용하라고 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은 아버지께 뭘 해 드리지 않아도 되어요.
그저 아버지 고맙습니다!
감사하게 쓸게요! 라고 친구들에게 과자도 사주고 필요한 장난감도 사고 학용품도 사서 잘 쓰면 용돈을 준 아버지를 대접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쓸 것은 쓰지 않고 아버지 선물을 사는데 다 쓴다고 하면 이건 아니에요.
아버지가 그 선물을 기뻐하지 않아요.
선물이 나빠서가 아니라 이건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와 같이 하나님은 아버지처럼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어요.
우린 아들처럼 받았어요.
그럼 하나님이 준 것으로 감사하며 살면 되어요.
하나님에게 안 바쳐도 하나님이 서운해 하지 않아요.
 
이러면 꼭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도 아이가 아빠에게 선물 한 것은 좋은 일이잖아요.
이건 옳고! 그르다! 를 떠나서 아버지가 바라는 바가 아니란 말이에요.
 
제가 성화론을 부정하면 어떤 분들이 그래요.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게 좋지 않습니까?
그게 뭐가 나쁜가요? 라고 해요.
그건 나쁜 게 아니라 하나님 이 바라는 바가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신앙의 본질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은 예수를 믿는 거예요.
아니 예수도 믿고 성화도 하면 좋잖아요.
그건 아니에요.
 
성화를 하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어요.
성화했는데 왜 예수를 믿습니까?
그냥 성화해서 구원받으면 되잖아요.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인간들이 성화를 해도 안 되기 때문이에요.
인간 쪽에서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이에요.
성화가 아니라 그 어떤 것으로도 안 되기 때문에 예수 믿어서 구원을 시키는 겁니다.
그러니 성화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 믿으세요.
 
그래도 성화 하면 좋잖아요.
아니, 그래!
성화 하면 좋지요.
그런데 그건 믿음이 아니에요.
좋은 것하고 옳은 것은 달라요.
제발 말 귀를 좀 알아들으세요.
 
알아먹지 못하니 제 말을 곡해하여서 정낙원 목사는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싫어한다더라고 왜곡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말라고 하던가요.
사세요.
그것도 아주 열심히,,,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말씀대로 산 것을 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피를 앞세우고 나아가야 해요.
 
하나님은 인간의 성화를 받지 않아요.
하나님은 오로지 예수님 피만 받아요.
성화 속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어요.
하나님의 의는 예수 안에만 있어요.
그러니 성화 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를 믿으세요.
 
이렇게 말해 줘도 못 알아들어요.
본인이 이게 맞다 싶으면 대책이 없어요.
그냥 그렇게 성화하고 사세요! 라고 밖에 할 말이 없어요..
제가 아니라고 하면 역정을 내잖아요.
 
성화하세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세요.
그러나 그걸 신앙이라고 내어 놓지 말란 말입니다.
제가 성화하지 말란 말은 안 해요.
다만 그건 신앙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성화를 부정하니 마치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말라고 하는 줄 아세요.
그렇지 않아요.
저도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해요.
성도들에게도 하나님 뜻대로 살라고 가르쳐요.
 
그러나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어선 안 된다고 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서 보내신 한 몸이 있어요.
그게 예수님이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게 신앙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것이 신앙이에요.
그래서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좋은 것 하고 옳은 것은 달라요.
하나님은 좋은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옳은 것을 원하세요.
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습니까?
그건 귀 구녕에 귀머거리 독사가 붙어서 그래요.
 
시 58:4절.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귀머거리 독사가 귀에 붙어 있으면 자꾸만 말씀을 인간 쪽에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뭔가 하여야 한다고 해요.
인간이 뭔가 하여야 하는 것은 자기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부패하고 타락했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어요.
마음에서부터 행동까지 언행심사 모두가 섞었다고요.
그렇게 하나님 말씀 말씀하면서 어째서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다 썩었다는 이 말씀은 왜 안 믿습니까?
 
죄인 속에서는 죄만 가득해요.
죄인 속에서는 쮸쮸바처럼 죄만 나와요.
가게 가서 쮸쮸바 하나 사서 눌러 보세요.
그리곤 냉장고에 넣었다가 며칠 뒤에도 눌러 보세요.
일 년 후에도 눌러 보세요.
십년 후에도 눌러 보세요.쮸쮸바가 나와요.
 
사람들이 착각하기를 성령이 오면 쮸쮸바에서 꿀이 나오는 줄 알아요.
하나님은 쮸쮸바라고 하는데 자꾸만 꿀이라고 우겨요.
하나님은 아니야 넌 죄인이야!
그런데도 이 인간들은 아닙니다!
난 의인입니다!
그러고 있어요!
이 싸가지 없는 것들이!
그냥 홬!
 
우리 몸에서 꿀이 나오면 이 몸 죽이지 말고 그대로 천국으로 골인하면 되어요.
뭐하려고 죽였다가 살렸다가 합니까?
바로 직행 하면 될 것을!
죄 아래서 난 우리 몸은 하나님 말씀을 다 담아 낼 수가 없기 때문에 죽이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다 담아낸 예수의 몸으로 부활시켜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거예요.
 
우리 몸은 성령이 와도 안 되어요.
물론 쬐끔 되어요.
그것도 은혜 받을 때 그 때만!
간헐적으로 잠깐 되다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요.
여러분 말씀을 들을 땐 변화산 같이 황홀하지요.
그럴 땐 원수도 사랑하고 다 할 것 같지요.
 
그런데 예배 끝나 보세요.
누가 신발 바꿔 신고 가면 개소리로부터 시작해서 소 새끼부터 말 새끼까지 끝에 가서 하나님 이름 들먹이면서까지 욕을 하잖아요.
눈알은 액세서리로 달고 다니냐는 둥~
눈 알은 집에 두고 왔느냐는 둥~
어디서 그런 욕은 배웠는지!
 
그 사람이 왜 신발 바꿔 신고 갔는지 아세요.
하나님이 시켰어요.
우리들 속에 있는 똥물을 끄집어내려고 그랬어요.
그래서 넌 똥통이라고 알려주는 겁니다.
똥통주제에 무슨 성화니 거룩이니 지랄을 떱니까?
제발 주제파악 좀 하세요.
이 똥통님아!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몸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지 않고 예수를 믿게 하는 겁니다.
주님 이 똥통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난 내 속에 꿀이 있는 줄 알았는데 똥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아주 잠간 찰나적으로 뱉어낸 꿀도 내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것이었습니다.
 
난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러란 말입니다.
좀 깨달으세요.
 
왜 예수 믿으라는 말이 그렇게 짜증이 납니까?
도대체 어떤 예수를 믿길래!
혹시 중국산입니까?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이 땅에서 나는 것은 안 받아요.
하나님이 받으실 것은 하나님이 내려 주세요.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세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누구냐!
그 분을 믿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 준비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에요.
우리는 역사 속에서 엿새 동안 예수 믿는 일을 하다가 일곱째 날로 나아가요.
 
일곱째 날 안식은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만이 누릴 수가 있어요.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에요.
그러니 뭘 드리려고 하지 말고 예수 믿으면 됩니다.
예수가 믿어지면 빨래 끝~ 하고 두 손 들고 커피 한잔 마시세요.
이걸 아는 사람만이 커피 마실 자격이 있어요.
 
모르면 손들고 서 있으세요.
이것도 모르는 인간이 커피는 무슨 커피를 마셔요.
그냥 녹차를 물에 울궈서 그 물은 먹지 말고 녹차 봉지를 뜯어서 그 속에 있는 풀을 먹으세요.
말귀를 못 알아먹는 것은 짐승이니까 차는 마시지 말고 풀이나 먹어야지요.
울궈 낸 물은 말 귀를 알아먹는 사람에게 드리고 봉지 꺼내서 그 옆에서 풀이나 잡수세요.
 
하나님께 드린다고 설쳐대면 하나님이 싫어해요.
여러분 자녀가 똥 한 사발 들고 와서 엄마 아빠 잡수세요!
그러면 좋겠어요.
그러면 부모님은 가슴이 철렁해요.
 
여보!
저 새끼가 뭘 잘못 처먹었나 봐! 라고 화를 내겠지요.
그래 고맙다!
그러진 않겠지요.
혹시 그러고 계십니까?
안 그렇겠지요?
그럼요.
그럴 순 없어요.
 
그래요.
하나님께도 그러지 마세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좋아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자기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해요.
아니에요!
 
그건 인간들의 착각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섬기고 있어요.
이걸 모르면 백날 헛 지랄하고 말아요.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에요.
그냥 하늘에서 내려주는 만나를 먹고 살면 되어요.
그 만나가 바로 예수에요.
만나가 약속의 땅으로 인도 하듯이 예수가 천국으로 인도 하세요.
 
이 세상은 광야 같아요.
광야는 일하는 곳이 아니에요.
하나님 약속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가는 곳이에요.
하나님 약속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니 예수 믿고 살면 되어요.
 
괴로워도 믿고!
슬퍼도 믿고!
기뻐도 믿고!
그냥 주구장창 믿으세요.
그러면 천국 갑니다.
그 믿음이 천국으로 인도해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 믿으면 행복해진다고 해요.
누가 예수 믿으면 행복해 진다고 합니까?
바울이 그랬습니까?
베드로가 그랬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그랬습니까?
 
예수님은 도리어 예수 믿으면 조용하던 가정에 분란이 생긴다고 했어요.
예수님은 예수 믿으면 행복해진다고 하지 않았어요.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고 했어요.
예수 믿으면 행복해진다는 말은 뱀 새끼들이 해요.
뱀 새끼들이 여러분 수중에 있는 돈을 뜯어내려고 사기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예수 믿고 육적으로 행복한 사람이 누가 있나요?
한 사람도 없어요.
전부 다 죽을 고생하며 살았어요.
다 예수 믿는다고 고생 고생했어요.
초대교회는 예수 믿는다고 가산을 적몰당하고 심지어 죽임 당했어요.
 
수백 년 동안 지하 카타콤에서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습니까?
아니에요.
나오느니 한숨이고!
나오느니 죽겠다는 소리였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야! 좋다!
산천경계 구경하면서 가지 않았어요.
에이! 씨팔~
왜 이런대로 데리고 가고 지랄이야!
하나님이면 다야!
더러워 죽겠네~ 하면서 갔어요.
 
착각하지 마세요.
예수 믿고 행복 운운하는 인간들은 백% 사기꾼들이에요.
그 놈들은 지옥에 사자들이에요.
구약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 백성을 평안하다! 평안하다! 라고 했어요.
 
참 선지자들은 너희들 죽는다!
망한다!
그랬단 말입니다.
그런 말 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어요.
 
대표적으로 예레미야 한 사람만 살펴봅시다.
 
렘 23:16-18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18.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의 거짓 된 신앙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패망을 본 사람이에요.
이스라엘의 패망은 곧 교회의 종말을 말하는 것과 같아요.
 
예레미야가 보니 온 교회에 거짓선지자들 천국인 겁니다.
그런데 이 놈들 특징이 평안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평안하다는 말은 지금 식으로 예수 믿으면 복 받고 행복하게 잘 산다는 말이에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지어낸 말이에요.
백성들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귀에 발리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안 하다는 말이 마귀의 말인 겁니다.
 
렘 23:21-22절.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22.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렘 23:25-30절.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몽사를 얻었다 몽사를 얻었다 함을 내가 들었노라 26.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27. 그들이 서로 몽사를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열조가 바알로 인하여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2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3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거짓선지자는 여호와의 회의(會議)에 참석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평안하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 놈을 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진짜 복음을 아는 목사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복음 속엔 육신적인 세상 복이 들어가 있지 않아요.
전부 영적인 하늘에 신령한 복이 담겨져 있어요.
도리어 복음 때문에 환란이 오더라도 참으라고 해요.
 
거짓 종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기도 많이 한다는 거예요.
교인들은 기도 많이 하면 능력 받는다고 생각해요.
이걸 노리는 겁니다.
그러니 기도해서 응답 받는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이걸 몽사(夢事)라고 했어요.
몽사란? 개꿈이라는 겁니다.
말짱 헛 것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기도해서 뭘 받았다고 하는 놈들은 다 가짜에요.
자기를 신령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서 교인들을 자기 수중에 두고자하는 사기꾼들이에요.
 
저도 옛날에 그랬어요.
기도 많이 했어요.
그리곤 신령한 척 했어요.
교인들은 기도 많이 하는 목사 앞에 서면 주눅이 들어요.
자기는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요.
이게 법 이래 있는 자들의 모습이에요.
법은 인간의 열심으로 서열을 정해요.
그래서 법 아래 있는 자들은 자기보다 열심이 많은 사람 앞에 서면 주눅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 싸움에서 밀리는 겁니다.
열심이 목사보다 많아 보세요.
기죽지 않아요.
도리어 기고만장 하지!
 
목사는 교회 안에 자기보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이용해요.
목사가 칭찬해 주면 이 사람은 목사를 두둔해요.
서로 윈! 윈! 하는 겁니다.
이게 그 세계에 통용되는 법이에요.
결국 인간들끼리 힘 자랑하는 것입니다.
 
네 힘이 세냐!
내 힘이 세냐!
힘 싸움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하지 않고 인간의 열심이 왕 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이걸 “겨” 라고 해요.
겨 알지요.
벼를 방앗간에서 찧으면 알맹이는 쌀이라고 하고 껍데기는 겨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기도 많이 해서 뭘 받았다고 하는 것은 겨란 말이에요.
 
기도 많이 하면 깨닫는 것이 있어요.
진짜 하나님의 은혜로 알게 된 깨달음은 남에게 군림하지 않아요.
자기 신앙에 유익을 삼지!
 
그러나 자기가 깨달은 척 하는 인간들은 항상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남기고자 해요.
자기가 무슨 영험한 무당이라도 되는냥 남에게 기도 해준다고 해요.
그 속에 말씀이 없는 교인들은 이런 무당들이 기도해 준다고 하면 좋아라 해요.
서로 자기 집으로 심방해 달라고 경쟁이에요.
 
누가 자기가 기도해 주면 복을 받는다고 하면 그 놈은 백% 가짜에요.
또 그런 놈들에게 기도 받으러 다니는 인간도 가짜에요.
가짜이기 때문에 가짜를 따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는 불같은 말씀으로 책망을 해요.
죄를 지적한단 말입니다.
욕을 한다는 말이 아니고 복음을 말해요.
십자가를 말하면 그 십자가 복음이 우리 안에 죄들을 고발을 해 내요.
 
그러면 말씀을 듣곤 회개하지요.
아! 이래선 안 되겠다!
내가 오해했구나!
내가 이래서 죄인이구나! 를 알게 되어요.
 
중요한 것은 이런 거짓 선지자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여호와의 이름” 을 잊게 만들어요.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해요.
여호와의 이름을 잊게 한다는 것은 구약에선 하나님의 약속을 잊게 한다는 말이에요.
 
이스라엘은 약속의 민족이에요.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이에요.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을 끌고 다녀요.
 
출애굽도 아브라함 언약 때문에 하였고,
광야에서 가나안도 아브라함 언약에 이끌려서 들어가요.
그 약속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와서 살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것은 약속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자기들의 신앙 행위에 있지 않아요.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 약속을 잊게 하는 겁니다.
신앙을 행위로 몰고 가는 겁니다.
교인들끼리 열심과 충성을 경쟁시키는 겁니다.
그래야 백성들이 제사장들에게 갖다 바치는 것이 많아지니까요.
 
신앙이 행위로 가면 외식하게 되어 있어요.
위선으로 흐른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걸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으로는 내게서 멀도다” 라고 했어요.
예수님 당시 율법에 특심한 바리새인들이 그랬단 말입니다.
 
조금 전에 거짓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잊게 한다고 했지요.
여호와의 이름은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언약으로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왔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예수살렘 성전에 입성 할 때 백성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 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환호한 겁니다.
 
예수님이 언약으로 오신 분이니까 그럼 예수님의 말을 들어야 하잖아요.
그렇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을 기다렸다면 말이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님 말씀을 안 듣는 겁니다.
왜 안 듣는가 하면 예수님이 기존의 신앙을 다 뒤집어엎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옛 언약인 율법 신앙을 뒤집어엎는 것은 새로운 언약을 세워야하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하고 달라요.
옛 언약은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지만 새 언약은 한 몸을 드리는 겁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다 책임 져 주시는 방법으로 구원을 하는 것이에요.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걸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옛 것을 폐한다고 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인간들이 열심으로 지은 헌 집을 헐어버리고, 예수님의 열심으로 새 집을 짓는단 말입니다.
 
새 언약에선 인간은 하나님과 상종할 대상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과만 상대해요.
예수님 의만 받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낸 하늘에서 온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러는 겁니다.
아버지여!
여기 아버지와 창세전에 약속한 대로 제가 제물로 왔습니다!
그러니 날 받으소서!
그러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전하(殿下) 죄인을 죽여주시옵소서!
그러고 계신 겁니다.
 
그럼 성도는 예수라는 제물을 앞세우고 천국에 가요.
이게 마치 야곱이 에서의 옷을 입고 “아버지의 맏 아들 에서로소이다” 라고 당당하게 축복해 달라고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과 같아요.
 
잠간 야곱이 축복 받는 과정을 살펴보고 갑시다.
 
창 27:26-27절.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 맞추라 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 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이삭이 장자에게 축복을 하고자 합니다.
이걸 리브가가 알았어요.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에요.
이삭이 장자 에서에게 축복을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리브가는 에서와 야곱을 잉태 했을 때부터 차자가 진정한 장자가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리브가는 차자인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받도록 한 겁니다.
장자를 바꿔치기 한 것입니다.
하지만 차자로서 받는 것이 아니고 장자로서 받아야 해요.
왜냐하면! 장자는 기력의 시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장자의 축복 속엔 하나님의 축복을 담아 놓은 겁니다.
하나님은 장자를 축복하세요.
그런데 차자를 장자로 축복을 해요.
 
역대상 5장을 봅시다.
 
대상 5:1-2절.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찌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야곱의 장자는 르우벤입니다.
그런데 간음 사건에 연류가 됩니다.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다는 말은 어미를 간음했다는 말입니다.
이는 배도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장자가 유다에게로 넘어 갔어요.
 
하지만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다고 합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어요.
야곱의 장자가 요셉에게로 넘어간 것은 장차 메시야가 차자로 와서 장자가 될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선 첫 아담이 장자에요.
그런데 아담이 실격(失格)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으로 보냈어요.
즉 예수님은 차자로 온 겁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장자로서의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겁니다.
이삭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장자의 축복도 다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암튼 리브가는 차자인 야곱에게 에서의 옷을 입힙니다.
그리고 온 몸에 노출된 부분은 다 염소 털로 가립니다.
쉽게 말해서 죄인의 모습은 다 희생의 제물로 다 가린 겁니다.
마치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벌거벗었던 아담을 가죽옷으로 가려준 것과 같아요.
 
맨 살은 죄인의 몸으로서 수치에요.
리브가가 하나님이 아담을 가죽옷으로 가려 주듯이 염소 가죽옷으로 다 가려주는 겁니다.
그리곤 희생당한 염소로 요리하여서 야곱에게 주어서 들고 가게 합니다.
야곱에게 철저하게 당부합니다.
절대로 야곱이라 하지 말고 맏아들 ‘에서’ 라고 해야 한다고 당부해서 들여보냅니다.
 
그러니 지금 야곱은 속은 야곱이지만 겉은 에서로 들어가는 겁니다.
차자가 염소 가죽 옷을 입고 장자로서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곤 당당하게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삭이 어 이상하다!
음성(音聲)은 분명히 야곱의 음성인데 겉은 에서의 옷을 입고 있는 겁니다.
이삭도 야곱인줄 알았어요.
 
사람의 겉은 감출 수 있어도 목소리는 감출수가 없어요.
음성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다 다르게 주셨어요.
요한복음 10장에서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음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이삭이 야곱의 음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축복한 것은 야곱이 장자인 에서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야곱을 보지 않고 야곱이 입고 온 맏아들의 옷을 보고 축복해 주신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삭이 야곱이 입고 온 옷의 향취를 맡고서 축복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축복을 야곱에게 한 것이 아니고 맏아들에게 한 겁니다.
그 맏아들이 곧 예수님이에요.
 
우리는 야곱이에요.
독자적으로 축복을 받을 수가 없어요.
설령 받고 싶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아요.
하나님은 예수님에게만 축복해요.
우리는 예수 안에서 그 복을 누리는 겁니다.
 
이삭은 본분대로 장자에게 축복을 한 겁니다.
이삭이 아들을 축복한 것은 하나님이 성도를 축복하는 것과 같아요.
지금 이삭이 하나님 입장에서 아들을 축복하는 겁니다.
 
이걸 신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장자는 예수님이에요.
하나님은 예수님에게만 축복해요.
그럼 죄인인 우리는 야곱처럼 빤질빤질 해서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아야 해요.
그런데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죄인을 다 감추는 겁니다.
 
맨 살은 아담의 몸이에요.
여기에다 예수님의 희생이라는 가죽 옷을 입혀서 들여보내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보지 않고 우리가 뒤집어쓰고 간 가죽 옷을 보고 축복을 해 주세요.
우리가 뒤집어쓰고 간 가죽 옷은 예수님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보고 축복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보고 축복을 하는 겁니다.
 
우리는 맨 몸으로 못 나가요.
그럼 저주 받아요.
그래서 저주 받을 몸을 그리스도로 옷을 입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땅의 제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제물로 나아가는 것이 됩니다.
아까 그랬잖아요.
하나님은 땅의 제물을 받지 않는다고!
 
이를 다른 말로 하나님은 우리 공로를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만 받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맨 살 즉 우리 행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즉사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피로 우리를 가려주는 겁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이해가 될 때까지 읽고 또 읽고 하셔서 완전히 이해를 하셔야 해요.
성경은 교과서처럼 진도 나가는 게 목적이 아니고 이해하고 믿어져야 하는 겁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데 잘 이해 하셔야 합니다.
 
글이 긴데다가 어려운 말을 해서 무지무지하게 송구합니다.
최대한 제일 쉽게 쓰려고 하는데도 언어구사의 한계가 있어서 진땀이 나네요.
자꾸만 엉뚱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가는 것은 성도가 천국에 가는 것의 모형이에요.
가나안을 일컬어 약속의 땅이라고 하잖아요.
왜 약속의 땅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하고 약속을 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약속을 앞세우고 가나안에 가는 겁니다.
약속을 앞세우고 가는데 날마다 하늘에서 뭐가 내려요.
만나에요.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에요.
만나가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려와요.
 
가나안에 당도하자 만나가 그쳤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가나안까지 인도하신 겁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면 하나님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면 되어요.
 
지금도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와 세운 새 언약을 앞세우고 사는 성도에겐 날마다 은혜를 주세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세요.
지금까지 인도해 왔어요.
우리가 둔해서 모르고 있는 것뿐이에요.
 
마치 자식이 부모의 은혜로 살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사는 것과 같아요.
나중에 시집가서 자식 낳고 살아 보아야 그때 비로소 부모님의 은혜를 알게 되는 것과 같아요.
부모님의 은혜를 아는 것을 일컬어 철이 들었다고 합니다.
철들자 부모님은 이미 세상에 안 계시잖아요.
 
우리 부모가 날 은혜로 키워주셨듯이 우리도 자식들에게 베푸는 겁니다.
자식들은 우리처럼 몰라요.
그 놈도 시집이나 장가를 가서 자기 자식 낳고 키워보아야 부모심정을 알아요.
이게 인간이에요.
아주 어리석지요.
 
하나님은 다 아세요.
부모와 자식이라는 제도를 주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심이에요.
 
내리 사랑은 하여도 치사랑은 못해요.
이는 부모님은 사랑하지 못하고 자식을 사랑한단 말입니다.
늘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은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뭘 갚고자 하지 마세요.
그냥 받으세요.
받으시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라고요.
제발!
 
하루하루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침에 눈뜨면 주여 오늘도 눈을 뜨게 해 주셨군요!
오늘도 은혜로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불가능한 말을 하고 있지요.
 
그래요.
불가능한 말을 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해야 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악당이라는 것을 고발하고자 함이에요.
우리라고 별수 있겠어요.
 
구약 이스라엘과 같이 매일 만나를 먹으면서도 주둥이 내밀고 징징거리며 끌려가고 있어요.
징징거려도 하나님은 끌고 가는 겁니다.
그게 히브리서 11장에서의 믿음이라고 말했잖아요.
우리가 믿는다는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를 끌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실패 할 수가 없어요.
 
예수 믿고 천국 간다고 하면서 불안한 사람은 예수 안 믿는 사람이에요.
그 속에 성령이 없으니 약속이 안 믿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불안을 없애려고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하여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 쪽에서 뭔가 해서 두려움을 내어 좇으려고 하는데 백년을 해 보세요.
되는가?
안 되어요.
 
제가 약 40여 년을 이 짓거리 하다가 자살하려고 했어요.
어둠은 퍼내려고 해서 퍼 내 지지가 않아요.
어둠은 빛이 들어오면 자연히 물러가요.
불안한 것은 내 마음이 어둠이라는 뜻이에요.
 
믿음이 들어오면 빛처럼 불안한 것이 싹 사라져요.
예수님의 새 언약이 믿어지면 그냥 그 순간부터 무장해제에요.
난 자유인이다!
그런다고요.
 
지금 제가 쇼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돈도 안 되는 쇼를 뭣 하려고 합니까?
교인이 많습니까?
그렇다고 누가 알아주기를 합니까?
 
하지만 내가 만난 예수가 너무도 귀하기에 증거하는 겁니다.
수십 년간 어둠 아래서 믿어지지도 않는 예수를 남들 앞에선 믿는 척 연기한 세월이 너무도 원통해서 그래요.
지금도 나같이 율법 이래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서 목소리 높여서 소리 치고 있는 겁니다.
지난 세월 돌아보면 야속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그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임이 깨달아져요.
 
지금 우린 광야 이스라엘처럼 울면서 끌려가고 있어요.
기쁨도 하나님의 은혜고,
슬픔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괴로워도 슬퍼도 “달려라 하니 처럼” 달리세요.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고!
울 일도 하나님이 허락했고!
웃을 일도 하나님이 허락했어요.
울 때도 감사하고!
웃을 때도 감사하고!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천국에 가요.
천국에 가서 어이쿠 이 좋은 곳에 인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세세토록 예수님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살면 되어요.
 
예수 믿는 것은 아주 간단해요.
믿어지면 믿고 안 믿어지면 안 믿으면 되어요.
믿어지면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준 것이고 안 믿어지면 하나님이 안 믿어지게 해 준 겁니다.
창세전에 아들하고 약속하여서 영생 주기로 작정 된 사람에겐 믿어지게 해 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안 믿어지게 해요.
 
말은 바로 합시다.
모두가 안 믿어지는 것이 정상이에요.
다 안 믿어지는 것이 정상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중에 얼마에게 믿어지게 해 준 것입니다.
이걸 은혜이고 선물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예수가 믿어지는 선물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복을 받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머리털 하나도 검게나 희게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지도 않는데 주여 믿습니다!
악을 써도 안 믿어져요.
금식해도 소용없고!
산 기도 해도 소용없어요.
 
그래서 믿을 수 있을 것 같으면 믿음을 선물이라고 하지도 않아요.
도나 개나 다 주여 삼창(三唱)해서 믿으면 되잖아요.
그러나 주여 삼창해도 안 되기 때문에 선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선물은 몽땅 다 주면 선물이 아니지요.
선물은 특별한 사람만 받을 때 선물이 되어요.
예수도 다 믿어지면 선물이 아니지요.
믿고 싶어도 못 믿는 사람이 있어야 선물답지요.
 
예수는 아주 특별한 사람만 믿어지게 해 주었어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 믿어지기로 되어 있어요.
창세전에 약속을 그렇게 했거든요.
우린 억세게 재수 좋게 그 약속 안에 있어서 이렇게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데도 예수가 믿어지는 겁니다.
 
성화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안 믿어지니까 죽기 살기로 자기 쪽에서 믿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막무가내에요.
바리새인들이 이들이었어요.
열심히 성화한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이 지옥에 가라고 하셨어요.
바리새인들은 지옥에서 이빨을 갈고 있어요.
 
성화주의자들도 바리새인들처럼 이빨을 갈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 가서야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러나 이미 늦었어요.
여기서 속은 것을 알고 돌이켜야 해요.
성화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 믿으세요.
 
뭐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뭐가 그렇게 복잡합니까?
이 모두가 다 종교꾼들이 먹고 살려고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겁니다.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 하나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섬김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지 말고 섬김을 받으세요.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에요.
이방인들은 지성이면 감천한다고 믿는 겁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를 잘 말해 주었어요.
 
행 17:22-25절.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바울이 아덴에 갔어요.
아덴은 지금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요.
그리스 하면 뭐가 떠오릅니까?
신화(神話)잖아요.
그리스 신화를 보면 각종 신(神)들이 있잖아요.
헬라 문화는 신을 인간화 해 놓았어요.
 
아덴은 헬라 문화의 중심지에요.
그런 아덴에 바울이 예수님을 증거하러 갔어요.
가서 보니 온 동네가 우상 천지인 겁니다.
신전(神殿)마다 신에게 드린다고 제물들이 가득한 겁니다.
 
그걸 보니 바울이 마음이 아픈 겁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보니 이름 모를 신이라고 하여 제단을 하나 만들어 놓은 겁니다.
아덴 사람들이 자기들은 모든 신을 섬긴다고 하였는데 혹시나 자기들이 몰라서 빠트린 신이 있는지 모르니 불안한 겁니다.
 
자기들이 미처 알지 못한 그 신이 노(怒)를 발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을 하나 만들고 거기다 제사를 지낸 겁니다.
우리가 미처 몰라서 그러는 것이니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래 너희들이 모르는 그 신을 알려 준다고 합니다.
그 신이 누구냐 하면 바로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정작 알아야 할 신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만유를 지으신 분이므로 인간들에게 섬김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창조주가 뭐가 아쉬워서 피조물에게 섬김을 받느냐 이 말입니다.
도리어 피조물이 창조주로부터 섬김 받고 있다는 겁니다.
이건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부모와 자식 같아요.
 
여러분 섬김이 뭡니까?살도록 돌보는 거잖아요.
그럼 누가 누구를 돌봅니까.
부모가 돌보지요.
 
부모는 창조주 입장이고 자식은 피조물 입장이지요.
그럼 누가 누구를 섬깁니까?
창조주가 피조물을 섬기고 있는 거지요.
그렇다면 피조물은 늘 창조주가 공급해 주는 것으로 감사하면서 살면 되어요.
뭘 갚고자 하는 것은 교만이에요.
 
죄가 뭐냐?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에요.
신앙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을 감사하게 받는 거예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삽니다! 라고 하는 거라고요.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가 정성껏 지은 밥을 감사히 먹는 것이 엄마를 기쁘게 하는 것이에요.
새벽같이 일어나 온갖 정성을 들여서 음식을 해 밥상을 차려 놓았는데 먹지 않고 가 보세요.
엄마는 학교 가는 자식 뒤통수 보면서 울어요.
이런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엄마를 대접하는 거예요.
 
엄마로부터 섬김을 받는 것이 자식 된 도리에요.
그러니 일찍 일어나서 잘 처먹으세요.
이것도 맛있고!
저것도 맛있고!
야! 우리 엄마 음식 솜씨는 짱이야! 라고 하세요.
그 한마디가 엄마를 가장 행복하게 해 주는 거예요.
부모 입장에선 자식이 잘 자라주는 것만큼 큰 기쁨이 없어요.
 
제 글도 마찬가지에요.
비록 글이 험하고 직설화법(直說話法)으로 귀에 거슬리는 것이 있지만 빈말이라도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라고 해 주어야 기분이 좋아요.
 
전 설교를 할 때 고집이 있어요.
쉽게 하자!
무조건 쉽게 하자!
초등학생이나 할머니가 보아도 이해하도록 쉽게 하자 에요.
 
설교의 목적은 내 지식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잘 증거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쉽게 하려고 해요.
말도 가장 쉬운 말이 뭔가 생각해요.
 
욕을 할 땐 욕을 하는 것이 욕 답다!
그래서 처음 설교를 쓸 땐 속에서 나오는 그대로 다 써요.
그리곤 교정을 해요.
혹시나 너무 심한 것은 아닌가?
 
예수님도 가장 쉬운 말로 했어요.
신약 성경이 아람어로 기록이 되었어요.
아람어는 흔히 시장 바닥에서 쓰는 상인들 말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인간다운 말이 시장 통 말이에요.
시장에 가 보세요.
온갖 육두문자가 날아 다녀요.
 
예수님 말씀 하는 것 보세요.
욕과 저주가 날아다닙니다.
체면도 없어요.
 
언어는 목적 전달이 최우선이에요.
잘못 했을 땐 소리쳐서 욕을 해 줘야 해요.
그래야 아! 내가 잘못 했나 보다 그래요.
그렇지 않고 점잖게 하면 샐샐 웃으면서 웃음으로 때우려고 해요.
목사는 이미지 관리하는 자가 아니에요.
자기 인품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해요.
 
하루에 12시간씩 앉아서 독수리 타법으로 이 긴긴 편지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설교 한 편을 쓰는데 보통 사흘은 걸려요.
썼다가 교정하고 또 썼다가 교정하고 하다 보면 30 시간은 걸려요.
그래서 한 편 올려요.
 
저는 오전 9시에 교회에 오면 5시까지 있다가 저녁 먹고 다시 7시에 교회로 나와서 밤 12시까지 설교 준비하다가 집으로 가요.
12시에 블로그 확인하고 그 날 뉴스 검색 좀 하고 2~3시에 잠들어요.
그러니 하루 12 시간을 설교 준비하는 겁니다.
물론 여일(如一)하지 않지만 이 싸이클로 움직여요.
 
교회는 일부러 인터넷을 안 놓았어요.
이걸 해 놓으면 인터넷으로 손이 가기 때문에 설교 준비를 못해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설교 한편 제대로 올리지 못해요.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만난 예수를 어떻게 하면 증거 할까 늘 고심해요.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결리고, 눈도 침침하고, 온 몸이 욱신거려요.
그래도 은혜 받고 복음에 대하여 눈을 떠가는 분들이 있어서 그 기쁨으로 해요.
여기저기서 감사의 전화라도 해 주면 그렇게 고마워요.
생명이 살아나는 것을 보면 아픈 것이 싹 가셔요.
 
그래서 전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영감을 주시니까 허접하지만 이렇게라도 글을 쓸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얻어먹고 뱉어 내고 있는 겁니다.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고 있는 것이에요.
 
글 한 편을 쓰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또 종에 눈을 열어서 주의 기이한 법도를 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진리의 생명에 말씀이 깨달아지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하나님의 섬김에 감사하는 겁니다.
그러니 육신은 힘들어도 행복한 겁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잊게 만들어요.
왜 감사를 잊겠어요.
하나님께 얻어먹고 산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니 감사가 안 나오는 겁니다.
 
율법 신앙이 왜 나쁜지 아세요.
성화 신앙이 왜 나쁜지 아세요.
율법 신앙과 성화 신앙에는 감사가 안 나와요.
자기 뿌듯함만 있어요.
 
뭔가 했다는 자기 성취감에 도취되어 있어요.
자기가 뭔가 하였다고 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감사가 안 나와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하나님이 야속해요.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이 왜 나쁜가요?
자기 업적으로 아버지를 나쁘게 몰아가기 때문이에요.
탕자를 용서한 아버지가 자기보다 나쁘다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독사처럼 대가리 쳐들고 아버지에게 덤비는 겁니다.
 
예전에 잘 아는 장로님이 있었어요.
이 분은 성화론 자에요.
반듯하게 사세요.
 
이 반듯함이 표준이 되어서 모든 사람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겁니다.
신앙적인 일들은 내게 들은 것을 가지고 자기 교회에 가서 남을 판단하는데 사용하는 겁니다.
마치 탕자 비유에서의 맏아들과 같아요.
그 속에서 긍휼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어요.
 
그 분의 아내가 전화를 해서 남편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는 겁니다.
교회에만 가면 입만 열면 누군 어떻고! 누군 저떻고! 비판하고 정죄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화가 나서 극단적인 말을 했어요.
 
장로님에게 꼭 말하라고!
이제부터 도적질도 좀 하고!
사기도 좀 치고!
룸살롱에 가서 아가씨 끼고 술도 먹고 사고도 치고 그렇게 살아보라고 했어요.
이런 짓을 하고도 다른 사람들 비판 할 수 있는지 한 번 해 보라고 했어요.
장로님 같은 분이 예수를 죽였다는 것을 아시냐고 말하라고 했어요.
 
이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같은 자가 천국에 간다고 생각해요.
이게 유대인들의 사고거든요.
바리새인들은 너무도 완벽해서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보다 자기들이 더 깨끗한데 왜 예수를 믿겠습니까?
 
제가 성화주의를 호되게 몰아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이 인간들은 예수를 닮아야 한다고 해요.
자기 주제도 모르고 말이에요.
 
그들 말대로 예수를 닮는다고 한다면 예수님처럼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예수님처럼 창기들과 어울리고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말을 새겨들으세요.
무슨 말인지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말 귀를 아세요.
 
예수님이 왜 죄인들과 어울렸습니까?
거기에 가야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섬길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의(義)가 필요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예수님 날 좀 섬겨 주세요!
그런단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준다고 하면 싫어해요.
예수님을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자기들이 다 해요.
바리새인들 신앙이 마르다 신앙이에요.
마르다처럼 예수님을 섬기겠다고 설치니까 예수님이 할 일이 없어요.
 
예수님은 마리아 하고 노는 겁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주는 말씀을 널름 널름 받아먹는 겁니다.
또 주세요!
또 주세요!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밥을 먹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 눈에 마리아가 얼마나 예쁘겠어요.
어이구! 내 새끼!
그래 얼른 먹고 많아 커라!
그런단 말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겠다고 분주합니다.
동생인 마리아가 좀 도와주면 좋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놀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응석을 받아주니까 예수님이 야속한 겁니다.
언니를 좀 도우라고 하면 좋을 텐데 말이죠.
 
참다가 못해 한마디 합니다.
예수님에게 저 철없는 년을 좀 나무라 주세요! 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도리어 마르다를 나무랍니다.
 
놔 둬라!
마리아는 좋은 걸 택했다!
넌 뭔가 착각하고 있구나!내가 이 집에 밥 얻어 먹으로 온 줄 아느냐!
내가 이 집에 도리어 밥을 먹여주려고 왔단다!
넌 왜 그걸 모르냐고 책망을 하는 겁니다.
 
물론 성경엔 이런 말이 없어요.
글과 글의 행간을 읽으면 보여요.
그 상황을 잘 음미해 보세요.
전 그 상황을 보고 글을 쓰고 있어요.
 
바리새인들은 마르다 처럼 예수님이 하실 일을 다 차단해 놓았어요.
예수님이 할 일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왔는지 모르게 하고 있어요.
하나님도 왜 예수님을 세상에 보냈는지 완전히 짱구를 만드는 겁니다.
그래 놓고선 예수님 나 잘했지요!
나! 예뻐해 주세요!
그러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할 말이 없어서 입맛만 쩝쩝 다시고 계세요.
헛기침만 해요.
헛~ 헛!
 
제가 복음을 좀 안다고 하면서 나대는 사람들을 보면 그럽니다.
제발 홍해를 니가 가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어떻게 가르는지 구경 좀 하자고 해요.
저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는지 지켜보자고 해요.
 
지금은 좀 서툴고 흠이 많지만 주께서 알아서 다듬어 갈 것이니 기다리자고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잘 다루고 계시는데 괜히 지가 나서서 다 망치고 있어요.
택한 백성이면 자기가 지랄을 안 떨어도 주께서 일으켜 세울 것이고, 아니면 자기가 백날 지랄을 떨어도 안 되어요.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복음 아는 것으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재미로 살아요.
복음을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셨다고 하면 남을 비판하고 정죄할 수가 없어요.
거저 받았는데 어떻게 넌 왜 모르냐고 타박을 합니까?
 
남을 깔본다는 것은 복음을 자기가 알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음은 없어요.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남을 깔보고 나대는 사람은 지식으로 아는 복음이에요.
지식이니까 남을 판단하고 자기 자랑이 나오는 겁니다.
 
복음을 알면 뭔가 생명의 풍성함들이 묻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찬바람이 쌩쌩 불어요.
가까이 하기가 싫어요.
 
맏아들처럼 좀 안다고 약방에 감초처럼 안 나서는 데가 없어요.
이게 다 철이 없어서 그래요.
배추가 소금에 절여져서 맛을 내듯이 우리가 복음에 녹아져서 나는 간 곳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하는 복음의 맛이 나와야 해요.
 
중원의 무림에는 소림사 고수들이 즐비해요.
그런데 고수들은 다 멍청해 보여요.
중국 소림사 무술 영화를 보세요.
고수들은 멍청하게 보이잖아요.
그러나 익다가 만 땡감 같이 시퍼러팅팅한 것들이 꼭 설치고 다녀요.
동네 망신 다 시키면서 말이에요.
그러다가 임자 만나면 된통 혼나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좀 진득해야 하는데!
좀 너그럽고!
참아주고!
용서하고!
성화하라는 말이 아니고 다 주께서 일으킨 사건이라 생각하고 지켜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를 깨달은 것을 가지고 열을 아는 척해요.
그러니 얼마나 꼴불견입니까?
어쩌면 그리도 바리새인들을 닮았는지 모르겠어요.
 
은혜를 가슴으로 받아서 가슴이 따뜻해야 하는데 전부 대가리로만 받아서 머리는 뜨거워서 펄펄 끓는데 가슴은 겨울철 보일러 꺼진 냉방처럼 싸늘한 냉골이에요.
죄인이 용서받음에 대한 감사함이 없어요.
말은 맞는데 그 속에 생명이 묻어 나오지 않아요.
 
십자가는 남을 정죄하는 도구가 아니에요.
나를 죽이는 도구에요.
내 정과 욕심을 죽이는 것이에요.
 
십자가는 나는 죽이고 남을 살리는 도구에요.
그런데 우린 꺼꾸러 사용하고 있어요.
자기가 죽어야 하는데 남을 전부 죽이고 있어요.
전부 바리새인들이 되고 말았어요.
 
제발 예수님을 일하게 좀 하세요.
예수님이 병원을 개업해 놓고 파리 날리고 있어요.
돌팔이들이 다 의원 행세를 하고 있으니 예수님에게 오는 손님이 없잖아요.
 
조만간 예수님이 한국교회에선 철수 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전부 성화하여서 거룩하여서 의인이 되어 죄인이 없으니 문을 닫아야지요.
예수님이 치료 해 줄 죄인들이 없잖아요.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도와주세요!
난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잠시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러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사랑 좀 해 주세요! 라고 하세요.
예수님에게 떡을 드리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이 주는 떡을 먹으세요.
 
베데스다의 38년 된 병자와 같이 주여! 나를 못에 넣어주는 자가 없나이다!
날 좀 어떻게 해 주세요!
그러란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덜렁 들고 집으로 가라고 하잖아요.
못가에서 자기 힘으로 뭘 해 보겠다는 놈들은 지금까지도 끙끙거리고 있어요.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합니까?
한 몸을 준비 했다고 하잖아요.
한 몸에서 나오는 것만 받으시겠다고 하잖아요.
우리 것은 안 받는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은 애초부터 짐승의 피를 받을 생각이 없었어요.
짐승의 피로 드려지는 제사는 한 몸을 겨냥하고 드려진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짐승으로 제사를 드려도 한 몸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누구에게 관심을 갖느냐 에요.
예수에게 관심을 두고 사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눈만 뜨면 어떻게 살까요?
어떻게 할까요?
온통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잖아요.
 
하나님은 내 아들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너! 내 아들의 죽음을 아느냐!
너! 내 아들이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 아느냐! 라고 묻고 있어요.
 
하나님이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요.
너! 예수 아니!
사람들은 관심도 없어요.
오로지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어요.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하셨어요.
이것만 하고 마칩시다.
 
어떤 임금이 아들의 혼인잔치를 배설했어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기별을 합니다.
우리 아들의 혼인 잔치에 참석을 하여서 마음껏 즐기라고 초청장을 다 보냈어요.
 
어떤 사람은 밭을 샀다고 거부하고!
어떤 사람은 소를 샀다고 거부하고!
어떤 사람은 장가갔다고 거부합니다.
 
임금이 화가 나서 종들을 보내서 가난하고 병든 병신들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임금의 잔치 집에 감히 올 수 없는 자들을 불러들인 겁니다.
이런 자들로 강권해서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이 비유를 왜 했는지 아세요.
하나님이 갚을 수 없고 얻어먹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에서 했어요.
누구를 대접을 하더라도 그 대접을 고맙게 잘 받아 줄 사람에게 하라는 겁니다.
받아먹은 사람에게 베푼 사람의 은혜가 남도록 말이에요.
 
다른 말로 하나님은 하나님 은혜를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은혜를 준다는 말입니다.
임금의 잔치에 거절한 놈들은 임금에게 안 얻어먹어도 다 먹고 살만하다고 생각하는 놈들이에요.
한마디로 독자적으로도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들이에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잔치를 베풀었어요.
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안 오는 겁니다.
잔치를 거절한 놈들처럼 아쉽지 않다는 거예요.
잔치를 배설한 하나님만 멋쩍어지는 겁니다.
 
고을에 은혜를 입히려고 잔치를 배설 했는데 싫다고 하니 난감 한 겁니다.
그래서 종들을 보내서 못난 놈들을 불러다가 집을 채우라고 한 겁니다.
못난 죄인들은 먹으면서 주인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인께 영광을 돌리는 겁니다.
 
못난 놈들이니 주인께 은혜를 갚겠다고 하지 못하지요.
그 못난 놈들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겁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해요.
 
구원 속엔 구원해 주신 분의 공로만 담겨져 있어야 해요.
구원 받은 놈들이 공로가 담겨져 있으면 안 되어요.
그런 구원은 없어요.
 
야곱이 에서의 옷으로 포장말이를 했듯이 우리도 예수님 옷으로 포장말이가 되어야 해요.
우리 맨 살이 보이면 안 되어요.
우리 행위는 꼭꼭 숨겨야 해요.
오직 예수님의 행위만 보이도록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이게 구원받은 자가 해야 할 도리에요.
제발 시답지 않은 성화를 한다고 까불대지 말고 종용히 좀 있으세요.
미친년처럼 속살 다 드러내 놓고 다니지 말고!
 
제발 자기 꼬라지 보지 말란 말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은 우리 꼬라지 안 봐요.
예수님 것만 봐요.
 
오늘 그러잖아요.
하나님이 준비한 한 몸만 받으신다고!
그러니 하나님 앞에 예수님 몸만 들고 가세요.
예수님 공로만 앞세우고 가란 말입니다.
 
나가면서 하나님의 맏아들 예수로소이다! 라고 당당히 나가란 말입니다.
조금도 주저함 없이 위풍당당하게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니 이 놈 목소리는 죄인 목소리인데 옷은 내 아들 예수의 옷을 입고 왔네!
허! 그 녀석 믿음 있네!
그러고 야! 천국은 저쪽이니 저리로 가!
그러는 겁니다.
 
술 처먹었다고 미안해서 교회 빠지지 말고!
술 쳐 먹어도 예수님의 대속에 은혜를 앞세우고 교회 와서 하나님 한잔 했습니다!
그러세요.
죄인이 죄지었다고 미안해하는 것은 그건 겸손도 아니고 회개도 아니에요.
웃기는 짬뽕이에요.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술 처먹었으면 더 나와야지요.
숨지 말고 악착같이 나와서 주님 피 좀 발라 주세요!
그래야지요.
그래서 말씀 한 자락이라도 더 들어야지 주님의 사랑을 알 것 아닙니까?
주여! 난 죄인이 맞군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라고 하시라고요.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셨잖아요.
예수님을 제물로 주셔서 우리 죄를 다 담당하게 했잖아요.
이런 인간인줄 다 알고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죄를 우리에게 묻지 않고 예수님에게 묻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왜 이런 비유로 말하는지 제발 말 귀를 좀 아세요.
왜 술 먹어도 교회에 오라는 건지!
교회 와서 예수님 말씀을 들으셔야지요.
그래야 술 처먹은 것으로 찜찜한 것을 용서 받고 가지요.
 
이러면 꼭 아이큐 70짜리들이 야! 그럼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겠네!
비아냥 거려요.
정낙원 목사는 술 처먹어도 된다더라고!
누가 술 처먹어도 된다고 했나요!
예수님의 피는 우리가 술 처먹은 것도 다 용서로 덮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지!
 
술 처먹고 싶으면 처 드세요.
내 핑계되지 말고!
내가 여러분을 책임져 줄 것도 아닌데!
만약에 천국 문에 서서 하나님이 술 처먹은 놈은 지옥으로 가 그러면 제 핑계 대려고요.
정낙원 목사가 술 처먹어도 된다고 해서 먹었다고 그러려고요.
그러니 내 말 듣지 마세요.
술 안 처먹으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잖아요.
 
무슨 말인지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한마디로 예수 믿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뒤에 졸졸 따라다니란 말입니다.
주여! 날 좀 감싸 주세요!
좀 그러세요.
 
잘 할 수가 있지요.
그래요.
잘 하실 수 있어요.
여러분 안에 성령이 계시잖아요.
 
예수가 믿어지는데 무슨 문제입니까?
내가 그 문제를 풀려고 하니 힘이 든 겁니다.
그냥 맡기세요.
죽이든지 살리든지 하나님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살아지지 않는데!
 
내 장담 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원대한 계획을 세워도 그건 여러분의 꿈이에요.
하나님은 여러분이 바라는 꿈대로 다스리지 않아요.
도리어 그 꿈이 악이라고 고발하고 역설적으로 일해요.
사생아가 아니라면 말이에요.
 
진짜 하나님의 자녀라면 코피 터지게 만들어요.
그러니 그런 꿈을 꾸지 마세요.
얻어터지니까?
 
차라리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 라고 맡기세요.
무책임하게 살란 말이 아니고 이런 정신 자세로 살란 말입니다.
부디 말씀을 오해하지 말고 참 뜻을 깊이 깊이 깨달아지는 은혜가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나 대신 죽어줄 한 몸을 보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전 지금 예수라는 제물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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