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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39강. 브엘세바의 일곱 우물 (창 21장 20-34)

by coroa 2021. 4. 29.

 

[39강. 브엘세바의 일곱 우물 (창 21장 20-34)]

-.정낙원 목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려 가는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만물 자체가 목적에 의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신약의 성도들의 자화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구약의 육적 이스라엘을 통해서 신약의 성도들을 어떻게 구원해 내시고 천국으로 인도해 가시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백성에 주신 말씀이에요.

이미 구원을 얻은 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얻을 자가 아니고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이에요.



왜 구원을 받은 자에게 성경을 주시는가요?

이는 내가 너희를 어떻게 구원을 하셨는지를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떤 희생을 치루셨고 또한 지금도 어떻게 은혜로 간섭을 해 가시는지를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보통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은혜를 몰라요.

역설적으로 관념적이니까 기쁨도 없고 뜨뜨미지근한 산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감사로 하는 것이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종이 아니라 아들이에요.

종은 억지로 하지만 아들은 기쁨으로 감사로 해요.

가슴이 뜨거워야 해요.

차가우면 안 되어요.



마음이 냉골인 사람은 예수를 만난 자가 아니에요.

구경하는 자들이에요.

그러니까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 중풍병자와 앉은뱅이처럼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들을 간섭하시는지를 알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지금 어떤 간섭을 당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 속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자기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려가는지를 말씀하고 있어요.

구약 이스라엘을 다스려가듯이 지금도 자기 백성들을 다스려가세요.

그래서 우리가 구약 성경을 배우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이 시대에 우리에게 들려지는 이야기가 되어야 해요.

우리가 살펴보는 아브라함의 집안 이야기도 그냥 구약 시대 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살았던 아브라함의 집안이야기로만 들려지면 안 되어요.



아브라함의 집안 이야기가 지금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고 아브라함을 간섭하신 그 하난미이 지금도 나를 간섭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해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들을 깨달아야 해요.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습니다.




창 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 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통고합니다.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근원이란?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에서 복과 저주의 기호로서 서 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든지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은 아브라함을 기준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을 받을 자와 저주를 받을 자로 갈라지게 됩니다.

이러면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홍해가 갈라지듯이 두 부류의 사람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쪽은 복의 사람으로,

다른 한 쪽은 저주의 사람으로,

아브라함은 예표의 사람이에요.

장차 오실 복의 근원이 되실 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세상에 보내서 복에 사람과 저주의 사람으로 갈라내듯이 장차 아브라함처럼 열국의 아비가 되실 분이 오셔서 천국 백성과 지옥백성으로 갈라낸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실상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구약의 아브라함과 같은 기호의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이 두 쪽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복을 받는 사람이 있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저주를 받는 사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을 보면 두 아들이 있습니다.

육으로 난 이스마엘과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이삭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같은 자기 씨인데도 이스마엘과 이삭을 달리 대우해요.



부인이 누구이냐에 따라서 달리 대우하는 것입니다.

하갈이 낳은 자는 종으로 대우하고 사라가 낳은 자는 아들로 대우해요.

어미에 따라서 아들의 운명에 달라지는 것입니다.



첩에게서 낳아진 자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종이 되고,

본 부인에게서 낳아진 자는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분명은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이삭을 다르게 대우합니다.

육으로 난 이스마엘은 유업을 받지 못하도록 집에서 내어 쫒았습니다.

이는 모두가 계시사적인 것입니다.



장차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이 구분 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육적 이스라엘은 혈통으로 난 자들이고 영적 이스라엘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장차 아브라함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님이 오시면 육적 이스라엘을 쫓겨나고 영적 이스라엘이 유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령으로 난 자라야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셨어요.

예수님이 성도들 안에 하나님 나라를 몰고 오셨어요.

이걸 천국이 침노해 왔다고 합니다.



흔히들 천국에 간다고 하는데 틀린 말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 우리에게 내려와요.

예수님이 천국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을 천국이 왔다고 합니다.

물론 장차 우리가 가야할 천국은 하늘에 있어요.

그러나 지금은 영적으로 천국이 우리 안에 침노해 와있어요.



지금 우리 안에 천국이 와 있지 않은 자는 나중에 죽어서 가는 천국은 갈 수가 없어요.

바울이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지요.

이것은 지금 우리 안에 이루어진 영적인 천국은 물질적 가치의 천국이 아니라 영적인 가치의 천국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영적인 천국을 멋보고 사는 것입니다.

영적인 천국은 말씀으로 사는 곳이에요.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말씀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떡에 가치보다 말씀에 가치를 더 두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세요.

모두가 쫓겨 다니면서 초근목피 하면서 살았어요.

그러나 그들 속에 임한 천국을 누리고 살았어요.



천국의 가치가 세상의 고난도 넉넉히 이기게 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에 가치로 사는 성도는 세상의 물질적 가치를 초월하고 살아가요.



세상에서 사는 것이 비록 고달프고 힘들다고 하더라도 은혜로 이겨내고 살아요.

천국을 소망하면서 말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서 이기게 하십니다.



우리는 천국 그러면 풍경 좋고 살기 좋은 그런 곳으로 생각하잖아요.

안락한 삶을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살기 좋으면 아 천국 같다고들 합니다.

이건 마귀가 주는 천국관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천국은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천국이에요.

예수 안에 천국이에요.



예수 안에 있으면 천국이고 예수 밖이 지옥이에요.

예수 안에 있으면 세상가치를 이기고 살지만 예수 밖에 있으면 세상가치에 쫓기게 되어 있어요.

현재 천국은 영적으로 와 있어요.



영적 천국이 이루어진 자는 세상 가치로 살지 않고 하늘의 가치로 살아요.

하늘의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가 받은 구원의 놀라운 축복들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12 제자들을 보세요.

그들이 어떤 가치로 살았는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보세요.



12 사도들이 세상 적으로 다 고난 받고 핍박 받고 살았어요.

그것을 성경에서는 천국이라고 해요.

이 천국은 육으로 난자들은 절대로 알 수가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요.

육에겐 비밀이에요.



하나님은 이 땅에 천국을 역설적으로 주셨어요.

그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21장 내용은 3 단락으로 나누어있어요.



1-7절 까지는 사라에게 약속하신대로 그 기한에 이삭을 낳았다는 내용이고,

8-21절 까지는 이삭이 젖을 떼고 난 후 잔치를 베풀 때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함으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집에서 쫒아내는 것으로 되어 있고,

22-30절 까지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언약을 하고서 암양 일곱을 주고서 우물 일곱을 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는 구속사가 담겨져 있어요.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자 잡에서 쫓아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스마엘의 후손도 12방백을 주어서 창대케 해 주신다고 합니다.



비록 유업을 받지 못한 아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간섭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위해서는 반드시 두 민족이 필요하거든요.



육으로 난 자와 약속으로 난 자가 필요해요.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는 것으로 서 있는 겁니다.

이스마엘은 이스마엘대로 쓰임 받고, 이삭은 이삭대로 쓰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쫓아내면서 자식인고로 아비 입장에서 물 한 가죽 부대를 줍니다.

이스마엘은 물 한 가죽 부대를 받고서 바란 광야로 쫓겨나게 됩니다.

거기서 애굽 여인을 취하여 아내로 삼고 살게 됩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암양 일곱을 주고서 우물을 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값을 주고 산 우물을 브엘세바라고 명명합니다.



브엘세바의 일곱 우물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문자적으로 보면 브엘세바의 우물을 양 일곱 마리를 주고 산 것입니다.

그래서 브엘세바를 “일곱 우물”이라고 합니다.

이 우물은 이삭이 젖을 떼고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어 쫓은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는 모든 것이 계시에요.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암양 일곱을 주고 우물을 산 것도 어떤 영적 의미가 있겠지요.



우물을 산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어날 일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의 사건 속에 신약의 예수님이 하실 일이 담겨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서로 떨어져 각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스마엘은 이스마엘의 방식으로 살고, 이삭은 이삭의 방식으로 살게 됩니다.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짐승을 사냥을 하면서 살고, 아브라함과 이삭은 일곱 우물 중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앞서서 바란 광야에서 이스마엘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엘로힘 하나님이었습니다.

엘로힘 하나님은 만물을 주관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계서 이스마엘을 여러 인간들을 다뤄가는 방식으로 다루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마엘도 여러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사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삭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났지요.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구원해내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집에서 쫒아 냅니다.

이스마엘은 종의 자식이에요.

종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율법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스마엘은 광야에 쫓겨나서 짐승을 사냥하는 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에게 준 한 가죽 부대의 물은 율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하는 짓이 율법을 상징하는 일들을 해요.

이것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바란 광야에서 활 쏘는 자로, 남을 죽이는 사냥꾼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냥꾼은 땅을 차지하는 지배자를 의미할 때 자주 사용합니다.

야곱의 형 에서도 사냥꾼이었어요.

니므롯도 특이한 사냥꾼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육에 속한 자들입니다.



결국 이스마엘은 니므롯과 에서의 계열로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후일에 약속의 아들들을 핍박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스마엘은 사냥꾼 노릇을 하고, 아브라함과 이삭은 우물 파는 일을 하였어요.

똑같이 바란 광야에 인근하고 살고 있었으나,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물을 판다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어요.

우물은 나그네들에게 생수를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광야 길에 지친 사람들과 짐승들에게 목을 축이게 하여서 살게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물은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물가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모세도 우물가에서 십보라를 만나고,

야곱도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나고,

아브라함의 몸종인 엘리에셀도 이삭의 아내를 만나러 갈 때에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납니다.



이처럼 우물은 언약 백성들이 구원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아브라함이 우물을 파는 사건은 예수님이 하실 일을 예표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셨어요.



당시에 우물은 귀한 것이었어요.

우물의 귀중함을 알고 있다면 이스마엘도 우물을 파야하는데,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이삭 같이 우물을 파지 않았어요.

이것은 이스마엘은 하늘에 생명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에게 준 한 가죽 부데의 물은 땅의 표피층의 물이에요.

이 물은 갈함을 채워주지 못해요.

늘 떨어져서 곤고케 만들어요.



마치 수가성 여인이 목 마름을 해결하고자 물을 길러 온 것과 같아요.

이스마엘이 먹는 물은 이삭이 먹는 우물 물과는 달라요.

이삭이 먹는 물은 땅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심층수에요.

반석에서 나오는 물이에요.



이것은 생수를 의미해요.

이스마엘은 땅의 물을 먹고,

땅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이삭처럼 약속의 자손들은 샘물과 같은 깊은 말씀을 먹고 하늘의 생명으로 살아가요.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가 주는 물을 먹고 하늘로 나아가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물을 가지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지요.



그랄 땅의 주인은 아비멜렉이고 아브라함은 이사 온 객이에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우물을 파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의 종들이 와서 그 우물을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들과 아비멜렉의 종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양 일곱 마리를 값 주고 그 우물을 사버립니다.

곧 양의 피 값으로 우물을 산 겁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아브라함처럼 객으로 오셔서 예수님의 피 값으로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산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이 값을 주고 산 일곱 개의 우물은 곧 장차 예수님이 자기 피 값으로 신약의 일곱 교회를 산 것과 같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곤 그 곳을 “브엘 세바”라고 합니다.

“브엘 세바”는 ‘우물’이라는 ‘브엘’과 ‘일곱’이라는 ‘세바’가 합쳐진 말로서 “일곱 개의 우물” 이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 “언약의 우물” “맹세의 우물”이라고 합니다.



브엘 세바의 뜻을 신약식으로 조합을 해 보면 예수님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워진 교회는 새 언약으로 세워졌어요.

이게 신약의 요한계시록에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로 나타나게 됩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온 세상에 흩어진 교회를 상징합니다.

신약의 교회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워진 교회에요.

그런데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죽고 나니까 아비멜렉의 종들이 그 우물들을 다 메워버립니다.



그러자 이삭이 다시 그 우물을 복원을 시킵니다.

이걸 언약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이 판 우물은 구약 교회가 되고 이삭이 복원시킨 우물은 신약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 교회를 허물고 신약 교회를 세우셨잖아요.

구약의 12 지파로 세워진 이스라엘을 허물고 그 자리에 신약의 12 사도들을 가지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마귀의 세력들이 교회를 핍박하고 무너뜨리려고 하여도 하나님은 교회를 끝까지 지켜 내신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에요.



영적으로 보면 마귀의 노림수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교회를 타락하게 만드는 것이에요.

마귀는 늘 하나님의 일을 방해해 왔어요.



하나님의 교회를 타락케 만들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타락된 교회를 다시 회복시킵니다.

그게 이삭이 아버지의 우물을 다시 파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다 타락했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지켜내세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한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지켜내는 이야기에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도 교회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아브라함을 믿음에 조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브라함은 구약 교회를 상징해요.



아브라함은 일곱 마리 양을 주고 우물을 산 후에 그 우물곁에 에셀 나무를 심습니다.

그리고는 영생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것은 곧 이 우물은 “영생하는 여호와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영생하는 여호와의 집은 교회를 말해요.

교회가 여호와가 거하는 집이에요.

교회는 영생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에요.

영생을 떡을 먹는 곳이에요.



하나님은 이 땅에 자기백성들을 위하여 영생하는 떡집을 하나 마련해 두었어요.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에요.

성도들은 교회에서 예수라는 떡을 먹고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짐승의 구유에서 태어난 것도 다 이러한 영적의미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양식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떡을 주면서 내 살이라고 하잖아요.

예수님의 살을 양식으로 주신 겁니다.

그것이 새 언약의 말씀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요.

베들레헴은 떡 집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떡집예요

하늘에 떡이 있는 곳이에요.



누구든지 하늘로서 내린 떡을 먹으면 영생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값주고 산 우물곁에 에셀나무를 심고 이곳은 영생하는 여호와의 집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세워진 교회가 바로 영생하는 여호와의 집이라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영생하는 떡을 주는 곳이에요.

영생하려면 영생하는 나라의 것을 먹어야 해요.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먹어야 합니다.

하늘로서 내려온 사람을 믿어야 해요.

그 분이 바로 영생의 떡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늘의 것을 주는 곳이에요.

하나님은 이 땅에 하늘에 속한 교회를 세우셨어요.

이는 하늘에 속한 자들을 모으기 위함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은 교히로 모이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우물가에서 신랑은 만나는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물가에서 남녀 간에 정분이 나는 사건들이 많이 있어요.

모두가 남편이 우물가에 있는 아내를 찾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이게 의미가 깊어요.



예수는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세요.

신랑이 신부를 찾아오는 겁니다.

그래야 구원이 은혜가 되어요.



신랑이 신부를 찾아오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럼 성경 속에서 우물가에서 이루어진 사랑이야기를 살펴봅시다.

먼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이 장가갈 때가 되자 집안에서 가장 똑똑하고 충직한 종을 이삭의 아내가 있는 곳으로 보냅니다.

그 종의 이름이 엘리에셀입니다.

엘리에셀이란?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엘리에셀과 동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의 신부감을 데리러 가는 것이 됩니다.

엘리에셀은 주인의 명을 받고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갑니다.

아브라함이 종에게 그곳에 가면 하나님이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엘리에셀이 주인의 명을 받고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갑니다.

그러자 우물가에 리브라가 양떼를 데리고 나와서 물을 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이 직감적으로 아 저 여자가 이삭의 아내가 될 여자이구나를 알고 자초지종 이야기를 하고서는 데리고 옵니다.

결국 이삭은 아내를 우물가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야곱이 장자권을 받자 에서가 노발대발하면서 야곱을 죽이겠다고 하자 어미 리브가가 야곱에게 어미의 고향으로 가서 장가를 들라고 합니다.

야곱은 장자권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집에서 쫓겨나서 광야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오셔서 하는 말이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합니다.

야곱은 어미의 말대로 어미의 고향으로 갑니다.



거기에 가니까 우물이 있는 겁니다.

우물가에 도착하니 마침 라헬이 양떼를 몰고 나오는 거예요.

야곱은 그를 자기 아내로 맞게 됩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에요.

모세가 애굽의 왕자 신분으로 있다가 쫒겨나 미디안 광야로 갑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애굽에서 쫓아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인도한 것입니다.

미디안 광야에 가니까 거기에 우물이 있는 겁니다.

우물가에 십보라가 있는 겁니다.

이에 모세가 십보라를 아내로 맞게 됩니다.



이게 산약으로 오면 예수님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땅 수가성 우물가로 가십니다.

거기에 가니까 한 낮에 물을 길러 나오는 창기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여자는 남편을 수시로 갈아치우는 창기에요.

이는 죄인을 상징해요.



예수님이 여인에게 신랑을 데려 오라고 합니다

그러자 수가성 여인이 나는 남편이 없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그 여자의 과거를 쭉 이야기 하면서 그래 네 말이 맞다고 하면서 네가 이미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의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자가 화들짝 놀라면서 당신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바로 너 같은 죄인을 구원하러 온 메시야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내가 바로 네 신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자기 아내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모두가 신랑이 우물로 찾아가지요.

우물가에 신부가 있지요.

그 우물이 바로 교회예요.



어느 시대이고 신랑은 교회에 있는 신부를 찾아가요.

교회가 바로 신랑과 신부가 만나는 장소에요.

지금도 교회에서 신랑 신부가 바람이 나야 해요.

진짜 신랑이신 예수와 바람이 나야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세상 신랑으로부터 자유 할 수가 있어요.



수가성 여인은 우물가에서 진짜 신랑인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세상의 가짜 신랑으로부터 자유 할 수가 있어진 것입니다.

세상 신랑은 목마름을 해결할 수가 없어요.

하늘로서 온 예수 신랑이라야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도 교회라는 우물가에서 수가성 여인처럼 예수님과 눈이 맞아서 바람이 나야해요.

진짜 신랑과 바람이 나면 술람미 여인과 같이 신랑을 사모하게 되어 있어요.

미쳐요.

그 사랑이 너무도 황홀해서 잊지를 못해요.

그래서 술람미는 그 남편의 사랑을 잊지 못해서 다시 한 번 키스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수가라는 말과 술람미라는 말이 같아요.

그러니까 구약의 술람미는 신약의 수가 여인인 것입니다.

술람미의 신랑은 솔로몬이었는데 솔로몬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는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의 구원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로 만나면 그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신앙생활은 억지로 하는 게 아니에요.

남녀 간에 사랑하듯이 하는 거에요.



사랑해 보세요.

서로 그리워하잖아요.

죽고 못 살잖아요.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 만나고 난 후 어떻게 살았겠어요.

오매불망 그리워하고 살았겠지요.

성령이 오시자 신랑이 자기 안에 온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창기로 살았지만 그 속에서 우러나는 기쁨을 막을 수가 없었어요.

신랑의 사랑이 생수처럼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신랑의 사랑이 덮쳐오면 세상을 이기게 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백성을 구하려 오셨어요.



예수님이 와서 보니 자기백성들이 수가성 여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여러 남편들을 데리고 살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사는 겁니다.

세상 남편이란?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것들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가지면 만족 하리라 생각하지만 이러한 것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해요.



물질를 가져고 만족치 못하고,

명예를 얻어도 만족치 못하고,

권력을 잡아도 만족치 못하고,

세상 쾌락을 좇아가도 만족치 못해요.



마음속에서부터 밀려오는 허전함을 달랠 수가 없어요.

마음속에서 밀려오는 허전함은 땅에 것으로는 채울 수가 없어요.

하늘에 것으로만 채울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하늘에 신랑을 만나야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를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섯 신랑과 살던 여자도 예수를 만난 후에야 모든 것을 다 던지고 예수 신랑을 쫓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세상에 이것저것 의지하고 살고 있었으나 하늘의 신령한 것을 받고 보니까 세상 것이 세피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 세상 별 것 아니구나!

여긴 영원한 곳이 아니고 지나가는 곳이구나!

이 땅엔 영원한 것이 없고 영원한 것은 하늘에 있구나!

내가 살 곳은 여기가 아니고 하늘이구나!

내 안에 와 계신 신랑이 나를 하늘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랑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세상 것 의지하지 않고 하늘에 신령한 것을 사모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신랑 만나면 가짜 신랑하고 살수 없어요.



하늘에 것을 맛을 보면 땅에 것을 먹을 수 없어요.

하늘에 물을 맛보면 세상 물을 마실 수가 없어요.

새 언약을 맛보면 옛 언약을 먹을 수가 없어요.

마치 코카콜라 맛을 본 아프리카 사람들이 그 맛을 잊지 못해 코카콜라를 다시 찾는 것처럼 말이에요.



삼하 23:13-17=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떼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쳤더라 14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의 영채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5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16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17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다윗이 전쟁을 하는 중에 고향의 물이 마시고 싶은 겁니다.

그 물은 바로 베들레헴에 있는 우물 물이에요,

그때에 다윗의 용사 중 세 명이 적진을 뚫고 베들레헴에 가서 우물물을 길어와서 다윗에게 줍니다.



그러자 다윗은 이 물은 병사들이 생명을 걸고 가져온 물이므로 그냥 물이 아니고 피라고 생각을 하니까 마시질 못하겠는 겁니다.

그래서 그 물을 하나님께 전제로 드립니다.



이 세상은 영적으로 전쟁터에요.

어떤 전쟁이가 하면 말씀 전쟁이에요.

참 복음과 다른 복음의 전쟁이에요.



마귀는 복음을 변질시키고자 해요.

다른 것을 섞어서 말이에요.

이 시대는 순수한 복음을 찾기 힘든 시대에요.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더합니다.



다윗이 전쟁 중에 먹고 싶었던 고향 베들레헴의 우물물은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복음으로 볼 수도 있어요.

다윗이 그 물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한 물만 받아요.

예수그리스도의 물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셨지요.

그 물과 피로 세워진 곳이 교회입니다.

새 언약으로 세워진 곳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하나님께 바친 베들레헴 우물 물은 영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에서 증거 되는 새 언약의 말씀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도 있어요.

교회에는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증거 되어야만 해요.

이 증거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다른 물을 절대로 찾을 수가 없어요.



이 시대에는 물이 엄청 많아요.

말씀의 홍수시대에요.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듯이 이 시대가 그러한 때에요.



교회마다 말씀이 넘쳐나요.

그런데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생수가 아니고 땅에 고인 물이에요.

구약은 고인 물이고 신약은 흘러내리는 물이에요.



옛 언약은 고인 물처럼 썩었어요.

그 물을 먹으면 죽어요.

율법은 기쁨이 없어요.



은혜라야 기쁨이 있어요.

새 언약의 물을 마셔야 살아요.

우리가 마실 물은 새 언약이라는 말씀의 물이예요.

새 언약의 물은 예수 십자가의 피로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물이예요.

그 물맛을 맛보면 절대로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쫒아가게 되어 있어요.



마지막 시대는 물 전쟁이예요.

말씀 전쟁이에요.

어떤 우물 물을 마시느냐에 따라서 달라져요.



광야를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물이 생명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광야에서 우물 파는 일을 한 것입니다.

값을 주고 우물을 산 것입니다.



얼마나 우물이 귀하였으면 영생하는 여호와의 집이라고 하였겠어요.

이 우물이야 말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여호와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이삭에게 알려 준 것입니다.



이 우물은 그냥 우물이 아니고 영생하는 여호와가 계신 곳이라고,,,

이 우물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나중에 그 우물을 다시 파서 집안에 식솔들과 짐승들에게 먹인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타락한 구약 교회를 허물고 자기 피로 신약의 교회를 다시 세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자는 말씀으로 낳아졌어요.

그러므로 말씀으로 낳아진 성도는 반드시 그 말씀을 찾게 되어 있어요.

나를 잉태케 한 그 말씀을 그리워하고 찾게 되어 있어요.

마치 다윗이 고향의 우물물을 그리워하듯이 말이에요.



아브라함은 땅을 파서 물을 얻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깨트려서 하늘에 물을 주십니다.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어요.



그 반석은 바로 예수예요.

반석이 깨어짐으로 물을 마셨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몸이 깨어짐으로 우리가 살아난 것을 의미해요.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세워졌어요.

교회는 예수님의 피가 증거 되어야 해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복음이 증거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 산다는 것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이게 구약 사사기에 보면 삼손의 수수께끼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삿 14:1-20=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2 도로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 중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취하여 내 아내를 삼게 하소서 3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 삼손이 아비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 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오소서 하니 4 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5 삼손이 그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서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어린 사자가 그를 맞아 소리지르는지라 6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7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며 그를 기뻐하였더라 8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가더니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는지라 9 손으로 그 꿀을 취하여 행하며 먹고 그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취하였다고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10 삼손의 아비가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배설하였으니 소년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 11 무리가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다가 동무를 삼아 그와 함께 하게 한지라 12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하리니 잔치하는 칠일 동안에 너희가 능히 그것을 풀어서 내게 고하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13 그러나 그것을 능히 내게 고하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줄지니라 그들이 이르되 너는 수수께끼를 하여 우리로 듣게 하라 14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그들이 삼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 15 제 칠일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로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자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 16 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 가로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풀어 이르지 아니하도다 삼손이 그에게 대답하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풀어 고하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풀어 이르리요 하였으나 17 칠일 잔치할 동안에 그 아내가 앞에서 울며 강박함을 인하여 제 칠일에는 그가 그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 이르매 그 아내가 그것을 그 민족에게 고하였더라 18 제 칠일 해 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19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 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올라갔고 20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 되었던 그 동무에게 준바 되었더라”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치려고 합니다.

그래서 명분을 만들고자 합니다.

여기에 삼손이 투입이 됩니다.



삼손이 딤나의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을 통해서 얼마를 구원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구원을 하는가 하면 수수께끼를 통해서입니다.



삼손이 부모님과 함께 상견례차 그 여자의 집으로 내려갑니다.

내려가는 도중에 포도원에서 나온 어린 사자가 삼손을 공격하는 겁니다.

이에 삼손이 맨 손으로 그 사자를 찢어 죽입니다.



이제 얼마 후에 여자를 아내로 맞이 하려고 삼손이 딤나로 내려갑니다.

가다가 보니까 지난 번에 자기가 찢어 죽인 그 사자의 몸에서 꿀이 있는 것입니다.

그 꿀을 취하여서 먹고 그 부모에게도 드립니다.



이제 잔치가 배설이 됩니다.

그 자리에 여자의 동무 삽십 명이 참석을 합니다.

이 때 삼손이 수수께끼를 냅니다.

옷을 걸고 7일 동안 잔치하는 기간 동안 알아맞히기 내기를 합니다.



그들이 맞추면 삼손이 그들에게 겉옷과 속옷을 주고 못 맞추면 그들이 삼손에게 옷을 주는 것으로 합니다.

수수께끼 내용이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삼손이 딤나로 가다가 사자 새끼를 죽였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에서 꿀이 나온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삼손이 죽어서 이스라엘을 해방 시키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신약으로 와서 영적으로는 강한 예수가 죽음으로 구원의 꿀을 내어주는 것을 의미해요.



삼손이 낸 이 수수께끼는 아무도 몰라요.

오직 삼손만 알아요.

삼손은 자기 아내에게 이 비밀을 알려 줍니다.



삼손은 수수께끼의 비밀을 아내를 통하여서 알도록 한 것입니다.

동무들이 도무지 수수께끼 비밀을 알 수가 없으니까

삼손의 아내에게 와서 알려 달라고 조릅니다.



그러자 삼손의 아내가 알려줍니다.

동무들은 삼손의 아내로부터 알게 된 비밀을 삼손에게 말하고 삼손으로부터 약속 된 겉옷과 속옷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장차 천국에 입고 갈 옷을 걸고 하는 수수께끼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던진 수수께끼가 있어요.



강한 자에게서 꿀이 나오는 거예요.

곧 강한 예수가 죽어서 자기백성이 구원하는 것이에요.

곧 예수를 통하여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교회 밖에 몰라요.

교회 이외는 알려주신 적이 없어요.

삼손은 자기 아내에게만 수수께끼의 해답을 알려주었어요.



삼손의 아내 덕분에 친구들은 옷을 받았어요,

계시록에 19장을 보면 하나님이 어린양의 신부들에게 흰 세마포 옷을 입혀주시지요.

그 옷은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상징합니다.



이게 세상에 던져진 비밀입니다.

사자가 죽어서 단 꿀을 내듯이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그 자리에서 또 다른 하나님의 아들들이 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긴 수수께끼를 알려 주어요.

그 수수께끼 해답을 아는 교회 이야기가 아브라함의 광야 생활 속에서는 브엘세바 일곱 우물 이야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안의 식솔들과 짐승들을 광야의 목마름으로부터 살려내기 위하여 우물을 판 것입니다.

아브라함 집안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암양 일곱을 주고 산 그 우물 물을 마시고 광야에서 닥치는 목마름을 해결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암 양을 주고 산 브엘세바의 일곱 우물은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로 값주고 산 아시아의 일곱 교회로 나타난 것입니다.



교회 속에 예수님의 신부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우물가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여자들처럼 말이에요.

우리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들입니다.



신랑이 곧 오실 겁니다.

그러니 세상 사는 것이 광야 길처럼 힘들지라도 신랑을 만난다는 소망으로 잘 이겨 내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넘침바 되었습니다. 이 상징적인 이야기를 예수님의 이야기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하시옵소서. 교회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 사랑하는 바람이 나서 신랑 한 분 만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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