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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40강. 여호와 이레 (창세기 22:1-23)

by coroa 2021. 5. 1.

 

[40강. 여호와 이레 (창세기 22:1-23)]

-.정낙원 목사

 

오늘은 여호와 이레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여호와 이레란?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셨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희생제물을 친히 준비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러면 구약의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의 본질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는 진짜가 아니란 뜻입니다.

진짜는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한 제물이란 말입니다.

이를 히브리서에서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먼저 보고 갑시다.

한 절 한 절을 봅시다.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율법은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하지요.

율법은 장차 좋은 것이 오는데 이를 보여주는 그림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로는 온전해 질수가 없다고 합니다.



좋은 것이란? 실체란 뜻입니다.

이러면 자연히 율법은 실체를 보여주는 그림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온전해 질수가 없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율법으로 드리는 제사는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이는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는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니고 너는 죄인이야 라고 알려주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제사를 왜 지내나요?

죄 지으니까 지내지요.

그러니까 제사를 지내면서 나는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5-7절 그리고 10절을 봅시다.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하나님이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하지요.

하나님은 한 몸을 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보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대신 희생당할 한 몸을 책에다 기록해 놓았는데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몸을 입고 왔습니다!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단 번에 제물로 드림으로서 자기백성들이 거룩함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9절을 봅시다.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첫 것을 폐하신 것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하지요.

첫 것이란?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말합니다.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장차 예수의 몸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설명하기 위하여 드린 것입니다.



율법은 마치 사진과 같은 겁니다.

사진은 실물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실물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심으로 첫 것인 율법으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는 폐하여지게 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몸으로 드려지는 둘째 것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미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는 받지 않고 예수님의 몸으로 드리는 제사만 받기로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아버지여 내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예비한 한 몸의 제물을 일컬어 여호와 이레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를 알고 예수님을 보고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이 예수가 바로 “여호와 이레” 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여호와 이레를 설명하기 위하여 만들었어요.

이걸 “그를 위해서” 라고 합니다.



골 1:15-17=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가 누구냐?

세상 죄를 지고 가기 위하여 한 몸으로 오신 여호와 이레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신 것은 그를 위하여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그 분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곳이에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입니다.

그 뜻은 그 아들을 만유의 주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에 의하여 만물이 만들어졌고,

그를 위하여 만물이 다스려지고 있어요.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하는 것도 그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우리의 원함이나 우리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원함으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가지 인도해 오셨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일을 하고 계시며,

장차도 하나님께서 일을 성취해 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은 성경을 통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린 이미 다 얻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면 다 얻은 것입니다.

더 얻을 것이 없어요.



얻은 것이 너무도 크고 광대한데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니까 사는게 힘이 드는 겁니다.

내 뜻을 이루고자 하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어디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뜻대로 살아지던가요?

안 되어요.

왜 그러냐?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래 없던 자입니다.

언약 때문에 생겨난 자들입니다.

언약이 먼저이고 우리가 나중이에요.

언약이 없었으면 우리 인생도 없습니다.

언약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를 만들기 전에 시나리오가 먼저 이듯이 언약이 먼저이고 우리가 나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잉여품인 것입니다.

언약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언약을 누가 세웠나요?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도 언약을 위하여 간섭을 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 언약을 이룰 때까지 우린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요.



인명은 재천이라고 하지요.

맞아요.

우리의 명줄은 하나님이 잡고 계세요.

사명을 다할 때까지 우릴 살려 두세요.

이걸 사명 때문에 산다고 합니다.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의 운명은 작가에게 달렸어요.

작가가 드라마 속의 배우에 명줄을 쥐고 있어요.

늘렸다 줄였다 해요.

말 안 들으면 멀쩡한 사람도 사고사로 죽게 만들어서 하차 시켜버려요.

우리 인생이 그래요.

우리는 사명을 다할 때까지 죽을 수도 없어요.



요한계시록 11장을 보면 두 증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명을 다할 때까지 죽을 수가 없어요.

사명이 다하니까 하나님이 무저갱으로부터 짐승을 올려 보내서 죽이게 합니다.

그리곤 죽은 그들을 하늘로 데리고 가십니다.



하나님이 살렸다 죽였다 하시는 겁니다.

이게 우리의 운명이에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줄 몰라요.



여러분 인류사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인가요?

에덴동산이지요.

거기엔 내 뜻이 필요가 없는 곳이에요.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곳입니다.

근데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다가 망한 겁니다.



인간의 불행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면서부터 시작이 되었어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인간의 불행은 시작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이 언제 행복하고 언제 불행한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순종으로 살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세요.

그게 광야에요.



애굽은 스스로 살수가 있지만 광야는 순종으로만 살 수가 있는 곳이에요.

광야는 자기 뜻대로 살고자 하면 개고생을 하고 순종하면 편안하게 사는 곳이에요.

하나님이 알아서 하는 대로 따라가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요.그런데 인간들이 광야에서 스스로 살고자 하다가 개 고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광야 사십년을 정의하기를 하나님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다 주었다고 합니다.

이를 독수리 날개로 업고 다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간섭하고 사랑하는지를 알려주고자 함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열고 귀를 열어서 애들아 너희가 받은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줄을 아느냐 라고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지는구나를 알고 인생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은 다른 것이 없어요.

내게서 다 떠나간다 할 찌라도 오직 예수 한 분으로 인하여 감사 할 수 있는 신앙,

그게 바로 좋은 신앙이에요.



신앙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드리는 것도 아니에요.

내가 산을 들어서 바다에 옮기는 것도 아니에요.

신앙은? 범사 속에서 주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사는 거예요.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감사가 감사가 되려면 먼저 깨달음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계속 깨닫게 해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후에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은 내가 강한 편 팔로 너희를 안고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서 가나안까지 데리고 왔는지 너희 후손들에게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신 사건을 구약의 성경으로 기록해놓았어요.

신약의 성경은 죽음에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가 오순절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어서 동행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예수가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신약 성경이에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지 않고 역사 속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성경이에요.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은 하늘에 있다고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인간들에게 신은 추상적 존재인 겁니다.

아니에요.

성경은 하늘에 계시던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합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에요.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인간과 희노애락을 함께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고 실제에요.

우리 안에 오셨어요.

실제 우리의 삶에 개입하여서 함께 하고 있어요.



이걸 실제로 믿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신앙만 있으면 안 되고 생활로 나아가야 해요.

생활이 없는 신앙은 도를 깨치는 것밖에 안 되어요.

그건 관념이에요.



신앙은 하나님과 스킨십 하는 것이에요.

사랑을 스킨십이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하여서 자꾸만 사건을 벌리는 것은 스킨십 하는 거에요.

그 스킨쉽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어서 역사를 다스리고 있어요.

그 역사 안에 내가 있어요.

하나님은 지금도 내 인생에 개입하여서 하나님의 뜻대로 끌고 가고 있어요.

성경은 이걸 알라는 것입니다.



어걸 놓치면 아무리 좋은 신앙고백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허상이 되고 마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말을 뻔드르 하게 하는 게 아니에요.

성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적 지식을 모르더라도 범사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살면서도 가장 기분 나쁜 것이 뭔가요?

무시당하는 거잖아요.

투명 인간 취급당하는 거잖아요.

사람이 곁에 있는데도 반응치 않아 보세요.

모멸감으로 살 수가 없어요.



오면 오고, 가면 가고, 아무 반응이 없어보세요.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잖아요.

취급당하지 않는데 어찌 삽니까?

헤어져야지요.



우리는 투명 인간 취급 받지 않기 위하여 자꾸만 사건을 일으키잖아요.

사건을 벌여서라도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잖아요.

사건 때문에 알콩달콩 싸우면서도 자존감을 회복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이 그렇게 하세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간섭해 오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건 속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사건 속에 잡어 넣으니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라고 반응을 하는 겁니다.



이게 광야 생활이에요.

이스라엘이 400년 동안 종살이 하면서 그냥 관념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었어요.

죽은 하나님이에요.

실제로 하나님은 아브라함 언약을 차근히 지켜나가고 있었는데 정작 아브라함 후손들인 이스라엘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알려 주려고 모세를 보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애굽에 바로를 혼을 냅니다.

이스라엘이 사는 고센 땅은 평온하고 애굽인들이 사는 땅에만 재앙을 내림으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리곤 출애굽을 시킵니다.



출애굽을 시켜서 광야에 나오니까 하나님이 하늘에서 매일 만나를 주시고 반석에서 물도 주시면서 그들의 삶 속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광야 길을 인도하면서 하나님이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를 일컬어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나안에서는 광야에서 알아진 하나님을 찬송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만큼 하나님을 믿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 굴복 당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안 것이 아니에요.

교회에 와서 비로소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왔어도 곧바로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고 한동안 율법 아래 있게 하세요.

율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하세요.



율법아래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제대로 안 것이 아니에요.

율법 아래서 알아진 하나님은 상선벌악하는 하나님이에요.

이런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에요.

애굽에서 아는 하나님과 같아요.



애굽에서 알아진 하나님은 율법의 하나님이에요.

상선벌악 하는 하나님,

인과응보 하는 하나님,



우린 예수도 그렇게 알았어요.

교회에 처음 와서 배운 예수가 말 잘 들으면 복 주고 말 안 들으면 벌주는 예수에요.

복 받기 위해서 교회 생활을 열심히 했어요.

그러다보니까 예수 믿는 것이 기쁨이 아니고 어느새 수고하는 것이 되고 만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어요.

첫 째 놈이 이스마엘이고 둘 째 놈이 이삭입니다.

근데 아브라함이 첫째 놈하고 둘 째 놈에게 주는 물이 달라요.



이삭에게 준 물과 이스마엘에게 준 물이 따로 있어요.

이스마엘에게 준 물은 가죽부대의 물인데 “한 가죽부대” 라는 말 자체가 히브리어로 “헤메트”인데 이는 “분노 한다” “병”이라는 뜻이 있어요.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물을 주며 “마시고 병들어라!”

혹은 먹고 “분노하며 살아라!” 고 하겠어요?



그런데 그 말 뜻이 그래요.

이스마엘과 이삭을 우리라고 생각해 보세요.

이스마엘은 육으로 낳고 이삭은 약속으로 낳어요.

이스마엘은 아담의 후손이고 이삭은 예수의 후손이에요.



우리 옛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고 새 사람은 예수의 후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스마엘부터 출발해요.

율법으로부터 시작해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에게 분노의 물을 주지요.

분노의 물은 율법을 상징해요.

율법은 내가 가지면 가질수록 내가 쉼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만 가지게 되어요.



그래서 분노가 쌓이는 거예요.

해도 해도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은 육으로 낳은 종이에요.

종에게 있어서 일은 끝이 없어요.



그래서 율법 아래서 하는 신앙생활은 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때가 차면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주세요.

이건 이삭의 출생과도 같아요.

이게 예수 안에서 난 새 사람입니다.



새 사람이 먹을 물이 따로 있어요.

이삭에게 주는 물은 우물 속에서 나오는 생수를 주어요.

예수님이 이것을 너희 안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한다고 하였어요.



성령이 오시면 우리 안에 생수가 넘치게 됩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세요.

그럼 신앙생활이 기쁨이 되어요.

감사가 되어요.



율법 아래와 은혜 아래는 먹을 물이 달라요.

율법 아래서는 가죽부대 물이고 은혜 아래서는 솟아 나는 우물물이에요.

가죽부대에 물을 가지고 가는 자는 떨어질까 노심초사하지만 샘에서 솟아나는 생수를 먹는 자는 물이 떨어질까 걱정을 하지 않아요.



육에 속한 자에게는 율법을 주고, 영에 속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어요.

은혜를 먹어야 갈함이 없어요.

사람이 언제 행복 하느냐?

자기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행복해요.



자기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 계속 쫓기게 되어있어요.

그러나 내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예수에게 맡기면 편해져요.

내가 내 행동을 책임지면 힘들어요.

내 행동을 예수에게 맡기면 편해요.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예수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겁니다.

율법 아래서는 내가 내 행동을 책임졌어요.

그러나 은혜 아래서는 예수님이 내 행동을 책임져 주세요.

예수님이 날 변호해 주세요.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에요.

예수님의 것으로서의 나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바라보면 내가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나로부터 해방이 되는 거예요.



애굽에서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졋지면 광야에서는 내 인생을 하나님이 책임을 지세요.

우리는 지금 광야 길을 걷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날마다 출애굽을 하는 게에요.



출애굽이란 나로부터 탈출하는 거예요.

내 인생을 예수에게 맡기는 출애굽을 하는 거에요.

출애굽 할 때 어린 양의 피를 발라서 출애굽 시키지요.



지금도 예수의 피를 바르고 내 자신으로부터 출애굽을 시켜요.

무슨 말인고 하니 내 꼬라지를 보지 말고 예수 안에서 내 인생을 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내 인생을 보면 내가 책임질게 아무도 없어요.



성령이 이 사실을 알게 하세요.

이게 믿어지면 인생이 가벼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마음의 쉼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꿈을 가지고 있는 한 불행의 시작이에요.

인간의 꿈이란? 자기 욕망의 화신이에요.

욕망이 꿈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지는 꿈은 항상 “자기 가치 챙기기” 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꿈이 포기 되지 않는 한 쉼을 누리지 못해요.

그 꿈이 깨어질 때에 쉼을 누리는 거예요.

아이러니 하게도 인간은 꿈을 가지면 불행하고 꿈이 깨어지면 쉼을 얻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꿈을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그 꿈이 바로 십자가에서 깨어지는 겁니다.

예수와 함께 내가 죽었다는 그 사실이 믿어 질 때에 비로서 십자가가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2006년도에 전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1위 나라는 바로 원시인들이 사는 남태평양 아래 있는 바투아트 라는 나라였어요,

178개 국 중에서 가장 행복을 느끼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피지 중간쯤에 위치한 80개 정도 되는 섬나라예요.



그들에게는 걱정 할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배고파 먹고 싶으면 바다에 가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고기가 잡아서 말릴 이유도 없어요.

그러니 고기를 많이 잡는 자들이 이해가 안 되는 거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럽니다.

애들아!

저기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저들을 누가 먹이는 줄 아느냐?

천부께서 다 먹이신단다!



이것이 무슨 말씀 인가요?

하나님이 농사 지은 그곳에 와서 먹으면 된다는 거예요.

마치 바투아투 사람들이 배고프면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아먹으면 되듯이 말이에요,

언제든지 가면 고기가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걱정하지 않게 되지요.



바투아투 사람들은 바다에는 항상 고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고 사는 겁니다.

바투아투 사람들에게는 바다가 쌀 독이에요.

양식 항아리에요.

언제든지 먹고 싶을 때 퍼다가 밥 지어 먹으면 되어요.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그랬어요.

하나님은 매일 만나를 주셨어요.

자고 일어나면 만나가 지면 가득히 내렸어요.

매일 내리니까 창고를 지을 필요도 없는 겁니다.

저장할 필요가 없어요.



매일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알면 걱정 근심이 없어요.

매일 만나를 주신다는 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염려하지 않아요.

그러나 이것이 안 믿어지는 사람은 두려워요.



혹시 내일 안 주면 어떻게 하지,

그럼 창고에 모으게 되는 겁니다.

모았는데 벌레가 생기고 말았어요,

이것은 인간의 탐욕은 벌레를 불러들이는 일을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벌레가 뭐겠어요.

각종 근심 걱정 거리 들이지요.

하나님은 만나를 모아 두면 화를 냈어요.

왜 날 믿지 못하느냐고,,



왜 믿지 못하고 만나를 모아 두는가요?

이는 자기 안에 욕심 때문입니다.

그 욕심을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신약에서는 탐심을 우상 숭배 라고 해요.



우리는 우리 독자적으로 욕심을 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말씀을 가지고 우상을 깨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회개하게 되는 겁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에는 내려놓게 되어요.



하지만 그것도 그 때 뿐이에요.

교회 문을 열고 나가면 세상이 보여요.

세상이 보이면 세상 방식으로 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처럼 어리석게도 매일 수고하며 살게 되는 겁니다.



이것들이 계속 반복되다가 보면 지치고 비로서 하나 둘씩 내려놓게 됩니다.

이 싸움을 일평생 하는 거에요.

신앙생활은 하루아침에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조금씩 조금씩 깨트려져 가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시점에 가서 보면 세상에 대하여 많이 내려놓은 자기 자신을 보게 되어요.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자기 자신을 포기하게 되고,

신앙이 깊어질수록 자꾸만 욕심을 내려 놓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도 버리고 자기 이름도 버리고 자기를 버리는 쪽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이게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보물 같은 존재에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들이에요.

근데 하나님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이 때 이삭의 나이가 제법 들었을 때에요.

주경학자들은 15세 전후쯤이라고 해요.

번제에 쓰일 장작을 짊어지고 가게 하였을 정도이면 제법 자랐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브엘세바의 일곱 우물 사건 이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브엘세바의 일곱 우물은 신약적인 의미에서 일곱 교회 시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교회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고 난 후라는 뜻입니다.

이삭이 자랐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신앙도 자라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배워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믿고 사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셨지요.

그리고 난 후 100세에 이삭을 주었어요.

이삭에 15세쯤 되었으니 약 40년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이에요.



그동안 아브라함은 많은 하나님을 경험 했어요.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에 아브라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저 추상이고 관념 이었어요.

하나님은 40년 동안 아브라함을 간섭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주었어요,

바로 왕도 혼을 내고 아비멜렉도 혼을 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 주십니다.

또한 죽은 자 같은 사라의 몸 속에서 이삭을 낳게도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신 거예요,.



아브라함은 40년 동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배워왔어요

오늘 본문을 많이 오해되어서 설교가 되어져요.

특히 부흥사들이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탈하기 위하여 잘 써 먹는 본문이에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쳤듯이 여러분들도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식으로 설교를 합니다.

이건 그런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을 시험한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확인해 본다는 뜻이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너 나를 얼마큼 알고 있는데” 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많이 보여주시고는 “너 나 얼마큼 알고 있어” 묻는 거에요.

믿음에 관한 것이에요.

아브라함을 넘어뜨리는 유혹(temptation 템테이션)이 아니고 서로의 신롸 관계를 알아보는 시험(Test 테스트)이에요.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들었어요.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고 이제 시험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진짜 하나님을 의지하는지 시험하는 거예요.

이는 곧 하나님이 불신자 아브람을 40년 동안 거쳐 오면서 믿음에 사람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놓고 이 놈 믿음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테스트 하는 것과 같아요.



아브라함에 계시된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에요.

죽은 자를 가지고 생명을 낳게 하는 하나님이에요.

이를 이삭으로 보여주셨어요.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그냥 단순한 아들이 아니에요.

죽은 자를 살려내는 하나님을 알게 하는 아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 놈이 내가 죽은 자를 살려내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죽은 자의 몸에서 난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 일을 하세요.

우리도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그런 경지에까지 이끌어 가고 있어요.

결국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까지 바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어~ 이 놈이 나를 제대로 알고 있네!” 하시고는 이삭 대신 다른 제물을 바치게 한 것입니다.

이게 여호와 이레 에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아브라함 자신이 바쳐진 것이에요.

아브라함은 예전에 자기 하나 살기위하여 사라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었어요.

그러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를 버리는 수준까지 도달한 것입니다.

이 수준까지 도달케 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함을 아브라함이 한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행하였다고 하빈다.

믿음으로 라는 말은 곧 하나님이 행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알고 야고보서에서는 믿음과 행함을 이야기할 때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을 가지고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그러한 행함을 만들어 냈다는 뜻이에요.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바치는 행함을 만들어 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행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고 이삭을 드릴 수 있도록 믿음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자랑스러운 거예요.

하나님의 그 은혜를 찬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는 쪽으로 가야해요.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믿음을 지키고 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여기가지 끌고 온 거에요.

그러니 그 인도하심에 감사가 나와야 해요.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거예요.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사랑은 억지로 되지 않아요.

사랑은 자기 속에서 우러나와야 해요.

사랑의 다른 말이 감사인데, 그 감사는 깨달아져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속 깨닫게 하는 작업을 하고 계세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작업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도하고 수많은 아픔도 일어나요.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날마다 깨어지는 거예요.



십자가는 날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를 기각시키는 현장이에요.

마치 맷돌에다 곡식 넣어서 갈듯이 우리 의를 부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깨어지고 부수어 질 때에 천국이 이루어져요.

내 자존심이 깨어지고 내 명예가 깨어 질 때에 비로소 천국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세상에 욕심 없이 맨 날 웃고 사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미친 사람들입니다.



미친 사람들은 근심걱정이 없어요.

마음에 천국으로 사는 겁니다.

예수를 만나면 미친 사람이 되어요.

수가성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나서 미쳐버리지요.



자신의 인생이 목마름의 인생이었어요.

그리고 수치를 가리는 인생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난 후 목마름도 해결되고 수치도 해결 되었어요.

그래서 물동이를 내 버리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육신의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우물에 왔는데 거기서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하는 물을 만나 겁니다.

그러자 육신의 목마름을 얻고자 하는 물동이를 버리게 되는 겁니다.

예수를 만나고 보니까 세상일을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가 주는 물을 마신 자는 그물을 찾게 되어 있어요.

다른 물 못 마셔요.

예수가 주는 물만 찾아요.

왜냐하면 예수가 주는 물을 마셔야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은혜를 주세요.

그리고 그 은혜를 찾게 하세요.

은혜를 맛보게 하시고는 계속하여서 그 은혜를 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바로 기도로 나타나는 겁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 간청하는 거에요.

은혜 아니면 못 살 것 같으니까 또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고 하시지요.

그리고는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말씀하시지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세상으로부터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세요.

그러면 어떤 환경에서든지 천국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다 세상으로 부터 왔어요.

그것들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해요.

진짜 행복은 위로부터 와요.

마음을 지으신 분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거예요.



예수께서 부활하시어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십자가의 흔적을 보이시고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라고 하시지요.

이것은 하늘에 평강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주어지게 되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서만 평강을 누려요.

하늘에 평강은 오직 자기백성에게만 주세요.

예수를 만나게 되면 평강을 얻게 되어요.



어쩌면 부르심과 이삭을 바치기까지의 아브라함의 40년 기간은 아브라함을 죽이는 기간이에요.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이나 예수님의 광야 40일은 고난과 시험을 당하는 기간을 전부 함축하고 있어요.

우리도 지금 그 광야 40년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이 자기 아들이라고 했으면 바칠 수 없었어요.

하나님의 것임을 알 때에 이삭을 바칠 수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원래 없던 자에요



그런데 선물로 받았어요.

아브라함이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원래 없었던 자인데 주셨으니 이삭을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주실 것을 믿었기에 이삭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봅시다.



히 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이 믿음으로 했다고 하지요.

아브라함의 실력이 아니에요.

믿음으로 했어요.



그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예요.

믿음이 있으면 누구든 이 일을 할 수 있어요.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대목이 있어요.



창세기 22장에서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독생자를 바쳤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이것이 아주 중요해요



독자는 외아들을 의미하지만,

독생자는 “스스로 존재 하는 자” 를 의미해요

스스로 사는 자는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독자 이삭 속에서 예수를 본거예요

곧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보았어요.

이삭 자체가 부활한 자와 같은 겁니다.



사라의 죽은 몸에서 이삭이 나왔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의 몸에서 나온 자이기 때문에 죽음에서 나온 것과 같아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부활을 본 것입니다

이삭은 죽어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을 본거예요.

결국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독자 이삭을 바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네가 이제야 나를 바로 알고 창조주 하나님 대접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잘 가르친 것입니다.

그거에 고맙다고 하는 거에요.

아브라함아 잘 커줘서 고맙다고 하는 겁니다.



이걸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자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영광이란 은혜에 보답하는 거에요.

마치 화분을 잘 가꾸었더니 그 놈이 꽃을 피워서 기쁘게 해 주는 것과 같아요.

화문에 물을 주는 것은 꽃을 얻고자 함이잖아요.

이럴 때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간섭을 하세요.

우리 안에서 믿음이 일으킨 행함 들을 쏟아 내라고 말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함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기 목숨까지 하나님께 드리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목숨보다 귀한 독자 이삭을 드리는 모습으로 나타나자 기뻐하시는 거예요.

속된 말로 하나님이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키워가고 있어요.



바울이 그러지요.

사나 죽으나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고백이 아니에요.

산전수전을 겪어 오면서 숱한 신앙의 훈련을 지난 다음에서야 고백되어지는 것이에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혼자 죽지 않았어요.

우리와 함께 죽었어요.

그리고는 죽은 자를 살려내세요.

살려 놓고서는 이제는 예수를 위하여 살게 하는 거예요.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그런 방식으로 다스려가세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제사를 드리러 갈 때에 이삭이 “아버지 제물은 어디 있어요?” 라고 묻지요.

그때에 아브라함은 제물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 하실 거라고 하잖아요.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가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약속으로 난 자이므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에요.

이삭은 예수님을 예표해요.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이삭을 죽이지 않고 수양을 죽이지요

하나님이 원하는 제물은 수양과 같은 자라는 거예요,

수양과 같은 자가 신약의 예수에요.



다시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1-10=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짐승은 그림자이고 한 몸이 살상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이 원래 받고자 하신 것은 한 몸이에요.

그 한 몸은 하나님이 준비 하세요.

이삭처럼 약속으로 오신 분이라야 해요.



이걸 율법으로 드리는 짐승의 제사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물은 장차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것을 한 사람을 예표 하는 것이에요

구약에는 제물을 드릴 때마다 제물을 통하여 장차 오실 한 몸 되신 분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만이 제사의 의미가 살아나요



제물을 잡아서 드리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것이 아니에요.

내용이 없는 제사는 진짜 제사가 아니에요

제물이 아니고 하나님이 예비한 한 몸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 한 몸을 창세전에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 준비한 한 몸을 보내는 때도 하나님이 정한 때가 있어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예수를 투입시키세요.

예수가 올 때 까지 예표하는 것을 주시었는데 그것이 바로 제사의 짐승이에요

제사를 드리면서 이 제사는 장차오시는 분이 자기 몸으로 드리는 제사를 예표하는 것임을 알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사건으로 장차 예수님이 오시어서 하실 일들을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실상이 올 때까지는 예표적으로 드리는 제사가 효력이 있어요.

이걸 선취적 믿음이라고 합니다.



구약은 그래서 매일 제사를 드렸어요.

한 몸이 올 때까지 드려야하는 것이므로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메일 드려야하는 겁니다.

한 몸이 오시면 매일 드릴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두 번 세 번 죽을 필요가 없이 단번에 드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단번에 제물이 되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도 단 번에 사하여졌어요.

만약 우리의 죄가 단 번에 죄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예수가 매일 죽어야 해요.

예수님이 단 번에 죽으시고 단 번에 살아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일괄 처리 했다는 것입니다.

일괄처리 했다는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단 번에 해결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단 번에 해결하셨어요.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매래의 죄까지 일괄처리 하셨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는다고 해서 다시 예수를 죽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어서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하세요.

이것이 믿어지는 자는 그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사를 드리는 곳이 모리아 산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솔로몬이 나중에 성전을 지어요.

이는 여호와의 이레로 오실 분이 바로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짐승의 제사로 드려지는 율법으로 세워진 성전을 헐라고 하면서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전이란? 여호와 이레의 제물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왜 예수님을 보내셨나요?

이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자기백성들과 화목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초부터 하나님이 인정하는 한 몸을 주신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구원받은 백성들이 천국에서 세세토록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한다고 말해요.

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고 그 화목이 이루어진 자들은 그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결정적으로 꽃이 핀 것이 십자가입니다



구원은 은혜의 산물이에요.

은혜로 구원 받을 것은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즉흥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계획된 것임을 깨달아야만 해요.



우리의 구원이 창세전에 결정이 된 것이에요.

이걸 알아야 담대함이 생겨요..

야 내 인생이 이미 창세전에 계획된 것이구나

내가 망해도 망하는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걸 알았기 때문에 우겨 쌈을 당하여도 우겨 쌈을 당하지 아니하고 내가 망한 것 같지만 내가 망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현실 속에서 묵시를 보고 살았어요.

현실이 암담해도 이미 하나님이 창세전에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한 과정에서 잠시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겨낸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도 다 지나가는 것이에요.

부함도 빈함도 지나가요.

기쁘다고 방방 뛸 일도 아니고 망한다고 슬퍼할 일도 아닌 겁니다.

다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어떤 일에도 너무 힘들어 하지마세요.

영원한 것이 아니니까요.

지금 나에게 닥치는 일들은 모두가 언약에 의한 것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언약에 의하여 일어났고 부활 하신 것도 언약에 의한 것이었듯이 우리에게 닥치는 죽고사는 모든 것도 다 언약을 위한 것이니 염려치 마세요.

사람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모두가 길동무들이에요.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가 정한 때까지 길 동무들이에요.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 곁에는 착한 사람도 있고 악당도 있잖아요.

때가 되면 주인공이 영광된 모습으로 드러나요.

그러니 현재 일어나는 일로 너무 큰 의미를 두지 마세요.



예수님이 몰고 온 천국은 세상과 단절 되는 곳에서 맛볼 수가 있어요.

무슨 말인고 세상 가치를 버리고 영적 가치로 살 때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가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에요.

이 속에는 돈도 들어가 있고, 명예도 들어가 있고, 권세도 들어가 있어요.

이런 가치를 쫓아가면 천국은 사라져요.

지옥이 되어요.



성도는 믿음으로 살 때 행복합니다,

믿음 안에 성도의 행복을 담아 놓았어요.

하나님은 이 행복을 맛보게 하시려고 믿음을 주었어요.

우리의 역사를 초월하여있는 자들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두 사이에 끼어 있어요.

흙에서 난 육신을 가지고 예수를 믿고 있어요.

육신의 욕망을 이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이길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에요.

구원이란? 하나님이 잔치를 벌려놓고 우리를 초대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천국을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로 비유하셨지요.

진치 집에는 그냥 가면 됩니다.

가서 차려진 음식을 먹으면 되어요.

우리를 그런 천국으로 초대하였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차려 놓은 것을 먹으면서 감사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일을 다 해놓으셨어요

하나님께서 다 구원하시고 우리를 초청하여 주시었어요.



초청해놓고 우리는 “하나님 참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되어요.

잔칫집에 가서 여러분이 가지고 간 그 무엇도 내놓으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주인을 모욕하는 것이에요.



잔치집에서는 체면이 필요 없어요.

“오직 감사합니다!” 이 말만 필요해요.

그것이 신앙생활이에요.



교회로 모일 때에 하나님이 풍성하게 주신 말씀을 닫고 감사하면 돼요.

이런 말씀들이 들려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말씀을 사모하여서 모이기에 힘쓰고,

말씀의 맛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에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안목이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지고, 더 풍성해지세요.

바울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풍성함을 많이 넓게 깊게 알기를 기도했어요.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밥상을 차려주었어요.

우리는 예수님이 차려 놓은 그 밥상에 둘러앉아서 차려주신 그 분에게 감사하여야 해요.



그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가 바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여호와 이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앞세우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예배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건들이 이미 창세전에 계획된 사건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았습니다. 창세전에 이미 한 몸을 준비하셨고 그 한 몸을 알려주기 위하여 이삭을 주셨고, 또한 이삭을 통하여서 여호와 이레의 제물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주어지는 구원의 사건을 창세전에 준비된 여호와 이레의 제사임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도록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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