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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38강.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 (창 21:8-21절)

by coroa 2021. 4. 23.

 

[38강.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 (창 21:8-21절)]

-.정낙원 목사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에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헤인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글 속에는 성령의 감동이 들어가 있어요.

그러므로 성경이 비록 우리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기록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상식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율법주의 유대교 신앙이 됩니다.

유대주의는 성경의 문자를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주의입니다.

유대교인들이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예수 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상황은 예수님의 초림 당시나 재림 때나 어느 시대나 동일합니다.

동일한 죄 아래 있고 동일한 마귀가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초림 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과거에 바리새인이 있었으면, 지금도 바리새인이 있습니다.

과거에 사두개인이 있고 열심당원이 있으면, 지금도 사두개인이 있고 열심당원이 있습니다.

과거에 쿰란공동체가 있으면, 지금도 쿰란공동체가 있습니다.

엣세넷파니 쿰란공동체니 하는 사람들은 요즘으로 말하면 수도원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과 같고 자기들끼리 끼리끼리 모여서 왕국을 꾸미는 이단들과 같아진단 말입니다.



반드시 그런 집단들은 일어나 줘야 해요.

그래야 성경은 어느 시대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리로 남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실 때 구약의 일은 신약하고 상관없어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게 볼 거 같으면 창세기를 강의할 필요 없습니다.

구약을 볼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성경은 어느 시대고 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구약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신약으로 해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조명해주시면 구약의 사건을 신약의 사건으로 이해가 됩니다.

신약의 사건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모든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기록했다고 합니까?

나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했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성경은 다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그럼 오늘 이 본문도 예수님 이야기가 되겠지요.

맞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자기 백성 구속사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살펴볼 때 일차적으로는 그 당시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로 해석을 하세요.

왜냐하면 지금도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일을 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역사적 사실로 기록한 것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지 않고 인간들 속에서 일을 하시고 있다는 뜻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간섭하셨듯이 지금도 자기 백성들을 간섭을 하시고 계십니다.

이걸 아셔야 해요.

이게 믿어져야 흔들리지 않아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지고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을 어떻게 간섭을 하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집안인데도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집안에 이스마엘이 있었고 이삭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은 하갈이라는 첩을 통해서 낳은 자식이고,

이삭은 사라라는 정실부인을 통해 낳은 자식입니다.



서열상으로 보면 첩의 아들이 장자이고 정실부인의 아들이 차자에요.

그런데 첩의 자식이 정실부인의 자식을 희롱하는 겁니다.

그래서 정실부인이 뿔따구가 나서 첩의 자식을 집에서 쫓아내버렸어요.

이건 그 당시 아브라함 집안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형제 싸움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약의 예수님 이야기로 해석이 되면 달라집니다.

영적인 이야기로 해석이 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이번에 00에 가서 강의를 하는데 성경을 절대 문자로 보지 말라고 했어요.

원어 중심으로 보려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원어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원어가 가진 특성 때문입니다.

원어 속에는 많은 다른 뜻이 담겨져 있어요.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동일한 단어인데도 그 단어가 담고 있는 내용은 다양한 것이어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뜻이 달라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해하는 사람의 신앙에 따라서 하늘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땅의 이야기도 되기도 해요.

모든 언어는 다 그래요.

우리나라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누구에게 “너 그러면 죽는다” 라고 했다고 합시다.

“너 그러면 죽는다” 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 사람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너 그러면 죽는다” 라는 말의 본 뜻은 “너 자꾸만 그런 짓을 하면 혼을 낸다”는 말입니다.

경고의 말이에요.

까불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너 그러면 죽는다”는 말 속에는 “경고”, “까불지 말라” “죽음”이라는 다양한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뜻은 완전히 달라져요.

이게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함정이에요.

이처럼 모든 언어는 복합적 뜻을 품고 있어요.

그러므로 얼마든지 본문의 뜻을 곡해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조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어는 파자를 하면 적게는 몇 가지에서 많게는 수십 가지가 나와요.

그러므로 사람의 입맛에 따라서 수십 가지 해석이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구를 잘 보세요.



오늘 본문의 이삭이 “젖을 뗐다” 라는 말이 ‘가말’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이 몇 가지가 있어요.

“젖을 뗐다”는 말이지만,

때로는 “보응했다”는 말도 되고,

때로는 “보복했다”는 말도 되고,

어떤 때는 “열매를 맺었다”는 말도 되어요.



그럼 몇 가지 해석이 나올 수가 있어요.

이러한 것을 파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지금 보는 성경은 원본이 아니고 수없이 거쳐 온 번역본이라는 것입니다.

원래의 히브리어가 아니에요.

원어가 되려면 모세가 이 말씀을 받아서 쓸 때 그 언어라야 해요.



알다시피 모세는 애굽에 왕자였습니다.

애굽에 언어를 사용했어요.

애굽의 언어를 후대에 히브리어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절대적으로 원어 중심으로 해석을 해야 할 것 같았으면 성경 원본을 남겨 놓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원본을 남겨두지 않고 번역본을 주신 것은 언어는 뜻을 나타내는 기호이기 때문입니다.

그 뜻은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성령은 원본이든 번역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세요.

그러므로 원어를 모른다고 해서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원어 모른다고 기죽지 마세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은 번역본이에요.

전 세계 어떤 성경도 원본이 없어요.

원본이 아님에도 하나님의 뜻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성경 속에 성령의 감동을 담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최고의 스승은 성령이에요.

성령이 깨닫게 해 주세요.



한국어로 기록을 했든, 영어로 기록을 했든, 아프리카 언어로 기록을 했든, 아랍어로 기록했든, 어떤 언어로 기록했든 그 속에서 성령의 감동만 임하면 해석이 되어요.

본 의미를 깨달아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성경 해석을 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감동을 입은 성도는 누구나가 그 말씀을 이해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많이 배우고 똑똑하다고 하여도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언어를 가지고 자기 맘대로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 뜻이 개입이 되어요.

그럼 성경의 해석이 달라지게 됩니다.

이 시대에 왜 교파가 이렇게 많이 나누어지고 교단이 나누어지는지 아세요?

그게 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을 해서 그렇단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교회가 하나의 교회였어요.

지역 지역마다 흩어져서 있었을 뿐이지 다 하나였어요.

한 사상으로 성경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예수 이야기로 구약 성경을 해석을 하였어요.



그러니까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서로 교제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나, 아가야 지방에 있던 교회나, 갈라디아에 있던 교회나, 고린도교회나, 예루살렘교회는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서 이제는 너와 나가 없어지고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



유대교와 이방인 교회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한 교회가 된 거에요.

담이 허물어 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을 당하니까 이방인 교회가 형제로서 도와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을 본 적도 없었음에도 한 형제가 되어서 도와준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마게도냐는 수백 킬로 떨어진 곳인데 한 번도 본적이 없는데 도와주고 있다니까요.



지금 이 시대는 바로 옆에 교회가 있어도 도와 주나요?

안 도와주나요?

안 도와주지요.

이건 성경과 다르지요.



이 시대는 교회가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아니에요.

교회의 본질을 상실해 버렸어요.

말씀에 순수성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적 가치가 들어와서 타락케 하였어요.



지금은 교회 안에 교회가 있어요.

교회 안에 교회가 누구인가 하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성경을 보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도에만 의미를 두고서 나오는 자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순수한 교회가 없으니까

그럼 교회 나갈 필요가 없지 않느냐 라고 합니다,

그럼 저는 거짓 교회라도 나가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 한 집안에 육과 영이 있듯이 교회 안에도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영에 속한 자들은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거짓 복음을 들으러 가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아는 복음을 나누기 위해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 누구를 어떻게 만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서 내가 받은 은혜로 섬기다 보면 하나님이 반드시 만나게 해주세요.

성령이 교회를 다스리고 나를 주장한다는 걸 왜 못 믿으세요,



믿음은 우리가 관리하는게 아니에요,

믿음은 주신 분이 관리를 해주세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신앙을 관리할 수 있을 것 같은가요?

아니에요.



우리는 조석으로 변해요.

조석으로 변하는 것이 인간이라니까요,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관리를 해가신단 말입니다.

염려를 하지 마세요,



온전한 사랑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어요.

뭔가 두렵단 얘기는 그 사람의 심령이 지금 온전한 사랑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안에 온전한 사랑이 없으면 필연적으로 두려움이 오고 두려움이 오면 인간들은 반드시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론을 쫓아가게 되어있어요.

 

그 방법론이 뭐냐?

나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위로받고 싶은 겁니다,

거기서 위로가 되면 나를 위로해주는 조직이 나에게는 믿음이 대상이되고 하나의 종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세월호 참사 때문에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는 000 집단을 보세요.

저들이 왜 저렇게 극렬하게 반발을 하고 자기 집단을 지키고자 하는가요?

이는 저들은 그 속에서 위로를 받고 있기 때문이에요.

저 사람들은 그 속에서 위로를 받기 때문에 외부에서 아무리 이단이니 삼단이니 욕을 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위기가 닥칠수록 더 똘똘 뭉쳐요.

저런 상태에 예수님이 가서 말해도 안 들어요.

왜냐하면 그 집단이 자기를 보호해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들이 위로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분들에게는 그곳이 쉼터에요.

000의 말이 그들에게는 진리로 들려요.

그 조직을 와해하고자 하는 자는 다 적이에요.



신자는 여호와를 힘으로 삼고 사는 자들입니다.

세상 힘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요.

세상 힘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가 믿는 하나님은 추상이고 그가 말하는 믿음이란 관념이라는 반증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믿는 것을 의지하게 되어 있어요.

돈을 의지하면 돈이 그 사람에게 주인이에요.

조직을 의지하면 조직이 그 사람에게는 믿음의 대상이에요.



이단의 특징이 뭔줄 아세요.

자기 조직의 힘을 의지하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단의 특징을 자기 힘을 의지하는 자는 다 이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나타난 이단들의 특징을 잘 보세요.

모두가 자기들 힘을 동원하여서 조직을 지키고자 하잖아요.



이들은 하나님을 안 믿어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않아요.

그러므로 조직에 어떤 위험이 닥치면 자기들 힘으로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자기들 조직이 위험에 처하니까 세상의 힘을 가지고 예수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힘으로 자기를 지키고자 하지 않았어요.

도리어 힘을 버리게 하였어요.

베드로가 칼로 예수를 지키고자 하니까 예수님은 칼을 도로 칼집에 집어넣으라고 하였어요.

순순히 잡혀서 죽었어요.



옳고 그름의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말이에요.

이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순교의 역사를 보면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잡혀서 죽었던 것입니다.

신자는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 해요.



지금 나에게 닥치는 일이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일어난 것이라 믿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순순히 받아 들어야 해요.

영적인 것은 인간들 상식적으로 접근하면 안 되어요.

영적인 것은 인간의 이성 밖에 있어요.

영적인 일에는 인간의 지혜나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힘을 발휘하지 못해요.



000 집단이 저렇게 몰상식한 짓을 하는 것도 악한 영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런 것을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에게 모독을 당한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은 반드시 거짓으로 드러나게 만들어요,

수치스러운 것들을 다 보여줘야 해요,



앞으로는 교회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더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집단보다 더 추악한 모습들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가 세상의 창기가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7장 18장에 보면 종말의 타락한 교회를 보고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완전히 응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음녀가 되어버렸단 말이죠.

이 시대 교회에서 증거 되는 말씀을 보세요.

오만가지 소리가 다 들려와요.

말씀 백화점이 되었어요.

백화점에 상품을 진열하듯이 말씀이 진열되어 있어요.

자기가 필요한 것을 취하면 되어요.



이젠 교회 스스로가 노골적으로 세상 종교와 같다는 이단성을 드러내고 있어요.

목사들이 예수 이외도 구원이 있다고 해요.

이게 모두가 개구리 영이에요.

밤이 되면 개구리가 울듯이 교회 안에 개구리 영들이 난무하여서 개굴 개굴 개굴 하는 거에요.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눈뜨고 코 베임 당하는 세상이에요.

교회 안에 이상한 신앙 풍조에 밀려가게 됩니다.

말씀에 든든히 붙잡혀 있지 않으면 언제 넘어질지 몰라요.

내가 말씀에 대하여 눈을 뜨지 않으면 한 순간에 이단에 빠져요.



오늘 이 본문 이야기도 굉장히 영적으로 깊은 이야기가 있어요.

오늘 본문을 일단은 먼저 문자적으로 해석을 한번 하고 난 후에 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합니다.



지금 이삭이 젖을 뗐습니다.

젖을 떼자 이스마엘이라는 놈이 젖 뗀 자기 동생을 희롱을 합니다.

이때 이스마엘의 나이가 거의 17-18세쯤 되었을 때입니다.

장성한 자에요.

장성한 놈이 어린 젖 뗀 동생을 희롱하고 있어요.



여기서 희롱한다는 말 속에는 “멸시하다” “비웃다” “핍박한다”는 말도 있어요,

왜 핍박을 할까요?

어린아이가 젖을 떼는데 왜 핍박을 합니까?

싫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아이들을 돌잔치를 해주잖아요.

과거에는 아이들이 태어나서 너무 많이 죽었어요.

이 아이가 얼마나 살지를 몰라요.

그래서 바로 호적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옛날 어른들이 나아가 호적과 실제가 다른 이유가 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그 아이가 1년을 지나고 나면 이제는 살았구나 해서 그것을 기뻐해 가지고 돌잔치를 해주었던 것입니다.

이 녀석이 이제 살 수 있는 인간이 되었구나,

그래서 잘살아줘서 고맙다고 돌잔치를 해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풍습으로 봤을 때 보통 3살 때 되면 돌잔치를 해준다고 해요.

이삭이 3살 정도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젖을 뗀다 이 얘기는 너는 이제 엄마의 품에서 젖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너는 이제 단단한 밥을 먹고도 살만한 인간이 되었다 이 뜻이란 말입니다.



아이가 젖을 떼는데 이스마엘이 왜 화를 내느냐? 이 말입니다.

기뻐해야지 왜 동생을 핍박 하느냔 말입니다.

언약적 관점에서 본다면,

여기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어요.



성경의 이야기는 모두가 언약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한 사건도 언약적 의미에서 접근을 하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아이가 다 자라가지고 젖을 뗐다는 이야기는,

저 놈이 죽지도 않고 이제 인간 구실을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뿔따구가 나는 겁니다.

왜 뿔따구가 나느냐?

이 놈이 살아있으면 자기가 아버지의 유업을 못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자기뿐이어야 하는데,

저 놈이 생기므로 자기가 빈털터리가 되게 생겼단 말입니다.



결국엔 뭐냐?

자기 밥그릇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 밥그릇을 빼앗기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기업을 주지 못한다고 되어 있지요.



10절에 보면,,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여종의 아들은 내 아들과 같이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했잖아요,



아브라함 집안의 기업을 누가 잇느냐?

정실 부인의 아들이 잇는 것입니다.

그동안 정실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기뻐했는데,

어느 날 아들을 떡하니 낳았단 말입니다.



근데 그 녀석이 잘 자라는 겁니다.

이제 스스로 살 수 있는 아이가 된 것입니다.

젓을 뗐다는 것은 건강하게 사는 이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화가 나지요.



성경은 참 재미있는 것이 항상 기업을 이을 자식이 늦게 태어나요.

기업을 잇지 못할 자들이 먼저 태어나요.

왜 그런가 하면 이건 언약을 말해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아내가 있었죠.

레아가 있고 라헬이 있었습니다.

레아는 언니이고 라헬이 동생입니다. 

야곱은 누구를 사랑했나요?

라헬입니다.



동생인 라헬을 사랑했는데,

라반이 그 동네의 풍습을 따라서 언니 레아를 먼저 주는 겁니다.

그리고 라헬을 주는 겁니다.

근데 레아는 자식을 잘 낳는데, 라헬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겁니다.



야곱에게는 라헬이 정실 부인이고 레아는 첩이에요.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잖아요.

레아는 사랑하지 않았어요.

사랑하는 자가 정실 부인이에요.

근데 첩인 레아가 자식을 많이 낳는 겁니다.

라헬은 정실부인이면서 자식을 늦게 낳아버렸어요,



아브라함 집안과 비슷하단 말이죠,

사라가 정실 부인인데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아들을 먼저 낳아버렸어요,

그러니까 육적으로 볼 것 같으면 이스마엘이 장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실제로 그 기업을 이을 장자는 누구냐 하면 이삭이란 말이에요,



이것을 언약적으로 보면 이래요.

신약과 구약의 의미를 살펴볼 것 같으면,

진짜 하나님의 백성은 구약의 육적 이스라엘이 아니고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에요.

예수님의 신부가 구약의 유대인이 아니고 신약의 교회란 말입니다.

이건 잘 이해 하셔야 합니다.



이런 말 하기가 참 조심스러운데 잘 이해하세요.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구약의 아브라함은 첩이고, 신약의 예수님이 정실부인이에요.

아브라함의 후손은 종이고 에수님이 낳은 성도가 아들이에요.

영적인 의미로 보면 그렇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로 낳아진 자들이에요.

예수로 낳아진 자들이 천국을 유업으로 얻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을 정실부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해되시지요.



성경에는 보면 항상 앞에 나오는 것은 타락해요.

그래서 장자이지만 늦게 나온 차자가 장자가 되는 거에요.

이것이 비밀이에요.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장자가 아브라함이었고 그 후손 이스라엘이었어요.



구약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장자였어요.

그런데 신약에오니까 진짜 하나님의 장자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고 예수님으로부터 낳아진 자들이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낳은 자들이 하나님의 기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난 교회들이, 성도들이 천국이라는 기업을 얻는 거에요.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이삭과 같이 기업을 이을 자가 되는 것입니다.

육적 유대인들은 기업이 없어요.

영적 유대인인 신약의 성도들이 얻어요.

육적 유대인들 입장에서 얼마나 뿔따구가 나겠어요.

그래서 육적 유대인들이 영적 유대인인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형이 되었으면 동생을 잘 돌봐야 되잖아요.

근데 그렇지 않죠.

정반대로 핍박을 하잖아요.



그래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 안 되고, 영적으로, 언약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 집안에 일어나는 일들이 신약에서는 교회로 나타나요.

육에 속한 자들이 영에 속한 자들을 핍박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은혜 아래 있는 자를 핍박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다시 이삭의 젖뗀 사건을 언약적으로 생각합니다.

이삭이 젖을 뗐다는 이야기는 엄마 젓 말고 다른 양식을 먹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삭은 기존에 엄마 품에서 먹던 젖이 있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그 양식을 버려버리고 새로운 양식을 먹게 된 것입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봅시다.



갈라디아서 4장 1-7절까지 봅니다.



갈 4:1-7=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원래 유업을 얻을 자식인데,

어디에 태어나게 만들었나요?

법아래 태어나게 만들었지요.

종노릇하게 만들었지요.



아들인데 잠시 동안 종노릇하게 한 겁니다.

종노릇하고 있다가 때가 되어서 종에서 해방을 시키지요.

마치 재벌 회장이 아들을 잠시 평사원으로 근무시키다가 나중에 회사를 물려주고 회장으로 승진시키는 것과 같아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종에서 아들로 나아가는 것으로 되어있어요.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나아가요.

율법에서 은혜로 나아간단 말이지요.



우리는 율법신앙으로부터 시작을 해요.

교회에 가면 율법부터 배워요.

율법 아래서 신앙 생활하다가 어느 날 때가 되면 은혜로 옮겨 갑니다.

은혜 안으로 불러주세요.

율법 아래서 은혜에 나아가면 젖 뗀 자가 되는 거에요.

이해되시지요.



히브리서 6장을 볼 것 같으면,

어린아이는 젖을 먹고 장성한 자는 단단한 것을 먹는다고 하지요.

여기서 젖을 율법으로 보세요.

단단한 것은 은혜에요.



율법신앙은 쉬워요.

하지만 은혜는 어려워요.

율법 아래서는 열 개 중에 하나만 바치면 되었어요.

일주일 중에서 하루만 나오면 되었어요.

그런데 은혜 아래는 전부를 드려야 해요.

매일 나와야 해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신약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 때 매일 모이고 재산 전부를 바치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이건 율법 아래서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러니 율법은 젖이고 은혜는 단단한 음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율법으로 먹고 살았어요.

율법이라는 젖을 먹었는데,

하나님께서 때가되니까 율법의 젖을 떼고 단단한 식물인 하나님의 은혜를 준단 말이지요.



잘 보세요.

아브라함의 집안은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는 집안이에요.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았는데 먼저 종인 하갈이라는 애굽 여자로부터 자식을 낳았어요.

이 놈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을 육의 자식이에요.

혈과 육으로 낳은 자식이에요.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지요.

이건 율법 아래서 낳은 것과 같아요.

율법 아래서는 종이기 때문에 유업이 없어요.



그러나 이삭은 달라요.

이삭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은 자식이잖아요.

이삭이 어렸을 때 젖을 먹을 때에는 이스아멜과 함께 율법아래 있었던 것을 상징을 해요.

그런데 이삭이 때가 되어서 젖을 떼고 율법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자 율법 아래서 함께 살고 있던 이스마엘과는 졸지에 원수가 되어버린 겁니다.



지금 우리가 그래요.

우리 신앙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처음 와 가지고 어디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느냐?

율법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율법신앙생활을 하다가 그 율법으로부터 벗어났어요.

그러자 누구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되는가요.

이방인들로부터 공격을 당합니까?

아니지요.

율법아래 있는 자들로부터 공격을 당하잖아요.



신자를 공격하는 것은 이방인이 아니에요.

옛날에 한솥 밥을 먹던 형제에요.

형제라고 하는 자들이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면서 핍박을 하잖아요.



바울을 보세요.

사울(바울)이 바리새인으로 있으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을 때 같은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당했나요?

아니지요.

안 당했지요.

사이좋게 지냈어요.



그런데 그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바울이 되고 나니깐 누가 공격하기 시작합니까?

조금 전에 한 형제라고 하던 자들이 돌변해가지고 공격하잖아요.

이게 지금 이 시대에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이게 영적 비밀이에요.

여러분들이 복음 전하면 누가 핍박하던가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지요.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이 핍박을 하게 되어있단 말이지요.



복음을 알면 그때부터 율법 아래 있는 자와는 원수가 되어버립니다.

원수가 되면 같이 살 수가 없어요.

반드시 분리가 되는 거에요.



요셉도 보세요.

첩이 낳은 레아의 소생과 종들의 소생들이 정실부인인 라헬의 소생을 핍박하지요.

요셉이 어떻게 됩니까?

죽임당하잖아요.



짐승의 피를 묻혀서 구덩이에 빠지잖아요.

이건 죽임 당했다는 이야기에요.

그렇게 죽임 당했던 요셉이 복수를 어떻게 합니까?

다시 죽이는 식으로 복수를 합니까?

아니지요.



끌어안고 용서하는 식으로 용서를 하지요.

이게 법에 속한 사람과 은혜에 속한 사람의 차이에요.

그래서 제가 늘 여러분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들일 것 같으면 여러분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그들과 같이 공격하지 마시라고요.

그들이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 먹으세요.

은혜 신앙은 같이 맞부딪혀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은 사람일 것 같으면 저 쪽은 아직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이고,

우리는 은혜 입은 자이기 때문에 관용하고 용서가 나오고 긍휼이 나오게 되는 거에요.

이런 관용과 용서는 은혜를 받아 본 자는 다 가지고 있어요.



요셉이 형제들에게 어떻게 하던가요?

용서하잖아요.

요셉은 꿈을 받은 자에요.

꿈의 내용이 뭔가요?

형제들이 주가 되는 것이잖아요.



주란? 부모처럼 자식들을 위하여 희생하고 다스리는 자에요.

그러니까 요셉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기를 죽인 형제들을 용서 하는 겁니다.

이게 성도의 실력이에요.

신앙의 능력이구요.

성도들도 이렇게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용서하잖아요.

저들이 몰라서 그런다고 하면서 말이에요.

동족들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기가 지옥에 가겠다고 하잖아요.

이걸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유대인들과 형제처럼 지냈어요.

공생애를 시작하고 천국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일제히 공격을 하지요.

그때부터 예수님의 형제들의 적이 되어버렸어요,



지금도 이 구조가 그대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면 반드시 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그랬지요.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미워한다고,

세상에 속하였으면 미움 당하지 않을 터인데,

이것은 곧 예수님은 세상 권세를 잡은 자와는 적이란 말입니다.



세상 권세 잡은 놈이 누구입니까?

마귀에요.

사람들 뒤에서 마귀가 조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누가 예수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인지 대번에 알아보아요.

누가 천국 복음을 전하는지 알아요.

그래서 육에 속한 자들을 동원해서 핍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한다는 이야기를 그냥 형제끼리 미워한다,

넌 내 떡을 뺏어가는 자야,

아버지 유산을 뺏어가는 자야,

그런 개념으로 보지 마시고 영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언약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으로 일하시는데,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에는 두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이 있고, 새 언약이 있어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은 항상 부딪히게 되어있어요.



옛 언약은 법이고 새 언약은 은혜에요.

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이에요.

법은 까발리는 것이고 은혜는 덮어주는 것이에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성질이 전혀 다른 서로 상극으로서 부딪히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옛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하고 다르기 때문입니다.

법이 은혜하고 있으면 나쁜 놈이라는 게 드러나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우리와 다른 사고를 가지고서 다가올 때 기분이 좋나요?

아니지요.

싫지요?

상대하기 싫잖아요?

왜냐하면 대화가 안 되니까요.

대화가 안 되면 같이 있으면 불편해요.

꼭 사돈끼리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옛 언약 안에 있을 때에는 옛 언약 안에 있던 자들과 형제로 지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때가 차면 갈래 냅니다.

율법이라는 동네에서 은혜라는 동네로 빼내세요.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7=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때가 차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에서 속량하나요?

율법 아래에서 속량한다고 하시지요.

속량이란? 죄를 속해준다는 말도 되지만 율법에서 빼내 준다는 말도 되어요.

이렇게 되면 속량 당한 사람은 속량당하지 않은 사람에게 원수가 되어 버리는 거에요.



꼭 마치 정치판과 같아요.

새누리 당에 있다가 그 사람이 탈당해서 민주당에 간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요?

변절자니 철새니 하면서 원수로 대하잖아요.

이게 인간들 세는 세상의 모습이에요.

이 모습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녹아져 있어요.



교회 안에서도 같이 신앙생활 하다가 어떤 사람이 다른 교회로 가면 상종을 안하잖아요.

아브라함의 집안은 언약을 보여주는 집안입니다.

언약에는 두 언약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집안에 종의 자식과 하나님 약속으로 난 아들이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22절부터 봅시다.



갈 4:22-31=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자 보세요.

아브라함에게 두 아내가 있습니다.

애굽 여인 하갈과 사라입니다.

하갈과 사라를 뭐라고 하나요?

두 언약이라고 하지요.



하갈에서 낳은 것은 종이고, 사라에게서 낳은 것은 아들이에요.

하갈은 율법을 상징하고 사라는 은혜를 상징해요.

그런데 유업은 누가 얻는다고 합니까?

아들이 얻는다 하지요.

종은 쫓아내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 둘은 잠시 동안에는 같은 집에 살고 있어요.

이삭이 젖을 뗄 때까지는 함께 살았어요.

아들이 장성하게 되어서 이제부터 아버지 집을 이어갈 유업을 얻게 될 때가 되면 종은 내어 쫓아야 하는 겁니다.



둘이 함께 두면 집안이 전쟁이 끊이지 않아요.

아들은 은혜로 집안을 다스려 가는데 종은 법으로 다스려 가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싸우게 되어요.



이삭이 젖을 뗐다는 이야기는 언약적으로 율법 신앙에서 은혜 신앙으로 넘어왔다는 말입니다.

법으로 살던 사람이 은혜로 사는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법에 속한 사람이 은혜로 넘어간 사람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하느냐?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내어쫓아내고서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이게 참 재미가 있는데,,,

이스마엘을 통해서 열두 방백을 주시지요.

이삭에게도 열두 방백을 주고 이스마엘에게도 열두 방백을 주십니다.

하나는 없애는 것이 아니고 다른 동네에서 같이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이스마엘과 이삭을 통해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들이 전투를 할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에 속한 자들도 승승장구하게 만들어요.

그들을 키운다니까요.



왜 키우느냐?

영에 속한 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스파링 파트너로 사용하고자 하심입니다.

강한 놈으로 키워서 영에 속한 사람을 대적하고 핍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만개가 되어서 나타난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면 영접 할 줄 았았는데,,

그게 아닌 겁니다.

도리어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러면 이 세상은 하나님과 원수임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권세 잡은 놈이 사람들 숲에서 가만히 숨어 있다가 하나님의 아들이 오니까 자기 정체를 밝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중에 하나님의 아들들을 죽인 이 세상을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언약이 없는 자식들 같으면 쓸어버렸으면 좋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고 하갈의 소생일지라도 키우는 것입니다.



본문을 잘 보시면 하갈이 쫓겨나서 바란 광야에서 물이 없어 가지고 기갈당하고 있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나타나서 옆에 있는 샘물을 알려주십니다.

그때 나타난 하나님이 누구이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고 엘로힘의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속하는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로지 자기백성에만 다스려요.



집에서 쫓김 당하여 들에서 방황하는 이스마엘에게 엘로힘 하나님으로 나타났다는 이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에게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일반 은총으로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집인 천국에 유업만 없을 뿐 이 세상의 유업은 주어요.



이스마엘은 이 세상에서 주류로 살아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하면서 이 땅을 유업으로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뱀은 이 세상을 주인이 되어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뱀이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표를 주어서 잘 살게 하지만 짐승 표를 받지 않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 된 자들은 다 죽이는 것입니다.



이삭은 여호와 하나님의 간섭을 받고,

이스마엘은 엘로힘 하나님이 간섭하는 거에요,

엘로힘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간섭하세요.

악인이나 선인이나 가리지 않고 햇삧도 주시고 비도 주세요.

저 절간의 중들도 엘로힘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어요.



신자는 두 가지 은혜를 입고 있는 거에요.

일반 은총도 있고 특별 은총도 있는 거에요.

일반 은총은 세상 사람들도 입는 모든 은총으로 창조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다스리심 속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던 자들 속에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서 특별 은총을 주세요.

그 아들이 누구냐 구약에는 여호와 또는 여호와 천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여호와는 신약의 예수로 보면 틀림이 없어요.

여호와가 예수에요.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를 보낸 것은 자기백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누구를 지키느냐 자기백성을 지키는 거에요.

암탉이 새끼를 품듯이 자기백성을 지키세요.



우리는 엘로힘 하나님으로서 일반 은총을 다 입고 있으면서 특별 은총을 입고 있어요.

여호와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입고 있어요.

그러니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징징거리면 안 되어요.

특별 대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이스마엘과 이삭의 싸움 속에서 비록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유약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어린아이가 아니고 이 어린아이 같은 자가 장성한 자를 이기는 어린아이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어린아이를 통하여 싸움을 하시는데 곧 세상의 권세를 깨뜨리기를 원하신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받은 자들은 이 땅에 연약한 모습으로 유약한 모습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두신 것입니다.

힘의 논리로 살아가는 이 세상의 법칙에 따라서는 유약한 어린아이와 같이 있는 자들은 핍박의 대상이 되지요.

조롱의 대상이 되어요.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의 새 언약에 속한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가지고 옛 언약에 속한 성도들을 집어삼키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일을 하지 않아요.

역설적으로 일하세요.



세상의 힘을 주는게 아니라 힘을 빼앗아가요.

이는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고 항상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들을 그루터기 같이 남겨두세요.

미미한 모습으론 남겨두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 아래 있는 자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두신 것입니다.

나그네와 행인은 여호와를 힘으로 삼고 살아요.

이게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올 때 무기 들고 나오지 않고 여호와 이름 들고 나왔어요.

골리앗은 무기 들고 나왔지만,,,

골리앗이 다윗이 물맷돌을 들고 나오니까 비웃지요.

야 이 놈아 내가 개냐? 물맷돌 들고 나오게,

맞아요.



다윗의 눈에는 골리앗이 장수로 보이는게 아니고 개로 보이는 거예요.

사람을 잡으러 가려면 총칼이 있어야 하는데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은 개이므로 물맷돌을 가지고 가면 되어요.

우리도 다윗과 같은 무기로 나가야 해요.

여호와 이름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나가야 하는 겁니다.

칼과 창은 세상의 힘이지만 여호와의 이름은 하늘의 힘이에요.



언약적으로 보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인간의 의를 힘을 삼지만, 은혜 아래 있는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를 힘으로 삼아야 해요.

성도의 무기는 “십자가의 도” 예요.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예수님이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음으로 나아가야해요.

비록 내 꼬라지가 형편없지만 이러한 나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내 죄를 속량해 주셨다는 그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단 말입니다.



세상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에요.

세상 사람들이 재물이라는 힘을 가지고 나오지만 우리는 창세전 언약인 천국에 소망을 들고 나가야하는 것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이 전부이지만 우리는 천국이 약속되어 있어요.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돈 들고 나오면 우리는 천국 들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돈을 들고 나오는데 우리가 돈을 가지고 나간다면 우리가 못 이겨요.

돈을 가지고 나오는 자들에게 우리는 말씀을 들고나가는 거예요.

그들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말이에요.

맞아요.

세상 사람들 눈에는 예수 믿는 것이 어리석게 보여요.



복음이 어린아이 같이 유약한 모습일지라도 이 복음이 세상을 이기게 되어요.

예수님이 천국비유를 하실 때 천국은 마치 가루 서말 속에 있는 누룩과 같다고 했지요.

그리고 겨자씨 같다고 하셨지요.



그 작은 씨가 큰 나무를 이루듯이 하나님께서 일하심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겨자씨가 큰 나무를 이루듯이 복음전하면 교회 부흥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겨자씨가 튼 나무가 된다는 것은 복음이 이 세상을 이기더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이스마엘과 이삭을 통하여 지금 신약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여주고 있어요.

아브라함의 집안 속에 이스마엘이 있고 이삭이 있어요.

하나는 육으로 났고 하나는 약속으로 낳았어요.



이걸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봅시다.

우리에게도 이스마엘이 있고 이삭이 있어요.

우리에게도 육으로 난 자가 있고, 약속으로 난 자가 있어요.

이스마엘은 아담 안에서 난 옛 사람이고, 이삭은 예수 안에서 난 새 사람이에요.



이 둘이 싸워요.

우리 몸을 차지하기 위하여 싸웁니다.

이를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계속 싸워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새 사람과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옛 사람이 싸웁니다.

이 싸움에서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옛 사람이 이겨요.

옛 사람이 힘이 더 강해요.

육신의 소욕이 힘이 더 강해요.



그때에 우리는 속사람을 탄식이 일어나요.

이게 로마서 7장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이 싸움에서 늘 새 사람이 진다는 것을 알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을 합니다.



그 탄식이 일어나도 우리는 계속 질수 밖에 없어요.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진 자로서는 육신의 소욕을 이겨내기 못해요.

그래서 우리의 속 사람을 계속 탄식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돼요.

긍휼과 은혜를 구하게 돼요.



그렇게 긍휼과 은혜를 구할 때에는 내가 약한 자의 모습일 때에 가능하지요.

우리가 율법 아래 살고 있을 때에는 내가 율법을 지키며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서 말씀 앞에 서보니까 우리 실존을 알게 된 겁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상한 심령이 되고 통회하는 심령이 되는 겁니다.



왜 안 되지, 라고 생각할 때 마다 성령께서 말씀하세요.

우리 몸이 죄 아래서 태어났기에 안 되는 거라고 하세요.

하나님 안에서 속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복하게 되어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어 있어요.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게 되어 있어요.

내 힘으로 독자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죽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아가게 되어요.

이게 신자에요.



성도의 운명을 요셉의 출생 이야기로 살펴봅시다.

야곱에게 12아들이 있습니다.

요셉은 12명의 아들들 중에서 합환채를 먹고 태어난 아들입니다.

라헬이 수없이 야굽하고 잠을 잤지만 아들을 낳지 못합니다.



그럴 때 레아의 소생인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뜯어서 오는 겁니다.

이 때 라헬이 언니 레아에게 오늘 밤은 자기가 야곱하고 잘 차례인데 나에게 합환채를 주면 잠자리를 언니에게 양보하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레아가 그러자고 하고 합환채를 라헬에게 줍니다.



라헬은 합환채를 먹고 요셉을 낳게 됩니다.

라헬은 그동안 야곱과 수많은 잠자리를 했지만 아들을 낳지 못했어요.

언니하고 다른 몸종들은 하룻밤만 자면 아들을 순풍순풍 낫는데 말이죠.

그러다가 합환채를 먹고 요셉을 낳은 것입니다.

이러면 요셉은 야곱이 낳은 자식이 아니고 합환채가 낳은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합환채는 임신촉진제에요.

이것은 생명을 낳게 해 주는 풀인 거에요.

이게 신약적인 의미로는 성령을 상징해요.



르우벤이 합환채를 뜯어 올 때는 맥추절 때에요.

그 때를 신약으로 말한다면 오순절이에요.

오순절에 이르매 하나님의 성령이 자기백성들에게 임합니다.



그러자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이 은혜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옛 언약에 있던 자들이 새 언약으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맥추 때에 합환채를 먹고 난 요셉은 바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요셉처럼 꿈을 받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를 자들이에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고 은혜로 갚아요.

비록 율법아래 있는 자들이 우리를 공격해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향하여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오히려 긍휼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육으로 난 자는 핍박을 하지만 성령으로 난 자는 요셉과 같이 용서를 하게 돼요.

우리는 이 땅에서 자기가 부인되고 버려지는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이걸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어서 말씀하셨어요.

네가 젊어서는 네 맘대로 다녔는데 네가 늙어서는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띠를 띠고 가게 될 것이라고 했어요.



베드로가 젊다고 혹은 늙었다고 하는 것은 성령을 받기 전과 후를 말해요.

성령 받기 전에는 베드로 마음대로 다녔어요.

이걸 젊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고 난 후에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가 아니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살아갈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삶은 결국 자기가 부인되고,

자기가 버려지고,

싸움을 해도 지는 싸움을 하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성령 받기 전에는 말고의 귀를 잘라내는 일을 했어요.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 은혜를 받고 보니 은혜 안에 있는 자로 은혜로 그들을 감싸 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곧 십자가의 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기백성을 살리기 위함이잖아요.

자기백성들은 일차적으로 구약의 백성들이에요.

예수님이 죽으시고 나서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한 후에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에 누구에게 했습니까요?

유대인들이었어요.



그러자 어찌 할꼬 하는 통회자복이 일어났습니다.

구원받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인 자들에게 죽음으로 되갚아주는 식으로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그 원수들을 살려내는 식으로 원수를 갚아버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에요.



우리 안에는 이삭도 있고 이스마엘도 있어요.

늘 속에서 싸워요.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이스마엘을 좆아내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잘 안 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이스마엘과 같은 사고를 계속 쫓아내야만 해요.



그런데 그때마다 유익을 얻는게 아니라 손해를 얻어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스마엘처럼 힘으로 살고 싶어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라고 하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상대가 너를 힘으로 공격하거들랑 너는 맞 받아 치지 말고 오히려 이해하고 용서하고 그들을 끌어안는 식으로 살라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항상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이기게 하는 여호와의 싸움법인 것입니다.



이것이 어렵지요.

부부간에 살면서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는 것은 순교에요.

부부간에 살아도 안 질려고 하잖아요.

누가 지느냐?

은혜 받은 자가 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 집에서 부부가 싸우면 내가 항상 져요.

내가 이겨봐야 내 마음이 곤고해요.

마음이 불편하면 영감이 사라져요.

목사에게 있어 최고의 아픔은 영감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건 지옥이에요.



그래서 가능하면 져 주는 것입니다.

이겨서 무엇하겠느냐 하고 말이에요.

목사라는 이유로,,,,



저는 늘 마음으로 이스마엘은 죽여야지 이삭으로 살아야지 라고 다짐을 해요.

이 싸움을 통해서 우리의 겉 사람은 점점 더 후패해져가고 속사람은 날마다 강건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나를 깨트리는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이 땅에 유업을 얻을 자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유업을 얻을 자가 아니냐!

그러니 져 주어라!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뜻대로 살아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간섭해가고 계시구나 생각하며 위로받고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하나님 감사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넘쳐서 우리가 진실로 이삭으로 살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뜻은 이삭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 만은 실상에서는 우리가 이스마엘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이스마엘을 내어쫒는 그 싸움을 게을리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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