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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46강. 대 제사장의 간구하심 (히 7:18-28)

by coroa 2021. 4. 21.

 

 -.46강. 대 제사장의 간구하심 (히 7:18-28).-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몇 가지 대조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전엣 계명”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전(前)”이라는 말은 지나갔다는 말로서 “이제” 라는 말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이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전엣 것이 연약하여 무익하므로 폐하였다고 합니다.

연약하다는 것은 완전치 못하다는 말입니다.

전엣 계명이란? 무엇인가요.

율법입니다.

 

그래요.

율법은 전엣 것입니다.

지나간 계명입니다.

무엇과 비교해서 지나갔나요.

새 계명 즉 새 언약과 비교해서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율법은 연약하고 무익한 것입니다.

연약하고 무익한 것을 붙잡고 있으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율법으로는 아무 것도 온전하게 할 수 없어서 폐하였다고 합니다.

 

폐하였다는 말은 율법적 방식으로는 구원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젠 다른 방법으로 하겠다는 겁니다.

구원의 방법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고 합니다.

이에 더 좋은 소망이 뭔가 하니 율법의 계통이 아닌 은혜라는 계통에서 온 예수라는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라는 제사장은 새로운 제사장이란 말입니다.

이제부턴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만 받으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하늘에 생명의 법인 영맥과, 땅에 죽음에 법인 육맥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걸 아론의 반차와 멜기세덱의 반차로 살펴보았습니다.

아론의 반차는 율법이고, 멜기세덱의 반차는 은혜입니다.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인간 제사장이 드렸습니다.

아론의 반차를 쫓아서 드리는 제사는 레위지파 사람들이 제사장 노릇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약점을 가진 제사장이에요.

약점을 가진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로서는 온전케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이제 인간 제사장이 아닌 죄가 없는 하늘에서 의로운 제사장이 왔습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있는 제사장입니다.

그 분이 누군가 했더니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온전하고 거룩하고 흠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영원(永遠)하다는 것은 이젠 폐하여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완전(完全)하다는 뜻입니다.

이제부터 제사장 직분이 갈리지 않고 영원합니다.

예수님이 드리는 제사는 온전히 구원케 하는 능력이 되므로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더 좋은 “언약의 보증” 이라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이 되셔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오늘 본문을 아주 짧게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한마디로 말하면 진짜가 왔으니 가짜는 비키라는 겁니다.

 

실체가 오기 전에는 모형이 필요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진짜 제사장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형을 가지고 알려 준 겁니다.

진짜를 보내 줄 테니 사진을 보고 잘 기억해 놓으라고 합니다.

경상도 말로 단디(잘) 보고 영접하라는 말입니다.

 

구약은 한마디로 아들이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오시리라! 오시리라!” 입니다.

모형을 가지고 오시는 실체를 맞이하라는 겁니다.

 

신약은 “오셨다! 오셨다!” 입니다.

약속한 그 분이 왔다는 겁니다.

이제 그림자는 버리고 실상을 만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왜! 먼저 가짜를 주셨을까요?

처음부터 온전한 제사장을 주셨으면 좋잖아요.

그럼에도 왜 온전치 못한 것을 주셨나요?

그것은 은혜를 남기기 위함입니다.

온전한 것은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아까 그랬지요.

율법은 무익한 것이고,

온전치 못한 것이고,

폐하여 질 것이라고 했지요.

 

이건 마치 은혜를 드러내려고 법을 준 것과 같아요.

이를 “상대적 차별성”이라고 합니다.

천국을 보여주려면 지옥이 꼭 필요합니다.

 

참 제사장을 보여주기 위해서 거짓 제사장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율법에 속한 가짜 제사장이 진짜가 오시니까 폐하여진 것입니다.

땅에 속한 제사장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은 이 땅에 있는 것은 다 부정하다는 뜻입니다.

 

땅은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께 저주 받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나는 것은 다 부정해요.

땅의 노선은 다 죽어요.

 

하늘의 것만 영원해요.

하늘에 영원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불타버릴 땅이 필요한 겁니다.

온전한 것은 오직 하늘로서 주어지는 것이란 것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하늘에만 온전한 것이 있어요.

하늘로부터 온 것만이 온전해요.

이는 다른 말로 하나님은 인간의 손에서 나오는 것은 받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만 받으세요.

이를 여호와 이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 것은 안 받으세요.

왜냐하면! 은혜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엔 아론에 반차를 쫓은 땅에 제사장들이 있었어요.

땅에 제사장들은 율법에 속하였어요.

율법에 속한 제사장들은 세습(世襲)이 되었어요.

 

아버지가 제사장이면 아들도 제사장이 되어요.

여기엔 선택 사상이 없어요.

정해진 법대로 제사장을 물려받으면 되어요.

세습으로 주어지는 것에는 은혜가 없어요.

 

하지만 멜기세덱의 반차는 정해진 법이 없어요.

세습을 허용하지 않아요.

은혜로 된다는 말입니다.

 

세습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늘로서 난다는 겁니다.

거저 주어지는 것이니 은혜이지요.

 

이걸 오늘 본문에선 하나님의 맹세로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맹세로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뜻입니다.

맹세란? 다른 말로 약속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이므로 변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거저 주는 방법으로 하신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맹세로 오신 제사장은 은혜의 제사장인 겁니다.

이 은혜의 제사장을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영원에 속한 은혜의 제사장은 인간의 공로가 전혀 없는 하나님의 은혜만 담겨 있는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본문을 한번 봅시다.

 

히 7:26-28절.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보세요.

예수님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가 없으신 분이라고 하지요.

죄인에게 떠나 있다는 것은 땅에 속한 분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분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담의 혈통에서 난 분이 아니고 하나님께로 난 분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맹세로 그 아들을 온전한 대 제사장으로 세우셨다고 합니다.

온전한 대제사장은 자기 피로 제사를 드려요.

죄 없는 온전한 분이기 때문에 온전한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아들이 드리는 제사만 받아요.

아들의 제사를 받고, 아들의 기도를 받으세요.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근거로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간구하세요.

간구는 다른 말로 기도에요.

이는 예수님만이 기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는 제사이든 기도이든 예수님의 것만 받으세요.

 

온전한 제사나 온전한 기도는 오로지 예수님만 할 수가 있어요.

결국 우리더러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는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함입니다.

그분이 누군가 하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셨던 겁니다.

 

요 14:13-14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예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의, 공로)을 앞세우고 기도하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약속이 뭡니까?

자기 피로 죄사함을 주는 새 언약이잖아요.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자기 피를 앞세우고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간구하듯이 성도 또한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나아가야 합니다.

야곱처럼 에서의 옷을 입고 당당하게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 로소이다 라고 나아가야 해요.

이걸 믿음으로 나아간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의 옷에 향취를 보고 축복을 하세요.

목소리는 야곱이지만 맏아들 옷을 걸치고 왔으니 복을 준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야곱을 축복한 것이 아니라 맏아들을 축복한 겁니다.

야곱은 맏아들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받은 복이 맏아들이신 예수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겁니다.

이걸 예수 안에서 받은 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기백성들에게 자기 옷을 입혀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알려주세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어 봅시다.

 

사 53:12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범죄자 중 하나로 취급당하고 죽었어요.

범죄자란 자기 백성입니다.

자기 백성 대신 범죄자가 된 것은 범죄자를 위해서 기도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우린 모두가 범죄자에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시는 기도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백성의 죄사함을 위해서 자기 피를 앞세우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가만히 있는데 예수님 혼자서 다 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은 손 떼라는 것입니다.

손 떼라는 말은 인간은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속된 말로 그저 굿이나 보고 주는 떡이나 먹으랍니다.

 

믿음이 뭐냐?

굿이나 보고 주는 떡을 먹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는 일을 보고 아들이 주는 살과 피를 마시는 겁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살과 피를 먹는게 아니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내 공로를 쌓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공로를 받아 챙기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넙죽 넙죽 받아 먹는게 신앙생활입니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려주는 만나를 넙죽 넙죽 받아먹고 살았듯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받아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믿음을 안 받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어요.

 

사람이 제일 어려운 게 뭔 줄 아세요.

공짜로 주는 것을 먹고 사는 겁니다.

이건 자존심을 가진 인간에겐 불가능해요.

 

자존심이 있으면 공짜로 받아먹어도 감사가 안 나와요.

얻어먹으면서도 떳떳하고자 하는게 인간이에요.

인간은 자존심 하나로 살아요.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자존심 건드려 보세요.

발끈합니다.

비록 얻어먹지만 자존심만은 지키고자 하는게 인간입니다.

 

폼생폼사 라는 말도 있잖아요.

폼으로 살고 폼으로 죽는다!

한마디로 자존심으로 살고 자존심으로 죽는다는 말입니다.

 

왜 사람이 공짜로 주는 것을 얻어먹고 살지 못하는 줄 아세요.

자아(自我) 때문이에요.

자아가 뭐냐 하면 자기 고집이에요.

자기 생각이에요.

 

자기 생각이 있기 때문에 얻어먹으면서도 짜네! 다네! 싱겁네! 타박을 해요.

얻어먹는 주제에 할 말을 다 해요.

이건 얻어먹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에요.

 

진짜로 얻어먹는 것은 주면 주는 대로 감사히 먹겠습니다! 하고 먹는 거예요.

짜네 싱겁네 하면 안 되어요.

짜면 짠 대로 먹고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먹어야 해요.

음식에 토를 달면 안 되어요.

 

그런데 이게 얻어먹는 거지라도 안 되어요.

얻어먹으면서도 자기 할 말은 다 해요.

어떤 트집이라도 잡아야 자존심을 챙기게 되어요.

 

얻어먹고 살려면 자아(自我)가 죽어야 해요.

그래 난 죽었어!

죽은 놈이 무슨 할 말이 있겠어!

그래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디 자아가 죽나요.

이 놈은 육신이 무덤 속에 들어가야 없어져요.

그러니 몸뚱이가 살아 있는 한 공짜로 얻어먹는 것은 불가능한 겁니다.

 

제가 지금 밥 빌어먹으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홀로 다 하셨으니 내가 뭘 하려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구원 받으려고 뭘 보태지 말란 말입니다.

보태고 뺄 것이 없어요.

천국 가려고 애쓰지 말란 말입니다.

죄사함 받고 거룩해지려고 노력하지 말란 말이에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누구든지 이 예언의 말씀을 더하든지 빼면 구원에서 제한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들이 더하고 빼는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놈들이 있다는 뜻이에요.

 

다른 말로 예수님의 공로에다 인간들이 뭘 섞는단 말입니다.

왜 섞겠어요.

구원 속에 자기 지분을 넣고 천국에 가서 상급으로 챙기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난 이만큼 성화 했다!

난 이토록 말씀대로 살았다!

그러니 날 알아주세요!

그런데 이런 놈들을 전부 지옥으로 보내겠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공로에 인간의 것이 섞이지 않는 싸움을 하는 겁니다.

신앙의 싸움은 예수님의 주신 것에 다른 것이 섞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는 다른 것은 전하지 않기로 작정을 했다고 했어요.

다른 것이 자랑되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교회마다 섞지 못해서 안달이에요.

목사들이 충성과 열심과 정성을 섞으라고 야단입니다.

안 섞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전하면 이단으로 정죄당하는 시대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구원은 우리가 이룰 일들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홀로 다 하세요.

예수님이 홀로 다 하시고 선물 보따리 풀어 놓듯이 “자! 여기 있다” 하고 던져 준단 말입니다.

이게 믿어져야 성도에요.

구원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믿어져요.

믿어지기 때문에 염치없이 공짜로 얻어먹는 것입니다.

 

이게 믿어지는 성도라면 두 손을 들고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라고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홀로 다 이루셨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날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신 거야!

따져 보세요.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들고 나아가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애(仁愛)하심을 들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예수님이 피 흘리셨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어떻게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는지 살펴봅시다.

성도의 구원은 성도가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이 이루어 가세요.

이걸 지난 시간에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반차란? 쉽게 말해서 족보입니다.

족보는 그 집안 식구들의 내력입니다.

족보는 잘난 놈 못난 놈 구분하지 않고 핏줄로 올립니다.

핏줄이 같으면 조건 따지지 않고 족보에 올라가요.

 

가문(家門)의 족보에 올라가는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어요.

제가 연일 정(鄭)씨입니다.

제가 정씨가 된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되었어요.

내가 정씨 족보에 올려 진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나게 하신 부모(父母)님의 뜻에 의하여 된 것입니다.

 

나고 보니 내가 정씨인 겁니다.

부모가 정씨라서 정씨가 되었어요.

내가 정씨가 되는 일엔 내가 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어요.

부모님이 나와 의논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셨어요.

 

부모님의 일방적인 사랑의 결과물로 내가 있는 겁니다.

난 내 것이 아니고 부모님 것이에요.

부모님 것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이걸 성경적으로 말해봅시다.

 

만물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우린 원래 없었던 자에요.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도 없는 겁니다.

우린 예수님 때문에 존재하고 있어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약속을 했어요.

아버지가 아들을 만물의 주가 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골 1:16-17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 속에는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어요.

마귀도 있고 천사도 있어요.

저주 받은 자도 있고 구원 받은 자도 있어요.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보면 지옥에 간 부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합니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불렀어요.

에서도 이삭을 아버지라 불렀어요.

 

지옥에 간 사람도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고,

천국에 간 사람도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만유의 주기 되는 겁니다.

이것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약속을 한 겁니다.

 

엡 1:3-6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보세요.

창세전에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어요.

우리란 구원 얻은 성도를 말해요.

우리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이미 예수 안에서 약속이 된 거에요.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간에 창세전에 하신 약속 때문에 생겨난 겁니다.

우린 창세전에 하신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 진 자들이에요.

그러니 나를 위한 내가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나인 겁니다.

 

성도를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 안” 에서 구원하였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 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예수가 없으면 우리도 없어요.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예수님 것이에요.

우린 예수님 것으로 살고 있어요.

그럼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겁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이 그래요.

세상 사람들이야 죄로 인하여 이걸 모른다고 하지만 성도라고 한다면 바로 알아야 하잖아요.

하지만 우린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아요.

 

우린 도적놈처럼 내 것인 냥 살고 있어요.

한마디로 악당입니다.

이걸 성경에선 죄라고 합니다.

 

죄는 항상 나를 앞세우고 발현(發現)해요.

죄가 뭐냐!

나에요.

 

나 때문에 우상도 있는 겁니다.

내가 없으면 우상도 없어요.

그러니 내가 있는 자리엔 항상 죄가 꿈틀 거리는 겁니다.

예수 안에 있어야 할 놈이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겁니다.

 

반차(班次)를 족보라고 했지요.

“아론의 반차”와 “멜기세덱의 반차”가 있다고 했지요.

이렇게 되면 두 족보(族譜)가 있는 것입니다.

아론의 족보와 멜기세덱의 족보가 있는 것입니다.

 

아론은 땅에 족보이고, 멜기세덱은 하늘에 족보에요.

땅은 사망(死亡)의 영역이고,

하늘은 영생(永生)의 영역입니다.

 

아론의 족보는 “죽음의 족보”이고,

멜기세덱의 족보는 “영생의 족보”인 겁니다.

어떤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하늘로 나서 하늘로 가게 되어 있어요.

이걸 세상 말로 팔자라고 합니다.

 

누군 아론의 족보에 올리고 싶어서 올려진 것도 아니고,

누군 멜기세덱의 족보에 올려지고 싶어서 올려진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누군 아론의 반차로 나게 하시고 누군 멜기세덱의 반차로 나게 하신 것 뿐이에요.

 

만약에 인간들에게 선택하라고 하면 다 천국에 가고자 하지 지옥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 멜기세덱의 반차로 나고 싶지 아론의 반차로 나고 싶어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어요.

 

우리 구원이 그러합니다.

우린 우리가 예수 믿고 싶어서 믿은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서 믿는 것뿐입니다.

 

반대로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믿기 싫어서 안 믿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시지 않아서 못 믿는 것입니다.

우린 우리 마음도 우리가 주장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하늘을 펴시고 땅에 터를 세우시고 사람의 속에 심령을 지으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마음도 움직이시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우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인 겁니다.

 

기적(奇蹟) 중에 최고의 기적이 뭔가 하면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복(福) 중에 최고의 복이 예수가 믿어지는 복이에요.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가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하는 겁니다.

예수 믿게 한 것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족보에 날 올려놓았어요.

예수 믿는 것이 자기 실력인냥 잘난 척하면 안 되어요.

 

신앙생활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하는 겁니다.

누가 예수 인 믿는다고 우습게 여기면 안 되어요.

긍휼히 여겨야 해요.

 

그럼 여기서 중요한 원리 하나가 도출이 됩니다.

뭔가 하면 구원이든 저주이든 우리 쪽에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쪽에서 구원 받을 길도 없지만,

아울러서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도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건 구원 받은 성도 입장에서는 엄청난 은혜이고 축복이에요.

하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횡포로 보여요.

왜 인간 쪽에서 결정 할 권리를 박탈하느냐! 라고 따지게 만들어요.

죄가 하나님의 결정에 반발을 하게 해요.

죄가 “나 있음” 을 들고 반발을 하게 하는 겁니다.

 

물론 죄인들에겐 구원 얻을 길을 알려주어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죄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구원 얻을 길을 알려 주어도 반대로 가요.

그렇지만 인간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요.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평상시엔 호형호제하다가도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면 반발을 해요.

구원이야기를 하지 않고 세상 이야기를 하면 친구인데 구원이야기를 하면 원수가 되어요.

믿음이니, 은혜이니, 예정이라는 말을 하면 동의되지 않고 갈려요.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셨다!

우리가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이미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 되었다! 라고 하면 그럼 인간은 뭐냐! 라고 반발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면 이상하리만치 화를 내요.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인간의 행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반드시 반발하는 사람이 있어요.

왜 인간의 행함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무시하느냐!

목사들이 인간의 행함을 무시하면 누가 봉사하고 충성하겠느냐! 라고 따져요.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은 일이 아니고 감사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이므로 일이 아니고 감사인 것입니다.

진짜 은혜로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은 누가 안 알아주어도 하게 되어 있어요.

 

누가 알아주어야 하는 것은 감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잘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는 이 정도면 괜찮은 인간이지요! 라고 꼴값 떠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의 행함을 무시하면 누가 봉사하고 충성하겠느냐! 라고 따지는 사람은 믿음을 받지 않은 사람이에요.

 

자신이 만약에 아버지께 용서 받고 사는 탕자(蕩子)라는 것을 안다면 아버지가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충성하게 되어 있어요.

아버지가 안 알아준다고 기분 나쁘다고 안하겠다고 한다면 그 놈은 아버지의 용서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놈이에요.

 

진짜 자신이 탕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집에서 한 일에 의미를 두지 않아요.

아버지께 받은 용서가 있기 때문에 마음에서 우러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인지라 뿔뚝하는 성질머리가 있어서 물론 늘 그런 정신머리로 살진 않겠지요.

하지만 자기 행위를 가지고 아버지와 거래하려고 하진 않아요.

집안 일 했다고 잘난 척하지도 않거니와 설사 집안 일 안했다고 해서 집에서 쫓겨날까봐 전전긍긍하지도 않는단 말입니다.

 

우린 탕자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용서 해 주셨어요.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우리 잘남이 아니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이에요.

용서하심 속에는 예수님의 피가 들어가 있어요.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용서해 주셨어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고 대신 용서 해 주셨다구요.

 

우리를 예수님의 족보에 올려놓으신 하나님이 취소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우리를 예수님 족보에서 빼낼 수가 없어요.

탕자를 용서하신 하나님이 집안 일 안했다고 내어 쫓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식언(食言)치 않는 분이에요.

식언치 않는다는 것은 하신 언약은 반드시 지키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널 복 줄게’ 그랬으면 반드시 복을 주고야 말아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모르고도 잘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 왔어요.

찾아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널 복 준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복 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복을 주겠다고 하셨어요.

아브라함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복의 조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란? 천국 가는 복입니다.

 

이 복이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졌어요.

우린 아브라함처럼 반드시 천국에 가고야 말아요.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반드시 가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국에 가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족보에 올려놓았기 때문이에요.

 

그럴 리야 없지만 실수로 설령 지옥에 가 있어도 생명책을 들고 와서 찾아내세요.

너 왜 거기 가 있어!

이리와!

그런단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아브라함의 행위로 인하여 취소되지 않아요.

아브라함이 싫다고 해도 유지되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가 한 말을 취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예수 믿는 것도 성도의 행함과 상관없이 취소되지 않아요.

애초부터 아버지와 아들 간에 약속이 예수님의 피를 보고 구원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하실 때 분명히 예수님 피를 보고 구원한다고 했어요.

이걸 잊지 마세요.

 

내 공로가 아니고 예수님 공로에요.

마치 출애굽시 장자가 죽는 재앙 때처럼 집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만 발라져 있으면 그 집안에 강도가 있든지 살인자가 있든지 상관치 않고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요.

 

죽음을 집행하는 천사는 집 안에 있는 사람을 보지 않고 외부에 발려진 피가 있느냐! 없느냐! 로 판단을 해요.

중요한 건 피가 발려져 있느냐! 없느냐! 이지,

내가 얼마나 잘났느냐! 못났느냐! 는 의미가 없어요.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자기 꼬라지를 살필 것이 아니고 피가 있나! 없나! 를 살피겠지요.

나를 살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피만 자랑하겠지요.

이처럼 어린 양의 피를 의지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성도의 구원에는 성도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예수님 혼자서 다 하세요.

시작부터 끝까지 예수님 홀로 다 하세요.

그래서 예수님 닉네임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는 겁니다.

한국말로 ‘처음과 나중’ 또는 ‘시작과 끝’이라고 해요.

 

예수님이 잃은 양을 찾듯이 찾아주셨어요.

그리고 의(義)에 옷을 입혀주셨어요.

마치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옷을 입혀주듯이 입혀 주셨어요.

어린아이는 자기가 옷을 골라 입을 주권이 없어요.

그냥 엄마가 입혀주는 옷을 입어야 해요.

 

우리는 우리가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을 열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해서 천사들을 분주하게 사용하고 있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고 있다고 하지요.

우린 쿨쿨 잠자고 있는데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세요.

예수님이 왜 간구하나요?

그건 예수님이 우릴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간구란 말이 의미심장해요.

물론 한자적인 의미지만 말이에요.

간구(干求)란? “방패” 간(干) 자에, “구할” 구(求)를 써요.

마귀가 참소하는 것을 방패처럼 막아서 변호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간구라는 말을 직역하면 적군이 쏘는 화살을 예수님이 막아서 구해 준다는 말인 겁니다.

적군이 쏘는 화살이란? 마귀의 참소에요.

마귀가 율법을 가지고 성도를 쉬지 않고 참소해요.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여야 하기 때문에 성도를 재판정에 세웁니다.

 

마귀가 하나님 저기 정낙원이라는 놈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아요.

저 놈은 아주 더럽고 나쁜 놈입니다.

온갖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위선자에요.

그러니 저 놈을 법대로 지옥으로 보내야 합니다! 라고 참소해요.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두 팔을 벌리고 떡하니 방패처럼 막아서서 변호한단 말입니다.

아버지! 내가 저 놈의 저런 죄 때문에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여기 손에 못 자국을 보시고 옆구리에 창자국을 보세요.

저 놈이 뒤집어쓰고 있는 피가 내 피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저 놈을 위해서 대신 죽었다고 변호를 하십니다.

 

마치 못난 애비가 술 처먹고 들어와서 아이들을 두들겨 패려고 하면 어미가 자식을 자기 품에 안고 이 눔아! 아이들을 패려면 차라리 날 죽여라! 라고 하는 것과 같단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러고 계세요.

우리가 범죄하면 예수님이 자기 피를 앞세우고 우리를 변호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엄마처럼 자기 품에 감싸고 보호한단 말입니다.

 

우린 예수라는 제사장을 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원한 제사장으로 보내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도록 하셨어요.

우린 잠자고 있어도 예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간구하시고 계세요.

 

왜 예수님이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가요?

이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린 가만히 있었는데 예수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셔서 우릴 구원하시고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기 위해서 졸지도 못하시고 주무시지도 못하시고 기도하고 계신 겁니다.

 

이런 황감할 때가 어디 있나요.

우리가 무엇이관데!

쥐뿔도 아닌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간구하고 계세요.

 

이 사실이 믿어지시나요?

이 사실을 얼마나 알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시나요.

마치 부자 집 못난 자식처럼 등 따습고 배부름이 가져 주어지는 것이라고 여기진 않겠지요?

등 따습고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 부모가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압니까?

 

나 하나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는 이 사실을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

예수님을 의식이나 하고 삽니까?

그 피가 감사하기나 합니까?

그냥 입술로 의미없이 내 뱉는 립 서비스는 아닌가요?

 

시골 할머니들처럼 습관처럼 의미없이 그저 예! 예! 하는 것은 아나겠지요?

할머니 잘못 했지요?

예! 그저 잘못 했습니다.

할머니 뭘 잘못 했습니까?

그건 모르겠고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잖아요.

 

할머니 예수 믿습니까?

예!

왜 예수 믿는데요?

그건 모르겠고!

목사님이 예수 믿어야 천국 간다고 하니 예수 믿는 겁니다.

이건 믿음이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에요.

천국은 예수 믿는 자가 가요.

아니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아니에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요.

 

믿어서 가는 것은 자기가 믿는 것이고,

믿는 것은 하나님이 믿어주게 해 주셔서 믿는 거예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준 사람은 천국 가고자 하지 않아요.

이미 천국 안에서 살고 있어요.

 

그러나 자기가 예수 믿어서 천국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해요.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천국에 넣어 준 적이 없어요.

예수 믿어서 천국 가라고 하는 것은 마귀가 하는 말이에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자기가 예수 믿어서 천국 간 사람은 없어요.

 

마귀는 예수를 우리가 믿을 수 있다고 가르쳐요.

믿고 안 믿고는 내 쪽에서 주관 하라고 해요.

우리가 믿을 수 있다는 말은 언제든지 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 되어요.

구원을 우리보고 관리하라고 하면 자기 편의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해요.

 

이렇게 되면 결국 행함 신앙으로 나아가게 되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자기 행함이 되는 겁니다.

이건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신 믿음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믿음이에요.

가짜이지요.

 

예수 믿는 사람은 믿고자 하지 않아요.

주여 믿습니다! 라고 한 사람치고 믿는 사람이 없어요.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무슨 말인지 잘 새겨서 들으세요.

 

여러분은 신앙생활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생활이란? 이런 사실을 알고 사는 겁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까요! 라고 묻지 마세요.

각자 깨달아지는 것으로 살면 됩니다.

감동 되는대로 사세요.

구원하심이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로 감격스러우면 그 감격을 토해 내세요.

 

봉사하고 싶으면 봉사하시고,

전도하고 싶으면 전도하시고,

섬기고 싶으면 섬기십시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저 그 감격으로 행하십시오.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은 정형화 된 것이 없어요.

그러니 어떻게 사랑할까요? 라고 묻지 마세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해요.

 

바울은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고 하였어요.

우리의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므로 그 누구도 아버지 손에서 성도를 빼앗을 수가 없어요.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것이라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만큼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억지로 감격을 흉내 내려고 하지 마세요.

없는 감격을 만들려고도 하지 마세요.

 

예수님의 피로 얻은 구원에 대한 감격이 없습니까?

십자가 피 이야기가 무덤덤합니까?

왜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들어도 감격이 되지 않을까요?

 

역으로 생각해 보세요.

내게 감격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내가 자랑하고픈 것이 무엇인가?

난 무슨 말을 들어야 기분이 좋아지고 가슴이 쿵쾅거리는가요?

 

이건 가르쳐서 될 일이 아니에요.

소리 지른다고 될 일도 아닙니다.

주의 은혜가 임하여야지만 되는 일입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제발 구원을 위하여 애쓰지 마십시오.

말씀대로 살고자 하지도 마세요.

천국가려고 노력도 하지 마세요.

예수 믿고자 하지도 마세요.

 

나도 모르게 이상하게 예수가 믿어지면 그 때가 비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때입니다.

이상하게 예수님 이야기가 듣고 싶어지면 그 때가 주님이 간섭하신 때입니다.

때와 기한은 주께서 알아서 정하세요.

주님이 간섭하기 전까진 가만히 계세요.

 

제가 과거에 율법 아래 있을 때 그토록 예수를 믿고자 했어요.

그런데 끝내 예수를 믿지 못했어요.

다만 믿는 척 했을 뿐입니다.

밤이 맞도록 주여! 주여! 라고 불러도 대답이 없었어요.

 

바울이 그랬지요.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찾아오시기 전을 일컬어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고 하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열심을 다하여 살았지만 허탕이었어요.

그리스도 밖이란? 예수를 믿기 전이란 말입니다.

 

저 역시도 율법 아래 있을 때가 바로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였어요.

내 열심은 특심하였으나 주님의 열심은 없었어요.

내 열심으로 예수를 믿고자 할 때는 왜 그렇게 예수가 안 믿어지는 줄 몰랐어요.

예수가 내 바깥 저 멀리에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의 열심이 나에게 덮쳐오니 예수가 내 안에 가까이 있어진 겁니다.

이젠 밤이 맞도록 주여! 하지 않아도 내가 여기 있다고 하십니다.

참으로 이상하지요.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믿고 싶다고 해서 예수가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실 때만 믿어집니다.

 

믿어지게 되면 믿고자 하지 않아요.

믿어지는 사람은 이렇게 믿으세요! 저렇게 믿으세요! 라는 말에 현혹당하지 않아요.

그냥 믿어지는 것으로 살아요.

이걸 진리 안에서 자유 한다고 해요.

 

이런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은 신앙생활이 그렇게 편안해요.

일체의 수고를 쉬어요.

하지만 안 믿어지는 사람은 복잡합니다.

신앙생활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에요.

 

내가 뭔가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거운 겁니다.

뭘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얻어먹고 산다는 것을 깨달으세요.

마르다처럼 분주하게 예수님 대접한다고 하지 말고 마리아처럼 예수님 말씀을 받아먹으세요.

 

이것이 그러한가 성경을 상고하세요.

과연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는 것이 사실인지 확인하세요.

우린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지 살피고 또 살피셔야 해요.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께로 돌아갑니다.

이는 예수님이 시작하시고 예수님이 끝내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날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깨달으세요.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을 들고 가는 게 믿음이에요.

예수님께 받은 게 있나요.

그거 내어 놓으세요.

예수님이 주신 것을 내어 놓는 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 곧 행함입니다.

부디 예수님의 것으로 사는 재미를 만끽하시는 여러분에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예수라는 영원한 제사장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이렇게 산 것도 모두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고 간구해 주신 예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끊어질 수 없는 이 놀라운 구원에 늘 감격하며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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