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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37강. 비웃음이 웃음으로 (창 21:1-7)

by coroa 2021. 4. 22.

 

[37강. 비웃음이 웃음으로 (창 21:1-7)]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은 사라의 비웃음을 하나님은 웃음으로 바꾸어 주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건 마치 슬픔을 기쁨이 된 것과 같습니다.

고난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축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제목을 ‘비웃음이 웃음으로’ 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은 언약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일을 하실 때는 즉흥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언약 하신 것을 이루어가는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창세전 언약은 드라마의 시나리오와 같습니다.

드라마를 보면 항상 주인공은 당하잖아요.

그러다가 결국에는 해피엔딩 합니다.

창세전 언약이 그래요.

성도의 구원이 이 땅에서는 새드로 끝이 나지만 그것이 천국에서는 해피로 주어집니다.



드라마가 횟수를 더 해 갈수록 시나리오가 구체화 되어서 나타나듯이,

이 세상 역사도 창세전 언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는 하나님께서 언약하셨던 그 일들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실현이 되고 또한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성경적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구원을 받은 자에게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이렇게 구원을 받았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은 마치 우리의 인생과 같습니다.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서 부모의 보호로 어린아이에서 청소년으로 자라가고 청소년에서 장년으로 나아가고 점차 어른이 되어 가면서 인생의 참 의미를 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과 생명의 자람은 동일합니다.

생명은 처음부터 어른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성숙하게 태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 미약하게 태어납니다.

그렇게 태어나서 부모님(하나님)의 보살핌을 따라 강한 자로 세워져가는 것이 이 땅의 모든 생명이 갖고 있는 원리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다가 은혜 아래로 옮겨졌습니다.

율법에는 장성한 자이지만 은혜에는 어린 아이입니다.

율법으로 사는 것은 능숙한데 은혜로 사는 것은 서툽니다.



은혜 안에서 자라가면서 율법의 색채가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오래 하게 되면 비판하고 정죄하던 사람이 이해하고 관용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것을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를 우리의 신앙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씨앗의 자람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확장 되어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4장을 봅시다.



눅 4:26-29=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씨앗의 자람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러한 식으로 확장되어 간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양적 팽창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편만하게 퍼져나감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형성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처음에는 씨앗처럼 미미하게 들어왔지만 이것이 신앙의 경륜에 따라서 점점 더 우리 안에서 확장되어 갑니다.



우리 옛 사람이 죽어지고 새 사람이 장성해가는 것입니다.

율법에 사람이 죽고 은혜의 사람으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철이 들어가듯이 성도들의 신앙도 경륜이 쌓여 갈수록 은혜의 사람으로 변해가고 예수쟁이 냄새가 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오래 믿으면 법에 사람에서 은혜의 사람으로 변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 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충만해져가기 때문입니다.

이걸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예수를 오래 믿고 복음을 오래 들으면서도 덕스럽지 못하고 정죄하고 비판하고 까칠해진다고 하면 그것은 은혜를 올바로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끊어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자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안에서 생명을 공급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성도는 반드시 예수의 냄새를 풍기게 되어 있습니다.

성품적으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생명의 속성입니다.



이것은 성화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의 성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성품적인 생명의 성화는 성화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의지와 각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신앙은 생명의 자람과 같이 예수를 많이 알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가치관도 달라지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들이 죽어가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점점 더 쌓여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해외 집회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창세전 언약에 대하여 특강을 하였습니다.

그 분들과 교제하면서 느낀 것은 신앙이 한국의 70년대 신앙과 같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의 70년대 신앙이 어땠습니까?

오로지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이었잖아요.

어떻게 하면 이 가난을 떨쳐 버리고 물질의 풍요를 이루어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땐 우린 눈만 뜨면 잘 살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땅에 복을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예수 잘 믿고 부자 된 사람들을 불러서 간증을 하곤 하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한국교회의 현실은 그러하지만 말입니다.



지금 그곳 목사님들이 그래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복을 준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 복이란 것이 땅에서 잘 사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 잘 믿으면 하나님이 구약의 아브라함처럼 거부가 되게 해 준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늘에 신령한 복을 이야기만 했으니 그들에게는 아주 생소하게 들려진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사와 다른 이야기를 하니까 힘이 든 겁니다.




강의 후에 그 곳 목사님들이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시는데 자기들은 지금까지 성경을 문자로만 이해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들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다 과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얼마나 순수한지 몰라요.

꼭 옛날 우리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아요.

우리도 옛 날에는 순진하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살면서 교회에 충성하고 기도 많이 하면 복을 받는다고 믿었잖아요.

그 땐 참 순수했어요.



지금 그 분들이 그래요.

전 그 모습에 감명을 많이 받았어요.

어린아이들 같은 순수성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신앙은 닳고 닳아서 그런 것들이 사라져 버렸잖아요.

열정도 사라지고 간절함도 사라졌잖아요.

순수성도 사라졌어요.


피리를 불어 도 춤을 추기를 합니까?

곡을 하면 애통하기를 합니까?

소 닭 보듯이 하잖아요.



예수를 믿을 수록 더 강퍅해져 가잖아요.

복음을 들을 수록 더 게을러지잖아요.

그만큼 우리의 신앙이 관념적이 되어간다는 뜻이에요.



처음 사랑을 다 잃어버렸어요.

신앙이 화석화 되어 버렸어요.

들은 게 많아서 머리는 큰데 중풍병자들처럼 손과 발이 움직이지 않아요.



그 분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준다고 하면 복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기도를 해도 통성기도로 열정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어떠한가는 차치하더라도 얼마나 뜨겁게 하는지 몰라요.

가슴을 치면서 울고불고 해요.



그런데 한국에서 함께 가신 목사님들은 전부 밍숭맹숭하게 있는 겁니다.

저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어요.

내가 참 나태해졌구나!

회개도 많이 했습니다.



속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 왜 제게는 저런 열정들이 사라져 버렸습니까?

왜 우리는 복 달라고 기도를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 이놈아! 나이든 사람이 어린아이 같이 촐싹거리면 되겠느냐 하시는 것 같아요.



이것은 그분들을 옳고 우리는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는 그런 과정을 지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진정한 복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복을 달라고 울고 불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생명의 자람과 같이 지나가는 기간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 때는 어린 아이 짓을 하고 어른은 어른 짓을 하게 되어 있어요.

어린 아이는 돈 달라고 해야 해요.

그건 잘못 된 것이 아니에요.



그곳은 지금 복음이 싹을 내는 단계에요.

전체적인 흐름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자유롭게 들려지기 시작한지가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러니 신앙이 어린 아이와 같은 겁니다.

그동안 숨어서 암암리에 전해지다 보니까 아직까지는 신앙이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들은 기도하면 말씀대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는데 저는 그게 아니라고 하니까 어렵지요.

하나님은 땅에 것을 가지고 하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말씀을 역설로 보세요.

거꾸로 보세요. 하니까 이해가 되겠어요?

아마 굉장히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도전도 많이 받았을 거에요.




함께 동행하신 목사님이 이번에 도전을 받은 것입니다.

굉장히 쇼크를 받으셨어요.  

저와 같이 한 숙소를 사용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솔직히 이제껏 전부 문자 설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저 같은 설교를 처음 들었다고 하는 겁니다.

자신은 전도가 제일이라고 믿고 열심히 호떡 구워주면서 전도를 했는데 어떻게 하느냐는 겁니다.




전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제는 전도를 교회 안에서 해야 하는 것이지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게 아닙니다.

이건 세상 바깥에 전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교회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상식으로 보고 있어요.

어쩌면 00 교회나 한국교회나 도낀 개낀이에요.

그래서 제가 교회 안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했어요.



우리가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보았잖아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서 안디옥 교회에서 최초로 선교사로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이들이 어디에 가서 전도를 합니까?

회당에 가서 했습니다.

그 회당이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셔서 회당에 들어 가셨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 안에서 복음을 전했어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 찾으러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이 교회 안에 있어요.



그래서 회당에 가서 천국 복음으로 전도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둘씩 파송하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도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라고 하시지요.

이는 이스라엘 속에서 전도 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 속에 자기 백성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 찾으러 오신 것이지 남의 백성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은혜 아래로 불러 내셨어요.

이게 전도에요.

그러니까 전도의 대상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 안에 전도해야 한다고 하니까

그 목사님에게는 아주 생경하게 들렸던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저에게 아니 교회 안에는 다 구원받은 사람이 있잖아요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이삭이 있고 이스마엘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삭처럼 약속의 후손들을 찾으러 오신 것입니다.

이 약속의 후손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구약 교회 율법 교회 안에 파송하여서 천국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농부 비유를 들면서 농사를 지을 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신다고 합니다.

가나안 땅의 특징은 애굽과 달라서 물을 저축해서 농사를 짓는 곳이 아닙니다.

거기는 하늘에서 비를 내리는 것으로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이른 비는 봄비로서 파종 할 때 내리는 부드러운 비에요.

이 비로 인하여 파종된 씨앗이 싹을 내고 잎을 피우고 자라게 됩니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나타났어요.




오순절 성령 강림은 이른 비와 같아요.

성령이 임하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예수님 피로 맺은 새 언약의 복음이 온 세상으로 펴져 나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온 세상에 구원의 농사가 지어지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곡식이 잘 익으면 가을에 추수를 하여야 하잖아요?

늦은 비는 가을 추수시기에 오는 비에요.

이 비는 강한 비에요.



이 비로 인하여 과실들이 텁텁한 맛이 사라지고 달콤한 맛이 들어가게 되어요.

그러니까 늦은 비는 과실의 맛을 내게 하는 비에요.

이 비가 열매를 익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 재림 때 부어지는 늦은 비 성령이에요.



예수님께서 초림 때에 오신 오순절 성령은 이른 비처럼 온 세계만방에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들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재림 때가 되면 늦은 비처럼 강한 성령이 임하는데 이 때는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만 거기서 뽑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내 백성아 음녀에게서 나와 그들이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고 하잖아요.

음녀란 타락한 교회를 말해요.


지금은 젖 먹는 말씀을 먹으면 안 됩니다.

땅에 복을 구해서는 안 되어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뽑으려고 오셨는데 땅강아지처럼 땅에 기운으로 살면 안 되지요.

하늘에 기운으로 살아야 해요.



강한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강한 말씀이란? 창세전 언약을 말합니다.

태초부터 있던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가 있어요.

언약을 알아야 세상을 이겨요.



오늘 본문을 유념하셔서 보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은 언약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세요.




창 21:1절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오늘 본문은 사라가 아들을 낳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낳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아들을 무엇이 원인이 되어 낳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 원인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 하셨다고 하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고 합니다.



‘그 말씀대로’ 라는 말은 이미 전에 약속하셨던 그 말씀이라는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미리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경수가 끊어져서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여자에게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라에게 창조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 창조가 약속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능력입니다.

하나님 말씀 자체가 생명이에요.

하나님이 말씀 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져요.



말씀이 떨어지면 그 말씀은 반드시 생명을 잉태하고야 맙니다.

왜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말씀을 하시니까 그 말씀이 사라의 몸에서 생명을 낳는 창조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조건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사라가 경수가 끊어져 죽은 자이든지 아무 상관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말씀이 그 속에 들어가서 생명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였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이삭이 먼저입니까?

말씀이 먼저입니까?

말씀이 먼저이지요.



다른 말로 약속이 먼저이고 이삭은 나중입니다.

이삭은 약속의 결과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전에 언약을 먼저 주셨습니다.

언약은 때가 있습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자기 백성들 속에서 언약이 실현이 되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때와 기한’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기한이 되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이삭을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그림을 잘 보세요.



(그림 설명)

역사는 일직선으로 수평적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 자체가 영화의 필름처럼 단락 단락으로 잘라져 있어요.

과거에는 경점으로 나누었는데 이제는 초 단위로 나눕니다.

초(秒)도 이제는 천 개로 나누어요.

육상을 보면 몇 분의 몇 초 이러지요.



그러니까 역사 속의 시간은 ‘비엔나 소시지’ 처럼 한 개 한 개가 붙어서 흘러가는 거에요.

이러한 시간을 ‘크로노스’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의 시간은 시작과 끝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 속에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창세전엔 언약하신 일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이걸 ‘정한 때’라고 합니다.

‘그 기한이 차매’ 라고 합니다.



이렇게 ‘정한 때’에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시면 어떤 사건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창조라고 해요.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말씀 하시면 어떤 사건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라는 가만히 있었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찾아 와서 내 년 이맘 때 아이를 줄게 그런 겁니다.

그러자 사라의 배가 점점 불러 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사라가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사건으로 개입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공중에서 뚝 떨어지는 것과 같아요.

창세전 언약이 이 땅으로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정한 때’라고 해요.

다른 말로 ‘때와 기한’이라고 합니다.


흘러가는 이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개입이 되면 그 때는 창조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증거에요.

처음부터 예수가 믿어지는 사람은 없어요.

사람마다 예수를 영접하는 시기가 달라요.

포도원 품꾼 비유처럼 어떤 사람은 일찍 믿고 어떤 사람은 늦게 믿어요.

주인이 부르는 시간이 우리가 예수가 믿어지는 때에요.



우린 모두가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어서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졌어요.

종 노릇하다가 아들의 명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1-7절을 봅시다.



갈 4:1-7=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2절과 4절에 보면 ‘정한 때’가 나오고 ‘때가 차매’ 라는 말이 나옵니다.

정한 때란?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지는 때입니다.

즉 예수가 믿어지는 때입니다.

이것은 ‘때가 차매’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들을 먼저 율법과 청지기 아래 나게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모두가 법으로 시작을 합니다.

이 때는 우리 열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였습니다.

이건 구약 신앙입니다.



그 때는 우리가 예수를 못 믿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믿고자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정한 때(카이로스)가 개입이 되면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어 오셔서 믿어지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때를 일컬어서 ‘거듭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때가 ‘카이로스’입니다.

우리를 정한 때까지 후견인에게 가두었다가 때가 차매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셨습니다.




율법은 내 가능성으로 하나님을 믿고자 할 때가 율법입니다.

내 열심과 가능성으로 예수를 믿고자 할 때가 율법 아래 있던 때입니다.

우린 모두 그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지금 00 교회의 모습이 그런 거에요.

내가 믿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분들에게 좋은 설교는 ‘할 수 있다’입니다.

열심히 하면 능치 못하는 게 없다는 것 하나면 다 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가서 우리가 할 것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하십니다, 라고 하니까 멘붕이 오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는 뭐해야 합니까?’ 라고 묻는 겁니다.

여전히 자기 가능성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게 율법이에요.



뭘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는 것은 자기에게 가능성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죄라는 것은 자기 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내가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자기 가능성으로 낳은 자식이 누구인가요?

이스마엘이에요.

이스마엘은 종이에요.

유업을 얻지 못해요.

그래서 집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낳은 자식은 누구인가요?

이삭입니다.

이삭은 불가능성에서 낳은 자식이에요.

이삭은 아브람이 죽고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죽고 사라가 되어서 낳았어요.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식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겁니다.

이걸 ‘여호와 이레’라고 합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하신 한 몸이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말해요.



하나님은 창조주세요.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분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자기 가능성으로 일을 하고자 할 때는 가만히 있어요.

불가능성이 될 때 일을 하세요.



중풍병자처럼 무기력 할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율법 아래 가두어서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내가 개입하지 않으면 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라고 하십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어서 간섭을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이 때가 바로 묵시가 역사를 침노하는 ‘카이로스’인 것입니다.


이 때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거듭남이라고 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를 때가 차매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고가 바꿔집니다.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하나님 뭘 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라고 했는데,, 

은혜 아래로 옮겨지고 나면 주께서 다 하셨네요! 가 나옵니다.



‘주님이 다 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한다’ 라고 합니다.

‘주님이 다 하셨네요’ 라고 하는 이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어린 양에게 세세토록 찬양을 합니다.

이는 주님 홀로 다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이 다 하셨다는 것은 곧 우리의 구원은 공짜로 얻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제가 성도의 구원을 전리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원해 오는 것으로 미리 보여 주었어요,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겨서 롯을 데리고 옵니다.

이 때 멜기세덱이 나타나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전리품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여기서 십일조는 전부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에서 찾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구원입니다.



이 전쟁을 예수님이 하셨어요.

마귀와 전쟁을 하고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구원이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던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큰 틀에서는 예수님이 성도를 대표하고 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님이 십일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뱀의 머리를 깨트리고 우리를 찾아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또한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구약적 십일조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성도 자체가 십일조입니다.

구약에서는 물질의 십분의 일을 드렸지만 그것은 장차 구원 받을 성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십일조가 연보 개념으로 바뀌게 됩니다.



연보란? 우리 지신을 드리는 것이에요.

그래서 신약에서는 성도의 몸을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자기 피 값으로 샀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는 자기 것이라고 없어요.

모든 게 예수님의 겁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에겐 자기 것이 없어요,

모든 것이 주인의 것이에요.



종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연보에요.

연보는 감사입니다.

감사는 깨달음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연보는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해 주신 것이 마음으로부터 깨달아질 때 연보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십일조는 법에 속한 것이지만,

연보는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감사는 은혜 아래서만 나타나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법에 가두었다가 은혜로 빼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절대로 감사가 나오지 않아요.

법을 지켰다는 자기 의에 사로잡혀요.

나 했잖아요, 라고 큰소리쳐요.



감사는 은혜 안에 들어 왔을 때 나와요.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았구나,

이런 은혜를 입었구나, 감사케 되어요. 



우리가 말씀을 깨닫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깨달아지는구나,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말씀이 문자로만 보였는데 이제는 눈의 비늘이 떨어지고 나니까 문자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놀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신약에서는 물질의 개념보다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너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라고 합니다.

이건 깨달음이 와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개입하는 시간인 그 때를 일컬어 카이로스 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을 드라마로 비유해 보시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드라마가 시작이 되었어요.

이걸 ‘크로노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 출연할 시기가 아니에요.

하지만 드라마는 계속하여서 진행이 되어가고 있어요.



그러다가 내가 출연을 할 때가 온 겁니다.

그럼 감독이 큐 하고 싸인을 주면 내가 맡은 배역을 연기하게 됩니다.

이러면 내가 드라마의 주체가 되어서 움직여지게 됩니다.

이걸 정한 때인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개입하면 그 때부터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사용이 되어져요.

마치 처녀인 마리아의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을 하시시니까 그 속에 예수가 잉태되고 마리아의 인생은 예수를 위한 인생으로 뒤 바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각도에서 오늘 본문을 보세요.

사라를 보세요.

분명히 하나님이 아들을 준다고 하셨는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지 않았습니다.

비웃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비웃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 꼬라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도무지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웃은 겁니다.

그런데 늙은 사라가 아들을 낳았어요.

하나님께서 비웃음을 웃음으로 바꿔주신 겁니다.




여러분 보세요.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우리들이 순종을 하고 잘해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다 불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우린 모두가 하나님을 믿지 못한 자들이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믿어지게 해주신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얻고 보니까,

나는 불순종의 자식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나로 하여금 순종의 자식으로 바뀌게 했구나 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되고 비웃음이 웃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을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니까 믿어지는 순종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 속에는 항상 우리 부정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부정을 깔고서 긍정이 주어집니다.




이삭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먼저 아들의 이름을 주십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을 먼저 주고 아들은 나중에 주십니다.

이건 역설입니다.



우리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지어주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름을 먼저 주시고 그 이름에 맞는 아들을 주십니다.

이름을 먼저 줬다는 것은 태어나는 아들은 이름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언약이 먼저이고 내용은 나중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창조의 방법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구원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먼저주시고 그 언약이 담고 있는 구원은 나중에 주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구원도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먼저 녹명이 되고 난 후 구원은 나중에 주어지는 것으로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간섭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언약입니다.



이 언약이 언제 주어졌습니까?

창세전에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간섭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로 보여 주셨어요.

먼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합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과 약속한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고 언약의 후손들을 출애굽을 시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대로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게 성도의 구원의 모습입니다.



어린이 인형극 아시죠?

인형의 손 발에 줄을 묶어 위에서 사람이 조종을 하지요?

인형의 손 발이 움직이지만 실제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인형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에 의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듯이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창세전의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일을 하시는 겁니다.

믿는 자는 믿는 자대로 간섭하시고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자로 간섭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든 불신자든 다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언약을 위해서는 신자도 있고 불신자도 있어야 합니다.

이 둘은 짝입니다.

서로를 드러내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구원을 설명하려면 구원 아닌 것이 무엇인지가 설명이 되어져야 합니다.

진리를 알려면 진리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알라야 합니다.

천국을 설명하려고 이 세상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에서 나온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이 세상을 만든 것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짝으로 보여 줍니다.

신자의 신자 됨은 반드시 불신자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이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야곱이 야곱으로 드러나기 위해선 반드시 에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약속의 아들로 드러나기 위해선 육신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상대적으로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은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옛 사람과 새 사람으로 생각해 보세요.



이삭과 이스마엘을 하나로 보세요.

이스마엘은 육(율법)으로 난 자입니다.

이삭은 은혜(약속)으로 난 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으로 난 자가 있고 은혜로 난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난 나의 옛사람은 쫓겨나고 은혜로 난 새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흙에서 난 옛사람인 이 몸뚱이는 흙으로 돌려주는 것입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으면 겉 사람은 점점 후패해지고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겉 사람이 후패해진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미련을 점점 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 가치로 살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은혜 받아 보세요.

사람이 계산적이지 않고 흐물흐물해져요.

그러니까 이 몸뚱이에 너무 연연해하지 마세요.


신앙이라는 것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린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됩니다.

천국은 지옥을 지나온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자꾸 버려지는 삶을 살도록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버려집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이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이 점점 버려짐을 당할수록 우리의 소망은 점점 새로워집니다.




여러분 보세요.

젊은 사람이 천국을 소망하는 것과 나이든 사람이 천국을 소망하는 것은 다릅니다.

어린 아이가 천국을 소망한다?

그건 아닙니다.



아이에게 천국은 먼 나라 이웃 나라처럼 막연한 세상이지요.

그러나 늙은이들에게는 천국은 점점 가까워지지요.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건강할 때 천국하고 아플 때 천국하고는 다릅니다.

내가 건강할 때의 천국은 관념입니다.

그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됩니다.

내 몸이 펄펄 살아서 내가 하고 싶은 걸 다하고 있는데 무슨 천국의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몸 병들고 희망이 없어 보세요.

하나님 나라가 점점 사모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후폐하면 할수록 그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서 망하고 어려운 일 당하는 것에 너무 아파하지 마세요.


중요한 팁을 하나 이야기합니다.


하늘이 주는 복은 겉사람은 후패하게 하고 속사람은 새롭게 해줍니다.

망하는 것 같으나 흥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복은 흥하게 하는 것 같으나 망하는 것을 줍니다.



세상의 복을 한마디로 하면 물질입니다.

물질 많이 받으면 흥하는 것 같고 좋은 것 같지요?

그러나 결국 그 물질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돈을 가질수록 점점 더 쫓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래도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재벌 회장도 되고 돈 많이 써보고 싶다고 하시겠지요.

그러나 재벌 식구들이 심정적으로 행복한 사람이 있냐하면 없습니다.

쫓깁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어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물질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생활의 편리함과 몸뚱이의 평안함은 주겠지요.

안락함을 주겠지요.



그러나 영혼의 평안은 절대로 세상 것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늘의 것이 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평안을 하늘에 것에 담아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것이 와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하늘의 복은 우리에게 영혼의 평안함을 주고, 세상의 복은 우리에게 육신의 평안함을 줍니다.

그런데 이 육신은 후패하고 버려질 것입니다.

이스마엘과 같이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어리석어서 이 후패할 몸뚱이에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눈만 뜨면 이 몸뚱이를 챙깁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 안에서 이 몸은 반납하고 갈 것이며 그 몸뚱이에 의미를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속사람을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역설적으로 다뤄 가십니다.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고 일로매진하는 쪽이 아니라 신앙에 방해가 되는 세상에 대한 소망들을 하나 둘 씩 가지치기를 해주십니다.




우리들이 지금 삶의 형편이 어렵고 힘들어서 이 자리에 와있는 것이지 우리 계획대로 삶이 평안하고 좋다면 여기 안 와 있을 겁니다.

세상 일락을 좇고 있을 겁니다.



복음은 농부가 농사를 짓는 것과 같아요.

어떤 곳은 복음이 막 뿌리가 내려 싹을 내고 자라가는 단계이고 어떤 곳은 복음이 다 자라서 추수하는 단계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국가마다 과정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포도원 주인처럼 품꾼들을 부르는 시기가 각각 다를 수가 있어요.

이건 국가마다 다를 수가 있고 사람마다 다를 수가 있어요.




한국은 지금 씨를 뿌릴 때가 아닙니다.

추수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뤄 가실 때는 반드시 과정이 있습니다.



지금 내 신앙이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 보셔야 합니다.

땅에 것을 구하는 때인지 아니면 땅에 것을 벗고 하늘에 것을 구하는 단계인지 보세요.


우리가 타고 있는 열차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것을 보시란 말입니다.



경부선 열차가 부산에서 출발해서 서울이 종착역이라고 생각을 합시다.

그러면 내가 타 있는 이 열차가 막 부산을 출발을 했는지 아니면 이제 곧 서울에 다다랐는지 그것을 보시란 말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 성도들은 출발하는 신앙은 이미 다 지나 왔습니다.

이젠 다다를 때입니다.

경부선 열차를 타면 서울에 다다르면 방송이 나오지요?

이제 곧 도착하니 짐을 잘 챙기고 내릴 채비를 하라고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멘트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은 이제 이 땅의 가치는 훌훌 벗어버리는 수준이 되어야지요.


세상의 복은 반드시 좋은 것을 줬지만 끝은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복은 역설적으로 세상에서 망한 것 같으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흥한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항상 비웃음을 통해서 웃음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잘 살아야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그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귀하고 감사하게 느끼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스스로 낙망하지 마세요.

내 꼬라지가 이래서 어떻게 하냐 하지 마세요.

복음은 그것을 이기게 하는 거잖아요.



복음은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나서 제일 먼저 한 것이 성전 미문에 있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고치는 것입니다.

성전 미문에서 얻어먹고 살던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고 나서 성전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전 바깥에 있던 사람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전 바깥은 율법입니다.

성전 안은 은혜입니다.

성전 안에 들어가니까 여호와를 찬미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를 통해서 예수를 만나고 나서 일어나게 되니까 성전 바깥에 있는 자가 아니라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그러한 때를 따라 간섭을 하십니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서도 어떤 분은 성전 안에 들어 가 있고 아직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정적으로는 우리 모두 앉은뱅이로 있을 자가 아니고 이미 일어난 자들입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자들입니다.


한 번 물어 봅시다.

먹고 사는 문제로만 보면 앉은뱅이로 살 때가 편했을까요?

일어나 걸어가는 게 편했을까요?

앉은뱅이로 살 때가 편했지요.



그 때는 자기가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은혜만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일어나 걷고 보니 누구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 때부터는 자기가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의 깊이를 모르고 그냥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는 그 때가 좋았어요.

문자적으로 해석해도 잘못된 건지 몰랐으니까 구하라 그러면 무조건 구하면 되고 두드리라 하니까 아무 때나 두드리고 그러잖아요.




과거의 우스운 에피소드가 하나 생각이 납니다.

제가 알고 지내던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목사님 교회를 갔더니 그 때 처음 나온 12인승 승합차 그레이스 사진을 교회 게시판에 붙여 놓은 겁니다.

그 사진 밑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하는 구절을 써 붙여 놓았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게 뭡니까?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데 우리는 이 차를 바라고 있다 하시는 겁니다.



그건 돈 주면 사는 건데 믿음이 왜 필요합니까?

그런데 그 당시엔 그런 게 통했다니까요.

그 때는 순수함이 그렇게 통했습니다.




지금 00이 그렇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뭐든지 구하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건 성전 바깥에 있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바깥에 머물면 안 됩니다.

일어나 걷고 뛰어야지요.

성전 안에 들어가야지요.

그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맛보고 찬미하는 쪽으로 나아가야지 언제까지 성전 문 밖에 머물고 계실 겁니까?




제가 늘 안타까운 게 그겁니다.

우리의 신앙이 언제까지 목사가 전해주는 말만 먹고 힘을 얻으실 겁니까?

아니에요!

이제는 스스로가 말씀을 보고 힘을 얻을 수 있는 위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육적인 것이 아니고 하늘의 것입니다.

눈이 떠진 자들은 구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똑같이 구하는데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땅의 것을 구할 것이고 눈을 뜬 사람은 하늘의 것을 구하겠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땅의 것을 구하는 것은 다 후폐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좋아 보여도 나중에 사라져 버리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것들은 아프고 힘들지만 가면 갈수록 생명의 역사가 푸르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복이 다른 점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땅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늘로 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사람은 흙으로 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난 사람입니다.

창세기 2장의 사람은 흙으로 난 사람입니다.  



흙으로 난 아담과 하와는 창세기 1장의 사람을 겨냥해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흙에서 난 자가 말씀으로 거듭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늘의 사람이 되는 것으로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모두 흙으로 났습니다.

그 흙으로 난 자들에게 하나님의 정한 때가 되어 간섭을 하시니까 우리가 말씀으로 거듭나 땅의 사람이 아닌 하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땅에 사람은 죽고 하늘에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탐심이고 그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잖아요.

지금도 내가 눈물로 기도를 한다.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데 그들의 신은 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배가 아니라 배때기라고 해야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현재 우리의 신앙이 자기 배를 위한 신앙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깨트려줘야 합니다.

나 같은 인간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 자리에 세웠는데 저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드니까 감사도 나오고 합니다.




현재 우리 인간의 이성은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과 사라와 같습니다.

사라와 아브라함이 이삭을 준다고 했을 때 비웃었던 이유는 그들의 사고방식이 자기 몸의 가능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고 하니까 비웃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내 가능성을 가지고 받습니다.

우리 꼬라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비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아야 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능력과 상관없이 일을 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이 언약이 먼저고 몸뚱이는 나중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형편없는데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의 형편없는 몸을 하늘에 몸으로 다시 살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창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웃음이 웃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세피하게 보고 비웃지만,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성취를 해 내어서 감사와 감격하는 지리로 나아가게 하여서 웃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 같은 인간이 구원을 받았고,

예수가 믿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서 감사하고 감격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때로는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넘어짐은 우리를 다시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넘어지게 한 것은 일으켜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넘어짐이 결국에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복음 속에는 항상 이 두 가지가 같이 나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떨어지면 항상 두 창조가 일어납니다.

갈라지고 채우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게 중요한데,,,



창조가 일어나려면 반드시 창세기 1장과 같은 창조가 일어납니다.

이 창조는 기존의 것으로부터 갈라지게 하는 창조입니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크로노스 시간으로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일어납니다.

이 때 거듭나는 창조가 일어납니다.



이게 창세기 1장 2-3절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불러내지요.

그러면 빛은 어둠 속에서 살던 삶은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아브람을 하나님이 찾아가서 빼내는 것과 같습니다.

갈대아 우르가 어둠의 동네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아브람을 하나님의 간섭이 있는 빛의 동네로 빼냅니다.

이러면 아브람의 인생은 종말과 시작을 동시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창조는 종말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이런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없는 곳에서 뭔가 뚝닥뚝닥해서 만들어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창조는 먼저 갈라내고, 갈라낸 다음 그 공간에 채우는 일들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갈라내는 일을 하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그 갈라낸 공간에 채우는 창조를 하는 것입니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을 끄집어내는 일들을 하고 넷째 날부터 여섯 째 날까지 은혜로 채우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 속에서 엿새가 차기까지 일을 하고 계시다니까요!



무슨 일을 하실까요?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들로 채워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옛 것은 뽑아지고 새 것이 채워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담의 속성들은 다 뽑아버리고 예수의 성품들이 우리 속에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오래 믿게 되면 예수의 마음이 그 사람 안에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화라고 하면 전 부정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깨끗하고 착하게 사는 것을 성화라고 하니까 그걸 나무라는 것이지요.




신자는 일 년 믿을 때하고 십 년 믿을 때하고 이십 년 믿을 때하고 달라야지요.

어떤 모습으로 달라집니까?

그 속에 예수의 마음이 점점 새로워지고 각인된 모습으로 나와야지요.

예수를 이십 년 삼십 년 믿었는데 그 속에서 예수의 마음이 없다면 그건 가짜입니다.

오래 믿으면 믿을수록 그 안에서 예수의 마음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모습들이 창조 속에 담겨져 있다니까요!

그래서 반드시 카이로스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창조의 일이 일어나는데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것은 갈라지는 창조입니다.

이 갈라짐이 종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다가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 아래로 왔습니다.

그러면 율법 아래 있다가 은혜 아래로 부르심을 입으면 율법의 사람은 종말을 맞는 것입니다.



법으로 살던 사람은 종말(죽음)을 맞는 것입니다.

이제 은혜로 사는 사람으로 새로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창조는 반드시 먼저 죽이는 창조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리는 창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옛사람이 먼저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새사람으로 살리심을 입는 것입니다.

이게 창조입니다.




지금 보세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언약이 떨어지기 전에는 자기들의 가능성으로 말씀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실 때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안 믿었다는 것은 자기들의 몸의 조건을 보는 것입니다.

그랬던 사라가 이삭을 낳고 난 이후로는 자기들의 몸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왜요?

자신처럼 죽은 여자의 몸에서 아이를 생산한 하나님의 능력을 맛봤잖아요.

이때부터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기 꼬라지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율법 아래 있을 때는 내가 말씀을 온전히 지켜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건 줄 알았는데 은혜를 만나고 보니까 내 몸뚱이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에 점점 낙심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서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왜요?

말씀이 결국 나로 하여금 내 한계를 깨닫게 만들고 내 연약한 한계성이 결국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앞에서 절망하고 그 절망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다가 오면 비웃음으로 다가와 나로 절망케 하는데 그 절망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소망이 생기게 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죽임을 당하고 또 날마다 살아나는 그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나는 죽어야 될 자라는 것을 알고,,

하지만 거기서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죽은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는 것을 알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이 드러나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신앙의 끝에는 나는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보여야 합니다.



오늘 집사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 조건 보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피(의)를 힘입고 나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잘해주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기도는 진솔해야 해요.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하는 것이 기도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그대로를 하세요.



그래서 제가 당부 드리는 것은 앞으로 기도하실 때 써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기도하는 그 때 주시는 감동대로 하세요.


기도를 잘하려고 하지 마세요.

도대체 어떤 기도가 잘하는 기도입니까?



그냥 순수하게 하시면 됩니다.

있는 그대로 마음에 감동되는 대로 하세요.


지금 우리도 사라와 같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이 이삭을 준다고 했을 때 자기 꼬라지를 보고서는 이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고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사라의 몸에 아들을 잉태케 하고서 정한 때에 기한을 맞추어서 나게 하시더란 말입니다.

약속한 것이 사실로 이루어졌습니다.

비웃음이 웃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 앞에 섰을 때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섰을 때 죽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해 주었습니다.

비록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담대하게 주님 앞에 왔다는 것이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조건으로 낙망하지 마세요.

비록 우리 처지는 비웃을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우리 안에는 언약이 있습니다.

그 언약이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반드시 구원을 이루어 가시니까 안심하세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를 복주리라고 약속을 하셨어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반드시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복의 조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은 죽을 고생을 해도 마지막에는 이긴 자가 되잖아요.

나쁜 놈이 득세를 하다가도 그들은 결국 다 망합니다.

결국엔 정의가 우뚝 선다는 것이 드라마의 내용이잖아요.

그러니까 드라마를 아는 사람은 나쁜 놈이 아무리 주인공을 득달 하더라도 절대로 쫄지 않습니다.




성도의 구원이 그렇습니다.

언약은 성도의 승리를 이미 확정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이삭을 준다고 하였으면 이건 확정된 것입니다.

사라의 몸이 어떻든 간에 반드시 이삭은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라가 낳은 이삭으로 성도의 구원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우리들의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확정된 것을 이 땅에서 구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로 한 것이면 반드시 복의 자리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니 그 약속을 믿으시고 평안한 마음으로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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