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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45강. 아론의 반차와 멜기세덱의 반차 (히 7:11-19)

by coroa 2021. 4. 18.

 

♣ -.45강. 아론의 반차와 멜기세덱의 반차 (히 7:11-19).-

-.정낙원 목사

 

사도 바울은 만물 가운데에는 하나님을 알만 한 것들이 담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어째서 만물 가운데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담겨져 있다고 할까요?
이는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을 보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합니다.
이는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보이는 세계는 복사본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원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철거가 될 허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식론(認識論)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 인간들에게 감지(感知)되지 않는 세계라는 뜻이에요.
인간들에게 감지되지 않는 나라가 바로 이 세상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인간에게 감지되지 않는 세계를 근거로 보이는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어요.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있는 것이 얼마든지 있어요.
가장 쉬운 예로 우리 인간을 가지고 말해봅시다.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구분합니다.
육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가 되지만 정신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아요.
하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을 보았습니까?
마음이 몇 근이나 나가든가요?
어떤 색깔이든가요?
어떻게 생겼든가요?
둥글던가요?
세모이던가요?
아니면 네모이든가요?
 
마음은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 몸은 마음이 움직이고 있어요.
몸이 정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이 몸을 주장해요.
정신이나 마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같고 몸은 보이는 세계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로 그 속에 생기를 불어넣었어요.
그러자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령은 산 자란 뜻입니다.
산 자는 ‘흙’이라는 물질과 ‘생기’라는 비 물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질인 흙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만질 수가 있지만,
비 물질인 생기(生氣)는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생기가 없으면 몸은 죽어요.
인간의 생명은 몸이 아니고 생기인 겁니다.
생기가 몸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가 창조 원리에요.
우리는 흔히 인간이 감지 할 수가 없는 세계를 영이라고 합니다.
영은 육으로는 인식 할 수 없는 세계에요.
이는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죄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란 다른 아닌 하나님 나라에요.
하나님 나라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소경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소경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인간의 이성은 유(有)에서 유(有)가 나온다는 것만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흙이라는 물질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세계 밖에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기서 물질세계 밖이란 비 물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밖을 말합니다.
이를 영의 세계라고 합니다.
영의 세계는 인간이 감지 할 수가 없어요.
 
인간들은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것은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손으로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것만 말하라고 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을 말하면 네가 봤냐! 네가 가 봤어!
이 말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감추어진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했다는 말 자체가 천지 밖에 계신 하나님이 천지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은 천지에게 천지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이 계시를 해 주어야지만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나 천국이나 지옥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가 없어요.
천국과 지옥은 인간들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없는 세계와 같아요.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인간들은 단지 자기들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없다고 하는 겁니다.
이는 죄(罪)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눈을 가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어둠이라고 하고 죄인을 일컬어 소경이라고 하는 겁니다.
 
무얼 못 보는 소경인가요?
하늘나라에서 온 예수를 몰라보는 소경입니다.
소경이기 때문에 예수가 행하는 갖가지 기적을 보고 신기해하기만 하였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몰라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나를 모르니 소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무슨 망발을 하느냐고 펄쩍뛰었지만 말이에요.
 
자 보세요.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똑 같은 모습으로 앞에 서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는 하나님 아들이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웃기고 있네!
우리하고 똑 같은데 네가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냐!
그러자 예수님이 그러니까 너희가 소경이라는 거야!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과 다른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자들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합니다.
유대인이나 베드로나 동일한 인간이에요.
그런데 베드로가 지금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유대인들은 몰라보는데 베드로는 알아보았어요.
 
베드로하고 유대인들하고 똑 같은 인간이에요.
그런데 하나는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알아보고,
다른 한 쪽은 예수님을 그냥 인간으로 보고 있어요.
그럼 이 땅에 인간도 한 종류가 아니고 두 부류가 있다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구분이 되어요.
 
이건 아주 심각합니다.
에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는 사람들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고,
예수님을 그냥 인간으로 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인 겁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은 눈을 떴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소경인 겁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대인은 자연적으로 죄인이고 소경이 되고 마는 겁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알아본 베드로는 눈을 뜬 사람이고 의인이 되는 겁니다.
똑 같은 인간인데 하나는 죄인이고 하나는 의인인 겁니다.
세상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있지만 하나님 아들로 보았어요.
물론 베드로의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어서입니다.
암튼 어쨌거나 저쨌거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았어요.
그럼 이 세상에는 베드로 같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보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래요.
눈에 보이는 것만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있어요.
성경은 인간의 이성으로 감지되지 않는 그 일을 말해주고자 하는 겁니다.
그럼 우리도 베드로처럼 육(흙)인 예수님을 통해서 육 너머(영)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조금 난해하니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셔야 합니다.
영과 육이 갈라지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세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소경이란? 분명히 사물이 있음에도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몰라보는 자를 소경이라고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해요.
성경은 이런 상태를 영적 소경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 보세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 하자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을 해 버립니다.
이건 하나님이 죄인에게 숨어 버린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아담에게는 에덴동산은 감추어진 세계에요.
에덴동산 밖에서 태어난 아담의 후손들에게는 에덴동산은 보이지 않는 세계인 겁니다.
이 모습이 지금 이 세상의 모습이에요.
 
죄가 에덴동산을 가려 놓았어요.
그러니까 죄인에게는 하나님 세계가 안 보이는 세계인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실제로 존재하는 곳임에도 죄인에게는 있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인간들은 하나님이나 천국이나 지옥을 없는 것으로 알고 살아요.
비록 하나님을 말하고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말을 하여도 그건 관념이지 실제가 아니에요.
관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않고 천국을 위해서 살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 교인들이 신앙생활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요.
 
신앙생활은 실제이지 관념이 아니에요.
관념으로 하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 아세요.
그건 천국과 지옥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겁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거에요.
 
어떤 이들은 입만 열면 복음 복음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들이 삶은 이방인과 똑 같아요.
복음은 머리로 동의하여서 믿으면 되는 것이니까 막 살아도 된다고 해요.
지적 동의가 마치 신앙인줄 착각하고 있어요.
이러한 믿음을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고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죽은 복음이니까 삶에 전혀 영향을 끼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삶이에요.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의식되고 천국과 지옥이 의식되면 막 살 수가 없어요.
 
천국과 지옥을 실제로 알고 사는 사람은 대충대충 살지 않아요.
이 땅에서 천국 백성으로 살아요.
반드시 그렇게 살게 되어 있어요.
의식이 되는데 어찌 설렁 설렁 산단 말입니까?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긴단 말입니까?
그럴 순 없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천국과 지옥이 사실임을 믿어지게 하셨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을 알리는 일을 하셨어요.
노아에게 찾아가서 알려 주자 노아는 사실로 알고 살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육신적인 일에만 몰두하고 살았어요.
하지만 노아는 장차 올 심판을 대비하는 방주를 짓는 삶을 살았어요.
먹고 마시는 사람들에게 방주를 짓는 노아의 모습은 미친 사람의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자 순종하고 따라 나섰어요.
아브라함의 가족들 입장에서 아브라함의 행동은 미친 사람의 행동일 수밖에 없어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서 부모형제를 떠나겠다고 하는 것은 미친 사람의 짓이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에요.
다메섹에서 천둥소리를 예수님 음성으로 들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천둥소리로 들었어요.
그런데 바울은 천둥소리가 아니고 예수님 소리라고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예수쟁이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려고 가고 있는데 도리어 예수는 맞고 유대인이 틀렸다고 합니다.
함께 가던 동료들에게 너희들 예수 믿어야 한다고 하고 있어요.
 
이건 동류들 입장에서 미친 짓이에요.
천둥소리에 놀라서 정신 줄을 놓아 버렸다고 밖에는 해석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동료들은 야! 임마, 정신 차려!
그러나 바울은 나 안 미쳤어! 정상이야!
진짜 예수 만났다고!
너희들 내 말을 들어야 살어!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바울은 분명히 보았고 들었어요.
그러니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억지로 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경험되고 믿어지는 것만큼 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스스로를 알려주세요.
이걸 계시라고 합니다.
숨어 있던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신 겁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숨을 필요가 없었어요.
 
아담이 범죄 하니까 숨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범죄하니까 에덴동산 밖으로 좇아냈어요.
이것은 하나님은 죄인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담에겐 에덴동산은 숨겨진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인간을 단절시켜 버린 겁니다.
죄가 에덴동산(하나님나라)을 보이지 않는 세계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보이게 되어요.
 
죄 문제만 해결 되면 하나님을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가려진 눈을 뜨게 하려고 죄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하신 겁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여서 가려진 세계를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를 구원이라고 합니다.
 
계시(啓示)란? 열어서 보여준다는 말이에요.
마치 연극 무대를 가리고 있는 커튼을 열어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과 같아요.
커튼을 우리가 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열어 주세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는 마치 연극 무대와 같아요.
죄인들이 사는 땅(육)이라는 객석에서는 하늘(영)이라는 무대 뒤가 커튼(죄)이 가리고 있어서 안 보여요.
분명히 있음에도 안 보이는 겁니다.
 
무대와 객석을 가리고 있는 커튼은 죄와 같아요.
죄가 커튼처럼 하나님과 인간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 세계를 볼 수 없도록 가려 놓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 가려진 죄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지만 하나님을 볼 수가 있어요.
 
이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셨어요.
예수님이 자기 육체로 죄 문제를 해결하여서 성소의 휘장을 확 찢어버리신 것입니다.
커튼을 걷어 버린 겁니다.
이를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구약에서는 성막의 제사를 가지고 예표적으로 보여 주었어요.
성막의 뜰에서 흠 없는 짐승의 제사로 죄사함이 이루어지면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 문제를 예수의 피로 해결한다는 이야기를 구약 이스라엘에게는 성막의 제사 제도를 통해서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겁니다.
 
성경은 전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이 사실을 예수 라는 이름 속에 담아 놓았어요.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 란 뜻이에요.
이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도록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면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여요.
예수님에 의해서 죄 문제가 해결 된 성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고 살아가요.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역(逆)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은 위에 것을 찾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억지나 강요가 아니고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어요.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말미암았다고 했지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하고자 보이는 세계를 만들었어요.
이걸 만물이 주께로부터 나왔다고 합니다.
 
만물이 주께로 나왔다고 한다면 만물의 실상이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만물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왔으니까 만물의 실상이 예수님이 되는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만물 속에 속한 사람들은 만물을 통해서 누굴 보아야 합니까?
예수님을 보아야 하지요.
만물은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하여 나온 것이니까요.
 
보이는 만물이라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예수님)의 그림자와 같아요.
그럼 우리가 만물 속에 살면서 누구 중심으로 살아야 하나요?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만물이 주께로부터 나온 일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러면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전부 소경이고 가짜가 되는 겁니다.
예수가 버젓이 있는데도 모르고 살고 있으니 죄인인 겁니다.
여기까지 이해가 되시지요.
 
자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만물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럼 만물과 예수님은 같이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안 보이지만 실제로 있지요.
 
위에는 예수님이 있고!
아래는 우리가 살고 있어요.
윗 층은 하나님이 계시는 에덴동산이고!
아래층은 아담이 사는 이 세상이에요.
 
이건 마치 1층과 2층이 같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1층에선 2층이 안 보여요.
하지만 분명히 2층이 1층 위에 있어요.
1층에선 마치 안개(죄)가 끼어서 2층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아요.
 
이건 구약 시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던 시내산과 같아요.
산 아래 있는 백성들은 중간에 구름이 끼어서 시내산 꼭대기를 보지 못해요.
모세는 산 위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산 아래서는 볼 수가 없어요.
산 위에서는 산 아래가 보이는데 산 아래에서는 산 위가 안 보여요.
산 위에서는 산 아래의 모든 것을 다 감찰하고 있어요.
 
시내 산 위를 하나님 나라를 예표해요.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과 모세가 이야기 하지요.
모세를 예수님이라고 보세요.
그럼 예수님하고 하나님이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되겠지요.
 
무슨 말씀을 나눌까요?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하고 다스릴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 아래 있는 백성들을 산 위로 올라오게 하는 일을 상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내 산을 옆으로 누이면 산 꼭대기가 가나안 땅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기나안으로 인도하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것을 예표하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산 위에 있는 나라 민족이지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딜 보고 살아야 합니까?
산 윗동네를 보고 살아야지요.
 
그런데 지금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산 아래서 살고 있지요.
이스라엘은 비록 산 아래 살아도 어딜 보고 살아야 합니까?
산 위를 보고 살아야지요.
 
산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거기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존재의미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일컬어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산 위 묵시에 속한 민족이라고 하는 겁니다.
 
산 아래 있는 이스라엘은 누구 지시로 움직입니까?
하나님의 지시로 움직여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율법을 받아 왔습니다.
율법이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이러면 이스라엘은 산 위의 지시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되지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은 산 위가 되겠지요.
산 위를 묵시라고 하고 산 아래를 역사라고 해요.
 
히브리서 11장 3절의 말씀으로 본다면 묵시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고 역사는 보이는 세계에요.
아까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했습니다.
보이는 산 아래 역사세계는 보이지 않는 산 위 묵시세계에서 나왔다는 말과 같아요.
산 아래 역사는 산 위에 종속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은 산 위에 지시를 받고 살아야 해요.
 
이걸 지금 우리에게 적용하면 예수님의 지시를 받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교회와 성도는 묵시에 속한 존재들이에요.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린 이걸 몰라요.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땅 강아지 마냥 흙만 퍼 먹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산 아래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은 산 위에서 공급되는 생명으로 살고 있어요.
그래서 만나가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면서 너희는 땅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라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땅에서 난 양식을 먹지 않고 하늘에서 주신 양식으로 살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산 위로 불러서 율법을 주신 이유도 다 여기에 있어요.
율법을 산 아래서 주어도 되어요.
그런데도 구태여 산 위로 올라오게 한 것은 너희는 하늘 백성이라는 것을 시청각교제로 알려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름으로 산 위와 산 아래를 구분시키고 산 위에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산 위는 묵시이고 산 아래는 역사에요.
모세가 산 위에서 받아온 율법으로 산 아래 있는 이스라엘을 다스리지요.
묵시에서 받아온 율법이 역사에 속한 이스라엘을 다스리잖아요.
그럼 실질적으로 역사에 속한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것은 묵시가 되겠지요.
 
이걸 깨닫게 하시려고 상징적으로 구름이 움직이면 이스라엘이 따라 움직이게 하신 겁니다.
구름은 묵시층이에요.
이스라엘이 구름 따라 이동한다는 것은 묵시가 역사를 이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산 위에서 움직이면 이스라엘 민족도 움직여요.
묵시와 역사가 함께 같은 동선(動線)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묵시가 역사를 끌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히브리서 11장에선 믿음이 사람들을 끌고 다녔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산 아래 있는 역사에선 이걸 몰라요.
왜 모를까요?
죄라는 안개가 끼어 있기 때문입니다.
죄 아래 있는 역사 쪽에서는 묵시가 안 보이니까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발적 사건을 일으켜서 여기 묵시가 있다고 툭툭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시내산 꼭대기에서 천둥과 우레와 나팔 소리로 여기 산 위 세상이 있다고 알려 주고 있어요.
물론 산 아래선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니 금송아지 만들어 놓고 춤추고 있는 겁니다.
 
산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영적 사건이라 해요.
중요한 것은 역사에선 묵시가 하는 일이 낯설다는 겁니다.
평상시엔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므로 감(感)을 잡을 수도 없고 아주 생경(生硬)해요.
이는 역사 세계가 전혀 예상치 못하고 경험되지 못한 일들이 터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묵시적 사건들을 역사에선 기적이라고 해요.
역사적 관점에선 묵시를 이해 할 수가 없으니 기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자기 백성들에게 그 사건을 깨닫도록 계시(啓示)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서 보여 주세요.
성령으로 감동케 해 주시면 아하! 그렇구나!
그런 뜻이었구나!
주께서 이렇게 하셨구나! 라고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성경은 보이는 세계를 가지고 보이지 않는 세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가 있어야 성경을 제대로 보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람은 다 알아요.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겐 비밀인 겁니다.
성경을 보아도 보이는 것으로 땅 차원의 해석을 하니 엉터리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비록 보이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을 담아 놓았는데 하나님께서 눈을 안 열어 주시니까 소경이라서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들 생각대로 성경을 해석하여서 엉뚱한 말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가 절간처럼 비나이다! 비나이다!
염불하는 장소가 된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인간들의 길흉화복을 점(占) 쳐주는 점쟁이가 된 것도 다 소경이라서 그래요.
이사야 선지자가 그랬어요.
 
이사야 42장을 봅시다.
 
사 42:19절.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사 56:10절.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소경이 누구냐?
목사들이라는 겁니다.
이런 일들이 있을 것은 이미 오래전 구약의 선지자들이 말했어요.
 
목사들이 소경이니까 죄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벙어리 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인도할 목사들이 소경이고 벙어리니까 이 세상은 허상이고 실상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소경이고 벙어리니까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이 죄사함을 주는 십자가 이야기로 풀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그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주는 구원의 능력이라는 말을 못하는 겁니다.
 
성경이 온통 예수님 이야기잖아요.
예수님 이야기라는 말은 자기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럼 자기백성들의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로서 사함이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주어야지요.
그럼에도 목사들이 예수를 가지고 허상에 불과한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마치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잖아요.
 
이사야 선지자가 말했듯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행복해지고자 꿈꾸고 있잖아요.
구약이든 신약이든 거짓 종들의 특징은 성경을 세상이야기로 푼다는 겁니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하고 있는데도 소경이니 보이는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이야기로 푸는 것입니다.
 
이걸 베드로는 성경을 억지로 푼다고 했어요.
 
벧후 3:16절.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억지로 푼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다는 말은 성령의 감동 없이는 해석 불가란 말입니다.
 
성경은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만 해석 할 수가 있어요.
성령을 받은 성도만이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어요.
성령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하면 땅에 복을 달라고 합니다.
땅에서 잘되는 것이 복 받은 증거라고 해요.
 
하지만 성령을 받은 성도는 복을 하늘에 신령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을 복으로 여깁니다.
이 시대 목사나 교인들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을 복이라고 가르치고 여기는 것은 전부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에요.
그러니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땅에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설명 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하늘이고, 보이는 세계는 땅입니다.
위는 하늘이고 아래는 땅이에요.
하늘과 땅이 복선(複線)으로 같이 동행(同行)하고 있어요.
마치 하늘에 비행기가 지나가면 땅엔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과 같아요.
 
이 세상은 하늘에 그림자에요.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하늘에 실체와 땅에 그림자가 두 줄기가 되어서 같이 가겠지요.
쉬운 말로 하늘은 비행기라는 실체가 지나가고 땅은 비행기의 그림자가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땅에 비췬 그림자를 보고 하늘에 있는 실상을 이해하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원리가 그렇습니다.
 
하늘을 영이라고 하고 땅을 육이라고 합니다.
하늘에 길을 영맥(靈脈)이라고 하고,
땅에 길을 육맥(肉脈)이라고 합니다.
맥(脈)이란? 길이고 줄기라는 뜻입니다.
 
그럼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말미암았다고 하였으니까,
이 세상에는 하늘처럼 보이지 않는 하늘에 길인 영맥과 땅처럼 보이는 길인 육맥이 있겠지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이 두 줄기가 같이 흐르겠지요.
사람으로 비유하면 하늘에 속한 영의 사람과 땅에 속한 육의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선 “아론의 반차”와 “멜기세덱의 반차”라고 합니다.
 
반차란? 계통 또는 가문이라고도 합니다.
하늘에 가문이 있고 땅에 가문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늘에 가문은 실상이고, 땅에 가문은 그림자입니다.
이게 오늘 본문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조금 어려운 공부가 될 것입니다.
그림자를 가지고 실상을 말해야 되니까요.
영맥은 실상이고 육맥은 그림자입니다.
실상이 본질이고 그림자는 허상입니다.
 
하늘에서 흐르는 것은 무궁한 생명의 법이고,
땅에서 흐르는 것은 죽음이 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것을 붙잡으면 살고 땅에 것 붙잡으면 죽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늘 위는 생명의 법이 흐르고 땅은 죽음의 법이 흘러요.
생명은 실상이고 죽음은 허상입니다.
이렇게 되면 실상과 허상 간에는 심판성이 담겨져 있음이 되겠지요.
 
그래요.
장차 허상인 이 세상은 불 타 버려요.
하늘에 실상을 다 보여주고 나면 허상은 철거가 되어요.
철거가 될 껍데기를 붙잡고 있으면 안 되겠지요.
껍데기를 통해서 알맹이를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껍데기를 알맹이인줄 붙잡고 있으면 슬피 울며 이를 갈 날이 와요.
 
껍데기를 알맹이인줄 붙잡고 있다가 망한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처럼 껍데기를 알맹이라고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교회 안에는 땅의 것인 그림자를 붙잡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세속적 가치를 쫓아가고 있어요.
 
중요하니 다시 말합니다.
이 세상엔 보이지 않는 영맥과 보이는 육맥이 있어요.
영맥과 육맥이라 함은 영적인 줄기와 육적인 줄기라고 했습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 아론과 멜기세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론은 육맥이고 멜기세덱은 영맥입니다.
아론은 땅이고 멜기세덱은 하늘이에요.
 
내가 지금 어느 줄기를 붙잡고 있는지 확인하세요.
어느 열차를 타고 있는지 확인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아론의 열차를 타고 있는지 멜기세덱의 열차를 타고 있는지 확인하라는 말입니다.
아론의 열차는 지옥으로 가고, 멜기세덱의 열차는 천국으로 가요.
 
멜기세덱의 열차에 타고 있다면 안심하세요.
은하철도 999처럼 천국이라는 안드로메다에 정확하게 인도해 줄 것이니까요.
그럼 우리가 타고 있는 천국행 은하철도 999라는 그 줄기를 살펴봅니다.
 
아론의 반차와 멜기세덱의 반차가 있다고 했지요.
반차를 가문과 같다고 했습니다.
알다시피 아론은 보이는 나라, 이 세상에 속한 나라인 이스라엘의 대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보이지 않는 나라,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늘나라의 대 제사장이에요.
 
이렇게 되면 아론의 가문은 그림자처럼 보이는 땅인 육맥이고, 멜기세덱의 가문은 실상처럼 보이지 않는 하늘에 영맥이 되는 것입니다.
아론은 껍데기이고, 멜기세덱은 알맹이입니다.
 
이걸 묵시와 역사로 이해해 봅시다.
묵시는 완성된 세계이므로 고정되어 있어요.
그러나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어서 변해요.
 
구조적으로 말하면 묵시는 고정되어서 수직적 구조로 짜여 있어요.
역사는 시작과 끝으로 쭉 늘어져 진행되기 때문에 수평적 구조로 짜여서 길게 누워져 있어요.
수직적이란? 마치 십자가처럼 하늘에서 땅으로 쭉 서 있는 것과 같아요.
수평적이란? 작대기의 그림자처럼 길게 쭉 누워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묵시는 창조의 영역이므로 족보가 없고, 역사는 피조 세계라서 족보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론의 계통은 족보가 있지만, 멜기세덱 계통은 족보가 없는 겁니다.
묵시는 창조세계이기 때문에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이 있으라 그러면 툭 툭 튀어나와요.
그러나 역사는 한 줄로 쭉 엮여 있기 때문에 차례와 순서가 있어요.
 
아론의 계통에 속한 제사장들은 역사에 속하였기 때문에 차례라는 순번이 있고 질서가 있어요.
그러나 멜기세덱의 계통에 속한 제사장은 묵시에 속하여서 우발적으로 하늘에서 뚝 뚝 떨어져요.
이들이 구약에서는 선지자들로 나타난 겁니다.
 
아론의 계열은 눈으로 보이니 예측이 가능한데,
멜기세덱 계열은 눈에 안보이니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 툭 튀어 나올지 몰라요.
 
하나님이 그렇게 일을 하세요.
이는 그림자인 육에 속한 역사가 예측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선 누가 멜기세덱 계열인줄 알 수가 없어요.
 
아주 쉬운 것으로 말할게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당시 유대인의 왕은 헤롯이었습니다.
헤롯은 땅에 왕이니 보이는 육의 계통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
그러는 겁니다.
예수님이 멜기세덱 계통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영(靈)의 맥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뜨인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형국입니다.
그러니 육의 계열에서 난리가 나는 겁니다.
이건 인정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길길이 날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이고 헤롯은 아론의 반차입니다.
이 둘은 항상 싸워요.
이런 맥은 구약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계속되어 왔어요.
이스라엘 역사를 역(逆)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현상들이 있었습니다.
항상 두 계통이 공존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면 예수님께 속한 계통과 헤롯에게 속한 계통 간에 서로 갈등 관계로 앙앙거렸을 것이지요.
서로는 갈등관계에 있으니 서로 간에 싸움이 있었겠지요.
이 싸움에서 예수님이 헤롯에게 핍박을 받았듯이 항상 예수님의 계열에 속한 사람들이 헤롯의 계열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았겠지요.
 
이 원리를 모르고 제사장 노릇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툭툭 던지는 멜기세덱의 반차로 주어지는 제사장들을 공격하겠지요.
자기가 진짜 제사장이라고 우길 것이 아닙니까?
진짜 제사장이 오면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진짜를 죽일 것 아닙니까?
그게 바로 예수님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난 겁니다.
구약에선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육에 속한 자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것으로 보여 주었어요.
 
사울 왕하고 다윗을 비교해 봅시다.
사울은 인간들이 세운 왕입니다.
사울은 인간들에게는 합법적인 왕이에요.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세운 하늘에서 툭 떨어진 왕이에요.
누가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겠어요.
사울 계통에서는 절대로 인정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날 뛰는 겁니다.
 
그런데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은 하나님이 세운 왕이란 것을 알아요.
요나단은 아버지 길을 가지 않고 다윗과 같은 길을 가는 겁니다.
지금도 요나단처럼 이걸 아는 사람들이 있어요.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이걸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아론의 반차에 속한 제사장과 멜기세덱의 반차에 속한 제사장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공부이니 이렇게 저렇게 반복 하더라도 이해하고 들으세요.
 
“아론의 반차와 멜기세덱의 반차”를 말하면서
“레위지파와 유다지파”라는 두 지파 이야기를 합니다.
“아론의 반차에는 레위지파”가 있고, “멜기세덱의 반차에는 유다지파”가 있어요.
 
알다시피 레위지파는 율법 아래선 합법적인 정통노선인 제사장 지파에요.
율법 아래서 제사장은 레위지파에서만 나옵니다.
율법이라 함은 보이는 인간들 세상의 계통 즉 육맥이란 말입니다.
 
땅에서는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가 없어요.
오직 레위지파만 할 수가 있어요.
이건 하나님이 법(法)으로 정해 놓은 겁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그러면 당연히 레위계통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계통에서 나오는 것은 전부 이단인 겁니다.
율법 아래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붙잡고 있으면 레위지파 이외 다른 제사장은 용납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론의 반차로 일하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로 일하세요.
이렇게 되면 아론의 반차는 가짜가 되겠지요.
가짜를 왜 두느냐 하면 진짜를 알려주기 위해서예요.
마치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하려고 보이는 세계를 만든 것과 같아요.
하늘에 있는 것을 말하려고 땅에 것을 만든 것과 같단 말입니다.
 
이걸 구원 이야기로 말해 봅시다.
 
레위지파는 율법으로 정한 제사장 지파이지요.
율법 아래서 정통한 유일한 제사장이에요.
땅에서는 레위지파 제사장이 주는 구원만 옳은 구원이 되어요.
 
알다시피 레위지파의 구원관은 율법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율법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율법 외에 다른 구원의 근거를 용납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기 때문이에요.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기들만 구원받는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천국에 가고 나머진 모두 지옥에 간다고 믿고 있었어요.
그래서 누구든지 율법을 건들면 가만두지 않았던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율법은 생명의 근원이었어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 외에 다른 구원관을 제시했어요.
율법 외란? 율법 말고 다른 방법이란 말입니다.
다른 방법이란? 다름 아닌 율법 지키려고 하지 말고 예수를 믿으라는 겁니다.
이건 유대인들이 지켜오던 구원관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말입니다.
이걸 유대인들이 용납 하겠어요?
당연히 못하지요.
 
바울도 율법 아래 있을 땐 이걸 용납 할 수가 없어서 예수쟁이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완전히 바뀌지지요.
이젠 도리어 예수가 구원의 길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젠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겠다고 난리 치는 겁니다.
 
이걸 제사장으로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은 레위지파 이외엔 제사장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율법에 없는 유다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온 겁니다.
율법으로 따지면 유다지파에선 제사장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건 반칙이에요.
 
오늘 본문에선 율법을 받은 모세도 이걸 몰랐다고 합니다.
이건 멜기세덱의 반차는 율법으로서는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세도 메시야가 아니란 말이 되지요.
모세가 메시야가 아니면 모세의 법을 구원의 법으로 붙잡고 있으면 안 되지요.
 
그래요.
모세는 메시야가 아니에요.
장차 오실 메시야를 보여주기 위하여 선택된 그림자에요.
모세의 실체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세요.
그러니 모세의 줄기를 붙잡으면 안 되겠지요.
모세의 실상인 예수님을 붙잡아야 됩니다.
그래야 살아요.
 
다른 말로 모세가 준 율법을 붙잡으면 안 되고 예수님이 주신 믿음(피)을 붙잡아야 해요.
옛 언약(인간 행함)을 붙잡으면 안 되고,
새 언약(예수님 피)을 붙잡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암튼 이스라엘은 율법 아래서 레위지파라는 제사장이 있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유다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왔어요.
유다지파의 다윗 왕이 제사장 노릇을 하였어요.
이렇게 되면 다윗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서 온 제사장인 겁니다.
나중에 예수님도 이 계통으로 오셨어요.
 
다윗 언약에 가면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 직이 하나로 통합이 되어요.
다윗은 왕이면서 제사장이었고 선지자였어요.
이건 율법에 없던 것입니다.
율법에는 왕 따로 제사장 따로 선지자 따로 있어요.
그런데 다윗이 왕이 되고선 다윗이라는 한 인물 속으로 통합이 되어 버린 겁니다.
 
물론 다윗 시절에도 선지자들이 있고 레위계통의 제사장이 있었어요.
이들은 왕을 보좌하는 역할로 있었어요.
다윗 왕에게 세 가지 직임이 통합된 것은 이는 장자 오실 메시야는 다윗 언약을 따라서 온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한 겁니다.
조금 전에 다윗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라고 했잖아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진짜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이걸 알려면 언약을 알아야 해요.
그럼 언약을 간단하게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노아와 언약을 맺었어요.
노아 언약은 다시는 땅에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언약이에요.
 
그런데 이게 아브라함 언약 안으로 들어오면서 달라져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함으로서 나머진 모두가 비 선택된 이방인이 되는 겁니다.
노아 언약 땐 모든 인류가 노아 언약의 혜택 속에 있었어요.
 
그러나 아브라함 언약이 주어지고 난 후에는 이젠 아브라함 계통과 비(非) 아브라함 계통으로 갈라지게 되었어요.
아브라함 후손과 이방인으로 구분이 되어요.
노아 언약에선 구분하지 않던 것이 아브라함 언약 안에선 하나님께 선택 받은 자와 선택 받지 못한 자로 세상이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 후손이 하나의 국가로 형성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를 출애굽 시킵니다.
그리곤 모세에게 율법으로 언약을 맺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모세 언약에선 율법으로 전환이 되어 버립니다.
모세 언약에선 율법으로 진짜와 가짜를 갈라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안에서도 율법 안에 있는 자와 율법 밖에 있는 자로 갈라내는 겁니다..
누구든지 율법을 지키면 이스라엘이 되고, 율법을 어기면 이방인처럼 버림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 언약 안에선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어지고, 오로지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로만 구분해 버려요.
 
그런데 이게 다윗 언약에 와서는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로 나누지 않고 다윗 편에 속하였느냐 아니면 사울 편에 속하였느냐 로 다윗이라는 한 인물 중심으로 갈라집니다.
이젠 우두머리가 누구냐로 복과 저주가 임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개인을 상대하지 않고 왕을 상대하는 겁니다.
왕이 개인을 책임져 주는 방식으로 되었어요.
누구든지 다윗의 편에 서 있으면 구원을 받고 사울 편에 서 있으면 저주에요.
 
결국 다윗 언약은 대신 책임져 주는 어느 한 사람을 지목하여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에게로 완성이 됩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안 믿으면 저주에요.
결국 모든 언약은 예수님의 새 언약 안으로 귀속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 언약이 주어졌는데도 옛 언약식의 구원관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겠지요.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이 옛 언약식 구원관을 가지고 있다가 망한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러지요.
하나님이 율법 외에 다른 의를 주셨다고 하지요.
율법 외에 다른 의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입니다.
이젠 의가 주어져요.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는 인간 쪽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요.
즉 믿음을 선물로 주신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로 구분이 되지요.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면 구원받고 안 주면 못 받는 겁니다.
마치 아브라함처럼 선택해 주면 구원받고 안 해 주면 못 받는 겁니다.
 
그러니 새 언약에선 예수라는 한 사람으로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으로 갈라지는 겁니다.
믿음이 왔는데도 율법대로 살았다는 자기 행함을 들고 나오면 안 되어요.
그건 폐기된 옛 것을 붙잡고 오는 겁니다.
 
지금까지 내용이 감이 잡히시는가요.
오늘은 어려운 공부니 보고 또 보고 완전히 이해하세요.
너무 중요하니 이렇게 또는 저렇게 잔소리같이 반복하는 겁니다.
 
언약을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노아 때에는 온 세계를 말하다가,
아브라함 때는 한 민족으로 말하다가,
모세 때는 율법으로 말하다가,
다윗 때는 한 사람으로 집중이 되어버리지요.
 
구약에선 최종적으로 노아로부터 주어진 언약이 다윗이라는 한 사람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겁니다.
다윗 언약은 장차 오실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다윗 언약에 따라서 오셨다고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맥(脈)을 따라서 오셨다는 겁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께서 아론의 반차를 따라 일하시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에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젠 예수 안이냐! 예수 밖이냐! 로 나누어버렸어요.
예수 믿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원이고, 예수 밖은 무조건 저주에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언약이 주어질 때는 항상 기존의 질서를 깨트리면서 주어진다는 겁니다.
 
이걸 놓치면 안 되어요.
새 언약이 오면 옛 언약은 깨트려야 해요.
옛 언약을 깨트리면서 새 언약이 주어진단 말입니다.
 
이를 오늘 분문에선 전엣 계명이 무익하므로 폐하여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태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하셨어요.
새 시대가 왔는데 옛 시대 법을 붙잡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로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세상에 공표했어요.
이젠 예수의 피 외에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아요.
 
이렇게 되면 기존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반발을 하겠지요.
옛 것으로서 자기 생명을 그대로 연장하려고 새 것을 안 받아 들이고자 하겠지요.
마치 민주당이 한나라당 이명박 정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과 같아요.
자기들이 계속해서 정권을 잡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계속하여서 딴지를 거는 겁니다.
 
이처럼 항상 새로운 언약은 옛 언약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어 있어요.
참 재미있지요.
새 언약은 옛 언약을 깨트리려고 하고 옛 언약은 새 언약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죽이는 겁니다.
정권을 안 빼앗기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서 새 언약을 축출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터진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아까 말씀드렸지요.
육맥은 순서가 정해져 있어서 그 차서(次序)대로 주어진다고 했지요.
그러나 영맥은 우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육의 질서를 깨트리면서 다가와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세운단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 쪽에선 황당한 겁니다.
헤롯왕처럼 내가 유대인의 왕인데 어느 놈이 왕이란 말이냐! 라고 반발하는 겁니다.
 
이러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육맥과 영맥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몰라서 그래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안다면 진짜가 오면 가짜가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하잖아요.
나는 그림자이다!
나는 껍데기이다!
나는 가짜다!
난 언제든지 진짜가 오면 자리를 비켜준다! 라고 하여야 하잖아요.
주인님 어서 오세요! 그래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 자리를 비켜주기 싫은 겁니다.
너무 황홀하거든요.
온갖 세상의 영광이 다 있는데 그걸 쉽게 내어 놓겠어요.
안 내어 놓아요.
 
도리어 자기가 진짜이고 저 놈은 가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법으로 자기 정당성을 내 세우는 것입니다.
봐라! 하나님이 우리보고 제사장 하라고 했잖아!
뭐가 문제인데!
 
지금 식으로 말하면
봐라! 하나님 말씀을 지키라고 하잖아!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잖아!
그래서 난 성도들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성화하라고 가르치는데 무슨 문제냐!
난 성경대로 가르쳤는데 무슨 문제냐! 라고 덤비는 겁니다.
 
이게 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몰라서 그래요.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몰라서 그래요.
그러니 진짜와 왔는데도 비켜주지 않고 가짜가 진짜를 죽이는 악을 도모하게 된 것입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해야 해요.
하나님은 말씀으로 넌 죄인이야!
넌 내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인이야!
그러니 넌 저주 받아 지옥으로 갈 놈이라고 합니다.
 
그럼 우리는 맞습니다!
난 죄인입니다.
나에게선 의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함엔 선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에게만 의가 있고 선이 있습니다.
우린 가짜입니다.
예수님만이 진짜입니다.
난 예수를 위하여 언제든지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난 살아야 돼!
난 행복하여야 해!
내 인생은 나의 것이야!
내가 내 주인이야! 라고 하잖아요.
 
이렇게 되면 주객이 전도가 되어서 예수는 나의 이용대상물로 전락하게 됩니다.
예수를 위한 내가 아니고, 나를 위한 예수가 된단 말입니다.
이러면 내가 예수를 죽인 유대인이 되는 겁니다.
무섭지요.
 
자! 다시 정리합니다.
두 제사장이 있습니다.
율법으로 난 “레위지파의 제사장”과 율법이 있기 전에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이 있습니다.
레위지파는 인간들 세상의 제사장이고 멜기세덱은 하늘나라 제사장입니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멜기세덱이 먼저 있었으니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이 원본인 셈입니다.
왜냐하면! 레위지파는 멜기세덱보다 430년이나 후에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멜기세덱은 원본(진짜)이고, 레위지파는 복사본(가짜)이 되는 셈이지요.
멜기세덱이 오리지널이고 레위지파는 짝퉁이에요.
 
이렇게 되면 레위지파는 멜기세덱을 보여주기 위하여 있는 지파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이런 제사장이 계십니다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에요.
레위지파가 멜기세덱을 보여주기 위하여 있다는 말은 멜기세덱은 감추어져 있다는 말이지요.
멜기세덱이 세상에 있으면 레위지파를 내 세울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그냥 멜기세덱이 쭉 하면 되잖아요.
그러나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어요.
 
여러분 멜기세덱은 어느 나라 제사장이라고 했습니까?
 
히 7:1절.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살렘 왕이면서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하지요.
그럼 살렘이라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란 말이지요.
하나님나라가 이 세상에 눈에 보이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이지요.
그럼 신약에서 하나님의 제사장이 누구입니까?
애수님이지요.
그럼 예수님 나라는 어디에 있나요?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럼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속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나라의 모델하우스를 하나 만들어 놓았어요.
그게 바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고 신약에서는 교회예요.
그러니 이스라엘(교회) 속에는 하늘나라 모형들이 가득 들어 있는 겁니다.
 
이걸 제사장에게 적용하면 레위지파 제사장 속에 멜기세덱이라는 하늘나라 제사장의 모형을 담아 놓으신 겁니다.
레위지파에 속한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백성들의 죄를 열심히 사함 받도록 제사를 지내 주잖아요.
이는 곧 하늘나라에 있는 진짜 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자기백성들을 위해서 자기 피로 제사지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자기 피로 우리 죄를 위하여 열심히 변호하고 계세요.
자기 백성들이 죄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자기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요일 1:7-10절.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 2:1-2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사도요한이 그럽니다.
우리가 죄 안 짓고 산다고 하면 그 사람은 스스로 속이는 자이고 진리 가운데 있는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악 중에 출생하여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용서해 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사도요한의 바램은 너희가 죄 안 짓고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꿈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죄를 짓더라도 낙심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해서 예수님이 제사장이 되어서 자기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변호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대신 간구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레위지파의 제사장이 되어서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레위지파의 제사장들도 이런 일을 하라고 세워놓은 거예요.
목사도 이 일을 하라고 세워 놓았어요.
 
이 시대 목사들이 흔히들 자기는 레위지파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가짜고 예수님이 진짜라고 알려 주어야지요.
그래야 레위지파 제사장을 세운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가 예수의 자리에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 안 되지요.
 
다시 말합니다.
레위지파 제사장은 진짜 제사장이 아니에요.
진짜 제사장은 예수님이라고 알려 주기 위해서 있는 자에요.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에요.
예수가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그림자 제사장인 겁니다.
예수님이 참 제사장이 되어서 성도를 위하여 자기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변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라고 있는 자에요.
 
목사가 자기가 참 제사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도해 준다고 하면 안 되어요.
만약 어느 목사가 대신 기도해 준다고 하면 사기꾼으로 보세요.
그건 목사가 아니고 무당(巫堂)이에요.
특히 기도원 원장들이 자기가 무슨 중보자가 되는 냥 기도해 준다고 하면 신접(神接)한 무당이라고 보면 틀림없어요.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인간에게 맡긴 적이 없어요.
예수님이 직접 하세요.
예수님이 직접 자기 백성을 돌보고 계신단 말입니다.
목사는 이 사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지신 분만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할 수가 있어요.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셨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에수님의 기도만 받으시는 것입니다.
누가 중보기도 해 준다고 하여도 속지 마세요.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해 준다고 하여도 속으면 안 되어요.
기도해 준다고 하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면 저 인간 마귀 들렸구나 생각하시고 피하세요.
물론 성령께서 감동케 하셔서 기도할 수 있어요.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기도는 내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라고 생색내지 않아요.
아무도 모르게 해요.
 
성령님이 하게 하시는 기도이니 내가 하였다고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도 저희 교회 성도님들을 위해서 기도해요.
또 블로그에 드나드는 분들을 위해서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시면 기도해요.
하지만 아무도 몰라요.
 
누가 저에게 목사님 기도 좀 해 주세요!
그러면 저는 당신이 믿는 예수는 죽었냐고 합니다.
내가 무당이냐고!
물론 기분 나쁘지 않도록 알아듣게 말하지요.
예수님이 진짜 제사장이라고 알려 주어요.
 
목사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이 자기가 예수를 대신하고자 하는 겁니다.
모든 교인들을 자기 손을 거쳐서 예수에게 나아가라고 하고자 해요.
자기가 기도해 주면 응답이 오고!
자기가 축복해 주면 복이 넝쿨채 굴러오는 것처럼 말해요
교인들에게 자기 존재감을 심어 놓아서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에요.
 
목사는 모형이에요.
실체는 하늘나라에 따로 있어요.
실체가 예수님이라고 알려주기 위해서 목사를 세워놓은 겁니다.
 
이걸 바울은 중매쟁이라고 했어요.
중매쟁이는 열심히 성도를 예수라는 신랑에게 보내면 되어요.
저 분이 바로 당신 신랑이라고 말해주면 된다고요.
그러면 중매 잘 섰다고 양복이라도 한 벌 해 주면 고맙습니다!
그러면 족한 거에요.
 
중매쟁이가 자기가 신랑 노릇하려고 하면 안 되지요.
그런데 이 시대 거짓 목사들은 전부 자기가 신랑이 되어서 교인들을 차지하고 있어요.
이런 자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제일 먼저 붙잡아서 유황불 속에 집어넣는다고 했어요.
 
세상에서 중매 잘 서면 술이 석 잔이고 잘못서면 귀싸대기 석 대라고 하지요.
섣불리 목사노릇 하고자 하면 큰일 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한 겁니다.
 
가짜가 되면 진짜 행세하고 싶은 유혹이 항상 넘실거리기 때문에 무서운 겁니다.
마귀가 자꾸만 진짜행세 하라고 꼬셔요.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을 주리실 때 마귀가 찾아 와서 하는 말을 보세요.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한번 멋지게 성공해서 세상에 데뷔하라고 하잖아요.
네 이름을 한 번 떨쳐 보라고 하잖아요.
마귀의 논리는 하나님 아들이 비실비실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교회가 그렇게 작아서야 되겠느냐!
빨리 부흥시켜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능력을 보여 보라고 해요.
 
마귀가 말하는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라는 이 말에 수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졌어요.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겠다고 하다가 다 넘어 졌어요.
큰 교회 꿰차고 음녀처럼 포도주에 취해서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어요.
 
지금도 마귀가 목사들에게 달콤한 말로 야! 너 대단하다!
너 유명한 목사잖아!
네 능력을 한 번 보이라고 부채질하고 있어요.
마귀에게 넘어간 자들은 예수님도 누려 보지 못한 호사스러운 영화를 누리고 있는 겁니다.
 
저도 과거에 한 달을 금식한 적이 있어요.
능력 좀 받으려고 한 달 동안 주리며 기도했어요.,
주여 내게 능력을 주소서!
밤이슬 맞아 가면서 기도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찔해요.
그 때 만약 하나님이 제 기도를 들어주셨으면 전 지금 이런 십자가 복음 전하지 않을 겁니다.
교회 부흥시켜서 예수님 부럽지 않게 왕 노릇하면서 호의호식하면서 살고 있겠지요.
물론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고 말이에요.
 
그런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제 기도와 반대 되는 일들을 벌리셔서 지금 여기에 서 있는 겁니다.
육신은 힘들고 어렵지만 마음만은 천국입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돈을 주지 않고 복음을 주세요.
 
좌우지간 예수를 빙자하여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것들은 전부 가짜에요.
자기가 무슨 영험한 종이라도 되는 냥 거드름 피우는 자는 다 사기꾼이라고 보면 틀림없어요.
암튼 이해하고 걸러서 들으세요.
 
다시 레위지파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레위지파는 멜기세덱보다 430년 후에 생겨났습니다.
그러니 레위지파로 난 제사장들은 멜기세덱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생겨난 제사장이란 말입니다.
진품(眞品)이 아니고 가품(假品)이에요.
 
이렇게 되면 레위지파 제사장들은 난 가짜이고 진짜는 하늘에 있습니다! 라고 하여야 하지요.
날 보지 말고 예수님을 보세요!
그래야 한단 말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일하시는 비밀을 안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래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걸 몰랐어요.
자기들이 진짜인줄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는 가짜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자 눈이 뒤집어 져서 진짜 보고 넌 가짜야 하고 죽여 버린 겁니다.
자기들이 진짜인줄 알았기 때문에 진짜로 하늘에서 진품이 왔는데도 몰라보고 죽여버린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짜를 돌 하나도 돌 위에 덧놓이지 않게 완전히 멸망시킨 것입니다.
 
AD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이 70만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침공하여서 가짜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을 초토화 시킨 겁니다.
이 때 예수님의 예언대로 그 화려하던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덧놓이지 않을 정도로 불살라져 버렸어요.
 
성전 창고에 금붙이들이 불에 녹아내리면서 벽돌 사이에 끼여서 그 금을 캐낸다고 벽돌 하나하나 해체시켰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들이 이 짓거리들을 하고 있어요.
 
몇 일전 서울 세미나를 하고 오는 길에 어떤 분이 그럽니다.
왜 서울에 제자 훈련하는 큰 교회 있잖아요.
성전을 짓는다고 헌금을 거두었는데 1100억이나 걷혔대요.
예상액보다 배나 걷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번 더 각출한대요.
아마 예루살렘 성전처럼 금으로 화려하게 지으려나 보아요.
 
이런 사람들에겐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 허상을 실상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겁니다.
믿어지는 것이 없으니 눈이 보이는 것을 붙잡겠다는 겁니다.
 
왜 교회를 호화롭게 지으려고 하겠어요.
자기 이름을 남기고 싶어서예요.
사울 왕처럼 자기 전적비(戰績碑)를 세우고 있는 겁니다.
 
제자훈련 백날하면 뭡 합니까?
본질이 레위지파 제사장 계열인데!
예수님 제자 훈련시킨다고 하면서 강도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과부가 15억 전 재산을 헌금 했는데 아들과 마찰이 생겨서 난리랍니다.
 
참 우습지요.
여러분은 안 그럴 것 같지요.
아니요.
그 집단 속에 있어 보세요.
집단 최면에 걸려서 똑같이 해요.
그러니 그런 집단 속에 속하지 않음을 감사하세요.
진짜와 가짜를 분별할 수 있는 은혜를 받은 것에 감사하세요.
 
다시 본문을 살펴봅시다.
 
멜기세덱은 세상에 없다고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서 오셨다고 합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셨다는 것은 기존의 방식으로 구원하시지 않는단 말입니다.
레위지파 제사장들처럼 율법으로 구원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율법이 뭡니까?
지키면 구원이고 안 지키면 저주에요.
구약에서는 율법 밖에선 구원의 길이 없었어요.
반드시 율법을 통하여서만 주어졌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하는 구원은 인간의 방법을 초월하고 하셨어요.
인간이 뭘 하여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주어요.
이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가 고침 받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에 구원의 방법은 누구든지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는 방법이었어요.
베데스다 못은 구약 율법교회를 상징해요.
 
베데스다의 구원 법은 “물 동함 + 못에 뛰어드는 내 행위 = 구원” 입니다.
베데스다식 구원이 되려면 첫째, 천사들이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해 주어야 해요.
그리고 둘째로는 물이 동할 때 내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니 신인 협동이 되어야 온전하게 고침을 받을 수가 있는 겁니다.
 
이게 율법적 구원관이에요.
하나님이 율법을 주면 인간은 그 율법을 지킴으로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38년 된 병자에요.
이 병자는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물이 동해도 그냥 멀뚱히 바라만 보아야 하는 그림의 떡인 겁니다.
 
38년 된 병자는 죄인을 상징해요.
죄인은 구원의 길을 알려 주어도 갈수가 없어요.
율법을 지키라고 해도 율법을 지켜 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죄인은 태생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자기 죄를 깨달아야 하는데 그걸 지켜서 의로워 지려고 했어요.
실제로 그런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율법을 지켜서 거룩하고 의로워지고자 한 겁니다.
율법적 구원관은 신의 은총과 인간의 반응이 합일되어야 온전한 구원이 되는 것이에요.
 
이건 마치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과 같아요.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 뜻대로 살아서 거룩하게 성화하여야 한다고 하잖아요.
말씀대로 살아야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하잖아요.
 
봐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잖아!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완전히 베데스다 못가의 구원 법이지요.
 
그러니 항상 불안한 겁니다.
이러다 구원에서 제외 되는 건 아닌가! 불안해요.
예수 믿는 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에요.
 
그런데 어쩝니까?
인간은 중풍병자와 같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걸요.
38년 된 병자와 같이 마음은 못에 먼저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데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않으니 어찌합니까?
 
이게 구약 율법교회의 특징이에요.
다윗처럼 죄 안 짓고 싶었는데 모친이 죄악 중에서 나를 출생시켜서 죄를 이길 수가 없어요.
바울의 고백처럼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싶은데 이 몸뚱이가 그 일을 해 내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육신이 살아내지를 못해요.
우리가 바로 38년 된 병자에요.
38년 된 병자에겐 물이 동하여도 스스로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구원은 그림의 떡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지금까지 지켜오던 틀을 깨트려 버립니다.
그냥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합니다.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에게 하는 말이 아니 난 저 연못에 안 들어갔는데요?
그러자 예수님이 들어갈 필요가 없어!
그냥 가!
그러는 겁니다.
이에 병자가 주님 지금까지 이런 법은 없었는데요?
 
그래!
이제부터 법이 바뀌었어!
이제부터 다른 법으로 고쳐줄게!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전엣 계명은 무익하므로 폐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율법으로는 아무 것도 온전케 할 수가 없어서 폐하였다는 뜻입니다.
애초부터 율법 속엔 온전케 하는 것이 들어있지 않았어요.
온전한 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예수님에게만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일방적으로 구원을 완성시켜 버렸어요.
내가 다 이루었다 선포했어요.
너희들 율법 안 지켜도 돼!
율법을 지키든 안 지키든 상관없이 내 피를 믿음으로 구원시켜! 그럽니다.
 
이게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에선 인간은 제외되었어요.
하나님이 인간과 상대하지 않아요.
예수님하고만 상대하세요.
이제 예수님이 데리고 오는 사람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원해 주세요.
 
새 언약에선 인간이 할 일이란 없어요.
넌 그져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 줄게!
그럽니다.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가에 38년 된 병자를 보고 그냥 자리 들고 가라고 합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기가 예수님을 청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 오셨어요.
그리고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일방적으로 고쳐 주셨어요.
38년 된 병자의 고침 속에는 자기 것이란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아요.
온통 예수님 것만 담겨져 있어요.
 
성도의 구원이란 이런 겁니다.
예수님이 다 하셨어요.
우리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좋은 신앙은 자기 구원 속에 예수님 것만 빛이 나도록 하는 겁니다.
예수님만 자랑 되어져야 하는 겁니다.
 
암튼 예수님은 지금까지 경험되어보지 못한 전혀 낯선 구원을 38년 된 병자를 통해서 하셨어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반칙이라고 아우성입니다.
지금까지 기다린 우리는 뭐가 되느냐!
고쳐 주려면 다 고쳐 주어야지!
왜 저 사람만 고쳐 주느냐! 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건 내 마음이라고 합니다.
나는 내가 불쌍히 여길 자만 불쌍히 여긴다고 합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되면 예수가 안 맞아 죽고 배기겠어요.
그래서 터진 사건이 십자가에요.
 
그래서 아론의 반차에 속한 레위지파 제사장들이 하는 율법적 제사법은 육체와 관련된 법이라고 합니다.
육체와 관련이 되었다는 것은 가짜란 말입니다.
생명이 없다는 말이에요.
 
레위지파 제사장들은 장차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실 별다른 제사장이 하실 일을 보여주는 역할극을 했어야 했어요.
그렇다면 레위지파 제사장은 생명은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실 별다른 제사장에게만 있다고 증거하여 주었을 겁니다.
 
그것이 레위지파 제사장이 하여야 할 일인 겁니다.
그럼 중매 잘하였다고 상을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소경이라서 이걸 몰랐어요.
알았다면 우리는 가짜입니다! 라고 했을 거예요.
몰랐으니 율법을 고집한 겁니다.
 
이스라엘이 누구의 후손입니까?
아브라함의 후손이지요.
그럼 아브라함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나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받았지요.
 
그럼 하나님의 구원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까요?
아브라함을 선택하였듯이 이루어질 것이지요.
이는 진짜 하나님 백성은 아브라함처럼 선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아브라함의 구원관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아!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택으로 구원 하셨지!
우리도 선택으로 구원 받았어!
이 정신을 알아야 진짜 아브라함 후손인 겁니다.
 
이스라엘의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으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있어요.
우린 아브라함 후손이다!
그러면 안 된단 말입니다.
혈통 주장하다가 망한다고 알려주기 위해서 있어야 해요.
 
그런데 구약 이스라엘은 어떤 민족입니까?
아브라함 후손이지요.
혈통으로 되었잖아요,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그러지요.
우린 아브라함 후손이다 자랑하잖아요.
그러자 예수님이 아브라함 후손 좋아하네!
너희는 마귀새끼야! 라고 합니다.
 
혈통 들고 나오는 걸 보니 마귀새끼란 말입니다.
진짜 아브라함 후손들은 혈통 들고 나오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 들고 나온다는 겁니다.
세례요한도 그랬잖아요.
너희가 속으로 우린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너희가 아브라함 후손이면 여기 있는 돌들도 아브라함 후손 된다고 하잖아요.
 
이걸 신앙생활로 비유하면 인간의 가능성을 앞세우고 나오면 전부 가짜에요.
난 목사다!
난 충성봉사 했다!
난 정직하게 살았다!
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 라고 나오면 전부 가짜에요.
 
인간이 구원 받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된다고 하여야 해요.
우리에게서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피에게서만 나온다고 하여야 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는 자가 참된 이스라엘인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표면적(表面的) 유대인”과 “이면적(裏面的) 유대인”이 있다고 한 겁니다.
유대인 속에 또 유대인이 있다는 말이에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 안에 또 교회가 있다는 겁니다.
교인들 속에 성도가 있어요.
표면적 유대인은 아론의 반차이고 이면적 유대인은 멜기세덱의 반차에요.
 
누가 아론의 반차를 탄 교인이냐 하면 자기 의(義)를 자랑하는 자에요.
반대로 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타고 있는 성도냐 하면 예수님 피를 자랑하는 자에요.
인간의 행함을 자랑하는 자는 레위 계통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자랑하는 유다 계통이에요.
 
오늘은 반복되는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점검해 보세요.
난 어느 반차의 제사장 뒤에 서 있는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자랑되어지면 당신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타신 분입니다.
그럼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서 우리를 구원케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는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에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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