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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36강. 내 백성을 손대지 말라 (창 20:1-18)

by coroa 2021. 4. 15.

 

♣ -.36강. 내 백성을 손대지 말라 (창 20:1-18).-

-.정낙원 목사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다뤄가시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록한 역사입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알려 주셨고,

신약은 교회를 통해서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늘나라의 비밀을 교회를 통해서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백성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성경은 배타성을 띠고 있어요.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후손만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시작 자체가 타 민족과 배타성을 띠고 출발하고 있어요.

기독교도 마찬가지에요.

 

이게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단초가 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다 천국에 간다.

그러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 믿는 자만 천국에 간다.

그런단 말입니다.

 

이러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욕을 하지요.

에이~ 나쁜 놈들 어떻게 자기들만 천국에 가고,

다른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고 하느냐고 신경질을 내면서 욕을 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욕을 해도 우리는 그들을 욕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채색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같아요.

다른 형제들은 다 무명 바지를 입고 있는데 야곱이 요셉에게만 색동저고리를 입힌단 말입니다.

그럼 요셉은 자연히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버려지는 아픔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아도 그들을 미워 할 수가 없어요.

왜냐, 자기는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그래요.

세상에서 요셉처럼 서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어요.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미워하고 욕을 하더라도 신자들은 맞받아치면 안 되어요.

미움과 핍박을 고스란히 받아야 해요.

구원 받은 죄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던가요?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찜 당하니까 찜 당하지 못한 자들이 회를 내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운명이에요.

 

구약 이스라엘이 왜, 애굽의 바로에게 미움을 받는가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아니었으면 미움 받지 않았어요.

하나님 백성이라는 죄로 미움을 받고 종살이 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 사실을 이야기 해 주고 있어요.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간섭을 해 가셨는지를 알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려 주시려고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에게 성경을 주셨어요.

이미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에 성경을 주어서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어떻게 구원했는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내가 이런 은혜를 입고 사는구나!

내가 엄청난 이미 복을 받았고 지금도 말 할 수 없는 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그 은혜의 영광을 오고 오는 세대 속에 찬미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울 때 어려서부터 효도해라, 효도해라 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 일 때는 아무리 효도를 가르쳐도 모릅니다.

효도는 가르쳐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가르치면 효도가 어떤 것인지 지식적으로는 알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니 지식이고 관념이에요.

진짜 효도는 자신이 시집가고 장가가서 부모가 되어야 할 수가 있어요.

자식을 키우면서 내가 부모의 심정이 될 때 효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효도는 가르쳐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면 자연히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은혜를 찬미하라, 감사하라 이것은 말로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직접 하나님과 부대끼면서 알아가야 합니다.

 

제가 늘 얘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남이 만난 예수는 소용이 없고 내가 만난 예수가 있어야 한다고,,,,

제가 만난 예수를 백 번 이야기 해 줘도 여러분들이 만난 예수가 없으면 제가 말하는 예수는 남의 예수가 됩니다.

이런 걸 그림의 떡이라고 합니다.

남에게 들은 예수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만난 예수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성경 속의 예수를 나의 예수로 만나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한 것입니다.

증인이란? 경험한 자들 말합니다.

예수를 만난 경험이 있어야지만 증인이 되어요.

알다시피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령으로만 알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알려주는 예수님이 있어요.

그럼 우리는 성령께서 알게 해 주시는 예수를 증거하게 됩니다.

이럴 때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난 그 예수를 주변의 사람들에게 증거를 하셔야 합니다.

 

우리 목사님이 그러던데,,,,

어느 집사님이 그러는데,,,

이러한 카더라 통신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남이 만난 예수를 들어서 아는 것을 지식이라고 합니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이 만난 하나님을 기록한 책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도 이 성경이 지금 나에게 무엇이라 말해 주고 있는지를 보셔야 합니다.

 

아브라함 사건을 통해서 지금 나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주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림의 떡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만난 그 하나님이 내가 만난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오면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걸 처소라고 합니다.

 

처소란? 집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우리를 한 집안에 거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도를 하나 되게 만들어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성령이 거하는 성도는 성경을 남의 이야기로 듣지 않습니다.

자기 이야기로 듣습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인물이 타자가 되면 안 되고 내가 되어야 합니다.

광야에 나와서 하나님을 원망했던 그 백성이 내가 되어야 하고,

그럼에도 언약 때문에 용서받고 구원받은 것도 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내 사건으로 보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그랄에 내려갔다가 그 아내 사라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겁탈을 당할 처지에 놓였을 때 꿈에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서 혼을 내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사라를 지켜주는 이야기입니다.

아비멜렉은 사라를 건들었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온 나라 여자들이 태가 닫치는 일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하나님에게 난 사라가 남편 있는 여자인줄 몰랐다고 하면서 억울하다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너를 위하여 기도해야 네가 산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잘못했다고 하면서 제물을 줍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여서 아비멜렉도 살고 닫혔던 태가 열리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7절을 보세요.

 

7절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찌니라”

 

17-18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18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이건 엄청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아비멜렉과 같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을 아브라함처럼 기도 해주는 선지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는 분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이러면 오늘 본문은 예수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하여 기도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게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살 수 있습니다.

 

구약엔 두 부류의 선지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궁중 선지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선지자입니다.

 

궁중 선지자들이 대부분 거짓 선지자 노릇을 했어요.

궁중선지자 중에서도 이사야 같은 선지자도 있으니까 궁중 선지자는 다 나쁜 놈이다 그러면 안 되어요.

이사야는 귀족 출신이고 궁중에서 자랐어요.

그런데 참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물론 대 다수의 궁중 선지자들이 나쁜 놈들이었어요.

대부분의 궁중 선지자들은 정권의 하수인으로 왕의 비위를 맞추면서 삯꾼 노릇을 했어요.

백성들이 신앙의 타락은 항상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궁중 선지자들은 사람 입장에서 말하지만, 참 선지자들은 하나님 편에서 말해요.

 

이 시대도 그래요.

대 부분 타락한 목사들은 궁중선지자들과 같이 제도로 만들어진 목사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교인들 등쳐먹고 살아요.

한국 교회 안에서는 신학교를 통해서 목사 안수를 받는 것이 하나의 과정이에요.

워낙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았다고 하면서 이상한 짓을 하는 이단들이 많이 나타나니까 신학교는 최소한의 이단을 걸러내는 장치 일 수는 있어요.

그렇다고 신학교를 나오면 모두가 다 참 선지자는 아닌 겁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야 해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어 선택이 된 선지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된 참 선지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지금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나에게 선택을 입은 자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비멜렉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넌 이런 존재야…

넌 하나님의 선지자야 라고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 본문의 사건이 동원이 된 것입니다.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행한 선지자의 모습은 장차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예표하고 있는 겁니다.

진짜 선지자는 예수님입니다.

아브라함은 진짜 선지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예표적 인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그림자라 하고 신약은 실체라고 합니다.

구약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하나의 예표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이걸 외국영화로 비유하면

구약은 영화의 그림과 같은 것입니다.

내용을 알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자막이 있어야지요.

 

영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림만 보면 모릅니다.

우리는 자막을 통해서 화면에 나타난 그림의 내용들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은 그림과 같고 신약이 자막과 같아요.

신약을 통해서 구약을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어요.

그러니까 성령이 성경을 해석해 주어야지만 그 진의를 알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자막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했던 성경해석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이전에는 구약은 그냥 문자적으로만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는 전부 영적으로 해석했어요.

구약이 전부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로 해석이 되더란 말입니다.

우리도 구약 속에서 예수님을 끄집어내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예수님의 사건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사건도 예수님 사건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장차 오실 진짜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서 기도를 하니까 아비멜렉이 살았고 여인들이 나음을 입고 생산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을 실제적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기도를 하십니까?

자기 백성들이 지금 죄 아래 가둬져 있기 때문에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잘나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은혜가 됩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전에 아브람이 한 일이 기억이 납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25년 전에 오늘 본문과 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때마침 그 땅에 기근이 들어서 남방으로 옮기다가 애굽까지 내려갑니다.

거기서 아브람의 아내인 사래가 바로 왕에게 겁탈을 당합니다.

 

창세기 12장의 사건과 오늘 본문인 20장의 사건은 똑같은 사건인데 하나의 차이점 있습니다.

12장에서는 사래가 바로에게 겁탈을 당해 버립니다.

그러나 20장에 와서는 하나님이 막아주십니다.

25년 전에는 왜? 사래가 바로 왕에게 겁탈을 당하는데도 가만 두었으며,

25년 후인 지금은 왜? 사라가 아비멜렉에게 겁탈 당하는 것을 막아주셨을까요?

 

왜 그럴까요?

이건 뭔가를 계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엔 엄청난 비밀이 있습니다.

무엇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은 가나안으로 들어 와서 25년 동안 엄청난 일들을 겪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할례를 받은 것과 이름이 개명당하는 것입니다.

할례란? 죽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름이 바꿔치기를 당한 것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과 사래로 살던 사람은 옛 사람을 상징하고

가나안으로 와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된 것은 새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25동안 죽었다가 살아나는 일들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25 년 전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는 ‘아브람’과 ‘사래’로 나왔습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이름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 와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과 사라로 이름이 바뀝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버지가 바뀐 것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성도를 상징합니다.

이러면 성도들에게도 두 아버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도 두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창세전 언약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옛 사람이 있고 새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옛 사람 일 때는 얼마든지 마귀로부터 유린당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이걸 언약으로 봅시다.

아브람과 사래는 옛 언약인 율법 아래 있는 것을 말하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새 언약인 은혜 아래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우리가 책임을 지고 은혜 아래서는 예수님이 책임을 져 주십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사단의 참소를 막아 낼 길이 없습니다.

그대로 당합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있으면 예수님이 변호하고 지켜 주십니다.

 

구원이 뭡니까?

나를 대신해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신 것입니다.

이걸 보혜사라고 합니다.

 

요한 1서 1장 10절부터 2장 2절을 봅시다.

 

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사도 요한이 내가 너희들에게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죄 안 짓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죄 짓지 말고 살아라!

그러나 죄 아래서 난 육신을 가지고 사는 동안은 죄를 이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희들이 설령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희를 위하여 대언하는 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너희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대언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을 근거로 대언을 하는가 하면 당신의 죽음을 근거로 해서 대언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대언이란? 변호한다는 뜻입니다.

왜? 변호할까요?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죄를 안 지을 것 같으면 대언자로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성도들의 대언자로 있다는 것은 성도들이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우리에게서 죄 값을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저 놈들 죄 값을 내가 대신 지불을 했다고 합니다.

이걸 대속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우리를 위하여 대속 제물로 값을 치루었다는 것입니다.

대속 제물이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어 주신 것을 말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화목 제물이라고 합니다.

화목 제물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대신 죽어 주심으로 인해서 아버지와 죄인 간의 막혔던 담을 헐어 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를 다하셨습니다.

첫째는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죽어 주셨고,

둘째는 예수님의 대신 죽어 주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로 인해 막혔던 담이 허물어 져서 이제 소통이 되게 된 것입니다.

교제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이 땅에 살면서 죄를 안 짓고 온전히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육신이 연약해서 죄 지을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 낙심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사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정죄로부터 자유한 자입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비록 범죄하여 참소 당할 일이 있다 할지라도 절대 낙심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변호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게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들의 정체성입니다.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의 담대함입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땐 정죄 당하였어요.

그러나 은혜 아래서는 정죄 당하지 않아요.

율법 아래서는 대언자가 없어서 내가 모든 걸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에 정죄를 당했어요.

그러나 은혜 아래서는 예수라는 대언자가 있기 때문에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아브람과 사래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로 살펴봅시다.

 

‘아브람’과 ‘사래’로 애굽에 내려갔을 때는 율법 아래 있는 옛 사람을 상징합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아브람과 사래를 지켜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로에게 겁탈을 당하였어요.

이 모습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할례를 받고 난 후 아브라함과 사라로 이름이 개명(改名)을 당합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새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할례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할례로 죽은 것입니다.

그리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새 이름을 주십니다.

이름을 주신 것은 이제 새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름은 태어나야 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과 사라의 부모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모로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지켜주신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을 때는 이 아이는 내 소유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낳아서 호적에 내 아이로 등재를 하잖아요?

그 때부터 이 아이는 누가 뭐래도 법적으로 내 아이라는 것입니다.

법적인 관계가 이렇게 형성이 되면 그 때부터는 부모가 아이를 책임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된 것은 언약적으로 말하면

이제 너희는 옛 사람이 아니고 새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걸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사라의 뱃 속에 이삭이 잉태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서 이삭을 잉태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과 사라를 찾아 와서 내년 이 맘 때가 되면 이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19장에서는 소돔 고모라 멸망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20장 이야기가 나오고 21장에서는 이삭이 출생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18장에서 오늘 본문까지는 약 1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인 겁니다.

오늘 본문 때에는 사라 속에 이삭이 잉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신 아들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사라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사라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사라 속에 예수님이 계신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라를 지켜 주신 것은 사라 속에 잉태가 된 아들 때문인 겁니다.

이것은 무얼 말하는가 하면 그 속에 예수를 품고 사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 이름을 받을 때 이미 하나님이 내가 너희를 지켜 줄게 라는 약속이 담겨져 있었어요.

 

그래서 아브람과 사래라는 옛 사람으로 있을 때는 사래가 바로에게 겁탈당하도록 내 버려두셨지만 새 이름을 받은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비멜렉으로부터 지켜 주신 것입니다.

이걸 언약적으로 말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은혜로 보호 받고 정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율법 아래 가둬진 사람입니다.

그 때는 법이 지배합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너 말씀대로 살았어? 안 살았어? 라고 하면 우리는 꼼짝없이 마귀에게 참소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넘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왜요?

우리를 지켜주는 분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못사니까요.

우리는 하나님 뜻대로 살 수가 없으니까 참소당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어요.

말씀을 보면 다 ‘하라’ ‘하지 말라’는 식의 명령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더러 그렇게 살으라는 것 아닙니까? 라고 묻습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맞아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보다 먼저 이 말씀을 누구에게 주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율법을 가지고 이해해 봅시다.

율법을 누구에게 주었습니까?

출애굽한 이스라엘입니다.

 

출애굽하자 말자 율법을 주었습니다.

율법을 받은 자들은 애굽에서 태어났고 애굽에서 자란 애굽 사람들이에요.

다만 그 속에 아브라함 언약이 흐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애굽인과 같이 죄인들이에요.

죄인에게 하나님 말씀이 떨어졌어요.

 

죄인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순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게 광야에서 열 번이나 거역하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애굽에 바로가 하나님 말씀을 열 번을 거역한 것과 같이 이스라엘도 거역했어요.

애굽에 바로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다가 저주 받고 죽음을 당했어요.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성막의 희생 제사를 통해서 용서해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바로는 직접 응징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짐승에게 응징했어요.

이스라엘에게 화를 쏟아 부어야 하는데 짐승에게 쏟아 부은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죄값을 짐승이 대신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하나님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순종을 요구한 것은 너희들의 죄 값을 대신 담당하여서 희생당한 제물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함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는 너는 순종이 안 된다는 것을 이미 바탕에 깔고서 그들의 죄를 드러내고 희생 제물을 알려 주시려고 순종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순종을 끄집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에요.

 

너는 내 말씀대로 살 수 없는 불순종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 말씀이 떨어졌을 때는 우리의 죄가 고발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속에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아들의 희생이에요.

그래서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볼 때 내가 지키고자 하면 잘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적 개념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내가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들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보면 나는 이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인간이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너무도 귀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만약의 경우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있다고 한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어요.

그냥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받으면 됩니다.

 

예수님 초림 때 보세요.

말씀대로 살았던 바리새인들은 예수 믿을 필요가 없다고 하잖아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가 믿어요.

내가 죄인임을 어떻게 압니까?

그건 하나님 말씀 앞에 서 보면 드러나요.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12-16=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말씀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잘 보세요.

말씀이 어떤 일을 하는가요?

우리 죄를 낱낱이 고발하지요.

우리를 발가벗기지요.

 

고발하는 이유가 뭔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럼 말씀을 주신 이유가 분명해졌지요.

예수 믿으라고 말씀을 주신 거에요.

 

신약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게 뭡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으라는 것입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구원받은 이십 사 장로들이 전부 어린양을 찬미하지요.

이는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우린 큰 일 날 뻔 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와 있군요 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받았던 면류관조차도 벗어 던지잖아요.

이 사람들은 말씀에 순종해서 간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 믿어서 간 사람입니까?

예수 믿어서 갔지요.

 

그런데 예수 믿는 것이 쉬어요?

어려워요?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준 사람은 쉬운데,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주지 않는 사람은 믿고 싶어도 못 믿습니다.

내가 예수가 믿어지는 것은 놀랍고 놀랍고 놀라운 일입니다.

 

부득불 또 간증을 합니다.

저는 수십 년 동안 예수를 믿고 싶어도 못 믿었습니다.

율법에 특심을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경건을 좇고 불철주야 산기도 다니면서 부르짖어도 결국 예수를 못 믿었습니다.

믿고 싶은데도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냥 믿어지더란 말이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겁니다.

은혜가 임하고 나니까 새 언약이 믿어지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그 모든 얘기들이 의심이 가지 않고 그냥 술술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의로워진다는 새 언약이 믿어지니까 이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안 믿어지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신앙의 근본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에 두었는데,

이제는 주 예수를 믿는 것에 두고 있어요.

새 언약이 믿어지니까 율법으로부터 자유가 된 것입니다.

 

정답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듯이 율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옮겨지면 믿어집니다.

새 언약이 믿어지면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 해져요.

이걸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면 술술 믿어지고 깨달아 집니다.

 

왜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는가요?

이는 은혜 아래서는 하나님이 간섭을 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브람과 사래가 할례를 받고 새 이름을 받은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제부터 너희는 내 것이야 하고 그 때부터는 책임을 져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할례를 받고 새 이름을 받은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서 못 건드리게 지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내 백성을 손대지 말라’인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는 이제부터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율법 아래 있는데, 새사람은 은혜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의 특징이 뭡니까?

하나님께서는 법으로 대하지 않고 ‘은혜’로 대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사람을 두 부류로 대하십니다.

법으로 대하는 사람이 있고,

은혜로 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법 아래 있는 자를 종이라고 하고,

은혜 아래 있는 자를 아들이라고 합니다.

 

종은 법으로 대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은혜로 대합니다.

종은 주인과 법적 관계로 맺어져 있어요.

그래서 주인은 종에게는 일을 했느냐 안했느냐 로 따지게 됩니다.

아들은 부모에게 자기가 한 일을 들고 나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빈둥거리고 논다는 말은 아닙니다.

빈둥거리고 아무것도 안한다는 게 아니고 무슨 일을 열심히 하든 안하든 그것을 근거로 나가는 게 아니고 아버지 앞에 나갈 때는 은혜와 사랑으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부모가 제일 속상할 때가 언제입니까?

자식이 부모 눈치 살필 때 입니다.

아이들이 언제 눈치를 살핍니까?

잘못했을 때이지요.

 

자식이 눈치를 살피면 부모는 먼저 알아요.

이 녀석이 무슨 짓을 했구나…

그래서 부모는 자식이 밥을 먹을 때도 눈치 보지 말고 먹으라고 하잖아요.

왜 그래요?

법의 관계에 있으면 서로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은혜로 대하십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서 태어났다가 정한 때가 되어서 은혜 아래로 빼내심을 입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1-11 까지 봅니다.

 

갈 4:1-1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데 그 백성들이 처음에는 율법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차서 은혜 아래로 옮겨 주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창세전 언약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까?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정이 되어 있는 사람입니까?

창세전에 이미 예정이 되어 있었지요.

이미 예정이 되어 있는 사람인데 잠시 동안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 백성 아닌 모습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찾아가서 빼내 오십니다.

 

지금 갈라디아서 4장이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아들들인데 잠시 세상의 천한 초등학문 아래에 가둬 놓은 것입니다.

그랬다가 때가 되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 낸 것입니다

법이라는 나라에서 은혜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원래 우리는 아담 안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졌습니다.

누가 옮겨 놨습니까?

우리는 법 안에 있을 때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몰랐어요.

옮겨 놓고 나서 옮겨진 그들에게 아들의 영을 줍니다.

 

아들의 영을 받고 보니까

아~! 내가 원래 아들이었구나 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의 영을 받아서 아들이 됐습니까?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의 영을 받았습니까?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의 영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아들의 영을 받아서 아들이 되면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는 꼴이 됩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으면 예수 믿음이 내 행위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어지게 해서 구원을 하십니다.

 

이미 창세전부터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될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선물로 줘서 예수가 믿어지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걸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내 실력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 믿는 것이 내 실력이면 언제든 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필요하면 붙잡고 필요 없으면 버립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손을 잡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을 잡으면 언제든지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분 좋으면 붙잡았다가 기분 나쁘면 버리곤 한다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일향 미쁘신 분이기 때문에 변덕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붙잡아 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는 마귀에게 우리가 참소를 당했는데 은헤 아래로 오고 보니까 참소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품 안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참소를 하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참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예수님께서 변호사가 되셔서 저 아이들이 받아야 할 죄값을 내가 대신 받았다고 하십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받아야 할 죄 값을 예수님에게서 받으신 겁니다.

이러면 하나님은 손해 보는게 없습니다.

우리에게 받을 것을 예수님에게 받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죄를 대신 책임져 주실 분이 계신 자들입니다.

이게 변호사, 대언자, 구원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내 독자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 안에서 받는 것입니다.

 

지금 보세요.

아브람과 사래가 25년 전 바로 왕 앞에서는 아무 저항도 못했습니다.

그 때는 힘없이 유린당했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 앞에 섰을 때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막아 버리십니다.

‘내 백성이다, 손대지 마라!

‘내 백성 손대면 너 죽여 버린다!’ 그러는 겁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다시 봅시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랄 땅에 거하고 있는데,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가 너무 예뻐서 데려와서 취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그 사람은 임자가 있는 사람이다 라고 막아 주십니다.

그 임자가 누구냐 하면 너를 위해서 대신 기도해주는 선지라라고 합니다.

 

이 얘기가 참 중요합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은 따집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동생이라고 해서 취하려 한 것인데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이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나에게 벌 주면 되겠습니까 라고 합니다.

 

아베멜렉 말이 맞아요.

그는 지금 상식적인 하나님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지금 자기가 착하게 살면 하나님 앞에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하나님 앞에 벌을 받는다는 선악 구조 속의 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선악의 구조 아래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선악적인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악의 법이 무엇입니까?

내가 잘하면 상을 받고 내가 잘못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지금 그 선악의 구조를 가지고서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선지자로서 너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너의 잘함과 잘못을 가지고 복이 오고 벌이 오는 것이 아니란 겁니다.

하나님이 지명한 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벌이 오기도 하고 상을 받기도 한다고 하시는 겁니다.

 

아비멜렉은 지금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면 복 받고 나쁘게 살면 저주를 받겠지 하는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선악사상이에요.

 

우리 모두가 율법 아래 있을 땐 그랬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모두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도 예수 밖에서는 상선벌악의 하나님, 인과응보의 하나님을 알고 있어요.

세상 사람들은 내가 착하게 살면 복 받고 나쁘게 살면 저주받는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어요.

아비멜렉도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아비멜렉아, 네가 복을 받고 저주받는 것은 네가 어떤 행동을 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세우신 자를 네가 어떻게 대접을 하느냐에 따라 복이 오기도 하고 저주가 오기도 한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들입니다.

증인이 뭡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 상식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관이 있는데 신자들은 그들에게 가서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관이 틀렸다는 것을 알랴 주어야 해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일을 하십니다 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율법으로 구원하지 않고 예수 믿음으로 구원한다고 알려 주어야 합니다.

옛 언약이 아니라 새 언약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알려 주어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예수 안 믿으면 저주 받는다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해서 복이 오고 못해서 저주가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안 믿느냐를 통해서 복이 오고 저주가 온다는 것을 얘기 해줘야하는 것입니다.

 

시편 2편에서 뭐라고 했나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포고령을 하나 내렸습니다.

누구든지 내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는 자는 저주받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일까요?

안 받아들이지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라요.

신자들만 하나님을 압니다.

 

신자가 아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여호와의 하나님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 중심으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관을 바로 잡아 주고 그것을 알려주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는 것이 선지자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릇된 길을 갔을 때 항상 선지자들이 출현을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섬길 때는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릇된 하나님을 섬길 때 선지자를 보내서 돌이키게 합니다.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옳게 들을까요?

안 들을까요?

안 듣겠지요.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은 옳다고 생각하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선지자가 와서 틀렸다고 합니다.

거기에 반발하는 사람이 있고 거기에 순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부류가 항상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속에서 선지자들을 보내서 돌아 올 자는 돌아오게 하고 유기될 자 그냥 유기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보면 항상 ‘남은 자’ 사상이 나타납니다.

 

어느 시대고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루터기처럼 많지 않아요.

적은 무리입니다.

 

구원은 보편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구원은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남은 자들이 받는 것입니다.

그 남은 자들이 자기들 실력으로 남았습니까?

하나님이 남겨 줘서 남았습니까?

하나님이 남겨 줘서 남은 것이지요.

남은 자들은 항상 자기 근거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나오게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면 그의 아내 사라는 예수님의 신부인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를 겁탈하려고 하지요.

그러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너 왜 내 선지자의 아내를 건드려 하면서 혼을 냅니다.

 

이 그림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예수님이 자기 신부들인 성도들을 세상에 보냅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냈습니다.

그러자 세상은 우리를 덥석 잡아먹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너 왜 내 백성을 잡아먹느냐 하고 세상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지금 보세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다니면서 자기들끼리 무슨 얘기를 합니까?

너는 나의 이복 누이야.

말은 맞지요.

그걸 신약식으로 하면 예수와 성도를 형제라고 하잖아요.

 

히브리서 2:11을 봅시다.

 

히 2:11절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자가 있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가 있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예수님이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는 신자입니다.

이 둘을 형제라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이복누이라고 한 것은 혈족이라는 것입니다.

한 몸에서 나온 자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항상 남으로 다니는 게 아니라 한 몸으로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다닐 때 형제로 다니지요?

 

세상이 우리를 공격하면 예수님이 공격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건 마치 한미동맹과 같은 것입니다.

한국이 공격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미국이 개입을 합니다.

자동 개입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한 형제로 같이 다니는데 세상 사람들에게는 예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를 공격하면 공격은 우리가 당하지만 실제 이 일을 막아 주고 처리하시는 분은 예수님이 하신단 말입니다.

 

신자들은 세상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미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자를 우습게 여기는데 그러다가 혼나는 겁니다.

지금 아비멜렉이 그런 것입니다.

자기가 왕이에요.

세상 권세 잡은 자란 말입니다.

 

그 당시 왕은 누구든지 자기가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취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일반적인 왕의 권세를 가지고 사라까지 취하려고 했습니다.

그 사라의 배후엔 아브라함이 버티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보통 존재가 아니고 그가 기도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받는 하나님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놀라는 겁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체라고 했습니다.

무슨 그림자이고 실체입니까?

예수님이 자기 백성 구원하는 그림자이고 실체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건은 예표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과 성도와의 관계로 나타납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성도만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을 공격합니다.

성도를 공격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이 공격당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잖아요.

제자들을 둘 씩 파송하시면서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얘기를 합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들에게 유익이다.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가 너희들에게 온다.

 

다른 보헤사가 오면 너희들과 나와 아버지를 하나로 만들어 줄 것이다.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러시는 겁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마라

아버지를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서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이 마련한 그 처소가 나중에 보니까 성령이더란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니까

그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되고,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 되고, 우리 모두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더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 된 상태를 일컬어 ‘거처’ ‘처소’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성령 안에서는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 되고,

아버지와 우리가 하나 되고,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 되고,

성도와 성도가 하나 된 그런 상태로 있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동행하고 있고 예수와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아요.

세상은 우리만 보고 핍박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공격한 것으로 보아요.

그래서 세상을 심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왜 망하는 줄 아세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구약에서는 애굽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보세요.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십니다.

어떤 언약을 세웁니까?

너희 후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어서 억압과 핍박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그 억압과 핍박의 죄 값을 물어서 그들을 징치할 것이다.

 

이 언약을 세우실 때 아브라함에겐 후손이 없었습니다.

자식이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그 언약에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을 통해서 열 두 방백이 나옵니다.

이 열 두 방백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큰 민족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 노릇한 것은 자기들이 원해서가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자기 조상들과 언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언약 때문에 애굽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도 자기들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으로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한 언약을 기억해서 이스라엘은 구출해 내십니다.

이 때 이스라엘을 괴롭힌 애굽의 왕 바로는 홍해 바다에서 수장을 시키지요.

왕이 죽은 것은 나라가 망한 것과 같아요.

그러니 바로의 죽음은 애굽의 멸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8장에 보면 마지막에 이 세상을 일컬어서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바벨론이 일순간에 맷돌이 바닷물에 빠지듯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은 애굽의 바로 왕이 홍해 바다 속에서 수장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바로가 무엇 때문에 수장을 당합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힌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멸망을 시켜야 하는데 그 멸망시킬 단초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 원인 제공은 자기 백성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은 이 땅에서의 삶은 고난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핍박 받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비록 이 땅에서 고난 받고 핍박 받더라도 그것으로 낙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다뤄가시는구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지옥 같은 삶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천국의 삶을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절대 천국의 삶을 주지 않습니다.

지옥의 삶을 주신다니까요.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멸망할 근거를 찾으시고 자기 백성들에게는 지옥 같은 삶을 겪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대 유업으로 천국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비록 내 삶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니까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이 세상의 것을 주지 않습니다.

 

요한1서 2장을 봅시다.

 

요일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지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런 것들은 다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 속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주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 창세전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을 줬는데 그 하늘의 신령한 복은 이 땅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영생의 복입니다.

구원의 복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보니까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사건이 그냥 사건이 아니라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 백성들이 이 땅에서 당하는 아픔들을 계시해 놓은 것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항상 생각하세요.

 

우리는 원래 법 아래에서 정죄당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 아래로 옮겨 놓고 은혜로 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아브라함과 같이 자기 하나 살자고 아내를 팔아먹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예수 믿기 전이나 예수 믿고 난 후나 죄의 본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이용해서라도 입신양명을 꿈꾸는 것이 인간입니다.

복 받고 잘 살기를 원한다니까요.

우리는 아무리 예수를 믿고 예수를 찬양한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예수 믿었다는 것을 이 세상에 것으로 보상을 받고자 한다니까요.

예수 믿어주었잖아요.

그러니까 날 좀 도와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라고 합니다.

우리는 늘 그것을 바란다니까요.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법대로 다스리지 않고 은혜로서 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가 받은 복인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법대로 하셨다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 역시도 여기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덮쳐 오니까 지금 현재 이런 모습 속에서도 이만큼이라도 용서받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셔야 합니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비멜렉에게 계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네가 잘하고 못하고를 통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중심으로 이 세상이 흘러져 가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을 복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기호로 삼아 놓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브라함을 영접하면 복을 받았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은 겁니다.

 

아비멜렉은 그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도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보내서 알려 주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아! 지금까지는 네가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 복이 오기도 하고 저주가 오기도 했는데,

이제부터는 내가 세운 선지자인 아브라함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네가 복을 받기도 하고 저주도 받기도 하는 거야.

그러니까 너는 네가 기도를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너를 대신해서 기도해주는 중보자, 곧 아브라함이 있어야 네가 살 수 있는 거야 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나중에는 사라에게 은(銀) 일천 개를 줍니다.

이것은 속죄제사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대신 기도를 하니까 아비멜렉의 죄가 용서 되고 여인들의 태가 열려지고 아이들을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이것을 알려주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몰라요.

 

자기들이 잘하면 복 받고 자기들이 잘못하면 저주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그 사람들에게 세상은 우리의 잘잘못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려 갈 때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서 이 세상을 다스려 가신다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예수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전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 성령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예수를 증거하는 일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서 내가 이렇게 하면 복 받고 저렇게 하면 저주받고 하는 구조 속에 살았어요.

그런데 성령이 우리 안에 오니까 그 구조를 깨버리는 겁니다.

네가 잘나고 못 나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로마서잖아요.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그러잖아요.

내 마음 속에는 두 법이 있는데 한 마음은 하나님을 즐겁게 하고 또 한 마음은 그 법을 어기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이 두 법이 싸우는데 결국은 내 안의 못 된 법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쪽으로 끌고 가더라고 합니다.

 

이에 바울이 안타까워서 탄식을 합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성령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의와 생명의 법으로 해방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 구조 속으로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믿으시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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