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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44강. 아브라함의 십일조 (히 7:1-10)

by coroa 2021. 4. 4.

 

♣ -.44강. 아브라함의 십일조 (히 7:1-10).-

-.정낙원 목사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히브리서는 율법이 어떻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어떻게 성취 하셨고,

또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율법은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였습니다.

 

몽학선생이란? 길잡이란 말입니다.

어디로 인도하는 길잡이인가요?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길잡이에요.

율법을 따라가면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물 지도를 하나 주셨어요.

보물(寶物)은 당연히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는 죄사함이 있고,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어요.

이러한 것들이 하늘에 신령한 보물입니다.

 

하나님은 이 보물을 율법이라는 지도에 담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이라는 보물 지도를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예수라는 보물을 만날 수 있는 지도를 받았으니까요.

 

그런데 말이죠.

이스라엘은 지도를 보물로 알고 있었던 겁니다.

보물을 찾으라고 지도를 주었는데 그만 그 지도가 보물인줄 알고 지도를 고이 모셔 놓고선 정작 지도 속에 있는 보물을 놓치고 만 것입니다.

이런 등신들이 어디 있나요?

 

마치 옛날 부잣집 아이들에게 공부 잘하라고 동아 전과를 사 주었는데,

그걸로 공부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나 동아 전과 있다! 라고 자랑만 하고 있었던 것과 같아요.

전과(全科) 안에 내용을 알아야 하는데 그만 전과만 들고 다닌 겁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보물을 이 땅에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물 지도의 약속대로 때가 차매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냈어요.

이스라엘은 예수를 알아보는 보물 지도를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알아보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보물로 오신 예수님을 돌멩이로 여기고 갖다 버리다 못해 아예 죽여 버렸어요.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다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이런 우매한 짓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하였어요.

 

우리가 생각해도 이스라엘이 참 바보짓을 했지요.

저주 받아도 싸지요.

그래요.

보물을 만나라고 보물 지도를 주었는데도 보물을 갖다 버렸으니 망해도 싸지요.

 

그런데 말이죠.

이런 바보짓을 이 시대 교회들이 또 하고 있어요.

우리가 하고 있다니까요?

유대인들이 한 그 짓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요.

 

얼마나 웃기는가 하면 자기도 바보이면서 유대인들에게 에이~ 이 바보들이라고 비웃고 있어요.

바보 이야기가 지금 우리 이야기에요.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인간의 역사는 늘 반복이 된다고 했어요.

 

전도서 1장을 한번 살펴볼까요.

 

전 1:9-11절.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자! 보세요.

해 아랜 새 것이 없다고 하지요.

오래 전에 있던 것들이라고 하지요.

새 것이 없다는 말은 늘 반복 된다는 말이에요.

이미 옛날에 했던 일을 그대로 한다는 말입니다.

 

이걸 신앙에 적용하면 구약 이스라엘이 한 그 짓을 신약의 교회들이 똑 같이 한다는 말이에요.

왜 그럴까요?

어느 시대이고 인간은 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놈이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들 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잘못한 것을 알았다면 신약의 교회들이 안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사람들이 그러지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

이는 한 번 실패 한 것은 다시 실패하지 않는다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말이죠.

영적인 일에는 실패한 것은 계속해서 실패하게 되어 있어요.

다른 말로 죄인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만 번이고 죄를 짓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인간 안에 죄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에요.

죄는 아담 아래로 동일하게 역사를 해요.

그래서 인간은 변하지 않는 겁니다.

조상들이 한 짓을 후손들이 그대로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걸 그 애비에 그 자식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핏줄은 못 속인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는 유전자가 똑 같다고 해요.

아담이 범죄하고 에덴동산에 쫓겨난 이후 가인과 아벨로 시작된 인류 역사 이래로 인간은 다 같은 유전자로 태어나기 때문에 동일해요.

 

가인 시대 인간이나,

노아 시대 인간이나,

모세 시대 인간이나,

예수님 당시 인간이나,

중세 암흑시대 인간이나,

지금 인간이나 한 치도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늘 돌고 돌아 그 자리인 겁니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여도 인간 자체는 변하지 않아요.

옛날에 인간들이 가지고 있던 그 속성을 지금 인간들도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2천 년 전 유대인들이 율법이라는 보물지도를 가지고도 그 보물인 예수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였듯이 지금 교인들도 그 짓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건 희망사항일 뿐이고 실제론 정 반대로 나타나고 있어요.

 

지금부터 왜 2천 년 전 유대인과 이 시대 교인들이 똑 같은지 살펴봅시다.

 

오늘 분문을 보면 십일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국교회에서 신주단지처럼 붙잡고 있는 것이 세 가지가 있어요.

“십일조”와 “주일성수”와 “교회”라는 이름의 성전이에요.

 

주일 성수는 구약의 안식일을 말하고,

교회는 성전을 말하고,

십일조는 의무적인 헌금을 말해요.

 

교인이라고 한다면 이 세 가지는 신앙생활의 기초로 깔고 있어야 해요.

이 세 가지를 안 지키면 신자 취급하지 않아요.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로 진급(?)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해요.

서류전형에서 자격미달로 떨어져요.

 

이 시대 교회들은 구약 교회와 같아요.

왜냐하면! 율법이 말하는 것들을 그대로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지금은 은혜 시대 라고 해요.

하지만 신앙생활은 율법 신앙 그대로에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데 헌 부대에 담고 있어요.

그러니 감당을 못하는 겁니다.

마치 중년늙은이들 뱃살이 삐져나오듯이 여기저기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셨다고 합니다.

 

골로새서 2장을 봅시다.

 

골 2:12-17절.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바울은 모든 율법은 십자가에서 도말하였다고 합니다.

도말이란? 덮어 씌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서 우리의 더러운 죄를 페인트칠하듯이 칠해서 안 보이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스스로를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하였어요.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고 혈통으로 따지면 왕족인 베냐민 지파이고 율법 학교를 따지자면 최고의 명문대학인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어요.

지독한 율법 주의자였단 말입니다.

골수 유대교 신자였어요.

 

그런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골로새서를 썼어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골로새 지역의 율법주의자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썼단 말입니다.

어느 놈이 먹고 마시는 것이나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하느냐!

요즘말로 누가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고, 성전을 건축하여야 한다고 하느냐 라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못 박았다는 말은 율법의 기능을 죽였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누구에게?

자기백성들에게 말이에요.

예수를 믿는 성도는 율법의 기능이 죽었어요.

율법이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고 율법으로 판단 받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정죄 당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겐 주일 성수나, 십일조나, 성전은 없어요.

이런 것 없어도 또는 안 지켜도 괜찮아요.

하나님이 너 왜 이런 것 안했어!

그러지 않는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이게 다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많은 목사들은 말로는 율법을 안 지킨다고 해요.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 세 가지는 포기하지 않아요.

이걸 주장하고 있어요.

 

율법 속에는 성전도 있고, 안식일도 있고, 십일조도 있고, 제사장도 있어요.

짐승을 잡아서 드리는 제사도 있고,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들도 있고, 해서는 안 될 일이 있고, 해야 되는 일도 있어요.

 

율법은 사람도 구분하고, 행동거지도 구별하고, 음식도 구별하고, 날과 달도 구별하고, 거룩하고 속된 장소도 구별해요.

옷도 아무 것이나 입어도 안 되어요.

사람도 율법이 없는 이방인은 사귀면 안 되어요.

혼인도 이방인과 하면 안 되어요.

 

이런 것들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몽땅 폐기하셨어요.

예수님이 율법을 안고 죽어 버렸어요.

쉽게 말해서 율법이라는 박스를 불태워 버렸어요.

 

율법이라는 박스 안에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지키는 것과, 구별하는 것과,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들어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박스를 십자가에서 자기 몸으로 다 감싸 안아버렸단 말입니다.

이젠 이런 것을 하나 안하나 의미가 없어요.

 

율법의 요구대로 살지 않았다고 해서 저주 받는 것이 없어요.

이런 것으로 신앙이 있고 없음을 운운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 것 안에는 인간의 행함이 들어갈 틈이 없어요.

온통 예수님의 것으로만 채워져 있어요.

 

예수님의 피뿌림으로 용서해 주는 은혜로 충만해 있어요.

예수님 피 뿐이에요.

예수님 “피” 이외는 보이지 않아요.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바탕으로 교회를 세웠어요.

그럼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피만 남아 있어야 해요.

율법의 잔재가 눈에 보이지 말아야 해요.

그래야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 안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갖다 버린 것들을 모아 놓았어요.

이름만 살짝 바꿔놓았어요.

마치 엘리야 시대에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둔갑시켜서 백성들에게 섬기도록 한 것과 같이 말이에요.

 

왕상 18:21절.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이 시대 교회가 그래요.

무늬만 신약 교회에요.

뚜껑을 열어보면 예수님 피는 없고 온통 구약의 율법들이 가득해요.

 

안식일을 주일로 바꿔놓고,

성전을 교회로 둔갑시켜놓고,

제사장을 목사로 위장하고 있어요.

 

부정한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술과 담배로 바꿔치기 해 놓았어요.

거룩한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삶은 성화라는 것으로 포장해 놓았어요.

구약대로 하려면 다 하던가,,

어떤 건 구약이고 어떤 건 신약이고 짬뽕이에요.

 

짐승도 잡아서 제사를 지내고,

안식일도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오후로 지키고,

예루살렘 성전에 일 년에 세 번씩 순례케 하야야 하고,

유월절로부터 시작해서 초막절까지 다 지켜야지요.

대 제사장도 있고 제사장도 세워야지요.

 

그런데 이런 것들은 다 빼버리고 십일조만 달랑 남겨 놓고 지키라고 하고 있잖아요.

주일성수해야 한다고 하고,

성전을 지어야 한다고 성전 건축헌금을 하라고 하고,

목사는 제사장이라고 하고 있어요.

 

돈 안 되는 하루살이는 다 걸러내고, 돈 되고 목사 권위세우고 교회라는 집단을 운영하기 위해서 십일조라는 약대만 삼키고 있어요.

지키려면 다 지키든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에요.

 

이건 짝퉁이에요.

율법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에요.

개그콘서트에서 한창 유행하던 “같기도” 예요.

 

이게 초대교회도 있었어요.

그래서 바울이 그토록 싸웠던 겁니다.

 

골 2:20-23절.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바울이 그러잖아요.

왜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려고 하느냐!

왜 의문에 순종하느냐!

그토록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책망을 하고 있어요.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전부 부패로 돌아가니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모두가 사람들이 지어낸 말로서 영을 쫓는 것이 아니고 육체를 쫓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사기꾼들의 가르침에 넘어 가느냐고 소리 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봅니까?

아니 성경을 안 읽으니 알 턱이 없지요.

무식하니 목사를 무당 섬기듯이 하고 있는 겁니다.

 

그저 무당에게 빌듯이 목사 말에 순종하면 복이 넝쿨채 굴러 오는 줄 알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부처도 좋고!

예수도 좋고!

귀신이면 어떻습니까?

가정에 우환이 없고, 자식 잘되고, 부자 되고, 건강하면 만사 OK 인데!

 

목사가 복을 준다고 하면 자기 집구석부터 돈벼락을 맞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자기 집안 자기 자식들 다 복에 채여서 굴러다니게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목사들이 교인들 비위를 맞추면서 한 푼 얻어먹으려고 알랑방귀를 뀌고 있잖아요.

이게 다 사기란 말입니다.

 

목사들은 스스로가 사기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예수 안 믿어요.

그러니 예수 팔아서 약장사하는 겁니다.

 

그런데 무식한 교인들만 몰라요.

목사의 말에 무슨 영험한 능력이라도 되는 줄 알고 굽실거리고 있어요.

제가 지금 이런 막말을 하는 것은 사기꾼 같은 목사의 말을 복음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교인들은 목사들이 강도처럼 자기 양털을 다 깎고 있는데도 몰라요.

 

그래서 제가 그럽니다.

교인이 소경이니 소경 목사를 따른다고!

눈을 뜬 사람은 절대로 소경을 길잡이로 세우지 않아요.

소경을 길잡이로 세우고 있다는 것은 자기가 소경이기 때문이에요.

 

성경을 본다고 한다면 따져 보아야지요.

그냥 목사가 그러니 맞겠지 생각하지 말고 따져 보세요.

바른 말을 하는 목사라면 눈이라도 빼줄 심정으로 섬기고,

그렇지 않고 가짜라고 판단되면 사정없이 떠나세요.

 

베뢰아 교인들과 같이 과연 성경이 그러한가! 살펴보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니 유대인들과 같은 짓을 하게 되는 겁니다.

구약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누누이 말하는 것인데!

남이 만난 예수는 소용이 없어요.

내가 만난 예수기 있어야 해요.

 

남이 가지고 있는 진리는 소용이 없어요.

내가 진리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남이 아무리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길잡이입니다! 라고 말해도 내가 그걸 인정하지 않고 율법을 붙잡고 있으면 소용없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였다고 하여도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가 아니면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예전에 필리핀 지역에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으로 참전하였던 군인들이 첩첩 산중에서 살고 있는데 그들은 아직도 전쟁 중인 줄 알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 사람들에겐 아직도 전쟁 중이에요.

전쟁이 오래 전에 끝이 났어도 그 사람은 아직도 진행 중인 줄 알고 있는 겁니다.

모르니까요.

그럼 어쩔 수 없어요.

그 사람은 계속하여 전쟁 모드로 살아야 할 밖에요.

 

율법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고 하여도 본인이 이 사실을 믿지 않으면 그 사람은 율법이 살아 있기 때문에 율법대로 살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견디지 못해요.

그 사람은 여전히 구약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겁니다.

 

남이 무슨 말을 하느냐는 중요치 않아요.

내가 믿어져야 해요.

내가 율법으로부터 자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속지 않아요.

 

성경이 내 이야기가 되어야지 자기하고 상관없는 이야기이면 성경을 볼 필요가 없어요.

예수가 내 신랑이 되어야지 남에 신랑이 되어선 안 되어요.

남에 신랑 붙잡고 좋아하면 나중에 크게 다쳐요.

 

율법은 남에 신랑이에요.

예수님이 우리 신랑이에요.

율법이라는 신랑은 뭘 지키는 것을 굉장히 좋아해요.

그러나 예수라는 신랑은 우리가 뭘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예수님이 주는 것으로만 살기를 원하세요.

 

예수라는 신랑이 그래요.

 

넌 그냥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 줄게!

내 품에 둥지를 틀어!

가만히 있으래요.

다 자기가 알아서 해 주겠대요.

 

오늘은 십일조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의 십일조와 신약의 십일조는 어떻게 다른지에 대하여 살펴볼까합니다.

그럼 우리 신랑이신 예수님이 율법 안에 있는 십일조를 어떻게 완성하셨는지 살펴봅시다.

 

창세기 14장을 봅시다.

 

창 14:17-20절.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아브람 시대에 큰 전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부족들 간에 연합전선을 형성해서 전쟁을 했어요.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과, 소알이라는 다섯 부족이 연합을 하였고,

엘람과, 그돌라오벨과, 고임과, 디달과, 시날이라는 네 부족이 한편이 되어서 전쟁을 합니다.

 

부족끼리 연합을 해서 치른 연함전쟁이었어요.

서로 뜻을 같이 하는 부족끼리 5:4로 뭉쳐서 전쟁을 한 겁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조카가 속해 있는 소돔의 연합군이 져버렸어요.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에요.

 

전쟁에서 이기면 패한 자의 모든 것은 이긴 자의 몫이 되는 겁니다.

이긴 자들은 사람에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전부 전리품으로 챙겨가는 겁니다.

그래서 소돔의 연합군에 속한 롯도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이 소식을 아브람이 들었어요.

그래서 조카 롯을 구출 해 오려고 자기 집에서 기른 사병(私兵) 318명을 데리고 간 겁니다.

5개국이 연합을 하고도 졌는데,

아브람이 오합지졸과 같은 318명 가지고 전쟁을 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에요.

 

아브람은 애당초 무모한 전쟁을 시도 한 겁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아브람이 강대국을 이겼어요.

이건 저 아프리카의 미개한 부시맨들이 강대국 미국을 이긴 것과 같아요.

그래서 포로로 잡혀 갔던 롯을 구출해 오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이 포로로 잡혀 갔던 모든 사람들을 다 구출해서 개선장군이 되어서 돌아오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는 길목에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이 마중을 나온 것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밎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누구요? 라고 물었어요.

 

응! 나 살렘 왕!

하나님의 제사장이야!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가만히 보니까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겁니다.

거기다가 지극히 놓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하고 있어요.

더군다나 개선 장군이 아브람을 축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신 것이라고 알려 주는 겁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싸워 주셔서 이긴 것이란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드렸어요.

아브람이 왜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을 드렸을까요?

이는 이번 전쟁은 하나님이 싸워서 이긴 전쟁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드린 것입니다.

 

아브람의 생각에도 어쩐지 전쟁이 쉽더라 생각했어요.

그게 다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전리품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전리품 중에서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자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것이란 뜻이에요.

자기가 한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전쟁이라고 시인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뜻 전쟁에서 취한 전리품을 하나님에게 십일조로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모두 다 드렸다는 의미에요.

십일조를 드림으로서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최초의 십일조에요.

십일조의 원본이에요.

십일조의 의미를 여기서 찾아야 해요.

 

아브람이 드린 십일조는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율법식의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십일조 개념과는 성격이 달라요.

왜냐하면! 아브람이 십일조를 할 때는 아직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한 십일조는 율법적 개념을 벗어난 십일조에요.

법으로서의 강제성을 띤 것이 아니에요.

알다시피 율법은 강제적입니다.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겁니다.

안 지키면 징벌을 당해요.

 

그러나 아브람이 한 십일조는 법적 개념이 없어요.

자발적으로 드린 겁니다.

아브람의 십일조에 담긴 의미는 율법 정신을 띠어 넘어 있어요.

 

십일조를 율법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십일조는 주께로 온 것을 주께로 되돌려 드린 것이에요.

아브람의 십일조는 은혜의 고백인 겁니다.

 

그런데 이 십일조가 나중에 율법 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이게 헷갈리는 겁니다.

암튼 십일조가 율법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요.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법(육)과 은혜(영)로 갈라내는 일을 해요.

이게 무지무지하게 중요해요.

 

아브람의 십일조가 율법 속으로 들어가긴 하여도 그 정신은 그대로 계승이 되어서 들어가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십일조를 율법 안에 담아 놓은 것입니다.

율법의 십일조는 그릇과 같고,

아브람의 십일조는 내용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법으로 하는 십일조와 은혜로 하는 십일조로 나누이게 됩니다.

비록 율법으로 주어지긴 하여도 은혜로 하여야 아브람의 십일조가 되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새 언약 안에서 드려지는 십일조와 옛 언약 안에서 드려지는 십일조로 나타나게 됩니다.

 

마태복음 23장을 봅시다.

 

마 23:23-24절.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서 드려지는 십일조 속에는 의와 인과 신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십일조만 받았습니다.

십일조 속에 담겨 있어야 할 의와 인과 신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삼키고 그 내용은 버렸다고 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는 돈이 아니고 믿음입니다.

십일조라는 그릇에다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담아야 해요.

새 언약 하에선 십일조는 돈 내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되어요.

 

십일조는 복 받기 위해서 내는 것이 아니에요.

주고받는 거래가 아니에요.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십일조라는 돈을 내고 반대급부를 바라지만,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은 십일조라는 물질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로 담아서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의 근본적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가 도대체 뭔가?

십일조 속에 무엇을 담아야 합니까? 라고 물어야 해요.

 

십일조를 해도 됩니까?

안 해도 됩니까? 라고 접근하지 마세요.

그건 접근 자체가 잘못 된 것입니다.

 

‘해야 되느냐’ ‘안 해도 되느냐’ 라는 명제에 가두어지게 되면 율법적 행위에 가두어지게 되어요.

십일조는 법이 아니고 은혜에요.

의무가 아니고 감사에요.

감사가 되려면 먼저 깨달음이 있어야 해요.

 

그럼 깨닫기 위해서 십일조의 근원을 찾아가 보십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십일조에 대한 힌트가 나와 있어요.

차근차근 살펴봅시다.

 

본문을 봅시다.

 

히 7:4-10절.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먼저 눈여겨 볼 것은,

창세기에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사람은 “아브람”이에요.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라고 합니다.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지요.

 

왜 동일한 인물을 다르게 부를까요?

창세기에서는 “아브람”이라고 하고,

히브리서에서는 “아브라함”이라고 할까요?

 

‘아브람’과 ‘아브라함’은 동일 인물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에 사람이에요.

‘아브람’은 할례를 받기 전에 ‘옛 사람’이고,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고 난 후의 ‘새 사람’이에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옛 사람 아브람은 구약이고,

새 사람 아브라함은 신약이에요.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람이 한 것을 아브라함이 하였다고 언급하는 것은 율법의 십일조 사건을 새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옛 언약을 새 언약으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가 뭡니까?

율법을 예수님으로 해석하는 거잖아요.

그러니 지금 아브라함이 한 십일조도 예수님으로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아브람과 아브라함은 마치 옛 언약 아래 있을 때 사울과, 새 언약 아래 있는 바울과 같아요.

“사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 사람이고,

“바울”은 예수를 만난 후의 사람이에요.

“사울”과 “바울”은 신앙의 근본이 달라요.

 

신앙생활의 주체가 누구냐 로 완전히 달라져요.

 

이걸 십일조로 비유하면 내가 하는 십일조냐!

아니면 예수님이 하신 십일조냐! 가 되어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십일조는 안 받아요.

예수님의 십일조만 받아요.

 

아브람의 십일조를 뭐라고 했나요?

아브람이 전쟁을 하고 얻은 전리품 중에서 드린 거라고 했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드리는 전리품이 되려면 예수님이 전쟁을 하여서 빼앗은 것이라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누구와 전쟁을 하여서 전리품을 얻었는지를 알면 아브람이 한 십일조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예수님이 누구랑 전쟁을 했습니까?

마귀와 전쟁을 했지요.

마귀와 전쟁을 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지요.

 

예수님이 하신 전쟁을 봅시다.

 

마 12:28-29절.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예수님께서 귀신을 좇아내자 유대인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붑을 힘입어서 귀신을 좇아낸다고 힐난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귀신을 좇아낸 것은 귀신이 아니라 성령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귀신보다 강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은 곧 예수님 자신이기도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마귀를 결박하고 그 집에 있는 세간살이들을 늑탈해 온 겁니다.

세간살이란? 자기 백성들을 말해요.

마치 아브람이 롯을 구출해 오듯이 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예수님의 전리품이 되는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승리하여서 찾아온 전리품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이 뭔가요?

 

히브리서 2장을 봅시다.

 

히 2:14-16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빼내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사로잡힌 아브라함 자손을 놓아주기 위한 전쟁을 하셨어요.

죽음에 사로잡힌 자들을 빼내려고 마귀와 전쟁을 치른 겁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다 찾아내서 영생을 주는 거잖아요.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이 지금 롯처럼 포로로 잡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전쟁을 해서 찾아 온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찾아온 전리품이에요.

그 전리품을 예수님이 아버지께 십일조로 드리는 겁니다.

 

이건 구약에선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서 이스라엘의 장자를 살리고선 그 장자는 모두 하나님 것이라고 명한 것과 같아요.

그러니 십일조는 물질이 아니고 구원받은 성도인 겁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 하지요.

세계란? 족보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구약의 아브라함이나 다윗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일컬어 믿음에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곧 예수님이 믿음에 조상이란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예수님은 같은 의미에요.

구약에선 아브라함이 포로로 잡혀 있던 자들을 찾아 왔지만 신약에선 예수님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찾아와요.

 

그럼 예수님께서 성도를 어디에서 어디로 빼내 왔는가요?

바울의 말을 들어봅시다.

 

갈라디아서 4장을 봅니다.

 

갈 4:1-7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자 보세요.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아들이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었다고 하지요.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두었다고 합니다.

후견인과 청지기는 율법을 말해요.

 

율법을 일컬어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하지요.

이는 온 세상은 율법 아래 갇혀 있다는 말이에요.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성도도 율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마귀가 율법으로 종 부리듯이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율법으로 정죄 받아서 모두 죽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때가 차매 예수님을 보내서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하는 자기 백성들을 속량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어디서 빼냈다고 하나요?

율법 아래서 빼냈다고 하지요.

자 중요하니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세요.

 

아들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 아래 있지요.

그럼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겠어요.

율법적으로 하고 있겠지요.

 

오늘은 십일조 이야기를 하니 십일조에 대하여서만 살펴봅니다.

아까 아브라함의 십일조가 율법으로 들어갔다고 했지요.

그러면 율법 아래서 태어난 사람은 어떤 식으로 십일조를 드릴까요?

율법 식으로 드리겠지요.

율법식 십일조는 의무이고 강제적인 거지요.

마음에 없어도 해야 해요.

 

율법식 십일조는 마음에 없어도 의무적으로 해야 하니까 꼭 자기 것을 드린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러면 십일조를 낸 사람은 자신이 자랑스러워요.

그런데 아브람이 한 십일조는 이런 생색내는 십일조가 아니에요.

아브람은 하나님께 복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하였는데,

율법 아래서 난 자들은 하나님 난 십일조 했어요! 참 잘했지요! 라고 자랑을 한단 말입니다.

 

이걸 예수님께서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 빠진 십일조라고 했어요.

이는 다른 말로 자기 자랑하는 것은 십일조가 아니란 말이에요.

의와 인과 신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인데 이는 곧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안에 다 담겨져 있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십일조는 곧 예수님의 피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안에는 율법적 십일조가 없어요.

 

이렇게 되면 신약에선 물질적 개념의 십일조는 사라진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믿음으로 사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신앙생활 속에 십일조 정신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만 있어요.

믿음 속엔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는 감사가 담겨져 있어야지 십일조를 했다는 율법적 행위가 담겨져 있어선 안 되어요.

 

하나님께서 율법 속에 십일조를 심어 놓은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에요.

아브람처럼 내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는 것을 알라고 하신 거예요.

 

율법 속에서 십일조를 하라는 것은 복을 받는 자가 누구이고 복을 주는 자가 누구인가를 알려 주고자 하신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율법 속에 있는 십일조를 가지고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복을 준다고 하는 겁니다.

율법에서 누가 누구에게 십일조를 냅니까?

 

민수기 18장을 봅시다.

 

민 18:21-24절.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22.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23.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2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백성들이 십일조를 레위지파 제사장에게 드린다고 하지요.

히브리서 식으로 말하면 십일조를 내는 쪽은 낮은 자이고, 십일조를 받는 쪽이 높은 자에요.

십일조를 받는 쪽이 복을 주는 자이고, 십일조를 하는 쪽이 복을 받는 자입니다.

 

그럼 왜 레위지파가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습니까?

레위지파가 어떤 지파인가 알면 됩니다.

 

민수기를 봅시다.

 

민 3:11-13절.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민 18:21-24절.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22.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하나님께서 레위인을 택하여서 첫 것을 대신 한다고 합니다.

첫 것이란? 장자란 뜻입니다.

이 장자를 맏아들이라고 해요.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으로 나타나요.

예수님이 맏아들이에요.

 

하나님은 맏아들에게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도록 했어요.

제사장 역할을 하라고 했어요.

제사장은 흠 없는 제물의 피로 죄인과 하나님을 화목 시켜 주는 분이에요.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듯이 레위지파도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에게 귀속이 되었어요.

예수님이 곧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제사장인 것입니다.

이 멜기세덱의 정신이 구약 율법 아래서는 레위지차에게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는 레위지파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 한 겁니다.

 

레위지파는 성막을 관리하는 지파에요.

하나님의 제사장 지파입니다.

하나님께 복속된 지파란 말입니다.

이러한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하라고 했어요.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 할 때 레위지파에겐 땅을 주지 않았어요.

성막에서 봉사하도록 했어요.

이건 모세가 율법을 줄 때 이미 정해 놓았어요.

레위지파는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 지내는 일을 담당했어요.

 

성막에서 봉사하는 대신 11지파가 십일조를 레위지파에게 바치도록 했어요.

레위지파는 하나님이 먹는 십일조를 먹고 사는 셈인 겁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람과 멜기세덱의 구도로 이해하면 레위지파는 아브람에게 십일조를 받은 멜기세덱과 같고 백성들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아브람과 같아집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드리면서 이 전쟁을 이기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라고 했듯이 백성들도 레위지파에게 십일조를 드리면서 당신들의 제사로 인하여 우리가 복을 받고 살았습니다! 라고 하여야 하는 겁니다.

 

레위지파는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다고 했으니 결국 십일조는 하나님이 받은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레위지파를 하나님의 제사장 지파라고 하는 겁니다.

물론 레위지파는 그 십일조를 받아먹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였어요.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지요.

레위지파도 제사장이지요.

아브람은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 때문에 살았고, 이스라엘은 레위지파 제사장 때문에 살고 있는 겁니다.

 

백성들은 제사장이 지내주는 제사 덕분으로 죄 가운데서도 별 탈 없이 살고 있어요.

이게 히브리서에 오면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제사장 때문에 성도들이 죄 가운데 살면서도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는 겁니다.

 

이해되시지요.

아마 쉬울 겁니다.

그래요.

모든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로 풀면 재미있게 술술 풀려져요.

 

지금 이스라엘 속에 레위지파와 일반 백성들의 모습은 곧 아브람과 멜기세덱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 속에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 반열에 속한 레위지파가 있는 겁니다.

레위지파는 이스라엘에게 복을 빌어주는 위치에 있고,

백성들은 레위지파가 빌어주는 복을 받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레위지파도 나오고, 이스라엘 백성도 나왔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여주는 역할극을 시키기 위해서 레위지파와 백성들을 같은 허리에서 나오게 한 겁니다.

 

허리란? 줄기란 말입니다.

마치 줄줄이 엮인 비엔나 소시지같이 레위를 쪽 따라 올라가면 아브람이 나와요.

율법 아래선 레위지파는 멜기세덱 편에 서 있고 백성들은 아브람 편에 서 있는 겁니다.

 

백성들은 십일조를 레위지파에게 바침으로서 이 물질이 레위지파로부터 온 것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레위 지파 제사장 위에는 하나님이 계세요.

결국 하나님에게로 온 것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셈입니다.

 

율법 아래서 십일조를 해도 이 정신을 잊으면 안 되어요.

내가 바친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되어요.

그건 법으로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십일조를 드리면서 내가 하나님께 얻어먹고 산다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은혜에 속한 것이 되어요.

 

이 사실을 신명기 26장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 26:1-11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 당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4.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취하여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며 5.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9.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10.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찌니라”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을 합니다.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다 지으면 곡물을 추수해서 맏물 곧 십일조를 레위 제사장들에게 바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고백을 하라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유리하는 민족이었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농사를 짓고 삽니다.

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자 이렇게 십일조를 가지고 왔습니다! 라고 하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십일조를 낸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드린다는 의미에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뜻이에요.

만약에 자기 것을 드린다고 생각하면 그건 십일조 정신에 어긋나는 겁니다.

비록 율법 아래서 십일조를 드려도 내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얻어먹고 산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되어요.

 

행여라도 자기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한다면 이는 아브람의 십일조 정신을 모르는 것이 되므로 죄가 되는 겁니다.

십일조가 비록 율법 속에 있어도 그건 법이 아니고 은혜인 겁니다.

 

내가 드립니다! 가 되면 율법이고!

하나님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드리면 은혜인 겁니다.

이걸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비유하면 “내가 드립니다” 는 옛 언약이고,

“하나님 것으로 삽니다” 는 새 언약이에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사도 바울을 예로 듭니다.

 

사울이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율법을 자기가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하였어요.

율법을 지키는 것은 자기 것을 드리는 겁니다.

십일조를 해도 자기 것으로 하였다고 해요.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어요.

바리새인이 하나님에게 나와서 기도를 할 때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드리고 구제를 했다고 하면서 자기가 행한 것을 쭉 열거하면서 자랑 질을 했어요.

 

그러나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는 자기는 죽어야 할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았어요.

죄인의 괴수가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안 겁니다.

하나님이 살려주는 것으로 살았어요.

비록 십일조를 한다고 하여도 그 속에 예수님의 의(義)만 담겨져 있는 겁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지는 의(義)로 살았어요.

 

옛 사람 사울일 때는 자기가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생활을 하였다면,

새 사람 바울일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으로 살았어요.

이처럼 옛 사람일 때와 새 사람일 때 신앙생활은 근본이 달라요.

 

이걸 십일조로 해석하면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먹고 사는가? 의 차이가 나요.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면 십일조 속에 내 의(義)가 포함되어져 있어요.

그러면 십일조라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만들어요.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을 얻어먹고 산다는 의미에서 십일조를 드리게 되면 감사하게 되어요.

하나님 주셔서 고맙습니다! 가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동일한 십일조라고 하여도 그 의미는 천지와 같은 차이가 나는 겁니다.

내 자랑거리냐?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냐! 로 차이가 납니다.

 

아까 십일조를 하게 된 배경을 아브람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에 대한 신앙고백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셨다는 의미에서 하였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되면 십일조는 이 전쟁의 승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게 하는 루트(길)가 되지요.

 

십일조를 통해서 누가 누구에게 복을 받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 십일조를 받는 분에게 복 받은 것을 감사하는 것이잖아요.

이런 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어요.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살게 해 주셔서 산다는 고백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야 산다는 것 자체가 감사가 되어져요.

그렇지 않으면 환경에 따라서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어요.

 

그럼 새 언약적 관점에서의 십일조 의미를 살펴봅시다.

 

앞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다 도말시켰다고 했지요.

의문에 쓴 증서 속에 십일조도 들어가 있지요.

그럼 십일조도 도말 된 것이겠지요.

그렇잖아요.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 하셨으니 십일조는 예수님이다! 라고도 말 할 수가 있어요.

예수님이 십일조다!

좀 생경한 말이지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에요.

예수님이 맏물이니까요.

좀 더 정확한 의미에선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이 십일조에요.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의미로 볼 때 신약에 십일조는 예수님이 구원한 성도라고 했어요.

성도 자체가 십일조에요.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어요.

 

이걸 종(從)이라고 해요.

종은 자기 소유가 없어요.

모든 것이 다 주인 것이에요.

자식을 낳아도 주인에게 귀속되어요.

 

성도는 그리스도의 종이에요.

그럼 성도가 누리는 모든 것은 예수님 것이에요.

예수님 것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내 모든 것이 예수님 것이니까 우리가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적 십일조를 하고서 십일조를 했다고 하면 안 되어요.

우리 전부가 십일조이니까 우리의 일부를 십일조로 드리고서 십일조를 했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도리어 내 전부를 드려야 하는데 십일조 밖에 드리지 못하고 있네요.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해야 맞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십일조를 하면서도 죄가 더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 앞에서 서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죄들이 넝쿨째 캐져 나오는 겁니다.

구약에선 십일조만 하면 되는데 신약에선 몽땅 다 하여야 하잖아요.

성도 자체가 십일조니까요.

 

우리는 우리 자체가 십일조인데도 율법적인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도 인색해요.

다 드려도 시원치 않은데 열에 하나를 드리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말하는 십일조도 제대로 못하는 인간이 몽땅 드린다는 것은 불가능 하겠지요.

결국 우린 온전한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선 십일조라 하지 않고 연보라고 하는 겁니다.

 

연보(捐補)란? 안에 있는 것을 내어 놓는다는 말이에요.

연보는 양(量)적인 의미가 아니고 은혜를 달아보는 시금석이에요..

은혜를 받고 보니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소득의 10에 1을 내느냐!

10의 2를 내느냐!

몽땅 내느냐!

정한 것이 없어요.

마음에 감동되는 대로 하면 되어요.

십일조라고 하면 정해진 것이 있지만 연보는 감동되는 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나타났어요.

성령이 임하자 구약식의 십일조가 아니라 전 재산을 내어 놓았어요.

그동안 율법의 십일조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달라졌어요.

 

내 것이라고 여기던 재물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으로 보여진 겁니다.

그래서 아낌없이 연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다른 세계가 보인 겁니다.

마음속에 천국이 임한 거예요.

 

마음속에 천국이 임하자 성도가 예수님으로 보인 겁니다.

예수님으로 보았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께 속한 같은 지체로 보인 거예요.

한 몸으로 보이니 자기 재산을 내어 놓은 겁니다.

 

이걸 가지고 또 율법 아래 있는 목사들은 돈 긁어내는데 인용하고 있어요.

이건 바치라는 말이 아니에요.

은혜가 임하였다는 것을 간증하는 겁니다.

 

물질은 사람의 마음이고 주인이에요.

예수님은 재물과 하나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재물을 주인으로 말한 것을 허투루 듣지 마세요.

 

재물이 주인이면 마음은 인색하게 되어 있어요.

반대로 하나님이 주인이면 재물은 오순절 성령을 받았던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은 자세의 삶이 살아져요.

 

바울이 연보에 대한 말씀을 할 때 제일 중요한 대목이 마음이 정한대로 입니다.

 

고후 9:7-8절.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마음이 정한대로라는 말은 마음에 감동이 되는대로 하라는 겁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허락케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색함이 없지요.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면 하면서도 기뻐요.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마음에 인색함이 사라져요.

은혜가 착한 일을 넘치게 하도록 하게 하세요.

 

착한 일이란? 성도를 섬기는 일인데 여기선 가난한 형제들을 위하여 연보하는 겁니다.

형제가 남으로 보이면 연보 할 수가 없어요.

연보는 형제가 나와 한 몸이라는 것으로 보여야지만 할 수가 있어요.

교회도 내 교회라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야 연보할 수가 있어져요.

 

지금 바울은 연보를 마게도니야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것으로 말하고 있어요.

마게도냐 교회는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어서 성도들이 초근목피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한 형제 된 심정으로 도왔던 겁니다.

얼마나 하나님께 큰 은혜를 입었으면 극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하게 되었겠어요.

 

고린도후서 8장을 봅시다.

 

고후 8:1-4절.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자 보세요.

하나님이 마게도냐 교회에 은혜를 주셨다고 하지요.

그러자 성도를 섬기는 일에 동참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잘 살지도 못하면서 자기보다 더 어려운 형제를 돕고자 한 겁니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다만 바울의 말을 듣고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것을 알게 하시니까 가만있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십시일반으로 도운 것이 힘에 넘치도록 자원한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의미 있는 것은 이 은혜가 성도를 섬기는 일에 참예함에 대하여 간절히 구한다는 겁니다.

은혜가 연보하도록 역사를 한단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토해내게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토해내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걸 역으로 말하면 인색하다는 것은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은혜를 받으면 사람이 마음이 풍성해져요.

여유로워요

관대해지게 되어 있어요.

 

연보는 돈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에요.

믿음이고 사랑이에요.

 

교인들이 연보에 인색한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은혜를 받지 못해서에요.

마게도냐 교회는 연보해서 교회 짖지 않았어요.

교회라도 지으면 자기 흔적이라도 남으니 마음에도 없는 헌금을 할 수가 있어요.

내가 헌금해서 교회를 지었다는 보람이 남으니까 은혜 없어도 헌금 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마게도냐 교회는 생면부지 낯선 사람들에게 연보했어요.

자기 생색낼 일이 아무도 없어요.

그냥 흘러가는 물에 돈을 버린 것과 같아요.

아무런 흔적이 없어요.

 

그럼에도 분에 넘치는 연보를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강권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연보는 자기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억에 담아두지 못해요.

은혜로 하는 모든 일들은 주신 것을 토해내는 것이므로 자랑하지 않는 겁니다.

 

물질은 그 사람의 신앙을 달아보는 바로미터에요.

이걸 하도 사기꾼들이 등쳐먹어서 나쁜 소리로 들리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의 증거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곳엔 반드시 자기 부인이 일어나고 헌신이 일어났음을 증거하고 있어요.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차고 넘치도록 헌물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게 다윗이 성전을 짓고자 할 때 또 그러했어요.

 

역대상 29장을 봅시다.

 

대상 29:9-14절. “백성이 자기의 즐거이 드림으로 기뻐하였으니 곧 저희가 성심으로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며 다윗왕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니라 10.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11.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13.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다윗은 백성들이 즐거이 드리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어요.

우리가 무엇이관데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이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백성들의 헌물을 하나님 은혜로 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돌려 드린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또 사기꾼 목사들은 성전 건축 한다고 인용해서 사기치고 있어요.

새 언약 하에선 율법이 도말 되었는데 무슨 성전 건축을 한다고 합니까?

그러니 이런 성경으로 돈 뜯어내고자 하는 것은 다 사기꾼들입니다.

 

그렇다고 교회를 나 몰라라 하는 것도 똑 같은 사람이에요.

교회가 어려우면 함께 짐을 질 생각을 해야지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아니에요.

뱉어 내지 못하는 것은 은혜를 받지 못한 증거에요.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 안에서 자유라고 하니 아무 것도 안하는 자유로 살아요.

자기를 위해서 자유를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왜 주를 위해 헌신하는 자유로 살지 못하나요.

 

왜 주를 위해서 연보하는 자유!

봉사하는 자유!

헌신하는 자유! 는 없나요.

 

십자가가 주는 자유는 자기를 위한 자유가 아니라 그리스도 몸을 위한 자유에요.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종이 되라는 말이에요.

이걸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순회전도를 하면서 다른 교회 형제들의 어려움을 이야기 했어요.

 

고후 9:1-5절.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2.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 3.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4.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5.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 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바울이 아가야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 이야기를 하자 아가야에 있는 성도들이 다음번에 바울이 오면 연보한 것을 줄려고 일 년 전부터 준비했다고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자랑을 했어요.

그러니 내가 나중에 마게도냐 성도들과 함께 연보를 수금하러 갈 때 미리 준비하지 않아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미리 미리 준비하라는 겁니다.

이는 늘 성령 안에서 한 형제임을 기억하고 있으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네 교회냐! 내 교회냐! 따지지 않고 어려운 교회를 위해서 연보하라고 권면을 한 겁니다.

바울의 권면을 들은 각 지역의 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를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을 하였어요.

 

바울은 성도들이 연보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난하심에 동참한 것이라고 했어요.

 

고후 8: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선 부요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가난케 되심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가난하심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부요케 된 것은 구원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린 예수님의 것으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것으로 살고 있는 성도라면 예수님의 지체가 물질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면 가만있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가만있게 하지 않아요.

진짜 형제는 가난한 형제가 있으면 잘 살도록 도와주고 싶어져요.

그래서 바울은 서로 짐을 같이 져서 평균케 하라고 하는 겁니다.

 

고후 8:13-15절.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건 마치 부모가 잘 사는 형에게 못사는 동생을 좀 돌보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재벌 형은 가난한 동생을 외면하지 않아요.

부모는 형이 동생의 곤궁함을 해결해 주길 바래요.

그래서 바울도 부모 된 심정으로 서로 돌아보아 평균케 하라고 합니다.

 

오늘은 이상하게 연보하라는 것으로 말하게 되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바울의 권면도 할 수가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어요.

연보하라고 하면 행위주의자로 몰아가니까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물질에 인색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물질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자기 부인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관념적 신앙인 겁니다.

 

십자가는 살아 있는 능력이에요.

나를 부인하고 해체시키는 능력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늘 십자가는 우리를 죽이는 모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을 말할 때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 잘 새겨보세요.

 

약 2:14-17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너희가 믿음이 있느냐?

그런데 어째 교회 안에 헐벗고 굶주린 형제가 있는데 모른 척 할 수가 있느냐?

교회 안에 헐벗고 굶주린 형제가 있는데 말로만 따습게 입으라! 배부르게 먹으라! 고 하는 것을 책망하고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입으로 조잘조잘하는 신앙은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준 적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없으니 교회 안에 형제가 남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한 성령을 마셨으면 어떻게 나 몰라라 할 수가 있느냐! 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에요.

 

이건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런 믿음이 있는지 스스로 확증해 보라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는 이런 자기 부인이 들어가 있어요.

사도들은 지금 그 십자가의 능력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늘 자기 신앙을 점검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어그러져 있는지를 알아야 해요.

하나님은 이렇게 요구하시는데 난 저렇게 반응하는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깨닫고 이러함에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살고 있음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물질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재물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악당들인 겁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아도 재물 없으면 못산다고 아우성을 치잖아요.

이런 악당들이 살고 있는 배후엔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러니 환경 탓하지 말고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모든 것을 받고 살고 있음에도 항상 받지 못해서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잘나서 싸운 이김이 아닌데도 우린 늘 우리가 잘나서 싸운 이김이라고 살았습니다.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승리하심으로 주어진 전리품인 것을 알고 범사가 감사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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