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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35강. 죄인의 한계와 실상 (창 19:30-38)

by coroa 2021. 4. 5.

 

♣ -.35강. 죄인의 한계와 실상 (창 19:30-38).-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이 참 난해합니다.

인간의 윤리 도덕적인 기준으로 이해를 하면 전혀 이해를 못합니다.

왜 성경에 이런 추접한 얘기를 써놓았을까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추접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추접한 죄인들을 구원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흐르는 한 사상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최초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한 것이 노아 홍수로 하셨습니다.

홍수를 벗어나서 노아가 무슨 일을 합니까?

수치를 드러내는 일을 하지요.

타락해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롯이 멸망당하는 소돔 고모라로부터 빼내심을 입습니다.

이것은 홍수 속에서 노아 가족이 구원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소돔 고모라에서 구원받은 그 백성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죄 짓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 입니다.

애굽에서 광야로 빼냈습니다.

애굽의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보여준 것은 애굽은 심판받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에서 건져진 자들이 광야에 나와서 무슨 짓을 합니까?

또 범죄하지요.

이게 인간입니다.

 

옛 말에 개 꼬리 삼 년 묻어 놔도 개 꼬리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착각을 하시는 게 예수를 믿고 나면 내가 변해서 천사가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아니에요.

예수 믿어도 죄는 사라지지 않아요.

 

우리가 착각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구원을 받았으면 내가 개과천선되어 성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그것을 요구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넌 이런 인간이 되라! 이런 인간이 되라! 라고 하는데,

그것은 마치 소귀에 경 읽기와 같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라,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순종을 끌어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치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형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빛으로 다가오면 우리 속에 있는 것이 다 드러나요.

우리는 하나님도 속이고자 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점잖은 모습으로 나오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야 이 놈아! 내가 네 속을 훤히 다 아는데…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어도 마음 속에는 우리의 이욕을 좇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솔직하지 못해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니까요.

하나님도 다 아세요.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내가 참 나쁜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리고 이런 악당이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인간이 결국 이 수준 밖에 안 되는구나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살 궁리만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롯의 딸들이 왜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동침해서 자식을 낳습니까?

왜 금수 같은 짓을 합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왜 종족을 보존하려고 합니까?

자기 이름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도 무슨 일을 해도 내 흔적을 남기려 해요.

 

여러분들이 자식들에게 투자하고 금지옥엽 키우는 것도 결국 그 자식을 통해 내가 실현해내지 못한 것을 이뤄내고 싶은 욕망 때문인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훈육하고 키울 때 모두 자기의 뜻을 그 자식에게 담아 놓는 거에요.

그래서 자식이 부모의 말을 안 들을 때 제일 속이 상한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식을 자신의 연장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자식이 성공하지 못하면 그 부모가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기가 이루지 못한 것을 자식을 통해서라도 이루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그 말을 순순히 듣습니까?

안 들어요.

철없을 때는 듣지요.

철이 들어 자아가 생기면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품안의 자식이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품 안에 있을 때는 부모 말을 들어요.

하지만 품을 떠나면 부모 말을 듣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 애기를 합니다.

아들이 고등학교 때입니다.

교회를 처음 개척하던 때라 교회 안에 자기 친구도 없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이는 그것이 힘들었는데 부모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저는 오로지 이 자식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올바르게 키워야 겠다는 일념만 가지고 있다 보니까 아이에게 율법 식으로 가르쳤어요.

그런데 이 놈이 제 말을 듣나요?

안 듣지요.

 

어느 날 주일 예배 마치고 집엘 갔더니 비디오를 하나 빌려 보고 있는 겁니다.

전 그게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아이를 야단치며 주일날 무슨 짓을 하고 있냐고 했더니

제 손을 딱 잡으면서 ‘아버지! 왜 이러세요’ ‘나도 힘들어요!’ 라고 하는 겁니다.

전 충격을 엄청 받았습니다.

 

그 때 아, 이 아이는 더 이상 내 품의 아이가 아니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대화를 시작합니다.

우리도 그렇잖아요.

아이는 커서도 내 말을 들어 주기를 바라잖아요.

 

그런데 아이는 그 말을 들어 주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이 인생이 따로 있고 아버지는 아버지 인생이 따로 있는 겁니다.

자식들은 부모 마음대로 신앙생활 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는 우리 자식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놈들이 제 바램처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신앙은 세습이 되지 않아요.

제가 자식을 키우면서 위로를 받는 것이 그것입니다.

제 자식이라도 내가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어요.

자식들 신앙을 내가 책임을 진다고 생각하면 힘들어서 못삽니다.

그냥 하나님께 맡겨야 해요.

 

사무엘의 아들들 속에서도 불량자들이 나옵니다.

엘리의 자식들도 불량자가 나올 수 있는 거에요.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혈과 육으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의 자식들을 두고 아버지는 구원받는데 자식은 아니다 그런 말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혈과 육으로는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부르심으로만 가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한 집안 속에서도 택함 받은 자와 택함 받지 못한 자가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여러분들의 자식들을 두고서 여러분의 뜻대로 신앙생활 하지 않는다고 해서 싸우지 마세요.

그냥 기도하는 방법 밖에 없어요.

본인은 안 믿어져서 그러는 거잖아요.

믿음을 내가 줄 수 있으면 얼마든지 주고 싶지요.

 

그런데 믿음은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저 놈들에게도 예수가 좀 믿어지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지요.

이걸 모르면 자꾸만 내 쪽에서 내 아이까지 책임지려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자식, 내 형제, 내 부모까지 책임지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도 주체하기 힘든데 그것을 어떻게 다 감당하시겠습니까?

그냥 하나님께 맡기세요.

어차피 우리가 이 땅에 난 것은 이 세상의 구조 속에서 부모 자식이고 형제자매이지 천국에 가면 아니라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가도 이 구조로 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게 얼마나 불행하겠어요.

천국에 가서도 내가 아비 노릇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해야 한다면 자식 입장에서는 얼마나 원통하겠어요?

 

천국은 그런 구조가 아닙니다.

세상의 구조와 천국의 구조는 다릅니다.

이 세상의 구조는 하늘나라에 일어나는 일들을 모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뿐입니다.

이 땅의 부모와 자식이 있듯이 하늘나라에도 우리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것을 알려 주기 위해 이 세상에 가정이라는 구조를 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가정이라는 구조 속에서 하늘의 것을 깨닫고 그 속에서 내가 이 땅에 온 것 자체가 내 원함대로 온 것도 아니고 내 뜻대로 살아지는 것도 아니니까 하나님께서 내 형제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를 알아서 간섭하시겠지 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위로를 받아야 할 것은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개과천선해서 변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변하는 지향성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의 지향성은 주십니다.

 

우리 몸뚱이는 생각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살아지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 애굽에서 나온 백성들의 앞 뒤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간섭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중간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이 이끄는 대로 밀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원해서 가는 게 아닙니다.

밀려가면서도 곱게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원망하며 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 왜 빼냈을까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이들이 애굽에서는 자기들이 죄인인 것을 몰랐어요.

광야에 끄집어 내 놓고 짤순이가 빨래를 짜듯이 네가 죄인이라는 것을 짜내는 겁니다.

죄가 낱낱이 고발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8:1-3절을 봅시다.

 

신 8:1-3=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빼낸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인간인지 아닌지를 확인시키기 위해서 빼냈다고 합니다.

이것을 ‘시험한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어느 점수가 되면 합격시키고 아니면 낙제시키는 컷 오프 시키는 그런 시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고 너희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시험인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을 하십니까?

원래 창세전 언약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우리가 반듯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날아가 버립니다.

 

창세전 언약의 근거가 은혜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은혜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바탕 화면에 우리의 죄들이 깔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맘대로 죄짓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 죄인인데 스스로 난 괜찮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 그렇지 않나요?

속으로 나는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낫지…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끝까지 자기 자존심을 지키고자 합니다.

우린 모두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너나 저나 다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조금 잘하고 조금 못하고가 있지만 그건 인간적인 평가 기준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 놈이 그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광야로 빼낸 다음 앞 뒤로 불 기둥 구름 기둥으로 막아 놓고 그들 속에 있는 죄들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차별이 없었어요.

모두가 똑 같은 인간으로 규정이 되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사십년 동안 자기 안의 죄들이 드러났어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배워갔어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항상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이 사실입니다.

 

그것을 놓치는 순간 여러분은 여러분의 의를 내놓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래도 이 정도는 했는데…

내가 이 만큼은 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의 심판 속에서 롯과 두 딸을 구원했는데 그들이 또 소돔 고모라 인간들과 같은 죄를 짓고 있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이 구원을 해줘도 죄를 이기지 못하더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하나님의 은혜로 소돔 고모라의 유황불 속에서 구원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종족을 보존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해주시겠지 하고 믿어야 하는데 롯의 딸들은 그것을 못 믿은 것입니다.

 

자기들이 망한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망하는 속에서 건져줬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안 해주시겠느냐 이 말이죠.

해 주실 것이잖아요.

그런데 못 믿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키우면 아이는 그 부모에게 방긋 방긋 웃어주면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서 아버님 어머님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준비는 하셨습니까 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건 아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습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고자 해요.

애굽에서 끄집어내서 홍해 바다를 가르고 인도하시는 분이 뭐가 아쉬워서 안주시겠어요?

매일 만나를 주셨잖아요.

이건 하나님이 살게 해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지요.

자기들 힘으로 살고자 해요.

그래서 매일 내리는 만나를 몇 일치씩 거두는 것입니다.

이게 애굽에 근성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일부러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을 끄집어 내놓고 그들을 자꾸 시험을 하는 것입니다.

애굽에 근성이 죄라는 것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우리고 교회에 와서 자꾸만 고발당해야 해요.

교회가 광야에요.

 

우리 안에는 자기 몸뚱이 챙기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항상 등 따시고 배부른 쪽으로 움직이려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증거는 인간들이 등 따시고 배부르니까 하나님을 떠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좋은 것 하고 편한 것은 못 이깁니다.

 

어려운 건 이겨냅니다.

힘들고 어려운 건 이겨낼 수 있어요.

그런데 좋은 것, 편한 것은 못 이겨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가 망할 때는 항상 등 따시고 배부를 때로 나타난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어요.

인간은 배부르면 반드시 하나님을 떠나요.

자기가 신이 되어 버려요.

그래서 신앙의 적은 부요와 배부름이에요.

마귀는 세상의 것으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어요.

 

우리가 그러고 있어요.먹고 살만 하니까 교회를 떠나잖아요.

옛날에는 교회 오는 것이 즐거움이었는데 이제는 세상 일락이 더 재미가 있어요.

그래서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에요.

로마가 왜 망했습니까?

부패해서 망했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네 나라가 나오지요?

그 중 넷 째 나라가 로마를 상징합니다.

로마 시대 때 예수님이 오셨어요.

 

그런데 넷째 나라인 로마에서 열 뿔이 나왔어요.

열 뿔은 열국을 상징해요.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나라는 로마와 본질이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로마가 부요해서 망했듯이 이 세상도 부요해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이든 세상이든 부요해서 망해요.

성경은 세상 끝은 타락해서 망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타락이란? 세상 것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 17장에서는 음녀로 묘사를 합니다.

 

요한계시록 17:1-6절을 봅시다.

 

계 17:1-6=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계시록 17장 18장에 나오는 음녀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광의적으로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모든 성경은 교회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이 음녀가 되는 것입니다.

음녀는 다른 게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교회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물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물은 사상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뱀이 교회에다가 물을 강같이 토해낸다고 합니다.

이것은 종말의 교회 안에 뱀의 말이 난무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음녀를 일컬어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달리 음녀가 아닙니다.

이 놈도 받아들이고 저 놈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음녀인 것입니다.

 

왜? 교회를 음녀라고 할까요?

모든 사상을 다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가 섞여서 잡탕이 되었어요.

 

홍수가 뭡니까?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합해지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궁창 윗 물과 아랫물을 갈라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노아 시대 때 합해져서 홍수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말과 뱀의 말이 하나가 되는 것이 홍수입니다.

 

마지막 때 교회의 모습이 음녀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먹는 포도주를 음행의 포도주라고 합니다.

음녀가 음행의 포도주에 취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들이 음행의 포도주에 취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에 도취되어 세상의 다양한 것들을 다 끌어 들였습니다.

지금은 교회가 문화 공간이 되었어요.

예배가 문화 행사로 변질 되었어요.

연극 예배를 드린다, 오페라 예배를 드린다하면서 각종 문화 형태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말씀은 사라지고 문화 행사만 남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인간들을 즐겁게 하는 인본주의입니다.

 

옛날 로마가 망할 때 그랬습니다.

매일 무희들을 불러 춤추게 하였어요.

음란을 행하고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고 했어요.

육신의 쾌락을 즐기는 것이 삶에 의미였어요.

 

그게 세상입니다.

지금 교회들이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들이 돈이 많아지니까 이 돈을 어떻게 쓸까 궁리하다가 외국으로 나가는 겁니다.

나가서 놀면서 선교 한다고 해요.

말이 좋아 선교지요.

속지 마세요.

 

물론 선교하러 가는 사람도 있겠지요.

제가 모두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다수가 놀러 가는 것입니다.

 

돈 많은 교회를 보세요.

무슨 전도 대회한다고 하면서 경품으로 TV나 냉장고 심지어 승용차까지 걸어 놨습니다.

이제는 해외 여행을 경품으로 걸어 놓았어요.

이게 결국 음녀입니다.

타락의 모습입니다.

전부 음행의 포도주에 취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6절을 다시 한 번 보세요.

 

6절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음녀가 무엇에 취하였나요?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했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복음 전하는 자들을 죽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짜 복음을 전하고 진짜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은 밀어내고 있어요.

문화 행사를 악이라고 고발하면 좋아 할까요?

당연히 싫어하지요.

 

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들이 누구를 책망합니까?

땅에 거하는 자들이에요.

즉 세상 일락을 즐기는 교회들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단이라고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놀고 싶어 하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그거 아니다 라고 하면 그 말을 들을까요?

안 들어요.

도리어 재수 없다고 하면서 쫓아내요.

이게 죽음당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각양의 사상들이 교회에 물밀듯 들어 와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와 세상의 경계가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것을 지금 우리에게 적용을 해보세요.

 

‘교회’ 라고 하니까 나는 아니겠지 하는데 우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예전에 고귀하게 여기면서 지켜왔던 신앙들이 남아 있나요?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것들이 다 사라졌어요.

복음 핑계대고 안해요.

 

마치 복음 알면 이러한 것을 안 해도 되는 줄 알고 다 버렸어요.

다 넘어져 버렸습니다.

무엇을 빌미 삼아서 넘어졌나요?

복음을 빌미 삼아서 에요.

 

율법 아래 있던 옛날에는 그래도 나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 있었는데,

이제는 복음을 빌미 삼아 그런 것들을 더 버렸어요.

신앙의 단이 다 넘어져 버렸습니다.

그건 우리가 지금 타협을 한다는 것입니다.

 

왜 타협을 합니까?

내 육신 몸뚱이 챙기기 위해서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을 자게 게으름을 합리화 시키고 자기 유익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셔야 해요.

 

복음을 전하면 누구에게서 공격을 받는 줄 아세요?

복음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공격을 당합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 공격하지 않습니다.

 

안다고 하는 자들이 공격해요.

그런 자들이 어떤 줄 아세요?

복음 알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우린 종이에요.

종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종하고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차이가 뭔 줄 아세요?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떠나가면서 이걸 가지고 장사하라고 하니까 그 말에 순종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이 없었습니다.

주인의 말에 그냥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자기 머리를 굴려서 묻어 둔 것입니다.

이게 죄라니까요.

 

종은 자기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피 값으로 우리를 샀잖아요.

예수의 피 값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복음인데,

그 복음을 안다고 하면 이제 내 맘대로 살아도 되겠네? 라는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없겠지요.

 

그런데 그래도 된다는 인간들이 있어요.

제가 지금 이런 자들과 엄청 싸우고 있어요.

자칭 복음 안다고 하면서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과 싸우고 있어요.

 

전화가 자주 옵니다.

첫 마디가 그거에요.

복음 알면 이제 교회 안가도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합니다.

내가 교회인데 꼭 교회 가야합니까? 라고 해요.

 

왜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안합니까?

왜 안 모입니까?

결국 복음을 자기 사욕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놀고 싶은데 복음이 면죄부를 준 것입니다.

자기 합리화를 시켜주는 것입니다.

 

복음은 자정능력이 있습니다.

 

진짜와 가짜를 갈라냅니다.

그래서 복음에 반하는 자들은 복음에 반하는 모습으로 자꾸만 드러내 줍니다.

복음을 가지고 반 복음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그 사람은 아닌 자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에 합당한 삶들은 복음을 가지고 날마다 죄와 싸우는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를 믿기 전과 믿고 난 후에 삶은 극명하게 달라집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엣 날에 회사 다니면서 그랬잖아요.

같이 술 먹다가 어느 날 교회 다니면서 술을 끊잖아요.

그러면 안 믿는 사람들이 회식 자리에서 어떻게 하는가요?

술 안 먹는다고 난리를 치잖아요.

술 안 먹는다고 머리에다 붓고 합니다.

 

전 옛날에 그런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왜 그래요?

사람들은 유유상종으로 모일 때 기쁨을 얻기 때문입니다.

나하고 다른 사람이 있으면 기분 나빠 그 자리에 같이 못 있어요.

재수 없다고 해요.

그러면서 핍박을 해요.

 

저는 지금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면서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은 음녀처럼 많은 물위에 앉아서 음행의 포도주에 취한 모습으로 보고 있습니다.

복음을 철학적으로 공교하게 만들어서 이상한 논리를 펴는 목사의 말을 듣고서 값싼 은혜에 취하여서 자기 수치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인터넷에서 다른 설교 들으시는 것 좋아요.

그런데 걸러서 들으시길 바랍니다.

잘못 들으시면 독약을 마신다니까요.

분별도 할 수 없으면서 잘못 들으면 안 됩니다.

 

원래 그렇잖아요.

어디를 가든지 나쁜 것은 제일 먼저 배웁니다.

외국에 나가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게 뭔지 아세요?

그 나라 욕부터 배웁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뱀의 독이 달콤해요.

인본주의 말이 듣기 좋아요.

자기 행위를 긍정해 주면 좋아해요.

 

지금 보세요.

롯의 두 딸이 소돔 고모라의 유황불의 심판을 봤으면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데 하는 짓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까를 궁리하는 것입니다.

 

아니, 언제 자기들 힘으로 살았습니까?

하나님이 살려주시니까 살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딸들은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롯의 두 딸이 곧 우리입니다.

교회 나와서도 여전히 우리는 우리 방식으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 세상을 소돔 고모라라고 한다면 교회는 소알 성과 같은 곳입니다.

 

‘소알’이라는 말이 ‘작다’는 뜻인데 곧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소알에 왔으면 소알의 법도를 따라야 하는데 소알에 있기도 싫은 겁니다.

그래서 소알을 벗어나 굴로 가는 것입니다.

 

지금 이 두 딸이 아버지를 굴로 데려가서 술을 먹이고 근친상간을 합니다.

우리도 세상에 있다가 교회로 왔습니다.

교회로 왔으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교회로 불러 주셨나 생각하면서 교회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지향성과 방향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여기 와서도 내 몸뚱이 편한 것을 추구합니다.

 

여기 와서도 하나님 나 좀 잘 살게 해 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광야에 빼놓았더니 애굽에 음식을 달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왜 우리에게는 이런 박한 식물만 줍니까

수박도 주고 외도 주고 그래야 우리도 힘을 내서 살 것 아닙니까 하고 따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러고 있잖아요.

말은 ‘예수 천당’ 이러지만

몸은 그와 반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여기가 천국인데,,,

무슨 천국을 사모해요.

 

여러분, 천국은 누가 사모하는 줄 아세요?

여기서 지옥생활 하는 사람이 천국을 사모합니다.

여러분이 등 따시고 배부른 상황이면 절대로 천국 사모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간다니까요.

그래서 성경에서 고난을 일컬어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을 보세요.

고난당함이 내게 유익이라 그러잖아요.

내가 고난당하기 전에는 어긋난 길을 갔는데 고난을 당하고서 주의 율례와 법도를 배웠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매를 맞고 보니까 그 매가 어긋난 길을 가는 나를 옳은 길로 돌려 세우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참 아들들은 징계한다고 합니다.

징계하는 목적이 어그러진 길에서 돌이키게 하고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보면 은혜의 포도주에 다 취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차라리 복음을 몰랐을 때는 나와서 기도도하고 열심히 모여서 봉사도 하고 충성도 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부터 모든 것을 놔 버렸습니다.

아무것도 안하는 식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봉사할 것도 없고 모일 것도 없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음행의 포도주에 취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왜 술 취하지 말라고 하겠습니까?

술이라는 것은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켜버립니다.

성경에서 술 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을 받으라 하지요?

그러면 역설적으로 성령 충만하지 않은 모든 것이 술 취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소주 맥주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을 입지 않은 모든 것이 술 취하는 게 되는 겁니다.

그 술취함이 결국 육신의 쾌락을 쫓아가게 하고 세상을 쫓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다루어 가실 때 좋은 환경에서 끄집어 내놓고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을 봇물처럼 쏟아내게 하십니다.

이게 참 은혜입니다.

인간은 가장 좋은 환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오는 게 아니라 자기 사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서에서 그런 말을 하잖아요.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오리니 그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는 때라고 합니다.

이게 고통 하는 때입니다.

자기 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나 밖에 없습니다.

이게 말세입니다.

 

지금 재밌는 게 잘 보세요.

롯의 두 딸이 아버지와 상관을 해서 낳은 두 아들이 누구입니까?

모압과 암몬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이 모압과 암몬 백성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이들은 저주받은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비를 통해 자기 스스로 종족을 보존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서 들어가는 곳이지 자기 힘으로 들어가서 사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힘을 허용하지 않아요.

 

그래서 롯의 두 딸이 자기 힘과 자기들의 방식으로 종족을 보존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성을 훼손하고 가리는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모압과 암몬 족속은 여호와의 총회에 못 들어 오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걸 또 역설로 이해해 보세요.

중요합니다.

잘 들으세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혈과 육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올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롯의 두 딸이 자기들의 힘으로 종족을 보존하고자 한 족속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못 들어오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가능성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오게 만들었잖아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똑같은 적용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도 이스라엘 혈통이니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구원 받는다 이런 것은 없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속에서도 혈과 육으로 일을 하시지 않고 거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성으로 부르심을 입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속에 표면적 이스라엘이 있고 이면적 이스라엘이 있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할례가 있고 마음의 할례가 있다고 하는 거에요.

육신의 할례는 내가 할 수 있지만 마음의 할례는 내가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해 줘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 영을 보내 주시면 마음의 할례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속에서도 혈과 육으로 구원받을 수 없게 하기 위해 인간의 가능성을 가지고 나오는 자들은 철저하게 배격을 시키는 것입니다.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는데 성경에 보면 모압 족속에 속한 사람 중에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 간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인가요?

룻입니다.

룻은 모압 여자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할아버지를 낳습니다.

 

그 룻이 신약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가 있습니다.

그러면 룻은 어떻게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 갈 수 있었습니까?

은혜입니다.

 

이게 참 재밌는 것이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 베들레헴에 살고 있는 나오미를 모압으로 보냅니다.

나오미가 모압에 가서 며느리를 얻었는데 그가 룻입니다.

 

룻은 시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베들레헴으로 따라 옵니다.

그리고 보아스에게 은혜를 입고 아들을 낳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게 하여서 나오미를 모압에 보낸 것은 모압에 있는 룻을 구원하기 위해 보낸 것입니다.

 

이러면 나오미는 모압에 여호와의 사자로 간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룻은 자기 혈통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 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룻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입니다.

이방인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자격이 안 된다니까요.

그런데 그 이방인인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은 조건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은혜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이 초지일관 말하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은 계속해서 기각시키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봐야 할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내 꼬라지로 나가는 것이 아니니까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시란 말입니다.

무엇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의 근거를 가지고서,,,

 

믿음이라는 것은 내 것을 가지고 나아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선물로 다 줬습니다.

선물 받은 사람은 그 선물 받은 것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고 난 후에도 우리는 자기 의를 앞세우고자 해요.

로마서 7장에 뭐라고 그러나요?

우리 안에서 두 법이 싸운다고 합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성령 충만을 입고서 쓴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안에 두 법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싫어하는 이 마음은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버젓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내 안에 두 법이 있구나 라고 한 것입니다

두 법이 있다는 것은 이것을 통해서 나는 내 힘으로는 될 수 없는 것이구나, 내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지금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어떻게 해서 구원을 얻은 줄 아느냐?

너희들의 조건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은혜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이나 환경을 탓하지 말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이 하나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꼬라지를 보는 순간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꼬라지를 합리화 하지 마세요.

죄인이 죄 짓는데 뭐 어때 그러지 마세요.

은혜는 자기 합리화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에요.

은혜는 자기 연약함의 통절함을 알 때 가치가 드러나요.

 

제가 전에 비유를 할 때 이 세상은 탄광과 같다고 했습니다.

탄광촌에 사는 사람은 자기가 아무리 깨끗하게 살아도 연탄재가 날아 와서 옷을 더럽게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탄광촌에 사는 우리를 위해서 드럼 세탁기를 하나 주셨습니다.

 

왜 주셨나요?

옷이 더러우면 빨아 입으라는 것입니다.

세탁기를 줬는데도 옷을 빨아 입지 않는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연탄 공장 옆에 사는 우리에게 연탄이 날려서 옷이 더러운 것을 알기 때문에 세탁기를 줘서 빨아 입으라고 준 것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오해하기를 어차피 연탄이 바람에 날려서 옷은 더러워지는데,,

그러면서 옷을 씻지 않고 그대로 입고 살면 이게 악이라니까요.

 

이게 꼭 지금 복음을 곡해하는 사람들의 말과 같습니다.

그들이 뭐라고 그러나요?

어차피 인간은 죄인기이 때문에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막 살아도 죄이고 막 살지 않아도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막 살라고 하는 거에요.

 

이게 꼭 세탁기를 가져다 줬는데 세탁도 안하고 어차피 더러운데 하면서 계속 더러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주셨어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를 깨닫고 이런 죄인이 용서받고 살고 있구나 하는 그 은혜를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통해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죄가 고발당하면 당할수록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셨구나 하는 이 용서가 믿어지게 해주신다니까요.

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드럼 세탁기와 같은 것입니다.

 

내가 비록 죄 가운데 죄의 몸으로 이 땅에 살지만 이 죄의 몸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이 죄인 줄 알면 그 다음엔 주님 은혜 앞에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피 흘려주심으로 내가 삽니다 라는 감사로 나와야지요.

그런 사람들은 또 나가서 죄짓자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니까요.

 

사도 바울이 그러잖아요.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지을 수 있느냐?

결단코 그럴 수 없느니라!

사도 바울 시대에도 그런 인간들이 있었다면 지금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자들에게 어떻게 했어요?

욕을 끌어 부었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 교회에 일어났던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영지주의가 있었듯이 지금도 있는 것입니다.

영지주의 자들이 머리로는 복음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행동으로는 삶으로는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머리로는 아는 사람들이 손과 발은 움직이지 않아요.

말로는 복음! 복음! 하지요.

 

이런 자들을 일컬어서 사도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입으로는 주를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돌아서라고 했어요.

 

요한계시록 3장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세요.

이걸 잘 아셔야 합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지고 성경을 썼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신약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경도 교회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전 세계의 역사에 펼쳐진 모든 교회를 상징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이 역사 자체를 가지고 만물 속에서 일을 하시는데 교회를 통해서 만 대로부터 감춰진 일을 증거하시는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 자체가 교회 시대와 같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온 시대 교회를 총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 시대의 맨 마지막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 역사의 마지막 때의 모습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3:14-18 입니다.

 

계 3:14-18=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 어떤가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스스로 다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는가요?

곤고하고 가련하고 눈 멀고 벌거벗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약 사서 발라보라고 하십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라고 하지요?

행위가 무엇입니까?

삶의 모습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데 실제 살아가는 모습은 눈 멀고 가련하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약을 사서 발라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경 앞에 너를 세워 보라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믿음으로 살았던 성도들과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워 봤을 때 네 꼬라지가 과연 정상이냐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이 어느 목사의 말을 듣지 말고 제발 성경을 상고해 보시라는 겁니다.

성경 속에 믿음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의 모습들이 나와 있다니까요.

그러면 그 사람들의 모습과 나를 한 번 비교를 해보란 말이지요.

 

오순절 초대 교회 의 성도들이 성령 받고 나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습니까?

막 살았나요?

아닙니다.

죄인이 죄 짓는 게 어때 하고 죄 짓고 살았나요?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어떤 목사가 공교하게 지은 말에 현혹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 믿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발 오해하지 마세요.

 

말씀은 그렇게 호락호락 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함부로 다룰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논리를 개발하고 그 논리에 근거해서 말을 만들지 마세요.

목사들은 그런 것이 있습니다.

 

목사들은 자기가 성경을 보면서 자기의 논리를 만듭니다.

그 논리를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성경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 구절의 논리에 인용당해야 하는 것이지 거꾸로 내 논리를 만들어서 성경 구절을 도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을 도둑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 자들이 꼭 말씀을 합리화 시켜서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듣는 사람들은 솔깃해서 넘어갑니다.

 

생각을 한 번 해보세요.

예수 믿으면 막 살아도 됩니다, 라는 말에 누가 제일 솔깃하겠어요?

막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겠지요.

막 살고 싶은데 그동안 율법으로 못하게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들어 와서 막 살아도 된다고 하니까 맘대로 사는 것입니다.

결국 막 사는 것으로 인하여서 너는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치 않는 인간이라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성경을 아전인수식으로 끌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는지 상고하시란 말입니다.

성경을 봐야 여러분의 신앙이 올바로 가고 있는지 점검을 받을 수 있다니까요.

 

성경을 보면 믿음으로 살아갔던 성도들이 나와 있습니다.

사도들이 누구랑 싸웠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그들과 나를 한 번 비교해 보세요.

그러면 내가 지금 가는 길이 맞는지 그른 것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신앙이란 날마다 싸우는 거에요.

내 안에 있는 옛 사람과 싸우는 것입니다.

물론 실패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낙망 하지 마세요.

성경이 롯의 두 딸에 사건을 기록해 둔 것은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주셨더라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롯의 두 딸들이 지옥 갔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들은 소돔 고모라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들이에요.

구원을 받은 자들임에도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도 이런 죄성들이 드러나는 것이라는 것을 고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니고 결국 이런 죄인들이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긍휼뿐이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말씀에 비춰보면 형편없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거기에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살고 있다는 이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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