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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34강. 여호와께서 인자를 더하심 (창 19:12-29)

by coroa 2021. 4. 2.

 

♣ -.34강. 여호와께서 인자를 더하심 (창 19:12-29).-

-.정낙원 목사

 

베드로는 소돔 고모라의 유황불 심판을 장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멸하실 것을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일어났던 이 일들은 신약에서 일어날 일들을 샘플로 미리 보여 주신 것이니까 잘 보고 경계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성경을 읽으실 때 구약은 항상 신약을 전제로 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신약의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소돔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경계로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구약에 일어났던 사건들은 동일하게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일어났지만,

신약에서는 교회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소돔 고모라를 광의적인 의미에서는 온 세상을 말하는 것이지만 교회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지금 이 시대 교회를 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항상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생각은 교회 안에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만 있었으면 합니다.

그게 우리의 바램입니다.

저 역시도 우리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이 다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 함께 주님을 찬양하는 자이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뜻이고 저의 바램입니다.

 

구약의 믿음에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집안을 보면 그렇지도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한 집안 속에서도 이스마엘과 이삭을 두셨습니다.

이삭의 집안에도 에서와 야곱처럼 택하지 않은 자와 택한 자를 두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원함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런 구조를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을 큰 의미로 보면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 안에도 이스마엘의 계열이 있고 이삭의 계열이 있습니다.

에서의 맥으로 난 자가 있고 야곱의 맥으로 난 자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 구조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저 사람이 암까마귀냐 숫까마귀냐를 판단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판단할 것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지 내가 누구의 신앙까지 간섭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늘 강조하지만 우리는 항상 포도원 품꾼 비유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놀고 있던 사람들이 자원해서 들어 간 것이 아닙니다.

포도원 주인이 찾아 와서 필요한 사람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다 놀고 있었는데 주인이 찾아 와서 어떤 사람은 아침 일찍 들여보내고,

어떤 사람은 낮 열두시에 들여보내고, 어떤 사람은 오후 늦게 들여보낸 것입니다.

 

이걸 안다면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 온 것으로 다투면 안 됩니다.

불러주신 그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주인의 은혜를 알라고 주인이 각각 다르게 부르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일찍 들어 온 사람이 있고 늦게 들어 온 사람이 있습니다.

쉬운 말로 일찍 복음을 깨달은 사람이 있고 늦게 깨달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혹시 다음 주에 깨달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누가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심판 받은 자들이지 누구를 심판 할 자들이 아닙니다.

남의 신앙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항상 복음을 알게 되었더라도 조심해야 할 부분들이 그런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또 합니다.

과거에 복음을 깨닫고 나서 저는 저 혼자 복음을 아는 줄 알았습니다.

그 때는 온 세상을 논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다 틀렸고 나만 복음을 아는 것처럼 했습니다.

멀지 않아서 그것이 얼마나 철딱서니가 없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잘라내고 가르는 일을 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많이 미흡하지만 붙이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고 법이 튀어나와서 정죄하였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은혜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저 분이 지금 제 맘에 안 들더라도 어떻게 하든지 이해하고 참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제가 비판하고 정죄하고 할 때 하나님께서 저를 각성시키신 것이 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다가 하나님께서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야 이놈아! 너도 저들 중에 있다가 부르심을 입었는데,

네가 뭐 잘났다고 저들을 비판하고 판단하느냐,

넌 살려야 하는 복음으로 죽이는 일만 하느냐! 라고,,,

 

그리고 난 후부터 기도가 바뀌는 겁니다.

옛날엔 기도 속에 은혜와 긍휼이 없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은혜와 긍휼이 담겨져 있어요.

 

예전엔 누가 나를 시비 걸면 원수 갚아 달라고 했어요.

그러지 이제는 저들이 몰라서 그러니 용서해 주세요 라고 해요.

‘하나님! 저의 눈을 열고 마음을 열어서 복음이 들려지고 깨달아지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여지게 해 주셨던 것같이 저 사람에게도 복음을 들려지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제가 변하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예전엔 복음을 구경만 했고 지금은 복음을 먹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저에게 누가 이단이라 하면 ‘하나님! 저 사람 눈 좀 열리고 귀가 열려서 복음 좀 들려지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면 마음이 좀 넓어져야 합니다.

이게 배부른 사람입니다.

배불러야 관대함이 나오잖아요.

우리 안에서 관대함이 안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이 배고파 있다는 것입니다.

만족을 못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먹어서 배가 부르셔야 해요.

힘 있는 사람은 일일이 시시비비하지 않아요.

그냥 지나칠 수 있어요.

배가 부르면 주변에서 무슨 애기를 하든지 그냥 웃을 수 있습니다.

씨익 웃어줄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같이 맞받아서 싸우지 마시구요.

신앙생활은 우리가 마귀 짓을 하면서 누구를 판단하고 누구를 넘어뜨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은혜를 받았고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아 가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참 감사함 것이 롯과 롯의 사위를 비교를 해봤습니다.

롯이나 롯의 사위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둘 다 멸망 속에서 구원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롯은 들었고 롯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어요.

실은 롯도 밍기적 거렸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와의 천사가 롯을 찾아 와서 여호와께서 이 소돔 고모라 성을 멸하기로 했으니까 도망가라고 알려줍니다.

그러자 롯이 아멘하고 도망갔습니까?

안 가더란 말이지요.

아직도 미련이 남아서 밍기적거립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롯을 ‘재촉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이끌어냈다’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가 홍수 오기 전에 방주를 짓고 난 다음 들어가지 않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그 식구들을 집어넣고 문을 닫아 버린 것과 같습니다.

 

지금 롯도 마찬가지 입니다.

천사들이 이끌어 내지 않으면 롯은 절대로 떠나질 못합니다.

왜요? 여기에 자기의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피 땀 흘려 일구어 놓은 재산이 다 있어요.

그런데 어찌 떠나겠어요.

 

신앙을 너무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명령하여 ‘예’ 하고 순종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구원은 우리가 순종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하심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실력으로 주어지는 것을 알아야 해요.

 

롯의 구원도 롯이 순종으로 타나난 것이 아니에요.

여호와께서 인자를 더하심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열심’ 이라고 합니다.

 

구원을 계획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일을 이루어 가시는 분도 여호와시고,

온전히 성취하는 분도 여호와이세요.

 

구원 속에는 여호와의 일하심만 가득 담겨져 있어요.

우린 이 세상에서 그걸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라고 고백을 했어요.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다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아브라함이 떠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아브람을 끌고 나온 겁니다.

 

성경에서는 아브람이 말씀을 좇아서 떠났다고 합니다.

이 말은 말씀이 앞서 가니 내가 쫓아가겠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 반대에요.

말씀이 아브라함을 붙잡아 끌어 당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를 끌고 갈 때 안 가려고 하는 소를 어떻게 끌고 옵니까?

소는 곱게 끌려오지 않습니다.

질질 끌고 옵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을 쉽게 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질질 끌고 오신 것입니다.

여기가 어떤 자리인데 이런 자리에 있겠습니까?

 

큰 교회에 가 보세요.

얼마나 분위기 좋습니까?

최상의 시설에 최고의 서비스가 주어집니다.

최고의 음향 시설에 성가대에 웅장하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반주자가 없어서 찬송도 제대로 못하는 곳입니다.

그렇잖아도 음치라서 못하는데 반주도 없으니까 찬송하는 게 아주 힘듭니다.

이런 환경 속에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모인 것입니까?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 하나 듣고자 여기에 모인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권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이 자리로 끌고 온 것입니다.

결국 말씀이 행한 결과입니다.

우린 모두 등 따시고 배부르고 좋은 환경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저도 큰 교회 하고 싶어요.

때로는 저도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저도 멋진 곳에서 마음껏 한 번 외치고 싶습니다 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건 네 뜻이고, 네 생각이지,

복음이 언제 그렇게 전해졌느냐?’ 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그렇게 전해 진 적이 없습니다.

혼자 투정 부려 본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그렇잖아요.

복음이라는 것은 생명이잖아요.

이 생명이라는 것은 아스팔트 위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거름 더미, 시궁창 같은 곳에서 자랍니다.

 

하나님의 일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극히 미미한 자들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지 잘난 놈들이 했다 하면 자기들이 다했다고 자랑해요.

 

오늘 소돔 고모라의 사건 속에서도 여러분은 그걸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롯에게 ‘인자를 더하셨더라’

 

이게 복음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소망이 그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인자를 더한다.’

 

그래서 저는 이사야서 43장의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야곱아 내가 너를 창조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러나니,

네가 물 가운데 지날지라도 물이 너를 엄몰치 못하고

불 가운데 지날지라도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할 것이라’

왜냐하면 ‘너는 내 것 이니까’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이 끝까지 인자를 더하셔서 지켜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 같은 환경이 닥치고 불 같은 환경이 닥친다 할지라도 결국 우리의 구원은 포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찜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찜을 당하니까 물에도 들어가게 되고 불에도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세요.

 

하나님의 찜을 당하니까 물에도 들어가게 되고, 불에도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찜 당하지 않았으면 물에 들어가지도 핞고 불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지요.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우리는 세상에서 죄인이에요.

왜냐하면 세상과 원수이신 예수님의 것으로 찜 당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예수를 죽였으면 우리도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물 길을 걷는 것이고 불 길을 걷는 것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던가요.

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너희도 담대하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비단길을 가는 것이 아니에요.

가시밭길이에요.

세상의 화려함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이에요.

이 길은 우리 스스로가 갈 수가 없으니까 하나님이 강권하심으로 끌고 오신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말씀이 여기에 있으니 감사한 것입니다.

비단길이 아니더라도 감사하고,

웅장한 오케스트라고 없어도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덮쳐 오니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수많은 사람이 여러분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여러분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여러분의 심령은 곤고해집니다.

제가 과거에 복음을 몰랐을 때 율법으로는 엘리야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열심이 특심했어요.

온 교회가 저를 칭송했다니까요.

심지어 목사님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를 본 받으라고 했었으니까요.

워낙 열심과 충성이 대단했으니까요.

성경도 많이 알고 기도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좌우지간 대단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영적으로 딜레마가 오는 것입니다.

딜레마가 오니까 이게 아닌데 싶은 겁니다.

수많은 사람이 저를 칭찬해도 내 안에서 이거 아닌데 라는 영적인 곤고와 우울증에 빠지니까 사람이 미치는 거에요.

 

오죽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겠습니까?

말씀에 갈급함으로 너무 힘이 들어서요.

집도 나와서 도망도 갔었다니까요.

말씀에 대한 곤고함이 오면 미쳐요.

영적 우울증이 그렇게 무서워요.

 

결국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이 말씀을 찾아 나서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어디 말씀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가요?

하루아침에 알아지는가요?

여기저기 헤매면서 별 희한한 목사와 집단들을 경험했어요.

수많은 사기꾼들이 광명의 천사처럼 위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아~! 이 세계가 정글이라는 것도 체득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과정을 겪게 하신 것이라 감사가 되어요.

물 가운데 불 가운데를 지나온 겁니다.

아 내가 버린 자식은 아니었구나 생각하니 감사하지요.

 

수많은 사람이 여러분을 다 인정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야지요.

내 안에 증거가 있어야지요.

그 하나님의 증거가 내 안에 있으니까 이것 이상 기쁜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인정 안 해도 하나님이 인정하면 되는 겁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좇아요.

그 사랑!~

두려움을 내어 쫓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해요.

창세전 언약이 믿어지면 두려움이 사라져요.

담대함이 생겨요.

배짱이 생긴다구요.

 

그래서 제가 구원이라는 것을 노름판의 장땡으로 비유를 하는 것입니다.

노름판에서는 단풍 잎사귀 두 개가 능력이에요.

힘이에요.

단풍잎 두 개를 기자면 여유가 생겨요.

느긋해져요.

이건 가진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라니까요.

절대 변할 수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증거가 그래요.

그 증거가 언약이에요.

창세전 언약입니다.

그 증거를 여러분이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지금 보세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올 때 그에게 복속된 자가 따라 나왔습니다.

누구입니까?

롯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비유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예수님 홀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는 자기 백성의 명부를 들고 오셨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기 백성을 찾으러 오신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아무나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만 구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 자기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 롯 속에 저와 여러분이 다 들어 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를 멸망시킬 것을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자 아브라함은 롯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저 속에 내 조카가 있습니다.

내 피붙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내 이름을 봐서라도 롯을 살려 달라고 하나님과 담판을 짓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기도애요.

이것은 지금 이 시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다 타락하고 이 세상이 멸망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저 울산에 목양교회 백성이 있습니다.

저 미국에 모퉁이돌 식구들이 있습니다.

저들이 다 내 백성입니다,

 

제가 작년에 모퉁이돌 소식을 듣고 미국에 갈 때 하나님께서 제게 감동을 주신 것이 그것입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저들이 울고 있느니라

전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그 분들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니까 이사야서 말씀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저들의 눈물을 위로해주라고 할 때 제가 굉장히 많이 울었습니다.

아…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지금 아브라함을 보세요.

소돔 고모라가 멸망하는 것 뻔히 알아요.

하나님의 계획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알려 줍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은 저들 속에 롯이 있다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롯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나 찾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 만남이 준비 되어 있다니까요.

 

롯은 누가 올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롯의 마음속에 성문 어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을 준 것입니다.

그 때 천사들이 나타나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복음 안에서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일련의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볼 때 사도행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대로 일어나는 것이 보여져서 한 편으론 기쁘기도 하고 한 편으론 두렵기도 합니다.

 

예레미야가 그럽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며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내가 너를 알았고 내가 너를 택했다고 하니까

예레미야가 그러지요.

하필 왜 나입니까?

 

예레미야가 사역할 당시는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시점입니다.

그 시점에 독야청청 예레미야 혼자 외쳤다고 생각해 보세요.

수많은 궁중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하는 얘기가 ‘평안하다 평안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절대 망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혼자서 망한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이방인의 손에 붙였으니까 곱게 끌려가라고 했습니다.

모두들 예레미야를 민족의 반역자라고 손가락질 하면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일이 예레미야에게 얼마나 아팠으면 그의 외침이 왜 하필 나입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 때로는 이 복음 전하는 것이 싫을 때가 있습니다.

누가 알아주기를 합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신 그릇일 것 같으면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반항한다고 될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가 우리에게 덮쳐 오면 모두 저주받아야 할 그 곳에서 나를 건져 주시고,

그 복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것을 전할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을 붙여 주세요.

이게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는 종들을 보내서 만나게 해주십니다.

그 만남을 통해서 듣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롯과 롯의 사위 이 둘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가서 롯은 재촉해서 인자를 더하는데 왜 롯의 사위는 안 해줍니까?

왜 롯의 사위는 가만 내버려 둡니까?

롯의 사위는 지금 뭐라 그래요?

‘농담으로 여겼더라’

농담으로 여겼다는 것은 우스개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과 아닌 자들이 드러납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말씀으로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이 될 때 산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생명을 존재케 하고 살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생명(生命)이라는 말 뜻이 뭡니까?

한문으로 쓰면 ‘날 생(生)’에 ‘명할 명(命)’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살으라고 하기 때문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저와 여러분들에게 살고 있으라고 하시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흙으로 돌아가라 하면 돌아간다니까요

내가 죽고 싶어서 죽고,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살게 해주면 살고 죽게 하면 죽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이것을 인정합니다.

불신자들은 안하지요.

그 차이입니다.

신자는 왜 인정합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계속해서 생명으로 내 속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이 계속해서 나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믿어지게 합니다.

 

말씀과 연결이 끊어진 자들은 롯의 사위처럼 농담으로 여깁니다.

지금 이 세상 망한다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이 망한다고 생각하겠어요?

 

제가 설교를 준비하다 보면 영화를 통해서도 은혜 받는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며칠 전에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이 말씀과 너무 연관이 되어서 일부러 찾아보았습니다.

꼭 소돔 고모라 멸망이야기입니다.

 

지금 화산이 터져서 곧 다 쓸어버릴 판인데 거기서 이권을 챙기는 사람도 있고 원수 갚겠다고 하는 자도 있습니다.

지금 용암이 쏟아져 재앙이 덮치는 데도 말입니다.

이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모습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멸망’이라는 것은 어느 날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멸망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신다는 것은 어느 날 쑤욱하고 오는 게 아닙니다.

‘재림’이라는, ‘파루시아’라는 말은 계속해서 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역으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저와 여러분이 어느 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천국에 가고 있다니까요.

이해되세요?

내가 지금 천국을 가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이 천국을 몰고 오세요.

 

생각을 해 보세요.

천국이 우리 안에 침노해 왔습니다.

천국에 침노당한 자는 지금 천국으로 살고 있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으로 살고 있고 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가치로 살지 않고 롯과 같이 성문 어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누가 줍니까?

하나님께서 주시지요.

 

여러분들이 덜 똑똑하고 세상 사람들보다 덜 영악해서 그들과 다르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더 똑똑하고 더 영악합니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로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인자를 더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덮쳐 오니까 그 은혜가 나로 하여금 다른 가치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잠깐이다.

오실 이가 곧 오시리니…

곧 오신다 조금만 기다려라

다른 사람은 다 농담으로 여길지라도 넌 다르지 않느냐?

왜냐하면 내 안에 말씀이 달음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달음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육적으로는 다 거짓말 같은데 거짓말로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로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어지니까 또 사실로 증거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떨어지는 곳에는 반드시 두 가지 반응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그 복음을 말씀으로 무겁게 듣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가볍게 듣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그 현장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너희들이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사흘 만에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가 지금 너희들 속에 와 계신다’

이런 얘기를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어찌할꼬 하는 통회와 자복이 일어나는데

어떤 이들은 이를 갈며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끝이지 어떻게 다시 살아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사고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 주시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이 세상이 왜 망하느냐고 하겠지요.

 

저는 어렸을 때 사는 집이 바닷가와 바로 붙어 있었습니다.

바다와 집이 50미터도 안됐습니다.

방축 하나 쌓고 살았는데 매 년 태풍이 오면 파도가 집 안까지 덮치곤 했습니다.

온 동네가 모두 물바다가 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사람들이 수백 년을 살았습니다.

떠나지 않습니다.

왜 그래요?

늘 해마다 겪어 왔던 일이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가전제품이라도 있으면 못살았겠지요.

그거 아까워서도 멀리 이사를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때는 세간살이라야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물결이 와서 쓸어 가도 갔나 보다 하고 또 그 자리에서 삽니다.

자식 놓고 수 대를 그렇게 살아 온 것입니다.

 

우리 의식이 그렇습니다.

태풍 온다고!

오겠지 뭐…

그렇게 우리는 모두 농담으로 듣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 세상 멸망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안 듣습니다.

안 믿습니다.

천재지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바다가 우는 소리에 너희가 기절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는 과거에 그걸 농으로 여겼습니다.

바다가 운다는 것이 무슨 소린가 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지금 이 시대 쓰나미가 그것입니다.

전 그렇게 봅니다.

 

바다가 운다는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

말씀이 그 당시엔 은유적으로 표현을 했지만 그런 것들이 지금은 가시적으로 다 드러난다니까요.

그런 것들이 깨달아지고 눈에 보이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이 사실이 진짜일 것 같으면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되는 사실도 진짜지요.

사실이지요.

그러니까 소망이 생기고 감사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모두 멸망당한다 해도 그 중에 자기 백성은 건져내셨군요.

그러니까 이 롯의 이야기가 결국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이 보여질 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그들의 역사가 아니고 내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이 세상이라는 역사 자체는 ‘그 분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역사입니다.

그래서 ‘history’라는 역사는 ‘His Story’ 그 분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분의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만이 아니고 축약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내 이야기인 것입니다.

내가 세상이라니까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할 때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이

보라 ! 온 세상이 그를 쫓는도다 라고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온 세상이 누구인가요?

자기 백성들입니다.

그것을 온 세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온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나를 가지고 그 분의 이야기를 써가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다 그 분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이야기를 누가 씁니까?

그 분이 쓰시지요.

 

그래서 그 분이 우리 안에 와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신 것은

야곱아 너를 내가 창조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기 때문에 그 때부터 야곱은 여호와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 속에 여호와의 인생이 써져 가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그렇게 간섭해 가고 계십니다.

롯도 마찬가지입니다

롯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롯을 구원해내시는 겁니다.

 

롯 속에 누구의 이야기가 있습니까?

자기 백성들의 이야기가 있지요.

여호와께서 일하심의 이야기가 있지요.

롯의 일생 자체가 여호와의 일하심의 이력서에요.

롯의 구원 이야기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반드시 구원해 내시더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 이야기도 예수님께서 일을 하신 이력서이에요.

여기에 우리의 소망을 두고 감사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우리가 망할 수 있습니다.

병들어 아플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보세요.

죄 아래 난 이 몸은 아무리 건강해도 결국 병들어서 늙고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잖아요.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덧입는 장막이 있으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게 믿어지면 두렵지가 않지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어떤 성경을 보시더라도 그 안에서 소망을 찾아 내셔야 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렇게 찾아내시는구나!

그 얘기가 결국 내 이야기였구나!

여호와의 천사가 밍기적거리는 롯의 등을 떠밀어 끌어내는 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봤을 때 우리는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롯은 끄집어 내 놔도 또 불안해합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지려고 합니다.

저 산은 너무 멀고 가다가 재앙을 만날 것 같으니 가까운 곳으로 가게 해달라고 합니다

롯은 끝까지 자기 꾀로 살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믿음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할지라도 우리 역시 은혜 받을 그 때 뿐입니다.

문만 열고 나가면 내 방식대로 산다니까요.

이게 인간입니다.

 

여러분 방식대로 사세요!

살다 보면 하나님께서 또 간섭을 하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찜할 때도 하나님께서 하시고 찜한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실 때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믿어지면 여러분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잠들 수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엄마 품에만 있으면 거기가 전쟁터라도 신경쓸 게 없습니다.

엄마 품이 결국 모든 전쟁을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옛날 6.25 때 그랬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한다는 이 사실이 믿어진다면 두렵지가 않지요.

이게 안 믿어지니까 두려운 것입니다.

온갖 꾀를 써서 살고자 하지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서 달음질을 해서 목사가 하는 설교가 내 속에서 아멘으로 들려지고 그 이야기가 목사가 하는 얘기가 아니라 내 얘기로 들려지면 여러분들은 오늘 대박 맞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면 지금 여러분은 농담으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전 진담으로 애기하는데 농담으로 들으시면 전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 진담으로 들려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잖아요.

 

우리가 복음이 들려진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그걸 못 느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무덤에서 잠자는 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하십니다.

그리고 듣는 자는 살아나라 하지요?

 

이 말씀 자체가 이상하지 않나요?

무덤에 들어간 자라면 우리 생각엔 죽은 자잖아요.

죽은 자는 말씀을 못 듣지요.

그런데 죽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데 거기에서 살아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지요?

육적으로는 분명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와라! 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나사로를 죽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냥 잔다고 하십니다.

 

인간의 눈에 생물학적으로 볼 때는 분명히 죽은 것이 맞아요.

그럼 죽은 자는 말을 못 듣잖아요.

못듣는 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셔서 나사로야 일어나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소리 지르며 부르셨을까요?

그냥 말씀하신 겁니다.

그럼 이미 나사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 눈은 봄으로 복이 있고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건 아무나 듣는 소리가 아닌데 너희들이 내 말이 들려진다는 것 자체가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려진다는 이 사실은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며 제 간증을 많이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전 수십 년 동안 예수를 믿고자 했어요.

예수를 믿어야지! 믿어야지! 하고 내 열심을 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안 믿어지는 걸 어떡합니까?

입술로는 믿는다고 하는데도 마음으로는 안 믿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내 열심히 믿음을 만들어 내려고 했어요.

 

사람은 안 믿어져도 얼마든지 믿는 척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마음에 없어도 겉으로는 다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위선을 떨 수 있습니다.

안 믿어지는데 믿는 척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때는 그렇게 믿고 싶어도 안 믿어졌는데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 와서 믿어지니까 이제는 안 믿어지는 게 안 되는 겁니다.

이게 믿어지니까 믿는 거에요!

이게 내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믿어지게 해주시니까 믿는 것입니다.

믿어지니까 그 때부터는 말씀이 들려집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이 들려지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귀에 ‘나사로야 일어나라!’ 하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졌듯이

그러니까 복음이 들려진다는 이 사실은 자다가도 놀라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감격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다 그러려니…합니다.

 

아니에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교회에 사람이 많고 적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그 말씀이 자기 백성을 찾아 갑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품고 있는 내용을 그 사람에게 적용을 시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좇아가서 합니다.

 

소돔 고모라가 망한다 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롯의 마음속에서 믿어지게 하는 일을 해서 이곳은 망하는 곳이구나 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롯의 사위는 농담으로 들었지만 롯은 그렇게 듣지 않았습니다.

 

롯은 소돔 고모라가 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 속에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서 달음질을 하니까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지요.

 

복음의 내용이 뭡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우리가 믿는 것이잖아요.

구약에서와 같이 과거에 우리는 율법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지키는 것을 신앙의 목적으로 두고 열심히 했는데 어느 날 내 안에 영적 딜레마가 오고 우울증이 생기면서 이건 아니데…하니까 아무리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도 곤곤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나서 내가 이뤄야 될 이 말씀들을 예수님께서 다 이뤄주셨다는 것이 믿어지고 이 말씀을 내가 지키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다 지켜주셨다는 것이 믿어지니까 이제는 예수 안에서 내가 비록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낙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아파하고 비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도리어 이런 나 때문에,

내가 이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뤄주신 것이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잘 믿는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 낼 수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낼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린 그냥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제가 구원받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길은 하나님 말씀대로 퍼펙트하게 사시면 됩니다.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버리지 않고 다 지키면 구원받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이 율법을 통해 죄를 알려주셨잖아요.

그래서 율법을 지키면 죄 안 짓는 게 되잖아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율법의 문자 안에 가둬져서 문자적 의미만 가지고 그것만 지키면 되는 줄 알았는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 문자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어떤 율법사가 찾아 오셔서 묻잖아요.

선생이여!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뭐라 그러나요?

말씀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내가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네게 있는 재물을 다 팔아 가나한 사람 나눠주고 나를 쫓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부자 청년이 그 재물로 인해서 고민하며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부자 청년의 오해는 모든 율법을 말씀대로 지키는 것이 율법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을 약탕기에 넣고 졸여서 짜면 이웃 사랑이 나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짜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재물은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된다고 하시는 겁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부자가 왜 지옥 간 줄 아세요?

부자는 날마다 열락하고 호위호식 하면서 자기 문 앞에 있는 나사로를 외면한 것입니다.

그 부자가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켰다 할지라도 그는 율법이 가지고 있는 정신을 놓친 것입니다.

자기 문 앞에 있는 나사로를 외면한 것입니다.

그게 죄라니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율법을 지켜서 얻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너는 안 되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대신 지켜주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두 가지 요구를 완성하셨습니다.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켰습니다.

아래로는 이웃과 관계를 회복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는 담이 있었는데 그것을 허물고 관계를 회복시킨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과 이웃 간에 담이 있었는데 그 담도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그 예수가 우리 안에 오고 보니까 이젠 내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이 되고 이웃 간의 관계도 회복이 되더란 말입니다.

이건 우리가 온전히 살았다 안 살았다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내 안에서 내 이웃을 돌아보는 마음이 생기더란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그 분이 내 안에서 적용을 시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가지고 자기 편지를 써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양 팔 벌려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우리 안에서 양 팔 벌여 형제와 형제가 서로 서로 화목하고 교제하는 이 일들을 벌리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구약의 율법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대신 담당해 주심으로 다 이루셨습니다.

그게 믿어지도록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 성령이 우리에게 오니까 이 사실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제는 그것이 믿어지니까 예수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 어떤 의미에서 제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과거에 율법 아래 있을 떄 보다 못살고 있습니다.

그 때는 억지로라도 지키려고 했습니다.

분을 품지 말라 했으니까 안 되더라도 속으로는 분을 품지 말아야지 했다니까요.

 

요즘 성화주의자들이 그러잖아요.

속에서 분이 나더라도 이불 뒤집어쓰고서도 참으라고 하잖아요.

이빨을 깨물더라도 참으라고 하잖아요.

인간은 의지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안에 말씀이 와보니까 그 말씀이 거울처럼 나를 비춰주니까 내가 이런 인간이었구나 를 알게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는 도저히 설 수 없는 인간이구나,

아무리 소돔 고모라가 멸망 한다 소리쳐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는데 몸뚱이는 롯과 같이 밍기적거리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잘 들으세요.

신앙은 염세주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빌미 삼아서 도피하는 것은 염세주의입니다.

열심히 사세요!

열심히 살되 인간의 한계를 아시라는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정과 욕심을 못 막고 그 나라를 소망하고 살아라 해도 내 몸뚱이는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을 아시라는 겁니다.

정답은 알고 있어도 내 육신은 안 된다는 것을 아시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왜 안 될까?

고민하시라구요.

 

그렇게 안 되는 것을 알 때 ‘주여, 도와 주세요’가 나온단 말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선 그 아들을 보내서 대신 이뤄주셨군요.

그렇게 해서 여러분의 신앙의 끝에는 예수님께서 홀로 이루신 그것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목사는 여러분들과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어떻게든 죄인의 자리로 끌어내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악당인지를 보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됐을 때 여러분은 그 악당의 자리에서 주의 긍휼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를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여 맞습니다!

내가 이런 악당이었는데 이런 악당이 용서받고 살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린 롯의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로 롯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롯을 하나님은 기어코 끄집어내시더란 말입니다.

그 끄집어내심이 있었기 때문에 롯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부어 주십니다.

말씀이 계속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 속에 오면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자꾸 일들을 하게 하십니다.

말씀이 일을 하게 되면 우리 안에서 이 세상에 없는 것들이 발생을 합니다.

말씀이 지향하는 것이 우리 안에 일어나면 우리가 안하던 짓들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주께서 시작하신 착한 일인 것입니다.

착한 일이라고 하니까 세상적으로 착한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 것 말고 하나님 앞에 착한 것은 예수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착한 분은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 믿는 것이 착한 일입니다.

이건 내가 개판으로 살아도 예수 믿으면 된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건 또 말씀을 곡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당신의 뜻을 이뤄낸단 말이지요.

그럴 때 마다 우리는 우리가 부인당해지고 우리의 뜻은 기각당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롯의 마음은 소돔 고모라를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타락된 도시인 줄 알면서도 떠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그 소돔 고모라에 자기의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도 있고 친구도 있고 친척도 있고 다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못 떠나는 겁니다.

 

얘기를 낳을 때 보면 엄마가 애기를 품고 있다가 열 달 만에 낳습니다.

엄마 뱃 속은 탯줄만 연결되어 있으면 사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엄마 뱃 속에서 나왔으면 탯줄이 연결되어 있으면 안 됩니다.

연결되어 있으면 오히려 죽는 거에요.

잘라 줘야 합니다.

 

그 탯줄을 자를 때는 과감하게 잘라야 합니다.

그러면 엄마에게서 종속되어 살던 모습에서 이젠 독자적으로 사는데,

그렇다고 독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과 보살핌을 입고 삽니다.

 

그렇게 살지만 이제부터는 아이가 혼자 살면서 그것을 체득해 나가는 겁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엄마의 도움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식을 키우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고 있음을 깨달으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갈대아 우르에서 빼낼 때 아브라함을 곱게 빼내지 않았습니다.

탯줄을 자르듯이 잘라 주신 겁니다.

롯도 마찬가지 입니다.

 

소돔 고모라에서 끄집어내신 것은 탯줄을 자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잘라 놓고 그 다음에 간섭해 나가십니다.

잘라져 나온 아브라함과 롯을 다스려 가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롯이나 아브라함이나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고 살면서도 여전히 자기 안에 있는 그 죄성들은 계속해서 발산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망하지 않고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내시더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일을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고 그 일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흔히 구원을 삼 시제(時題)로 말합니다.

 

구원을 받았다.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룰 것이다 라고 합니다.

 

왜 삼 시제로 씁니까?

구원은 미완료가 아닙니다.

구원은 완료되고 완성품인데 이 역사 세계 속에서 그렇게 표현을 하는 겁니다.

역사 자체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시제를 인용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복 중에 짓기 전에 택했다고 하지요?

이 말은 야곱이 복중에 짓기 전에 이미 게임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것을 역사라는 세상에 보내 놓으니까 시간의 흐름이 있는 이 역사 안에서 하나님께서 다뤄가시는 방법이 구원을 이뤄가고 있고 이룰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구원을 이루다가 잘리기도 하고 하는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왜 그래요?

구원은 구원을 하실 분이 이뤄가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하실 분이 누구신가요?

하나님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뤄가신다면 우리의 구원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 분이 반드시 이뤄내신다니까요.

 

롯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전쟁에 포로로 잡혀 갔을 때도 롯이 해방시켜 달라고 했습니까?

누가 찾아 갔나요?

아브라함이 갔습니다.

 

아브라함이 답답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식이 집에 안 들어 오면 누가 답답합니까?

부모가 답답해서 찾아 가는 것입니다.

롯이 비록 전쟁에 포로로 잡혀 있어도 아브라함이 답답하니까 아브라함이 가는 거에요.

 

아브라함이 누구 능력으로 가서 구출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출해내지요

결국 롯이 포로로 잡혀 있는 것이 하나님이 답답하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동원해서 롯을 구출해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가 전쟁에서 이긴 줄 알고 오는데 멜기세덱이 나타나 이 전쟁은 니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있는 전리품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전리품 속에 롯도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왜 롯을 전리품으로 받습니까?

하나님이 전쟁해서 찾아 온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 롯이 소돔 땅에 들어가 살고 있습니다.

 

누가 급합니까?

하나님이 급하지요.

아브라함이 급하지요.

롯은 기도하지 않았어요.

 

아브라함이 기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 성의 의인을 가지고 흥정을 한 것은 소돔성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자기 피붙이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지금 세월호 사건이 나서 두 달이 다 되어 갑니다.

아직도 찾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시신을 찾지 못한 사람은 아직 그 곳에 있습니다.

부모들이 식음을 전폐하며 발을 동동 구르면서 찾아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자기 백성이 세월호 속에 갇혀 있습니다.

누가 급합니까?

하나님이 급하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찾아내십니다.

 

이 세상을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이 바다와 같고 바닷 속의 침몰하는 배와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교회를 배로 묘사를 합니다.

이 속에 지금 자기 백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뛰어 들어 가셔서 찾아내신다니까요.

한국 해경이야 구경만 하고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습니다.

기울어 가는 뱃 속이라도 하나님이 찾아 가셔서 반드시 끄집어내신단 말입니다.

 

이게 잃어버린 양 비유에 나오잖아요.

잃어버린 양은 지가 잃어버렸진 줄도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혼자 있는데 목자가 찾아 가는 것입니다.

산을 건너고 들을 지나서 결국 찾아내서 울러 메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잖아요.

 

예수님께서 왜 오셨습니까?

자기 백성을 찾으러 오셨다니까요.

왜 저주받은 소돔고모라 성에 천사들이 갑니까?

자기 백성 찾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들 속에 자기 백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자기 백성을 찾아내시는 겁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다 찾아내시는구나..

그러니까 이 세상이 어떠함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 세상에 대해서 두려워하시지 마세요.

 

롯의 사위처럼 농담으로 여겨지지 않고 내 안에서 이 말씀이 사실로 믿어지고 내 이야기로 들려진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느 곳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이끌림으로 건져냄을 당하는 구원을 받을 자들인 것입니다.

 

이미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구원을 이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일 때문에 낙심하지 마세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는 믿음으로 이겨 내십시오.

 

강 집사님이 많이 편찮으신데 제가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인간적으로는 위로해 봐야 그냥 듣기는 좋겠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입술에 침 바른 소리를 해서 나을 것이라고 위로들을 합니다.

희망사항입니다.

나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이 몸 나아도 또 병든다니까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비록 이 땅에서 육신이 병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이 몸 말고 하나님이 준비한 그 몸이 있다는 것이 믿어진다면 육신의 아픔들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세상사는 것이 어렵고 힘듭니다.

삶이 팍팍하고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 많을 겁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삶의 질과 가치는 점점 떨어집니다.

행복지수는 점점 떨어집니다.

세상이 잘살아 질수록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뚝뚝 떨어집니다.

 

이는 인간의 탐심은 그와 비례하여서 자꾸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옛 말에 말 타면 종 부르고 싶다는 말이 있습니다.

편하면 더 편해지고 싶은 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죄인의 탐심을 무저갱과 같다고 합니다.

밑 빠진 독이에요.

 

마귀는 세상 것을 주어서 세상 것으로부터 가두어 버립니다.

세상 이라는 가옥에 가둡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십니다.

세상 것이 신기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건짐 받은 구원 문제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가 허상이고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있는바 족한 줄 알고 사십시오.

잠시 잠간 후면 실상인 눈물 없고 고통 없는 그곳으로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안에서 그 날을 소망하면서 감사하며 사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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