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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42강. 생명의 떡을 먹을 자들 (요 6:35-46)

by coroa 2021. 4. 20.

 

♣ -.42강. 생명의 떡을 먹을 자들 (요 6:35-46).-

-.정낙원 목사

 

오늘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펴볼까 합니다.

누가 복을 받은 자인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생명을 떡을 먹는다고 합니다.

누가 생명의 떡을 먹느냐?

아버지께로 난 자들입니다.



이는 생명의 떡을 먹을 자들이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살펴볼까합니다.

그럼 먼저 왜 예수라는 생명의 떡을 먹는 자들이 복 된 자들인지를 에덴동산으로부터 추적해 올라가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죽는 길과, 사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생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영생하는 자가 되고,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살 수 있고,

선악과를 먹고 죽으면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신신 당부를 합니다.

절대로 선악과는 먹지 말고, 반드시 생명과를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반드시 먹으라는 생명과는 먹지 않고 절대로 먹어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 선악과를 먹어버렸습니다.

 

그리곤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은 자가 되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좇아낸 것은 생명과 죽음은 같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생명과 죽음은 본성(本性)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죽음은 서로 상극(相剋)으로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남과 동시에 하나님과 관계도 단절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된 것을 성경은 죽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천사들로 하여금 죄인들이 생명과를 접근치 못하도록 에덴동산의 문(門)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건 죽음이 생명의 세계로 침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 끼리 살고, 산 자는 산 자 끼리 살도록 조치를 하신 겁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죽은 자에겐 생명의 세계는 감추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인간은 독자적으로 생명의 세계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겁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인간들에게는 철저히 감추어져 버린 세계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죄인에겐 하나님 나라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존재하고 있지만 없는 세계와 같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죄인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죄란 항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반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꺼꾸러 들었습니다.

먹으라고 한 것은 먹지 않고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먹었잖아요.

 

죄란? 뭐냐? 불순종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꺼꾸러 듣게 하는 겁니다.

꺼꾸러 듣는 것은 하나님처럼 자존자가 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느냐?

나도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태초 이래로 인간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어깃장 놓고 살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라고 하면 안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기어코 하고자 합니다.

일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일하고, 일하라고 하면 가만히 있으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쫓아냈는지 이해가 가지요.

 

하나님 말씀을 꺼꾸러 듣는 인간과 어찌 함께 산단 말입니까?

좇아내서 혼자 살게 해야지요.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좇아내서 저주 받은 땅에서 혼자 왕 노릇하고 살게 한 겁니다.

 

참으로 죄인답지요.

달리 죄인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청개구리처럼 어긋나 반발하니 죄인인 겁니다.

이런 죄성은 아이들을 키워보면 알 수 있어요.

아이들이 부모에게 반항하는 것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우리 스스로 살펴보면 알 수 있어요.

우리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라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는 구하지 말고, 오직 그에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라고 했어요.

그러나 우리는 눈만 뜨면 구하지 말라고 한 것만 구하고, 그토록 구하라고 한 것은 전혀 구하고 있지 않아요.

 

여러분은 성경대로 살고 있나요?

아니지요.

성경과 반대로 살고 있지요.

이게 우리의 본질이고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 주소입니다.

그래서 죄인인 겁니다.

 

설교를 듣는다고 인간의 본성이 고쳐지지를 않아요.

우리가 설교를 못 들어서 안 고쳐진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으로도 고쳐 질 수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 고쳐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고치려고 하지 않아요.

성경은 우리더러 개과천선하라고 하지 않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해요.

이는 죄인은 개과천선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인간의 언행심사를 고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너희는 이런 악당들이고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라고 해요.

그러니 설교를 듣는 것도 반듯한 인간이 되려고 듣는게 아니고 죄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려고 듣는 겁니다.

 

이런 악당들인데도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산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하는 겁니다.

그냥 용서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해 주신 겁니다.

도무지 하나님 뜻대로 살 수가 없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겁니다.

우리는 죄를 이길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죄 아래서 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러지요.

죄악 중에 출생 하였다고!

그리곤 죄악이 나를 이겼다고 하지요.

 

시 65:3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죄는 우리가 이기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사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해 준다는 것은 용서 해 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용서 해 주느냐를 성경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인간은 말씀을 통하여서 죄인을 위해서 하나님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움이란? 자기 주제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내가 과연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있는 인간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안다면 신앙생활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세가 달라집니다.

 

제사를 지내려고 하지 않고 긍휼을 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고 한 것은 죄인이 주제파악을 하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뭘 갖다 바칠 생각하지 말고 용서 받고 얻어먹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겁니다.

용서로 얻어먹고 산다는 것을 알면 감사가 나옵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누구입니까?

죄인 아닙니까?

아무리 용서 받고 얻어먹어도 꼴에 체면치레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량한 자존심은 지키겠다고 합니다.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요.

이건 뭐와 같은가 하면 옆집 친구의 칠순 잔치에 단 돈 만원이라도 봉투에 넣어야 가는 것과 같아요.

최소한도 만 원짜리 봉투라도 들고 가야지 얻어먹고 오지 않았다는 자존심이 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 신앙에 고스란히 묻어져 나와요.

교회에 올 때 한 주간 개판으로 살았다는 생각이 들면 교회 오기도 싫지요.

와도 찜찜해요.

빈손으로 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안하던 감사 헌금도 하잖아요.

그래야 마음이 조금 편해요.

하나님 앞에서도 그만큼 자존심 세우고 싶은 겁니다.

잘못 한 것을 돈으로라도 내서 때워야 덜 불편 한 겁니다.

 

그리고 웃기는 게 죄인 주제에 이건 죄고, 저건 죄 아님 이라고 정해 놓았다는 겁니다.

술 먹으면 죄고, 술 안 먹으면 죄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죄인의 행동에 죄 아닌게 어디 있습니까?

산다는 것 자체가 죄에요.

죄인에게서 죄다 아니다 구분 할 수가 없어요.

 

강아지의 행동이 개 판 아닌 것이 어디 있나요?

없잖아요.

강아지가 행동 하는 모든 것이 개판이잖아요.

강아지가 하는 행동을 사람의 행동이라고 말하지 않지요.

강아지가 아무리 잘해도 개 행사 머리입니다.

 

죄인의 행사 머리도 이와 같아요.

죄인에게 어떤 것은 죄이고 어떤 것은 죄가 아닌 것이 없어요.

몽땅 죄입니다.

 

지난번에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을 합디다.

목사님 성도에게 죄가 뭡니까? 라고 물어요.

그래서 제가 성도라 할지라도 죄 아닌게 없다고 했어요.

 

성도라 할지라도 일평생 죄를 뿜어내고 살아요.

죄를 뿜어내며 산다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에요.

이건 우리 행위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뜻에서 인간의 모든 것이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이걸 몰라요.

자기에게 착한 선이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에게 착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죄도 큰 죄와 작은 죄가 있다고 등급을 매겨 놓았어요.

이건 순전이 인간들이 만든 규정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규정을 용납하지 않아요.

 

하지만 인간들은 살인하고 강도나 도적질 같이 남에게 피해를 준 것은 아주 큰 죄이고,

도박이나 하고, 룸싸롱 가서 술 쳐 먹고 바람피우는 것 같이 쾌락을 좇아간 것은 덜 큰 죄이고,

주일 안 지키고, 교회 봉사 충성하지 않고, 전도 안하고, 기도 안하고, 성경 안보고 하는 것들은 하나님께 미안한 작은 죄라고 여깁니다.

 

아주 자기 마음대로 매겨 놓았어요.

그래서 살인이나 강도같은 것은 아주 큰 죄라고 하여서 이런걸 저지르면 교회도 안 나오고,

술 먹고 사고 친 것과 같은 것은 덜 큰 죄라고 하면 금식이다 철야기도다 하면서 자숙하고,

주일 성수 안하고 전도 안하고 농땡이 친 것 같은 적은 죄는 돈으로 때우는 겁니다.

 

자기 행동에 따라서 큰 죄가 되기도 하고 작은 죄가 되기도 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웃기는가 하면 자기 행동을 가지고 죄를 경중으로 나누어 놓았어요.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전부가 죄이지 크고 적은게 어디 있습니까?

강아지가 하는 행동은 다 개판이지 덜 개판이고 큰 개판이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은 하나님 앞에선 죄인이에요.

바퀴벌레란 말입니다.

바퀴벌레의 행동을 가지고 큰 죄 작은 죄로 나눈다는게 말이 됩니까?

안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죄를 큰 죄 작은 죄로 나누고 살아요.

어디서 어디까지는 큰 죄에 속하고, 어디서 어디까지는 작은 죄에 속한다고 나누어 놓았어요.

교회들이 그렇게 해 놓았어요.

그래서 교인들이 교회가 정해 놓은 죄의 경중에 따라서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 되면 하나님 뵙기가 송구스러워서 교회에 안 나오는 겁니다.

 

아이가 바지에 오줌을 쌌어요.

그러면 벗기지요.

똥을 쌌어요.

동일하게 벗기지요.

 

똥이든 오줌이든 더럽기 때문에 벗기는 겁니다.

똥 조금 쌌다고 안 벗기고 많이 쌌다고 벗기고 하지 않아요.

똥 오줌 자체가 더럽기 때문에 양과 상관없이 벗기는 겁니다.

 

인간의 죄도 동일해요.

죄인 자체가 죄예요.

죄인에겐 선(善)이 없고 의(義)가 없어요.

뭘 해도 죄입니다.

의가 아니란 뜻에서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목사가 설교를 해도 죄이고, 헌금을 해도 죄이고, 기도를 해도 죄예요.

교회 나와도 죄이고, 교회 안 나와도 죄예요.

예수 믿어도 죄이고, 예수 안 믿어도 죄예요.

이건 마치 바퀴벌레가 목욕을 해도 나쁘고 똥밭에 뒹굴어도 나쁜 것과 같아요.

 

여기서 못을 하나 쳐 놓고 갑시다.

성도가 하는 모든 일이 죄라고 하니 그럼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겠네!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건 아무 것도 하지 말란 이야기가 아니고 자기가 행한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을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내가 한 일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하신 일이라고 하시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제발 자기 행동으로 죄다 아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행동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 판단하지 않아요.

예수 안에 있으면 의인(義人)으로 간주하고, 예수 밖에 있으면 죄인(罪人)으로 간주해요.

살인자도 예수 안에 있으면 천국가고, 성자라도 예수 밖에 있으면 지옥가요.

 

노아의 방주 안에는 정결한 짐승도 실렸고, 부정한 짐승도 실렸어요.

부정한 짐승도 방주 안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난 겁니다.

방주 안에 있으면 정결하든 부정하든 따지지 않고 구원이고, 방주 밖은 무조건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방주 안에 있느냐, 방주 밖에 있느냐로 판단해요.

그 방주가 지금은 예수님이에요.

예수 안에 있으면 살인자 강도라도 의롭다 인정하고, 예수 밖에 있으면 부처님이라도 죄인으로 멸망을 받아요.

 

신앙생활이란? 자기를 변화시키고 치장하는 것이 아니에요.

날마다 예수님의 피 공로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고 사는 겁니다.

인간들이 정해 놓은 착하게 살고 악하게 사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몸으로 하는 행동은 세상 법에 따라서 처리를 받아야지요.

육신의 행동은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는 자기 행동으로 인하여 울고 불고 하면 안 돼요.

아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는데,

왜? 우리가 정죄를 합니까?

“결코” 라는 말을 놓치지 마세요.

 

“결코”란? 반드시 그 어떤 것으로도 만고불변(萬古不變)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않는 분입니다.

헛소리 안한단 말입니다.

성도의 구원이 완료적인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불변성 때문입니다.

 

야곱을 태어나기도 전에 선택한 것은 야곱의 행위로 선택이 번복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행위와 상관없이 천국에 가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야곱의 후천적 행위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기도 전에 하신 선천적인 약속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행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는데 왜? 우리가 묻고 따집니까?

우리가 하나님 보다 더 셉니까?

우리가 입법자입니까?

아니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 움직일 뿐이에요.



믿음이란? 하나님의 결정에 순복하고 사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면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예! 아닙니다!

그러세요.

그게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존심이 살아 있어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면 하나님 앞에 나오기가 뭔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혼을 하거나 감옥에라도 갖다오면 자기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교회를 옮기잖아요.

복음과 상관없이 자기 이미지를 위해서 옮기는 겁니다.

 

집안에 어떤 남사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도 있으면 스스로 교회에 오지 못하잖아요.

꼭 목사가 심방을 해야 못 이기는 척 하면서 그래 내가 나가 주지!

그러면서 나오잖아요.

똥 싼 놈이 성 낸다고 아주 유세를 떨고 꼴값을 떨잖아요.

 

그래서 목사들이 하는 말이 있어요.

한 주간 안 나오면 모른 척 하고,

두 주간 안 나오면 전화를 하고,

세 주간을 안 나오면 심방을 가라는 말이 있어요.

 

세 주간 안 나오면 미안해서 못 와요.

그래서 심방을 가서 데리고 오라는 겁니다.

세 주간 안 나와도 심방 안가면 다른 교회로 옮겨요?

이건 신학교에서 실천 목회 시간에 다 배워요.

한마디로 교인들을 관리하는 노하우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수치보다 자기 자존심 상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찾아가서 자존심을 세워 주는 겁니다.

그래 다 이해한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그럴 수가 있지!

하나님도 다 알고 계시니 혹시 교회에 섭섭한 일이 있더라도 이제 툭툭 털고 나오라고 합니다.

 

속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겉으론 인자하게 웃으면서 말해요.

절대로 자존심 상하게 하는 말을 하면 안 돼요.

그러지 않으면 교회를 옮기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인은 순순히 응하지 않아요.

자존심을 챙깁니다.

암튼 죄인들의 본성은 하지 말라고 하면 끝까지 하고야 맙니다.

죽어도 하고 마는게 죄성입니다. 

그래서 굳게 닫힌 에덴동산의 문도 인간의 힘으로 열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의 정성과 열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합니다.

 

인간은 금지 할수록 그 금지된 것을 소망하게 되어 있어요.

죄가 금지 된 것을 소망하게 만드는 겁니다.

죄가 하나님이 결정한 일에 반발하는 쪽으로 나타난다고 했지요.

그러니 하나님이 에덴동상에서 쫓아냈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인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금지하면 할수록 더 적극적으로 반발을 합니다.

그러니 죄인들에게 너희는 천국에 오지마!

그러면 기를 쓰고 천국에 가고자 하는 겁니다.

천국에 가고야 말겠다는 욕망은 버릴 수가 없어요.

마치 TV에 치토스 선전하는 것처럼 반드시 먹고 말거야! 치토스 하잖아요.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안 들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면 이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서 가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 신앙이 인간들에겐 매력적인 겁니다.

율법 신앙은 인간의 자존심을 세워 주거든요.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서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펴면 이처럼 인간의 힘으로 신께 나아가겠다고 하는 것을 이방종교라고 해요.

인간들이 만든 세상 종교는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으라고 합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기는 겁니다.

 

종교란?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선행과 착함으로 나아 가겠다는 겁니다.

인간의 의로움으로 나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 속에는 인간의 노력으로 신을 만날 수 있다는 사상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곧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사상입니다.

인간이 땅에서 정성을 들여서 빌면 하늘에 신도 인간들의 노력을 보고 감동하여서 인간들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인간의 열심과 정성이야말로 신을 만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자연히 신에게 더 잘 보이려고 열심과 정성을 쏟게 되는 것입니다.

 

정성이 때로는 고행으로 나타나며,

때로는 금욕으로도 나타나며,

때로는 이웃에 대한 박애사상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자기 몸을 학대하는 것으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종교들은 한결같이 자기 절제와, 고행을 최고의 신앙에 덕목으로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사상이 교회 안에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어요.

물론 구약 이스라엘 속에도 있었어요.

 

엘리야의 갈멜산 사건을 잘 알지요.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참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 엘리야와, 거짓 하나님을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간에 대결이 나오지요.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주전 875년경에 북쪽 이스라엘에 아합이라는 7대 왕이 통치하던 시기입니다.

아합 왕은 이스라엘을 안정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주변국의 시돈이라는 나라에 드로 왕의 딸인 이세벨을 왕비를 맞이하는 정략결혼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신을 섬기는 나라와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영적 간음과 같아요.

아니나 다를까 이세벨이 아합 왕에게 시집을 오면서 자기가 섬기던 바알이라는 남자 신과, 아세라 라는 여자 신을 가지고 와서 섬기게 되었습니다.

시돈이 이스라엘보다 더 강대국이니 자연히 왕비의 입김이 국정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서 자연히 바알과 아세라 신도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아담 이래로 여자의 말을 안 듣는 남자가 없었듯이 아합 왕도 이세벨의 말에 넘어가서 하나님만 섬겨야 할 이스라엘이 이방의 신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유일신(唯一神) 사상이지만, 이방인들의 신관은 다신(多神)관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여러 신들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인간 역사를 다스리는 신이 여럿이 있다고 믿어요.



어떤 신은 풍우를 다스리고,

어떤 신이 우로를 다스리고,

어떤 신은 바다를 다스리고,

어떤 신은 산을 다스린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바다 신은 용왕이고,

산에 신은 산신령이고,

하늘에 있는 신은 하늘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가지고 온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의 신으로서 인간들에게 농사를 잘되게 하여 풍년을 준다는 신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부부(夫婦) 신입니다.

바알은 남신(男神)이고, 아세라는 여신(女神)입니다.

 

그래서 바알 신전(神殿)엔 남자 제사장(祭司長)이 있고, 아세라 신전엔 여자 사제(司祭)가 있는 겁니다..

바알 신전엔 여자 신도들이 가서 제사를 드리고, 아세라 신전엔 남자들이 가서 제사를 드렸어요. 

남자 신도는 아세라 신전에서 여 사제와 성적(性的) 향연을 갖고, 여자 신도는 바알 신전에 가서 남 제사장과 성적(性的) 향연을 해요.

 

이런 의식을 행하는 이유는 땅에서 제사장과 성적 접촉을 갖게 되면, 하늘에 있는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이 사랑을 나누어서 이 땅에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를 준다고 믿게 때문입니다.

신의 세계도 완전히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사장과 성 접촉을 가짐으로서 하늘에 있는 신과 접촉을 하여서 신의 은택을 입게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시대이고 먹는 것 앞에는 장사가 없듯이 배부르게 해준다고 하니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식도 많이 낳게 해 주고 풍년도 주고 쾌락까지 주는데 어찌 인간들이 싫다고 하겠어요.

인간들은 이런 신을 찾고 또 찾잖아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틈만 나면 이방신을 섬기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어요.

 

육신이 요구하는 것을 채워 주겠다고 하는데 거절할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없어요.

이런 신앙생활은 하지 말라고 하여도 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들은 이런 신과 생활하기를 원해요.

 

그런데 이 시대 교회가 바알 신전과 아세라 신전이 되고 말았어요.

예수 믿으면 복도 받고 풍요로운 생활도 준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교회마다 복 받기 위해서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잖아요.

그래서 종말의 교회를 음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서 시내 산에서 율법으로 십계명을 주실 때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한 것은 인간들의 신관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른 신이란? 인간의 욕구를 들어주는 신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인간의 욕구를 들어주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이 시대 제법 잘나간다고 하는 목사 즉 속된 말로 깨어 있다고 하는 목사들이 다른 종교와 교류를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어요.

교인들은 이런 목사들을 개혁적이고 앞서간다고 해서 좋아해요.

 

이런 목사들의 특징이 교회를 오락장소로 만들어 놓았어요.

열린 예배라고 하면서 연극을 하고 오페라를 하고 요란한 밴드로 교회를 마치 나이트클럽처럼 만들어 놓았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지 않고 교인들이 육적 쾌락을 주고 있는 겁니다.

교회가 갖가지 이름의 동호회 모임의 집단이 되고 말았어요.

 

십계명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것은 죄인들의 잘못된 신관을 지적하는 말이지,

신이 여럿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십계명(十誡命)에서 말하는 다른 신이란 모두가 타락한 천사들로서 피조물들입니다.

그러니 신이 아닙니다.

욥기를 보면 사단도 일반 천사들과 같이 하나님의 일에 수종을 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단도 마지막엔 불신자들과 같이 유황불 속에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바울은 은혜를 받고나자 세상에는 하나님 이외에는 신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이 우상의 제물을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었던 것도 바울에겐 우상은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겐 우상의 제물도 일반 음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안목(眼目)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우상도 두려울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세상 안목으로 보면 마귀는 신으로 보이는 겁니다.

 

다신관(多神觀)은 이방나라의 신관(神觀)이예요.

아합 왕의 아내인 이세벨은 이방나라 사람입니다.

그러니 다신관을 가지고 들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사단은 위장의 귀재입니다.

사단이 나는 사단이라고 노출하고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 위장을 하고 나타납니다.

아합 왕 시절에 바알과 아세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으로 위장하여서 섬김을 받았습니다.

 

왕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보세요.

바알을 하나님이라고 섬겼다고 하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을 하나님이라고 섬겼다는 겁니다.



이는 거짓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서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이라고 섬기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앞에서 너희가 섬기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지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지 내기를 하자고 한 것입니다.

 

이 때 바알 선지자들이 신을 찾는 방법이 참 재미가 있어요.

지금까지 이런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인간들이 신을 찾아가고자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이 신을 찾는 방법이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은 각자 자기 방식으로 신을 찾았습니다.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신을 찾습니다.

그런데 응답이 없는 겁니다.

엘리야가 놀리기 시작합니다.

혹시 너희 신이 잠을 자거나 아니면 동네마실 나갔는지 모르니 더 큰 소리로 부르라고 합니다.

 

이에 격분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자기들이 신을 섬기는데 있어 가장 정성스럽다고 여기는 특단의 방법인 자기들의 몸을 학대하는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자기 몸을 칼과 창으로 상하게 하여 피를 뿌리면서 신이시여 우리들의 정성을 보아서라도 응답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건 우리가 이렇게 정성을 쏟는데도 응답을 안 해 줄 것인가 시위하는 겁니다.

그러나 신은 끝내 침묵하였습니다.

저녁때가 되어도 응답이 없자 포기하고 맙니다.

결국 바알 선지자들이 찾던 신은 거짓 하나님이라는 것이 드러난 겁니다.

애당초 신이 아니기 때문에 응답을 할 수가 없지요.

 

이제는 엘리야 차례가 되어 엘리야가 섬기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기도하자 즉시로 하늘에서 불이 내렸습니다.

이로서 엘리야가 섬기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이야기를 전개한 것은 거짓 종교의 특징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거짓 종교의 특징은 인간의 정성이 신을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신께 대한 정성과 열심과 충성을 강조하게 됩니다.

마귀는 어느 시대이고 인간 쪽에서 열심히 정성을 쏟으면 신을 만날 수 있다고 미혹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증거는 인간들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신을 만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와 주시지 않으면 인간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거니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 6:41-43=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예수님께서 자신이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니 유대인들이 수군거립니다.

수군거리는 이유는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판단입니다.

 

유대인들의 말은 “우리는 예수 네가 요셉의 아들인줄 아는데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 왔다고 하며,

너도 우리들과 똑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생명의 떡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입니다.

맞는 말이지요.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고 상식적인 말을 해야지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면서 믿으라고 하니 수군거리고 비웃을 수 밖에 없지요.

이들을 나무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6:44-45절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너희들이 나를 몰라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몰라보게 하였다는 겁니다.

믿게 해 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시지 않으면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지혜로는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알 수 없어요.  

예수를 모른다면 당연히 믿을 수도 없지요.

하나님이 이끌어주지 않는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데 있어서 인간의 지혜나 지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믿음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에덴동산의 문을 닫아버렸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닫아놓은 하늘나라의 문은 인간이 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 대하여 알려주지 않으면 인간은 알 길이 없습니다.

기독교를 계시 종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을 열어주어야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이 마음으로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사상이 있어요.

히브리즘 사상과,

헬레니즘이라는 두 정신 사상이 있어요.

 

히브리즘은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계시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사상이며 곧 기독교가 말하는 사상입니다.

헬레니즘은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사상을 말하는데 곧 엘리야 시대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같이 자신들의 정성으로 신을 만나 보고자하는 사상입니다.

 

헬레니즘 사상은 예수 밖에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입니다.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가짜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영적소경이기 때문에 조상들이 유전에 따라서 섬겨오던 전통적인 헬레니즘 방법으로 여전히 신을 찾아왔고, 또 지금도 찾고 있으며, 앞으로도 찾아가고자 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그 말입니다.

수군거리는 군중들에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지 않으니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도 이해 할 수가 없지요.

 

계시가 임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계시가 임하지 않으면 그렇게 밖에 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성령께서 깨닫는 마음을 주셨어요.

그러니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이건 아무나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행운이고 축복입니다.

이런 사실이 믿어져야 신앙생활이 감사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시대 수많은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감사치 못하는 것은 예수를 유대군중들과 같이 육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원이나 들어주는 그런 분으로 믿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 자체로서만 기쁘지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감사하지 않고 기쁘지 않는 것은 종교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종교생활엔 기쁨이 없어요.

늘 수고만 있어요.

항상 자기가 뭔가를 행하여야 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은 율법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죄와 사망 아래서 신음하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일차적으로 율법 아래서 구원을 이루어 보겠다는 율법 신앙을 겨냥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따르라고 한 겁니다.

예수님의 멍에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오면 율법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율법의 무거운 짐들을 다 내려놓게 하셨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믿어지는 사람은 기쁘지 아니할 수가 없지요.

항상 기뻐지는 겁니다.

왜? 항상 기쁩니까?

내가 져야할 짐이 없기 때문이지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책임질 인생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자기가 책임질 인생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건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기분 좋으라고 툭 던지는 그런 수사(修辭)가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는 독자적으로 대하지 않아요.

예수 안에서 대해요.

그러니 하나님 앞에선 나란 존재는 없어요.

오로지 예수님만 있어요.

 

이걸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체는 몸이 관리를 하지 자기가 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이니 예수님이 관리해 주는 겁니다.

 

이게 믿어지면 감사가 되고, 이게 안 믿어지면 늘 곤고해져요.

믿음으로 살라는 말은 이런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란 말입니다.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하느냐? 라고 늘 책망을 하는 겁니다.

 

성도는 완벽한 자가 아니에요.

완벽해 질 수도 없어요.

완벽해 질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구원을 하는 거에요.

예수를 믿게 해서 구원하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우리 독자적으로 안 되기 때문에 성령이 오셔서 믿어지게 해 준단 말입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는 일체의 고민이나 염려가 없어요.

제발 구원이니 영생이니 죄사함이니 하는 것에 관하여서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우리 영역 밖에서 해결할 문제들이에요.

그건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이서 알아서 할 일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예수님께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나무라지 않아요.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제자들에게 있지 군중들에게 없어요.

제자들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입었는지 깨닫게 하시려고 이런 사건을 벌린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관심이 있어요.

예수님이 생명의 떡으로 오신 것도 자기 백성들에게만 생명을 주시고자 오신 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보고 있어요.

그런데 군중들은 목수의 아들로만 보아요.

그래서 군중들에게 만약에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나를 목수의 아들로 보지 않고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제자들 보고 들으라는 겁니다.

저 사람들은 나를 목수의 아들로 보지만 너희들은 나를 생명의 떡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지혜로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지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의 아들 같지가 않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각인 되어져 있는 하나님의 아들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에요.

그들 속에 그려진 메시야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는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기 때문에 화려하고 좋은 가문에서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에 아들로 태어나서 갖가지 기적을 일으켰다면 그들은 예수의 말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자기들 앞에 있는 예수는 초라한 목수의 아들이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어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정도로는 보아 줄 수가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라고 인정하기에는 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을 순회하다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어 보았지요.

그러자 베드로가 사람들이 주님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라고도 하는데 대체적으로 선지자로 보고 있다고 대답을 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에 대한 시각입니다.

이것도 크게 인심을 써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럼 너희들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지요.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요.

그럴 때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이 나를 그리스도로 본 것은 하나님께서 알게 해 줬다고 하지요.

너희들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열렸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하여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시지요.

그리고는 천국에 비밀을 너희에겐 허락 되었으나 저희에겐 아니라고 하지요.

이 말은 천국은 아무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선택한 자에게만 천국을 열려져 있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인간 쪽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결정해서 일하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 백성은 반드시 예수가 믿어지게 되어 있어요.

믿어지지 않으면 그건 택한 성도가 아닙니다.



예수는 우리가 애쓴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성령이 임하면 자연스럽게 믿어져요.

아주 자연스럽게!

 

전혀 의심도 가지 않고 믿어진다니까요.

술술 믿어져요.

억지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한다고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금식하고 밤새워 통성 기도 한다고 믿어지는게 아니에요.

 

신앙생활은 술술 믿어지는 것으로 사는 것이고, 종교는 안 믿어지는 것을 믿고자 노력하는 겁니다.

노력해서 믿어지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건 자기가 만들어낸 가짜 믿음이에요.

 

살아 있는 생화(生花)가 아니라 만든 조화(彫花)란 말입니다.

생화는 향기가 나지만 조화는 향기가 없어요.

생화는 인위적으로 만들지 못하지만 조화는 얼마든지 만들 수가 있어요.

기쁨이나 감사는 안에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겉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잖아요.

예수가 믿어지면 이상하게 기뻐지고 감사가 나와요.

 

신앙생활은 생명의 흐름이에요.

신앙생활이 생명의 흐름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자라는 것은 생명의 흐름입니다.

억지로 키울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는 대로 자라가는 겁니다.

 

그러나 마네킹은 공장에서 마음먹은 대로 찍어내요.

어린아이로도 찍어 내고, 어른으로도 찍어내고, 남자로도 찍어내고, 여자로도 찍어내요.

아무리 예쁘게 자유자재로 찍어내도 생명이 없기 때문에 가치가 없는 겁니다.

 

종교인은 가르침으로 양산이 되지만 성도는 가르쳐서 만들어지지가 않아요.

성도는 자식을 낳듯 낳아지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45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아버지께서 주신 자는 다 예수에게로 온다고 하지요.

아버지께서 성도를 예수 앞으로 이끌고 온다고 하지요.

아버지께서 알려 준 자는 다 예수를 믿게 되어 있다고 하잖아요.

 

왜? 예수가 믿어지는 것이 축복입니까?

그냥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공짜로 주어지기 때문에 축복인 겁니다.

 

공짜로 받으면 기쁘지요.

공짜로 돈을 얻게 되면 사람이 관대해져요.

월급은 쓰기가 아까운데 보너스는 아깝지가 않지요.

보너스 받으면 여유롭고 인심이 후해지지요.

 

그래요.

성도가 세상을 초연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복음이 주는 관대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알면 이상하게 여유가 생겨요.

자기 목숨까지도 아깝지가 않아요.

 

세상이 세피하게 보여요.

아등바등 살아갈 이유가 없어져요.

대충 대충 살란 말이 아니고 미련을 두지 않는단 말입니다.

 

세상을 빡빡하게 산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뭔가에 좇기고 있다는 증거에요.

세상에 대하여 살아 있기 때문에 좇기는 겁니다.

 

바울이 세상의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세상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이단이라고 하여도 허~ 허~ 하고,

누가 욕을 해도 그러려니 했어요.

왜냐하면! 그 속에 천국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은 바울만 살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바울과 같은 성령을 받은 성도는 정도의 차이는 조금 있을 수 있지만 이런 가치관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요.

이건 허세가 아니에요.

자유에요.

 

법아래 있는 사람의 눈에는 자유가 마치 방종처럼 보입니다.

방종과 자유는 달라요.

방종은 자기 육체의 쾌락을 좇아가는 것이지만, 진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진리가 주는 기쁨 때문에 세상에 평가에 구속(拘束)받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억지로 믿음 있는 척하지 마세요.

믿음은 사람들 눈을 의식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사람들 눈치 살필 이유가 없지요.

 

괜히 없는 믿음을 있는 척 하려니 힘들고 짜증나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 눈에는 이런 사람들이 보여요.

불쌍하지요.

억지로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천국 문을 열어 주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거든요.

 

천국의 문은 예수의 피로서만 열려요.

천사들이 예수님의 피인지 아닌지 귀신같이 알아요.

내 새끼인지 남의 새끼인지 귀신같이 찾아내요.

 

엊그제 신문을 보니 중국에 D.N.A로 친자 검사하는 것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별 희한한 유행도 다 있다 싶지요.

그런데 심각해요.

 

20%가 남의 자식을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여자들이 외도를 해서 낳은 자식들이 그렇게 많다고 해요.

10년 20년 키우다가 나중에 남에 자식이라는 것을 알고 난리랍니다.

 

검사하면 다 나와요.

인간도 자기 새끼인지 검사하면 아는데 하나님이 모르겠어요.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모르겠느냐고요.

그런데 인간들의 어리석음은 하나님도 속는 줄 알아요.

믿는 척 하면 믿음으로 간주해 주는 줄 알아요.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지 않아요.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 구원해요.

천국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자기 자식들만 딱 살도록 맞춤이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예루살렘 성의 규격이 나오지요.

이는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신천지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기들이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하지요.

아직도 십사만 사천 명이 차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채우려고 꼭 문에 교패가 붙어 있는 집에만 찾아가서 전도하잖아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니 이런 해석을 하는 겁니다.

참으로 웃기는 집단입니다.

지네들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하나님은 단 한 사람도 탈락하지 않도록 다 찾아내십니다.

 

예수님 눈이 달리 불꽃같은 눈이 아니에요.

예수님 눈은 옛날에 드라마에 나오던 600만$의 사나이 눈 보다 더 밝아요.

자기 새끼들은 어디에 숨어 있어도 다 찾아내서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드라크마를 찾듯이 다 찾아내요.

잃어버린 어린 양을 찾듯이 기어코 찾아내서 어깨에 둘러매고 오십니다.

그러니 천국 못가면 어떨까 염려하지 마세요.

천국 백성이면 반드시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천국에 갑니다.

반대로 아닌 자는 자기 원함과 상관없이 탈락 되지요.

 

종교인은 다 탈락해요.

모태 신앙도 소용없어요.

목사도 소용없어요.

신학교수도 소용없어요.

오로지 하나님께서 예수 믿게 해 준 성도만이 천국에 가요.

 

이런 예수가 지금 우리가 믿어진다는 것이 놀랍지 않나요.

이게 믿어지면 자다가도 춤을 추어야 해요.

세상에!

내가 지금 예수를 믿고 있어야!

이건 횡재야! 횡재!

하늘 나라 복권에 당첨이 된 겁니다.

 

이것 이상 더 기쁜 일은 없어요.

바울이 이런 기쁨 때문에 감옥에 갇혀서도 실성한 사람같이 찬송을 부른 겁니다.

맞아도 히죽거리고,

빼앗겨도 히죽거리고,

욕을 먹어도 히죽거리고,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습니까?

그런데 있어요.

 

지금 우리들이 그렇잖아요.

누가 이단이라고 하는데도 웃고 있잖아요.

교회는 거지꼴이 되어도 웃잖아요.

 

아니 목사가 교회 문 닫을 지경이 되면 악악거려야 하는데 이건 울어라 열풍이니 뭐 이런 인간들이 다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어떻게 가둘 대책이 없어요.

 

너 십자가 피 전하면 교회 부흥 안 된다.

괜찮아!

너 십자가 피 전하면 이단 소리 듣는다.

괜찮아!

너 십자가 피 전하면 교단에서 쫓겨난다.

괜찮아!

 

이건 감당이 안 돼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믿음은 죽음의 세력이 가둘 수가 없어요.

세상에 가두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걸 십자가의 능력이라고 하는 겁니다. 

성도가 성경을 보고 기도하고 하는 것은 이런 능력 안에서 살아가고자 해서입니다.

이런 능력은 성령이 주십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주의 성신을 거두지 말라고 했어요.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성신을 거두지 말라는 것은 성령의 깨달음이 늘 안에서 나타나게 해 달라는 겁니다.

두려움이 깃드는 것은 언약 안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만 보이고 언약이 안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이 두렵고 환경이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이 늘 안에서 믿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환경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도록 주장해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 충만 받으라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게 해 달라는 것이에요.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갖가지 아픔들로 넘어지고 시험이 드는 것은 모두가 현실만 보이고 천국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보이지 않으면 두려워 질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성도는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비주류로 살아가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 말씀을 상고하여야 하는 이유는 구원을 얻고자 함이 아니고, 이미 받은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약속이 보이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세상을 이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 믿는 것을 생명의 양식을 먹는 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러나 그 들음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해요.

십자가의 피에 복음을 들어야 믿음이 견고해 집니다.

 

생명의 흐름은 정직합니다.

먹은 것만큼 자라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만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겨요.

 

교회에 열심히 다녀야 하는 이유가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부대끼면서 자기 악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집안에 혼자 있으면 자기가 악한 놈인 줄 잘 몰라요.

사람과 사람 간에 부딪치면서 나는 참 나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되요.

 

연보를 하면서도 얼마나 돈을 사랑하는 자인지 알게 되고,

봉사와 충성을 하면서 얼마나 주님 사랑으로 하지 않고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있는지 알고,

남에게 받기만 좋아하고 남을 베푸는 것엔 얼마나 인색한 악당인지를 알아야 해요.

 

그럴 때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않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 51:16-17=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은 말씀 앞에 자신을 서 보아야 알아요.

말씀으로 난도질을 당하여서 하나님 앞에 발가벗김바 되어 숨을 곳이 없어야 해요.

마음에서부터 언행심사 하나 하나가 다 까발림바 되어야 해요.

 

그래서 내가 눈먼 자이고,

가련한 자이고,

벌거벗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서 야!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큰 은혜를 입고 사는지 알게 되는 겁니다.

 

말씀을 들어야 감사가 우러나게 됩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믿음 좋아지겠다고 하는 것은 다 헛것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믿음이 좋아지고자 하는 것은 밥을 먹지 않고 건강해야지 하는 것과 같아요.

 

예수 믿는 것을 기뻐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것은 종교성으로 믿음을 이해하기 때문이에요.

자기 능력으로 믿음을 관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난 믿을 수가 없는데, 하

나님께서 믿게 해 주심으로 믿는다는 것이 없으니 예수를 믿는 것이 기쁘지가 않은 겁니다.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교회 오는게 힘들고 싫다는 것은 그건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반드시 기쁨과 감사가 동반되어지게 되어 있어요.

감사와 기쁨이 있어야 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는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믿는다는 것은 자기가 믿음을 만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 자기 기분에 따라서 춤을 추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지요.

이 백성들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슬퍼하지 않는다고 하지요.

이는 예수님에 대한 반응이 없다는 겁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복음에 대한 반응이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 피가 증거 되어도 시큰둥하다는 겁니다.

천국을 말해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예수가 안 믿어지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예수가 믿어지면 기쁘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천국이 믿어지면 빨리 가고 싶어요.

 

세상 보다 천국이 좋아 보이고 커 보여야 정상입니다.

사도요한이 그러지요.

세상을 이기는 것은 믿음이라고!

맞아요.

세상은 믿음으로만 이길 수가 있어요.

그 믿음이란? 바로 예수 안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심으로서 믿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온 우주를 다 받는 것과 같이요.

예수님의 살과 피가 생명의 떡이라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선택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사세요.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이 믿음이 있으면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이겨 낼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받은 자 답게 사세요.

좀 세상을 자유롭게 사세요.

세상에 가두어지지 말고 세상 밖에서 세상을 보고 사세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너머에서 세상을 보면 다 불타 없어질 허구라는 것이 보입니다.

마귀는 허상을 실상이라고 미혹하지만 성도는 속지 않아요.

세상 속엔 생명의 떡이 없어요.

생명의 떡은 오직 십자가 안에만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생명으로 보인다면 그대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생명의 떡을 먹을 자격이 주어진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에 배부름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알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미 영생을 받았으니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생한 자로서 살게 하옵소서. 세상보다 천국이 커보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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