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43강. 생명의 떡을 먹은 자의 삶 (요 6:47-59)

by coroa 2021. 4. 24.

 

[43강. 생명의 떡을 먹은 자의 삶 (요 6:47-59)]

-.정낙원 목사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한 것이고,

둘째는, 종신토록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는 수고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고,

셋째는, 이러한 수고와 슬픔의 삶도 종국엔 죽음으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세 가지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벗어나 영생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추방당하였던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고,

셋째는, 모든 수고와 슬픔을 그치고 영생으로 안식하는 것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 되면 이 세 가지는 모두가 회복되어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내어 좇으면서 뱀의 머리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가 오면 모든 것을 되찾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좇아내고 죄인들이 살아갈 땅을 저주하십니다.

죄인에게 돌아 온 것은 저주입니다.

저주 받은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형벌이고 저주입니다.

우리 인생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저주가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이 저주를 풀어 보려고 종교도 만들고 문명도 발달시켜보지만 백약이 무효입니다.

 

저주는 저주를 내리신 분이 풀어 주어야 풀립니다.

인간 쪽에서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고 하여도 풀려지지 않습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저주를 풀 수 있을 것 같으면 그것은 저주라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 힘으로 풀 수 없기 때문에 저주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하자 흙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은 뱀과 한 통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뱀의 후손들은 흙에 기운으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흙에서 나서 흙에 것을 먹다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길은 흙에 속한 자로서는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흙 밖에서 오신 분이 건져 줄 때만 가능합니다.

흙이 아닌 분이 오셔서 빼내 주어야만 합니다.

 

이처럼 죄 문제는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께서 풀어 주셔야지만 합니다.

인간의 그 어떤 종교적 행위로도 하나님이 묶어놓은 저주는 풀 수가 없어요.

그러니 구원 받고자 하는 종교 놀음은 사기입니다.

 

죄사함이나, 영생이나, 천국은 그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어지는 것이지 인간 쪽에서 따 내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께 성은(聖恩)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죄사함도 선물이고,

영생도 선물이고,

천국에 가는 것도 선물입니다.

 

성도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는 모든 것은 선물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면 어찌 감사가 넘치지 아니하겠습니까?

신앙생활에 감사가 없는 것은 구원을 지식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건 관념입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아는 것은 이성을 근거로 이해하는 것이지만,

믿음은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는 것입니다.

보이는 물질 세계는 눈으로 본 바고 손으로 만진바가 되니 믿음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인 천국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가 없으니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일컬어 “생명의 떡” 이라고 합니다.

 

떡이란? “먹거리” 입니다.

떡은 실제로 맛보고 배부름을 얻는 것입니다.

떡은 먹는 것이지 분석하고 연구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떡은 먹어야 힘이 됩니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게 되어 있어요.

밥을 먹었는데도 배가 부르지 않다면 그건 그림으로 본 것이고 꿈 속에서 먹은 겁니다.

상상한 겁니다.

상상은 실제가 아니므로 몸에 변화가 없습니다.

 

상상으로 아무리 풍성한 것을 먹어도 배부름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콩 한 알이라도 실제로 먹으면 몸이 느낍니다.

몸에 반응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살과 피를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실제로 느끼고 몸에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떡을 먹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믿음이 오면 실제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새 언약을 믿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 뭡니까?

내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담당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받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이 믿어진다면 뭔가 반응이 나타나겠지요.

죄 문제로 인하여 고민하지 않겠지요.

죄 문제가 고민이 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죽음에 문제도 고민되지 않습니다.

이건 중요한 문제이니 잠시 후에 상세하게 살펴볼게요.

 

우리가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행복해지듯이, 새 언약이 믿어지면 죽음이 두렵지가 않아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 “영생을 가졌다” 고 합니다.

“가질 것이다” 라는 미완료(未完了)가 아니고,

“이미 가졌다” 라고 완료(完了)로 말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가졌다” 는 것은 “소유하고 있다” 는 말입니다.

소유하였다는 것은 내게 “와 있다” 는 말입니다.

 

영생을 소유하고 있는 증거가 뭐냐 하면 죄와 사망이 두렵지가 않는 겁니다.

예수가 믿어지면 죄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두렵지가 않아요.

사실이라니까요.

 

제가 과거에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죄와 사망의 문제가 해결 받았다는 것은 관념이었어요.

관념이다 보니 자꾸만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근심 걱정이 생기는 겁니다.

속된 말로 주일이라도 어기면 뭔가 찜찜하고 불안했어요.

교회에 봉사하여야 하는데 참석치 못하면 뭔가 죄스러워요.

그래서 나중엔 밀린 방학숙제 하듯이 봉사치 못한 보상이라도 하듯이 열심을 내는 겁니다.

 

율법 아래선 마음에 평강을 내 행위로 찾았어요.

뭔가 충성했다 싶으면 기분이 좋고 마음도 편안 한데,

불충 했다 싶으면 찜찜하고 불안하고 뭔가 얻어터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칠 않았어요.

 

그러니 그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서 액땜하듯이 더 열심을 내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안 믿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이 엄청 좋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을 했어요.

열심과 충성으로 믿음을 포장하였던 것입니다.

 

율법 아래선 마음에 쉼이 없어요.

자기 열심과 비례하여 주어집니다.

그러니 늘 불안한 겁니다.

 

믿음이란? 행함과 반대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행한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럼 예수가 믿어진다고 하면 내 행위와 상관없이 안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 아래서 안 되어요.

왜냐하면! 율법은 내 행위를 근거로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예수가 믿어진다면 율법 신앙을 고수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니 예수님의 대속이 믿어지는 겁니다.

믿음이 덮쳐오고 나니 이상하게 성경이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믿어져요.

 

열심과 충성으로 신앙을 가늠한다면 지금이 율법 아래 있을 때 보단 훨씬 못해요.

과거 율법 아래에서 하던 것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예요.

지금은 과거처럼 산 기도도 다니지 않아요.

교회를 위하여 죽기 살기로 하지 않아요.

전도지 들고 길거리로 나가서 전도하지도 않아요.

열심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과거와 비교하면 지금은 믿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과거엔 그렇게 충성하고 열심을 내었지만 안 믿어졌는데,

지금은 과거처럼 그런 열심도 충성도 없지만 믿어져요.

믿어지니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때처럼 하지 않는 겁니다.

 

제가 지금 예수가 믿어진다고 하는 것이 여러분 눈에는 믿어지지 아니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인간적인 열심과 충성으로 본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전 믿음으로 살고 있어요.

사실이에요.

사실이기 때문에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쓴 소리를 하는 겁니다.

 

옛날엔 설교를 하면서도 교인들 눈치 살피느라 분주했어요.

행여 이 말을 하면 누가 시험 들지나 않을까?

행여 이런 말을 하면 교회 안 나오면 어떨까?

설교를 하면서도 갖가지 염려를 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런 눈치를 전혀 안 봐요.

시험 들든지 말든지!

교회 오든지 말든지!

전혀 신경 안 써요.

오면 오고 안 오면 안 오고 그래요.

 

자기 안에 성령이 계시면 그 분이 알아서 간섭하시겠지 하고 맡기는 겁니다.

교인들을 하나님이 관리하도록 맡겨야지,

괜히 내가 관리 하지도 못하면서 그걸 붙잡고 관리한다고 하면 심신이 지친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내가 간섭하고 싸울 문제가 아니란 것을 안 겁니다.

 

이건 교인들을 아무렇게나 관심 없이 대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런 마음으로 산다는 겁니다.

물론 교회 안 오면 전화도 하고 심방도 해요.

하지만 저 사람 교회 안 나오면 어쩌지!

다른 교회로 가면 어쩌지! 하는 염려나 근심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믿어지면 이상하게 예전에 없던 담대함이 생기고 근심 걱정이 사라져요.

근심 걱정 없이 목회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줄 몰라요.

이런 배짱이 모두가 믿음이 오니 주이지는 겁니다.

 

요한일서 4장에 보면 믿음이 오면 두려움이 없다고 했어요.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보세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고 하지요.

여기서 사랑이란? 믿음이에요.

믿음을 요한은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본문대로 사랑이라고 합시다.

사랑이 오니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하지요.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좇는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뭔가 두려워 한다는 것은 그 속에 온전한 사랑이 와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매사 두려워요.

불안하고 걱정이 생겨요.

불안과 근심 걱정은 사랑이 오면 쫓겨 가고, 사랑이 없으면 안방에 떡하니 자리를 잡아요.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 속에 예수님이 없기 때문이에요.

전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내 죄를 사해졌다는 것이 믿어지면 더 이상 죽고 사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져야 정상입니다.

그래야 믿는다고 할 수가 있어요.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믿어지면 죄 문제로 인하여 고민하지 않게 됩니다.

 

온전한 사랑을 집 이야기로 비유해서 말해 볼께요.

좀 생뚱맞은 것 같아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내 집과 남의 집에 차이가 뭔가요.

내 집에선 무슨 짓을 해도 거리낌이 없지요.

그러나 남의 집에선 불편하고 조심스러워요.

 

남의 집엔 아무리 주인이 마음 푹 놓고 마음껏 하고 쉬라고 하여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건 내 마음이 내 집과 남의 집을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여긴 내 집이 아니야! 라는 것을 인지하기 때문에 아무리 편하게 지내려고 해도 안돼요.

 

명절 때 고향 집에 가면 제일 그리운게 뭡니까?

내 집이지요.

며느리들은 명절 때 시집에서 빨리 벗어나서 친정에 가고 싶어 합니다.

이는 시집은 남의 집이고, 친정은 내 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친정에 가도 그 때 잠간 뿐이지 빨리 내 집에 가고 싶어요.

본능이 친정이 내 집이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내 집은 내 남편과 내 자식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시집이든 친정이든 갔을 때 그 때만 좋지 잠시 지나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서로 눈치를 주면서 빨리 가자고 채근하게 되는 겁니다.

집 떠나면 왜? 집이 그립습니까?

집은 나를 구속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에요.

내 집에선 발가벗고 소리쳐도 날 구속하지 않아요.

 

집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옷을 훌렁 벗잖아요.

옷은 남을 위해서 있는 거에요.

혼자 있으면 옷이 필요 없어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옷 만들어 입는 것이었어요.

범죄하기 전엔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수치를 몰랐어요.

하나님 앞에서도 수치를 몰랐어요.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나자 갑자기 아담과 하와는 서로 간에 타인으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이 타인으로 보인 겁니다.

그러니 벌거벗음이 수치스럽게 여겨진 겁니다.

 

타인으로 보이면 가려야 해요.

양심이 용납을 못해요.

그래서 남 앞에선 옷을 입는 겁니다.

 

연애 할 때는 남이기 때문에 수치가 보여요.

자짱면을 먹어도 고양이가 먹듯이 하잖아요.

천박하다고 흉 잡힐까봐서 내숭을 떨잖아요.

 

그러나 그런 내숭도 결혼을 하면 사라져요.

연애 할 땐 방귀라도 뀌면 혼비백산해서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지만 결혼해서 자식 낳고 살아 보세요.

이젠 거침이 없잖아요.

밥상머리에 앉아서도 뀌잖아요.

이건 예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한 몸이기 때문에 수치를 모르는 겁니다.

 

부부가 되면 벌거벗음이 수치로 여겨지지 않지요.

부부간에 벌거벗음이 수치로 여겨진다면 그건 온전한 사랑이 아니에요.

부부라면 목욕도 같이 하고 등도 밀어주고 할 수가 있어야지요.

 

부부라고 하면서 옷 갈아입는 것도 남편이나 아내 몰래 숨어서 한다면 그건 정상이 아니에요.

그 마음속에 아직도 남편이나 아내가 타자로 보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물론 여자들은 감추고 싶은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요.

원리가 그렇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부부간에는 흉허물이 없어야 해요.

트림도 하고 방귀도 마음껏 뀔 수가 있어야지요.

부부간에 허물은 하물이 아니에요.

허물로 보이지 않아야 부부입니다. 

부부가 한 집에서 한 침실에서 한 이불을 덥고 자는 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친척은 타자에요.

그래서 친척 집에선 수치도 가려야하고 불편한 겁니다. 

그러나 내 집에선 그 어떤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하여도 거리낌이 없는 것은 나를 정죄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편안한 겁니다.

 

편안함이란? 정죄 당함이 없는 겁니다.

내가 어떤 짓을 하거나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정죄당하지 않는 곳이 집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님과 있어도 수치스럽지가 않은 집을 마련해 준다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죽는 것은 성도들이 거할 처소를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죽음하고 처소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요한복음 14장을 봅시다.

 

요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면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죽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다고 하니 제자들이 근심이 가득했어요.

 

그럼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어떻게 우리만 달랑 남겨두고 죽는단 말인가?

그럼 우린 앞으로 어떻게 하지! 라면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근심걱정이 태산이었어요. 

이를 아시고 예수님이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내용이 14장입니다.

 

14장 1절에서 뭐라고 하는가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지요.

마음에 근심 하지 말라는 것은 근심은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말이지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스스로 관리 할 수가 있습니까?

없지요.

분명히 마음은 내 마음인데 내가 관리 할 수가 없어요. 

인간이 관리 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인데 죽음과 마음이에요.

죽음이나 마음은 비록 우리 안에 있지만 하나님이 관리를 하세요.

 

스가랴서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의 안에 마음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슥 12:1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

 

하나님이 사람 안에 심령을 지었다고 하지요.

그러니 마음은 하나님이 관리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에 일어나는 염려나 근심은 우리가 관리 할 수가 없어요.

 

염려와 근심이 생기는 것을 어찌하지 못해요.

염려와 근심은 외부에서 쫓아낼 수가 없어요.

마음속에서부터 몰아내 줘야 사라지는 겁니다.

 

그러니 마음을 관리하시는 하나님이 염려와 근심을 몰아 내 주어야지만 사라지는 겁니다.

세상에 근심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어요.

다 근심 없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근심은 우리가 윈치 않음에도 우리 마음속에 차지하고 두려움을 줍니다.

 

근심은 원초적인 것으로 본능에서 우러나는 겁니다.

본능이 두려움을 알아요.

본능은 죽는다!

그러면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지금 너희가 해결 할 수 없는 마음에 근심을 없애주려고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제자들은 지금 알아먹지를 못해요.

나중에 성령이 임하고 나니 이 말씀이 무슨 뜻인 줄 알게 됩니다.

 

암튼 예수님께서 염려와 근심이 가득 찬 제자들을 보고선 날 믿으라고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기 위함” 이라고 합니다.

처소(處所)” 란? “집” 입니다.

 

그 처소가 예비 되면 예수님께서 다시 와서 제자들을 그 처소로 영접하여 함께 살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성도와 함께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가면 성령을 보내 줄 터이니, 그 성령이 오면 너희를 내 안으로 불러들인다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과 제자들을 한 집에서 살게 하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처소란 성령입니다.

성령 안에서 성도와 예수님은 하나가 되는 겁니다.

한 몸이라고도 해요.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예수 안에, 예수가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이 믿어져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마련한다는 처소란 성령을 말하는 겁니다.

성도를 일컬어 성령이 거하는 전이라고 하지요.

전이란? 집이에요.

그럼 성도는 성령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거한다고 합니다.

거한다는 말의 거(居) 자는 살 거(居)자인데 한마디로 한 집에서 산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살면서 무슨 일을 하느냐 하면 예수님과 하나 되게 만듭니다.

쉽게 말해서 성령이 방을 마련해 줘서 예수님과 성도를 합방시키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 성도는 예수님과 한 몸이 되는 겁니다.

부부가 되는 거예요.

부부란? 한 몸이라고 했지요.

부활하신 예수님과 한 몸이 되면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면서 그리스도의 영이세요.

그럼 성령이 성도 안에 와 계신다고 하면 아버지와 예수님이 와 계심이 되지요.

이런 상태를 동거한다고 합니다.

 

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육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성령이 오면 믿어져요. 

성령이 언제 오십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야 오시지요.

예수님이 가셔서 보내 주셔야 해요.

그럼 오순절날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하나님 나라에 가셨다는 말이지요.

 

사도행전 2장을 봅시다.

 

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오른 손으로 높이셨다는 것은 승리자로 인정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겼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이겼습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겼지요.

죽음에서 살아났으니 죄와 사망을 이긴 것이잖아요.

 

예수님께서 승리자가 되셔서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그리곤 아버지께 성령을 받아서 제자들에게 부어 주셨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냥 성령이 아니고 약속의 성령이라고 하지요.

언제 약속 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에 약속했지요.

내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난 후에 아버지께로 가서 성령을 보내 주신다고 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제자들에게 보낸 준 겁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보내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이 오시면 무엇을 증거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해요.

성령께서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고, 왜? 십자가에 죽으셨는지를 알게 해 주세요.

성령은 예수님을 성도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게 되요.

관념이 아니라 능력으로 알게 되요.

삶에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가도록 하세요,

 

알다시피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셨잖아요.

유월절 어린 양의 뭡니까?

죽음의 재앙을 넘어가게 하는 거지요.

 

출애굽 때에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진 집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넘어 갔지요.

어린 양의 피만 발라져 있으면 그 집에 누가 살든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넘어 갔어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인간의 조건을 묻어 버려요.

 

피 안에선 인간은 모두가 똑 같아요.

그러니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모든 죄를 막아주는 능력이 되는 겁니다.

출애굽 때에 어린 양의 피만 문에 바르면 그 어떤 죄로부터도 정죄당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그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로서 십자가에 죽으신 겁니다.

그 피를 자기 백성들에게 뿌려 주셨어요.

그럼 지금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의 실체로 십자가를 지셨다면, 영적 상황이 과거 출애굽 때와 같다는 말이지요.

 

잘 보세요.

과거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시려고 유월절 어린 양이 죽었어요.

어린 양의 피로서 애굽에서 나왔어요.

 

그럼 지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디서 빼냅니까?

죄와 사망 안에서 빼 내지요.

죄와 사망이 무엇을 가지고 죄인을 옭아매고 있습니까?

율법이지요.

율법을 가지고 넌 죽어야 할 자라고 몰아치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누구의 입을 막은 겁니까?

율법이지요.

율법이 성도를 정죄하여서 죽음으로 몰고 가잖아요.

그런 율법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요구를 다 이루신 겁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자기백성들을 빼내기 위해서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겁니다.

율법이 자기 백성들을 정죄하자 예수님께서 그 정죄를 한 몸에 다 받으시고 그래 내가 죽을께! 하고 죽으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가 율법으로부터 정죄 받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다 받았으니 성도는 율법에 정죄당할 이유가 없어진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성도가 받아야 할 정죄를 대신 받아서 죽었으니까요.

 

성령이 오시면 이것이 믿어지게 된단 말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우리대신 율법의 정죄를 다 받았다고 알려 줍니다.

그러면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죄사함 받았다는 것이 믿어져요.

율법으로부터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믿어져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믿어진다니까요.

이 사실이 믿어지면 성도는 죄로부터 자유자로 살게 되는 겁니다.

죄로부터 자유자로 산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알아야 해요.

 

죄인이 뭡니까?

죄만 생산하는 인간이란 말이지요.

죄인은 일평생 죄만 생산해 내는 자에요.

죄인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죄에요.

 

하나 질문합시다.

 

성도는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의인이지요.

 

어디 안에서 의인입니까?

예수 안에서 의인이지요. 

그럼 예수 밖에 나오면 어떻게 될까요?

죄인이지요.

 

예수 안에서만 의인이에요.

이걸 놓치면 안 돼요.

우리는 스스로 의로운 자들이 아니에요.

스스로 의로울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겁니다.

여김 받는다는 말은 실제로는 죄인인데 의인으로 간주해 준다는 말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자신은 죄인인데 예수님 때문에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늘 깨닫고 감사하게 되요.

야! 나 구원 받았다 까불지 않고!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구나! 를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난 예수님이 십자가에 내 대신 율법의 요구를 들어 주셔서 내가 사는 거야 라고 감사하지요.

하나님께서 성도를 예수의 피로서 구원시켜 준 것은 예수님을 자랑하라고 한 것이지 구원 받은 우리 자신을 자랑하라고 한 것이 아니에요.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4-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은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거저 주신 그 은혜를 찬미케 한다고 하지요.

한마디로 나 예수 때문에 구원 받았다를 자랑하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 구원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 목적이지요.

아들을 자랑하라고 우리를 구원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는 자는 가짜로 구원 받은 자에요.

 

성령이 오시면 정확하게 이 사실을 증거해 주세요. 

그러니 누가 나 예수 믿는다!

나 구원 받았다!

나는 복음을 안다고 하여도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지 않으면 가짜가 되는 겁니다.

 

물론 예수의 피로 의롭게 된 자들이 살아가는 삶이 있어요.

이건 부차적입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말을 할 때는 오직 십자가 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외는 전하지 않기로 작정을 했다고 천명한 겁니다.

사도 바울과 동일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사도바울과 같이 십자가만 증거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증거하지 않는 자는 다 가짜라고 하는 겁니다.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그 십자가를 가지고 교회 부흥을 꾀한다거나,

자기 인기를 누리고자 한다거나,

자기 입지를 넓히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로하나 바로하나 십자가만 증거되면 되요.

하지만 십자가를 이용해서 뭔가 꼼수를 누리는 사람은 구원에서 탈락해요.

 

예를 들어서 거짓 목사가 마음에도 없는 여러분 예수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라고 했는데,

그 소리를 듣고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생겨 날수가 있어요.

거짓 목사가 십자가를 이용하려고 전했는데 하나님은 그것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는데 사용하세요.

하나님의 뜻은 누구를 통해서든지 십자가로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에요.

그러니 어떤 사람은 평생 예수를 말했지만 그 예수를 이용하다가 지옥으로 가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 사실이 잘 나와 있어요.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위 내용은 예수님이 자칭 목사라고 하는 자들을 심판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자칭 성도라고 하는 사람도 포함이 됩니다. 

이 사람들은 평상시에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좇아내고, 권능도 행하였다고 하지요.

맞아요.

주의 이름으로 했으니 겉 보기엔 목사가 맞고 성도가 맞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불법을 행한 자라고 하면서 지옥으로 보낸다는 것이 문제에요.

예수님이 모르겠다고 하면 끝난 겁니다.

세상에 평생 예수 믿는다고 살았는데 정작 그 예수님이 모른다고 합니다.

 

왜? 예수님이 이들을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하는 겁니까?

이는 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알 수가 있어요.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한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한 일을 자랑하고 있어요.

 

신앙생활이란? 자기가 뭘 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거에요.

아까 에베소서에서 뭐라고 했나요.

그 아들을 자랑하기 위해서 구원을 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아들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불법이 되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은 귀신을 좇아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피를 증거하는 거에요.

예수 믿는 것은 선지자 노릇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피를 증거하는 거에요.

예수 믿는 것은 권능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피를 증거하는 게여요. 

귀신을 좇아내고, 권능을 행하고, 병자를 고치고, 갖가지 은사를 행하는 것은 세상 어느 종교에서도 행할 수가 있어요.

 

케이블 TV를 보면 미스테리 극장이라는 프로가 있어요.

거기에 접신하거나 귀신을 좇아내는 것들을 많이 보여줘요.

참 재미있는 것은 무당이나 중들이 귀신을 더 잘 좇아내요.

목사는 잘 안 나와요.

 

전 그것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 아들들도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이나요.

그러니 귀신을 좇아내고 기적을 행하고 병 고친다고 해서 그걸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믿으면 안돼요.

 

그 사람의 신앙을 확인 하려면 성령으로 하여야 해요.

성령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십자가만 증거해요.

예수님 십자가만 증거하라고 예수님이 아버지께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준 겁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여도 속지 마세요.

 

천국과 지옥을 갔다 왔다고 해도 믿지 말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좇아낸다고 해도 믿지 말고,

무슨 엄청난 능력을 행한다고 하여도 믿지 마세요.

또 겸손하고 속된 말로 성자 같더라도 믿지 마세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믿으세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하는 사람이 예수님이 보낸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 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이 모든 죄에서 깨끗해 주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성도를 어디 안에 머물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피 안에 머물게 해요.

다른 말로 예수님의 피 뿌림 안에 거하게 한단 말입니다.

난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자랑하게 해요.

그럼 예수 안에 거하는 사람은 죄에 대하여 두려움이 있겠어요?

없지요.

 

아까 죄인은 일평생 죄만 토해내며 산다고 했지요.

그럼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삶으로 인한 죄책감이 있겠어요?

없지요.

 

죄책감이란? 죄를 자기가 책임을 지고자 하는 마음이잖아요.

성령이 임하면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에 대한 책임을 질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요.

우리는 우리의 죄를 책임 질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에요.

 

성도가 죄책감이 없는 이유는 성령이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을 믿어지게 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로부터 정죄당하지 않게 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 믿어져서 그래요.

 

성도는 죄 앞에서 뻔뻔스러워야해요.

이건 아무렇게나 살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를 대하는 자세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하지 않아요. 

이게 믿어지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자기 삶으로 인하여 자책하거나 후회하거나 반성하거나 하지 않겠지요.

자기 삶으로 인하여 자책하거나 후회하거나 반성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로부터 깨끗케 한다는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를 뿌려준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성도라고 한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자책하거나 후회하거나 반성하지 말아야지요.

자책하거나,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것은 잘 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못 했을 때 나타나는 반응이잖아요.

 

아! 죄를 안 지을 수가 있었는데!

야! 아깝다!

잘 할 수가 있었는데! 못했을 때 하잖아요.

 

우리가 잘 할 수 있었으면 예수를 믿으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갈고 닦아서 잘 하면 되니까요.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본질적으로 안 되기 때문에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마음으로는 잘하고 싶어도 육신은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잘 할 수가 없는 존재에요.

우리는 마음으로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그 짓을 하는게 인간이에요.

죄인은 죄를 이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육신을 일컬어 죄의 종이라고 하고, 죄의 권세아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죄가 인간의 육신에 주인이에요.

죄가 신경질 내!

그러면 신경질이 나와요.

 

죄가 미워해!

그러면 미움이 나와요. 

죄가 욕을 해!

그러면 욕이 나와요.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하니 자기가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어요.

그러자 예수님께선 웃기지 마라!

죄는 네 힘으로 이기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사단이 널 밀 까불듯이 하여 날 세 번 부인한다고 하셨어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말을 안 믿었어요.

자기 의지로 자기가 한 말을 지켜보려고 했어요.

그러나 막상 죽음 앞에 닥치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였어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것도 사단이 갖고 놀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부인하고 저주하였다고 섭섭해 하지 않았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에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저주 하였음에도 정죄당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변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죄는 마치 쮸쮸바와 같아요.

쮸쮸바를 누르면 그 속에 있는 것이 나오듯이 죄인도 누르면 죄가 철철 흘러나와요.

죄를 흘리고 다니면서 사는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겐 예수님의 피 안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주는 겁니다.

성도는 의로운 자가 아니라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에요.

의로운 자와 의롭다 여김을 받는 자는 천지 차이에요.

 

의로운 자는 독자적으로 의를 만들 수 있는 자이지만,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실제로는 의롭지가 않은데 예수님의 의(義)(피)를 뒤집어씌워서 의롭다고 여겨주는 것입니다.

분명이 죄인이 맞는데, 예수님 피 때문에 용서해 주는 겁니다.

 

그럼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정죄함이 없으니 어떤 자세로 살겠습니까?

죄로부터 자유하게 살겠지요.

예수 안에 있으면 내 집처럼 전혀 불편함이 없어요.

이런 상태를 쉼이라고 하고 죄로부터 자유한다고 하는 겁니다.

 

성도는 자기가 책임질 것이 없어요.

모든 것을 예수님이 책임을 져 주세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책임져 주세요. 

성령이 임하면 이런 것들이 그냥 술술 믿어져요.

예수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믿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도 닦는 게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삶이란? 현실이란 말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실제로 밥을 먹고 배부름을 누리듯이 죄사함을 누려요.

실제로 예수를 믿으면 의에 배부름을 얻습니다.

의에 배부름을 얻는다는 것은 율법의 정죄함으로부터 자유한다는 겁니다. 

비록 세상적인 삶이 가난하다 할지라도 근심되지 않고 이상하게 두렵지가 않아요.

 

바울이나 12제자가 쇼를 하고 살지 않았어요.

아픈데도 안 아픈 척 하고 살지 않았어요.

속으로 두려워서 벌벌 떨면서 겉으론 아닌 척 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겉으론 온갖 고난을 당하였지만 속으론 그 고난 때문에 슬퍼하거나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주는 능력 안에서 세상을 담대히 살았습니다.

이는 예수라는 떡을 먹고 의에 배부름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이라는 떡을 먹으면 의에 배가 불러요.

든든해져요.

죄에 대하여 반발하는 힘이 생겨요.

 

사람이 사는 것은 밥 힘으로 살듯이 성도도 생명의 떡 힘으로 살아요.

 

성도도 예수를 밥을 먹은 것처럼 실제로 믿고 사는 거에요.

성령이 오시면 실제화 시켜주세요.

그렇기 때문에 우겨쌈을 당해도 주눅 들지 않고, 욕을 먹어도 그러려니 하고 살아요.

 

바울과 12제자만 그런게 아닙니다.

지금도 바울과 12제자가 받은 동일한 성령을 마신 자들은 그들과 같이 살아갑니다.

비록 육적으로는 배고픔과 아픔이 있지만 믿음으로 의에 배부름을 얻고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목마름과 배부름은 의가 있으면 해결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떡이 없어 배고픔을 당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배고픔이란? 의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가 없어서 목마르고 배고픔을 당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의를 예수님이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배부름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죽으심을 떡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 어째서 예수님이 생명의 떡인지 알아봅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왜? 생명의 떡을 먹는 것인지 살펴봅시다.

 

먼저 인간에게 왜? 생명의 떡이 필요하게 되었는지 상고해 봅시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스스로가 먹거리를 마련하여야 하는 처지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에덴동산에 있었으면 하나님이 공급하는 것으로 살 텐데!

쫓겨남을 당하고 난후엔 공급 줄이 끊겨 버린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 마련하여야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만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좇겨난 인간은 눈만 뜨면 먹거리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자기 생명을 자기가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선 하나님의 것으로 살았는데 이젠 자기가 책임을 지게 되었어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은 언제나 먹거리를 준비하는 일에 모든 일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육신의 생명은 떡으로 연명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에게 떡은 곧 생명인 겁니다.

육신이 살아 있는 한은 떡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떡 있음은 생명이고, 떡 없음은 곧 죽음입니다.

 

그런데 죽음에 쫓기고 있는 인간에겐 먹거리가 많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인은 죽음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많은 먹거리를 준비해 둔다고 하여도 죄로 인하여 엄습하는 불안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돈이 없을 땐 돈만 많으면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 같지요.

그러나 막상 돈을 가져 보세요.

또 다른 근심거리가 찾아옵니다.

인간의 욕망은 밑 빠진 독과 같아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돈 있어 보세요.

병들면 어쩔까?

사고라도 나면 어쩔까?

강도 만나면 어쩔까?

갖가지 염려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이런 염려는 모두가 죄로 인하여 죽음이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이에요.

이게 인간의 현실입니다.

이는 모두가 시절을 좇아 변하는 땅에 주소를 두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머금고 있는 땅에 주소지를 두고 살아가는 한 근심 걱정은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주 받은 땅에 양식을 먹는 자들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어요.

 

땅에서 나는 양식 속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영생은 하늘의 양식에게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저주로부터 벗어나려면 하늘에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알려 주시려고 구약 시대 출애굽해서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살 때에는 하늘에 양식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모세를 따라 광야에 나와 보니 하늘에서 양식이 내려 온 겁니다.

땅이 전부인줄 알고 있던 사람들은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나를 보곤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했어요.

만나라는 이름의 뜻이 “이것이 무엇이냐” 예요.

 

이건 마치 예수님께서 풍랑을 꾸짖고 피도를 잔잔케 하자 제자들이 “이 분이 뉘길래” 라는 말과 같아요.

도대체 이 “예수가 뉘길래 풍랑도 말을 듣느냐” 입니다.

“예수가 뉘길래!”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라는 것은 세상에겐 영원한 의문입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죄사함을 받습니까?”

“왜? 예수가 생명의 떡입니까?”

도대체 “예수가 무엇이길래 그 분을 믿으면 영생을 얻느냐” 이 말입니다.

왜? 예수 믿어야 천국 가는데?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가 누군데” 라고 묻습니다.

구약의 광야 식으로 말하면 “이것이 무엇이냐” 입니다.

참 재미있지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마치 만나처럼 “뭐 이런 일이 있어” 라는 식으로 벌어져요.

인간의 상식과 이성을 비껴가요.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하늘은 낯선 곳입니다.

그들은 땅에서 태어나고 땅에서 나는 음식을 먹고 땅에 기운으로 살던 사람들이었어요.

땅이 전부인줄 알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광야에 나오니 하늘에서 양식이 내린 겁니다.

 

무슨 이런 일이 있나요?

세상에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 날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게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주심으로서 너희의 주소(住所)지가 땅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것을 알려 준 겁니다.

너희는 땅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사람이라고 알려 준거예요.

 

사도 바울이 그랬지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골 3:1-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지요.

여기서 눈여겨 볼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입니다.

성도는 당연히 위엣 것을 찾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강요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란 겁니다.

 

이건 마치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서 출애굽 하였으면 하늘에 양식을 찾으라는 말과 같아요.

양식이란 신약식으로 말하면 의에요.

하늘에 사람은 예수님의 의를 먹고 살고, 땅 사람은 율법에 의를 먹고 살아요.

 

바울이 너희는 죽었다고 하지요.

너희는 땅에 대하여 죽었어!

땅이란? 육신을 말하기도 하면서 세상을 뜻하기도 합니다.

의 차원에서는 율법에 의를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율법에 의를 찾지 말고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를 찾으라고 합니다.

 

바울의 말을 원리적으로 해석하면 진짜 성도라고 하면 자연히 하늘에 의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건 본성이에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아니 하늘에 생명으로 났으면 당연히 하늘에 양식인 예수님의 의를 찾아야지요.

하늘에 사람이라고 하면서 땅에 의를 찾는다면 그건 뭔가 수상해요.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자랑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해 준다는 것을 들으면 들을수록 기쁘고 감사해요.

아니 예수의 피로서 모든 죄에서 깨끗해진다고 하는데 왜? 우리가 성화해야 한다고 야단입니까?

꼭 우리 자랑을 보태야겠습니까?

꼭 나도 있소!

그래야겠습니까?

예수님의 의로 만족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렇게도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자고 하는게 못 마땅합니까?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을 시키고 하늘에 양식을 준 것은 너희는 하늘 백성이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본분을 알려 준 겁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면서 자기 실존을 알아야 했어요.

아! 내가 하늘 백성이었구나!

그런데도 우리는 모르고 애굽에 바로에게 종노릇 했었구나!

우리 임금은 하나님인데 엉뚱한 놈에게 벌벌 떨고 살았구나!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이렇게 어린 양의 피로서 출애굽을 시키셨구나!

신약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해 주셨는데 우린 그것도 모르고 율법에 질질 끌려 다녔구나!

 

만나를 먹으면서 감사했어야 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실존을 이제 알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젠 다시는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겠습니다! 라고 하여야 해요.

그래야 그 사람이 진정한 출애굽을 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바울의 말을 볼까요.

 

갈 4:1-7=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지만 어렸을 동안엔 잠시 후견인 아래서 종처럼 살게 하였다고 하지요.

 

중요한 말이니! 자세히 보세요.

우리는 원래부터 아들이었어요.

종이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아들이 잠간 동안 종처럼 있었다고 하잖아요.

 

천국 갈 백성과 지옥 갈 백성은 이미 창세전에 정해졌어요.

지옥 갈 백성이 나중에 천국에 가고, 천국 갈 백성이 나중에 지옥에 가고 그런 일은 없어요.

이미 야곱과 에서처럼 천국으로 갈 자와 지옥으로 갈 자로 정해져서 태어난 겁니다.

 

천국으로 가기 위해 작정 된 자는 반드시 천국에 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원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천국에 가기로 작정 된 자는 반드시 찾아내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을 찾김 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찾는 것은 주인이 찾지 우리가 주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구약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낸 것은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강제로 빼낸 겁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하고자 하지 않았어요.

애굽을 떠날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모세가 찾아 와서 가자고 해서 따라 나온 겁니다.

모세가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자고 하니 그들의 뭐라고 했습니까?

싫다고 했지요.

우리가 왜? 가야하는데요?

 

그러자 모세가 그러잖아요.

너희들은 여기서 살 인간이 아니야!

너희들이 살 곳이 따로 있어!

그래서 강제로 끌고 나온 겁니다.

 

지금 바울도 그래요.

우리가 원래 하나님 아들인데 잠깐 동안 마귀에게 맡겨 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너희가 마귀에게 종노릇 했다는 겁니다.

마귀가 율법을 가지고 종처럼 부려 먹은 겁니다.

 

마치 애굽에 바로가 하나님 백성을 자기 백성처럼 부려 먹은 겁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때가 차서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하던 자기 아들들을 빼내 오라고 예수님을 보냈다고 하잖아요.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맏아들을 보내서 자기 동생들을 찾아오라고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식으로 말하면 형님이 동생을 마귀로부터 구출해 낸 겁니다.

 

그래서 구출된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했다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고 나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자연스럽게 하늘을 지향하고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의 성도를 보여주는 예표에요.

이를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해요.

그러니 우리는 지금 구약 이스라엘이라는 그림책을 보고 우리 신앙을 점검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땅만 바라보고 살던 사람을 모세를 보내서 광야로 끄집어냈구나!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라고 만나를 주셨구나!

 

그럼 우리는 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교회로 불러 들여서 땅만 바라보고 살아가지 말고 이제부터는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가라고 하는구나!

내가 땅 사람이 아니고 하늘 사람이었구나! 를 알아야 해요.

그래야 성도에요.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오병이어 기적을 베풀고 그 사건을 가지고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사건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한 떡 이야기가 아니고 영생에 관한 일이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그 생명의 떡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그 생명의 떡을 먹었어요.

배부르지 않으세요.

의에 배부름을 느끼지 못하세요.

예수님의 의를 먹으세요.

먹고 배부름을 얻으세요.

 

내가 의를 만들어서 먹으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주신 의를 먹으세요.

의를 밥처럼 먹고 실제로 그 힘으로 사세요.

넘어지면 툭툭 털고 일어나세요.

 

난 왜? 이 모양일까?

자책하기 마세요.

부엉이 바위에 올라가서 뛰어 내리지 마세요.

우리가 죽기를 두려워 하니 예수님께서 대신 죽어 주셨잖아요.

마귀가 너 죽을래!

그러면 난 예수님과 함께 죽었는데 하세요.

 

우리는 죄 앞에서 죽은 자에요.

죄와 상관이 없어요.

여러분이 비록 죄를 짓고 살아도 하나님은 죄로 인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결코 정죄함이 없는 세계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에요. 

마귀가 율법 들고 와서 너 왜? 말씀대로 안살아!

그러면 미친놈! 그러세요.

예수님의 의를 내 보이세요.

 

이 시대 누가 마귀입니까?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자들이지요.

일명 성화주의자들입니다.

그런 놈들이 왜? 말씀대로 안 삽니까?

그러면 너나 잘 하세요! 라고 하세요.

 

소경하고 눈뜬 사람이 부딪히면 눈 뜬 사람이 사과해야 해요.

소경하고 싸워서 무슨 득을 보겠어요.

빛은 빛으로 있으면 자연히 어둠이 어둠이라고 고발당하는 겁니다.

빛은 가만히 있어도 어둠은 자기들과 다르다고 화를 내고 난리를 칩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그것들과 일일이 싸우려면 지쳐요.

아니 본인이 검은 안경을 끼고 있어서 흰색을 검은 색이라고 우기는데서야 어쩔 도리가 없어요.

아! 그러세요.

당신 눈에 검게 보이면 그럼 검은 것으로 치세요.

 

신앙도 동일해요.

자기 것이 옳다고 하는데서야 어쩌겠습니까?

굳이 성화해서 의를 만들겠다는데 누가 말리겠어요.

그냥 두세요.

 

바울의 말로 오늘 말씀을 가름합시다.

 

갈 4:1-1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절서부터 계속 연결해서 읽으세요.

그래야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우리는 모두가 율법의 진노 아래서 종노릇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 아래 있던 우리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아들에 영을 보내주셨어요.

 

그런데 어째서 다시 천한 초등학문인 율법이 말하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느냐 라고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종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이 아니고 아들입니다.

 

아들은 일하는 자가 아니에요.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안식하면 되요.

내 안에 아들의 영이 거하시면 쉬세요.

그 어떤 것으로도 수치스러워하지 말고 내 집 안에서 쉬는 것처럼 쉬세요.

 

아니 쉬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셨는데 왜? 우리가 피 흘리려고 하십니까?

죄 문제는 예수님이 처리하도록 다 돌리시고 여러분은 그냥 예수님을 자랑하고 사세요.

의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의를 만들겠다고 주접떨지 마세요.

 

예수님을 최고로 대접하는 것은 그의 죽으심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죄와 싸운다고 꼴값을 떨면 예수님의 개 죽음이 되고 맙니다. 

제발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지 마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생명의 떡이 되셔서 우리가 먹힘 당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생명의 떡을 먹은 자로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선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 사실을 떡을 먹고 배부름을 얻는 것처럼 실제로 믿고 의에 배부름으로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