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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44강. 복음에 비밀(秘密)과 걸림돌 (요 6:60-71)

by coroa 2021. 5. 2.

 

[44강. 복음에 비밀(秘密)과 걸림돌 (요 6:60-71)]

-.정낙원 목사

 

전 과거에 성경을 왜? 이렇게 어렵게 써놓았는지 불평하기도 하고 궁금해 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소설책처럼 한번만 보면 다 알아 먹도록 쉽게 써 놓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소설책은 이해가 되니까 밤새도록 보아도 지겹지가 않고 또 보고 싶어지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보면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재미가 없어서 한 장을 읽기도 전에 하품이 나오고 눈이 침침해지잖아요.

 

그럼에도 성경을 읽은 것은 교회에서 구역별로 성경 읽기 경쟁을 붙여 놓아서입니다.

구역보고 할 때 성경 몇 장 읽었느냐를 기록해야 했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무조건 읽었어요.

물론 신자로서 성경을 읽어야겠다는 의무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껏 안다고 하여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나니 성경은 “비밀(秘密)” 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은 아무나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만 이해가 되게 하려고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알려져 있는 비밀인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라고 했으니 “예수님이 곧 비밀” 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비밀로 해 놓은 것은 이 세상에는 예수님에게 속한 자와 속하지 않은 자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비밀은 상대편이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겁니다.

모두가 다 알아야 할 것이라면 비밀로 할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을 비밀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인간을 차별하고 있는 겁니다.



이 차별을 오늘 본문에서 영(靈)과 육(肉)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는 영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가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 자신을 영이라고 하셨으니 영에 속한 자만 예수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영에 속한 자를 찾아내기 위해서 오셨음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그러니 육은 아무리 예수를 보아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무엇이 비밀인지 살펴봅시다.



사도바울의 증거를 들어봅시다.

 

골 1:25-27=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秘密)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秘密)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秘密)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비밀이라고 하면서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오면서 감추어져 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의 성도” 들에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만세로부터 감추어져 있던 비밀이 드디어 베일이 벗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그의 성도” 라는 말입니다.

“그”가 누구인가 보니!

바로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비밀”이라고 합니다.

 

아주 중요한 것은 “예수”를 비밀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비밀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그리스도” 라는 것을 육에 속한 자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비밀로 해 두었을까요?

그리고 육에 속한 자들이 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면 안 되는건가요?

여기엔 뭔가 중요한 것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감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비밀로 해 놓았지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육은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 세상은 모두가 육이니 세상의 지혜로는 알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지혜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알게 하신 겁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자 제자들이 일제히 하나님께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하기 시작 했습니다.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성령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 라는 것을 증거케 하려고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럼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게 됩니다.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는 자가 성령을 받은 영에 속한 자입니다.

반대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치 않는 자는 성령을 받지 않은 육에 속한 자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와 그리스도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성령을 받은 자는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게 됩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십자가 이야기만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도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에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 라는 것을 증거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율법아래 있을 때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믿는 자들이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럼 먼저 주와 그리스도가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메시야”란 말입니다.

“메시야”는 “구원자”인데, 곧 “왕”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주 라는 말은 왕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왕이란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그러니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말은 곧 예수 당신은 우리의 구세주이고 왕이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고백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이러면 왜? 유대인들이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극구 부인하려고 했는지 알 수가 있어집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자기들과 동등한 한 인간으로서의 선생이나 선지자 정도로는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용납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를 자기들의 왕이고 더군다나 하나님이라는 것은 인정 할 수가 없어요.

구원자로는 인정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바라는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라는 메시야는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정치적인 메시야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라는 메시야는 과거 다윗 왕과 같이 이스라엘을 세계에게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들어서 이스라엘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줄 메시야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부국강성한 나라를 만들어줄 정치적인 메시야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구원해줄 메시야가 필요하였습니다.

민족의 해방을 가져다 줄 강력한 구원(救援)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러자면 온 민족을 하나로 결속시켜 로마에 항거 할 수 있게 하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메시야여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바라는 메시야는 철저하게 유대인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그런 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일체 정치적인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정치적인 일이란? 작게는 유대나라를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일이고, 크게는 유대인들이 부국강성(富國强性)하게 해서 잘 살게 해주는 그런 일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 때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고자 한 것도 모두가 자신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 달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入城) 할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환호한 것도 다윗 왕과 같이 이스라엘을 강한 나라로 만들어 달라는 의미에서의 환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는 너희들을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시려고 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픈 마음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 주시려고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이라는 저주 아래서 끄집어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세상의 실질적인 임금인 마귀를 멸하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죄와 사망의 권세로 자기 백성들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적 구원을 위한 영적인 메시야로 오신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에요.

 

예수님은 영에 대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에 문제를 해결하고자 오셨는데 유대인은 육에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한 겁니다.

육은 로마에서 해방되는 것이지만 ,영은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로마는 보이는 권세이지만, 죄와 사망은 보이지 않는 권세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보이는 것을 해결해 달라고 예수를 찾게 됩니다.

반면에 성령을 받은 성도는 죄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예수를 찾습니다.

 

히브리서 2장을 봅시다.

 

히 2:14-16=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자녀가 지금 사망의 세력에게 잡혀 있습니다.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뭔가 이상하지요.

하나님의 자녀가 사망의 세력인 마귀에게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자 보세요.

하나님은 영생하는 분입니다.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자녀가 사망에 가두어져 있고 죄 아래 있습니다.

 

이건 마치 내 자식이 지금 강도에게 인질로 붙잡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자녀가 인질로 붙잡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고 있겠습니까?



밥맛이 있겠어요?

잠이 오겠어요?

마음이 쉼이 있겠어요?

사는게 사는게 아닐 것이 아닙니까?

온통 마음은 자식에게 가 있을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도 그래요.

안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자기 백성들이 지금 죄와 사망에 가두어져 있어 종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서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라고 하신 겁니다.

 

어떻게 건져내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죄값을 치루어 주심으로서 건져내는 방식으로 하십니다.

제자들도 성령이 임하고 나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는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성령이 오시고 난 후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지금 로마에게 종노릇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현실이 그러니까요.

그래서 눈만 뜨면 로마로부터 끄집어 내 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정치적인 메시야를 보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이 세상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주면 뭣합니까?

죄 때문에 죽는데!

로마의 식민지로 있어도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죽고,

로마로부터 해방을 해도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로마로부터 해방이 되나 안 되나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로마라는 세상의 어떤 환경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급선무인겁니다.

 

그런데 자칭 하나님 자녀라고 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의롭고 거룩한 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나 창기들이 죄인이지 자기들을 죄와 상관이 없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을 지킨 자는 거룩한 자이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저주 받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요 7: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자신들은 당연히 율법대로 살고 있으니 저주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 문제를 이야기 하자 그건 이방인에게나 필요한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으면 당연히 천국에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확신은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후손은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아브라함 후손도 죄 아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세력에 종노릇 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놓아주려고 오셨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잘 보세요.

예수님이 지금 아브라함 후손을 놓아주려고 하지요.

어디에서 놓아 준다고 합니까?

죄와 사망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은 누구입니까?

자기가 죄와 사망에 가두어져 있다는 것을 아는 자가 되겠지요.

자기가 죄와 사망에서 빠져 나와야 된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아브라함 후손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한다면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해 줄 메시야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럼 지금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은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란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육적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입니다.

혈통적 아브라함의 후손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닙니다.

영적인 아브라하므이 후손이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은 죄로부터 건짐 받을 성도들인 겁니다.

이해되시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으로 난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찾아서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혈통적인 아브라함 후손과 영적인 아브라함 후손이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예수님에 의해서 표면적(表面的) 이스라엘과 이면적(裏面的) 이스라엘로 갈라 질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육적(肉的) 이스라엘과 영적(靈的) 이스라엘로 구분이 된다는 것을 몰랐어요.

 

혈통적이니 육적이니 표면적이라는 말은 전부 육이란 말입니다.

육적 이스라엘이란 죄의 종으로서 마귀 자식이에요.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마귀의 자녀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어요.

예수님이 와서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니까 펄쩍 뛴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리는 육적 이스라엘과, 죄에서 구원하는 영적 메시야를 기다리는 영적 이스라엘로 갈라진 겁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육적 신자는 육적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고, 영적 신자는 영적인 문제를 해결 해 달라고 합니다.

 

육적인 문제는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고, 영적인 문제는 하늘나라에서 필요한 겁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 것을 구하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합니다.

예수님을 찾는 것은 동일한데 그 내용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유대인들의 육적 메시야 사상은 지금 이 시대 기복사상을 쫓아가는 교인들과 같습니다.

기복 사상을 쫓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여서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똑 같은 사고방식으로 예수를 믿고 있어요.

 

유대인들은 예수를 보면서도 그 “예수”가 죄에서 건져줄 “그리스도” 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는 그들에게는 “예수”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줄 “그리스도” 라는 것이 감추어져 있는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맥락에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군중들은 오병이어 기적과 같이 세상에 떡을 주면 얼마든지 예수를 주로 인정 할 수가 있어요.

예수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런 기적을 베풀었다고 한다면 받아들이기가 어렵지가 않아요.

구약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이런 기적들을 행하였기 떄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을 가지고 자꾸만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라느니!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느니!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다고 하시면서 내 말이 영이고 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차라리 율법을 지키라고 하면 알아먹겠는데!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영생을 얻는다는 둥!

자신은 하늘로서 온 산 떡이라고 하는 둥!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알아 들을 수가 없는 정신병자 같은 말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중 여럿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 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여론이 형성이 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저 양반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겉보기엔 정신 나간 것 같지는 않은데 자꾸 알아먹지 못하는 헛소리를 하니 자기들이 더 헷갈리는 겁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예수님께서 수군거리는 자들을 보고 이런 말에 걸림이 되면 어쩌느냐?

그럼 앞으로 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어찌하겠느냐! 라고 합니다.

점입가경(漸入佳境)입니다.

이 무슨 쌩뚱 맞는 소리인가요?

 

그러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 때문에 혼란스러운데 이젠 아주 하늘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정상인으로 간주 할 수가 없어집니다.

더는 따라 다닐 수가 없어요. 

그래서 수군거리던 제자들이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합니다.



야! 아무리 기적도 좋고,

병 고치는 것도 좋지만,

저런 정신 나간 사람을 따라다니다간 우리도 정신병자 취급당한다고 하면서 제 정신 가진 사람들은 다 떠나갔습니다.

 

물론 여기서 떠나가는 제자들이란? 스스로 예수를 따라다니겠다고 나선 자들입니다.

육적인 메시야를 추구하던 자들입니다.

떠나가는 자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누구라도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않으면 저렇게 다 떠나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번엔 12제자에게 너희들도 떠나갈래! 라고 묻습니다.

이에 12제자들이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신데 우리가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라고 합니다.

그럼 여기서 벌써 두 편으로 나누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떠나가는 자와 남아 있는 자들 간에 다름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육적인 메시야로 보았다가 아니라고 생각이 되어서 떠나가게 되었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영생을 주실 메시야로 보고 붙좇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결국 예수를 두고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두 편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영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로 갈라진 겁니다.

예수를 육적인 메시야로 따르는 자들과, 죄로부터 구원해줄 메시야로 따르는 자들로 갈라진 겁니다.

 

이러한 일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 속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항상 있어 왔고, 이제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겁니다.

육적인 문제로 나아오는 자들과, 영적인 문제로 나아오는 자들로 나누입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을까? 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수천 년 동안 입만 열면 하나님! 하나님! 하던 자들이 어째서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몰라보았을까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들의 신앙관으로 예수님을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율법이라는 정통신학으로 예수님을 판단 하였기 떄문입니다.

율법 신앙으로 보면 예수님은 이단입니다.

 

유대인들의 신앙과 신학의 오류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전통 신학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틀린 말도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겐 하나님의 말씀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수많은 율법사와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신학자들입니다.

율법사와 서기관들은 철저하게 조상들이 전통적으로 해석하는 문자적 해석방식으로 성경을 해석을 했습니다.

이걸 장로들의 유전(遺傳)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장로들의 유전은 모든 성경 해석의 교본(敎本)입니다.

요즘 말로 정통신학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전통적인 맥을 가지고 있고 정통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에는 더 이상 누구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조상들이 율법을 열심히 연구해 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자기들의 지혜로도 하나님의 뜻을 알아 낼 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신학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신앙이 절대적 기준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사고와 다른 말을 하면 정통 신학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이단적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은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떡을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면 영원히 산다고 하니 유대인들 입장에선 황당한 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요 6:51-52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그냥 과거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먹인 것처럼 오병이어 기적을 베풀었다고 하면 되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을 모세가 준 만나 사건을 자신의 살과 피로 해석을 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자기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고 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지요.

예수님의 이러한 말은 유대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겐 율법이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율법 속에 복과 저주가 들어가 있어요.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보면 복과 저주는 율법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로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율법을 생명처럼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건 유대인으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거니와 이런 말을 하는 자는 그냥 두어서 될 일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율법을 모욕하고 하나님을 참람하게 하는 자입니다.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염병과 같은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을 주저함 없이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쟁이들은 이단으로서 죽여도 된다고 하였어요.

율법적인 기준으로 보면 예수는 당연히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예수는 유대교 정통 신학으로 보면 분명한 이단이에요.

 

바울이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는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핍박하는 일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옳고 선한 일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신학으로는 예수는 죽어야만 해요.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어요.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정통 신학과 전통 신앙을 부정하는데 어찌 살려 둘 수가 있겠어요.

예수님의 말씀이 맞으면 온 유대교가 다 틀린 것이 되는데 어찌 용납이 되겠어요.

설령 예수의 말이 맞다고 하여도 유대나라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라도 예수는 죽어야 해요.

그래서 예수를 재판한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온 민족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났다고 했어요.

 

물론 예수가 맞다고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보이는 유대나라를 위해선 예수가 살아 있으면 분열을 일으키니 없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육적 이스라엟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요즘말로 구국의 결단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보이는 나라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유대인의 사고는 모든 인간들의 사고와 같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도 보이는 세상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에겐 하늘나라는 없어요.

오직 보이는 이 세상만 있어요.

그러므로 육에 속한 자들은 육에 문제를 위해 예수를 찾지 죄 문제를 위해서 예수를 찾지 않아요.

 

사회학자들의 주장을 빌리면 온 인류중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똑똑하다고 합니다.

노벨상을 제일 많이 탄 사람들이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논리를 근거로 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모든 인간들도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인간들의 지혜로는 예수님의 말을 알아먹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을 알아 들으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은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는 영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영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를 갈라내고자 왔다고 하십니다.

내 말을 알아 듣는 사람은 영에 속한 자이고, 못 알아듣는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영(靈)과 육(肉)은 본질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영과 육은 서로가 하나 될 수 없으며 또한 사로 간에 이해 할 수가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과 육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靈)이고, 인간은 육(肉)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이고, 인간은 땅입니다.

땅에선 하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생소한 세계입니다.

 

영(靈)과 육(肉)을 지혜로 말하면 영(靈)은 하나님의 지혜이고, 육(肉)은 인간의 지혜에요.

예수님께서 하늘에 말을 하는데 유대인들은 땅에 말로 해석하려고 하니 못 알아먹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인간에겐 감추어져 있는 분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는 아는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감추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 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시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지고 세상을 두 편으로 의도적으로 갈라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애초부터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다면 유대인들이 알아먹을 수 있는 말을 하였을 것입니다.

사람이 누구를 설득하고자 하면 그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말을 할 터인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난 자만을 찾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 교회들이 전도하는 것과는 상충된 일입니다.

이 시대 교회에서는 전도를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는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설득하면서 전도를 하고 있잖아요.

 

만약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기편에 두고자 하였다면 수군거리면서 떠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설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 찾으러 오셨어요.

자기 백성 아닌 자는 떠나가는게 정상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은 떠나가는 자들을 아쉬워하지 않았어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일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언된 일입니다.

 

구약에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살펴봅시다.

 

사 6:8-10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사야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꼬! 하니,

이사야가 저요!

제가 가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뭐라고 전할까요? 물으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 말을 저 놈들에게 해도 알아먹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는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뭔가 이상하지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너희들은 나를 모른다는 것을 전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지혜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인간들의 눈과 귀를 가려 놓았다고 알려 주라고 합니다.

 

이건 우리가 생각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지자가 오면 조근 조근 알아먹도록 이야기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증거는 정 반대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지로 보내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을 못 알아먹게 하려고 보낸다고 하지요.

못 알아듣도록 눈과 귀를 막아놓았다고 하잖아요.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해서 알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좀 의아하지 않습니까?

아니 선지자를 보내면 하나님의 말을 알아먹게 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못 알아먹게 하려고 한다는 것은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가지고 구약의 만나 이야기를 하고,

그 만나는 자신의 살과 피라고 하고 있어습니다.

내 살과 피를 먹어야 그 속에 영생이 있다고 합니다.

 

아니~ 유대인들이 식인종입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게!

문자적으로 들으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알아먹지 못하는 말씀을 하실까요?

이는 너희가 모르는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육으로서는 영의 일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너희는 나를 알 수 없다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유대인을 철저히 소경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소경이라고 하는데 유대인은 아니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밝히 보고 있는데 왜? 소경이냐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를 몰라보니 소경이라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알 수가 없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길 바라야지요.

일체의 노력을 중단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지요.

가만히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인간 쪽에서 알 수 없는 것을 인간 쪽에서 알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설치면 설칠수록 교만만 쌓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일을 하십니다.

이를 하나님의 때라고 합니다.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하시지 인간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과거 수십 년 동안 예수를 믿고자 엄청 노력을 하였습니다.

열심과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내 몸을 학대 하면서 믿음을 따 내려고 했어요.

밤마다 산 이슬 맞아 가면서 산 기도를 했고, 한 달을 금식하면서 기도를 했고, 열심과 충성으로 교회를 섬겼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오는 줄 알고!

이건 내가 때와 기한을 정하고 있었던 교만이었습니다.

물론 복음을 알고 나니 이런 것이 어리석음이고 내 교만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뜻과 상관없이 목회에 지쳐 갈 때 바라지도 않던 은혜가 덮쳐 왔습니다.

그토록 은혜를 사모 할 땐 외면하시다가 이젠 교회고 목사고 다 그만두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명분을 찾고자 할 때 불쑥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나니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었고,

지금까지 내가 바라던 메시야도 가짜 메시야였라는 것을 비로서 알게 된 겁니다.

눈이 떠진 겁니다.



눈이 떠지고 보니 내가 바로 예수를 죽인 유대인이라는 것이 보여졌어요. 

전 솔직히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전엔 죄와 사망의 문제에서 구원해 준다는 것은 상투적으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 기도를 해도 그의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지 못하고 온통 세상 것만 구하였어요.

밤 이슬 맞아 가면서 기도하면 뭣합니까?

한달 금식하면 뭣합니까?

순 엉터리인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복음이라는 것으로 포장을 해서 들키지 않으려고 하나님도 속이고 사람도 속였던 것입니다.

입만 열면 천국 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립서비스였지,

내 속엔 세상 나라가 가득차 있었어요.

마음 속에 세상이 가득차 있는데 뭐가 나오겠어요.



입만 열면 세상 것이 나오지요.

종말론에 빠져서 천국을 말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말하고,

종말을 말해도 염세주의적인 도피 차원에서 한 말들이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비밀이 벗겨지기 시작한 겁니다.

영과 육이 구분이 되기 시작했어요.

모든 성경이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로 풀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예수님이 모든 성경을 통하여서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마치 베드로가 말했듯이 내 안에 샛별이 떠 오른 겁니다.

희미하던 것들이 이젠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바 되어 잡히기 시작한 겁니다.

허상이 실상으로 보여지니 그 동안 두려움이 안개가 사라지듯이 다 사라져 버렸어요.

 

지금의 교회 사정이 예전에 교회 사정과 비교하면 형편없이 열악해요.

하지만 내 안엔 과거에 없던 기쁨과 평안과 감사함으로 가득차 있어요.

이젠 그리스도가 네겐 비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데 있어 전혀 어렵지가 않은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죄와 사망에서 건짐 받았다는 것이 믿어져요.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이 믿어져요.

그러니 예전에 없던 담대함이 있어요.

 

이젠 설교하는 것도 거창하게 각색하고 포장할 필요도 없어요.

그져 주시는 은혜 따라 증거하면 되요.

난 이런 은혜로 산다는 것을 증거하는 겁니다.

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제 설교에요.

분명하게 말하지만 예수는 가르치고 설득해서 믿어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습니다.

 

이는 육과 영의 차별성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육으로서는 영을 알 길이 없어요.

그러니 일체의 노력을 하지 마세요.


헛수고입니다.

괜히 적개심만 쌓여요. 

구약의 선지서에 보면 환상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요.

선지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환상으로 봅니다.



환상이란? 베일에 가려진 세계입니다. 

환상을 역사세계에 알려 주려니 고난이 따른 겁니다.

역사 세계가 알아먹을 수가 없으니 핍박을 하는 겁니다.

이는 곧 장차 환상 속에 계시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 당할 고난을 미리 맛보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들 세상에선 알 수 없도록 베일에 가려져 있어요.

그러니 환상을 보여주어도 인간 쪽에선 해석할 길이 없어요.

마치 바로 왕이나 느브갓네살 왕이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가 없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그 환상을 해석해 주어야지만 알 수가 있어집니다.

 

그 환상의 실체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비록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와 있지만 인간들에겐 환상 속의 인물인 겁니다.

인간은 빤히 보고도 예수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무라도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면 자기를 알 수가 없다고 하신 겁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어 준 사람은 예수님을 환상 속에서 알게 됩니다.

 

이런 환상을 오늘 본문에서 영이라고 합니다.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겁니다.

영 안에선 예수님은 추상적인 분이 아니고 실상이에요.

 

죄사함도 실상이고,

구원도 실상이고,

천국도 실상이고,

영생도 실상이고,

부활도 실상입니다.

 

믿어진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쉼도 실제이고,

평안도 실제이고,

기쁨도 실제이고,

감사도 실제입니다.

 

사도요한은

귀로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어요.

 

이처럼 예수님을 비밀로 두신 이유는 자기 백성만 알아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습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예수님을 알 수 없게 하셨어요.

그 이유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이해하게 되면 인간의 노력으로도 믿을 수가 있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어지려면 인간의 지혜로 믿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믿음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은혜가 날아가 버려요.

 

그래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말을 하고 계신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 쪽에서 도대체 어느 누가 구원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라는 반응이 나와야 됩니다.  

고맙게도 이런 일이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선 문답한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답니다.

 

마 19:24-25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리고 나를 좇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근심하고 돌아갔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 가는 것보다 쉽다고 합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가 없듯이 부자라는 것으로도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인간 쪽에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부자들은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들 쪽에서 천국에 가는 길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깜짝 놀라면서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불만을 토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사람으로는 할 수가 없는데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다고 알려 줍니다.

 

26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라는 말과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인간들 쪽에선 방법이 없고 하나님 쪽에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할 일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신 겁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게 해 주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게 해 주지 않으면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주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을 이해 할 수가 없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하나님께서 눈과 귀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봅시다.

마태복음 13장은 천국을 일곱 가지로 비유하신 내용입니다.

 

마 13:14-15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시니 제자들도 답답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아니 이왕 말씀을 하실 것이면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먹도록 하라는 겁니다.

빙빙 돌려서 말하지 말고 딱 부러지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말하라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저희들은 못 알아먹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다고 하십니다.

저희들이란? 스스로 구원을 이루겠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은 비밀이라고 하시면서 “너희”에겐 허락이 되었지만, “저희”에겐 아니 되었다고 “너희”와 “저희”로 갈라놓으신 겁니다.

 

16-17절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너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의 비밀이 허락 되었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이 비밀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고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너희들에겐 하나님의 복이 임하여서 허락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내 말을 알아먹는 것은 너희들이 똑똑해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알아먹게 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반대로 유대인들이 내 말을 못 알아먹는 것은 저희들이 무식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아먹지 못하게 해서 못 알아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내 말을 알아먹는다고 잘난 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난 척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복음을 아는 모든 성도에게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눈과 귀와 깨닫는 마음을 허락해 주어서입니다.

 

유대인들은 뻔히 예수님을 보고도 몰랐던 것은 지금 우리는 2천 년 전에 유대 땅에서 벌어진 십자가 사건을 영적으로 이해하고 믿고 있어요.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유대인들은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한 것은 지금 우리는 알고자 하지도 않았는데 알고 있어요.

세상에 이런 일이!

 

믿음에 대한 감격이 없다면 아직 이 놀라운 사건을 애하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육적인 지식으로 알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없는 겁니다.

육으로 아는 지식은 감동이 없어요.

본문에서 육은 무익하니 라는 말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신앙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데 인간의 조건은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데 남녀노소(男女老少)와,

빈부귀천(貧富歸天)과,

박학다식(博學多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 지식과는 전혀 무관해요.

 

그러므로 교회 안에는 사람 간에 차별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학문으로 비교하여 기가 죽을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영생을 얻는 데는 인간의 조건은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무식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하나님의 일을 밝히 알 수가 있으며, 반대로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에는 소경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데는 목사나 평신도나 차이가 없어요.

모두가 하나님이 믿게 해 주어서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표현하는 데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믿음이라는 면에선 전혀 차이가 없어요.

 

이 시대 수많은 목사나 신학자들이 예수를 믿지 않아요.

지식으로 알아진 예수에요.

그러니 신앙이 관념으로 흐르는 겁니다.

아는 것따로 사는 것 따로인 거에요.

신학이라는 학문으로 아는 예수뿐이에요.

화려하고 현란한 수사(修辭)를 동원하여서 말은 하는데 죽은 말이에요.

 

학문으로 전하는 예수는 공허해요.

학문으로 아는 예수는 육이기 때문에 죽은 예수예요.

죽은 예수란 지식이란 말입니다.

지식으로 알아진 예수는 우리 삶에 변화를 주지 않아요.

화석화(化石化)된 신앙으로 가요.

 

그래서 신학으로 하는 설교는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사용하여서 청산유수(靑山流水)같이 화려하게 말은 하는데 맹맹해요.

죄사함의 기쁨이나 구원의 즐거움이 없어요.

전혀 생명의 역사가 없어요.

예수의 생명이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설교는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울고 웃기는 코메디가 아니에요.

기독교 방송에서 틀어주는 무당 같은 목사들의 코메디가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적당히 말하다가 양념으로 던지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설교는 말장난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 안에서 흘러나는 생명의 역사를 증거하는 거에요.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의 악함을 깨닫고,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애통함이 일어나고,

예수님의 피 뿌림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에 놀라운 감사와 축복들이 넘쳐나는 겁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예수를 증거해요.

증거는 단순해요.

증거는 아름답게 포장할 이유가 없어요.

그져 자기가 본대로 깨달은 대로 말하면 되요.

 

목사들이 자기 안에 예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신학을 말하고,

교리를 말하고,

신조를 말하고,

철학을 말하고,

법을 말하는 겁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복음을 깨닫고 자기 교회 목사님에게 성전도 없고 십일조도 없고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의롭게 된다고 말하니까 화를 내더랍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정통신앙의 칼빈주의와 삼위일체를 아느냐 라고 하더랍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 속에 예수가 없다는 증거에요.

예수가 없기 때문에 신학이 나오는 겁니다.

신학에서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그러니 목사나 신학자라는 타이틀에 속지 마세요.

 

예수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면 세상 학문과 상관없이 알게 되어요.

성령으로 깨달아진 예수를 말하는 사람은 비록 신학은 모르고 말이 어눌하고 표현이 서툴고 투박하지만 그 속에 생명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되요.

 

이건 영생을 받은 성도는 대번에 알아보아요.

아! 저 사람은 예수의 생명이 있다 없다 를 알아요.

지식인지 생명의 흐름인지 느낀다니까요.

 

예수님의 생명은 정확하게 동질인 예수님의 생명을 감지해 내요.

대화를 해 보면 산 예수인지 죽은 예수인지 알아요.

성령께서 누가 내 형제인지 아닌지를 구분해 내요.

 

예수의 생명은 성령께서 구별해 내십니다.

이런 상태를 빛 가운데 사귐을 갖는다고 하는 겁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사귐을 가질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빛에 속하였으므로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고 하지요.

이는 성령을 받은 성도는 그 속에 빛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을 정확하게 감지(感知)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어둠에 말을 듣지 않아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깨닫도록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왕 노릇하여야지 세상 학문으로 알아진 인간의 지혜가 왕 노릇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인간 쪽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들 입장에선 예수님의 말을 들으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겠느냐? 고 해야 정상입니다.

만약 인간의 지혜로 예수님의 비밀을 알 수가 있다면 성령이 오실 필요가 없잖아요.

 

만약 인간이 예수를 믿을 수 있다면 인간 힘으로 구원도 이룰 수가 있어집니다.

죄 사함도 인간의 방법으로 얻어 낼 수가 있어지게 되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어요.

성령도 필요 없어요.

 

마귀는 인간들의 노력으로도 거룩해지고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미혹을 해요.

이러한 사상이 사람들로 하여금 지옥에 가는 것은 예수를 믿지 않아서 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고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는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의 함정은 예수를 믿고 안 믿고는 인간 쪽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믿었고!

너는 안 믿었다는 행위가 남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이 또 다른 인간의 행위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지고 인간들 자랑만 남아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들이 잘나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을 못하게 하기 위하여 알아먹지 못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이란? 인간에게 다가 올 때는 항상 인간을 부정하면서 다가오게 되어 있어요.

이를 일컬어 걸림돌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의 이성으로 복음을 이해하려는 자를 넘어지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미련하게 보인다고 했어요.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또 충돌을 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가져야 해요.

성도가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만약 내가 십자가에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우러러 높여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 예수님처럼 외면당하게 되어 있어요.

 

복음을 전하는데 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르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이 동네에서 핍박하면 저 동네로 피하라고 했지요.

이는 십자가를 전하면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른다는 것을 전제하여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복음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과 대화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귀에 경 읽기라는 말과 같이 성도가 하늘에 소리를 하면 사람들은 땅에 귀로 듣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을 욕으로 여겨서 핍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을 설득하고자 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복음은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걸림돌”로 오셨어요.

이를 “시온의 거치는 반석”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부정하지 않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외면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실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모든 사람을 구원해야 되겠다면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는 말로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알아먹어야 복음을 믿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말로 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게 하라고 한 것은 모두를 구원하실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려면 반드시 지옥에 가는 자도 있어야 해요.

지옥에 갈 자에겐 예수는 비밀이어야 해요.

 

복음을 인간들의 지혜로는 알아먹지 못하게 한 것은 천국백성만 찾아내기 위함이에요.

복음은 택한 자를 찾아내려는데 목적이 있지 사람들을 설득해서 교회를 키우고자 하는 데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본문 67절에서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68-69절에서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라고 하면서 자신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앞서 66절을 통해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고 하면서 예수를 떠나는 제자들과, 예수 곁에 남아 있는 제자들을 대조시켜서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인간들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베드로와 같이 12제자들도 예수님을 떠나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위시하여 12제자는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을 공감한다는 것입니다.

 

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에 거부감을 나타내고 떠나는데 12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에 공감을 하고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까?

그 이유를 65절에서 말해주는데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고 하여 12제자들은 하나님이 이끌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떠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떠나지 않는 것은 자기들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떠나지 않도록 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를 떠나지 않은 것은 자기들의 의지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아는 자는 믿음조차도 자랑으로 내 세우지 않습니다.

은혜를 안다면 예수 믿는 것조차도 자랑 할 수가 없어요.

자랑이 아니라 감사가 나와요.

 

성도가 신앙생활 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이므로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들이 나는 무엇을 하였고 우리교회는 이런 일을 한다고 자랑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고 성도를 일컬어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고 하였지요.

그러면서 가지는 절로 과실을 맺을 수가 없고 나무에 붙어 있어야 된다고 하지요.

가지가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다는 말은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가지가 내가 열매를 맺었다고 자랑하는 것은 자기 분수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열매가 비록 가지에 맺혀 있어도 가지는 내가 열매를 맺은 것이 아니고 나무가 맺게 해 주었다고 하여 나무를 자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올바른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가지를 붙잡고 있는 나무를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성도에게 적용하면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주 예수를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열매 맺음이 주님의 은혜라고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겐 자랑거리는 없고 오직 은혜를 주심에 대한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신앙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만 남아 있어야 해요.

 

만약 누군가가 자기의 신앙을 자랑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반대말은 인간의 행위입니다.

마귀가 노리는 노림수가 바로 인간의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는 자들은 인간의 행위를 포기하지 못해요.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은 자신이 행한 종교적인 여러 가지 일들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자랑을 해요.

 

자기 행함을 자랑하는 자는 가짜라고 보면 틀림이 없어요.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자기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랑할 것이 없어요.

 

성도는 예수 안에서 살아난 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살아난 성도는 자기의 자랑거리는 없고 오직 예수님의 자랑거리만 가지고 사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지 않은 자는 자기가 버젓이 살아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을 마일리지 적립하듯이 쌓아두고 훈장처럼 달고 다니며 자랑하는 겁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였고, 구제하였고, 철야하였고, 전도하였고, 봉사하였다는 것을 자랑한 것과 같이 자랑을 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원수는 인간의 행위를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이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이 바다에서 저 바다 끝까지 다닌다고 합니다.

그래서 얻어진 교인을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든다고 하지요.

왜? 지옥 자식으로 만드나 하면 율법 지킴이라는 행위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 지킴을 신앙이라고 가르침을 받게 되면 그 율법을 지킨 자기 자신이 위대해 보이고 자랑스러워지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되면 평생 자기 자랑만 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요.

결국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를 자랑한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죽음을 가치 없이 만드는 것이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넘어지게 하려고 예수님을 보냈어요.

 

사 8:13-15절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시온에 보내실 거룩한 분은 이스라엘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고 함정과 올무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유대인을 넘어뜨리게 하려고 보낸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보내실 거룩한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시온이란?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을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지금의 모든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예수님을 신앙생활 잘하는 자들을 넘어지게 하려고 걸림돌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유대인들을 넘어뜨려야만 했나요?

그대로 두면 바벨탑을 쌓듯이 인간의 행위로 천국까지 쳐 들어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서 허물어 버린 겁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예수님은 원수 같은 인물입니다.

자기들 편을 들어주지 않고 넘어지게 하니 원수가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싸우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말을 지금 이 시대에 적용하면 지금도 교회 안에는 유대인과 같은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로는 인간들의 역사 속에는 항상 유대인과 같은 사고를 가진 자들이 어느 시대이고 있었으며 이들은 항상 인간의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대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도 교회 안에는 믿음과 반대되는 행함을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고 있지 않고 자신들의 종교적인 행위를 붙잡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행위를 중시합니다.

 

역사 속에 항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있었다면 상대적으로 대적 자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자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예수님 당시의 영적 구도를 만들어 놓아요.

지금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있어요.

물론 적은 무리에요.

 

이사야는 이런 자를 “그루터기” 라고도 하고 “남은 자” 라고 했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였듯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믿음만 강조하다가 행위를 자랑하는 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건은 지금 이 시대에도 계속하여 재현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심이 특심한 자들의 손에 죽임 당하였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면 아멘을 해요.

하지만 택함을 받지 않은 자들은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행한 것은 무엇이냐! 라고 하면서 화를 냅니다.

하나님이 믿으라고 한 것을 그대로 믿으면 되는데 안 믿어지기 때문에 행함으로 믿음을 대신하려는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없기 때문에 믿음으로 산다는 말을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행함으로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고 하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로 오해를 합니다.

믿음으로 살라는 말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이것만 설명하고 마칠게요.

우리는 과거 율법 아래 있었어요.

율법이 주인이었어요.

그래서 율법이 시키는 일을 하고 살았어요.

우리 모두는 믿음이 오기 전에는 열심히 율법아래서 살았어요.

 

그런데 율법에서 나와 예수 안으로 들어 왔어요.

이제 믿음이 왔어요.

이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지요.

예수님이 살게 해준 것으로 열심히 살아야지요.

난 이렇게 예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를 증거하면서 살아야지요.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자기 열심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택을 받은 자들은 자기를 자랑치 않고 선택해 주신 분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택해 주신 분이 자랑스러워야지 선택 된 자기가 자랑스러우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셨지요.

하나님은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받으신다고 했지요.

성경이 말하는 어린아이란? 자기 자랑이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 부모를 자랑합니다.

우리 엄마는 어떻고 우리 아빠는 어떻고 하면서 부모를 자랑해요.

 

어린아이는 엄마 아빠의 힘을 자랑하지 자기 힘을 자랑하지 않아요.

예수님만 자랑하며 사는 성도가 어린아이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산다는 것을 자랑하는 어린아이로 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을 여시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나로 살게 마옵시고 예수 안에서 예수의 것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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