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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39강. 무슨 양식을 구하나? (요 6:22-27)

by coroa 2021. 4. 8.

 

♣ -.39강. 무슨 양식을 구하나? (요 6:22-27).-

-.정낙원 목사

 

오늘 살펴 볼 것은 양식입니다.

어떤 양식을 구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썩을 양식이 있고 영생하는 양식이 잇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 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분이 아주 의미 있는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천국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습니까?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겁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음속으로 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면 예수는 내가 천국을 가는데 수단이 됩니다.

천국에 가고 싶은데 내 힘으로는 안 되니 예수의 힘을 빌려서 가고자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예수님을 천국에 가려고 잠시 이용하는 겁니다.

 

이걸 역(逆)으로 말하면,

에이! 난 천국 안 갈래! 라고 하면 예수는 믿을 필요가 없어집니다.

천국을 가기 싫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나와 상관없는 존재가 되겠지요.

 

아무리 보아도 이건 틀린 것 같지요.

왜냐하면! 예수를 개인 구원 용도로 사용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기를 구원을 개인을 위한 것으로 여깁니다. 

구원을 개인 용도로 여기게 되면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구원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그리스도 몸을 위한 구원입니다.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나를 위한 구원이 되면 하나님과 내가 단독자로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만 만나 주십니다.

예수 안에서 만나주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몸으로 만나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개인 구원이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국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질문은 틀린 말이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면 말이 달라집니다.

천국백성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 몸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나는 예수님(천국)을 위한 내가 되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에게 종속이 되어집니다.

 

천국을 일컬어 아들의 나라 라고 말하는 것은 아들을 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천국은 아들이 주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모든 것은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의 주인이니 천국백성도 예수님의 것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

 

이건 천국에서 성도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을 봅시다.

 

계 4:9-10=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천국에 가면 무얼 한다고 하는가요?

면류관을 어린 양에게 던지고 세세토록 어린 양에게만 영광 돌린다고 하지요.

면류관을 어린 양에게 던지고 어린 양에게만 영광 돌린다는 말은 내 주체는 없다는 말입니다.

어린 양만을 위한 무대란 뜻입니다.

 

어린 양이 주인공이고 만물은 엑스트라입니다.

엑스트라는 주인공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천국이란? 예수님은 주인이고 성도는 예수님의 종으로 살게 되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 천국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면 이 땅에서 천국이란? 장소적 개념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으로 산다는 주권 개념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의 주권 아래서 살아가는 것이 곧 천국에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너희 안에 있으니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님도 함께 계신다고 하셨지요.

이는 장소적 천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다스림 안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주체의 싸움입니다.

내가 주인이냐?

예수님이 주인이냐?



내가 주인이면 예수님은 내 종이고,

예수님이 주인이면 내가 예수님 종이 됩니다. 

그럼 여기서 성도가 어떤 존재인지 성경이 뭐라고 하는지 귀를 기울려야 합니다.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필요에 의해서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필요란?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성도들도 바울과 같이 예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종인 겁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서 사용되어지는 도구입니다.

 

복음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죄사함 받는다는 소식을 말합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이유는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위하여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위해서 우리를 불렀다고 했잖아요.

우리가 뭘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증거하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생활이 아주 간단하게 정리가 되지요. 

우리는 신앙생활 이러면 뭔가 내가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대부분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른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케 하려고 불렀다고 합니다.

 

성도를 부르신 목적이 분명하게 나와 있어요.

여기에 무슨 성도가 몸을 바쳐서 죽도록 일을 하여야 한다는 개념이 없어요.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믿는 것인데 믿음 속에는 인간의 행함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일하는 것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그럼에도 이 시대 교회에서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죽도록 일하는 것으로 둔갑시켜 놓았어요.

이는 교인들을 교회를 유지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교인들을 교회를 위해서 부려 먹고 있는 겁니다.

마치 애굽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궁궐을 짓는데 종으로 부려 먹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시대 거짓 목사들은 교인들을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케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위해서 종처럼 죽도록 일만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위하여 교인들을 이용하는 목사들은 애굽의 바로입니다.

성경을 모르면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이 목사들에게 평생 종노릇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서 소경이 소경의 인도를 받아 둘 다 구덩이에 빠져 죽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목사의 종이 아니고 예수님의 종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세상에 알리게 하려고 종으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 성도라면 예수님이 시키는 것만 하면 돼요.

  

종은 주인의 말에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종에겐 자기 생각이 없어요.

종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주인이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삽니다.

 

교회란? 예수님의 종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왜? 교회(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곳입니다.

사고 판다 라는 것은 소유물의 권리 이양을 바탕으로 하는 매매 용어입니다.

예수님의 핏 값으로 산 성도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예수님 것이란 말입니다.

 

원리가 그렇다면 말입니다.

이런 원리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 원리가 정답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내가 얼마나 잘못 살고 있는 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선 예수님 종으로 사는게 천국에서 사는 겁니다.

종 그러니 기분 나쁘고 듣기 싫고 재미가 없지요.

종이란 말이 기분 나쁘고 듣기 싫은 것은 자기 주권이 박탈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재미는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 때가 재미가 있어요.

어린아이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게 간섭하면 화를 냅니다.

쪼그만 놈이 간섭하면 성질을 내는 것도 다 죄인이라서 그런 겁니다.

 

내 마음대로 못살면 재미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어느 누가 자기 인생을 예수님에게 차압당하고 살고자 하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말은 자기 위해 살지 말란 말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생을 예수님에게 차압당하였습니다.

예수님 손에 이미 넘어 갔어요.

 

집이 경매로 넘어가면 조만간에 집달리가 들이 닥쳐서 정리하지요.

성도에게도 성령이라는 집달리가 들이닥쳐서 우리 삶을 하나 하나 차압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모든 것이 차압당하는 겁니다.

시간도 건강도 물질도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도 하나 하나 주님의 것으로 이첩이 됩니다.

 

종국엔 내 세상적 기쁨까지도 다 빼앗깁니다.

그리곤 철저하게 예수님 종으로 살아가게 만듭니다.

이게 예수를 믿는다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현실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감상주의로 생각하면 시험 들고 실족해요.

 

처음 질문을 다시 환기해서 봅시다.

질문의 답은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천국에서처럼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이 땅에서 천국으로 사는 겁니다.

 

이러면 우리는 대뜸 반발합니다.

아니 천국의 삶이 왜? 이 모양입니까?

무슨 천국이 이렇습니까?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이 천국의 삶이라면 난 천국에 가지 않겠습니다! 라고 항의 할 겁니다.

 

이런 불만을 토하는 것은 우리가 천국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죄가 주는 정보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판단합니다.

 

죄가 주는 지식으로 천국을 이해하면 편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생각합니다.

죄인은 육신이 편한 곳을 천국이라고 하고, 육신이 고통스러운 곳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들면 지옥 같다고 합니다.

이는 모두가 자기 육신 중심으로 천국과 지옥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능은 육신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고통이 없는 곳을 동경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천국 그러면 아! 고통 없이 살기 좋은 곳!

지옥 그러면 아! 불구덩이 속에서 고통당하는 곳!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천국관은 마귀가 주는 천국관입니다.

인간은 짐승처럼 육신이 편하면 천국이라고 생각하고, 불편하면 지옥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항상 몸이 편하고 좋은 환경을 꿈꾸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천국을 눈물 없고 고통 없는 곳으로 말하고, 지옥은 유황불 속에서 세세토록 고통당하는 곳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국은 장차 미래에 주어지는 천국입니다.

미래에 가야할 천국은 이 세상에서 천국 생활을 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에서 산 사람은 장차 천국으로 가고, 이 땅에서 지옥에서 산 사람은 장차 지옥으로 갑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세상에서의 천국과 지옥은 장차 가야할 곳과 역설적으로 바뀌어져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천국은 지옥 같고 지옥은 천국 같다는 말입니다.

즉 천국은 육신이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와 있고, 지옥은 육신이 편한 모습으로 와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몰고 온 천국을 알지 못하면 속게 됩니다.

이 땅에 천국도 장차 가야할 천국과 같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예수님이 몰고 온 천국은 장차 가야할 천국과 전혀 다르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몰고 오신 천국을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몰고 온 천국은 아주 역설적으로 와 있어요.

육에 속한 사람은 감지(感知) 할 수 없도록 와 있어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모습으로 와 있다는 것입니다.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수님은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고 협착하고,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은 크고 넓다고 했습니다.

 크고 넓다는 말은 편하다는 말이고, 좁고 협착하다는 말은 고통스럽다는 말입니다.

이는 영생으로 가는 길은 고통스럽고, 멸망으로 가는 길은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생으로 가는 문은 안 들어가고, 멸망으로 가는 문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즉 천국은 안가고 지옥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육신이 편한 것을 선호하고 택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성도라고 해서 자발적으로 좁고 협착한 길로 가고자 하지 않아요.

성도도 육신으로 살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이 항상 편한 길로 끌어 당겨요.

저도 육신이 편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지 고난 받으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믿음으로 간섭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육신의 뜻과 반대 되는 좁은 길로 끌고 가는 겁니다.

 

바울이나 12제자들이 자진해서 고난 받지 않았어요.

모두가 하나님이 간섭해서 고난의 길로 이끌고 간 것입니다.

믿음이 강제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몰고 온 천국 안으로 밀어 넣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이상한 천국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이상한 천국이란? 장차 가야할 천국과 상반된 천국을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 땅에 천국은 환경적 개념이 아니고 어디에 속하였느냐 라는 존재론적 개념입니다.

존재론적이란? 영역을 말합니다.

아담 안이냐! 예수님 안이냐! 라는 영역 말입니다.

 

아담 안은 지옥이고, 예수님 안은 천국입니다.

아담 안은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지옥입니다.

반대로 예수님 안은 아무리 힘들어도 천국입니다.

 

아주 쉽게 말할게요.

아담 안은 주인이 나이고, 예수 안은 주인이 예수님입니다.

아담 안은 내 힘으로 살아가는 곳이고, 예수 안은 예수님 힘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아담 안은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는 곳이고, 예수님 안은 예수님이 책임져주는 곳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면 지옥이고, 예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면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천국은 나 라는 존재는 없고 오직 예수님만 있는 곳입니다.

 

맞아요.

천국엔 내가 없어요.

내가 없다는 것은 내가 책임질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내 힘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 힘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책임 질 것이 없다는 것만큼 편한 게 없어요.

책임은 힘든 거에요.


어른이 힘듭니까?

어린아이가 힘듭니까?

어린아이는 자기가 책임질 인생이 없고 부모가 다 책임을 져 주기 때문에 힘들게 없어요.

 

어린아이에게 요즘 경제를 말해보세요.

난 그딴거 모르거든!

나 배고파 밥 줘! 그래요.

이게 자기가 책임질 인생이 없는 어린아이 모습이에요.

얼마나 편합니까?

 

그런데 어린아이에게 편하느냐고 물어 보세요?

불만이 가득해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

왜? 어른이 되고 싶은데?

엄마 아빠 간섭을 안 받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가 있으니까요? 라고 합니다.

결국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이게 죄인의 본성입니다.

 

성경이 성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아들이라 함은 책임질게 없다는 말입니다.

다 아버지 것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성도를 아들이라고 합니까?

이는 하나님이 성도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성도는 피조물이에요.

 

창조주가 피조물을 창조 했어요.

그럼 피조물은 자기 능력으로 삽니까?

창조주 도움으로 삽니까?

창조주 도움으로 살지요.

이게 원래 창조된 세상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자기 힘으로 살았습니까?

하나님이 힘으로 살았습니까?

하나님 힘으로 살았지요.

 

그런데 뱀이 인간에게 선악과 따 먹고 하나님 같이 되라고 하지요.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 먹었어요.

선악과를 따 먹은 후로 인간은 하나님 같이 되고 말았어요.

 

하나님 같이 된다 함은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지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는 삶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살아가야 할 피조물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결국 자기가 자기 인생에 갇히게 되고 만 것입니다.

인간은 일평생 자기에게 갇혀서 사는 존재입니다.

항상 자기 몸에 매여서 울다가 웃다가 하다가 죽습니다.

이처럼 죄란? 피조물이 창조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책임지고자 하는 것이 죄입니다.

 

이게 신앙적으로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지 않고, 자기 열심이라는 행함으로 살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예수님 것으로 사는 것이고, 행함으로 사는 것은 자기 것으로 사는 겁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예수 안에서 사는 법이고, 행함으로 사는 것은 아담 안에서 사는 법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왜? 지옥 생활을 하여야 하느냐 하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을 지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해결 할 수도 없는 죄와 사망의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려고 하니 지옥인 겁니다.

 

반면에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왜? 천국 생활을 하느냐 하면,

자기 인생을 예수님이 다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문제를 예수님 안에서 해결하고 살기 때문에 천국인 겁니다.

 

이건 마치 구약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 만나로 먹인 것과 같아요.

이스라엘은 광야 사십년 동안 자기들이 농사지어서 먹고 살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만나를 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시고 물을 주셨어요.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틈만 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어요.

그 이유는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자기들이 좋아하는 애굽에 음식을 안 주느냐고 원망한 겁니다.



음식을 가지고 원망하였다는 말은 왜? 출애굽을 시켰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해 주려고 출애굽 시키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출애굽 시켰어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음식을 가지고 타박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엔 관심 없고 오로지 자기 입을 즐겁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육신을 편하게 해 달라고 했어요.

이건 반칙입니다.

 

지금 먹고 사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께서 구약에선 이스라엘을 출애굽 하셨고, 신약에선 성도를 부르셨느냐 입니다.

왜? 불러 주셨는지를 모르면 구약 이스라엘처럼 육신을 편하게 해 달라고 원망하게 됩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사는 것은 떡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떡에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떡을 못 먹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죽는 겁니다.

인간들은 떡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 죄 때문이라고 말하십니다.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에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먹고 마시는 것이 해결 되었다 하여도 지옥입니다.

그러니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은 떡으로부터 해방이 아니라 죄로부터 해방이 되어야 합니다.

이 죄 문제를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자기가 책임을 지려고 하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이 책임을 져 주신다는 말입니다.

 

암튼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고 살려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자기가 모든 것을 알아서 준비하고 챙겨야 하잖아요.

이게 지옥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왜? 힘들어집니까?

책임져 줄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니 일평생 수고와 슬픔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천국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천국을 예수님에게 맡겼어요.

그래서 천국을 아들의 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천국백성들을 다 책임지라고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백성들을 책임져 주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자기백성들의 죄 값을 책임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돌리면 됩니다.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지요.

얼마나 염치가 없으면 자기 죄를 예수님에게 책임지라고 하겠어요.

 

그런데 말이죠.

염치없이 사는게 신앙생활이랍니다.

염치없이 사는데는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자존심이 있는 놈은 못 살아요.

 

자존심 있으면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덤빕니다.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덤비다가 지옥 간 놈들이 바로 유대교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요즈음은 경건주의를 표방하는 성화주의자들입니다.

 

천국엔 자존심이 없는 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맨 날 얻어먹으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사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배알이 있으면 예수도 못 믿고 천국도 못가요.

 

예수 믿는게 왜? 인간의 육으로는 불가능한 줄 아세요.

자존심 버리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겁니다.

죄인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 같이 되었어요.

그래서 자아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자아가 살아 있기 때문에 자기 행함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자아는 본능적으로 자기 의를 쌓고 자기 의를 내어 놓아요.

내가 살아 있으니까 내 것을 내어 놓게 되는 겁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의 것을 내어 놓는 것인데도 말이죠.

 

자아가 살아서 설치면 믿음이 안 나오고 행함이 나와요.

자꾸만 하나님 앞에서 떳떳해 지려고 해요.

떳떳해 지려는 것이 다 자아라는 자존심 때문입니다.

자아는 나를 살게 하고, 믿음은 나를 죽게 해요.

그러니 자아가 살면 지옥이 되고, 믿음으로 살면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땅에 천국인 예수 안에 있으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살펴봅시다.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 운명을 그대로 뒤집어쓴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운명이 뒤집어씌워지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하셨던 삶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신 것을 보면 눈물 흘리고 고통당하며 사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땅에 천국은 고난으로 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천국이니 예수님이 사셨던 모습이 곧 이 세상에 온 천국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요한 계시록에서 말하는 천국의 삶을 살지 않았어요.

도리어 지옥 같은 삶을 사셨어요.

예수님은 세상에 살면서 행복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되면 육적으로 눈물 없고 고통 없는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실족을 하게 됩니다.

뭐 이런 천국이 다 있어!

난! 이런 천국은 안 갈래! 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육에 속한 자들은 천국이 이런 곳이라면 거져 준다고 해도 안 간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예수가 몰고 온 천국에 가자 그래도 안 갑니다.

그들 눈엔 지옥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환경적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성도라고 한다면 천국을 예수님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실제로 천국을 예수님 안으로 생각하고 산 사람이 있어요.

12제자들과 바울입니다.

물론 초대교회 성도들이 다 그렇게 살았어요.

구약에선 믿음으로 그렇게 살았어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산 사람들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혀서 찬송과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환경으로 보지 않고 예수님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환경적으로는 매를 너무 많이 맞아서 피가 나고 아픈 몸으로 갇혀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었어요.

그러니 매를 맞아 터진 상처를 안고도 찬송과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찬송이 언제 나오든가요?

기쁠 때인가요?

슬플 때인가요?

기뻐야 나옵니다.

 

사람의 감정은 슬프면 울고 기쁘면 노래하게 되어 있어요.

물론 너무 기쁘면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노래는 기뻐야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서 찬송을 한다는 것은 기쁘단 말입니까?

슬프단 말입니까?

기쁜 겁니다.

 

지금 바울과 실라가 매를 너무 많이 맞아서 실성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제 정신입니다.

너무 정신이 또렷했기 때문에 간수가 자결을 하고자 하니 막을 수 있었던 겁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송 할 수가 있었던 것은 성령의 위로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증거를 들어 봅시다.

 

벧전 4:12-14=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잘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그러고는 불시험이 온다고 하지요.

이게 영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 좋은 것 줄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제가 만약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러면 우리 육은 아! 하나님께서 교회 부흥시켜 주는가 보다! 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목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잖아요.

 

이걸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해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제야 내 소원을 들어 주시려는가 보다 라고 생각해요.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입니다.

 

자식들도 부모의 사랑을 이렇게 이해하지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면 자식은 아! 오늘 아빠가 무슨 좋은 선물이라도 사 주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아빠가 아들아 사랑한다고 하고선 집에서 좇아내서 생고생 시키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인간 입장에서 기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실제 이런 예가 구약에 야곱이라는 사람이 당했어요.

야곱만이 아니고 다 그랬어요.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으면 아버지 유업을 이어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호시탐탐 장자의 축복을 받고 싶어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고 난 후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어요.

이건 야곱이 생각하는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늘 이런 식으로 자기 백성들을 다스려 가십니다.

그러니 성경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시험 들지 않아요.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이라고 주었는데 뭐 이런 것을 주어! 라고 원망 할 수가 있어집니다.

육적으로 판단해서 저주라고 원망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암튼 사랑하는 자들아 그러고는 불같은 시험이 온다고 하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불같은 시련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불같은 시련을 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뭐가 그리 축복입니까? 라고 의문을 제기 할 수가 있겠지요.

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축복인가 하면 장차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그의 영광에 참예케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보세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한마디로 고난을 바가지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엔 세상으로부터 온갖 고난 받은 상처투성이가 있어요.

 

그래서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 하실 때 피 묻은 옷을 입고 오신다고 했어요.

 

계 19:11-13=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예수님께서 재림 하실 때 백마를 타고 오시는데 그 옷이 피 묻은 옷을 입고 오신답니다.

이는 고난당한 모습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왜? 고난당한 옷을 입고 오시는가요?

이는 이 세상에서 죽임 당하셨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이유는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왜? 심판 당하여야 하는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당한 그 십자가에서 피 흘렸던 그 옷을 입고 오시는 겁니다.

너희들이 날 이렇게 죽였다고 그래서 이젠 너희들이 죽어야 할 차례라고!

이해되지요.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한 자들도 피 묻은 옷을 입고 마중을 하게 됩니다.

전쟁터의 군인의 옷은 찢어지고 피가 묻은 옷이라야 합니다.

말짱한 옷 입고 있으면 그 놈은 전쟁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바울과 실라가 복음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잖아요.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하였잖아요.

그러니 육적으로는 아파도 영적으로는 얼마나 신이 나는 일입니까?

그래서 찬송이 나오는 겁니다.

 

베드로가 뭐라고 했나요?

고난을 받으면 영광의 영이 그 위에 머문다고 하지요.

지금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의 머리 위에 영광의 영이 머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송하게 한 것은 곧 성령께서 하신 겁니다.

성령이 바울과 실라에게 너희는 복 받은 자라고 위로해 주니 찬송이 나오는 겁니다.

참 이상하지요.

이 말은 육으로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도통 안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만 알아 먹게 하려고 이 세상에 천국은 고난으로 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 들어가면 장차 가야할 하늘에 천국이 보여요.

장차 가야할 천국은 십자가 너머에 있어요.

십자가 이쪽에선 안 보여요.

 

십자가 이쪽에서 보면 지옥으로 보여요.

그러니 육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가 저주로 보이는 겁니다.

이걸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좁고 협착하다고 한 것입니다.

저주스럽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안목으로 보아야 십자가 너머에 천국이 보입니다.

이쪽에서 십자가는 지옥으로 보였는데 믿음으로 넘어가면 저기가 천국인 겁니다.

세상에!

 

바울과 실라는 성령의 안목으로 고난 뒤에 있는 영광을 본 겁니다.

그러니 실성한 사람같이 피가 철철 흘리면서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어찌 육에 속한 자들이 이해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앙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못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할 수가 없어요.

육신의 요구와 역설적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이걸 알기 때문에 육에 속한 자들을 추수하려고 육신이 바라는 천국을 주는 겁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듬뿍 듬뿍 채워 주는 겁니다.

그러면 육에 속한 자들은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자기 죽는 줄도 모르고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는 겁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잘사는 것이 복 받은 증거라고 하는 말은 몽땅 마귀의 말입니다.

또한 교인들이 좋은 환경을 주면 예수 잘 믿겠다고 하는 것도 전부 사기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좋은 환경 준다고 예수가 잘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환경과 상관없어요.

예수는 환경과 상관없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환경 때문에 울고불고 하지 않아요.

환경가지고 울고 분다는 것은 죄인들의 천국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사람들은 등 따습고 배부르면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천국은 마귀가 광야에서 사십일을 주리시던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주겠다던 천국입니다.

마귀가 그러지요.

야! 예수야! 네가 그래도 명색이 하나님 아들 아니냐!

하나님 아들이 그렇게 살아서 쓰겠냐!

뭔가 사람들보다 나아야 안 되겠느냐!

한마디로 세상에서 성공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나님 아들답지 않느냐! 라고 꼬십니다.

 

이 시대 땅에 속한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마귀가 주겠다고 하는 것들을 주겠다고 합니다.

교인들도 이런 것을 달라고 새벽부터 밤늦도록 아우성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천국을 몰고 왔는데, 교인들은 눈물 없고 고통 없는 천국을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대 떡을 주겠다고 하는 목사나 떡을 달라고 하는 교인들이 다 마귀인 겁니다.

마귀가 뿔 달고 나타나지 않아요.

마귀는 다정한 친구처럼 다가와요.

우리의 소원을 다 들어주는 자상한 분으로 찾아와요.

아주 거룩하고 고결하고 인품도 훌륭하고 어디 흠 잡을 때가 없을 정도로 완벽합니다.

 

요즈음 벌어지고 있는 노무현 게이트와 같아요.

재벌로부터 돈을 달콤하게 받아먹다가 전부 감옥으로 가고 있잖아요.

정권을 잡아서 받아먹을 때 얼마나 달콤하고 기분이 좋았겠어요.

그러다가 정권이 바뀌고 나니 이젠 과거에 달콤하게 받아먹던 것이 독이 되어서 굴비 엮이듯이 줄줄이 엮여서 감옥으로 가잖아요.

 

이 시대 교인들에게 경고하는 좋은 시청각 자료에요.

 

이건 마치 이 시대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세상적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라는 달콤한 것들을 주고 전부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목사들이 마귀가 되어서 교인들에게 세상 것을 주겠다고 하잖아요.

육에 속한 교인들은 저 죽는 줄도 모르고 넙죽넙죽 받아 먹고 있어요.

 

사십일을 굶은 예수님에게 나타난 마귀가 그렇잖아요.

다 주겠다고 하잖아요.

한마디로 천국을 만들어 주겠다는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예수님께서 거절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의 뜻을 놓치면 안 돼요.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고 하지요.

그리고 하나님만을 경외하라고 하지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성도가 신앙생활하면서 마음 판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누구 뜻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아버지 하나님 뜻으로 왔지요.

 

그럼 지금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서 사십일을 굶게 한 것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지요.

 

성경을 봅시다.

 

마 4:1-2=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자 보세요.

지금 예수님을 성령이 끌고 광야로 나가서 사십일을 금식하게 하시지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사십일을 금식하는 것은 자기 뜻입니까?

아버지 뜻입니까?

아버지 뜻이지요.

 

아버지 뜻은 예수님이 자기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다 알아요.

 

성도들에게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으면 그야 나중에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지요! 라는 정도로 대답합니다.

거의가 다 그래요.

이 시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으로는 이 대답 밖에 나올게 없어요.

그래서 교인들은 죄 사함 받는다고 하면 나중에 죽어서 좋은데 가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겁니다.

 

죄와 사망에서 구원한다는 말은 죽어서 천국에 보내준다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죽어서 천국에 안 보내준다는 말이 아니고 구원이라는 말 속에는 훨씬 더 풍성한 것이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범죄하자 하나님께서 내린 저주가 뭡니까?

종신토록 수고하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것 아닙니까?

 

성경을 봅시다.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저주한 내용이 뭡니까?

종신토록 수고하고 그 소산을 먹는 것이지요.

그것도 편하게 얻는 것이 아니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목구멍에 풀칠 할 수가 있어요.

땅도 소산물을 풍성 풍성 내지 않도록 가시와 엉겅퀴로 방해를 합니다.

 

그러니 밭을 개간하고 씨를 뿌려도 가시와 엉겅퀴를 제거하는 수고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밭에 가시와 엉겅퀴만 나는게 아니고 새들이 와서 싹을 쪼아 먹으니 한시라도 방심 할 수가 없어요.

기껏 농사 잘 지어 놓아 추수하려고 하면 느닷없이 태풍이 불어와 농사를 망치기 일쑤입니다.

 

씨를 뿌려도 비가 안 올까봐 걱정!

비가 와서 싹을 틔우면 가뭄이 올까봐 걱정!

이제 좀 곡식이 여물어 간다 싶으면 태풍이 올까 걱정!

온갖 걱정 근심을 하여야 겨우 목구멍에 밥이 넘어 갑니다.

 

이런 걱정은 모두가 자기 힘으로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오는 것들입니다.

만약 먹고 살 걱정을 안 한다면 이런 걱정할게 없어요.

비가 오든지 말든지, 가물든지 말든지, 태풍이 오든지 말든지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그러나 내 손으로 먹거리를 장만하여야 하니 모든 것이 걱정 아닌 것이 없는 겁니다.

 

우리도 그러잖아요.

십년 이십년 오십년 후를 지금부터 걱정하고 있잖아요.

아니 며칠을 더 살지 모르면서 온갖 걱정을 다하고 있어요.

자식도 걱정해야하고, 사업도 걱정해야하고, 건강도 걱정해야하고, 먹고사는 것도 걱정해야하고,,,걱정 아닌 것이 없어요.

근심 하나 덜었다 싶으면 또 다른 걱정거리가 닥치고,,,

이게 모두가 여러분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잖아요.

 

만약 믿음이 있어서,  

아니! 하나님 자식이 어디 내 자식입니까? 하나님 것이지!

아니! 내 몸이 어디 내 것입니까? 하나님 것이지!

사업이 어디 내 사업입니까? 하나님 것이지!

이러면 어디 걱정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어디 믿음이 있어야지요.

믿음이 없으니 자나 깨나 근심 걱정뿐인 겁니다.

근심 걱정이 그냥 밀려 와요.

초청하지 않아도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앉아 빚쟁이처럼 딱하니 버티고 앉아서 떠나가지 않아요.

 

그래서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죄인으로 사는 것은 일평생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해주었어요.

그리곤 종국엔 죽는다고 했어요.

 

시 90: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보세요.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간다고 하지요.

사람이 고생하는 것은 하나님이 저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편할 날 없이 근심 걱정하면서 죽도록 고생 고생 하다가 결국 죽는게 죄가 몰고 온 저주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한다면 죄가 몰고 온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어야 해요.

그래야 온전한 구원이 되는 겁니다.

 

이건 돈을 많이 벌으라는 말이 아니예요.

재물을 많이 쌓아 두라는 말이 아니고 두려움을 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라는 말입니다.

육신의 생존 문제를 해결하여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름하여 죄가 몰고 온 사망의 문제입니다.

 

두려움이란 먹고 사는 것이 주는 것이 아니고 죄와 사망입니다.

인간은 먹지 않아서 죽는 것이 아니고 죄 때문에 죽어요.

죽음이 인간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줍니다.

그래서 재물을 모아도 죽음이 주는 두려움으로부터는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먹고 사는 문제를 뛰어 넘어서 육신의 생존문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뛰어 넘는 것을 사람이 떡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산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몸 뚱아리는 신앙으로 살지 않고 밥으로 살아요.

밥이 들어와야 지탱을 합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몸은 먹지 않으면 죽어요.

몸은 밥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먹고 사는 것은 신앙과 상관없어요.

이건 육을 가진 인간이 이겨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겨 낼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신 책임져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지요.

대신 책임진다는 말은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책임져 주시니 난 실패해도 괜찮아요.

예수님이 대신 책임져 주셨으니까요.

 

이걸 놓치면 안 돼요.

예수님께서 대신 책임져 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성도가 할 수 없는 것을 대신 해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대신 이겨 주신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지킨 것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걸 놓치면 내가 자꾸만 지키려고 해요.

내가 이기려고 해요.

그러면 믿을 것은 사라지고 내가 해야 할 것만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요.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먹고 사는 문제도 우리가 벗어나려고 하면 못 벗어나요.

우리가 먹고 사는 것으로부터 못 벗어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겨 주신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우리가 이기지 못하는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이겨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공생애 시작하자 말자 광야로 몰아내셔서 사십일을 굶게 한 것은 인간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먹고사는 문제가 써진 시험지를 풀게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 문제를 푼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어요.

구약의 이스라엘도 실패 했어요.

 

그러니 지금 예수님이 마귀로부터 자기 백성들을 대표해서 시험을 치는 겁니다.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지는 마귀가 출제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죄인들을 넘겨주었기 때문입니다.

 

눅 4:6-7=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보세요.

마귀가 지금 예수님에게 당당히 말하잖아요.

세상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이라고 하잖아요.

이 모든 권세란 세상에서 먹고사는 것에서부터 성공하고 출세하는 모든 것이에요.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자기에게 절만 하면 이런 것 다 주겠다고 합니다.

마귀가 하는 말이 다 맞아요.

흔히들 사람들은 마귀는 거짓말 하는 놈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육적으로는 마귀의 말이 다 맞고 도리어 예수님 말씀이 다 틀려요.

 

아니 사십일 굶은 사람에게 떡이 양식이지 하나님 말씀이 양식일 수 없어요.

그러니 마귀가 떡을 주겠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지요.

도리어 하나님 말씀 먹겠다는 것이 틀린 말입니다.

 

솔직히 예수님 말씀은 육적으로 들으면 들을게 없어요.

다 궤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고 하고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하지요.

 

마귀는 하나님께 위임 받은 것으로 착실하게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에게도 자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찾아 온 겁니다.

모든 육신은 마귀가 장악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마귀는 죄인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가지고 왕 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마귀의 말을 들어야 살 수가 있어요.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적그리스도가 666표를 가지고 땅에 속한 자들을 다스린다고 하지요.

그 666표가 뭡니까?

매매하는 표잖아요.

그 표가 없으면 먹고 살지 못하잖아요.

그러니 먹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 666표를 받을 수 밖에 없어요.

 

암튼 예수님은 인간들로서는 해결 할 수 없는 이 일을 하여야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치고 있는 겁니다.

 

마귀가 그럽니다.

 

마귀 : 배고프제!

예수님 : 그래!

마귀 : 밥 줄까!

예수님 : 싫어!

마귀 : 왜?

예수님 : 난 하나님 말씀 먹고 살어!

마귀 : 너 밥 안 먹으면 죽는데!

예수님 : 그래 나도 알어!

마귀 : 그걸 아는 인간이 밥이 싫다고 하냐!

예수님 : 밥이 싫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목적이 밥이 아니라 하나님 뜻이라는 거야!

마귀 :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야! 난 지금까지 밥 싫다고 하는 놈은 처음 본다.

이건 상종하지 못할 놈일세!

그리곤 마귀는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이겼어요.

그렇다고 예수님은 밥을 안 먹고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마귀의 시험이 끝나고 예수님도 밥을 먹었어요.

그럼 예수님도 떡으로 살았잖아요! 라고 항변 할 수가 있지요.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산다는 것은 밥을 안 먹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살아가는 목적을 말하는 겁니다.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 것이 목적이란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이겼기 때문에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내십니다.

어떻게 구원해 내시는가 하면 떡으로 사는 인간에서 하나님 말씀을 사는 인간으로 구원해 내십니다.

 

사람에 목적을 바꿔주신다는 말입니다.

떡에 가치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가치로 바꿔준다는 뜻입니다.

눈만 뜨면 떡만 보고 살던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보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을 끄집어낸다는 말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왜? 망했습니까?

먹는 것 때문이지요.

맨 날 먹고 사는 것 투정하다가 하나님께 혼났잖아요.

먹고 사는 것 때문에 실패 했잖아요.

 

그럼 구약 이스라엘은 어디에 갇혀 있었습니까?

먹고 사는 일에 갇혀 있었지요.

그러니 틈만 나면 먹고 사는 일로 하나님께 원망했지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틈만 나면 우상을 섬깁니까?

떡을 주기 때문입니다.

앞서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떡을 준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떡으로 사는 사람은 반드시 마귀를 섬길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떡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산다고 하시면서 마귀를 이겼어요.

구약 이스라엘은 실패 했지만 예수님은 성공했어요.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이긴 겁니다.

이제 이긴 자로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건져 내십니다.

떡에 갇혀 있는 자들은 어떻게 떡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느냐 이걸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뭡니까?

썩을 양식을 구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구하라는 말이지요.

썩을 양식은 오병이어 같은 떡이고, 영생하는 양식은 예수님 살과 피입니다.

 

암튼 예수님은 지금 두 가지 양식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썩을 양식이고, 다른 하나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라고 합니다.

썩을 양식을 먹으면 글자 그대로 썩게 되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먹으면 영생하게 됩니다.

 

우리 같으면 어느 양식을 택하겠습니까?

당연히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택하겠지요.

맞아요.

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택한다고 그래요.

 

그런데 막상 시험지를 주면 전부 썩을 양식에다가 동그라미를 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썩을 양식은 영생하는 것처럼 보이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썩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썩을 양식은 육신을 이롭게 하는데,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육신을 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썩을 양식은 떡인데, 영생하는 양식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먹으라고 해야 하는데 예수님 피를 믿으라고 하니 귀에 들어오겠어요?

안 들어오지!

 

“사람이 먹기 위해서 삽니까!” 아니면 “살기 위해서 먹습니까!”

우리는 이런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답은 각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먹기 위해서 산다고 하면 존재의 목적이 먹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떡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살게 되겠지요.

하지만 살기 위해서 먹는다고 한다면 삶이 존재의 목적이 됩니다.

그러면 떡은 살기 위한 수단이 되지요.

 

이걸 예수님과 비교해 보세요.

왜? 예수 믿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예수 믿습니까?

아니면 예수를 위해서 먹고 삽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으면 떡이 목적(주인)이고 예수는 수단(종)입니다.

반대로 예수를 위해서 먹고 산다고 하면 예수가 목적(주인)이고 떡은 수단(종)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으면 떡으로 사는 것이고. 예수를 위해서 먹고 살면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존재의 목적에 따라서 떡으로 사느냐 말씀으로 사느냐가 됩니다.

지금 예수님을 쫓아온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왔습니까?

오병이어의 떡을 보고 왔지요.

떡 달라고 온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떡은 먹어도 죽지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 산다고 합니다.

즉 내가 너희들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믿으면 산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령이 와서 믿어지게 해주셔야만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이런 사실이 믿어질 것이라는 것을 미리 내다 보시고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먹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그 어떤 인간도 먹을 것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이고 인간 세상에는 떡이 항상 최고의 관심사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떡으로부터 자유한 사람은 없습니다.

떡을 위해서 신을 찾고 떡을 위해서 땀 흘리고, 떡을 위해서 전쟁을 해 왔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떡은 양보 할 수가 없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것도 모두가 먹고살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은 임금에게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교인들도 하나님께 먹을 것 달라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시간 시간마다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굶주린 자들의 배를 불리게 해주자 군중들은 스스로가 예수의 종이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가 좋아서가 아니라 예수를 모시고 살면 먹고사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에겐 떡이 왕인 것입니다.

그래서 떡을 주는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자 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겐 누구든지 떡을 주면 왕이 됩니다.

 

예수님께선 육신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합니다.

군중들이 예수를 찾은 것은 떡이 필요해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떡을 위하여 신을 찾는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그럼 떡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인간은 우상은 멀리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이 우상숭배가 하나님께 원수 되는 일이라 하여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포기하고자 하기 전에는 우상은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여도 우리는 이런 것들을 구하고 찾고 염려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예수님 말씀대로 그에 나라와 그에 의만 구하고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몸뚱아리는 한 끼만 밥을 안 넣어줘도 난리를 칩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 의를 구하라고 하여도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성도란 이런 한계성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 앞에 자기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주님의 뜻대로 살 수가 없는 죄인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육신 때문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선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선악과를 따 먹도록 한 뱀을 저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한 내용은 종신토록 흙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 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흙을 먹는다는 것은 땅의 기운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뱀의 후손들은 모두 땅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자들은 모두가 땅의 기운으로 삽니다.

땅의 기운으로 산다는 떡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떡으로 사는 사람으로부터 탈출시키기 위함입니다.

떡으로 사는 자를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가지고 자신은 하늘에서 온 생명의 떡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내 살과 피는 영생하는 양식이라고 합니다.

 

영생하는 양식이란?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밥은 썩은 양식이고, 예수님의 피를 믿는 것은 영생하는 양식이란 말입니다.

밥은 먹어도 죽지만, 예수님 피를 믿으면 삽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는 말씀은 곧 밥을 줄까! 죄사함을 줄까! 입니다.

밥이 필요하냐?

죄사함이 필요하냐? 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중하게 여기느냐? 이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나를 따라다니느냐?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나를 따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라고 비아냥거립니다.

맞습니다.



예수 믿어봐야 밥도 돈도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 믿으면 죄사함 받습니다.

죄사함 받으면 죽고 사는 문제로부터 해방을 받습니다.

죽는다는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사람에게 있어 먹고사는 일보다 더 큰 일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문제는 예수님 살과 피를 먹어야 해결이 됩니다.

 

죽음에 좇기는 죄인에겐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먹고 사는 일보다도 더 급합니다.

먹고 살아도 죽음을 이기지 못하면 헛것입니다.

떡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부를 쌓아도 헛것이란 것을 어리석은 부자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눅 12:15-21=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사람의 생명은 물질이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재물을 곡간에 쌓아둘 일이 급선무가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하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예수님의 피를 믿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믿는 것이 곧 영생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양식은 인자가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영생의 양식을 주신다는 것은 믿어지게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믿어지게 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는 믿음을 받는 사람은 오병이어가 육신의 떡을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죄사함을 얻게 해주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보여주는 표적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죄사함 받았다는 것이 믿어지시면 비록 떡이 없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감사하고 사십시오.

재물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도 죄와 사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하루 하루를 두려움으로 근심걱정으로 산 어리석은 부자보다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떡 보다 더 귀하다는 것이 믿어지는 은혜가 넘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떡을 구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떡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떡이 죄사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가 죄사함을 준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행위로 마옵시고 주께서 주신 믿음으로 살아가게 인도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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