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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41강. 광야에 내린 생명의 떡 (요 6:30-35)

by coroa 2021. 4. 17.

 

♣ -.41강. 광야에 내린 생명의 떡 (요 6:30-35).-

-.정낙원 목사

 

예수님은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썩는 양식이 있고 영생하는 양식이 있다는 말은 좀 난해 한 말입니다.

아니~ 양식은 다 같은 양식이지 무슨 썩는 양식이 있고 영생하는 양식이 있단 말입니까?

 

썩은 양식이라면 당연히 쓰레기통에 갖다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썩는 양식이 있고 영생하는 양식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썩는 양식이니 영생하는 양식이니 하는 말은 곧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본다면 영생하는 양식이란 글자 그대로 영생을 주는 양식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살펴보아도 이 세상에서 먹는 것 중에서는 먹으면 영생한다는 양식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만약 그런 양식이 있었다고 한다면 인간은 죽음을 모르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불로장생하는 양식을 예전에도 찾았고 지금도 찾고 있습니다.

 

과거 진나라의 시황제(秦始皇帝)가 죽지 않기 위해서 불로초를 찾았지만,

지금은 과학의 힘으로 유전자 조작을 통하여서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명약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진시황제가 그토록 구하려고 하였지만 끝내 구하지 못하여서 죽고 말았듯이,

과학의 힘으로도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요원합니다.

그 이유는 죽음은 죄로 인하여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죽음의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펴면 예수님께서 영생하는 양식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진시황제가 그토록 찾고자 하던 영생불사(永生不死)하는 그 명약입니다.

그 영생불사하는 양식을 예수님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영생하는 양식이,

과연 과거 진시황제가 찾던 그 영생불사하는 양식일까요?

아니겠지요.

 

그럼 예수님께서 썩을 양식이니 영생하는 양식이니 하는 말은 다른 뜻이라는 것이 자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인간들이 먹고 사는 먹거리 이야기를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겠지요.

맞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인간들이 먹고 배부를 불로장생(不老長生)할 음식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죽고 사는 근본 이야기를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죽음을 몰고 온 죄(罪)를 없애는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알다시피 죄(罪)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만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가지고 영생하는 양식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사람은 다 썩을 양식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모르고 살아가는 모든 인생은 썩은 양식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세상 양식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은 예수님의 피로서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먹고사는 것보다 예수님의 피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야겠지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있지 않으면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를 모른 채 세상에서의 그 어떤 성공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의 성공이 죽음을 막아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생각하지 말고 그에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말씀도 곧 그에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그 나라란?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그의 의(義)란? 하나님께 옳다 인정함을 받는 의(義)를 말합니다.

 

왜?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의(義)가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가요?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이긴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이긴다는 뜻입니다.

이건 마치 애굽에 장자가 죽어질 때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서 죽음에서 살아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인간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서 인간이 죽음 아래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게 하였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죄에서 건짐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로지 죽어야 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 하루하루 먹고 살아가기에만 급급합니다.

 

이런 인간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관심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영생이니 하는 말씀도 모두가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입니다.

영생에 대하여 알아야 영생하는 양식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영생을 모르는데 무슨 관심을 둘 수가 있겠습니까?

 

알다시피 죄인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니까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가 먹고 사는 일보다 하나님의 의(義)를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영생을 모르는 자에게 영생은 죽은 것입니다.

영적 죽음이란? 영(靈)에 대하여 의식하지 못하는 겁니다.

영을 모르면 영에 대하여 죽은 겁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이 자체를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이니 지옥이니 그건 어디까지나 교회에서 하는 말이지 세상에선 없는 말입니다.

안다고 하여도 전설 따라 삼천리에서나 나오는 신화이고 허구예요.

 

만약에 인간들이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고 하나님의 심판이 믿어진다면 이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영생이 믿어진다면 영생을 위하여 살아가고자 할 것입니다.

영생이 안 믿어지니 영생을 위하여 관심이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영생이 뭔지도 모르는 자에게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이독경(牛耳讀經)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더군다나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말입니다.

아니 예수를 인정해야 받아들이고 말고 하지요.

예수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데!

 

그러니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공허한 메아리로 울릴 뿐입니다.

먹고 사는 일보다 예수 믿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눈에 밥만 보이는 사람에게는 영생의 양식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이처럼 먹고사는 일보다 예수를 믿는 일이 우선이라고 하는 말은 인간들에겐 낯선 이야기입니다.

누가 보아도 산 사람에겐 떡이 양식이지 예수가 양식일수는 없습니다.

밥에 힘으로 살아가는 육신에겐 밥이 양식이지 예수가 양식 일 수는 없단 말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말로는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관념(觀念)입니다.

예수도 관념이고,

천국도 관념이고,

영생도 관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을 취미 생활하듯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은 죽기 살기로 합니다.

몸이 조금만 아파도 직장엔 나갑니다.

요즈음 같이 직장 구하기가 힘든 시대엔 직장생활을 게을리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조그마한 핑계거리가 생겨도 안 나옵니다.

하지만 직장은 몸이 아파도 나갑니다.

왜냐하면! 직장생활은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떡이 안 나와도 직장에 나가면 떡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린 어쩌면 교회 안 올 핑계를 찾는 줄 모릅니다.

교회를 다닌 지 수년이 지나고 십 수년이 지났으면 이젠 스스로 출석하는 것 정도는 졸업했을 법 한데도 아직도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주일만 되면 갈까 말까 망설이잖아요.

토요일부터 고민하잖아요.

놀러 갈까?

교회 갈까?

 

TV는 밤새워 가면서 보아도 말씀 듣는 것은 싫습니다.

차라리 잠을 자지 말씀은 안 들어요.

왜? 예수 믿는 것이 그렇게도 짐스럽고 싫은 걸까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예수를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지식으로만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죽기 살기로 믿지 않는 것은 그 믿음이 관념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세계만 보이지 영의 세계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이 세상만 보이지 천국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는 대충 대충 시간 날 때나 믿는 척 하는 겁니다.

 

떡으로 살아야하는 인간의 배고픔 앞에선 그 어떤 것도 앞설 순 없습니다.

예수도 배가 불러야 믿습니다.

마치 배가 불러야 취미 생활도 하듯이 예수 믿는 것도 배가 부른 후에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도 떡을 위해 일하지 말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일이라고 하면 먹거리를 장만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영생하는 먹거리 라는 것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이마에 땀을 흘리고 일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인간은 일을 함으로서 먹고 살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일하라고 하면 먹고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꿈에도 예수 믿는 것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인간에게 있어서 일이란 먹거리를 얻기 위한 수고이고 노동입니다.

내가 움직이고 수고하여야 먹거리를 얻을 수가 있단 말입니다.

죄인의 세계에선 양식은 누가 거저 주는 것이 아니고 내 노력의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양식 이야기를 하니 제자들이 어떻게 일을 하여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외에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으라고 합니다.

날 믿으라고 합니다.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입니까?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고 하는 말은 제자들에겐 딴 나라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로서는 썩는 양식이나, 영생하는 양식이나 하는 말들은 생소한 말들입니다.

비록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 다니고는 있지만 이들도 떡을 위하여 따라다니는 군중들의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말도 생소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로서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하나 같이 현실과 동떨어진 말씀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생하는 양식을 예수님이 주시겠다고 하는 말씀은 곧 제자들의 귀에는 예수님이 먹거리를 주겠다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눈에는 아무리 봐도 예수님은 노동으로 먹거리를 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재벌도 아니고 그렇다고 열심히 노동을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따라 다녀 보았지만 한 번도 예수님이 먹거리를 준비한 적이 없습니다.

먹거리는 도리어 제자들이 준비를 했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제자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묻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과 군중들 간에 대화를 상고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역시도 예수님과 이런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우리나 제자들이나 떡을 먹어야 산다는 육이라는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대화는 곧 이 시대 우리가 예수님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들을 제자들이 대신 물어주고 있는 셈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가 물어야 할 것들을 미리 묻고 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예수 믿는 것을 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삶입니다.

살아가는 일상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기도원이나 수련회 가서 도(道)를 닦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념(理念)이나 사상(思想)놀음이 아닙니다.

용서받은 자로서 감사하며 죄와 미워하고 멀리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은 하루 하루 밥을 먹고 살아가듯이 사는 것입니다.

한끼 밥을 안 먹으면 힘을 잃듯이 예수도 한끼 한끼 거르지 않고 밥을 챙겨 먹듯이 믿고 살아야 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생명은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것만이 생명의 최고에 가치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명이라도 죽으면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선 어떤 생명이냐 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생명을 죽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미 그 속에 죽음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생명은 죽지 않을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죽지 않을 생명을 원합니다.

 

그러나 죽지 않을 생명은 인간에겐 없습니다.

죽지 않을 생명은 죄가 없는 이 세상 밖에 있습니다.

죽지 않을 생명은 세상 밖에서 오신 분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살려주는 영이 되셔서 그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생명을 양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인간의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모릅니다.

일부러 예수님께서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예수님과 인간은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를 할 때 제자들이 동네에 들어가서 빵을 사 가지고 와서 예수님에게 잡수시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난 벌써 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눈이 휘둥레지면서 아니 누가 먹을 것을 드렸지?

언제 잡수셨지! 라고 서로 얼굴 쳐다보면서 의아해 합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았습니다.

떡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잡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먹는다는 의미와 양식에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면서 내 양식은 하나님이 보내신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밥을 먹는다 라고 하면 뱃속에 음식물을 채워 넣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뜻을 이루는 것을 밥을 먹는다고 했어요.

 

이는 무얼 먹느냐! 라는 말이 아니고,

무슨 목적으로 사느냐! 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이냐 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 뜻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하러 왔습니다.

 

아버지 일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일이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은 육신의 떡을 구하러 갔지만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에게 있어서 삶에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창세전에 택정한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을 구원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으니 밥을 먹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밥을 안 먹는다는 말이 아니고 살아가야하는 목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하나님의 일이 뭡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너희가 나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하나님 일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건 교리문답서에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그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뭡니까? 라고 물어야지요?

성경을 펴면 하나님께서 영광 받는 것은 딱 하나 있습니다.

그건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걸 지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누가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냐 라고 물으면!

예수 믿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여야 합니다.

이것 이상 정확한 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삶에 목적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목적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예수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든 집에서 놀든 예수를 믿고 살면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예수를 믿음으로 사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데에는 인간의 조건은 아무런 장애가 될 수가 없습니다.



부자이든 가난하든,

많이 배웠든 못 배웠든,

목사이든 평신도이든,

교회에 있든 없든,

남녀노소 구분이 없어요.

믿어지는 것으로 살면 되는 거니까요.

 

목사라고 해서 믿음이 고급스럽고 평신도라서 믿음이 저급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주는 믿음엔 차별이 없어요.

그래서 바울은 종으로 있으면서 부르심을 입었느냐?

자유자로 부르심을 입었느냐?

그건 따질 필요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고전 7: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종도 예수님의 종이고, 자유자도 예수님의 종입니다.

그러니 예수 안에선 차별이 없습니다.

종으로 있으면서 예수를 믿어도 구원을 받고 사장으로 있으면서 예수를 믿어도 구원을 받습니다.

 

종이냐 자유자냐 라는 말은 이 시대 종업원이냐 사장이냐 라는 말과 같습니다.

부자냐 가난하냐 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교회 안에선 종업원이다 사장이다 따질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목사다 장로다 집사다 평신도다 따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직분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 자는 뭔가 수상합니다.

그 직분을 이용해서 자기 영광을 꾀하고자 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십자가 은혜를 색욕거리로 삼는 자입니다.

한마디로 악한 자입니다.

 

그 속에 성령이 계신 사람은 직분을 가지고 우열(優劣)을 나누지 않습니다.

사람의 조건으로 차별하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 안에서는 술집 종업원이라고 해서 하찮게 보고 대학교수라고 해서 고급스럽게 보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술집 종업원도 죄인이고 대학교수도 죄인입니다.

둘 다 예수님의 피로서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차별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 안에선 세상 지위가 그대로 교회 안에 통용됩니다.

세상의 회장이면 교회 안에 와서도 회장 짓을 하고자 합니다.

교회에 세상의 옷을 그대로 입고 왔습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사는 곳입니다.

그런데 돈에 눈이 먼 목사들이 세상 옷을 그대로 입게 한 것입니다.


목사들이 교회와 세상의 경계를 없애고 하나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들이 세상 적으로 조금 유명한 사람이다 싶으면 대대적으로 우리 교회는 이런 사람이 나온다고 광고하고 자랑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 무슨 영광이나 되는 줄이나 알고 말이에요.

 

이 시대 교회 안에 유명인들은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술집 얼굴마담처럼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마치 유흥업소 전단지에 예쁜 얼굴마담 사진으로 호객행위 하듯이 거짓 목사들이 그런 사람들을 이용하여서 자기 교회를 선전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세상 가치로 엄몰한 교회를 음녀라고 합니다.

과격하게 말하면 교회라는 사창가(私娼街)에 유명인들을 얼굴 마담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고급상품이 있으니 와서 이런 사람들과 사귀어 보라고 하는 겁니다.

너무 심한 말 같은가요?

 

요한계시록 17장 18장을 봅시다.

바벨론을 음녀라고 하지요.

음녀(淫女)란? 타락한 교회를 말합니다.

세상과 짝한 교회를 일컬어 바벨론 즉 매음굴(賣淫窟)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강도의 굴혈(掘穴)이라고 했지요.

강도의 소굴이라고 할 때는 한 두 사람이 있어서는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몽땅 강도들만 있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시대 교회가 강도들이 모인 곳이란 뜻입니다.

목사도 강도고 교인도 강도란 말입니다.

 

강도란? 서로 이익을 위하여 모인 자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에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드는 인간들은 모두가 자기 유익을 위해서 드나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싸잡아서 강도의 굴혈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예수님의 재림에 표상입니다.

영적인 상태가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말의 모습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때란 말입니다.

 

노아 시대 죄악이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한 것입니다.

노아시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였다는 말은 우상 숭배하였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간음이란?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인간들의 언어를 빌려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상 5:25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렘 3:8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어 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보세요.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그 땅에 신(神)들을 간음하듯 섬겼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우상과 짝하여서 이혼 증서를 써주었다고 합니다.

 

이를 이 시대적으로 말하면 교회가 세상과 짝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세상과 벗된 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약 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는 곧 교회가 하나님이 싫어하는 짓거리들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왜? 교회가 하나님의 원수 짓을 하고 있는가요?

이는 교인들을 땅에 붙잡아 두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뱀과 같이 세상 것으로 교인들을 땅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사람의 생명이 떡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늘에 것을 주어야 함에도 땅에 것을 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주어야 합니다.

세상에 없는 것을 주어야 해요.

교회는 하늘에 속한 곳이지 땅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생하는 양식을 주어야지 썩을 양식을 주어선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먹고 사는 일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죽음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 만이 영생하는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터(攄)입니다.

진리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터(攄)란? 펼치고 늘어놓는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를 증거하기 위하여 깔아 놓은 멍석과 같은 마당이라는 뜻입니다.

 

진리란?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럼 교회는 어느 때나 누구든지 여출일구하게 십자가 피만 증거되어야 해요.

그게 최고로 좋은 교회입니다.

 

단 한 사람이 있어도 십자가 피만 증거가 되면 하나님 보시기에 최고의 교회인 겁니다.

다른 것 다 안 해도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면 교회이지만,

다른 것 다 해도 예수님의 피가 증거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 충성 봉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 일입니다.

 

불신앙이 뭡니까?

글자 그대로 예수를 믿고 바라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안 바라보면 누구를 바라봅니까?

자기를 바라보지요.

자기가 한 일을 바라보지요.

 

불신앙은 예수님의 피로서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안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나쁜 신앙이 자기 꼬라지로 인하여 예수를 떠나서 자책하고 반성하는 겁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울고불고 하는 겁니다.

아니 죄인이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운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죄인은 반성하거나 죄책감에 사로잡힐 수 없는 인간입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다는 말은 잘 할 수 있었는데 못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은 근원적으로 잘 할 수가 없는 종자(種子)입니다.

그래서 죄인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모욕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헛 죽음으로 만드는 겁니다.

 

가룟 유다는 자살을 함으로서 예수님의 죽음을 헛 죽음으로 만들었어요.

왜? 그런가요.

가룟 유다의 악함은 자기가 자기 죄를 책임지고자 한 것입니다.

아주 건방지게 말이죠.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것은 인간에겐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하여서 죄사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반성을 촉구하고 죄책감을 갖도록 합니다.

성화(聖化)를 부르짖으면서 자책하게 만듭니다.

겉으론 엄청 신앙이 좋은 것 같지만 이런 것이 불신앙임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사들이 교인들을 바리새인으로 만들고 있어요.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서 의로워지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피 없이도 스스로 거룩해지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예수 믿지 말라는 말은 안합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는 말이 예수를 믿지 말라는 뜻인 줄 모릅니다.

성화주의가 바로 교인들을 바리새인으로 만드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선 말씀대로 살라고 하지 않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예수님이 지킬 테니 너희들은 그져 예수만 믿으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였다는 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이건 아무렇게나 살으란 말이 아닙니다.

죄인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알라는 말입니다.

죄인은 하나님 뜻대로 온전히 살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하라고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가르쳐 주어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백성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게 만듭니까?

죄인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모욕하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이건 여러분들의 죄를 합리화시키고 조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죄인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죄인에겐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뜻대로 살라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최선을 다해도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로서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죄인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죄인의 순종을 원하지 않고 주 예수를 믿을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충성 봉사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지 말란 말입니다.

 

교회에서 충성 봉사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그 감동을 주체 할 수가 없어서 행하여지는 신앙 고백적 차원에서 행하는 기쁨의 표현인 겁니다.

이런 표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지요.

내가 받은 은혜가 너무 기뻐서 형제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라면 장려되어야 할 일입니다.

봉사는 기쁨의 표현이지 강제로 하는 수고와 짐이 아닙니다.

 

그러니 마음에도 없는 사람에게 반 강제로 등 떠밀어서 전도지 주어서 길거리 나가서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전도지를 나누어 주어도 그 속에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없으면 말짱 헛것이에요.

 

길거리로 나가 전도지를 나누어주지 않아도 야!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서 죄 사함을 받았어!

세상에 이런 놀라운 일이 있나!

이런 악당이 예수님 때문에 꼼짝없이 천국에 가게 생겼어!

우째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라면서 감격하고 감사하면서 사는게 하나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에 촛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 일으킨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죽인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너무도 기뻐서 그 기쁨을 주체 할 수가 없어서 전도지도 나누어 주고, 교회 청소도 하고, 연보도 하는 겁니다.

 

주의 은혜로 하면 아까운 것도 없고 수고로움도 없어요.

마냥 기뻐요.

하면 할수록 기쁩니다.



수고를 하면서도 기뻐요.

자기 돈을 쓰면서도 기뻐요.

이게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입니다.

영생의 양식을 먹은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그럼 옆에 있는 사람이 당신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내가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죄 용서받은 것이 너무도 기뻐서 그런다고 하세요.

이 기쁨을 주체 할 수가 없어서 교회 다닌다고 하세요.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성령이 강림 하고 나자 성도들이 미치지요.

자기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다 내어 놓잖아요.

이건 제 정신이 아니고 미친 짓이에요.

성령이 그 사람에게 사건을 일으키니 미쳐 버린 겁니다.

그러니 재산을 갖다 바치고 하는 겁니다.

 

어째? 우리에게 생경하고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요.

실감이 안 가지요.

그만큼 여러분들이 마음이 화인(火印) 맞았다는 증거입니다.

아니 예수쟁이가 예수 이야기 하면 기뻐야 하는데 벙어리 꿀 먹은 듯하고 있으면 어찌하자는 겁니까?

무슨 말을 하여야 기뻐하렵니까?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애통해 하여야지요.

 

이 시대 교인들은 모두가 중풍병자들이에요.

그러니 마음은 하고 싶으나 몸이 말은 안 듣는 겁니다.

하지만 중풍병자라 할지라도 주님만 만나면 고쳐지니까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쳐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가 사건을 일으킬 것입니다.

사건은 우발적으로 일어납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마치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찾아간 사건과 같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 사건을 일으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가치관이 장악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건을 일으키면 이 사람은 이제부터 관중이 아니라 선수가 되어서 뛰게 됩니다.

부딪치고 깨어지고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당하셨던 그 아픔들을 몸소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도 일일 연속극처럼 일어나지 않고 주님께서 간헐적으로 일어나게 하십니다.

 

신앙생활은 일일 연속극이 아닙니다.

삶이란? 수학공식처럼 정해진 답이 없어요.

범사 속에서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때 그 때마다 간섭하십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일들을 일으키십니다.

 

우리의 삶이 내 생각대로 살아지지가 않듯이 신앙생활도 우리 각본대로 살아지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짠 각본대로 살아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짜 놓으신 각본대로 살아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짜 놓은 각본을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짜여진 각본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광야에 만나가 내렸다고 합니다.

왜 만나가 광야에 내렸을까요?

왜 애굽에서는 내리지 않았나요?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나가면 하늘에서 만나가 내릴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계획조차 세울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하늘에서부터 만나가 내렸어요.

만나는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달라고 하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실컷 먹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아니 이 백성의 숫자가 얼만데!

소를 얼마나 잡아야 이 백성들을 먹일 수 있겠느냐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내가 조막손 인줄 아느냐! 라고 혼을 냅니다.

그리고 메추라기를 눈 쏟아 붓듯이 주어서 먹게 하십니다.

광야 사십년 동안 이스라엘을 먹이고 입힌 것은 인간들이 예상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이 예상치 못하는 만나와 메추라기와 반석에서 물을 내는 사건을 일으킨 겁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길은 사건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들입니다.

반석에서 물을 낸 것도 이스라엘의 머리에선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사건입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 손을 들면 전쟁에서 이기고 손을 내리면 전쟁에서 지는 것도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입니다.

 

유월절 피를 뿌리고 죽음에서 살아난 것이나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이나 그 어느 하나라도 이스라엘이 생각하고 고안해낸 것이 없습니다.

하나에서 끝까지 모두가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고 자기 백성들을 살려 내는 일도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입니다.

우리는 죄만 지었는데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해서 죄 없다고 용서해 주신 것도 하나님이 만들어낸 아이디어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을 감사하게 받고 고맙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이란? 하나님 홀로 하신 일에 인간의 것을 보태려고 하는 짓입니다.

인간의 열심과 충성을 보태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에 무슨 의라도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생명의 양식으로 준 것은 인간들이 예상치 못한 일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모세의 사건을 배경으로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듯이 예수님께서 생명의 양식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양식은 누구에게 필요합니까?

산 사람에게 필요하지요.

산 사람이라면 양식을 찾게 되어 있지요.

이처럼 양식이란? 생명을 가진 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죽은 자에겐 양식이 필요가 없어요.

 

그럼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면 양식을 찾게 되어 있겠지요.

무슨 양식을 찾겠어요?

당연히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찾겠지요.

 

영생하는 양식이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피와 살이라고 했지요.

그걸 지금 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본문을 봅시다.

 

요 6:30-35=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오늘 본문이 있기 전에 배경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자 군중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고자 했어요.

그러자 예수님은 배를 타고 다른 동네로 피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군중들이 예수님을 좇아 왔어요.

예수님께서 그들이 좇아 온 이유는 떡을 먹고 배가 불러서 라고 합니다.

 

예수님 : 군중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서 나를 따르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서 따르라!

군중들 : 그럼 우리가 어찌하여야 그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 : 그야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으면 되지!

군중들 : 아니! 그래 그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누굽니까?

예수님 : 네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야!

군중들 : 그래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것을 어떻게 믿느냐?

 

군중들은 당신이 메시야 라는 것을 무슨 표적이라도 보여 줄 수 있느냐? 라고 묻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니 모세가 광야에서 하늘에 있는 떡을 주었다는 기록은 있는데,

그렇다면 당신이 모세처럼 하늘에 떡을 내려서 먹게 해 줄 수 있느냐? 라고 묻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불과 이틀 전에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고 좇아온 사람들 아닙니까?

자기들이 왜? 여기까지 예수님을 좇아 왔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의 떡을 먹고 좇아 온 것이잖아요.

 

이들이 예수님을 왕을 삼고자 하고 여기까지 좇아 왔다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어떤 분인 줄을 대충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 저 양반을 따라다니면 배를 곯지 않겠구나?

오병이어를 가지고 수천 명이 먹고도 남을 만한 기적을 베푼 것을 보니 범상한 분은 아닌게 분명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쫓아 온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상외에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군중들은 자신들의 육신에 배를 부르도록 만 해주면 그것으로 OK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생하는 양식을 주겠다고 합니다.

알아먹지도 못할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영생에 대하여 관심도 없어요.

그저 등 따습고 배부르게 해주면 됩니다.

그러니 과거 모세가 광야에서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주어서 먹게 하였듯이 해 달라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건 죽은 떡이고!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떡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떡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주는 떡을 먹은 사람은 다 죽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에 생명을 주려고 주신 떡은 먹으면 영생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군중들이 그럼 그 떡을 우리에게 주세요.

우리도 그 떡 먹고 영생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그 떡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 분문에서 그 내용이 없지만 예수님의 이 소리를 듣고 군중들이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우리가 식인종인가? 자기 살을 뜯어 먹게?

미쳤다고 했을 겁니다.

아니 우리가 자기 아버지를 아는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가? 라고 욕을 하면서 다 떠나갔어요.

 

지금 군중들과 예수님은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으로 자신의 살과 피를 말하고자 하는데 군중들은 떡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셨는데 인간들은 세상 살아가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가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면서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구합니까?

예수님께서 구하라고 하는 것은 구하지 않고 구하지 말라고 하는 것만 구하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예수 믿고 있다고 하지요.

예수님 사랑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들처럼 예수님 사랑한다고 하던 자들이 예수를 죽였어요.

자기들 왕이 되어 주지 않았다고 죽였어요.

지금도 예수님은 누구 손에 죽임 당하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 사랑한다고 하는 교인들 손에 죽임 당하고 있어요.

 

이런 것을 구하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으라고 하는 싫어하고 욕을 하잖아요.

그게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세상 것을 구하는 것이 죄라고 하면 욕을 하잖아요.

누가!

우리가 그래요.

 

우리 주변을 한번 살펴보세요.

교회마다 교인들마다 세상 것 달라고 하잖아요.

눈만 뜨면 세상에서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게 해 달라고 하잖아요.

 

장사하는 교인들 가게에 가 보세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니 나중은 창대하리라” 라는 부적이 떡하니 붙어 있잖아요.

교인들 집에는 “주여 종의 집에 복을 주옵소서” 라는 부적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신주단지처럼 붙어 있잖아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이라고 하면서 그 실상에 우리의 성공(꿈)을 붙여 놓았잖아요.

 

목사들은 우리 자식들에게 세상에 거목이 되라고 안수기도 해 주잖아요.

그러면 우리들은 흐뭇해 가지고 돈 다발 갖다 바치잖아요.

무당인줄도 모르고 주의 종이라고 떠받들잖아요.

 

이런 것을 악이라고 하는 목사에겐 욕바가지를 갖다 붓고,

이런 것을 주겠다고 하는 목사들에겐 바리바리 싸들고 아양 떨면서 갖다 바치잖아요.

바른 소리를 하면 욕으로 듣고 거짓말을 하면 좋다고 하니 이를 어찌합니까?

 

지금 예수님 앞에 찾아와서 세상의 떡을 달라고 하는 사람과 우리가 뭐가 다릅니까?

똑 같잖아요.

언제 우리들이 그에 나라와 그에 의(義)를 구하여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고요?

눈만 뜨면 세상 것 달라고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떡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하여서 말씀해 주시고 계신 겁니다.

 

누가복음 12장을 봅시다.

 

눅 12:15-21=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어떤 청년이 부모의 유산상속 문제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형과 상속문제로 다투어서 찾아 온 겁니다.

율법에는 부모의 유산을 형제들끼리 나누게 되어 있는데 형이 그렇게 안 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에게 해결 좀 해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보아하니 선지자 같으니 가서 해결 좀 해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야! 내가 보니 너는 지금 유산 상속 문제가 급한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것이 급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하고 있는 겁니다.

 

자 봐라!

어떤 동네에 엄청난 부자가 살고 있었단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재물 모으는 일에만 몰두하였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단다.

부자의 생각엔 물질만 있으면 행복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게 큰 잘못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은 돈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켜주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부자에게 야! 이 어리석은 놈아!

그 재물이 네 죽음을 막아 준다고 하더냐!

죽음 앞에서 그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텐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라고 말합니다.

그럼 네 생각엔 뭐가 중요한 것인지 묻고 계신 겁니다.

너 같으면 돈을 붙잡겠느냐! 아니면 하나님과 화목하겠느냐! 묻고 계신 겁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수를 모르면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다.

마귀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보다 먹고 사는 일이 더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관심사를 땅에 붙잡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관계보다도 이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떡 속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떡을 좇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부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의 떡은 광야에서 주어진다는 것이 비밀입니다.

광야란 세상과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세상과 다른 의미로 광야를 선택한 겁니다.

 

그럼 구약의 광야에서 내린 만나 사건과 예수님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그럼 만나가 광야에서 내린 이유를 알수가 있을 것입니다.



광야란? 애굽과 다른 세계입니다.

애굽은 땅이고 광야는 하늘입니다.

그래서 애굽에 양식이 아닌 하늘에서 만나를 주었어요.

애굽에 양식은 땅에서 얻은 것들입니다.

 

애굽은 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땅에서 나는 양식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 죽었어요.

그러나 광야에서는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어요.

만나는 하늘에 양식입니다.

 

자보세요.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를 하실 때 각각 먹어야 할 양식들을 주셨어요.

채소를 먹는 짐승도 있고 육식을 먹는 짐승도 있어요.

소는 풀을 먹게 하셨고 사자는 고기를 먹게 하셨어요.

땅에 사람이 먹어야 할 양식이 있고 하늘에 사람이 먹어야 할 양식이 있어요.

애굽에서 먹어야 할 양식이 있고, 광야에서 먹어야 할 양식이 있는 겁니다.

 

그럼 광야에서 하늘에 양식을 주었다는 말은 너희는 하늘에 사람이라는 겁니다.

너희는 땅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만나를 주신 겁니다.

 

아까 양식은 누가 찾는다고 했습니까?

살아있는 사람이 찾는다고 했지요.

죽은 사람은 양식을 찾지 않아요.

 

양식을 찾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어요.

땅 사람은 땅에 양식을 찾고, 하늘에 사람은 하늘에 양식을 찾아요.

이게 본질이에요.

 

아! 저 사람은 만나를 찾는 것을 보니 하늘에 사람이구나!

아! 저 사람은 애굽에 양식을 찾는 곳을 보니 땅 사람이구나!

아! 저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찾는 것을 보니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구나!

아! 저 사람은 세상 것을 찾는 것을 보니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이구나!

 

무엇을 찾는가를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확인해 주고 있는 겁니다.

광야에선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보고 불평하는 자는 땅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싫어하면 그 사람은 예수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떡에 가치로 사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피 이야기 하면 짜증을 내요.

다른 말을 해 달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복 받고 잘 살 수 있는지 알려 달라고 합니다.

광야에서 망한 이스라엘은 애굽에 음식을 안준다고 날마다 데모를 했어요.

만나를 박한 식물이라고 폄훼했어요.

 

하지만 그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사람은 감사하게 먹었어요.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까지 들어간 것을 보아서 불평하지 않았다고 보는 겁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 할 때도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르게 보았어요.

하나님의 약속으로 그 땅을 보았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들어가자고 했어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가나안 족속들만 보았어요.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어요.

그래서 애굽으로 돌아가지고 한 겁니다.

결국 그들은 출애굽을 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보여준 겁니다.

그래서 몽땅 광야에서 죽은 겁니다.

 

이들에겐 애굽이나 광야나 차이가 없어요.

늘 보는 눈이 육적으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보면 가나안 족속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성도들에게도 동일해요.

이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고 사느냐에 따라서 살아가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진정으로 출애굽한 성도는 이 세상을 애굽처럼 망할 곳으로 보아요.

그러니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사는 겁니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도 출애굽 하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합니다.

교회에 와서도 애굽(세상)에 것을 달라고 합니다.

교회 와서도 썩는 양식을 구한단 말입니다.

 

교회에 왔으면 하늘에 만나와 같이 하늘로서 온 예수라는 영생하는 양식을 구하여야지요.

그래야 하늘에 생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영생하는 양식으로 보는 사람은 예수 앞에 나와서 땅에 것 달라고 하지 않아요.

예수 앞에 나와서 땅에 것 달라고 하는 사람은 광야에서 애굽에 음식을 달라고 한 사람과 똑 같아요.

 

구약 시대도 광야(교회)에 와서 애굽(세상)에 것을 달라고 한 사람들이 있었듯이,

지금도 교회에 와서 세상의 것을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자신이 영생하는 양식이라고 하여도 군중들은 알아먹지 못해요.

나중에 다 떠납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군중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저 사람들은 땅 사람들이니 썩을 양식을 구하러 다닌다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 너희들도 썩을 양식을 구할래?

저 사람들처럼 나를 떠날래?

그러자 제자들은 영생의 양식이 여기에 있는데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라고 대답을 했어요.


물론 그 순간 이었지만!

성도는 예수님처럼 먹을 양식이 다릅니다.

먹고 사는 것이 삶에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 것이 삶에 목적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애굽은 세상을 상징하고, 광야는 천국을 상징합니다.

애굽에 사람은 옛 사람을 상징하고, 광야에 사람은 새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의미적으로는 교회에 나온 사람은 새 사람입니다.

그럼 새 사람이 먹을 양식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새 사람인 겁니다.

 

자! 그러면 양식을 옛 사람과 새 사람은 율법과 은혜로 비교해 봅시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지금부터가 본문을 영적인 이야기로 합니다.

쉽고 간략하게 말 할 테니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먼저 옛 사람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옛 사람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고,

옛 사람은 옛 언약이 지배하는 구약에 사람이고,

옛 사람은 애굽에 사람입니다.

 

옛 사람은 자기가 양식을 구하여야 먹고 살 수가 있습니다.

이를 의(義)로 말한다면 자기 의(義)로 산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율법을 지킴으로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 사람에겐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삶에 의미이고 목적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율법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새 사람은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고,

새 사람은 새 언약이 지배하는 신약 사람이고,

새 사람은 광야에 나온 사람입니다.

 

새 사람이 먹어야 할 양식은 예수님의 피 입니다.

양식이란? 의(義)입니다.

썩을 양식은 인간의 의이고,

영생하는 양식은 예수님의 의입니다.

자기 의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주신 의로 산다는 말입니다.

 

광야는 자기가 농사를 지어서 양식을 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광야엔 하늘로서 의가 비 오듯이 내려오는 곳입니다.

 

수십만 명이 먹고도 남을 만큼 풍성하게 내립니다.

마치 오병이어로 5천명이나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을 정도로 풍성하게 내립니다.

광야에 내리는 의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입니다.

광야엔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 능력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광야에선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지만,

신약의 광야인 교회에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가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광야입니다.

교회엔 하늘로서 내리는 양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해둔 영생하는 양식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 입니다.

예수님의 의입니다.

 

당신이 서 있는 그 광야(교회)엔 무슨 양식(義)이 내립니까?

인간의 행함이라는 썩을 양식(義)입니까?

예수님의 피라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義)입니까?

 

하나님이 몰아내신 광야엔 반드시 하늘에 양식(義)이 내립니다.

하늘에서 마나가 쏟아져 내리듯이 예수님의 피뿌림의 은혜가 쏟아져 내립니다.

베드로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를 합니다.

 

벧전 1:1-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베드로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친다고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오는 곳이어야 합니다.

 

구약의 광야에선 만나가 쏟아졌지만,

신약의 교회에선 예수님의 피가 쏟아집니다.

예수님의 피가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양식이어야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피를 먹고사는 뱀파이어들입니다.

다른 피를 먹으면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를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 만이 영생하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예수님의 피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피(義)가 없는 곳은 하나님이 인도한 광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운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산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반드시 예수님의 피만 증거가 되어집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듯이 예수님의 피가 증거되지 않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를 영생하는 양식으로 먹지 않는 그 사람도 성도가 아닙니다.

당신이 진정 성도라면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에 와서 다른 것 구하면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 피 만 달라고 하여야 합니다.

 

무엇하러 교회에 왔습니까?

왜? 예수님을 찾아 오셨습니까?

당신은 예수님의 피에 굶주려 있습니까?

당신은 예수님의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뱀파이어입니까?

 

부디 예수님의 피 없이는 살 수 없는 뱀파이어가 되시길 주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영생하는 양식으로 보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피가 영생하는 양식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이 주신 그 의(義)로 감사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피를 먹지 않고선 살수 없는 뱀파이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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