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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40강. 하나님의 일 (요 6:27-29)

by coroa 2021. 4. 11.

 

♣ -.40강. 하나님의 일 (요 6:27-29).-

-.정낙원 목사

 

오늘은 “하나님의 일” 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시다.



사람들은 “일” 이라고 하면 인간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는 인간의 의식구조가 일이란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으로 입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의 개념이 신자와 불신자 간에 다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일에 대한 개념은 믿음과 종교성으로 나타납니다.


믿음과 종교성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고 난 후 하나님이 말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상고해 봅시다.

 

신자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고, 불신자는 아담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두 부류로 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법으로 대하고,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은혜로 대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세계는 법의 세계이고, 예수님의 세계는 은혜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법이 지배하고,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은혜가 지배합니다.

법은 책임이 동반하고, 은혜는 용서가 동반됩니다.

무슨 일이든 법 아래선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고, 은혜 아래선 예수님이 책임을 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 있는 사람에겐 법이 따라다니면서

넌 어떻게 살았느냐!

넌 할 일을 다 했느냐!

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느냐! 라고 추궁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은혜가 따라다니면서 너의 잘못을 예수님이 다 담당하셨다! 라고 알려 줍니다.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책임져 주셨다는 것을 아느냐 라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는 자기가 자기를 책임지는 인간이 있고, 자기를 예수님이 책임져 주는 인간이 있는 셈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책임을 지는 것은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에 그렇고,

자기를 예수님이 책임을 져 주는 것은 예수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법아래 있는 사람은 죽고 사는 모든 문제를 자기가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하니 힘이 듭니다.

하지만 은혜 아래 있는 성도는 죽고 사는 모든 문제를 예수님이 대신 책임져 주시니 어떤 환경에서도 두려움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요즈음 탤런트 이순재 씨가 하는 라이나 생명의 광고같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너 어떻게 살았느냐?

너 왜? 그 모양이냐? 라고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으니 얼마나 편합니까?

죽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성도 같이 배짱이 편한 사람이 없어요.

 

존재론적 의미에서 보면 죽음에 좇기는 인간이 자기가 책임질 인생이 없다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죄 아래서 살아가는 인간은 눈만 뜨면 어떻게 살까? 걱정근심에 휩싸입니다.

어떻게 살까? 라는 것은 죽음이 따라다니기 때문에 밀려오는 공포심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모든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죽는 사람이 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죽고,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삽니다.

왜냐하면!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죄값을 치러야하기 때문에 죽어야 하지만, 에수 안에 있는 성도는 예수님이 대신 죄값을 치러주셨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하나님께선 법과 은혜로 인간을 대하신다고 했지요.

법은 자기가 책임을 지고, 은혜는 예수님이 대신 책임을 져 준다고 했지요.

그래서 법아래 있는 사람은 죄 값을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므로 자기가 죽는 것이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책임을 져 주신다고 하였으니 사는 겁니다.

 

원칙적으로 하면 법아래 있는 사람이나,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나 죄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동일하게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법아래 있는 사람은 자기 죄값으로 자기가 죽어야하고, 은혜 아래 있는 성도들의 죄값은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셨습니다.

똑 같이 죄를 지었는데 한 사람은 예수 때문에 살고, 한 사람은 자기 죄값으로 죽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은 죽어야 할 사람에게 죽지 않게 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영생의 양식 이야기를 하는 것은 죽음이 넘실거리는 세상에 죽지 않는 양식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죽음은 인간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두려움을 주고 괴롭힙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능 속에는 상대적으로 살고 싶어하는 것도 들어 있습니다.

죽음에 쫓기면서도 어찌하든지 죽음을 피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죽음에서 벗어 날 수가 있을까?

사람들이 오래 살고 싶다는 말은 죽기 싫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지 않을 비결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만든 것이 종교입니다.

수요는 공급을 낳는다고 하듯이, 필요는 발명을 낳습니다.

난 살아야겠다는 필요가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신(神)을 한번 이용해 보자는 겁니다.

 

종교(宗敎)란? 인간들의 두려움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들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해결해 주고자하는 바탕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 요소들을 담고 있어요.

인간이 바라는 것들을 해소시켜 주지 않으면 인간들은 종교를 찾을 이유가 없어요.

 

사람들이 얼마나 영악합니까?

어린아이도 아쉬운게 없으면 엄마 안 찾아요.

누가 누구를 찾는다는 것은 다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찾는 겁니다.

 

교인들이 목사를 찾는 것도 이용가치가 있어서입니다.

저 역시도 여러분들이 이용가치가 있으니 만나는 겁니다.

이용가치가 없어 보세요.

안만나요.

 

모든 인간은 다 계산 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용한다고 섭섭해 하지 마세요.

당신도 남을 이용하고 살아 왔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 갈 것이구요.

 

인간들은 계산적으로 살아가요.

이용가치가 없으면 신을 찾지도 않아요.

무엇하려고 돈 들여가고 정성을 쏟아가면서 절간이나 교회를 찾겠습니까?

다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이 있고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와 상관없는 일에 손해를 보아가면서 투자할 만큼 그리 관대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자기 필요에 따라서 행동을 합니다.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이 좋아 사랑이지 실상은 이용하는 거예요.

 

아내도 남편을 이용하고, 남편도 아내를 이용하고 있어요.

자식도 부모를 이용하고 부모도 자식을 이용해요.

이게 죄 아래 갇힌 인간의 본성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외면 한다면 그 사람에게 이용가치가 상실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용가치가 있으면 오지 말라고 해도 찾아옵니다.

한마디로 돈만 있어 보세요.

사돈에 팔촌에 동창생까지 다 찾아옵니다.

길가다 옷깃만 스친 사람도 인연이라고 찾아올 것입니다.

 

신앙적인 면에서 가난하다는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물론 돈이 많았으면 하는 마음은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어요.

지금도 로또라도 당첨 되지 않나 생각하고 삽니다.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가난이 복이라는 것을 언제 아느냐 하면 일가친척들 만나면 알게 되요.

가난하니 안 찾아 와서 좋은 겁니다.

잘 살아 보세요.

오만 사람들이 다 찾아와서 귀찮게 할 겁니다.

내가 좋아서 찾아 오는게 아니고 내가 가진 돈을 보고 찾아오잖아요.

 

복음을 알고 보니 야! 이 가난도 하나님의 은혜구나!

날 귀찮게 하지 않게 하려고 가난케 하였구나! 라고 생각을 합니다. 

남에게 나누어 줄게 없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그들로부터 자유케 해 주는 겁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모든게 감사해요.

그러니 없으면 없는 대로 감사하고 사세요.

 

암튼 사람들은 자기가 아쉬우면 찾게 되어 있어요.

이처럼 사람들이 신을 찾는 것은 신이 좋아서가 아니라 신의 도움이 필요해서입니다.

죽음에 쫓기는 인간들은 자기가 소멸된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모든 인간의 본능 속에는 영원불멸(永遠不滅)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어가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영원불멸하고자 하는 마음은 죄가 가져다 준 겁니다.

죽음이 상대적으로 영생에 대하여 갈망하게 만든 겁니다.

하나님께선 인간들에게 영원(永遠)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전도서 3장입니다.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영원이란? 영생이라는 말입니다.

영생은 죽음의 반대말이니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줌으로 너희는 죽음에 가두어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하여야 할 너희가 죄로 인하여 죽음에 떨어졌다는 것을 고발해 주고 있는 겁니다.

 

인간들이 영원불멸하고자 하는 것은 죽음이 가져다 준 상대적 욕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를 가지고 영원불멸의 존재로서 보장을 받고 싶어하는 겁니다.

인간들 세상에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가 그 종교를 통하여서 죽음이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평안을 얻고 싶어서입니다.

 

세상이 불안할수록 사람들이 종교생활을 더 열심히 하는 이유도 다 종교를 통하여서 마음에 안식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종교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지 않고 다만 그것으로 자신이 위로가 되기 때문에 찾는 것입니다.

 

스포츠 선수들이 운동경기 전에 목걸이에다 키스를 하는 것도 그것이 자기에게 행운을 안겨다 주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하늘에다 성호를 긋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스스로 최면을 거는 것입니다.

 

보통 유명한 선수들이 그렇게 하거든요.

그러니 아! 저렇게 하면 경기가 잘 풀리는가보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자기도 흉내를 냈는데 그날따라 경기가 잘 풀렸어요.

그러면 그때부터 그 사람에겐 목걸이는 단순한 목걸이가 아니고 행운을 안겨다 주는 부적(附籍)이 됩니다.

 

부적이란? 신의 능력이 임재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목걸이를 안 하면 불안해 집니다.

사람의 마음이 불안하면 경기력은 자연히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이러한 것은 차에 십자가를 걸고, 염주를 걸어 놓는 것과 같아요.

이런 것을 걸어 놓아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교인들이 차를 타고 기도를 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요즘은 차에다 성경책을 얹어 놓고 다닙니다.

성경을 보려는 것이 아니고 부적으로 싣고 다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니고 다니는 마스코트가 다 부적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일평생 두려움에 쫓기며 살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화를 면하고자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원초적으로 오는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신의 힘을 빌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상이라고 하고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종교는 자기가 자기를 믿는 것이에요.

자기가 정성을 쏟는 것만큼 위로를 받습니다.

일종의 자기 최면인 것입니다.

 

종교에선 인간의 정성이 빠지면 설자리가 없어요.

그래서 고급종교일수록 고행과 금욕을 신앙생활의 중요한 덕목으로 내세우는 겁니다.

고행과 금욕을 잘해야 고승(용한 무당)으로 인정받아요.

 

이게 교회 안에선 신령한 목사로 대접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목사들이 사십일 금식을 하고 365일 철야를 하고 산 기도를 하는 겁니다.

저도 과거에 그랬어요.

나는 특별한 목사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참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제 이야기 좀 할께요.

전 과거에 밤마다 교인들 몰래 잘 때에 교인들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대문에 부쳐놓은 교패에 안수하고 다녔어요.

교패가 마치 유월절 어린양의 피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교인들 가정에 마귀가 엄습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다녔어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맞아요.

제가 그랬으니까요.

 

그러면서 은근히 교인들에게 자랑하는 겁니다.

너희들은 편안하게 잠을 자지만 난 잠 안자고 당신들 가정을 위해서 기도 한다.

아침 한끼 금식하면서 너희들은 삼시 세끼 밥 잘 먹지만 난 굶는다.

난 너희들보다는 신과 가까이 있다는 표를 내는 겁니다.

 

그러니 날 우습게 보지 말고 대접 잘하라는 말입니다.

누가 당신들을 위해서 밤잠 안자고 기도해 주겠냐?

그러니 날 떠나지 말라 영원히 내 밑에 있으라는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히 무당 노릇한 겁니다.

복음을 모르면 무당 노릇 할 수밖에 없어요.

목사들이 무당 노릇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예요.

그래야 교회를 통해서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율법 아래 있는 목사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런 유의 일들을 하고 있어요.

목사나 교인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뭔가 특별한 것을 하면 무당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어요.

그러니 속지 마세요.

무당의 특징이 범인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겁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거리들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누가 하면 그 사람이 달라 보여요.

왠지 무슨 능력이라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귀가 이걸 놓칠 리가 없지요.

거짓 능력을 행하게 하여 주의 자리에 앉힙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이런 목사를 아주 특별한 주의 종이라고 생각하고 따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들이 특징이 뭡니까?

자기에게 기도만 받으면 만사가 형통하는 것처럼 말하지요.

자기 말을 듣고 누구는 어떤 복을 받고, 누구는 어떤 병을 고치고, 누구는 어떤 문제가 해결을 받았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돈 싸들고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자기 소원을 이루어지게 기도를 해 달라고 하잖아요.

목사이든 교회이든 남이 안하는 짓을 하면 그건 사이비라고 보면 틀림없어요.

사이비 일수록 거창하고 이상하고 특별한 제도들을 많이 만들어서 미혹을 해요.

 

예를 들어

0시 예배를 드린다거나,

365일 철야를 한다거나,

하루 한 끼씩 금식을 시킨다거나,

연례행사로 특별 기도회를 한다거나,

일천번제 운동을 한다거나,

홍해 작전이니, 여리고 정복 작전이라던가,

금요일도 그냥 금요일이 아니고 성 금요일에 산 기도를 간다거나,

좌우지간 성경에 있는 것들을 동원하여서 교인들의 정신을 행사에 빼앗아 혼미케 합니다.

 

천주교 같은 곳을 보면 일 년 열두 달을 무슨 무슨 기간이고 절기로 만들어 놓았어요.

어디서 끼워 맞추었는지 때를 따라서 옷 색깔도 바뀌고 정신이 없습니다.

이게 모두가 인간의 정성으로 하나님을 움직여 보겠다는 종교성에서 기인 된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밖에 계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행하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역사 밖에 계신 분입니다.

역사 밖을 묵시라고 해요.

혹은 영이라고도 하고, 다른 말로 영원세계라고도 합니다.

묵시다, 영이다, 영원이다 라는 말은 다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 세계는 역사 밖의 세계이니 날과 달과 절기가 없어요.

날과 달과 절기는 낮과 밤이 있는 역사 세계에서나 있지 낮과 밤이 없는 하나님 나라에선 없습니다.

천국엔 밤이 없다고 하는 것은 시간 개념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항상 오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는 비록 역사 속에 살고 있더라도 모두가 묵시적인 주님의 날입니다.

 

그러니 천주교에서처럼 날을 쪼개서 절기를 만들 필요가 없어요.

아니 일요일은 거룩하고 월요일은 거룩하지 않는가요?

토요일 11시 59분 59초는 비거룩한 시간이고, 12시 땡하면 일요일이니 거룩한 시간이 되는가요?

이 얼마나 웃지 못 할 코메디입니까?

 

과거에 실제로 제가 아는 어느 목사는 주일날 차타고 가다가 기름이 떨어졌는데 기름을 넣지 않아요.

왜? 그러냐고 물으면 주일은 거룩한 날이기 때문에 돈 쓰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일 밤에 서울로 세미나를 간다고 같은 차에 동승하고 올라가다가 차에 기름이 떨어지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기다리다가 밤 12시가 지나면 월요일이니 기름을 넣고 가는 겁니다.

옆에서 핀잔을 주어도 자기 신앙은 그렇다고 하면서 고집을 피웁니다.

 

어떤 목사는 월요일 오전에 울산에서 행사가 있어서 주일날 저녁에 서울서 떠났어요.

울산에 도착하니 밤 11시경이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마중을 나가서 숙소에 안내 했어요.

목사님 3분이 같이 오셨는데 여정에 저녁 식사를 하지 못하였다고 한 분이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식사 하러 가시자고 하니 주일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 밤 12시가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구약 사람입니다.

아직 예수를 못 만났어요.

이런 사람은 종교 생활하는 것이지 예수 믿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종교 생활하는 교인들 눈에는 이런 목사가 더 신령해 보여요.

 

그러니 성경적 이름을 따서 무슨 특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면 다 가짜라고 보면 틀림없어요.

인간의 열심과 정성을 신앙이라고 내어 놓으면 인간이 만든 종교 집단이라고 보면 되요.

종교는 항상 인간의 정성을 요구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은 인간들 것을 안 받아요.

열심도 정성도 안 받아요.

하나님은 예수님 것만 받아요.

 

그러니 인간의 정성을 신앙생활로 가르치는 곳은 종교단체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종교단체와 달라요.

교회는 종교단체가 아닙니다.

편의상 종교 단체를 종교라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곳이지만, 종교는 인간이 세웠어요.

교회를 하나님이 세웠다는 것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종교를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새워졌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세워졌기 때문에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는 종교단체가 아닌 겁니다.

종교와 교회의 차이를 알아야 해요.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의인화하는 것은 인간의 요구는 없고 그리스도의 요구만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내가 없어요.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내 소원, 내 요구가 필요치 않는 겁니다.

종교 속에는 내가 있지만, 교회 속에는 내가 없어요.

왜냐하면! 종교는 나를 위하여 생겨난 것이지만, 교회는 예수님을 위해서 세워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인간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들이 만든 교회라는 종교단체에 불과합니다.

 

지난번 석가탄신일에 동료 목사님들과 문수산 등산을 갔어요.

가는 길에 문수사 라는 절이 있어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샘물로 목도 좀 축일 겸 해서 절에 갔더니 마침 대웅전에서 스님이 강론하는 겁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는가 잠시 들어 보았어요.

 

설법 내용은 경제가 어려우니 모두 근검절약해서 이겨내라고 합니다.

아주 상식적인 말입니다.

거기에 곁들여서 종교 색채를 가미해서 열심히 좋은 업보를 쌓고 불공을 드리면서 부처님께 기도하면 바라는 소원들을 다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이건 교회에서 목사들이 늘 하는 말입니다.

 

불교는 불교 용어로 사용하고 교회는 교회 용어만 사용할 뿐 그 속에 담긴 내용은 똑 같아요.

그러니 교회나 절간이나 유유상종이고 초록은 동색이지요.

인간의 욕심을 채워 주겠다고 하니 교회나 절간이나 종교인겁니다.

 

교회는 인간의 욕망을 깡그리 기각시켜 버리는 곳입니다.

죄인이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 죄라고 고발을 해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일체 인간을 기쁘게 해 주는 요소가 없어요.

교회 지붕에 십자가를 세워 놓는 것은 다 죽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핏값으로 아겔다마 라는 피 밭을 사서 나그네 무덤을 삼았지요.

교회는 예수님의 핏값으로 샀어요.

아겔다마는 교회를 상징해요.

교인들의 정과 욕심이 들끓는 옛 사람을 장사 지내 주어야 해요.

마치 성막에서 제사장들이 양을 잡듯이 교인들을 죽여야 합니다.

말씀의 칼로서 이것도 죄고, 저것도 죄라고 지적해 주어야 해요.

넌 죽은 자인데 왜? 자꾸만 너로 살고자 하느냐? 라고 책망을 해 주어야 해요.

 

그러니 육에 속한 사람들은 교회를 좋아 할 수가 없어요.

자기를 부정하는데 누가 좋아 하겠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절은 싫어하지 않는데 교회는 본능적으로 싫어해요.

 

사람들에게 절에 가자 그러면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지만 교회 가자고 하면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이 세운 곳이기 때문에 왠지 거북스러운데, 절간(종교)은 인간들이 만든 곳이기 때문에 이상하게 부담이 없어요.

 

교회는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만 올 수가 있어요.

교회는 아무나 못 와요.

모두가 인간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교(절간)는 아무나 갈수 있어요.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 증거하지만, 종교는 항상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해요.

그래야 고객을 관리 할 수가 있어요.

고객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으면 고객들은 용한 무당을 찾아서 다른 곳으로 옮겨요.

 

이 시대 교인들이 시절을 쫓아서 교회를 옮겨 다니는 것은 무당을 찾아다니는 것과 같아요.

대 다수가 진리를 위해서 옮기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알아주는 곳으로 옮깁니다.

이런 이기주의자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니 항상 시끄러운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런 교회들을 일컬어 “사단의 회” 또는 “귀신의 처소” 라고 합니다.

 

종교는 인간들의 필요에 따라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주체로 자리 잡게 됩니다.

말로는 신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신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해 줘야 하니 종으로 있어요.

신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하니 종인 겁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를 들여다보면 종교화 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교회가 종교화되었기 때문에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자기 소원을 들어달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그냥 들어달라고 하면 양심이 꺼림칙하니 돈을 내든지 열심이나 충성을 바치는 겁니다.

열심과 충성은 자기 소원을 따 내기 위하여 신께 뇌물을 바치는 행위입니다.

 

인간들은 신에게 받아 내는 것도 인간 쪽에서 뭔가를 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냥 달라고 하지 못하고 뭐라도 드리고 달라고 하는 겁니다.

드릴 것이 없으면 정성이라도 쏟아야 합니다.

 

하다 못해서 이른 새벽에 사람들이 우물물을 긷기 전에 깨끗한 정화수(井華水)라도 떠 놓고 찬물에 머리라도 감고 치성(致誠)을 드려야 해요.

그래서 신이 감읍(感泣)하여 소원을 들어 준다고 인간들은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사상이 그대로 교회 안에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겁니다.

이 시대 대 다수의 새벽기도나 철야기도가 모두 이런 사상으로 드려지고 있어요.

 

이런 사상이 교인들로 하여금 목사에게 종속시킵니다.

교인들은 목사에게 복 받는 비결을 알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목사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에 충성 봉사하라는 식으로 정성을 드리라고 합니다.

정성 중에 최고는 돈이고, 돈이 없으면 몸으로 전도하고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라고 합니다.

 

교인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아예 신앙 생활하는 방법도 알려 달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게 얼마나 웃기는 말인가 하면 어떻게 살까요? 라고 묻는 것과 같아요.

아니 사는 것을 남에게 물으면 어찌합니까?

자기가 알아서 살아야지!

 

사람이 살아가는 삶이 어디 정형화 되어 있는가요?

정형화 된 삶이 없어요.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법이 다 달라요.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기호도 달라요.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스포츠를 보아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봅니다.

음식을 먹어도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채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태양인이 좋아하는 음식이 있고, 태음인이 좋아하는 음식이 달라요.

소양인이 좋아하는 음식이 다르고, 소음인이 좋아하는 음식이 달라요.

각자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자기 보고 싶은 것 보고 살아가는 것이 삶이에요.

 

12제자들의 성격이나 기호도 다 달라요.

하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삶에 가치관은 다 같아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면서 천국을 향한 지향점이 같았어요.

택시를 타고 오든지, 걸어서 오든지 교회로 온다면 따질 문제가 아닌 것과 같아요.

 

양복을 입고 교회 와야 됩니까?

남방 입고 와야 됩니까?

니 마음대로 하세요.

팬티만 입고와도 돼요.

벌거벗고 오면 어때요?

예의 없고 남사스러워서 그렇지?

남한데 욕은 먹겠지만 천당 가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신앙생활(信仰生活)이 뭡니까?

문자대로 풀이하면 믿고(信) 바라는(仰) 것으로 살아가는(生活) 것입니다.

자기가 믿고 바라는 것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누구에게 물을 것도 없이 자기가 믿고 바라는 것으로 살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받아 보면 알아요.

하나님의 은혜는 각 사람마다 다르게 임해요.

그러니 남에게 물을 필요가 없어요.

 

그럼에도 교인들이 목사에게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알려 달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받은 은혜가 없고 깨달아지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는 안 믿어지는데 목사는 믿으라고 하니 어떻게 믿으면 되느냐고 알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신령한 척하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는 식으로 방법론을 제시해 줍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이렇게 되면 교인은 목사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믿음이 있는 줄로 착각을 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목사가 정해 준대로 사는 것이지, 자기 신앙생활이 아니지요.

 

목사들이 나쁜 말은 하진 않잖아요.

다 착하게 살고 교회에 충성하라고 가르치잖아요.

그러니 교인들은 목사가 시키는 대로 성경보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합니다.

그리곤 목사가 시키는 대로 했으니 믿음이 있는 줄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생각에도 타당한 것 같으니까요.

 

그러나 성경은 이런 믿음을 믿음이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신 것을 믿는 겁니다.

내가 믿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기 피” 예요.

하나님이 믿으라고 한 것은 “예수님 피” 밖에 없어요.

하나님은 “주 예수를 믿으라” 고 했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는 믿음은 예수님 피 인 겁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신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면 어떤 행동들이 나타납니다.

그건 사람마다 달라요.

사람마다 깨닫는 것이 다르니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없지요.

다만 그 내용은 같아요.

 

이건 마치 예쁜 꽃을 보고 사람마다 나타내는 반응이 다른 것과 같아요.

어떤 사람은 호들갑을 떨고, 어떤 사람은 속으로 음미해요.

하지만 아름답다고 느끼고 기뻐하는 것은 같아요.

그러니 누구 흉내 낼 필요가 없어요.

그냥 자기가 깨달아지고 받은 은혜대로 살면 되요.

 

자기가 받은 은혜를 남에게 물어 볼 필요가 없잖아요.

옆 사람에게 내가 무슨 은혜를 받았지? 라고 물으면 어찌합니까?

그런데 뭘 목사에게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묻느냔 말입니까?

어떻게 하면 은혜 받습니까? 라고 물으면 안 됩니다.

가르쳐 주겠다고 하는 사람도 예수가 안 믿어지는 것은 매 일반입니다.

믿어지는 것이 없으니 믿는 것을 만들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오늘 살펴볼 내용이 “하나님의 일” 이라서 그럽니다.



하나님이 일하라고 하면 인간은 자기가 아는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곤 하나님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 일이 아니고 자기 일입니다.

하나님 일은 하나님이 하라고 한 것을 하여야 하나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일을 가르쳐 준 것은 제자들이 자기 생각으로 알고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인 겁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일 말고 내가 가르쳐준 일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일” 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자 군중들이 몰려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할 때 예수님이 그들을 피하여 숨었다가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는 이유는 떡을 먹고 배부른 연고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군중들과 같이 배부르기 위한 떡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을 하라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선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땅을 파고 집을 짓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것을 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이해되는가요?

 

군중들이 곡괭이나 삽을 들고 일하려고 예수님을 따른게 아닙니다.

떡을 얻어먹기 위해서 따른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떡을 얻어먹기 위해서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것을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 너희들은 떡을 얻어먹기 위해서 예수를 따르지 말란 말입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일이란 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잖아요.

군중들이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떡을 얻어먹고 사는 것이나, 농사지어서 밥 먹는 것이나 다를게 없지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군중들처럼 먹고 살기 위해서 날 쫓아다니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은 썩은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무엇인줄 알아야겠지요.

그래서 제자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하는 일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고 합니다.

무슨 선문답하는 것 같지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어요.

믿으니까 따라다니지요.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이나 군중들이나 똑같이 보고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생각은 다 같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먹고 살게 해 주려고 부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먹고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에 부른 거란 말입니다.

 

먹고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뭐냐?

그게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아니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무슨 뜬금없는 말을 합니까? 라고 하겠지요.

 

지금 제자들이 예수를 믿고 있잖아요?

예수를 믿으니 따라 다니는 것 아닙니까?

맞아요.

예수를 믿으니 따라다닌 겁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뭐냐 이 말입니다.

아니 믿음은 믿음이지 믿음도 뭐가 다릅니까?

맞아요.

믿음이 달라요.

믿음이 다르기 때문에 썩는 양식이니 영생하는 양식이니 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썩는 믿음이 있고, 영생하는 믿음이 있어요.

이러면 복잡해지지요.

 

썩는 믿음은 예수를 떡 주는 예수로 믿는 것이고,

영생하는 믿음은 예수를 죄 사함 주는 예수로 믿는 겁니다.

결국 떡을 위해 믿느냐!

죄사함을 위해 믿느냐! 로 답이 모아지지요.

 

떡을 위해 믿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다 믿을 수 있는 예수예요.

그러나 죄사함을 위해 믿는 예수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만이 믿을 수가 있어요.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죄사함 받아야 한다는 것은 몰라요.

그것은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죽어가면서도 왜? 인간은 죽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왜? 인간은 먹고 사는 일에 수고와 슬픔과 고생이 동반되는 줄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왜? 인간은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까?

이건 철학자들만이 사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들이 고민하여야 할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들의 먹거리나 해결해 주고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살아가는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랑가는 것보다 훨씬 원초적인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셨어요.

예수님은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하는 자기 백성들을 죽음에서 놓아 주려고 오셨어요.

 

히브리서 2장을 봅니다.

 

히 2:14-16=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혈육을 입고 오신 것은 혈육에 속한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을 책임지시기 위해서 혈육으로 오신 겁니다.

죄인과 똑같이 죽음이 얼마나 저주스럽고 두려운 것인지를 체휼하시려고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겁니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계셨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웠어요.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죽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한 것입니다.

두렵기 때문에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한 겁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당한 아픔들을 다 당하셨어요.

이를 체휼이라고 합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보세요.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았다고 하잖아요.

시험을 받았다는 말은 우리가 당하는 아픔들을 똑 같이 동참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대신 책임져 주는 분이 되실 수가 있어지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고 천사들과 같이 왔다면 자기백성들을 대신 책임져 줄 수가 없어요.

그건 죄인들의 고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줄 모르는 상태에서 대신 책임진다는 것은 관념입니다.

관념은 아프지 않아요.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와 다른 몸으로서 광야에서 사십일 금식하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고 이겼다고 한다면 그건 능력일 수가 없어요.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마귀에 시험을 이겼다면 신기할 것도 능력일 것도 없어요.

하나님이니까 당연히 이기는 거잖아요.

그러나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마귀를 이겼다고 한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그것은 우리를 대신하여서 이긴 것이 됩니다.

 

이런 이치로 만약 예수님이 인간과 다른 모습의 하나님으로 십자가에 죽으셨다면 능력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죽었다 살아 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도 관념이 되고 말아요.

그 십자가에는 인간의 아픔이 공유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와 동일한 몸으로 십자가를 지셨다면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아픔을 다 당하셨기 때문에 중보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완전하게 인간이어야 하고 완전하게 하나님이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시키는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중보자는 양쪽의 처지를 다 알아야 중보자가 됩니다.

우리가 아파하는 것만큼 아파보아야 비로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완전한 인간이 죽었고 완전한 하나님이 죽은 겁니다.

완전한 인간으로서 죽은 것은 자기백성들을 대신해서 죽은 것이고, 완전한 하나님으로 죽으신 것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버림 당하신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곧 하나님이 싫다고 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도를 대표하면서도 하나님을 대신하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을 대신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천사들이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천사들에겐 육신이 없어요.

우리와 같은 몸이 없어요.

그러니 우리가 죄 때문에 당하는 아픔도 모르지요.

죽음에 두려움도 모르지요.

그래서 천사들은 우리를 돕는 자는 될 수가 있어도 구원자는 될 수가 없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구원자는 반드시 인간과 똑 같아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대신하는 대언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죽으신 겁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의 흔적을 구원 받은 자들에게 담아 놓고자 한 것입니다.

성도에겐 예수님의 흔적이 오롯이 담겨져 있어요.

성도는 천국에서 이 예수님의 공로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인간과 같은 고초를 겪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두려움을 너무도 잘 아세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군중들처럼 떡을 위해서 따르지 말고 이 죽음에 문제를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죽음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고, 그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신 죽어 주심 때문에 내가 산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그냥 살려주지 않아요.

반드시 죄인 대신 다른 사람이 죽어야만 살려 주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했지요.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보세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셨기 때문에 내가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우리 목숨은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도 이런 사실을 모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모르고 있어요.

이런 것은 장차 성령이 오셔야 알아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은 영생하는 양식을 얻기 위해서 자기들이 뭔가를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은 겁니다.

하나님 일을 가르쳐 달라는 겁니다.

가르쳐만 주면 그대로 시키는대로 하겠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영생의 양식을 자기들이 일한 결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영생하는 양식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가? 라는 묻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영생하는 양식을 얻는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인데 그것은 인자가 준다고 합니다.

 

자 중요하니 정리하고 넘어 갑시다.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럼 하나님이 보내신 자는 예수님이니,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지요.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하는 양식은 인자가 주신다고 했지요.

인자란? 예수님입니다.

그럼 예수님 자신이 영생하는 양식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영생하는 양식은 예수님의 살과 피 입니다

그걸 지금 주시겠다는 겁니다..

누가요?

예수님이!

 

그럼 영생하는 양식을 인자가 주겠다고 하는 말은 곧 예수님이 제자들을 대신하여서 죽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해되지요.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서 이 사실을 성도로 하여금 믿어지게 하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내 죄를 위해서이고, 난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심으로 죽음에서 벗어 날 수가 있어졌구나! 라는 것이 믿어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우리더러 결정해서 영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내가 결정해서 믿으면 그건 내 믿음이지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신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은 선물이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못한 법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자 합니다.

법에 속한 사람은 항상 자기가 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가 믿고자 합니다.

그러나 은혜에 속한 사람은 믿고자 노력하지 않고 믿어지는 것으로 믿고 삽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라는 말도 법에 속한 사람과 은혜에 속한 사람은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보낸 자를 믿을 일이지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글자 그대로 영생을 “얻는” 겁니다.

“얻는다” 는 말은 “공짜로 주어진다” 는 말입니다.

타자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영생은 예수님이 거저 주는 것이구나! 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믿는다는 말은 자기고백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게 해 주는 고백입니다.

하지만 법에 속한 사람들이 전도하는 것을 보면 자꾸만 예수를 믿는다고 결단을 하라고 합니다.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니 예수를 영접하라고 합니다.

왜? 못 믿느냐고 타박을 합니다.

제발 좀 믿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법에 속한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생활이 자기 자랑으로 가득차 있어요.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것으로 살지 않고 자기 믿음으로 사니 자랑할 수 밖에 없어요.

예수 믿는 것에서부터 봉사하고 충성하는 모든 것을 자기가 행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래요.

 

그러니 남이 이런 일을 안 하면 우습게 보는 겁니다.

딱하게 보는 겁니다.

봉사를 해도 난 이렇게 하는데 너희들은 뭐냐? 라는 식으로 꼴값을 떨어요.

이런 것을 종교성이라고 합니다.

종교는 내가 한다고 했지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들은 믿음이 없을 경우에 그 대체물로서 종교성이 등장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시대이고 마귀는 믿음 대신에 종교적인 행위로 믿음을 대체하라고 미혹을 해 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법에 속한 사람들은 마귀가 심어준 종교성을 믿음이라고 내어 놓는 겁니다.

 

인간은 믿음이 없을수록 열심을 내어놓습니다.

믿음에 대체물로 자기 행함을 내어 놓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종교들은 인간들의 금욕과 고행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능력 밖에 일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내가 아우성친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기도 많이 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인간의 아이큐하고도 상관이 없어요.

 

그럼에도 사람들은 믿어지는 것이 없으니 불안하고, 그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자기 열심으로 믿음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믿음이 아니고 자기 행함입니다.

 

인간의 행함은 죄사함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는 믿음은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함이 없어도 안심이 되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만약에 어떤 일을 하지 않아서 두려워진다고 한다면 그건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을 안 했다고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예수 안 믿어도 두렵지가 않아야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상하게 들리지요.

이 말은 예수를 믿는 것을 내가 행사하지 않는 것이란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이 행사를 하시잖아요.

하나님이 행사를 한다면 우리 행위와 상관이 없잖아요.

그러니 내가 예수를 믿네! 안 믿네! 하는 것과 상관없이 예수는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예수 안 믿어도 두렵지가 않아야 예수 믿는 것이라고 말한 겁니다.

헷갈리지요.

믿음으로 들으면 헷갈릴 것도 없어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믿음을 만들어 내려고 어떠한 시도도 하지를 않습니다.

그저 믿어지기 때문에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고 사느냐고 물으면 믿어지기 때문에 믿는다! 라고 말 할 수밖에 없어요.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게 하면 믿어지고, 믿지 못하게 하면 못 믿어요.

 

이걸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고 강퍅케 한다고 했어요.

 

롬 9:15-18=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기는 자가 있고, 강퍅케 하는 자가 있다고 하지요.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구원시킨다는 말이고, 강퍅케 한다는 말은 구원시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럼 긍휼이 여기는 것은 예수가 믿어지게 해 준다는 말이고, 강퍅케 한다는 것은 예수가 안 믿어지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고 안 믿고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말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소관 밖에 일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자로도 안 되고 달음질하는 자로도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강퍅케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을 강퍅케 만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이미 강퍅한 인간으로 출생을 합니다.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강퍅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어있어요.

 

그러므로 강퍅케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은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죄인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강퍅한 자로 살아요.

죄인 자체가 강퍅한 자에요.

다 나쁜 놈인데 성도는 그냥 용서를 받는 겁니다.

용서 해주면 좋은 놈으로 인정받고, 용서 안 해주면 그냥 나쁜 놈입니다.

 

용서 받는 자는 의인이고, 용서받지 못한 자는 죄인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성도를 의인으로 간주하셔서 성도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왜? 가 있을 수 없고, 어떻게? 가 있을 수 없어요.

하나님이 의인으로 인정하신다고 하니 의인인 것입니다.

나는 전혀 의롭지가 않은데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분이 의롭다고 하니 의로운 것입니다.

 

단 예수 안에서 의롭다고 하십니다.

예수님 피를 보시고 의롭다고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 피가 성도를 감싸고 있어요.

 

이건 마치 성막의 법궤 속에 불순종의 증거물들을 시은좌가 감싸고 있는 것과 같아요.

법궤 속에 들어가 있는 세 가지 물건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증거품들입니다.

법궤 속에 담긴 세 가지 물건은 바로 이스라엘이고 우리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불순종한 물건을 시은좌가 덮고 있어요.

 

시은좌 위에 뭐가 있느냐 하면 흠 없은 희생제물의 피가 있어요.

희생제물의 피가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대신 죽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시은좌에 뿌려진 대신 죽은 사람의 피를 보고 용서해 주시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영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피가 감싸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안 보이고 예수님의 피만 보이는 겁니다.

이런 상태를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준다는 것은 내 피로 너희들을 살려 준다는 말씀입니다.

내 피가 영생하는 양식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 피를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란 말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 사이의 계약에 의한 것입니다.

성도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 안중엔 성도가 없어요.

 

성도의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과 예수님 간에 계약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성도의 행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의롭지 않은데도 의롭다 여김을 해 주었다고 했어요.

 

롬 4:1-8=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 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겐 그들의 죄를 인정치 않는데 그 사람들은 복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죄인임에도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시니 한마디로 땡을 잡은 거예요.

이게 은혜에요.

은혜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돼요.

인간의 상식은 반드시 행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받는 인과응보(因果應報) 식입니다.

 

인간의 상식은 경건하게 살아야 경건한 자라고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경건과 상관없이 예수 안에 있으면 경건한 자로 간주해 줍니다.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 법칙은 인간들에겐 반칙으로 보입니다.

 

이건 마치 부모와 자식의 생각이 다른 것과 같아요.

우리가 자식을 키워보면 알듯이 부모는 모든 자식을 행위와 상관치 않고 사랑을 합니다.

그래서 공부 잘한 놈이나 못하는 놈이나 같이 밥 먹이고 같이 옷을 사 입히고 합니다.

부모는 형과 동생을 하나로 보잖아요.

 

그러나 자식들은 형과 동생을 비교합니다.

동생이 형보다 공부라도 잘하면 꼭 다르게 대우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는 형과 하나로 보지 않고 객체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부모와 자식의 마음이(법)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과 같고, 자식은 피조물인 인간의 마음과 같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의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행함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누가 인간의 착함을 의라고 하면 인간에게선 의로운 행함이 없습니다 라고 말을 해야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면 성도는 아무렇게 살아도 된단 말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럼 아무렇게 산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반문합니다.

그러면 여지없이 인간의 윤리 도덕이 나옵니다.

이건 인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에게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인데도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있으니 어떻게 사느냐? 아무렇게 살아도 되느냐? 라는 식으로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행함을 놓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물음에 성경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해줍니다.

분명히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한 것을 믿으면 되는데 믿음이 없으니 자꾸만 자기 쪽에서 발생시키는 어떤 행함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직도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란? 예수의 행위를 믿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불의란? 예수님의 행위를 놓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성경에 하라! 하지 말라! 라는 명령들이 이렇게 많은데 이걸 다 빼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라고 합니다.

그것은 본인이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겁니다.

분명히 말하는데 성경의 증거는 성도들의 구원은 그것과 상관없이 예수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명령들을 지킴과 못 지킴에 상관없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성도의 구원이 예수의 행위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이지 성도가 성경의 말씀들을 지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렇게 살아도 되겠네! 라고 묻는 말은 불 신앙적인 말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말은 성도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성도의 행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성도의 행함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을 지킴과 상관없이 구원이 되었어요.

그럼 구원 받은 자는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겠지요.

내가 이 말씀을 열심히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는 사고방식은 사라지겠지요.

 

그럼 성경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이는 성경의 요구와 자신의 한계를 아는 계기로 삼겠지요.

성경의 말씀을 지키다 보면 자신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지키려고 하면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요.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말씀 앞에 서 보니 자기 안에 악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을 통해서 자기 안에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숨어 있는 죄를 더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알아가게 됩니다.

죄에 깊이를 아는 것과 비례하여서 예수의 피로서 구원받았음에 감사가 더해집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십니다.

죄를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죄인임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내가 이 정도 기도했으면 칭찬 받을 것이고, 이 정도 봉사하고, 충성하고, 헌금하고, 전도했으면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는 자기 행위가 의로운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위가 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다고 합니다.

인간에게선 하나님이 바라는 의가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의로운 일이라고 여겼던 종교적 행함들이 하나님 앞에선 다 쓰레기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지금까지 자기가 자랑하던 율법적 행함들이 전부다 배설물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지금은 말씀이 우리 인간들의 행함이 배설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니 말씀이 내 죄를 깨닫게 해 주는 거울이 되는 셈이지요.

 

예쁜 사람은 거울을 많이 봅니다.

늘 거울을 가까이 두고 수시로 자기 얼굴을 봅니다.

이처럼 믿음이 좋은 사람일수록 성경을 많이 봅니다.

설교를 많이 듣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인간을 죄 아래 가두어졌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지키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자기의 죄인 됨을 깨닫고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음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자랑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렇다고 성도가 말씀을 안 지켜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평생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주야로 묵상하시면서 내가 왜? 죄인인가를 깊이깊이 알아 가십시오.

 

말씀을 지키려고 보지 말고 말씀을 지키면서 내 속에 악을 발견하십시오.

말씀을 지킨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갖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 가 훼손당합니다.

 

말씀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성도가 가지고 있어야 될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 공로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이 영생의 양식을 먹은 성도입니다.

 

부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영생하는 양식인 주님의 살과 피를 많이 먹고 항상 믿음에 배부름으로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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