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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38강.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 (요 6:16-21)

by coroa 2021. 3. 21.

 

♣ 38강.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 (요 6:16-21)

-.정낙원 목사

 

사람들은 흔히 초월적인 사건들이 일어나면 기적이라고 합니다.

초월이란?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피조물 입장에서 창조주는 기적에 속한 분입니다.



예를 들어 산 나무에 꽃이 피었다.

이건 상식입니다.

그런데 부지깽이 같이 죽은 나무에 꽃이 피었다.

이건 기적입니다.

 

사람은 물 위를 걸을수 없으므로 바다에 빠진다.

이게 상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었다.

이건 기적입니다.

 

인간의 상식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야 아이를 낳는다.

이건 상식입니다.

그런데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

이건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은 기적 중에서도 최고의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하고 똑 같은 육신을 입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게 안 믿어져야 하는데 믿어진단 말입니다.

믿어지니 믿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니까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최고의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믿어진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이 믿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고, 천국이 믿어지고, 영생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라는 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죄인이 의로워진다는 것이 믿어지고,

나 대신에 예수님이 죽어서 내 죄가 용서 받았다는 것이 믿어집니다.

이건 육에 속한 사람에게서는 나타날 수가 없는 고백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밥을 먹었는데 내 배가 부른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밥을 드셨는데 내 배가 부르냐 이 말입니다.

도무지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이처럼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되며,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느냐 입니다.

어떻게 예수의 죽음으로 내가 죄사함을 받습니까?

어떻게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고,

어떻게 예수님이 멸시를 받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까?

 

내 죄는 내가 감당해야지,

왜?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느냐? 입니다.

예수님과 나는 분명히 다른 몸입니다.

몸이 분명히 다른데 어째서 한 몸이 될 수가 있습니까?

 

이건 논리적으로 말이 안돼요.

그런데 믿음이 오니까 믿어지고 말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이성은 나와 다른 타자(他者)는 두 몸입니다.

 

두 몸이란? 자아가 개별적이란 말입니다.

부부라 할지라도 하나 될 수가 없습니다.

속된말로 부부가 한 몸으로 섞여 있다 할지라도 서로의 생각은 다른 둘입니다.

이게 상식이고 이성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믿음 안에 들어가면 하나가 됩니다.

둘도 하나이고,

셋도 하나이고,

열도 하나가 됩니다.



불가능한 일이 발생합니다.

예수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간헐적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말이에요.

 

예수 안에는 모두가 하나가 됩니다.

너와 내가 하나가 되지만 나와 예수님도 하나가 됩니다.

이건 신비(神秘)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지식적으로 동화 속 이야기를 대하듯이 하면 이해가 됩니다.

하나의 신화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면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말이나,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이야기이나,

물 위를 걸었다는 이야기도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신화(神話)는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단군신화 같이 곰이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나,

박혁거세가 알에서 깨어났다거나 하는 일들은 신화이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이야깃거리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오면 신화 같은 예수님 이야기가 실제화 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현실이고 실제화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이 사실이고 실제로 믿어집니다.

동화 속에서나 말할 수 있는 상상 속의 이야기가 의심 없이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적 믿음은 자기 손으로 만지고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가 직접 경험하여야 믿는다고 합니다.

인간의 믿음은 경험을 토대로 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더 더욱 인간이 경험 할 수가 없습니다.

 

2천 년 전 이스라엘이라는 땅에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을 지금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망상이고 동화 속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전 세계적으로 예수를 믿는 성도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서 예수가 믿어지도록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가 버젓이 있다는 것은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구약의 성도들을 믿음이 간섭을 하였듯이 지금도 간섭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살아서 자기 백성들을 간섭하고 다스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시대에 따라서 살아가는 모습은 다를지 몰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나 살아가는 자세는 국가와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여서 예수를 믿는 신자들은 동일합니다.

지금도 믿음이 간섭한 성도는 정도의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과 방불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간섭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느 시대나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믿게 해 주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가 믿어진다고 한다면 더 다른 기적(奇蹟)을 바라지 마십시오.

쉬운 말로 기적은 이해력이 부족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은물과 같은 것입니다.은물이란?

유치원에서 어린 아이들을 이해 시키고자 하는 교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적을 그림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림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쉽게 이해시키고자 부 교제입니다.

글로 해서 못 알아먹으니 그림으로 그려서 이해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에게 필요합니다.

 

여러분들도 어렸을 때 동화책을 많이 읽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보는 책엔 온통 그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림 책 속에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공을 가지고 놀고 있고 그 옆에 강아지 한 마리가 뛰놉니다.

아무런 글이 없어도 어릴 때는 그 그림을 보고 철수가 영이와 함께 공놀이를 하는데 바둑이도 기뻐서 뛰어 놉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어릴 땐 그림책만 보면 술술 그 내용을 다 숙지하였습니다.

물론 정답은 아닙니다.

그림을 해석하는 것은 사람마다 이해의 폭이 다르기 때문에 정답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건 기적을 바라보는 관점이 각자의 신앙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암튼 그림책만 보던 어린아이가 점점 자라가면서 학교에 들어가 학년이 높아지고 이해력이 커지면서 그림책은 멀리하고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한 책으로 공부를 하게 됩니다.

 

대학에 들어가면 글씨들만 빼곡한 책을 읽습니다.

이젠 그림으로 이해하는 시기는 지났다는 것입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그림책을 달라고 한다면 그는 책망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사역을 시작 하실 때에는 갖가지 기적들을 일으켰습니다.

4 복음서를 보면 기적이 예수님 사역 초기에 집중 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 말기로 가면서 즉 십자가로 가까이 가면서 기적은 점차 사라집니다.

 

이는 사도들의 행적으로 보아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초기에 기적이 집중적으로 일어난 것은 예수님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기적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 주기 위해서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이 믿어진 사람에겐 더 이상 기적으로 예수님을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을 할 때는 갖가지 체험을 하였습니다.

흔히들 성령의 은사라고 합니다.

방언이나 통역이나 환상이나 입신이나 병 고침이나 귀신을 쫓는 일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일들을 오랜 세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두루 경험했습니다.

 

그 땐 이런 일을 행하는 재미에 푹 빠져서 밤마다 철야를 하고 산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신기한 일들을 행하는 것이라 너무도 황홀해 하고 세상을 다 얻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혀 맛보지 못한 것을 경험한 것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가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행하면서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 한 구석에서부터 무엇인가 곤고한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엔 밤새워가면서 방언기도를 하고 환상을 보고 입신을 들어가며 황홀해 하면서 재미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헛배가 부른 것처럼 마음이 시원치가 않은 겁니다.

몇 년 동안 이런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말고 다른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하였습니다.

산 기도를 해도 재미가 없고 방언을 해도 재미가 없고 환상을 보아도 흥미가 없습니다.

 

흥미는 없어도 또 이런 일이 안 일어나면 답답해집니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라고 하면서도 그 일을 하게 됩니다.

하면서도 배부름을 얻지 못하고 늘 허전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진리를 알고픈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지식으로는 아는데 내게 능력으로 와 닿지가 않았습니다.

열심과 충성은 특심한데 정작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남들 보기엔 엄청 믿음이 좋은 것 같으나 실제 내겐 믿음이 없었습니다.

 

내가 죄인인줄도 모르겠고,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셨다는 것도 믿어지지가 않고,

천국도 믿어지지가 않고 모두가 지식이었던 것입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으로는 냉랭한겁니다.

 

이건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교육으로 알아진 지식이고 관념이었습니다.

예수는 예수고 나는 나였습니다.

누가 예수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도 그 예수는 남의 예수이지 내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만난 예수가 없으니 답답한 겁니다.

 

물론 남들 앞에선 믿는다고 합니다.

그건 어디까지 남들 앞에서 내 이미지 관리차원에서 하는 말이지 실상은 아니었습니다.

위선적인 신앙생활이 지속 될수록 진리에 대하여 더 갈급해지는 겁니다.

남을 속이는 것을 차치하고라도 내 스스로가 속고 있다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다가 너무도 곤고하고 우울해지더니 자살까지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위선적으로 사느니 죽는게 났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전 6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니 교회 가는 것은 때가 되면 밥을 먹는 것처럼 습관이었습니다.

안 가면 도리어 뭔가 이상합니다.

그러니 예수를 안 믿고 교회를 안 다니는 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믿어지지 않아도 예수는 믿는다고 하고 교회는 다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내 신앙이 위선이라는 것이 보여지기 시작하니 괴로워 죽겠더라고요.

하나님이 믿어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 또한 안 됩니다.

차라리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되면 편한데 그렇지도 않고 하니 더 괴로운 겁니다.

 

목사님들 설교를 들어도 목사님마다 다 다르게 말하니 도무지 헷갈려서 못 듣겠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알아야겠다고 신학교에 가게 되었고 이렇게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가서도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어요.

학문으로 깨달아질 수 있는 예수님이 아니거든요.

 

진리에 대하여 알아야겠다는 갈급한 일은 교회를 개척하고서도 지속이 되었습니다. 

저는 복음을 만나기 전에는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종말론에도 빠져 보았고, 성화론에도 빠져 보았습니다.

수많은 세미나를 쫓아다니고 수많은 책도 보고 수많은 목사들의 설교도 들었습니다.

한 달 금식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예수님의 십자가가 믿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가 믿어지기 시작하니 이젠 더 이상 그 동안 해왔던 은사 신앙들은 자연히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방언을 안 해도 환상을 안보아도 전혀 갈급하지를 않아요.

그런 것 안한다고 전혀 섭섭하지도 아쉽지도 않아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대로 내가 어렸을 땐 어린아이같이 생각하고 말을 하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 일을 버렸다고 하듯이 저도 그렇게 된 것입니다.

 

고전 13:8-13=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은사는 부분적인 것입니다.

사랑이 오면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합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예수님입니다.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예수님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것이니 예수님을 만나면 다 안 것이 됩니다.

 

은사는 예수님을 맛보고 만나게 하는 길잡이인 겁니다.

믿음도 소망도 사랑을 위한 것입니다.

즉 예수를 위하여 믿음도 소망도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믿음도 소망도 필요가 없어요.

천국에 가서 믿음 주세요!

천국을 소망합니다! 하지 않아요.

거긴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도 소망이 이 세상에 있을 때 필요한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오직 예수님과 사랑하는 것만 있어요.

그런데 그 천국이 지금 우리 안에 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천국을 몰고 오신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고린도전서 13장에선 사랑이라고 합니다.

 

은사는 믿음과 소망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을 위한 것입니다.

은사는 희미한 것들입니다.



은사는 어린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어린아이 때 즐겨 보던 그림책과 같은 은사를 찾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예수를 보여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은사를 부정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그건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주어진 것일 뿐입니다.

은사는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성령을 보면 성도 안에 내주하는 성령이 있고,

바깥에서 간헐적으로 역사하는 성령이 있습니다.



내주하는 것을 “엔(in) 성령"이라고 하고,

바깥에 있는 것을 "에피(out) 성령"이라고 합니다.

 

내주하는 “엔(in)" 성령은 성도를 거듭나게 하는 분으로서 한 번 오시면 영원히 떠나가지 않고 내주하십니다.

이는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성령입니다.

그러나 바깥에서 역사하는 "에피(out)" 성령은 어떤 사건을 일으킬 때 간헐적으로 신자나 불신자나 상관치 않고 일을 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발람 선지자나 사울에게 잠깐 임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이를 성경에선 “성령을 입어” 라는 식으로 표현을 합니다.

“입어” 라는 말은 왔다 갔다 한다는 말입니다.

마치 겉 옷을 입고 벗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성령은 "에피(out)" 성령으로서 필요할 때만 역사를 합니다.

복음을 증거키 위해서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에피(out)" 성령이 임하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병을 고칠 때도 있고,

귀신을 좇아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령의 은사는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해 주셨어요

마태복음 7장 21-23절에 보면 이 내용이 나옵니다.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에 보면 분명히 예수님 앞에 온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행하였다는 것은 성령으로 했다는 말입니다.

분명하게 성령의 은사를 행하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모른다고 합니다.

내게서 떠나가라고 합니다.

그러니 은사를 행한다고 다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은사를 행한다고 주의 종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도가 때로는 병을 고치기도 하고, 때로는 병을 고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방언을 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은사입니다.

 

은사란? 주었다 가져갔다 그런다는 말입니다.

고정화 되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마치 겉 옷을 입고 벗듯이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과거엔 병을 고치고 방언도 하곤 했는데,

어느 날 방언도 사라지고 병을 못 고친다고해서 주님이 떠나간 것이 아니므로 낙망할 일이 아닙니다.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엔(in)" 성령님은 우리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고 들어와서 안방을 차지하고 계십니다.

이 분은 우리가 가라고 해도 가지 않아요.

이 분을 생명의 성령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늘 성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가도록 간섭을 하십니다.

 

이 “엔(in)" 성령님을 바울은 구원의 보증이라고 했습니다.

이 “엔(in)" 성령님이 와 계신 성도는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믿어져요.

이 “엔(in)" 성령님이 내주하는 성도는 구원에 대하여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전부 "에피(out)" 성령이 하십니다.

그러니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는 온전한 예수를 만나면 다 사라질 것들입니다.

은사가 필요 없고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게 해 주는 사진과 같으니 예수님을 만났으면 사진은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이젠 예수님과 교제를 하여야지 사진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사진은 약혼자(예수님)의 얼굴을 몰라서 받잖아요.

이제 그 사진으로 약혼자를 만났으면 약혼자 얼굴을 보아야지 사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안돼요.

그건 약혼자를 모욕하는 일입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예수님과 부대껴가면서 알아가야지요.

예수님과 같이 살면서 왜? 남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물어야 합니까?

예수님을 만나고도 은사를 좇는 것은 마치 자기 신랑을 이웃집 여자에게 묻는 것과 같아요.

 

이웃집 여자에게 여보세요! 우리 남편이 어떻게 생겼지요? 라고 물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아니 내 남편을 왜? 남의 여자에게 묻습니까?

내 남편은 내가 잘 알고 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 뭡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죄인이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착해지는 것도 아니고 먹고 살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착해지고 먹고 사는 일은 내가 얼마든지 노력하면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핵심은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 받는 일입니다.

이 죄와 사망의 문제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해결했습니다.

 

이 사실이 믿어진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방언해서 죄사함 받는 것도 아니고,

병 고쳐서 죄사함 받는 것도 아니고,

귀신을 쫓아낸다고 죄사함 받는 것도 아닙니다.



죄사함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 받습니다. 

예수의 피로서 내 죄가 사해졌다는 것이 믿어진다면 방언 못해도 괜찮고, 병을 못 고쳐도 괜찮아요.

예수가 믿어지는데 더 이상 뭐가 아쉽습니까?

이젠 아쉬울 것도 없어요.

 

그러니 예수 안에 들어간 성도는 기적이나 은사를 좇아가고 거기에 머물 이유가 없어요.

이런 것을 붙잡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지 못하였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희미하고 부분적인 그림자만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성경은 초보에 머물러 있지 말고 완전한데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히 6:1-6=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기적은 초보이고 젓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를 만났으면 그림책을 버리세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세우신 새 언약 안에 담겨진 풍성한 은혜에 취하세요.

 

완전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맺은 새 언약이라는 복음입니다.

예수를 만났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림책을 붙잡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림책 보는 일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온전한 사랑이 오면 희미하던 것들은 다 사라집니다.

성도는 진리를 사랑하여야지 기적을 사랑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밝히 보이는데 아직도 기적을 붙잡고자 하면 도리어 미혹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 기적을 동원한다고 하십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봅시다.

 

살후 2:9-12=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선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기적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이건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마귀로 하여금 지옥에 갈 놈들을 추수하기 위해서 기적으로 미혹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복음을 좇지 않고 기적을 좇는 자들은 진리에 속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초월적인 것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기적은 그 때만 신기할 뿐이지 진리에 대하여서는 해갈을 주지 못합니다.

믿음은 진리가 주는 것이지 기적이 주지 않아요.

 

기적은 소금물과 같아서 한 번 맛보면 계속하여 갈증을 일으킵니다.

한 번 초월적인 일을 맛보게 되면 항상 그 맛을 좇아가게 됩니다.

기적은 마약과 같아요.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금단 현상이 일어나요.

미치고 환장합니다.

 

제가 과거에 그랬어요.

늘 환상을 보고 늘 꿈꾸고 입신을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보따리에 싸두었다가 내가 필요하면 풀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 때 그 때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사가 안 일어나면 환장하는 겁니다.

혹시 내가 뭘 잘못했는가?

내 정성이 부족한가?

자꾸만 자기를 반성하고 성찰하고 열심을 추구하게 되요.

그래서 자기를 학대하는 쪽으로 흘러가게 되는 겁니다.

 

솔직히 은사주의자들은 은사를 자기 노력으로 따내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자기 몸을 학대를 합니다.

마치 갈멜산에서 자기 몸에 칼로 그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같이 고행을 합니다.

그게 신앙인줄 알기 때문에 그래요.

밤이슬 맞아가면서 산 기도를 하거나 밤이 맞도록 철야를 하거나 아니면 굶거나 하잖아요.

그래서 목이 항상 쉬어 있어요.

기도 많이 했다는 증거로 남겨 두어야 교인들이 영험하게 보거든요.

 

이처럼 은사를 좇아가는 자들은 항상 쫓기게 되어 있어요.

남들 다 잘 때 기도라도 해야 해요.

그래야 안심이 되어요.

새롭고 신비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미칩니다.

그 불안함과 미침을 달래기 위해서 자기 몸을 자꾸만 학대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밝혀두고자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귀가 은사로 가장하여 미혹을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도 진리의 빛을 받고 복음을 알고 난 후에 깨달은 것이지만 이 시대 행해지는 대다수의 은사 운동은 마귀적인 것입니다.

 

목사님 어떻게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 할 수 있습니까?

항의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뭐라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진리에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 마귀로 하여금 거짓 것을 믿게 하려고 기적을 행하게 한다고 그랬지요.

 

고전 13장을 말하면서 은사는 사랑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요.

사랑을 다른 말로 진리라고 하고 또 예수님이라고도 합니다.

그럼 성령께서 주신 은사는 어디로 가야합니까?

반드시 예수님께로 가야하지요.

 

그럼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은사에 머물 이유가 없지요.

아까 온전한 것이 오면 희미한 것들은 사라진다고 하였잖아요.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했지요.

 

장성하다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어린아이는 예수님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희미한 것은 은사이고 온전한 것은 사랑 즉 예수님입니다.

그럼 온전한 예수님 사랑 안에 들어간 사람은 희미한 은사를 붙잡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기적을 좇아가는 자들을 불의를 좋아하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불의란? 예수 안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 안 믿는 놈들을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서 마귀를 통해서 기적을 행하게 하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을 심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특징은 진리를 사모하게 되어 있어요.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반드시 예수님을 사모하게 만듭니다.

성령의 은사가 예수님을 찾아가도록 이끈단 말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은사를 받은 성도는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예수님 안으로 이끌지 않는 은사는 전부 마귀가 주는 가짜 은사인 것입니다.

마귀는 절대로 예수를 만나게 해 주지 않아요.

왜냐하면! 마귀는 하나님으로부터 죄인을 지옥으로 데리고 가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못 믿도록 역사하는 겁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아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서 구원의 능력이 나온다는 것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마귀는 기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피를 가리는 일을 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에게 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선악과로 생명과를 가린 것과 같아요.

하와의 시선을 선악과로 붙잡아 두면 이미 게임은 끝난 겁니다.

왜냐하면! 선악과의 그 화려함에 눈을 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은사를 행해 보세요.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완전히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겁니다.

수많은 시선들이 자기에게 쏠리는데 그 황홀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어느 인간이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보내겠어요?

전부 자기 종으로 삼고 왕 노릇하고자 하지!

그래서 은사는 마약과 같다고 하는 겁니다.

 

은사주의자들을 살펴보세요.

그들은 예수님 십자가 피 이야기 안 합니다.

피를 모르니 말할 수가 없지요.

 

피를 아는 사람은 피를 말하게 되어 있어요.

피를 모르니 피는 말을 못하고 맨 날 자기들이 한 일을 자랑합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좇아내고, 기도했더니 뭘 보았고, 환상을 보았고, 음성을 들었다는 것들을 자랑해요.

그러니 진리에 서 있지 않는 자들은 꼬르륵 넘어 가게 되어 있어요.

 

중요하니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예수를 붙잡도록 역사 하지만,

마귀의 은사를 행하는 자들은 자신에게 붙잡아 두고자 합니다.

 

이 시대 대다수 은사주의자들은 마귀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은사를 가지고 자기 영광 받고 밥 벌어 먹고 사는 수단으로 쓰고 있어요.

은사로 자기가 예수님 자리에 앉아서 왕 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보통 기도원으로 쫓아다니는 사람들은 진리에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요.

이들은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무당을 원해요.

이런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기도원에 가서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복 빌어주고 화를 면하게 해 주는 기도원 원장들에게 복채(헌금)를 주고 무당굿하고 푸닥거리를 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 특징은 진리에 관심이 없어요.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 소금 맞은 지렁이처럼 늘어집니다.

그러다가도 자기가 행한 일들을 이야기 하면 비오고 난후 죽순 자라듯이 신이 나서 입에 침 튀겨 가면서 말합니다.



십자가 피 이야기 하면 눈이 게슴츠레하다가도,

은사이야기 하면 눈이 초롱초롱해지고 생기가 돌아요.

이런 사람들이 특징이 거만하고 반말을 하면서 교만하고 시건방져요.

 

제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는데 아무리 복음을 말해도 안 들어요.

만화책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으니 곁에서 뭐라고 하면 잔소리로 들리니 간섭하지 말라고 해요.

이건 마치 어릴 때 구슬과 딱지를 보물단지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건 어른이 되면 가지라고 해도 버립니다. 

은사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상고해 오면서 요한복음에 기록된 여러 가지 기적들은 모두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고자 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라는 것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선 기적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표적이란? 다른 말로 싸인 혹은 계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이고 이런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라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동원하는 것은 인간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라고 물을 때 제자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나 선생으로 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릅니다.

사람은 육이고 예수님은 영이십니다.

육과 영은 본질이 다릅니다.

이는 마치 바퀴벌레와 인간이 다르듯이 다릅니다.

 

인간이 하는 일을 바퀴벌레에게 알리려면 바퀴벌레 세계에서 통용되는 일들로서 말을 해주어야 합니다.

지금 영이신 예수님께서 육인 인간들에게 자신은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인간들이 이해하는 하나님 관으로 알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초월적인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흔히 기적을 일으키는 분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인간의 이성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신이 하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인간의 이성 밖 사건을 행함으로서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알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계에선 하나님을 알릴 방법은 초월적인 사건뿐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볼 믿음이 없기 때문에 기적으로만 판단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역 초기엔 갖가지 초월적인 사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메시야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만물을 시청각 교제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그림책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표적마다 예수님에 대한 계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기적 자체에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기적을 통하여서 무엇을 말하고 계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기적은 믿을 일이지 분석할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분석이 되어질 일이라면 기적일 수가 없습니다.

영에 일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분석 될 수 없는 일입니다.

 

피조물의 지혜로는 창조주가 하시는 일을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땅에선 하늘에 일은 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땅을 육이라고 하고, 하늘을 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늘에 속한 일을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는 모습이 이 땅에선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영이신 예수님 자체가 땅에선 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 속엔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세상에 오신 것이나,

처녀가 아이를 낳은 것이나,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것이나,

구름타고 승천하신 일이나,

장차 다시 오신다는 일 모두가 신비로운 기적에 속한 일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모든 일도 기적에 속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인간 입장에서 기적이지 예수님 입장에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육에 입장에선 영에 일이 기적으로 보이지만 영 입장에선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육적으로 이해를 하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영적으로 이해를 합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이상하게 보지 않는 것은 영에 속한 성도들의 눈에는 예수님은 신비한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보면 다 믿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이방인들 입장에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나 행동이나 모두가 이상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는 이런 존재다! 라는 것을 기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기적을 보았다고 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이다! 라는 것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다! 라는 것은 성령이 와야 믿을 수가 있어집니다.

 

애굽에 바로가 열 가지 재앙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믿어지는 믿음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열 가지 재앙은 기적들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애굽인에겐 그져 신기한 일일 뿐입니다.

지금도 이방인에겐 예수님의 일은 시기한 사건일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받은 신자들은 그 기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됩니다.

이게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고전 2:9절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로 난 자 이외는 예수님을 알 수 없도록 해 놓았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모두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만이 알아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세상엔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 자는 알아보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자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 자만 알 수 있는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 눈과 귀를 열어주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알아볼 재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기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육적으로만 이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일을 하여도 육에 속한 사람은 육적으로만 이해합니다.

 

이러한 우려가 지금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좇아내셨던 초월적인 사건을 가지고 마치 목사들이 인간의 병을 고쳐주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인 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이런 일을 행하였기 때문에 예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목사들도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고 기적을 일으킨 것 같이 하여야 된다고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종이라는 겁니다.

 

이런 사상이 교회 안에 자리 잡다가 보니 자연스럽게 교인들도 병을 잘 고치는 목사는 참된 주의 종이고 신령한 목사라고 생각을 합니다.

상대적으로 이런 일을 행하지 못하면 주의 종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이런 교인들은 보리떡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한 알의 겨자씨 같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이들에겐 가루 서 말 속에 들어 있는 누룩처럼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낯설어 보일 뿐입니다.

왜? 하나님은 저런 식으로 일을 하시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사람의 사고방식은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라 합니다.

그러니 전도도 능률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베드로가 한번 외칠 때 3천명이 회개하였듯이 그런 일들이 일어나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잠실 운동장에 수만 명이 모이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두세 사람 모여서 예수님 복음 이야기 하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죄인에게 있어 하나님다움은 능력 행함 입니다.

인간들이 아는 능력이란? 강함입니다.

무소불위의 힘을 말합니다.

이는 모두가 죄인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을 보리떡처럼 찢기시고 버림당함으로서 죄인을 살려내는 생명의 비밀을 모릅니다.

이들은 짐승의 구유에 생명의 밥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릅니다.

이들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죽어주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모릅니다.

 

죄인의 눈에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여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힘없는 실패로 여깁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들은 자기들 때문에 멸시 받는 메시야는 귀하게 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 53:1-6=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인간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모두가 자기 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추호도 자신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행세가 남루하고 초라하기 그지없기 때문입니다.

 

메시야 같은 사람이 죽었으면 애통해 주겠는데 이건 영 아니올시다! 입니다.

인간적으로 흠모 할 만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면 이해가 되겠는데 예수님에겐 흠모 할 만한 인간적 매력이 없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처럼 선종을 했다고 한다면 이해를 하겠는데, 이건 개죽음 당하셨으니 이해 될 리가 없지요.

아니 저런 사람이 무슨 메시야란 말인가?

당신이 메시야이면 난 메시야 아버지라고 조롱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과대망상증 환자가 괜히 잘난 척하다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혜자들이 그렇게 판단했어요.

그러니 일반 범인들이야 더 이상 달리 생각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세속적 가치로 보면 실패한 인생입니다.

육적 신자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다른 영광된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자리에 앉아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사고가 급기야는 교회도 초라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화려하게 짓게 되는 겁니다.

수백억씩 들여서 교회를 짓는 것은 왜곡된 하나님 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고가 성도들도 세상 적으로 성공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우러러 봄을 받는 자리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교회마다 성도가 세상에서 성공하여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교회마다 성도들을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라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탐욕이 가득한 자들이 이런 목사들의 성공 설교는 휘발유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부류들 속에 있게 되면 가난하고 실패하면 교회를 나오지 않게 됩니다.

급기야 창피해서 자기를 모르는 곳으로 교회를 옮깁니다.

 

이들은 세상에서의 실패가 곧 신앙의 실패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영적으로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신적 지혜를 받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도 육적 기적으로만 이해하게 되어 흉내를 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을 하나님의 일은 영적으로만 깨달을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고전 2:12-14=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받지 않은 자는 신령한 일에는 소경이라는 말입니다.

신령한 일이란? 영에 속한 일이란 말인데 영에 속하였다 함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말입니다.

 

성경은 세상을 육이라 하고 하나님나라를 영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세상 가치관으로 일을 하면 육적 일이 되고, 하늘에 가치관으로 일을 하면 영적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이라는 말은 신비스럽고 초월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육에 사람이다 영에 사람이다 라고 말할 때 그 기준은 세상 가치관에 사로잡힌 사람은 육에 사람이라고 하며, 하늘에 가치관에 사로잡힌 사람은 영에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늘에 가치관으로 사로잡혔다 함은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예수님과 같은 사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출세지향주의 성공지향주의와 같은 일을 꿈꾸지 않습니다.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고 그러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마다 분복을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잘 사는 분복을 주셨고,

어떤 사람은 못 사는 분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잘살고 못 살고가 좋고 나쁨이 아닙니다.

거지 나사로는 거지로 사는 분복을 받은 것이고, 부자는 부자로 사는 분복을 받은 것입니다.

다만 그 속에서 어떤 가치관과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부자가 부에 도취되어 하늘나라를 잊고 산다면 그 사람에게 부자라는 것은 독약과 같은 것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거지가 되어서 하늘나라에 소망을 품고 현실에 삶을 낙심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 거지의 삶이 오히려 그 사람에게는 천국으로 인도하는 양약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거지가 거지신세만 한탄하고 부한 자들을 부러워하며 일평생을 산다면 그 거지는 두 번 죽는 것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부자가 부에 도취됨이 없이 항상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산다면 그는 천국에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겐 부자냐! 가난하냐! 라는 것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데에는 전혀 지장을 주지 못합니다.

천국 가는데 지장이 없다면 그것 때문에 울고불고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겁니다.

물론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아픔은 있겠지요.

그러나 그 아픔도 믿음으로 받으면 이겨내지 못하는 그리 어려울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란?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고 인생을 주님께 맡기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지라 해서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은 천국이 유업으로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세상에서 거지라는 역할을 맡긴 것뿐입니다. 

거지라는 역할을 잘하고 드라마가 끝나면 모두가 동등합니다.


천국에선 목사나 성도나 차이가 없어요.

목사나 성도는 이 세상에서 짐시 맡겨진 배역입니다.

그러니 불평하지 말고 맡은 배역만 충실하게 하면 됩니다.

남에 배역을 부러워 할 이유가 없어요.

 

그러므로 나사로는 거지 생활하면서도 낙심하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영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세상 것으로 일희일비하지를 않습니다.

또한 이렇게 영에 속한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일하신 모든 기적적인 사건들을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육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맞본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풍랑이 거세게 일어나는 밤바다 위를 예수님이 걸어서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로 가셔서 바다를 잠잠케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이 사건 역시도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계시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생명의 떡으로 오셨다는 것을 계시하신 기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난 후 자신은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그 속에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곤 오늘 본문의 바다 위를 걷고 풍랑을 잔잔케 하신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잠잠케 하신 것은 예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다를 이 세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와 같은 사건이 있습니다.

 

눅 8:22-25=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 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제자들이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이 순종하는고” 입니다.

 

바람이나 바닷물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바람과 물이 제자들에게 말하고 잇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고 너희들 주인이라고!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곧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말은 예수그리스도가 세상의 주인이고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主) 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주인이고 다스리시는 심판자라는 것을 안다면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이냐를 아느냐? 모르느냐? 에 따라서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졸로 보이면 졸로 대할 것이고 왕으로 보이면 왕으로 대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랬어요.

누구든지 나를 존중히 여기면 나도 그를 존중히 여기고 누구든지 나를 멸시하면 나도 그를 멸시한다고 했어요.

각자가 아는 대로 예수님을 섬기게 되어 있어요.

 

주일 날 예수님이 왕이면 친구 만나는 것보다 예수님 만나러 올 것이고, 예수님이 졸로 보이면 자기 볼일 보러 다닐 것입니다.

어쩌겠어요.

교회가 천국인줄 알면 교회로 올 것이고, 세상이 천국으로 보이면 세상으로 가겠지요.

결국 자기 믿음으로 살다가 가는 겁니다.

 

기적은 예수님을 계시하는 것이지 우리더러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그리스도가 바다 위를 걷는 사건을 가지고 자신들이 삶에 기적으로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셨기 때문에 성도들도 바다 위를 걸어야 된다고 하는 식의 가르치는 것은 비 신앙입니다.

 

본문은 성도들에게 기적을 일으키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가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기록된 참고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시냐! 를 증거하고자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걷고 풍랑을 잠잠케 하심으로 나는 창조주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하늘에 지혜가 없는 육에 속한 자들은 예수님은 내 삶에 환란을 잠잠케 해주시는 분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성경을 자기 유익되는 쪽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물론 성도가 믿음으로 살아가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예수님께서 도와주실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도와주심은 내가 너를 돕는 자이니 앞으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낙망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앞으로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계속하여 도와주겠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다는 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고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낙심하게 됩니다.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상황임에도 믿어야 참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 믿음을 달아보시기 위해 때로는 어려운 환경 속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 같이 하나님께 기적을 요구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왜? 나를 외면하느냐고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할 것이요 물결이 너를 엄몰치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야곱을 불 가운데로 물 가운데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이건 환란을 말합니다.

 

불같은 시험과 물 같은 시험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그랬지요.

불같은 시험을 당하거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지명하여 불렀다는 것은 그런 시험이 닥친다 하여도 너는 실패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불에 태워지고 물에 잠겨 실패하여야 함에도 실패하지 않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너는 내 것이니 어떤 상황에서도 안심하라는 말입니다.

이게 야곱과 같은 성도에게 주신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조롱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한번 내려와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기적으로 증명을 해보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조롱을 다 당하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귀싸대기 한 대 후려 패면서 봐라! 내가 하나님 아들이다! 이제 믿겠느냐! 라고 하고 다시 십자가에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조차도 외면하고 어두움이 엄습해 올지라도 아버지께 영혼을 맡기는 것이 예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망해서 영광을 받을 때도 있고, 흥해서 영광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나무에 잎사귀가 무성할 때는 잎사귀가 무성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잎사귀가 형형색색으로 낙엽이 들어 떨어질 때는 떨어지는 것이 아름다움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세상의 주인임을 알리기 위해서는 물 위를 걸으시고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기적을 행한 것도 영광이 되지만, 자기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 가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다가 어떠한 형편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며 범사에 감사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무조건 고난 받아야 된다는 것도 잘못이고, 또 성공해야 한다는 것도 잘못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선악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생명의 관점에서 보십시오.

선악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잘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못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햇빛이 찬란한 날도 있고 태풍이 몰아치는 때도 있습니다.

햇빛도 생명을 자라게 하는데 필요하지만 비바람과 태풍도 생명의 자람에 필요합니다.

 

어린아이가 자라가면서 병치레를 하면서 병에 대한 면역력을 높여 가듯이 병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도리어 병을 통하여서 병을 이겨내게 하는 능력을 배양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병도 생명의 자람에 있어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성도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기 때문에 성공도 영광이고 실패도 영광입니다.

성도가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믿음으로 살 때 영광을 받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생명으로 믿음으로 살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받은 성도는 사나 죽으나 모든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엄청난 기적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우리가 살아 숨 쉬고 하루하루 굶지 않고 사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임에도 모릅니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들이 이만큼이라도 사는 것이 하나님의 기적임을 모릅니다.

감사거리를 찾지 마세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잘 되는 것만 하나님의 은혜이고 나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님이 아닙니다.

순풍이든 역풍이든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모든 것이 감사한 것인데도 우리는 좋고 나쁜 것으로 갈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저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오로지 자기 육신의 유익으로 판단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가난케 하셔서 영광이 된다면 가난으로 몰아 갈 것이고, 흥해서 영광이 된다면 흥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예수그리스도가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성도는 오늘 본문을 가지고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기적 베푸는 분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아! 저 분이야 말로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런 분이 지금 내가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데 나와 함께 하고 있구나! 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먼저 알고 거기에 맞게 대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누구를 대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를 알아주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이 세상을 다스릴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거기에 걸 맞는 대접을 하여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이 왕 인줄 알면 왕에 대한 대접을 하게 될 것이고, 종 인줄 알면 종으로 대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왕인 줄 아는 자는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을 삶에 최우선에 두고 살아갈 것이지만,

예수를 하찮은 존재로 보는 사람은 항상 자기의 삶을 우선시 하게 되고 예수를 따르는 일은 뒷전으로 밀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열심히 모이려고 할 것이고,

예수그리스도를 사랑치 않는 자들은 모이기를 싫어할 것입니다.

결국 성도의 신앙생활이란? 자기의 앎과 믿음에 따라서 신앙의 열심이 결정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알아달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눈이 있는 자는 볼 것이며, 귀가 있는 자는 들을 것입니다.

각자가 보고들은 대로 예수를 믿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 본문을 통하여 깨달아야 할 중요한 것은 기적의 떡을 먹어도 환란은 닥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기적의 떡을 먹었다고 하여서 세상에서 환란이 비켜 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기적을 체험한 것과 환란을 겪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오해하기를 믿음이 좋으면 환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는 믿음이 좋을수록 환란이 많이 닥친다는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은 직접 기적을 행하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엄청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12 제자나 바울 역시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엄청난 고난을 당하다 결국 죽임 당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면 고난도 없고 행복한 삶만 기다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 성경적입니다.

신앙생활을 이 세상에서 안락을 꿈꾸고자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성도에게 세상에서의 평안한 삶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성도들에게 많은 환란을 겪을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행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평안에 처하든지 곤고에 처하든지 모두가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선을 이룬다는 말은 믿음이 견고해진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믿음에 유익한 것이란 뜻입니다.

 

인간은 타고난 본성이 고난을 싫어합니다.

이는 죄의 삯으로 사망이라는 고난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본성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유전적으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능적으로 고난을 피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고난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 죄의 종 아래 갇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고난을 피하고자 신앙을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타고난 죄성이 편해지려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이용하고자 하는 미혹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죄인임을 알면 고난은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로 받은 자들은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는 다른 말로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환경의 좋고 나쁨으로 울고 웃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겁니다.

 

고난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로서 인간적인 솔직한 바램은 저 자신이나 성도들에게도 고난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 우리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같은 운명에 동참 한 자들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 자에겐 좋은 환경도 나쁜 환경도 없습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있을 뿐입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바울과 실라처럼 매 맞고 감옥에 갇혀 온몸이 착고에 채움을 당하여 옴짝달싹 못한다 할지라도 찬송과 기도를 하게 됩니다.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바울 같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환경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그 환경 속에서도 이겨내게 하십니다.

도무지 앞이 안 보이는 터널 속과 같은 환경 속에서도 믿음이 걸어 나오게 하십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가시다가 예수님은 곤하여 배에 고물을 베고 주무시는데 갑자가 풍랑이 일어나 배에 물이 들어와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은 사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혼비백산한 제자들은 서로 배에 들어온 물을 퍼낸다고 법석을 떨다가 자기들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 할 수가 없어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러자 잠에서 깨어나신 주님은 미안한 마음은 조금도 없으시면서 하시는 말이 제자들의 수고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왜?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책망 속에는 너희들이 진정 나와 함께 동행한다는 사실을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죽겠다고 난리를 피울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잘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나와 함께 가면서도 나를 믿는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을 달아보시려고 일부러 풍랑이 이는 배에 주무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에게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뜻하지 않는 풍랑을 만나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호들갑을 떨지 마시고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려니 하고 받아들이십시오.

모든 환경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믿음이 그렇게 인도해 나가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믿음이 그렇게 간섭해 오셨는데도 우리가 단지 미련해서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지금이라도 믿음에 눈으로 여러분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간섭 아닌 것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2천 년 전 갈릴리 바다 위를 거닐던 그 예수님이 지금 저와 여러분이 걸어가는 인생 여정에 함께 걷고 계십니다.

엠마로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도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지금 여러분과 동행하고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하고 잇지는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프카니스탄에 선교하려고 가지 마시고,

지금 여러분과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을 보십시오.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 주려고 하지 마시고, 날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꼭 못난 자식이 출세해서 부모님께 효도한다고 벼르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은 출세 할 동안을 기다려주지 않고 죽어요.

그러니 출세하지 못하더라도 지금 효도하세요.

효도를 돈으로 하려고 하지 마세요.

효도는 돈이 아니고 마음입니다.

범사에 부모님께 감사하면 됩니다.

 

하나님께 출세해서 영광 돌리려고 하지 마세요.

탕자가 출세해서 아버지 앞에 떳떳하게 서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불효막심한 짓입니다.

다 털어 먹었더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버지께 효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육신의 부모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엔 내일이 없습니다.

내일은 우리 날이 아닙니다.

안개 같은 인생이 앞날을 예견한다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니 지금 믿어지는 것으로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이 없더라도 지금 살아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하세요.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믿어진다는 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는 것만큼 더 큰 신앙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감사하지 아니할 것이 없습니다.

 

시편기자가 한 감사 기도를 보세요.

 

시 136: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3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4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5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6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7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8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9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0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1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2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3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4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5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6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7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8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9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0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1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2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3 우리를 비천한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4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5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6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선별해서 감사거리를 찾지 마세요.

감사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아프십니까?

아프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사업에 실패했습니까?

실패케 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곤란을 겪고 계십니까?

곤란을 겪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주께서 내 전후(前後)를 두루시고 나를 안위하시고 계십니다.

풍랑이 보입니까?

풍랑 속에 다가오시는 주님을 보십시오.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가 없는 운명입니다.

풍랑 이는 바다에 왜?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까?

 

“내니 두려워 말라!” 고 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풍랑이 일어도 배는 가고자 하는 곳에 반드시 이르게 된 것입니다.

죽음에 세력이 맹위를 떨치고 여러분을 협박합니까?

두려워 마십시오.

예수님의 피가 넉넉히 이기십니다.

 

죽음조차도 예수님을 가둘 수가 없어서 토해 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과 함께 토해냄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 예수님의 생명이 지금 우리 속에서 꿈틀 거리고 있습니다.

 

풍랑을 보지 마시고 풍랑을 꾸짖는 주님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꺼꾸러뜨리려고 우겨싸고 있는 세력에게 말씀 하십니다.

누구야!

어떤 놈이야!

떼끼! 이놈!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만유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믿어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들이 우리를 우겨싼다 할지라도 그 배후에 계시는 주님을 보게 하옵소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린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넉넉히 세상을 이기게 하여 주실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믿음으로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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