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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33강. 소돔 고모라의 죄 (창 19:1-12)

by coroa 2021. 3. 26.

 

♣ -.33강. 소돔 고모라의 죄 (창 19:1-12).-

-.정낙원 목사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경고의 말씀이기도 하고 위로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소돔 고모라는 하나님께 유황불 심판을 받은 곳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를 멸망하신 것은 후세의 경건치 못한 사람들에게 본으로 보여주시려고 하신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곧 이 세상은 소돔 고모라와 같이 멸망을 받아야 하는 곳이란 뜻입니다.

이건 우리에게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멸망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을 해내신다는 소망도 있습니다.

 

롯의 구원은 곧 우리의 구원과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롯을 구원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위로를 받아야지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고아입니다.

고아란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멸망 속에서 지켜줄 사람이 없으면 그냥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를 지켜주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께서 이루어 주세요.

왜냐하면 자기 피 값으로 샀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지키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구원을 해주신 예수님께서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로를 삼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소돔 고모라 같은 세상 속에서도 자기 백성들은 반드시 찾아 가서 건져내시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희망입니다.

 

오늘은 소돔 고모라를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현실이 어떠한지를 살펴볼까 합니다.

우리는 소돔 고모라의 죄악된 모습이 지금 이 시대와 어떻게 동일한지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안목에서 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봅시다.

 

1절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날이 저물 때 두 천사가 롯을 찾아갑니다.

앞선 창세기 18장에서 세 천사가 아브라함을 갔습니다.

그런데 소돔 고모라에는 두 천사가 갑니다.

 

왜? 아브라함에게는 세 천사가 찾아 가고 롯에게는 두 천사가 찾아 갈까요?

왜 그럴까요?

두 천사와 세 천사의 의미를 아셔야 합니다.

 

세 천사가 아브라함을 찾아 갈 때는 생명을 주기 위해서 갑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때는 항상 세 천사가 갑니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일을 하실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을 주기 위해서는 세 천사가 찾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천사는 심판을 단행할 때 찾아 갑니다.

여리고 성의 멸망 소식을 알리러 갈 때도 두 천사가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둘 씩 파송을 하지요.

그것은 심판을 알리는 것입니다.

 

두 천사가 심판을 알리러 가는 그 때를 일컬어 종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 씩 둘 씩 파송을 한 것은 그들을 맞이하는 동네는 곧 종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파송되어 가는 자체가 종말을 뜻하는 것입니다.

 

종말이 되면 갈라지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지고 곡식과 가라지가 갈라지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낼 때는 그 자체가 세상에서 자기 백성들을 갈라내기 위한 종말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낸 것은 종말 사건입니다.

이 세상 속에 있는 자기 백성과 아닌 자들을 갈라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오신 것을 일컬어 ‘종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이 세상은 종말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내가 간 그대로 다시 온다고 하셨지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종망 모드가 돌입 된 것입니다.

이걸 종말론적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 시대를 일컬어 ‘종말론적’ 이라고 합니다.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종말의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기러한 삶을 종말론적 삶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잖아요.

그러니 항상 종말이라고 살아야 해요.

그런데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게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종말입니다.

 

두 종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끝나는 역사적인 종말이 있고,

우리가 죽는 개인 종말이 있습니다.

역사의 종말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잃어나지만,

개인 종말은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야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종말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일어나지만 우리 개인의 종말도 있는 것입니다.

개인 종말은 아무도 몰라요.

자다가 죽을 수도 있어요.

밤 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입니다.

아니면 오늘 예배드리고 집으로 가다가 사고 나서 죽을 수도 있어요.

그건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깨어 있으라는 것은 항상 주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면서 살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복음은 우리에게 다가오면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를 소망하게 합니다.

성령이 오면 늙은이들이 꿈을 꾼다고 하지요.

늙은이에게 무슨 꿈이 있나요?

회춘하는 꿈인가요?

아니에요.

 

천국에 가는 꿈이에요.

성령이 임하면 천국에 대한 꿈을 주어요.

마치 소풍날 기다리는 어린 아이와 같아져요.

이게 올바로 성령 받은 성도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천국을 소망하는가요?

아니에요.

천국은 동화 속 이야기이고 이 땅에 천국을 좇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마라나타 신앙이 전부 사라져 버렸습니다.

왜요?

땅의 것에 매몰되었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서 땅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해서 비유를 하시는데 그 비유가 참 재밌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감람산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봅니다.

그 때 제자들이 성전을 바라보면서 자랑을 합니다.

 

예수님 저 성전 참 멋있지요?

그도 그럴 것이 돔을 황금으로 입히고 했으니 보기에 멋있었겠지요.

제자들은 화려한 성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성전의 돌 하나에 돌 하나도 얹히지 않고 완전히 파괴된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눈에는 껍데기를 보고 자랑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껍데기를 보지 않고 속을 보았어요.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신앙을 외식 신앙이라고 했어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셨어요.

이는 관념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해 보세요.

예수님 초림은 재림의 모형이에요.

영적 상태가 초림 때와 같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신앙이 전부 외식신앙이에요.

교회가 껍데기는 수백억 원씩 들여서 화려하게 해 놓았어요.

근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예수가 없어요.

복음이 없어요.

 

교회마다 껍데기 지창하기 경쟁이에요.

교인들도 자기 잘남을 자랑하기에 바빠요.

기껏 자랑한다는 것이 세상 것이에요.

나 출세 했다, 나 부자 됐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곡간마다 차고 넘치는데 전부 세상 것이고 불타 버릴 것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이 자랑하는 성전을 헐어버리는 것입니다.

헐어야 붙잡지 않아요.

그래서 복음은 먼저 기존에 것을 허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치 재개발하듯이 불도저로 밀고 새로운 집을 짓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오심을 종말이라고 합니다.

종말은 추수하는 때입니다.

종말에는 열매를 추수하는데 열매를 추수할 때는 나무의 잎이 다 떨어져야 합니다.

잎사귀가 푸르러 있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형식적인 신앙은 다 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고 속사람이 단장 되어야 해요.

신앙의 연조를 자랑 할 것이 아니고 속사람이 예수그리스가 되어 있어야 해요.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은혜가 너무도 크고 고마워서 마리아처럼 자기의 모든 가치를 예수님의 발 아래 내려놓아야 해요.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하늘을 몰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 땅에 것을 자랑치 않아요.

예수를 자랑하고 주께 받은 은혜를 자랑하고 하늘나라를 소망하게 되어 있어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지요.

믿음이 보지 못한 그 세계를 자꾸 지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믿음이 자꾸만 그 곳을 사모하게 하세요.

이게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간섭을 하세요.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에게는 반드시 이런 현상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억지가 아니고 뭔가 끌어당김이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이 없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종교생활 하듯이 해요.

자기 가치 챙기는 식으로 하게 됩니다.

복음조차도 땅의 것을 추구하는 쪽으로 이용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참과 거짓을 갈라내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하셨습니다.

어떤 밭에다가 곡식을 심었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까 원수들이 밭에 가라지를 심어 버렸습니다.

종들이 와서 보니까 가라지가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가라지를 뽑을까요? 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던가요?

뽑지 말고 추수 때까지 가만 두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이 다칠까봐서라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교회 안에 하나님의 백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짜도 있습니다.

마귀가 가짜들을 심어 놓은 것입니다.

가짜들이 진짜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종들은 알아요.

진짠지 가짠지 안단 말입니다.

그래서 뽑을까요? 했는데 뽑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그런 구조를 만들어 놓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훈련케 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를 취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두 부류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두 부류가 섞여 있는 것은 곧 세상과 같은 겁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교회로 축소시켜 놓은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를 광의적으로 생각하면 세상이 되고 이것을 축약하면 교회가 되어요.

 

이사야 1장에 보면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이상을 보여 줍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이란? 교회와 같아요.그런데 하나님이 이들을 짐승만도 못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몰라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소돔 고모라 백성과 같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가리켜 소돔 고모라라고 많이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소돔 고모라 사건을 광의적인 입장에서 세상으로만 보지 마시고 축약해서 교회로 보잔 말입니다.

교회 안에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보아야 한단 말입니다.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소돔고모라에 보낸 목적이 무엇인가요?

소돔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그 속에서 롯을 구원하기 위함입니까?

자기 백성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멸망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천사를 보낼 필요가 없어요.

그냥 멸망시키면 되니까요.

 

여리고성 멸망 사건도 같아요.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멸망 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으면 천사를 보낼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멸망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두 천사를 보낸 것은 라합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실제로 두 천사는 라합에게만 구원 소식을 알려주고 왔어요.

여리고의 군사력을 정탐하러 간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리고에 가서 라합만 만나고 온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에 간 천사도 만찬가지에요.

롯에게 멸망 소식을 알리고 구원해 냈어요.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보내서 멸망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여기가 지옥이에요.

창세기 1장 2절과 같아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중에 있는 지옥이에요.

이 속에 빛이 있는 겁니다.

마치 타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롯이 있는 것과 같아요.

 

흑암 속에서 빛을 불러내지요.

이게 구원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이 지옥인데 이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창세전에 기록을 한 어린 양의 생명책을 주시면서 여기에 적힌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늘로 데리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생명책에 녹명된 사람들을 찾아 가서 구원을 해 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 된 자들을 하늘로 데리고 가요.

지옥 속에서 천국 백성 만 쏙 빼내 가는 거에요.

그럼 이 세상은 그대로 지옥인 겁니다.

 

이걸 예수님의 초림 이야기로 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마지막 때에 오셨어요.

어디에 오셨는고 하니 구약 교회에 오셨어요.

 

구약 교회가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인 겁니다.

강도의 굴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건 지옥과 같아요.

그 속에 자기 백성들이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약 교회 속에서 빼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예수님은 다 찾아내세요.

기어이 구원을 해 내세요.

시편 기자는 하늘에 올라가 별과 별 사이에 깃들어 있어도 찾아내고 바다 깊은 곳에 있다 할지라도 찾아내신다고 하셨어요.

 

롯이 어디에 있나요.

지옥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찾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엊그제 어떤 분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런 전화를 받으며 속이 상하고 안타깝습니다.

이 분은 자칭 복음을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갈 교회가 없어서 교회에 안 다닌다고 하는 겁니다.

주일 날 등산 다니고 집에서 논다고 합니다.

 

그것이 마치 복음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래서 가까운 교회라도 가시지요 그랬더니 하는 말이 복음 전하는 교회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당신이 복음을 소유한 빛이라고 한다면 복음을 모르는 어둠의 교회를 가야할 것 아니냐,

가서 복음은 이런 것입니다,

이게 빛에 속한 것입니다 라고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라고 책망을 했어요.

 

여러분 신앙생활이 뭔가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성경 속에서 찾아 보세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살았나요?

사도들이 어디에서 복음을 전했나요?

구약 교회에요.

 

구약 교회는 복음을 몰라요.

속된 말로 복음을 안 전해요.

그래서 복음을 받은 사도들이 가서 이게 복음입니다 라고 전했어요.

사도행전을 보세요.

바울은 어디든지 가면 제일먼저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어요.

회당은 유대교인들이 모인 곳이에요.

 

예수님이 구약 교회에서 사도들을 불러냈어요.

그리고 복음을 주고서 구약 교회로 보냈어요.

왜냐하면 그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율법 아래 있던 자를 은혜 안으로 불러내고서는 다시 율법 안으로 보내잖아요.

 

바울은 율법 교회에 가서 예수를 증거했어요.

그러니 나 복음 아는데 복음 전하는 교회가 없어서 안 간다는 것은 틀린 겁니다.

이 사람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거에요.

마치 복음 아는 것이 신앙인 줄 알고 있어요.

분명히 말합니다.

복음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복음과 함께 고난 받으면서 사는 것이 신앙이에요.

 

복음을 아니까 가야지요.

가서 복음을 전해야지요.

가서 선생 노릇하려고 하지 말고 섬기세요.

잘난척 선생 노릇 하니까 싫어하는 것입니다.

가서 섬겨 보세요.

섬기다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만나게 해 주세요.

 

그런데 섬기기는 싫고 잘난 척은 하고 싶고,,

그러니 복음 안다고 하면서 깡패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 아는 척 하면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는 마귀 짓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좋아 하겠어요.

 

빛은 어둠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 자체가 어둠이기 때문에 빛이신 예수님을 보낸 것입니다.

이 세상이 빛일 것 같으면 예수님이 빛으로 오실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안가는 겁니다.

교회에 가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에요.

복음으로 자기 게으름을 합리화 하려는 겁니다.

전 이런 사람들을 보면 차라리 복음을 몰랐으면 좋았을 뻔 하였다고 해요.

왜냐하면 복음으로 복음을 가리는 짓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9장을 봅시다.

 

계 9:1-11절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2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3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4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7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8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 9 또 철흉갑 같은 흉갑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10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11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까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별이 하나가 있습니다.

별은 하늘에 있어야 해요.

그런데 땅에 떨어 졌어요.

 

별은 땅에 떨어 질 수가 없어요.

땅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원래 땅에 있어야 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이건 자기 자리로 보낸 것이에요.

 

이게 요한계시록 12장에 가면 잘 나타나요.

용이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납니다.

철창으로 만국을 다스릴 아이가 하늘로 올라가서 용을 땅을 쫓아 낸 것입니다.

 

용을 일컬어 옛 뱀 마귀 사단이라고 합니다.

뱀은 하늘에 있으면 안 되어요.

땅에 있어야 해요.

하나님이 뱀을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냈어요.

그러니 뱀이 살 곳은 이 땅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놈이 하늘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야~! 이 놈아! 네가 있을 곳은 지옥인데 왜? 하늘에 있느냐 라고 하면서 쫓아 낸 것입니다.

이건 원래의 자리로 내려 보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이야기는 어느 시대 특정한 때에만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 교회 시대에 다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특히 종말이 되면 이런 일들이 극명하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걸 교회 안에 신자들 이야기로 해 봅니다.

교회 안에는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어요.

누가 진짜인지 누가 가짜인지 몰라요.

 

복음을 툭 던져 보면 반응들이 다르게 나타나요.

진짜는 복음이 담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가짜는 복음에 반하는 모습을 드러내요.

그러니까 진짜들은 복음을 받으면 자기 몸을 불태우면서 섬겨요.

그러나 가짜들은 복음을 자기 편한 쪽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 안다고 하면서 교회에 가지 않고 빈둥거리면서 게으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음이 넌 가짜라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율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러다가 때가 차매 복음으로 은혜 아래로 옮겨졌어요.

진짜 신자들은 복음의 고마워서 은혜 아래에서도 율법 아래서 행하던 것처럼 행해요.

과거에는 종으로 행하였지만 이제는 아들로서 감사함으로 행해요.

 

그런데 가짜들은 율법 아래 있을 땐 하는 척 하다가 복음을 알고는 안 해요.

달란트 비유에서 악한 종처럼 받은 달란트를 땅이 묻어 두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입니다.

주인이 있을 때 하는 척 하다가 주인이 없다고 생각하니 안하는 것입니다.

이게 마귀 아래 있는 자들의 특징이에요.

 

진짜 신자가 나중에 타락을 한다 그런 건 없습니다.

원래 가짜이기 때문에 타락으로 자기의 본질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복음으로 더 감사의 자리로 나아가고 어떤 자들은 복음으로 게으르고 악한 종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원래 하늘에 떠 있어야 할 별이라면 땅에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늘에 속한 별이 아니란 말입니다.

별 행세를 한 것입니다.

이게 마귀의 세력입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염소를 갈고 닦으면 양이 되는 그런 건 없습니다.

양은 애초부터 양이고 염소는 애초부터 염소입니다.

염소가 백일 기도해서 양이 되는 게 아닙니다.

양은 양이고 염소는 염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아닌 자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아닌 자가 진짜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음을 가지고 넌 아니거든 하고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게 하여서 갈라내는 일들을 하시는 겁니다.

 

야곱과 에서 이야기로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장자를 구원합니다.

야곱은 하늘에 장자이고 에서는 땅에 장자에요.

 

그런데 에서가 장자로 태어나고 야곱은 차자로 태어났어요.

하나님이 누가 하늘에 장자인지 구별해 냅니다.

어떻게 구별해 내는가 하면 하늘에 떡과 땅에 떡으로 구별을 해 내는 겁니다.

 

땅에 떡을 툭 던져 보니까 에서는 장자권을 버리고 떡을 덥석 덥석 물었고,

야곱은 떡을 버리고 장자권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에서는 땅에 떡을 좇아갔고 야곱은 하늘에 장자를 좇아갔어요.

결국 떡 앞에서 자기 정체성이 드러난 것입니다.

 

떡을 복음이라고 봅시다.

그럼 복음을 던져 보면 자기 정체성이 드러나겠지요.

어떤 사람은 복음에 합당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어떤 사람은 반 복음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겠지요.

 

다시 계시록 9장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무저갱을 여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하나 있습니다.

무저갱은 다른 말로 지옥의 문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렇게 무저갱을 여니까 연기 같은 것이 온 세상을 가리는 겁니다.

거기에서 황충들이 일어나는데 이 황충들을 다른 말로 거짓 선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거짓 선지자들을 쓰는데 어떤 식으로 쓰는가 하면 4절을 보세요.

 

4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 황충을 풀었는데 황충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자들을 추수하기 위해 풀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해돋는 데서 와서 자기 백성들을 인치는 작업을 합니다.

 

또 묻습니다.

어느 백성에게 인을 친다고 하나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은 반드시 인을 치신단 말입니다.

내 소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귀를 풀어서 심판을 할 때 내 소유는 손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절대 해하지 못하게 한다니까요.

 

이 황충들이 인 맞지 않은 자들을 해하는 겁니다.

이마에 인 맞은 자들의 특징이 뭡니까?

 

4절을 다시 봅시다

 

4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인을 맞은 사람들은 ‘푸르다’ 수목이다’ 이 말은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마른 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 맞은 사람들이니까 그런 자들은 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에 황충이 나타나서 일하는 것은 누구를 추수하기 위함입니까?

인 맞지 않은 자들이지요?

마른 풀입니다.

푸른 풀이나 수목의 반대말이 뭡니까?

마른 풀이나 마른 나무가 되겠지요.

죽은 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추수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짓 선지자들이 어떤 모습인가 하면 7절 이하를 보세요.

 

7-8=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8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

 

이들을 지금식으로 해석을 하면 거짓 복음을 가진 자들은 스스로 자신은 구원 얻은 자로 금 면류관 비슷한 것까지 쓰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다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짓은 사람 모양으로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항상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여자의 머리털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세상의 영광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영광을 차지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들의 이빨은 사람들을 씹어 삼킬 것 같은 아주 잔인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9절에 뭐라고 합니까?

 

9절 “또 철흉갑 같은 흉갑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복음을 가지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지 않고 비판과 정죄와 죽이는 일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 많이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보면 그 복음 안다는 것을 가지고 스스로 자만하고 교만하고 스스로 으뜸 되어서 자랑하고 있잖아요.

이게 결국 자기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들을 합니다.

 

11절에 보세요.

 

11절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아불루온’이라는 이 말은 ‘파괴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받으면 그 복음을 가지고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신앙을 낭패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란 말입니다.

 

그럼 소돔 고모라를 통해서 거짓 선지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일어나는지 살펴봅시다.

 

소돔 고모라가 어떤 곳입니까?

‘소돔’ 이라는 말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라는 뜻입니다.

어느 개그 프로에 나온 말처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입니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처럼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모습입니다.

어떻게 보면 신자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해요.

 

‘고모라’는 ‘물이 많다’는 뜻입니다.

물은 말씀을 상징하기도 하고 사상을 말하기도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합하면 분명하지 않은 물이 많다는 뜻입니다.

이는 뱀의 물로서 혼합주의 비진리를 말합니다.

 

타락이란? 두 물이 합하는 겁니다.

하늘에 말과 땅에 말이 혼합하는 것입니다.

이걸 홍수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 혼합주의 사상이 홍수처럼 밀려들고 있어요.

 

혼합주의가 뭐냐?

인본과 신본이 섞이는 겁니다.

갈라디안 신앙입니다.

믿음에다가 행위를 섞는 겁니다.

이 시대 알미니안 신앙이에요.

 

이게 교회 안에 진리처럼 회자 되고 있어요.

이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하나님의 뜻을 지켜내야 한다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목숨 걸고 지켜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고 해요.

 

어제 어떤 분이 전화를 해서 666표가 베리칩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 분은 자칭 복음을 안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되물었어요.

베리칩이 666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한데요.

그럼 받지 마세요.

그러자 그 분이 그거 안 받으면 먹고 살지 못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해요.

그럼 굶어야지요.

그랬더니 짜증을 내는 겁니다.

 

666이 뭐라고 합니까?

매매수단이라고 하잖아요.

666표가 없으면 사람이 먹고 마시고 사고파는 일들을 금지하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받아야 합니까?

안 받아야 합니까?

 

이건 간단해요.

떡에 가치로 사는 사람은 받고,

말씀에 가치로 사는 사람은 안 받아요.

 

하나님이 왜 짐승에게 666표를 허락했을까요?

짐승이 666을 가지고 뭘 하는지 보면 알 수 있어요.

 

계시록 13장 8절을 보세요.

 

계 13:8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누가 짐승에게 경배 하나요?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은 땅에 거하는 자들이지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짐승에게 경배를 안 하지요.

 

짐승이 666표를 누구에게 주나요.

땅에 거하는 자들이에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은 땅에 거하는 자들이지요.

 

땅의 짐승이 왜 필요하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은 땅에 거하는 자들을 추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겁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왜? 필요한가 하면 진리에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을 추수하기 위함이에요.

 

계속해서 13장 11절과 14절을 보세요.

 

계 13:11절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계 13:14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은 짐승에게 경배하지요.

짐승이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지요?

누기 미혹 당하는가요?

땅에 거하는 자들이에요.

 

거짓 종들이 일어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땅에 거하는 자들을 추수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짓 종들을 일으키는 것은 교회 안에 땅에 거하는 자들을 추수하기 위함입니다.

 

분명히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666을 안 받게 해요.

하나님의 백성은 안 받게 하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이게 안 기쁘다 지금…

내가 안 받아야지 폼 나고 자랑스러운데 말이죠.

알미니안 주의자들처럼 내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안 받아야 뿌듯한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안 빋게 해 준다고 하니까 즐겁지가 않은 겁니다.

 

알미니안 신앙을 가진 자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심판을 피 할 수 있을까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666를 받지 맙시다.

심판을 피합시다, 목소리 높이는 겁니다.

겉으로 들으면 엄청 신앙이 좋은 것처럼 들려요.

야 대단하다!

어쩜 저렇게 신앙이 좋으냐!

 

그런데 성경은 이걸 신앙이라고 하지 않아요.

성경은 우리더러 심판을 피하라고 하지 않아요.

우린 심판을 피 할 수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피하게 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우린 666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어찌 안 받겠어요.

그런데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사람들은 안 받게 해 주세요.

이걸 믿으세요.

 

이게 안 믿어지면 호들갑을 떨어요.

신앙은 호들갑 떠는 게 아니에요.

호들갑을 떤다는 것은 뭔가 수상해요.

호들갑 떤다고 해서 믿어지지 않아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믿어져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666표를 안 받는다니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세요.

 

이걸 오늘 본문 식으로 해석해 봅시다.

 

지난 시간에 천사가 아브라함을 찾아 와서 소돔 고모라의 멸망 소식을 전해 줬을 때 아브라함이 기도를 합니다.

아브라함이 누구를 위해서 기도했나요?

소돔 고모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입니까?

롯을 위해서 입니까?

오직 자기 조카 롯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롯을 찾아 간 것입니다.

 

‘조카’가 무슨 뜻이라고 했나요?

‘권속’이라는 뜻으로 쉬운 말로 ‘자기 피붙이’라는 말입니다.

누구 피붙이입니까?아브라함의 피 붙이에요.

아브라함의 피붙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기도한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 붙이들은 어린 양이 지켜주세요.

어린 양이 빼내 주세요.

왜냐하면 자기 피붙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피로 낳은 자들이기 때문이에요.

 

롯이 소돔 고모라에서 살아난 것은 자기 능력 때문입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입니까?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이지요.

아브라함은 예수를 상징한다고 했지요?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자기 백성을 지켜 주세요.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 같은 이 세상을 불 심판으로 다스려야 하는데,

거기에 예수님의 새끼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죄악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천사를 보내서 롯처럼 소돔 고모라 성으로부터 빼내심을 입게 하는 것입니다.

롯은 자기가 노력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만히 있는데 천사들이 찾아 와서 빼내준 것입니다.

 

롯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이 뭡니까?

소돔 고모라 사람들같이 타락된 모습으로 살지 않고 그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지요.

그게 성문 어귀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성문 어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세로 사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 사람과 다른 모습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자들처럼 살지 않아요.

가치관이 다르단 말입니다.

삶에 방향성이 달라요.

 

소돔 고모라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본문 4절에 보면 소돔 고모라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창 19:4절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천사들이 롯을 만났습니다.

롯이 천사들을 자기 집에 데려갑니다.

그러자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새로운 남자가 왔다더라

그래서 소돔 고모라의 남자들이 모두 찾아 와서 그 천사들을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천사들과 상관을 하겠다고 합니다.

성 관계를 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영어로 소돔을 남색(男色) 하는 동성애를 말해요.

 

이것은 소돔 고모라 사람들의 타락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순리를 역리로 바꾼다고 해요.

 

로마서 1장에 보면 인간의 타락상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 범죄한 세상을 유기시켜 놓으니까 인간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모습으로 드러나더라고 합니다.

 

동성애라는 것은 같은 성끼리 관계하는 것을 말해요.

남자와 남자가 관계를 맺고 여자가 여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해요.

이건 세상이 정의하는 동성애에요.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동성애는 그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가 다 동성애자 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사랑하는 것이 동성애인 것입니다.

잘 이해를 하세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은 생명을 낳는 행위에요.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생명을 잉태할 때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과 상관없는 사랑 놀음은 전부 육체를 쫓아가는 쾌락입니다.

이게 죄란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남자와 여자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남자란? 하나님의 씨를 가진 자를 말해요.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자가 남자에요.

 

이 땅에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없어요.

아담 안에서 난 자들은 다 죽은 자들이에요.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에 없어요.

 

하나님의 생명은 하늘로서 오신 분에게만 있어요.

하늘로서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을 가진 남자에요.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신부는 누구인가요?

성도들이에요.

성도가 여자에요.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일컬어 여성명사로 쓰고 있어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는 오직 한 남편 되신 예수그리스도만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와 사랑을 할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요.

그래서 신앙을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세상을 사랑하게 만들어요.

세상과 사랑하면 죽어요.

세상과 사랑해서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세상과 사랑하도록 미혹해요.

여기에 미혹 당하면 예수를 사랑해야할 교회가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영적으로 동성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야고보서가 왜? 세상과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는지 알겠지요.

성경은 세상을 남자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마귀가 있어요.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마귀와 놀아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소돔 고모라 사람들이 마귀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증거가 동성애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롯이 자기 딸들을 준다고 하여도 싫다고 하는 겁니다.

여자는 싫고 남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사랑 행위는 생명을 잉태하는 귀한 것이지만 남자와 남자와 상관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쾌락이에요.

우리는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육체의 쾌락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돔고모라 사람들이 삶에 가치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몸뚱이 즐겁게 하는 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이들에겐 모두가 쾌락의 대상인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기 육신의 쾌락을 위하여 예수를 믿으면 그 사람에게는 예수가 동성애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왜 성경에서 이방 신을 쫓는 것을 음행이라고 하는지 아세요.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상징으로 보여 주는 것이 바알 신전에서 음행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냥 즐기는 것입니다.

그냥 육체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해야 하는데 지금 이들은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역리 현상입니다.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역리현상이란 말입니다.

 

죄는 항상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리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지으신 것은 생명을 낳기 위해서 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통해서 생명을 낳기 위해서 만들어 놨는데 인간들은 생명과 상관없이 쾌락을 쫓아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육체적 쾌락을 쫓아가는 것을 소돔 고모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에 나타난 소돔 고모라 사건이 어떤 모습일까요?

구약에서는 천사들이 롯을 찾아 갔을 때 소돔 고모라 사람들이 천사들을 성적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 나타나지요?

 

이것을 사도 베드로는 어떻게 설명했는지 베드로후서 2:1절을 보세요.

 

벧후 2: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잘 보세요.

민간에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들이 일어나서 멸망케 할 이단을 가지고 들어온다고 합니다.

 

이단이 뭡니까?

‘끝이 다른 것’이지요

즉 정답을 다르게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복음을 말한다고 해서 다 복음주의가 아닙니다.

그 복음의 끝이 무엇을 가지고 나오는지 봐야 합니다.

만약에 복음을 가지고 자신의 쾌락을 쫓아가면 이게 이단인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복음을 빙자해서 자기 육체의 쾌락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뭐라고 했나요?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한다고 합니다.

 

2 절을 다시 봅시다.

 

2절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여럿이 호색을 좇아간다고 하지요.

호색이란? 육체의 쾌락을 좇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의 쾌락을 좇아가니까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는다고 하지요.

 

왜 육체의 쾌락을 좇아가는데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는다고 합니까?

이는 진리의 도는 육체의 쾌락을 허용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진리의 도는 이 세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없어요.

이러한 것은 전부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요.

 

요한일서 2장을 봅시다.

 

요일 2:15-21=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1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지요.

그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이 세상 것이 뭔가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에요.

영원한 것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사랑치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세상 것으로 미혹해요.

그래서 사도요한은 아이들에게 적그리스도가 많이 일어나서 속이고 있으니까 속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 안에서 세상 것을 좇아가는 자들은 모두가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교회 안에서 세상 것을 좇아가는 자들은 원래부터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것을 좇아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좇아감으로서 스스로 세상에 속하였다는 자기들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돔고모라 사람들이 남색을 즐기므로서 저주 받은 자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롯은 비록 소돔고모라에 살고 잇지만 그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음으로서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삶이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육신을 쫓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복음은 죄와 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 복음은 죄를 억제시키고 멀리하게 하겠지요.

이 말은 복음이 진짜 역사를 하면 육체의 쾌락을 멀리하는 식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죄를 안 짓고 산다는 말이 아니고 죄를 멀리하고자 하는 지향성을 말하는 겁니다.

 

육체의 쾌락을 한 가지만 생각하지 마세요.

내 육신을 위해서 자기 몸을 추구하는 모든 것이 호색이고 육신의 쾌락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인간적으로 볼 때 진짜 착하다고 합시다.

집에 일찍 들어 와서 가족이랑 잘 지내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늘에 소망이 없고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 가족이 알콩달콩 잘 살까만 생각하면 이 사람은 육신의 쾌락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쾌락이라는 것을 잡다한 음란으로만 생각하지 말란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집에서 편히 쉬는 사람하고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사람이 있다 하면 우린 인간적으로 어떤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집에 있는 사람이지요?

밖으로 나돌아 다니면서 음주가무 하는 사람은 나쁘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성경은 집에 가만있든지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음주가무를 하든지 그것이 결국 자기 육신을 위한 것이라면 둘 다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사는 것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것이 죄에요.

 

예수 안 믿는 것을 통틀어서 쾌락이라 하고 다른 말로 호색이라 하는 것입니다.

왜 육체의 쾌락을 쫓아가는 것을 남녀 간의 간음을 뜻하는 호색이라고 합니까?

인간의 육체의 쾌락을 쫓아가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간음이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세요.

 

벧후 2:3절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저희가 탐심으로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利)를 삼는다고 하지요.

저희가 누구인가요?

거짓 선지자들을 말해요.

 

누가 거짓 선지자이냐?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삼는 자들이에요.

탐심으로 지은 말을 한다고 하지요.

이것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많이 놀라는 부분이 있어요.

많은 목사님들이 복음을 가지고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데 수단으로 쓰고 있음을 보아요.

복음을 가지고 자기를 추종하게 만들어요.

나는 저 사람들하고는 달라 하면서 자기 영광을 챙겨요.

 

교묘하게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을 해서 공교히 지은 말로 사람들 마음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이게 탐심으로 지은 말이에요.

그래서 속이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잘못 생각하는 것이 복음 알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복음을 핑계로 자기 게으름을 합리화 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초대교회부터 있었어요.

이들을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제가 늘 그러잖아요.

성경을 상고하세요.

성경에서 진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세요.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세요.

그들을 닮으라는 말이 아니고 성령이 그들을 어떻게 간섭을 하셨는지를 보세요.

그들과 다르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완벽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도 때로는 육체의 즐거움을 좇아가고 나쁜 짓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삶의 목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연약해서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저는 연약해서 넘어지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복음을 빙자해서 자기 사욕을 쫓아가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5절 이하를 보세요.

 

벧후 2:5-7=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그 시대에 다름으로 산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노아를 예로 듭니다.

노아가 무슨 의를 전파 했나요?

이것은 노아가 전도 하고 다녔다는 말이 아니고 방주를 짓는 삶이 의에 삶이란 뜻입니다.

그들과 다른 삶을 산 것이 의를 전파한 것이 된 것입니다.

 

노아 시대를 일컬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판다고 합니다.

이건 육신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방주 짓는 삶을 살았습니다.

장차 오는 심판을 대비하고 살았어요.

이는 노아 속에는 다른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게 의를 전파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롯은 어떠했습니까?

 

롯과 소돔 고모라에 있는 자들의 차이가 뭡니까?

소돔 고모라 사람들은 천사 조차도 자기 음욕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롯은 그런 모습들을 통해서 상한 심령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러잖아요.

 

소돔 사람이 전부 와서 자기 집에 들어 온 천사를 상관하려 할 때 이건 아니다 하니까

소돔 고모라 사람들이 롯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 놈이 어디에 감히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느냐 하고 죽이고자 했어요.

 

롯의 모습이 곧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과 다른 가치관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복음이 지향하는 것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지향하는 것으로 살다가 보면 자연히 반 복음적으로 사는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런 모습을 가진 자들과 심히 싸운 적이 있어요.

맘대로 살아도 된다,

막 살아도 된다,

꼴리는대로 살아라,

아, 막사는 재미…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고 하니까 자기들 하고 다르다고 하면서 쫓아내침을 당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시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이 소돔 고모라 사람들과 같아요.

육체의 쾌락을 좇아가고 있어요.

복음 아니까 교회 다닐 필요가 없다,

죄인이 죄 짓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 드러나지 않느냐 라고 하는 거에요.

이걸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계속해서 베드로후서 2장 10절 이하를 봅시다.

 

벧후 2:10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보세요.

이들은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한다고 하지요.

담대하고 고집이 쎄고 뻔뻔스럽고 진리에 서 있는 자들을 훼방한다고 합니다.  

이런 자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자 짐승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굳세지 못한 자들이 미혹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복음 안다고 하면서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이 있어요.

성경대로 이러한 자들이 일어나주어야 해요.

짐승들이니까 복음을 가지고서도 반 복음적인 짐승 짓들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정체를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넌 원래부터 짐승이야 라고 말이에요.

이러한 것을 보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했어요.

 

하나님 백성은 그게 아닙니다, 하면 돌이킵니다.

잘못됐다 하면 이게 아니었구나, 하고 돌이킨다니까요.

그러나 육에 속한 자들을 고집을 피워요.

 

베드로는 지금 구약의 소돔 고모라 모습과 롯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롯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았다고 합니까?

소돔 고모라 사람들과 다르게 성문 어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살았다고 하잖아요.

 

소돔 고모라의 모습이 멸망받기로 작정된 자들은 저런 모습으로 사는구나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을 통해서도 두 가지 반응으로 나타나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것이 진리다 하고 자기 식으로 살고,

어떤 사람들은 이래선 안 되겠구나 하고 돌이켜요.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뭔지 봅시다.

다시 17절 이하를 봅시다.

 

벧후 2:17-19=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 18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19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뭐라 그럽니까?

물 없는 샘입니다.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라고 하지요.

 

샘은 반드시 물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물이 없는 샘이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 속에서 은혜가 나오지 않고 생명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건 사기 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라고 합니다.

아까 요한계시록 9장에서 무저갱을 여니까 안개 처럼 올라 와서 온 세상을 자욱하게 가린다고 했지요?

이게 그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는데 이들의 특징은 복음을 가지고 자기 쾌락을 쫓아가는데 사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안개처럼 모든 세계에 편만하게 퍼져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얘기합니다.

무엇이든지 육체의 쾌락을 쫓아가게 하는 것은 옳은 게 아닙니다.

그건 복음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세요.

우리가 연약해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넘어지는 것을 합리화시키지는 말란 말입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예수님은 그 피로 다 용서해주시니까 우리는 용서받아서 괜찮아 이렇게 변명하진 말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 타락된 죄에서 건져주셨잖아요.

그러면 그 건짐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진짜 용서받은 사람은 그렇게 살아지지 않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재산을 밖에서 다 말아 먹고 왔는데 아버지가 받아 줬습니다.

그러면 아들은 그 때부터 어떤 자세로 살까요?

시간만 나면 또 돈을 훔쳐서 나갈까요?

아니지요.

진짜 아버지의 용서를 아는 자라면 그런 짓으로부터 멀리하겠지요.

 

그러면 복음을 알면 어떻게 합니까?

복음이 지향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으로 우리를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지 어떻게 우리 육체를 가지고서 음란과 정욕을 따라 가게 하겠느냐 이 말입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왜 교회를 안다니고 교회에 와서도 왜 아무 것도 안합니까?

결국 복음을 핑계로 자기 쾌락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너무 복음이 왜곡되었습니다.

 

복음이 곡해되면 저런 현상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았으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까?

과거에 살던 모습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복음으로 자기 사욕을 채워가지요.

왜 이러한 말에 속나요?

이는 거짓선지자들이 복음을 가지고 자기 이를 탐하려고 공교한 말로 사람을 현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왜 이런 얘기를 합니까?

왜 소돔 고모라가 후세에 경건치 못한 자들의 본을 삼았습니까?

베드로의 이런 얘기가 초대 교회에 국한된 것입니까?

아니면 지금도 계속됩니까?

지금도 계속되지요.

 

그래서 민간의 거짓 선지자가 일어난다는 것은 옛날에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계속해서 이런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이 성경을 통해서 저런 자들이 가짜구나 하고 깨달아야지요.

세상에 지금은 교회에 가서 열심내고 충성하세요 하면 이게 이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에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20-22절을 보세요.

 

벧후 2:20-22=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심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알지 못하는 것이 낫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가요?

차라리 복음을 모르는 것이 나을 뻔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다시 더러운데 눕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산 것을 절대로 간과해선 안 됩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육신의 소욕과 싸우면서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고자 한 삶의 자세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율법 아래에서 하나님 뜻대로 살고 깨끗하게 산 것을 내 의로 삼기 때문에 나쁜 것이지 율법을 지키고자 한 것은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의 삶을 본받으라고 했어요.

 

우린 율법 아래서 다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복음을 받고서 경건의 싸움을 다 포기했어요.

복음을 빙자해서 자유다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맘대로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차라리 복음을 몰랐으면 더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는 겁니다.

복음을 가지고 곡해를 하려면 차라리 율법주의가 되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왜 감사를 모르고 신앙이 경건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가요.

그것은 율법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율법은 버리는 게 아닙니다.

율법은 평생 살아서 우리를 고발해 주어야 해요.

율법이 없으면 죄를 몰라요.

말씀 앞에서 우리의 죄가 고발당하여야 합니다.

 

제가 지금 우리 교회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도도 안하고 그런 것들이 사라져서 이것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열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건 아닙니다.

마치 기도 안하는 것이 복음 아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니까요.

 

왜 좋은 것들을 버립니까?

기도를 안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기도는 우리 소원을 들어 달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연약함을 토설하는 게 기도에요.

주님 도움 없이는 못 삽니다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기도하는 행위가 비 복음이 되어 버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거짓 선생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잖아요.

누가 우리는 어차피 죄인이기 때문에 막 살아도 된다 할 때 그 목사의 말이 과연 맞는지 성경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는 게 있습니까?

없어요.

 

십자가의 도가 뭡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게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역사가 되면 그 죄를 싫어하고 멀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정상이지 또 죄를 먹고 마시고 즐기는 쪽으로 나타나겠어요?

그건 아니지요.

 

그래서 사도들의 서신서가 지극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모습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죄는 항상 우리 몸을 가지고 쾌락으로 쫓아가도록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서신서인 신약의 성경을 보세요.

이 얘기가 참 중요한데 …

 

(그림 설명)

 

구약이 있습니다.

구약은 우리가 열심히 살고 착하게 살아서 의로워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착하게 살아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은 십자가로 향합니다.

구약의 모든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요?

구약의 율법으로는 의가 나올 수 없고 의는 오직 예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서신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나온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온 서신서들이 전부 무엇을 말합니까?

윤리 도덕을 말하고 있지요.

 

왜 그런가 하면 죄가 우리를 비윤리 비도덕으로 몰고 왔다면 구원 후의 삶은 죄의 성향에 반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과거에 이방인같이 방탕하고 방종하고 살던 삶에서 이제는 돌이킴을 얻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구원을 받아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 육신이 복음이 담고 있는 내용들을 삶으로 온전하게 표현 해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죄인 됨을 자꾸 고발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지향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죄 안 짓고 살려는 방향성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는 죄를 이겨낸다!

못 이겨낸다?

못 이겨낸다! 그러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갈등이 생기고 싸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우리가 착하게 살아서 의를 만들라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이 말이 이해됩니까?

 

사도들이 복음을 몰라서 서신서를 쓰면서 쾌락 쫓아가지 마라,

육신의 정욕을 쫓아가지 마라,

음란하지 말라고 그러겠어요?

이는 죄가 우리 몸뚱이로 자기 사욕을 쫓아가는 식으로 드러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교회 생활을 등한시하고 게으름을 피우고 열심내지 않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복음을 가지고 자기 사욕을 위해 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게 소돔 고모라의 죄입니다.

 

세상 자체가 음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 속에서 빼내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세상 사람과는 다른 삶의 방식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예를 들어서 세상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자 그렇게 나아가더라도 신자들은 그런 모습으로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자기 가치관이 세상이 전부니까 그렇게 살아간다고 하지만 신자들은 그게 아니란 말이지요.

 

신자들의 몸뚱이는 항상 전투가 일어나요.

우리 안에서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계속 싸움을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에서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을 보면 롯이 소돔 고모라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그 마음이 상했더라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지금 제 설교를 윤리 도덕으로 듣지 마세요.

어떤 행함의 차원으로 듣지 마세요.

 

사람은 사람 행세하는 것이 사람이고 개는 개 행세 하는 것이 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 행세 하지 못하고 개 행세를 하면 그것을 인두겁을 썼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짐승이지요.

그래서 베드로후서에서도 하는 말이 이렇게 육체의 쾌락을 쫓아가는 자들을 짐승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나와 있는데 마음대로 살아도 됩니다 라고 해야겠어요?

어디서 들은 복음이 그런 복음이 있습니까?

그것 아니란 말입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제 안에도 걸리는 게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다시 한 번 내가 이런 모습이었구나!

내가 이런 자였구나 를 보게 됩니다.

끊임없이 우리 속에는 죄를 향해서 쫓아가는 소욕이 있는데 이것이 죄라는 것이 깨달아 져서 내가 잘못된 것을 쫓아가고 있었구나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제발 복음을 가지고 여러분 면죄부를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살아가는 삶을 합리화 시키지 마세요.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복음대로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복음을 그렇게 쓰지 마시란 말입니다.

그건 악한 것입니다.

 

항상 복음은 거울처럼 정답으로 제시해놓고 내가 그 앞에 섰을 때 나의 죄됨이 고발당하고 내 마음 속에 상한 심령이 일어나야 합니다.

주여 내가 이런 인간인데 주님의 용서와 긍휼이 필요합니다, 라는 자세가 나와야지요.

그게 신앙입니다.

 

제발 유리하는 별들처럼 세상 풍조에 밀려 쫓아다니지 마세요.

어느 누구도 우리의 영혼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책임져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란 말입니다,

그것이 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잖아요.

 

성경을 특정한 사람을 통해서만 해석하려 하지 마시고 여러분들이 성경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셔야 한다니까요.

그래야 속지 않아요.

민간의 거짓 선생들이 많이 일어났으니까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할 떄 웃으면서 했겠어요?

그 당시에도 이런 인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그런 얘기를 합니다.

복음은 복음을 안다고 하는 인간들 때문에 가려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지요?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당한다고.

 

여러분 주변에 복음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여러분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소자 하나가 실족하면 연자 맷돌 메고 바다에 빠져 죽으라는 것 같이 여러분들의 자유가 그만큼의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하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 자유는 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항상 남을 배려하고 저 사람이 내 행동 때문에 어떻게 시험 들까 하는 것을 염려해야지,

난 뭐든 할 수 있어 그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직분자들은 가능하면 교회 빠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직분자로서 행하여야 할 것을 하세요.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세요.

이런 것 안하는 것이 복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신앙이 좋은 게 아닙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실족하게 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자유는 여러분 것이 아니에요.

 

왜 소돔 고모라의 죄를 통해서 우리에게 얘기를 해주고 있습니까?

얼마나 사람이 악했으면 천사들조차 자기 쾌락의 도구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를 지금 의역화해서 복음으로 비유를 해보세요.

그 복음을 쾌락의 도구로 쓰고 있잖아요.

그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롯과 같이 그 속에서 상한 마음으로 그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복음의 합당한 모습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반 복음적인 모습이 마치 복음을 아는 것 마냥 하지 마세요.

 

복음은 그런 게 아닙니다.

소돔 고모라의 죄악 된 모습 속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오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의 죄가 발견되어야 합니다.

 

나 역시도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인데,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셔서 살고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달으시고,

그렇게 해서 롯처럼 소돔 고모라 사람과는 다른 상한 심령이 여러분 속에 일어나서 그 상한 심령이 날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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