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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32강. 나를 위해 기도하는 의인이 있느냐? (창 18:16-33)

by coroa 2021. 3. 22.

 

♣ 32강. 나를 위해 기도하는 의인이 있느냐? (창 18:16-33)

-.정낙원 목사

 

하나님께서 롯을 구원한 것은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날 위하여 기도해 줄 의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기도해 주시는 의인을 알려 주십니다.

 

오늘은 그 의인이 누구인지를 찾아봅시다.

롯이 어떻게 살았나요?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하면 ‘나를 위하여 기도해 줄 의인이 있느냐?’ 라는 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누구 이야기입니까?

예수님 이야기이지요.

우리가 누구 때문에 구원을 받습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누가 기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럼 롯을 위하여 기도한 아브라함은 누구를 예표 합니까?

예수님이지요.

맞아요.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어요.

그럼 롯의 구원 이야기를 성도의 구원이야기이지요.

 

이걸 예수님 초림으로 이해해 보세요.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셔서 누구를 어디에서 구원을 해 내셨습니까?자기 백성들을 유대교 율법주의로부터 구원을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12제자가 롯이 되고 유대교 율법주의가 소돔과 고모라가 되는 것입니다.

 

광의적인 의미에서는 이 세상 자체가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타락한 교회가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요한계시록 17-18장을 보면 종말의 타락한 교회를 음녀라고 하는데 이를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합니다.

 

음녀가 뭔가요?

이 사람 저 사람 아무나 다 받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를 음녀라고 하는 것은 이런 사상 저런 사상을 다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게 소돔 고모라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롯의 구원 사건은 초림 때는 유대교 율법주의로부터 끄집어냄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재림 때에는 세속적으로 타락한 교회로부터 끄집어냄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구원이 뭔가요?

죄로부터 건져냄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무엇을 죄라고 했습니까?

누구에게 저주를 하셨는지를 보면 마귀적 신앙과 죄가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행하여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면서 지옥에 가라고 했습니다.

그럼 율법주의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를 긍정하고 율법지킴을 의로 여기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증거 하였어요.

율법의 의 말고 믿음으로 난 의를 증거했어요.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율법 지킴을 신앙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하여서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율법 지킴을 신앙으로 내 세우는 자들과 싸웠습니다.

이전의 자기와 싸운 겁니다.

율법 아니고 은혜라고 했어요.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걸 롯의 구원 사건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그러니 오늘은 롯의 구원이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 목적이 다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미련 없이 멸하실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 멸망당할 세상 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한 번 살펴붑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셔서 아들을 주겠다고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계획들을 알려 줍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실 일을 보여주는 인물로 선택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알려 준 이야기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선 소돔과 고모라로 나타났지만 신약에선 이 세상 전체를 말합니다.

광의적인 의미에선 이 세상이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초림 때는 율법주의이고 종말에는 세속화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타락된 교회를 보고 탄식하게 되어 있어요.

이는 성령이 그 안에서 상한 심령을 일으켜서 탄식케 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기도가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성도들을 구원하십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봅시다.

 

20절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물어 봅시다.

누가 부르짖을까요?

소돔 고모라에 있으면서 소돔 고모라에 관해 부르짖는 사람이 누굴까요?

소돔 고모라에 속한 사람일까요?

속하지 않은 사람일까요?

거기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지요.

 

베드로서에 보면 소돔 고모라에 롯이 있었습니다.

롯이 불법하는 소돔 고모라의 사람들을 보고 심령에 통분을 여기고 하나님 앞에 간구했다고 합니다.

결국 소돔 고모라의 악함을 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소돔 고모라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롯을 일컬어 소돔 고모라에 ‘우거 한다’ 라고 합니다.

‘우거’라는 의미는 곁에 빌붙어서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에 정착된 사람이 아니고 나는 소돔 고모라의 사람이 아닙니다! 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성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 본 아브라함도 그랬잖아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준다고 해서 들어갔는데 거기서 네가 거할 땅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다고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비록 거부로 가나안 땅에서 살았지만 나는 가나안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 것이 나그네로 살았고 장막 문에 거하였다고 합니다.

롯이 성문에서 누구를 기다렸던 것처럼 아브라함도 장막 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이게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신자들은 이 세상에 비록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뭐냐 하면 세상 가치로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롯이 왜 소돔 성의 잘못된 부분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 부르짖었을까요?

소돔 성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이것은 롯은 소돔 고모라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관과 다른 죄관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개념은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육신의 소욕대로 살게 되어 있어요.

세상을 짝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소돔 고모라 사람들이 육체의 행락을 쫓아가는 것으로 고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자기 육신을 좇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이 땅에서 먹고 마시며 산다 할지라도 내가 사는 것은 이 땅에 속한 것은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이 쾌락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서 경건의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잊고 장차 가야할 천국을 잊고 노아 시대 사람들처럼 장차 닥칠 심판을 모른채 먹고 마신다면 죄가 됩니다.

 

경건을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윤리 도덕적으로 접근하지 마세요.

비록 우리들이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산다해도 우리의 관심사가 이 땅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우린 가야할 곳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먹고 마심 가운데서도 그것은 경건인 것입니다.

어떤 지향성으로 사느냐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풍요롭게 산다할지라도 관심사가 하나님 나라에 있다면 그 사람은 경건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살아도 내가 여기서 출세하고 살아야겠다고 하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불 경건이 되어 버립니다.

 

롯이 소돔 고모라에서 부하게 살았는지 가난하게 살았는지는 성경의 기록이 없으니 자세하게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롯이 소돔 성에 살면서도 소돔성 사람들의 가치관에 동조되어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성문 어귀에 있음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아브라함에게로 옮겨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와서 롯이 살고 있는 소돔성의 죄악이 중한 것을 보고서 심판을 해야겠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곳에 조카 롯이 있다는 것을 알고 급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흥정을 합니다.

성경에서는 롯을 아브라함의 조카라고 하는데 그 ‘조카’라는 말은 ‘한 식구’ ‘한 식솔’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일 울산에 불벼락을 내릴게! 라고 알려줬다면 이 울산에 내 식구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철야기도 하지 않겠어요?

내일 모레 불벼락이 떨어지는데 내 식구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그럼 어떡하겠어요.

하나님께 소리치지 않겠어요.

기도하게 되겠지요.

 

심판을 아브라함은 알고 롯은 모르고 있어요.

아브라함과 롯 둘 중에 누가 더 급할까요?

당연히 아브라함이지요.

그러니 아브라함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만 소돔 고모라의 멸망 소식을 알려줬습니다.

롯은 아직 모릅니다.

롯은 분명히 소돔 고모라에 살면서 소돔 고모라의 백성이 아닌 것으로 산 것은 맞아요.

그러나 심판이 언제 임할지는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 고모라의 심판 소식은 아브라함에게만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그 속에 있는 자기 식구 때문에 비상이 걸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흥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흥정 내용이 재미있어요.

하나님! 혹시 그 성에 의인이 있으면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 의인이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러십니다.

의인이 있나 찾아 봐라!

이에 아브라함이 의인 오십 명이 있으면 어떡하겠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흥정이 사십 오명, 삼십 명, 스무 명, 열 명까지 내려옵니다.

이 말은 소돔 고모라에 의인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얘기입니다.

오십 명에서 열 명까지 내려 왔다는 것은 숫자적인 의미보다 의인이 없다는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묻는 것은 소돔 고모라가 망하는 이유가 그들이 악하고 문란하게 살아서가 아니고 의인이 없어서 망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롯을 의인이라고 했어요.

이걸 잘 이해 하셔야 합니다.

 

롯이 누구의 기도 때문에 구원을 받습니까?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이지요.

이렇게 되면 롯은 아브라함 안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롯을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롯은 아브라함 안에서 의롭게 된 자의 모형이에요.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우리가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는 것과 같아요.

우린 의인이 아니에요.

예수 안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자들이에요.

그러니 독자적으로 난 의인이야 라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의인 되는 걸 원치 않아요..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는 걸 원하세요.

그래야 예수가 만유의 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걸 잊지 마세요.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던져 주고 계신 것은 이 세상이 왜 망하는지 아느냐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악하게 살아서 망하는 게 아니고 의인이 없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인입니다.

죄인이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라니까요!

 

우리에게 선이 있고 악이 있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나쁜 짓을 하니까 심판하고 착하게 살았으니 심판을 면하고 그런 게 아니란 말입니다.

우린 자체가 악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이 세상에 의인이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은 의인이 있으면 살고 의인이 없으면 죽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 우리에게 화두로 한 번 던져 보세요.

하나님께서 정낙원! 너를 중보 할 의인이 있느냐? 라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심판하시는데,

다시 말해서 너를 위하여 중보해 줄 그 의인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인은 아브라함이지 소돔 고모라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그 어떤 인간도 다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멸망시키는데 그 이유는 의인이 없어서라고 합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물어야 할까요?

하나님 그 의인이 어디 있습니까?

그 의인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어야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는 그 의인은 아브라함 자신입니다.

왜요?

아브라함이 복의 조상이잖아요.

누구든지 아브라함을 영접하면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저주를 받는 것은 우리가 착하게 살았느냐 악하게 살았느냐 하는 우리의 행함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하신 그 분을 영접하느냐 안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낸 의인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의인이 되기도 하고 죄인으로 남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은 딱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의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래요?

이 세상 자체가 죄 아래 가두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의인은 어디서 와야 합니까?

죄 바깥에서 와야 합니다.

 

왜 하늘나라에 계시던 분인 예수님께서 이 세상으로 오실 때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십니까?

그건 롯을 위하여 기도한 아브라함처럼 소돔 고모라와 같은 죄악 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겉보기엔 우리 사람과 같은 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로부터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처럼 복을 주는 조상이 되고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 할 수 있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이 땅에 의인으로 보냈을까요?

이는 의인의 기도를 통해서 자기 식솔들을 살려 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나 기도해 주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무나 구원시키는 게 아닙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 구원하세요.

 

요한복음 1장 9-13절을 봅시다.

 

요 1:9-13=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알아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로 난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 사람은 왜 못 알아보고,

알아보는 사람은 어떻게 알아봅니까?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사람은 예수를 알아보게 해주고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못 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비밀’이 되는 것입니다.

비밀로 오신 것은 알 자만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지 않는 사람들 눈에는 예수님은 사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하나님께로 난 사람은 저 분이 나를 대신해서 죽어 주실 구세주라는 것을 알아요.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겐 믿음을 줘서 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것은 세상 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과 같아요.

하나님과 성도만이 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을 보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른다고 합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른다는 말은 믿음이 믿을 분을 알아보게 한다는 말이에요.

믿음이 예수를 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에요.

믿음이 믿게 하세요.

이 믿음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다시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는데 아무도 못 알아봅니다.

못 알아보는 게 정상이에요.

그런데 12-13을 보면 알아 먹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에요.

그래서 영접하는 자들에게 아들의 권세를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 1:12-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육신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셨어요.

그런데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창세전에 하나님의 아들 되기로 작정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되기로 작정된 그들에게만 믿음을 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영접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만 믿는다니까요.

이게 믿어지면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자체가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덤덤합니다.

왜 무덤덤할까요?

안 믿어져서라고 하시네요!…

 

믿어지면 자기 안에서 믿어지는 이것이 기쁘고 감사하지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뭡니까?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라고 보내셨잖아요.

그런데 자기 백성들은 구원받을 자인지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혼자 비상이 걸려서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할 자인지도 모르고 쿨쿨 잠자고 있는데,

예수님 홀로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서 찾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1서 2장 1절을 봅시다.

 

요일 2:1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대언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언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변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리를 변호합니까?

자기 새끼들이니까 변호하는 겁니다.

자기 피로 낳았잖아요.

그러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를 왜 그렇게 피 땀 흘려 키우고 지켜냅니까?

그 자식을 내가 낳았잖아요.

아이들은 부모의 공을 몰라도 부모는 그 아이가 부모의 공을 알든 모르든 상관하지 않고 내가 낳았기 때문에 키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언자로 계신다는 자체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지 우리가 뭐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내가 뭔가 많은 것을 해서 하나님께 갖다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큼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고 사는지를 깨닫고 거기에 대한 반응이 나와야 합니다.

 

엊그저께 양주의 00교회에 가서 금요 철야 집회를 했습니다.

약 200명이 모였는데 집회를 하고 나니까 하는 말이 그 교회가 생기고 나서 외부에서 온 강사 중에 제일 잘했다고 합니다.

가장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요.

 

제가 그분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성경에서는 여자를 누구라고 합니까?

교회라고 하지요?

지금 현재 여자들이 하는 것이 교회의 영적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표상학이라고 하는데 여러분들도 그렇게 보시기 바랍니다.

 

표상학적으로 볼 때 여자들이 하는 짓이 교회가 하는 짓과 거의 비슷합니다.

요즘 여자들이 아이를 낳으려고 합니까?

안 낳으려 합니까?

아이를 낳았다 해도 자기 미용 때문에 아이에게 자기 젖을 먹이지 않고 짐승인 소젖을 먹입니다.

짐승 젖을 먹고 자라니까 짐승 짓을 하는 것입니다.

상징적으로 말씀드리니 잘 이해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걸 교회 이야기로 해 봅시다.

여자들이 아이에게 엄마 젖을 안 먹이고 짐승 젖을 먹이는 것은 교회가 성도들에게 하늘의 말씀을 먹여야 하는데 땅의 말을 먹이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전부 짐승들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변비 비유로 했습니다.

변비가 왜 생깁니까?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제일 큰 원인은 안 먹어서 그래요.

뭘 먹어야 나올 것이 있지요.

변비는 잘 먹으면 생기는 병이 아닙니다.

 

우리 몸은 정직해요.

먹으면 싸게 되어 있어요.

우리 몸의 구조는 먹으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복음적이에요.

하나님이 우리 몸을 복음을 드러내는 도구로 만드셨어요.

몸에 구조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을 시켜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가만있게 하지 않고 뭔가 자꾸 토해 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로 하여금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가 나로 하여금 가만있지 못하게 하고 뭔가 자꾸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일을 하게 되고 일을 하면 또 은혜를 사모하게 되고 이렇게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일을 많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달란트 비유에서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조차 빼앗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 안하는 사람들은 왜 안 하는가요?

은혜를 못 받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게 변비입니다.

안 먹으니까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은혜를 받으세요.

그래서 제가 늘 그러잖아요.

교회 오는 게 힘들면 블로그의 글이라도 좀 읽으시라구요.

외부에서는 그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데 밥상을 차려놔도 안 먹는 심보는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이 그렇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인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모두들 알아보질 못하는데 우리에게는 알아먹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구원하실 구속자라는 것을 알게 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면 놀라와야지요.

예수 믿는 것이 희열이 느껴지고 기뻐야지요.

왜 기쁘지가 않습니까?

 

왜 예수를 믿는다면서 그렇게 화가 난 얼굴들입니까?

어떻게 보면 교회에 오는 게 억울한가 봅니다.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이건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러분들이 그렇게 싫어하고 억울해 해도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지금도 간구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롯이 잘나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성경에서 이런 애기를 깔아 놓은 것은 롯이 구원받은 것은 아브라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신약에서는 예수잖아요.

 

하나님은 예수님하고 상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구원받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구원받고 싶어도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구원하신다고 했습니까?

자기 백성이지요.

 

창세전에 영생주시기로 작정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야곱처럼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작정이 되어서 이 땅으로 보내짐을 입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 고모라를 멸망시킨다는 얘기를 듣고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서 하나님 앞에 흥정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아브라함이 소돔 고모라의 누구를 기억하고 그러는 것입니까?

자기 조카 롯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바짓가랭이를 붙잡는 것입니다.

 

내 조카 살려내고 멸망시키라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서 롯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를 멸망할 때에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롯을 구원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다음 장인 창세기 19장 29절을 봅시다.

 

창 19:29절,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롯이 자기 의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이것을 우리로 이야기 해봅시다.

롯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잘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받고 난 사람들의 고백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주님 때문입니다! 라는 고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가 어떻게 주일날 교회를 왔느냐?’ 하고 물었을 때 ‘주님 때문입니다.’ ‘주께서 내 발걸음을 여기 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라고 하셔야 하는 겁니다.

 

- 너 어떻게 이렇게 봉사를 하느냐?

  주께서 봉사할 힘을 주셔서 합니다.

 

- 너 어떻게 이렇게 헌금을 하느냐?

  주께서 내게 헌금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셔서 합니다! 라고 고백하여야 해요.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우리의 신앙의 끝은 모든 것이 ‘주께서’ 입니다! 가 되어야 해요.

신자가 살아가는 삶의 주체는 항상 ‘주(主)’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을 다시 한 번 보세요.

 

히 11: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구약의 선진들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실상으로 가지고 있었습니까?

여기서 믿음이 보게 하는 실상은 예수님입니다.

 

믿음이 오니까 장차 자기들을 구원할 메시야를 소망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메시야를 소망할 수 있게 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그들을 간섭하니까 장차 오실 메시야의 삶을 선취적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절 3절을 보세요.

 

히 11:2-32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지금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보이는 세상이지요?

히브리서 11장 3절에 보면 보이는 세상이 있고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보이는 이 세상이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말미암은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의 앞에 “믿음으로” 라고 하는 겁니다.

믿음으로 라는 말은 믿음이 이러한 일을 하게 하였다는 뜻이에요.

이해되세요?

 

믿음이 오니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이 세상은 가짜고 실제는 저 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믿음이 없으니까요?

그러니 이 세상에 올인하고 사는 겁니다.

 

그러나 성도는 다릅니다.

믿음이 이 세상에 올인치 말고 하늘나라에 올인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가치로 살지 않고 믿음에 가치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오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 실력이 아니에요.

믿음이 그렇게 하세요.

그 ‘믿음’을 누구에게만 줍니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만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받으니까 이 세상은 허상이구나! 진짜는 저 위에 있구나! 를 알더라는 것입니다.

 

머릿 속으로 그림을 한번 그려 보세요.

위에도 세상에 있고 아래에도 세상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했으니까 보이는 이 아래 세상은 보이지 않는 저 위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 되지요.

 

위는 실상이고 아래는 허상입니다.

허상이기 때문에 이 허상에 속한 것은 전부가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풀과 같이 쇠해지는 것입니다.

이게 죽음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허상 속에 사는 나도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흙에서 나는 것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에서 난 몸을 영원한 것으로 주지 않습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살 몸은 따로 있어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늘나라는 영생하는 무한의 나라이고, 이 땅은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한 세계입니다.

영원한 세계에 살려면 우리 몸도 영원한 세계에 살 수 있는 몸이 되어야 합니다.

흙에서 태어난 이 몸은 영원히 살 수 있는 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몸을 붙들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난 것은 땅으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질량불변의 법칙’ 이라는 말을 하지요.

땅에서 난 것은 땅으로 돌려 보내줘야 한다니까요.

그렇게 보내 주고 하나님께서는 이 몸 말고 하늘의 몸을 주십니다.

그래서 땅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장막으로 덧입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서 우리 육신이 이 땅에서 죽는 것은 마치 씨앗이 죽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씨앗이 죽는 것은 그 씨앗 속에 있는 내용물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육신이 죽는 것은 비록 너희는 흙으로 난 육신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속에다가 하늘의 사람을 심어놨다는 것입니다.

 

이 속사람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육신은 반드시 죽음에 넘겨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성도의 죽음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집사님의 어머님이 병이 드셔서 다들 기도를 해달라고 합니다.

왜 기도해 달라고 합니까?

병을 고치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이렇게 응답 하세요.

저 위에 네 몸이 있다고 알려주세요.

이게 응답으로 주어지면 아픈 몸이지만 소망이 생겨요.

육신이 병들어서 좋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기도해야 합니다.

저 역시도 복음을 전하면서도 몸 아프면 짜증이 나고 그럽니다.

그러나 어차피 흙에서 난 이 몸은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죽어요.

우리 몸은 죄의 영향으로 병들게 되어 있고 결국에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알아야 할 것은 이 몸이 전부가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 속에 하늘의 생명을 심어 놓았습니다.

씨처럼 담아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원한 생명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이 땅의 몸을 씨처럼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지요?

씨라는 것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씨가 죽지 않으면 그 속의 내용물이 꺼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 속에 하늘의 생명을 심어 놨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오고 나니까 나는 이 땅에서 존재하는 자가 아니고 저 위에서 살 자이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육신을 영원토록 붙잡으려 하지 않고 의미를 두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믿음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육신을 무가치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 육신보다 저 위에 있는 몸을 생각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으로 가인은 아벨에게 죽임을 당했고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믿음으로 모세는 애굽의 왕좌의 신분에서 광야로 도망을 갔고…그러는 겁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살 때 스스로가 도망을 갔을까요?

믿음이 끄집어냈을까요?

믿음이 끄집어냈지요.

어느 인간이 그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도망가려 하겠습니까?

 

여러분, 애굽의 왕자가 히브리인 한 사람 죽이는 것은 그리 큰 일이 아닙니다.

히브리인은 종입니다.

왕자가 그 히브리인 한 사람 죽인 것에 두려워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가 하면 믿음이 모세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믿음이 모세를 쫓아내게 만든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줬으니까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은 정착할 곳이 아니고 우리가 가야할 곳은 따로 있구나 를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살면서 육신이 조금 불편하고 사는 게 조금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것 때문에 낙망하지 말고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했잖아요.

이러면 보이는 세계에 사는 나 조차도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건 선재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장차 우리의 구원에 완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태어난 자는 그 누구도 스스로 난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창세전에 계획된 섭리 가운데 그 언약에 의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여기서 뭔가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죄에서 건져짐을 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롯과 같이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롯이 소돔 고모라에 살면서 소돔 고모라 사람 아닌 것으로 살았습니다.

롯은 소돔 고모라 사람처럼 먹고 마시고 육신의 쾌락을 좇아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의로운 롯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아파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부르짖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장차 이 세상이 왜 망하는가 하면 성도들의 부르짖음 때문에 망합니다.

 

요한계시록 8장을 보세요.

 

계 8:1-5=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2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보세요.

땅에서 지진이 나고 번개가 일어나는 것은 성도들의 기도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부르짖습니까?

그 이유는 지금 우리의 신앙과 비교했을 때 현재 세상의 모습이 올바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악함을 볼 때마다 입버릇처럼 ‘야~! 이 놈에 세상 빨리 망해야지!’

‘예수님이 빨리 오셔야 해!’ 라고 하잖아요.

이게 다 의로운 자들의 탄식이고 기도에요.

 

만약에 우리가 세상과 똑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부르짖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과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틀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이거 아니잖아요! 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기 때문에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자동적으로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이라고 하니까 너무 포괄적인데 이것을 교회로 생각을 해보세요.

만약에 제가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가 여러분의 관심사를 땅으로 끌어당긴다고 생각해 보세요.

제가 이 땅에서 예수 믿기 때문에 복 받고 잘 살아야 됩니다, 라고 설교를 했을 때 여러분 속에서 롯과 같이 하늘에 속한 사람이 있다면 제 설교를 통해서 마음에 탄식이 나오겠지요.

하나님 이거 아닌데요? 라고…

 

교회 안에서도 목사의 사고와 다른 사고를 가질 때 부르짖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의 경우에 제가 땅의 가치를 이야기하지 않고 창세전 언약을 말하고 하늘의 가치를 이야기하면 반대로 땅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설교를 좋아하지 않겠지요.

에이~! 무슨 설교가 저래 라고 불평하겠지요.

각자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이 자기와 다름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탄식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교회도 유유상종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롯은 소돔 고모라에 살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롯은 아브라함의 식구에요.

그럼 아브라함과 함께 가나안에서 살아야 해요.

그런데 자기 욕심에 이끌려 소돔 고모라로 갔어요. 

막상 가니까 다른 겁니다.

그래서 그들과 융화되어서 살지 못하고 다름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와 같아요.

신자는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으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악함을 보면 자동적으로 탄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불평과 탄식을 달라요.

불평은 탐욕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탄식은 틀림을 알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롯을 구원하지요?

이것은 롯이 아브라함 안에서 구원을 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롯은 아브라함의 의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롯이 소돔에서 부르짖었다고 하지요.

이건 롯이 소돔 사람과 다른 것이지요.

그래서 롯이 우거하는 자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나그네로 산 것과 같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롯을 소돔 고모라에 아브라함과 같은 모습으로 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는 세상과 다른 사람으로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과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또 중보자가 됩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우리가 중보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중보하고 계세요.

예수님의 중보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자는 세상 속에서 중보자의 모습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사람이 아니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의인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의인은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 기도가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니에요.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의인인 것입니다.

 

롯이 의인일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의 안에서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롯이 스스로 의인일 것 같으면 아브라함의 중보 없이 롯이 구원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소돔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에 먼저 아브라함에게 알려 준 것은 소돔 고모라에는 의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니까 자기가 가진 의를 자기 조카 롯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게 아브라함의 기도에요.

 

아브라함이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날 봐서 롯을 구원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그걸 예수님께서 그대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세상 속의 내 백성이 있습니다.

내 백성을 살려주세요!

누구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기도를 들으신단 말입니다.

 

하나님 앞의 의인은 누구에요?

예수님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나님 앞에 진짜 의인은 아브라함인 것입니다.

아브라함 외에는 의인은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 고모라의 멸망 소식을 듣고 거기에 있는 자기 조카 롯을 기억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묻는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에 의인이 있다면 죽일 수 있습니까? 라고 당당히 묻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의를 가지고 조카 롯을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내 조카(식구)가 거기 있는데 내 식구는 살려 줘야 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살려 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도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의인이기 때문에 그 예수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는 것은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게 아니고 진짜 하나님 앞에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뭐합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 참 의인이라는 것을 알잖아요?

 

그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내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앞세우고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 가운데 주셔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서 대신 기도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성령이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예수님께서 중보자라는 것을 알려 주는 입장으로 존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입니다.

두 증인이 뭐합니까?

하나님의 교회에 가서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땅이 전부가 아니고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해줍니다.

그것이 중보자적 삶입니다.

 

흔히들 중보 기도 하자, 그러지요?

착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중보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중보 기도는 예수님만이 할 수가 있어요.

그럼 우리는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입장에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중보 기도는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기도만 받으십니다.

의인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기도만 받으신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만이 하나님 앞에 참 의인입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끝에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지요?

그 말은 내가 지금 기도하는 모습들은 내 기도가 아니고 예수님의 기도로 드려진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말은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해놓고 실제는 주술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냥 끝에 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할머니에게 대표 기도를 시켰는데,

이 할머니가 끝에 가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를 까먹어 버렸습니다.

할머니는 기도를 끝내고 자리에 앉았는데 사람들이 가만히 있습니다.

 

왜 그래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를 안 해서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때 당시 전도사님이 할머니에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하세요, 라고 했습니다

이게 부적 같은 주술이라니까요.

내용은 전부 자기 것으로 채워 놓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하면 그 기도를 받습니까?

아니에요.

 

극단적으로 말할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안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기도할 수 없다니까요.

그게 안돼요.

 

솔직히 우리가 기도하면 무슨 기도 합니까?

위의 것을 구합니까?

땅의 것을 구합니까?

하나님께서 땅의 것을 주실까요?

안 줍니다.

 

그럼 우리는 기도하면서 내가 엉터리라는 것을 자꾸 고발당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기도를 하라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를 고발하는 차원에서 기도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팁을 하나 드릴게요.

요즘 휴대폰은 녹음 기능 좋잖아요.

기도를 할 때 녹음을 하고 나중에 한 번 들어 보세요.

그 기도 내용이 전부 무슨 내용입니까?

내가 완전히 엉터리로 기도를 한 것이 폭로되는 것입니다.

그걸 깨닫는 것입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신 게 다행이지 않아요?

 

전 과거에 기도를 엄청 많이 했습니다.

산 기도에서부터 철야와 금식과 엄청 했어요.

하루 열 두 시간씩도 했어요.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전부 내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기도를 안 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제가 늘 그렇잖아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 주셨다면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없어요.

이런 목회 하지 않아요.

사람 끌어 모으는 목회를 하였을 겁니다.

그냥 일반 목사들처럼 복 받고 잘 살란 말이나 하고 있겠지요.

예수 잘 믿으면 땅에 복을 받는다고 하면서 무당 노릇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제 기도를 안 들어 준 것을 감사하고 있어요.

들어 주셨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하게 되면 진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안 들어 주신 게 너무 너무 고맙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도 마차가지 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몸뚱이를 위해서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함으로 우리의 악이 고발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순 엉터리구나를 알게 되어요.

그런 의미에서 기도 많이 하라고 하는 거에요.

 

여기서 기도에 대하여 오해 할까봐서 못을 하나 쳐 놓고 갑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에요.

기도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어요.

 

성령이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하는 기도가 있고 우리의 욕구로 하는 기도가 있어요.

제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탐욕으로 구하는 것을 안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서 하는 기도는 들어 주세요.

성령은 복음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세요.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잘 이해 하세요.

 

복음을 오해 하면 기도 안해도 되겠네 라고 합니다.

이 시대 실제로 복음을 오해하는 자들 중에서 이러한 자들이 많이 있어요.

이들은 기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해요.

이들은 복음을 자기 구원용으로 이해하니까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아니에요.

교만이에요.

 

기도 하셔야 해요.

아무리 많이 해도 모자라요.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면 기도하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이 세상이 전쟁터인데 어찌 기도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보면 성도들의 기도가 귀한 것이므로 금 대접에 담겨져 하나님 보좌로 올라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대접이 쏟아집니다.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는 예수님의 중보 기도와 같다는 뜻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게십니다.

세상이 왜 망하는가 하면 의인이 없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의인이 기도해 주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묻는 거에요.

너희에게 의인이 있느냐?

너를 위해 중보해 줄 의인이 있느냐?

그걸 묻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계십니다, 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버리지 마세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비록 내 꼬라지가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그게 정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비록 그럴지라도 이런 인간이 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대신 기도해 주시는 중보 때문에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나를 지금 지켜주는 중보자가 누구냐 하는 것을 붙드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한마디로 ‘주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차 이 세상은 반드시 멸망합니다.

 

소돔 고모라는 맛보기로 보여 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에서 ‘이 세상은 장차 불로 심판하기 위해서 간수된 바’ 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그 조짐이 보이잖아요.

그렇게 망해 가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이 중보하는 자들은 다 살려 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중보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중보 하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 때문에 소돔 고모라를 엎기 전에 두 천사를 보냅니다.

 

천사가 갔을 때 롯이 순순히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잡아끄는 겁니다.

그 잡아끄는 것이 히브리서 11장으로 말하면 ‘믿음으로’ 입니다.

믿음이 롯을 잡아끌고 나온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항상 믿음이 우리 마음을 주장해서 은혜의 자리로 끌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만큼이라도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이 감사인 것입니다.

신앙이 감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끄집어 내주지 않았으면 어찌할 뻔 했습니까?

끄집어 내주지 않았으면 우리도 저들과 똑같이 살고 있을 텐데…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주장해 주시지 않았으면 나도 땅강아지처럼 세상 사람들처럼 돈! 돈! 하며 살았을 텐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믿어지고 깨달아지니까 요만큼이라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셔야지요.

 

앞으로 우리의 삶 속에 어렵고 힘든 일들이 닥친다 해도 놀라지 마세요.

이 세상에 사는 한 힘들고 어려운 일은 다 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병들고 병들면 늙고 늙으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전부 정하신 이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이 정한 이치로 사는 자가 아니고 죽어도 산다는 역리로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바깥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소망 없는 자들처럼 살지 말고 하늘에 소망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삶 속에서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어렵고 힘들면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해서 이런 일들을 벌이셨구나 라고 생각하세요.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긍휼을 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으니 살 수 없는 인간임을 고백하시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해야 합니다.

내 꼬라지가 이래도 나를 위하여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대언하고 계시는 예수님이 중보자로 계신다는 것을 아시고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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