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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31강. 나그네 영접 (창 18:1-15)

by coroa 2021. 3. 20.

 

♣ 31강. 나그네 영접 (창 18:1-15)

-.정낙원 목사

 

이 세상은 독자적으로 운행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로 운행됩니다.

그것은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 라는 말은 “~ ~ 말미암아” 라는 뜻을 담고 있어요.

 

이는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란 뜻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냐 하면 창세전 언약입니다.

언약이 먼저이고 창조가 나중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만물 자체가 언약에 의하여 창조 되었고 언약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셨던 것을 역사 속에서 풀어 가십니다.

마치 화가가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도화지에 그려내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획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 아들의 피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구원이야기는 장차 신약에서 일어날 성도들을 구원하는 일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의 구원 이야기는 신약 성도들의 구원이야기의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가지고 신약의 성도들의 구원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실 때 역사의 중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끼워 두신 것입니다.

이 세상 역사를 주전(主前)과 주후(主後)로 나누는 것도 예수님을 기점으로 한 것입니다.

성경도 예수님의 오심을 기점으로 구약과 신약으로 나눕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라는 짝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상입니다.

무엇의 그림자이고 무엇이 실상입니까?

 

육과 영의 그림자와 실상입니다.

육은 그림자이고 영이 실상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지요.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무익하다고,,,

구약이 육이고 신약은 영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자기 백성을 은혜로 구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원이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은혜가 실상인 것입니다.

은혜가 실상이라고 한다면 은혜의 반대인 법은 그림자가 되겠지요.

 

은혜는 살리는 것이고 법은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죄 아래 가두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왜 죄 아래 가둡니까?

그래야 예수님이 와서 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신약을 드러내기 위한 바탕 화면과 같아요.

하나님은 신약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하여 구약에 율법을 바탕 화면으로 깔아 놓은 것입니다.

 

신약을 새 언약이라고 하고,

구약을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둘은 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위하여 옛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에요.

세례 요한을 일컬어 율법과 선지자의 마침이라고 합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하는 일이 율법과 같다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왔습니다.

 

세례 요한을 일컬어 주의 길을 예비한다고 했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서 일을 하실 수 있도록 해 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물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물 세례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율법을 가지고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전부 죄 아래 가두는 일을 한 것입니다.

 

왜 죽이고 가둡니까?

그래야 예수님이 오셔서 죄에서 건져내고 죽음에서 살려 낼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시려고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물 세례로 죽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성령 세례로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서로 짝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교만을 떨던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하지 말라고 했어요.

 

하나님께서는 여기 있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후손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혈통적 근거를 가지고서 선민이라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혈통적 근거로 선민사상에 사로잡힌 그런 사고 자체가 육이고 죄라는 것입니다.

돌맹이로 아브라함 후손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혈통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혈통으로 구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후손과 이방인으로 구분을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혈통을 자랑 할 수가 있었어요.

그러나 신약에서는 아닙니다.

신약은 혈통으로 구원을 하지 않습니다.

신약은 부르심과 선택으로 구원을 합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을 하십니다.

구약도 실상은 아브라함을 부르심과 선택으로 구원을 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조상이 아브라함도 은혜로 구원을 받았어요.

혈통이 아니고,,,.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한다면 혈통적 근거로 나오면 안 됩니다.

은혜로 나와야 해요.

왜냐하면, 자기들 조상이 부르심과 선택이라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혈통을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속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은혜성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짝이에요.

구약은 옛 언약이고, 신약은 새 언약이에요.

옛 언약은 율법이고, 새 언약은 은혜에요.

율법과 은혜는 짝입니다.

 

하나님은 신약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하여 구약의 율법을 바탕에 깔아놓은 것입니다.

은혜를 설명하려고 법을 깔아 놓은 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은혜를 몰라요.

은혜는 반드시 그 반대의 성질을 가진 법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둘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펼쳐 보이시는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는 지옥과 천국 같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반대이고 짝입니다.

천국을 알려면 지옥을 알아야 해요.

죽음과 생명도 이와 같습니다.

 

법에서는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율법으로는 구원이 나오지 않습니다.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켜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 속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은혜 안에만 있어요.

이 은혜를 예수님이 몰고 오셨습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이 생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생명이 없어요.

생명은 예수님 속에만 있어요.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를 알고 아브라함도 예수님 때를 보고 즐거워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 들어가셔서 구약의 성도들을 다 끄집어내시고 부활 하신 후에 그들을 몽땅 천국으로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법을 가지고 구약 이스라엘의 불가능성을 고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실패의 역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은혜를 줘도 인간은 결국 안 되더라는 것을 고발하신 것입니다.

그럼 갖다 버려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고 끝까지 보듬어 주신 것입니다.

보듬는 방법이 그 아들을 보내서 대신 그들의 죄를 담당하는 형식으로 하셨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물어야 할 죄를 예수님에게 대신 물으신 것입니다.

이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전부 예수그리스도 안에 살아나는 것이 됩니다.

이걸 일컬어서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죄를 고발하고서는 신약에 와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해 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내가 죄인이라고 사실이 고발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불가능성을 말해주고 있어요.

이를 구약 이스라엘을 가지고 설명을 하였어요.

유대인들이 인간들 중에서 가장 똑똑한 자들이에요.

 

하나님이 가장 똑똑한 자들을 가지고 시험을 한 것입니다.

너희들 내 말씀대로 살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허락해 주었어요.

그런데 실패했어요.

 

인간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요.

난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몰라요.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게 구약의 유대인들이었어요.

 

I can do it !

 

할 수 있다.

한 번 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신약에서는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나타났어요.

이런 것들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성을 가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 그대로 반영이 되어서 나타납니다.

인간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알미니안주의 구원관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인간의 가능성으로 나와요.

알미니안주의는 성경을 전부 자기 가능성으로 접근을 해요.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신인협동론을 주장하는 알미니안 식으로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영접한 사건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찾아내야 할 것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여호와가 아브라함이 불러서 오신 것이 아니에요.

 

여호와가 찾아오신 것이에요.

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습니까?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지키고자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그려 내는 도화지일 뿐입니다.

언약을 이루는 주체가 하나님이지 아브라함이 아니에요.

언약을 이루어가는 데에는 아브라함은 수동적이지 능동적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하는 대로 끌려 갈 뿐입니다.

 

언약을 이루는 데에는 아브라함은 가능성이 있으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의 가능성을 죽이는 일이 지난 시간에 살펴 본 할례입니다.

할례란? 아브라함을 죽이는 것입니다.

넌 죽은 자라는 것을 알리려고 이름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꿔 준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기 방식으로 아들을 낳았지만 아브라함은 자기 방식으로 아들을 낳으면 안 되어요.

하나님 방식으로 낳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방식으로 일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죽이고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할례 받은 아브라함은 죽은 자에요.

자기가 설치면 안 되어요.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자기 가능성을 계속해서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게 비웃음으로 나타난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또 비웃는 사건이 나옵니다.

지난 시간에는 아브라함이 비웃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사라가 비웃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하나님이 아들을 주겠다고 하자 비웃는 것은 믿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왜 비웃나요?

자기 가능성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건 결국 자기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증거에요.

오늘 본문은 할례를 행하고 이름을 바꿔주고 난 후 이야기에요.

 

앞서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한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다시 찾아 온 것입니다.

찾아 와서 지난번에 약속한 것처럼 아들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못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 속에서도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들이 비웃어도 이삭을 낳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이라는 죄와 상관없이 언약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우리에게 심어준 구원의 약속은 우리의 죄와 상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 하여도 우리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불신과 상관없이 우리 안에 심어준 구원을 반드시 이루어 내시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개명을 시켰습니다.

이름을 바꿔 줬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아비가 되어서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뜻입니다.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져 있어요.

아브라함의 이름에 뜻에 뭔가요?열국의 아비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가 되도록 간섭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책임을 지고 간섭을 해 나가는데,

어떤 식으로 간섭해 나가는가 하면,

아브라함이 불신을 한다 할지라도 그에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10-15절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10-15=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 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온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생기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라가 피식하고 웃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왜 비웃는데,,,

내가 못할 줄 아느냐! 라고 합니다.

기한이 이르면 내가 네게로 돌아와서 아들을 반드시 낳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잘 보세요.

사라가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누구의 아들인가 하면 여호와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가 돌아온다!

그러는 겁니다.

 

내가 네게로 돌아올게 라고 하지요.

내가 누구입니까?

여호와에요.

그러니까 여호와가 사라 뱃 속에 여호와의 아이를 심어준 것입니다.

 

사라는 여호와의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신약 식으로 말하면 사라는 이삭을 낳은 게 아니고 예수를 낳은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것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삭이었느냐?

아니다,

그가 그리스도였다고 합니다.

 

지금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 와서 아들을 주겠다는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데 그 방법은 창조의 방식으로 이룬다 했습니다.

창조의 방식으로 이루려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불가능으로 있어야 합니다.

죽은 자로 있어야 해요.

사라의 몸이 전혀 자식을 생산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사라의 몸을 가지고 창조의 일을 하시는 겁니다.

 

사라는 경수가 끊어진지 오래에요.

이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에요.

사라의 죽은 몸에서 생명을 낳는 창조의 일은 곧 하나님 자신이 하신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 언약을 하신 후에 찾아오시는 겁니다.

 

이런 찬송가 있지요.

 

‘주님 찾아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이러한 찬송가를 우리가 부를 때 보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내가 주님을 모시는 것이 주어(主語)가 되어 버립니다.

모시어 들이자!

모시어 들이자!

그럽니다.

 

아니에요.

이건 그 반대에요.

주님이 찾아오신 것이 주어(主語)에요.

찾아오신 주님은 우리가 모시어 들이지 않아도 우리 안으로 들어오세요.

 

사라가 언제 주님 어서 오세요, 하였나요?

아니에요,

안 믿었어요.

 

그럼에도 여호와가 그 속에 아이를 심어 주셨어요.

오늘 본문을 잘못 이해를 하면 여러분들 아브라함같이 천사를 영접 합시다가 됩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다 그렇게 해석해요.

그러니 영접하는 주체가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틀린 거에요.

 

이것은 우리더러 영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또 영접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말이 어려우니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것은 마치 자석하고 쇠붙이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석으로 오셨는데 쇠붙이가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자석은 반드시 쇠붙이만 반응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쇠붙이 같은 존재로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시면 자동적으로 끌림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아 가면 자기 백성들은 영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더러 영접해야 합니다,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영접 자체가 또 내 행위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영접은 우리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하신 것이에요.

이걸 로마서에서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예수를 믿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세요.

왜냐하면 믿어야 하는 분을 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는데 자기 백성이 그 아들을 알아보고 영접을 하도록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예수를 알아보고 영접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우리가 영접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믿음이 한 것입니다.

이럴 때 예수를 믿는 것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행위가 아니고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했어요.

 

아브라함이 지금 그 일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세 천사를 영접한 것은 자기 실력이 아닙니다.

믿음이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17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할례 언약을 맺고 이름도 개명시신 것은 이제부터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인생을 간섭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언약이란? 하나님이 이루세요.

하나님이 아들을 준다고 약속을 하셨으니까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그러니까 너는 반드시 나를 영접할 수밖에 없고, 나는 너에게 약속한 것을 반드시 이룰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어떻게 다루어가시고 어떻게 간섭해 가시는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런 반응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구나! 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천사를 영접하는 것은 할례 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여호와께서 어떤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오십니까?

나그네로 찾아오십니다.

이건 장차 하나님이 이 땅에 나그네로 오신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어요.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체라고 했지요?

여호와가 나그네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다는 것은 장차 오실 여호와도 이 땅에 나그네의 모습으로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신다는 뜻입니다.

당시에 나그네는 힘없는 사람입니다.

나그네라는 의미 자체가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자기 목숨을 지킬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셔야만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나그네는 얻어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 씩 둘 씩 파송 하시면서 나그네로 보내지요.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먹여주고 입혀주고 마시게 해 줄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믿음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니까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제자들은 그 집에 유숙하면서 하늘에 평안을 주었어요.

이건 마치 천사들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신 것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을 하면 제자들을 영접하는 사람들을 준비 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만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롯과 두 천사를 만나게 하고,

라합과 두 정탐꾼을 만나게 하고,

베드로와 고넬료를 만나게 하신 것처럼 만나게 하세요.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만나게 하여서 구원의 소식을 듣고 복음을 들었어요.

 

성도간의 만남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원함에서가 아니고 복음 안에서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실 때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세요.

 

근데 찾아오는 시간이 의미심장합니다.

몇 시에 찾아오는가 하면 정오에요.

정오란 낮 열 두 시에요.

 

팔레스타인 지역은 낮 열두 시가 되면 엄청 덥습니다.

제가 과거에 중동에서 근무를 해 봐서 잘 알아요.

오전 열 한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는 엄청 덥습니다.

그래서 가게도 문을 닫고 쉬어요.

제가 일할 때도 그 시간엔 일을 못했습니다.

실제 철판에다 달걀을 터뜨리면 게란 후라이가 될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엔 전부 낮잠을 잡니다.

 

아브라함은 가장 뜨거운 그 시간에 자지 않고 장막 문에 있습니다.

이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바로 이 땅의 하나님 백성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걸 나그네의 삶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도 나그네로 오시는데 자기 백성들도 나그네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기 백성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의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장막 문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아브라함 스스로가 이 땅에 정착한 자가 아니라 나그네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말씀을 좇아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어요.

아브라함은 거기에 자기 땅이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땅은 여기에 없고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의 눈을 열어서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보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거기서 나그네로 장막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자기 소유는 하나도 없었어요.

돈으로 주고 산 땅이 딱 하나 있어요.

막벨라 굴입니다.

그것도 살 집이 아니고 무덤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아무리 재물이 많고 거부가 되었다고 해도 땅에 집착하지 않고 하늘을 향한 나그네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나그네로서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걸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메시야를 이 땅에 나그네를 보냈어요.

그런데 그 나그네를 누가 알아보는가 하면 이 땅에 하늘 나그네들이에요.

나그네가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 나그네 모습으로 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정착하는 자로 살지 않고 떠나야 하는 자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해 가시는 것입니다.

억지로 나그네로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염세주의로 살라는 뜻이 아니에요.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물질문명을 누리고 잘 사세요.

누리고 사시되 마음은 항상 나는 떠나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사시란 말입니다.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고 내가 가야할 곳은 따로 있다는 생각으로 사시란 말입니다.

그 모습이 지금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서 기다리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을 잘 보세요.

다른 사람들은 전부 잠자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만 깨어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앞에 보니까 나그네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자 쫓아가서 강권해서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이고는 발 씻을 물도 드리고 고기도 잡고 떡도 해드리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이 영접한 것으로 보여요.

그러나 영적으로는 그 반대에요.

본문을 한 번 잘 보세요.

아브라함이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대접을 합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기다렸다가 영접했다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의 실력으로 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7장에서 자기 가능성을 가진 아브람을 할례로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불가능성 된 아브라함을 다시 가능으로 이끌어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죽은 아브라함이 어떤 일을 하면 그것은 아브라함이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5절을 봅시다.

 

살후 1-5=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4 너희에게 대하여는 우리의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잘 보세요.

주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달음질 한다고 하지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속에 말씀을 주시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일을 해요.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을 만나게 만들어요.

예수를 믿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말씀이 달음질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달음질을 하면 말씀을 붙잡는 것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떨어지면 그 말씀은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이 되어서 살아서 움직입니다.

그러면 생명을 가진 자는 반드시 생명을 쫓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아브라함에게는 이 땅에 나그네가 하늘에 나그네를 기다리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산 자는 반드시 밥을 찾게 되어 있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본 사람은 반드시 그 은혜를 사모하는 모습으로 쫓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말씀이 달음질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세요.

 

그러면 그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쫓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은혜를 사모하도록 선순환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온 것은 은혜가 우리를 강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에요.

 

이것을 아가서에서는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입맞춤을 해 달라는 모습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솔로몬과 술람미는 이미 입맞춤을 했어요.

그리곤 솔로몬이 떠나갔습니다.

그러자 술람미가 그 입맞춤을 잊지 못하고 다시 입맞춤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은혜라는 입맞춤을 해주셨습니다.

그 입맞춤을 맛 본 사람은 그 황홀함을 잊지를 못합니다.

그 기쁨을 잊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다시 갈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이 그래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 안에 언약을 심어 주셨어요.

그럼 그 언약이 언약을 이루실 분을 기다리게 되는 겁니다.

언약이 떨어지면 그 언약이 언약을 이루실 분을 지향하고 쫓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언약은 생명과 같아요.

생명을 가진 산 자의 특징은 살고자 운동합니다.

생명이 생명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산 자의 특징은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여러분 보세요.

내가 은혜를 받게 되면 그 은혜가 나로 하여금 가만있게 하지를 않습니다.

자꾸만 더 은혜 받는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찾아 가게 해요.

 

은혜가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은혜 받지 못하는 자는 게을러지고 은혜 받은 자는 열심을 내게 되어 있어요.

은혜는 마치 사랑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봐도 또 보고 싶잖아요.

 

은혜도 마찬가지에요.

은혜가 은혜를 갈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갈망하니 은혜의 자리를 찾아 나서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서 복음이 들려지게 해주셨기 때문에 복음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맛 집을 찾아다니듯이 복음이 증거 되는 곳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는 귀를 열어주지 않으면 복음이 전해지는 곳이 있어도 가지를 않아요.

 

왜 그런가요?

이는 말씀이 그 속에서 달음질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병든 사람 앞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아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과 같아요.

믿음이 병들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교회를 등한시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믿음과 교회 생활은 비례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믿음이 건강한 사람은 교회 생활도 열심히 하고 병든 사람은 게을러요.

데살로니가후서에서 그러는 겁니다.

말씀이 달음질 하게 하니까 그 말씀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끌고 가나요?

 

5절을 보세요.

 

5절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우리 맘을 인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한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가요?

믿음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좇아가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좇아가게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아브라함 사건이 그 얘기를 해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천사를 영접한 것은 아브라함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정오에 낮잠 자지 않고 장막 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게 한 것입니다.

 

누구를 기다렸는가 하면 여호와를 기다린 겁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천사를 보고 강권해서 자기 집으로 들이고 대접을 한 것입니다.

천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고 여호와의 아이를 사라 속이 임신을 시켜 준 것입니다.

 

구약은 그림자라고 했지요?

그림자는 온전한 형상으로 확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냥 모습만 희미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신약으로 와서 보니까 아브라함처럼 언약을 받은 자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천사를 영접한 것은 그림자이고 성도가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실체에요.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신약의 성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본문을 잘 보세요.

이 사건이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자기 실력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 잘 드러나고 있어요.

천사를 영접해 놓고는 여호와가 아들 준다고 하니까 비웃으면서 믿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 실력으로 기다렸을 것 같으면 아들을 준다고 할 때 아멘 할렐루야를 외쳤을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가 여호와의 천사가 사라에게 아들 준다고 하자 피식 웃는 것입니다.

피식 웃는 것은 지금 농담 합니까? 그 소리에요.

왜? 비웃어야 하는지 아세요.

 

비웃어야 천사를 영접한 것이 그들의 실력이 아니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웃었는데 하나님이 아들을 낳게 해 주셨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안 믿고 비웃어야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불렀습니까?

아니면 여호와가 찾아 갔습니까?

여호와가 찾아 갔지요.

왜 찾아 갔습니까?

 

이는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준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가 약속을 지키고자 찾아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준다고 약속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찾아가서 아들을 주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비웃어도 아들을 주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게 하나님은 아무나 찾아 가지 않고 약속한 사람만 찾아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겠다고 약속한 사람만 찾아 가서 구원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약속은 하나님이 지켜내세요.

하나님을 일컬어 거짓말 하실 수 없고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고 하지요.

 

맞아요.

하나님은 자기 입으로 뱉어낸 말은 반드시 지키세요.

하나님은 창세전에 약속을 했어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 된 사람만 찾아 가서 구원을 해 주세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어린양의 생명책을 들고 오셨어요.

그리고 녹명된 사람들을 하나 하나 찾아 가서 예수가 믿어지도록 해 주세요.

그래서 제가 구원은 우리의 몫이 아니고 하나님의 몫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애쓸 것이 없어요.

 

구원이니 영생이니 은혜니 믿음이니 하는 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하늘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공짜로 받은 사람에게서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찬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가 만들어 낸 자들에게서는 자기 자랑이 나오지만 받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은 감사와 찬미가 나와요.

 

예수는 아무나 믿지 못해요.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오로지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사람만이 믿어져요.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사람에게만 예수가 믿어져요.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다는게 복음이잖아요.

그러니 복음은 아무나 들려지는게 아닌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고 너희 눈은 봄으로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너희가 복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가 믿어지고 천국 복음이 들려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아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 아는 것을 자랑하면 안 된다고 누누히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복음 아는 것을 가지고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하는 것은 그 복음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실력이니까 자꾸 자랑 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을 기죽이는데 쓰는 겁니다.

나는 아는데, 넌 왜 몰라? 그러고 있어요.

동일한 칼이라도 의사가 사용하면 사람을 살리고 강도가 사용하면 사람을 죽여요.

 

복음도 마찬가지에요.

학습으로 배워서 아는 사람들은 복음을 법으로 사용해서 사람을 죽여요.

분명히 복음은 살리는 것인데 법에 속한 사람은 죽이는 일을 해요.

정죄하고 비판하고 심판하는 것으로 뱉어내는 것입니다.

뱉어내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을 알 수가 있어요.

은혜에 속한 자인지 법에 속한 자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부부지간에도 복음 가지고 싸우지 말라고 했어요.

나는 아는데 당신은 왜 몰라 그러지 마세요.

상대를 기죽이는 일을 하지 마세요.

싸워서 알아질 복음이라면 삼박 사일 싸우지요.

 

그러나 예수는 싸운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어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마음을 열고 예수 복음이 들려지게 해 주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내 아내와 내 남편이 그토록 복음을 들었는데도 복음이 안 나오고 법이 나온다 해도 싸우지 마세요.

아, 태생이 아니구나 생각하고 그냥 사세요.

 

지나가다 보면 대문에 ‘개조심’ 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개를 잡아야 합니까?

내가 피해 가야 합니까?

내가 알아서 피해 가야지요.

대문에 “개 조심”을 써 놓은 것은 알아서 피해 가라는 것이에요.

‘가까이 가면 무니까 조심하세요’ 라는 말이에요.

 

복음을 툭 던져보고 반응이 시큰둥하면 말하지 마세요.

머리 나쁜 사람에게 ‘너 머리 나쁘지’, 그러면 화를 내고 덤벼요.

교회 안에도 그래요.

어떤 사람은 복음 이야기 하면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아무 소리 안 해요.

그런데 세상 이야기하고 정치 이야기 하면 입에 침 튀겨 가면서 말해요.

관심사가 그래요.

 

그래서 제가 교회 안에서도 복음 아는 것으로 자랑하지 말고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학습으로 배워서 알았다는 것입니다.

복음도 얼마든지 학습으로도 알아 질 수가 있어요.

학습으로 알아진 복음은 법으로 나타나요.

지식 자랑한단 말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 뭐라고 했나요?

사랑이 없이도 천사의 말을 하고,

사랑이 없이도 크고 비밀한 것을 얘기하고,

사랑이 없이도 산을 옮길만한 일들을 하고,

사랑이 없어도 구제하고 순교도 할 수 있다고 하지요.

 

여기서 사랑이란? 예수에요.

은혜에요.

믿음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없이도 성경 이야기하고 복음이야기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은혜 안 받아도 얼마든지 열심히 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없이도 기적을 행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마귀는 모방의 천재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을 다 모방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 한 것을 내 자랑거리로 내어 놓습니다.

 

만약에 오늘 본문을 가지고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영접해야 됩니다’ 라고 한다면 그 속에 자기 의로 가득 찬 법의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내가 문 밖에 서서 기다리노니’ 라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 쪽에서 결단을 촉구하거나 한다면 그건 성경을 잘못 보는 거에요.

성화주의자들은 문고리가 밖에는 없고 안에 있다고 하면서 안에서 열어 줘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 문을 열고 영접 하라고 하잖아요.

 

물어 봅시다.

어떻게 하면 마음 문이 열립니까?

만약에 내 마음을 내 맘대로 조정 할 수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은혜니 믿음이니 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마음 먹고 믿으면 되니까요.

은혜 받고 싶으면 은혜 받고, 예수 믿고 싶으면 믿으면 되잖아요.

복음을 알고자 하면 언제든지 마음을 열어서 들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요?

우리가 은혜 받고 싶다고 해서 받아지던가요?

믿음으로 살고 싶다고 해서 믿음으로 살아지던가요?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은혜 달라고 하는거 아니에요.

귀를 지으시고, 눈을 지으시고, 마음을 지으신 분이 들려지게 해 주고, 보게 해 주고, 열어 주지 않으면 죽었다 깨도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눈은 봄으로 복이 있고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듣게 해주니 듣고,

보게 해주니 보는 것이고,

믿어지게 해 주시니까 믿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믿는 것이 내 것입니까?

아니죠.

하나님의 은혜지요.

 

그러면 보는 사람은 ‘주여! 보게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해야지요.

‘듣게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라고 하셔야죠.

‘믿어지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해야지요.

‘이게 왠 은혜입니까’를 고백하셔야지요.

 

똑 같은 날,

똑 같은 시간에,

똑 같은 목사에게,

똑 같은 설교를 들었는데도 한 사람은 은혜로 듣고 한 사람은 법으로 들어요.

 

어떤 사람은 감사로 뱉어내고, 어떤 사람은 법으로 토해내요.

이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바램은 내 뜻입니다.

 

언제 교회 안에 다 신자만 있던가요?

아니에요.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보세요.

백 프로 신자만 있는 교회는 이 땅에 없습니다.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해 놓았어요.

밭에 곡식과 가라지가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비록 그 사람이 지금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는 사람이 참아 주고 기다려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걸 가지고 비판하고 정죄해서 너 복음 알아?

이렇게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살려야 하는 복음을 가지고 죽이는 일에 쓰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 입니다.

포커스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가셨구나’ 로 보셔야 합니다.

왜 찾아 가셨을까요?

줄 게 있으니까 찾아가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자기 백성에게만 주십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들은 모두가 세상에 고기 잡고 있었어요.

먹고 사는 일에 치중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찾아 오셔서 가자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있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 우리 팔자가 세상에서 살 팔자가 아니구나! 생각하고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사람 아닌 것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아브라함 모습입니다.

 

장막 문에 거했다는 것은 지금 나그네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을 하니까 아브라함의 삶 자체가 그냥 나그네 대접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13장에서는 부지중에 아브라함이 천사를 대접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지중에’라는 것은 어쩌다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았다는 것이 아니고 습관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몸에 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이 그 속에서 달음질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양과 염소를 심판을 합니다.

양들은 나그네를 대접하고 약한 자를 공경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대접받고 공경 받았다고 하니까 양들은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고 하면서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양들의 삶 자체가 나그네를 대접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늘 그런 삶을 산 사람은 그런 행동을 해도 기억이 안 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가지고 여러분 우리 양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건 그렇게 살라는 것이 아니고 양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를 하니까 그 삶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억지로는 몇 번 못해요.

그런데 염소들은 어떻게 하나요?

억지로 하려고 찬스를 찾고 있어요.

오기만 해 봐라 내가 영접 할거다 그러고 있었어요.

 

그런데 언제 하나님이 그들 눈에 맞도록 찾아 가는가요?

하나님이 언제 ‘내가 메시야다!’ 하고 나타나는가요?

그들이 포착할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잖아요.

염소들은 나그네를 바라지 않아요.

고관대작을 바래요.

나그네가 오면 저기 양들에게 가라고 하고 고관대작이 오면 어서 오십시오 한다구요.

 

하나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나그네 모습으로 나왔지요?

염소들은 나그네 속에 있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들은 나그네가 와도 몰라보고 잘난 놈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염소들은 세상 가치로 잘난 놈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잘난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나그네로 오셨어요.

예수님은 이 땅에 나그네를 찾기 위해서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 나그네는 하늘에서 온 나그네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는 분입니다.

하늘에 계셔야 할 분이 역사 속에 온 것 자체가 나그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들을 찾아 가신 것입니다.

 

나그네라는 것은 이 땅에서 거지처럼 산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세상 가치로 살지 않고 하늘에 가치로 산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잠깐 있다가 사라질 것들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사실들을 알아요.

그러니까 세상 것에 목을 매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백성들은 이 세상 속에서 영원무궁토록 붙박이처럼 살 것이 아니고 난 떠나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을 성경에서는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어떤 사람은 부자로 있습니다.

물량적인 개념으로 가난하고 부유한 것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고,

부자라고 해도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나는 가야할 나라가 따로 있어, 라는 정신으로 살면 그 사람은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난한데 열심히 노력해서 여기서 잘 살아야겠다고 하면 그 사람은 부자인 것입니다.

물질이 많고 적음을 가지고서 가난이냐 부자이냐 생각하지 마세요.

가난한 부자가 있고 부자인 가난한 사람이 있어요.

물질적 가치로 살면 가난해도 부자이고, 하늘에 가치로 살면 부자라도 가난한 사람이에요.

 

아브라함이 만약에 율법식으로 나그네를 영접했다면 그냥 끼니 한끼 챙겨서 대접하면 되어요.

근데 지금 아브라함은 어떤 모습으로 나옵니까?

최상의 것으로 대접을 합니다.

떡도 만들고 짐승도 잡고 합니다.

 

세 사람 대접할 것을 몇 십 명이 먹을 것으로 준비를 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물질적 가치로 살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그네에게 최상의 것으로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그 나그네가 그냥 나그네가 아니고 내 형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그렇잖아요.

같은 교회 안에서도 호불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친하고 어떤 사람은 덜 친할 수가 있습니다.

친한 사람은 식사를 대접하면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가지요.

그런데 덜 친한 사람은 간단히 대접을 하는 경향이 있지요.

 

우리가 그렇습니다.

이게 우리의 본능 속에 배어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그냥 나그네를 본 것이 아닙니다.

형제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음식을 준비하면서 최상의 대접을 한 것입니다.

이걸 또 오해 할까봐 못을 하나 치고 갑시다.

이것을 행위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이렇게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달음질하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이런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의 신앙의 속성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양이기 때문에 양의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염소이기 때문에 염소의 모습이 나옵니다.

염소이기 때문에 들이 받고 양이기 때문에 매 맞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럼 양이 되게 하고 염소 되게 하는 것은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하시지요.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하는 것은 우리의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게 한 것입니다.

우린 모두 짐승 같은 자들인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속에서 달음질 하니까 미력하지만 짐승이 아닌 사람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브라함 사건이 얼마나 재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해놓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 나타나시는 겁니다.

나타나셔서 약속했던 아들을 준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또 자기 가능성을 보고 아내 사라를 보면서 아니라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아들은 내 방식대로 낳게 해 준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라는 이삭을 낳게 됩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 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나그네로 오셔서 우리 속에 들어 오셨습니다.

우리가 사라에요.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 와서 아들을 잉태케 하고 낳게 하세요.

우리는 예수를 낳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지금 씨가 있어요.

누구의 씨인가요?

예수의 씨에요.

우리의 꼬라지가 이래도 하나님의 아들을 배태(胚胎)하고 있어요.

우리가 예수의 신부에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신부에게 자기 씨를 심어주기 위해서 에요.

나중에 그 속에 예수의 씨가 심겨진 자들을 데리러 오세요.

 

옛날 조선 시대 왕이 누구에게 자기 씨를 줍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지요.

궁녀들이 많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만 찾아 주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만 찾아 오셔서 자기 씨를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씨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속에 씨를 심어 놨기 때문에 그 사람을 끝까지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을 져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다뤄 가실 것인가 하는 것을 구약의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람을 찾아가서 빼내서 그 속에 씨를 심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이 그렇게 실수를 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신을 해도 그 불신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기어코 이뤄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을 한 번도 철회하신 적이 없습니다.

뜻을 철회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복 주고 복 준다고 한 것은 아브라함의 조건과 상관없이 반드시 아브라함을 복의 조상으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져 있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은 창조의 능력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아요.

중요한 것은 그 창조의 하나님이 나를 찾아 오셨느냐 아니냐 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심어 놓은 사람은 믿음이 역사해요.

 

데살로니가 후서 3장에서처럼 말씀이 달음질 해요.

말씀이 달음질하여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그리스도의 인내 가운데로 인도한다고 했습니다.

달음질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으로 끌어당기는 일을 하게 되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로 우리를 끌어 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가 뭡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셨던 그 모습을 쫓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그네 삶입니다.

쉬운 말로 신자의 팔자는 예수님의 팔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팔자는 예수님의 팔자라는 컨베어 벨트에 올려져서 끌려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현대 자동차 공장에 가 보면 자동차를 만드는 컨베어 벨트가 있습니다.

그 위에 차체를 올려놓으면 벨트가 움직이면서 공정을 이루어 갑니다.

바퀴를 끼우는 사람은 하루 종일 바퀴만 끼우고, 문짝 다는 사람은 하루 종일 문짝을 달아요.

컨베어 벨트에 따라가다가 보면 마지막에 차가 완성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컨베여 벨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렇게 올려놓으면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때 그 때 필요한 것을 끼워서 완성시켜 가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비유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모두가 다 계시사적인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뤄 가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은물’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 세상의 교육을 통해서 봅시다.

유치원이 있고, 초등학교가 있고, 중학교, 고등학교가 있고, 대학교가 있습니다.

 

어릴 때는 엄마가 유치원에 보내줍니다.

유치원에 가면 유치원 선생님이 있습니다.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갑니다.

거기에 가면 또 선생님이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중학교를 가고 고등학교를 가고 대학교를 갑니다.

학교로 따지면 대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은 끝이에요.

이걸 부모가 해 주잖아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뤄 가시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도 모든 신앙은 구약(율법)에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율법 아래에서 출발했는데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은혜 아래로 건져 내십니다.

 

그렇지만 은혜 아래 건져 졌다 해도 그 사람이 한꺼번에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아래 들어 와도 그 은혜를 알아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깨달아가는 시간이 필요해요.

 

믿음이란? 생명과 같이 자람이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루아침에 나 은혜 다 받았다 그런 건 없어요.

평생 알아가요.

 

우리가 법 아래 있다가 은혜 아래로 옮겨졌어요.

은혜 아래 옮겨졌지만 여전히 우린 안에는 법이 자리 잡고 있어요.

법에는 강한데 은혜에는 약해요.

법으로 사는 것은 쉬운데 은혜로 사는 것은 서툴러요.

그래서 복음을 알아도 법으로 쓸 때가 많습니다.

 

이건 빨리 지나가야 해요.

은혜 속에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으로 살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태권도 6개월 배우면 자기가 최고 고수인 줄 압니다.

바둑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하수일 때는 겁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수일수록 어렵다고 합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들을 때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고 자신만만해집니다.

마치 사춘기 시절 태권도 6개월 배울 때처럼 자기가 무슨 대단한 고수라도 되는 줄 알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철들고 나면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알게 됩니다.

복음의 깊이를 알면 알수록 입을 닫게 됩니다.

주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두려워집니다.

 

제 솔직한 고백입니다.

복음을 처음 알고 나서 마치 다 아는 냥 거드름을 피웠어요.

모든 사람들은 정죄하고 판단했어요.

 

설교하는 것도 처음엔 자신이 있었습니다.

제가 제일 설교 잘 하는 줄 알았어요.

자신만만했다니까요.

그런데 지나오면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두렵다고 느껴져요.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몰라요.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이제는 솔직히 안하고 싶어요.

가면 갈수록 말씀이 무겁다는 것을 절실히 느껴요.

혹여 잘못 전할 까 두렵다니까요.

 

바울이 그랬잖아요.

내가 이 복음 전하고 자신은 버림당할까 두렵다고 했잖아요.

이건 구원에서 짤린다는 두려움이 아니에요.

복음을 훼손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전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될수록 세상사는 게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잖아요.

젊어서는 세상에 대한 꿈이 많지요.

그런데 그 꿈이 이뤄지던가요?

 

아이들이 흔히 하는 말로 나중에 커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대통령이 되는 줄 모릅니다.

아이가 자라가면서 대통령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비우게 되어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뤄가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실제 은혜를 받고 보면 그게 아니란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산을 옮기는 것도 아니고 내가 순교하는 것도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더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올 때가 정오라고 했지요.

 

정오란? 태양과 지구가 가장 가까운 시간입니다.

그림자가 가장 짧을 때입니다.

그림자가 짧다는 말은 내 가능성이 가장 적을 때란 뜻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내가 죽어 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시간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할례 후의 모습인 것입니다.

할례 후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해요.

 

우리가 언제 은혜를 많이 받습니까?

내가 이 세상에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입니다.

우리가 병들고 약할 때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찾을 수 있는 때 입니다.

 

건강해 보세요.

놀러 다니기 바쁘지요.

세상에서 승승장구해 보세요.

교회 못 와요.

 

사업이 바쁜데 어찌 오겠어요.

언제 오느냐 망해야 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약하고 힘들 때 가장 좋아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가능성이 있으면 하나님을 안 찾습니다.

 

탕자 비유를 보세요.

자기 수중에 돈이 남아 있을 때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돈이 다 떨어지고 알거지가 되고나니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버지가 그 탕자를 어떻게 맞이합니까?

버선발로 쫓아갑니다.

양 잡고 소 잡고 잔치를 베풉니다.

 

아버지에게는 탕자의 망함이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탕자의 망함이나 아브라함의 할례나 같아요.

아브라함은 할례로 망했어요.

자기 힘이 하나도 없어요.

이럴 때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할례 후의 아브라함의 모습은 탕자의 모습과 같아요.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에 후손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다루어 가실까요?

아브라함처럼 다루어 가시겠지요.

 

맞아요.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들을 아브라함처럼 다루어 가십니다.

다루어가는 방법이 세상에 힘을 빼는 방식으로 다루어갑니다.

나그네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그네일 때 나그네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사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지요.

나그네로 사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왜요?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돈의 가치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과 같아요.

이게 죽는 것입니다

이게 순교라니까요.

내가 세상의 가치를 죽이는 것, 그것이 순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그네의 모습으로 찾아오십니다.

누구에게 찾아 가느냐?

나그네에게 찾아 가십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나그네를 영접하라는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2절을 보세요.

 

벧전 1-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받을 자들이 이 땅에 흩어진 나그네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징적으로 초대 교회의 흩어짐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교회 갑자가 부흥이 됩니다.

 

그러자 교회 안에서 파당이 생기면서 분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의 숫자로 힘을 삼아서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 흩어버리십니다.

 

힘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리곤 사방으로 흩어버리십니다.

나그네를 만든 것입니다.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흩어진 나그네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열 두 지파 속에 하나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의 기득권 속에 두지 않고 비주류로 두어요.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의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신자는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달음질을 해요.

그래서 이 세상이 허구인 것을 알아요.

 

그러므로 비록 세상에 살고 있지만 아브라함처럼 장막 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세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을 소망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오를 하고 의지를 발동해서 그렇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섭을 해가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간섭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과 멀어지는 삶의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게 되어요.

저만치 지나고 나면 나그네가 되어 있어요.

 

교회는 나그네들이 쉬는 곳이에요.

교회는 예수님의 핏값으로 산 곳입니다.

가룟 유다가 은 삼십에 판 예수님의 몸 값으로 밭을 하나 샀어요.

그 밭 이름을 아겔다마 피 밭이라고 합니다.

 

그 피 밭을 나그네들의 무덤을 삼았어요.

그래서 교회는 나그네들이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장사지내는 무덤인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늘을 향하여 살아나야 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을 하나 찾고 마칩시다.

 

신명기 10장 19절입니다.

 

19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하지요.

여기서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이 주어가 아니에요.

이 말씀의 진의는 나그네를 사랑하면서 너희가 과거에 애굽에서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왜 나그네로 산 것을 기억케 하는가요?

이는 내가 나그네일 때 나그네를 영접할 수가 있어지기 때문입니다.

나그네 된 자들을 빼내서 땅을 줍니다.

그리곤 나그네를 영접 하라고 율법으로 주셨어요.

이는 나그네로 오시는 분을 영접케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주십니다.

주고 나서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너 받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준 것 있잖아,

그 거 내놔!’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는 사람은 내어 놓는 것이 쉬워요.

나그네로 있다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나그네 대접하는 것이 쉬워요.

그러니까 나그네를 영접하라는 것은 명령이라기 보다는 나그네는 나그네를 알아보고 영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 나그네로 두셨습니다.

나그네들은 반드시 나그네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말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복음이 들려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이를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부디 그 은혜 속에 감사하며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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