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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30강. 비웃음의 아들 (창 17:15-27)

by coroa 2021. 3. 17.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 입장에서 창조주를 알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창조주가 스스로를 계시해주기 전에는 피조물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알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성경을 주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복 받고 잘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살 것인가? 하는 것을 주제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세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세상 바깥에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창세전에 언약 하신 것이 이 땅에서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들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일컬어 흔히 하나님 나라요 천국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교회의 정체성은 이 세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세상 바깥, 즉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는 겁니다.

신자들이 교회로 모인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구원 때문입니다.

 

구원이 뭔가요?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이고,

이 세상으로부터 구원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교회에 온 것입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가 믿어지도록 해줘야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믿는 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자기 스스로 예수를 믿으려고 한단 말이지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게 인본주의 사고이거든요.

 

쉽게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가 예수를 믿은 것이 되면 내가 예수를 버릴 수도 있어집니다.

내 형편에 따라서 얼마든지 예수를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믿었으니, 내가 버릴 수도 있잖아요.

 

사람들은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착하게 산 사람들을 보면 아 저 사람은 천국에 갔겠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니에요.

천국은 착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이 가요.

 

하나님은 착한 사람 악한 사람으로 판단하지 않고,

예수 믿는 사람과 예수 안 믿는 사람으로 판단해요.

예수 믿는 사람은 천국에 보내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지옥에 보내요.

이게 하나님이 정한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준으로 세상을 다스립니다.

 

이러면 사람들은 그럼 예수 믿어 주지 그래요.

자기가 예수를 믿어 준다고 해요.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신을 찾는 것도 같아요.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관은 내 필요에 의해서 신을 찾아 갔다가,

내 필요가 사라지면 신을 떠나는 것입니다.

신을 찾고 떠나는 주도권을 인간이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되고 예수를 못 믿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되는 거에요.

하나님이 예수를 믿어지게 해 주시면 이게 나 안 믿을게요! 가 안 되어요.

왜냐하면, 예수를 믿게 하는 주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어요.

피조 세계에 속한 인간들은 항상 자기 주체로부터 모든 것을 이해를 합니다.

내 가능성으로부터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내려 주셨다면 그것을 자기 쪽에서 지키려고 합니다.

자기가 어떤 주제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피조 세계에서는 절대로 이해가 안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전부 창조의 방식으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무에서 유로, 없음에서 있음으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셔서 그 집 안에 있는 모든 남자는 양피를 자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너희들은 남자가 아니고 여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라고 하는 놈들은 전부 여자를 만들어 버리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이게 할례에요.

 

남자라는 말의 의미가 뭡니까?

씨를 생산해 내는 자입니다.

씨를 가진 자가 남자입니다.

 

씨가 생명이에요.

그런데 생명은 하나님에게만 있어요.

창조주에게만 생명이 있어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공급해 주는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들이지 자기들 생명으로 독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피조물은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자들입니다.

이걸 남자와 여자로 비유하면 하나님이 남자이고 피조물은 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남자 구실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남자 구실을 해서 낳아진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이 놈은 하나님 아들 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낳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아브라함 방법으로 낳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놈은 네 집안에 유업을 이을 수 없는 자라고 쫓아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복의 조상으로 선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복이라는 것을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로또 당첨 정도로 생각합니다.

부동산을 샀는데 몇 배로 값이 뛰면 복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전형적인 이런 기복주의에서 나온 복 개념이잖아요.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복이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복이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은 하늘에 것이지 땅의 것으로 말한 적이 없습니다.

기복주의를 외치는 목사들이 복을 말할 때는 항상 구약을 들고 말합니다.

이들은 구약이 왜 있는지를 알지 못해요.

이는 언약을 몰라서 그래요.

 

창세전 언약 속에는 두 언약이 있습니다.

이것에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옛 언약은 육이고, 새 언약은 영이에요.

그래서 구약은 육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타났고, 신약에서는 영적 이스라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걸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약’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을 바탕으로 깔아 놓으셨습니다.

‘신약’은 ‘영’에 관한 것입니다.

이 신약의 ‘영’에 관한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구약의 ‘육’을 깔아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적 이스라엘은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을 설명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나라를 설명해줘야 하는데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반대되는 세계를 깔아 놓은 것입니다.

그게 천지창조로 나타난 것입니다.

천지 창조를 해 놓고는 성경은 하늘을 감추어 버리고 땅에서 하늘에 속한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영원’의 반대가 뭡니까?

‘시작과 끝’이 있는 것입니다.

유한(有限)의 반대는 무한(無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한의 세계에요.

이것을 영원한 나라, 또는 영생의 나라라고 합니다.

이 영원한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와 반대되는 ‘유한’의 세계, 이 역사 세계. 시작과 끝이 있는 세계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과 끝이 있는 세계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서 설명을 하십니다.

세상 속의 자기 백성들에게만 알려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모습처럼 너희들이 살 영원한 곳이 있어!

너희들이 이 땅에서는 눈물 흘리고 고통 받고 아프고 병드는 게 있지!

그런데 아프고 병들고 고통당하고 죽는 그런 세계 말고,

눈물 없고 고통 없고 사망 없는 그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생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 반대로 사망이 있는 세계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하늘나라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곳은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고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무 해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과 상대적인 모습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이 세상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세상을 설명하십니다.

우리는 보이는 이 세상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받으면 보이는 이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저 세계를 지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서 이러한 일들을 하세요.

하나님은 역사적인 사건을 가지고 영적인 이야기를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보세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조건이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어가는 가장 좋은 것에 맞도록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렇게 다뤄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가는가 하면 창조의 방법으로 하십니다.

그 창조의 방법은 아브라함이 자기 가능성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죽이는 식으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지 않으면 피조물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오늘 본문 속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요.

오늘 분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 오셔서 할례를 시키고 이름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꿔주고 그 아내의 이름도 ‘사래’에서 ‘사라’로 바꿔줍니다.

 

이름을 바꿔준다는 말은 새롭게 탄생했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전에 사람은 자기 가능성으로 살았던 사람이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전에 자기 가능성으로 살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일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를 드러내는지를 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고 내년 이맘 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아브라함이 비웃습니다.

오늘본문에서는 없지만 다음 장에 가면 사라도 비웃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래가 내년 이 맘때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고 하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는 것입니다.

 

왜 비웃는 것일까요?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왜 말같지 않다고 생각하나요?

자기들 조건으로 그래요.

 

오늘 본문에서 무라고 하는가요?

내 나이가 얼만데,,,

나야 그렇다고 치지만 사래의 몸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에요.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자기 꼬라지를 보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여자는 월경이 있어야 아이를 낳아요.

 

그런데 사라는 경수가 끊어진지가 오래 되었어요.

석녀란 말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게 해 준다고 하니까 피씩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왜요?

안 믿어지니까요.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직까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는지를 몰라요.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방식으로 일하세요.

창조의 방식이란? 없음에서 있음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르고 자기들 입장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겁니다.

이성적으로 이해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비웃을 수밖에요.

 

인간의 이성은 자기 가능성에서 이해해요.

무엇이든지 자기가 할 수 있어야 예~! 하고 대답해요.

아브라함이 지금 자기 꼬라지를 보니까 남자인 자신은 씨가 마르지 않았으니 그렇다고 쳐도 아내 사라는 구십 세가 되어서 경수도 끊어져 자식을 생산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피조 세계에서는 젊은 여자가 아이를 낳지 늙은 여자는 아이를 낳을 수가 없습니다.

이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일을 하십니다.

죽음에서 생명을 끄집어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창조주로서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모습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라가 지금 경수가 끊어져 자식을 생산할 수 없는 몸이 될 때가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사라 나이 육십 오세 때 갈대아 우르에 찾아 가셔서 자식을 준다 하시고 이십 오년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십 년 정도 기다리다가 도저히 못 기다리겠다고 해서 낳은 자식이 이스마엘입니다.

성경의 기록상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낳고 나서도 십사 년 동안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십사 년 만에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시면서 할례를 받으라 하고 이름 바꾸고 그제서야 자식을 준다 하는데 여러분들 같으면 믿겠습니까?

 

평상시에는 나타나지도 않으시다가 느닷없이 나타나셔서 아이를 준다고 합니다.

지금 사라의 상태는 여자의 기능을 다 상실하고 아이를 생산할 수도 없는 지경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웃지 않는 사람은 비정상입니다.

비웃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관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관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나를 도와주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무소불위의 힘을 실어 주는 게 아니고 도리어 아브라함이 가진 힘을 빼앗는 일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할례 속에 담겨져 있어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나이 백세가 된 할아버지에요.

그런 사람에게 할례를 하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생식기를 자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아들 낳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기겁을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기 전에 자기가 알고 있던 하나님이 있잖아요.

그렇게 알고 있던 하나님은 자기에게 복 주는 하나님이었던 겁니다.

자기 육신을 편안하게 해주고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고 영웅호걸이 되게 해주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찾아 오셔서 복은 고사하고 있는 것도 전부 빼앗아 가시더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직까지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계속해서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정상입니다.

그것이 잘못됐다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에 대해 전혀 모르던 사람에게 어느 날 찾아 가셔서 알려준다고 해서 금방 알아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이성과 맞아 떨어지지도 않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하루아침에 믿어지느냐 이 말입니다.

못 믿어요.

안 믿어지는 게 정상이에요.

그래서 계속해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충돌을 일으키면서 아브라함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관을 자꾸 바꿔 주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에요.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이렇게 성경을 배우는 것은 우리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을 버리고 아브라함을 간섭하셨던 그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우리들만의 하나님 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성경은 우상이라 하고 다른 신이라고 합니다.

저는 여기서 그 우상을 깨트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이 잘못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란? 참 하나님에 대하여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주는 피조물이 담아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다가 오면 자꾸 피조물의 사고를 깨버리고 창조주의 사고를 집어넣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계속해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를 잘 믿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평생 동안 예수를 못 믿어요!

우리는 못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참 아이러니 한 것이 내가 못 믿는 그 자리에 믿음이 투입이 됩니다.

이 비밀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은 허상이 되어 버리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은 내가 믿을 수 없을 때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을 수 있을 때 일을 하는 것은 나의 이성입니다.

자기 이성으로 믿는 것을 사람들은 믿음이라고 내어 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믿음은 허상이라고 깨트리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가짜임을 고발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은 반드시 우리의 불신을 바탕으로 일을 하십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것을 주신 것은 어디 것을 믿으라고 주셨습니까?

하늘에 것이지요.

 

세상 바깥에 있는 것을 믿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은 여전히 세상에 있습니다.

세상의 구조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 바깥의 이야기가 믿어질까요?

안 믿어질까요?

당연히 안 믿어지겠지요.

 

만약에 믿어진다면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안 믿어지기 때문에 믿음이 투입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안 믿어지니까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서 믿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신 믿음이지요.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주신 그 믿음이 우리에게 다가 오면 우리의 불신을 고발하면서 일을 한다니까요.

 

‘너는 나 안 믿었어! ‘ 하는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내가 하나님을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못 믿어요.

 

제가 극단적으로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겠다! 고 하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은 천국 못 간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어지게 해서 천국에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은혜가 되어요.

 

만약에 내가 예수 믿어서 천국에 간다고 하면 내 행위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믿었다 하는 것을 인정해주면 우리는 천국 가서도 완장 차는 그런 짓을 할 것입니다.

나는 믿었는데, 넌 왜 못 믿었어, 하면서 반장 노릇을 할 거에요.

천국은 은혜의 나라에요.

공짜로 가는 나라에요.

 

말이 공짜이지 실상은 예수님의 것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천국에는 내 것은 요만큼도 가지고 가지 못해요.

천국은 내가 믿었다는 것을 인정 해주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가르쳐 주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았는데, 이런 자를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과 용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깨달아 가게 되어요.

신앙생활은 날마다 우리의 가능성이 꺾이고 나를 비우는 자리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언제 가장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가요?

하나님을 언제 찼습니까?

가장 소망이 없을 때 입니다.

내가 내게 기대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입니다.

 

그 때가 언제에요?

불가능 할 때입니다.

몸 아플 때로 비유해 보세요.

감기 걸려서는 하나님을 안 찾아요.

병원 가서 주사 맞으면 나으니까요.

그런데 병원 가서도 못 고치는 병에 걸려 보세요.

암처럼 불치병에 걸리면 안 하던 금식도 하고 하나님께 매달리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식으로 간섭하고 인도해 가시는가 하면 우리가 기대할 만한 것이 없도록 우리를 몰아가세요.

불가능 속에서 하나님을 찾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좋을 수가 있겠습니까?

없어요.

 

당연히 안 좋아요.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어요.

미워해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아이들이 엄마를 사랑한다.

그 사랑이 진짜 사랑일까요?

아니면 엄마를 이용하기 위한 사랑일까요?

이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사랑한다 해놓고 엄마가 자기에게 야단이라도 쳐 보세요.

금방 엄마 미워! 하지요.

아이가 엄마를 사랑한다는 그 배경 속에는 항상 자기에게 잘해주는 것을 깔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내게 잘해주면 사랑이고 못해주면 그것은 미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엄마는 그 아이에게 잘해 주고 못해 주고가 아니라 이 아이를 올바로 키우기 위해서 때로는 매도 들잖아요.

그런데 그 아이 입장에서는 엄마가 매를 대는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요.

어느 인간이 자기에게 매를 대는데 사랑으로 여기겠어요?

하나님이 지금 자기 백성에게 그러시는 겁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세요.

혹독하게 시달립니다.

입에서 단 내가 나도록 시달립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학을 떼는 것이지요.

 

무슨 사랑이 이런 사랑이 있냐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 구절을 잘 아실 겁니다.

집집마다 부적처럼 붙여 놓고 있잖아요.

 

시편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목사들은 심방 가서 이 구절을 가지고 여호와는 우리의 목자이시니까 여러분들을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뒷부분에 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싹 빼버립니다.

쉴만한 물가 푸른 초장으로만 인도하는 하나님으로 설교를 합니다.

그런 설교를 듣다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얘기를 하면, 이건 뭔가 잘못된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목자가 되셔서 때로는 사망의 골짜기로도 인도하시고, 때로는 쉴만한 물가로도 인도를 하십니다.

 

둘 다 사랑이에요.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도 사랑이고, 푸른 초장도 사랑이에요.

우리 자식 키우는 것과 똑같습니다.

때로는 자식을 칭찬도 하고 때로는 매질도 합니다.

그 모두를 일컬어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 입장에서 사랑은 내게 잘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입장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짜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내리 사랑이지 치 사랑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걸 언제 압니까?

자기가 시집가고 장가가서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알게 됩니다.

부모가 되어 보아야 부모의 마음을 알 수가 있어요.

 

예전에 우리 아이들이 무슨 문제가 있어서 엄마 아빠에게 따진 적이 있어요.

애들 입장에서 봤을 때 엄마 아빠가 하는 일이 다 옳을 수가 없잖아요.

엄마 아빠가 틀릴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 놈들이 자기들 입장에서 옳고 그르냐는 법적인 문제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한 번 크게 혼을 낸 적이 있습니다.

‘나는 너희들을 법이 아닌 사랑으로 키웠는데 왜 너희들은 법을 가지고 부모에게 덤비느냐?

부모가 너희들 생각에 틀릴 수도 있지!

만약에 내가 너희들을 그런 법으로 키웠을 것 같으면 너희들은 벌써 다 죽었어!

너희들이 항상 엄마 아빠 말 잘 들어서 이렇게 컸다고 생각 하느나?

 

그런 자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는 어떻게 키웁니까?

그 아이를 옳고 그름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왜요?

아이는 아직 옳고 그름으로 분별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딸이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이것을 알아가고 있어요.

자기 자식에게 옳고 그름으로 대하면 키우겠어요?

못 키운다니까요.

 

진짜 사랑은 자기가 부모가 되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 사랑이 이런 것이었구나!

우리 부모가 나를 이렇게 키웠구나!

나를 이렇게 사랑했구나! 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 준 것을 우리는 절대 이해를 못합니다.

그것이 언제 이해가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을 주시면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아비의 심령을 갖게 해서 연약한 사람 앞에서 법으로 군림하지 않고 은혜와 사랑으로 다가가게 만들어요.

여러분들이 지독히 말 안 든는 사람을 보면서 나를 보아야 하는 겁니다.

상대는 나를 보게 하는 거울이에요.

 

이건 제 고백입니다.

말 안 듣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저 모습이구나…

이 작은 식구 중에서도 지독히 말 안 듣는 사람이 있잖아요.

 

옛날 같으면 법으로 단 칼에 어떻게 할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법으로 단 칼에 처했으면 전 여기서 존재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길이 참으심 중에 나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있는 겁니다.

그 용서 받은 것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용서가 비록 말 안 듣고 속 썩이는 신자라 할지라도 그에게 칼이 나가는 것이 아니고 저 모습이 내 모습인 것을 알아서 하나님이 알아서 간섭해 주시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 남겨 둔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에 대해서 몰라요.

그러니까 그 세상 속에 하나님을 알려 주기 위해서 남겨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주고 싶은 것이 뭡니까?

 

하나님 은혜에요.

그 은혜를 알려고 아브라함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시청각 교제로 사용해서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3장에서 세상 권세에 도전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래요?

세상 권세조차도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이 불의하고 세상이 우리를 협박하면서 칼을 들고 나온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처럼 칼 들고 나가는 자가 아닌 것입니다.

저쪽에서 법을 들고 나오면 우리는 은혜를 들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신자입니다.

 

왜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법이 아니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용서하심을 받았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용서를 토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저 쪽에서 법을 들고 나왔다고 해서 나도 법을 들고 나가면 안 된단 말입니다.

 

지금 세월호 사건에서 구원파가 하듯이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지금 하는 모습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저들이 하는 짓이 신자로서의 할 짓이 아니란 말입니다.

공권력이 조사하러 나오면 받겠다고 해야지요.

 

그런데 저들이 하는 짓을 보세요.

힘을 의지하여 맛 서고 있어요.

신자는 진리 문제에 목숨을 거는 자들이지 세상 일로 목숨 거는 자들이 아니에요.

그런데 저들은 진리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들 교주 지키기에만 급급합니다.

아니 막말로 교주 하나 잡혀 들어간다고 해서 무너질 교회라면 그건 교회가 아니지요.

 

왜 자기가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데요?

성경 어디에 우리가 원수 갚으라는 말이 나옵니까?

세상의 정권이 옳으냐 그르냐로 접근하지 마세요.

 

세상 자체가 틀렸는데 거기서 무슨 옳음과 그름을 따집니까?

하나님께서 그 틀린 세상의 권세 아래 왜 우리를 굴복하게 합니까?

그건 우리가 틀린 자였는데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잖아요.

사랑을 받았잖아요.

 

그럼 우리는 사랑받은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법으로 사는 자들이니까 저쪽에서 칼을 들고 나오면 같이 칼을 들고 나가야지요.

자기 힘으로 자기 목숨을 지켜야 하니까요.

그러나 신자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사람은 저 쪽에서 칼을 들고 나온다고 해서 같이 칼로 맞받아치는 게 아니에요.

 

베드로처럼 칼로 말고의 귀를 자르면 안 되어요.

예수님이 칼을 휘두르는 베드로에게 뭐라고 했나요?

검을 도로 집에 넣으라고 하잖아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어요.

 

칼은 법이에요.

법에서는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죽음뿐이에요.

그러나 신자는 생명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인 세상과 싸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세상 정권하고 싸웠습니까?

사도들이 언제 세상 정권하고 싸웠습니까?

안 싸웠다니까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자를 고쳐 놨다고 그 쪽의 유지들이 사도 바울을 탄핵해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냥 갇힌 게 아니라 사십에 하나 감한 태장을 맞고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감옥에서 옥 터가 움직이고 옥 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리게 해서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줬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망갔나요?

안 갔어요.

 

간수는 어떻게 생각했나요?

감옥 문이 열려서 죄수들이 다 도망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죄수들은 다 도망갔어요.

그래서 간수가 자살하려고 하는데 바울이 그럽니다.

여보시오.

우리가 여기 있으니 자살하지 마시오. 그럽니다.

 

그러자 간수가 놀랍니다.

아니 다른 사람은 다 도망가는데 당신들은 뭔데 도망가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고난 받아 감옥에 집어넣은 것은 저 간수 하나 구원 받게 하기 위해서 이런 사건을 벌였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후 바울이 그러잖아요.

내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데 너희들이 나를 재판도 없이 이렇게 가뒀으니 내가 너희들을 다 죽여야 되는데 내가 로마 시민권을 쓰지 않겠다고 하는 겁니다.

법대로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용서와 긍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도 법으로 하면 마땅히 저주 받아 죽어야 될 자인데,

그런 자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용서와 긍휼하심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빚지고 있으니까,

그 사랑의 빚진 자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뭡니까?

그른 자를 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뭡니까?

정죄하는 것입니다.

비판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 정죄하고 비판하고 죽이는 그것을 보듬어 안는 것이 사랑입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하는 것이 사랑 아니고 그 잘못된 놈을 끌어안고 그를 위해 내가 죽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나타날 때는 항상 죄 없는 자가 희생당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죄 있는 자 때문에요.

흠 없는 제물이 희생당함으로 흠 있는 자가 용서받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다뤄갈 때 하늘의 방식을 적용시켜 다뤄가십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 하늘의 방식이 낯섭니다.

이해가 안돼요.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방식을 비웃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 몸뚱이에 가능성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아들 준다고 했을 때 비웃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요.

 

그런데 자기 몸에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오셔서 아들을 준다고 하니까 헛소리로 밖에는 안 들리는 겁니다.

희롱으로 듣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이삭을 주십니다.

 

그 이삭의 이름이 뭐라 그랬습니까?

‘비웃음’ 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있어서 이삭이라는 아들은 그들을 고발하는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비웃음을 고발하는 자로 있는 것입니다.

 

이삭이라고 이름을 부를 때 마다 그 이름 속에 담겨 있는 비웃음을 생각하겠지요.

그래서 그를 부를 때 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였는데 라는 자신들의 믿음 없음이 계속해서 고발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방식으로 자기 백성들을 다뤄가십니다.

우리에게 다가 오시면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힘을 빼는 방식으로 다뤄가십니다.

우리의 힘이 빠졌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형편이 좋고 살기 좋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 하고 진짜 살기 힘들 때 기도하는 것은 달라요.

 

살기 좋을 땐 간절함이 없어요.

그러나 살기 어려워 보세요.

간절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자꾸만 죽이는 일들을 하십니다.

세상의 것을 주는 방식으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타고난 본성이 교회에 와서도 세상 것을 달라고 그러잖아요.

세상 것을 줘봐야 세상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 것에는 행복이 없다고 합니다.

진짜 행복은 저 위에 있다고 합니다.

 

신자는 말이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행복해요.

행복은 마음에서 주어지는 것이에요.

돈이 있다고 행복하지 않아요.

돈은 몸뚱이는 편하게 해 줄 수는 있어도 우리 맘을 편하게 해 주지 못해요.

그래서 육선이 가득하고 다투는 집에서 사느니 채소를 먹더라도 광야에서 사는 게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맘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어야 행복해요.

마음이에요.

오직 마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마음의 할례를 행하게 하십니다.

할례라는 것은 남자의 생식기를 자르는 것과 같아요.

신약적 의미에서의 할례는 내가 죽는 것이라고 했지요?

우리의 가능성이 부정당하고 나의 자리를 비움으로 나가는 것이 할례입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의지대로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야 그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나의 원함과 상관없이 그 자리로 밀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할례는 몸에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하는 것입니다.

진짜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이 할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습니다.

육적으로 그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 백성입니까?

아니란 말입니다.

 

육적으로는 얼마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할례의 의미는 마음의 할례입니다.

할례란 자기 가능성이 제로가 되는 것이라 그랬지요?

 

내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이 할례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내 몸뚱이에 할례를 받는다고 해서 그렇게 됩니까?

안되지요.

내가 진짜 내 가능성을 버리고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건 내 맘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가운에 오셔서 마음의 할례를 행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은 그 때부터 자기 가능성으로 나아오지 않고 자기 없음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한다는 그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언약을 줬습니다.

언약을 주셨으면 반드시 그 언약을 이뤄가는데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방식으로 그 언약을 이뤄간다고 했습니다.

창조의 방식으로 이뤄갈려면 그 사람은 죽은 자로 있어야 합니다.

자기 가능성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성으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면 그 언약을 받은 사람은 자꾸만 비우는 자리로 내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언약이라는 것 자체가 창조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창조적인 방식으로 언약이 이뤄지기 때문에,

우리의 가능성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을 받은 사람은 이 땅에 자꾸만 죽임당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경수가 끊어진 사라의 몸에서 언약의 후손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사라에게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옵니다.

 


이걸 그대로 신약적으로 비교를 해 보세요.

죽은 예수 속에서 자기 백성이 나오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필연적으로 죽으셔야 합니다.

안 죽으면 안돼요.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 갔을 때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더러 뭐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봤을 때는 선생이라고도 하고 유명한 선지자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한 것은 네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다’ 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어떻게 알았나요?

하나님께서 알려 줬기 때문에 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제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도 되겠구나 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뭐라 그랬어요?

안됩니다.

예수님 죽으시면 안 됩니다.

내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자기 진심으로 예수님을 지키려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고맙다 하지 않고 사단아! 내게서 떠나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이다! 라고 책망을 하십니다.

 

왜 사단이라고 책망하나요.

이는 예수님이 죽어야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걸 지금 막고 있으니 마귀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죽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어야 그 죽음을 통해서 언약의 후손들이 나옵니다.

마치 사라가 죽어야 언약의 아들이 낳아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라가 죽어야 언약의 아들인 이삭이 나오듯이 예수가 죽어야 자기 백성들이 구원을 얻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예수님 속에 언약을 담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진 사람은 이 땅에서 언약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임당하는 속으로 밀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사도들이나 성도들이 전부 죽는 구조 속으로 밀려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은 이 땅에서 필연적으로 죽임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한 얘기인데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예수를 심어 놨습니다.

이 예수는 내가 깨어질 때 나옵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나온단 말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예수가 안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는 구조 속으로 자꾸만 밀어 넣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다는 것을 생물학적으로 목숨 끊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신앙적인 죽음이란? 화가 나도 참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베풀고 나누는 것이 전부 죽음입니다.

그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이게 순교에요.

 

나의 옛 사람이 죽어지는 것이 순교에요.

그 끝이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것도 이해하고 용서 하지 못하면서 순교 한다,

웃기지 마세요.

 

교회에서 섬기고 봉사하고 사랑하지 못하면서 십지가 길 간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걸음마도 못하는 사람이 육상 한다고요,

교회에서 섬기고 봉사하고 사랑하는 것은 내가 죽지 않으면 못해요.

 

이건 퍼포먼스가 아니에요.

우리는 원래 남을 섬기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게 본성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우리 가운데 와서 마음의 할레를 받게 되면 우리가 섬김을 받는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 살게 됩니다.

이 섬기는 것이 자기부인이고 자기부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교입니다.

 

지금 구원파처럼 유**을 위해서 순교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순교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순교라는 것은 자기가 법정에 가서 다 내어 놓는 것이 순교입니다.

왜 저렇게 데모합니까?

자기 것을 안 뺏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저런 짓을 하지 않지요.

왜 그 사람들이 자기 조직을 저렇게 지키려고 합니까?

그 조직이라는 그늘 속에서 안위 받고 싶은 겁니다.

그 조직이 무너지면 자기 안위가 부정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단들의 특징입니다.

 

이단들은 내가 따르는 교주가 무너지면 자기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으로 여기는 겁니다.

그 사람과 나는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지키는 것이 자기를 지키는 것이 되고 그 사람이 죽는 것이 자기의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이단들의 특징입니다.

 

물어 봅시다.

유**이가 메시야입니까?

그 사람이 예수가 아니잖아요.

그 사람이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그 사람을 지켜야 합니까?

저들은 지금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들 힘으로 자기들 뜻을 이루어 보려고 연일 주야로 데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를 위해서 저를 지키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 지지 않았습니다.

나를 지킬 이유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아, 이제 하나님께서 다 쓰신 것 같구나,

때가 다 된가 보다 하고 조용히 내버려 두세요.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두 증인을 사용하는데 그 두 증인을 사용할 때는 입에서 불이 나오고 권세 있게 일을 하게 합니다.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러나 때가 되면 힘없이 죽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데려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보세요.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오셨을 때 유대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사고는 힘을 가지고서 로마라는 힘을 밀어 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적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로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힘을 키워서 이 로마를 밀어 내고 유대 나라가 부국강성한 나라로 열강을 지배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생각으로 과거의 화려했던 다윗 왕권의 회복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러십니다.

야~ 이 놈들아!

로마가 힘으로 너히를 지배하는 것이나, 너희들이 힘을 가지고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자 하는 것이나 뭐가 다르냐?

로마가 지배하면 나쁜 놈이고, 너희가 지배하면 착한 놈이냐?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충동질해서 로마 정권을 물리치고 자기 유대 나라를 세우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로마가 지배하든 누가 지배하든 예수님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망하는 세상이고 너희들이 가야 할 나라는 이 세상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에 유대인들은 화가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나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먹는 것입니다.

왜요?

이 세상 자체가 허상이니까요.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다가 누가 욕하든지 이단이라고 하면 웃으세요.

그걸로 싸우지 마세요.

그래 봐야 다 세상 이야기라니까요.

제가 늘 그러잖아요.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해주고 여러분들이 믿어지는 그 믿음이 있으면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

같이 싸운다는 얘기는 결국 자기 안에 증거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싸우는 겁니다.

 

사도들이 힘이 없어 안 싸운 게 아닙니다.

물론 힘도 없었겠지만,,

그 사도들이 세상 권력과 싸우지 않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고 나니까 이 세상은 안개 같은 허상이구나,

내가 가야 할 곳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아니까 안 싸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교인들끼리 서로 세상 법정에다가 고소하고 고발을 하니까,

야~ 너희들은 하늘나라에 속한 자들인데 뭘 그런 걸 가지고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가느냐,

차라리 손해보고 말지, 그러는 겁니다.

세상 것 더 갖는다고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손해 본다고 해서 실패하는 것이 아닌데,

뭘 그런 걸 가지고 아옹다옹 싸우느냐,

너희들 정신머리를 어디다 두고 사느냐고 책망을 한 겁니다.

 

우린 다 가졌어요.

하늘에 것을 가졌다구요.

그러니 땅에 것으로 인하여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초월하고 하셔야 해요.

 

부모하고 자식하고 싸우면 부모가 자식을 이깁니까?

아니지요.

부모가 자식을 이기지 않는 이유는 그 거 이겨서 뭐하겠어요?

그냥 져주는 것으로 나타나지요.

어린 아이를 키우다 보면 툭하면 떼를 쓰잖아요.

애들은 때를 쓰면 뭐든 통한다고 생각해서 떼를 쓰잖아요.

 

아이들이 떼를 써서 엄마가 들어 주는 게 아닙니다.

엄마가 사주고 싶은 생각이 있었으면 떼를 쓰지 않아도 사줍니다.

그런데 아이는 때를 쓰면 사주니까 떼쓰면 사준다 생각하고 아무데나 때를 씁니다.

그러면 그 때는 화장실로 데려가야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도 꼭 어린아이 같은 그런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금식하고 철야하면서 떼를 써서 얻고자 하잖아요.

기껏해서 얻고자 하는게 어린 아이들 장난감과 같은 세상 것들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힘을 줘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그런 인간을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너희들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만든다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날마다 내가 부정당하고 내게 있는 것을 빼앗김 당하고 그런 일들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당할 때에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접근을 하면 우리는 쉽게 시험이 들어요.

그렇게 접근하지 말고 언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접근을 해보세요.

 

그러면 이겨 낸다니까요.

예수님의 운명 안에서 보세요.

그럼 그 어떤 것으로도 이겨 낼 수가 있어요.

만약에 내가 복음으로 인하여 어떤 수욕을 당한다고 봅시다.

 

그럴 때 예수님이 얼굴에 침 밭음을 당하고 뺨을 맞는 것으로 접근해 보세요.

그럼 지금 내가 복음 때문에 당하는 수욕은 영광이 되는 겁니다.

전 그렇게 이겨내요.

예수님이 내 안에서 내 때문에 당하는 수욕이니 기뻐하라고 하세요.

그러니 첨엔 속이 상하다가도 금새 그래 이게 다 내가 복음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구나 이해가 되고 감사가 되어요.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예수라는 생명을 담아 놨습니다.

예수 속에 있는 생명은 내가 예수처럼 죽어야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예수처럼 죽이는 것입니다.

 

이걸 씨 비유로 살펴봅시다.

여기에 씨가 있습니다.

그 씨 속에는 생명이 있어요.

그런데 그 생명은 반드시 씨를 죽이는 토양이 필요한 것입니다.

토양이 없으면 씨가 죽을 수가 없어요.

 

농부는 그 씨 속에 생명을 끄집어내기 위하여 흙에 묻어서 씨를 썩게 만듭니다.

하나님도 자기 백성들을 씨처럼 다루어 가세요.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생명을 틔우기 위해서는 세상이라는 밭이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양 같은 제자들을 이리 라는 밭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디로 보냅니까?

이리에게 보내지요.

제자들은 양이에요.

 

양과 이리는 다른 종자에요.

이리는 양을 잡아먹고 사는 종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놈들이 양의 탈을 쓰고 있단 말입니다.

사람들은 모르는데 예수님은 다 알고 계세요.

 

그래서 제자들을 가지고 그 놈들이 이리 라는 것을 폭로시키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양으로 보내니까 그 동안 양처럼 행세하던 가면을 벗고 이리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마귀가 장악하고 있어요.

당시 유대교가 마귀가 장악하고 있었어요.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이 마귀의 종이었어요.

그런데 이 놈들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이 놈들은 천사가 아니라 마귀라는 것을 폭로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그들의 미끼로 주어서 그들이 마귀의 종자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리가 양을 잡아먹는 것은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이 왜 이리에게 먹히느냐?

힘이 없으니까 먹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짐승의 나라에요.

힘의 법칙으로 다스려집니다.

약육강식의 논리로 다스려져요.

힘으로 약자를 죽이고 있어요.

 

이건 하나님나라의 법칙과 달라요.

하나님 나라는 강자가 약자를 위하여 희생하는 곳입니다.

이걸 가정의 부모와 자식 관계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강한 분이세요.

피조물은 약자에요.

강한 창조주가 약한 피조물을 섬기고 있어요.

그래서 피조물이 사는 것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원래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법칙으로 세워져가는 나라에요.

그런데 타락하여서 짐승의 법칙으로 다스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힘으로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목사들이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 호의호식하는 것과 같아요.

이러한 곳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은혜로 다스려지는 나라를 몰고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은혜의 나라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은혜의 결정체에요.

십자가는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죽임 당한 곳이에요.

 

힘 있고 강하신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피조물인 약자에게 먹힘 당함으로서 이 세상은 죄 아래 있다는 것이 폭로가 된 것입니다.

이건 마치 바로가 꾼 꿈처럼 살찌고 힘 있는 소가 파리한 힘 없는 소에게 잡아먹힌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걸 역리라고 합니다.

이게 죄에요.

 

이 세상은 죄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어떻게 고발하는가 하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으로서 고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힘이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나라는 힘으로 약자를 잡아먹고 있어요.

 

약자를 잡아먹음으로서 이 세상은 악에 속하였음이 고발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러한 역리 현상으로 자기 백성들을 다스립니다.

자기 백성들을 세상의 미끼로 사용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에서 죽임 당함으로서 이 세상은 악에 사로잡혀 있음으로 고발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악의 집단이 지금은 타락한 교회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의 증거는 참 선지자들이 항상 거짓 선지자들에게 죽임 당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언약의 후손들이 뱀의 후손들에게 죽임 당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성경은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 이야기에요.

 

어느 시대고 교회는 항상 예수에게 속한 자들이 죽임 당하였습니다.

지금도 진짜 복음 전하는 종들은 무시당해요.

교인들이 세상의 가치로 판단 한단 말입니다.

교회가 크면 하나님이 함께 하고 교회가 작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물량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교인들 숫자가 적으면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 성도들을 세상의 구경거리로 만물의 찌끼로 두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승승장구 일취월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낮아지고 깨어지고 비워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버려지고 죽임당하는 모습으로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할례정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라의 경수가 끊어질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사라가 경수가 있으면 아무리 하나님이 자식을 주어도 사라가 낳았다고 하지 하나님이 낳았다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라의 경수가 끊어져서 사라의 가능성이 완전히 제로가 될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경수가 완전히 끊어지자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이제 창조의 일을 좀 해 볼까 하고 죽은 여자의 몸에 하나님의 생명을 심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지 못하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경수가 끊어진 사라에게 아들을 준다고 하니까 비웃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들 생각으로는 이건 불가능하거든요.

그러니 둘이서 서로 얼굴 쳐다보면서 속으로 ‘웃기고 있네’ 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참 야속하지,

아니,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내 몸뚱이가 어떤데,,

두 눈이 있으면 내 몸뚱이를 보고 말하세요. 라고 비웃은 것입니다.

이들은 여전히 자기 가능성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성경엔 없지만 행간을 보면 하나님이 사라 보고 그랬을 겁니다.

야~ 이 가시나야,

네가 가능성이 있어서 아이를 낳으면 그게 네 아이이지 하나님 아이라고 하겠느냐!

네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어서 낳아야 하나님 아이가 되지 않느냐 라고 하셨을 겁니다.

물론 순전히 제 상상으로 하는 말이지만 말이에요.

이해가 되는가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언제 가장 빛을 발하게 되는가 하면 약할 때입니다.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을 때 하나님을 쳐다보게 됩니다.

사면초가가 되어야 비로서 하나님을 찾게 되어요.

우리 생리가 그래요.

믿는 구석이 있어 보세요.

하나님 안 찾아요.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의 신앙을 돌아보세요.

여러분들이 언제 하나님을 가까이 찾는지를,,,

잘 살 때입니까?

어려울 때입니까?

 

고린도후서 12장을 봅시다.

 

고후 12:7-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自高)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이 어떤 사람이냐?

예수님과 방불한 삶을 산 사람입니다.

죽은 자도 살리고 수많은 병도 고치고 기적도 베풀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바울의 몸에 사단의 가시를 심어 놓았어요.

 

사단의 가시가 무엇인지는 성경 속에서는 나타나지 않아요.

그러나 문헌에 보면 바울은 간질병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간질병 아시지요.

바울이 세 번씩이나 기도를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 병이 엄청 자기를 괴롭힌 모양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죽은 자도 살리고 병도 고쳤어요.

기적도 행하였어요.

그런 사람이 복음 전하다가 기절해서 입에 거품을 물고 발버둥친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쪽팔리겠어요.

얼마나 수치스럽겠느냐 말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인간의 상식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겁니다.

하나님,

내가 이래 보아도 천국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내 몸뚱이 병 하나를 고치지 못하고서 남에 병을 고치고 천국 복음 전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그러니 내 병 좀 고쳐 주이소! 라고 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뭐라고 합니까?

고마 됐다!

네가 잘 나서 복음 전했으면 사람들이 그건 네 실력이지 하나님 실력이라고 하겠느냐!

네가 못 나야 내 능력이 드러날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안 고쳐주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잖아요.

내가 약할 때 강함이라고,,,

바울이 하나님에게 힘을 달라고 하자,

하나님이 바울에게 네가 약할 때 내 능력이 네게 머물러 있게 된다고 하셨어요.

 

이게 무슨 말인가요?

힘을 준다는 말인가요?

안 준다는 말인가요?안 준다는 말입니다.

 

왜 힘을 안 줍니까?

힘을 주면 하나님을 안 찾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 일을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자기 힘으로 한 것이지 하나님 힘으로 한 것이 아니에요.

잘 보세요.

바울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뭐라고 하는지를,,

 

9절 10절을 보세요.

 

9-10=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나의 여러 약한 것들을 자랑한다고 하지요.

약한 게 뭔가요?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이에요.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없애 달라고 하잖아요.

이런 일들을 당하면 기쁩니까?

화가 납니까?

화가 나지요.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라고 덤비잖아요.

그래서 창피하다고 교회도 안 나오고 숨어버리잖아요.

 

바울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졌어요.

그래서 처음엔 따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까 이해가 되는 겁니다.

 

아!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서 일을 행하시는데,,

날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고자 하시는데,,

난 내 힘으로 하나님을 증명하고자 하였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못난 자로 만들어 주셨구나,,

병을 고쳐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시려고 그랬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내가 능욕당하고, 궁핍하고, 핍박당하고, 곤란을 겪으면 나 예수 안 믿을래! 라고 하면서 도망을 가야 하는데,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꾸역 꾸역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이 내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력이었구나 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쪽 팔리는 일을 당하면 숨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일을 당해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건 내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실력이란? 강함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에요.

실패 속에서 드러나요.

세상 가치로 보면 망하고 실패하면 에이!~ 나 예수 안 믿을래! 하고서 떠나야 해요.

욥의 마누라처럼 사업이 망하고 자식들이 죽고 신랑이 불치병이 걸리면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나야 해요.

그게 인간적이에요.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더욱 더 붙좇고 있어요.

이건 바울의 실력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구나, 를 알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제일 좋은 실력이 뭔고 하니,

세상 적으로 망하고 실패하면 자존심 상해서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해야 하는데,,

분명히 교회 안 나오고 도망가야 하는데,,

그럼에도 교회 나와서 찬송하고 봉사하고 예배한단 말입니다.

 

이건 그 사람 실력이 아니에요.

그 속에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고백 앞에 우리의 신앙을 점검 받아야 해요.

 

우리의 신앙에 허구성들이 까발려져야 해요.

우리는 늘 계산적으로 예수를 믿고 있어요.

자기 이성으로 계산해요.

 

예수는 똑똑한 사람들은 믿지 못해요.

왜냐하면, 이성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접근하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머리로 예수를 이해하고자 하니까 안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최고의 석학들이었어요.

최고로 똑똑한 사람들이었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전부 박사 학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를 죽었어요.

왜, 예수를 죽였느냐?

자기들 신학으로 예수를 이해하니까 이단인 겁니다.

 

자신들의 유전으로 내려온 정통 신앙과 맞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하는 겁니다.

자기들 신학으로 예수의 말을 분석해 보니까 하나도 안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 이단이지 하고 죽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약하고 천한 것들을 택해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복음도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전하지 않아요.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은 계산적이에요.

자기 이미지 관리하기에 바빠요.

그렇다고 세상 적으로 공부 많이 하면 예수를 안 믿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것은 이성적으로는 성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똑똑하다는 것이 뭔가요?

다른 사람들보다 이성이 발달했다는 뜻이잖아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성적으로 발달한 사람들이에요.

똑똑해요.

그러니 경수가 끊어진 사라에게 아들을 준다고 하니까 비웃는 것입니다.

비웃는다는 것은 자기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 말씀을 이해해 보니까 아닌 겁니다.

그래서 비웃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인간들이 비웃을 정도로 일을 하세요.

역설적으로 일을 해요.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간섭하세요.

하나님이 만약에 우리 이성으로 맞도록 간섭했을 것 같으면 우리는 이 자리에 있지 않아요.

다 세상에 푹 빠져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힘 주는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보세요.

여러분들이 기도한 것을 녹음해서 한번 들어보세요.

전부 세상 것을 구하고 있어요.

우리 기도대로 응답을 해 주었으면 우린 모두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있어야 해요.

여러분은 다 부자 되었을 것이고,

저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기도한 것과는 정 반대로 있어요.

그럼에도 도망가지 않고 이 자리에 있습니다.

이건 우리 실력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성으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비웃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기어코 그 비웃음으로 낳은 자식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그런 자리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불신 속에서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순종의 자리까지 인도하신 그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기어코,

반드시 구원해 주시고 천국으로 인도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조금 힘들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이겨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낙원 목사-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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